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지선 최대 격전지 부울경, 지역 이슈 제대로 맞붙어라
지방선거가 100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지방선거는 2024년 12월 비상계엄 선포 여파로 치러진 지난해 대통령 선거로 정권이 바뀐 이후 치러지는 첫 선거다. 정권을 잡은 더불어민주당으로서는 더욱 탄탄한 국민의 지지를 업고 정책 추진에 탄력을 붙이려 할 것이다. 반면 정권교체 이후 절치부심하고 있는 국민의힘으로서는 납득할만한 결과를 얻어 야권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을 계기를 찾으려 할 터이다. 이 같은 이해득실 속에서 부울경은 이번 선거에서 최대 격전지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 혹은 바람을 타고 때론 쏠림 저지 심리를 따라 여와 야가 한 번씩 압도적 우위를 경험한 바가 있어서다. 2018년 지방선거에서 부울경은 광역 단체장을 민주당이 싹쓸이한 바 있다. 문재인 전 대통령 당선 이후 남북 관계 개선 등으로 전국적으로 민주당 바람이 불면서 벌어진 결과였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는 전국적인 정권 심판론 속에서도 부울경은 특정 정당 쏠림 현상 견제심리로 보수가 결집하면서 국힘 광역 단체장을 뽑았다. 두 번의 지방선거 모두 부울경의 성적표가 곧바로 여와 야의 성적표로 직결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나 이번 선거에서 부산은 현역 박형준 시장과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한 전재수 의원이 여론조사 결과 후보 지지율과 정당 지지율 등에서 격돌을 예고하며 전국적 관심을 받고 있을 정도다. 이번 선거는 기존 선거와는 달리 최대 격전지 부울경의 성적표에 따라 여야 4당 지도부의 정치적 명운까지 걸려 있어 더욱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하다. 부울경에 퍼붓고 있는 정책 집행 공세에서 보듯 여권은 일찌감치 승부수를 던져 왔다.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을 필두로 한 부산에 대한 여권의 애정공세는 필사적이다. 그에 비해 이번 선거에서 부울경을 수성해야 할 입장인 국힘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절연 문제로 내홍이 커지면서 갈피를 못잡는 모양새다. 혹여 직전 지방선거처럼 막판 보수층의 결집과 특정 정당 쏠림 견제심리가 발동하기만을 기다린다면 곤란하다. 지방선거 자체의 성격이 확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번 지방선거는 어느 때보다 지역 관련 이슈가 부각되는 선거다. 속도전 논쟁까지 불거진 광역 행정통합 추진이 그렇고 해양수산부 이전 등 분권과 맞물린 지역균형발전 이슈가 그렇다. 여야 모두 지역 관련 이슈에 대안을 내놓으며 누가 더 지역을 살릴 수 있는 적임자인지를 놓고 경쟁을 벌이지 않고서는 유권자의 표를 얻기 힘들어졌다. 지방선거 전체의 성적표를 좌우한다고 할 수 있는 최대 격전지 부울경은 수도권 일극 체제를 견제할 다극 체제의 성패를 좌우할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에서야말로 지방선거의 최대 이슈들을 둘러싼 경쟁이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지방선거의 의의를 어디서 찾겠는가.
[사설] 트럼프발 관세전쟁 2라운드 국익 위한 신중한 대응 필요
미국 대법원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부과가 위법하다고 판결했다. 세계 무역질서에 큰 충격을 준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정책을 무효화한 것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판결 직후 15%의 ‘글로벌 관세’를 새롭게 부과하면서 지구촌은 다시 격랑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추가 행정명령 등 대체 가능한 수단을 총동원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트럼프발 관세전쟁 2라운드가 시작된 것이다. 상호관세 위법 판결이 또 다른 불확실성을 낳으면서 전 세계 국가들은 현재 이 사안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우리도 3500억 달러 규모 기존 대미투자 합의 이행 여부 등을 둘러싼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미국 대법원은 지난 20일(현지시간) 국제비상경제권한법에 따른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판결에서 대법관 6 대 3으로 위법하다고 결정했다. 보수 성향 6명의 대법관 가운데 3명이 반 트럼프 판결에 동참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은 정치적 입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만회하려는 듯 플랜B를 적극 가동하고 있다. 글로벌 관세에 이어 무역확장법 232조, 무역법 301조 등도 활용, 조만간 적법한 새 관세를 발표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는 정치적 명운이 걸린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입장이라 관세 부과 폭이 기존보다 더 확대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당장 우리로서는 경제 핵심 품목인 자동차와 반도체, 조선 등이 미국의 국가 안보를 근거로 한 무역확장법 232조의 적용을 받을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현실화될 경우 우리 경제엔 큰 충격이 불가피하다. 더욱이 부산, 울산, 경남은 자동차와 조선 산업 밀집 지역이다. 원청은 물론 수많은 협력업체들이 연쇄적으로 관세 인상 피해를 입을 경우 지역 경제에도 먹구름이 드리울 수밖에 없다. 그만큼 새 관세 구조가 어떻게 짜이는가는 국가와 지역의 명운을 좌우하는 너무나도 중차대한 문제다. 정부는 다양한 시나리오를 가정해 품목별 맞춤형 대응 방안을 철저하게 준비하길 바란다. 트럼프 대통령의 좌충우돌 스타일은 이제 뉴노멀이 됐다. 이번에도 중간선거를 앞둔 그가 어떤 돌발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위법 우회 카드’를 내놓을지조차 예상하기 어렵다. 되레 리스크만 더 커진 국면이다. 각 국가들이 관세 환급 등을 미국에 선제적으로 주문하지 않고 신중 모드에 돌입한 것도 이런 이유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일단 정부가 기존 관세 합의와 관련한 대미투자를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한 것은 무척 다행스럽다. 무엇보다 보복 본보기 국가로 낙인찍히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국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면서 최대한 현명하게 이번 파고를 헤쳐가길 바란다.
