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HUG, 쪼개기 꼼수로 지역인재 채용 의무 회피했다니…
노무현 정부 당시 지역 균형발전 정책에 따라 지역으로 옮겨온 공공기관들은 그동안 수도권 일극주의로 쪼그라든 지역을 활성화하는 마중물 역할을 해왔다. 특히 이전 공공기관들은 혁신도시법에 따라 해당 지역 고교와 대학 졸업자를 일정 비율 이상 의무 채용하면서 청년 지역인재 역외 유출을 막는데도 일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부산에 본사를 둔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꼼수로 의무 채용을 회피한 것으로 드러났다. HUG는 2014년 말 부산으로 이전한 뒤 다양한 지역 공헌 사업을 했다는 평가를 그동안 받았다. 그러나 이번 꼼수는 HUG의 기존 부산 사랑에 강한 의구심이 들게 하는 것은 물론 배신감마저 안긴다. 감사원의 공공기관 인력운용 실태에 대한 최근 감사 결과 HUG는 지역인재 의무 채용 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 지역 청년 채용에 소극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본사를 지역으로 옮긴 공공기관은 채용 인원의 30% 이상을 지역인재에 할당해야 한다. 다만 시험 분야별 5명 이하를 채용할 경우 의무 채용 예외 적용을 받는다. HUG는 이 예외 규정을 악용, 당초 1개였던 시험 분야를 여러 항목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채용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한다. 제도를 준수했다고 해명하지만 참으로 악의적인 수법이라서 말문이 막힌다. 지역 청년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했을 취업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한 점엔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HUG가 자행한 시험 분야 쪼개기 꼼수를 들여다보면 정부의 잘못도 크다. HUG는 당초 2019년까지 일반행정 직군으로 채용을 하다가 2020년부터 직렬 단위인 경영, 경제, 법으로 각각 분리했다. 이 결과 2021~2023년 법과 경제 직렬에서 총 4회에 걸쳐 채용 인원이 각 5명으로 정해지면서 지역인재 의무 채용을 비켜갔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가장 큰 문제는 정부가 그동안 의무 채용 예외 방지를 위한 개선 방안을 서둘러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세부 기준조차 없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정부는 이참에 구멍 난 예외 규정을 정밀하게 손질해 지역인재 채용 회피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길 바란다. 정부는 현재 2차 공공기관 지역 이전을 추진 중이다. 공공기관 추가 이전은 ‘수도권 블랙홀’이 가속화한 대한민국의 병폐를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부산 이전 12년 차로 접어든 HUG의 꼼수는 상당수 이전 공공기관들이 여전히 수도권 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씁쓸함을 안긴다. 이전 공공기관들의 상당수는 본사만 지역으로 옮겼을 뿐 지역에 녹아들지 못한 채 마음은 여전히 수도권에 머물러 있다. 수도권 일극 체제가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것도 이런 뿌리 깊은 관성 때문일 것이다. 2차 공공기관 이전을 앞두고 HUG뿐만 아니라 모든 이전 공공기관들은 자신들이 지역으로 옮겨온 큰 뜻을 되새기길 기대한다.
