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내년도 예산 '낙동강 먹는 물' 반영, 이제 해결할 때 됐다
부산시가 사상 첫 국비 10조 원 시대를 맞게 됐다. 지난 2일 확정된 내년 정부 예산안에서 부산시가 받는 국비는 10조 2184억 원으로 올해 대비 6%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부산은 스마트항만 구축 사업비가 삭감되는 등 일부 미래 신산업 육성 분야를 제외하면, 가덕신공항 등 대다수 사업비는 원안이 유지됐다. 지역에서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낙동강 먹는 물 사업이 막판에 기사회생해 19억 2000만 원을 확보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난 수십 년간 좌절을 거듭한 취수원 다변화 사업은 올해도 애초 정부안에서 누락됐지만, 극적으로 부활했다. 먹는 물 공급의 패러다임 전환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낙동강 유역 주민들에게 믿고 마실 수 있는 식수를 제공하려는 ‘먹는 물 사업’이 시작된 건 1991년 경북 구미공단 페놀 유출 사고가 계기다. 식수를 강물에 의존하던 하류 주민들이 안전한 공급원을 찾으려 한 것은 당연지사다. 그래서 낙동강 본류와 지류, 지천의 수질 안정과 이를 바탕으로 한 고도 정수처리, 그리고 광역 상수도망 구축이라는 종합적 공급 체계를 구상한 것이다. 합천 황강 복류수, 창녕 강변여과수 등 새로운 취수원을 통해 하루 90만 톤 규모의 식수를 부산과 경남 동부에 공급한다는 계획은 그 자체로 획기적이다. 하지만 부산-대구-경남 간 이견에 재정 부담과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겹치면서 하세월이 되고 말았다. 부산시는 올해도 먹는 물 사업을 ‘예산 1순위’로 올렸지만, 정부 우선순위에 밀리고 말았다. 지역 정치권과 경제계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호소한 덕분에 국회 심의 때 설계비가 추가되는 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확보된 예산은 전체 사업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특히 낙동강 유역 통합관리 구상도 제도화까지는 갈 길이 멀다. 지류와 지천의 수질 편차, 계절별 유량 변화, 지역 간 이해 갈등도 난제다. 예산의 일관된 확보를 위해 정치적 변동성을 극복하는 일은 지역의 몫으로 남았다. 지자체 간 협력에 기반한 속도감 있는 실행력과 주민 수용성 확보 병행에 사업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내년 부산 국비 사업 중 가덕신공항은 6889억 원의 정부안이 유지됐다. 하지만 대구경북신공항 건설비 2882억 원이 내년 예산에 미반영된 사례처럼 국책 사업이라 해도 돌발 변수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긴장감을 놓아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부산은 바이오·디지털·해양 분야 사업비도 먹는 물 사업처럼 국회 심의 단계에서 대거 추가돼 주목된다. ‘자율주행 기반 스마트항만 모빌리티 구축 사업’에 19억 6000만 원이 신규 배정되는 등 인공지능(AI)과 해양 신산업이 수혜를 받는다. ‘시민 삶의 질을 개선해 나가면서, 동시에 미래 성장 동력을 모색하자.’ 국비 10조 원 시대를 맞이한 부산 앞에 놓인 과제다.
[사설] 내란 심판에 방점 대통령 계엄 1년 담화 국민 통합 어쩌나
이재명 대통령이 12·3 비상계엄 사태 1주년인 3일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이번 성명엔 국민 통합을 강조하는 의지가 담길 것으로 기대됐다. 여야가 지난 1년 동안 한치 양보 없이 비상계엄 공방을 벌이면서 정치 실종은 물론 민심 분열의 골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성명에서 통합보다는 내란 심판을 강조했다. ‘정의로운 통합’이라는 키워드를 제시했으나 과거 지향적 의미로 해석된다. 국민의힘도 사과 대신 책임을 여당에 미루는 등 전향적인 자세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 대통령과 국힘의 모습은 시계를 1년 전으로 돌린 듯한 착각까지 유발한다. 민심을 봉합하기는커녕 기름을 끼얹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대통령은 성명에서 가담자들에 대한 엄정한 처벌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 정권을 겨냥해 ‘사적 야욕’ ‘친위 쿠데타’ ‘전쟁 획책’ 등을 강조하며 비판 수위를 높였다. 이어 “다시는 쿠데타를 꿈조차 꿀 수 없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도 ‘정의로운 통합’은 필수”라며 결국 내란 심판에 방점을 찍었다. 여당도 이날 국회 본청 계단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내란의 완전한 종식’을 다짐했다. 2026년을 내란 청산 원년으로 만들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미 특검 등도 마무리 수순에 접어든 시점이다. 지난 1년 정치적 내전으로 국민들은 큰 고통을 받았다. 국론 분열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하다. 분열이 아닌 통합이 절실한 시점이다. 더욱이 여당은 내란전담재판부, 추가 특검 등을 추진 중이다. 여야 갈등은 더 극심해질 전망이다. 비상계엄 1년을 넘겼지만 극한 공방은 해를 넘겨서도 재연될 조짐이다. 이 대통령마저 성명에서 여당의 손을 들어주면서 국민 통합과 ‘모두의 대통령’ 등 취임 당시의 약속을 저버렸다.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내란 정국’을 이어가려는 의도라는 말까지 나온다. 국힘도 일부 의원들이 사과했지만 장동혁 대표는 사과 요구에 선을 그으며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대통령과 여야의 이런 태도는 주권자인 국민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어떠한 경우라도 분열을 조장하는 지도자는 국가 미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국힘은 계엄 해제 표결 참여를 방해한 혐의를 받는 추경호 의원 구속영장이 이날 기각된 것을 두고 “위헌 정당으로 몰고 가려는 여당 계략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반응이다. 비상계엄 면죄부를 받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여당의 반응도 우려스럽다. 정청래 대표는 “내란 청산을 방해하는 제2의 내란 사법쿠테타”라고 재판부를 겁박했다. 대한민국은 대미 관세 협상으로 인한 경제 위기와 환율 불안 대책은 물론 지역 균형발전 등 산적한 국정 과제도 신속하게 추진해야 한다. 민생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좌고우면할 시간이 없다. 더 늦기 전에 과거에 발목 잡혀 분열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대한민국을 구해내야 한다.
