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여야 앞다퉈 항만법 개정안 북항 개발 활성화로 이어지길
부산항의 중추 역할을 해 온 부산 북항을 재개발하는 사업은 부산의 미래를 바꾸는 역점 사업이다. 하지만 하부 부지 조성 이외에 최대 난제로 꼽히는 랜드마크 부지에 대한 투자와 개발이 지지부진하면서 재개발 부지 대부분이 잡초가 무성한 공터로 방치되다시피 해 왔다. 이 같은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상부 시설에 대한 개발과 분양, 운영 권한을 공공이 맡도록 하자는 내용의 관련 법 개정안이 최근 부산지역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특히나 해당 개정안 발의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 정치권이 경쟁 구도까지 보이는 양상이어서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경쟁의 2회전이라는 평가까지 나온다.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과 관련한 항만재개발법과 항만공사법 등의 개정안 발의에 먼저 포문을 연 것은 국민의힘 소속 곽규택 의원과 조경태 의원이다. 곽 의원이 발의한 관련 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부산항만공사(BPA)의 사업 범위를 상부 시설까지 확대해 공공기관이 핵심 개발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사업 주체인 BPA가 토지 조성과 상부시설의 개발·분양·임대까지 할 수 있게 된다. 조 의원의 발의 내용도 토지 조성과 상부 건축을 하나의 사업구조 안에서 다루는 정부와 지자체, BPA, 민간사업자가 참여하는 통합 협의체 구성을 의무화해 일관된 사업구조를 마련하도록 한 게 핵심 내용이다. 올해 초 발의된 두 의원의 법 개정안에 여권의 유력한 부산시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전재수 의원이 최근 개정안 하나를 더 보탰다. 항만재개발법과 항만공사법 개정을 통해 항만 재개발 지역의 상부 시설까지 포함한 공공 개발을 가능케 하자는 게 주요 내용이다. 여권은 기존 논리를 더욱 명료화했다는 주장이다. 이를 두고 야권에서는 기존 개정안 내용의 베끼기라는 비판이 나왔으나 전 의원 측은 여기에 북항 재개발지 내에 돔 야구장 건립 가능성을 보태고 나섰다. 북항 재개발지 내 야구장 건립은 여야 부산시장 후보군 모두 쟁점화하고 있는 사안이어서 법 개정안 경쟁은 지방선거용 쟁점화로 커지는 모양새가 됐다.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은 두 가지 난제에 봉착해 왔다. 하나는 202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랜드마크 부지에 대한 민간 공모가 유찰되면서 벌어진 장기간 부지 방치와 이로 인한 북항 재개발 활성화 실패다. 이런 현실에서 부산지역 국회의원들의 잇단 항만재개발 관련 법 개정안 발의로 상부 시설 개발 가능성이 넓어진 것은 반가운 소식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북항 재개발 활성화를 위해서는 다른 난제까지 풀려야 한다. 부산지역 대규모 개발 사업에서 반복된 난개발의 방지다. 공공 개발이 개발 내용의 공공성까지 확보함으로써 제대로 된 북항 재개발 활성화가 이뤄질 때라야 성공적 개발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설] 수도권서 멀수록 두텁게 지원… 재정사업 지방 우대 당연
정부가 내년도 예산안 편성지침을 확정했다. 정부가 작년 9월 국회에 제출한 계획에 따르면 2027년 재정지출 규모는 764조 4000억 원을 넘어설 예정이다. 800조 원에 육박할 예산안에 대한 편성지침은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국가 운영 철학과 방향성을 반영한다. 더욱이 이번 지침은 이재명 정부 출범 뒤 첫 예산안을 어떻게 편성할 것인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라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정부는 재정사업과 관련해 지방 우대 원칙을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수도권 일극 체제 극복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방 주도 성장 여건 조성 등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칠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을 정책에 반영했다는 점에서 무척 바람직하다. 정부가 30일 임시 국무회의를 통해 의결한 2027년 예산안 편성지침의 골자는 5극 3특 성장엔진 연계 등 지방 주도 성장, 인공지능 전환(AX) 통한 성장패러다임 구축, 스타트업·청년 등 모두의 성장을 통한 양극화 구조 개선, 안전·평화 기반 구축 등이다. 특히 정부는 내년 예산안부터 수도권으로부터 거리가 먼 지역일수록 더욱 두텁게 지원하는 ‘재정사업 지방 우대 원칙’을 본격 적용한다고 밝혔다. 고사 위기에 놓인 지방에 예산을 적극 지원해야 제대로 된 지역 균형발전을 이룰 수 있다. 더욱이 이 대통령이 취임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강조한 지방 우대 예산 정책이 본격 도입된다는 점에서 큰 기대를 품게 한다. 정부는 또 5극3특 육성을 위해 지역별 주력산업과 연계한 대규모 AX 연구·실증, 남부권 반도체 벨트, AI 실증도시, RE100산단 등 지방 중심의 첨단 거점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거점국립대를 교육·연구의 허브로 집중 육성하고 문화 격차 해소를 위해 인프라도 확충할 계획이다. 공공기관 이전도 적극 추진한다는 방침을 재확인했다. 문제는 속도다. 각 정부 부처와 지방정부는 5월 31일까지 기획예산처에 예산안 요구서를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방정부는 현재 지방선거를 앞두고 어수선한 분위기다. 부산시 등은 지역에 필요한 예산을 반드시 확보할 수 있도록 행정력을 집중, 적극적인 예산안 수립에 나서야 할 것이다. 내년도 예산안은 수도권 공화국이라는 도시국가 체제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 정부도 지방정부가 사업을 제대로 기획·발굴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정부가 지방정부 지원을 위해 신설한 초광역계정과 ‘지방재정전략협의회’의 적극적인 활용도 기대한다. 하지만 정부가 지방 우대 원칙을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지방정부가 관성에 따라 중앙 의존식 소극적인 예산안 요구에 그친다면 지방 주도 성장은 동력을 잃게 된다. 각 부처도 지방정부와의 소통을 강화해 주길 바란다. 내년 예산안이 명실상부한 지방 주도 성장 초석으로 자리매김토록 정부와 지방정부가 남은 두 달여 기간 동안 최선의 결과를 도출하길 당부한다.