[사설] 윤석열 내란죄 무기징역, 이제는 어두운 역사와 단절해야
12·3 비상계엄 선포 사태와 관련해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기소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비상계엄 선포 443일 만에 나온 이번 판결은 헌정 질서를 뒤흔든 국가적 위기에 대한 사법부의 단호한 응답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5부는 19일 비상계엄 선포 자체가 곧바로 내란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헌법기관의 기능을 마비시키려는 목적이 인정될 경우 내란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군을 국회로 보낸 행위를 사건의 핵심으로 규정하며 체포조 편성, 선관위 점거 시도 등을 폭동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헌법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권력은 없다는 원칙을 다시 확인한 순간이었다. 재판부는 윤 전 대통령의 행위가 형법상 내란죄의 성립 요건인 ‘국헌문란 목적’과 ‘폭동’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국가 위기 상황을 내세운 피고인 측 주장에 대해서는 명분과 목적을 혼동한 논리라고 선을 그었다. 공수처의 내란죄 수사 개시 권한 역시 인정하며 수사 절차의 적법성을 확인했다. 다만 장기 독재를 위한 사전 기획이라는 공소사실은 증거 부족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른바 ‘노상원 수첩’의 신빙성도 부정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에게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죄가 인정돼 징역 30년이 선고됐다. 관련 피고인들에 대한 유·무죄 판단도 엇갈렸다. 법은 감정이 아닌 증거와 논리로 판단한다는 사법의 기본을 보여준 판결이었다. 12·3 사태는 전시나 사변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전혀 없었음에도 대통령 개인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사유화해 입법권과 사법권을 침탈하려 한 사건이다. 이는 국가 안전을 위협하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중대 범죄로 기록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부끄러운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정치권 또한 달라져야 한다. 계엄 사태 이후 시간이 흘렀지만 여야의 태도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국민의힘은 뒤늦은 사과와 내부 갈등을 반복하며 과거와의 단절에 미온적이고, 위기 대응보다 진영 결집에 치우친 모습으로 국민 신뢰를 갉아먹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다수 의석을 앞세운 입법 전략과 권력기관 개편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제 변하지 않는 정치 후진성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거 우리는 12·12와 5·18을 거치며 전두환 등 내란의 주범들을 법정에 세워 민주주의의 가치를 회복한 경험이 있다. 이번 판결 역시 같은 맥락이다. 어떠한 권력도 헌법 위에 존재할 수 없으며 민주적 절차를 벗어난 국가 운영은 용인될 수 없다는 원칙의 재확인이다. 다시는 이 땅에서 누구도 내란을 획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제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권력 구조의 오만과 제도의 허점을 바로잡고 정치 문화의 후진성을 극복하는 일이다. 오늘의 선고가 또 하나의 기록으로만 남을지, 아니면 어두운 역사와 단절하는 전환점이 될지는 우리 사회 전체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일상화된 '짬짜미'
“우리 사회에는 설탕, 밀가루, 육고기, 교복, 부동산 등 경제 산업 전반에서 반시장적 담합행위가 뿌리깊게 퍼져 있다.(중략) 담합 이득을 훨씬 넘어서는 무거운 제재가 뒤따라야 하고, 제재의 내용도 형사 처벌 같은 형식적 제재가 아니라 경제 이권 박탈이나 경제적 부담 강화 같은 실질적 경제 제재가 돼야 한다. 이런 반시장적 행위가 반복될 경우 아예 시장에서 영구 퇴출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이재명 대통령이 설 연휴 직후인 지난 19일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반시장적 담합행위에 대한 철퇴를 주문하며 쏘아올린 발언이다. 이 대통령이 국무회의, 소셜미디어(SNS) 등을 통해 이 같은 민생 침해 행위를 공개적으로 잇달아 언급하면서 범정부 차원의 대응도 빨라지고 있다.최근 공정위는 3개 제당업체가 4년여에 걸쳐 음료·과자 제조사 등 기업간거래(B2B)에 적용되는 설탕 가격을 담합한 행위에 대해 총 4083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또 CJ제일제당, 대한제분 등 7개 제분업체가 6년간 국내 B2B에서 반복적으로 밀가루 판매가격 및 물량 배분을 밀약한 혐의를 전원회의에서 심의하기로 했다고 지난 20일 발표했다. 이번 담합행위에 영향을 받은 관련 매출액 규모는 5조 8000여억 원으로 추산됐다. 제분업체들은 밀가루 담합 혐의로 2006년 4월에도 제재를 받은 바 있다.문제는 이 대통령이 언급한 이 같은 시장 교란 행위가 오래전부터 지속돼 온 반복적·관습적 폐해라는 점이다. 