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뽕' 한 사발을 누가 마다하리오[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최근 대한민국이 자체 개발한 무기들이 국제 무대에서 큰 관심을 받으면서 시중엔 소위 ‘국뽕’이 차오른다는 표현이 넘실대고 있다. 2010년대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탄생한 단어인 국뽕은 국가와 필로폰(히로뽕·메스암페타민)의 합성어로서 자국에 대한 환상에 도취돼 자국을 찬양하는 행태를 일컫는 비속어에 속했다. 그러던 것이 해가 갈수록 대한민국의 위상이 가슴 벅차도록 올라가는 장면이 반복되자 ‘주모! 여기 국뽕 한 사발 주소’ 같은 밈으로 소비되며 사용빈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특히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발전상에 대한 자부심에서 드러나는 국뽕은 그 어느 때보다 상한가를 치고 있는 중이다. ■방산 신화의 시작 70년이 넘도록 휴전 상태를 지나오면서 차곡차곡 쌓아온 대한민국의 K-방산에 대한 국뽕은 가장 대표적인 국뽕에 속한다. K-방산에 대한 국뽕의 연원은 1998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미국이 주도한 환태평양 군사훈련, 소위 림팩이라는 훈련이 진행되던 때. 한국에서는 국내 생산 장보고급 잠수함인 ‘이종무함’이 참여한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일본의 이지스함 등 상대적으로 어마어마한 해군 전력을 지닌 국가들 사이에서 이종무함은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하지만 막상 훈련이 진행되자 이종무함은 단 한 번의 고장도 없이 가상 해전에서 미 해군 핵추진 잠수함을 비롯해 일본의 이지스함 등 모두 13척을 가상 격침시키는 활약을 보였다. 디젤 엔진을 끄고 실내가 찜통이 되는 열악한 환경을 배터리로 버티면서 타국의 대잠 기능을 무력화시킨 결과였다. 인터넷 상의 쇼츠 등에선 ‘한국은 다음부터 심판이나 보라’고 푸념했다는 귀여운 미국, 일본의 모습이 떠돌 정도다. 실전에서 국산 방산무기의 성능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이 훈련은 지금까지도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차세대 전투기 생산국 최근 양산 체계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4.5세대 전투기 KF-21은 2015년 8조 원이 넘는 개발 투자로 시작된 국산 전투기 개발 사업의 결실이다. 6.25전쟁 이후 미국이 공급한 전투기에 의존해 영공을 지켜야 했던 대한민국이 자체 전투기 생산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개발에 들어가자마자 전투기 핵심 장비인 AESA 레이더 기술 이전을 미국이 거부하는 사태가 결정적이었다. 대한민국은 연인원 6만 5000명에 가까운 연구진을 ‘갈아넣다시피’ 하며 자체 레이더 기술 등 핵심 기술들을 개발했다. 전투기 개발 이후 42개월간 1600여 회 시험 비행에서 단 한 건의 사고가 없었던 점도 세계 전투기 개발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쾌거. 인도네시아 16대 수출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와 중동 국가들의 오픈런이 예고될 정도로 양산 이후 전망은 장밋빛이다. 차후 10년 이내 독자적인 엔진 개발까지 이뤄지고 나면 미국 승인 없이도 전투기 수출이 가능해진다. 그 시기쯤이면 현재 4.5세대인 전투기가 차세대급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높다. ■미사일 강국 천궁-II가 아랍에미리트 하늘에서 이란의 탄도 미사일을 96%나 요격해낸 사실은 한국 미사일 개발의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천궁-II가 가성비까지 보태며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버금가는 요격 미사일로 급부상하는 동안 미국의 사드체계와 어깨를 견주려는 국내 미사일체계도 개발이 착착 진행중이다. LIG넥스원이 지난해 공개한 L-SAM이 그 주인공이다. 천궁-II처럼 수출까지 염두에 둔 L-SAM은 장거리 지대공 미사일 체계다. 천궁-II보다 높은 상층 방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사드체계와 곧잘 비교된다. 천궁-II의 중동전 활약 등으로 요격 미사일 실전 데이터가 확보된 이상 L-SAM의 활약도 그에 못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산화한 미사일들은 수비형 미사일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고고도로 띄운 뒤 수직으로 낙하해 적진을 타격하는 현무 미사일도 핵을 제외한 최강 무기로 세계를 놀라게 하는 중이다. 8톤급 탄두를 장착할 수 있어 북한의 지하 벙커 시설 대부분을 파괴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1년 대한민국 미사일에 대한 미국의 사거리 제한 지침 종료로 국내 미사일 개발은 더욱 날개를 달게 됐다. ■자주포의 나라 한국은 지난해 기준으로 K-9을 비롯한 자주포를 3000대 넘게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 5000대와 4000대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하면 전 세계 3위이지만 면적당 밀도를 감안하면 세계 최다 자주포 보유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 전체 자주포 수와 맞먹는 규모라는 분석도 있다. K-9 자주포는 지난해 중국과 국경 분쟁을 벌인 인도에 4000억 원 상당의 추가 수출이 이뤄졌을 정도로 실전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도 큰 호평 속에 수출이 잇따르고 있다. 