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LH 쪼개기' 논란 경남 이전 효과 희석 의도 우려스럽다
정부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이원화를 본격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본사 소재지인 경남 진주시 지역사회가 강력 반발하고 있다. 특히 지방선거와 맞물리면서 최대 쟁점으로 부각한 상태다. 이원화는 LH 조직 구조를 개편해 두 개로 쪼개는 것이다. 이번 구조 개혁은 160조 원에 달하는 LH 부채 문제를 해결한다는 취지로 진행 중이다. 문제는 쪼개진 조직 중 하나가 자회사로 편입될 경우 진주를 떠날 우려가 높아진다는 것이다. 지역 사회는 그동안 온갖 그럴듯한 명분을 대면서 결국 수도권으로 다시 회귀한 지방 이전 공기업 등의 사례를 재현하려는 시도가 아니냐며 결사 반대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부산일보〉에 따르면 LH는 6개월째 공석인 사장 재공모를 통해 빠르면 상반기 내에 선임 절차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사장 취임을 기점으로 이원화 문제가 본격화할 전망이다. 이번 이원화는 지난해 말 이재명 대통령이 LH 부채 비율을 문제 삼으면서 촉발됐다. 국토교통부와 LH개혁위원회는 현재 LH를 토지주택개발공사와 비축공사로 이원화하는 개편안을 검토 중이다. 비축공사가 부채를 담당하고 토지주택개발공사에 LH 주요 사업을 맡기는 구조로 예상된다. 국토부는 2021년 LH 임직원의 신도시 투기가 사회문제화됐을 때도 재발 방지책의 일환으로 쪼개기를 추진했다가 시민 반발 때문에 원점 재검토를 선언했다. 2021년에 이어 LH 쪼개기가 또 시도되는 것은 지역 사회에 날벼락이나 다름없다. 2021년 당시 진주의 거의 모든 단체들이 1년 3개월 동안 정부안을 반대하는 국회 앞 시위 등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당시 지역 사회는 진주혁신도시와 지역 경제 핵심 축인 LH를 쪼갤 경우 본사 기능 약화에 따른 진주 혁신도시 위상 추락, 지역 경제 침체, 지역 인재 채용 감소, 상권 위축 등이 불가피해진다고 밝혔다. 그 뒤 4년여 시간이 지나 다시 불거진 LH 이원화 전망에 대한 지역의 우려는 당시와 동일하다. 더욱이 2021년 당시 LH 문제로 지역이 엄청난 홍역을 치른 것을 알면서도 사태가 재연될 조짐을 보이자 불쾌감마저 호소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수도권 일극화 때문에 엄청난 기회비용을 치르고 있다. 이 대통령이 지역 균형발전을 주요 국정정책으로 꼽고 2차 공공기관 이전 등을 추진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하지만 지역과 숙의를 거치지 않은 LH 쪼개기가 다시 추진될 경우 청와대와 정부 진심에 대한 의구심은 커질 수밖에 없다. 국토부와 LH가 구조 개편을 추진할 경우엔 하루빨리 로드맵부터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여기엔 본사 기능을 유지할 충분한 대안과 자회사 소재지를 진주로 하겠다는 약속 등을 담아야 한다. 정부와 LH가 지역 균형발전 원칙과 LH 이전 효과를 훼손치 말아 달라는 진주와 경남 지역 사회의 우려와 분노를 감안한 현명한 답을 내놓길 촉구한다.
[사설] 부산 도심 재생의 핵심 축 '동천 살리기'에 지혜 모아야
부산 국제금융단지를 휘돌아 북항으로 이어지는 동천. 부산에서 세 번째로 긴 이 하천은 오랫동안 ‘죽은 하천’이라는 오명을 쓴 채 도심 한가운데 흉물로 방치돼 있었다. 최근 강바닥에 매설된 해수관로의 누수를 정비하기 위해 물을 빼내자 썩은 흙이 드러났고, 인근 상인과 주민들은 극심한 악취에 시달려야 했다. 이 해수관로는 바닷물을 끌어올린 뒤 다시 흘려보내 수질을 개선하려 설치된 것이다. 이 해수 도수에만 2000억 원 이상이 투입됐지만 근본 해결책이 되지 못했고, 성지곡 담수 유입 역시 기대만큼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생태 복원과 도시 재생은커녕 수질조차 개선하지 못한 동천은 부산 도시 정책이 보여 준 단기 처방식 행정의 한계를 드러낸 사례라 할 만하다. 시민단체 ‘숨쉬는동천’이 11일 동천 생태 복원과 원도심 재생을 연계한 ‘부산 대개조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은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복개를 허물고 부전천·당감천·가야천 등 지천을 연결하는 ‘부산형 블루 네트워크’를 구축하자고 부산시장 후보자들에게 제안했다. 부산 원도심을 관통하며 여러 물줄기와 이어진 동천을 생태·문화·관광 거점으로 키워 도시 경쟁력의 중심축으로 삼자는 것이다. 지역의 미래를 책임지겠다며 6·3 지방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각 정당의 후보들이라면 동천 부활이 수질 개선을 넘어 도심 재생과 활력 회복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를 리 없다. 이른바 ‘동천 난제’를 둘러싸고 부산시장 후보들도 해법 제시에 나서고 있다.