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코스피 7300P 돌파, 물가 상승·실물 괴리 우려도 커져
코스피가 6000P 고지에 오른 지 2개월여 만에 꿈의 7000P를 돌파했다. 6일 코스피는 7384.56P로 장을 마감하며 한국 자본시장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반도체 투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급등세가 지수 상승을 견인한 덕분이다. 하지만 경이적인 신기록 이면에서 울리고 있는 경고음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증시 랠리가 곧바로 실물 경제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가가 꿈틀대고, 금리는 상승 압박을 받고 있다. 수출 대기업 중심의 증시 호황이 국민 다수의 체감 경기와 괴리가 반복되고 있다. 코스피 7000P 돌파를 기뻐하되 경제의 기초 체력과 위기 대응 능력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한국은행이 공개적으로 금리 인상 가능성을 언급한 것은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한은은 당초 성장 둔화를 걱정했지만 1분기 성장률이 예상치를 크게 웃도는 1.7%를 기록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호황과 수출 회복이 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있지만 동시에 물가 자극 요인도 커지고 있다는 판단이다. 국제 유가 불안까지 겹치면서 인플레이션 방어 수단이 필요한 상황에 이르렀다. 정부와 지자체의 고유가 지원금도 시중에 풀려 우려를 키운다. 증시 과열과 빚투 확산이 동반되고, 유동성이 위험 자산에 몰려 자산시장 거품과 가계부채 부담을 키울 가능성을 제때 차단하는 정책 수단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6%로 1년 9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점도 유의할 대목이다. 호르무즈 사태로 석유류 가격이 20% 넘게 급등한 탓이다. 최고가격제와 유류세 인하가 없었다면 상승률은 3% 후반까지 치솟았을 수 있다. 유가 상승은 항공료와 외식비, 생활서비스 가격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증시는 뜨겁지만, 서민들의 장바구니는 무거워지고 있다. 게다가 내수 침체는 길어지고 자영업 폐업은 늘고 있다. 청년층 취업난과 가계부채 부담도 해소되지 않았다. 체감 경기는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증시만 치솟아서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기약할 수 없다. 시장 왜곡을 막기 위해서는 실물 경제 정상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환호와 낙관이 아니라 냉정과 균형감이다. 코스피 7000P 돌파로 한국 경제가 새로운 심리적·상징적 고지에 올라선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딛고 선 현실은 공급망 불확실성, 고물가, 고환율 등의 불안 요인이 적지 않다. 반도체 호황이라는 강한 상승 동력을 얻었지만 동시에 극복해야 할 구조적 과제도 분명해졌다. 실물 기반 없는 자산 가격 급등은 큰 부작용을 동반한 조정 국면으로 이어질 우려가 크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자본시장 과열을 경계하면서 물가 안정과 실물 경제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 국민 다수가 체감하는 경기 회복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코스피 7000P 시대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사설] 선거 쟁점된 '공소 취소 특검' 지역 이슈 집어삼킨다
‘공소 취소 특검’을 둘러싼 논란이 6·3 지방선거판을 집어삼킬 기세다. 박형준 부산시장 후보를 비롯한 국민의힘 영남권 5개 시도지사 후보들은 6일 울산시청에서 이른바 공소 취소 특검법안을 일제히 규탄했다. 이 법안에는 대장동·위례신도시 개발 비리 등 이재명 대통령 관련 8개 사건이 수사 대상에 포함돼 있다. 또 당선 이후 중단된 재판의 공소를 취소할 권한이 담겼다. 후보들은 이를 사법 쿠데타라는 강도 높은 표현까지 동원하며 비판했다. 특히 박 후보는 “대통령이 자신의 죄를 삭제하는 삭죄 특검법”이라며 비판 수위를 높였다. 지방 행정을 책임질 후보들이 지역 현안이 아닌 사법 이슈로 공동 대응에 나선 것은 이례적이다. 이날 김두겸 울산시장 후보는 “대통령이 임명한 특검이 대통령 재판을 취소하는 것은 삼권분립 위반”이라고 비판했고, 이철우 경북도지사 후보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더라도 반드시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힘 후보들은 해당 특검법을 헌법 질서 훼손이자 권력의 사법 개입으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에 나선 것이다. 국힘에선 앞서 서울시장 후보를 비롯해 9명 후보가 ‘공소 취소 특검’ 대열에 합류한 바 있다. 이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도 여야는 ‘범죄 수사’와 ‘대통령 무죄 세탁’이라는 표현을 주고받으며 충돌했다. 특검법 공방이 지선과 정치권 전반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형국이다. 법조계의 문제 제기도 이어졌다. 대한법학교수회는 이날 성명에서 “특검에 공소 취소권을 부여하는 것은 법치주의와 권력분립을 훼손하는 독소 조항”이라고 밝혔다. 특히 진행 중인 재판을 중단시키는 것은 사법권을 침해하고 법원의 최종 판단 권한을 박탈하는 행위라는 지적이다. 정치권 공방이 헌법 질서 논쟁으로 번지는 양상이라 하겠다. 주목할 대목은 특검 이슈가 지선을 앞두고 정치 연대로 확장되는 흐름이다. 국힘은 물론 개혁신당 인사들까지 비판에 가세하며 보수 야권의 공동 대응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부산에서는 개혁신당 후보가 공세에 동참하며 국힘과 연대를 제안할 정도다. 특검법이 지역 선거 구도 재편의 변수로까지 작용하는 셈이다. 결국 이번 특검 논란은 지선의 본질을 흐리고 선거 성격까지 바꾸고 있다. 지역 경제와 민생 정책 경쟁은 밀려나고 특검과 중앙 정치가 선거판을 지배하는 형국이다. 울산 공동 기자회견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향후 특검법 논쟁은 국회 입법 과정과 대통령의 대응, 선거 결과와 맞물려 더 큰 파장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지선은 본래 지역의 삶과 정책을 겨루는 자리다. 하지만 이번 선거는 중앙 정치와 사법 리스크가 전면에 부상하며 의미가 훼손되고 있다. 이번 사태의 발단은 명확하다. 논란을 촉발하고 선거판을 흔든 책임은 여당에 더 있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선거를 특검 논쟁으로 덮은 책임을 무겁게 느껴야 한다.
