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첫 막 오른 부산 커피어워즈, 산업생태계 키울 기회다
부산을 대표하는 커피 업체들이 주축으로 참여하는 ‘2025 부산 커피어워즈&페스티벌’이 4일 개막했다. 부산시, 부산일보, 한국스페셜티커피협회가 주최·주관하는 이 행사는 7일까지 부산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열린다. 대기업 중심의 기존 행사와는 차별화되는 첫 ‘부산표 커피 축제’로, 국내외 커피 업체 88곳이 참여했다. 중소 커피 브랜드, 챔피언 바리스타, 커피 애호가들이 함께 모여 교류하며, 이를 기반으로 커피 산업 확장을 목표로 한다. 지역 커피 기업을 알리는 실질적인 비즈니스의 장이 펼쳐진 것이다. 커피 도시 부산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지역 커피 산업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부산 커피어워즈는 다양한 이색 대회로 구성돼 눈길을 끌었다. 아마추어 바리스타들이 8분간 빠르게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즉석에서 심사받는 ‘스로우다운’ 대회와 커피 맛을 포함해 카페들의 컵 디자인을 평가하는 ‘커피컵스’가 4일 진행됐다. 홈브루어들이 자신만의 레시피와 도구로 자유롭게 커피를 선보이는 토너먼트 대회인 ‘홈브루다운’이 5일과 6일 열린다. 국내외 커피 챔피언들이 동일한 머신과 원두를 사용해 에스프레소 추출 실력을 겨루는 ‘위너스 클럽’은 7일 펼쳐진다. 커피 챔피언에게 직접 핸드드립을 배우고, 바리스타와 로스터와 직접 만나 커피를 맛보는 장도 마련됐다. 생생한 커피 체험은 물론 산업의 최신 동향을 접할 수 있는 기회다. 부산은 국내 커피 90% 이상이 수입되는 물류 거점도시다. 또 관광객을 비롯해 커피 소비층이 많아 소형 독립 카페, 대형 프랜차이즈, 스페셜티 커피전문점 등이 발달해 있다. 부산시는 2022년 전국 최초로 ‘커피산업 육성 및 지원 조례’를 제정했으며, 지난해 6월 ‘제1차 부산시 커피산업 육성 기본계획’을 내놓았다. 2023년엔 부산을 글로벌 커피도시로 키워 나가기 위해 산학연관이 참여한 ‘커피도시부산포럼’도 발족한 바 있다. 부산 커피산업을 신성장 동력으로 만들기 위해 지자체와 민간이 꾸준히 합심해 온 것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부산 커피어워즈는 부산을 글로벌 커피도시로 나아가게 하는 강력한 추동력이 될 것이다. 부산이 커피 수출입 거점을 점하고 있지만, 커피 수입업체 대부분은 수도권에 있다. 단순 수입 거점에서 탈피해 커피산업을 새 성장 산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커피 수입, 가공, 유통, 판매 등 커피 밸류체인을 강화해야 한다. 블록체인, 인공지능을 활용한 물류 플랫폼 구축을 통한 고부가가치 창출도 필요하다. 이번 커피어워즈에서는 부산시가 부산 출신 월드챔피언 바리스타 3인과 함께 개발한 커피음료 ‘월드챔피언 부산커피 맛쩨’를 선보여 호평받았다. 라테 상품으로 내년부터 주요 편의점을 통해 전국에 유통된다고 한다. 부산형 커피 음료의 전국화 가능성을 선보인 이번 행사를 커피 산업생태계를 키울 기회의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설] 지역의사제, 위기에 처한 지역 의료 살릴 불씨 돼야
지역에서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하는 지역의사제도가 마침내 법제화됐다. 여야가 지난 2일 ‘지역의사의 양성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키면서다. 지역의사제도는 의료 인력 불균형으로 인한 지역 필수의료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불씨로서 기대를 모아온 제도다. 크게는 ‘복무형’과 ‘계약형’으로 나뉜다. 어떤 형태가 되든 빠른 의사 수급으로 지역의 필수의료 공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기대감은 부풀고 있다. 반면 단순히 의사 수만 늘린다고 해서 지역의 필수의료 공백 문제를 단박에 해결할 수는 없다는 비관론도 만만찮다. 법제화는 시작일 뿐, 더욱 촘촘한 후속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지역의사제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의무적으로 근무해야 하는 기간이다. 복무형 지역의사는 대입에서 지역의사 선발 전형으로 뽑힌 의대생이 졸업 이후 특정 지역에서 10년 동안 의무 복무를 하는 것이다. 해당 의대생은 세금으로 등록금과 기숙사비 등을 지원받고 제적 혹은 자퇴, 의무 복무 불이행 시 등의 경우엔 지원받은 비용을 반환해야 한다. 또 다른 형태인 계약형 지역의사는 전문의 가운데 국가나 지자체 혹은 의료기관와 특정 지역에서 혜택을 받고 일정 기간 종사하기로 계약을 맺는 방식이다. 계약상 의무 종사 기간은 5~10년이다. 어떤 형태든 의무 기간을 채우지 않을 경우 정부가 의사 면허 자격 정지까지 가능하다. 이처럼 강력한 의무 복무 혹은 종사 기간을 설정해 놓았음에도 지역의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지역의사들이 법에서 정한 의무 기간만 지역에서 채운 다음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싣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라는 우려가 대표적이다. 의사로서 가장 성숙한 시기에 지역을 떠난다면 지역의사제도의 취지와는 완전히 거꾸로 가는 일이 된다. 여기에다 복무형 지역의사의 경우 일러야 2027학년도 입시 윤곽이 나온 뒤에 의대 정원 규모가 정해질 전망이어서 우려가 더 크다. 의대 입학 후 본격적으로 의사가 되는 기간만큼 장기간 공백이 불가피해서다. 시범 도입 중인 계약형 지역의사 규모부터라도 서둘러 늘려야 한다. 지역의사제도가 지역의 필수의료 공백을 제대로 메울 수 있기 위해서는 사명감 같은 부분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 사명감이 제대로 발현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환경이 반드시 조성돼야 한다. 다행히도 정부는 하위 법령 제정 등을 통해 지역의사들이 지역에서 일하고 싶은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다양한 지원책 마련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지역 정주여건 개선에서 시작해 지역 병원 시스템 강화와 합당한 보상 체계 구축 등으로 지역의사들의 발길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외부 환경이 제대로 조성된다면 지역의사들이 내적 사명감을 발휘하지 않을 리 없을 터이다. 그게 지역 필수의료 공백을 메울 줄탁동시(啐啄同時)다.