여타 국가보다 엄청나게 빠른 납기와 탄탄한 후속 수리 서비스는 이미 입소문이 자자하다는 평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포탄 비축량이다. 지난해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포탄이 모자랄 때 대한민국은 포탄 비축량이 ‘7일치’밖에 없다면서 50만 발을 빌려준 바 있다. 그 때 드러난 대한민국의 포탄 비축량은 340만 발. 유럽 전체 규모와 맞먹는 자주포가 하루 수십만 발을 발사함으로써 7일만에 340만 발을 소비한다는 개념이 포탄 비축량 ‘7일치’의 실체였던 것이다. 방산강국 대한민국 신화의 출발점이었던 이종무함의 활약은 최근 캐나다로 출발한 도산안창호함의 위용으로 이어진다. 탄탄한 조선업을 배경으로 이룩한 잠수함 관련 기술은 핵추진 잠수함이 아님에도 독보적인 배터리 기술 접목을 통한 오랜 잠항시간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알려진다. 독일 등 잠수함 생산국들이 서류를 들이밀며 캐나다의 60조 원대 잠수함 도입 계획에 응찰할 때 대한민국은 실물 잠수함으로 직접 태평양을 건너는 퍼포먼스로 응찰하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칠 정도다. 기존 국가 대비 절반 이하의 가격과 엄청나게 빠른 납기로 상징되던 대한민국의 무기는 이제 실전에서 검증되며 신뢰까지 확보했다. 국제적인 안보 위기 고조가 뉴노멀이 돼 가는 지금, 가격과 납기에다 신뢰까지 무장한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결과물들은 앞으로 더 빛을 발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국뽕이라면 정말 사발로 들이키라 해도 마다할 수 없을 듯하다.
[사설] 지역 미래는 안 보이고 정치 공학만 난무하는 6·3 지선
국민의힘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는 16일 방송 인터뷰에서 “제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다른 지역구 얘기는 곤란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부산의 미래가 아닌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 관련 질문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민주당 전재수 후보 역시 “빅매치는 전재수 대 박형준”이라며 지방선거보다 보궐선거가 더 큰 이슈로 다뤄지는 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47일 앞으로 다가온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지역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북갑 보궐선거가 과열되면서 6·3 지방선거가 중앙 정치의 부속품처럼 변질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극소수 유력 정치인의 거취만 주목받고 풀뿌리 후보들은 외면당하는 이상한 선거가 되고 있다. 한 지역구 보궐선거가 지역의 4년 미래를 책임질 시장·교육감 선거를 압도하며 판을 흔들게 된 것은 정략적 접근 탓이다. 여야 모두 중앙당이 직접 개입해 선거 구도를 왜곡하고 있다. 국민의힘에서 제명된 한동훈 전 대표가 북갑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하자 무공천론, 복당론, 단일화론 주장이 뒤엉키며 국힘은 내분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민주당과 하정우 청와대 AI 미래기획 수석비서관은 연일 출마 읍소와 즉답 회피를 반복하며 궁금증을 유도하고 있다. 정치 신인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의구심까지 드는 대목이다. 정치 공학에만 급급하며 지자체 선거판에 분탕질을 치는 원내 양당의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자치’가 ‘정치’에 질식되는 지방선거로는 미래로 도약하기는커녕 퇴행할 수밖에 없다. 메가시티와 통합특별시 구상, 미래형 산업 구조 전환, 저출생·고령화 대응 등 도시의 성장을 이끌 핵심 의제를 토론하고 숙고할 기회를 잃기 때문이다. 정치권이 유명인의 공천 여부나 출마 포기 압박, 계파 충돌, 정치적 유불리 등의 정치 공학에 급급한 것은 지역 유권자를 우롱하는 것이다. 지역 발전에 대한 유권자의 의견을 듣기는커녕 정치권이 짜 놓은 판을 바라보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격하시키는 꼴이라서다. 지방선거는 중앙 정치의 연장이 아니다. ‘지방의 선택’을 가로막는 정략적인 행태는 당장 중단돼야 한다. 지방선거의 본질은 지역의 미래 비전을 놓고 벌어지는 경쟁이다. 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공약을 제시한 후보자가 유권자의 선택을 받는다. 문제는 이번 6·3 선거에서 중앙 정치의 과잉으로 지역 의제가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후보자들은 미래 비전과 정책을 알리는 기회를 잃고, 유권자들은 선택권을 제한받고 있다. 이런 기형적 구조가 고착된다면 선거 이후에 무엇이 남겠는가. 중앙 집권은 더 공고해지고 지방의 종속적 구조는 강화될 뿐이다. 지금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지역 유권자는 안중에도 없는 게 분명해 보인다. 여야는 이번 6·3 지방선거를 지역민과 동네 일꾼에게 돌려줘야 한다.