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는 성지곡수원지부터 북항까지 10㎞ 생태 축을 조성하고, 여기에 대심도 터널과 BuTX(부산형 급행철도) 공사 과정에서 확보한 지하 담수를 활용해 물길을 복원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개혁신당 정이한 후보는 생활 오수 유입과 악취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하고, 보행 환경과 녹지 공간을 정비해 서면·문현·북항을 연결하는 도시재생 축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후보는 동천 문제를 부산 도시 경쟁력을 좌우할 핵심 과제로 규정하고, 시민과 전문가 의견을 반영한 항구적인 수질 개선 대책을 약속했다. 동천을 둘러싼 장밋빛 계획은 수없이 나왔지만 번번이 단기적인 하천 정비 사업에 그쳤다. 수계와 비점 오염원 경로가 다양한 데다 수질 개선과 도시재생 문제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어 단일 해법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부산처럼 산과 바다, 원도심과 신도심이 단절된 도시일수록 물길을 활용한 공간 재편 전략이 중요하다. 그 중심에 동천이 있다. 6·3 지방선거는 지역의 미래를 놓고 공론장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후보자들은 동천 공약이 결국 부산 도시 경쟁력을 높이는 전략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 구체적이고 지속 가능한 청사진이 제시될 때 유권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설] 부울경 해양수도권 완성 첫걸음은 해양 인재 공동 양성
해양강국 대한민국의 주축이 될 해양수도 부산을 완성하는 마지막 방점은 사람일 수밖에 없다. 미래에는 인공지능이 대세를 이루는 사회가 되리라는 전망이 판을 치고 있지만 정책을 수행하고 산업을 이끌어가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11일 해양수산부와 교육부가 해양 인재 양성을 위해 범부처 차원 업무 협약을 하고 나선 것은 해양수도 부산을 향한 최종 방점에 해당한다 할 것이다. 해수부가 지역 교육기관에 산업 현장성과 경쟁력을 강화할 방안을 찾고 교육부가 교육기관의 인재 양성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동남권 주력 산업인 해양·조선 산업을 이끌 사람을 양성하겠다는 뜻이어서다. 두 정부부처는 이날 부산대학교에서 ‘해양수도권 인재 양성을 위한 업무 협약식’을 공동개최했다. 협약식에는 두 부처 장관을 비롯해 부산대, 부경대, 해양대 등 지역 대학 총장들과 한국해양수산개발원, 해양진흥공사 등 해양 공공기관 관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행사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은 것은 교육부의 지역성장 인재양성체계 사업에 기반한 5극 3특 중심 대학 지원 사업이었다. 올해만 1200억 원을 지원하는 이 사업을 기반으로 지역 대학들이 시설과 장비, 자원 등을 공유함으로써 조선·해양 관련 인재를 양성토록 한다는 게 주내용이다. 기존 라이즈 산업의 전환을 선언한 현 정부의 전향적 지원책으로 꼽힌다. 교육부가 교육기관에 대한 예산 지원안을 내걸었다면 해수부는 지역 대학들이 조선·해양 연관 산업 분야에 필요한 전문 인재를 양성할 수 있도록 산학협력 등 현장성 강화 정책을 내걸었다. 교육부의 교육기관 지원 예산과 연계해 해양 금융, 해사 법률 전문 인재까지 양성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게 해수부의 방안이다. 두 부처는 앞으로 투자 계획과 지역 전략산업 육성책 등을 공유하며 곧장 현장 투입 가능한 인재 양성에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이는 해양수도 부산 구축을 위해 동남권으로 해양 관련 행정기관과 금융기관, 사법기관을 비롯해 HMM 같은 대기업까지 집적화하겠다는 정부 전략의 본격화 신호탄으로 읽힌다. 범부처 차원의 해양 인재 양성 방안 마련은 교육 분야 수도권 집중 완화를 비롯한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몸부림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지역 대학이 지역에 특성화한 경쟁력을 토대로 양성한 인재들이 해당 지역 산업을 선도하고 지역에 정주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선순환 구조는 있을 수 없다. 이는 단지 해양수도 부산 구축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해양과 조선 등 국가 미래 핵심 전략산업이 밀집한 부울경 전체를 해양수도권화해 파이를 더욱 키우는 첫걸음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지난해 해수부 부산 이전부터 촉발된 정부의 집적화 전략이 인재 양성으로 실질적인 방점을 찍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바이다.