특히, 라면·과자·제빵·음료 등은 밀가루와 설탕을 주 원재료로 하는 생활필수품인데다 교복은 초중고생을 둔 가정의 필수 준비물이라는 점에서 담합행위에 따른 서민 피해가 큰 만큼 발본색원이 절실하지만, 현재의 독과점 시장, ‘소비자 선택권 및 경쟁 제한’ 구조에서 척결이 결코 쉽지 않다.제분업체와 제당업체의 장기간 밀가루·설탕 가격 담합 사건은 소수 기업 중심의 과점 구조 즉, 독과점 시장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교복값 역시 ‘가격’ 보다는 ‘소비자 선택권 및 경쟁 부재’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이다. 학교 주관 구매제도가 소비자의 선택권을 크게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학교에서는 교복(동·하복) 외 체육복·생활복까지 사실상 패키지로 구매하면서 전체 구매 가격이 60만 원에 이르는 사례가 나오기도 했다.생활 속 뿌리깊은 담합행위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척결 의지와 함께 업계의 고강도 자정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송현수 선임기자 song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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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AI 시대에도 여행은 결국 '사람'이 만든다
하루 일정에 1만 원. 일본 오사카 여행에서 가장 잘 쓴 돈이었다. SNS에서 우연히 알게 된 개인 여행 큐레이터에게 맞춤형 일정을 맡겼다. 메시지를 보내 취향을 설명하니, 교통·동선·맛집을 모두 반영한 3박 4일 일정표가 도착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피드백을 주면 곧바로 수정됐다. 챗GPT 같은 인공지능도 여행 일정을 잘 짜주는 시대다. 검색 몇 번이면 인기 관광지와 맛집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경험은 달랐다. 단순한 정보 나열이 아니라 ‘내가 어떤 여행자인지’를 먼저 묻는 과정이 있었다. 여행자 구성이 어떻게 되는지, 걷는 것을 좋아하는지, 줄 서는 것을 싫어하는지, 사진을 중시하는지, 어떤 목적의 여행인지, 현지 분위기를 선호하는지 등등을 세세하게 물었다. 그 결과 나온 일정은 놀라울 만큼 정교했다. 라멘, 야키니쿠, 카레우동, 장어덮밥, 규카츠, 오코노미야키, 다코야키, 텐동까지, 일본과 오사카를 대표하는 음식들이 하루 흐름에 맞춰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었다. 무거운 메뉴와 가벼운 메뉴, 대기가 있는 곳과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곳, 관광지와 골목 상권이 균형 있게 섞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곳은 의자가 여섯 개뿐인 작은 텐동집이었다. 바로 앞에서 튀김을 튀기고 소스를 끼얹어 손을 뻗어 건네주는 구조였다. 들리는 언어는 대부분 일본어였다. 여행자가 아니라 잠시 현지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곳은 지하철역과 이어진 지하상가의 우동집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인근 직장인들이 몰려들었고, 여행자인 나도 그들 사이에서 줄을 섰다. 특별한 연출도, 관광객용 메뉴도 없었다. 그저 도시의 일상이 흐르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 한 끼는 생생한 기억으로 남았다. 일정은 음식뿐 아니라 이동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복잡한 지하철역에서 어느 출구로 나와야 하는지, 어느 노선을 타야 가장 효율적인지, 몇 정류장을 이동해야 하는지까지 안내돼 있었다. 여러 교통패스 가운데 일정에 맞는 카드도 추천했다. 그 일정표를 따라 움직이는 동안, 여행은 더 이상 ‘검색의 결과’가 아니라 ‘설계된 경험’처럼 느껴졌다. 오사카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관광객 동선에서 살짝 벗어난 골목과 생활권도 엿볼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자연스럽게 부산을 떠올리게 했다. 부산에도 지하철역과 연결된 상가가 있고, 점심시간마다 직장인들로 북적이는 식당들이 있다. 서면 지하상가, 남포동 일대, 동래·부전·전포 골목, 범일동과 초량의 오래된 식당들까지. 관광지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도시의 결이 살아 있는 공간은 이미 충분하다. 문제는 ‘없는 것’이 아니라 ‘잘 엮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에게 이런 맞춤형 큐레이션은 더욱 필요하다. 언어와 정보의 장벽 속에서 누군가의 설계는 여행의 질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부산에는 로컬 크리에이터도 있고, 여행 블로거와 가이드도 있다.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통역 인력과 관광 스타트업도 활동하고 있다. SNS 계정을 통해 자신만의 코스를 제안하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가능성의 씨앗은 곳곳에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것을 하나의 경험으로 묶어내는 일이다. 