[사설] 불붙은 부산시장 경선전, 쏟아지는 공약들 엄정히 따져야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산시장 선거가 본격적인 경선 국면에 돌입했다. 국민의힘은 지난 27일 부산KBS TV 토론을 시작으로 박형준 부산시장과 주진우 의원이 첫 맞대결을 벌이며 경쟁의 막을 올렸다. 행정 경험을 앞세운 현직 시장과 세대 교체를 내건 도전자의 구도가 뚜렷하다. 더불어민주당 역시 같은 날 공천관리위원회 브리핑을 통해 전재수 의원과 이재성 전 부산시당위원장의 2인 경선을 확정했다. 두 후보는 다음 달 3일 방송 토론을 통해 본격적인 경쟁에 나선다. 양당 모두 경선의 막이 오른 만큼, 부산시장 선거는 사실상 본선에 준하는 치열한 정책 경쟁 단계로 접어들었다. 국힘의 이날 토론은 낙동강 개발과 행정통합을 두고 의견차를 드러낼 정도로 치열했다. 박 시장은 주 의원의 낙동강 개발 공약에 대해 “환경 규제와 연약 지반으로 사실상 불가능하다. 백일몽에 불과하다”고 했고, 주 의원은 “현실성만 따지다 보니 시민 삶이 바뀌지 않는다”고 맞섰다. 행정통합을 두고도 주 의원은 “전남·광주에 20조 원이 투입된다면 부울경은 50조 원 규모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박 시장은 “법과 예산 구조를 모르는 이야기”라고 반박했다. 민주당도 공약 대비가 뚜렷했다. 전 의원은 북항 돔구장을, 이 전 위원장은 다대포 테마파크와 서울대병원급 의료관광 클러스터 등을 제시했다. 쏟아지는 공약은 유권자에게 너무나 익숙한 선거 풍경이다. 요는 후보들이 쏟아내는 이런 약속이 과연 어디까지 현실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낙동강 개발 논쟁에서 드러났듯이 환경 규제 하나만으로도 사업은 수년씩 늦어질 수 있다. 북항 돔구장이나 대형 테마파크 역시 수조 원대 자금과 행정 절차 등 복합적인 과제가 뒤따른다. 과거에도 부산은 크고 굵직한 개발 계획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사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거나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한 바 있다. 특히 선거 때마다 반복돼 온 대형 개발 공약은 시민의 기대를 자극하지만, 실제 실행 단계에서는 재원 조달과 환경 규제 등에 막혀 좌초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기에 후보들이 쏟아내는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시장 후보들의 공약에 대한 비판과 검증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부산이 처한 현실은 냉엄하다. 인구는 줄고 청년은 떠나고, 산업 기반은 약화되고, 도시의 활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에 비판 못지않게 절박한 부산의 현실을 돌파할 실질적 해법과 정책을 제시하는 일 또한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과제다. 따라서 후보들은 부산의 생존 전략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가덕도 신공항, 북항 재개발 등 산적해 있는 굵직한 현안을 유기적으로 엮어 도시의 방향을 제시하는 청사진도 필요하다. 양당 경선은 정책의 실효성과 부산의 혁신을 가늠하는 자리여야 한다.
