[사설] 중동 에너지 전쟁 장기화 조짐, 백척간두의 한국 경제
이란 사태가 끝내 에너지 전쟁으로 비화해 세계 질서를 흔들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란 지도부를 추가로 제거한 데 이어 사우스파르스 가스전까지 폭격하며 레드라인을 넘어섰고, 이란은 카타르의 라스라판 가스 시설을 타격하며 맞대응에 나섰다. 미국 또한 이란 원유 수출 거점인 하르그섬 점령을 위한 지상군 개입을 예고했다. 에너지 공급망 자체가 전장의 표적이 되면서 시장은 요동치고 있다. 에너지 수급 불안이 커지자 국제 유가의 기준이 되는 브렌트유는 배럴당 110달러를 돌파했다. 석유와 가스를 중동에 의존하는 한국이 가장 원치 않는 상황이다. 단순한 경제 위기가 아닌 생존이 걸린 문제라는 엄중한 상황 인식이 급선무다. 중동발 에너지 위기 장기화 조짐에 산업 현장은 초토화되고 있다. 특히 나프타 등 화학 원료는 수입의 60% 이상이 막히면서 재고가 2~3주 수준으로 떨어져 공급 부족과 연쇄 가동 중단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나프타 쇼크’는 플라스틱·섬유·자동차·전자 제품을 비롯해 건설 자재와 타이어 생산 등 전 산업 분야로 파급된다. 원유 수급은 정부가 아랍에미리트(UAE)로부터 최우선 공급 다짐과 함께 비축유 방출 등 대책을 세우고 있으나 중동 수입선이 끊기면 4월부터 재고로 버티는 상황은 불가피하다. 석유화학산업의 연쇄 효과로 소비재 생산 마비와 물가 상승 우려까지 겹치면서 일각에서 4월 위기설까지 제기되는 실정이다. 더 큰 문제는 에너지 위기가 국제 질서를 흔들고 있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호르무즈 이용국 책임론’을 제기하며 재차 동맹의 참여를 압박했다. 스스로 에너지 안보를 책임지라는 논리다. 반면 이란은 중국 위안화로 결제하는 국가만 안전 통행을 보장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페트로 달러’ 체제의 균열을 시도하고 있다. 또 인도 등은 러시아산 원유 확보에 나서며 독자 노선을 걷는다. 에너지 전쟁을 계기로 세계 질서가 혼돈에 빠지는 양상이다. 한국은 중동 수입 의존 구조와 한미 동맹 체제라는 한계에 선택지가 제한돼 있다. 국가의 명운이 걸린 갈림길에 섰다는 각오로 국익 우선의 대응책을 도출해야 한다. 충격은 이미 금융과 산업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환율은 1500원대로 치솟고 증시는 흔들리고 있다. 고유가와 달러 강세가 겹치면서 물가와 금리를 자극하는 복합 위기 양상이다. 한국은행의 금리 인하 여지는 좁아지고 스태그플레이션 위험까지 거론된다. 상황은 명확하다. 에너지 문제는 경제 현안의 일부가 아니라 국가 안보 그 자체다. 수입선 다변화와 장기 계약 확대, 전략 비축 체계 재설계, 에너지·산업재 통합 공급망 관리, 재생에너지 전환 가속화가 시급하다. 일시적 유가 상승이라는 안이한 상황 인식은 위험하다. 대응이 늦어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한국이 백척간두에 섰다는 위기의식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사설] 울산 일가족 사망 사건, 사회 구조적 문제 잘 살펴봐야
울산의 한 주택가에서 생활고와 육아에 시달리던 30대 가장이 미성년 자녀 4명과 함께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 사건은 미성년 자녀 중 초등학생인 아동이 학교에 등교하지 않는 등 심상찮은 전조가 있었음에도 발생해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상한 낌새를 챈 지자체와 경찰이 사건 발생 전 해당 가정에 대한 방문 조사를 수차례 실시했으나 사건 발생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위기 가구 발굴과 관리 시스템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해당 가정의 가장은 일정한 직업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나 기초생활 수급자 선정과 특례 적용 과정을 되돌아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울산경찰청과 울주군 등에 따르면 지난 18일 오후 5시께 울산 울주군의 한 빌라에서 30대 가장과 7세·5세·3세·1세 네 자녀가 숨진 채 발견됐다. 검안 결과 일가족은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됐다. 외상이 없고 가장의 유서가 발견된 점 등으로 미뤄 경찰은 극단적 선택에 무게를 두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해당 가장은 사실상 생계를 책임지던 부인이 지난해 12월부터 개인적 사유로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생활고와 ‘고립’ 육아의 고통을 주위에 토로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때문에 촘촘하지 못한 사회적 안전망으로 인해 이번 사건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더 꼼꼼히 따져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부산일보〉의 취재를 복기하면 해당 가정에는 두 차례나 결정적인 위기 신호가 있었다. 첫 번째 신호는 취학 연령이 된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 예비소집에 나타나지 않아 경찰에 신고가 들어옴으로써 포착됐다. 즉시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가장과 네 자녀들을 직접 면담했으나 가정 폭력 등의 징후가 없고 양육 환경이 양호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두 번째 신호는 나흘째 무단 결석한 첫째로 인해 포착됐다. 담임교사가 신고하면서 경찰과 지자체 담당자까지 출동했으나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해 돌아서고 말았다. 대신 지자체 복지 지원 연계를 했으나 해당 가장이 기초생활 수급자 신청 등을 안 해 안타까움을 남겼다. 이번 사건을 놓고 학교나 경찰, 지자체 등의 조치를 비판하기는 쉽지가 않다. 위기 신호를 포착하고 관련 조치를 취하려 노력한 징후가 역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가족이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한 이상 이면을 살피려는 노력은 더 한층 강화돼야 옳다. 당사자가 신청해야만 가능한 기초생활 보호 수급자 선정 과정을 직권주의로 바꿔 위기 신호 가정에 대한 보호 강화 방안을 서두르는 등의 노력이 대표적이라 할 것이다. 이번 사건은 누구를 비판하거나 책임을 묻는 일차원적 대처를 넘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돌아보는 계기로 승화돼야 한다. 그게 사회적으로 일가족의 명복을 비는 방식이다.
