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해수부 부산 시대 개막, 해양 수도 비상 꿈 이루자
해양수산부가 23일 부산 동구 수정동 IM빌딩 청사 본관에서 개청식을 연다. 이로써 해수부 부산 시대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리는 것이다. 해양수산부가 1996년 8월 발족 이후 30년 만에 정부 부처 가운데 처음 부산으로 단독 이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부산시는 2000년 12월 18일 동북아 중심 해양 관문 도시를 지향하며 ‘대한민국 해양 수도’를 선포했는데, 25년 만에 현실이 됐다. 해수부는 2008년 2월 국토해양부와 농림수산식품부로 업무가 분산되면서 해산의 아픔을 겪었지만, 2013년 3월 부활했다. 해양 수도를 향한 여정에서 숱한 우여곡절을 경험했기에 이번 개청식을 보는 부산 시민들은 감개무량할 수밖에 없다. 해양산업계와 시민사회도 ‘해수부 부산 시대’ 개막을 환영했다. 그러면서도 해수부 이전이 실질적인 해양 수도 완성과 글로벌 해양강국 건설의 주춧돌이 되도록 후속 조치를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해수부 부산 이전 등 관련 국정 과제를 진두지휘하던 전재수 전 장관의 갑작스러운 낙마로 컨트롤 타워 공백이 생겼다. 정부는 해양수산 공공기관과 해운기업 본사 부산 유치 로드맵을 후임 장관 임명 전에라도 빠른 시일 내에 공개해야 한다. 후임 장관 임명을 서둘러 해수부 이전의 구심력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9월 이후 공석인 대통령실 해양수산비서관도 조속히 임명해야 한다. 리더십 공백 장기화는 해수부나 지역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해수부 부산 시대 개막은 해양 수도권 구축을 통한 해양강국 건설의 출발이자 국가균형발전 실현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의 기회다. 이를 위해서는 해수부가 명실상부한 해양정책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도록 위상과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해수부 이전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기능 강화 등 핵심 내용이 빠진 ‘반쪽짜리’ 법안이라는 지적이 많다. 해양수산 공공기관과 HMM과 같은 해운기업 이전, 동남권투자공사와 해사법원 설치, 북극항로 거점 구축 등 해양 행정·사법·금융을 포함한 해양산업의 종합적인 집적은 반드시 이뤄내야 할 과제다. 해수부 이전은 지속 가능한 해양 정책의 혁신과 해양산업 생태계를 강화하는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진정한 해양 수도 부산이 되려면 지역 역량과 국가 정책을 유기적으로 연계해 시너지 효과를 내야 한다. 이를 위해 전통 해양산업의 디지털 전환과 해양 신산업 육성 전략,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해양산업 현장과 정책을 연계해 실행 속도를 높일 수 있는 거버넌스 구축이 시급하다. 동남권의 특장점과 북극항로를 연계시키기 위해 해수부 주관 아래 산업부, 국토부, 기재부 등이 범정부 합동 종합 계획 수립에 나서야 한다. 민간 금융과 정책 금융이 협업해 글로벌 해양금융중심지 조성에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 지역, 민간, 정부의 역량을 모으고 극대화해 해양 수도 비상의 꿈을 실현해야 할 것이다.
[사설] 통일교 특검 급물살… 정치적 물타기 변질 안 된다
통일교를 둘러싼 각종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검사 도입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22일 통일교 게이트와 관련해 “여야 정치인 누구도 예외 없이 모두 포함해서 특검을 할 것을 제안한다”고 했다. 그동안 통일교 관련한 야당의 특검 도입 주장에 선을 그었던 것과는 달리 사실상 조건부 수용 의사를 내비친 것이다. 여야 정치인을 모두 수사 대상에 포함하겠다는 방침에 국민의힘과 개혁신당도 환영 입장을 밝혔다. 이에 따라 통일교를 둘러싼 각종 의혹은 제도적 절차를 통해 본격적으로 규명될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번 특검이 정치적 계산을 넘어 공정한 진상 규명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다. 민주당은 전날까지 “통일교 특검에 동의할 만한 명확한 근거가 없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통일교 의혹을 털고 넘어가기를 바라는 지지층의 특검 요구가 커지자 태도를 바꾼 것으로 해석된다. 이재명 대통령의 ‘지위고하 없는 엄정 수사’ 지시와 여론조사 결과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실제 한국갤럽이 최근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통일교 특검 도입에 대한 찬성 여론은 62%에 달했고, 민주당 지지층의 찬성(67%)이 국힘 지지층(60%)보다 높았다. 장기간 이어진 공방이 민주당의 특검 수용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번 결정의 순수성이 의심된다. 민주당이 통일교 특검을 민생법안, 2차 종합 특검과 연계할 가능성을 시사한 것은 순수성 논란을 자초한 꼴이다. 야당이 “특검을 하자면서 또 다른 특검을 얹는 것은 정치적 물타기 아니냐”고 경계하는 이유다. 실제로 특검이 민생 법안 처리와 연계되고, 정국 주도권 싸움의 수단으로 활용된다면 국민 신뢰는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앞서 민중기 특검은 윤영호 전 통일교 세계본부장이 문재인 정부 시절 여당이던 민주당 의원들에게 정치자금을 전달했다고 진술했음에도 민주당 관련 의혹은 수사하지 않고 국민의힘에 대한 정치자금 제공 혐의만 수사했다. 이로 인해 특검 자체가 의혹의 대상이 됐다. 특검이 또다시 새로운 논란을 낳아서는 곤란하다. 통일교 특검의 성패는 공정성에 달려 있다. 무엇보다 구색 갖추기식 수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수사 대상과 범위를 명확히 하고 특검 추천과 임명 과정에서 정치적 편향을 차단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나아가 신속하고 투명한 진상 규명이야말로 이번 특검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이다. 이를 제대로 담보하지 못한다면 결과가 무엇이든 논란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통일교 특검은 여야 모두에게 부담이 될 수 있는 사안이다. 정치권은 ‘특검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특검이 되느냐에 답해야 한다. 특검을 통해 금품 수수 등 통일교를 둘러싼 의혹이 속 시원히 밝혀지길 국민은 바라고 있다.
