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지선 공식 선거운동 돌입, 부울경 미래 위한 정책 대결을
오늘부터 6·3 지방선거와 국회의원 보궐선거의 본격적인 레이스가 시작됐다.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한 후보자들은 내달 2일까지 13일 동안 차량을 이용한 거리 유세, 대담, 신문·방송 광고, 현수막 게시, 선거 공보물 발송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유권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전국 곳곳에 선거 벽보가 붙으면서 세 대결도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부산·울산·경남에선 부산시장, 울산시장, 경남지사 등 광역단체장을 비롯해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교육감 후보들이 유권자의 표심을 잡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펼친다. 향후 4년간 부울경의 미래를 설계하고 책임질 지역 일꾼을 뽑는 축제의 장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전국적인 관심이 집중된 부산시장 선거의 후보자들은 이날 시민 밀착형 유세에 나선다.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후보는 “부산이 침체한 상황에서 성과 없는 시정을 혁신하겠다”는 시정 심판론과 함께 “해양수도를 완성해 부산 대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는 “민주주의 방파제 역할을 해 온 부산이 이재명 정권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힘을 모아주시길 바란다”며 “보수 대통합을 넘어 시민 대통합을 완성해 기필코 승리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김상욱, 국힘 김두겸 울산시장 후보와 민주당 김경수, 국힘 박완수 경남지사 후보 등도 슬로건을 내세워 표심 호소에 나선다. 부울경(PK) 수성과 탈환을 위한 여야의 총력전이 펼쳐질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PK 선거 열기가 극과 극으로 나뉘고 있다는 점이다. 최대 격전지로 떠오른 부산시장 선거가 과열 양상을 보이는 반면, 부산시교육감 선거는 ‘깜깜이 선거’로 흐르고 있다. 김석준, 정승윤, 최윤홍 후보가 나서 지난해 재선거와 똑같은 인물 구도가 형성된 데다, 모두 사법리스크를 안고 있어 유권자들의 피로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울산 정치권도 후보 단일화 진통을 겪고 있다. 국힘 김두겸 후보와 무소속 박맹우 후보의 울산시장 후보 단일화를 두고 보수 진영에선 압박과 폭로전이 이어졌다. 진보 진영에선 민주당과 진보당의 단일화 룰을 둘러싼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이런 모습들이 유권자들의 냉소와 무관심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 공식 선거운동 이전까지 이번 지방선거는 지역의 미래 비전을 놓고 벌이는 경쟁보다는 진영 간의 대리전과 단일화 등 정치공학만 난무했다. 정작 중요한 지역은 사라지고 거대 양당의 대결 구도만 도드라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생활 정치의 근간인 지방선거에서 부울경 주민의 삶과 미래를 위한 명확한 비전과 정책 대결로 나아가야 한다. 부울경은 인구 감소, 산업 기반 약화를 겪고 있어 신성장 산업 동력 확보와 혁신적인 교육 정책이 무엇보다 절실한 상황이다. 후보자들은 지역을 살릴 비전과 현실성을 갖춘 공약, 정책을 앞세워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것이다.
[사설] 삼성전자 노사 성과급 갈등, 국가 경제 미칠 충격이 걱정
슈퍼 사이클 도래로 역대 최대 호황을 맞았다는 국내 반도체산업이 그에 따른 양지의 따스함보다는 이면에 도사린 거대한 음지의 기운이 더 두드러지는 암울한 국면을 맞았다. 국내 대표 반도체기업인 삼성전자의 성과급 배분을 놓고 노사가 벌이는 첨예한 갈등의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조는 앞으로도 타결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당장 21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간다는 강경 입장을 밝혔다. 삼성전자의 파업은 노조와 회사만 당사자일 수 없는 문제다. 공식 조정 절차가 아닌 '자율 협상'의 모양새를 취했지만 고용노동부 장관이 직접 20일 오후 삼성전자 노사를 임금 협상 테이블로 모은 건 그 때문이다. 초기업노조 삼성전자 지부 위원장은 20일 사측과의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예정대로 21일 총파업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사후 조정을 벌인 사흘 동안 중앙노동위원회가 제시한 조정안에 노조가 동의했으나 사측이 끝내 거부했다는 게 노조가 밝힌 이유였다. 당초 협상 쟁점은 성과급 규모에 초점이 맞춰졌으나 조정 과정에서 적자 사업부 보상을 놓고 노사 간 의견 차이가 컸다는 후문이다. 삼성전자 측은 성과에 대한 보상인 성과급을 적자 사업부에까지 보장할 경우 사업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진다. 노사는 이번 협상 내용이 국내 산업계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양보의 끈을 서로 놓아버린 듯하다. 