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소비자 우롱·국회 농락 쿠팡, 사회적 책임 엄중히 물어야
개인정보 유출 사태를 일으킨 국내 1위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업체 쿠팡의 사고 이후 행태는 도를 넘고 있다.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식의 셀프 조사 결과를 돌연 공개해 혼란을 자초한 데 이어, 창업자인 김범석 쿠팡Inc. 이사회 의장은 국회 청문회 출석을 거듭 거부하며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김 의장은 정보가 유출된 지 한 달 만인 28일 사과문을 발표하고 ‘전면 쇄신’을 다짐했다. 하지만 반성의 진정성이 공감을 얻기는 너무 늦었고, 더구나 쿠팡 보도자료를 통한 형식이 되레 비난 여론을 부르고 있다. 소비자를 우습게 보고 국회까지 농락하는 처사에는 엄중한 책임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국회 6개 상임위는 30∼31일 초유의 연석 청문회를 열기로 하고 쿠팡 책임자의 출석을 요구했다. 하지만 김 의장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는 출석을 거부해 한국 사회에 대한 책임을 외면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김 의장 등은 불출석 사유서에서 예정된 일정의 변경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번이 두 번째인 불출석 통보는 앞서 한국어를 못하는 미국인 대리인을 내세워 국회 질의응답을 맹탕으로 만들었던 전례와 함께 조직적·의도적 책임 회피로 보기에 충분하다. 소위 ‘글로벌 플랫폼 기업’은 한국의 법체계와 사회적 기준을 지킬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최근 쿠팡의 자체 조사 결과는 되레 의혹만 부풀렸다. 쿠팡이 유출자를 특정했고, 범행에 사용된 뒤 버려진 노트북을 하천에서 수거해서 포렌식 조사한 결과, 유출 규모는 3000여 건에 불과하며, 외부 유출 정황도 없었다는 것이다. 정부 조사단과 사전 협의하거나, 공동 조사 및 발표 방식 대신 단독으로 공개를 강행한 점에서 의구심만 키운 꼴이 됐다. 진실 규명 과정에서 절차적 정당성이 훼손된다면 신뢰를 잃기 십상이다. 유출 경위와 동기, 단독 범행 여부 등 핵심 사항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쿠팡이 셀프 조사로 얻은 건 의혹 해소가 아니라 쿠팡 자체가 의혹의 몸통이 된 것이다. 더 이상 어물쩍 넘길 수 없게 됐다는 의미다. 쿠팡은 변방의 스타트업이 아니다. 국내 이커머스 시장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국민의 삶과 지역 경제에 적잖은 영향을 미친다. 미국 법인과 국적을 방패 삼아 한국 사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한국에서 기업 활동을 하려면 개인정보 유출뿐만 아니라 노동 문제, 소비자 피해, 중소 상공인과의 갈등 현안에 대해 기업의 최고 책임자가 나와 설명하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국회는 청문회 증인 출석 제도의 허점을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정조사나 입국 금지 등 강력한 조치를 해야 한다. 외국계 기업이 대한민국의 법과 사회 규범을 무시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철퇴가 반드시 내려져야 한다.
[사설] 지방자치 30년, 주민자치회 활성화로 생활 정치 꽃 피우길
정부는 지방자치제도 시행 30주년을 맞아 주민자치회 전면 시행을 추진 중이다. 법제화를 통해 시범 운영되던 주민자치회의 안정성과 실효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행정안전부는 2013년부터 주민자치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기존 주민자치 기구인 주민자치위원회보다 기능과 권한이 강한 주민자치회를 시범 운영하고 있다. 2013년 전국 31곳에 불과했던 주민자치회는 지난해 12월 기준 1411곳(39.6%)이 운영되고 있다. 주민자치회 운영은 전국적인 추세로 점점 확대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부산에서는 아직 주민자치회 도입이 저조하다고 한다. 주민이 직접 행정에 참여하는 실질적 주민자치의 장을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재 부산 지역에서 운영 중인 주민자치회는 16개 구군 206개 읍면동 가운데 6개 구(동·동래·사하·연제·부산진·해운대) 19곳(9.2%)에 불과하다. 기존 주민자치위원회는 연제구를 제외한 15개 구군 187개 읍면동에서 활동한다. 주민자치위원회가 읍면동 행정의 자문 기구로서 주민자치센터 운영을 심의한다면, 주민자치회는 직접 주민자치센터를 운영하고 주민 화합과 발전을 위해 지자체가 위임·위탁하는 사무를 처리하는 등 실질적인 권한이 강하다. 그럼에도 주민자치회 도입이 저조한 이유는 주민자치위원회의 영향력 감소 우려, 예산 증가로 인한 지자체들의 소극적인 전환 장려 때문이다. 지자체와 지역민이 발상을 바꿔야 할 시점이 됐다. 그동안 주민자치위원회는 행정업무에 대한 자문·심의 역할을 해왔지만 단순 행정 보조 역할, 권한 범위 불분명 등 한계가 있었다. 반면, 주민자치회는 민관협치 기구로서 주민이 직접 의제를 발굴·의결하고 예산까지 확보할 수 있다. 정부가 주민자치회 전면 시행을 추진하는 이유는 현장의 반응이 뜨겁기 때문이다. 올해 부산시 운영 평가에서 최우수로 선정된 동래구 안락2동 주민자치회가 대표적이다. 주민이 ‘어르신 안심 생활 지원사업’ 등 6대 마을 의제를 선정했고, 4개가 실제 사업으로 추진됐다. 이처럼 주민이 지역 정책을 수립·실행하며 참여 의식을 높일 수 있어 풀뿌리 민주주의 확산을 기대하게 한다. ‘국민주권 국가’를 지향하는 현 정부는 주민자치권 확대·강화를 국정과제에 포함하고 있다. 윤호중 행정안전부 장관도 “주민자치회 법제화 개정안을 정기국회 중에 처리하자고 당정 간 협의를 마친 만큼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주민자치회가 전면 시행된다면, 지방행정의 자율성과 주민서비스 행정은 한 단계 도약할 것이다. 부산도 대세가 된 주민자치회를 활성화해 생활 정치의 꽃을 피워야 한다. 주민자치회 역할 강화를 위해 행정, 시민·직능단체, 학교 등 지역사회와 협력 네트워크 구축이 절실하다. 다양한 참여 모델 개발, 지역 특색을 반영한 운영 시스템 마련, 주민 참여율을 높이는 프로그램과 교육 다양화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59금 오페라와 고령 도시 부산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도 끝까지 보게 되는 이유는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개연성 때문이다. 