[사설] 가덕신공항 팽개친 현대건설, 국책사업 나쁜 선례 막아야
가덕신공항 부지조성 공사의 우선협상대상자였다가 공기 연장 불가를 이유로 일방적으로 공사 참여를 포기한 현대건설을 제재할 수 있을지가 다시 관심사로 떠올랐다. 관련 사업 주무부처인 국토부가 현대건설의 부정당업자 제재를 위해 국가계약법 소관 부처인 기재부에 사실관계 판단을 다시 요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부산지역을 비롯해 가덕신공항 조기 개통을 간절히 바라는 동남권은 국책사업을 무책임하게 팽개침으로써 사업을 지연시킨 대기업에는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향후 공사 재입찰 과정에서 같은 사태가 반복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정부의 준엄한 판단이 필요해 보인다. 국토부는 상반기 기재부에 현대건설 부정당업자 제재 가능성 판단을 요청했다가 제재 대상 지정 불가 판단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법제처가 해당 판단은 사실관계를 따져 결정해야 한다는 취지의 해석을 별도로 내놓자 국토부는 최근 새로운 사실관계를 첨부해 기재부에 제재 가능성 판단 재요청을 했다. 국토부가 새롭게 첨부한 사실은 현대건설이 활주로 부지의 지반 시추 조사조차 실시하지 않는 등 사업 불참 근거가 부족하다는 내용이다. 이 같은 새로운 사실관계가 현대건설의 사업 불참 결정 근거 부족으로 인정되면 현대건설을 부정당업자로 지정해 공공 입찰 제한 등의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현대건설은 지난해 10월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 공사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으나 이후 갑자기 공기를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현대건설은 공기를 국토부와 당초 합의한 84개월이 아니라 108개월로 늘려야 한다고 버티다 5월 사업 불참을 선언했다. 이후 가덕신공항 사업은 아직까지도 후속 시공자가 선정되지 못 하는 등 공항 개통 시기가 당초보다 6년 늦어질 위기에 처했다. 그러는 사이 김해공항은 올해 국제선 이용객만 1000만 명을 돌파했을 정도로 시설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곽규택 의원실 자료에 따르면 최근 김해공항의 인프라는 수하물 수취 시간, 주차 시설 등에서 전국 최하위권으로 처졌다. 현대건설이 무책임하게 사업 불참 선언을 한 여파는 동남권에 가덕신공항 부지 조성 공사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겼다. 재입찰이 추진되고 있으나 공기를 놓고도 여전히 새 우선협상대상자의 신의성실에만 기댈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어 트라우마는 더욱 크다. 국책사업 시공자가 기본설계 과정에서 해상 지반 시추 같은 기본적인 조사조차 하지 않고 입찰 조건을 내팽개치는 행위를 방치한다면 향후 재입찰에도 나쁜 선례를 남길 가능성이 높다. 가덕신공항은 지역 균형발전의 핵심 인프라다. 조기 개항 꿈이 흔들리도록 한 책임조차 엄히 물을 수 없다면 정부의 지역 균형발전 구호는 사탕발림이 되고 말 것이다.