[사설] 경남-전남 손잡은 우주항공복합도시 건설 주목된다
영호남이 우주항공복합도시 건설에 의기투합했다. 경남 사천의 서천호 국회의원과 전남 고흥 문금주 국회의원이 우주항공산업 지원 특별법을 공동 발의한 것이다. 우주항공 분야는 기술·인력·인프라·안전 관리에 국가적 역량 집적이 필수라서 중앙정부의 주도적 역할과 책임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간 법적·재정적 뒷받침이 부족해 사천의 KAI(한국항공우주산업)와 고흥 나로우주센터는 성장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앞서 사천 단독 지원 특별법이 특혜성으로 비쳐 심사의 벽을 넘지 못했지만, 영호남 상생 구조의 남부권 우주항공 거점 육성에 여야의 이견이 있을 리 없다. 누리호가 연 우주시대의 가속화가 기대된다. ‘우주항공복합도시 건설 지원 특별법’은 전담 조직 설치, 특별회계 신설, 예비타당성조사 면제 등 실행력을 담보하는 장치를 담고 있다. 이 법안은 답보 상태였던 우주항공산업 거점 구축을 실현하는 강력한 법적 토대다. 특히 지원의 일관성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전망이다. 올해 우주항공청 개청 1주년 기념식이 본청이 있는 사천이 아닌 과천에서 열릴 예정이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서야 사천 개최로 변경된 해프닝이 대표적 사례다. 또 우주항공청 신청사 건립을 앞두고 대전을 중심으로 한 연구개발 부서 분리 신설 요구로 혼선이 빚어졌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별법이 ‘나눠 먹기’의 구태를 차단하는 쐐기가 돼야 한다. 우주항공산업의 심장은 발사 기지가 있는 고흥과 항공산업의 중심지인 사천이다. 본격적인 우주항공 시대는 남부권에서 열려야 한다. 하지만 특별법이 우주항공산업의 성공을 보장한다는 안이한 생각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예타 면제는 사업 진행의 신속성에 도움이 되지만, 타당성 평가가 약화되면 사업의 실효성과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을 수 있다. 국가 역량이 집중돼야 할 신산업이라 중앙정부의 주도적 책임과 정밀한 관리 체계가 필수적인데, 지역 단위 또는 부동산 중심의 도시 개발에 그친다면 본래 취지가 훼손된다. 실질적인 산업 클러스터로 발전하려면 정부·지자체·민간 기업의 실행력과 거버넌스가 중요하다. 남부권에 우주항공 벨트를 안착시키려면 지역별 산업 생태계와의 협업과 상생이 고려돼야 한다.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의 4차 발사를 주도한 민간 기업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주 사업장을 경남 창원에 두고 있다. 이밖에 부울경에는 방산·로봇·소재 부문 경쟁력이 있는 기업이 즐비하다. 이 생태계가 전남까지 확장돼 순환 체계를 이뤄야 한다. 특정 지역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육성책은 국토 균형발전의 취지에 부합한다. 지역주의 굴레를 벗고 국가전략으로 추진될 충분한 명분이 있다. 예산 확보, 중앙-지방 컨트롤 타워 정립, 민간 참여 확대, 인재 양성 등 할 일이 산적하다. 우주항공 신산업으로의 전환이 과제다. 특별법은 출발선에 불과하다.