빈소에 들어온 AI
“엄마, 어디 있었어? 보고 싶었어.”2016년 희귀 난치병으로 일곱 살에 세상을 떠난 나연이가 엄마 장지성 씨에게 말을 건넸다. 장 씨는 허공에 손을 뻗어 만질 수 없는 딸을 안으며 오열했다. 스튜디오에 함께 있던 남편과 세 아이도 눈물을 쏟았다. 2020년 2월 MBC 다큐멘터리 ‘너를 만났다’ 이야기다. 제작진은 약 8개월에 걸쳐 나연이의 얼굴과 체형, 목소리를 가상현실(VR) 기술로 복원했다.영상은 유튜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0분 분량의 주요 영상 조회수는 3700만 회가 넘어간다. 하지만 높은 관심만큼 논쟁도 뜨거웠다. 갑작스러운 난치병 진단, 한 달 만에 영영 떠나버린 아이. 고개 떨구며 미안함을 전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을 흔든다. 그러나 죽은 아이를 디지털로 되살려 어머니의 눈물을 콘텐츠로 소비한다는 비판도 거셌다. 치유인가, 고통의 재생산인가. 다만 사람들은 그것이 다큐멘터리라는 틀 안에 있기에 한발 물러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로부터 6년이 흘렀다.최근 일부 장례식장 빈소에 AI로 구현한 고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생전 사진과 음성 데이터를 학습한 인공지능이 화면 속에서 고인의 얼굴로 조문객에게 인사를 건넨다. “와줘서 고마워” “건강하게 잘 지내” 유족은 마지막으로 고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위로가 됐다고 한다. AI 기술 업체들은 ‘디지털 추모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사업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그러나 빈소에서 이 광경을 마주한 조문객들의 반응은 엇갈린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의례의 공간에서 AI가 고인을 흉내 내는 장면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거부감의 뿌리에는 AI가 고인의 데이터를 학습한 소프트웨어일 뿐, 결코 그 존재를 대체할 수 없다는 직관이 자리한다. 사회적 쟁점도 만만치 않다. 고인의 명시적 동의 없이 외모와 목소리를 복제하는 행위는 인격권 침해 소지가 있고, 유족의 슬픔을 겨냥한 상업화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죽음 앞에서 기술은 겸손해야 한다. AI가 고인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순간, 이별은 유예되고 애도는 교란된다. 슬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부재를 받아들이고, 기억을 추려내고, 비로소 놓아주는 그 긴 과정이 애도다. 기술이 그 과정을 단축하고 위로해주겠다는 약속은 달콤하지만 위험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잊히지 않는 기억’이지, ‘떠나지 못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닐 것이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김승일 칼럼] 돌아온 로맨스
‘데이트는 죽었다.’ 미국 〈뉴욕타임스〉 2013년 1월 11일 자 기사 ‘구애의 종말?’(The End of Courtship?)의 진단이다. 전통적인 연애 방식이 사라지면서 진지한 관계 발전의 기대감이나 상호 구속력이 없는 ‘훅업’(hookup)과 ‘행아웃’(hangout)이 데이트 문화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관계가 목적이거나 썸만 타다 마는 식의 속성 관계다. 〈뉴욕타임스〉가 지적한 로맨스의 위기는 사회경제적 구조 변화와 직결된 현상이다. ‘3포’(연애·결혼·출산 포기)로 시작해 ‘n포’로 악화한 한국은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서 있다. 취업·주거난과 독박 육아 앞에 달콤하거나 가슴 시린 사랑의 감정은 사치스러울 수밖에 없다. 2030 세대의 이른바 ‘갓생’(God·生) 심리에 비춰 보면 연애는 점점 ‘비효율적인 선택’으로 밀려난다. 감정 낭비를 줄이려는 ‘갓생’의 논리에서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현실 로맨스와의 괴리감이 커지니 극 중의 대리 체험에 몰입하는 것도 어색하기만 하다. 사랑을 감정 노동쯤으로 치부하는 세태에 순애보를 다루는 드라마와 영화는 눈길을 끌기 어렵다. 어느새 범죄와 권력 암투, 사적 복수, 재난 소재가 K콘텐츠의 주류가 됐다. 하지만 최근 멜로 장르가 이례적인 흥행 행진을 하면서 업계와 평단은 원인 분석에 분주하다. 올 초 가난한 청춘의 사랑을 그린 영화 ‘만약에 우리’가 대작 외화 ‘아바타’를 밀어내고 롱런했고, 넷플릭스 ‘이 사랑 통역되나요?’는 글로벌 무대를 달구면서 K로맨스의 가능성까지 과시했다. 가상 연애 시뮬레이션을 다룬 ‘월간남친’, 이성 교제에 서툰 30대의 심리를 다룬 ‘미혼남녀의 효율적 만남’, 그리고 고교 첫사랑을 긴 호흡으로 그려내는 정통 로맨스 ‘샤이닝’까지 달달한 사랑 이야기가 풍년이다. 갑작스러운 로맨스의 소환을 스릴러, 판타지 등 자극적인 장르에 지치며 순수함을 찾게 되는 역설적 현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새로운 관계 맺기조차 효율과 비용으로 계산하는 현대인의 심리가 투영된 서사라는 행간 분석도 있다. 여기서 빠져서는 안 되는 질문이 있다. 로맨스의 귀환은 낭만의 회복인가, 아니면 일시적 유행인가. ‘결혼 건수 8년 만에 최대치.’ ‘출생아 수, 19개월 연속 증가세.’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 0.99명.’ 국가데이터처가 25일 발표한 올 1월 인구 통계를 전하는 뉴스는 환호와 감격 일색이다. 혼인 증가에 세계 최저 출산율 그래프까지 고개를 든 것이 반가운 변화다. 현상 유지 기준인 합계출산율 2.1명에 턱없이 못 미치지만 0.7대에서 0.99로 껑충 뛴 것은 추세 반전의 신호탄으로 읽힌다. 극 중 로맨스의 부활과 현실 트렌드 변화에 상관성이 있는지 주목되는 대목이다. 