[사설] HMM 상당수 인력 서울 잔류 버티기, 반쪽 이전 안 될 일
국내 최대 국적 해운선사인 HMM 노사가 부산 이전에 전격 합의했지만, 자칫 ‘반쪽 이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노조와 사측이 900여 명의 서울 인력 상당수가 잔류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30일 열린 노사 합의 발표 행사에서도 최원혁 대표이사는 “영업과 금융 부문 직원은 본사가 부산으로 옮기더라도 지점 형태로 서울에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정성철 육상노조 위원장도 “언제든지 기본 합의가 지켜지지 않고 조합원이 불이익을 받거나 문제가 생길 경우, 단체행동권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노사 입장을 보면 핵심 인력이 빠진 채 본사만 이전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노조는 특히 HMM 본사 이전이 거론된 이후 이러한 입장을 일관되게 유지해 왔다. 정성철 노조 위원장은 지난달 7일 최원혁 대표이사를 부당노동행위로 고용노동부에 고소하면서 “서울 본사 인력의 상당수가 잔류하면, 상징적 차원의 본점 부산 이전은 논의할 수 있다”고 했다. 2024년 4월 부산상공회의소 양재생 회장과 간담회를 가진 전정근 당시 HMM 해원노조 위원장은 “해외 영업을 하는 국제본부와 국내 사업을 관할하는 국내본부로 분할한 뒤, 국내본부와 자회사가 입주하는 사옥을 북항에 건설하면 본사 이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노조의 입장 변화가 전혀 없는 셈이다. HMM 노사는 지난해 하반기 이후 본사 이전과 관련해 극한 대립을 반복해 왔다. 육상노조는 노동위원회 조정 신청, 대표이사 고소에 이어 파업까지 예고하며 거센 반발을 이어왔다. 이런 가운데 노사가 구체적인 이전 조건 없이 대승적 차원의 합의를 갑자기 도출한 배경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는 상황이다. 지난달 30일 서명식 질의응답에서도 합의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사의 본사 부산 이전 합의가 오는 8일 열리는 임시 주주총회에 대한 사전 합의 성격이 강하다는 절하된 평가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노사는 이제부터라도 부산 이전이 국가 발전과 균형성장을 위한 대승적 결단이라는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세계 8위 국적 해운선사인 HMM의 부산 본사 이전은 해운·항만·금융·정책 기능이 결합한 해양산업 생태계가 집적하는 효과를 지닌다. 앞서 부산에 본사를 옮긴 SK해운, 에이치라인해운과 시너지를 내고 일자리 창출에도 큰 도움이 된다. 이를 실현하려면 단순히 주소지만 옮기는 ‘무늬만 지방 이전’에 그쳐서는 안 될 일이다. 실질적인 기능과 핵심 인력이 서울에 남지 않고 부산으로 와야 이전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반쪽 이전에만 머문다면 언제든지 정치적 상황에 따른 변수에 쉽게 흔들릴 수 있다. 당연히 해양수도 부산의 완성도 요원할 것이다. HMM 노사가 이전 기관의 책임감을 갖고 전향적인 입장 변화를 보였으면 한다.