인핸스드 게임즈
올여름 스포츠계에서 ‘인핸스드 게임즈’(Enhanced Games)가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인핸스드 게임즈란 약물과 기록의 규제에서 벗어나 오로지 ‘기록 달성’만을 가치로 삼는 대회다. 세계도핑방지기구(WADA)가 금지하는 약물의 복용이나 각 종목 단체가 불허하는 최첨단 신발, 유니폼 착용을 모두 허용한다.인핸스드 게임즈는 호주 사업가 에런 드수자가 기획한 대회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아들인 트럼프 주니어가 이 대회에 투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내년 5월 24일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에서 제1회 대회가 열릴 것으로 예정돼 있다.주최 측은 금지 약물을 사용해 기록이 크게 나아지는 수영, 육상, 격투기 종목을 인핸스드 게임즈의 주요 종목으로 꼽고 있다. 주최 측이 내건 종목 1위 상금은 50만 달러(약 6억 9000만 원)다. 이들은 육상 100m와 수영 자유형 50m 세계 기록을 넘어서면 100만 달러(13억 8000만 원)를 주겠다고 공언했다. 거액을 내걸고 불법 약물과 과학의 힘을 빌려 신기록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를 포함해 전성기를 지난 선수들은 물론이고 일부 현역 선수들까지 출전을 선언하면서 인핸스드 게임즈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거센 반발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세계도핑방지기구(WADA) 총회 차 부산을 찾은 위톨드 반카 WADA 회장은 3일 “인핸스드 게임즈에 참가한 선수들은 더 까다로운 약물 검사를 받게 될 것이다”며 인핸스드 게임즈에 참가한 선수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뜻을 명백히 했다. 그는 또 “인핸스드 게임즈는 너무나 위험한 행사다. 금지 약물을 복용하게끔 하는 건 반도핑 취지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성토했다. 아시아에서 처음 열리는 WADA 부산 총회에서 금지 약물에 대한 반카 회장의 메시지는 분명했다.5일 열리는 폐회식에서는 스포츠 공정성과 선수 보호, 도핑방지 국제협력 강화를 위한 공동 의지를 담은 ‘부산선언’이 발표된다. 공정과 정직함은 스포츠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가치다. “선수의 가치는 메달이 아닌 정직함에 있고, 승패와 관계없이 인격과 겸손, 정직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스포츠를 존중하는 것”이란 반카 회장의 말처럼 약물에 의지한 신기록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지, 돈으로 작성된 기록이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곱씹어 봐야 한다.
논설주간/이사
강윤경
논설위원/대기자
강병균
논설위원
김승일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김승일의 곰곰 생각] 친애하는 정산 씨
산을 대하는 태도에서 한국은 서양과 큰 차이를 보인다. 서양은 만년설로 뒤덮인 험산 준령을 괴물이 출몰하는 곳으로 여겨 두려워했다. 근대 과학이 무지의 공포를 걷어내기 전까지 산 정상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한반도는 국토 70퍼센트가 산지이지만 최고봉 백두산이 3000m를 넘지 않고, 남한에 한정하면 한라산·지리산 모두 2000m를 밑도는 저산 지형이다. 그래서인지 한민족의 서사는 산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한국인의 삶은 산에서 시작해 산으로 끝난다. 생명이 태어나면 산지에 태를 묻으며 장수와 복록을 빌었으며, 죽으면 산소(山所)로 돌아가 대대로 선산(先山)을 이뤘다. 입산(入山)은 산과 일체가 된다는 의미로 쓰여 꼭짓점을 정복하는 행위와 구분할 정도였다. 특히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이 개국을 위해 내려온 곳이 태백산이었고, 이후 역대 왕조도 도읍지를 정할 때 산세를 첫 조건으로 따졌다. 산업화 시대에 근교 산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해방구였다. “주말에 뭐 해?”는 ‘산에 같이 가자’는 압박이다. 회사 상사는 단합을 핑계로 부하 직원들의 휴일을 빼앗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5060 세대의 억지 산행은 이제 옛말이다. 알록달록한 레깅스룩의 젊은 여성들이 동네 뒷산을 누비기 시작하면서 산길에서 세대교체가 일어난 지 오래다. 배낭에 막걸리 한 통씩 챙겼던 아재, 아줌마 세대는 교류와 여흥에 방점을 찍었지만, 2030 세대는 등산을 스포츠의 한 장르로 받아들인다. 요즘은 안내 산행도 스마트폰 앱이 대세다. 올가을 억새 군락을 보러 창녕 화왕산에 가면서 앱을 이용했다. 버스는 승차 지점인 도시철도 서면역과 동래역 등을 경유하는데, 지정 좌석제라 ‘불편한 동석’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떠들썩한 관광버스를 연상하면 오산이다. 취식 불가에 묵언 수행이 연상되는 고요한 분위기는 귀갓길까지 일관됐다. 하산 후 각자의 방식으로 씻고, 일상복으로 바꿔 입고 차량으로 돌아왔고, 상당수는 등산화를 주머니에 넣고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소음·냄새 제로가 철칙. 주 이용객인 젊은 여성과 ‘나 홀로’ 취향이 만들어 낸 등산 문화의 혁신이다. 소싯적부터 산속에 들기를 좋아해서 해외 출장 때면 일정 외 시간을 쪼개 현지 명산을 들르곤 했다. 일본 도쿄에서는 후지산에 올랐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차로 4시간 이상을 달려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바위산을 걷고 말았다. 