[사설] 5000고지 찍은 코스피, 성장률 정체 구조개혁 수반돼야
국내 대표 주가지수 코스피가 22일 장중 사상 처음으로 5000고지를 찍었다. 이날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1.57% 상승한 4987.06으로 출발한 후 곧장 5000을 넘어섰다. 지난해 10월 27일 종가 기준 처음으로 4000선을 넘어선 후 3개월도 안 돼 돌파한 것이다. 1980년 코스피 지수 산출 이후 46년 만에 대기록이다. 반도체주의 강세 속에 현대자동차가 새로운 로봇 대장주로 부상해 꿈처럼 여겨졌던 코스피 5000고지를 밟은 것이다. 전날 뉴욕증시 강세 마감과 미국의 그린란드 관세 중단 합의도 호재로 작용했다. 코스피는 5010선을 찍은 뒤 오름폭을 줄여 4952.53에 장을 마쳤다. 하지만, 코스피 5000 돌파는 한국 증시에 새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다. ‘코스피 5000 터치’가 현실이 된 것은 인공지능(AI) 투자 확대 속 국내 반도체 기업과 로봇주가 호황을 맞으면서 외국인·기관·개인의 매수세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정부의 증시 활성화 정책에 대한 기대도 투자심리를 뒷받침했다. 정부는 출범 이후 상법 개정과 세제 지원 등을 통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 해소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풍부한 시장 유동성과 정책 효과가 맞물리면서 상승 탄력이 강화된 것이다. 코스피는 지난해 75% 넘게 오르며 전 세계 주요국 중 상승률 1위를 기록했다. 올해도 16%가량 오르면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 증권가 일각에서 6000선 돌파 전망도 나오는 상황이다. 그러나 최근 코스피 급등은 반도체 대형주 위주의 쏠림 현상에 기인한 바가 크다. 경제의 견고한 성장, 서민 경제의 회복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걱정스럽다. 증시 호황과 실물경제의 괴리가 임계점을 넘어서면 거품이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업황과 원·달러 환율, 외국인 수급 등도 코스피의 향후 진로를 좌우할 변수로 거론된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1%라고 22일 발표했다. 1%대 성장률 속에서 주가만 빠르게 오르는 구조는 지속 가능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무분별한 ‘빚투’까지 늘면서 금융당국은 주가의 단기 급등에 따른 부작용 해소책을 고민해야 한다. 반도체 경기 활황에도 불구하고 내수 부진과 투자 위축이 여전하다. 석유화학과 철강 등 주력 산업 경쟁력이 약화하고, 대표기업과 나머지 기업 간 양극화도 심각하다. 특히 원화 약세는 미국보다 낮은 성장률과 국내 경제의 펀더멘털이 취약함을 반영한다. 저성장 극복을 위해서는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한 구조개혁과 시장친화적 정책을 서둘러야 한다. 코스피 5000고지를 찍었다고 축포만 울릴 때가 아니다. ‘빚투’ 위험성에 대한 투자자 교육 강화, 시장 상황에 따른 담보 비율 조정 등 변동성을 줄일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기업 이익 증대 방안, 혁신·성장기업 발굴 등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 성장률 제고에 온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사설] 이 대통령의 '지방 주도 성장' 강력한 분권이 전제돼야
이재명 대통령이 올해를 대도약 원년으로 삼고 기회와 과실을 고루 나누는 모두의 성장을 이루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21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년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다. 이 대통령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대도약을 위한 성장전략으로 가장 첫머리에 지방 주도 성장을 내세웠다. 이는 수도권 1극 체제를 ‘5극 3특 체제’로 개편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기에 대통령은 지방이 그에 걸맞은 규모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5극 3특 체제 개편에 걸맞은 규모를 갖추기 위한 방편으로 대통령은 대전·충남과 광주·전남의 광역 행정통합 사례를 꼽으면서 이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국가 생존 전략이라고까지 추켜세웠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수도권에서 먼 거리에 재정을 우선 지원하겠다는 정책 방향을 분명히 한 바 있다. 