부산의 꿈, 피레우스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첫 장면에는 주인공이 크레타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 자유로운 영혼 알렉시스 조르바를 운명적으로 만나는 장소, 피레우스(Piraeus)가 등장한다.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약 1.2km 떨어져 있는 이곳은 고대 아테네가 해상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전략 요충지였다.피레우스는 수심이 깊고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고 있었고, 이런 가치를 알아본 정치가 테미스토클레스가 군사 항구로 개발했다. 아테네 도심과 피레우스 항구를 잇는 거대하고 긴 성벽을 쌓아, 육로가 차단돼도 바다를 통해 물자를 공급받을 수 있는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는데, 덕분에 2000년 넘게 아테네 경제를 뒷받침할 수 있었다.긴 역사를 품은 항구도시 피레우스는 현재 유럽에서 가장 큰 여객 항구 중 하나다. 아시아에서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배들이 유럽에서 가장 먼저 기항하는 항구로, 그리스의 수많은 섬들을 연결하는 허브이며, 지중해 크루즈 여행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단순히 사람만 오가는 곳이 아니다. 세계 최대 해운 강국인 그리스의 심장부답게 전 세계 선박들이 모이는 핵심 물류 항만이며, 세계 최대 선박박람회 중 하나인 ‘포시도니아’(Posidonia)가 2년마다 열리는 해양 비즈니스의 중심지다.무엇보다 피레우스는 부산에게 있어 해양 클러스터 ‘선배 도시’임에 틀림 없다. 그리스 정부는 1954년 해양도서정책부를 피레우스로 완전 이전하고, 이후 1967년 관련 특별법을 제정해 해양 클러스터 구축의 근간을 만들었다. 59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는 974개의 해운기업과 2056개의 해양산업 지원서비스 업체, 47개의 정부 산하기관, 54개의 해양수산업계 단체 및 협회가 모여 있다. 해양 관련 금융기관과 학계, 연구기관도 수십 개씩 집적돼 있다. 명실상부 그리스의 해양수도인 셈이다.대한민국 대표 선사이자 글로벌 8위 해운기업 HMM의 본사 부산 이전 소식이 날아들었다. 본사의 핵심 인력까지 부산으로 내려오는 실질적 이전을 이끌어내는 과제가 남아 있긴 해도, 지역은 환영과 기대로 가득 찼다. 정부의 의지대로 해양수도 구축을 위한 작업이 흔들림 없이 추진된다면, 수십년 뒤 해양수산 분야 민관산학연이 부산 북항과 영도 동삼동에 빽빽하게 자리잡을 것이다. 갈 길이 멀지만 대한민국 해양수도이자 관문이면서 성장 엔진이 될 부산에 진정한 기회의 시간이 도래했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박세익의 뷰파인더] 보이지 않는 감옥, 에코 체임버 탈출하기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 놀러 갔다가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교장선생님이 서시던 단상에 어깨띠를 두른 아저씨들이 차례로 올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관중 일부가 다 같이 이름을 외치니, 박수 소리와 야유가 운동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른바 ‘운동장 유세’ 현장이었다. 그 시절 유권자들은 한자리에 모여 미어캣처럼 눈과 귀를 기울였다. 후보들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 무슨 말을 해도 놓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인터넷이나 유튜브가 없던 시절, 신문이나 TV 뉴스 이외에는 후보들의 언행을 직접 보고 들을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 운동장은 밝기만 한 곳이 아니긴 했다. 사람들을 동원해 인지도를 왜곡하거나 싸움을 하고, 돈봉투를 주고 표를 사는 매표 행위가 횡행했다고 한다. 그래도 자연스럽게 후보가 어떤 공약으로 어떻게 일하겠다고 하는지, 말과 행동을 어느 정도 종합하고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90년대 민주화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공직선거법은 투명한 선거를 치르도록 진화했다. 거리 유세도 여전히 남아 있지만, 최근 선거는 오프라인보다 온라인 공간을 더욱 파고든다. 수많은 유권자들이 다양한 정보가 넘쳐나는 SNS나 영상 플랫폼에 모여 갑론을박을 벌이고, 거기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여기서 큰 문제가 생겼다. 이전에 비해 손쉽게 후보들을 만나고 정보를 파악하는 장점의 이면에 눈과 귀를 가리는 편 가르기 현상이 심화하고 있어서다. 이것이 알고리즘 추천 온라인 뉴스와 영상의 미로 속에 스스로 갇히는 ‘에코 체임버’다. 내 말과 소리가 세상에 나아가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갇힌 공간이라는 의미다. 유권자들이 비교적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종이 신문이나 방송 뉴스를 점점 외면하고, ‘네 생각이 옳다’고 맞장구치는 커뮤니티나 유튜브 콘텐츠에 점점 매몰되는 현상을 표현한다. 그나마 과거 ‘운동장’을 경험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청년 세대는 처음부터 전체를 보기 힘들게 됐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사회생활을 하기 전부터 온라인 공간에서 비슷한 무리의 생각에 갇히기 쉽다. 알고리즘이 그들의 생각이 전체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끝없이 유도한다. 그래야 영상과 광고를 더 많이 시청해 매출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최근 20대 남성과 여성의 생각과 가치관이 양극단에 위치하는 이유 중 하나다. 절대다수가 이용하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플랫폼은 철저하게 이익을 추구한다. 