'딸깍'이라는 환상
“주말과 퇴근 후에 따로 공부한 노하우라서요. 회사에 공유는 힘들 것 같습니다.”최근 직장인 커뮤니티 ‘리멤버’에 올라온 사연이 화제를 모았다. 마케팅 회사의 팀장이 인공지능(AI)을 잘 다루는 막내 팀원에게 프롬프트(AI에게 입력하는 지시문) 공유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는 내용이다. 글쓴이는 “자기도 남들이 만들어 놓은 문서 양식과 자동화 기능을 쓰지 않나”라고 토로했다. 500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결과물은 회사 소유라도 과정의 노하우는 개인의 것”이라는 옹호와 “그럼 나도 후배에게 업무 노하우 가르치지 말아야 하나”라는 반박이 맞섰다.비슷한 요청을 종종 받는 입장에서, 신입의 고집은 옳지 않다고 본다. 사람마다 기술 우위는 결국 좁혀지리라 보기 때문이다. 한때는 ‘프롬프트를 잘 쓰는 것’이 AI 활용 능력의 척도였지만, 이제는 꽤나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새 기술이 나왔을 때 발 빠른 사람이 잠시 앞서갈 수 있다. 하지만 사용이 보편화될수록 ‘나만의 노하우’라고 우길 여지는 줄어든다. 그때 가서 과거의 인색함이 동료들 기억에 좋게 남을 리 없다. 공유하다 보면 자신도 더 사용법을 익히게 되고, 타인의 질문에서 아이디어를 길어 올리기도 한다.다만 ‘팀장’ 쪽에도 짚어둘 대목이 있다. AI는 같은 프롬프트를 써도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계산기는 결정론적이다. 같은 식에 같은 숫자를 넣으면 누가 눌러도 결과가 동일하다. AI는 다르다. 무엇을, 어떤 순서로, 어떤 맥락에서 묻느냐에 따라 답이 갈린다. 확률적으로 그럴듯한 말을 이어 붙이는 원리 탓에 가짜를 진짜처럼 내놓는 ‘환각’ 증상도 남아 있다. 사용법을 배운다고 단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어제의 방법이 오늘은 통하지 않는 일도 흔하다.‘딸깍’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마우스를 가볍게 누르기만 하면 AI가 결과물을 뚝딱 내놓는다는 어감이다. 그 말에는 ‘쉽게 한다’ ‘대충 한다’는 그늘이 따라붙는다. 이런 인식은 AI 사용자를 위축시키고 예비 입문자를 망설이게 한다. ‘딸깍’은 환상이다. 그럴 듯한 저품질 결과물로 만족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결과물의 품질을 가르는 것은 결국 사용자의 손때 묻은 노하우와 ‘암묵지’다. 이미 많은 직장인이 각자의 분야에서 갖추고 있을 소양이다. 남은 건 직접 써보는 일 뿐이다. 자전거를 처음 탈 때 설명서부터 펼치는 사람은 없지 않나.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김상훈의 포커스온] 증시 불장, 환호와 우려 사이
코스피가 최근 기록적인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증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뜨겁다. 코스피는 2월 25일 역대 처음 6000선을 뚫은 지 2개월 만인 이달 6일 사상 첫 7000선 고지를 밟았다. 12일엔 장중 7999.67까지 올랐지만, 외국인의 순매도로 하락하며 8000선 돌파는 좌절됐다. 하지만 인공지능(AI)으로 촉발된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몇 년간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리면서 글로벌IB와 증권사들은 코스피 지수가 1만 포인트까지 갈 수 있다는 예측도 내놓는다. 글로벌 빅테크를 중심으로 반도체 수요가 폭발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이익 전망치가 갈수록 상향 조정되고 있어서다. 코스피가 기록적인 상승세를 이어온 것은 AI 밸류체인을 중심으로 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천문학적 영업이익, 퇴직연금 계좌를 통한 상장지수펀드(ETF) 투자 활성화, 중동 전쟁 종전 기대감이 커진 4월부터 순매수로 돌아선 외국인 투자, 정부의 자본시장 선진화 정책에 대한 기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동안 시장 변동성에 취약했던 개인투자자들의 패턴도 달라졌다. 코스피 지수가 오르는 날엔 주식을 순매도하며 차익을 실현했고, 지수가 큰 폭으로 조정받을 땐 저가 매수에 나서면서 증시 방어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세대 전반으로 투자 열풍이 번지는 것도 큰 흐름이다. 노년층은 직접 투자를 위해 증권사를 앞다퉈 방문해 계좌를 개설하고, 부모가 자녀 명의로 계좌를 만들어주면서 미성년자들의 투자 증가세도 가파르다고 한다. 주식시장이 자산 축적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떠오른 것이다. 주가지수 상승은 기업 실적과 성장 전망이 개선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가운 신호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증시 활황의 환호 뒤에 가려진 우려의 그림자도 짙다. 무엇보다 코스피 상승의 온기가 모든 투자자에게 고르게 퍼지지 않고 있다. 주가 활황세가 반도체 ‘투 톱’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쏠려 있다는 것은 부담이다. 두 기업이 증시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미 40%를 넘어섰다. 1분기 경제성장률(1.7%)에서 반도체 제조업의 기여도는 무려 55%에 달한다. 역대 최고치를 경신한 1분기 수출액(2199억 달러) 역시 전년 대비 139%나 폭증한 반도체 독주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한국 경제의 반도체 의존증이 깊어지는 것이다. 지수는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지만, 주도주를 보유하지 않은 투자자는 이를 체감하기 어렵다. 중소형주와 코스닥 전반이 약세를 보이고, 오른 종목보다 내린 종목이 더 많으면서 증시의 ‘K자형 양극화’도 심화하는 상황이다. 개인투자자들의 위험천만한 ‘빚투’ 행렬은 걱정이다. 증시 호황에 나만 뒤처지는 것처럼 느끼는 ‘포모’(FOMO) 심리가 확산하면서 신용거래융자 잔액은 사상 처음으로 36조 원을 넘어섰다. 신용거래융자는 투자자가 주식 투자를 위해 증권사로부터 돈을 빌린 후 아직 갚지 않은 금액을 말한다. 이는 주가가 오를 것이라는 기대감에 증권사 대출을 받아 주식을 산 투자자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다. 경제 기반이 취약한 2030 젊은 세대와 자산을 보수적으로 운용해야 할 5060 시니어 세대의 빚투 규모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심각하다. 빚까지 내 주가가 급등한 대형주에 뒤늦게 뛰어드는 행태는 시장 조정기가 닥치면 막대한 가계 부채 부실과 사회적 비용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반도체 호황이 다른 산업 전반에 미치는 ‘낙수효과’는 아직 미미하다. 지난 3일 국가데이터처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1분기 반도체 생산은 전 분기보다 14.1% 증가했지만, 다른 제조업 생산은 0.2% 늘어나는 데 그쳤다. 수도권은 반도체 산업 호황에 따른 소득 증가로 소비가 확대되지만, 부산을 비롯한 지역의 중소기업, 자영업자, 소상공인에겐 다른 나라 얘기나 다름없다. 실물 경제와 금융시장 간 괴리가 심각한 것이다. 자산시장만 호황인 채 실물 경제는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는 성장동력을 잠식할 수 있다. 금융시장이 지나치게 경제를 과점하는 현상은 장기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 반도체가 아직 한국 경제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불확실성도 크다. 중국을 비롯한 경쟁국의 추격, 대미 투자·통상 환경 변화, 중동 전쟁 장기화에 따른 공급망 불안은 위험 요인이다. 기술 초격차 유지를 위해서는 더 과감한 투자와 기술 개발이 필요하다. 특히, 성과급을 둘러싼 삼성전자의 노사 갈등이 파업과 반도체 생산 차질로 이어져선 안 된다. 정부는 반도체 호황에만 취해 있을 것이 아니라,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사라질 때를 대비해야 한다. 반도체 일변도에서 벗어나 미래 성장 엔진 발굴과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금의 환호가 미래의 눈물이 되지 않도록 냉철한 정책 실행이 필요한 때다.