일본 파견 근무 때 후쿠오카현 숙소 인근의 시오지야마(四王寺山)는 샅샅이 훑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망한 백제 유민들이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축조한 백제식 산성 유적이 중턱에 흩어져 있어 답사하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부산일보〉 산행 지면을 담당했을 때는 매주 명산만 골라 다니는 호사도 누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 집 뒷산이 천 리 밖 명산보다 낫다! 천하의 절경이라도 오르고 싶을 때 바로 입산이 가능한 발밑 가까운 산만 못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금정산 둘레길과 능선은 나의 최애·최다 산행로다. 부산 금정구 쪽 금정산 자락에 터를 잡고 30년 넘게 산 덕분이다. 문밖 산행로 초입에서 1시간 남짓 걸으면 북문과 동문 사이에 올라선다. ‘쇠의 바다’ 김해평야와 광안리·해운대의 아득한 바다를 조망하며 바장이다 보면 충만감이 밀려온다. 후지산보다, 요세미티 기암괴석보다 엎어지면 코 닿을 삼삼한 동네 금정산이 최고다. 미로 같은 둘레길에서 길을 잃고 탈진했던 쓰라린 순간, 새해 해맞이로 심야에 고당봉에 올라 칼바람을 맞으며 떨었던 무모한 도전, 식물원 위 숲에서 볼더링(암벽 타기)을 즐기던 추억…. 금정산은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한 친구다. ‘정산아, 고맙다!’ ‘금’ 자를 떼고 ‘정산’으로 부르는 게 버릇이 됐다. 한데, 이제 격식을 갖춰 ‘정산 씨’라고 부를 일이 생겼다. 올해 금정산은 대한민국 24번째이자 최초의 도심형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시민단체 제안으로부터 20년 만의 쾌거다. 지난해 대구 동구의 팔공산 도학캠핑장과 등산로에서 시설·서비스가 확 달라져 놀랐던 경험이 겹친다. 23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한 팔공산은 예전의 만만한 팔공산이 아니었다. 금정산은 국내 유일의 도심형 명품 공원이다. 관광객 유치를 핑계로 요란한 개발 사업을 펼칠 게 아니라, 체계적인 생태·탐방로·문화재 관리와 보호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등산 문화의 변화, 등산객 세대교체의 의미를 새겨보면 명확해진다. 변해야 할 것은 금정산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금정산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정산 씨’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찾아나가면 된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김정화의 크로노토프] 도시가 건네는 따스한 위로
달력 한 장만 남은 12월, 시간과 공기는 서로 다른 속도로 흐른다. 도시의 시곗바늘은 여전히 빠르게 돌아가지만, 마음속 시간은 어둑한 빛을 따라 느리게 움직인다. 정리해야 할 일들과 정리되지 않는 감정이 뒤섞이는 시기에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숨 고르기’를 원한다. 자연이 겨울에 속도를 늦추며 다음 해를 준비하듯, 자연의 일부인 인간 역시 느린 박자로 되돌아가려는 감정을 품게 된다. 예술은 그렇게 오래된 감각을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되살린다. 부산은 변화의 파동 속에서 새로운 시간을 덧입히는 중이다. 클래식 전용극장이 문을 열었고, 기존 공간들은 역할을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기술과 AI는 도시의 생활 리듬을 바꾸어 놓았지만, 사람들은 자신만의 속도를 되찾으려 한다. 도시는 원래 ‘서로 다른 시간이 공존하는 지층’이다. 2025년의 부산은 그것을 또렷하게 드러냈다.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진 장소와 사람들이 뒤섞이며, 도시는 어떤 리듬을 선택해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이런 때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는 위로’다. 예술이 주는 위로란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속도를 잠시 내려놓고 스스로 시간을 거두고 바로잡는 작은 숨 고르기다. 공연장은 이런 위로를 몸으로 직접 느끼게 하는 장소다. 공연 전 객석을 감싸는 정적, 서서히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지는 조명, 무대 위 짧은 침묵 같은 작은 순간들은 우리가 잊고 살아온 삶의 속도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따뜻함은 공간을 기억으로 바꾼다”는 바슐라르의 말처럼, 공연장의 온도는 단순한 난방의 온도가 아니라, 오래도록 스며든 몸의 흔적과 시간이 켜켜이 쌓인 기억의 온도다. 아무리 기술이 앞서가도, 이 느린 온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공연장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도 결국 ‘조용한 위로’를 향한 자연스러운 선택일 것이다. 50년 넘게 부산시민회관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위로의 온도를 품어온 곳이었다. 뒤이어 문을 연 부산문화회관 또한 40년 가까이 수많은 예술가의 긴장 어린 숨결과 스태프들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겹겹이 쌓여 하나의 예술적 지층을 이루어왔다. 이 두 장소는 부산에서 공연예술을 업으로 삼은 이들이 의례처럼 거쳐 간 출발점이었고, 관객들에게는 스며든 시간이 되살아나는 익숙한 온기였다. 한 해의 끝자락에 이곳을 찾으면 묵직한 공기 속에 응축된 시간이 자연스레 다가와 빠르게 흘러온 일들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세월의 흔적이 담긴 극장은 단순한 시설을 넘어, 도시의 기억이 잠시 머무는 내적 쉼터가 된다. 