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로봇과 피지컬 AI, 부울경 산업생태계 혁신 기회다
부산·울산·경남이 글로벌 피지컬 AI(인공지능)와 첨단 로봇산업의 핵심 요충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AI의 두뇌를 채울 고품질의 제조 데이터, 로봇의 관절과 근육이 될 핵심 부품 생산력, 지정학적 가치 등 좋은 요건을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 피지컬 AI는 실제 공장에서 발생하는 소음, 진동, 마찰열 같은 데이터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미국은 수십 년간 제조업 공동화로 학습용 데이터가 부족하다.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는 중국은 미중 패권 경쟁으로 데이터 반출이 막힌 상태다. 피지컬 AI와 로봇산업 패권을 차지하려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막강한 제조 인프라와 데이터를 보유한 부울경 지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부울경의 가장 큰 장점은 로봇에 사용할 데이터 확보, 실증, 부품 공급, 생산, 시장 응용까지 한 번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지역 기업들이 협력해 모은 데이터가 6개월 만에 300TB(테라바이트)를 넘어섰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데이터의 질적 변화도 눈에 띈다. 과거 불량률, 생산량 같은 결과값이 아니라 ‘진동과 열에 따라 나사의 규격이 어떻게 버티는지’ 등 피지컬 AI가 학습할 수 있는 실제 산업현장에서의 프로세스를 담았다는 점이다. 로봇에 활용이 가능한 고품질 데이터가 모인 것은 지역에서는 처음이라고 한다. 제조 현장에서의 변수, 숙련공 기술을 데이터화하지 못한 글로벌 AI 기업들에겐 부울경은 거대한 ‘데이터 창고’가 되는 셈이다. 부울경 제조업이 피지컬 AI와 로봇산업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는 것은 분명 호재지만,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실제로 부산 지역 로봇기업 140여 곳의 약 70%가 연 매출 100억 원 미만 기업이다. 아직 영세한 업체가 많아 스케일업을 위한 정책적 뒷받침이 이어져야 한다. 개별 기업 차원의 데이터 정리를 넘어, 부울경 전체를 관통하는 ‘로봇 거점센터’와 같은 컨트롤타워와 클러스터 육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로봇산업이 성장할 경우 지역의 다른 주력 산업들과 시너지 효과가 크기 때문에 로봇기업 성장을 가속화하는 집적단지와 거점센터 마련을 서둘러야 한다. 피지컬 AI와 접목한 로봇산업의 육성은 부울경 산업생태계를 혁신하는 절호의 기회다. 어쩌면 빅테크 기업들이 데이터를 찾아 지역을 찾는 지금이 골든타임이다. 지역 산업계는 단순히 데이터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AI 기술혁신과 전환에 속도를 내야 한다. 정부도 이를 기반으로 로봇산업을 육성하고 글로벌 표준화 작업을 주도할 수 있는 공공 차원의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 로봇산업의 메카로 첨단업종 입주가 가능한 ‘서부산권 복합산업단지’(부산 강서구 강동동)를 거점으로 삼는 것도 필요하다. 부울경 제조업이 로봇산업의 발전 가능성을 계기로 삼아 대도약의 기회를 반드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사설] 덧셈해도 모자랄 판에 '뺄셈 정치' 늪에 빠진 국힘
국민의힘이 29일 최고위원회를 열고 한동훈 전 당대표를 윤리위원회 원안대로 제명했다. 최고위 표결에서 장동혁 당대표를 비롯한 구성원 9명 중 8명이 찬성함으로써 이뤄진 조치다. 장 대표가 단식을 접은 뒤 당무에 복귀한 지 불과 하루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이번 제명 조치로 국민의힘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내전 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에 돌입했다. 이번 사태를 놓고 당장 눈앞에 놓인 지방선거의 승패에 대한 우려들이 당 내외에서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힘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선거에 대한 정치공학적 판단보다는 정치적 균형을 맞출 건전한 비판세력의 몰락이 불러올 결과를 더 걱정해야 할 판이 됐다. 국힘은 ‘당원 게시판 사건’을 이유로 한 전 대표에 대해 제명 조치를 했다. 한 전 대표와 가족이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 등을 비방하는 내용의 글을 조직적으로 올려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당의 명예와 이익에 피해를 줬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결론에 이르는 과정에서 국힘 윤리위는 한 전 대표가 직접 게시글을 작성했는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직접 관여 여부를 스스로 뒤집었다. 여기에다 익명 시스템의 게시판에 가족들이 글을 올린 행위로 제명 조치까지 함으로써 답을 정해놓은 징계라는 비판에도 직면해 있다. 비판은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찬성에 대한 보복성 징계의 성격이 짙다는 지적으로 이어진다. 한 전 대표에 대한 징계를 더욱 심각하게 바라보는 쪽은 국힘 내부의 당내 파벌이 소위 탄핵 반대파나 ‘윤 어게인’ 세력으로 결집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까지 내놓는다. 민주당이 국힘을 내란정당이라 칭할 때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이 “계엄을 막은 한동훈이 있는 당을 그렇게 모는 것은 무리”라 지적한 것에 비춰보면 수긍이 가는 우려다. 한 전 대표의 제명에 대해 당내 소장파 의원들과 오세훈 서울시장 등이 당 지도부 사퇴를 강력하게 촉구하고 나선 것도 이런 우려의 연장선이다. 하지만 징계 강행파들은 “특정인을 찍어내듯 제명하고, 뺄셈의 정치를 강행하는 것은 모두가 패배하는 길”이라는 당내 목소리에 귀를 닫았다. 한 전 대표 제명 조치로 인해 국힘은 현실적으로 중도 확장에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했다. 다가 오는 지방선거에서 중도 확장을 가장 큰 전략으로 가져가려 했던 지역의 국힘 인사들에게서는 체념의 분위기가 감지될 정도다. 진영 논리를 떠나 정치권이 특정 세력의 색깔 하나로만 물드는 것은 위험하다. 정치권 전체도 한 정당의 일방 독주가 위험할 뿐만 아니라 한 정당도 특정 세력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는 스스로 고립을 자초할 가능성이 크다. 국힘이 ‘뺄셈 정치’로 특정 세력화 정당을 향한 행보를 거듭함으로써 정치권에서 건전한 비판·대안세력의 지위를 상실하게 된다면 그것은 국민적 비극이 될 터이다.