결혼이 늘고 출산이 뒤따르는 선순환이 복원되는 것은 사회의 지속 가능성이 걸린 문제다. 지난 20년간 청년 세대와 신혼부부 지원 정책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는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 한국의 저출생 현상을 ‘문명적 위기’로 규정했던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가 “한국인 3분의 2가 사라질 것… 북한군은 (침공을 위해) 그냥 걸어 내려오면 된다”는 말은 실언으로 끝나야 한다. 다만 통계 변화가 일시적 신호인지, 구조적 전환의 시작인지 따지는 것은 필수다. 통계의 착시 효과로 낭패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한국은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로 2022~2023년 혼인과 출산에서 ‘바닥’을 찍었다. 2022년 19만 1690쌍 결혼이 역대 최저치였는데 이듬해 1%, 2024년 14.8%, 2025년 8.1% 증가했다. 선행 지표인 결혼 증가에 출생도 시차를 두고 상승 반전했다. 2023년 23만 28명까지 추락했다가 2024년 3.6%, 2025년 6.8% 신장했다. 올 1월 합계출산율 1명 턱걸이의 낭보는 이런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 흐름이 비대면 시대가 끝나면서 미룬 결혼식이 몰린 이연 효과에 그친다면 곤란하다. 전무후무한 ‘바닥’을 딛고 올랐기 때문에 상승 폭이 커 보이는 기저 효과도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일본의 속절없는 하락세는 반면교사다. 합계출산율은 2021년 1.3명을 기록한 이후 지난해까지 줄곧 떨어져 1.15를 밑도는 수준까지 밀렸다. 한국과 달리 혼인이 출생을 견인하지도 않고 코로나 변수와도 무관하게 전 지표가 동반 하락하는 고착 국면이다. 소멸로 가는 급행열차의 속도가 잠시 늦춰졌다고 해서 안심하고 낙관하면 금물이다. 이연·기저 효과로 인한 ‘깜짝 반등’에 그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일본처럼 추세 반전의 모멘텀을 찾지 못해 대세 하락으로 복귀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일시적 반등이 아닌 구조적 전환이 우리 사회에 남겨진 과제다. 근본 해결책은 연애·결혼·출산 포기가 합리적 선택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며, 이는 로맨스 흥행이 지속되는 조건이기도 하다.
[김대래의 메타경제] 특별한 결심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부산이 중앙정부에 특별한 요구를 처음 했던 것은 해방된 지 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1949년 부산에서는 부산특별시 승격 운동이 전개되었다. 부산상공회의소가 앞장을 서고 부산시는 물론 정치인들까지 참여한 시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때 부산 인구는 50만 명을 향해 가고 있었다. 5만 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들과 50만 명에 육박해 가는 부산을 동격으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국회의 문턱을 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서울과 경남지역 의원들의 반대가 심했다. 서울과 같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은 서울지역 의원들과 경남에서 알짜배기인 부산이 떨어져 나가는 데 불만을 가진 경남지역 의원들이 지속적으로 반대를 하였다. 그리하여 특별시를 직할시로 바꾸면서까지 국회에 올렸던 승격안은 네 번이나 부결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 1월 1일 박정희 정부의 선물로 부산직할시가 되었다. 오늘날 부산의 성장과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직할시 승격을 거론한다. 직할시가 되면서 경남도를 거치지 않고 중앙정부를 상대할 수 있게 되고, 도시계획도 스스로 짤 수 있게 되었다. 직할시에 걸맞은 직제도 만들 수 있게 되어 대외적 위상도 높아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유일한 직할시였던 부산이 이 특별한 지위를 부산 발전의 특별한 동력으로 제대로 활용해 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직할시로 승격된 지 꼭 10년 후인 1973년에 우리나라는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하면서 공업 구조의 대전환을 선포하였다. 이 흐름에 동참할 수 있는지 여부가 이후 도시 발전의 승패를 가르는 거대한 분수령이었다. 많이 지적된 대로 부산은 반대의 길을 갔다. 오히려 부산은 노동집약적 공업에 더욱 집중하였고, 중화학공업은 외면하였다. 그 결과는 성장동력의 약화였다. 이것이 선택의 실패였는지 여건의 미흡함 때문이었는지는 아직 제대로 논의된 바 없다. 잘 나가던 노동집약적 공업에 집착한 것이 선택의 실패라면, 여건의 미흡은 중화학공업을 받아들일 땅의 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직할시가 되면서 부산이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가용 용지를 넓히는 것이었다. 직할시가 된 지 15년이 지난 1978년에야 낙동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 때 비로소 김해의 대저와 명지를 부산에 포함시켰다. 부산의 대표 공업단지가 된 녹산을 편입한 것은 1989년에 가서야 가능하였다. 경남에서 떨어져 나온 부산이 경남지역으로 시역을 확대하는 것은 정말 힘들었다. 2년 전 부산은 직할시 승격 이후 또 한번 정부에 특별한 요청을 하였다.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이 그것이다. 