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일자리 만들어 달라'는 부산 시민 호소 후보들 잘 새겨야
부산 시민들이 지방선거를 통해 만들고 싶은 지역의 미래는 소박했지만 절박했다. ‘이 도시를 떠나지 않고 살 수 있는 삶의 질을 보장해 달라!’ 〈부산일보〉가 6·3 지선을 40여 일 앞두고 시민 63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는 ‘부산을 떠나게 만드는 조건을 개선하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부산의 유권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키워드는 일자리였다. 교통 불편, 돌봄 부족 등 다양한 요구가 분출했지만, 삶의 기반을 결정하는 핵심은 안정된 일자리라는 점에서 전 연령대에서 ‘먹고사는 문제 해결’이 압도적이었다. 이는 지역 정치가 정치 담론이나 대형 개발 이슈가 아닌 일상에서 체감하는 변화에 집중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준다. 시민들이 토로한 지역의 현실은 단순한 불편을 넘어 구조적 위기를 드러낸다. 지역에 좋은 일자리가 부족해 청년층이 수도권으로 유출되면 그저 인구 감소에 그치지 않는다. 고령화까지 겹치면서 소비 감소, 상권 침체의 악순환을 부르고 결국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에 부메랑이 된다. 여성과 중장년층, 노년층은 경력 단절과 재취업의 벽에 부딪히는 것이 일상적이다. 교통 불편과 돌봄 부족도 일자리와 맞물려 있다. 산업단지 접근성이 떨어지면 기업 유치가 어렵고, 돌봄 서비스가 작동하지 않으면 마음 놓고 일터로 갈 수 없다. 이른바 ‘괜찮은 일자리’는 청년 대책인 동시에 인구와 상권, 지역경제를 살리는 공통 열쇠인 셈이다. 그간 지방선거는 지역 유권자들의 기대와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거대 정당을 등에 업은 후보자들은 정치 공방 구도를 지역에서 재연하기 일쑤였으며, 대형 개발 사업과 장밋빛 청사진에 치중할 뿐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일할 곳이 없는 도시에서 활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시민 인식의 변화를 정치가 따라가지 못하는 데 있다. 일자리 관련 공약은 구체적인 전략과 실행력에 허점을 드러냈고, 시민이 체감할 만한 변화를 이끌기에 부족했다. 유권자들은 지방자치가 주민 한 명 한 명의 삶을 바꾸는 ‘생활 행정’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 4년 지역의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후보자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시민 인터뷰에서 ‘일자리’는 무려 46회 언급되면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를 ‘청년’(25회)과 ‘기업’(19회)이 뒤따랐다. 성별과 연령대를 불문하고 ‘먹고사는 문제’를 으뜸으로 꼽은 것은 대한민국 제2 도시로서 뼈아픈 대목이다. 이에 대해 지역의 일꾼을 자처하며 나선 후보자들이 답해야 한다. 시민들은 ‘부산에서 계속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요구한다. 지역이 활력을 되찾고 주민의 삶이 바뀔 수 있는 도시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행정은 일자리 창출을 중심에 두고 산업, 교통, 돌봄, 문화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해야 한다. 지선의 관전 포인트는 정당의 유불리가 아니라 지역민 삶의 질 개선을 둘러싼 경쟁이어야 한다.
[사설] 부산 이전 공공기관 지역업체 외면, 지역화 갈 길 멀다
공공기관 이전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에 그치지 않는다. 지역과의 유기적 결합과 지역경제와의 동반 성장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 실효성을 의심케 하는 수치가 나왔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해양수산부와 부산 소재 소속 기관들이 올해 발주한 부산 지역 공공구매 4595억 원 가운데 지역업체 수주액은 922억 원으로, 비율은 20.1%에 그쳤다. 이는 부산시와 구·군 등 지역 기관의 수주율 70.5%, 전체 평균 58.5%에 크게 못 미친다. 특히 부산이 사업 현장인 경우만 따로 집계한 결과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분명하다. 부산 이전 공공기관들의 지역 상생 약속이 헛구호에 그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와 국가공공기관의 부산 지역 공공구매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역업체 몫은 24.9%에 불과해, 총 3조 8434억 원 가운데 약 4분의 1인 9580억 원만 지역에 돌아갔다. 반면 부산시와 산하기관, 교육청 등 지방 공공기관의 지역업체 계약 비율은 63.4%로 두 배 이상 높았다. 전체 공공구매의 39.8%를 차지하는 ‘큰손’이라는 점에서 낮은 지역 기여도는 더욱 뼈아프다. 특히 부산으로 이전한 공공기관들마저 주택도시보증공사와 한국주택금융공사가 각각 0.3%, 0.5%에 그치는 등 미미한 실적을 보이며 이전 취지를 무색하게 하고 있다. 결국 이전이 단순히 주소지 변경 차원에 머물렀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이는 지역 일자리 창출과 산업 상생, 고용 분산이라는 약속은 구호에 그치고 실제 운영은 따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 물론 현실적 제약은 있다. 중앙 부처와 공공기관이 전국 단위 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지역업체 참여가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 공사나 전문성이 요구되는 사업일수록 지역업체의 진입 장벽이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부산이 사업 현장인 경우조차 낮은 수주율을 보이는 것은 이런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지역제한입찰을 적용할 수 있음에도 이를 활용하지 않는 건 의지의 문제다. HUG가 지역 인재 의무 채용 제도의 예외 규정을 활용해 ‘쪼개기 채용’을 했던 사례 역시 같은 맥락이다. 부산시는 전국 최초로 공공계약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해 국가·공공기관의 지역업체 수주율을 실시간 공개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정보 제공을 넘어 제도 개선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다. 아울러 기관들과 지역상생 실무협의회를 구성해 이행 방안도 논의할 계획이다. 이는 늦었지만 필요한 대응이다. 다만 근본적인 변화는 공공기관 스스로의 인식 전환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역경제의 마중물이 되지 못한다면 그 존재 이유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공공기관 이전은 단순한 장소 이동이 아니라 지역과의 ‘화학적 결합’을 전제로 한다. 그 결합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균형발전 역시 공허한 구호에 그칠 뿐이다. 이제는 실천으로 답해야 할 때다.