[사설] 지방선거 누가 되든 2028년엔 부울경 통합단체장 뽑자
새해 들어 이재명 정부가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이라고까지 강조한 광역 행정통합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수십조 원에 달하는 각종 인센티브를 내세우며 6월 지방선거 전에 광역 행정통합을 이뤄내겠다는 정부의 속도전식 추진에 재정과 자치권 강화 등을 포함하는 특별법 제정 필요성이라는 맞불이 놓아졌기 때문이다. 주민투표 등 절차적 정당성에 무게를 두며 속도 조절을 하는 듯한 부산과 경남의 경우 뿐만이 아니라 주민투표 없이 통합을 서두르려는 광주와 전남까지 공통적인 상황이다. 이는 광역 행정통합 추진 절차와 속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행정통합이 가지는 핵심적인 가치는 같다는 점을 시사한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박완수 경남도지사는 28일 부산 신항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연내 공청회를 통해 주민 여론을 다진 뒤 주민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는 뜻을 밝혔다. 두 단체장은 주민투표에서 통합의 필요성이 확인되면 2028년 총선 때 광역 행정통합 단체장을 선출할 수 있다는 로드맵도 제시했다. 주민투표 시점은 정부가 재정 이양과 자치분권 강화 등의 내용을 담은 특별법을 수용하면 지방선거 60일 이전으로 앞당길 수 있다는 여지까지 남겼다. 지방선거 전 행정통합을 위해 속도전을 펼치고 있는 정부에 공을 넘기겠다는 뜻이다. 두 단체장은 특별법 제정을 위한 8개 통합 시도 단체장 긴급 연석회의도 제안했다. 부산·경남이 요구하는 행정통합 관련 포괄적 특별법과는 별도로 더불어민주당이 광주·전남 행정통합을 위해 가동중인 특별위원회가 발의하려는 개별 특별법도 조만간 발의된다. 해당 특별법은 특정 중앙부처 이전 등 지역 갈등을 부를 소지가 있는 내용의 포함 여부가 논란이지만 기본적인 틀은 부산·경남 단체장들이 내세우는 내용과 같은 방향이다. 재정 이양과 자치권 강화 등이 주된 내용이어서다. 이 특별법이 발의된다고 해도 정부가 어디까지 수용할지가 관건이 될 것이므로 이 또한 공은 정부로 넘어간 셈이다. 정부가 지역 선택적 결정을 하지 않으려면 결국 행정통합의 핵심가치를 돌아봐야 할 국면인 것이다. 대통령이 직접 대한민국의 생존 전략이라고까지 언급한 행정통합이 지방선거만을 위한 이벤트가 되거나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의미가 달라져서는 안 된다. 포괄적이든 개별적이든 특별법의 핵심가치가 같다는 것은 그 엄중한 무게를 재차 강조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이뤄져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정부는 행정통합 특별법의 핵심 가치 수용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지방선거 결과 누가 당선이 되든 늦어도 2028년에는 부울경 지역의 통합 단체장을 뽑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경남 두 단체장의 로드맵 발표에는 이에 대한 불가역적 결의가 필히 담겨 있으리라 믿는다.