어디가 맛있는지 알려주는 수준을 넘어, 어떻게 움직이면 좋은지, 어떤 순서로 만나야 더 매력적인지, 어디에서 잠시 일상에 섞일 수 있는지까지 안내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관광은 더 많은 시설을 짓는 일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공간과 일상을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도시의 매력은 달라진다. 지하상가 우동집에서의 점심 한 끼가 여행의 기억이 되듯, 부산의 평범한 점심시간도 충분히 콘텐츠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이 일정과 정보를 손쉽게 제공하는 시대다. 그러나 도시의 맥락을 읽고, 동선을 설계하고, 여행자가 일상 속에 스며들 수 있도록 돕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영역에 가깝다. 부산에도 그런 가능성은 이미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이미 시작된 작은 시도들이 서로 연결된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며 도시의 표정은 달라질 수 있다. 관광의 경쟁력은 새로운 랜드마크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지하철역과 이어진 우동집 한 곳을 어떻게 소개하느냐에서 시작된다. 부산은 이미 충분한 재료를 갖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가능성을 더 많은 여행자의 기억으로 만드는 일이다.
[노트북 단상]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지난해 12월 국토교통부와 부산시는 해운대1·2지구 2구역(4694세대)과 화명·금곡지구 12구역(2624세대)을 노후계획도시 정비 선도지구로 선정했다. 용적률 완화와 용도지역 변경 특례, 신속한 인허가 등 각종 혜택이 주어지니 ‘수혜’를 입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특히 해운대 그린시티 일대 아파트에 관심이 집중됐다. 30년이 다 된 단지들의 집값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간 수도권 1기 신도시에서만 추진됐던 노후계획도시 사업이 지방에서 추진되는 첫 사례인 만큼 기대도 커졌다. 호재인 건 분명하겠으나, 장밋빛 미래만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1기 신도시 재건축 선도지구였던 분당이나 일산의 소위 ‘대장 단지’에서도 갈등으로 공회전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제자리 재건축을 하느냐 아니면 통합 분양을 하느냐를 두고 주민들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아서다. 상대적으로 입지가 좋은 단지 주민들은 기존 아파트 자리를 보장해주는 제자리 재건축을 선호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주민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정부나 지자체는 이런 갈등을 아마도 예상했겠지만, ‘주민들끼리 갈등을 해소하라’는 식으로 뒷짐만 진다. 여러 단지들이 통합해서 와야 선도지구 선정에 유리하다고 홍보했던 국토부에게 ‘사기를 당한 기분’이라는 주민들도 적지 않다. 정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겠다는 노후계획도시 특별법마저 이런 실정인데, 일반 재건축 시장은 더욱 험난할 수밖에 없다. ‘헌 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말이 절로 나오던 과거의 재건축 사업장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분담금 폭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합원들이 추가로 내야 하는 돈이 커졌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자재비와 인건비 등이 크게 올라 건설사들이 조합에 과도한 공사비 인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수억 원씩 추가 분담금을 내야 한다는 설명에 일부 원주민들은 ‘이럴거면 재건축을 할 이유가 없다’며 돌아서기도 한다. 분담금 산정 방식이 복잡하고 불투명해서 이를 둘러싼 갈등도 적지 않다. 한국부동산원이 공사비 검증 절차를 수행하고는 있지만, 강제성이 없어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부산의 재건축 최대어로 손꼽히는 수영구 삼익비치타운은 지난해 4월 특별건축구역 지정을 통한 99층 초고층 아파트 건립을 포기했다. 과도한 분담금과 늘어지는 공사 기간 등이 주된 이유였다. 지방 최초의 ‘아크로’ 브랜드 아파트로 관심을 모았던 해운대구 삼호가든 재건축 역시 공사비를 둘러싼 건설사와의 갈등으로 시공 계약을 해지했다. 일각에서는 재건축 조합원들이 무리하게 욕심을 부려 화를 자초하고 있다는 식의 비난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수십 년 전부터 그곳에 터를 잡았던 주민들은 물론 자산 증식을 위해 투자를 한 투자자 모두 손가락질 받을 대상은 아니다. 도시의 관점에서도 낡고 불편한 구시가지를 어떤 형태로든 재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다양한 형태로 곳곳에 산재한 갈등을 이대로 두고만 본다면 결국 언젠가는 터질 수밖에 없다. 정부나 지자체가 ‘갈등을 해결해서 가져와라’는 방관자적인 자세를 취할 때가 아니다. 새로운 정책은 과감히 도입하고, 해묵은 규제는 완화하며 풀어가야 한다. 헌 집 주고 새집을 얻는 시대는 끝났다고 하더라도, 제도권 내에서 정당한 투자를 한 이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려서는 안 될 일이다.