[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미국 의존도를 줄이자는 목소리
최근 국제정세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불확실성’이다. 특히 아이러니한 점은 냉전 이후 국제 질서를 설계하고 유지해 온 미국이 이제는 국제사회의 가장 큰 불확실성 변수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국제사회의 핵심 화두는 중국 공급망 의존 문제였다. 코로나19 팬데믹과 미중 전략경쟁 심화 과정에서 미국, 유럽연합(EU), 일본은 모두 중국 중심 공급망 구조의 위험성을 체감하였다. 희토류, 배터리, 반도체, 핵심 광물 등 전략 산업에서 중국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다는 우려가 확산되었고, 이에 따라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이 본격화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국제사회의 고민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제는 중국 뿐만 아니라 미국 의존 리스크 자체가 새로운 글로벌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동맹국들에 대해서조차 예측 불가능한 통상·안보 압박을 반복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EU산 자동차 관세 문제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이후 미국의 중동 파병 협조에 비협조적인 유럽산 자동차에 대한 관세를 기존 15% 수준에서 25%까지 인상하겠다고 발표하며 유럽 자동차 산업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EU 자동차 업계는 큰 충격에 빠졌고, 유럽 내부에서는 “동맹국에게도 언제든 경제적 압박이 가능하다”는 위기의식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독일의 중동 및 대미 안보 협력 태도를 문제 삼으며 독일 주둔 미군 5000명 감축 방침까지 검토·발표하면서 유럽 안보 지형에도 충격을 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크게 약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관세 인상을 강하게 발표했다가도 다시 시행 시점을 7월 4일까지 연기하는 등 매우 변덕스러운 모습을 반복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 입장에서는 단순히 높은 관세 자체보다도 “내일 어떤 결정이 나올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이 훨씬 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결국 글로벌 기업들은 특정 국가 의존보다 ‘정책 리스크 분산’ 자체를 새로운 생존 전략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최근 중동 상황 역시 미국 중심 안보 질서의 한계를 보여준다. 본래 안전 보장을 위해 운영되던 중동지역 내 미군 기지들이 오히려 공격 목표물이 되면서 미군기지를 유치한 국가의 무고한 민간인 희생이 확대되는 역설적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과거에는 미군 기지가 안정의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지정학적 충돌 시 가장 먼저 공격받는 전략 시설로 인식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주요 국가들은 비교적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U는 감정적 대응보다는 전략적 자율성(strategic autonomy) 강화에 집중하고 있다. 미국과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에너지·방산·첨단산업 분야에서 독자적 역량 확보를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는 장기 제재 체제 속에서도 중국·인도·중동과의 협력을 확대하며 새로운 경제 네트워크를 구축 중이다. 중국은 미국과의 정면 충돌을 피하면서도 공급망·희토류·배터리·AI 경쟁력을 장기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일본 역시 방위력 증강과 함께 경제안보 차원의 공급망 다변화를 조용히 추진하고 있다. 한국 역시 복합적인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한미동맹은 여전히 한국 안보의 핵심축이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은 최대 교역국이며, 중동은 핵심 에너지 공급처이다. 미국의 관세 정책 변화, 미중 갈등, 중동 리스크,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동시에 한국 경제와 산업에 영향을 주고 있다. 결국 특정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 자체가 위험이 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특히 한국과 같은 무역 의존도가 높은 국가는 이러한 변화에 더욱 민감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조선, 철강 등 한국의 핵심 산업은 미국·중국·EU 시장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미국의 보호무역 강화와 관세 압박은 단순히 수출 감소 문제를 넘어 글로벌 투자 전략과 공급망 구조 자체를 흔들 수 있다. 심지어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주요 정책은 미국 대통령의 변덕스럽고 즉흥적인 정책 발표에 따라 갈팡질팡하고 있다. 과거 국제사회는 중국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디리스킹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제는 중국 뿐 아니라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 역시 줄여야 한다는 새로운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다. 국제질서가 다극화할수록 국가들은 어느 한 축에 일방적으로 의존하기보다 공급망, 시장, 외교, 안보를 다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불확실성의 시대일수록 중요한 것은 냉정함이다. 국제정치는 감정이 아니라 국익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지금 세계는 미국 중심 질서의 균열 속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가는 거대한 전환기 한가운데 서 있다.