삼성전자 노사 협상 결렬 소식이 알려지자 당장 청와대가 긴급히 움직이고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영업이익에 대해서 이익을 배분받는 것은 투자자가 하는 것”이라며 “이익 관철 노력도 적정한 선이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노란봉투법을 필두로 친노동 정책을 펼쳐온 정부가 이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삼성전자 노조를 향한 시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평가다. 이에 앞서 김민석 국무총리도 긴급조정권 발동 검토를 언급한 바 있어 국가가 개입할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형국이다. 고용노동부 장관까지 노사 합의 결렬 직후 직접 주재에 나선 것은 이 같은 정부의 의지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삼성전자 노사 갈등은 여러 모로 국내 노동계에 새 이정표를 남겼다. 천문학적 초과 수익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놓고 주주와 노동자를 등치시키려는 시도는 그 시작점에 불과했다. 그 시도는 노동자가 회사 초과 수익을 일정 비율로 나눈다면 회사 손실에 대한 비율까지 떠안을 수 있느냐는 물음으로 진화했다. 이는 노동시장 유연화 필요성 논의로까지 이어지면서 노동계를 둘러싼 논란을 더 키우는 중이다. 문제는 그 사이 반도체 시장을 둘러싼 국제적인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진다는 점이다. 그 어떤 이정표도 경쟁에서 도태된 이후의 폐허엔 세울 수가 없다. 삼성전자 노사가 양보의 끈을 서둘러 다시 잡아야 하는 이유다.
[사설] 동북아 안보·경제 질서 급변, 한일 협력 중요성 커진다
19일 경북 안동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은 양국의 셔틀외교가 친교의 복원을 뛰어넘어 급변하는 안보·경제 질서에 공동 대응하는 전략적 협력 관계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서로의 고향을 방문하며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동북아 안보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 대응책을 모색했다. 그 배경에는 중동 사태로 촉발된 에너지 공급망 불안과 북·중·러 결속,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 강화가 있다. 이 사활적 과제 앞에 한국과 일본은 동병상련의 입장에 처한 이웃이다. 이날 두 정상이 다짐한 안보와 경제 협력의 약속은 선언에 그쳐서는 안 되고 실천과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그간 한일 양국은 자유로운 통상 질서와 북한의 비핵화를 핵심으로 한 동북아 안보를 위해 협력했다. 이번 안동 회담을 통해 양국의 의제가 에너지 안보로 확장됐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이날 이재명 대통령은 언론 발표에서 “액화천연가스(LNG)·원유의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면서 비축 정보의 공유와 소통도 강조했다. 이어 다카이치 총리는 원유의 공동 비축과 스와프 거래까지 제시했다. 양국이 중동산 원유와 원자재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중동 전쟁 장기화에 공동 대응을 선언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작지 않다. 한일 양국은 호르무즈 해협 리스크에 적극 대응하고 글로벌 공급망 불안을 최소화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하지만 한일 양국 앞에 난제가 쌓이고 있고 해결 과정은 순탄치 않다. 북한은 핵 능력을 고도화하고 있고, 러시아 지원 파병 이후 친러 행보를 가속하고 있다. 미중 스몰딜 이후 대만을 상대로 한 중국의 군사적 위협도 커지고 있다. 이 와중에 미국은 동아시아 안보 책임을 약화하는 언행으로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만을 마치 협상 카드처럼 취급하는 발언으로 한국과 일본 등 인접 지역 동맹국의 우려를 자초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번영을 이룬 한국과 일본이 손을 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셔틀외교가 연 협력의 기회를 실질적 성과로 이어 가려는 노력이 양국 모두에 요구된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는 적지 않은 부침이 있었지만, 세계 질서 격변기를 맞아 안보와 경제 현안을 공동 대응 체제로 묶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역사 갈등을 이유로 일본이 소재 수출을 규제하며 보복한 것이 불과 7년 전 일이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과 책임 회피로 형성된 국민적 반감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정부는 일본의 책임 있는 자세를 지속적으로 촉구해야 한다. 또 에너지 협력 등이 국내 산업과 소비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투명하게 설명하고 이해와 협조를 구해야 한다. 이웃과의 협력은 필요하지만, 원칙 없는 교류는 오래가지 못한다. 안동 회담은 상호 필요성 확인에 그치지 않고 신뢰를 행동으로 증명하는 계기가 돼야 한다.