이제 부산의 공연 지형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고 있다. 부산콘서트홀은 대규모 기획과 풍부한 음향을 통해 도시 예술 역량을 확장하고 있다. 내년 정식 개관을 앞둔 낙동아트센터는 서부산권에 오래 비어 있던 문화적 공백을 메울 신호탄이다. 오래된 극장은 축적된 시간의 무게로 도시를 지탱하고, 새로운 극장은 관습에서 벗어나 실험을 받아들이는 유연한 리듬이 된다. 극장은 단순한 시설만이 아니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의식 속을 흐르는 응축의 질적 시간”, 즉 지속의 본질이 드러나는 자리다. 공연예술은 관객에게 다른 시간의 흐름을 체험하게 한다. 공연 시간은 다루는 방식에 따라 30분의 연주가 5분처럼 들리기도 하고, 10분의 연주가 1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차이가 베르그송이 말한 질적 시간의 차이다. 지속의 질을 바꿔 관객의 의식 구조를 바꾼다는 의미다. 그래서 낯선 리듬의 변화 속에서도 자신만의 숨표를 찾기 위한 위로의 시간은 더욱 절실해진다. 예술가와 청중의 숨결이 맞닿는 순간, 도시의 예술 생태계는 비로소 다층적 균형을 얻는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즈음, 거창한 결산보다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는 일이다. 자신만의 리듬을 찾는 것은 다음 해를 위한 힘을 비축하는 것이다. 공연장에 잠시 머무는 숨 고르기만으로도 지친 도시의 속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속도를 조율할 수 있다. 빠른 시대일수록 예술의 느린 기술이 필요한 이유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스마트폰은 속도를 멈추고, 숨기운은 자연스레 제자리를 찾는다. 유명한 공연이 아니어도 충분하다. 이름 없는 지역 예술가들의 작은 공연도 그 자리를 찾아줄 수 있다. 12월의 공연장은 단순한 문화 소비의 장을 넘어, 도시의 서늘함을 따스하게 감싸안는 안식처다. 정신없이 달려온 삶 속에서 본래의 리듬을 되찾아주는 둥지와도 같다. 이때 예술은 한 해의 끝자락을 지탱하는 본연의 위로가 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힘이 된다.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이 닿는 공연 하나를 찾아 객석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정신없이 달려온 삶의 속도는 안정되고 다음 해를 살아낼 힘은 천천히 채워진다. 공연장이 건네는 작은 위로를 통해 도시가 몰아쳤던 압박을 떨쳐 내기를 기원한다.
[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음악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공간, 카탈루냐 음악당
스페인 바르셀로나 도심, 라이에타나 거리 주변 골목 사이를 걷다 보면 반전처럼 한 건물이 위용을 드러낸다. 편도 1차로 좁은 길에 면해있지만, 화려한 입면과 모자이크로 장식된 기둥 그리고 유리와 철로 만들어내는 독특한 곡선 형태가 어우러진 카탈루냐 음악당이다. 개인적으로 손꼽는 가장 아름다운 콘서트홀이며, 20세기 초 카탈루냐 민족주의와 모더니즘 예술이 함께 빚어낸 상징적 건축물임과 동시에 바르셀로나가 지닌 문화적 자부심이다. 1908년 완공된 카탈루냐 음악당을 만든 이는 바르셀로나 모더니즘 건축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루이스 도메네크 이 몬타네르이다. 가우디의 명성과 작품들에 가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의 건축적 멘토이자 스승이었던 몬타네르는 구조적 혁신과 장식적 예술을 정교하게 결합한 또 다른 형태의 바르셀로나 모더니즘을 개척했다. 카탈루냐 음악당에서 몬타네르는 “음악이 눈에 보이는 건축”이라는 비유를 화려하게 실현해냈다. 건물의 외관은 처음 보는 이에게 다소 과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하다. 붉은 벽돌과 다채로운 세라믹 외장재가 뒤섞여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기둥은 각각 다른 모자이크 꽃무늬를 두르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당시 카탈루냐 지역에서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의 미학과 역사 의식을 돌과 유리로 재현한 것이다. 그러나 음악당의 진정한 매력은 내부에 들어서는 순간 비로소 완성된다. 천장 중앙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마치 아래로 쏟아지는 태양의 분화처럼 설계되었으며, 공연장 좌우를 채우는 조각과 모자이크는 음악의 신성과 인간적 환희를 동시에 표현한다. 특히 무대 양옆 관객석 위로 웅장하게 솟은 조각들은 음악이 인간을 초월적 세계로 끌어올린다는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드러낸 명장면이다. 몬타네르의 진짜 재능은 화려함이 단지 장식에 그치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는 철 구조와 유리의 조합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당시로선 매우 혁신적인 개방형 공간을 구현했다. 기둥의 수를 최소화한 구조 덕분에 객석 어디서도 시야가 가려지지 않고, 자연 채광이 공연장 전체를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변화시킨다. 기능성과 미학 두 요소를 충족한 셈이다. 카탈루냐 음악당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바르셀로나의 대표적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이 건물의 의미는 단순한 관광지 이상이다. 한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의 문화적 뿌리를 되찾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예술을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모델이다. 건물은 아름답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이 태어난 배경과 의지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에 위대하다. 음악당에 들어선 순간, 우리는 단지 한 시대의 건축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꿈과 자존감이 쌓여 만들어진 하나의 거대한 에너지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데스크 칼럼] 국민 식재료 ‘양산 계란’ 축제로 변신
