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로봇과 피지컬 AI, 부울경 산업생태계 혁신 기회다
부산·울산·경남이 글로벌 피지컬 AI(인공지능)와 첨단 로봇산업의 핵심 요충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AI의 두뇌를 채울 고품질의 제조 데이터, 로봇의 관절과 근육이 될 핵심 부품 생산력, 지정학적 가치 등 좋은 요건을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 피지컬 AI는 실제 공장에서 발생하는 소음, 진동, 마찰열 같은 데이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미국은 수십 년간 제조업 공동화로 학습용 데이터가 부족하다.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은 미중 패권 경쟁으로 데이터 반출이 막힌 상태다. 피지컬 AI와 로봇산업 패권을 차지하려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막강한 제조 인프라와 데이터를 보유한 부울경 지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부울경의 가장 큰 장점은 로봇에 사용할 데이터 확보, 실증, 부품 공급, 생산, 시장 응용까지 한 번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지역 기업들이 협력해 모은 데이터가 6개월 만에 300TB(테라바이트)를 넘어섰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데이터의 질적 변화도 눈에 띈다. 과거 불량률, 생산량 같은 결과값이 아니라 ‘진동과 열에 따라 나사의 규격이 어떻게 버티는지’ 등 피지컬 AI가 학습할 수 있는 실제 산업현장에서의 프로세스를 담았다는 점이다. 로봇에 활용이 가능한 고품질 데이터가 모인 것은 지역에서는 처음이라고 한다. 제조 현장에서의 변수, 숙련공 기술을 데이터화하지 못한 글로벌 AI 기업들에겐 부울경은 거대한 ‘데이터 창고’가 되는 셈이다. 부울경 제조업이 피지컬 AI와 로봇산업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는 것은 분명 호재지만,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실제로 부산 지역 로봇기업 140여 곳의 약 70%가 연 매출 100억 원 미만 기업이다. 아직 영세한 업체가 많아 스케일업을 위한 정책적 뒷받침이 이어져야 한다. 개별 기업 차원의 데이터 정리를 넘어, 부울경 전체를 관통하는 ‘로봇 거점센터’와 같은 컨트롤타워와 클러스터 육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로봇산업이 성장할 경우 지역의 다른 주력 산업들과 시너지 효과가 크기 때문에 로봇기업 성장을 가속화하는 집적단지와 거점센터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피지컬 AI와 접목한 로봇산업의 육성은 부울경 산업생태계를 혁신하는 절호의 기회다. 어쩌면 빅테크 기업들이 데이터를 찾아 지역을 찾는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지역 산업계는 단순히 데이터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AI 기술혁신과 전환에 속도를 내야 한다. 정부도 이를 기반으로 로봇산업을 육성하고 글로벌 표준화 작업을 주도할 수 있는 공공 차원의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로봇산업의 메카로 첨단업종 입주가 가능한 ‘서부산권 복합산업단지’(부산 강서구 강동동)를 거점으로 삼는 것도 필요하다. 부울경 제조업이 로봇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계기로 삼아 대도약의 기회를 반드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사설] 덧셈해도 모자랄 판에 '뺄셈 정치' 늪에 빠진 국힘
국민의힘이 29일 최고위원회를 열고 한동훈 전 당대표를 윤리위원회 원안대로 제명했다. 최고위 표결에서 장동혁 당대표를 비롯한 구성원 9명 중 8명이 찬성함으로써 이뤄진 조치다. 장 대표가 단식을 접은 뒤 당무에 복귀한 지 불과 하루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이번 제명 조치로 국민의힘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내전 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에 돌입했다. 이번 사태를 놓고 당장 눈앞에 놓인 지방선거의 승패에 대한 우려들이 당 내외에서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선거에 대한 정치공학적 판단보다는 정치적 균형을 맞출 건전한 비판세력의 몰락이 불러올 결과를 더 걱정해야 할 판이 됐다. 국힘은 ‘당원 게시판 사건’을 이유로 한 전 대표에 대해 제명 조치를 했다. 한 전 대표와 가족이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 등을 비방하는 내용의 글을 조직적으로 올려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당의 명예와 이익에 피해를 줬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국힘 윤리위는 한 전 대표가 직접 게시글을 작성했는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직접 관여 여부를 스스로 뒤집었다. 여기에다 익명 시스템의 게시판에 가족들이 글을 올린 행위로 제명 조치까지 함으로써 답을 정해놓은 징계라는 비판에도 직면해 있다. 비판은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찬성에 대한 보복성 징계의 성격이 짙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한 전 대표에 대한 징계를 더욱 심각하게 바라보는 쪽은 국힘 내부의 당내 파벌이 소위 탄핵 반대파나 ‘윤 어게인’ 세력으로 결집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까지 내놓는다. 민주당이 국힘을 내란정당이라 칭할 때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계엄을 막은 한동훈이 있는 당을 그렇게 모는 것은 무리”라 지적한 것에 비춰보면 수긍이 가는 우려다. 한 전 대표의 제명에 대해 당내 소장파 의원들과 오세훈 서울시장 등이 당 지도부 사퇴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나선 것도 이런 우려의 연장선이다. 하지만 징계 강행파들은 “특정인을 찍어내듯 제명하고, 뺄셈의 정치를 강행하는 것은 모두가 패배하는 길”이라는 당내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 한 전 대표 제명 조치로 인해 국힘은 현실적으로 중도 확장에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다가 오는 지방선거에서 중도 확장을 가장 큰 전략으로 가져가려 했던 지역의 국힘 인사들에게서는 체념의 분위기가 감지될 정도다. 진영 논리를 떠나 정치권이 특정 세력의 색깔 하나로만 물드는 것은 위험하다. 정치권 전체도 한 정당의 일방 독주가 위험할 뿐만 아니라 한 정당도 특정 세력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는 스스로 고립을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국힘이 ‘뺄셈 정치’로 특정 세력화 정당을 향한 행보를 거듭함으로써 정치권에서 건전한 비판·대안세력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면 그것은 국민적 비극이 될 터이다.