[사설] 결속력 키우는 부울경 경제동맹, 행정통합 디딤돌 돼야
동남권을 ‘동북아 8대 초광역경제권’으로 육성하기 위한 부울경 초광역경제동맹 추진본부가 공식 출범했다. 부산·울산·경남 3개 시도는 18일 국민연금관리공단 부산지사에서 본부 현판식을 개최했다. 메가시티 구상이 좌절된 뒤 2023년 느슨한 협력체로 출범한 ‘추진단’이 3급이 이끄는 ‘추진본부’로 격상되고, 2개 전담 부서가 신설돼 정책 실행력이 높아졌다. 정부의 행정통합 압박 속에 지역 주도로 실물 경제부터 유기적으로 결합하겠다는 의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중요한 것은 경제 협력의 성과를 딛고 행정통합으로 나아가겠다는 방향성이다. 별도의 트랙이지만 결국 동일 생활·경제권을 만들겠다는 지향이 같기 때문이다. 이재명 정부가 국정과제로 제시한 ‘5극(초광역권) 3특(특별자치도)’ 성공 여부는 지역 경제권의 안착에 달려 있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 추세를 반전시키려면 실제 작동하는 지역 경제권 모델이 필요한데 동남권이 가장 유력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예컨대 부산을 중핵으로 한 해양경제권은 수도권 일극주의의 폐해를 끊고 국가 성장축을 다원화시킬 수 있는 시험대다. 부산의 해양·물류·금융 중심 기능에 울산의 제조 역량과 경남의 생산 기반을 연결해 하나의 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때 시너지 효과가 가장 높다. 산업 기반과 기술, 인력이 갖춰진 부울경이 실패하면 ‘5극 3특’이 구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추진본부 격상은 부울경 산업 생태계를 전략적으로 설계하고 실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만, 조직 확대만으로 성과가 담보되지는 않는다. 조선·방산·이차전지 등 성장 엔진을 전략적으로 분할하고, 역할을 명확히 해야 한다. 동시에 정책과 정보, 인프라를 공유하는 체계를 구축해 실질적인 공동 시장을 형성해야 한다. 이날 3개 시도가 제시한 북극항로 거점화, 지역 인재 양성 등 경제 과제와 60분 교통 체계, 주거·교육·의료·복지 연계 등 생활 과제는 기본 조건이다. 특히 동일 경제권 정서를 형성하는 것에 성패가 달려 있다. 억지춘향식 강제 통합보다 중요한 것은 지역민 스스로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체감하는 것이다. 메가시티가 ‘제도 중심의 강한 통합’이라면, 경제동맹은 ‘성과 중심의 단계적 협력’이다. 현실적인 이유로 경제적 결속을 선택했지만, 궁극에는 행정통합으로 진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두 모델은 단절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다. 행정, 재정, 인프라 전반을 포괄하는 정책적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결국 광역권 통합은 필수불가결이기 때문이다. 또 위로부터의 통합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점진적 협력 모색도 중요하지만 느슨한 연대가 장기화하면 실행력 저하라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한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협력을 선언하는 것은 쉽고,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부울경 3개 시도와 추진본부가 이끄는 동남권의 변화와 실적에 주목한다.
“사람 해칠 개인가?”
반려견에게 물려 다치거나 목숨까지 잃는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 경남에서 80대 여성이 자신이 기르던 반려견에게 물려 사망한데 이어 올해도 강원도 거주 60대 여성이 대형견에 물려 부상을 입었다. 특히 적법한 허가 등 절차를 밟지 않은 채 맹견을 사육하는 경우가 많아 유사 사고 우려가 상존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맹견은 사람의 생명이나 신체 또는 다른 동물에게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는 개를 일컫는다. 동물보호법은 도사견, 핏불테리어, 아메리칸 스태퍼드셔 테리어, 스태퍼드셔 불테리어, 로트와일러 등 5종과 그 품종의 잡종견을 맹견으로 지정했다. 법정 맹견이 아니더라도 공격성이 높을 경우 평가를 거쳐 맹견으로 지정할 수 있다. 법정 맹견들의 경우 사육 허가를 받는 절차가 까다로워졌다. 법정 맹견 품종들은 동물보호법 제18조가 규정한 기질 평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맹견 사고가 끊이지 않자 시민 안전 보장을 위해 2024년 4월 도입된 맹견 사육허가제에 따른 조치의 일환이다. 하지만 당초 지난해 10월 26일까지였던 맹견 사육허가제 시행을 위한 1년간의 계도 기간은 올해 말까지로 연장됐다. 절차가 복잡해 시간이 촉박했던 데다 의무화된 맹견 중성화 수술에 대한 반발은 물론 견주의 경제적 부담도 크다는 이유 때문이다.이에 따라 맹견 소유자는 늦어도 올해 안으로 맹견 기질 평가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 공격성과 통제 가능성 등을 검토하는 맹견 기질 평가는 수의사와 반려동물 행동지도사 등 전문가들로 구성된 기질 평가위원회에서 실시한다. 위원회는 평가 대상 맹견이 지나가는 행인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 갑자기 발생한 소음에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등 다양한 상황에 따라 사람을 해칠 가능성 여부를 분석한다. 맹견이 기질 평가를 통과해야 견주는 사육 허가증을 받을 수 있다.사후 조치도 엄격하다. 허가 후에도 견주는 매년 3시간 과정의 안전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맹견과 외출할 때는 반드시 입마개를 착용케 하는 등 안전 수칙도 지켜야 한다. 계도 기간 뒤 사육 허가 없이 맹견을 기를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된다. 맹견 사육허가제와 맹견 기질 평가는 안전한 반려견 문화 정착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법정 맹견뿐만 아니라 공격성이 높거나 사람에게 위해를 가한 전력이 있는 ‘맹견 아닌 개’에 대한 기질 평가도 한층 활성화되길 기대한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편집국에서] 국민의힘, 부산 없이 선거 치르겠단 건가