공익이나 견제와 균형, 저널리즘 따위는 관심이 없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더 많은 광고를 보게 할 것인가’가 AI 알고리즘의 유일한 목표다. 그렇게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또래가 많이 본 영상을 지속적으로 추천하는 ‘입소문 시스템’을 강화한다. 절대 ‘필터 버블’ 소우주 밖 은하계를 노출하지 않는다. 그것이 확증 편향인 줄도 모르고, 시야가 점점 좁아져 극단적으로 가짜 정보를 맹신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제는 미로를 스스로 탈출할 때가 됐다. 경주마의 눈가리개를 치우고 넓게 보려고 안간힘을 써야 한다. 항상 가동되는 내 안의 ‘레드 팀’이 필요하다. 단순한 노력으로 불가능하다. 습관 자체를 바꿔야 한다. 당장 해야 할 일은, 추천 피드에 의존하지 말고 검색과 시청 기록을 주기적으로 초기화하는 것이다. 자동재생 기능도 꺼야 한다. 알고리즘에만 맡길 게 아니라 내가 주도해 반대 의견을 검색한 뒤 한 건 이상은 읽고 시청하는 습관을 들이자. 유튜브나 네이버 등 한 플랫폼에만 머물지 말고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는 공간과 채널, 커뮤니티를 찾아다녀야 한다. 다른 목소리를 듣는 새로운 계정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강한 콘텐츠를 잘 가려내는 안목이 필요하다. 어떤 정보든 의심하는 자세도 중요하다. 감정적으로 공감되는 그럴 듯한 주장이지만, 출처와 1차 자료를 가지고 교차 검증을 해보면 근거 없는 경우가 많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콘텐츠는 공유하지 않는 게 낫다. 부산일보TV 등 공신력 있는 영상 콘텐츠를 의도를 가지고 무단으로 재가공해 돈벌이를 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유튜버들도 난무하는 상황이다. 그런 이들이 만든 짧은 영상들을 하루 종일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심리적 지배를 당하게 된다. 세상 모든 시스템에는 장점과 단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아날로그 운동장 유세와 온라인 공간의 장점만 남길 수는 없다. 그렇다면 영화 맨인블랙의 끝도 없이 확장하는 우주처럼, 나만의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태도가 절실하다. 견디기 힘들고 불편하더라도, 어느 쪽이든 무슨 근거로 주장하는지 들어는 보고 판단할 일이다. 6·3 지방선거가 달아오르니 온갖 주장이 난무한다. 고귀한 나의 한 표를 쉽고 편하게 던져 버리고 말 일인가.
[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세계적'이라는 주문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중략)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의 시 ‘오월’이다. 계절의 여왕 오월에는 어김없이 가족이 가운데 자리한다. 가정의 달의 거창한 형식보다 “사랑합니다” 한마디가 더 묵직한 계절.그러나 오월, 부산에서는 그 온기를 비집고 불편한 진실이 고개를 든다. 부산시청 집무실 어딘가에는 아마도 이런 지도가 걸려 있을 것이다. 오페라하우스, 퐁피두 분관, 라 스칼라 공연. 점점이 찍힌 세계 지도 위에서 부산은 이미 뉴욕과 밀라노와 파리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박형준 시장에게 문화는 브랜드다. ‘세계적’이라는 형용사는 그의 통치 언어에서 가장 자주 소환되는 주문(呪文)이고, 그 주문이 통할 때마다 시민 혈세는 대서양 너머로 흘러간다. 지금 부산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문화 행정의 성취가 아니다. 문화 이해의 빈곤을 드러내는 연속극이다. 부산오페라하우스 개관 공연으로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의 오페라 ‘오텔로’를 세 차례 올리기 위한 업무협약 동의안을 부산시의회가 심의 중이다. 1778년 개관해 24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라 스칼라. 그 이름만으로도 개관 첫날의 포스터는 완성된다. 부산시장 입장에서 이보다 완벽한 홍보 그림도 없을 것이다. 화려한 그림의 이면을 보라. 이 공연 하나를 위해 라 스칼라 측에 지불해야 할 금액은 105억 원으로 추산된다. 반면 올해 부산소극장오페라축제와 창작오페라 지원사업에 대한 시비 지원은 2억 2000만 원에 불과하다. 세계 정상급 오페라단 초청에는 100억 원을 쾌척하면서, 그 무대의 씨앗이 될 지역 예술 생태계에는 2억 원을 쥐여준다. 이것이 이 행정의 민낯이다. 오텔로는 공연되고, 객석은 환호하고, 국제 언론은 짧게 보도할 것이다. 그리고 밀라노의 예술단은 유유히 돌아가고, 부산에는 105억 원의 공백과 여전히 무대를 갖지 못한 지역 오페라 가수들만 남는다. 이것은 개관이 아니다. 전시(展示)다. 오페라하우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 유치는 민선 8기 핵심 공약이다. 부산시는 총 1099억 원을 투입해 남구 이기대 예술공원 일대에 미술관을 건립할 예정이다. 숫자가 말해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연간 예상 수입은 약 50억 원, 총지출은 약 125억 원이다. 매년 75억 원의 적자를 시민 세금으로 고스란히 메워야 한다. 그것도 사업비와 일반 운영비의 ‘전시’ 항목에 브랜드 사용료만 연간 65억 원이 들어갈 것으로 확인됐다. 요컨대, 부산 시민은 매년 65억 원을 내고 ‘퐁피두’라는 프랑스 미술관의 이름을 임차하는 셈이다. 도시의 문화적 자존심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외국 브랜드의 하청 문화 기지가 되겠다는 선언 아닌가! 절차적 문제도 심각하다. 시민단체는 지방재정법상 투자 심사와 타당성 조사 의무를 어겼다며 감사원에 공익 감사를 청구했다. 업무협약(MOU)은 비공개다. 시민의 돈으로 시민이 알 수 없는 계약을 밀실에서 맺는다. 이것이 민주적 문화 행정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독선의 문법, ‘세계적’이라는 면죄부! 작금의 문화 행정에는 일관된 문법이 있다. 