D램 화려한 부상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지난해 가을부터 급등하기 시작했다. 큰 관심없던 사람들도 최근 각종 전자기기 가격이 오르면서 가격인상을 체감하고 있다. 이미 PC를 조립하려는 사람들은 급등한 메모리 가격에 망연자실한 모습이다.PC에 들어가는 삼성전자 DDR5-5600(16GB)은 지난해 8~9월만 해도 7만 원 정도였다. 그런데 10월부터 급상승하더니 지금은 35만 원에 이른다. 게임용 PC를 조립하려면 통상 32GB 메모리를 장착하는데 이 제품은 63만 원이다.과거 PC를 조립할 때 램은 가격 부담 없는 ‘헐값’ 부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PC 가격의 절반을 차지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체들은 메모리 선두주자이지만, 파운드리 경쟁력이 약해 파운드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주 오래 전부터 나왔다. 아무리 메모리를 잘 만들어봤자, 수익은 중앙처리장치(CPU) 등 핵심 반도체를 만드는 업체들이 다 가져간다는 설명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인공지능(AI) 열풍으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고 있고 중요성도 갈수록 부각되고 있다. AI에서는 연산량이 폭증하는데 이를 받쳐주는 메모리가 없으면 시스템이 성능을 발휘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AI 서버에 쓰이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범용 D램 생산은 뒤로 밀리고 있다.삼성전자가 새로 내놓은 노트북 ‘갤럭시 북6’ 출고가는 최소 341만 원이다. 전작인 북5 프로 시리즈(176만~280만 원)보다 크게 올랐다. LG전자도 신제품이 전작보다 50만 원 가량 인상됐다.스마트폰에도 당연히 메모리가 들어간다. 보급형은 8GB, 고급형은 16GB가 주로 쓰인다. 오는 3월 출시 예정인 갤럭시 S26 가격도 이전보다는 꽤 오를 가능성이 크다. SD카드나 태블릿에도 영향을 미칠 조짐이다. 특히 D램은 기기의 처리 속도를 높이는 데 필수적이어서 용량을 낮추면 속도 체감이 크다. D램 부족은 올해 내내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아니라 ‘울트라 사이클’이다. 인공지능 열풍의 후폭풍으로 당장 사람들이 사서 써야 하는 노트북과 스마트폰 가격을 밀어올리고 있다. 높은 스펙에 대한 욕심은 접고 웬만하면 지금 노트북 그대로 쓰라는 충고까지 나온다.김덕준 세종취재부장 casiopea@
논설주간/이사
강윤경
논설위원
김승일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김승일 칼럼] 국가대표 AI의 도전
AI(인공지능) 도구 챗GPT 입력창에 연합뉴스 기사 링크를 넣고 비교, 분석을 주문하면 ‘읽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뜬다. AI 로봇이 사이트에 들어와 데이터를 긁어가는 크롤링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AI 검색 결과에 전통적인 뉴스 매체가 그다지 많지 않고 생소한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네이버 역시 생성형 AI의 크롤링을 막는다. 블로그나 카페의 방대한 정보에 아예 접근할 수 없게 했다. 애써 축적한 정보를 거대 AI 기업이 공짜로 가져가서 장사를 하게 놔두지 않겠다는 의도다. 공공기관에서 생산하는 문서는 아래한글로 작성된다. 전산화 이후 수십 년간 축적된 데이터는 국산 문서 편집기로 생산된 것이다. 그런데, 챗GPT 등 대부분의 글로벌 생성형 AI는 아래한글 문서를 읽을 수가 없다. 텍스트로 풀어서 입력하거나 PDF로 변환해야 업로드가 가능하다. 이는 사용자의 불편이기도 해서 정부 차원에서 호환 대책을 만들고 있고, 구글도 제미나이 3.0 버전부터 아래한글 문서 읽기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LG 엑사원, 업스테이지 등이 호환 서비스를 제공한다. 방대한 정보가 담긴 아래한글 문서를 여는 기능에 AI 경쟁력이 엇갈린다. 크롤링 차단이나 아래한글 문서의 사례는 국산 AI 독립의 가능성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구글이 유튜브와 검색 데이터를 독점해 AI 훈련에 사용하고 있고, 메타는 SNS의 실시간 정보를 활용하기 때문에 판단과 추론에서 뛰어난 성능을 자랑한다. 그래서 이들 AI 도구가 ‘넘사벽’처럼 보여 맞서 싸울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AI 로봇이 접근하지 못한 한국의 정보 자산이 있다. AI 플랫폼 종속을 탈피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AI 주권’(소버린 AI)이 전 세계의 화두다. 미국산 거대언어모델(LLM)에 예속되는 것을 피하려고 세계 각국이 사활을 걸고 있다. 중국은 알리바바, 텐센트 등이 자체 아키텍처(설계도) 기반의 LLM을 잇달아 내놓고 미국을 맹렬히 추격하고 있다. 프랑스(미스트랄)와 UAE(팰컨) 등도 독자 AI 모델 구축에 힘을 쏟고 있다. 우리 정부도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사업에 나서고 있다. 이른바 국가대표 AI의 도전이다. 그간 국산 AI 서비스들은 외국 모델을 미세 조정(파인튜닝)한 것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기술 독립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기정통부의 독자 AI 사업은 국내 기업을 지원해 세계 최고 수준의 파운데이션 모델을 만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특히 데이터 수집부터 모델 아키텍처 구성, 수조 개의 토큰을 학습하는 과정까지 독자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현재 1차 단계에서 네이버클라우드와 엔씨소프트가 탈락하고 남은 LG AI연구원, SK텔레콤, 업스테이지 등은 2차에 도전한다. 다음 과제는 문자와 이미지, 음성 등 여러 유형의 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는 멀티모달 기술 개발이 핵심이다. 