결국 문제는 '전기'
미국 샌프란스시코가 성탄절을 앞두고 대혼란에 빠졌다. 변전소 화재에 따른 대규모 정전이 원인이 됐다.하지만 정작 도시의 핵심 기능인 도로를 마비시킨 건 구글이 운영하는 무인택시 ‘웨이모’였다.정전 때문에 식당과 상점의 조명이 꺼지자 시민들은 귀가를 위해 차분하게 도로로 나섰고, 작동이 멈춘 신호등 앞에서도 질서있게 차례를 기다렸다.그런데 웨이모가 길 한복판에서 비상등을 켜고 그대로 멈춰 서기 시작했다. 신호등과 같이 지켜야할 교통 규칙이 없어지고,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통신 신호가 약해지면서 운행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샌프란시스코에서 운행되는 웨이모는 현재 300여대로 알려졌다. 수백 대도 안되는 웨이모이지만 먹통이 된 신호등 때문에 밤새 갈팡질팡하고, 도로 가운데 멈춰서자 일반 자동차와 행인들도 큰 불편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웨이모는 정밀한 도시 지도를 미리 익혀서 움직이며 레이더·카메라 등 센서로 신호등과 행인 등 실시간 상황을 인지한다. 하지만 신호를 읽을 수 없게 된 웨이모는 미리 설계된 프로그램대로 안전 운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스스로 멈춰버린 것이다.사람이 운전하는 자동차는 정전이나 고장으로 신호등이 작동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차량의 흐름을 읽으면서 대응할 수 있지만 ‘더 똑똑한’ 웨이모는 그런 임기응변이 안 된 것이다.이런 상황에 벌어지자 웨이모와 경쟁 중인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는 “테슬라 로보(무인)택시는 샌프란시스코 정전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깐족댔다. 테슬라는 운전석에 안전 요원이 탑승한 상태로 ‘감독형 자율주행’(FSD) 소프트웨어를 활용해 운영된다.결국 자율주행차가 정교한 센서와 카메라를 갖췄다하더라도 도시 전력망이라는 인프라가 무너질 경우 아무리 최첨단 시스템이라도 완전히 무력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샌프란시스코 정전 사태가 보여준 것이다.인공지능(AI)이나 자율주행 기술 자체는 고도화되지만 도시 인프라가 뒷받침하지 못하면서 발생하는 예외적인 상황이 도시 전체를 더 큰 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우리 정부도 대통령 직속으로 AI 정책 총괄 컨트롤타워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를 만들어 AI를 대대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기초 인프라인 ‘전기’의 안정적인 수급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다면 엄청난 혼란에 맞닥뜨릴수 있다.
논설주간/이사
강윤경
논설위원/대기자
강병균
논설위원
김승일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천영철의 사리 분별] 기억이 단절될 때 지역은 소멸한다
요즘 농촌을 찾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마을에서 주민을 만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다. 날이 찬 겨울철엔 더욱 그렇다. 외지로 떠난 젊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고, 노인들만 농촌에 거주하다 보니 인구는 계속 줄어든다. 마을 노인들의 상당수도 외지 요양기관이나 병원으로 떠나가면서 ‘유령 마을’을 방불케 한다. 앞집도 빈집이고 옆집도 빈집이다. 대문에 체인 열쇠를 감아 밖에서 잠근 집이나 잡초만 무성한 휴경 농지가 부지기수다. 식당, 미장원 등도 모두 문을 닫았다. 이것은 인구 유출과 출산율 감소로 빠르게 소멸 중인 상당수 농촌의 일상적인 풍경이다. 올 11월 기준으로 전국 229개 기초자치단체 중 소멸 위험에 처한 지역은 60.2%인 138곳에 달한다. 그중 소멸 고위험 지역은 66곳에 이른다. 경남에서도 전체 16개 시군 가운데 합천군, 산청군, 의령군, 창녕군 등 11곳이 고위험 지역으로 분류됐다. 이런 통계는 사실상 농촌의 대부분이 소멸 위기에 직면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정부는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5극(초광역) 3특(특별자치도) 정책’으로 수도권 집중과 지역 소멸의 악순환을 끊겠다고 한다. 그러나 500대 기업 77%가 수도권에 있고, 지난해 신규 벤처 투자 68.5%도 수도권에 집중되는 등 수도권 일극주의는 여전히 기세등등한 상황이다. 반면 소멸 위험 지역은 해마다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더군다나 지역 균형발전 정책이 추진되더라도 농촌 지역의 소멸 위험을 해소하려면 사실상 오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유럽 등의 상황을 보더라도 우리의 지역 소멸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영토의 사막화’ 또는 ‘변방화’를 극복하려면 긴 호흡의 장기적인 정책이 필요했다. 결국 현재 우리는 정책적 단기 처방이 지역 소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가능성이 무척 높은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있다. 여기서 시간이 더 흐른다면 소멸 고위험 지역 내에서도 변방에 위치한 읍면동부터, 그중에서도 외곽 마을부터 본격적인 소멸 물결에 휩쓸릴 것으로 우려된다. 일본처럼 도로 등 공공 인프라 관리 효율화를 위해 소멸 중인 마을들의 주민들을 특정 지역에 집단 이주시켜 거주토록 하는 극단적인 방안이 머지않아 현실화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떤 지역이 최종적으로 소멸했다고 판단하는 기준과 절차는 무엇일까. 집계된 인구 통계와 이에 기초한 정부 심사와 고시 등일 것이다. 하지만 행정적인 절차에 앞서 해당 지역에 깃든 사람들의 삶과 그들이 소중히 지켜온 것 등에 대한 전승이 끊어질 때, 즉 지역에 대한 기억이 단절될 때 해당 지역은 사실상 소멸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소멸 위험 지역의 역사와 문화, 스토리를 발굴해 기록하고 보전하는 작업은 무척 소중하고 큰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소멸 위험 지역 주민들은 고령화로 점점 줄어들고 있다. 