'국뽕' 한 사발을 누가 마다하리오[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최근 대한민국이 자체 개발한 무기들이 국제 무대에서 큰 관심을 받으면서 시중엔 소위 ‘국뽕’이 차오른다는 표현이 넘실대고 있다. 2010년대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탄생한 단어인 국뽕은 국가와 필로폰(히로뽕·메스암페타민)의 합성어로서 자국에 대한 환상에 도취돼 자국을 찬양하는 행태를 일컫는 비속어에 속했다. 그러던 것이 해가 갈수록 대한민국의 위상이 가슴 벅차도록 올라가는 장면이 반복되자 ‘주모! 여기 국뽕 한 사발 주소’ 같은 밈으로 소비되며 사용빈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특히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발전상에 대한 자부심에서 드러나는 국뽕은 그 어느 때보다 상한가를 치고 있는 중이다. ■방산 신화의 시작 70년이 넘도록 휴전 상태를 지나오면서 차곡차곡 쌓아온 대한민국의 K-방산에 대한 국뽕은 가장 대표적인 국뽕에 속한다. K-방산에 대한 국뽕의 연원은 1998년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미국이 주도한 환태평양 군사훈련, 소위 림팩이라는 훈련이 진행되던 때. 한국에서는 국내 생산 장보고급 잠수함인 ‘이종무함’이 참여한다. 미국의 항공모함과 일본의 이지스함 등 상대적으로 어마어마한 해군 전력을 지닌 국가들 사이에서 이종무함은 초라하기 그지없어 보였다. 하지만 막상 훈련이 진행되자 이종무함은 단 한 번의 고장도 없이 가상 해전에서 미 해군 핵추진 잠수함을 비롯해 일본의 이지스함 등 모두 13척을 가상 격침시키는 활약을 보였다. 디젤 엔진을 끄고 실내가 찜통이 되는 열악한 환경을 배터리로 버티면서 타국의 대잠 기능을 무력화시킨 결과였다. 인터넷 상의 쇼츠 등에선 ‘한국은 다음부터 심판이나 보라’고 푸념했다는 귀여운 미국, 일본의 모습이 떠돌 정도다. 실전에서 국산 방산무기의 성능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이 훈련은 지금까지도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차세대 전투기 생산국 최근 양산 체계가 본격 가동되기 시작한 4.5세대 전투기 KF-21은 2015년 8조 원이 넘는 개발 투자로 시작된 국산 전투기 개발 사업의 결실이다. 6.25전쟁 이후 미국이 공급한 전투기에 의존해 영공을 지켜야 했던 대한민국이 자체 전투기 생산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개발에 들어가자마자 전투기 핵심 장비인 AESA 레이더 기술 이전을 미국이 거부하는 사태가 결정적이었다. 대한민국은 연인원 6만 5000명에 가까운 연구진을 ‘갈아넣다시피’ 하며 자체 레이더 기술 등 핵심 기술들을 개발했다. 전투기 개발 이후 42개월간 1600여 회 시험 비행에서 단 한 건의 사고가 없었던 점도 세계 전투기 개발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쾌거. 인도네시아 16대 수출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와 중동 국가들의 오픈런이 예고될 정도로 양산 이후 전망은 장밋빛이다. 차후 10년 이내 독자적인 엔진 개발까지 이뤄지고 나면 미국 승인 없이도 전투기 수출이 가능해진다. 그 시기쯤이면 현재 4.5세대인 전투기가 차세대급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높다. ■미사일 강국 천궁-II가 아랍에미리트 하늘에서 이란의 탄도 미사일을 96%나 요격해낸 사실은 한국 미사일 개발의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천궁-II가 가성비까지 보태며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버금가는 요격 미사일로 급부상하는 동안 미국의 사드체계와 어깨를 견주려는 국내 미사일체계도 개발이 착착 진행중이다. LIG넥스원이 지난해 공개한 L-SAM이 그 주인공이다. 천궁-II처럼 수출까지 염두에 둔 L-SAM은 장거리 지대공 미사일 체계다. 천궁-II보다 높은 상층 방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사드체계와 곧잘 비교된다. 천궁-II의 중동전 활약 등으로 요격 미사일 실전 데이터가 확보된 이상 L-SAM의 활약도 그에 못지 않을 것으로 기대된다. 국산화한 미사일들은 수비형 미사일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고고도로 띄운 뒤 수직으로 낙하해 적진을 타격하는 현무 미사일도 핵을 제외한 최강 무기로 세계를 놀라게 하는 중이다. 8톤급 탄두를 장착할 수 있어 북한의 지하 벙커 시설 대부분을 파괴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21년 대한민국 미사일에 대한 미국의 사거리 제한 지침 종료로 국내 미사일 개발은 더욱 날개를 달게 됐다. ■자주포의 나라 한국은 지난해 기준으로 K-9을 비롯한 자주포를 3000대 넘게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각 5000대와 4000대가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하면 전 세계 3위이지만 면적당 밀도를 감안하면 세계 최다 자주포 보유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 전체 자주포 수와 맞먹는 규모라는 분석도 있다. K-9 자주포는 지난해 중국과 국경 분쟁을 벌인 인도에 4000억 원 상당의 추가 수출이 이뤄졌을 정도로 실전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서도 큰 호평 속에 수출이 잇따르고 있다. 