[데스크 칼럼] 6·3 이후가 더 걱정인 이 대통령
6·3 지방선거는 전국 동시 선거라는 점에서 대한민국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나 영향을 미친다. 개별 후보들에겐 자신의 ‘당락’이 생존과 직결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입장에서도 ‘15 대 1’이냐 ‘13대 3’이냐에 따라 엄청난 후폭풍이 있을 것이다.(여기서 3이 어느 지역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경북을 상수로 놓고 서울·부산·대구 등을 변수로 보면 될 듯하다) 문제는 대한민국 국정 전체를 큰 그림으로 놓고 보는 이재명 대통령이다. 지방선거 결과에 따라 잠시 좋고 나쁠 순 있지만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당이 바라는 최선의 지방선거 결과가 나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렇게 공 들였던 영남, 그것도 TK(대구·경북)까지 차지한다면 일단 이 대통령의 취임 1년 간 국정 운영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직후 벌어질 더불어민주당의 8월 전당대회는 선거승리의 공과를 어떻게 나눠먹는가에 대한 치열한 권력투쟁의 장이 될 것이다. 과거 여당의 역사를 되돌아봤을 때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으로서도 통제가 힘든 각축장이 펼쳐진다. ‘명-청(이재명-정청래) 대전’이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반 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스개소리로 넘어가려는 필자의 귀를 붙들어둔 것은 한 여당 의원과의 사담이었다. ‘친명’으로 분류되는 수도권 의원이었다. 그는 친문(친문재인) 출신 정청래계 모 의원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최소 3번은 우리를 죽이려 했다’고 분을 감추지 않았다. 2022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불거진 대장동 문제, 이 대통령의 대표 시절 국회에서의 체포동의안 가결, ‘비명횡사-친명횡재’ 공천 때의 앙금 등이 그것이었다. 최근에도 양측의 갈등은 표면화됐다. ‘조국혁신당 합당 밀약설’과 ‘공소 취소 거래설’은 명청 대전의 큰 흐름에서 발발한 국지전이었다. 정청래 대표는 8월 전대에서 다시 대표 자리를 노릴 것이다.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서울만 패하지 않는다면 웬만해선 정 대표의 공을 깎아내리기는 힘들 것이다. 하정우 전 청와대 AI미래기획수석의 부산 북갑 보궐선거 차출은 의미심장한 부분이다. 이 대통령은 AI 수석의 공백으로 국가 미래전략의 큰 틀을 짜는 데 차질이 불가피하다. 하 전 수석을 대체할 만한 후임 인선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하 전 수석이 당선되면 여당을 위해 인재를 내줬다는 이 대통령의 희생보다는, 정 대표가 하 수석을 ‘삼고초려’한 과정이 더 크게 부각될 것이라는 말들이 벌써부터 나온다. 정 대표가 전대에서 다시 대표가 되면 양측은 지금보다 강하게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이 대통령이 갖고 있던 국정의 구심력을 여당 대표의 강력한 원심력이 나눠 갖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다. 전대의 영향력은 다음 선거인 2028년 총선으로 이어진다. 친명이든 친청이든 자신의 공천 문제를 생각하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이다. 민주당이 전광석화처럼 밀어붙이던 ‘조작기소 특검’을 이 대통령이 일단 멈춰 세웠다. 선거에 역풍이 만만치 않다고 본 것이다. 여당이 추진했지만 ‘공소 취소’가 가능하다는 조항 때문에 여론의 비판은 이 대통령이 뒤집어쓸 가능성이 높은 이슈였다. 그렇다면 지방선거가 끝나면 여당은 특검법안을 재추진할까. 특검법 처리는 중도층의 민심 이반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정 대표가 굳이 무리수를 두면서 총대를 멜지 두고봐야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당내에서는 특검의 ‘공소 취소’ 권한 삭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부 의원들은 “국정 과제에 집중해 그 성과로 국민들의 평가를 받으면 된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면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날 수 있다”며 괜한 정치적 부담을 뒤집어쓸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펼친다. 하지만 친명 쪽에서는 ‘순진한 발상’이라고 깎아내린다. 여당이 정권을 재창출하더라도 수많은 전직 대통령들이 자신의 후계자로부터 냉정한 비판(심할 경우엔 사법처리)을 받은 전례가 있다. 야당으로 정권교체라도 되면 말 할 것도 없다. 정 대표는 조작 기소 특검이 과연 자신의 전대 득표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계산기를 두드릴 것이다. 최고권력자인 이 대통령이 지방선거 이후에 있을 여당의 전대와 조작기소 특검을 어떻게 다룰지가 벌써부터 흥미로워진다. 박석호 정치부 선임기자 psh21@busan.com