유입 인구가 없다 보니 노인들은 자신과 마을의 이야기를 후인들에게 전승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소멸 고위험 지역인 합천군 적중면이 ‘산안 열여섯 마을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적중면지’를 내놨다. 딱딱한 역사 기록을 나열하는 기존의 행정기관 백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출판물이라서 관심을 모은다. 주민과 출향인들이 편찬위원회를 결성해 적중면 16개 마을 노인들의 기억에 근거한 생활사 채록, 주민들이 보관하던 사진 자료, 마을의 변화 과정, 인물 데이터 베이스, 문화유산과 생활사 등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과 역사적 가치를 집약했다. 책정된 행정 예산과 별도로 자발적 모금을 통해 당초 계획보다 훨씬 방대한 664쪽 분량으로 2000권을 제작해 전국에 배포했다. 책에 인쇄된 QR코드를 통해 드론 등으로 촬영한 다양한 동영상 자료까지 제공한다. 이런 점에서 ‘적중면지’는 단순한 출판물이 아니라 적중면 사람과 역사, 문화에 대한 기억을 미래로 전승하려는 주민들의 강한 의지를 담은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다. 적중의 과거를 현재와 연결하는 것은 물론 언젠가 이곳에 깃들 미래 세대들이 지역에 대한 자긍심을 갖기를 바라는 염원의 표출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는 지역을 살릴 마지막 골든타임을 지나고 있다. 절박함에 답할 대책은 지지부진한 반면 소멸 속도는 예상보다 너무나 빠르다. 주민 참여형으로 편찬된 ‘적중면지’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지역을 기억하는 주민들이 사라지기 전에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와 문화를 기록하고 보전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관련 조례 제정과 국가 차원의 적극적인 정책 추진이 시급하다. 마을에 깃든 이야기와 역사를 기억하고 미래 세대에 전승시켜야만 지역이 잊히고 안타깝게 소멸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기를 소망한다.
[송성수의 과기세] 100년 만에 다시 만나는 슈뢰딩거
100년 전의 과학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때는 1925년 12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슈뢰딩거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여친과 함께 스위스 아로사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났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방정식의 골격을 세웠다. 약간의 보완을 거친 후 1926년 1월에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발표했다. 그 방정식은 양자역학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물리학 교과서에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물리학에서 아름다운 방정식 4개를 뽑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F=ma와 E=mc2가 생각날 것이다. F=ma는 뉴턴의 운동방정식이고, E=mc2는 아인슈타인이 만든 질량-에너지 등가원리이다. 나머지 2개로는 맥스웰 방정식과 슈뢰딩거 방정식이 꼽힌다. 맥스웰 방정식은 전자기학을 집대성한 것이고, 슈뢰딩거 방정식은 양자역학을 파동함수로 묘사한 식이다. 맥스웰 방정식과 슈뢰딩거 방정식은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많은 물리학자들은 두 방정식에서 자연현상의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한다. 슈뢰딩거와는 별도로 1925년 7월에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을 이용하여 전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1926년 5월에는 슈뢰딩거가 자신의 파동역학과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이 실질적으로 동등하다는 점을 증명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행렬역학보다는 파동역학을 선호했다. 행렬보다 미분방정식이 간단하고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역학은 ‘양자역학’이란 이름으로 결합되었는데, 그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는 막스 보른이 꼽힌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어 얻게 되는 파동함수의 물리적 의미에 관한 것이었다. 1926년 12월에 보른이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파동함수가 고유한 상태함수이긴 하지만 물리적 의미를 가진 것은 파동함수의 제곱 값이고 그 값이 단지 확률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의 파동은 물질을 실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확률의 파동’이라는 것이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도 보른의 주장에 동조했고, 양자역학에 대한 확률적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렸다. 코펜하겐은 보어의 이론물리학연구소가 있던 곳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슈뢰딩거가 코펜하겐 해석에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35년에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불리는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그 실험은 1시간 뒤에 방사성 원자가 붕괴하면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생존하는 상황에 주목한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고양이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아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어있는 상태가 된다. 