독자 모델의 성패 여부는 데이터의 차별화에 있다. 미국과 중국의 AI 로봇이 범접하지 못한 양질의 정보가 승부수다. 국가지식정보를 통합 검색·열람할 수 있는 플랫폼인 디지털집현전이 그 사례다. 각 기관에서 생산한 논문, 보고서, 간행물 등이 메타데이터와 함께 연결되어 있다. 국가 기관이 생산한 정보는 양질의 정제된 데이터라서 활용도가 높다. 국가대표 AI가 디지털집현전처럼 공공 정보를 모아서 이를 체계적으로 학습한다면 외국산 AI에 비할 수 없는 신뢰성을 얻을 수 있다. 이밖에 행정 데이터, 판례, 언론 아카이브 등 한국에 특화된 정보로 무장한다면 외국계가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서비스가 가능하다. 특히 언론사 뉴스 콘텐츠의 경우 유료 사용 계약을 맺는 것도 공정한 AI 생태계 구축에 필요하다. 또 법률, 의료, 국방, 행정 등 전문 분야로 압축한 중소 규모 LLM도 시도할 가치가 있다. 한국에 특화된 콘텐츠로 사활을 걸어야 한다. 한때 파운데이션 모델은 도저히 승산이 없으니 응용 서비스나 개발하자는 식의 체념이 지배했던 적이 있다. 챗GPT의 충격파가 워낙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 AI’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우리 정보가 해외 서버에 쌓이도록 방치한다는 것은 국가 안보와 산업 생태계를 위협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민감한 기업 기밀이나 국가 보안 사항이 통제되지 않은 채 국경을 넘나들게 할 수는 없다. 한국은 인터넷 검색과 문서 편집기에서 구글과 MS 워드에 장악되지 않아 디지털 세상의 한글 주권 독립으로 비유된 적이 있다. 하지만 생성형 AI와 멀티모달 시장에서는 후발주자로 뒤처진 점이 뼈아프다. ‘세계 3대 AI 강국’. 독자 파운데이션 모델이 성공해야 정부가 내세운 ‘AI G3’ 전략은 실현된다. 한글 데이터의 종속이냐, 아니면 주권을 지키느냐는 갈림길에 서 있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배학수의 문화풍경] ‘환단고기’를 다시 읽는 이유
“우리 동방의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알아,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 〈환단고기〉의 사상을 요약하는 이 문장은 역사적 사실 여부와는 별도로, 한 공동체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자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월 말은 새해의 결심이 서서히 힘을 잃는 시기다. 계획과 목표가 흔들릴수록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나를 누구라고 믿고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자기개념, 곧 자기의식은 개인의 의지나 성취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몸에 밴 태도와 습관, 기억과 분위기,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오랫동안 반복해 온 이야기 속에서 서서히 빚어진다. 개인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더 큰 ‘우리’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형성된다. 그래서 자기개념을 성찰하려는 시선은 자연스럽게 개인을 넘어 그가 속한 집단의 서사로 향하게 된다. 이 집단적 자기 이해가 한 사회 차원에서 응결된 형태가 바로 국민정신이다. 국민정신은 개인의 심리와 윤리를 떠받치는 중요한 토대다. 국가 공동체가 자신을 존엄한 존재로 인식할 때 그 안에 속한 개인 역시 좀 더 안정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 반대로 공동체가 스스로를 하찮거나 주변적인 존재로 내면화할 경우 개인의 자기 확신 또한 쉽게 흔들린다. 신화적 요소 지녀도 배척해서는 안 돼 사실 여부보다 사유 흔적으로 이해를 어떤 삶 자세 가능하게 했는지가 중요 이러한 국민정신은 처음부터 언어로 조성되지 않았다. 춤과 의례, 제의는 말보다 앞서 공동체 세계관을 몸에 새겨 왔다. 절기의 제사나 집단적 춤사위, 예절의 신체 동작은 개인에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감각을 반복적으로 각인시킨다. 그러나 몸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다. 이와 달리 텍스트는 의례와 몸의 실천에 담긴 의미를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공동체의 자기 이해를 언어로 고정한다. 춤과 의례가 국민정신을 ‘느끼게’ 한다면, 텍스트는 그것을 ‘이해하게’ 한다. 문제는 어떤 텍스트가, 어떤 방식으로 이 역할을 수행해 왔는가이다. 이 물음의 연장선에서 〈환단고기〉를 둘러싼 논쟁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이 신뢰할 수 있는 역사 문헌인가를 두고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텍스트의 가치를 오직 사실 여부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사실적 정확성이라는 질문 너머에는 또 다른 물음이 놓여 있다. 즉 이 텍스트가 독자에게 어떤 자기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가 하는 점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판단이 거짓이라는 점은 그 판단을 반박하는데 결정적 이유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삶을 고양하고, 삶을 유지하며, 생을 지탱하는가 하는 점이다.” 니체에게 중요한 기준은 사실의 정확성이 아니라, 그 판단과 해석이 인간의 삶에 어떤 힘으로 작용하는가였다. 어떤 이야기가 인간을 위축시키고 자기 경멸로 이끈다면,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삶에 해롭다. 반대로 한 서사가 인간에게 자신을 긍정할 힘과 버텨낼 용기를 준다면, 그것이 신화적 요소를 지닌다 해도 섣불리 배척되어서는 안 된다. 