극 전개가 어처구니없고 결국은 뻔한 결말로 치닫지만, 눈길을 떼기가 어렵다. 중독과 더 센 자극이 반복되는 막장 드라마에는 계보가 있다. 원조는 16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발명’된 오페라다. 신과 왕을 칭송하는 대신 인간의 희로애락을 정면으로 응시하자는 취지로 음악과 문학, 극, 춤 장르가 통합되어 탄생했다. 흥미를 끌려다 보니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멜로드라마로 흐를 수밖에 없었고 소재도 가정 불화, 배신, 비극적 죽음 일색이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열광했고 그 덕분에 상업 극장 시대가 열려 ‘밤마다 객석을 가득 채우는 대중오락’으로 발전했다. TV 드라마가 영어로 소프 오페라(soap opera)로 불리게 된 것도 막장계의 후예라서다. 부산 오페라하우스는 2026년 말 준공과 2027년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부산과 오페라의 조합은 여전히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여론이 있다. 오페라는 점잖고 교훈적이며, 우아하고 품격이 있다는 선입견 탓이다. 어렵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고정관념을 극복하지 못하면 일반 시민에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될 수밖에 없다. 오페라하우스의 문턱을 낮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페라를 격조 있게 꾸민 성인 드라마쯤으로 여기고 가볍게 즐기는 문화가 형성돼야 저변 확대가 가능할 것이다. 요컨대 관객과의 이질감 해소가 관건이다. ■ 고급으로 포장된 막장 ‘이 작품은 가정 폭력, 성폭력, 살인, 누드, 약물, 음주, 거친 언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잉글리시내셔널오페라 극장이 2024/2025 시즌에 무대에 올린 ‘카르멘’에는 미성년자 입장 제한이 붙어 있다. 다른 극장에서도 작품에 따라 관람 연령을 지정하거나 부모 동반 조건을 붙인다. 원작 자체가 사회의 부조리를 극단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성인물 장르인 데다,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프로덕션이 한술 더 뜨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가 남긴 오페라 부파(희극)의 걸작이다. 한국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팬층이 두텁고 친숙한데, 아마 2023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버전을 만나면 입이 쩍 벌어질 것이다. 연출가 마르틴 쿠세이가 알마비바 백작과 하인 피가로를 폭력과 마약에 물든 마피아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성 착취와 총격전, 선혈, 알몸이 무대를 뒤덮는다. 원작의 귀족-평민 계급 갈등 구조를 현대의 위계적 권력관계로 대체한 것이다. 경쾌한 희극 요소는 희미해지고, 누아르의 질감이 두터워진 새로운 서사 구조를 읽어내는 묘미가 있다. 역시 잘츠부르크에서 2005년 초연된 빌리 데커 연출의 ‘라 트라비아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텅 빈 무대에 거대한 시계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장면이 각인되면서 ‘시계 트라비아타’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무대 설정은 폐결핵으로 죽음을 앞둔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삶이 유한한 시간에 갇혀 있음을 상징한다. 원작의 순애보를 뛰어넘은 인간 존재론의 질문이다. 연출 의도를 이해하고 나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한층 애틋해질 뿐만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주는 극적 효과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신산의 고비고비를 거치고 난 인생의 후반기에 이 연출을 접했다면 공감 영역이 훨씬 넓어질 테다. ■ 오페라, 덧없는 인생을 노래하다 ‘카르멘’은 멀쩡한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치정극이다. 한국 관객에게 인기가 많은 ‘라 트라비아타’·‘리골레토’·‘토스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주인공의 비극적 죽음과 절규로 끝을 맺는다. 한데, 뻔할 것 같은 팜므 파탈 소재도 연출에 따라 전혀 다른 주제 의식으로 재탄생한다. 영국의 로열오페라하우스와 미국 뉴욕메트로폴리탄오페라가 2023/2024 시즌에 ‘카르멘’을 동시에 선보였다. 두 곳 모두 신예인 메조소프라노 아이굴 아흐메트쉬나가 카르멘 역을 맡고 시공간을 현대로 옮긴 건 같지만 메시지가 달랐다. 뉴욕의 카르멘은 멕시코 국경을 무대로 한 무기 밀매단 소속으로, 미국 사회의 폭력·총기 문제를 드러냈고, 이민 여성 노동자로 그려진 영국의 카르멘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 폭력 구조를 시사했다. 두 작품 모두 메가박스에서 상영된 터라 국내 오페라 팬들은 동시에 두 프로덕션을 비교 음미할 수 있었다. 클래식부산의 정명훈 예술감독은 지난 19~20일 부산콘서트홀 무대에 콘서트 오페라 형식의 ‘카르멘’을 올렸다. 정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내년에 전막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명실상부 세계 최정상급인 정 감독이 선보일 ‘카르멘’이 어떤 메시지를 담아낼지 기대가 크다. 또한 이 작품에 부산이라는 도시의 색깔이 어떻게 투영될지도 궁금하다. 또 정 감독은 자신이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이탈리아 라스칼라 극장의 ‘오텔로’ 프로덕션을 부산에 초청할 계획이다. 오페라 발상지의 본격 무대를 부산에 소개하겠다는 취지다. 부산 오페라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키겠다는 사전 포석이 착착 진행되는 모양새다. ■ 인생 황금기에 즐기는 예술 장르로 이탈리아에서 상업 극장이 처음 문을 열었을 당시의 풍경을 비유적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대단한 센세이션이 느껴진다. 농사를 팽개친 남편들이 도시의 극장을 전전해 부인들이 한탄하고, 싼 가격에 좋은 자리를 구하려는 극장 앞 노숙자까지 생겨났다. 왜냐하면 너무 재미있어서 안 보고는 배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 오페라하우스 개관 이후라면 어떨까. 