슈뢰딩거는 이것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고 일갈하며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와 유사하게 아인슈타인은 “당신이 달을 보기 전에는 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말을 남겼다. 만년의 슈뢰딩거는 물리학보다 생물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3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생물학에 대한 대중 강연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할 생각이었지만 준비 도중에 강연 내용이 계속 불어났다. 결국 슈뢰딩거는 세 번에 걸쳐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실시했으며, 이를 보완하여 1944년에 책으로 출판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물리학자가 바라본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다. 슈뢰딩거에게 생명현상을 관장하는 것은 유전자였으며, 유전자의 본성은 다름 아닌 정보였다. 이제 생물학자들의 임무는 유전자에 저장된 정보를 해독하는 것이 되었다. 슈뢰딩거는 전신의 모스 부호를 예로 들면서 조그마한 유전자에 수많은 정보가 담길 수 있다고 설파했다. 분자생물학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던 과학자들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많은 영감을 얻었다. 윌킨스는 이 책을 접한 후 자신의 전공을 핵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바꾸었고, 왓슨도 대학 3학년 때 책을 읽은 뒤에 유전자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처럼 슈뢰딩거는 단순한 물리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물리학에 뿌리를 두면서도 철학과 생물학으로 나아갔다. 현대물리학의 최전선을 달리는 가운데 양자역학의 철학적 의미를 캐묻고 생명현상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경향은 슈뢰딩거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현대물리학의 창시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그들은 나치가 집권하기 전까지 역동적인 학문공동체를 이루며 치열하게 탐구하고 토론했다. 학문이 세분화되어 있는 오늘날에도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와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새롭고 중요한 것들이 생겨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데스크 칼럼] 통일교는 어떻게 대권을 꿈꾸게 됐나
한일해저터널이 특정 종교세력을 배후에 둔 뭔가 음습한 사업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두 나라를 바다 밑 터널로 연결해 물류를 일으키고, 동북아 대표 경제권을 만든다? 일견 그럴 듯하고, 실제 부산의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이 ‘진짜 해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 한 번쯤 했을 것 같다. 이 구상을 이끌어가는 한일해저터널 연구회만 봐도 부산의 오피니언 리더라고 할 만한 인사들이 다수 포함돼있다. 느닷없는 ‘금품 로비’ 의혹이 터지기 전까지 한일해저터널은 멀쩡한 외양을 갖춘 지역의 오랜 비전 중 하나였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부산에서 한일해저터널 논쟁이 어떻게 전개돼왔는지 살펴봤는데, 내가 아는 건 빙산의 일각임을 깨달았다. 문선명 총재가 1981년 전 세계를 연결하는 ‘국제 평화 고속도로’ 구상을 발표하고, 그 출발점을 한일해저터널로 설정한 이후 통일교 신도들은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속적이고, 집요하게 현실화에 주력해왔다. 영불해저터널을 모델로 100년이 걸릴 각오로 끈덕지게 이 일을 해왔다고 한다. 종교적 신념이 아니라면 상상하기 힘든 헌신성이다. 통일교는 그 동안 각종 포럼, 이벤트를 만들어 전문가들을 포섭하고, 여야 정치인들을 한일해저터널의 우군으로 끌어들였다. ‘평화 도로’, ‘피스로드’ 등을 키워드로 연결된 이 네트워크에는 전직 장·차관, 대사, 교수 등 화려한 인맥이 포진해있다. 정치인들에겐 표를 언급하고, 금전적 후원을 얘기했을 것이다. 정치인들이 이 문제를 다루는 뒷배경에는 항상 통일교의 그림자가 자리했다 초기에만 해도 반일 정서와 맞물려 일본의 대륙 진출 길을 터준다는 반대 논리가 우세했던 한일해저터널은 2010년대 중반부터 부산시장 공약으로 추진되는 데까지 위상이 커졌다. 정당이 하나의 정책을 두고 이 정도로 노력을 했다면 못 이룰 게 없었을 것 같다. 흥미로운 지점은 한일해저터널의 ‘스피커’들이 1년 전부터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공약인 북극항로 개척을 피스로드와 연계한 새 비전으로 적극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궤도에 오른 한일해저터널의 성과에 고무된 것일까? 통일교는 얼마 전부터 이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우리 목표는 청와대에 보좌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두 번째 목표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우리에게) 국회의원 공천권을 줘야 한다”, “국회의원 공천, 청와대 진출 등 기반을 다져가면 2027년 대권에도 도전할 수 있지 않겠나”. 4년 전 통일교 간부들이 나눈 대화라고 한다. 지금 보니 마냥 허무맹랑한 소리로 치부할 수도 없겠다. 한일해저터널에 보인 집요함, 성실함이 이어졌다면 지금쯤 권력 핵심부에 통일교 인맥 몇 명은 거뜬히 진입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을 ‘독생녀’라고 주장하는 교주 1인을 신적 존재로 여기는 비정상적인 종교 세력이 권력의 정점에서 국가 정책을 흔들 수 있다면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다. 