이날 모두발언에서 지방 주도 성장을 가장 먼저 내세운 것은 정책 일관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광역 행정통합을 국가 생존 전략이라 내세운 점도 그 연장선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최근 여권을 중심으로 수십조 단위 재정 인센티브를 앞세우며 행정통합 속도전에 나선 것을 두고 지방선거용 쇼라는 비판이 불거지는 것도 현실이다. 특히 수년 전 정치권을 시작으로 부울경 메가시티를 하향식으로 추진하다 무산된 경험이 있는 동남권에선 인센티브를 쥔 정부 주도의 하향식 행정통합 추진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동남권의 우려는 21일 김두겸 울산시장이 부산·경남과 진행할 광역 행정통합 논의에 대해 밝힌 입장에서도 드러난다. 김 시장은 이날 울산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광역 행정통합에 앞서 지방정부에 대한 실질적인 권한 이양과 시민 동의가 선행돼야 한다고 못박았다. 지방정부의 사무와 권한이 중앙정부에 귀속된 구조를 놔두고 행정 단위만 확대하면 균형발전보다는 지역간 쏠림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도 펼쳤다. 이처럼 동남권에서는 권한과 재정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 정부의 한시적 인센티브 부여로 추진하는 광역 행정통합은 부울경 메가시티가 실패한 전철을 되풀이할 수 있다는 지적이 끊이질 않는다. 이 같은 지적을 의식한 듯 이 대통령은 이날 모두발언에서 광역 통합의 방향이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흔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대통령은 성장 축을 분산시킴으로써 수도권 집값 과열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지역 균형발전의 필요성에 대한 강력한 의지 표명이다. 대통령이 그런 의지를 관철하겠다면 재정과 사무 이양을 통한 실질적 분권의 병행은 필수적이다. 정부 주도의 하향식 인센티브만으로는 선거용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어렵다. 인센티브용 재정 감당 여부 우려도 나오는 형국이다. 제대로 된 분권을 토대로 강력한 다극체제 구축이 이뤄지지 않으면 지방 주도 성장 전략은 모래성에 불과하다.
넷플과 K콘텐츠 10년
넷플릭스는 2016년 1월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당시 넷플릭스에 공개된 최신 영화는 1년 전 개봉된 ‘간신’이었다. 최근 드라마나 예능 콘텐츠도 없어서 영향력은 미미했다. 자국 콘텐츠 역량이 높은 한국 시장의 특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이후 절치부심한 넷플릭스는 K콘텐츠 지형에 변화를 일으켰다. 2019년 최초의 한국 시리즈인 ‘킹덤’을 선보이며 ‘K좀비’ 글로벌 열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2021)이었다. 글로벌 톱10 순위에 32주간 머물렀고, 9주간 1위를 차지하며 대박을 터트렸다. 2021년부터 집계한 글로벌 톱10에 지난 5년간 이름을 올린 한국 작품만 210편이 넘는다. K콘텐츠가 넷플릭스라는 강력한 플랫폼을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영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넷플릭스는 코로나 팬데믹 때 ‘TV·극장’에서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로 플랫폼의 무게 중심을 급격히 이동시키며 콘텐츠 산업구조를 바꿔 놓았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대중은 극장을 멀리했고 영화 산업은 크게 위축됐다. 2020~2021년 한국 영화 ‘승리호’ ‘사냥의 시간’ 등은 극장 상영을 포기하고 넷플릭스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극장표 1장 값으로 한 달 내내 모든 콘텐츠를 즐기는 넷플릭스는 매력적인 플랫폼이었다. 스마트폰 사용의 보편화로 콘텐츠 시청 행태가 개인화되면서 넷플릭스 영향력은 더 커졌다.반면, 국내 콘텐츠 업계에 가져온 그림자도 짙다. 자본력과 글로벌 유통망을 갖춘 넷플릭스의 독주로 국내 OTT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이다. 또 넷플릭스 등 글로벌 플랫폼이 IP(지식재산권)를 독점하는 구조로 인해 한국이 ‘글로벌 하청 기지’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넷플릭스가 제작비 전액을 투자하는 방식은 안정적이지만, 대박이 났을 때 제작사의 추가 수익이나 IP 권리 확보는 제한적이다. IP 주권 확보는 K콘텐츠 활성화 차원에서 중요한 축이다. 