기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계란에 대해 웃지못할 추억이 하나 있다. 매일 친척이 운영하던 다방에서 병에 가득 담긴 귀한 계란을 집에 가져왔다. 이 계란에는 노른자가 없었다. 흰자만 있는 계란만 먹다 보니 노른자가 있는지 몰랐다. 어느 날 친구 집에서 밥을 먹었고, 노른자가 선명한 계란 반찬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귀가 후 ‘왜 우리 집 계란에 노른자가 없느냐’며 엄마에게 따지듯 물었다. 엄마는 웃으며 “다방에서 쌍화차를 만들 때 노른자를 사용하고 남은 흰자만 가져온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 오래된 기억이 떠오른 것은 50여 년이 흐른 올해 10월 25~26일 양산 황산공원에서 계란을 주제로 한 ‘에그야 페스타’가 열렸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첫 시도된 계란 축제는 초대형 계란말이 커팅식과 유명 셰프들의 스페셜 쿠킹 쇼, 더 에그 배틀, 낙동강 라면, 세계 계란 요리 등 다양한 콘텐츠로 행사 기간 내내 대기 줄을 만들어낼 만큼 인기를 끌었다. 양산 지역 소상공인이 참여한 푸드 존은 준비한 식재료가 조기에 소진될 정도로 대박을 터트리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양산시가 통신사 유동 인구와 카드 매출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타지역에서 2만 8000여 명을 포함한 최소 4만 6800여 명이 축제를 찾았다. 행사장 인근 라피에스타 등 증산신도시와 물금읍 원도심 상가 매출이 행사 직전 주말보다 36%가 증가한 42억 7000여만 원을 기록해 오랜만에 상인들의 환호를 끌어냈다. 방문객 규모에서는 김천의 김밥 축제(10월 25~26일)나 구미의 라면 축제(11월 7~9일)에 비해 뒤졌지만, 첫 행사에서 ‘방문객과 소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와 발전 가능성도 확인됐다. 하지만 개선해야 할 점도 적지 않다. 축제 정체성인 ‘왜 양산에서 계란 축제를 개최하는지’가 방문객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양산은 부울경 내 산란계를 사육하는 밀집 지역 중 한 곳이다. 올해 연간 3억 개 이상 계란을 판매하는 국내 최대 규모 업체의 본사도 양산에 있다. 양산은 계란 산업의 뿌리가 깊은 도시인 것이다. 계란 역사는 1970년으로 올라간다. 오경농장(현 젤란) 김중경 대표가 병아리 500여 마리를 사육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농가의 닭 사육은 흔했지만, 수백 마리 단위의 닭 사육은 처음이었다. 이후 김 대표 형제들과 이웃 농가들이 닭 사육에 앞다투어 뛰어들면서 상·하북을 중심으로 90여 농가가 210만 마리의 산란계를 기르기도 했다. 하루 평균 계란 생산량도 150만 개를 넘겼다. 수 년 전부터는 사육 환경 변화 등으로 인해 13개 농가에서 70만여 마리의 산란계가 사육 중이지만, 여전히 지역 핵심 산업 중 하나다. 행사장인 황산공원 진입로 개선은 시급하다. 행사 기간 황산공원 진입로는 교통 체증으로 몸살을 앓았고, 일부 방문객은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양산시도 문제를 인식해 추가 진입로 개설을 추진 중이지만, 수백억 원대 예산 확보 문제 등으로 늦어지고 있다. 양산시는 4일 오후 물금읍에서 열리는 박완수 도지사와의 도민상생토크와 5일 국민의힘 경남도당 양산시 정책협의회에서 예산 지원을 각각 요청할 예정이다. 방문객 동원엔 성공했지만, 머물게 할 콘텐츠도 필요하다. 방문객의 60.5%가 외지인이라는 사실은 관객 동원에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방문객이 소비하고, 지역을 둘러보고, 숙박까지 이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축제는 일회성 체험으로 끝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역 경제와 직결된 체류형 축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1만년 전부터 인류와 함께 한 계란은 단백질 등 필수 영양소를 갖춘 완전식품이다. 1950~60년대에는 손님이 오거나 생일, 제사 등 특별한 날이 아니면 밥상에 오르지 않았다. 60~70년대는 닭고기와 돼지고기, 찹쌀과 함께 명절 선물이었을 정도로 귀했다. 현재는 K-푸드를 선도하고 있는 치킨이나 김밥, 라면 등 우리나라 음식 전반과 뛰어난 궁합으로 확장 가능성 역시 무궁무진하다. 먹거리 하나로 도시가 변화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계란은 우리 음식 재료의 지존으로 단순한 식재료 그 이상이다. 정체성에 기반한 설득력 있는 스토리텔링과 방문객을 체류시킬 수 있는 콘텐츠, 양산시, 지역 주민, 기업이 함께 할 때 계란 축제는 ‘스쳐 가는 행사’에서 ‘머물게 하는 행사’로, ‘지역 경제와 직결되는 지속 가능한 축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 흰자만 맛보던 계란이 그랬듯, 양산 계란 축제 또한 아직 보여주지 않은 ‘노른자’를 품고 있을지 모른다.