세계 최고 브랜드를 유치하면 나머지 논란은 자동으로 봉합된다는 논리다. 라 스칼라가 오면 오페라하우스의 정당성이 증명되고, 퐁피두가 들어서면 부산은 문화도시가 된다는 식이다. 이 논리 안에서 지역 예술인의 소외, 시민 의견 수렴 부재, 천문학적 적자는 모두 ‘보완할 과제’로 가볍게 축소된다. 문화는 수입(輸入)되지 않는다. 비스마르크가 군함을 사들였다고 독일 해군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탄생하지 않은 것처럼, 라 스칼라가 북항을 한 번 다녀간다고 부산에 오페라 문화가 뿌리내리지 않는다. 진짜 문화도시는 외부에서 브랜드를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예술가를 성장시키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부산시립미술관과 부산현대미술관에 전략적으로 투자해 동북아시아 특화 미술관을 만드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선택받지 못했다. 화려한 외국 간판이 그 길을 가렸다. 독선은 나쁜 의도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 옳다는 확신에서 가장 두꺼운 독선이 자란다. 라 스칼라와 퐁피두를 동시에 향해 달려가는 부산시장의 모습은 웅장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달음박질 속에서 정작 부산의 문화 토양은 짓밟히고 있지 않은지, 이 물음을 시민이 제기할 때가 되었다. 그 시점이 지금이다. 세계적인 것을 꿈꾸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간판을 사들이는 것과 세계적인 문화를 일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임을 모르는가! 하나는 돈의 문제고, 하나는 철학의 문제다. 그 차이를 모른다면, 혹은 알면서도 무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독선이다.
[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책과 빛, 사유의 시간을 담은 엑서터 도서관
미국 뉴햄프셔주의 작은 도시 엑서터(Exeter). 보스턴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이 작은 마을에는 현대 건축사를 대표하는 도서관 가운데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Kahn)이 설계한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 도서관(Phillips Exeter Academy Library)이다. 흔히 ‘엑서터 도서관’이라 불리는 이 건물은 단순한 학교 시설을 넘어, “인간은 어디에서 가장 깊이 사유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건축적으로 풀어낸 공간으로 평가받는다. 1972년 완공된 이 도서관은 미국의 명문 기숙학교인 필립스 엑서터 아카데미를 위해 지어졌다. 당시 루이스 칸은 이미 솔크 연구소와 킴벨 미술관 등을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건축을 단지 기능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작업으로 바라본 건축가였다. 엑서터 도서관 역시 화려한 형태나 과장된 조형보다는 공간의 본질에 집중한다. 건물 외관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다.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거대한 정육면체 형태다. 장식은 거의 없지만, 창문의 비례와 벽돌의 리듬은 묵직한 존재감을 만들어낸다. 멀리서 바라보면 오래된 수도원이나 고전 건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루이스 칸은 현대 건축 안에서도 시간의 깊이와 영속성을 담아내고자 했다. 이 건물의 진정한 공간 경험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중앙에는 4층 높이의 거대한 아트리움이 뚫려 있고, 천창을 통해 들어온 자연광이 공간 전체를 부드럽게 감싼다. 특히 중앙부의 거대한 원형 개구부는 보는 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사람들은 이 공간을 흔히 ‘사유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내부에 들어서면 단순한 도서관이라기보다 조용히 머물며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공간에 가깝다. 루이스 칸 건축의 핵심은 ‘빛’에 있다. 그는 “태양은 벽에 닿기 전까지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자연광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엑서터 도서관에서도 빛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라 공간을 완성하는 재료처럼 사용된다. 시간과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빛의 흐름은 공간에 깊이를 더하고, 이용자들은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집중과 사유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외곽 벽면을 따라 배치된 창가 열람석은 이 건물의 가장 인간적인 장면이다. 작은 창가 좌석은 개인 서재처럼 구성되어 있어 학생 한 명이 조용히 책을 읽고 생각에 잠길 수 있다. 거대한 중앙 공간이 공동체의 지식을 상징한다면, 가장자리의 작은 자리들은 개인의 고독과 사유를 상징하는 셈이다. 루이스 칸은 공동성과 개인성을 하나의 건물 안에서 균형 있게 풀어냈다. 디지털 시대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도서관을 찾는다. 단지 정보를 얻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조용히 머물며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 그리고 깊은 사유에 잠길 수 있는 공간을 원하기 때문이다. 엑서터 도서관은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를 건축으로 구현한 대표적인 사례다.