[사설] 지방선거 누가 되든 2028년엔 부울경 통합단체장 뽑자
새해 들어 이재명 정부가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이라고까지 강조한 광역 행정통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수십조 원에 달하는 각종 인센티브를 내세우며 6월 지방선거 전에 광역 행정통합을 이뤄내겠다는 정부의 속도전식 추진에 재정과 자치권 강화 등을 포함하는 특별법 제정 필요성이라는 맞불이 놓아졌기 때문이다. 주민투표 등 절차적 정당성에 무게를 두며 속도 조절을 하는 듯한 부산과 경남의 경우 뿐만이 아니라 주민투표 없이 통합을 서두르려는 광주와 전남까지 공통적인 상황이다. 이는 광역 행정통합 추진 절차와 속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행정통합이 가지는 핵심적인 가치는 같다는 점을 시사한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박완수 경남도지사는 28일 부산 신항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연내 공청회를 통해 주민 여론을 다진 뒤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두 단체장은 주민투표에서 통합의 필요성이 확인되면 2028년 총선 때 광역 행정통합 단체장을 선출할 수 있다는 로드맵도 제시했다. 주민투표 시점은 정부가 재정 이양과 자치분권 강화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법을 수용하면 지방선거 60일 이전으로 앞당길 수 있다는 여지까지 남겼다. 지방선거 전 행정통합을 위해 속도전을 펼치고 있는 정부에 공을 넘기겠다는 뜻이다. 두 단체장은 특별법 제정을 위한 8개 통합 시도 단체장 긴급 연석회의도 제안했다. 부산·경남이 요구하는 행정통합 관련 포괄적 특별법과는 별도로 더불어민주당이 광주·전남 행정통합을 위해 가동중인 특별위원회가 발의하려는 개별 특별법도 조만간 발의된다. 해당 특별법은 특정 중앙부처 이전 등 지역 갈등을 부를 소지가 있는 내용의 포함 여부가 논란이지만 기본적인 틀은 부산·경남 단체장들이 내세우는 내용과 같은 방향이다. 재정 이양과 자치권 강화 등이 주된 내용이어서다. 이 특별법이 발의된다고 해도 정부가 어디까지 수용할지가 관건이 될 것이므로 이 또한 공은 정부로 넘어간 셈이다. 정부가 지역 선택적 결정을 하지 않으려면 결국 행정통합의 핵심가치를 돌아봐야 할 국면인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이라고까지 언급한 행정통합이 지방선거만을 위한 이벤트가 되거나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의미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 포괄적이든 개별적이든 특별법의 핵심가치가 같다는 것은 그 엄중한 무게를 재차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이뤄져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정부는 행정통합 특별법의 핵심 가치 수용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지방선거 결과 누가 당선이 되든 늦어도 2028년에는 부울경 지역의 통합 단체장을 뽑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경남 두 단체장의 로드맵 발표에는 이에 대한 불가역적 결의가 필히 담겨 있으리라 믿는다.