[사설] 경남·울산 보건소 의사 구인난, 공공의료망 구멍 어쩌나
경남과 울산의 공중보건의사(공보의) 구인난이 심각하다. 보건소와 지소의 필수 인력인 공보의들이 3년 복무를 마치고 대거 전역하지만, 이들의 빈자리를 메울 신규 지원자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경남 지역 의과·치과·한의과 공보의 301명 중 142명이 이달 말 복무를 마치는데, 72명만 새로 배치된다. 특히 이 가운데 필수 진료를 맡는 의과 공보의 116명 중 54%인 63명이 복무를 끝내지만, 15명만 충원된다. 울산 울주군도 비상 상황이다. 공보의 15명 중 의과 전공은 2명뿐이며, 내년 4월 복무 만료를 앞두고 있다. 충원되지 않으면 일선 보건지소 운영 중단이 불가피하다. 공보의 대규모 이탈은 지역 1차 의료 체계 붕괴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지자체들은 공보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일당·계약 의사 채용에 나섰지만, 녹록지 않다. 경남 창원·김해·양산·진주 등 도시 지역의 보건소는 일당을 50만~60만 원으로 제시했지만 지원자는 거의 없다. 군 단위는 일당을 100만 원까지 올렸지만 지원자는 절벽 상태다. 울주군보건소는 조례를 제정해 1억 5000만 원의 연봉을 내걸고 ‘업무 대행 의사’ 제도를 도입했지만 근무자를 못 구한 상태다. 생활 여건이 불편한 이유 외에도 공공기관 임금 수준이 민간 의료기관보다 턱없이 낮아 선호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경남과 울산이 만성적인 의사 구인난으로 필수 진료에 차질을 빚으면서 공공의료망에 구멍이 난 셈이다. ‘공보의 썰물’ 현상이 의료 공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건 이미 예견됐던 문제다. 2024년 본격화한 의정 갈등 여파로 의대생들이 집단휴학을 하면서 의사 면허 취득자가 줄어들었다. 현역병보다 긴 복무 기간은 공보의 기피 현상의 주요 요인이다. 1979년 공보의 제도가 도입된 초기에는 현역병과 공보의 복무 기간이 36개월로 같았다. 이후 현역병만 1년 6개월로 줄어들면서 현역을 택하는 의대생이 늘어났다. 복지부는 단계적으로 공보의 복무 기간을 단축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지만, 국방부는 학사장교·군법무관 등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신중한 태도다. 정부가 실효성 있는 해법을 내놓지 못하면서 지원자는 매년 줄고 있다. 내년 입시부터 도입되는 지역의사제는 공보의 미충원으로 인한 경남 지역 의료자원 부족 완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첫 졸업생이 나오는 2033년이 돼야 효과를 볼 수 있고, 광역시인 울산은 혜택이 아예 없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취약 지역의 필수 의료 공백을 메울 순 없는 것이다. 공보의 기피 현상이 계속되면 무의촌이 늘어나고 지역 공공의료가 붕괴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공보의 복무 기간의 합리적 단축, 근무 여건 개선과 처우 보강, 의료 취약지 인센티브 강화 등 다각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공공병원 확충, 퇴직한 시니어 의사 공공의료기관 매칭 확대도 추진해 지역 의료 접근성 악화를 막아야 할 것이다.