6·3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부산 정치권에선 국민의힘을 향한 근본적인 의문이 커지고 있다. 선거 승리를 준비하는 정당이라기보다, 패배 이후를 염두에 둔 조직처럼 보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박형준 부산시장 경선 컷오프 논란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정현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장은 한차례 사퇴 의사를 밝힌 뒤 당 지도부로부터 공천 관련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선언과 함께 복귀했고, 곧바로 현역 시장 컷오프라는 초강수를 밀어붙였다. 이 장면이 보여준 것은 후보 간 유불리를 떠나 명분과 상식의 붕괴였다. 후보 난립으로 사전 교통정리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사법 리스크나 중대한 도덕성 논란이 제기된 것도 아니다. 박 시장의 시정 성과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있지만, 산업은행 이전과 부산 글로벌허브 특별법 추진 과정에서 나타나듯 민주당의 반대와 의도적 처리 지연이 그의 시정 구상 실현 동력을 꺾어 놨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전략적으로도 패착이라는 점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현재 판세는 국민의힘 후보들이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에게 밀리고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이런 상황일수록 당내 경선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가깝다. 경선은 단순한 후보 선출 절차가 아니라 조직을 재정비하고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컨벤션 효과’를 만들어낼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두 후보의 정치적 조건을 고려하면 그 필요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박 시장은 두 차례 시장 선거를 거치며 행정 경험과 선거 검증을 동시에 통과한 인물이다. 반복된 선거 과정에서 여러 논란에 대한 평가가 이뤄졌고, 중도 확장성 측면에서도 비교적 경쟁력을 인정받아 왔다. 반면 주 의원은 초선으로 행정 경험과 대형 선거 경험이 적고 조직 기반 역시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평가가 따른다. 강성 지지층 결집에는 강점이 있을지 몰라도 행정가로서의 역량이나 외연 확장이라는 과제에서는 아직 검증이 필요하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경선은 특정 후보를 위한 절차가 아니라 시민들이 후보의 행정 철학과 리더십, 도덕성을 검증할 최소한의 장치다. 동시에 패배 분위기를 반전시킬 마지막 동력일 수도 있다. 그 과정을 생략한 채 단수 공천을 밀어붙이겠다는 발상은 선거 전략 차원에서도 쉽게 납득되기 어렵다. 공천 방향이 당 전체 선거 전략과 직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이 위원장 개인의 돌출 행동으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당 지도부와 일정 수준의 교감이나 공감대 없이 이런 결정을 독자적으로 추진했겠느냐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반면 민주당은 통일교 금품 수수 의혹으로 합동수사본부 수사를 받고 있는 사법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전 의원이 유력 후보라는 점을 앞세워 단일대오 구축을 강조하고 있다. 민주당 입장에서 보면 선거 경험과 조직력 등을 고려할 때 본선 상대는 박 시장보다 주 의원이 상대적으로 수월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선거 전략과 승리를 향한 절박함이라는 측면에서 국민의힘이 이미 지고 들어간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심각한 생채기만 남긴 채 경선 문제는 일단락됐지만, 장동혁 지도부의 노선 문제는 선거 전망을 한층 암울하게 만든다.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관계를 둘러싼 논란에서 분명한 절연 대신 모호한 기조를 유지하고, 극단적 성향 유튜버의 목소리가 내부의 절박한 자성과 쇄신 요구를 무력화하고 있다. 이 같은 모습은 부산 보수의 역사적 정체성과도 거리가 있다. 부산 보수의 뿌리는 권위주의 권력과 결별하며 군부 정치의 잔재를 척결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에서 찾을 수 있다. 국민의힘 지도부와 강성 지지층이 추구하는 ‘윤 어게인’과는 결이 다르다. 이대로라면 부산의 중도층은 물론 합리적 보수를 표방하는 많은 유권자들이 선거에서 등을 돌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당 지도부가 선거 승리보다 이후 당내 권력 재편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다면, 이는 현장에서 뛰는 후보와 지지자들에게 치명적인 신호가 된다. TK(대구·경북)가 보수 지지의 중심이라면, PK(부산·경남)는 그 세력을 둘러싸며 변화와 혁신으로 외연을 넓혀온 지반에 가깝다. 이 지반이 무너지면 중심 역시 버틸 수 없다. 부산에서의 균열은 단순한 지역 선거 패배를 넘어서 보수 정치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쇄신은 구호가 아니라 결단에서 시작된다. 부산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국민의힘은 부산과 함께 선거를 치를 것인가, 아니면 부산 없이 선거를 치르겠다는 것인가.
[오금아의 그림책방] 특별한 안경
“안경을 쓰면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게 보인단다.” 세상에 그렇게 특별한 안경이 진짜 있을까? 핌 판 헤스트가 쓰고 닌케 탈스마가 그린 <안경을 쓰면>(책과콩나무)의 주인공은 의사에게서 안경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속상한 아이에게 안경점 주인은 안경을 쓰면 아주 특별한 것들이 보인다고 말한다. 1주일 뒤 완성된 안경을 쓰니 책상 아래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안경점 주인이 잃어버렸던 결혼반지를 ‘안경 쓴 주인공’이 찾아냈다. 나무 위 비둘기, 저 멀리 가게 간판, 땅을 기어가는 개미까지 예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눈에 쏙쏙 들어온다. 매일 보던 구름마저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니 주인공에게 새 세상이 열린다. 안경을 벗어도 새로운 것이 보인다. 레오 티머스 작가의 <뭐가 보이니?>(그린북)는 머리 위에 안경을 올려두고 깜빡한 곰 이야기다. 안경을 쓰지 않은 곰의 눈에 나무는 ‘사슴’, 풀숲은 ‘악어’, 바위는 ‘코끼리’로 보인다. 친구인 기린이 머리 위 안경을 찾아주자, 곰은 자신이 본 동물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대체 악어가 어디 있다는 거야?” 기린의 질문에 곰은 안경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며 안경을 벗는다. 그러니 눈앞에 없는 새로운 동물이 다시 보인다. 안경을 써야 보이는 것이 있고, 안경을 벗어야 보이는 것이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내가 알던 세상과 다른 것을 보게 된다는 거다. 그런 점에서 그림책은 안경과 비슷하다. 그림책을 보며 상상의 날개를 펴고,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잊고 있던 가치를 발견한다. 심예진 작가의 그림책 <자란다>(노란상상)에서 여기에 딱 맞는 장면을 찾았다. 어린이가 안경을 쓰고 즐겁게 독서하는 모습(그림)이다. <자란다>는 일상에서 한 뼘씩 자라고 변화하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공동 현관 숫자판에 드디어 손이 닿은 날, 보조 바퀴를 떼고 자전거 타기에 성공한 날,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 먹은 날 등 평범하게 보이는 하루에도 성장의 순간이 있다. 아이와 어른 모두 ‘특별한 안경’ 같은 그림책을 만나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면 좋겠다. 그 소중한 순간을 선물하는 그림책 세상에 감사를 전한다.