근래 들어 종교가 헌법에도 적시된 정교 분리라는 오랜 원칙을 깨고 현실 정치에 개입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12·3 비상계엄과 탄핵 즈음에는 가히 ‘발호’(跋扈)라고 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의 극단화하는 진영 대립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한다. 정치를 넘보는 이들 종교 세력 중에는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유사 기독교 종파가 두드러진다. 문제는 전광훈 류의 사이비 종파를 넘어 차별금지법 등을 매개로 일부지만 소위 정통파 기독교단까지 ‘탄핵 반대’ 대열에 뛰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1948년 ‘제정 헌법’부터 이어진 정교 분리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퇴행이다. 이런 종교의 퇴행은 정치의 타락이 길을 열어준 측면이 있다. 결집된 소수 강경 지지층이 당내 언로를 장악하고, 반대파에는 문자 폭탄과 댓글로 집단린치를 가해 이견의 싹을 잘라버린다. 민주 정당을 표방하지만, 그 배타성이 일부 종교 집단의 행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특히 당원이 주인이라는 논리로 매달 1000원 내는 당원들을 누가 많이 모집하느냐에 당내 권력의 향배가 갈린다. 막강한 인적, 물적 동원력을 가진 사이비 종교가 합법적인 루트로 정당을 장악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진 셈이다. 내부 권력 전쟁에 매몰돼 극단 세력과의 결탁도 마다 않는 정당의 비틀린 자화상이 이번 통일교 사태를 통해 또 한 번 여실히 드러났다. 통일교 사태는 우리 대의 민주주의 체제의 또 다른 위기 신호다. 자정 기능을 상실한 정치와 순수성을 잃은 종교가 기묘하게 결합하면서 우리 사회를 더 극단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상대를 인정하고,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의 본령을 추구하는 여야 정당 내 상식적인 사람들의 각성과 분발이 더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노트북 단상] 되풀이되는 비극, 시스템 개선 없인 답이 없다
병원의 수용 거절로 여러 병원을 떠도는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응급환자를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할 수 없도록 하는 이른바 ‘동희법’이 시행에 들어간 지 3년이 지났지만 현장은 제자리다. 부지불식간에 나 또는 가족, 지인의 일이 될 수 있는 이 같은 비극은 되레 늘어나는 실정이다. 소방청 자료에 따르면 119 구급대 재이송 건수는 2023년 4227건에서 지난해 5657건으로 1430건이나 증가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의료 현장에선 병원과 의료진에 지워진 민·형사 책임을 응급실 뺑뺑이의 주된 원인으로 꼽는다. 응급실 당직을 맡았던 외과 교수가 해당 진료과 전문의가 아니라는 이유로 소송을 당하고 병원과 함께 배상 책임을 져야 했던 2023년 판결 이후 의사들이 움츠러들게 됐다는 것이다. 배후진료 붕괴도 주된 원인 중 하나다. 응급실 내원 환자에게 여러 진료과의 전문적인 치료가 뒷받침돼야 하는데 의정갈등 이후 배후진료 붕괴가 가속화했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논쟁도 더해졌다. 최근 119 구급대에 이송 병원 지정 권한을 주자는 응급의료법 개정안을 두고 의료계가 2012년 1339 응급의료정보센터가 119로 흡수 통합된 것이 문제의 시발점이라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1339는 공중보건의가 응급환자를 경증·중증으로 분류하고 입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이송할 병원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는데, 1339를 통해 경증으로 분류됐던 환자들이 응급실로 향하면서 119는 환자 수송 업무가 늘고, 응급실은 경증 환자까지 도맡게 돼 과밀화됐다는 지적이다. 해결 방법은 없을까. 유사한 비극을 겪은 일본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은 ‘도쿄 룰’이라는 대응 시스템을 구축해 지자체와 지역 소방, 지역 병원이 긴밀하게 협력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지자체의 경제적 지원과 보험수가 인상을 통해 3차 기관들이 응급실 운영에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했다. 영국 국가의료서비스(NHS)의 대대적인 시스템 개편도 참고할 만하다. 병상 확충과 전담기금 투입은 물론 모든 주요 응급실에 컨설턴트와 간호사를 배치해 입원 없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다. 비교적 덜 위급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2시간 내에 가정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긴급 지역 대응팀을 꾸려 구급차 수요를 분산시킨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처럼 다단계 안전망을 구축하는 동시에 상급종합병원은 중증 응급환자에 집중하고, 경증 환자는 지역 내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의료 전달체계 재편이 시급하다. 중복 등을 이유로 119에 통합된 1339를 되살리기 어렵다면 119구급대와 구급상황센터의 의료 전문성을 대폭 보완·강화해야 한다. 배후진료 체계 정상화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전공의 복귀와 함께 응급 상황에서의 협진 체계를 명확히 하고, 이에 대한 적절한 보상체계를 마련할 필요성이 있다. 골든타임을 놓쳐 스러지는 생명들 앞에서 정치적 공방과 책임 떠넘기기는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의학적 판단 능력을 갖춘 조정 시스템 재구축에 집중하는 것이다. 일본의 도쿄 룰도, 영국의 NHS 개혁도 결국 전문성과 협력에 기반한 ‘시스템 개선’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해결 의지와 실행이 중요하다. 응급실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의료진들이 제대로 된 시스템 아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협력하고 움직이는 것, 이에 시민들이 공감하고 의지하는 것. 그것이 국가의 책임이자 우리 모두의 과제다.
[중앙로365] 다시 도약하는 내 고향 부산!