만세와 천세
만세(萬歲)는 오래도록 살기를 바라는 뜻이다. 만수(萬壽)도 마찬가지. 둘 다 윗사람이나 귀한 손님에게 올리는 축원의 말이었으나, 이후 쓰임이 갈라졌다. 만세가 황제 숭배와 국가 질서를 상징하는 말로 굳어진 것이다. ‘황제 폐하 만세’는 ‘오래 사세요’가 아니라 ‘황제의 통치 질서가 영원하라’는 정치 구호다. 송나라 때 술자리에서 함부로 만세를 외쳤다가 불경죄로 곤장을 맞고 죽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사용이 엄격했다.만세의 위계질서는 중국 밖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다. 명나라 사신이 세종대왕에 올린 인사를 보면 수직적 세계관이 뚜렷하다. ‘황제는 만만세하고, 전하(세종)는 천천세, 세자(문종)는 천세 하소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즉위식과 왕실 경사 때 신하들이 ‘주상전하 천세, 천세, 천천세’를 함께 외쳤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조선에서도 만세는 금기어였던 것이다.중국 황제의 전유물이었던 만세는 근대에 극적인 변화를 겪는다. 3·1운동 때의 ‘대한독립 만세’는 획기적인 구호였다. 황제가 독점하던 상징 체계를 민중이 무너뜨리고 스스로 역사의 주체임을 선언한 것이다. 독립 선언문에 없는 만세삼창이 방방곡곡을 뒤덮은 것은 기존 질서를 깨뜨리는 민중의 집단적 열망의 분출,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집단 지성’의 발현이었을 것이다.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의 역사 왜곡 논란이 만세, 천세를 소환했다. 21세기 입헌군주제 한국을 배경으로 한 국왕 즉위식에서 신하들이 천세를 연호한 것이다. 주권 국가 시대에는 맞지 않는 오류다. 디즈니+에서 방영돼 세계적인 팬덤을 얻었기에 자칫 중국의 역사 가로채기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에 빌미를 줄 우려도 나온다.만세와 천세는 영어 자막에서 똑같이 ‘Long live~’로 번역된다. 군주제에서 비롯된 이 표현은 3·1운동 이후 완전히 다른 정서를 획득한 ‘K만세’의 느낌과 동떨어져 있다. 스포츠 경기에서, 촛불 집회에서, 아이가 태어날 때 모두가 함께 외치는 기쁨과 연대의 감탄사이기 때문이다. 외국어로 오롯이 전달되지 않는 ‘한(恨)’과 ‘정(情)’처럼, 만세는 한국인의 기억과 감정이 응축된 고유 명사로 봐야 한다. 드라마 제작진은 문제의 장면을 수정하겠다고 약속했다. 해당 장면을 만세로 바꿀 때 번역 없이 만세(Manse) 그대로 두면 어떨까. K콘텐츠의 선한 영향력에 힘입어 ‘K만세’의 정신이 전 세계에 각인되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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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재논의할 개헌이라면 재정 분권부터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행정통합 논의가 자취를 감췄다. 부울경을 집어삼킬 듯 달아올랐던 행정통합이란 화두가 정작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논의 자체가 묻혀버린 것이다. 통합의 시기와 절차를 놓고 여야가 벌인 날 선 공방이 그저 샅바싸움에 불과했다는 허탈감만 감돈다. 행정통합 논의는 사라졌지만 그 과정에서 던져진 질문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방분권, 특히나 재정분권은 대체 왜 이뤄지지 않으며 대체 언제쯤 실현되는가. 이 문제를 유권자가 찬찬히 들여다보게 된 점은 분명한 성과다. 행정 서비스가 고도화되면서 지방정부가 떠맡아야 하는 부담도 날로 커지고 있다. 하지만 이를 추진할 재정권은 중앙부처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당장 지방세 비중은 국세와 비교하면 턱없이 낮다. 2024년 기준 국세와 지방세 비율은 75%대 25%이다. 지난 1월부터 국무조정실 주도로 범정부 재정분권 TF가 가동 중이다. 연내 70% 대 30%까지 지방세 비율이 올라갈 것이라는 관측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지역 관가에서는 여전히 멀었다는 평가다. 국가 예산의 60% 이상이 지방에서 최종적으로 지출되는 까닭이다. 행정 서비스와 국가사업의 절반 이상이 지방에서 이뤄지지만 돈줄은 중앙부처에서 쥐고 놓아줄 뜻을 보이지 않는다. 이 기형적인 구조는 건국 이래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중앙부처는 사업성을 앞세워 지역을 옥죄어올 것이 자명하다.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몰려 있고, 수도권과 지방의 인구 격차는 날로 벌어진다. 예산의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놓고 봤을 때 수도권을 이겨낼 수 있는 지방은 대한민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당장 수도권에서는 자다깨면 새로 추진되는 게 GTX 노선이다. 중앙부처 구성원이 수혜를 직접 누리는 GTX 노선은 수도권 곳곳으로 뻗어나간다. 이제는 수도권의 범주를 충청권까지 확장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 중앙정부가 재정 권한 이양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중앙부처가 권한을 틀어쥔 구조로는 지방 경쟁력을 키우는 데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조세법률주의 원칙에 따라 지방정부는 임의로 세금을 만들거나 세율을 정할 수 없다. 지방정부는 중앙부처가 정해준 틀 안에서만 움직일 수밖에 없다. 