[오션 뷰] 연안 여객선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고언
어청도, 상왕등도, 횡도, 홍도, 가거도, 여서도, 거문도. 이 섬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23개 영해 기점 중 하나이자, 여객선을 타고 방문할 수 있는 섬이다. 이 중 3곳은 ‘국가보조항로’로 지정되어 정부 소유 선박이 운항한다. 연안 여객 항로의 유지 및 확대가 섬 주민의 교통권 확보뿐만 아니라 해양 관할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도 매우 중요한 과제임을 시사하는 사례다. 2025년 말 기준, 우리나라에는 100개 항로, 149척의 여객선이 운항하고 있으며 약 1260만 명의 섬 주민과 관광객을 수송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항로 수는 변동이 없으나 여객선은 18척이 감소했고, 수송 실적은 20% 가까이 줄었다. 섬 주민 감소, 연륙교 개통, 해외 관광 수요 증가 등 복합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사의 상황은 어떨까? 작년 54개 연안 여객선사의 전체 매출액은 3767억 원 규모로 선사당 약 70억 원 수준이다. 이는 시외버스 업체당 매출액의 4분의 1 수준이고 국내 항공 운송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규모이다. 특히, 제주도, 울릉도 등 주요 관광 항로를 운항하는 13개 선사의 매출액 비중이 60%에 가까운 점을 감안할 때 나머지 선사는 40억 원 미만으로서 격차가 더 벌어진다. 지속적인 수요의 감소, 선박 건조비 상승 등 비용 증가가 겹치면서 연안 여객 운송업계의 지속 가능성에 빨간불이 켜져 있는 상태이다. 한 연구에 따르면 표본의 한계는 있지만 과반수의 선사가 재무적으로 ‘심각’한 단계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연안 여객선이 섬 주민의 교통 이동권과 직결되는 준공공재적 서비스임을 감안할 때, 과감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정부도 손을 놓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대형 카페리 여객선을 중심으로 현대화 펀드 사업을 시작하였고, 차도선 등 중소형 여객선에 대한 금융 지원도 강화하고 있다. 항로 단절 방지를 위한 국가보조항로와 소외 도서 항로 운영 지원 사업 등도 병행하고 있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도 연안 여객선에 대한 다양한 지원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와 같이 적자 항로에 대한 지원은 결을 같이 하지만, 개별 업체에 대한 직접적 보조보다는 중앙정부 또는 지방정부가 직접 운영하거나 공공 법인을 통해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스웨덴의 경우, 40개 전 항로를 교통부 산하 ‘국가도로페리청’에서 운영하고 운임 무료 정책 등 교통 복지 차원에서 강력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각 나라의 사정과 관련 산업 생태계가 다르기에 무조건 외국 사례를 따를 필요는 없지만, 이제는 연안 여객 운송업에 대한 정부 정책의 실효성을 원점에서 재검토하고 새로운 방안을 설계할 필요가 있다. 마침 이재명 정부는 섬 주민의 교통권 확보와 섬 관광 활성화를 국정과제로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관광 항로와 나머지 항로를 다른 시장으로 보고 접근해야 한다. 특히 시장 원리 작동이 어려운 국가보조항로 등의 경우에는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운영 방식, 즉, 공공 부문의 통합 운영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둘째, 선박, 즉 여객선을 철로, 도로와 같은 사회간접자본(SOC)으로 보고 공공 부문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 현재의 연안 여객 시장 여건상 어느 항로를 막론하고 막대한 신조선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다. 일각에서 주장하는 공공 부문의 ‘선주사’ 개념과도 닿아 있지만, 반드시 병행해야 하는 것이 해당 선박을 운영하는 선사의 항로 운영을 보장하는 보완 장치가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책을 시행하는 목적은 선사의 이익 보장이 아니라 도서민의 교통권 보장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시장 확대를 위한 적극적인 지원 정책 발굴이다. 작년 인천광역시에서 시행한 ‘인천 I-바다패스’ 같은 운임 지원 확대는 물론 항로 특성에 맞는 스토리텔링형 관광 자원 개발이 병행되어야 한다. 단기적으로 공공 부문의 재정 부담은 늘어날 수 있지만 무너져 가는 산업 생태계 유지를 통해 장기적으로 재정 부담은 줄어들 수 있다. 현재, 연안 여객선의 공공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다수의 해운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다. 지난 19일 관련 상임위 법안 소위에서 처음 심의가 이루어졌지만 아쉽게도 의결은 다음으로 미루어졌다고 한다. 개정안의 핵심은 국가보조항로의 운영을 민간 위탁에서 공공 위탁으로 변경하는 것으로 중단 없는 서비스 제공을 위해 조속한 법안 의결을 기대해 본다 오는 4월 16일은 제12회 국민 안전의 날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의 중요성을 되새기기 위해 제정된 법정 기념일이다. 아픔을 딛고 온 국민이 연안 여객선을 안심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첫 출발이 되는 4월을 기대해 본다.