대박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부산의 공연 문화계에 분명한 입지를 구축하고 안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 유수의 극장과 어깨를 겨루는 원작 그대로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연출로 재창작되는 ‘부산 프로덕션’ 병행을 모색하는 유연한 운영이 바람직하다. 부산이 초고속 고령화가 진행되는 도시라는 점에 착안한 시니어 맞춤 전략은 어떨까. 부산은 2050년에 가면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44%로 늘어난다. 오페라하우스가 곁에 있어서 인생의 쓴맛, 단맛을 곱씹게 만드는 작품을 즐기며 노년을 보낼 수 있는 도시. 부산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요인이 될 테다. 원래 오페라가 통속 성인물로 출발했으니,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쉽다. 여기에 부산의 색깔이 입혀지면 금상첨화다. 낡은 장르라도 새 숨결을 불어넣으면 경쟁력 있는 콘텐츠로 재탄생된다. 부산 오페라하우스가 그 산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단 1점만을 위한 전시
박물관의 핵심은 전시실이다. 우리가 흔히 “박물관에 간다”고 말할 때도 대개는 전시를 보러 간다는 뜻이다. 그래서 박물관은 늘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한다. 전시 주제와 유물의 선택에서부터 전시실의 색과 조명, 진열장 높이와 동선, 설명문 하나에 이르기까지 전시는 치열한 설계의 산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안에만 해도 전시실은 수십 개에 이른다. 안내지나 안내판만으로는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이는 해외의 유명 박물관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유물이 전시실에 빼곡히 들어서 있어 하루이틀 관람으로는 모두 보기 힘들다. 한때 박물관의 미덕은 얼마나 많은 유물을 보여주느냐에 있었다.하지만 최근 박물관의 목표는 달라지고 있다. 많이 보여주기보다 단 한 점의 유물이라도 관람객의 기억에 오래 남게 하려는 방향이다. 국내에서는 2021년 국립중앙박물관에 문을 연 ‘사유의 방’이 전환점이 됐다. 440㎡ 공간에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을 전시했다. 같은 박물관 내 ‘손기정 기증 청동 투구’ 전시실 역시 유물 하나만으로 서사를 완성했다. 이는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신라금관 특별전’으로 이어진다. 유물 수를 줄이는 대신 깊게 들여다보게 하는 방식이다. 얼핏 썰렁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이런 전시를 다녀온 이들은 “유물을 제대로 본 느낌”이라고 종종 말하곤 한다. 이런 흐름은 해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21년 10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재개관한 뭉크 미술관은 기존 미술관을 13층 규모의 신축 건물로 옮기며, 에드바르 뭉크의 대표작 ‘절규’만을 위한 전시실을 새롭게 마련했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역시 리노베이션을 통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전용 전시 공간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올해 초 밝힌 바 있다.최근 문을 연 국립부여박물관의 백제금동대향로 전용 전시관은 이런 전시 흐름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전시관은 향로 구조를 본떠 3층 규모로 지어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의 방’처럼 특정 유물을 위해 전시실이 조성된 경우는 있었지만, 건물 자체가 한 유물을 위해 설계된 것은 처음이다. 전시실은 빛을 극도로 절제하고 조명을 오직 향로에만 집중시켰다. 이런 전시 앞에서 관람객은 관람의 속도를 늦춘다. 설명문을 읽고 조각 하나하나를 살피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만큼 유물 관람은 깊어진다. 보이지 않던 부분도 보이기 시작한다. 박물관의 변화는 결국 관람객을 향한 배려다. 많이 보지 않아도 오래 남는 관람, 그것이 오늘날 박물관이 건네는 제안이다.정달식 논설위원 dosol@
논설주간/이사
강윤경
논설위원/대기자
강병균
논설위원
김승일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편집국에서] 왜 면박을 주면 안 되나
지난 23일 해양수산부 업무보고를 끝으로 3주에 걸친 정부 부처 및 산하기관 업무보고가 마무리됐다. 역대 정부 최초로 생중계가 됐던 부처 업무보고는 분명 이전과 달랐다. 국민 앞에 공개됐고, 생중계됐으며, 대통령은 장관과 공공기관장들에게 직접 질문을 던졌다. 업무보고는 더 이상 책상 위 문서가 아니라, 국민이 지켜보는 현장이 됐다. 그동안은 무엇을 결정하는지, 누가 책임지는지 국민은 알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신년 업무보고는 최소한 권력이 숨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업무보고 현장 벽면에 붙어 있는 ‘국민께 보고드립니다’라는 문구는 이번 정부의 소통과 투명성을 강조하는 의미를 담았다. 공개와 질문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기본 조건이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공개가 곧 개혁은 아니라는 점이다. 카메라가 켜졌다고 해서 국정이 자동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문제는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뒤에 숨은 사람들이다. 이번 업무보고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장면은 대통령의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기관장들, 원론적 답변으로 시간을 끄는 고위 관료들, 책임 대신 ‘검토 중’이라는 말로 빠져나가는 행태였다. 국정의 병목은 대부분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정책 의지는 위에 있지만, 실행은 아래에서 멈춘다. 권한은 있으나 책임은 지지 않는 구조, 자리는 차지하되 결과에는 무관심한 기관장들. 생중계가 불편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민 앞에서 설명해야 하는 순간, 그동안의 무능과 안일함이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이번 업무보고는 기관장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들춰냈다. 