최근 동구 수정동의 거리를 걷다 보면 사뭇 달라진 분위기를 느낀다. 멈춰 있던 골목마다 활기가 돌고 있고, 점심시간 식당가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생동감이 넘친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은 단순한 행정기관 이동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수정동을 비롯한 원도심 상권의 부활이자, 부산이라는 도시가 다시금 엔진을 가동하기 시작했다는 상징적인 신호탄이다. 이런 풍경은 자연스레 나의 기억 속 부산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부산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냈고, 이 도시에서 꿈을 이루고, 터전을 잡았다. 지금은 광안리와 해운대가 세계적인 번화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내 기억 속에 각인된 부산의 원형은 조금 더 투박하고 생동감 넘치는 공간들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거닐던 국제시장과 자갈치의 비릿한 바다 내음,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누볐던 대학가 일대, 그리고 부산의 심장이자 청춘의 집결지였던 서면일번가의 북적임까지. 어느 곳 하나 심심하지 않았고, 골목마다 다른 맛과 멋이 가득했던 부산은 그 자체로 거대한 놀이터이자 배움의 터전이었다. 그렇게 생기 넘쳤던 도시는 '서울 공화국'의 그림자에 점점 가려졌고, 지역 대학들이 위기를 겪는 사이 인재들은 불안감 속에 수도권으로 떠났다. 지역 경제발전은 멈춰 섰고, '노인과 바다'라고 자조하는 표현까지 나올 만큼 남겨진 세대에게는 상실감이 자리했다. 부산을 고향으로 둔 사람으로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은 작지만 모든 것이 담겨 있는 도시다. 바다와 강, 산과 평야가 이어지는 지형, 항만과 시장, 문화 시설과 상권이 공존하는 구조, 산업과 관광이 연결되는 도시 특성은 세계에서도 흔치 않다. 이 다양성은 부산의 매력이며, 앞으로 우리가 활용해야 할 전략적 자산이기도 하다. 흔히들 부산의 미래를 고민할 때 지중해의 보석이라 불리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떠올린다. 여행에서 마주했던 바르셀로나는 부산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있었다. 거대한 항구를 품고 있으며, 해변과 인접한 도시 구조, 그리고 독자적인 지역 문화에 대한 강한 자부심까지 판박이다. 과거 쇠퇴하던 공업 도시였던 바르셀로나는 올림픽을 기점으로 해안가를 시민들에게 돌려주는 과감한 도시 재생을 단행했고, 현재는 세계적인 관광지이자 유럽의 혁신 스타트업 허브로 거듭났다. 바르셀로나의 성공은 단순한 정비사업이 아니라 문화와 기술의 결합이었다. 현재 부산이 마주한 현안들도 이와 궤를 같이한다. 수정동에서 시작된 원도심의 활기는 북항 재개발 2단계 사업으로 이어져 항만 시설을 시민들의 공간과 미래 산업 단지로 탈바꿈시켜야 한다. 여기에 가덕신공항은 부산을 세계적인 물류 허브로 이끌어줄 강력한 날개가 될 것이다. 바르셀로나가 그러했듯, 우리도 해안가라는 천혜 자원을 경제적 동력으로 전환하는 과감한 실행력이 필요하다. 진정한 도약을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과 인재 양성 또한 필수적이다. 현재 논의 중인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은 부산을 규제 없는 글로벌 비즈니스 거점으로 만들기 위한 법적 토대다. 특별법이 통과되어 전 세계의 자본과 인재가 부산으로 모여드는 기분좋은 상상을 해본다. 또한, 지역 대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RISE 사업과 글로컬 대학 프로젝트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인재들의 발걸음을 돌릴 유일한 길이다. 지자체와 대학, 기업이 하나가 되어 청년들이 부산에서 꿈을 설계할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하여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수도권 중심 체제에서 포기해버리고 체념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2026년은 부산에 있어 역사적 분기점이 되어야 한다. 정계는 당파를 초월해 가덕신공항과 특별법이 정치적 논리에 휘말리지 않도록 단단한 입법적 방어막이 되어주어야 한다. 경제계는 혁신적 기업가 정신으로 신산업을 육성하고, 청년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최근 SK해운과 에이치라인해운 같은 해운 대기업의 본사 부산 이전 결정은 명실상부한 해양수도 미래 부산의 위상을 보여준 것이다. 변화에 발맞춰 법조계의 역할 또한 막중하다. 해운 기업의 이전이 실질적인 지역 발전으로 이어지려면 전문적인 법률 서비스 지원이 필수적이다. 이에 '해사법원'의 부산 설치는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무엇보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가짐 또한 중요하다. 우리가 먼저 부산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부산은 이미 세계적인 대도시들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잠재력을 가진 도시다. 수정동에서 시작된 작은 활기가 북항을 넘어 가덕도로, 그리고 부산 전역으로 퍼져나가 2026년이 우리 모두에게 도약의 한 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부산은 여전히 뜨겁고, 우리의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우리의 고향 부산은 앞으로는 세계를 향한 도시가 되리라 믿는다.