[사설] 내년도 예산 '낙동강 먹는 물' 반영, 이제 해결할 때 됐다
부산시가 사상 첫 국비 10조 원 시대를 맞게 됐다. 지난 2일 확정된 내년 정부 예산안에서 부산시가 받는 국비는 10조 2184억 원으로 올해 대비 6%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부산은 스마트항만 구축 사업비가 삭감되는 등 일부 미래 신산업 육성 분야를 제외하면, 가덕신공항 등 대다수 사업비는 원안이 유지됐다. 지역에서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낙동강 먹는 물 사업이 막판에 기사회생해 19억 2000만 원을 확보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난 수십 년간 좌절을 거듭한 취수원 다변화 사업은 올해도 애초 정부안에서 누락됐지만, 극적으로 부활했다. 먹는 물 공급의 패러다임 전환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낙동강 유역 주민들에게 믿고 마실 수 있는 식수를 제공하려는 ‘먹는 물 사업’이 시작된 건 1991년 경북 구미공단 페놀 유출 사고가 계기다. 식수를 강물에 의존하던 하류 주민들이 안전한 공급원을 찾으려 한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낙동강 본류와 지류, 지천의 수질 안정과 이를 바탕으로 한 고도 정수처리, 그리고 광역 상수도망 구축이라는 종합적 공급 체계를 구상한 것이다. 합천 황강 복류수, 창녕 강변여과수 등 새로운 취수원을 통해 하루 90만 톤 규모의 식수를 부산과 경남 동부에 공급한다는 계획은 그 자체로 획기적이다. 하지만 부산-대구-경남 간 이견에 재정 부담과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겹치면서 하세월이 되고 말았다. 부산시는 올해도 먹는 물 사업을 ‘예산 1순위’로 올렸지만, 정부 우선순위에 밀리고 말았다. 지역 정치권과 경제계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호소한 덕분에 국회 심의 때 설계비가 추가되는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확보된 예산은 전체 사업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특히 낙동강 유역 통합관리 구상도 제도화까지는 갈 길이 멀다. 지류와 지천의 수질 편차, 계절별 유량 변화, 지역 간 이해 갈등도 난제다. 예산의 일관된 확보를 위해 정치적 변동성을 극복하는 일은 지역의 몫으로 남았다. 지자체 간 협력에 기반한 속도감 있는 실행력과 주민 수용성 확보 병행에 사업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내년 부산 국비 사업 중 가덕신공항은 6889억 원의 정부안이 유지됐다. 하지만 대구경북신공항 건설비 2882억 원이 내년 예산에 미반영된 사례처럼 국책 사업이라 해도 돌발 변수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긴장감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부산은 바이오·디지털·해양 분야 사업비도 먹는 물 사업처럼 국회 심의 단계에서 대거 추가돼 주목된다. ‘자율주행 기반 스마트항만 모빌리티 구축 사업’에 19억 6000만 원이 신규 배정되는 등 인공지능(AI)과 해양 신산업이 수혜를 받는다. ‘시민 삶의 질을 개선해 나가면서, 동시에 미래 성장 동력을 모색하자.’ 국비 10조 원 시대를 맞이한 부산 앞에 놓인 과제다.
초연결된 고독 사회
퇴근 후 카톡 차단권, 속칭 ‘연결되지 않을 권리’ 실현은 이재명 정부에서 국정과제로 채택됐다.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근로기준법 개정안은 22대에서 재발의됐다. 근로 시간 이외에 SNS·이메일 업무 지시 금지가 골자다. 평일 업무 종료 후는 물론 주말·공휴일까지 ‘카톡 감옥’을 경험했다는 직장인이 3분의 2에 이르는 현실이 법안의 배경이다. ‘친구’로 포장된 상호 연결성은 겉으로 평등해 보이지만 권력관계가 개입하면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 된다. 업무 메시지를 무시할 수 없거나, 전화를 끌 수 없는 쪽이 약자다. 하지만 법안 통과에 난관이 만만치 않다. 업무 유연성 저하를 우려하는 기업의 반대로 또 하세월이 될 조짐이다.초연결사회에서는 관계망의 굴레가 더 강력해진다. 이동통신, 전자상거래,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는 신속함과 편리함을 핑계로 사람과 사물, 공간을 하나로 묶어 버린다. 문제는 개인정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얻는 소소한 편익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진 보안 사고 위험을 가린다는 점이다. 최근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대형 플랫폼의 보안 사고는 초연결성의 폐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해킹을 당한 SK텔레콤에서 2300만 명의 정보가 유출되더니, 국내 1위 전자상거래 업체인 쿠팡은 회원 3370만 명의 정보가 빠져나가도 몰랐다. 어이없는 실수나 방심으로 순식간에 수천만 명의 평온한 일상이 사이버 범죄의 먹잇감으로 노출되고 만다. 원형 감시탑의 통제 구조인 판옵티콘(panopticon) 감옥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개인정보를 내주는 순간, 투명한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는 셈이다.인류 역사상 가장 촘촘히 연결된 시대를 살지만, 정작 현실 세계는 고립과 단절이 심화되는 모순으로 혼란스럽다. 2024년 부산에서 발생한 고독사는 367명으로 전년 287명보다 27.9%나 늘었다. 전국 증가율 7.2%에 비하면 부산은 4배 가량 폭증했다. ‘나 홀로’ 방치된 죽음이 빈곤층도 아닌 5060 중장년 남성에 몰린 점은 허투루 넘기기 어렵다. 주로 경비원과 집주인에 의해 발견되는 패턴은 가족과 사회의 접점 상실을 드러낸다. 부산의 1인 가구 비중(37.2%)을 고려하면 고립된 죽음의 확산은 시간 문제다.접속 과잉의 시대에 우리는 ‘절연 사회’를 목도한다. 이 시대의 불편한 진실은 외면하고 싶다고 외면될 수 없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와 연결해야 할 책임. 모순된 과제를 꿰뚫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난제다.
논설주간/이사
강윤경
논설위원/대기자
강병균
논설위원
김승일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편집국에서] 내 아이는 학폭 피해자다!