부산광역시를 물류, 금융 및 디지털 첨단산업 분야에서 국제적 경쟁력을 가진 글로벌 허브도시로 육성하자는 제안이다. 발의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그동안 여러 차례 국회 소관 상임위에 회부됐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번번이 뒤로 밀리면서 실질적인 논의는 이뤄지지 못했었다. 그러던 것이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마침내 빠른 입법 절차에 들어가는 모양새이다. 선거를 앞두고 처리를 압박한 국민의힘의 요구와 시민들의 표를 의식한 더불어민주당의 전격 수용이 가져온 결과이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은 서로의 성과라고 입씨름을 벌이고 있지만, 그동안의 행태들을 보면 어느 쪽도 성과를 온전히 가져가기에 마뜩찮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보다 지금 다투어야 할 것은 어떻게 하여야 특별법이 부산의 미래에 정말로 특별한 성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두고 중론을 모으는 것이다. 사실 특별법이 만들어진다고 해서 부산이 요구하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균형발전에서 충분히 경험했듯이 법안은 잘 만들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추진은 지지부진하기가 일쑤다.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이 부산에 어떤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인가는 부산의 능력과 노력에 달려있다. 더욱이 지방선거 이후 닥쳐올 광역권 통합과 같은 또 다른 특별법 속에서 부산이 글로벌 허브도시를 잘 추진해 나가는 것은 매우 기술을 요하는 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공을 놓고 다투는 것보다는 부산이 어떻게 특별법 이후를 준비하고 대응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어야 한다. 선거가 두 달 앞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경계하여야 할 것은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정치적 논쟁은 본질을 흐리고 추진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특별법을 그야말로 부산 발전의 특별한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부산의 ‘특별한 결심’이다.
[데스크 칼럼] 너의 이름은
부산은 다리의 도시다. 산·강·바다를 모두 품은 삼포지향(三抱之鄕)의 부산 지형은 아름답지만 살아가기에 장애가 되기도 한다. 이 같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480개가 넘는 다리가 도시 곳곳을 연결하고 있다. 부산은 거가대교에서 시작해 가덕대교~신호대교~을숙도대교~남항대교~부산항대교~광안대교까지 7개 다리가 이어진 총 52㎞의 해안순환도로망을 자랑한다. 부산의 다리는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길이로 따지면 동서고가로는 전국에서 가장 긴 다리 2위, 광안대교는 3위다. 오래전부터 부산을 상징했던 영도다리는 애잔하다. 6·25 전쟁 당시 피란민들에게 영도다리는 혹시 헤어지면 만나기로 한 최후의 약속 장소였다. 예전 아이들은 자라면서 ‘영도다리에서 주워 왔다’라는 소리를 한 번쯤은 들었다. 전쟁 통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영도다리 주변에 그렇게 많았던 탓이다. 광안대교는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다리다. 화려한 야경을 자랑하는 광안대교는 최근 처음 출전한 야간 경관 국제 어워드에서 당당히 세계 2위에 올랐다. 그동안 유럽에서 독식해 오던 도시조명상 수상을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광안대교가 이뤄낸 것이다. 부산항대교는 무서운 다리로 통한다. 부산시티투어버스가 부산항대교 진입 램프에 들어서면 “롤러코스터 타실 준비 되셨나요”라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모르고 진입했다가 운전자가 무서워서 차를 세우는 바람에 119 구조대가 램프를 걸어서 올라가 대신 운전해 주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크루즈선이 지나갈 수 있도록 아파트 20층 높이에 세워진 부산항대교의 나선형 램프는 부산의 또 다른 매력이 되고 있다. 이처럼 다리는 부산 관광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이들 대부분이 차량 위주라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리는 원래 사람이 지나가라고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 차보다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만 것이다. 이달 초 개통한 부산의 첫 보행교 수영강 휴먼브리지는 그래서 더 반갑다. 수영구와 해운대구 APEC나루공원·영화의전당을 잇는 이 다리는 벌써부터 사람들로 북적인다. 수영강에 놓인 다리는 15개에 달한다. 수영강의 여러 다리를 많이 걸어 봤지만 보행교는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벚꽃까지 만발한 수영강 일대를 걸으며 금상첨화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다 좋은데 ‘휴먼브리지’라는 다리 이름이 불만이다. 수영강에는 이미 민락교·수영교·좌수영교·과정교 같은 이름의 다리들이 있다. 이처럼 다리 이름은 그 장소의 역사나 지리적 특징을 담아 다른 곳과 구별되게 짓는다. 휴먼브리지는 국내외 어디에 있는지 모를 특색 없는 이름이다. 