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속도 내는 글로벌허브특별법, 이럴 걸 지금껏 끌었나
현역 시장의 삭발 사태까지 부른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이하 글로벌법) 국회 통과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며칠 전까지 국회 소위 안건 상정조차 하지 않던 여권이 24일 갑자기 소위에서 안건 처리를 해서다. 여권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당 지도부가 직접 나서서 국회 우선 처리 방침까지 밝혔다. 이대로라면 글로벌법 국회 통과는 시간 문제일 것으로 보인다. 수년 동안 국회에서 줄곧 외면만 당하던 글로벌법의 통과는 반가운 일이지만 글로벌법을 두고 벌어진 그간의 행태들은 부산 시민들로서는 참담함을 금치 못하게 한다. 지방선거 코앞까지 떠밀린 부분도 뒷맛이 개운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더불어민주당은 24일 행안위 소위에서 글로벌법 안건을 처리했다. 안건 상정조차 아예 외면하면서 현역 시장의 삭발 사태까지 불렀던 그동안의 행보에 비춰보면 놀라울 정도의 태세 전환이다. 민주당은 그 과정에서 법안을 공동 대표발의한 전재수 의원 요청에 원내대표가 직접 나서서 “조속히 법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침까지 보탰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글로벌법 처리 과정에서 현역 시장에겐 ‘무능’ 이미지를, 여당 유력 시장후보에겐 ‘실행력’ 이미지를 씌우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지방선거를 앞둔 시민들은 특별법 통과 하나를 놓고도 기표를 위한 해석에 골몰해야 할 판이 됐다. 2024년 5월 발의된 글로벌법은 부산 국회의원 18명 전원이 공동발의하고도 2년 동안 국회 문턱을 조금도 넘지 못 했다. 국회에서 외면만 당한 것이 아니라 21대 국회 임기 만료로 한 번 폐기된 뒤 22대 국회에서 새로 발의되면서 법안 문구까지 개악됐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21대 발의 땐 ‘한다’라는 기속행위가 법안 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반면 22대 발의 내용에선 문구가 ‘할 수 있다’는 재량행위로 대거 바뀌었기 때문이다. 법률상 기속행위로 정해 놓은 경우에도 예산 불비 등의 이유로 시행이 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점을 감안하면 재량행위로 바꾼 것은 ‘하지 않겠다’는 뜻의 완곡한 표현으로까지 읽혔다. 우여곡절 끝에라도 글로벌법의 국회 통과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고무할 만한 일이다. 대표적인 지역 특화 특별법으로서 부산을 물류·금융·디지털 첨단산업의 국제 허브로 조성하기 위한 규제특례·재정지원·거버넌스 체계를 일괄적으로 만들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권 유력 시장후보가 나서자 일사천리로 바뀌는 여권 당 지도부의 태도를 접하면 ‘이럴 걸 지금까지 왜 끌었나’하는 의구심이 드는 건 솔직한 심정이다. 글로벌법만 국회를 통과하면 부산시민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라는 생각은 안일하다. 글로벌법이 발의 이후 어떻게 변질되고 좌절됐는지를 시민들은 너무나 똑똑히 보아 왔다.