여타 국가보다 엄청나게 빠른 납기와 탄탄한 후속 수리 서비스는 이미 입소문이 자자하다는 평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한국이 보유하고 있는 포탄 비축량이다. 지난해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포탄이 모자랄 때 대한민국은 포탄 비축량이 ‘7일치’밖에 없다면서 50만 발을 빌려준 바 있다. 그 때 드러난 대한민국의 포탄 비축량은 340만 발. 유럽 전체 규모와 맞먹는 자주포가 하루 수십만 발을 발사함으로써 7일만에 340만 발을 소비한다는 개념이 포탄 비축량 ‘7일치’의 실체였던 것이다. 방산강국 대한민국 신화의 출발점이었던 이종무함의 활약은 최근 캐나다로 출발한 도산안창호함의 위용으로 이어진다. 탄탄한 조선업을 배경으로 이룩한 잠수함 관련 기술은 핵추진 잠수함이 아님에도 독보적인 배터리 기술 접목을 통한 오랜 잠항시간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알려진다. 독일 등 잠수함 생산국들이 서류를 들이밀며 캐나다의 60조 원대 잠수함 도입 계획에 응찰할 때 대한민국은 실물 잠수함으로 직접 태평양을 건너는 퍼포먼스로 응찰하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칠 정도다. 기존 국가 대비 절반 이하의 가격과 엄청나게 빠른 납기로 상징되던 대한민국의 무기는 이제 실전에서 검증되며 신뢰까지 확보했다. 국제적인 안보 위기 고조가 뉴노멀이 돼 가는 지금, 가격과 납기에다 신뢰까지 무장한 대한민국 방위산업의 결과물들은 앞으로 더 빛을 발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런 국뽕이라면 정말 사발로 들이키라 해도 마다할 수 없을 듯하다.
트럼프 vs 교황 ‘오버랩’
중세 유럽에서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이다. 신성 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과의 갈등 끝에 파문을 당한 뒤, 눈 덮인 성문 앞에서 사흘 동안 맨발로 무릎을 꿇었다. 세속 권력의 정점에 있던 황제가 종교 권력에 굴복한 순간 교황권은 절정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힘은 오래가지 못했다. 1096년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권위를 흔드는 계기가 됐다. 200년에 걸친 전쟁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고 교황의 결정이 늘 옳은 것은 아니라는 의문이 퍼졌다. 이 무렵 르네상스와 과학의 발전은 인간 이성의 힘을 한층 부각시켰다. 왕권도 교황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전환의 상징이 바로 ‘아비뇽 유수(幽囚)’다. 유수란 잡아 가둔다는 뜻이다. 1309년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과의 세금 갈등 끝에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후 70여 년간 교황은 사실상 왕권 아래 놓였다.나폴레옹도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다. 1804년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열린 대관식에서 나폴레옹 1세는 교황 비오 7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스스로 황제의 관을 머리에 썼다. 이어 아내 조제핀에게도 직접 황후의 관을 씌워 주었다. 교황이 황제를 세우던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장면이었다. 이후 그는 교황을 5년간 유폐시켜 종교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다.이제 시대는 달라졌다. 황제의 시대는 갔다. 교황의 권위도 절대성을 갖지 않는다. 한데 갑자기 이들 장면이 오버랩된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교황 레오 14세 사이의 갈등과 다툼에서다. 이란 전쟁과 외교 문제를 둘러싸고 세속 권력과 종교 권위가 충돌하는 양상이다. 아니 세속 권력이 종교 권위를 압박하는 구도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 같다. 트럼프 행정부가 아비뇽 유수를 언급하며 교황청을 압박하는가 하면, 미국의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들의 다툼을 두고 “나폴레옹 1세 이후 트럼프만큼 공개적으로 교황과 맞선 정치 지도자는 없었다”고 평했다.역사는 반복되기보다 변주된다는 말이 있다. 카노사에서 비롯된 권력의 긴장은 아비뇽을 거쳐 파리로, 그리고 오늘날 워싱턴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왔다. 외형은 달라졌지만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힘으로 짓누르는 권위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평화를 지향하고 전쟁에 반대하는 보편적 가치는 그 자체로 힘을 지니기에 권력이나 권위로 억압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를 역사에서 배웠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데스크 칼럼] 인간과 AI의 대결, 부산에서 하면 어떨까