좋은 우리말 이름 놔두고 왜 정체불명의 영어 이름인가. 원래 휴먼브리지는 건축이나 도시 설계 분야에서 보행자 전용 교량을 뜻하는 용어다. 정식 이름을 정하기 전에 임시로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서울 서초구 몽마르뜨공원과 서리풀공원을 연결하는 보행교도 처음엔 휴먼브리지로 불렀다. 정식 개통을 하면서 서초(瑞草)의 옛 지명을 살린 ‘서리풀 다리’라는 이름으로 정해져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가평 자라섬에 설치된 보행교도 처음엔 자라섬 휴먼브리지로 추진되다 지금은 ‘자라섬 출렁다리’로 불리고 있다. 휴먼브리지는 기껏 근사한 공원을 짓고 이름을 ‘동네 공원’이라고 부르는 격이다. 누가 나를 볼 때마다 “이 사람아!”라고 부르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사람을 위한 다리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 역설적으로 사람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당신이 한번 아이디어를 내어보라”라고 한다면 ‘영화 도시’ 부산 영화의 전당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살려서 ‘영화교’로 부르자고 제안하고 싶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이 다리를 걸어 보자는 의미다. ‘부귀영화’할 때의 영화(榮華)나 ‘다리를 걸으면 젊어진다(Young)’라는 중의적인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아름다운 다리에 이런 의미까지 더해지면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까. 역사적으로 부산을 대표하는 인물의 이름을 가져와도 좋을 것 같다. 안용복은 조선 숙종 시절, 미관말직의 수군이었지만 목숨을 걸고 일본으로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현재 수영구 수영동에 있던 경상좌수영 소속이었으니 수영강과도 인연이 깊다. 수영강에 세운 다리에 이름을 붙이기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 더 좋은 이름이 나올 것이다. 다리 이름은 한번 정해지면 수십 년, 수백 년간 불리게 된다. 아무리 시민 명칭 공모를 통해 결정된 이름이라도, 시민 다수가 아니라고 하면 바꿔야 한다. 제대로 된 이름을 불러줘야 존재는 비로소 생명을 얻고, 본연의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박종호 문화스포츠부 선임기자 nleader@busan.com
[노트북 단상] '올해는 달랐다'를 기대하며
부산 야구 팬들이 ‘올해는 다르다’를 속는 셈 치고 다시 외치는 야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매서운 기세로 시범경기 단독 1위에 오르고 여세를 이어 정규시즌 개막 2연전을 모두 이긴 롯데 자이언츠. 기대감은 다시 한번 커지고 있다. 올해는 정말 다를까. 야구 전문가들은 롯데를 올해 프로야구 10개 구단 중 하위권으로 분류한다. 지난 겨울 자유계약선수(FA) 영입은 없었고 전지훈련 불법 게임장 사태로 주전급 선수들이 전열에서 이탈했다. 다른 팀들이 내실 있게 전력을 보강한 것과 비교하면 어쩌면 당연한 예상이다. 하지만 ‘공은 둥글다’는 야구의 오랜 격언이 정답임을 외치듯 롯데는 올해 ‘언더독’의 반란을 꿈꾸고 있다. 거의 매년 시즌 초반 승률이 좋아 ‘봄데’라고 부르기긴 하지만, 올 시즌 초반의 팀 분위기는 기대감을 키우기에 충분하다. 개막 시리즈 2경기에서 홈런 7개가 터지며 우승 후보 삼성 라이온즈를 완파했다. 지난해 팀홈런의 10%가 개막 2연전에서 나왔다. 9회말 위기에서 삼진을 연거푸 잡아내는 신인 투수도 등장했다. 2경기 만에 롯데의 상승세에 야구팬들과 전문가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시즌 초반 돌풍과는 다르다는 구체적인 분석들이 나온다. 위기는 누군가에게 기회가 됐다. 주전들이 빠졌고 새로운 선수가 기회를 포착했다. 지난해 고승민과 2루 경쟁을 했던 백업 내야수 한태양이 주전 자리를 꿰찼다. FA 계약 이후 부진한 모습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것 같았던 노진혁도 1루 글러브를 끼고 이를 갈고 있다. 신인 이서준과 2년차 이호준은 “미래 주전급 선수다”라는 감독의 칭찬을 발판 삼아 라인업 한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김태형 감독은 “경쟁이 자연스럽게 팀을 정상 궤도로 올려놓는다”며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김 감독은 “요즘 애들은 잘할 때는 잘하는데 잘 안될 때 버티는 힘이 약해”라며 롯데의 지난 시즌 아픔을 에둘러 표현했다. 지난해 3위를 달리던 롯데는 8월 12연패를 당하며 무너져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올해도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은 없다. 다만, 지난해의 경험은 큰 자양분이 될 것이 분명하다. 분명 위기는 찾아올 것이다. 잘 안되더라도 팽팽한 경쟁 구도 속에 ‘내가 잘못해서 지면 어떡하지’하는 물러섬이 아닌 ‘내가 잘해서 위기를 넘자’는 시즌 초반의 정신을 발휘한다면 위기는 길지 않을 것이다. 그 위기를 넘는다면 가을야구는 더 이상 남의 집 잔치가 아닌 ‘사직 잔치’가 될 수 있다. 야구는 7번 실패하고 3번만 잘해도 박수를 받는 스포츠다. 3할 타자는 잘 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투수도 9회 중에서 3실점을 해도 좋은 투수다. 실패해도 된다. 와르르 무너지지 않고 위기를 넘어가는 힘. 올해도 안되겠네 하며 ‘하이고’ 하지 않는 한 해. 올 시즌 롯데 자이언츠의 슬로건 ‘GO HIGH!’(높게 올라가다)를 팬들이 사직에서 크게 외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롯데의 가을야구 진출 소식을 기사로 전하며 첫 문장으로 ‘올해는 달랐다’라고 쓸 수 있기를.