[사설] AI 관제시스템 도입, 도심 교통 혁신 계기 만들어야
부산시가 인공지능(AI) 기반 교통 혁신에 나섰다. 부산시는 24일 AI와 교통 데이터를 접목한 ‘지능형 교통 신호체계 고도화’를 추진한다고 밝혔다. 부산은 산지·곡선 도로 구조에 항만 물류의 흐름까지 더해진 데다 상습 정체와 침수 구간이 많은 점이 도시 브랜드의 취약점으로 꼽혔다. 글로벌 허브도시로 도약하려면 도로 혼잡과 위험을 예방하고 이동 효율을 개선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부산시가 교통량과 속도에 돌발 상황 데이터까지 수집·분석하고 실시간 대응하는 AI 관제시스템 구축에 나선 것은 시의적절하다. 교통 혁신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은 당연하며, 데이터 기반 도시의 미래상까지 도출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부산의 교차로 223곳에는 스마트교차로 시스템이 구축·운영되고 있다. 24시간 모니터링이 가능한 인프라다. 시범적으로 AI로 최적의 신호 주기를 산출해 실시간 적용한 교차로에서 평균 속도는 시속 2.25㎞ 빨라졌고, 교차로 지체 시간이 10% 이상 감소했다. 부산시는 효과가 확인된 만큼 74억여 원의 국비 예산을 투입해 스마트교차로를 확대하는 한편 ‘긴급차량 우선 신호’ ‘스마트 화물차량 관리 시스템’ ‘침수 정보 제공’ 등 신규 기능을 개발하기로 했다. 이미 서울과 대전·세종 등 각 도시에서 드론 영상을 AI로 분석하는 등 관제 혁신에 나서고 있다. 중요한 것은 각 도시의 특성에 적확한 교통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AI 시스템은 구축보다 운영이 더 중요하다. 데이터 품질과 운영 역량이 핵심 변수다. 첨단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바로 성과가 나지는 않는다는 의미다. 데이터 오류나 관리 부실이 누적될 때 신호 체계 전체의 신뢰도가 흔들릴 수 있다. 또한 시스템 오류로 인한 사고 발생 시 책임 소재, 해킹 등 보안 문제 역시 사전에 정비돼야 할 과제다. 부산 특유의 복잡한 도로 구조와 상습 정체 구간, 침수 위험 지역까지 정교하게 실시간 분석과 대응이 가능한지 충분한 검증을 거친 뒤 실전에 투입해야 한다. 광안대교에 끼어들기를 단속하는 고정식 AI 카메라를 설치했다가 법규 미비로 2년 허송한 전철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AI 관제시스템이 성과를 내면 물류 효율 개선, 대기오염 저감, 시민 체감 편의 등 연쇄적 효과가 기대된다. 도시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 기여할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만 기술 의존이 곧바로 효율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사업의 성패가 AI 도입 자체가 아니라 현장에 맞는 지속적 운영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또 정적인 신호 체계에서 실시간 반응형으로의 전환이 갖는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데이터 기반 도시로 나아가는 출발점에 서 있다. 부산의 고질적인 교통난과 글로벌 허브도시의 미래상은 양립할 수 없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사설] 박형준 ‘삭발 투쟁’ 지방선거 쟁점 떠오른 글로벌허브법
부산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글로벌법)이 6·3 지방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23일 국회 앞에서 삭발까지 감행하며 법안 처리를 촉구했다. 이 법은 부산을 국제 물류·금융 중심의 자유 비즈니스 도시로 육성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데 목적이 있다. 부산을 싱가포르나 상하이, 두바이와 같은 글로벌 허브 도시로 도약시키겠다는 구상이지만, 정작 국회에서는 2024년 5월 발의 이후 2년 가까이 심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이날 박 시장은 여당을 향해 “국가와 부산의 미래가 달린 법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했다. 광역단체장의 삭발이라는 극단적 선택은 사안의 절박성을 드러낸다. 이와 맞물려 법안을 공동 발의한 민주당 전재수 의원은 곧바로 SNS를 통해 24일 원내 지도부와 만나 법안 처리를 매듭짓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 의원과 박 시장은 6·3 지선을 앞두고 여야 부산시장 유력 후보들이다. 전 의원은 오늘 국회에서 한병도 원내대표, 신정훈 행정안전위원장, 윤건영 간사 등과 공개 면담을 갖고 글로벌법 상정을 공식 요청할 계획이다. 마침 같은 날 행안위 법안 1소위원회에서는 해당 법안의 상정 여부가 논의될 전망이다. 박 시장의 삭발 투쟁과 전 의원의 담판 시도가 맞물리며 글로벌법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 정치력과 책임성을 가늠하는 시험대로 부상한 셈이다. 글로벌법은 2024년 5월 부산 지역 국회의원 18명 전원이 공동으로 참여해 여야 협치 1호 법안으로 발의된 바 있다. 그렇기에 현재 이 법안은 정부와 정치권 사이에 기본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법안은 발의 과정에서 행정안전부 등 관계 부처와 사전 협의를 거쳐 마련됐고, 정부 역시 남부권 혁신거점 구축과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측면에서 필요성을 인정해 왔다. 국회 검토보고서에서도 신속한 입법 필요성이 언급된 바 있다. 이런 배경을 감안하면 글로벌법은 특정 정당의 정책이 아니라 국가 균형발전과 지역 경쟁력 강화를 위한 공동 과제로 볼 수 있다. 