[노트북 단상] 생명지킴이도 소모품인 나라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합니까?” 역설적이다. 삶의 끈을 놓으려는 이에게 버팀목이 될 정신건강복지센터 위기개입팀 요원에게서 이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현장을 외면한 우리나라 자살예방체계의 실상이 이 울분 섞인 한마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들의 노동은 가혹하다. 밤샘은 일상이고, 극심한 감정 노동이 뒤따른다. 자살 소동 현장의 날 선 눈빛, 고함을 감내하며 응급 입원을 결정하고, 수화기 너머 출구 없는 절박한 호소와 때로 들릴 듯 말 듯 무기력한 목소리에 온 신경의 가닥을 잇는다. 정작 자신들의 마음은 다치고 지쳐 있지만, 이들을 보듬을 치유 시스템은 효과적이지 않다. 위기개입 요원 4명 중 1명이 반년 만에 짐을 싸는 악순환이 현장의 붕괴와 한계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치권의 관심에서도 이들은 소외돼 있다. 선거 국면에서 득표에 도움되지 않는 ‘철저한 소수’여서다. 울산 10여 명, 부산 10여 명, 경남 약 20명 등 전국 광역센터를 다 합쳐도 위기개입 요원은 200명 안팎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들의 위기를 모른 척하는 것은 한 해 1만 4000명에 달하는 자살자를 외면하는 것과 같다. 연 평균 2000여 명인 산재 사망자의 7배에 달한다. 국가적 재난 수준의 수치임에도 최전선의 보초병들은 소모품처럼 쓰이다 잊힌다. 현장의 폐쇄성은 침묵을 강요한다. 관련 기사에 ‘좋아요’ 하나 누르는 것조차 겁난다는 요원의 고백은 그냥 흘려듣기 힘들다. 얼마 전 계약해지된 지방의 한 요원은 취재 요청에 응하지 못해 되레 미안하다고 했다. 기관의 눈 밖에 나 업계에서 퇴출당할까 봐 스스로 입을 닫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이유는 하나, 막다른 길에 내몰린 생명을 부여잡는다는 소명감 때문이다. 최근 대통령은 높은 자살률을 두고 “전 세계적 망신”이라며 각별한 대책을 주문했다. 그러나 행정은 여전히 거꾸로 가고 있다. 1년도 못 버티고 사람이 빠져나가는데 국가는 그 숫자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다. 누가 언제 왜 떠났는지 추적하는 기초 자료가 부족하니 실효성 있는 대책이 나올 수 없다. 낙제점 수준의 안전망에 ‘전문성 만점’ 등의 가짜 성적표를 매기기 바쁘다. 지방 요원들은 박봉으로 버티다 현장을 떠나고, 그 공백을 채울 전문 인력을 키우는 기관조차 수도권에 쏠려 있다. 몇 번 출동했는지, 몇 통의 전화를 받았는지 세는 동안, 정작 몇 명을 살렸는지 묻지 않는다. 내부 인력조차 관리 못 하는 행정이 위기 개입 이후 대상자가 안정적인 치료 체계에 안착했는지 살필 리 만무하다. 관리 감독이 복잡하게 얽힌 위탁 체계 어딘가로 책임의 주체마저 희석된다. 이러한 구조 위에서 여론 무마용으로 팀을 급조하는 ‘땜질식 처방’을 반복하는 한, 비극의 고리는 끊기지 않는다. 기자로 활동하며 ‘베르테르 효과’ 등을 이유로 자살 관련 보도를 금기시했다. 그 사이 보도 윤리와 상관없는 현장의 모순마저 방관한 책임이 있음을 느낀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란 말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다. 자살률 OECD 1위라는 불명예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너진 정신응급 대응체계 위에서는 누구의 생명도 온전히 구할 수 없다. 벼랑 끝 현장을 사수하는 ‘생명 지킴이’를 지키는 것이 국가 자살 예방 정책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중앙로365] 북극 안보포럼에 다녀와서
서울 강남구 도곡동의 국가안보전략연구원(INSS)에서 열린 북극 안보포럼에 최근 다녀왔다. 국가적 과제로 떠오른 북극항로 참여 문제를 포함하여, 북극을 둘러싼 여러 지정학적 변동에 따른 주요 국가들의 북극 전략을 살펴보고 대비책을 생각하는 자리였다. “완성된 해법보다는 문제 설정과 방향성 논의를 위한 탐색” “문제의식과 질문을 공유하는 큰 틀에서의 재논의”라는 행사 취지에 공감하여 아침 일찍 수서행 고속열차에 몸을 실었다. 사실, 북극항로 문제는 어제오늘 제기된 갑작스러운 사안이 아닌데도 우리의 대응은 많이 늦었다. 북극 빙하가 녹은 지 언젠데 이제까지 가만히 있다가 지난해 6월의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느닷없이’ 선거 이슈로 불거졌고, 이런저런 기관이나 단체에서 포럼을 연다, 대책반을 꾸린다며 법석이다. 