[2030 칼럼] 설계도 밖의 부산
봄이 오면 사람들은 벚꽃 길을 찾아다닌다. 봄을 만끽하려고 이곳저곳 다니는 모습은 다분히 낭만적이다. 나도 봄이 오면 그리워하는 곳이 있다. 부산 금정구 장전동의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다. 연두색 새순이 돋으면 봄이 왔다는 걸 알리고, 무성한 녹음이 짙어지면 여름이 왔다는 걸 알리던 길이다. 나의 초등학교 등하굣길은 가로수 길과 함께했다. 하지만 그 길은 금정구와 북구를 잇는 산성터널이 생기면서 사라졌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동네의 그늘이 되어주던 수십 그루의 느티나무가 베어졌고, 초등학교의 교문은 위치까지 바뀌었다. 학교 앞 골목에 즐비하던 문방구들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넓은 도로와 터널, 아파트의 높은 담벼락이 새롭게 자리 잡았다. 가로수 그늘 아래 오가던 발걸음들은 조용해졌다. 나뭇잎 흔들리던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던 골목에는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남았다. 최근 ‘세계디자인수도 부산’ 협정식 디자인 통해 변화 가능성 높게 봐 F1963·영도 깡깡이 마을 좋은 사례 시민, 오래된 것 잃지 않을 권리 있어 어떤 과거 지키고, 어떤 기억 남길지 우리 마음속 질문 던질 때 도시 달라져 터널은 필요한 인프라다. 산성터널은 산이 많은 부산의 광역 물류와 교통망을 위한 도시의 선택이었다. 그 불가피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라진 것들을 떠올릴 때, 느티나무 가로수 길은 단순한 추억의 부재나 아쉬움만으로 치부될 수 없다. 동네란 단순히 물리적 공간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서예원의 할머니가 수십 년째 같은 자리에 앉아 붓을 드는 시간, 빵집 앞에서 아이 손을 잡고 멈추는 시간, 퇴근길 치킨을 포장해 가는 시간. 이런 것들이 모여 동네가 된다. 한 동네가 형태를 바꾸면, 오랜 시간 같은 동선을 공유하며 쌓아온 관계들도 한꺼번에 흩어지게 된다. 가게가 문을 닫고 이웃이 떠나는 건 개인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함께 만들어온 시간이 지워지는 집단의 상실이다. 동네의 작은 변화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파문을 일으킨다. 핀란드 헬싱키 디자인 랩(Helsinki Design Lab)이 소개한 한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지역의 수영장에서 이용객이 급격히 줄어든 일이 있었다. 시의회는 곧바로 시설 노후화를 원인으로 지목했고 대대적인 리모델링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실제 원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수영장으로 향하던 버스 노선이 변경되면서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긴 것이다. 문제는 건물이 아니라 버스 시간표였다. 이 사례는 도시가 작동하는 방식이 얼마나 미세한 요소들에 의해 좌우되는지를 일깨운다. 시민의 일상은 거창한 건물보다, 오히려 익숙한 동선과 사소한 연결 위에서 형성된다. 결국 도시를 설계한다는 것은 '무엇을 새로 지을 것인가'보다 ‘사람들의 움직임과 관계가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단절되는지’를 먼저 묻는 일이어야 한다. 며칠 전 ‘2028 세계디자인수도 부산’ 협정식이 열렸다. 세계디자인기구(WDO)는 새 건물을 짓고 화려한 조명을 입히는 것은 자본이 있으면 어느 도시든 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디자인이라고 봤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달랐다. 이 도시가 과거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공간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지였다. 부산을 완성된 도시가 아닌, 디자인을 통해 자신을 바꿔나갈 가능성이 높은 도시로 평가한 것이다. 옛 공장의 골격을 살린 문화복합공간 F1963, 조선소 골목을 남긴 영도 깡깡이 마을은 사라질 뻔한 문화를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그 방식이 예외적인 성공 사례로만 남을 것인지, 아니면 개발의 기본 문법이 될 것인지가 관건이다. 우리가 도시 개발을 이야기할 때 최우선 과제로 삼아온 것들이 있다. 더 넓은 주거 공간, 더 빠른 교통, 더 편리한 인프라들이다. 그동안은 이런 기준들이 필요했다. 지금도 여전히 고려해야 한다. 다만 그 기준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더 크고 더 빠른 것들이 들어설 때, 그 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들 말이다. 이제는 개발 논리와 함께 동네가 사라질 때 함께 끊기는 관계들도 눈여겨봐야 한다. 우리 세대는 나고 자란 공간을 잃고 있다. 시민의 삶에는 더 나은 것을 제공받을 권리만이 아니라, 오래된 것을 잃지 않을 권리도 있다. 그 상실이 누적될 때 도시가 무엇을 잃어가는지, 행정만이 아니라 시민도 함께 물어야 한다. 어떤 과거를 지키고 어떤 기억을 다음 세대에 넘길 것인지, 그 질문이 설계도보다 먼저 시민의 마음속에서 시작될 때 도시는 달라진다. 봄마다 느티나무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그 그리움이 도시를 바꾸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좋은 도시는 안목 있는 시민이 만들어낸다. 2028 세계디자인수도 부산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부산다운 것이 무엇일지 함께 물어야 할 때이다.