부산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외국인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상반기가 끝나기도 전에 외국인 관광객 100만 명이 다녀갔다. 그러나 노다지 같은 이 흐름을 공공 인프라를 위한 세원으로 끌어들일 방안이 전무하다. 관광세나 숙박세 등으로 공공 재원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된 세계 주요 도시들과는 큰 차이점이다. 독자적인 과세권이 없는 지방은 뻔히 물 들어오는 게 눈에 보이는 데도 노를 젓지 못하는 셈이다. 중앙부처가 움켜쥔 재정권은 세입에만 그치지 않고 세출까지 이어진다. 중앙부처에서 지원받은 예산 상당 수에는 딱지처럼 용처가 세세히 지정되어 있다. 지역 실정에 맞게 유연하게 집행하기 힘든 이른바 '경직성 예산'이다. 부산 뿐만 아니라 전국 지자체에서 포괄보조금을 확대해 달라고 애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방정부를 중앙정부 산하 기관 정도로 여기는 인식을 바꾸고 진정한 지방분권을 이루기 위해 재정분권 논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결국, 권한과 조직보다 중요한 건 돈이다. 사실 행정통합 논의와 더불어 재정분권 이야기가 나왔을 때도 공직 사회에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았다. 늘 지방분권은 중앙 정치권의 수사였다. 섣부른 기대는 배신감만 낳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8일 광주를 찾아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겠다며 개헌 재추진 의사를 밝혔단다. 지방선거와 동시에 추진하려던 개헌 논의가 무산되자 선거 이후 이를 다시 정국 의제로 올리겠다는 것이다. 개헌 논의가 다시 시작된다면 지방분권은 그 어떤 의제보다 무게감 있게 다뤄져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재정분권이 있어야 한다. 지방정부가 스스로 세입 기반을 마련하고 지역 상황에 맞게 재정을 운영할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할 시기가 됐다. 지방이 살아야 국가 경쟁력도 살아난다는 말은 이제 지겹다. 비대해진 수도권이 버겁다면서도 재정과 권한을 절대 놓지 않는 그 모순을 중앙 부처는 돌아봐야 한다. 재추진될 개헌이 진정 국가 시스템의 미래를 고민하는 논의라면 답은 분명하다. 지방분권, 그 가운데서도 재정분권부터 시작해야 한다. 권상국 사회부 차장 ksk@busan.com
[중앙로365] 격전지 변수는 2030 투표율
선거 결과는 투표함을 열기 전까지 모른다. 6·3 지방선거가 딱 그렇다. 두어 달 전만 하더라도 이번 지방선거에선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이 예상됐다. 수도권·충청은 물론 부산·경남·울산에서도 민주당 지지율이 국민의힘을 크게 앞섰다. 심지어 ‘보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에서도 여권 후보가 우세하다는 여론조사가 여럿 나왔다.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부겸 전 총리가 다시 등판한 건 그래서였다. 많은 여권 인사가 ‘김부겸이라면’ 대구에서도 민주당 깃발을 꽂을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경북 빼고 다 이긴다”며 ‘15대 1 압승론’을 꺼냈다. 겨우 두 달 전 이야기다. 선거가 다가올수록 격차는 좁혀지는 양상이다. ‘가족 오락관’처럼 ‘몇 대 몇’으로 표현한다면 민주당이 유리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문제는 격전지가 점차 늘고 있다는 것이다. 부산시장 선거는 전재수·박형준 두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 내로 붙기 시작했다.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도 마찬가지다. 11일~19일 공개된 6건의 여론조사 중 3건이 하정우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한동훈 무소속 후보의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 안에 드는 걸로 나왔다. 온 국민의 시선이 집중된 선거인 만큼, 북갑 선거는 전체 판세에도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다. 압승이냐 신승이냐, 참패냐 석패냐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여 압승 예상 뒤집고 격차 점점 좁혀져 부산시장·북갑 선거도 오차범위 접전 청년층 적극 참여 등 변수가 승패 좌우 2030 남성 40%가 보수 성향 무당층 또래 여성의 민주당 지지율도 낮아져 투표율 상승 전략 적중 땐 국힘 유리해 격전지에선 작은 변수가 승패를 가른다. 청년층 투표율도 그 변수 중 하나다. 청년들은 2020년대 들어 상황에 따라 정당 지지를 달리하는 스윙 보터 역할을 해왔다.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4050세대와 국민의힘 지지세가 강한 60대 이상이 팽팽하게 맞붙는 상황에서, 2030 표심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선거 결과가 좌우됐다. 2022년 대선과 지방선거가 그랬다. 이번엔 양상이 조금 다르긴 하다. 2030이 행사하는 표는 승패를 가름하는 캐스팅보트가 되기보다, 여권을 견제하는 표가 될 공산이 크다. 달리 말하면 청년층 투표율이 높을수록 국민의힘이 유리할 거라는 의미다. 과거엔 청년들이 투표를 많이 할수록 보수 정당이 불리했다. 