하늘길 숨은 요금
항공권 가격은 기본 운임, 세금, 유류 할증료 등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유류 할증료는 유가 상승에 따른 항공사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운임에 추가로 부과하는 금액이다. 유류 할증료는 1990년 걸프전쟁 영향으로 해운업에서 먼저 도입됐다. 이후 국제유가 상승에 따라 세계 각국 항공사들이 부과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는 2005년부터 항공 여객에 적용했다. 국내 항공사의 유류 할증료 기준은 아시아·태평양 최대 석유 제품 거래 시장인 싱가포르의 항공유 가격이다. 국토교통부가 인가한 거리비례제에 따라 각 항공사에서 자체 조정을 거쳐 월별로 책정한다. 싱가포르 항공유 가격을 기준으로 0~33단계로 구분해 요금을 부과한다. 단계마다 부과할 금액이 미리 설정돼 있다.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으로 고유가가 이어지면서 5월 발권하는 국제선 항공권에 부과되는 유류 할증료가 역대 최고인 33단계로 뛰어올랐다. 2016년 현행 체계 도입 이후 처음이다. 5월 유류 할증료 기준이 되는 3월 16일∼4월 15일 싱가포르 항공유 평균값이 1갤런당 511센트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이는 최고 단계인 33단계(갤런당 470센트 이상)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한국발 뉴욕, 파리, 런던 등 국제 노선의 왕복 항공권 유류 할증료는 3월 19만 8000원에서 5월 112만 8000원으로 오른다. 전쟁 여파가 반영되기 전인 3월과 비교해 6배 가까이 오르는 셈이다.중동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 여파로 전 세계가 항공유 대란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는 항공유 수출 1위 국가며, 미국 수입 항공유의 70%가 한국산일 정도로 경쟁력이 빼어나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원유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특성상 항공유 대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국 정유사가 만든 항공유라도 가격이 싱가포르 현물시장 시세와 달러 환율에 연동되기 때문이다. 국내 항공사가 특별히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을 수 없는 구조다. 특히 항공유는 휘발유·경유와 달리 엄격한 품질 기준과 안전 규정으로 인해 대량 장기 저장이 어렵다. 장기간 원유 공급이 제한될 경우, 항공유 공급망 자체가 흔들릴 우려도 있다. 국내 항공사들은 항공유 가격 급등으로 인한 운영 비용 상승으로 비상경영에 돌입했다. 전 세계 항공사들도 노선과 운항 편수 축소에 나서고 있다. 항공사들의 고강도 긴축 경영 못지않게 유류 할증료 부담이 커진 승객들도 여행에 고강도 제약을 받는 상황이다. 이래저래 전쟁이 일상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편집국에서] 정책 결정할 시간, 실패할 자유, 다시 일어설 권리
2년 전 다뤘던 주제를, 지금 또 다룰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부산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하 글로벌특별법)’ 얘기다. 지난달 박형준 부산시장의 삭발 투쟁과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의 등장 이후 하루 만에 국회 행안위 법안소위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공은 내 것’이라던 정치인들의 발언은 기분 좋게 묻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법제사법위원회의 문턱은 높았고, ‘숙려’라는 이름의 방관은 길었다. 이달 초 글로벌특별법 통과는 그렇게 또 좌절됐다. 여야가 합의한 법이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으로 올스톱됐다. 이 대통령이 글로벌특별법을 두고 ‘타 지역과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포퓰리즘적’ 입법 사례로 거론한 것은 지방자치의 본질을 오독한 결과다. 지역균형발전은 모든 지역에 똑같은 양의 사탕을 나눠주는 산술적 평등이 아니다. 각 지역이 가진 고유의 경쟁력을 극대화해 국가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전략적 선택이어야 한다. 여야가 뜻을 모은 글로벌특별법은 단순히 지역에 건물 몇 채 더 짓겠다는 개발 사업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짓누르는 수도권 일극주의에 균열을 내고, 지역이 스스로 생존 전략을 짤 수 있게 해 달라는 ‘주권 선언’에 가깝다. 부산이 ‘글로벌 허브’라는 이름 아래 요구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동남권 경제축을 살려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국가적 동맥경화를 뚫어내겠다는 고육지책이란 말이다. 사실 글로벌특별법은 당초 ‘~해야 한다’는 강행 규정으로 설계됐던 핵심 조항들이 21대 국회 폐기 후 22대 개원과 동시에 재발의를 앞두고 중앙부처와의 협의 과정에서 ‘~할 수 있다’는 임의 규정으로 후퇴하면서 지역의 거센 반발을 낳은 바 있다. 재정 투입이 전제되지 않은 ‘허울뿐인 껍데기’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하지만 지역은 내심 기대했다. 글로벌특별법을 통해 국제 물류·금융 중심의 자유 비즈니스 도시로 육성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라도 마련되면 부산도 또하나의 글로벌 경제축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껍데기’ 법안이 2년간 표류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최근 박 시장과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추진하는 행정통합 역시 정부의 ‘5극 3특’과 다른 것 같아도 결국 궤를 같이 한다. 정부의 ‘5극 3특’ 밑그림 위에 부산·경남의 행정통합이라는 집을 지어 실질적 ‘지방 자치’를 이끌어내자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는 이미 지역 불균형의 위험을 경험하고 대안을 마련해 체질을 개선하고 있다. 