[중앙로365] 축제 뒤, 부산 자본은 어디로 갔는가
해마다 9월이면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인을 불러 모으고, 11월엔 지스타가 벡스코를 가득 채워도, 사람과 함께 몰려온 자본은 축제가 끝나는 순간 빠져나갔다. 흥행은 부산에서, 수익은 수도권에서. 이 구조가 반복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투자를 구하려면 서울로 가야 했고, 자본이 있는 곳으로 기업도 따라 움직였다. 부산은 무대를 제공했지만 금융의 의사 결정권은 끝내 지역 안에 없었다. 부가가치가 결정되는 순간마다, 부산은 바깥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했다. 이번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부산 유치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첫 시험대다. 금융위원회 예비인가를 받은 KRX(한국거래소) 컨소시엄에는 코스콤과 BNK금융 계열사 등 지역 금융기관이 참여했다. 설계 단계부터 지역이 참여했다는 점이 이전과 다르다. 본인가 요건 이행과 시스템 구축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지만, 기회의 문은 열렸다. 그 문을 결과로 이어붙이는 것은 이제 부산의 실행력에 달려 있다. 조각투자 거래소는 자산을 쪼개 발행하고 시장에서 유통하는 자본 순환의 마지막 고리이자, 그 자산을 담는 그릇이다. 그렇다면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부산에는 이미 자산이 있다. 영화제와 지스타를 통해 부산이 공들여 키워온 콘텐츠 IP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제에서 발굴된 유망 콘텐츠나 지스타를 통해 가능성을 증명한 게임들은 흥행 잠재력이 충분함에도 자금 조달을 위해 서울의 벤처캐피털을 찾아가야 했다. 조각투자거래소가 생기면 상황은 비로소 달라진다. 영화 판권이나 게임의 미래 수익권을 조각투자 증권으로 발행해 시민과 투자자가 직접 참여한다. 흥행의 결실이 부산의 거래소를 통해 지역에 남는 구조를 만든다. 행사를 여는 도시에서 자본을 설계하는 도시로, 그 실질적인 시작점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변화의 의미는 금융 지형에 그치지 않는다. 부산의 창작자와 제작사가 외부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지역 시장 안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생태계의 변화다. 축제가 열릴 때 자본이 스쳐 지나가는 도시가 아니라, 축제가 끝난 뒤에도 자본이 남는 도시. 그 그림을 완성할 자산은 콘텐츠에만 있지 않다. 콘텐츠가 출발점이라면, 부산항은 그 다음 무대다. 국내 최대 환적항인 부산항은 수산물·원자재·소비재가 쉼 없이 오가는 물류의 심장이지만, 그 흐름에서 파생되는 수익권을 지역이 직접 설계한 적은 없었다. 수산물 유통 수익권이나 해운 화물에서 발생하는 미래 수익 구조를 조각투자 증권으로 발행해 부산의 거래소에서 거래한다면, 부산항은 자본의 무게를 실어 나르는 통로에서 자본이 만들어지는 시장으로 바뀐다. 콘텐츠와 물류, 두 축이 하나의 자본시장 안에서 연결될 때 부산의 그림은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나 인프라는 시작일 뿐이다. 진짜 과제는 역량의 지역화다. 발행의 구조 설계부터 유통의 리스크 관리, 자산 표준화와 투자자 보호까지, 그 역량이 지역 안에서 갖춰지지 않는다면 플랫폼만 부산에 있고 핵심 판단은 외부에서 이뤄지는 또 다른 분업 구조가 반복될 뿐이다. 이번에는 기능이 아니라 역량이 남아야 한다. 인력은 기회를 따라 움직이고, 기회는 시장을 따라 형성된다. 부산시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일은 지역 대학·연구기관과 함께 전문 인력 양성 경로를 설계하는 것이다. 부산에 조각투자거래소가 문을 여는 날, 그 안을 채울 사람이 외부인뿐이라면 지역화는 허울에 불과할 수 있다. 조각투자는 아직 대중의 신뢰를 충분히 얻지 못한 시장이다. 그렇기에 설계의 출발점은 속도가 아니라 신뢰여야 한다. 이상거래 탐지, 투명한 공시, 안정적인 수탁·결제 구조는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이 체계를 외부 용역에만 의존할 경우, 거래소는 또 다른 취약성을 안게 된다. 한 건의 사고가 수년간 쌓아 올린 평판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다. 지역 대학과 기술 기업이 보안과 운영 역량을 지역 안에서 키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뢰가 먼저 쌓여야 부산의 이야기가 투자 상품이 되고, 부산의 항만이 포트폴리오가 된다. 부산은 오랫동안 선언의 도시였다. ‘동북아 해양수도’, ‘글로벌 허브도시’, ‘스마트시티’. 비전은 매번 화려했지만 구조로 이어지지 않았고, 자본은 끝내 머물지 않았다. 조각투자거래소 유치가 그 반복과 다른 것은, 이번엔 선언이 아니라 설계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발행·유통·수탁·보안이 지역 산업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자본은 비로소 머문다. 그 연결을 완성하는 것이 지금 부산의 과제다. 축제가 끝난 뒤에도 자본이 남는 도시. 그 답을 부산이 스스로 써야 할 때다.