그런데도 법안이 장기간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것은 지역 입장에서 납득하기 어렵다. 박 시장은 ‘민주당 책임론’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고, 전 의원은 당 지도부와의 공개 면담을 통해 법안 처리를 요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글로벌법은 더 이상 정치적 공방 속에 머물 사안이 아니다. 여야가 성과를 다투는 사이, 법안 처리가 지연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돌아간다. 이제 필요한 것은 책임 공방이 아니라 국회의 결단이다. 과거 부산에서는 글로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시민 서명에 약 160만 명이 참여하며 지역의 기대와 요구가 분명히 표출된 바 있다. 수년간 축적된 논의와 시민의 요구를 외면한다면 정치권 전체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부산의 미래를 둘러싼 선택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
'아리랑' NO. 29
종소리는 종종 우리 삶에 깊은 울림을 남긴다. 특히 새벽이나 저녁에 사찰이나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한층 묵직하게 다가온다. 소리는 공기의 압축과 팽창이 만들어낸 파동으로 전해지지만 그 울림은 단순한 물리 현상을 넘어설 때도 있다. 요컨대 미국의 독립과 노예제 폐지를 상징하는 자유의 종을 비롯해 프랑스의 노트르담 대성당 종, 영국의 빅벤 등은 시대와 가치를 품은 상징으로 존재해 왔다. 종은 그림 속에서도 울린다. 농민의 삶을 그린 프랑스 화가 밀레의 ‘만종(晩鐘)’이 그렇다. 저녁노을이 스러질 무렵, 보이지 않는 종소리에 이끌리듯 밭일을 마친 농부 부부가 허리를 펴고 두 손을 모은다. 지평선 너머 희미하게 드러난 성당의 실루엣은 그 고요한 울림을 더욱 또렷하게 전한다.한국의 범종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특유의 조형미와 소리로 오래전부터 국내외 고미술학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에 국제적으로 ‘한국 종(Korean Bell)’이라는 고유한 명칭까지 얻었다. 성덕대왕신종(일명 에밀레종)은 그 정점을 보여준다. 통상 신라의 범종은 수킬로미터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릴 정도다. 이는 맥놀이 현상 때문인데, 서로 다른 진동수가 결합하며 강약을 반복해 길고 은은한 여음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음관도 한국 범종의 비밀 중 하나다. 종 상단 용뉴(종의 고리) 부분의 대나무 마디 형태 음관은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전한다. 만파식적은 나라의 모든 근심과 걱정이 해결된다는 전설상의 피리로 이를 불면 모든 풍파(분열·분란·재난)가 잠재워졌다고 한다. 종 아래 울림통 역시 공명을 통해 소리를 더욱 길게 확장한다. 한데 에밀레종은 이 모두를 갖췄다.그동안 우리는 이 에밀레종 소리를 품고만 있었다. 이를 적극적으로 알리려는 노력을 크게 하지 않았다. 최근 방탄소년단(BTS)이 3년 9개월 만에 발표한 5집 앨범 ‘아리랑’에 이 종소리가 담겼다. 6번 트랙 ‘NO. 29’는 단 한 번의 타종과 그에 이어지는 긴 여음만으로 1분 38초를 채우며 에밀레종 특유의 맥놀이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여음을 전한다.세상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만파식적의 전설처럼 모든 풍파를 잠재우지는 못하더라도 이 종소리가 BTS의 앨범을 통해 세계인의 귀에 닿아 시대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위로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하여 전쟁과 갈등 속에서 사라진 이들의 넋을 달래고 상처 입은 이들의 마음을 조용히 감싸안는 울림으로 번져가기를….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데스크 칼럼] 갈급하다
‘목이 마른 듯이 몹시 조급하다. 속이 마를 지경으로 몹시 바라다.’ 〈표준국어대사전〉과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 나오는 ‘갈급하다’의 뜻이다. 지난주 한 시민단체 대표와의 통화에서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이 단어가 귀에 콕 박혔다. 1991년 페놀, 1994년 벤젠·톨루엔, 2006년 퍼클로레이트, 2009년 1, 4 다이옥산, 2018년 녹조 대발생과 과불화화합물. 지난 20일 오후 부산맑은물범시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은 낙동강 수질 문제 이슈가 새겨진 검은색 조끼를 입고 벡스코 오디토리움 복도에 서 있었다. 2026 세계 물의 날 기념식 참석을 위해 부산을 찾은 김성환 기후에너지환경부 장관에게 성명서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최소남 상임대표는 기후부 장관에게 “우리 부산 엄마들이 정말 갈급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 엄마들이 얼마나 갈급한지 이해를 해달라”라고 말했다. 부산 물 문제를 지자체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떠넘기지 말고, 국가와 기후부가 주도해서 해결해 주길 바란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최 상임대표는 한 마디로 ‘쌩쇼’를 했다고 표현했다. 