이를 위해 토종 OTT를 육성하는 것이 급선무다. IP를 보유해야 꾸준히 수익이 발생하고, 속편 제작도 가능하기 때문이다.넷플릭스가 지난 10년간 K콘텐츠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위한 최적의 창구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자본과 규모에서 열세인 국내 OTT가 동일 조건에서 거대 글로벌 플랫폼과 경쟁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현실이 지속한다면 장기적으로 콘텐츠 산업 생태계 약화는 불가피하다. 정부가 실효성 있는 지원으로 토종 플랫폼의 체력과 경쟁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논설주간/이사
강윤경
논설위원
김승일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편집국에서] 올해는 '천만 영화' 탄생할까
3시간에 가까운 러닝 타임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 영화 ‘국보’(2025)를 뒤늦게서야 관람한 이유다. 이미 멀티 플렉스에선 찾아보기 힘들어진 뒤라 리클라이너 상영관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175분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가부키 분장을 한 배우들의 섬세한 표정 연기가 스크린을 가득 채웠고, ‘인간 국보’를 향한 이들의 광기에 가까운 예술 열정은 한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으로 넘어오기 전 영화관을 찾은 것은 역시 잘한 결정이었다. 물론 생소한 발성과 몸짓의 가부키 공연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몰입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영화 ‘패왕별희’(1993)의 경극이나 드라마 ‘정년이’(2024)의 여성 국극이 그러했듯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 장르를 새롭게 접하는 즐거움이 오히려 더 컸다고 할까. 재일 교포 이상일 감독이 만든 이 영화가 일본 영화의 흥행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지난 18일 기준 관객 1370만 명, 흥행 수입 193억 엔을 넘어섰다. 일본 실사 영화 흥행 수입 1위 기록을 이미 지난해에 갈아 치운 바 있다. ‘춤추는 대수사선 더 무비2: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2003·173억 엔)가 세운 기록을 22년 만에 뛰어넘어 화제가 됐다. 일본 현지에선 가부키 공연을 찾는 관객까지 늘고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파급효과가 크다고 한다. 반면 한국 영화의 최근 성적표는 처참하다. 지난해 1000만 관객 영화는 전무했고, 관객 500만 명을 넘긴 작품은 ‘좀비딸’(2025) 단 한 편에 불과했다. 코로나19 이후 영화관을 찾는 관객이 줄어든 가운데서도 ‘범죄도시2·3·4’(2022·2023·2024) ‘서울의 봄’(2023) ‘파묘’(2024) 등 ‘천만 영화’는 꾸준히 나왔던 것과 확연히 달라진 양상이다.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선보이는 새 영화 ‘가능한 사랑’도 영화관 개봉 대신 넷플릭스 공개를 택해 영화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일부에선 이를 ‘극장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보고 있을 정도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이탈한 관객은 회복될 조짐이 없다. OTT 플랫폼이 급성장한 가운데 젊은 층을 중심으로 관객의 취향은 더욱 더 세분화되고 있다. 그러나 극장을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은 관객 감소에 따른 수익 감소, 투자 위축, 제작 인력 이탈이 가속화하면서 개봉 편수마저 눈에 띄게 줄었다. 관객이 즐길 만한 다양한 콘텐츠 공급 자체가 어려운 구조적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나마 새해엔 구교환·문가영 주연의 멜로 영화 ‘만약에 우리’(2025)가 입소문을 타고 흥행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25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만약에 우리’는 전날까지 누적관객수 190만 명을 돌파했다. 지난해 연말 개봉한 이 영화는 이미 개봉 12일 만에 손익분기점(110만 명)을 넘긴 바 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관객 200만 명은 가뿐히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멜로 영화가 200만 관객을 넘긴 것은 2019년 ‘가장 보통의 연애’(292만 4000여 명)가 마지막이었다. 