일부 언론과 야당에서는 ‘면박 주기’ ‘공직사회 압박’ ‘전 정부 인사 찍어내기’ 등 여러 이름으로 이번 업무보고에 비판을 쏟아냈다. 물어보자. 면박을 주면 왜 안 되나. 공직사회에 압박을 주면 왜 안 되나. 민간 기업에서는 어찌 보면 그 정도의 면박은 허다하다. 일을 못 하면 그보다도 더한 면박을 넘어 질책을 받는다. 직장인들은 그걸 묵묵히 감수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가고, 그런 효율성을 바탕으로 기업은 발전한다. 공직사회를 예외로 두면 안 된다. 그냥 대충 월급이나 받고 시간을 때우자고 장관이나 공공기관장을 해선 안 된다. 기관장 정도 하려면 전문성을 갖추고 어떠한 질문에도 답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선거 때 캠프에 있었다는 이유로, 고위층에 줄을 댔다는 이유 등으로 얼떨결에 된 ‘낙하산 기관장’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으레 대통령 업무보고 때는 밑에 직원들이 만들어준 보고서를 보면서 읽어 나가고, 대통령은 듣기만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풍경. 이런 모습에만 익숙해져 있다가 약간의 격노와 공격적인 질문은 다소 낯선 광경일 수 있지만, 행정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공직사회의 긴장도를 높이는 건 필수불가결하다. 대통령실에서 기획된 생중계 신년 업무보고가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공직사회의 민낯이 드러난 이상, 이젠 이번 정부의 공직사회 개혁은 하나의 당면 과제가 됐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과를 내지 않아도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지속된다면,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생중계하고, 아무리 강한 질책을 해도 현장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해수부를 마지막으로 신년 업무보고는 끝났지만, 시즌2가 예고됐다. 이재명 대통령은 6개월 뒤 새로운 방식으로 업무보고를 해보자고 제안함으로써 관심이 쏠린다. 이 대통령은 “업무보고를 통해 소통을 강화해야 공직사회 전체가 살아 움직인다. 넷플릭스보다 재미있다는 평가가 있다”며 긍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했지만, 대통령의 자성과 준비도 더 필요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정책이 된다. 그래서 즉흥은 위험하고, 준비되지 않은 발언은 혼란을 낳는다. ‘환단고기’ ‘탈모약 건강보험 적용’ ‘촉법 소년 연령 하향 검토’ 등 평소 잘 알고 자신 있는 분야라고 해서 즉흥적으로 지시를 쏟아내며 국정에 혼선을 초래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대통령의 언어가 반드시 절제돼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괜히 지엽적인 것이 논란으로 부각되면서 꼬투리 잡히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강한 리더십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한 번 던진 방향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일관성에서 나온다. 이번 업무보고가 ‘소통의 출발점’으로 기록될지, ‘정치적 장면’으로 소비될지는 대통령의 실행 의지에 달렸다. 시즌1이 흥행에 성공했다고 해서 이에 자만한 채 시즌1을 답습하는 시즌2를 국민은 원치 않는다. 시즌2에서는 대통령이든 공직사회든, 좀 더 발전된 모습을 기대한다. 최세헌 편집국 부국장 cornie@busan.com
[오션 뷰] 은밀한 죽음의 덫, 유령어업 막아야
‘유령어업(Ghost Fishing)’. 섬뜩한 기분이 드는 표현이다. 유령이나 유령선이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어업 활동 중 바다에서 유실되거나 버려진 어구가 계속해서 바다 생물을 포획하여 물고기가 사라지는 것을 말하며 해양 환경과 수산업이 직면한 대표적 위협 중 하나이다. 사람의 손이 잘 닿지 않는 바닷속에 방치된 어구가 무의미하게 그리고 오랫동안 해양 생명을 앗아가기 때문에 피해는 장기간 축적되고, 실태 파악도 어렵다. 최근의 조사와 분석에 따르면 유령어업이 초래하는 생태적, 경제적, 사회적 피해는 이미 위기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Ghost Fishing’이라는 표현은 1960년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처음 등장했다. 1980년대 어업 공간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유실되는 어구가 대규모임이 확인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유엔환경계획(UNEP)과 유엔식량농업기구(UNFAO) 공동 보고서(2009)를 통해 국제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 보고서는 전 세계 바다에서 매년 약 64만 톤에 가까운 어구가 버려지거나 유실되며, 이는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의 주요 비중을 차지한다고 경고했다. 또한 유실된 그물이 수년간 생물을 포획하며 자원 손실을 가중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명확히 제시했다. 유실·폐기 어구에 포획돼 폐사 ‘죽음 악순환’ 해양 생물 1500종, 연 1조 7000억 원 피해 생분해 기술·디지털 관리 등 국제 협력 필요 이후 유령어업의 심각성은 점차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최근 호주의 연방과학산업연구소(CSIRO)는 전 세계적으로 어구 종류에 따라 매년 5~30%가 유실된다고 발표한 바 있다. 유럽연합 공동연구센터(JRC)는 북동 대서양 1000m 심해에서 약 2만 5000개의 폐자망을 발견했다. 이 그물들은 대구, 가자미, 문어 등이 다량으로 걸린 채 수년간 ‘죽음의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었으며, 사체가 다시 미끼가 되어 새로운 피해를 불러오는 비극적 순환 구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미국 해양대기청(NOAA)은 일부 북극 연안의 유실 어구가 바다표범·고래·바닷새의 주요 폐사 원인임을 밝히기도 했다. 이제 유령어업은 세계 해양 생물에 가장 광범위한 비의도적 피해를 주는 요인 중의 하나다. GGGI(세계폐어구계획)는 전 세계적으로 약 1500종 이상의 해양 생물이 ALDFG(유실·폐기·방치된 어구)에 의해 직접적 영향을 받는다고 분석했다. 