부산 시민단체가 맑은 물 확보에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작년 여름에는 114개 시민사회단체가 정부서울청사 국정기획위원회 앞에서 낙동강 수질 개선과 취수원 다변화 사업의 국정과제 채택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이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부산 시민이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의 안정적 확보를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이다. 낙동강은 1300만 영남권 주민의 식수원이지만 거의 매년 수질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녹조와 산업폐수라는 두 가지 문제가 상존해 지난 30년간의 수질 개선 노력에도 주요 수질지표는 한강에 못 미친다. 2021년 부산 환경단체가 페놀 유출 사건 30주년을 맞아 발표한 성명서 제목에 ‘낙동강은 신음한다. 아직도!’라는 문구가 들어있을 정도다. 시민단체가 기후부 장관에게 성명서를 전달한 날에 하루 앞서 부산시가 주최한 세계 물의 날 기념행사가 열렸다. 기념행사를 마친 뒤 300명의 참석자들은 벡스코 야외광장에서 맑은 물 염원 퍼포먼스도 펼쳤다. 뒤이어 열린 맑은 물 확보를 주제로 한 토론회의 분위기는 정말 뜨거웠다. “부산은 물로 차별받는 대한민국의 도시이다.” 부산시민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주제 발표자 겸 토론자로 참석한 환경공학 전문가의 발언은 물 문제에 있어서 부산이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대변했다. 이 발언은 특히 올해 세계 물의 날을 맞아 대한민국이 선택한 주제 ‘모두를 이롭게 세상을 품는 생명의 물’과 너무 비교됐다. 행사장에 앉아 있는 내내 기분이 씁쓸했다. 현재 낙동강 물 문제 해결을 위해 취수원 다변화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낙동강유역 하류에서 하루 90만 톤의 복류수·강변여과수를 취수해 부산에 42만 톤, 동부 경남에 48만 톤을 공급한다는 계획이다. 2021년 첫발을 내디딘 이 사업은 부산과 경남이 머리를 맞대고 조율 중이지만, 주민 반발과 예산 등의 문제로 흐르다가 멈추기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이다. 토론회에서 먹는 물 문제에 있어 지방정부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취수원 다변화를 국가 핵심사업으로 격상해달라” “국가 차원의 협력이 절실하다” “시민이 체감할 수 있는 대안을 끌어낼 신속한 의사결정이 필요하다” “역사적 결단을 내린다는 생각으로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쏟아진 수많은 이야기의 끝은 결국 정부가 나서서 낙동강 물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민단체는 성명서를 전달받은 김 장관이 부산 물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김 장관이 같은 날 부산상공회의소 초청간담회 자리에서도 시민 숙원사업인 낙동강 취수원 다변화에 대해 부산 지역도 맑은 물을 확보할 수 있도록 열심히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니 그 약속이 어떻게 지켜질지 두고 볼 일이다. 시민의 생존권이 달린 맑은 물 확보는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약속이고 정의라는 시민들의 외침을 절대 가벼이 들어서는 안 된다. 6·3 지방선거를 앞두고 갈급한 이들이 많다. 출마를 준비하는 여야 정치인, 선거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정당, 수치로 확인되는 민심의 성적표를 기다리는 정부까지. 모두 국민 한 명 한 명의 마음 잡기에 갈급할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지역 발전에 필요한 것, 지역민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이슈 속에서 지역과 지역민에게 가장 갈급한 것을 제대로 파악하고 응답하는 일이 유권자 표심 잡기의 출발점이다. 맑은 물을 향한 부산·경남 지역민의 갈증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낙동강 물 문제를 미래 세대에게까지 물려줄 수 없다고 다짐한 유권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중앙로365] '전략적 명확성 시대'의 외교
전후 국제정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임’을 펼쳐왔다. 상대에게 의도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동시에 상대가 쉽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불확실성을 남겨 두는 외교 방식이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를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이라고 부른다. 어떤 문제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기보다는 의도적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는 방식이다. 상대가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들어 억지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협상과 타협의 공간을 확보하는 ‘여백의 외교 기술’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만 문제다. 