[공감] 내 곁에 있어 줘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부터 꽤 많은 동물을 길렀던 것 같다. 첫 경험은 병아리였다. 아마 내 또래 유년의 공통된 경험일 것이다. 초봄의 하굣길, 학교 앞 양지바른 담벼락 아래에서 삐악거리는 소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기어코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집으로 왔었다. 병아리가 담긴 종이상자는 따뜻한 아랫목에 자리 잡는다. 경험상 병아리는 무조건 따뜻하게 해주면 되었다. 배추 잎을 연필 칼로 잘게 썰어주고, 파리채로 파리를 잡아줬다. 벌레를 잡아 톡톡 신호를 주면 저만치서 놀다가도 솜털 날개를 파닥이며 달려왔다. 보름쯤 지나면 솜털 끝에 하얀 깃털이 나온다. 이제부터 확연히 달라진다. 화단 흙을 헤집어 지렁이를 잡아내고, 장에 가두려 쫓으면 쏜살같이 도망친다. 병아리는 어느새 벼슬이 늠름한 닭이 되어 있다. 하굣길 문방구에서 뽑기를 하고 돌아온 어느 날, 마당 어디에도 닭이 없음을 알게 된다. 할머니께 닭의 행방을 물으면 대뜸 이런 지청구가 나온다. “꽃이고 이파리고 다 쪼아대서 화초가 남아나길 하나. 온 마당에 똥은 싸놓지.” 그렇다고 저녁 밥상에 닭고기가 올라오는 일은 없었다. 할머니는 어느 맘씨 좋은 할아버지께 닭을 줬다고 했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이었다. 다른 집으로 간 닭이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건 그보다 한참 뒤였다. 토끼도 키웠었다. 털이 부드러워 소위 밍크 토끼라 불리던 렉스 토끼 한 쌍을 삼촌께 얻었다. 나는 틈만 나면 시장에 가서 배추 겉잎이나 자투리 푸성귀를 잔뜩 주워왔다. 토끼 사료도 있었지만, 배추 잎을 입에 물고 아삭아삭 갉아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었다. 추운 겨울밤, 토끼는 새끼를 5마리 낳았고, 나는 다음 날 아침, 차갑게 굳은 5마리 새끼를 발견했다. 털 하나 없는 벌거숭이였다. 아기 손가락 같은 것을 편지봉투에 담아 사철나무 아래에 묻었다. 나는 어미 토끼가 새끼를 밴지도 몰랐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뭔가 예쁘고 귀엽다면 내 곁에 두려는 마음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잉꼬, 십자매 같은 애완조류를 길렀고, 수족관을 마련해 열대어를 길렀다.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돌봄의 노동, 그리고 죽음에 대한 자책이 요구되었지만, 그들과 함께함으로 행복을 느꼈다. 함께하는 기쁨이란 건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먹이를 먹는 모습, 조금씩 자라는 모습, 그리고 새끼를 낳아 생명이 이어지는 광경을 보는 것. 어쩌면 어린 마음이 가장 먼저 접한 생명에 대한 순수한 감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생명은 책 안의 개념이 아니라, 눈앞에서 숨 쉬고, 자라나며, 어느 날 예고 없이 아파지는 존재였다. 그때 나는 사랑이란 것은 사실, 바라보고 기다리고 아파하는 행위라는 것을 배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은 사랑한다는 자체에서 큰 위안을 얻는다. 그래서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애정이 얼마나 평화로운지도 안다. 그래서 그저 내 곁에 있어 달라고만 한다. 하지만, 내가 기르던 동물의 죽음은 단지 자연의 이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그들의 죽음은 늘 나의 책임과 죄책감을 일깨운다. 설사 내 잘못이 아니었더라도, 애초부터 내 곁에 두고 싶다는 이유로 자유로웠어야 했을 생명을 소유했으니 말이다. 한때, 애완동물이라 불리던 존재가 반려동물이라 불리고, 더 나아가 가족의 자리에까지 올라섰다. 이것은 생명을 소유물로 여기던 시대에서 벗어나는 진전일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동물에게 사람의 결핍까지 대신 메워주기를 기대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동물에 대한 사랑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동물이라는 존재를 인간으로 취급하는 게 아니라, 그 존재를 그 존재답게 사랑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기고] 해양력은 곧 국력이다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말이 국민적 구호였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직면한 환경을 돌아보면, 이제 그 구호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해양력은 곧 국력이다.” 정부가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한 결정은 단순한 행정기관 이전이 아니다. 이는 대한민국이 다시 한 번 스스로를 해양국가로 재정의하려는 선언이며,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국가 전략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부산은 대한민국 근대 해양사의 출발점이다. 부산포라는 작은 어촌에서 시작한 부산은 1876년 개항 이후 일본과의 교역은 물론,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의 핵심 관문 역할을 수행해 왔다. 바다를 통해 문물이 들어오고, 기술과 인력이 오갔으며, 새로운 세계 질서가 부산을 통해 유입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은 부산을 단순한 항구 도시가 아닌 ‘해양 교류의 플랫폼 도시’로 성장시켰다. 오늘날 부산항이 세계적인 환적항으로 기능하는 배경에는 이러한 축적된 해양 경험과 지리적 이점이 자리하고 있다. 부산의 해양적 가치는 전쟁의 위기 속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이 국가로서 존속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부산항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유엔군 병력과 군수 물자, 식량과 장비는 바다를 통해 부산으로 들어왔고, 부산은 이를 전선으로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해상 교통로 (Sea Line of Communication), 즉 국가의 생명선 역할을 수행했다. 만약 부산항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경험은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해양 통제력과 항만 운영 능력은 전시뿐 아니라 평시에도 국가 생존의 핵심 요소라는 점이다. 부산이 해양력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결코 최근의 일이 아니다. 약 17년여 전, 해군작전사령부가 진해에서 부산으로 이전할 당시에도 핵심 배경은 분명했다. 해양작전의 중심은 항만·물류·연합작전 환경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현재 부산에는 대한민국 해군작전사령부뿐만 아니라, ‘주한미해군사령부(CNFK)’가 함께 위치해 있다. 이는 부산이 단순한 국내 해양 거점이 아니라, 한미 연합 해양안보의 핵심 노드임을 의미한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은 이러한 군사·안보·산업 인프라와의 결합을 제도적으로 완성하는 조치라 할 수 있다. 이제 시선은 미래로 향해야 한다. 기후 변화와 글로벌 물류 재편 속에서 북극항로는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새로운 해상 실크로드로서 북극항로는 해운, 조선, 에너지, 안보 전반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부산은 이 변화에 가장 먼저 대응할 수 있는 도시다. 세계적 항만 인프라, 조선·해양산업 기반, 해군과 연합 해군의 존재, 그리고 해양수산부 이전이라는 정책적 결단까지 갖추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명확한 국가 해양 전략과 인재 양성, 그리고 해양력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컨트롤타워의 실질적 기능 강화다. 부산의 해양사는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의 자산이며 미래의 가능성이다. 개항의 기억, 전쟁의 교훈, 해군 전략의 축적, 그리고 북극항로라는 미래 비전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나는 이를 ‘해양력의 시간 항로’라 부르고 싶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은 그 항로 위에 놓인 중요한 이정표다. 이제 부산은 질문받고 있다. 우리는 해양수도를 준비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이전을 받아들였을 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곧 대한민국 해양력의 미래이자, 국력의 방향이 될 것이다.