청년층의 민주·진보 정당 지지세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당은 항상 2030세대의 투표를 독려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2년 제18대 대선 당시 “투표율이 77%를 넘으면 말춤을 추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제는 반대가 됐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2030의 민주당 지지율은 70대 이상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낮게 나타난다. 고령층이 가장 보수적이라는 공식은 깨진 지 오래다. 2030에서 민주당 지지율 평균을 끌어내리는 건 남성들이다. 한국갤럽은 월별 통합 여론조사에서 연령대에 더해 성별로도 구분된 조사 결과를 제시한다. 지난 1일 공개된 4월 통합 여론조사에서 18~29세 남성의 민주당 지지율은 17%, 30대 남성은 30%를 기록했다. 70대 이상 남성(38%)보다도 낮다. 4050 남성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이다. 물론 2030 남성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건 무당층이다. 40%쯤 된다. 중요한 건 이 무당층이 민주당보다 국민의힘에 가까운 무당층이라는 점이다. 최근엔 2030 여성도 또래 남성과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이들의 민주당 지지율 역시 6070세대 보다 낮다. 무당층 비율도 비슷하다. 남성들만큼 보수화한 건 아니지만, 얼마 전까지 2030 여성이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청년층의 진보 이탈 배경에는 세대 간 이해 충돌이 있다. 최근 여러 분야에서 청년층과 중장년층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지난해 국민연금의 보장성 강화 여부를 놓고 세대 간 갈등이 빚어졌던 게 대표적이다. 정년 연장, 민생 지원금, 건강보험 보장 범위 확대 등에 관한 시각도 엇갈린다. 청년들은 ‘미래의 자원을 당겨서 현재에 투입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이재명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40대~60대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만큼 이 세대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청년 세대 여론 지형은 쉽게 바뀔 것 같지 않다. 청년들이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해서 국민의힘에 표를 줄 거란 보장은 없다. 사실 그동안 국민의힘이 2030세대로부터 얻었던 지지는 반민주당·반이재명 정서에 따른 반사이익 성격이 강했다. 윤석열 정부 당시 청년층 국정 지지율이 매우 낮았음에도 지난 대선에서 범보수 후보들이 상당한 표를 얻을 수 있었던 건 그런 맥락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건 국민의힘에 잠재적 위험 요인이기도 하다. 청년층은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보수 정당을 지지해 준 전통 지지층과는 성격이 다르다. 국민의힘이 정치적 효능감을 안겨주지 못한다면 청년들은 투표장에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 이번 선거 격전지 결과를 2030이 결정지을 거라고 보는 이유다.
[다른 시선으로] 부모의 마음
내가 받은 나쁜 걸 대물리지 않겠다는 것이 좋은 부모의 마음이다. 좋은 부모의 마음이 있다면 세상에는 나쁜 부모의 마음도 있다. 이 둘의 대비가 2023년작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의 핵심이다. 학폭 가해자 박연진이 피해자 문동은에게 말한 대로, 가족은 때로 가장 큰 가해자다. 문동은의 모친 정미희는 자식을 잘 키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문동은이 대단한 점은 그 사실을 비관해 엄마를 닮지 않고, 그녀에게서 나쁜 걸 닮지 않으려 애쓴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박연진 또한 가족의 가해로 그리 된 것임을 통찰할 수 있었다. 문동은은 박연진의 모친 홍영애를 만나, 박연진에게 마치 모성을 가진 듯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보라고 말한다. 홍영애 또한 박연진을 잘 키울 생각이 전혀 없었고, 그를 알아챈 문동은은 합당한 방식으로 그들의 죄를 되갚아준다. 돈이 많든 적든, 내가 겪은 무엇이든지 내 자식에게 대물리기를 원한 점에서 두 엄마는 같다. 강력범죄자인 자신을 치료하겠다고 나선 주성학을 거꾸로 죽인 강영천은, 좋은 부모의 마음을 질투한 자다. 주성학의 아들 주여정은 강영천이 왜 부친을 살해했는지를 나중에야 깨닫는다. 내가 받은 나쁜 걸 남들이 대물림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그 질투의 핵심이다. 그를 거스른 면모를 문동은에게서 보았기에 주여정은 거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한때 제 억울함을 강영천처럼 풀어낼 수도 있었을 그였기에 그렇다. 강현남은 그녀와 그녀의 딸을 상습 폭행하는 남편을 모녀의 인생에서 지우는 것이, 내가 받은 나쁜 걸 대물리지 않을 유일한 방법임을 예감한다. 남을 해하는 복수와 내 딸을 살리는 일 사이를 괴로워하면서, 강현남은 나와 더불어 내가 받은 나쁜 걸 대물리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문동은을 연민한다. 그 순간 문동은과 강현남은 서로의 부모가 된 것이다. 살면서 가난한 사람을 이해해 본 적 없는 박연진의 남편 하도영은, 문동은을 만나 처음으로 자기가 몰랐던 세계를 알아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식이 그저 나를 닮길 바라는 일은 주로 가진 자의 병폐다. 그것이 지닌 한계를 하도영은 문동은을 만난 뒤에 비로소 알아본다. 그는 자기 핏줄 아닌 딸을 향한 좋은 부모의 마음을 간직한 채 딸과 함께 한국을 떠난다. 내가 받은 나쁜 것을 대물리지 않겠다는 마음은 친부모자식에만 매여 있지 않다. 인간은 때로 혈육에게 누구보다 잔혹하고, 그렇게 나쁜 걸 받아안게 된 인간들 중 일부는 그것을 대물리지 않기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한다. 그냥 주어지지 않는 그 마음에는 혈육을 매개로 한 원본이 없다. 나쁜 걸 대물리지 않겠다고 마침내 힘겨이 결심한 사람은, 누구나 그 순간 부모가 된 것이다.