국가 안보보다는 정권 안보 차원의 관점이 우세한 것 아닌가 그런 의심도 들고, 무엇보다 차분하고 근본적이며 묵직하고 두꺼운 대응 방식이 보이지 않아 답답하던 상태였다. 부산~동해~북동항로 현실화 위해선 러시아와 불편한 관계 빨리 개선하고 국가 이익 우선 물밑 교섭 실익 챙겨야 신항 배후단지 선진화 등 준비도 부족 전체적으로 지휘·조율 관제탑 만들어 대한민국 살릴 북극항로 시대 열어야 군사 전문가들이 발제와 토론에 절반가량 참여한 이번 INSS 북극 안보포럼에서는 새로운 정보가 많았다. 냉전의 부활로 미국·러시아·중국의 지역 전략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모두 지나가는 북극 해역으로 옮겨오는 추세라든가, 나토(NATO)의 북극사령부 창설 움직임과 북극 방어전략, 러시아의 ‘2035 북극개발 및 국가안보전략’의 단계별 내용 등이 소개되었다.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시나리오별 도전 요인과 기회 요인, 사이버·우주·인공지능기술 융합 중심의 킬 체인 등 3축 체계의 보완 필요성 등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세계의 질서를 바꾸고 조절하는 패권국이나 초강대국이 아닌 바에야, 변화무쌍한 강대국의 북극 군사전략과 안보 전략 등을 면밀하게 주시는 하되, 대한민국의 북극 안보 논의는 부산에서 동해를 지나 러시아 북쪽 연안으로 올라가는 부산~북동항로 현실화에 초점이 모여야 한다고 본다. 나머지는 부차적이며 구조화, 체계화, 효율화의 대상일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첫 번째 문제 상황은 균형 외교의 상실이다. 러시아는 북동항로의 ‘대주주’다. 1996년 오타와 선언으로 8개국으로 구성된 북극이사회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인 1916년부터 백 년간 그곳을 지배해왔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이후에 러시아와 계속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대통령이 유엔총회에 가서 러시아를 비난하는 연설을 대놓고 하거나, 유럽 순방 중에 우크라이나를 비밀리에 국빈 방문하기도 하였다.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직접 공급하는 방안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수출통제 품목을 대폭 확대하고, 심지어는 유명 발레리나의 내한 공연마저 막았다. 크렘린에서는 직항로를 계속 열라는데, 현 정부도 한-러 항공 재개를 계속 주저하고 있다. 1991년 이후 30여 년간 쌓아온 ‘북방 자산’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이런 편향 외교로는 북동항로 문제가 잘 풀릴 여지가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국익 차원의 ‘물밑’ 협력 작업의 미흡이다. 한미 동맹은 동맹이고, 국가 실익은 실익이다. 우리와 다르게 일본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친미 친서방 행보 속에서도 러시아와 물밑 교섭을 벌여 자국 액화가스(LNG) 수입의 8.8%를 차지하는 ‘러시아 사할린 2 프로젝트’에서 일본 회사들의 지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세 번째는 진정성과 준비 작업의 부족이다. 부산~북동항로에 진심이라면 화물 옮겨싣기를 넘어 부산 신항의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한 항만 배후단지의 선진화, ‘글로벌허브 도시 특별법’의 통과 등에도 진심이어야 할 것이다. 그것들과 연동 없이 북극항로가 따로 별개로 추진될 수 있을까? 네 번째는 추진체계의 난맥상이다. “북극항로, 북극항로” 목소리는 높은데 이를 전체적으로 지휘하고 조율할 관제탑이 없다. 관·산·학을 크게 아우르는 유기적인 협력도 약하다. 그저 기관이나 단체마다 제각각으로 움직이며 ‘물 들어올 때 우리도 노를 젓자’라는 식이다. 관심의 범위도 항만·물류·해양 관련한 경제 산업적·기술적 영역에 국한되고 있다. 최근 부산 중구 국제화센터에서 8주 과정의 ‘북극권 인문학 특강’이 처음으로 열리긴 했지만, 북극 지역 민속 조사나 학술교류, 시민특강 등 한반도와 북극 지역과의 친밀성을 높이기 위한 문화적 ·심리적 접근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를 상대한다면서 현지 지역 전문가가 정부나 지자체의 북극 논의 기구에 들어가는 법도 드물고, ‘북극 수도’ 무르만스크와 러시아 북극권의 5대 도시 혹은 10대 도시에 대한 평소의 관리와 네트워크 유지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호르무즈 위기 발생으로 북극항로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 요즘, 우리는 과연 북극항로가 대한민국을 살리고 해양수도 부산을 살릴 미래의 성장동력이라고 합의하고 있는 것일까?