미국은 1979년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따로 ‘대만관계법’이라는 국내법을 제정해 미국이 대만을 방어할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서도 군사적 지원과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미국이 취한 이러한 모호성은 중국의 군사 행동을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중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할 공간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마찬가지다. 집단방위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실제 군사 대응의 범위와 방식에 대해서는 일정한 모호성을 남겨 두었다. 동맹의 결속력을 유지하면서도 위기관리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장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략적 모호성은 국제정치에서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일종의 암묵적 규칙이었고, 그것이 국제 질서를 일정하게 안정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최근 국제정치의 흐름을 보면 이러한 전략적 모호성이 점차 약화하고 있다. 이제 강대국을 중심으로 모호한 메시지 대신 명확한 입장을 거침없이 공개적으로 밝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포함한 일방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패턴으로 옮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NATO 가입 배제라는 명확한 요구와 미국·NATO의 단호한 거절이 타협의 공간을 완전히 소멸시켜 전쟁을 불러온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동맹국과 경쟁국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 관세 조치를 취하는 것도 외교적 메시지가 더 이상 완곡한 신호가 아니라 직접적인 요구로 바뀌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일본 역시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그간 일본은 헌법적 제한과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피해국이라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안보 문제에서 매우 신중하고 절제된 표현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다카이치 총리는 작년 11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대만 유사시 상황을 일본의 집단 자위권 행사가 가능한 ‘국가 존립 위기 사태’로 판단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는 과거 일본 외교의 톤과 비교하면 매우 분명한 메시지다. 이에 중국은 중국인의 방일 자제와 희토류를 포함한 이중 용도 품목 전반에 대한 수출 통제 조치로 대응했다. 바야흐로 동북아 정세는 여지를 남겨두는 ‘전략적 모호성의 시대’에서 이제 입장과 의도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전략적 명확성(Strategic Clarity)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심각한 딜레마를 안겨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미국은 이란 호르무즈 해협에 한국 함정을 파견하라고 ‘명확하게’ 요구하고 있다. 또한 미중 경쟁이 첨예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앞으로 양 강대국이 한국에 어느 편에 설 것인지 보다 ‘명확한’ 입장을 요구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은 단순하지 않다. 지나치게 분명한 입장을 취하면 외교적 공간을 스스로 좁히게 되고, 반대로 어정쩡한 모호성을 유지하면 상대로부터 신뢰를 잃을 위험이 있다. 더구나 경제와 안보가 긴밀하게 얽혀 있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 이러한 딜레마는 더욱 복잡한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 외교는 프로다운 유능성을 요구받고 있다. 단기적 이익만 좇아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오가는 외교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기가 닥치면 진퇴양난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핵심적인 국가 이익과 동맹이라는 원칙에 관한 문제에서는 단호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실행 방식과 정책 추진 과정에서는 국가가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외교적 자산을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전략적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경험 많은 협상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최대한의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말하자면 원칙에서는 명확성을, 전략에서는 유연성을 구현하는 고차원의 예술을 끌어낼 수 있는 유능함이 필요하다. 이상론에 기대거나 단기 여론에 밀린 땜질식·아마추어식 외교는 국가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지금은 프로 외교의 시대다.