[편집국에서] 어서오세요, 해양수산부
내일이다. 해양수산부가 23일 개청식을 열고 ‘부산 시대’를 시작한다. 해수부는 1876년 부산항이 열린 지 150주년이자, 개청 30주년인 2026년의 첫 태양을 부산에서 맞이한다. 해수부 부산청사 개청을 앞둔 지난 주말 저녁, 부산 동구 산복도로의 야경에 발걸음을 멈췄다. 산복도로에서는 해양수산부 부산청사의 간판이 환하게 켜진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해수부 청사 옆으로는 부산 북항과 부산역, 부산항대교가 펼쳐졌다. 이어 부산을 지켜온 부산 앞바다가, 그리고 하늘의 별빛이 땅에 내려온 듯한 산복도로 주택가의 불빛이 켜져 있었다. 산복도로는 150년 전 부산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파노라마로 보여주는 듯 했다. 부산은 지난 2일 ‘대한민국 해양수도’가 됐다. 부산 해양수도 이전기관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국무회의에서 통과됐다. 1876년 개항 이후 대한민국을 세계로 잇는 관문이 된 부산이 149년 만에 해양수도로서의 지위를 얻은 순간이었다. 해수부 이전은 부산에 긍정적인 파동을 일으키고 있다. 800명이 넘는 해수부 직원들이 부산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청사 인근 상권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다. 임대 팻말이 나부끼던 상가에는 한곳 한곳 불이 켜지고 있다. 청사 인근 한 단골식당 주인은 “계절은 겨울인데, 마음은 봄이다”며 “해수부 손님들에게 뜨끈하고 맛있는 밥으로 대접할 것”이라고 미소 지었다. 해수부 부산 이전이 일으킨 파동은 더 커져야 한다. 해수부 부산 이전은 수도권에 집중된 해양·수산·해운물류 산업의 중추를 ‘현장’으로 옮기는 구조적 전환의 출발점이다. 다양한 분야의 현장 목소리가 해수부의 정책에 더욱 빠르고 정확하게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 것이다. 정책과 현장은 결합돼야 시너지가 발생한다. 이미 세계 주요 해양 강국들은 정책 결정과 현장이 결합된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들 국가의 체제는 우연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얻은 결과물이다. 덴마크는 수도인 코펜하겐을 중심으로 ‘블루 덴마크’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덴마크는 해운, 항만, 조선, 해양 기자재, 해양 금융 등 모든 해양 산업군을 묶어 국가 전략 산업으로 지정했다. 코펜하겐에는 해양 정책을 총괄하는 산업부와 세계 최대 해운 선사인 머스크의 본사가 한 곳에 있다. 해운 분야 금융 기관도 함께 한다. 프랑스도 다르지 않다. 프랑스 마르세유는 지중해의 관문 항만으로, 프랑스 대표 해운사의 본사가 있다. 프랑스 정부는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정책과 금융 지원을 집중하고 있다. 독일 함부르크 역시 항만, 해운사, 해운 금융, 해사 서비스를 한데 모아 도시의 역할을 키워가고 있다. 이들 도시의 항만은 단순한 하역 공간이 아니라 산업과 도시를 움직이는 엔진으로 자리매김했다. 대한민국 부산은 이들 나라를 뛰어넘은 항구 도시다. 부산항은 이미 환적화물 처리량 세계 2위, 컨테이너 처리량 세계 7위, 항만 경쟁력 순위 4위로 성장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형 해운사의 본사와 공공기관, 선박 금융기관은 서울과 세종에 있다. 해수부가 부산으로 오고 일부 해운사가 부산으로 본사를 옮겼지만, 여전히 주요 해운 기능은 서울이 중심이다. 해수부가 부산에 온 만큼 부산은 이제 ‘정책 실행 도시’에서 ‘정책 설계 도시’로서의 진화해야 한다. 해수부의 해운·항만·물류·수산 정책이 여러 공공기관, 해양금융 기관·기업에 의해 직접 집행되는 체제를 부산에 정착시켜야 한다. 부산이 진정한 해양수도로서의 기능을 갖추려면, ‘모든 해운 관련 의사결정은 부산에서 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덴마크의 ‘블루 덴마크’를 뛰어넘는 ‘블루 부산’ 프로젝트가 추진돼야 한다. ‘블루 부산’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내 1위 해운기업인 HMM을 비롯한 대형 업체들의 부산 이전이 필요하다. 국내 1위부터 10위 해운기업 중 부산에 본사를 둔 업체는 단 두 곳뿐이다. 해운사의 이전은 선박금융, 해상보험, 해사법률 등 수많은 산업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해운 강국인 덴마크와 싱가포르 등은 모두 해운사의 집적화에 성공했다. 대형 해운사들의 부산 이전은 곧 해양 전문 인재 양성의 근간이 된다. 부산은 부산대, 국립부경대, 국립한국해양대 등 인재 양성을 위한 좋은 터전을 갖추고 있다. 지역 인재들이 해운사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얻고, 이들이 부산의 해양 비즈니스를 키우는 선순환이 필요하다. 해양금융도 ‘블루 부산’에 날개를 달아줄 분야다. 매년 글로벌 선박 금융 거래액이 수백조 원에 이른다. 해양금융은 세계 금융중심지를 노리는 부산이 도전해야 할 미래 먹거리다. 10년 뒤, 부산 산복도로에서 바라본 부산항의 모습은 어떨지 상상한다. 부산항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길 기대한다. 김한수 편집부장 hangang@busan.com
李 “부산 동북아 해양도시 도약, 모든 지원 하겠다”
예탁원 ‘금 보관시설’, 진통 끝에 부산 확정
내란재판부 설치법 본회의 통과… 정통망법 개정안도 곧바로 상정
신공항·동남권투자공사·해사법원… 李, 부산 현안에 ‘올인’
해양수도 핵심은 ‘북극항로’… 육성 전략, 내년 상반기 마련 [해수부 부산 시대]
“후임 장관은 부산 인재 중에서” 대통령 언급에 하마평 무성
"더 이상 묵과 안 돼" 현대건설 부정당업자 지정 촉구 한목소리 [가덕신공항 본격 추진]
부산시 ‘2차 공공기관 이전’ TF 출범… 해양·금융 분야 ‘총력’
에코델타시티 3단계 사업 부지, 토양오염 정화 마무리
크루즈 관광객 90만 명 몰려도, 전담 인력 9명뿐인 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