설탕이 왜?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는 남태평양 뉴기니에서 기원해 선사시대 인류 이동을 따라 아시아로 전파된 것으로 여겨진다. 기원전 327년 인도에 도착한 알렉산더 군대의 사령관 네아르쿠스는 벌이 없어도 갈대에서 꿀 같은 단맛이 나온다며 이를 ‘벌 없이 꿀을 만드는 갈대’라 불렀다. 기원전 320년 인도를 다녀온 그리스인 메가스테네스가 설탕을 ‘돌꿀’이라 기록한 대목은 결정 형태의 설탕이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인도인들은 사탕수수를 압착해 즙을 내고 끓여 말리는 방식으로 원당을 제조했다. 이 과정이 5세기 힌두교 문헌에 등장한다. 설탕이라는 말의 뿌리 역시 인도 고대어인 범어 사르카라(Sarkara), 사카라(Sakkara)에서 비롯됐다.사탕수수는 기원 후 600년경 이집트에 전해졌고 이후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스페인 남부로 빠르게 퍼졌다. 콜럼버스는 1493년 자신의 두 번째 항해 때 사탕수수를 아메리카로 전파했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설탕은 후추보다 귀한 사치품이자 약재였지만 영국의 홍차, 프랑스의 커피 문화가 확산하면서 수요가 폭증했다. 18세기 중엽 설탕은 국제무역에서 가장 가치 있는 상품이 됐을 정도다. 그 부는 영국의 산업 발전과 런던 금융 중심지 형성의 토대가 됐다.근대 이전 한반도에서 단맛은 엿이나 꿀, 조청 정도였다. 조선 후기까지 설탕은 왕실이 하사하는 진귀한 물품이었고 중국을 통해 소량 유입돼 대다수 백성은 그 맛을 알지 못했다. 개항 이후에야 설탕이 본격 유입됐고 1920년 평양에 세워진 대일본제당 공장은 일제강점기 유일한 제당시설이었다. 광복 뒤 설탕의 역사는 부산에서 새로 쓰였다. 1953년 부산 서면에 들어선 제일제당은 국내 기술로 처음 순백의 정제당을 생산하며 수입 의존 시대를 마감했다.진화생물학자들에 따르면 고양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동물은 단맛을 좋아한다. 에너지 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이 혀로 느낄 수 있는 다섯 가지 맛 중에 달콤함은 가장 중독성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 설탕은 당뇨나 비만처럼 과도할 때 독이 된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설탕 부담금 도입 가능성을 언급하며 사회적 논의를 제안하자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해외에서는 설탕세가 당류 감축 효과를 냈지만 저소득층 부담과 물가 상승이라는 반작용도 남겼다. 달콤함의 유혹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는 이제 식탁을 넘어 정책의 문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정부가 각계의 의견을 잘 수렴해 정책 방향을 결정했으면 한다.정달식 논설위원 do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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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건강할 결심' 도와주는 사회
“여윳돈으로 2억 5000만 원 정도 있습니까? 없으면 운동하셔야죠!” 연초에 만난 한 운동 전문가가 정신이 번쩍 드는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은 이랬다. 2023년 기준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추정한 1인당 평생 의료비는 2억 4656만 원이며, 가장 의료비 지출이 많은 나이는 78세라는 것이다. 억대 의료비를 부담하지 않으려면 건강할 때 운동을 하라는 조언이었다. 자료를 더 찾아보니 공단이 발표한 1인당 평생 의료비는 건강보험 급여비와 본인부담금 등을 합산한 금액이었다. 내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병원비가 약 2억 원까지는 아니라는 생각에 조금 안심(?)이 됐지만, 불안을 완전히 떨치진 못했다. 지인도 그 불안을 건드려 운동의 계기를 만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는 ‘건강할 결심’을 미룰 수 없는 때라는 생각과 동시에 현실적인 고민이 든다. 운동할 시간과 장소는 어떻게 확보할까? 비용은 어느 정도 선이 적절할까?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이 최근 발표한 ‘2025년 건강인식조사 보고서’에서 2000명의 응답자가 본인의 건강 상태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요인 1순위로 ‘수입 및 사회적 수준’을 꼽았다. 실제 응답자의 수입에 따라 건강 정도가 달랐다. 월 소득 200만 원 이하는 22.4%가 건강하다고 답했지만, 800만 원 이상은 절반 넘게 (54.0%) 건강하다고 답했다. 반대로 건강하지 않다는 응답은 월 소득 200만 원 이하는 25.1%인 반면 800만 원 이상은 7.5%에 불과했다. 식단과 운동 등 건강에 투자하는 금액도 소득별로 달랐다. 월 소득 200만 원 이하는 월 9만 1000원을 사용했지만, 800만 원 이상은 20만 8000원을 사용했다. 건강을 위해 투자하는 시간도 월 소득 200만 원 이하는 주 5.3시간, 800만 원 이상은 7.9시간이었다. 건강 불평등의 지표는 각종 조사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헬스장 시설이 잘 갖춰진 아파트에 살면, 굳이 시간을 내어 ‘산스장(산속 헬스장)’에 갈 필요 없다. 운동 기구 사용법을 제대로 숙지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것보다, 비용을 들여 전문가에게 자신의 몸에 맞는 사용법을 코칭 받는 것이 건강에 더 효과적이다. 관절에 부담 없는 수영이나 아쿠아로빅을 하려고해도 공공 체육시설에 자리 잡기는 하늘에 별 따기다. 