오늘 칼럼은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한다. ‘사연팔이’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의도치 않게 지난 2년여 동안 소수자(?)의 삶을 경험했고,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나의 아이는 고등학교 1학년 때 학폭 피해를 당했고, 결국 2학년이 시작되며 자퇴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개근할 정도로 학교를 좋아했던 아이가 고등학교 입학하며 결석이 잦아졌다. 억지로 교복을 입혀 학교에 보내려던 순간, 아이는 과호흡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그제야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느꼈다. 아이는 어렵게 말을 시작했다. 학교에 심하게 놀리며 몸을 부딪치는 무리가 있다고 했다. 하지 말라고 해도 소용없었다. 가해 학생들은 모두 상위권 성적으로, 공부 면에서는 학교에서 인정받는 기대주였다. 담임은 가해 학생의 자술서를 받고 적당히 화해시키는 걸로 사건을 끝냈다. 학교와 가해 학생에 대한 분노가 컸지만, 결론적으로 우린 아무것도 못했다. 학폭위를 열고자 했지만 “빨리 여기를 떠나고 싶다”는 아이의 호소에, 피해자인 우리가 되레 도망치듯 그 학교를 나왔다. 병원에서 받은 아이의 병명은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공황장애’ ‘(환청·환시) 조현병’ ‘대인기피증’이었다. 그 후 1년간 아이는 스스로를 방에 가두고 자책과 자해를 반복했다. 힘든 시간을 견딘 후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학교에 소속되지 않은 청소년의 삶은 쉽지 않았다. 다수, 주류가 아닌 소수자로 산다는 건 또래 친구가 받는 복지와 정보에서 외면돼 뭐든 혼자 해결해야 했다. 대한민국에서 10대 후반 모든 청소년은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학교에서 공부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평일 낮 학교가 아닌 곳에 있는 아이는 자주 의뭉스러운 시선을 견뎌야 했다. 일반 고3들은 지역 교육청, 학력평가원의 모의고사로 수능 전까지 성적을 점검하고 최신 정보를 바탕으로 담임과 수시·정시 전략을 준비하지만, 아이는 그 모든 것에서 제외된다. 당장 학교 밖 청소년은 모의고사 응시조차 고난이다. 학평 모의고사만 응시할 수 있고, 그마저 남은 자리를 찾기 위해 학원마다 전화를 돌려야 한다. 어렵게 자리를 찾으면 마감될까 싶어 당장 돈을 들고 뛰어야 했다. 물론 모의고사도 수능시험도 모두 비용을 내야 한다. 또래의 친구들이 무료로 급식을 먹고 예고된 날에 모의고사를 응시하는 게 당연하다지만, 학교 밖 아이에겐 당연한 게 없다. 청소년 센터에 등록하면 식사 쿠폰을 받을 수 있다기에 찾아가니 예산 부족으로 이번 달은 식사 지원이 힘들다는 답을 들었다. 예산 문제로 학교가 급식을 주지 않았다면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현역 지원자의 특권이라고 불리는 수시 모집은 생기부가 없는 우리 아이에겐 논술 빼고는 가능한 선택이 없었다. 100점의 검정고시 성적표를 받았지만, 아이가 희망하는 서울의 대학들엔 쓸모없었다. 자퇴 소식을 들은 주변에선 “의대에 가기 위한 전략이네”라며 속 모르는 소리로 마음을 찔렀고, 그야말로 ‘할많하않’이었다. 코로나로 중학교 수학여행이 취소됐고, 자퇴로 고등학교 수학여행조차 가지 못한 아이에게 “수학여행은 어디로 갔냐”라는 질문들이 아프게 꽂혔다. 차별과 편견으로 힘든 삶을 산 소수자에 비해 배부른 투정처럼 들릴 수도 있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누구나 약자가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이다. 나조차 생각하지 못했고, 대부분 자신은 그저 보통의 다수라고 생각하겠지만, 어느 장소 어떤 상황이 닥치면 순식간에 외로운 약자가 된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을 모른 체하면 안되는 이유이다. 지난 겨울 시민단체 활동가로 일하는 친구가 갑자기 다리를 다쳐 목발에 의지해야 했다. 약자를 위해 꾸준히 목소리를 내며 집회를 연 친구였는데, 윤석열 탄핵 집회 후 이어진 거리 행진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다른 이의 보폭을 맞출 수가 없었다. 친구는 그때 처음으로 가쁜 숨을 쉬며 자신처럼 낙오된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배리어프리 관점에서 장애인도, 몸이 아픈 사람도 시위에 참여하는 방법을 준비해야 한다는 걸 몸소 경험한 것이다. 언론사를 비롯해 정부 기관들이 젠더데스크, 인권데스크, 다양성데스크를 운영하는 것도 소수자가 느낄 수 있는 차별을 지적하고 그들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는 데 노력하겠다는 의미이다. 부산일보는 국내 언론사로선 두 번째로 젠더데스크를 설치해 지난 5년간 운영했고, 현재 여러 기자가 참여하는 젠더위원회로 확대 운영할 것을 고민하고 있다. 윤리와 인권, 다양성 존중은 기자와 ‘기레기’를 구분하는 최소한의 장치이지 않을까 싶다.
[안준영의 집피지기] 건설사의 사회적 책임
부산도시공사가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결단을 내렸다. 에코델타시티 건립 등 민관 합동 사업에 참여한 건설사들에게 480억 원을 내놓기로 한 것이다. 이들 건설사는 원자잿값이 급등해 공사비가 물가 상승률보다 크게 올랐다며 비용 보전을 요구해 왔다. 480억 원이라는 금액은 건설사들이 요구한 공사비 보전액의 50% 수준이다. 여전히 일부 건설사들은 ‘보전액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더 많은 돈을 요구하고 있다. 부산시 산하 공공기관 중에서 굴리는 돈의 규모가 가장 큰 편인 부산도시공사 입장에서도 이 금액은 적지 않은 액수다. 당장 이 480억 원을 공사의 당기순이익에서 제해야 할 판이다. 당기순이익이 높은 편이었던 지난해가 830억 원 규모였으니, 한 해 당기순이익의 절반이 넘는 금액을 건설사들에게 줘야하는 셈이다. 공사의 향후 투자 전략이나 주거 복지 사업, 직원들의 성과급 등에 영향을 주지 않을 거라 보기 힘들다. 게다가 계약서에는 공사가 건설사에 돈을 지급해야 할 의무가 명시돼 있지 않다. 법적 다툼으로 넘어가면 보전을 해주지 않아도 도시공사의 손을 들어줄 확률이 높아진다. 다른 지방도시공사들이 ‘전국 최초’라는 타이틀을 단 부산의 사례에 관심을 쏟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이쯤 되면 부산도시공사가 어느 정도 사회적 책임을 실천했다는 사실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테다. 이제는 건설사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할 때다. 지역 건설사들이 앓는 소리를 할 때마다 나오는 말이 있다. “경기가 나쁘면 죽겠다고 정부건 지자체건 손을 벌리는데, 호황이 돼서 돈을 쓸어 담을 땐 건설사들이 지역 사회를 위해 뭘 좀 내놓은 게 있느냐”는 것이다. 굳이 지역사회 공헌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다. 