[2030 칼럼] 멸종 위기 시대의 사랑법
‘한 사람당 하나의/사랑이 있었대/내일이면/인류가 잃어버릴/멸종위기 사랑.’ 11월 27일자 부산일보 뉴스레터 B-read(브레드)를 읽다가 문득 떠오른 노래 가사다. 악동뮤지션 이찬혁의 노래 ‘멸종위기 사랑’의 한 대목이다. 떠올린 이유는 단순했다. 올해와 내년에만 부산에서 초등학교 5곳의 폐교가 확정됐다는 기사와 같은 지역에서 출생아 수 증가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기사가 공교롭게도 나란히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 댓글 중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은 댓글은 “사실 우리는 사랑 하나면 되는데”였다. 노래를 만든 이찬혁 역시 사랑이 사라진 시대를 노래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만큼 많은 이들이 사랑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대로 드러낸다. 폐교 소식과 출생 증가라는 상반된 두 기사를 마주하니, 사랑이 사라졌다는 말과 사랑을 찾으려는 마음이 동시에 교차하는 이 노래의 정서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는 한 시사 라디오에서 요즘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에 대해 “과거 가족중심 농경사회에서의 ‘자녀’란 노동력으로 환산되는 생산재였다면, 현재는 소비재에 가깝다”고 말했다. 직설적이지만 많은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은 발언이었다. 자녀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제공해야 하는 시대에서 자라난 우리는, 그 부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계산을 해보면 출산과 육아가 ‘이득’이라고 보긴 어려운 현실을 쉽게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폐교와 출생 증가라는 서로 다른 곡선을 보며 ‘가능성’이라는 말을 꺼내는 건 분명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두 지표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만약 사랑이 완전히 멸종된 시대라면, 출생 지표의 작은 반등조차 나타나기 어렵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여전히 누군가를 책임지고자 하고, 삶을 이어가려 하고, 계산보다 마음에 기대어 선택하는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 시대의 ‘가능성’은 그 작은 결심들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눈에 보이는 숫자로 표현되는 순간은 많지 않다. 연말연시마다 들려오는 유명인의 기부 소식은 익숙하지만, 정작 일상 속에서 꾸준히 발휘되는 작은 사랑들은 통계로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출산율이 지역 단위에서 조금씩 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더 크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계산으로는 결코 ‘득’이 아닐지라도, 누군가는 여전히 미래에 희망을 거는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기분이다. 사실 결혼이나 출산은 ‘사랑’을 좁게 보는 시도이기도 하다. 오늘의 한국 사회에는 전통적인 지표에 담기지 않는 다양한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혈연으로 얽히지 않아도 서로를 돌보며 한 집에서 살아가는 가족이 있다. 2022년 기준 전체 일반 가구의 2.4%인 약 110만 명이 비친족 가구에 속한다. 2021년 대비 증가율은 8.7%로, 같은 기간 1인 가구 증가율(4.7%)보다 높다. 버려진 동물을 입양해 작은 생명을 살리는 개인도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의 ‘동물복지에 대한 국민의식조사’에 따르면, 2024년 반려동물 양육 가구 비율은 전체의 28.6%로 증가하고 있다. 공식 조사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반려동물은 ‘가족의 대체나 확장 형태’로 해석할 수 있다. 최근 감소추세를 보이긴 하지만 아이를 낳지 않더라도, 입양을 통해 책임과 연대를 택하는 보호자도 있다. 사회학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돌봄의 재구성’으로 설명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돌봄은 더 이상 가족 내부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며, 공동체나 비친족 관계·지역 네트워크가 돌봄의 새로운 축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즉 사랑이 멸종된 것이 아니라, 책임과 애정이 향하는 방향이 시대에 맞게 다양해지고 있다는 분석이기도 하다. 이러한 변화는 사랑의 재편, 그리고 사랑의 확장으로 읽을 수 있다. 멸종 위기라는 말은 사랑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예전과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신호일지 모른다. 경제적 효율성을 최우선하는 시대에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계산되지 않는 선택’을 하며 누군가에게 마음을 건넨다. 이것이야말로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사라지지 않는 감정의 내구성일 것이다. 내년 3월 통합으로 문을 닫게 될 부산 영도구의 신선초와 남항초, 사상구의 괘법초, 영도구의 봉삼초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그곳에서 아이들이 배우고 나누었던 ‘사랑을 배우는 법’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 또 다른 세대가 그 자리에 서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며 새로운 사랑의 형태를 만들어갈 것이다.