[데스크 칼럼] 은쪽이 남매
후배들을 보며 기자 초년병 때를 떠올린다. 몸도 마음도 혹독하게 담금질했던 시절. 가장 힘들었던 건 이른 새벽 출근도, 비리 사건 취재도, 어려운 기사 쓰기도 아니었다. 바로 ‘땟거리’라 부르는 기삿거리 찾기였다. 걱정을 덜어준 건 ‘현장’이다. 동행취재 혹은 현장르포 형식을 빌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직접 체험하며 기사로 풀어냈다. 2009년 봄, 택시 기본요금 인상으로 수입이 반토막 난 현실을 알아보기 위해 조수석에 동승해 기사님과 손님들 얘기를 들었다. 장마철에는 아파트 수해 현장을 찾아 진흙투성이 지하주차장 복구 작업에 동참했다. 그해 여름 끝자락엔 119구조대의 24시를 동행취재한 기획기사도 기억에 남는다. 주변에서 “고생했다”며 칭찬을 건넸지만, 고백건대 전혀 고생스럽지 않았다. 기회만 된다면 ‘현장체험 전문기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장은 흥미진진했고, 보람도 컸다. 기자라면 현장 취재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변명, 아니 해명하자면 요즘 후배들은 게을러서가 아니라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해 현장을 찾지 못한다. 하루를 오전 오후로 쪼개, 여러 건 기사를 써야 하는 기자들에게 현장 취재는 후순위로 밀리기 일쑤다. 경찰과 소방의 보고서를 참고해 전화로 추가 취재를 하다 보면 기사 마감이 코앞이다. 방송 기자는 정반대 고충이 있다. ‘그림’을 확보하기 위해 현장을 누비는 반면, 모자란 취재는 타 언론사 기사를 참고하곤 한다. 신문쟁이로서 방송계를 언급할 수 있는 건 방송뉴스를 제작해 본 경험이 있어서다. 종편채널에 부산지역 뉴스를 공급하는 역할을 1년 동안 맡아, 여느 방송 기자처럼 다양한 사건사고 현장을 다녔다. 변사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시신 부패 흔적, 북극곰 축제를 취재하며 겨울 바다에 뛰어들었던 경험 등은 현장의 중요성을 더욱 일깨우는 기억으로 각인돼 있다. 돌이켜 보면 현장에 대한 관심은 기자로 첫발을 내딛기 한참 전부터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 같다. 학창 시절 기사를 읽거나 방송뉴스를 볼 때면 현장감 있는 소식에 더 눈길이 갔다. 각종 보고서나 통계자료가 나열된 기사를 접하면, 숫자 너머 현장의 목소리가 궁금했다. AI 시대에 레거시 미디어, 신문·방송의 미래는 있을까. 있다면 기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끊임없는 자문 끝에 찾은 한가지 해답 역시 ‘현장’이다. 사람 대 사람으로 직접 얼굴을 맞대 묻고 답하며, 생생한 이야기를 길어 올리는 일만큼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사람 기자의 몫이다. 올 들어 유튜브 채널 운영을 다시 맡게 되면서 이 해답을 업무에 적용하고 있다. 〈부산일보TV〉를 눈여겨본 구독자라면 최근 변화를 눈치챘을 것이다. 생방송·생중계를 비롯해 현장르포 성격의 콘텐츠가 늘었다. 최근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심르포’라는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주요 전통시장을 찾아 상인들의 입을 통해 지역 민심을 들어보자는 취지다. 지방선거와 함께 국회의원 보궐선거까지 치르는 부산 북구 구포시장 일대는 전국구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시장 구석구석을 돌며 진행된 전재수 전 의원의 감사 인사와 하정우 전 AI수석의 첫 방문을 비롯해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와 박민식 전 장관이 마주친 구포초등학교 현장도 찾아 민심을 들었다. 관련 콘텐츠 조회수를 다 합하면 100만 회가 훌쩍 넘는다. 이에 더해 한 전 대표의 단독인터뷰는 일부러 만덕2동 전셋집이 있는 아파트단지에서 야외 생중계로 진행했다. 현장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의도였는데, 역시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 같은 시도를 할 수 있는 건 사람 기자 덕분이다. 지난봄 TV방송국으로 발령 난 이은철·변은샘 두 기자가 일당백으로 뛰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름의 가운데 글자가 똑같아, 금쪽이 못지않게 소중한 ‘은쪽이’라 여기고 있다. 기자실 책상과 전화 취재가 익숙했을 후배들이 요즘 현장의 중요성을 자주 입에 올린다. 의견을 반영해 애초 4부작으로 기획한 ‘민심르포’를 확대 편성했다. 부산시장 후보들의 선거운동 무대 뒤편도 궁금한 세계다. 가능하다면 전재수·박형준 후보의 하루 일정을 따라다니며 생생한 장면을 전해보려 한다. 얼마나 날것의 현장이 담길지는 ‘은쪽이 남매’의 활약에 달렸다. 민주주의 축제가 끝나고 나면 어디서 땟거리를 찾아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기자는 기록하는 사람이기에, 결국 ‘기승전현장’이라 믿는다. 부산과 부울경을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 비전이 되는 현안, 전국에 울림을 주는 지역 이슈를 찾아 부지런히 돌아다닐 것이다. 지역민의 눈과 귀, 독자의 입과 손발이 되겠다는 다짐을 담은 〈부산일보TV〉를 한번 믿고 지켜봐 주시라. 그러니 부디... ‘좋댓구알’!