가장 기본적인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도외시했다는 질타가 곳곳에서 쏟아진다. 평생 번 돈을 아파트 분양에 쏟아부었지만 부실 시공으로 피눈물을 흘리는 수분양자, 제대로 된 안전장치 없이 외벽을 오르내리는 건설 노동자, 부도를 내고 잠적해버린 건설사 탓에 가슴을 치는 협력업체 사장 등 이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다. 우리가 보내는 일상의 대부분은 건설사들이 만들어 낸 공간에서 이뤄진다. 도시의 품격은 지역 건설사의 수준과 직결된다. 지역 건설사들이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중추라면, 이제는 ‘법은 지켰다’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될 일이다. 사회적 책임에서 비롯된 지역사회의 신뢰 없이는 건설사의 지속가능한 성장도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 사회적 책임은 기본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오션 뷰] 해양강국 경쟁력은 배가 아닌 '사람'
대한민국은 세계 6위권 해운국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조선기술 분야에서는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부산항은 세계적인 대표 환적 허브로 자리매김했고, 디지털 해운, 친환경선박, 해양플랜트, 해양에너지, 스마트 항만, 해양 금융, 해양바이오 등 신해양산업 또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화려한 성과 이면에는 갈수록 심화되는 해양수산 인력 기반의 구조적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해기사 부족과 선원의 고령화는 이미 임계점에 도달했고, 수산·양식·가공 산업 현장에서는 청년 인력의 유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관련 산업은 빠르게 미래로 이동하고 있는데, 이를 떠받칠 인력 기반은 오히려 약화되고 있는 모순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해양정책은 선박 건조, 항만 확충, 물류 인프라와 같은 ‘하드웨어’ 중심으로 추진되어 왔다. 그러나 이제 해양산업의 중요한 경쟁력은 더 이상 선박의 크기나 항만 자동화 설비가 아니라, 이를 설계하고 운용하며 새로운 기술로 혁신할 수 있는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다. 자율 운항 선박, 대체 연료, 디지털 해양수산, 북극항로 개척은 고급 인재 없이는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분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재 정책은 여전히 정부 부처별 단년도 사업에 머물러 있고, 대학은 불확실한 재정지원 공모사업에 매년 의존하는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면 해운 선진국들은 인재를 산업정책의 중심에 두는 선택을 이미 오래전에 끝냈다. 노르웨이는 선박 톤세제와 연계한 ‘해양인재역량기금’을 통해 해기사 양성, 해양대학 지원, 친환경·디지털 해운 인력 육성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안정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조세 혜택은 곧바로 인재와 연구개발 투자로 환류되는 구조가 제도화되어 있다. 영국 역시 톤세 적용을 받는 선사에 최소 훈련 의무를 부과한다. 세제 혜택의 대가로 해기사와 선원 양성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해운·조선·항만 산업의 지원은 반드시 인재 양성과 연구개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원칙을 제도화했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한국에는 선박 톤세제, 선원·어선원 지원 사업, 수산발전기금, 해양항만 공공기관 사회공헌 예산 등 다양한 재원이 존재하지만, 이 재원들이 해양수산 인재와 연구개발을 전담하는 상설 국가 기금 체계로 통합·연계되지 못한 채 분절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이제 필요한 해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해양수산인재육성특별기금’의 제도화가 그 핵심이다. 선박 톤세 적용 기업의 일정 비율 출연, 항만공사와 수산 관련 공공기관 수익의 일부 배분, 국가와 지자체의 상시 출연, 민간기업 기부와 국제협력 재원까지 결합해 오직 해양·수산 인재와 연구개발만을 전담하는 국가 차원의 상설 기금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장학사업이 아니라, 해기사·선원·어선원 양성, 해양AI·첨단해운항만·스마트 양식·해양바이오·친환경선박 전문인력 교육, 재직자 재교육, 산학연 공동연구, 국제 인재 교류까지 포괄하는 종합 인재 인프라가 되어야 한다. 국내에는 11개의 수해양특성화 고등학교가 있고, 해양수산 발전을 위한 국립대학교 총장 협의회 8개 회원 대학의 해양수산관련 학과들이 전문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우수한 인재들이 해양수산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첨단 미래 해양수산 산업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안정적인 재정 지원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앞으로의 해양 산업은 더 이상 해운과 수산을 분리해서 정책을 설계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데이터 기반 해운, 첨단 스마트 선박, 스마트 수산물 생산, 해양바이오 신약, 해양환경 관리, 해양에너지 산업이 하나의 가치사슬로 연결되는 ‘해양수산 융합 산업 시대’가 이미 도래했다. 이 전환을 이끌 인재는 기존의 해기사나 전통 어업 인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융복합 해양수산 인재를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국가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 배는 자본으로 건조할 수 있고, 항만은 예산으로 확장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최소 10년 이상의 시간과 일관된 국가 제도가 있어야 길러진다. 지금 인재 투자를 미루면, 10년 뒤 대한민국 해양수산 산업은 회복이 어려운 인력 공백이라는 치명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해양을 지키는 힘은 선박이 아니라 사람이고, 수산을 살리는 주체도 어선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제 대한민국 해양정책의 중심축은 ‘시설’에서 ‘인재’로, ‘단기 사업’에서 ‘상설 기금’으로 과감히 이동해야 한다. 해양수산인재육성특별기금의 제도화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산업 생존을 좌우하는 필수 과제다.