2016년 3월 서울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바둑기사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의 대결은 단순한 바둑 승부를 넘어 AI 시대의 서막을 알린 사건이었다. 최고의 바둑 인간 실력자와 최고의 바둑 AI 프로그램의 대결로 주목받았고, 최종 결과는 알파고가 4승 1패로 승리했다. 당시 대국은 인간과 AI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한 역사적 이벤트로 평가된다. 특히 알파고의 승리는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직관’과 ‘창의성’의 영역에서도 AI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줬다. 당시 대국은 전 세계로 생중계된 글로벌 이벤트였다. 국내에서는 공중파와 인터넷으로 실시간 중계됐고, 유튜브 등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해외에서도 시청 가능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까지 별도로 제공돼 글로벌 시청자의 이목을 끌었다. 특히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가 직접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면서, AI에 관심 있는 전 세계 시청자들이 이날 대결을 실시간으로 지켜봤다. 대국이 열렸던 서울 포시즌스호텔은 대규모 국제행사를 치를 수 있는 보안·방송 인프라는 물론, VIP 동선 관리도 쉬운 환경 등을 고루 갖췄다는 점에서 구글 딥마인드가 찾던 대국 장소로 안성맞춤이었다. 행사를 무사히 치른 포시즌스호텔은 전 세계 생중계 화면에 자연스럽게 노출되며 ‘AI의 역사적 순간이 열린 도시’ 서울에서 역사적 이벤트와 결합한 브랜딩 효과를 거뒀다. 서울 포시즌스호텔은 많은 국내외 취재진이 몰려들었고 TV, 유튜브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국이 생중계되며 최대 1000억 원 이상의 홍보 효과를 누렸다는 분석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인류사에 또 하나의 상징적인 대결이 예고됐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AI 기업 xAI의 차세대 모델 ‘그록5’와 세계 최고 e스포츠 팀 중 하나인 T1,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페이커의 맞대결이다. 바둑에서 시작된 ‘AI 대 인간’ 구도가 이제는 팀 기반의 복잡한 전략 게임인 리그오브레전드(LoL)로 확장되는 셈이다. 미국-이란 중동 전쟁 등의 국제적인 변수가 발생하며 이 이벤트 매치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 등에 대한 논의가 지연되고 있지만, 이 대결이 현실화한다면 그 상징성과 파급력은 10년 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크다. 바둑이 개인의 직관과 계산을 겨루는 경기였다면, LoL은 실시간 협력과 전략, 변수 대응이 결합된 고차원적 게임이기 때문이다. AI가 인간의 협력과 변수 대응 등의 영역에서 인간을 넘어설 수 있는지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수밖에 없다. 만약 이 역사적 대결이 올해 올린다면, 그 장소는 부산이 됐으면 한다. 부산이 대결 장소로 최적인 당위성은 충분하다. 부산은 이미 국내 대표 게임 도시로 자리 잡았다. 매년 국제 게임 전시회인 ‘지스타’가 매년 11월 열린다. 2009년부터 부산에서 열린 지스타는 세계적인 게임 축제로 자리 잡았고, 전 세계 게임 기업과 유저들이 모이는 플랫폼이 됐다. 특히 부산은 국제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인프라를 충분히 갖췄다. 벡스코와 오디토리움에서는 대형 e스포츠 이벤트를 열 수 있다. APEC 누리마루와 서면 삼정타워에 있는 e스포츠 아레나도 최적의 장소다. 부산의 특급호텔들 역시 VIP 보안과 동선 확보, 중계 인프라를 갖춰 역사적 이벤트를 충분히 치러낼 수 있다. 해운대를 중심으로 한 숙박·관광 인프라는 대규모 방문객을 수용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부산은 이미 APEC 정상회의와 국제기구 회의인 ITU 전권회의 등을 성공적으로 치렀고,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정상회담도 성공적으로 치러낸 검증된 도시다. 인간과 AI의 역사적 이벤트를 치를 무대가 부산이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지만,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선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이 이를 어젠다로 이끌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한 ‘장소 제공’을 넘어 도시 차원의 전략적 접근도 필요하다. 부산시와 지역 정치권은 당리당략과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부산에 이벤트를 유치하기 위해 협력하고, 부산에서 왜 이번 대결이 이뤄져야 하는지 강점과 당위성을 정부에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글로벌 AI 기업과 방송사, 스폰서 등과 소통 창구를 직접 만들고 정부 차원의 외교적 지원과 정책적 뒷받침도 이끌어 내야 한다. 10년 전 서울에서 시작된 인공지능 시대의 상징적 장면이 또 한 번 펼쳐질 기회가 눈앞에 와 있다. 6·3 지방선거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차기 부산시장과 지역 정치권이 이벤트 유치를 통해 부산의 도시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일 수 있는 어젠다를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길 기대한다.