[편집국에서] 헌법 정신을 생각하다
지난 주말,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상호 관세 정책이 일단 멈춰 섰다. 지난 20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트럼프 대통령이 주요 나라에 부과한 상호 관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번 판결로 지난해 1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이어져 온 ‘관세 전쟁’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이번 판결에서 미국 연방대법관 9명 중 6명은 트럼프의 결정이 헌법이 정한 대통령의 권한이 아니라고 봤다. 관세는 곧 세금이며, 세금을 부과하고 걷을 권한은 의회에 있다는 것이다. 미국 헌법 1조는 세금을 부과하고 걷을 권한은 의회에 부여하고 있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대통령은 헌법상 고유한 과세권을 갖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동시에 트럼프가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세금을 걷는 것은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트럼프가 ‘마가(MAGA·미국을 더 위대하게)’라는 구호와 함께 미국 경제 발전을 위한 판단이라고 하더라도, 헌법에 위배되는 결정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자국의 사법부 최고기관을 즉각 공격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대한 수치”라고 대법원의 결정을 비난하며 대법원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무역법을 동원해 상호 관세를 다시 추진하기로 했다. 트럼프에게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미국의 사법부와 헌법에 대한 존중은 찾아보기 어렵다. 헌법이 존중받지 못하는 모습은 한국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19일 12·3 비상계엄을 일으킨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혐의를 인정해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법원은 윤 전 대통령이 벌인 비상계엄은 “국헌 문란의 목적이 인정되는 폭동”이라고 판단했다. 비상계엄이 국회의 기능을 마비시켰다고도 판시했다. 이에 대한 한국 제1 야당 대표의 발언에서 ‘헌법 존중’은 없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계엄은 내란이 아니다”, “아직 1심 판결일 뿐이다”며 선고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판결문 곳곳에서 발견되는 논리적 허점들은 지귀연 판사가 남겨놓은 마지막 양심의 흔적”이라며 사법부의 판단을 비꼬았다. 대한민국 사법부 판사로, 오랜 기간 헌법에 근거해 자신의 경력을 쌓고, 삶을 이어온 그에게서 대한민국 헌법을 존중하는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국 사법부의 12·3 계엄에 대한 첫 판결은 어떠한 정치적 목적과 명분을 앞세우더라도, 국가의 존립과 국가기관의 권능을 흔드는 행위는 엄벌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판결이다. 처벌의 수위에 대한 개인별, 정치 집단별 의견 차이는 있다. 미국 사법부가 내린 트럼프의 정책에 대한 판결 역시 행정부의 긴급권한 남용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한국과 미국에서 벌어진 최근의 상황을 지켜보며 헌법을 다시 생각해 본다. 헌법학자들은 헌법을 국가 권력의 ‘사용 설명서’이자 ‘사슬’로 비유한다. 헌법은 국가 권력이 어디까지 할 수 있고, 어디부터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지를 정하는 최고 규범이다. 