사설 수영장을 이용하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다. 건강한 먹거리에도 경제적 장벽이 존재한다. 식재료가 건강하고 신선할수록 가격은 더 올라간다. 농약이나 화학 비료, 인공 첨가물을 써서 대량으로 생산된 식재료는 무농약, 유기농, 친환경 식재료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거주 지역에 따라 신선한 식재료를 쉽게 구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물론 경제적 이유는 때론 운동을 미루거나 나쁜 식습관을 정당화하는 핑계가 된다. 비교적 건강한 상태라면 맨몸으로 하는 플랭크나 푸쉬업 등으로 근육 운동, 계단 오르기나 달리기로 유산소 운동, 맨손 체조로 유연성 운동을 할 수 있다. 손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건강에 도움도 되고 비용도 덜 들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인스턴트 음식이나 배달 음식을 즐기기도 한다. 하지만 의지 정도가 동일하다면, 접근성 높은 운동 시설과 운동 전문가의 도움이 있을 때 운동을 지속하기 수월하다. 하루 노동 시간이나 건강 정도, 거주 지역에 따라 운동이나 한 끼 식사를 위한 시간과 노력이 달라진다. 사회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이 대목일 것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건강 인프라를 구축해 개인들이 의지 박약과 시간 부족이라는 난관을 넘을 수 있도록 돕는 일 말이다. 부산일보는 올해 초 ‘함께 넘자, 80세 허들’ 기획 보도를 통해 수도권과 부산, 부산 내 생활권역별로 기대수명의 차이를 조명하고 있다. 부산은 전국 평균보다 기대수명이 1년이나 짧았으며, 부산 안에서도 생활권별로 기대수명이 최대 6년 차이가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활권과 계층에 따라 수명 격차는 심화하고 있는 것을 수치로 확인했다. ‘수명’에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중첩되어 영향을 끼친다. 운동기구가 놓인 소규모 공원을 곳곳에 만드는 수준의 대응을 넘어 복지, 의료, 인구 고령화, 생활 체육 등 다방면의 복합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과 연령, 생활 행태별로 건강 수요가 다르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려면 포괄적인 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하는 것이다. 새해가 되면 많은 이들이 운동이나 식단 관리 등 건강을 챙기겠다는 결심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하는 이들이 많다. 돈이 없어서, 시간이 부족해서 등의 핑계 대기가 민망할 정도로 지역의 건강 인프라가 향상되길 기대한다. 송지연 스포츠라이프부장 sjy@busan.com
[오금아의 그림책방] 착한 사람
‘이 세상에서 참으로 바꿀 수 없이 필요한 것이란 바로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지난달 세상을 뜬 국민배우 안성기가 아들에게 쓴 편지 내용이 우리 마음에 깊고 긴 여운을 남겼다. 개인의 성공이 최우선이 되는 시대에, 세상에 필요한 존재가 될 것을 당부한 그는 진정 좋은 어른이었다. ‘착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고민이 된다면 출판사 길벗어린이에서 나온 그림책을 추천한다. <나쁜 씨앗>과 <착한 달걀> 두 권 모두 조리 존이 쓰고 피트 오즈월드가 그렸다. <나쁜 씨앗>은 아주아주 삐뚤어졌다. 안 씻고, 새치기하고, 거짓말하고, 조용히 하라면 더 떠드는 ‘삐딱한 씨앗’이다. 씨앗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오래 몸에 밴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씨앗은 계속 노력하기로 했다. 여전히 얄미운 짓을 할 때가 많지만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다른 씨앗을 도와주기도 한다. ‘삐뚤어지고 싶을 때도 있지만 착한 마음이 들 때도 많아.’ <착한 달걀>은 처음부터 착했다. 늘 ‘타의 모범’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친구의 잘못을 바로잡고, 큰 일이 생기지 않게 막으려 애쓰다 보니 껍질에 ‘쩍’ 금이 갔다. 달걀은 의사에게서 “스스로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주고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달걀은 마트를 떠났다. 혼자서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진 뒤 원래 모습을 회복한 달걀은 생각했다. ‘내 친구들에게 만큼이나 나 자신에게도 착한 달걀이 되어줄 거야.’ 나쁜 씨앗과 착한 달걀을 보며 생각한다. 처음부터 착하지 않아도 괜찮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마음이, 그리고 실천이 중요하다. 또 착하게 살기 위해 나를 과하게 희생하고 부당한 일까지 참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남도 소중하게 대하는 법이다. 엘리너 파전이 쓴 ‘친절한 지주님’(계몽사·1975년)이라는 동화가 있다. 인정사정없던 지주 로버트 처든이 딸에게 “좋은 아빠”라는 말을 듣기 위해 선행을 베풀며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착하고 좋은 어른을 보며 아이가 삶의 태도를 배우듯, 순수하고 선한 아이를 통해 어른도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을 지키며 세상에 이로운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 아이든 어른이든 아직 기회가 있다.