프랑스는 1982년 ‘지방자치단체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법’과 이듬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지방자치단체 간 권한배분법’을 제정해 각 지방에 재정·교육·도시계획 권한을 이양해 독립적인 산업 클러스터 구축에 성공했다. 독일 역시 연방기본법에 근거해 동등한 생활 조건 조성을 목표로 한 재정조정제도를 마련한 데 이어 7년간 논의 끝에 2020년 새로운 재정조정제도를 도입하는 등 지역 간 재정 운용을 형평성 있게 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영국의 행보도 빼놓을 수 없다. 런던 중심 국가였던 영국도 2014년 그레이터맨체스터 권한 이양 협정을 통해 그레이터 맨체스터에 보건·복지 예산 집행권을 완전히 넘겼다. 이후 그레이터맨체스터내의 불평등이 잉글랜드의 나머지 지역에 비해 줄어들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현실은 이 같은 세계의 흐름에서 역주행하고 있다. 수도권이 모든 자원을 블랙홀처럼 흡수하고 있는 와중에도 정부는 여전히 중앙 승인을 전제로 한 ‘무늬만 특별법’을 내민다. 정부가 “해주면 좋고, 안 해줘도 그만”이라는 식의 안일한 태도로 지방의 절규를 무시하는 사이 부산의 시계는 멈췄다. 글로벌특별법을 비롯해 지역균형발전을 토대로 한 여러 법안을 요구하는 부산의 외침은 지역 이기주의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지역의 사활이 걸린 가덕신공항도, 북극항로 개척도 중앙의 입만 바라봐야 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세계 여러 국가들이 수도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지역을 살려냈듯 우리에게도 결단이 필요한 때가 왔다는 ‘알람’이기도 하다. 진정한 지방자치는 중앙이 배포하는 예산 리스트가 아니라 지역이 스스로 법과 제도를 설계할 수 있는 통로를 여는 것에서 비롯된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법안들이 선거용 ‘표심 잡기’ 불쏘시개로 쓰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유야무야되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폐기된다면 지방소멸은 가속화할 것이다. 부산이 요구하는 것은 예산 몇 푼이 아니다. 정책 결정을 할 시간, 실패할 자유, 그리고 다시 일어설 권리다. 그것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를 살리는 마지막 기회다. 정치권은 부산의 분노가 ‘나중에’라는 말로 잠재울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김진호의 금융포커스] 기업은 봄, 가계는 겨울
금융시장이 기형적인 ‘역설적 상황’에 빠졌다. 금융 당국이 가계부채 증가율을 예년보다 현저히 낮은 1.5%로 묶어버리는 방안을 발표한 이후부터다. ‘부동산 투기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감안하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80%까지 낮추겠다는 목표는 명분이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비대칭성’이 실수요자 등 평범한 서민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시중은행의 영업점 풍경은 극명하게 갈린다. 자금 여력이 충분한 대기업이나 우량 중소기업에게는 저금리 대출을 제안하며 ‘모시기 경쟁’이 분주하다. 가계대출 총량 규제로 새로운 수익원 모색이 시급한 은행들의 고육책이다. 반면 가계대출은 한마디로 ‘빙하기’에 가깝다. 지난 17일부터 시작된 다주택자 만기연장 금지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1.5% 가이드라인도 실제로는 1% 내외로 더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다. 5대 시중은행(KB·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목표가 평균 1% 정도로 가정하면 1년간 최대로 늘릴 수 있는 규모는 6조 4493억 원에 불과하다. 한 달 5374억 원 꼴로 5개 은행 평균으로 1000억 원 남짓에 불과하다. 사실상 ‘문턱 통제’에 가깝다. 그 결과 기준금리 동결 상황 속에서도 주택담보대출(주담대) 금리 상단은 연 7%를 돌파한 상태다. 기업에게는 ‘봄바람’이 불지만 서민들에게는 ‘겨울바람’이 아직 불고 있는 금리의 역설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배분 방식도 문제다. 은행이 월별·분기별로 한도를 까다롭게 관리하면 이는 결국 고신용자 위주로 대출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당장 생계자금이 급한 서민이나 내 집 마련을 꿈꿨던 실수요자들의 금융 접근성이 크게 악화되는 것이다. 이미 ‘10·15부동산대책’으로 주담대 한도가 줄어든 상황에 대출까지 사실상 ‘선착순’에 가깝게 이뤄질 경우 저신용자 실수요자들은 대부업이나 불법사금융으로 내몰릴 우려도 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터넷전문은행들에서는 이른바 대출 ‘풍선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이마저도 고신용자 중심으로 정책 취지와 거리가 멀다. 부동산에 쏠린 과도한 유동성을 회수하고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추구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다. 하지만 정책의 정당성이 수단의 가혹함에 앞서서는 안 될 것이다. 수치 맞추기식 규제는 결국 가장 약한 서민들부터 피해를 입는 구조를 낳기 때문이다. 정부와 금융사들은 ‘숫자’에 집중하기보다는 7%대 고금리를 감당해야 하는 차주들의 ‘비명’에 귀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규제에 있어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내 집 마련을 위한 ‘사다리’가 되어야 하는 금융이 기업·자산가·고신용자에 집중되는 구조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실수요자를 ‘절벽’에서 끌어올릴 정교한 보완책을 서둘러야 한다.