[공감] 자식은 부모에게 행복을 주는 존재일까
자식이 부모에게 행복을 준다는 믿음은 어느 나라든 강력한 힘을 지닌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류에게 이런 믿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미 멸종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소득이 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질수록 출산율은 낮아진다. 내가 결혼한 이후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면, 우리 부모는 물론이고 일가친지까지 초읽기 하듯 아이는 언제 낳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진저리 치던 아내는 딸에게 굳이 결혼과 출산을 의무로 강요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것은 진화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이고, 행복마저 목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는 연구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먹는 것과 섹스가 인간에게 큰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이것이 생존을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개체는 행복해야 이 두 행위를 지속할 것이고, 그 덕분에 집단은 생존하고 번식한다. 부모에게 자녀의 유아기는 얼마나 가혹한가. 아이가 기저귀를 차고 누워 있는 순간을 시작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며 뛰어다니면, 부모는 위기를 맞는다. 대부분 여성은 양육보다 백화점에서 쇼핑하거나 친구를 만날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모임에 나가면, 자녀 양육이 얼마나 멋진 일이며, 아이가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모른다며 입을 모은다. 이것은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여 ‘인지 부조화’를 해소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지만, 첼시 코나보이가 〈부모됨의 뇌과학〉에서 밝힌 ‘돌봄 회로’(caregiving circuitry)가 우리 안에 강력히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녀 돌봄 회로는 간호사가 되었다, 요리사가 되었다, 운전사가 되었다가 결국 입시 전문가가 되는 초인적인 노력을 요구하며, 나아가 부모의 인생 자체를 바꾼다. 좋은 부모가 되고자 평소 읽지 않던 책을 읽고, 도서관이나 미술관도 가본다. “자식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라는 말이 듣고 싶지 않아 말투를 신경 쓰고, 거친 행동은 순화한다. 아이들은 가끔 부모를 미치기 직전까지 몰아갈 만큼 힘들게 하지만, 덕분에 우울해할 시간도 앗아간다.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부모는, 달려와 품에 안기는 자녀를 보며 느끼는 행복이 승진이나 적금을 털어 마련한 자동차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승진, 자동차나 명품 구매 등이 주는 행복은, 매우 강력하지만 자주 일어날 수 없다. 행복한 감정은 아무리 강해도 금세 사라지도록, 그렇게 초기화되도록 우리 유전자에 설계되어 있다. 그래야만 인간은 다음 행복을 위해 노력하며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행복심리학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다. 승진이나 자동차 구매는 매일 할 수 없지만, 아이와 눈을 맞추고, 아이가 달려와 품에 안기는 소소한 행복은 매일 찾아온다. 유대인의 언어 ‘이디시어’에서 유래된 ‘나케스’(naches)라는 말이 있다. 자녀의 성취에서 비롯된 부모의 자부심과 기쁨을 이르는 단어로, 자식을 향한 부모의 행복한 마음을 표현할 때 사용한다. 기던 아이가 걷기만 해도 그 성취에 행복을 느끼며 주위에 자랑하는 것이 부모다. “우리 아이가 드디어 걸었어요!” 명문대 합격이나 대기업 입사가 아니라도, 꼭 의사나 변호사가 되지 않더라도, 자식의 모든 성취는 부모에게 나케스다. 이디시어는 ‘마메 로슨’(mame-loshn)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는 어머니가 자녀에게 전하는 ‘어머니의 언어’라는 뜻이다. 엄마는 아이를 가슴에 품고 토닥이며 나케스의 의미를 전한다. “너는 내게 큰 기쁨과 행복을 주는 존재란다.” 기던 아이가 걸을 것이고, 걷던 아이가 뛸 것이다. 어느 날 말을 배워 ‘엄마’라 부르고, 훗날 인생의 여러 관문을 힘겹게 통과할 것이다. 그러다 먼 훗날, 지팡이 짚은 부모를 부축해 병원에 데려다 줄 것이다.
[기고] 금정산, 천년의 숨결로 세계 속 도심형 국립공원으로
부산의 영산(靈山) 금정산이 대한민국 최초의 도심형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이는 단순히 행정적 명칭이 바뀐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의식이 바뀌는 상징이다. 금정산은 오랜 세월 동안 부산의 정신적 지주이자, 부산 시민의 마음이 머무는 산이었다. 그리고 천년 고찰 범어사의 품 안에서 수행의 숨결과 시민의 삶이 함께 호흡해온, 그야말로 ‘산과 사람이 공존해온 시간의 증언자’이다. 1400년의 역사를 간직한 범어사는 금정산의 자락 아래에서 수많은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전란과 산업화, 그리고 도시의 팽창 속에서도 이 산은 늘 변함없이 자비와 평화의 품을 내어주었다. 수행자들에게는 깨달음의 터전이 되었고, 시민들에게는 지친 일상을 위로하는 쉼의 공간이었다. 수많은 불자와 시민이 이곳을 오르내리며 자연과 마음을 함께 닦아온 시간, 그것이 바로 금정산이 품은 진정한 역사이다. 이번 국립공원 지정은 금정산이 가진 불교적 가르침과 현대적 생태 가치가 결합되는 전환점이다. 불교가 말하는 ‘공존’과 ‘화합’의 정신은 생태의 언어로 번역되어, 생명 존중과 환경 보전이라는 현대 문명사회의 화두와 만나고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천년의 숲이 숨 쉬고, 그 속에서 시민이 명상하고 어린이가 생명을 배우는 풍경, 이것이 바로 금정산이 지향해야 할 도심형 국립공원의 모습이다. 불교가 전하는 공존의 의미는 단순히 함께 존재하는 것을 넘어서 서로의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산은 인간에게 쉼과 깨달음을 주고, 인간은 산을 돌보며 그 생명을 이어준다. 한 그루의 나무, 한 줄기의 물, 한 줌의 흙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음을 아는 것, 그 깨달음이 바로 불교적 공존의 실천이다. 범어사는 이러한 철학을 시민과 나누어 도시 속의 명상길, 마음의 쉼터를 조성하고자 한다. 이는 금정산이 지닌 자비와 생명의 숨결을 현대 사회 속에 되살리는 일이다. 금정산은 단지 부산의 산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산이며, 인류가 함께 지켜야 할 자연유산이다. 국립공원 지정은 부산이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가 주목하는 생태도시로 도약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다. 금정산이 품은 생태계는 단순한 녹지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자연이 다시 만나 서로의 존재를 회복하는 생명의 터전이다. 범어사는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시민과 불자, 그리고 환경단체와 손잡고 금정산의 생태계 보전과 문화유산의 전승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산사와 도시가 함께 이어지는 새로운 공존의 모델, 그것이 바로 금정산이 나아가야 할 길이다. 명상 숲길을 조성하여 시민들이 마음을 고요히 다스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청소년과 외국인을 위한 생태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자연의 가치를 배우게 할 것이다. 또한 국제적 환경 교류를 통해 금정산의 사례를 세계와 공유하며, 지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할 것이다. 세계는 지금 기후 위기와 환경 붕괴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금정산의 국립공원 지정은 단순히 지역의 경사에 머무를 일이 아니다. 이는 인간의 삶과 자연의 조화를 다시 묻는 문명적 성찰의 기회이다. 우리는 금정산을 통해 ‘산이 사람을 품고, 사람이 산을 지키는’ 새로운 윤리를 세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불교가 전해온 자비의 정신이 오늘의 언어로 구현되는 길이며, 동시에 부산이 세계 속에서 보여줄 새로운 생태문명의 모델이다. 금정산은 오래된 산이지만, 여전히 살아 있는 생명의 산이다. 그 품 안에서 수많은 생명이 깃들고, 인간의 마음 또한 다시 숨을 쉰다. 천년의 도량 범어사는 앞으로도 이 산이 지닌 자비의 숨결을 지켜낼 것이다. 이번 국립공원 지정은 그 첫걸음이며,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약속이다. 금정산이 부산의 시민은 물론 세계인 모두에게 평화와 깨달음의 공간으로 남을 수 있도록, 범어사는 그 뜻을 이어갈 것이다.