[김필남의 영화세상] 재능의 무게, 혈통의 벽
17세기 초, 일본 가부키는 일본의 정신을 담는 대표적 전통 예술로 자리 잡았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가부키 무대는 탄생 직후부터 많은 변화를 겪었고, 에도 막부가 ‘풍기문란’을 이유로 여성의 출연을 금지하면서 모든 배역을 남성이 연기하는 독특한 관습이 세워졌다. 이때 남성이 여성 역할을 맡는 배우를 ‘온나가타(女形)’라 부른다.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는 바로 이 온나가타의 삶과 예술, 그리고 영혼 깊숙한 곳의 고뇌를 집요하면서도 섬세하게 따라간다. 남성이 여성 역할을 연기한다는 점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스크린을 채우는 유려하고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그런 선입견을 단숨에 지워낸다. 흥미로운 점은 가장 일본다운 예술을 담은 이 영화를 재일교포 3세 감독이 연출했다는 점이다. 특히 혈연 중심의 계승이냐, 능력의 계승이냐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영화의 핵심 화두는 마치 이상일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국보’는 일본 영화사에 새로운 발자취를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의미 있다. 일본에서만 1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2003년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 2’ 이후 22년 만에 실사영화 흥행 기록을 경신한 기록이라고 전해진다. 175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 일본인들의 눈높이에 맞는 가부키 무대를 재현해야 하는 등의 어려움은 오히려 흥행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에도 얻어낸 결과라 주목할 수 있다. 영화는 야쿠자 보스의 아들로 태어난 ‘키쿠오’가 우연한 계기로 가부키 세계에 발을 들이며, 온나가타로 성장해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때 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동료인 슌스케 또한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즉 영화는 두 사람이 궁극의 예술을 찾아가며 겪는 갈등과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마침내 예술의 정점에 다가서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다룬다. 이는 무려 50여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과이다. 영화의 중심에는 키쿠오와 슌스케가 있다. 가부키를 늦게 시작했음에도 무섭게 실력이 늘어가는 키쿠오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년이다. 슌스케는 가부키 명가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실력이 키쿠오에 미치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열등감을 가진다. 세습 제도가 강한 가부키 세계에서 재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또한 재능이 없는 자가 혈통만으로 자리를 이어받는 것도 치욕스럽다. 영화는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두 사람이 겪는 고뇌와 절망, 질투와 광기, 열정을 그려낸다. 그래서 영화는 무대 위의 화려함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막이 내려간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사투와 치열함을 깊이 들여다본다. 완벽한 무대를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깎아내리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연마의 시간을 견뎌내는 모습은 처절할 만큼 아름답다. 스스로의 결여를 메우려 몸부림치고 타인의 재능을 시기하는 모습까지 숨김없이 담아낸다. 이처럼 감독은 무대를 가득 채우는 배우들의 절제되면서도 유려한 동작, 어둡고 고독한 분장실의 조명을 활용하는 등으로 감정의 층위를 쌓아 올리며 ‘국보’를 움직이는 회화로 빚어내는 것이다. 특히 키쿠오가 첫 주연 무대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천천히 관객을 바라보는 순간, 카메라는 그의 얼굴에 비치는 조명과 흔들리는 숨결을 오래도록 잡아낸다. 그 표정에는 승리와 공허, 희열과 두려움, 모든 감정이 겹겹이 담겨 있다. 이 장면은 ‘국보’라는 영화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며, ‘예술이 한 인간을 국보로 만드는 과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설명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의 전통 예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고독하고 치열한 길을 걸어가는 예술가의 영혼과 마주한다.
부산진 뜨고 해운대 지고… 인구수 역전 ‘눈앞’
“부산은 커피다” 2025 BCAFE 개막 [2025 부산 커피어워즈&페스티벌]
부산 가구당 소득 6349만원, 전국 꼴찌에서 두번째
‘원통 아동학대’ 유치원 대표가 부산시 3급 보좌관… 책임론 확산
부산, 외국인 관광객 300만 찍고 ‘500만 시대’ 간다
6개월 맞은 이재명 정부… 외교 '순항' 경제 ‘불안’, 독주는 뇌관
관객 참여형 ‘부산표 커피 축제’ 로컬 커피 문화의 장 ‘활짝’ [2025 부산 커피어워즈&페스티벌]
3명 숨진 ‘흉기 난동’으로 끝난 온라인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