니체는 진리를 삶과 분리된 추상적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삶을 북돋우는 해석과 삶을 약화시키는 해석을 가려내는 데 철학의 역할이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철학적 사유란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삶을 견디게 하고 지속하게 만드는 해석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이 관점을 텍스트 읽기에 적용한다면, 문제는 한 문헌이 ‘사실인가’보다 그것이 ‘어떤 삶의 태도와 자기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가’로 이동한다. 〈환단고기〉는 유구한 시간적 연속성과 선택된 공동체라는 상상을 통해 개인이 자신을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찬란한 전통의 흐름 속에 있는 존재로 이해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서사는 개인의 자기개념 형성에 작용하는 중요한 문화적 자원이 된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이스라엘 민족의 성경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선민’이라는 집단적 자기 이해는 유대 공동체가 오랜 유랑과 박해 속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 믿음의 역사적 진위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이 개인의 자기의식과 존엄성을 지탱해 온 힘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사례가 보여주듯 중요한 것은 서사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 서사가 개인에게 어떤 삶의 자세와 자기 인식을 가능하게 했는가이다. 〈환단고기〉는 맹신의 대상도, 냉소의 텍스트도 아니다. 그것은 한 공동체가 스스로를 존엄한 존재로 이해하고자 했던 사유의 흔적이다. 개인의 자아개념이 쉽게 흔들리는 시대, 우리는 어떤 이야기가 우리를 더 단단하게 살아가게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정확히 어땠는가’가 아니라, 그 과거를 해석하는 우리의 사유가 ‘오늘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열어 주는가 하는 점‘이다.
[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프라하 역사·음악 어우러진 드보르자크 홀
체코 프라하의 블타바 강변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시의 역사와 음악이 한 지점에서 겹쳐지는 공간 루돌피눔(Rudolfinum)을 만나게 된다. 루돌피눔은 전시와 공연을 동시에 수용하는 다목적 예술공간으로 기획되었고 그 중심에 체코의 역사와 정치, 예술, 그리고 음향 미학이 한 몸으로 얽혀 있는 드보르자크 홀이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였던 1876년 착공하여 1885년 완공된 이 건물은 건축가 요제프 지테크와 슐츠가 설계한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대표작이다. 루돌피눔이라는 이름은 당시 황태자였던 루돌프 대공에서 따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간은 이후 체코 민족주의와 문화적 독립의 중심 무대가 된다. 제국의 이름을 달고 태어났으나, 체코의 정신으로 살아남은 셈이다. 역사는 이 건물을 여러 번 변모시켰는데 1차 세계대전 이후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한 이후 한동안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음악의 전당이 정치의 무대로 바뀐 시기는 짧았지만, 체코 근현대사의 격동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후 다시 음악의 품으로 돌아온 루돌피눔은 오늘날까지도 체코 클래식 음악의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다. 드보르자크 홀은 약 1100석 규모의 메인 콘서트홀로, 체코가 낳은 국민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자크를 기리고 있다. 그의 음악이 지닌 서정성과 구조적 균형, 민속성과 보편성의 조화가 이 홀의 음향적 성격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건축 음향적으로 드보르자크 홀은 전통적인 슈박스(Shoebox) 형태를 따르고 있는데, 가로 장방형의 직사각형 구조, 높은 천장, 그리고 목재와 석고를 중심으로 한 마감은 풍부한 잔향과 명료한 직접음을 동시에 확보한다. 잔향 시간은 대략 1.8~2.0초 내외로, 후기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레퍼토리에 이상적이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드보르자크 홀에 상주하고 있는데, 1896년 창단 이후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토양에서 길러진 고유한 음색과 프레이징으로 자신들만의 길을 걸어왔다. 흥미롭게도 창단 연주를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직접 지휘했다. 하지만 당시는 드보르자크 홀이라 불리지 않았기에 훗날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될 홀에서 연주를 하고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아이러니한 음악사의 한 페이지이다. 동유럽을 대표하는 역사와 문화도시 프라하에는 또 하나의 콘서트홀이 있는데,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이 선언되었던 스메타나 홀이다. 해마다 5월이면 프라하의 봄 축제의 개막연주가 이곳에서 열린다. 그 밖에도 ‘돈 지오반니’를 초연했던 에스테이트 극장, 독일 극장이 전신이었던 프라하 국립오페라 그리고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야나체크 등 체코 작곡가들의 작품이 올라가는 국립극장까지 3개의 오페라 극장이 있다.