[김필남의 영화세상] 물속에서 건져 올린 공포
원한이 얼마나 깊고 억울한지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산 자를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는 귀신. 물에서 죽은 이가 다른 이를 끌어들여야만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이 오래되고 무서운 물귀신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 봐도 이 낡은 서사가 인기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뻔한 줄 알면서도 속절없이 빠져드는 것, 그것이 바로 공포의 매력일 것이다. 이상민 감독은 바로 그 익숙한 두려움을 영화 ‘살목지’에 담는다. 충청남도 예산군에 실재하는 저수지 ‘살목지’는 공포 팬들 사이에서는 익숙한 장소다. 예능프로그램에서 소개된 뒤 유명한 심령 스팟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차례 소비된 장소에서 새로운 공포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또한 30억 규모의 중저예산 작품인 데다 스타 캐스팅에 기대지도 않았으니, 기대감이 크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한국 공포 영화 흥행 순위를 다시 쓰며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한국 공포 영화 흥행 다시 쓴 '살목지' 익숙한 물귀신 이미지 낯선 방식으로 360도 파노라마 카메라로 만드는 공포 이야기의 뼈대는 간단하다. 로드뷰 서비스 회사에서 살목지를 촬영한 화면에 정체불명의 형체가 포착된다. 귀신이 있을지 모른다는 소문이 횡행한 장소에 선뜻 가겠다는 사람은 없다. 게다가 살목지에서 한 차례 촬영을 마친 ‘교식’이 연락이 닿지 않은 것도 불안감을 키운다. 그 자리에 ‘수인’이 자원한다. 선배 교식의 실종이 살목지와 무관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수인과 함께 살목지로 향하는 팀원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넘친다. 공포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 세정, 로드뷰 촬영 업체 직원이자 형제 사이인 경태와 경준, 그리고 장비 문제로 뒤늦게 합류하는 수인의 전 남자친구 기태까지. 여기에 연락이 끊겼던 교식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면서 기이한 일들이 연달아 벌어진다. 그리고 살목지 근처를 지키고 있는 돌탑은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으로 쌓였지만, 어느 순간 위협이 되어 발목을 잡는다. ‘살목지’는 장르의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 영화다. 귀신을 믿지 않는 인물부터 차례로 사라지는 전개, 금기를 어기는 행동들, 팀이 불신과 분열로 무너지는 과정. 공포 영화의 관객이라면 누구나 다음 장면이 눈에 선할 것이다. 그런데도 깜짝 놀라게 만드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며 긴장하게 만든다. 특히 영화 속 공포는 저수지를 둘러싼 공간에서 발생한다. 사방으로 트여 있음에도 인물들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내비게이션은 엉뚱한 곳을 가리키고, 시간도 멈춰 있는 듯하다. 언제든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완벽하게 닫힌 공간이 바로 살목지인 것이다. 게다가 핸드헬드 카메라가 만들어내는 흔들림, 어디를 향해도 불안을 유발하는 360도 로드뷰 화면, 영화 중반 이후 쉬지 않고 들려오는 기계음 사운드는 서사가 아니라 공포를 ‘체감’하게 만든다. 또한 익숙한 물귀신의 이미지도 낯선 방식으로 변주된다. 수면에 비스듬히 떠 있는 시체처럼, 혹은 세이렌처럼 무리 지어 움직이는 존재들은 일정한 형태를 갖추지 않는다. 물에 풀어진 수초처럼 신체의 일부만 드러내거나 소리로만 존재감을 드러낸다. 실재인지 환상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이 두려움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이때 살목지는 뻔한 줄 알면서도 놀라게 만드는데, 이는 머리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살목지의 공포는 성공이다. 한국 공포 영화 가운데 최다 관객 수를 기록한 ‘살목지’는 영화 밖에서도 묘한 장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실제 촬영지인 저수지에 방문객들이 몰리면서 “자본주의로 퇴마한다”는 농담까지 나온다. 억울한 원혼이 떠돈다는 공간이 영화 한 편으로 관광지가 된 셈이다. 공포를 두려워하면서도 끝내 찾아가 보고 싶어 하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가장 낯선 공포인지도 모른다.