[편집국에서] 우리는 그들의 외침을 듣지 않았다
최근 방영 중인 한 드라마에 ‘감정 워치’라는 가상의 장치가 등장한다. 심박수 등 사용자의 신체 신호를 측정해 현재의 감정 상태를 기쁨·불안 등의 단어로(혹은 색깔로) 치환해 보여주는 기계다. 얼마 전 경남 진주에서 50대 화물 노동자가 2.5t 화물차를 맨몸으로 막아서다 치어 사망한 소식을 접했을 때 왜 하필 드라마 속 감정 워치 따위가 떠올랐던 걸까. 사고는 지난달 20일 진주 CU 물류센터 앞에서 열린 화물연대의 집회 과정에서 발생했다. 노동자들은 대체 수송을 위해 물류센터를 빠져나오는 화물차를 정면으로 막아섰다. 이들 중 일부는 움직이는 차량에 매달렸고, 떨어졌다. 육중한 바퀴가 한 노동자를 삼킨 후에야 비로소 차는 멈췄고, 한 노동자의 삶도 멈췄다. 일부 호사가들은 달리는 차량 앞을 가로막고 나선 그들의 무모함을 탓하기도 했다. 그 무모함 속에 어떤 심정이 숨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어떤 마음이었길래 달리는 거대한 쇳덩이 앞을 맨몸뚱이 하나로 막아섰던 걸까. 만약 감정 워치가 실재한다면, 고인의 손목에 채워져 있었다면, 당시 그의 감정은 어떤 단어로 정의되었을까. 그들의 요구 사항을 검색했다. 고유가에 따른 운송료 인상, 과도한 업무 강도 개선…. 어느 단체교섭에서든 나올 법한, 지극히 당연한 요구였다. 그들은 CU를 운영하는 BGF로지스 진주센터 내 협력 운송사 12곳과 계약해 일하는 ‘특고’(특수고용직)다. 사실상 고용돼 일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고용의 형태가 아니다. 겉으론 사업자 간의 계약 형태를 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대신 사회는 그들을 ‘사장님’이라 부른다. 기름값과 차량 수리비를 제 주머니에서 꺼내니 겉으로는 번듯한 자영업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는 교묘한 언어적 위장이다. 기름값도, 차량 수리비도 본인이 부담하지만 배차는 원청이 결정하고 운임도 원청이 정한다. 고용 계약서가 없으니 해고가 아니라 ‘계약 종료’라는 매정한 단어로 잘려 나간다. 기업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퇴직금이 사라지고, 4대 보험이 사라지고, 단체교섭 의무가 사라진다. 노동자는 남되 사용자는 증발한다. 법조차 그들을 보호하는 데 무기력하다. 현행 근로기준법은 노동자와 자영업자 사이에 엄격한 칼금을 긋는다. 그들은 그 칼금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 경제적으로는 종속되지만 형식상으로는 독립적이다. 법원은 개별 사건마다 실질적 종속성을 따지지만, 그 판단이 나오기까지의 소송 비용과 시간은 노동자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한다.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워야 하는 약자에게 그 싸움의 비용을 온전히 지우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행 법 체계가 특고에게 부과하는 가장 가혹한 조건이다. 정부는 어떠한가. 사태 초기 고용노동부는 “특고는 노란봉투법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들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노란봉투법 시행 한 달 만의 정부 입장이다. 특고와의 교섭을 회피해 온 원청의 무책임한 행태에 면죄부를 준 셈이다. 이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장관이 나와 재빠르게 말을 바꿨다. 원청 기업 역시 뒤늦게 지난달 30일 화물연대와의 합의서에 서명했다. 노란봉투법을 추진했던 진영에선 법 시행 이후 특고와 원청 간 첫 단체교섭 타결이라며 저마다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해 법 제도의 성과가 아니다. 한 노동자의 생명과 맞바꾼 ‘목숨값’일 뿐이다. 법과 제도를 보완하지 않는 한,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사업장에서도 언제나 같은 비극이 반복될 수 있다. 때문에 요구는 계속돼야 한다. 특고의 법적 지위를 명문화해야 한다. 실질적 종속 관계가 인정된다면 긴 소송을 거치지 않더라도 우선 노동자로 추정하는 규정이 필요하다. 영국은 ‘워커’(worker)라는 중간 범주를 법제화했고, 스페인은 플랫폼 노동자에 대한 추정 규정을 도입했다. 드라마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6화에서 주인공이 극한의 상황에 몰리자 감정 워치는 그의 감정을 끝내 정의하지 못한다. ‘알 수 없음’이라는 결과값에 이를 모니터링하던 워치 제조사는 며칠 후 주인공을 불러 묻는다. “이걸 무슨 감정이라고 해야 될까요?” ‘분노’와 ‘좌절’, 거기에 ‘간절함’까지 뒤엉킨 복잡한 감정이었다. 주인공은 당시를 회상하며 뭔가를 깨달은 듯 울먹인다. “도와줘, 도와달라는 거예요.” 고인이 맨몸으로 막아서려 했던 것은 달리는 트럭만이 아니다. 고인이 온몸으로 버티려 했던 것은 2.5t짜리 쇳덩이 이상으로 가파르고 단단한 이 사회의 편견이었을 테다. 그가 달려오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느꼈을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참을 수 없는 분노? 혹은 좌절감? 어쩌면 그것은 이 사회를 향해 ‘도와달라’고 외치는 간절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듣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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