[기고] 트렌드를 읽고 취향을 입다, ‘나다운 옷’의 시대
‘오늘 무엇을 입을까’라는 질문은 매일 아침 마주하는 작지만 설레는 선택이다. 하루의 옷차림을 정하는 행위는 단순히 몸을 보호하는 단계를 넘어 타인에게 건네는 첫인사이자, 스스로를 정의하는 기분 좋은 의식이다. 이처럼 패션은 개인의 가치관을 투영하며 일상을 완성하는 가장 가까운 매개체가 된다. 옷은 나를 표현하는 솔직한 언어이자 그날의 기분과 일상의 활력을 결정짓는 가장 사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패션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다. 거리의 풍경을 보면 그 시대가 지향하는 가치와 대중의 심리가 고스란히 읽힌다. 최근 패션 시장은 급변하고 있지만, 흥미로운 점은 소비자들의 반응이다. 과거에는 유행을 따르는 것이 보편적인 선택지로 여겨졌으나, 지금의 소비자들은 획일화된 유행만을 좇지 않는다. 지난 겨울, 보온성을 우선시한 천편일률적인 디자인을 벗어나 각자의 체형과 라이프스타일에 맞춘 ‘퍼스널 패딩’이 인기를 끈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는 옷을 비롯해 사용하는 물건 하나하나 ‘나의 취향’이라는 필터를 거쳐 선택하는 시대가 됐다. 올봄 패션계에 등장한 다채로운 스타일들 또한 트렌드보다 개인의 감각이 우선시되는 ‘취향의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준다. 시인처럼 자유롭고 낭만적인 분위기의 ‘포앳코어(Poet-core)’부터 선명한 색감의 대비로 활력 넘치는 ‘컬러 블로킹(Color-blocking)’까지 상반된 트렌드가 동시에 사랑받는 중이다. 유행을 무조건 수용하기보다 본인의 감각으로 재해석하는 소비자들에게 트렌드는 참고용 데이터이고, 마지막 선택을 내리는 결정값은 ‘나의 취향’에 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디지털 공간이 있다. SNS나 유튜브를 통해 각자의 스타일을 공유하며 취향은 더욱 세밀해졌고, 소비자들은 ‘내 취향에 맞는 옷’을 찾기 위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적극적으로 탐색한다. 이는 패션 소비의 기준이 ‘나’를 중심으로 재정의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브랜드가 제안하는 답안을 거부하고 스스로 스타일의 주인공이 된 소비자들은 옷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성껏 큐레이션하고 있다. 여성복 브랜드 ‘올리비아로렌’ 역시 이 같은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해 왔다. 기존 시즌별 컬렉션과 함께 ‘온라인 익스클루시브’ 라인을 론칭해 폭넓은 선택지를 제공하고, 필자가 직접 유튜브를 통해 소통하며 고객의 목소리를 브랜드 방향성에 녹여내고 있다. 올해 봄 컬렉션 ‘Time to Bloom(타임 투 블룸)’과 캠페인 메시지 “당신만의 분위기를 입으세요”에도 이런 고민을 담았다. 단순히 브랜드가 제안하는 신제품을 입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옷이 내 고유한 분위기와 만났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나다움’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나다움’의 기준은 이제 패션을 넘어 삶 전반으로 확장되는 추세다. 필자는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지난 2024년 말 ‘OVLR’이라는 신설 법인으로 새로운 도약을 시작했다. OVLR은 올리비아로렌을 필두로 여성의 일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라이프스타일 파트너로 나아가고자 한다. 패션부터 일상을 채우는 모든 선택에 취향이 투영될 때 비로소 ‘나다운 삶’이 완성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3월은 새로운 시작을 설계하는 시기다. 가벼운 아우터 하나가 일상의 온도를 바꾸듯, 이맘때야말로 ‘나만의 스타일’을 발견하기 가장 좋은 때다. 우리는 고객들이 올리비아로렌을 통해 타인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내면이 먼저 만족하는 ‘취향의 옷’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기업에게 트렌드를 읽는 것이 생존의 문제라면, 유행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브랜드 본연의 가치와 고객 취향에 대한 존중에서 나온다. 유행이 지나간 자리에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결국 견고한 취향이다. 올봄, 모든 여성이 나만의 확신과 취향으로 일상을 채워가며 저마다의 삶 속에서 가장 눈부신 순간을 맞이하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BTS와 글로벌 부산의 만남은 필연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BTS가 완전체로 돌아왔다. 드디어 21일 오후 8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방탄소년단(BTS) 더 컴백 라이브: 아리랑’의 막이 오른다. 공연명은 20일 공개한 정규 5집 앨범 ‘아리랑’에서 따왔다. BTS는 K팝을 글로벌 주류로 이끈 월드 스타다. 3년 9개월 만에 일곱 멤버가 완전체로 귀환해 공연을 선보이는 것은 현대 팝 음악의 역사적 장면이다. 전석 무료인 공연 객석은 2만 2000여 석이지만 광화문 일대에는 전 세계 BTS 팬인 ‘아미’(ARMY)를 비롯해 최대 26만 명이 운집할 것으로 예상된다. 넷플릭스는 이날 공연을 190개국에 단독 생중계한다. 넷플릭스가 특정 가수의 단독 콘서트를 단독 중계하는 것은 처음이다. ■ 광화문과 K컬처가 만드는 서사 BTS는 21일 공연 당일 경복궁 내부 근정문에서 출발해 흥례문을 거쳐 광화문을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어 해태(해치)상이 자리한 월대를 지나 길 건너편 광화문 광장에 설치된 무대로 향할 전망이다. 월대는 조선 시대 국가 중요 행사가 있을 때 왕과 백성이 소통했던 장소다. ‘근정문→흥례문→광화문→월대’로 이어지는 길은 ‘왕의 길’로도 불렸다. 1866년 만들어진 광화문 월대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전차 선로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사라졌다가 2023년 광화문 현판과 함께 복원됐다. 스탠딩석과 지정석은 세종대왕 동상, 이순신 장군 동상 등이 있는 무대 남쪽 방향에 설치되며 시청역 인근까지 늘어선다. 이번에 주목할 부분은 ‘광화문’이라는 공연의 장소성이다. 600년 역사를 품은 경복궁과 현대적인 빌딩 숲이 공존하는 광화문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아리랑’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왕의 길’을 따라 무대에 오르는 퍼포먼스는 한국 역사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전통 건축의 미를 자연스럽게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드러낼 것이다. 600년 조선 왕조의 서사와 21세기 대중문화의 서사가 하나로 결합하며 더 묵직한 임팩트를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공연은 문화 혼종성의 관점에서도 주목받는다. 