[오션 뷰] 이제 '오션 마인드'의 시대로
2026년의 시간도 어느새 한 달을 지나왔다. 사람들은 달력을 넘기며 흐르는 시간을 체감하고, 바다 역시 해마다 다른 결을 만들어낸다. 파도는 결코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늘 어제와는 다른 바다를 마주한다. 그리고 지금의 바다는 단순한 자연의 반복을 넘어 ‘부산 시대’라는 이름의 결정적 가능성을 품은 채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은 단순히 행정기관의 지리적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대한민국의 해양 전략 중심이 서울이라는 내륙의 틀에서 벗어나 비로소 바다 현장으로 체질을 바꾸는 역사적·구조적 전환이다. 그동안 책상 위에서 설계되던 해양 정책은 이제 부산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입안될 것이다. 이 변화는 부산이 더 이상 중앙의 지침을 수행하는 항만 도시에 머무르지 않고, 대한민국 해양 경제의 심장이자 컨트롤타워로 자리매김하겠다는 국가적 선언에 가깝다. 변화는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진행되고 있지만, 그 방향성만큼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분명하다. ‘북극항로 개척’ 생존과 직결된 현실 부산, 세계 경제 핵심 거점 도약 기회 바다 중심 도시 구축 시드니 ‘참고점’ 파도 기다리기보다 서퍼처럼 나아가야 특히 북극항로의 개척은 더 이상 먼 미래의 공상이나 외신 속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부산의 생존과 직결된 이미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다. 기후변화로 북극해 항로의 상업적 운항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유럽까지의 항해 거리는 기존 수에즈 운하 노선보다 12~15일가량 단축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변화는 단순한 물류 비용 절감의 차원을 넘어, 글로벌 물류의 기준이 바뀌고 세계 항만 지도의 위계가 다시 재편되는 거대한 지각변동을 의미한다. 유라시아 대륙의 기점과 종점에 위치한 부산항이 이 새로운 ‘지름길’의 관문으로 부상하며, 부산이 세계경제의 흐름을 좌우할 핵심 거점으로 도약할 결정적 기회를 맞이했다. 이 지점에서 하나의 도시가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학부 시절을 보냈던 호주의 시드니는 항만 도시가 어떻게 한 도시의 삶의 방식과 정체성까지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시드니는 항구를 중심으로 성장했지만 항만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항만과 해변, 레저와 문화, 주거와 관광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바다를 중심에 둔 도시 구조’를 구축해 왔다. 그곳에서 바다는 산업의 배경이 아니라 도시의 중심이었고 곧 경쟁력이었다. 이 점에서 시드니는 부산이 앞으로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참고점이 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스스로에게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부산은 북극항로의 수동적인 종착지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해양 질서를 주도하는 능동적인 출발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부산항은 이미 세계적 수준의 환적 항만이지만 우리가 마주할 다음 파도는 단순한 하역과 적치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다. 해양 에너지와 해양 레저, 요트·크루즈 산업, 인공지능 기반의 스마트 해양 관제, 친환경 선박 건조 기술, 나아가 해양 도시만이 구현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까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바다는 이제 하나의 산업이 아니라, 도시의 삶 전체를 혁신하는 핵심 성장 엔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서핑팀을 이끌며 파도를 마주할 때마다 절감하는 진리가 하나 있다. 최고의 서퍼는 막연히 같은 곳에서 파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파도의 결을 읽고 적극적으로 파도를 찾아다니는 사람이다. 도시의 운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파도는 위협적인 파고일 뿐이지만, 깨어 있는 도시에 파도는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가장 강력한 동력이 된다. 부산·울산·경남을 잇는 이른바 ‘동남권 해양 벨트’는 이러한 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 부산의 항만 서비스가 울산의 조선 산업, 경남의 해양 기자재 산업과 하나의 사슬처럼 맞물릴 때, 우리 해양 경제의 체급은 비로소 세계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 역시 분명하다. 단순히 ‘오션 뷰(Ocean View)’가 좋은 도시가 아니라, 도시 구성원 모두가 ‘오션 마인드(Ocean Mind)’를 공유하는 도시다. 바다를 풍경으로 소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바다를 향해 도전하며 주도적으로 나아가는 해양 주권의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오션 마인드란 결국 바다를 두려움이 아닌 기회로, 금기가 아닌 일상의 놀이터로 받아들이는 인식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지금 부산 앞바다에는 거대한 기회의 파도가 밀려오고 있다. 이 흐름을 놓친다면 우리는 또 한 세기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파도의 결을 읽고 선제적으로 준비한다면, 분명 부산은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해양 수도로 도약할 수 있다. 바다는 다시 부산을 부른다. 이 파도를 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제 부산은 그 질문에 답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공감] 오디세우스가 칼립소의 낙원을 떠난 이유