[오션 뷰] 신뢰와 협력으로 북극항로 시대를 열자
올해 3월, 필자는 북위 69도에 자리한 노르웨이 트롬쇠를 찾았다. 북극의 관문으로 불리는 도시에서 ‘지속 가능한 북극항로 시대’의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트롬쇠항과 협력 MOU를 체결하고, 북극경제이사회(AEC)의 공식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아시아 항만에서는 최초 가입으로 북극항로 준비에 부산항만공사가 실질적인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기후 위기가 북극의 모습을 바꾸고 있다. 극지연구소(KOPRI)에 따르면 북극 얼음은 두터운 다년생 얼음이 줄고, 넓고 얇은 단년생 얼음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모든 탄소 배출 시나리오에서 여름철 ‘얼음이 없는 북극해’의 출현은 불가피한 것으로 분석된다. 위성 관측이 시작된 1979년 이래 여름철 얼음 면적은 10년마다 12.1%씩 줄어들고 있다. 이는 남한 면적의 75%에 달하는 얼음이 매년 사라지는 속도다. 이러한 변화는 세계 해상 교역로의 재편을 예고한다. 최근 중동전쟁으로 공급망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북극항로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북극항로는 단순히 얼음이 빨리 녹는다고 해서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운용하려면 기본적으로 세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이용할 화물, 운송 수단인 선박, 그리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항만이 그것이다. 쇄빙선 등 선박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화물과 항만에 대한 준비는 아직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우선 화물로는 북극에 묻혀 있는 LNG 등 에너지와 광물 자원이 고려될 수 있으며, 컨테이너의 경우 특송 화물을 염두에 둘 수 있다. 항만 측면에서 볼 때 부산항은 동북아 주요 항만 중 북극항로에 가장 근접해 있으며, 글로벌 2위 환적항이라는 검증된 인프라와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산업 기반도 갖추고 있다. 남은 과제는 올바른 방향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 방향을 다음 세 가지로 본다. 첫째, 친환경·탈탄소이다. 북극은 지구에서 가장 취약한 해양 생태계를 품고 있다. 이를 보호하기 위해 국제해사기구(IMO)는 극지 운항 선박에 엄격한 기준을 부과하는 ‘극지 코드(Polar Code)’를 발효했으며, 2024년 7월부터는 중유(HFO)의 사용과 연료로서의 적재를 금지하는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북극항로를 오가는 모든 선박은 LNG·메탄올·암모니아 같은 친환경 연료를 써야 하고, 기항하는 항만은 그 연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북극권 연안국의 다자 협의체인 북극이사회(Arctic Council)에서도 친환경 이슈를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다. 둘째는 안전이다. 기상 예측·해빙 탐지·위성 항법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북극해는 여전히 데이터가 부족하고 환경 변화가 극심하다. 얼음이 사라진 오픈워터가 넓어질수록 거대 파랑과 폭풍 발생 가능성은 오히려 커진다. 해빙·유빙 정보, 극지 기상 예보, 보험 등 운항 전 주기에 걸친 정보가 체계적으로 집적·공유되는 ‘북극 항해 안전 데이터센터’가 필요한 이유이다. 셋째, 북극권 당사국과의 협력이다. 북극권 이해 당사자들과의 신뢰 구축 없이 지속 가능한 북극항로 운용은 불가능하다. 개발과 이용이 원주민의 삶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지역 포용성’을 갖추지 않으면 북극권 국가들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우리 정부는 2013년 북극이사회의 옵서버 국가로 참여한 이후 북극권 국가들과 다양한 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신뢰를 쌓아왔다. 이번에 부산항만공사가 북극경제이사회에 가입하고, 트롬쇠항과 협력 체계를 구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뢰와 협력’ 없이는 지속 가능한 북극항로 논의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다. 북극권 국가와의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친환경 해상 운송로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기후 대응, 안전 확보, 원주민 포용성까지 아우르는 다자간 협력 플랫폼인 ‘친환경 북극항로(Green Arctic Corridor)’의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시범 사업은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하며, 이에 발맞춰 부산항만공사도 스마트 항만과 친환경 벙커링 인프라 구축, 국내외 북극 협력 강화를 담은 ‘부산항 친환경 북극항로 로드맵’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기후 위기가 만들어낸 역설적인 도전 앞에서 바른 방향성과 철저한 준비로 본격적인 북극항로 시대를 열어나간다면 부산이 울산, 경남과 함께 진정한 해양수도권으로 발전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중심에 바로 부산항이 있다.