[김필남의 영화세상] 당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 햄넷
삶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죽음은 예고 없이 다가오고, 상실은 준비할 틈조차 주지 않는다. 남겨진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면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루를 이어간다. 그러다 문득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매기 오파렐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햄넷’은 아이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슬픔이 어떻게 걸작으로 바뀌는지 추적한다. 먼저 영화는 16세기 영국의 한 시골 마을로 카메라를 돌려, 셰익스피어의 아내 아녜스의 시선으로 아들 ‘햄넷’을 잃은 시간을 복원한다. 사실 햄릿하면 윌리엄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이 먼저 떠오르지만, 영화는 그 익숙한 위상을 걷어낸다. 영화 속에서 그의 이름은 단 한 번 언급될 뿐이며 그를 위대한 작가가 아닌 그저 ‘윌’로 둔다. 그는 아버지의 빚 때문에 라틴어를 가르치다 우연히 ‘숲속 마녀의 딸’로 불리는 아녜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정을 일군 두 사람은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평온하고 행복한 때를 보낸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 않는다. 영화는 행복한 가족 서사가 아닌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내고 힘겨워하는 부부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때 아이의 부재는 단순히 비극에 머물지 않고, 남겨진 이들의 삶을 뿌리부터 뒤흔든다. 깊은 슬픔에 잠긴 윌과 아녜스는 더 이상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영화는 우리가 알고 있던 ‘셰익스피어’를 비껴간다. 그의 위대한 유산이 아닌 감당하기 힘든 상실을 견디고 그것을 기어이 예술로 승화시켜 낸 부부의 시간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아들을 잃고 7년이 흐른 뒤, 윌은 연극 ‘햄릿’을 세상에 내놓는다. 셰익스피어의 죽은 아들로 기억 속에 잠겨있던 햄넷은 이제 우리 모두가 호명하는 이름 햄릿으로 무대 위에서 다시 태어난다. 위대한 비극이 어쩌면 천재의 영감이 아니라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고통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 가정은 영화 내내 조용하면서도 묵직하게 남는다. 영화에서 주목할 인물은 아녜스다. 그녀는 예지력을 지녔음에도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데 비탄에 빠진다. 슬픔은 점차 자기 붕괴로 이어진다. 울부짖는 순간보다, 울음이 멈춘 뒤의 공백이 더 깊게 남는다. 윌을 향한 감정 역시 단순하지 않다. 아들이 죽던 날 그는 런던에 있었고, 그 사실 하나가 두 사람 사이를 뒤틀어 놓는다. 사랑과 원망이 같은 자리에 머무는 감정을 아녜스는 분리하지 않는다. 그 점이 이 인물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그리고 윌은 슬픔 앞에서 도망치듯 글에 몰두하는 인물이다. 아들에게 건네지 못한 마음을 글로 옮긴다. “사느냐, 죽느냐”라는 질문은 덴마크 왕자의 독백이라기보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의 목소리로 들을 때 더 절실하게 울린다. 아녜스는 남편이 감히 아들의 이름을 연극 제목으로 삼았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예술은 한 사람에게는 견디는 방식이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아직 지나가지 않은 고통인 것이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다른 슬픔의 언어로 부딪힐 때, 그 긴장을 스크린 너머로 느낄 수 있다. 영화 후반부, 글로브 극장에서 ‘햄릿’의 막이 오른다. 무대에 선 윌은 죽은 햄릿의 아버지 유령으로 등장해 차마 건네지 못했던 아들을 향해 작별 인사를 고한다. 아녜스는 그제야 남편의 의도를 알아챈다. 아들을 예술이라는 형식으로 되살려 또 다른 생을 부여하겠다는, 작가만의 이별 방식이었음을 말이다. 아녜스가 무대 위 절망에 빠진 햄릿에게 손을 뻗는다. 극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두 사람은 비로소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예술이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순간이다.
[김종기의 미술 미학 이야기] 천재의 얼굴, 숭고에서 상품으로