대한민국 입법·행정·사법의 권력자들이 그들의 선서에서 각각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본인은 법관으로서,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라고 비슷한 내용의 선서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내 한 헌법학자는 ‘헌법은 최악의 세상을 막는 숭고한 힘이자, 최선의 삶을 향한 절대적 상식’이라고 정의한다. 헌법은 언제나 존중 받아야 하며, 헌법은 하늘에 둥둥 다니는 조문이 아닌 국민의 생활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한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는 헌법 질서를 위기에 몰아넣는 사건들을 반복적으로 겪었다. 헌법이 무너지는 위기를 겪을 때마다 시민들을 거리로 나섰고, 법원은 이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때론 법원이 무너질 때는 국회가 법원을 견제했다. 행정이 입법부의 권한을 잠식할 때는 사법부가 나서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헌법이 설계해 놓은 ‘구조적 엄벌’이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트럼프의 상호 관세 부과에 제동을 건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경제적 파장이 아무리 크더라도 헌법이 의회에 부여한 권한은 침해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재확인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정한다. 헌법을 뒤흔드는 행위는 단순한 법 위반이 아니다. 국민 스스로가 세운 나라의 존재 근거를 부정하는 일인 것이다. 헌법은 정치적 유혹이 클수록, 경제적 이해관계가 클수록 더욱 단단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점에서 한국 사법부와 미국 사법부의 이번 판결은 의미가 크다. hangang@busan.com
[김진호의 금융포커스] 시험대 오른 코스닥
정부가 코스닥 시장에 대한 강도 높은 개편을 예고했다. 부실·좀비기업을 신속하고 엄정하게 퇴출하고, 혁신기업의 성장 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이다. 상장은 쉬운 반면 퇴출은 어려운 구조 속에서 사실상 방치돼 온 시장 환경을 이제는 바로 잡겠다는 의미다. 금융당국이 최근 발표한 주가 1000원 미만 이른바 ‘동전주 퇴출’이 대표적 사례다. 시장 체질 개선을 위해 문제가 되는 부분을 도려내겠다는 조치로,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한 ‘썩은 상품’ 지적과도 맥을 같이한다. 이 대통령은 코스닥 시장을 백화점에 비유하며 “상품 가치가 없는 썩은 상품, 가짜 상품이 많으면 누가 가겠느냐”고 지적했다. 동전주 요건 신설 등 상장폐지 요건 강화로 올해 코스닥 상장폐지 대상 기업 수는 기존 예상 50개 내외에서 약 150개, 최대 220여 개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코스닥 상장사의 약 10%에 해당하는 규모다. 코스닥은 본래 혁신기업이 자본시장을 통해 성장 자금을 조달하고, 투자자는 그 성과를 공유하는 선순환 구조로 설계됐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신규 상장은 늘었지만 투자자의 수익과 신뢰는 오히려 후퇴했다. 유상증자와 전환사채(CB) 남발로 버티는 기업, 테마와 루머로 주가를 부풀린 종목, 작전 세력의 놀이터로 변질된 사례가 반복됐기 때문이다. 동전주는 그 결과물이다. 기업 경쟁력으로 평가받는 건전한 시장이 아니라, 방치된 시장이 만들어 낸 가격표인 셈이다. 신뢰를 잃은 시장에서 혁신기업과 투자자 모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정부 정책의 초점이 코스닥 정상화에 맞춰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국내 증시가 글로벌 시장 대비 양호한 흐름을 보이고 있는 만큼 구조개혁에 따른 충격도 상대적으로 흡수할 여지가 있다. 시장 신뢰 회복이 성공한다면 코스피에 이어 이제는 코스닥 상승장의 시간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온다. 물론 상장 문턱을 높이고 퇴출 기준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장이 요구하는 것은 실제적인 부실·좀비기업의 정리다. 금융당국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올해 상장폐지 대상 기업은 최대 220개, 전체의 약 13% 수준에 달한다. 그만큼 코스닥이 문제 기업을 오래 방치해 왔다는 방증이다. 코스닥이 과거처럼 투기장에 머물지, 혁신의 시장으로 돌아갈지는 이번 개편의 실행력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늦었지만 방향은 맞다. 이제 필요한 것은 흔들림 없는 정책 집행이다.