[노트북 단상] 김기철, 잊히지 말아야 할 이름
김기철 씨는 1980년 3월 14일 부산 안창마을의 두 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43세. 그는 임종 직전까지 제대로 된 진찰 한 번 받지 못했다. 황달과 폐질환 증세를 보였지만, 병의 근원은 고문 후유증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언론인 조갑제 씨의 논픽션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김근하 군 피살 사건’을 둘러싼 수사와 재판 과정을 추적한 기록이다. 경찰과 검찰, 법원, 언론이 고문과 조작, 오판, 오보로 얼룩진 사건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보여준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967년 10월 17일, 화랑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5학년 김근하(11) 군은 부산 서구 동대신동에 있는 학교를 나와 과외를 마치고 귀가했다. 근하 군은 그날 밤 늦게 부산시청 인근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집으로 돌아가던 근하 군이 유괴·납치된 뒤 살해된 것으로 보였다. 경찰은 사건과 무관한 인물을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냈지만, 이들이 모두 풀려나면서 수사는 결국 헛발질로 마감됐다.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김기철 씨는 이듬해 5월 5일 검찰에 구속됐다. 수년 전 범천공원에서 라디오를 빼앗았다는 혐의였다. 단순 절도 혐의로 시작된 사건은 곧 근하 군 살해 혐의로 확대됐다. 검찰은 김 씨 지인 김금식 씨의 허위 자백을 토대로 사건을 엮었다. 말 그대로 ‘생사람 잡는’ 수사를 벌였다. 김 씨에게 가해진 가혹행위 부분은 차마 눈으로 읽기 힘들 정도다. 그는 검사실로 불려가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두꺼운 가죽 수갑을 채워 세수조차 못 하게 했다. 검찰은 김 씨가 잠이 들면 감방 재소자들이 발길질하도록 유도했다. 한편으로는 김 씨에게 불고기가 놓인 술상을 차려놓고 자백을 회유했다. 그럼에도 김 씨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법원과 언론의 대응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부산지법은 1968년 11월 22일 검찰의 엉터리 공소장을 토대로 김 씨 등 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수사 검사를 치켜세우는 데 급급했다. 항소심은 달랐다. 1969년 3월 21일 김 씨 등은 전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 같은 해 7월 25일 대법원이 검찰의 항고를 기각했다. 하지만 육체와 정신이 무너진 김 씨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했다. 아들의 누명을 벗기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던 김 씨의 부모 또한 차례로 세상을 등졌다. 근하 군 사건은 1982년 10월 17일 공소시효가 만료돼 영구 미제가 됐다. 1960년대 군사독재 시대 벌어진 일이지만,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무겁다. 이제는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피의자를 둘러싼 검찰의 회유, 이른바 '연어 술파티'와 같은 사건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김 씨에게 제공했던 '불고기 술상'과 묘한 기시감을 느꼈던 이유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수사권 조정과 보완수사, 공소청 설치, 헌법소원 등의 쟁점이 충돌 중이다. 정파적 유불리를 떠나 단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인권을 보호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기철이라는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앙로365] 청년이 떠나면 해양수도도 없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산은 어느 때보다 치열한 정책 경쟁의 무대가 되고 있다.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계기로 해양 관련 공공기관의 추가 이전 논의가 본격화하고, 북극항로 추진본부 출범과 수산진흥공사 설립 추진, 국내 최대 국적 선사인 HMM 본사 이전 논의까지 이어지면서 부산의 해양 정책 지형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지금 부산은 글로벌 해양 경제 중심 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그러나 이러한 거대한 정책 구상과 인프라 확충의 이면에는 우리가 반드시 짚어 봐야 할 불편한 현실이 있다. 바로 이 해양 산업 생태계를 실제로 운영하고 혁신을 이끌어갈 청년 인재를 충분히 길러내고 있느냐의 문제다. 과연 부산은 그 준비가 되어 있는가. 부산은 이미 대한민국 해양 정책과 연구의 핵심 거점이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국립수산과학원, 한국해양진흥공사 등 국가 해양 정책과 연구를 이끄는 주요 기관들이 부산에 집적돼 있고, 이들 기관은 매년 대규모 연구개발 사업을 통해 고부가가치 전문 인력 수요를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있다. 여기에 세계적 수준의 항만과 물류 인프라까지 더하면, 부산은 명실상부한 해양 산업 중심 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산업 기반을 뒷받침할 인재는 충분한가. 현재 부산의 해양수산 전문 교육은 국립부경대와 한국해양대, 부산대 등 일부 국립대에 집중되어 있고, 다수의 사립대학과 전문대학은 해양 인재 양성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수산 분야는 국립부경대를 제외하면 체계적인 인력 양성 기반이 매우 취약하다. 해양 금융, 해양 로봇, 해양 바이오와 같은 신산업뿐 아니라 스마트 양식, 해양 식품 산업, 항만, 해양물류 등 해양 산업 전반에서 전문 인력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 대학들은 여전히 기존 학과 체계에 머무른 채 급변하는 산업 현장의 요구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지역 청년들은 해양 산업에서 미래를 그리지 못한 채 수도권으로 떠나고 있다. 