어릴 적 만화방으로 향하던 길은 내게 작은 모험과도 같았다. 눅눅하고 어두운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어머니에게 들키면 혼이 나곤 했지만, 주머니에 동전 몇 개만 생기면 나는 어김없이 골목 끝 만화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율리시스의 모험〉은 신세계였다. 외눈박이 괴물과 세이렌의 매혹적인 노래, 끝을 알 수 없는 항해는 몇 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훗날 그 만화의 원작이 서양 문학의 시초로 불리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최근 완역본으로 출간된 〈오디세이아〉를 다시 읽으며, 나는 유독 한 장면에 오래 머물렀다. 오디세우스는 귀향을 꿈꾸던 10년 중 무려 7년을 요정 칼립소의 오기기아섬에서 보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긴 세월 동안 그의 행적이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치 생이 정지된 것처럼, 호메로스는 그저 “칼립소가 그를 붙들어 두었다”고만 서술한다.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신탁을 전하러 온 헤르메스가 등장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묘사된다. 7년이라는 세월이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압축되어 버린 것이다. 안락한 현재 속에 정체되기보다 불안하지만 미래로 향하는 선택 두 갈래 길 사이 망설이는 우리 선택 순간 각자 앞에 놓여 있어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영생을 제안한다. “나와 함께 있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라는 매혹적인 약속이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그 섬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그는 왜 이 완벽한 낙원을 뒤로하고 다시 거친 파도 속으로 몸을 던진 것일까. 칼립소의 섬 오기기아는 결핍도 위협도 존재하지 않는 장소다. 그곳의 삶은 이미 완성되어 있어 선택의 고민도, 실패의 두려움도 없다. 이는 삶의 모든 책임으로부터 면제된, 휴식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다. 칼립소는 그저 지금의 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뿐이다. “여기 머물러도 괜찮다”는 다정한 위로는 지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환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안전함 속에서 그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는 늙지 않지만, 더 이상 변화하지도 않는다. 서사는 멈추고, 삶은 정박한다. 고통이 거세된 자리에서는 이야기 또한 멈춘다. 오디세우스는 생물학적으로 존재했으나, 실존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던 셈이다. 이를 칼립소의 악의라고 볼 수는 없다. 불멸의 존재에게 정체(停滯)는 비극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멸의 존재인 인간 오디세우스에게, 변화 없는 삶은 끝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었다. 그가 돌아가려는 이타카는 안식처가 아니다. 다시 상처 입을 가능성이 열려 있는 거친 세계다. 늙어버린 아내와 알아보지 못할 만큼 커버린 아들, 집안을 유린한 구혼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칼립소가 약속한 영원한 청춘에 비하면 이타카는 고단하고 위험하다. 그럼에도 그가 뗏목을 엮은 이유는, 신의 곁에서 누리는 완벽한 안락함보다 늙고 병들더라도 사랑하는 이들과 부대끼며 책임을 감당하는 삶을 택했기 때문이다. 결국 오디세우스가 칼립소를 떠난 것은 인간이라는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실존적 선택이다. 안락한 현재 속에 박제되기보다, 비록 상처 입고 부서질지라도 내일이 존재하는 미래로 나아가기를 선택한 것이다. 오늘날 오기기아섬은 먼 신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 번아웃을 피해 무기한 휴식 뒤로 숨어버린 누군가의 모습으로, 혹은 안정적이지만 의미 없는 일상에 머물며 꿈을 유예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관계의 피로를 피해 자신을 고립시키는 선택 역시 또 다른 오기기아다. 이러한 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휴식이 다시 나아가기 위한 숨 고르기가 아니라, 삶으로부터의 도피가 될 때, 우리 삶은 흐르지 못하고 고인다. 〈오디세이아〉가 오늘날에도 우리를 흔드는 이유는, 우리 역시 매 순간 안락한 정체와 불안한 성장 사이에서 망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결국 칼립소를 떠나 이타카를 향해 뗏목을 띄웠다. 그 선택의 순간은 지금도, 우리 각자 앞에 놓여 있다.
[기고] 겨울철 혈액 보릿고개를 넘으며
매서운 바닷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본격적인 겨울이 부산에 당도했다.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네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지만, 부산혈액원 제재공급팀의 긴장감은 그 어느 때보다 팽팽해진다. 기온이 떨어지면 시민들의 외부 활동이 줄어들고, 각급 학교의 방학으로 단체 헌혈이 급감하면서 혈액 보유량이 급격히 떨어지는 ‘동절기 혈액 보릿고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혈액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으며, 대체할 물질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건강한 사람의 자발적인 헌혈만이 수혈이 필요한 환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겨울철은 헌혈자에게도, 수혈을 기다리는 환자에게도 가장 가혹한 계절이다. 혈액원 제재공급팀장으로서 매일 아침 출근과 동시에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은 그날의 혈액 보유 현황판이다. 적정 혈액 보유량인 5일분이 넉넉하게 채워져 있을 때의 안도감은 잠시뿐, 겨울철에는 ‘주의’단계인 3일분 미만으로 떨어지는 날들이 잦아진다. 숫자로 표시되는 그 데이터 뒤에는 당장 수술을 받지 못해 애태우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절박한 눈물이 숨어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붉은색 경고등이 켜질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겨울철 혈액 부족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앞서 언급한 방학이라는 계절적 요인 외에도 독감과 같은 호흡기 질환의 유행은 헌혈 적격자를 감소시킨다. 