[오션 뷰] 해기인력, 국가전략이다
우리가 먹고, 만들고, 수출하며 성장해 온 방식은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바다를 통해 연결되는 국가라는 사실이다. 원유·가스·곡물 같은 필수 자원, 반도체·자동차·철강 같은 주력 제품, 그리고 국가 비상 상황에서의 군수·구호 물자 등 이 모든 것이 해상 물류망 위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해운산업은 단순한 ‘운송업’이 아니라 국가 경제와 안보를 동시에 떠받치는 기간산업이다. 그런데 이 동맥이 원활히 흐르려면 배만 있어서는 안 된다. 배를 움직일 사람, 즉 해기인력이 있어야 한다. 선박의 안전 운항, 화물의 안정적 수송, 항해·기관·전자·통신·안전관리 등 고도의 전문성이 결합된 해기역량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특히 친환경 연료 전환, 디지털·자율운항, 사이버 보안과 같은 새로운 기술이 해운 현장에 빠르게 들어오면서, 해기인력은 이제 ‘부족한 직군’이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격차를 만드는 직군’이 되고 있다. 미국은 다시 바다를 국가 전략의 한가운데로 불러왔다. 2026년 2월 발표된 ‘America’s Maritime Action Plan(MAP)’은 단순한 조선·해운 정책이 아니다. 이는 산업정책·안보정책·공급망 전략을 하나로 묶은 ‘해양 국가전략’ 선언에 가깝다. 미국이 문제를 인식한 지점은 명확하다. 연간 상선 건조량은 세계의 1%에도 못 미치고, 대형 조선소는 손에 꼽을 정도로 줄었다. 군수 물자, 에너지, 식량 수송까지 외국 선박과 외국 조선에 의존하는 구조는 단순한 산업 경쟁력 문제가 아니라 국가안보의 취약성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숙련 인력의 고령화와 기술 단절까지 겹치며, 미국은 ‘해양 역량의 구조적 붕괴’라는 표현까지 사용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해운을 국가 전략의 중심에 놓고 있는가. 해기인력 양성을 단기 인력 수급 문제가 아니라 장기 국가 역량 구축 과제로 다루고 있는가. 그리고 그 답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기반을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가. 그 기반의 이름이 바로 국립한국해양대학교다. 국립한국해양대학교는 지난 80년 동안 대한민국 해운산업의 성장 곡선과 함께 걸어왔다. 전후(戰後) 폐허 속에서 해상 운송의 복원이 곧 국가 재건의 출발점이던 시절부터, 고도성장기 수출입 물동량이 폭증하던 시기, 세계 조선·해운 강국으로 도약하던 과정, 그리고 글로벌 공급망이 흔들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립한국해양대학교는 현장에 투입될 해기사와 해운 전문인력을 꾸준히 길러내며 산업의 ‘사람 기반’을 만든 기관이었다. 해운산업은 ‘설비 산업’이면서 동시에 ‘인력 산업’이다. 선박은 자본으로 살 수 있지만, 해기역량은 시간과 축적이 필요하다. 국립한국해양대학교는 바로 그 축적의 장이었다. 항해사와 기관사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 해기인력 양성은 물론, 해운, 항만, 물류, 선박금융, 해사법, 조선, 조선기자재, 해양디지털 분야로 교육과 연구의 스펙트럼을 넓혀오며 산업 변화에 대응해 왔다. 산업의 파고가 높아질 때마다 현장은 “사람이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사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숙련과 신뢰가 축적된 인력이 부족한 것”이다. 국립한국해양대학교는 그 숙련과 신뢰를 제도적으로 길러내는 대표 거점이었다. 오늘날 해운산업은 또 다른 전환점 앞에 서 있다. 국제 환경규제 강화로 인한 친환경 연료 전환, 디지털 전환과 자율운항 기술의 도입, 공급망 재편과 경제안보 경쟁, 그리고 해상 사이버 위협의 증대까지 현장은 기존의 ‘항해·기관’ 역량에 더해 데이터·AI·보안·신연료 안전관리까지 요구하고 있다. 즉 해기인력은 줄어드는 직업이 아니라, 더 복합적이고 고도화되는 직업으로 바뀌고 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단순한 인력 확대가 아니라 한국형 해양행동계획이다. 해운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재정의하고, 해기인력 양성을 국가가 책임지는 구조로 바꾸는 계획이다. 그 중심에서 국립한국해양대학교는 ‘교육기관’을 넘어 국가 해양인력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아야 한다. 해기사 교육을 강화하되, 친환경 연료·해양 AI·자율운항·디지털 선박·해상 안전·해양 사이버 보안까지 아우르는 통합 역량 체계를 구축하고, 산업·군·공공부문과 연계한 경력 경로를 설계해야 한다. 나아가 실습선과 교육 인프라를 ‘현장 실증 플랫폼’으로 확장해 기술 전환을 교육과 동시에 달성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바다는 국가의 동맥이다. 그리고 해기인력은 그 동맥을 뛰게 하는 심장이다. 대한민국이 해운산업으로 성장해 왔다면, 앞으로도 해양으로 미래를 열어야 한다. 지난 80년 동안 국립한국해양대학교가 해기사 양성과 해운산업 발전에 기여해 온 역사는, 앞으로의 80년을 준비할 가장 확실한 자산이다. 이제 그 자산을 ‘과거의 성과’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국가 전략의 중심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바다는 다시 국가의 일이 되었고, 사람은 그 전략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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