더욱이 수산 분야 인력의 고령화는 이미 위험 수준이다.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머지않아 수산 산업은 물론 부산 해양 산업 전체의 인력 기반이 흔들릴 수 있다. 우리가 참고할 만한 사례는 미국 텍사스의 오스틴이다. 오스틴이 ‘실리콘 힐즈’라는 이름의 세계적 기술 도시로 성장한 배경은 단순한 세제 혜택만이 아니었다. 지역 대학들이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를 지속적으로 공급하는 강력한 교육 생태계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기업이 먼저 와서 인재를 찾은 것이 아니라, 우수한 인재가 있었기에 기업이 자연스럽게 몰려든 것이다. 부산 역시 같은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HMM과 같은 대형 해운기업과 공공기관이 인력 걱정 없이 부산행을 선택하게 하려면, 부산이 전문 인재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도시라는 믿음을 먼저 심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역 대학들의 역할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립대 몇 곳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최근 지적되는 특정 대학 출신 쏠림으로 인한 인력 풀의 경직성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다. 지역 대학들은 각자의 강점과 해양 산업을 연결하는 융합 교육 모델을 과감히 확대하고, 해양수산 특성화 학과 신설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IT·AI, 공학, 인문학, 경영학 등 다양한 전공이 해양 산업과 연결될 때 수도권 대학과 차별화된 부산만의 독보적인 인재 생태계가 완성된다. 동시에 공공기관과 기업들도 대학 교육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첨단 연구 장비를 학생들과 공유하고, 기업과 기관이 교육 과정 설계에 참여하고 졸업생 채용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적 인재 양성 생태계가 구축되면 교육과 산업 현장의 미스매치도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대학과 기업, 연구 기관이 인프라를 공동 활용하며 현장 중심 교육을 운영하면 지역 인재와 산업 경쟁력은 동시에 강화된다. 부산은 이미 세계적 수준의 항만과 해양 인프라, 다양한 정책 거버넌스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해양수도의 경쟁력은 건물이나 기관의 숫자가 아니라 그 안에서 미래를 설계하는 청년 인재의 역량과 열정에서 나온다. 지역 대학들이 수동적 대응에서 벗어나 인재 공급의 전진 기지로 거듭나고, 부산시가 이를 뒷받침하는 정책을 과감히 펼칠 때 부산은 기업과 인재가 스스로 찾아오는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해양도시가 될 수 있다. 기관과 기업의 이전만으로는 해양수도가 완성되지 않는다. 결국 도시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은 ‘사람’이며, 교육의 근본적 전환을 통한 인재 생태계 구축이야말로 우리가 완성해야 할 최고의 해양수도 전략이다.
[편집국에서] 정책 결정할 시간, 실패할 자유, 다시 일어설 권리
2년 전 다뤘던 주제를, 지금 또 다룰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부산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하 글로벌특별법)’ 얘기다. 지난달 박형준 부산시장의 삭발 투쟁과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의원의 등장 이후 하루 만에 국회 행안위 법안소위를 통과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가 좋았다. ‘공은 내 것’이라던 정치인들의 발언은 기분 좋게 묻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법제사법위원회의 문턱은 높았고, ‘숙려’라는 이름의 방관은 길었다. 이달 초 글로벌특별법 통과는 그렇게 또 좌절됐다. 여야가 합의한 법이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으로 올스톱됐다. 이 대통령이 글로벌특별법을 두고 ‘타 지역과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포퓰리즘적’ 입법 사례로 거론한 것은 지방자치의 본질을 오독한 결과다. 지역균형발전은 모든 지역에 똑같은 양의 사탕을 나눠주는 산술적 평등이 아니다. 각 지역이 가진 고유의 경쟁력을 극대화해 국가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전략적 선택이어야 한다. 여야가 뜻을 모은 글로벌특별법은 단순히 지역에 건물 몇 채 더 짓겠다는 개발 사업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짓누르는 수도권 일극주의에 균열을 내고, 지역이 스스로 생존 전략을 짤 수 있게 해 달라는 ‘주권 선언’에 가깝다. 부산이 ‘글로벌 허브’라는 이름 아래 요구하는 것은 특혜가 아니라 동남권 경제축을 살려 수도권 집중으로 인한 국가적 동맥경화를 뚫어내겠다는 고육지책이란 말이다. 사실 글로벌특별법은 당초 ‘~해야 한다’는 강행 규정으로 설계됐던 핵심 조항들이 21대 국회 폐기 후 22대 개원과 동시에 재발의를 앞두고 중앙부처와의 협의 과정에서 ‘~할 수 있다’는 임의 규정으로 후퇴하면서 지역의 거센 반발을 낳은 바 있다. 재정 투입이 전제되지 않은 ‘허울뿐인 껍데기’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하지만 지역은 내심 기대했다. 글로벌특별법을 통해 국제 물류·금융 중심의 자유 비즈니스 도시로 육성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라도 마련되면 부산도 또하나의 글로벌 경제축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껍데기’ 법안이 2년간 표류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최근 박 시장과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추진하는 행정통합 역시 정부의 ‘5극 3특’과 다른 것 같아도 결국 궤를 같이 한다. 