[편집국에서] 지역소멸 멈추는 지방선거를 바라며
다시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선거는 팍팍한 일상의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희망 고문’이라 냉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번 선택으로 내 생활이, 아이들의 삶이 바뀔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희망을 간절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절망이 깊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인구가 감소하는 지역의 절망은 수도권 일극주의 폐해에서 비롯됐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으로 가장 고통받는 곳과 전국 최저의 출생율을 기록하는 곳이 서울이라는 사실은 수도권 일극주의가 국가 전체의 재앙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부산이 절망을 돌파하기 위한 비전으로 제시한 대표적 어젠다는 글로벌특별법과 행정통합이다. 하지만 이들 어젠다가 겪고 있는 현실을 지켜보는 부산 시민은 착잡하다. 글로벌특별법은 부산이 대상이고, 행정통합은 부산·경남과 울산이 적용 대상이라 논의 범위가 다르지만, 지역의 역량을 극대화해 일자리를 늘리고 사람을 불러 모아 지역 발전은 물론 정체된 국가 성장의 새로운 동력으로 거듭난다는 희망은 동일하다. 우울하게도 이들 부산의 비전이 수도권 중심의 정치 지형에서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같은 처지이다. 글로벌특별법은 그야말로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지난 26일 국회 행안위 전체회의를 겨우 통과한 이 법안은 2024년 1월 25일 부산 전체 18명의 국회의원과 당시 여당 원내대표까지 가세해 최초 발의됐다. 부산을 싱가포르·상하이·홍콩과 같은 글로벌 해양도시로 육성하기 위한 특별법으로, 물류·금융 산업 발전 지원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2023년 11월 엑스포 유치 실패로 낙담한 부산 민심을 달래기 위해 시작된 법안이지만, 부산의 미래를 견인할 방안이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었기에 당시 야당인 전재수 의원을 포함해 부산의 모든 의원이 법안 발의에 참여했다. 당시 여당인 국민의힘은 당론으로 채택 했지만, 처리에 속도를 못 냈고 결국 넉 달 뒤 21대 국회가 종료되면서 폐기됐다. 22대 국회에서 재발의 되긴 했지만, 2년 넘게 표류하다 지방선거를 두 달여 앞둔 이달 중순께 다시 주목받게 된다. 전북·강원·제주 관련 이른바 ‘3특법’이 먼저 처리되면서 글로벌특별법의 ‘찬밥 신세’가 더욱 도드라졌다. 박형준 부산시장의 삭발과 유력 부산시장 후보인 전재수 의원의 역할로 행안위 문턱을 가까스로 넘었다. 행정통합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재명 정부의 ‘선착순 당근’으로 최대 이슈로 부상했다. 정부는 통합 지방정부에 대해 연간 5조 원, 4년간 최대 20조 원 규모의 재정 지원과 함께 차관급 부단체장 신설, 공공기관 이전 우선권 부여 등 파격적인 지원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중앙정부가 일시적으로 지원금을 주는 방식으로는 행정통합의 취지를 제대로 살릴 수가 없다. 가까운 마산·창원·진해 통합의 사례를 통해 부산과 경남은 지역 주민의 동의 없는 행정통합의 부작용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들 지역은 물리적 통합은 했지만, 통합의 시너지를 이끌 수 있는 설계가 엉성했다. 통합 이후 해당 지역 인구와 일자리 모두 줄어들었고, 세 지역의 갈등은 계속됐다. 정부의 지원마저 흐지부지되면서 통합 무용론이 나오는 실정이다. 지역민의 공감대와 통합 지역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치밀한 설계가 행정통합의 핵심이다. 실질적 권한 이양 없이 지원금만 내미는 방식으로는 지방분권의 취지를 살릴 수 없다. 선거는 기존 정치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미국의 정치학자 존 킹던이 말한 ‘정책의 창이 열리는 순간’의 조건 중 하나다. 그는 사회가 문제라고 인식하는 ‘문제의 흐름’과, 정치권이 움직이는 ‘정치의 흐름’, 그리고 대안이 준비된 ‘정책 대안의 흐름’이 서로 맞물릴 때 유효한 정책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너무 늦은 감이 있지만 ‘지역 소멸’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인지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선거로 ‘정치의 흐름’이 바뀔 수 있는 지금,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대안이 제시되어야 한다. 지역 소멸은 양대 정당인 국민의힘이나 더불어민주당 집권 시기에도 가속화했다는 점에서, 상대방을 탓하는 분노의 정치는 대안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역 문제를 국가적 의제로 전환시키고, 중앙의 정책 결정 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해 국가발전의 판을 바꾸는 리더십이다. 수도권 중심의 정치 지형이 바꿀 수 없는 ‘게임의 룰’이라면, 중앙 정치의 역학을 꿰뚫는 전략적 사고와 지역의 이해를 국가적 언어로 번역하는 소통 역량, 그리고 방향을 잃지 않는 철학적 일관성으로 생존 위기에 처한 지역의 난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역소멸을 막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선거로 지역소멸의 시계가 멈추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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