[데스크 칼럼] 쿠팡의 사과, 그리고 국민 기만과 멸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빎. ‘사과’의 사전적 의미다. 사과는 진정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시기도 중요하다. 차일피일 미룬 사과는, 이해와 계산에 따른 사과 또는 등 떠밀린 사과로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사과를 잘하면 신뢰를 회복하고 연대로 확장할 수 있다. 국내 온라인 유통 플랫폼 1위 사업자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 이후, 쿠팡이 내놓은 사과는 이러한 사과의 조건을 어떤 것도 갖추지 못한 최악의 사과였다. 진정성이 전혀 없었고 때늦은 사과였다. 소비자를 내내 기만해왔던 쿠팡은 허울뿐인 사과로 공분만 산더미처럼 키웠다. 그간 쿠팡이 보여준 대응은 노골적인 기만행위였다. 쿠팡은 개인정보 유출과 관련해 ‘노출’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또 마케팅 목적이 짙은 보상안을 내놓았고, 이마저도 사실상 ‘휴지 조각’ 이용권을 주면서 역대급 보상안을 내놓았다며 생색냈다. 정부 조사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피해 규모를 축소한 셀프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최종 의사 결정자인 김범석 의장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이번 사태를 경시하는 태도를 일관되게 보였다. 국회 현안 질의나 청문회엔 ‘중요한 비즈니스 일정’이 있다며 불출석했고, 약 한 달 만에 나온 그의 사과문은 전방위적인 압박에 마지못해 내놓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많은 소비자는 시장 점유율 방어와 이익 추구에만 매몰된 김 의장의 비루한 기업가 정신을 확인했다. 무엇보다 국민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매출의 90% 이상을 한국에서 올리고도 사회적 책임 이행과 사회 공헌은 미국에 집중하는 김 의장의 행태를 두고 ‘역시 검머외(검은 머리 외국인)’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그가 얼마나 로비를 벌였는지, 미국 정부와 국회, 경제계가 쿠팡의 불공정 행위와 위법 행위는 안중에도 없고, “한국이 미국 기업을 차별하고 있다”며 쿠팡을 감싸고도는 모습에 국민은 분노를 넘어 허탈감까지 느끼고 있다. 김 의장의 이러한 배짱 두둑한 태도는 ‘소비자들이 욕해도, 쿠팡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과 ‘대마불사(Too Big to Fail)’ 논리에서 오는 확신에 기반한 것일지 모른다. 이번 사태의 결론을 두고 AI는 로켓 배송, 쿠팡이츠, 쿠팡플레이로 이어지는 쿠팡의 플랫폼 생태계가 높은 시장 점유율로 생활 깊숙이 묶여 있어, 불매 운동이나 탈팡(쿠팡 회원 탈퇴)이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봤다. 또 ‘미국 국적자’ ‘미국 상장 기업’을 방패막이로 한국 정부와 국회의 압박을 피할 것으로 예상했다. 영업정지까지 고려하겠다던 정부는 결국 유통·판매업자, 물류 종사자 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과징금 부과를 차선책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이 경우 쿠팡은 수수료 인상이나 납품 단가 인하 등 새로운 과금 체계를 도입하고, 알고리즘을 조정해 광고 등의 명목으로 마진을 기존보다 더 챙겨 가는 방식 등으로 과징금 부담을 전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윤리 경영은 기업이 공정성과 투명성 등 윤리를 행동 원칙으로 삼아 법적·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고, 이해관계가 상충할 때는 규범적 판단과 도덕적 가치 기준을 우선적으로 따르는 경영 원칙이다. 기업은 윤리 경영을 통해 가치와 신뢰를 높이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특히 윤리 경영은 이해 관계자 간 균형 있는 가치 분배를 목표로 한다. 그런 점에서 쿠팡은 협력업체, 소비자와 가치 분배는 등한시하고 오직 이윤만 좇는, 글로벌 스탠다드와 거리가 먼 기업이다. 하인리히의 법칙을 윤리 경영에 적용하면, 치명적인 한 건의 비윤리적 행위로 기업이 파산하기 전에 수십 건의 가벼운 비윤리 행위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쿠팡은 지금까지 할인율 부풀리기, 자사 PB 상품에 유리한 검색 순위 조작, 임직원이 동원된 가짜 리뷰 작성 등 불공정 행위를 해왔고, 일용직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한 취업 규칙 꼼수 변경이나 쿠팡 물류센터 근로자 사망과 관련한 증거 인멸 시도와 과로사 은폐 의혹 등으로 숱한 위험 신호들을 울리고 있다. 쿠팡이 결국 웃게 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 속에도 정부와 국회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건, 윤리 경영을 저버린 기업은 반드시 비극적 말로를 맞이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 짓밟힌 국민의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줄 곳은 정부와 국회밖에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검찰 수사로 각종 불공정·위법 행위를 의심할 여지 없이 밝히고, 과징금 부담을 입점 업체와 물류 노동자에게 부당하게 전가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쿠팡은 국민의 신뢰가 회복 불가능한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길로 돌아가고, 행한 대로 그 대가를 받는다는 만고의 진리를 믿는다.