바다거북, 바닷새, 물범, 돌고래 등 보호종의 폐사도 유령어업과 연관되어 있다. 경제적 피해도 매우 큰데, EU는 유령어업으로 발생하는 어획량 감소·조업 차질·선박 사고 등 경제적 손실을 연간 10억 유로(약 1조 7000억 원) 이상으로 추정했다. 우리나라도 연간 약 4000억 원의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제사회도 본격적으로 유령어업을 해양 환경 및 식량 안보 관련 핵심 의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FAO는 2018년 ‘어구 표시 자발적 지침’을 채택해 모든 어구에 식별 표시, 유실 시 보고, 회수 및 폐기 절차 마련을 권고하고 있다. UNEP, IMO(국제해사기구), RFMOs(지역수산관리기구)도 유령 어구를 범세계적 해양 오염원으로 규정하고 공동 대응을 확대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2019년 해양폐기물 및 해양오염퇴적물 관리법을 제정하고 2022년 수산업법을 개정하여 침적 폐어구 수거 사업 확대, 어구 실명제, 어구 보증금제, 재활용 기반 확충 등 어구 전주기 관리 체계를 단계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특히 한국수산자원공단 자료에 의하면 2024년 통발을 대상으로 세계 최초로 도입된 어구 보증금 제도가 2026년부터 자망과 부표까지 포함되면서 연간 1400만 개가 넘는 어구가 대상이 된다. 그리고 아직은 일부 어구에 한정되기는 하지만 폐어구 반납에 대한 인센티브 제도가 도입된 이후 폐어구 회수량이 배 가까이 증가한 사례를 볼 때, 합리적인 관리 체계 위에 적절한 인센티브가 더해진다면 유령어업 예방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유령어업을 줄이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식의 변화다. 어구 유실이나 무단 폐기는 단순한 재산 피해나 순간의 편의에 그치지 않고 어업 자원의 영구적인 유령 소비로 이어지고 전 지구적 피해로 돌아온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나아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기술과 정책, 지역사회가 함께 하는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생분해성 어구, 저비용 어구 추적 장치, 디지털 어구 관리 시스템 등 혁신 기술의 도입과 어구 판매·사용·회수·폐기 과정의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전주기 관리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공해와 극지 해역처럼 국가 경계를 넘어선 해역에서는 책임 있는 국기들이 중심이 된 국제적인 협력 대응도 필요하다. 유령어업은 바닷속에서 조용히 일어나지만 그 영향은 영구적이고 파괴적이다. 바다의 건강과 소중한 수산 자원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어업인, 공공 기관과 정부, 그리고 시민단체가 함께 유령어업을 예방하고 문제해결에 함께 나서야 할 시점이다.
[김진성의 타임 아웃] 자유계약선수(FA)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는 올겨울 자유계약선수(FA, Free Agent) 계약에 소극적이었습니다. 내년에는 반드시 가을야구를 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구단 안팎으로 흘러나왔는데도 FA 시장에서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죠. 알고 보니 조용히 내실을 다졌습니다. FA 시장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그 비용으로 알짜 외국인 선수를 데려오는 것이었지요.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와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한 외국인 투수 엘빈 로드리게스와 제레미 비즐리를 영입했고, 아시아쿼터로 일본 출신 교야마 마사야를 데려왔습니다. 내년 시즌에는 정말 사직에서 가을야구를 볼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 FA 제도는 언제 생긴 걸까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75년 12월 23일 MLB에서 처음 시작됐는데요. MLB는 리그 초창기인 1880년대 구단의 독점계약권리인 보류권 제도를 만들어 100년 가까이 유지했습니다. 선수들은 소속 구단과 시즌 개막 전까지 계약하지 못하면 보류권 제도 때문에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없었고, 계약은 1년 자동 연장됐습니다. 이같은 불합리한 계약 환경은 1969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뛰던 흑인 외야수 커트 플러드의 이의 제기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세인트루이스는 1969년 플러드를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트레이드했는데요. 이에 플러드는 인종차별 문화가 심한 필라델피아로 이적하지 않겠다고 법정 싸움을 벌였습니다. 플러드는 이 과정에서 보류권 제도의 불합리함을 강조하면서 자유계약권리를 주장했습니다. 플러드는 대법원까지 가는 분쟁 속에 패소했으나, 이 사건은 MLB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법정 싸움 과정을 지켜본 많은 선수가 자유계약권리를 법적으로 강하게 제기했고, 1975년 투수 데이브 맥널리와 앤디 매서스미스가 소송 끝에 구단 이적의 자유를 법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조정위원회는 두 선수의 자유계약권리를 인정했고, 1976년 미국 연방지방법원과 항소법원은 이 결정을 확정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1976년 7월 MLB 선수노조와 구단은 단체협약을 통해 FA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후 선수들은 한 팀에서 6시즌을 뛰면 자유롭게 구단을 옮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선수들의 대우는 크게 달라졌고, 전 세계 프로스포츠 환경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975년 판결로 미국프로풋볼(NFL), 미국프로농구(NBA), 유럽 축구 선수 이적 규정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국프로야구는 1999년 2월 10일 구단주 총회에서 FA 제도 도입을 승인했고, 그해 11월 송진우가 한화 이글스와 계약기간 3년, 7억 원에 합의하면서 프로야구 FA 1호 계약 선수가 됐습니다.