[기고] 적십자 회비에 담긴 '부산의 연대'
2025년 세계 적십자의 날 슬로건은 ‘On the Side of Humanity’(인류의 편에서)이다. 이 슬로건은 인종, 국적, 종교, 정치적 배경을 넘어 모든 인간의 존엄을 최우선으로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담고 있다. 고통받는 사람을 발견하면 가장 먼저 다가가고, 위기 상황이 길어질수록 더 오래 곁을 지키겠다는 인류 공동의 약속이기도 하다. 이러한 메시지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곁에 끝까지 남겠다는 적십자의 변하지 않는 사명을 다시 일깨운다. 적십자 운동의 본질은 바로 여기에 있으며, 부산지사 역시 이러한 가치 아래 지난 76년 동안 지역사회와 함께해 왔다. 적십자 운동은 1863년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차별 없이 보호하려는 열망에서 시작됐고, 대한적십자사는 1905년 고종 황제의 칙령에 따라 ‘널리 구제하고 고루 사랑하라’는 정신을 바탕으로 창립돼 올해로 120년을 맞았다. 부산에서는 1949년 부산지사가 발족된 이래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화재구호 등 인도주의 활동을 이어오다 6·25전쟁 당시 수영강변에서 피 묻은 군복을 손수 빨며 본격적인 봉사활동을 시작하였고, 1953년 황폐한 국토를 되살리기 위해 서구 천마산에서 나무를 심으며 시작된 대한민국 청소년적십자 활동, 베트남 난민 수용 등 재난과 혼란의 시대마다 생명을 살리고 위기를 극복하며 희망을 전하는 데 힘을 보태 왔다. 적십자 회비는 이렇듯 오래된 역사 속에서 쌓아온 책임감으로, 가장 필요한 순간에 사용된다. 올해 역시 부산지사는 다양한 현장에서 적십자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했다. 무안국제공항 제주 항공기 추락 사고와 경북 산불 피해 발생 당시 긴급 모금을 전개했으며, 대규모 이재민이 발생한 경북 영덕에 긴급구호박스, 쉘터, 급식차량을 즉시 전달했다. 동시에 재난 심리 지원을 실시해 피해 주민의 빠른 일상 복귀를 도왔다. 평시에는 부산 내 1930여 결연가구에 밑반찬 지원, 맞춤형 물품 지원, 정서 돌봄을 이어 왔고, 범죄 피해자 지원과 김장 나눔, 캠코와 함께한 소외계층 가족 힐링 여행(희망 리플레이 제주 가족여행) 등 다양한 복지 활동도 펼쳤다. 재난 대응체계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됐다. 전국 25개 기관이 함께하는 대규모 재난대응 역량 강화 훈련인 ‘레디코리아’에 참여해 실전형 훈련을 수행하고, 11월에는 200여 명의 직원과 봉사원이 참여한 전국 재난구호 종합훈련을 개최해 이재민 구호 절차와 현장 대응 능력을 높였고, 전국학생심폐소생술 경연대회를 주관해 시민의 생명 구조 역량 향상에도 기여했다. 또한 결혼이주여성 20여 명과 적십자 봉사원의 결연을 통해 한국의 전통 문화를 체험하고 부산 특화 체험·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지역사회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이제 부산지사는 2026년도 적십자 회비 모금 62억 원을 목표로 12월부터 본격적인 희망나눔 성금 모금 운동에 들어간다. 시민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로 나뉜다. 우선, 일정 금액을 매월 후원하며 지속적으로 취약계층을 돕는 정기후원 프로그램(희망 나눔 사업장(매월 3만 원 이상), 씀씀이가 바른기업(매월 20만 원 이상), ESG실천기업(매월 50만 원 이상) 등)이 있다. 또한 연말 지로 용지와 함께 개인이나 사업장이 의미 있는 날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특별성금 형태의 일시적 후원이 가능하다. 여기에 더해, 인도주의 가치를 함께 확산하고자 하는 이들이 1억 원 이상 후원을 약정하는 ‘레드크로스 아너스클럽’도 운영하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방식으로 상황에 따라 나눔에 동참할 수 있다. ‘On the Side of Humanity’라는 슬로건처럼 부산적십자는 앞으로도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는 일에 흔들림 없이 나아가고자 한다. 부산 시민의 참여가 늘어날수록 우리 지역의 안전망은 더 단단해지고, 위기에 놓인 이웃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도 더 많이 생길 것이다. 희망을 잇는 이 나눔에 함께 해주시길, 뜻깊은 참여와 따뜻한 성원을 보내주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린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킹 달러’ 시대 생존법
세계 최강 국가인 미국의 달러는 국제무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결제 수단이다. 글로벌 기축통화인 달러와 다른 화폐의 환율은 각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현재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는 달러 강세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달러 환율이 높아질 수록 수입 물가 상승 등 각종 부작용이 연쇄적으로 촉발되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기준 1달러 당 원화 환율이 1475.2원을 기록했다. 이 환율에 따른 현물 달러 구입가는 1501.01원에 달했다. 이후 지난 4일까지의 환율은 1470원대 전후로 들쭉날쭉하고 있지만 사실상 체감적으로 1500원 시대에 진입한 느낌이다. ‘달러 계엄’이라는 말까지 나돈다. 달러 초강세가 이젠 뉴노멀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달러가 계속 초강세를 보이면 국민 생활도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은 현재 미국과의 불공정한 관세 협상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다. 3500억 달러(514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이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면서 외환보유액에도 비상이 걸린 상태다. 더욱이 이번 환율 인상의 가장 큰 원인은 미국 금리 인상 우려에 따른 것으로 현재까지 분석된다. ‘서학개미’ 등의 해외 주식 투자 급증에 따른 외환 유출 등도 원인으로 지목됐다. 더군다나 환율이 높아져 달러나 달러 표시 자산을 보유하려는 시도가 잇따를 경우 환율은 더 오를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미국 금리가 인상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사실상의 ‘킹 달러’ 시대,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닥칠까. ■ ‘킹 달러 시대’ 본격 도래하나 이번 달러 초강세의 주된 원인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가 금리를 인상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준은 최근 기준 금리를 잇따라 인하했다. 하지만 연준이 조만간 금리를 인상하면 미국 채권 금리와 달러 자산의 수익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자본이 미국으로 더욱 쏠린다. 반면 원화는 수요 감소로 상대적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에 원달러 환율이 올라가는 구조다. 미국 금리 강세로 인한 달러 강세의 경우 통상 ‘킹 달러’ 현상으로 분류한다. 특히 전 세계의 이목은 오는 9~10일(현지 시간) 열리는 연준의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 정례회의에 쏠려있다. 금리가 인상될 경우 원달러 환율은 더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킹 달러’ 시대도 본격화할 전망이다. 