정부의 ‘5극 3특’ 밑그림 위에 부산·경남의 행정통합이라는 집을 지어 실질적 ‘지방 자치’를 이끌어내자는 것이다. 세계 여러 나라는 이미 지역 불균형의 위험을 경험하고 대안을 마련해 체질을 개선하고 있다. 프랑스는 1982년 ‘지방자치단체의 자유와 권리에 관한 법’과 이듬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지방자치단체 간 권한배분법’을 제정해 각 지방에 재정·교육·도시계획 권한을 이양해 독립적인 산업 클러스터 구축에 성공했다. 독일 역시 연방기본법에 근거해 동등한 생활 조건 조성을 목표로 한 재정조정제도를 마련한 데 이어 7년간 논의 끝에 2020년 새로운 재정조정제도를 도입하는 등 지역 간 재정 운용을 형평성 있게 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펼치고 있다. 영국의 행보도 빼놓을 수 없다. 런던 중심 국가였던 영국도 2014년 그레이터맨체스터 권한 이양 협정을 통해 그레이터 맨체스터에 보건·복지 예산 집행권을 완전히 넘겼다. 이후 그레이터맨체스터내의 불평등이 잉글랜드의 나머지 지역에 비해 줄어들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현실은 이 같은 세계의 흐름에서 역주행하고 있다. 수도권이 모든 자원을 블랙홀처럼 흡수하고 있는 와중에도 정부는 여전히 중앙 승인을 전제로 한 ‘무늬만 특별법’을 내민다. 정부가 “해주면 좋고, 안 해줘도 그만”이라는 식의 안일한 태도로 지방의 절규를 무시하는 사이 부산의 시계는 멈췄다. 글로벌특별법을 비롯해 지역균형발전을 토대로 한 여러 법안을 요구하는 부산의 외침은 지역 이기주의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지역의 사활이 걸린 가덕신공항도, 북극항로 개척도 중앙의 입만 바라봐야 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바꾸자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세계 여러 국가들이 수도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 지역을 살려냈듯 우리에게도 결단이 필요한 때가 왔다는 ‘알람’이기도 하다. 진정한 지방자치는 중앙이 배포하는 예산 리스트가 아니라 지역이 스스로 법과 제도를 설계할 수 있는 통로를 여는 것에서 비롯된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 법안들이 선거용 ‘표심 잡기’ 불쏘시개로 쓰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유야무야되거나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폐기된다면 지방소멸은 가속화할 것이다. 부산이 요구하는 것은 예산 몇 푼이 아니다. 정책 결정을 할 시간, 실패할 자유, 그리고 다시 일어설 권리다. 그것이야말로 한국 민주주의를 살리는 마지막 기회다. 정치권은 부산의 분노가 ‘나중에’라는 말로 잠재울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섰다는 것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김진호의 금융포커스] 기업은 봄, 가계는 겨울
금융시장이 기형적인 ‘역설적 상황’에 빠졌다. 금융 당국이 가계부채 증가율을 예년보다 현저히 낮은 1.5%로 묶어버리는 방안을 발표한 이후부터다. ‘부동산 투기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감안하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80%까지 낮추겠다는 목표는 명분이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 ‘비대칭성’이 실수요자 등 평범한 서민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시중은행의 영업점 풍경은 극명하게 갈린다. 자금 여력이 충분한 대기업이나 우량 중소기업에게는 저금리 대출을 제안하며 ‘모시기 경쟁’이 분주하다. 가계대출 총량 규제로 새로운 수익원 모색이 시급한 은행들의 고육책이다. 반면 가계대출은 한마디로 ‘빙하기’에 가깝다. 지난 17일부터 시작된 다주택자 만기연장 금지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1.5% 가이드라인도 실제로는 1% 내외로 더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다. 5대 시중은행(KB·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목표가 평균 1% 정도로 가정하면 1년간 최대로 늘릴 수 있는 규모는 6조 4493억 원에 불과하다. 한 달 5374억 원 꼴로 5개 은행 평균으로 1000억 원 남짓에 불과하다. 사실상 ‘문턱 통제’에 가깝다. 그 결과 기준금리 동결 상황 속에서도 주택담보대출(주담대) 금리 상단은 연 7%를 돌파한 상태다. 기업에게는 ‘봄바람’이 불지만 서민들에게는 ‘겨울바람’이 아직 불고 있는 금리의 역설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배분 방식도 문제다. 은행이 월별·분기별로 한도를 까다롭게 관리하면 이는 결국 고신용자 위주로 대출이 이뤄질 수밖에 없다. 당장 생계자금이 급한 서민이나 내 집 마련을 꿈꿨던 실수요자들의 금융 접근성이 크게 악화되는 것이다. 이미 ‘10·15부동산대책’으로 주담대 한도가 줄어든 상황에 대출까지 사실상 ‘선착순’에 가깝게 이뤄질 경우 저신용자 실수요자들은 대부업이나 불법사금융으로 내몰릴 우려도 크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터넷전문은행들에서는 이른바 대출 ‘풍선 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이마저도 고신용자 중심으로 정책 취지와 거리가 멀다. 부동산에 쏠린 과도한 유동성을 회수하고 국가 재정의 건전성을 추구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다. 하지만 정책의 정당성이 수단의 가혹함에 앞서서는 안 될 것이다. 수치 맞추기식 규제는 결국 가장 약한 서민들부터 피해를 입는 구조를 낳기 때문이다. 정부와 금융사들은 ‘숫자’에 집중하기보다는 7%대 고금리를 감당해야 하는 차주들의 ‘비명’에 귀를 기울어야 할 것이다. 규제에 있어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입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내 집 마련을 위한 ‘사다리’가 되어야 하는 금융이 기업·자산가·고신용자에 집중되는 구조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실수요자를 ‘절벽’에서 끌어올릴 정교한 보완책을 서둘러야 한다.