[공감] 우아한 위선
얼마 전 TV에서 들었던 말이 있다. “우아한 위선의 시대가 끝나고 야만의 시대가 도래했다.” 광고나 드라마의 대사가 아니다. 세계의 흐름을 진단하는 어느 출연자의 말이었다. ‘야만의 시대’는 요즘 뉴스를 보면 저절로 공감되는 말이다. 최근 강대국이 벌이는 전쟁이나,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무역 정책들도 그렇다. 심지어 강대국의 고위직이라는 사람은 대놓고 인터뷰한다. 세상은 원래 힘의 논리로 굴러가지 않았었나? 그러니 제발 약육강식의 현실을 직시하라고. 그는 현실을 외면하는 당신들이 오히려 어리석다는 식으로 몰아붙인다. 이제 강대국들의 메시지는 간결해졌다. “우리는 우리 이익만을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들의 메시지 끝에 모두가 알아듣는 문장이 풍선처럼 떠오른다. “그래서, 너희가 어쩔 건데?” 생각해보면, 그간 강대국들은 ‘우아한 말’로 세계를 움직여 왔다. 정의와 평화, 자유와 평등, 인간애와 지구환경 같은 명분들을 내세워서 결국 그들 이익에 부합하는 세계 질서를 구축했었다. 어떤 이는 그런 이익추구를 ‘우아한 위선’이라 하며 비꼬았다. 강대국은 이제 세계를 설득하려 애쓰지 않는다. 설득 대신 통보하고, 명분 대신 효율을 강조하고, 체면 대신 폭력을 선택한다. 위선이 우아함을 잃는 순간, 남는 것은 약탈이 난무하는 야만의 민낯이다. 그래서 나는 이 우아한 위선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다만, 이 위선이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민족 간 갈등을 부추기거나, 자원 수탈을 설계하고 전쟁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위선이 아니라 그저 추악한 폭력이며 약탈일 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우아한 위선’은 숨겨진 나의 욕망을 위해 보편적 가치를 따라가는 척하는 거짓된 선량함을 말한다. 국제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분쟁지역의 평화를 도모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재난 국가에 원조를 제공하는 식의, 그러니까 실제로는 다른 속내가 있는 행위였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는 고통을 덜게 되거나 혹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위선을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위선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나의 욕망을 인정한다면 모든 사람의 욕망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누구도 그 욕망을 온전히 성취하며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마음속엔 온갖 욕망이 들끓고 있었더라도, 그것을 평생 억누르고 살았다면, 우리는 그 삶을 위선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어떤 이는 미워하면서도 거짓 웃음을 짓는다. 어떤 이는 손해 보기 싫어서 진실을 털어놓고, 어떤 이는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으려 선행을 한다. 그런 마음의 이중성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를까. 우리는 위선이라는 단어를 일방적으로 사용해왔다. 마치 사람의 마음을 해부대 위에 눕혀, 가장 어두운 장기만 꺼내 보여주면 진실이 규명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처럼… 그러나 ‘사실확인’은 모든 가치의 독점물이 아니다. 인간이 욕망을 가졌다는 건 자연법칙이지만, 그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려 애쓰는 것은 문명이다. 많은 사람이 욕망을 위해 선을 연습한다. 마음속에서 수없이 많은 문이 열리고 닫힌다. 누군가를 밀쳐내고 싶은 문, 거짓말로 빠져나가고 싶은 문, 내가 전부 가지고 싶다는 문. 그런데 우리는 그 문 앞에서 자주 멈춘다. 그 짧은 욕망의 위선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그래서 이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현실적인 힘은, 약육강식이 아니라 욕망의 균형을 깨지 않으려 애쓰는 우아한 위선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못나고 사나운 욕망이라면 부디 본색을 드러내지 말자. 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천영철의 사리 분별] 트럼프가 던진 숙제… 민주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기행 이력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인종차별 발언이나 비속어를 남발하는 저급함은 더 이상 특별한 놀라움을 자아내지 못한다. 그가 세계사 주역으로 등장한 지 11년째로 접어들면서 지구촌 사람들도 트럼프 발 충격에 다소 무덤덤해진 모양새다. 돌이켜 보면 트럼프 대통령의 출현은 인류사적 맥락에 부합한다는 생각이다. 