[중앙로365] 부산~블라디보스토크 하늘길 빨리 다시 열려야
발해의 동쪽 끝이었던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는 예부터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일본이나 미국보다 앞서서 한인 디아스포라가 처음으로 형성된 곳이며, ‘대한국민의회’라는 이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장 먼저 선 한국 독립운동의 북방 기지였다. 북방을 떠도는 유이민의 아픔을 노래한 일제 강점기 시인 이용악, 그의 시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의 ‘우라지오’도 블라디보스토크를 말한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이름은 러시아어로 ‘동방을 점령하라!’라는 뜻으로, 1860년부터 러시아 제국 정부가 기울어가는 청나라를 겁박하여 차지하기 시작한 땅이었다. 도시로 성장한 건 146년 전인 1880년으로, 2018년 12월부터는 하바롭스크를 제치고 러시아 연방의 ‘극동 연방 구’의 ‘지역 수도’로 발돋움했다. 극동개발과 아시아 중시정책의 하나로 푸틴 행정부가 2015년부터 ‘동방 경제포럼’을 열고 있는 이 도시는 앞으로 남북문제가 다시 풀리고 부산~북극항로가 현실화될 경우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블라디보스토크와 부산 사이에 하늘길이 4년째 끊어져 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이후에 줄곧 그렇다. 직항로가 닫혀있으니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쉽지 않아서 재외국민, 경제인과 상인들, 유학생, 관광객들의 고충과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011년부터 해마다 부산에서 열리던 부산~극동 러시아 경제포럼도 이래서 ‘개점휴업’상태다. 이전에는 이렇게 냉랭하지 않고 사이가 좋았다.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오가는 가까운 거리인데다 편 수가 많을 때는 주 12회나 다녀서 서로 왕래가 잦았다. 1992년 6월에 두 도시 사이에 이미 자매도시 협정이 맺어졌고, 협정 체결 20주년 축하행사가 부산시 대표단과 문화공연단이 참석한 가운데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성대하게 열리곤 했다. 9288km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떠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역 근처에 앉아있으면 곳곳에서 부산 사투리가 들렸으며, 부산의 대형 병원이나 서면 의료단지도 러시아 환자들로 북적였다. 러시아엔 종합검진, 성형, 암 치료, 뼈 수술 수요가 많다. 이들이 예전의 독일이나 이스라엘에서 한국으로, 특히 높은 의료 수준과 비교하여 치료비와 물가가 싸고 산과 바다가 같이 있는 부산으로 많이 왔기 때문이다. 물론, 하늘길이 막혀있는 지금 상황에서도 배로는 연해주를 오갈 순 있다. 그리고 중국이나 몽골로 돌아서 가면 항공이나 기차로도 러시아 입국이 가능하다. 그러나 배는 멀리 강원도의 속초나 동해시를 거쳐야 하는데다 멀미, 독과점요금, 불편한 출항 일정 등으로 이용하기가 쉽지 않고, 우회 항공로도 비용, 시간, 편의성 면에서 문제가 많긴 마찬가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지인 올가(55)는 딸이 열성적인 한류 팬이라서 중국의 상하이를 거쳐 모녀가 함께 부산을 가끔 찾는다. 그런데 항공편 때문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직항이 있을 때보다 항공료도 2~3배 비싸고 환승 대기시간도 길어요. 한국정부의 서방 제재 동참, 러시아 정부의 한국에 대한 ‘비 우호 국가’ 지정, 그런 과거를 넘어서 이젠 직항로를 복구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라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하늘길을 계속 막고 있을까? 러시아 정부는 처음부터 항공망 폐쇄에 반대했다. 답은 대한민국이다. 일본 정부도 우리와 비슷하지만, 실리에 밝은 일본은 그래도 작년 초부터 크렘린과 물밑에서 직항 재개를 활발히 논의 중이다. 일본 방문을 원하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올해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일본 비자 발급 센터를 다시 연다는 보도도 있다. 이렇게 서로 다투면서도 협력할 일을 찾아 협조하는 게 맞지, 아예 길을 계속 막고 있는 건 아니라고 본다. 한번 정한 정책이라고 끝까지 밀고 가는 아집과 고집이 문제를 계속하여 악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러시아 측에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2023년 12월, 2024년 6월, 지난 1월 15일 등 세 번에 걸쳐 한러 관계의 실용적 접근과 회복을 강조하였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의아한 건 ‘민생 정권’이라는 현 정부의 태도인데,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직항로 폐쇄만은 앞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붙들고 있을 심산 같다. 이러다 보니 지난해 10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특이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동북아평화연대 등 시민단체, 동포단체 등 128곳이 공동의 이름으로 “재외국민과 고려인 동포 15만 명의 이동권을 침해하지 말라!”라며 한·러 직항 항공편 재개를 직접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정부든 국회든 이에 대해 들은 척 만 척한다. 일단 막힌 하늘길부터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경제, 사회문화,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 부서진 두 나라 관계에 다시 핏기가 돌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원하는 북극항로도 한반도 쪽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설 것이다.