[오션 뷰] 신뢰와 협력으로 북극항로 시대를 열자
올해 3월, 필자는 북위 69도에 자리한 노르웨이 트롬쇠를 찾았다. 북극의 관문으로 불리는 도시에서 ‘지속 가능한 북극항로 시대’의 가능성을 탐색하면서 트롬쇠항과 협력 MOU를 체결하고, 북극경제이사회(AEC)의 공식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아시아 항만에서는 최초 가입으로 북극항로 준비에 부산항만공사가 실질적인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기후 위기가 북극의 모습을 바꾸고 있다. 극지연구소(KOPRI)에 따르면 북극 얼음은 두터운 다년생 얼음이 줄고, 넓고 얇은 단년생 얼음 위주로 재편되고 있다. 모든 탄소 배출 시나리오에서 여름철 ‘얼음이 없는 북극해’의 출현은 불가피한 것으로 분석된다. 위성 관측이 시작된 1979년 이래 여름철 얼음 면적은 10년마다 12.1%씩 줄어들고 있다. 이는 남한 면적의 75%에 달하는 얼음이 매년 사라지는 속도다. 이러한 변화는 세계 해상 교역로의 재편을 예고한다. 최근 중동전쟁으로 공급망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북극항로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북극항로는 단순히 얼음이 빨리 녹는다고 해서 곧바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운용하려면 기본적으로 세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이용할 화물, 운송 수단인 선박, 그리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항만이 그것이다. 쇄빙선 등 선박에 대한 논의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화물과 항만에 대한 준비는 아직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우선 화물로는 북극에 묻혀 있는 LNG 등 에너지와 광물 자원이 고려될 수 있으며, 컨테이너의 경우 특송 화물을 염두에 둘 수 있다. 항만 측면에서 볼 때 부산항은 동북아 주요 항만 중 북극항로에 가장 근접해 있으며, 글로벌 2위 환적항이라는 검증된 인프라와 세계 최고 수준의 조선산업 기반도 갖추고 있다. 남은 과제는 올바른 방향으로 준비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 방향을 다음 세 가지로 본다. 첫째, 친환경·탈탄소이다. 북극은 지구에서 가장 취약한 해양 생태계를 품고 있다. 이를 보호하기 위해 국제해사기구(IMO)는 극지 운항 선박에 엄격한 기준을 부과하는 ‘극지 코드(Polar Code)’를 발효했으며, 2024년 7월부터는 중유(HFO)의 사용과 연료로서의 적재를 금지하는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북극항로를 오가는 모든 선박은 LNG·메탄올·암모니아 같은 친환경 연료를 써야 하고, 기항하는 항만은 그 연료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북극권 연안국의 다자 협의체인 북극이사회(Arctic Council)에서도 친환경 이슈를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다. 둘째는 안전이다. 기상 예측·해빙 탐지·위성 항법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북극해는 여전히 데이터가 부족하고 환경 변화가 극심하다. 얼음이 사라진 오픈워터가 넓어질수록 거대 파랑과 폭풍 발생 가능성은 오히려 커진다. 해빙·유빙 정보, 극지 기상 예보, 보험 등 운항 전 주기에 걸친 정보가 체계적으로 집적·공유되는 ‘북극 항해 안전 데이터센터’가 필요한 이유이다. 셋째, 북극권 당사국과의 협력이다. 북극권 이해 당사자들과의 신뢰 구축 없이 지속 가능한 북극항로 운용은 불가능하다. 개발과 이용이 원주민의 삶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지역 포용성’을 갖추지 않으면 북극권 국가들의 신뢰를 얻기 어렵다. 우리 정부는 2013년 북극이사회의 옵서버 국가로 참여한 이후 북극권 국가들과 다양한 협력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신뢰를 쌓아왔다. 이번에 부산항만공사가 북극경제이사회에 가입하고, 트롬쇠항과 협력 체계를 구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신뢰와 협력’ 없이는 지속 가능한 북극항로 논의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때다. 북극권 국가와의 신뢰와 협력을 바탕으로 친환경 해상 운송로를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기후 대응, 안전 확보, 원주민 포용성까지 아우르는 다자간 협력 플랫폼인 ‘친환경 북극항로(Green Arctic Corridor)’의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시범 사업은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하며, 이에 발맞춰 부산항만공사도 스마트 항만과 친환경 벙커링 인프라 구축, 국내외 북극 협력 강화를 담은 ‘부산항 친환경 북극항로 로드맵’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기후 위기가 만들어낸 역설적인 도전 앞에서 바른 방향성과 철저한 준비로 본격적인 북극항로 시대를 열어나간다면 부산이 울산, 경남과 함께 진정한 해양수도권으로 발전하는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 중심에 바로 부산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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