3월 26일, 1827년. 이날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가장 잘 알려진 베토벤의 얼굴은 요제프 칼 슈틸러가 그린 ‘베토벤 초상’이다. 이 초상은 단순한 인물화를 넘어, 낭만주의가 발명한 ‘천재 예술가’의 시각적 원형을 확립한 결정적 이미지다. 헝클어진 머리, 붉은 스카프, 손에 쥔 ‘미사 솔렘니스’(장엄 미사) 악보, 내면을 응시하는 시선. 슈틸러의 ‘베토벤’은 고독한 창조자이며, 초상은 외모의 기록을 넘어 ‘창조하는 정신’으로 형상화된다. 여기서 예술가는 장인을 넘어 시대와 불화하는 천재로 재정의된다. 낭만주의의 ‘숭고’는 이렇게 한 얼굴 속에 응축되었다. 160여 년 뒤, 이 얼굴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시 등장한다. 1987년, 앤디 워홀은 ‘베토벤’ 연작을 제작한다. 고독한 천재의 얼굴은 실크스크린으로 반복 인쇄돼 대량 복제의 표면 위에 놓인다. 슈틸러의 ‘베토벤’이 ‘내면의 깊이’를 드러낸다면, 워홀의 ‘베토벤’은 그 깊이를 없애고 ‘표면’만을 남긴다. 워홀은 낭만주의가 강조한 창조적 고통과 숭고를 형광색의 평면 속에서 차갑게 평준화한다. 칸트 이후 낭만주의가 말한 숭고는 인간이 자연의 압도적인 위력 앞에서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연을 초월하는 정신의 위엄을 자각하는 데 있었다. 슈틸러의 베토벤은 그러한 숭고를 응시와 표정, 고립된 분위기로 구현했다. 반면 워홀은 숭고를 해체한다. 반복과 색채 변형은 원본의 아우라를 약화시키고, 천재의 얼굴을 이미지의 네트워크 속으로 분산시킨다. 여기서 우리는 발터 벤야민이 말한 〈기계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을 떠올릴 수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기술 복제는 원본 예술 작품이 지닌 ‘지금-여기’의 아우라를 약화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예술을 특정한 장소와 권위로부터 해방시켜 더 많은 대중이 쉬이 접근할 수 있게 만든다. 이를 통해 대중들의 감식력과 비판력이 성장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워홀의 실크스크린 복제 이미지는 벤야민의 논지와 접점을 가진다. 워홀의 실크스크린은 원본의 권위를 의도적으로 무화하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이미지를 더 널리 각인시킨다. 낭만주의는 예술가를 초월적 존재로 신화화했다. 반면, 워홀은 그 신화를 복제하고 반복함으로써 그 아우라를 훼손하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천재의 얼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로써 워홀은 자본주의를 비판하기보다 그 작동 방식을 극도로 투명하게 드러낸다. 반복은 그저 미학적 전략인 것이 아니라, 욕망이 끊임없이 복제되는 체제의 은유다. 결국 워홀은 천재를 신화화한 낭만주의의 이상을 무너뜨리면서도, 자본주의가 그 신화를 또 다른 방식으로 활용하고 증식시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숭고를 기억하는가, 아니면 이미지를 소비하는가? 미술평론가·철학박사
[다른 시선으로] 운신의 폭은 좁지 않다
젠더·섹슈얼리티와 관련해 무언가 진보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할 때 꼭 따라붙는 말이 있다. 그렇게 시시콜콜히 뭔가를 제약해서 뭘 어쩌자는 거냐는 볼멘소리다. 물론 살인하면 안되고 성폭력 하면 안되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제약이지만, 기본적으로 자기 운신의 폭을 제약당하는 일을 즐거워할 사람이 드문 것은 맞다. 일단 사람은 자기가 물려받은 문화적 전형에 전부 다 도전하고 살 수 없다. 그것은 여성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여성성의 전형이 어딘가 잘못 성애화돼 있는 것은 맞지만, 여성 당사자가 그 전형을 완전히 초탈하고 살기란 힘들다. 따라서 그 전형이 조금이라도 묻었다는 이유로 연애와 섹스를 완전히 거부하는 4B 운동이 의미있는 만큼, 그 전형을 어떻게든 활용하며 사는 여성 팝스타나 걸그룹을 그 전형에 부역했다고 몰아붙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런 문화적 전형과 젠더 구조를 개인의 탓이라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사회이론에서 구조의 강제와 개인의 창발이라는 오래된 이항대립을 몰고 온다.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사회문화 안에 불평등한 젠더 구조가 있는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럼 그 구조를 어찌 지적하고, 나아가 그것을 혁파하고 해체하기 위해 무얼 해야 하는가에서 각자의 견해가 갈린다. 거기서 말조심을 좀 하고 살자는 얘기는 그 수많은 갈래 중 극히 일부의 방침일 뿐이다. 젠더를 포함한 사회 구조는 개개인에게 습관과 무의식의 형태로 스며든다. 그렇기에 분명하게 죄를 물어야 할 명백한 가해의 경우가 아니라면, 남 인생을 두고 지금 너한테 구조 묻었다는 지적이 즐겁고 통쾌한 정동이어서는 안된다. 그 즐겁고 통쾌한 지적 가운데 나 또한 그 구조에 연루돼있다는 사실이 지워지기 쉽기 때문이다. 사회 구조에 따른 개인의 지분을 말할 때 죄와 책임을 서로 분리하는 까닭이 이것이다. 남의 죄를 묻는 일은 신나지만, 책임은 애초에 그것을 나 아닌 남에게만 묻기란 불가능하다. 새롭고 다르게 살려는 마음은 예쁘고 힘이 드는 일이다. 그렇기에 일견 새롭지도 다르지도 않게 살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까지 미워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그도 그 나름의 긴장 가운데 그 자리를 버티는 것이다. 그것은 싸우지 않거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다는 결심과는 다르다. 구조에 맞서는 개인의 전략에는 수천 수만 갈래가 있고, 새롭고 다르게 살려는 마음이 그중 어느 한 가지 색깔일 수는 없다. 구조의 불의를 인정하는 것과 개인이 예정된 행동을 따라야만 한다는 강박 사이에는 막대한 거리가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도전하고 살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 운신의 폭은 그렇게 좁지 않다.