[김필남의 영화세상] 그가 진짜 잃어버린 건 무엇일까?
‘사노’는 친구 ‘미야타’와 함께 이즈의 휴양지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는 휴양지 풍경에는 관심이 없다.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그 모자가 아이 것이 맞냐는 생뚱맞은 질문을 던지거나, 아내 ‘나기’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전화를 건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다 휴대폰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문 닫힌 식당에 들어가 물건을 뒤지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이해 못할 행동을 이어가던 사노는 호텔 프런트로 찾아가 대뜸 빨간 모자를 잃어버렸으니 찾아달라는 요구까지 한다. 그는 오직 무언가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움직일 뿐이다. 영화 ‘슈퍼 해피 포에버’는 사노의 행동에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가라시 고헤이 감독은 ‘다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2022)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번에도 정적인 카메라와 절제된 거리감을 유지하며 사노를 천천히 따라갈 뿐이다. 스크린을 채우는 건 눈부신 하늘과 시원한 여름 바다. 하지만 그 풍경은 사노의 내면과 대조를 이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설명이 유예된 자리에서 드러난 사실은, 사노가 찾는 모자가 이미 5년 전 분실물이라는 점이다. 카메라는 2018년, 과거의 시간으로 미끄러진다. 같은 휴양지, 같은 호텔이지만 그곳의 공기는 사노가 머물던 현재보다 한결 가볍다. 사노는 이 휴양지에서 나기를 처음 만난다. 타인이었던 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고, 선물을 주고받고, 클럽에서 춤을 추는 등 설렘의 순간들로 채워진다. 늦은 밤 편의점 앞에 앉아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어떻게든 헤어지는 시간을 늦춰보려는 모습은 귀엽다. 운명이나 극적인 로맨스가 아닌, 여행지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만남은 관객의 마음속에 더 쉽게 스며든다. 특별할 것 없는 연애의 시작이 역설적으로 가장 찬란한 기억이 된다는 사실을 카메라는 고요히 증명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사노는 빨간 모자를 나기에게 선물한다. 나기는 그 모자를 쓰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모자를 잃어버린다. 우리는 그녀가 어디에서 모자를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마음이 가는 남자에게 받은 선물을 잃어버리고 당황해 거리를 헤매는 나기의 모습을 볼 뿐이다. 잃어버린 모자를 찾아 헤매다 사노와의 약속 시간에 늦어버린 나기는 이제 사노를 만나지 못할까 봐 우울해진다. 바로 그때 거짓말처럼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 여행이 끝나도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5년을 지나 2023년의 시간으로 건너온다. 사노는 아내 ’나기‘를 잃고 혼자 남겨졌다. 과거 나기 앞에서 수줍어하던 그는 없고 잔뜩 날이 선 남자만이 남아 있다. 그러니까 사노에게 모자 찾기는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견디는 방식이다. 사노는 5년 전 나기와 함께 걸었던 장소를 다시 걸어본다. 장소는 그때 그대로지만,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없다. 호텔의 복도, 바닷길, 방 안의 공기는 과거의 감각을 품은 채 사노를 맞이한다. 이때 감독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보여주지만 이를 굳이 나누어서 보여주지 않는다. 사라진 것은 과거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현재와 겹쳐지고 포개지고 있음을 자연스레 느끼게 한다. 그래서 영화는 추억을 회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오히려 과거가 되돌아오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시간은 장소와 감각 속에 남아, 지금의 사노를 다시 붙잡는다. 기억은 희미해져도 그때의 감각은 남아 있는 법이다. 이때 빨간 모자는 소품이 아니라 처음 만난 날의 어긋남과 다시 이어진 시간, 끝내 돌아오지 않는 존재의 의미를 품고 있다. 그때 그 시간의 모자를 찾을 수 없겠지만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다. 영화는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시간의 힘을 새긴다. 상실을 견뎌낼 만큼 ‘슈퍼 해피’한 기억이 내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이별은 슬픔이 아니다. 지나간 시간이 기억과 장소에 고스란히 살아있는데 슬플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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