서양 팝 음악에 뿌리를 둔 K팝과 조선 왕조를 상징하는 광화문, 경복궁이라는 전통 공간의 조합이 독특한 문화적 긴장과 새로운 예술적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문화 요소의 충돌과 융합은 고품격 콘텐츠를 창출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BTS는 과거에도 한복을 재해석한 무대 의상, 전통 부채춤을 현대 안무에 접목한 퍼포먼스 등을 통해 전통과 현대의 결합을 정체성으로 삼아왔다.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 열풍으로 북촌한옥마을, 낙산공원 등은 이미 외국 관광객들 사이에서 성지순례 코스로 자리잡았다. 애니메이션 한 편이 서울을 거대한 K컬처 체험 공간으로 바꿔 놓은 셈이다. 이번 공연을 통해 광화문이 K팝의 글로벌 랜드마크로 부상할 것이란 기대감도 나온다. 마치 영국 런던 북부의 ‘애비로드’처럼 말이다. 이곳은 비틀스라는 이름과 함께 전 세계 팬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장소다. 1969년 자신들의 마지막 앨범을 녹음한 비틀스는 스튜디오 바로 앞 애비로드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진을 앨범 커버 이미지로 사용했다. 이 앨범의 재킷 사진은 수많은 영화와 문화 콘텐츠의 오마주 대상이 됐으며, 팝 역사의 중요한 상징물이다. 2010년 영국의 중요 문화재로도 지정된 애비로드는 문화적 의미까지 부각되면서 런던의 대표적인 랜드마크가 됐다. 이로 인해 애비로드는 전 세계 음악 팬이 순례하는 성지가 됐다. ■ 공연장 일대 ‘BTS노믹스’ BTS는 오는 2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컴백쇼를 연 뒤 4월부터 월드 투어에 돌입한다. 4월 9~12일 고양종합운동장 공연, 6월 12~13일 부산 공연을 포함해 일본 도쿄,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 전 세계 34개 도시에서 82회에 걸쳐 투어를 진행한다. 콘서트 개최지마다 경제 활성화 효과를 낳는 이른바 ‘BTS노믹스’(BTS+이코노믹스)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은 2022년 BTS의 국내 콘서트 1회당 창출되는 경제적 파급 효과가 최대 1조 2207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한 바 있다. 콘서트 티켓 판매액, 외래 관광객의 관광 소비 지출, 교통비, 숙박비 등을 종합해 경제적 효과를 산출했다. 이번 BTS 컴백은 미국 인기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테일러노믹스’에 견줄만한 수준이란 평가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공연과 음반, 마케팅 등으로 수조 원의 경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BTS에 팬덤 아미가 있다면 스위프트에게는 팬덤 ‘스위프티’가 있다. 이들은 스위프트 공연이 열리는 곳마다 찾아가고 이를 위한 호텔 숙박과 굿즈(기획 상품) 구매 등을 아끼지 않는다. 아미는 스위프티와 충성도, 연령층, 소비 의향 등 여러 측면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다른 국가에서 열리는 콘서트에도 기꺼이 참석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는 점에서 아미의 열정과 헌신의 정도가 스위프티보다 더 높다는 평가도 나온다. 서울은 이미 ‘BTS노믹스’로 들썩이고 있다. 공연 당일 서울 도심 호텔은 객실이 동나고 백화점, 면세점은 외국인 손님맞이에 분주하다. 광화문 대형 전광판은 기업뿐 아니라 BTS 팬클럽인 ‘아미’(ARMY)까지 가세해 광고 특수를 누리고 있다. 다음 달부터 차례로 공연이 열리는 경기 고양, 부산까지 ‘BTS노믹스’ 온기가 이미 퍼지는 중이다. ■ 부산, BTS 성지 생기나 부산은 BTS에 상당한 지분(?)을 가진 도시다. 멤버 7명 중 지민과 정국 2명이 부산 출신이다. 지민은 금정구 회동초등학교와 윤산중학교 출신이다. 정국은 북구 백양초등학교와 백양중학교를 다녔다. BTS는 2022년 10월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기원 콘서트 ‘BTS 옛 투 컴 인 부산’(Yet To Come in BUSAN)을 개최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부산 연제구 아시아드 주경기장에서 펼쳐진 이 공연 현장에는 5만 명이 몰렸다. 부산항 국제여객터미널 야외 주차장에 마련된 ‘라이브 플레이’로 1만 명이 공연을 관람했다. 이번 월드 투어의 한국 공연에 부산이 비수도권에선 유일하게 들어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6월 BTS 부산 콘서트를 앞두고 부산 서구 아미동을 BTS 관광 콘텐츠로 개발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팬덤 ‘아미’(ARMY)와 이름이 같은 아미동을 BTS의 ‘성지’로 만들자는 취지다. 김병근 서구의원은 ‘아미(ARMY)가 아미에 오다’ 캠페인 추진을 제안하고 나섰다. 서울이 BTS 복귀에 맞춰 도심 전시 공간과 미디어 파사드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열고 있듯이 아미동에 포토 존과 팝업스토어 등을 만들어 관광객들이 아미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것이다. 멤버 지민은 올 1월 아미동 등 서구 13개 동에 라면 200박스를 기부하며 인연을 맺었다. 과거 멤버들이 방문했던 부산 여행지를 중심으로 한 ‘BTS 순례 코스’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부산진구 부산시민공원에는 멤버 뷔가 산책하며 사진을 촬영한 장소를 중심으로 인증샷 공간이 조성돼 있다. 또 RM이 방문한 부산시립미술관 내 이우환 공간도 주요 코스로 꼽힌다. 이 공간은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이우환이 입지 선정부터 건축 기본 설계와 디자인까지 참여했다. 지민의 부모가 운영하는 부산 남구의 한 카페도 전 세계 아미들의 필수 방문지로 꼽힌다. 해당 카페에는 각국 팬들이 보낸 편지와 선물, 트로피 등이 전시돼 있다. 지난해 부산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가 364만 명을 넘었다. ‘글로벌 도시 부산’의 저력을 발휘한 셈이다. 부산시는 올해 5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잡았고 이를 위해 체험형 관광 상품 개발에 본격 나서고 있다. 전 세계에 엄청한 영향력을 지닌 글로벌 아티스트 BTS를 테마로 한 성지 순례 코스를 만든다면 많은 아미들이 찾을 것이다. BTS와 글로벌 부산의 만남은 필연이다.