[중앙로365] 지방선거, 부산 디지털 금융의 청사진을 묻다
얼마 전 세계 8위 해운사 HMM이 부산으로 본사를 이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에 이어 한국 해운 산업의 상징과도 같은 민간 기업까지 부산에 둥지를 트는 셈이다. 정부 부처와 대형 민간 기업이 차례로 내려오면서, 부산은 단순한 항만 도시를 넘어 ‘해양 금융의 수도’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하게 됐다. 그러나 이 발판이 진짜 성장으로 이어지려면 항만과 해운이라는 실물 자산을 ‘디지털 금융의 언어’로 다시 짜는 작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필자는 지난 3월 본 지면을 통해 부산이 가진 해운·물류 인프라가 RWA(실물자산 토큰화)와 결합할 때 만들어 낼 새로운 금융 모델을 제안한 바 있다. 선박의 소유권과 용선료 수익권을 토큰화해 일반 투자자에게 개방하는 ‘선박 RWA’, 가덕신공항의 운영권 일부를 시민 참여형 디지털 펀드로 조달하는 ‘인프라 RWA’가 그 골자였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지금, 해수부와 HMM의 부산 이전이라는 거대한 모멘텀이 만들어지면서, 그 제안은 더 이상 미래의 청사진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정책 의제로 바라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부산의 정책 시계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발표되는 후보들의 공약을 살펴보면, 부동산·교통·복지 등 전통적인 의제는 빼곡히 채워져 있지만, ‘디지털 금융 도시 부산’을 어떻게 구체화할지에 대한 실질적인 청사진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된 지 수년이 지났고, 디지털 자산 시장은 이미 제도권 금융의 본류로 진입하고 있는 시점에서 부산은 여전히 이 변화의 무게를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 차원의 입법 또한 사정이 녹록지 않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규율할 디지털자산기본법은 발행 주체와 지분율을 둘러싼 이견 속에 표류를 거듭하고 있고 지방선거 국면에 접어들면 그 우선순위는 더욱 뒤로 밀릴 가능성이 크다. 그 사이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송금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중앙의 입법이 늦어진다고 해서 지방이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이유는 없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부산이 ‘제도의 실험장’을 자처하며 한 걸음 앞서 나가야 할 시점이다. 이미 글로벌 해양·금융 도시들은 디지털 자산을 도시 경쟁력의 핵심 축으로 삼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싱가포르는 통화청(MAS) 주도의 ‘프로젝트 가디언(Project Guardian)’을 통해 채권·펀드·외환의 토큰화 실증을 정부 보증 아래 진행 중이고, 두바이는 별도의 가상자산규제청(VARA)을 설립해 토큰화 자산의 발행과 유통을 일원화된 체계로 관리하고 있다. 홍콩 또한 디지털 자산 ETF와 스테이블코인 라이선스 제도를 정비하며 아시아 디지털 자산 허브 자리를 노리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도시 단위에서 명확한 정책 방향을 가지고 자산 토큰화 시장을 선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 부산에서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검토해 보기를 희망한다. 첫째, 부산 차원의 ‘디지털 자산 규제 샌드박스 2.0’이다. 기존 블록체인 특구가 기술 실증에 초점을 맞췄다면, 새 단계는 금융과 자산의 실증으로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 선박·항만·물류 자산을 기초로 한 RWA 발행과 유통,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 실험, 디지털 자산 커스터디 인프라 구축이 부산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빠르게 검증될 수 있도록, 지자체가 중앙 부처와의 가교 역할을 적극적으로 자임해야 한다. 둘째, ‘부산형 시민 참여 인프라 펀드’의 제도화다. 가덕신공항, 북항 재개발, 항만 배후 단지와 같은 대형 사업의 일부 지분을 토큰화해 부산 시민이 소액으로 보유하고 운영 수익을 배당받는 구조다. 자본 조달과 시민 참여,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한꺼번에 풀어내는 ‘부산만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셋째, 디지털 금융 인재 생태계의 본격적인 구축이다. 디지털 금융 혹은 블록체인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정규 과정에 편입시키고, 지역 대학·연구기관·기업·금융권을 잇는 상설 플랫폼으로 확장해야 한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 도시에 자본은 머물지 않는다. 디지털 금융은 부산이 오래 짊어져 온 구조적 과제, 즉 수도권 자본 의존, 청년 인구 유출, 산업 고도화 지연 등을 정면으로 풀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렛대가 될 수 있다. 항만과 조선이 20세기 부산을 만들었다면, 그 위에 얹히는 디지털 금융이 21세기 부산을 다시 만들 수 있다. 다만 이는 시장과 의회가 의지를 갖고 일관되게 끌어가야 가능한 일이다. 디지털 금융 도시 부산의 청사진을 분명히 제시하는 후보, 그리고 그 청사진을 끝까지 검증하는 시민. 이 두 주체가 만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부산의 다음 10년이 시작될 것이다.