[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팔만대장경, 차이와 반복이 만들어낸 미학적 형식
5월 24일,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경남 합천 해인사를 찾는다. 세계문화유산 해인사 장경판전에 보관된 세계기록유산,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화엄경, 법화경, 아미타경 등 불교의 핵심 경전이 집대성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완전한 불교 경전의 보고(寶庫). 그러나 이 거대한 유산에서 미학적으로 떠오르는 질문은 따로 있다. 무엇이 새겨져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새겨졌는가가 바로 그것이다. 팔만대장경의 또 다른 감동은 바로 텍스트 이전의 형식에, 의미 이전의 감각에 있다. 팔만대장경은 정확히 8만 1258판의 목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슷한 크기, 엄정한 배열, 끝없이 이어지는 문자들. 그것은 완벽한 동일성의 세계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그 질서는 조용히 흔들린다. 여기서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떠오른다. 반복은 동일성을 복제하는 일이 아니라 차이를 생성하는 사건이다. 나뭇결은 저마다 다르고, 칼끝의 떨림도 다르다. 새겨진 획의 깊이와 번짐, 글자의 미세한 균형 또한 조금씩 다르다. 각각의 목판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품고 있다. 대장경의 장엄함은 이 무수한 차이가 거대한 반복 속에서 이루어내는 질서에 있다. 수백 년 전 몽골 침입 이후 국가적 위기 속, 장인의 손끝에 일었을 망설임, 한 자를 완성하고 다시 다음 글자 앞에 앉았을 그 인내와 집중. 그 마음은 나라의 안녕을 비는 서원,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구도적 염원,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대장경의 숭고함은 단지 규모에서 오지 않는다. 그 위대함은 내용만으로도 다 헤아릴 수 없다. 끝내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 끝없는 손길의 염원, 바로 그것이 숭고를 만들어낸다. 자연통풍과 습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장경판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읽기보다 먼저 멈추게 된다. 끝없이 이어진 목판 서가는 그 자체로 거대한 설치 미술이라 하겠다. 오래된 나무 향은 서늘한 공기와 섞여 천천히 코끝에 스미고, 낮게 스며든 빛은 목판 위를 고요히 흐른다. 발걸음은 느려지고, 말소리는 낮아진다. 생각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바빴던 시간, 흔들리던 생각들, 쉬이 지치던 날들이 잠시 멈춘다. 판각을 새기는 수백 년 전 장인들의 모습, 한 자 한 자 새기며 붙들었던 집중과 인내 속의 그 염원이 떠오른다. 머릿속에서 문득 반가사유상의 고요한 미소가 떠오른다. 팔만대장경은 단지 경전을 새긴 목판이 아니다. 인간의 기다림과 기도, 그리고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 했던 마음을 나무 위에 새긴 시간의 숲이다. 초파일을 앞두고 다시 생각한다. 수없이 반복된 손길이 어떻게 아름다움이 되는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어떻게 위대한 미학적 형식이 되는지를. 미술평론가·철학박사
[기고]부산·울산·양산 원헬스의 빈칸, 함께 채울 시간