다만 시장은 연준이 이번에 기준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기대한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 페드워치에 따르면 금리 인하 예상치는 87.4%에 달한다. 실제로 인하된다면 한국도 한숨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금리가 인하되더라도 미국의 인플레이션 우려가 높아지면 언제라도 다시 인상될 가능성이 높아 향후 ‘킹 달러’ 사태는 뉴노멀이 될 가능성이 높다. ■ 서학개미, 국민연금 때문일까? 미국 금리인상 우려가 주도한 이번 환율 상승에는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의 해외 투자 증가도 한몫을 했다는 분석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3분기 ‘일반정부’ 해외주식 투자는 총 245억 1400만 달러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127억 8500만 달러)보다 92% 증가한 수치다. 같은 기간 ‘비금융기업 등’의 해외주식 투자는 95억 6100만 달러에서 166억 2500만 달러로 74% 늘었다. 일반정부는 국민연금으로, 비금융기업 등은 서학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로 각각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다는 설명이다. 이런 통계는 서학개미와 국민연금의 미국 주식 투자로 달러 유출이 증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각에서는 해외 투자 증가로 달러 수요도 급증하면서 환율 상승의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여기에 더해 대미 투자 협상 관련, 기업들의 해외 투자 확대에 따른 달러 매도 물량 감소도 환율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해석이다. 수출 기업의 달러 보유 선호, 원화 가치 하락을 우려하는 일반 개인들의 달러 예금 증가 등도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석에 대한 논란도 이어지고 있다. 달러뿐만 아니라 유로화와 파운드화에 대한 환율도 상승했기 때문이다. 2021년부터 최근까지 약 5년간 유로 환율은 29.1%, 파운드 환율은 31.9% 상승했다. 이 기간 동안 달러 환율은 35.9% 상승했다. 원화 가치 절하 현상이 광범위하게 나타났다는 방증들이다. 즉, 국제 시장이 한국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원화 가치가 계속 떨어진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 치솟는 물가… 서민·기업 직격탄 환율이 급등하면 기업은 물론 서민들까지 직접적인 경제적 타격을 받는다. 물가가 올라가고 기업의 이자 부담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에너지와 원자재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 구조를 감안할 때 환율 상승은 주유소 기름값, 전기료, 생식품 물가 폭등을 부추긴다. 생활비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미 고물가에 신음하는 서민들에게 ‘킹 달러’는 재앙인 셈이다. 해외 여행, 유학, 해외 직구 등에 따른 비용도 더 늘어난다. 더군다나 이미 서민들은 가파른 물가 상승 때문에 지갑을 쉽게 열지 못하고 있다. 자영업자 등은 더 버틸 여력이 없다며 아우성이다. 여행과 유학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이어지고 있다. 가격 경쟁력을 확보한 수출 기업에겐 호기가 될 수 있다고 하지만 ‘킹 달러’로 위안화와 엔화도 상대적인 달러 약세를 보인다면 장기적으론 악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미 소비자물가도 들썩거리고 있다. 소비자물가는 두 달 연속 2%대 중반의 오름세를 나타냈다. 수입 의존도가 높은 석유류와 수입 먹거리를 중심으로 물가 변동성이 커지는 모습이다. 원달러 환율 상승 여파가 가시화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국가데이터처가 지난 2일 발표한 '11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7.20(2020년=100)으로 1년 전보다 2.4% 올랐다. 체감물가에 가까운 생활물가지수는 2.9% 상승했다. 작년 7월(3.0%) 이후 1년 4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품목별로는 환율에 민감한 석유류와 농축수산물 등이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주목됐다. 석유류는 5.9% 뛰면서 올해 2월(6.3%) 이후 9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하고 전체 물가를 0.23%p 끌어올렸다. 특히 경유(10.4%), 휘발유(5.3%) 등에서 상승 폭이 컸다. 농축수산물 물가도 지난달 5.6% 상승했다. 수입 축산·수산물, 수입 과일이 환율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갈치(11.2%), 고등어(13.2%) 등은 수입산 가격이 오르며 10%대 상승세를 보였다. 중장기적으로는 가공식품, 외식 물가도 원재료 가격 상승으로 인해 오를 것으로 우려됐다. ■ 심각한 원화 소외…종합 처방 시급하다 달러 초강세 문제는 시대에 따라 상대적이다. 현재는 원달러 환율 1500원 시대 도래 여부에 모두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후폭풍이 휘몰아치던 2009년엔 1400원 시대 도래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당시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 1400원은 ‘빅 피겨(big figure)’로 불렸다. 보기 드문 상징적 숫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1400원 시대를 넘어 1500원 시대의 언저리까지 와있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 1500원 시대를 걱정하고 있으나 머지않아 1600원 시대를 앞두고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킹 달러’가 뉴노멀이 된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도 ‘킹 달러’ 시대를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상의 ‘킹 달러’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까. 미국 금리 인상과 한국 경제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한 ‘원화 소외 현상’까지 복합적으로 겹친 것이라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원화 가치의 폭락은 ‘셀 코리아(Sell Korea)’를 가속화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달러 표시 자산에 대한 분산 투자, 탄탄한 내수 기반이나 독점적 기술력을 가진 필수 소비재기업에 대한 가치 투자, 불필요한 대출을 줄이고 기존 부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 등을 개인들에게 조언한다. 하지만 현재는 이번 고환율의 정확한 원인 분석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이다. 더욱이 정부는 현재 서학개미 등에 대한 증세 검토 등 고환율 방어 대책을 추진하고 있으나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긴급 처방은 필요하겠지만 성장 잠재력 저하로 외국인 투자 매력이 하락하고, 달러도 빠져나가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거쳐 단기와 장기 대책을 면밀히 수립해야 한다. 더욱이 한국이 처한 현재 상황은 굉장히 복잡하다. 