[정달식의 일필일침] 대심도, 터널이 아니라 시스템을 설계하라
부산 도심 지하 깊은 곳에 새로운 길이 열렸다. 북구 만덕과 해운대 센텀을 잇는 도시고속화도로(대심도)다. 길이 약 9.6㎞, 왕복 4차로, 총사업비 8000억 원가량이 투입된 대형 인프라다. 만덕에서 센텀까지 40분 걸리던 이동 시간을 10분대로 단축하겠다는 목표로 추진됐다. 취지 역시 분명했다. 상습 정체 구간의 교통을 분산하고 지상 혼잡을 줄이겠다는 구상이었다. 시민 역시 이를 기대했다. 하지만 개통 직후 마주한 풍경은 기대와 다르다. 대심도 주변은 빠져나온 차량과 이를 피해 가려는 차들이 뒤엉키며 멈추고, 서기를 반복한다. 교통 상황이 이를 뒷받침한다. 개통 이후 평일 출근 시간대 미남교차로에서 만덕 방향 통행 속도는 시속 20.6㎞에서 11.3㎞로 떨어졌다. 만덕사거리에서 구포 방향 역시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터널 내에서는 차량이 빠르게 흐른다. 마치 노래 가사처럼 10분 내로 관통한다. 그러나 출구를 빠져나온 차량은 이내 정체에 갇힌다. 길은 뚫렸지만 흐름은 막힌 셈이다. 이는 단순한 불편을 넘어 도시 교통 설계의 방향 자체를 되묻게 한다. “도대체 이 대심도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문제의 핵심은 설계 단계에서부터 내재된 구조적 한계다. 현재 진입 방식은 중앙 차로를 통해 이뤄지면서 짧은 구간에서 여러 차로를 가로지르는 ‘엇갈림’을 유발한다. 운전자는 제한된 시간 안에 차로 변경과 감속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작은 지체는 연쇄적인 정체로 확산된다. 무엇보다 급차선 변경이 반복되는 구조는 안전 측면에서도 취약하다. 도로 설계의 기본인 단순성과 예측 가능성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한 결과다. 주변 교통 여건과의 부조화도 문제를 키운다. 센텀 일대는 전시·상업·관광 기능이 밀집된 지역으로 평소에도 교통 수요가 높은 곳이다. 여기에 대심도에서 빠져나온 차량이 한꺼번에 유입되며 병목이 심화된다. 향후 해운대구청까지 센텀 IC 인근에 들어서면 혼잡은 더욱 가중될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도로 확충이 교통량 증가로 이어지는 ‘유발 교통’ 현상까지 겹치면서, 정체는 구조적으로 고착될 우려가 있다. 특히 만덕 쪽은 고속도로와 연결돼 있다. 남해고속도로에서 들어올 때는 대심도와 무관한데도 낙동강 다리에서부터 꼼짝없이 묶이는 구조다. 본래 정체구간이 더 정체되는 꼴이다. 이대로라면 대심도 인근 혼잡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번 사례는 행정과 전문가 집단의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대심도 도로는 단순한 공사가 아니라 도시 전체 교통 체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가깝다. 그럼에도 개통 수년 전 교통영향평가 단계에서 여러 차례 제기된 구조적 문제는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설계에서 걸러낼 수 있었던 위험을 사후 대응으로 넘긴 셈이다. 더욱이 민간투자 방식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수익성이 강조되는 사이, 공공 인프라로서의 균형은 뒤로 밀렸다는 비판도 나온다. 결국 이 도로는 교통 흐름의 정교한 설계보다 ‘터널 관통’ 자체에 집중한 결과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시민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점도 아쉽다. 도시 교통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는 사업임에도 사전 설명과 의견 수렴 과정은 미흡했다. 도로는 행정의 성과가 아니라 시민의 일상이다. 이용자의 동선과 체감 불편이 설계의 출발점이 되어야 하지만, 이번 사업은 그 기본을 놓쳤다. 향후 부산에는 대심도 사업이 추가로 거론되고 있으며, 지하 공간을 활용한 교통 인프라 확충이 도시 발전 전략의 하나로 논의되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사후 대응이 아닌 구조적 보완이다. 단기적으로는 엇갈림 구간을 단순화하고, 차선 유도와 안내 체계를 강화해 운전자 부담을 줄여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지하 구간에서부터 교통 흐름을 분산시키는 구조 개선과 함께 인근 도로와의 연계 운영, 신호 체계 조정이 병행돼야 한다. 나아가 향후 사업에서는 교통 수요 예측의 독립성과 검증 절차를 강화하고, 시민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민간투자 방식이라 하더라도 공공성 확보를 위한 장치는 분명히 해야 한다. 부산은 지형적 제약이 큰 도시다. 그만큼 도로 하나에도 더 치밀한 설계가 요구된다. 중요한 것은 길을 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이 도시 전체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느냐다. 설계의 빈틈은 또 다른 혼잡과 위험으로 되돌아온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설계 허점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전문가의 진단에 귀 기울이며, 시민의 목소리를 정책 중심에 놓는 일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대심도는 또 하나의 ‘거대한 병목’으로 남게 될 것이다. 만덕~센텀 대심도는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대심도는 끝난 사업이 아니라 이제 검증을 시작한 사업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문제를 외면하는 태도가 아니라, 무엇이 잘못됐는지 직시하고 바로잡는 용기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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