매슬로우는 안전을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로 보았다. 먹고사는 문제 다음에 오는 삶의 토대, 곧 내 가족과 이웃이 예측 가능한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믿음이다. 안전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무너지는 순간 일상의 모든 질서가 흔들린다. 그런데 부산이 과연 그 믿음의 도시인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한 가지 빈칸을 직시해야 한다. 사람과 환경, 동물의 건강을 하나로 보는 원헬스의 시대에 부산·울산·양산권(부울양권)에는 수의과대학이 없다. 이 문제는 대학의 이해나 어느 한 기관의 요구로만 볼 일이 아니다. 부울양은 500만에 가까운 시민이 생활권을 공유하는 동남권 핵심 축이다. 항만과 공항, 산업단지, 대학병원과 연구기관, 해양바이오와 반려동물 문화가 겹친 지역이기도 하다. 이만한 생활권에 수의학 교육·연구·방역 인력 양성의 거점이 없다는 것은 원헬스 안전망의 분명한 빈칸이다. 시민의 삶 가까이에 있는 안전 인프라가 지역 안에서 충분히 갖추어져 있는지 이제는 물어야 한다. 코로나19는 우리에게 불편한 교훈을 남겼다. 감염병은 행정구역을 묻지 않고, 인간의 병은 인간 사회 안에서만 시작되고 끝나지 않는다. 인간과 동물, 환경의 건강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감염병 대응 역시 이 세 영역을 함께 보아야 한다. 이제 방역은 병원이 문을 연 뒤의 치료만이 아니라, 항만과 공항, 축산과 반려동물, 야생동물과 환경 데이터가 함께 움직이는 과학이어야 한다. 원헬스는 먼 미래의 구호가 아니라 이미 우리 도시가 준비해야 할 현실의 안전 전략이다. 수의과대학은 동물병원을 늘리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첫째, 지역 학생들이 수의학을 배우기 위해 외지로 떠나야 하는 현실을 줄일 수 있다. 청년에게 교육 기회의 지역 격차는 곧 지역의 미래 격차다. 부울양권에 수의학 교육의 길이 열리지 않는다면, 이 분야의 인재는 계속 외부로 빠져나가고 지역은 필요한 전문성을 외부에 의존하게 된다. 지역에서 배우고, 연구하고, 일할 수 있는 사다리를 만드는 것은 청년을 붙잡는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기도 하다. 둘째, 수의학은 다른 보건의료·생명과학 분야와 결합할 때 더 큰 힘을 낸다. 의학, 간호학, 약학, 치의학, 한의학, 생명과학, 환경공학, 해양바이오 분야가 수의학과 만나면 감염병 예방, 식품안전, 동물복지, 재난관리, 바이오산업까지 이어지는 융합 교육과 연구가 가능하다. 이는 한 대학의 경쟁력만이 아니라 지역 교육과 연구 생태계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일이다. 특히 동남권이 미래 먹거리로 삼고 있는 바이오헬스, 해양바이오, 스마트 방역 분야와도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셋째, 국제도시 부산의 신뢰를 높인다. 부산은 이미 수많은 관광객과 물류, 인적 교류가 오가는 개방형 도시다. 앞으로 가덕도 신공항이 들어서고 글로벌 중심도시의 비전이 구체화될수록 부산의 관문 기능은 더 커질 것이다. 그러나 개방성은 안전망 없이는 위험이 될 수 있다. 항만과 공항, 도시 방역과 동물 감염병 대응을 함께 설계할 수 있는 원헬스 기반은 국제도시가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이다. 세계와 더 많이 연결될수록, 지역 안의 방역과 연구 역량은 더 단단해야 한다. 지방선거가 다가오면 많은 공약이 나온다. 도로와 철도, 산업단지와 개발사업도 중요하다. 그러나 6월 3일의 선택이 단순한 개발 경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시민의 안전, 청년의 교육 기회, 도시의 국제적 신뢰를 함께 높이는 과제가 의제로 올라야 한다. 부울양권의 수의학 교육·연구·방역 거점 구축은 어느 한 정당의 깃발 아래 놓일 사안이 아니다. 부산시와 울산, 양산의 행정, 지역 대학과 산업계, 시민사회, 그리고 여야 정치권이 중앙정부를 향해 초당적·초정파적으로 요구해야 할 생활안전 의제다. 사람만 건강한 도시는 없다. 동물이 아프고 환경이 흔들리면 사람의 안전도 흔들린다. 부울양이 진정한 국제해양수도권을 꿈꾼다면 원헬스의 마지막 퍼즐을 채워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경쟁의 언어가 아니라 공동의 언어다. 어느 기관이 앞에 서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500만에 가까운 시민의 안전을 위해 이 지역에 반드시 필요한 기반을 함께 만드는 일이다. 부울양 원헬스의 빈칸을 이제는 함께 채워야 한다.
여 “시정 심판” vs 야 “정권 견제”… PK 대전 시작됐다 [6·3 지방선거]
부산 ‘국제회의 유치’ 세계 첫 40위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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