[공감] 사람이 온다는 것은
온다. 오는 것이 많은 계절이다. 이슬이 오고 바람이 오고 짧은 햇살이 긴 그림자를 데리고 온다. 색을 품은 잎사귀도 제 몫의 시간을 다해 땅으로 내려오고 지난 기억도 잠시 마음에 눌러앉는다. 조용히 혹은 격렬하게 밀려오는 운명과 맞닥뜨리기도 하지만, 예고 없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사람이 온다. 적막 같은 빈집에 백년손님이 오는 것이다. 어느 시구에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했는데 진짜 놀라운 일이다.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은 도대체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일까. 가족이 한 명 더 생긴다는 것은 모래바람이나 바다 태풍보다도 더 거센 강풍을 동반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바람은 무너뜨리기보다는 무언가를 세우는 바람이다. 인연의 벽돌을 쌓고 신뢰의 기둥을 세우며 가족이라는 이름의 지붕을 덧얹는다. 새 식구가 온다.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새 식구 맞이 준비를 한다. 청탁 원고도 작품집 교정도 강의 준비도 모두 차순으로 밀려났다. 답바지 음식을 들고 첫 방문했을 때는 주문한 생선회로 잠시 대접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직접 음식 준비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시장 가는 걸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호숩다’라는 남도 지방 탯말을 빌려와 지금의 내 감정에 실어도 될까. 오랜만에 재래시장의 인파에 실려 다니는 일이 이렇게도 신명 날 줄이야. 예전 같으면 동네 마트를 한번 휘돌아 몇 가지 먹거리만 준비했지만, 이번에는 나도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진짜 주부가 되었다. 갈비도 사고 강정도 떡국도 더덕도 나물거리까지 넘쳐나도록 산다. 일전에 다쳤던 허리가 뜨끔뜨끔하고 의사 선생님이 무거운 것을 절대 들지 말라던 말이 떠오르는데도 그냥 실실 웃음이 난다. 차에 장거리를 옮겨놓고 다시 마트로 이동한다. 냉장고 속 오래된 반찬통을 바꿔야 하고 실내화도 폭신한 것으로 준비하며 욕실 슬리퍼도 새뜻한 것을 고른다. 거실용 향초를 사고 펌프식 손 비누를 구입하며 달걀도 난각번호를 살펴 가며 담고 생수 역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 든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반찬 가지 수를 세어보고, 갈비찜과 떡국은 시뮬레이션하여 미리 맛을 가늠한다. 손님께서 보리차를 드신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했으므로 햇보리를 덖은 물을 끓이면서 물 간을 맞추느라 몇 번이나 뜨거운 차를 홀깍거리며 마셔본다. 그러는 동안 지긋하던 허리통도 말쑥이 가라앉았다. 쪼꼬맣던 딸아이가 어른이 되고 아들 같은 듬직한 사위가 생겼다. 그 인연을 둘러싼 사돈 내외를 만나고 또 사돈의 가족들과도 연결되었다. 바깥사돈 고향이 무척산 근처라는 것과, 안사돈의 자매들이 유난히 의가 좋아 주말마다 백수 노모 댁에 모인다는 사실과, 바이올린을 켜는 ‘시우’라는 아홉 살 예쁜 꼬마 아가씨가 내 사위의 조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사위가 온다. 까칠하던 딸을 단박에 야들하게 만든 그 신비한 남자가 오는 것이다. 서른 몇 해 동안 설거지 한 번 하지 않았고 세탁기 근처에도 가지 않던 딸이었다. 그뿐인가. 요리 젬병 아가씨가 애호박전도 부치고 고등어도 굽고 소고기뭇국도 끓이며 ‘지옥에 빠진 계란’의 뜻을 가진 ‘에그인헬’이라는 중동 요리까지 만든다. 이 불가사의한 힘은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단 말인가. 인간의 가능성은 뜻밖에도 사랑이라는 자극 앞에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사람이 온다는 건, 또 다른 세계가 열리는 일이다. 그의 말과 그의 웃음과 그의 시간이 함께 오는 일이다. 그리하여 삶이란 오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연습이라는 것을 배워간다. 그 연습 속에서 우리는 어느새 조금씩 더 다정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기고] 국가균형발전의 시작은 부산으로부터
대한민국은 지금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수도권 과밀을 완화하고 남부권에 새로운 성장축을 세우겠다는 국가적 구상은 더 이상 선언이나 구호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실행을 위한 구체적인 추진 방안이 마련되어야 하고, 부산은 그 방안을 적용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지다. 그간 수도권 집중이 심화되며 부산은 ‘제2의 도시’라는 위상이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시점에서 수도권의 대체축으로 기능할 수 있는 지역은 사실상 부산을 포함한 남부권이 유일할 것이다. 특히 부산은 세계 2위 환적항을 기반으로 동북아 관문이라는 독보적인 지정학적 입지 위에 항만·공항·철도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복합 물류체계를 갖춘 도시이자, 제조업·물류·관광·금융이 집적된 글로벌 복합 대도시다. 서울과 동일한 길을 걷는 추격자가 아니라, 전혀 다른 기능과 구조로 국가 성장의 또 하나의 발전축을 담당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산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이에 더해 북극항로시대의 개막과 4차산업혁명의 핵심인 AI 기술의 발전은 부산의 전략적 가치를 한층 더 부각시키고 있다. 북극항로가 가져올 글로벌 물류·에너지·산업 지형의 변화와 함께, AI 기술은 전통산업인 물류·제조·해양 산업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며 새로운 성장 단계로 이끄는 게임체인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해양수산부와 해운기업 본사의 부산 이전 추진은 이러한 변화 속 부산을 국가균형발전 전략의 중심에 두겠다는 정부의 분명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지금 다가오는 새로운 기회를 발판으로 성공적인 국가균형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외부적으로 수도권 중심의 성장 구조를 보완·분산할 수 있도록 부산이 중심이 되어 남부권 전체의 경제·산업 협력을 전략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부산은 항만·공항·금융·관광 등 도시 인프라와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글로벌 허브 기능을 강화하고, 울산과 경남은 자동차·조선·기계 등 전통 제조업을 기반으로 AI 조선, 제조 혁신 등을 통해 산업 경쟁력을 고도화하는 방식으로 상호 보완적인 발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이와 병행하여 부산 내부적으로는 글로벌 허브 도시로서의 위상에 걸맞게 기업 혁신, 행정 혁신, 금융 혁신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철저한 준비를 해나가야 한다. 