한미 관세 협상 후폭풍, 다자주의의 종식과 국가 이기주의, 세계화 이후 부작용들의 발현, AI 등 미래 산업에 대한 뒤늦은 대응, 아시아태평양지역 지정학적인 리스크 증가, 미국과 중국의 갈등 등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영향을 주고 있다. 국내적으로론 비상계엄 사태로 인한 대외 신인도 추락과 정치 실종, 극단의 국론 분열, 수도권 일극주의로 인한 국토 불균형과 제한적인 확장성, 수도권의 비정상적인 집값과 인구 집중화, 제조업 위주의 산업 구조가 가진 한계, 노란봉투법 등을 둘러싼 기업과 노동계의 상반된 입장과 갈등, 저출산 고령화, 좋은 일자리 부족 등 현안이 산적한 상황이다. 결국 국내외적인 이런 현안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우리 경제의 체력 소진과 성장 잠재력 하락을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다. 이번 환율 위기는 땜질식 처방으로 넘어가기 어려울 전망이다. 당국의 일시적인 달러 매도 등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정부는 환율 방어 대책을 추진하면서 시장 신뢰를 회복하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특히 여야의 극한 대치와 심리적 내전 상태 장기화 등 경제 발목을 잡는 각종 리스크를 빨리 해결해야 한다. 지금 한국 경제는 한 번도 경험치 못한 위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번 기회에 우리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을 종합적으로 진단해 성장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데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특히 개인들은 이번 환율 사태가 과거의 사태보다 훨씬 심각하면서도 복합적 원인에 기인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현재 누구도 이번 사태를 섣불리 전망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변수들이 존재한다. 조급한 판단과 실행보다는 초장기적 관점을 갖고 이번 사태 흐름을 면밀하게 주시하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김승일의 곰곰 생각] 친애하는 정산 씨
산을 대하는 태도에서 한국은 서양과 큰 차이를 보인다. 서양은 만년설로 뒤덮인 험산 준령을 괴물이 출몰하는 곳으로 여겨 두려워했다. 근대 과학이 무지의 공포를 걷어내기 전까지 산 정상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한반도는 국토 70퍼센트가 산지이지만 최고봉 백두산이 3000m를 넘지 않고, 남한에 한정하면 한라산·지리산 모두 2000m를 밑도는 저산 지형이다. 그래서인지 한민족의 서사는 산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한국인의 삶은 산에서 시작해 산으로 끝난다. 생명이 태어나면 산지에 태를 묻으며 장수와 복록을 빌었으며, 죽으면 산소(山所)로 돌아가 대대로 선산(先山)을 이뤘다. 입산(入山)은 산과 일체가 된다는 의미로 쓰여 꼭짓점을 정복하는 행위와 구분할 정도였다. 특히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이 개국을 위해 내려온 곳이 태백산이었고, 이후 역대 왕조도 도읍지를 정할 때 산세를 첫 조건으로 따졌다. 산업화 시대에 근교 산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해방구였다. “주말에 뭐 해?”는 ‘산에 같이 가자’는 압박이다. 회사 상사는 단합을 핑계로 부하 직원들의 휴일을 빼앗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5060 세대의 억지 산행은 이제 옛말이다. 알록달록한 레깅스룩의 젊은 여성들이 동네 뒷산을 누비기 시작하면서 산길에서 세대교체가 일어난 지 오래다. 배낭에 막걸리 한 통씩 챙겼던 아재, 아줌마 세대는 교류와 여흥에 방점을 찍었지만, 2030 세대는 등산을 스포츠의 한 장르로 받아들인다. 요즘은 안내 산행도 스마트폰 앱이 대세다. 올가을 억새 군락을 보러 창녕 화왕산에 가면서 앱을 이용했다. 버스는 승차 지점인 도시철도 서면역과 동래역 등을 경유하는데, 지정 좌석제라 ‘불편한 동석’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떠들썩한 관광버스를 연상하면 오산이다. 취식 불가에 묵언 수행이 연상되는 고요한 분위기는 귀갓길까지 일관됐다. 하산 후 각자의 방식으로 씻고, 일상복으로 바꿔 입고 차량으로 돌아왔고, 상당수는 등산화를 주머니에 넣고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소음·냄새 제로가 철칙. 주 이용객인 젊은 여성과 ‘나 홀로’ 취향이 만들어 낸 등산 문화의 혁신이다. 소싯적부터 산속에 들기를 좋아해서 해외 출장 때면 일정 외 시간을 쪼개 현지 명산을 들르곤 했다. 일본 도쿄에서는 후지산에 올랐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차로 4시간 이상을 달려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바위산을 걷고 말았다. 일본 파견 근무 때 후쿠오카현 숙소 인근의 시오지야마(四王寺山)는 샅샅이 훑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망한 백제 유민들이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축조한 백제식 산성 유적이 중턱에 흩어져 있어 답사하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부산일보〉 산행 지면을 담당했을 때는 매주 명산만 골라 다니는 호사도 누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 집 뒷산이 천 리 밖 명산보다 낫다! 천하의 절경이라도 오르고 싶을 때 바로 입산이 가능한 발밑 가까운 산만 못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금정산 둘레길과 능선은 나의 최애·최다 산행로다. 부산 금정구 쪽 금정산 자락에 터를 잡고 30년 넘게 산 덕분이다. 문밖 산행로 초입에서 1시간 남짓 걸으면 북문과 동문 사이에 올라선다. ‘쇠의 바다’ 김해평야와 광안리·해운대의 아득한 바다를 조망하며 바장이다 보면 충만감이 밀려온다. 후지산보다, 요세미티 기암괴석보다 엎어지면 코 닿을 삼삼한 동네 금정산이 최고다. 미로 같은 둘레길에서 길을 잃고 탈진했던 쓰라린 순간, 새해 해맞이로 심야에 고당봉에 올라 칼바람을 맞으며 떨었던 무모한 도전, 식물원 위 숲에서 볼더링(암벽 타기)을 즐기던 추억…. 금정산은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한 친구다. ‘정산아, 고맙다!’ ‘금’ 자를 떼고 ‘정산’으로 부르는 게 버릇이 됐다. 한데, 이제 격식을 갖춰 ‘정산 씨’라고 부를 일이 생겼다. 올해 금정산은 대한민국 24번째이자 최초의 도심형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시민단체 제안으로부터 20년 만의 쾌거다. 지난해 대구 동구의 팔공산 도학캠핑장과 등산로에서 시설·서비스가 확 달라져 놀랐던 경험이 겹친다. 23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한 팔공산은 예전의 만만한 팔공산이 아니었다. 금정산은 국내 유일의 도심형 명품 공원이다. 관광객 유치를 핑계로 요란한 개발 사업을 펼칠 게 아니라, 체계적인 생태·탐방로·문화재 관리와 보호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등산 문화의 변화, 등산객 세대교체의 의미를 새겨보면 명확해진다. 변해야 할 것은 금정산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금정산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정산 씨’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찾아나가면 된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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