인터넷 발달, 포퓰리즘 기승, 미국 제조업 붕괴와 양극화 심화, 중국 등 신흥 강자들의 거센 도전 등을 고려할 때 그의 등장과 지지층 급증은 어쩌면 불가피해 보이기까지 한다. 더욱이 국가와 개인 이익에 충실한 보수 리더를 원하는 경향성이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트럼프주의는 뉴노멀로 자리매김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그간 정책은 미국 중심의 질서 회복에 방점을 두고 있다. 지지층들은 부적절한 일방적 관세 부과와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 납치, 이란 전쟁과 최고지도자 하메네이 제거, 돈로주의 표방 등에 대해 달러·AI 패권 유지, 중국 견제, 자원 안보, 영토 방어를 위한 선제적 대응이라고 평가한다. 즉, 그의 정책이 거칠고 상식에 부합하진 않지만 나름대로 어느 정도 일관성 있는 목표를 갖고 진행됐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절대 넘지 말아야 하는 선까지 넘나들고 있다. 인명을 대거 희생시킨 이란과의 전쟁 기간 중에도 골프를 하고 UFC 대회를 관람했다거나, 교황을 비난하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로 연상케 하는 그림을 SNS에 공유한 정도의 몰상식을 지적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 전쟁과 관련해 최근 대국민 연설 등을 통해 다양한 발언과 글을 쏟아냈다. 이 과정에서 ‘석기시대’와 ‘문명 말살’ 표현을 서슴지 않았다. 이란을 겨냥해 “앞으로 2~3주 동안 그들을 극도로 강하게 타격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석기시대로 되돌려 보낼 것이다”라고 밝혔다. 또 “그들이 장기간 석기시대로 접어들고 핵무기를 가질 수 없게 되면 우리는 떠날 것”이라고도 했다. 이어 ‘하나의 문명이 오늘 밤 완전히 사라질 것이며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글을 SNS에 올렸다. 이런 말과 글은 이란의 인프라 등 현대 국가 기능을 완전히 무력화하겠다는 의미를 넘어 집단학살 위협을 가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핵심은 세계 최강 국가 리더라고 해서 무시무시한 반인륜적 협박을 반복적으로 일삼아도 되느냐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2017년 유엔총회서 “북한 완전 파괴” 발언을 한 전력도 있다. 더군다나 미국이 민주주의 절차에 의거해 선출한 트럼프 대통령은 힘이 곧 정의라는 논리로 국제질서를 연이어 파괴하고 있지만 그를 제재할 방법조차 제대로 없다. 미국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 범죄를 예고한 것이라며 탄핵 소추안을 제출하고 직무수행 불능 결정을 위한 수정헌법 제25조 발동도 촉구하지만 현실화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번 발언을 계기로 국민이 위임한 대통령 권력의 한계와 제재 방안에 대한 논란과 함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근본적 보완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거세지고 있다. 1776년 독립선언과 1787년 헌법 제정을 주도한 토머스 제퍼슨 등 당시 계몽주의 엘리트들이 예상치 못한 트럼프 대통령 같은 반지성적 지도자의 등장이 건국 이념을 위협한다는 위기의식도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유롭고 깨어있는 국민, 덕성을 갖춘 리더를 전제로 현대적 민주주의 국가를 설계하고, 삼권 분립 등 견제 장치를 만들었다. 그러나 포퓰리즘과 양극화 때문에 이기주의에만 몰두하는 국민이 급증하는 등 지난 250년 동안 민주주의 환경 자체도 급변한 상황이다. 이것은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등 상당수 국가들은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모체인 미국의 제도를 차용하거나 이식받았다. 미국 민주주의 위기와 유사한 상황이 연쇄 발생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우리는 이미 2024년 12월 불법 비상계엄을 경험했다. 최근엔 입법 만능주의를 앞세운 여당의 사법개혁으로 삼권분립이 흔들리는 과정도 목격했다. 민주주의가 변질되고 폭주하는 지도자를 통제할 방법조차 없으면 자유와 평등, 다양성 등은 심각한 위험에 노출된다. 현재 청와대와 여당은 비상계엄에 대한 국회 통제를 강화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헌법 부분 개정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1987년 체제 이후의 엄청난 사회·가치관 변화, 트럼프 대통령을 닮은 포퓰리즘적 정치 기인의 등장, 권력 남용과 전제주의로의 변질 우려 등을 염두에 둔 광범위한 헌법 개정 논의가 필요하다. 나아가 우리 실정에 맞는, 한층 더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성숙한 ‘K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숙의도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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