그 첫 번째는 기업 혁신이다. 급변하는 산업 환경 속에서 기업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AI·디지털 전환, 친환경 기술 도입, 기술 고도화 등 혁신 역량 강화가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기술 개발, 인재 확보, 자금 조달, 시장 진출이 유기적으로 구축·운영되는 혁신 생태계 조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경영자는 혁신 의지를 가지고 기업 운영에 적극 실행해야 한다. 다음은 행정 혁신이다.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규제 개선이나 절차 간소화에 머무르는 단순 관리 중심의 행정에 그쳐서는 안 된다. AI와 데이터 기술을 적극 활용해 행정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동시에 산업 변화와 기업 수요를 선제적으로 파악하고, 정책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아울러 4차 산업혁명과 AI 전환 등 미래 산업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을 바탕으로, 부산의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고 중장기 산업전략을 설계할 수 있는 정책 역량이 요구된다. 마지막은 금융 혁신이다. 금융의 역할은 더 이상 단순한 대출이나 이자 수익 중심의 활동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미래가치 창출에 기여하는 생산적 금융 체계로 전환돼야 한다. 글로벌 자본 이동과 금융 환경이 빠르게 재편되는 가운데, 지역 금융 역시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핀테크, 디지털 금융, 데이터 기반 금융 등 첨단 금융 기술을 적극 활용해 기업의 혁신과 투자를 촉진하고, 나아가 지역 산업과 글로벌 자본을 연결하는 금융 플랫폼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국가균형발전은 대한민국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중대한 국가 전략이다. 권역별 경제 발전 전략과 협력, 그리고 각자의 혁신 노력이 함께 어우러질 때 전국 어디에서든 청년이 기회를 얻고, 기업이 성장하며, 시민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균형 잡힌 나라를 만들 수 있다. 그 출발점은 부산이다.
[기고] 이번에는 맑은 물 먹을 수 있어야
낙동강 유역 주민들에게 깨끗한 수돗물을 공급하겠다며 정부가 다시 나서고 있다. 최근 기후에너지환경부는 낙동강 유역 주민의 식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맑은 물 공급을 위한 최적 방안을 마련하고, 단계별 사업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강변여과수와 복류수를 이용하는 취수원 다변화 방안이 제시됐고, 부산 취수장을 낙동강 상류로 올리는 방법 등이 논의되고 있다. 낙동강 하류 지역 주민들에게 남강댐의 물 공급 계획은 30년 이상 늘 애만 태우게 만든 ‘희망고문’과 같은 것이었다. 남강댐의 상류에 댐을 더 만들어서라도 깨끗한 물을 부산과 창원·함안·김해·양산 등 경남의 중·동부 지역 주민들에게 공급하겠다는 것은 역대 정부의 일관된 국정과제였고, 경남도의 도정과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서부경남 지역과 일부 환경단체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그런데도 희망의 끈을 놓지 못하는 것은 낙동강 하류 주민들의 생활과 건강 문제와 직결돼 있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부산의 끈질긴 구애에 취수예정지 주민들과 지자체들이 점차 호의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진주 등 서부경남에서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남강댐물의 수급 체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주목된다. 지난해 부산상의회장 취임 직후 반드시 물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강한 의지를 나타냈던 양재생 회장의 적극적인 활동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양 회장은 지난 10월 서울에서 기후부장관을 만나 부산의 맑은 물 확보와 관련한 건의서를 전달하면서 낙동강 취수원 다변화 사업을 국정과제로 삼은 정부가 부산 물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대체수원 확보 등 장기적 방안도 함께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지난해에도 대통령에게 물 문제를 건의해서 긍정적 답변을 얻어냈다. 돌이켜 보면 맑은 물 공급 문제는 1991년 페놀사태 이후 필자가 부산상의회장을 맡고 있던 1990년대 중반부터 정부와 낙동강 유역 지자체들이 대책 마련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각종 정책과 다양한 방안이 제시됐으나, 서부경남의 반대로 인해 어느 것 하나 진척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진주 출신의 출향인들이 재부산진주향우회와 진주·부산발전협의회 등을 만들어 민간 차원에서 소통하면서 공감대를 넓혀나갔고, 재부경남향우연합회가 힘을 합쳤다. 허남식 전 부산시장 등 서부경남 출신의 출향인들도 함께 현지 지자체장과 상의회장 등을 직접 만나 지역발전기금 지원 등 상생 방안을 협의했으나, 문제 해결에는 미치지 못했다. 최근 서부경남에서도 남강댐 방류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종전과는 다른 변화가 감지된다. 사천·남해·하동 지역에서 홍수 때 남강댐의 대량 방류가 “공동체의 생존기반을 무너뜨리는 구조적 문제”라며 국회의원과 지자체장들이 나서 피해보상과 함께 댐 운영 방식과 방류체계 개선, 국비지원 등을 요구하고 있다. 지난달 말에는 진주에 지역구를 둔 의원이 경남도의회에서 지난 7월 극한호우 당시 남강댐은 최대량을 방류했는데도 댐 바로 아래에 사는 진주시민은 물론이고 함안과 의령 군민들까지 엄청난 침수 피해를 입을 뻔했던 위기를 겨우 넘겼다며 기후대응댐 건설을 공식 제안했다. 그동안 정부와 경남도가 남강댐 수위 높이기, 합천댐의 조정지댐 활용, 함양 문정댐 건설 및 중·소규모 댐 건설 등의 방안을 내놓았으나 댐이란 말만 나와도 심한 거부감을 나타내던 서부경남에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심정’으로 이런 의견이 나왔다는 것은 이상기후로 인한 홍수 위험이 그만큼 커졌다는 증거라고 하겠다. 이런 대책을 맑은 물 공급과 직접 연관을 지을 수는 없겠으나, 좀 더 다목적인 방향으로 이뤄져서 더 많은 주민들이 혜택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는 10여 년 전부터 일본의 8개 광역지자체가 결성해서 공동발전하고 있는 간사이광역연합을 모델로 부울경광역연합을 만들자고 주장하면서, 이 연합의 결성에 단초가 된 것이 3개 광역지자체가 물 문제를 양보와 타협으로 해결했다는 점을 강조해왔다. 낙동강 물 문제는 결국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강과 안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상류와 하류 지역 주민들이 서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상생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정달식의 일필일침] 폐교 하나쯤은 이런 공간 필요하다