게다가 최근 가속화되는 저출산 고령화 현상은 혈액 수급의 구조적인 어려움을 심화시키고 있다. 헌혈 가능 인구인 청년층은 줄어드는 반면, 수혈이 주로 필요한 고령 인구는 늘어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일시적인 부족 현상을 넘어,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장기적인 과제임을 시사한다. 현장에서 병원으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을 때가 있다. “지금 당장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데 혈액이 부족합니다.” 응급환자, 백혈병 환자, 출산 중 과다출혈 산모 등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서 혈액을 제때 공급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실무자로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이다. 부산 지역 내 수많은 병원에서 하루에도 수백 명의 환자가 누군가의 따뜻한 나눔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공급하는 붉은 혈액 팩 하나하나가 곧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아버지이며, 사랑하는 자녀의 생명줄이다. 하지만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위기 때마다 빛나는 시민의식을 발휘해 온 저력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감염의 공포 속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헌혈의 집을 찾아주셨던 부산 시민들의 행렬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 뜨거운 연대와 나눔의 정신이 이 유난히 추운 겨울, 다시 한번 발휘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헌혈은 건강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가장 고귀한 생명 나눔의 실천이다. 헌혈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20~30분 남짓이다. 잠깐의 따끔함이 지나면, 나의 혈액이 누군가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씨를 되살린다는 벅찬 보람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헌혈 과정에서 진행되는 기본적인 혈액 검사를 통해 자신의 건강을 확인해 볼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의 기쁨이라 할 수 있다. 시민 여러분, 그리고 부산 지역의 기업 및 단체 관계자 여러분께 간곡히 호소드린다. 이번 겨울, 가까운 ‘헌혈의 집’이나 ‘헌혈 버스’를 찾아 팔을 걷어붙여 주시길 바란다. 특히 방학을 맞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허리인 중장년층의 적극적인 헌혈 참여가 절실하다. 직장 동료와 함께, 혹은 가족의 손을 잡고 헌혈에 동참하는 모습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그 어떤 교과서보다 훌륭한 생명 존중의 교육이 될 것이다. 연말연시,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물을 하며 마음을 전한다. 올겨울에는 세상에서 가장 값진 선물, ‘생명’을 선물해 보는 것은 어떨까. 여러분이 나누어 준 혈액은 차가운 수술실을 덥히고, 병상의 환자에게 다시 봄을 꿈꾸게 하는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다. 부산의 겨울 바람이 아무리 차갑다 해도, 우리가 나누는 생명의 온기보다는 강할 수 없다. 여러분의 따뜻한 헌혈 참여가 꽁꽁 얼어붙은 혈액 수급의 위기를 녹이고, 더불어 사는 우리 부산을 더욱 건강하고 아름답게 만들 것이라 확신한다. 오늘, 당신의 팔을 걷어 생명을 잇는 기적에 동참해 주시기를 다시 한번 부탁드린다.
16년, 너무 길었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드디어 걸린다. 오랜 세월 논란과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서울 광화문 현판 문제가 사실상 마침표를 찍게 됐다. 문화체육관광부가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추가로 설치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휘영 문체부 장관은 지난 20일 국무회의에서 ‘광화문 한글 현판 추가 설치’ 검토 계획을 보고했다. 3층 누각 처마에 걸린 기존 한자 ‘광화문(光化門)’ 현판은 유지하되 2층 누각 처마에 한글 현판을 새로 다는 내용이다. 최 장관은 “광화문은 우리 현대사의 역동적인 상징이자 현재 진행형의 공간인 만큼 한자 현판이 지닌 의미를 존중하되 한글 현판을 추가해 그 상징성을 더욱 확장하자는 취지”라며 “전문가 의견 수렴과 공청회, 여론조사를 거쳐 현판 설치를 위한 공식 절차를 밟아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 소식은 반가움과 함께 묘한 감회를 안긴다. 올해가 훈민정음 반포 580주년이자 한글날의 효시인 ‘가갸날’ 선포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1968년 광화문에 내걸렸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현판을 둘러싼 사례가 말해주듯 이 논란은 과거에도 있었다. 그리고 2010년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으로 철근 콘크리트 광화문이 철거되고, 원래 자리에 돌과 나무로 지은 광화문이 공개되면서 논쟁은 다시 불붙었다. 흰 바탕에 검은 글씨의 한자 현판(門化光)이 걸리자 그간 잠잠하던 한글 현판의 위상과 표기를 둘러싼 논의가 시작됐다. 그로부터 16년이 지나서야 정부는 한자 현판은 유지하되 한글 현판을 추가로 설치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방향을 바로 잡았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결정이다. ■16년 현판 논쟁의 본질 광화문은 1395년 태조 때 창건된 경복궁의 남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865년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다시 세워졌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일부가 훼손된 광화문은 1968년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됐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쓴 글씨로 현판을 내걸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이 추진한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2006년 철근 콘크리트 광화문이 철거됐으며, 2010년 원래 위치에 돌과 나무로 만든 광화문이 공개됐다. 