[기고]부산의 문제는 역시 일자리였네
지난 1월 미국 애리조나를 방문했다. LG에너지솔루션 공장 건설 현장을 보고, 애리조나주립대학(ASU)에서 반도체·배터리 분야 교육 현장도 살펴보았다. 그곳을 둘러보며 내내 떠오른 도시는 뜻밖에도 부산이었다. 애리조나는 따뜻한 기후와 넓은 정주 공간, 빠르게 확장되는 도시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다. 은퇴 이후 머물기 좋은 환경이라는 점에서 부산과 닮은 점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현장에서 본 애리조나는 부산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곳에는 사람이 모여드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의 중심에는 일자리가 있었다. LG에너지솔루션 공장 건설 현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메시지였다. 공장 하나가 들어서는 것이 아니었다. 장비, 물류, 유지보수, 품질관리, 협력업체, 교육훈련 체계까지 함께 형성되며 산업 생태계와 정주 기반이 동시에 만들어지고 있었다. 결국 사람은 미래가 보이는 곳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미래는 대개 일자리의 형태로 가장 먼저 나타난다. ASU 방문에서는 더욱 인상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 관계자는 “우리는 엔지니어를 양성할 수는 있지만, 테크니션 교육은 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전문대학과 협력 방안을 모색해보자”고 말했다. 짧은 말이었지만 의미는 컸다. 첨단산업은 연구개발 인력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반도체 공정을 운용하고, 배터리 생산설비를 다루며, 장비를 유지보수하고,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숙련된 테크니션이 있어야 산업이 움직인다. 우리나라 전문대학에는 이미 5년 전부터 전문기술석사과정이 운영되고 있다. 이번 회의를 통해 나는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제 우리가 길러야 할 인재는 단순한 실무자가 아니다. 첨단산업 현장을 이해하고 설비를 운용하며 공정을 개선할 수 있는 고숙련 인재, 곧 ‘슈퍼 테크니션’이다. ASU의 제안은 한국 전문대학 직업교육의 가치가 국제적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순간 부산을 다시 떠올렸다. 부산은 흔히 자조적으로 “노인과 바다의 도시”라고 불린다. 바다는 아름답고, 기후는 온화하며, 정주 여건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청년의 눈으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기술을 익히고 미래를 설계하며 성장할 수 있는 도시인가를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부산의 인구 문제를 말할 때 우리는 낮은 출산율, 고령화, 수도권 집중을 이야기한다. 모두 맞는 진단이다. 그러나 조금 더 근본으로 들어가면 부산의 문제는 결국 일자리였다. 정확히는 청년이 남고, 외부 인재가 들어오고, 기업이 미래를 걸 수 있을 만큼 지속가능한 일자리의 부족이었다. 사람은 바다가 싫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설계할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떠나는 것이다. 부산은 전력도 있고 물도 있다. 항만과 물류의 강점도 갖고 있다. 그러나 기업은 전기와 물만 보고 오지 않는다. 숙련된 기술인력이 있고, 협력업체가 연결돼 있으며, 대학이 산업과 함께 움직이는 구조가 있어야 한다. 산업 입지의 경쟁력은 결국 사람과 교육의 수준에서 완성된다. 이제 직업교육은 단순히 취업을 돕는 교육이 아니다. 지역의 산업을 만들고 지탱하는 핵심 인프라다. 부산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그 일자리를 뒷받침할 기술인재를 길러내는 일이다. 지역 기업과 대학이 함께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학생이 학습 단계에서부터 산업현장을 경험하며, 졸업과 동시에 지역의 좋은 일자리로 이어지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애리조나에서 내가 본 것은 사막 위의 공장만이 아니었다. 나는 그곳에서 산업이 도시를 바꾸고, 교육이 산업을 지탱하며, 일자리가 결국 인구를 움직인다는 현실을 보았다. 부산의 문제는 결국 일자리였다. 그리고 그 해법은 기술인재 양성과 직업교육에 있다. 부산이 더 이상 “노인과 바다의 도시”라는 자조에 머물지 않고, “기술과 청년이 모이는 도시”로 나아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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