[김필남의 영화세상] 무너지는 세계에서 버티는 법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패션이라는 화려한 갑옷을 입고, 전쟁터 같은 사회를 누비는 여성들의 초상을 그려내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쉴 새 없이 등장하는 명품 브랜드와 세련된 스타일링은 보는 이들의 감각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누군가는 소비 지향적인 판타지를 그린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아찔한 킬힐 소리 뒤에 숨겨진 땀방울을 목격하며, 화려한 외양 너머 존재하는 이면을 그려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2006년 개봉한 영화에서는 사회초년생 ‘앤디’(앤 해서웨이)가 패션 매거진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립)의 비서로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까다로운 상사와 어수룩한 신입, 패션을 중심으로 한 볼거리는 가볍게 소비되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앤디의 미숙함, 완벽해 보이지만 언제든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미란다의 불안을 교차시키면서 20~30대 여성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다. 가히 신드롬을 일으켰던 영화 속 그들. 가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했던 그들이 20년 만에 돌아왔다. 2편은 20년 전 런웨이를 떠났던 앤디가 탐사보도 기자로 저널리즘 상을 수상하면서 문을 연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 앤디는 문자 한 통으로 해고를 통보받는다. 회사 전체가 구조조정에 들어간 탓이다. 시상대 위에서 트로피를 쥔 채 실직자가 되는 이 아이러니한 장면은, 영화가 응시하는 2026년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성실하게 축적해온 시간과 성취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경험, 그 불안은 특정 직종을 넘어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공통된 감각에 가까워 보인다. 또한 2편이 전작과는 다른 이야기로 전개될 것임을 예상케 한다. 먼저 영화가 포착하는 또 하나의 축은 권력의 이동이다. 과거 미란다의 비서였던 ‘에밀리’는 현재 럭셔리 브랜드의 임원이 되어 협상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다. 상사의 눈치를 살피던 위치에 있던 인물이 이제는 런웨이의 생사를 좌우하는 위치에 선 것이다. 갑과 을이 뒤바뀐 이 장면은 시간이 만들어내는 위계의 재편과 냉정한 속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맞물려 2편은 화려한 외양에 머물지 않고,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저널리즘의 생존을 다룬다. “치실로 써도 될 만큼” 얇아진 잡지의 두께, 하이패션 브랜드들의 광고가 아니면 매체도 존재하지 못하는 현실, 편집장의 직관보다 알고리즘이 우선하는 환경에서 가치 있는 기사는 의미가 없다. 미란다와 앤디 또한 아름다움과 조회 수 사이에서 헤맨다. 그들에게 패션은 예술이나 철학이 아닌, 데이터에 의해 재단되는 숫자에 불과해진 것이다. 영화는 ‘악마’로 불리던 미란다도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린다. 한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그의 권위적인 태도는 이제 문제적 행위로 읽힌다. 사무실에 들어서며 코트를 비서에게 던지던 과거와 달리, 끙끙거리면서 스스로 옷을 정리한다. 부하 직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내던 모습도 볼 수 없다. 강화된 HR 규정은 그 아무리 미란다라고 해도 비껴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장면은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묘하게 씁쓸하다.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권력은 사라지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과연 사라진 것인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현실 상황을 그려내는 듯 보이지만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지 못한다. 레거시 미디어의 생존이라는 현실적 고민이 판타지로 치환되는 순간, 공들여 쌓아 올린 질문의 무게는 힘을 잃고 만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자본의 논리나 선의로 덮어버리는 방식인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무너지는 기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미란다와 앤디를 통해 말한다. 시대의 흐름을 인정하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을 방법을 강구하는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사랑스럽다.
부산 문화 랜드마크, 선거판 흔드는 화두로
창원특례시를 다시 마·창·진으로?
대사관은 부인하더니…이란 관영 매체 “한국 선박 표적”
교직원 사진 빼내 딥페이크 제작한 학교 외주직원 구속
금리 높다 했더니… 지방은행의 ‘유동성 확보’ 고육지책
국민의힘, ‘특검법’에 연일 ‘십자포화’… 민주당, “국민 몰라” 발언에 당혹
예측불허 판세에 야야 PK 기초단체장 후보들 ‘좌불안석’
“소음·먼지에 창문 못 여는데 기준치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