이때 1865년 중건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이 쓴 흰 바탕에 검은색 한자 ‘光化門’ 현판이 복원돼 걸렸다. 그러나 석 달 만에 균열이 발생하면서 정확한 복원이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됐고 이로써 광화문 현판을 둘러싼 논쟁은 다시 본격화됐다. 이후 사료 검토를 거쳐 2023년 10월 검정 바탕에 금색 글씨의 한자 현판이 새로 설치됐다. 2024년에는 유인촌 전 문체부 장관이 세종대왕 탄신일을 맞아 한글 현판 설치를 제안했지만 문화재 복원 원칙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무산됐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광화문 현판의 모습이다. 이처럼 광화문 현판을 둘러싼 논쟁은 이상하리만큼 길었다. 한글이냐 한자냐라는 단순한 선택지 앞에서 우리는 십수 년을 맴돌았다. 현판 하나를 거는 데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을까. 이 논쟁은 문화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룰 것인가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와 결단을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 시간이었다. ‘원형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특정 시점을 절대화하려는 관점과 문화재 역시 현재의 상징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충돌하면서 16년이라는 시간이 허비됐다. 그 결과 국가의 얼굴인 광화문은 오랫동안 일관된 메시지를 갖지 못했다. ■광화문, 살아 있는 상징 광화문은 처음부터 ‘광화문’이 아니었다. 조선 초기 이 문은 정문(正門)이라 불렸다. 세종 8년 정문을 광화문으로 고쳤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남아 있다. 세종 13년에 문이 완성돼 현판이 달렸고, 세종 30년 <태조실록>을 증수(增修)하면서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공식 기록으로 굳어졌다. 이는 사소한 개명이 아니었다. 이름은 곧 의미였다. 기능을 드러낸 ‘정문’에서 ‘빛이 널리 비친다’는 뜻의 광화문으로 바뀌는 순간 이 문은 단순한 출입구를 넘어 상징의 공간이 됐다. 세종은 일찍부터 광화문이 갖는 공간의 의미를 알아챈 셈이다. 흔히 역사학자들은 ‘문화유산은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어쩌면 광화문이야말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은 지금도 축제와 추모, 환희가 교차하는 현재진행형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존중하면서도 현재의 언어로 세계와 대화하는 곳이 바로 광화문이다. 마치 대한민국의 얼굴과 같은 곳이다. 그런 장소이기에 현판이 오직 1865년의 모습만을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보존의 원칙이 오롯이 ‘원형 유지’에만 머문다면, 그건 살아 있는 역사를 박제해 두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광화문 앞에는 세종로가 펼쳐지고 광장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에 정작 세종이 만든 글자가 없다는 사실은 너무도 아이러니다. 이는 한글 단체가 줄기차게 주장해 왔던 부분과 맥을 같이한다. 한글 현판을 더 얹는 일은 장식을 하나 보태는 문제가 아니다. 자주국가의 상징이자 대한민국 정체성의 표현이다. 더불어 경복궁과 광화문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한국의 얼굴을 더 분명히 전하고 우리 국민에게는 한글에 대한 자부심을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글·한자 현판이 갖는 의미 정부의 이번 절충안은 타협일까, 아니면 진일보일까. 후자에 가깝다. 잠시 세종대왕을 떠올려 보자. 그가 오늘의 광화문을 본다면 오롯이 한자만을 고집하라고 했을까. 세종은 기존 질서와 전통을 부정한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한자를 버리지 않았다. 대신 백성이 쓰고 읽을 수 있는 문자를 하나 더 만들었다. 훈민정음은 단절이 아니라 확장이었다. 질서를 허문 것이 아니라 질서를 더 많은 사람의 것으로 넓힌 선택이었다. 광화문에 한자 현판을 남기고 한글 현판을 더 얹겠다는 결정은 바로 이 세종의 정신과 닿아 있다. 기존 한자 현판을 유지하는 것은 역사적 연속성과 문화재 복원 원칙을 존중하는 일이다. 여기에 한글 현판을 더하는 것은 오늘을 사는 시민과 세계를 향한 메시지를 보태는 행위다. 문화재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상징을 현재화하는 선택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고 한글 현판 추가 설치 논의는 특정 정부의 성과나 실책으로 얘기할 사안도 아니다. 윤석열 정부 시절 유인촌 장관이 같은 문제의식을 제기했고, 이재명 정부가 병기안을 추진하는 것 역시 같은 연장선에 있기 때문이다. ‘현판이 둘이면 상징이 흐려진다’는 우려도 분명 있다. 하지만 세계의 유산은 이미 복수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 자금성이 만주어와 한자를 병기했듯이 언어의 병존은 혼란이 아니라 역사적 깊이와 시간의 층위를 드러내는 장치가 될 수 있다. 한자 현판이 1865년의 시간을 말한다면, 한글 현판은 지금의 시간을 말할 것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고 했다. 우리는 그 문자를 스마트폰 자판과 K 콘텐츠 자막을 통해 세계에 내보내면서도 정작 우리의 얼굴이라 할 광화문에는 오랫동안 한자만 걸어 두었다. 기묘한 자기부정이었던 셈이다. 한글을 세계에 알리면서도 국가의 상징에는 새기지 못했던 모순. 한글 현판은 이를 깨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나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다시 쓰는 선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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