“외로움은 하루에 담배 15개비를 피우는 것만큼이나 건강에 해롭다.” 미국 연방정부 공중보건서비스단은 2023년 발표한 ‘외로움과 고립감이라는 유행병’ 보고서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같은 해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외로움을 긴급한 세계 보건 위협으로 규정하고 이를 전담할 위원회까지 출범시켰다. 영국은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 담당 장관을 임명해 국가 차원의 정책을 추진해 왔고, 일본도 코로나19 이후 고독과 고립 문제를 전담하는 장관직을 신설하며 관련 대책을 강화했다. 한국 역시 고독사 예방과 사회적 고립 해소를 위한 정책을 점차 확대하고 있다. 외로움이나 고독은 이제 전 지구적 사회 리스크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데 이 문제의 한가운데에는 바로 노인이 있다. 노인과 외로움은 어쩌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물론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얄팍한 행복 대신 단단한 외로움을 선택하라”고 말하며 외로움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외로움은 내면의 성장과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특히 노인에게 외로움은 철학적 성찰의 기회가 되기보다 삶의 무게를 더욱 가중시키는 현실적 고통으로 다가오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외로움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국가데이터처의 ‘2025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연령대가 높을수록 외로움을 느끼는 비율이 증가했고, 특히 80세 이상 노인의 절반 이상이 외로움을 호소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노인의 외로움은 삶의 질 저하를 넘어 신체·정신 건강의 악화, 우울과 사회적 위축으로 이어진다. 최악의 경우 고독사라는 비극적 결말에 이르기도 한다. 이 문제는 부산에선 더욱 절박하게 다가온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 비율이 전국 특·광역시 가운데 가장 높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노인들이 여가와 활동, 생산적 참여를 동시에 지원하는 공간도 충분하지 않다. 기존 노인복지시설은 대체로 닫힌 공간 안에서 상담이나 강의, 여가 프로그램에 집중돼 있어 생산적 활동이나 폭넓은 사회적 참여를 담아내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 지점에서 눈여겨볼 자원이 바로 폐교다. 학령인구 감소로 현재 부산에는 50곳이 넘는 폐교가 존재한다. 앞으로 그 수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지금까지 폐교는 매각 대상이거나 임시 활용 공간 정도로 취급돼 왔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폐교는 고령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공공 자산으로 충분히 재탄생할 수 있다. 그래서 제안한다. 폐교를 노인을 품은 새로운 공간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폐교 활용의 가능성은 이미 검증된 바 있다. 부산 서구 암남동에 위치한 ‘알로이시오기지1968’은 폐교를 복합공간으로 재탄생시켜 지역의 대표적 명소가 됐다. 카페와 영상제작실, 상담·치료실, 공방, 침묵의 방, 도서관과 사랑방, 부엌, 수직농장, 달빛 옥상과 옥상 텃밭, 체육관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이 공간은 개관 4년 만에 10만 명이 넘는 초중고 학생들이 찾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 성공 모델을 노인을 위한 공간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기존 노인복지시설이 상담과 강의, 여가 중심의 비교적 닫힌 공간에 머물러 있다면, 폐교는 교육·체험·생산·보건 기능이 한 공간에서 유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열린 공간이자 지역의 생활 거점으로 재구성하자는 제안이다. 예컨대 교정과 운동장 일부를 공동 경작지로 활용해 노인들이 직접 작물을 기르고 이를 폐교 내 장터에서 판매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에 식사 공간과 명상 프로그램, 교양 강좌, 체육·취미 활동, 보건소, 약국 등 간단한 의료 서비스까지 더해진다면 폐교는 노인의 일상과 관계가 회복되는 생활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나아가 지역 주민을 위한 카페나 독서실, 소규모 영화관을 함께 운영하는 것도 가능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졌던 교실과 운동장이 노인의 대화와 활동, 지역민의 문화로 다시 채워진다면 폐교는 방치된 건물이 아니라 사회를 회복시키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최근 전남 고흥에서 지역 노인을 활용해 지자체가 운영 중인 ‘고흥손맛반찬’ 사례는 시사점을 던진다. 어르신들이 직접 음식을 만들고 배달하며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는 이 사업은 돌봄 등 그 어떤 지원보다도 생산적 활동이 노년을 가장 따뜻하게 지탱하는 복지임을 일깨워 준다. 외로움의 해법은 결국 관계와 활동이다. 폐교는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 될 수 있다. 폐교 활용은 노인 문제 해결을 넘어 도시의 구조적 난제에 답을 제시한다. 원도심 쇠퇴, 세대 단절, 공동체 해체라는 문제를 한꺼번에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부산이 ‘늙어가는 도시’를 넘어 ‘노인까지 품은 도시’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폐교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폐교의 재탄생은 부산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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