젊은 세대에게 두 남녀의 연애와 성장 스토리가 많은 공감을 얻으면서 정통 멜로 장르의 부활에 대한 희망마저 읽힌다. 영화계에선 특정 장르에 편중된 투자,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국 영화가 살아날 수 있다고 본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과 실험이 이뤄질 수 있는 산업적 토양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의 경쟁력이 된 과감한 시도와 신인 감독들의 성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독립·예술영화에 대한 지원을 포함한 다양한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 높아진 극장 문턱을 낮추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진행되는 ‘문화가 있는 날’ 제도를 매주 수요일로 확대 시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OTT처럼 구독료를 내고 극장에서 일정 횟수를 저렴하게 볼 수 있는 ‘구독형 영화 패스’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다행히 올해는 거장 감독의 신작 개봉이 잇따라 기대를 모은다. 먼저 설 연휴를 앞두고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가 관객과 만난다. ‘곡성’(2016) 이후 10년 만에 신작을 선보이는 나홍진 감독의 ‘호프’도 7월 개봉을 예고하고 있다. 연상호 감독의 ‘군체’도 기대작이다. ‘천만 영화’로 상징되는 ‘대박 영화’에 대한 바람은 우리 영화산업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검증된 감독들의 대작을 만나는 기쁨도 크지만, 관객의 허를 찌르는 의외의 작품을 만나고 싶은 갈망도 크다. 소위 말하는 ‘대박’ ‘중박’ 영화가 골고루 나오고, 관객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 독립·예술영화도 더 풍성한 한 해가 되길 바란다.
[김은영의 문화시선] 연대와 숫자의 힘 ‘퐁·반 500’
지난 24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A 갤러리는 삼삼오오 모여든 작가들로 북적였다. 갤러리에 작가들이 모이는 건 당연하지만, 이날만큼은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결기에 찬 듯하면서도 마음 맞는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인 덕분인지 축제 같은 분위기도 전해졌다. 20여 명의 작가는 직접 가져온 한두 점의 작품을 B 작가의 진두지휘에 따라 전시장 곳곳에 배치했다. A 갤러리를 나와 C 화랑을 찾아갔는데 그곳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C 화랑은 작가 겸 기획자 D가 중심이 돼 쇼윈도에 작품을 걸고, 전시장을 꾸미느라 여념이 없었다. 또 다른 E·F 전시 공간도 사정은 비슷했다. 퐁피두 분관 유치 반대 서명 500명을 기념하는 릴레이 미술 전시 ‘퐁·반 500, 부산 미술인 한마음展’이 이날 오후 부산 전역의 20여 갤러리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돼 2월 8일 전후까지 계속된다. 부산미술협회 퐁피두 분관 유치 반대 대책위원회 김성헌 공동대표는 “부산시에서 추진 중인 프랑스 퐁피두센터 분관 유치 사업과 그에 수반된 이기대 천혜 자연 난개발 계획에 반대하는 뜻을 부산의 미술인과 지역 화랑이 공동으로 표명하는 집단적 예술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김 공동대표는 이날 현재 참여 작가 429명, 반대 서명 미술인은 685명으로, 참여 갤러리(26개)와 작가 수는 증가 중이라고 덧붙였다. 전시 내용은 ‘퐁피두 반대’(퐁·반)라는 강력한 사회적 슬로건과 달리, 작가의 평소 화풍이 담긴 일반적인 작품이 대부분이다. G 작가는 “연대에 방점을 두고 참여했다”고 말했다. 실제 이번 전시는 개별 작품의 내용보다는 ‘500명 이상의 작가가 한목소리를 내며 모였다’는 집단 행위에 큰 무게를 둘 수 있다. 다만, 모 갤러리 대표 H와 J는 “전시장을 구하지 못한 작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장소를 제공했는데 이를 불편하게 보는 시각이 있어서 곤혹스럽다”는 말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물론 이번 전시는 세련된 큐레이팅이 가미된 대형 기획전과는 결이 다를 수 있다. 그래도 회화뿐 아니라 사진, 판화, 조각 등 부산 미술의 전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부산 미술의 ‘두께’를 보여준다. 관람객은 “이 작가는 퐁피두 유치를 반대하면서 왜 평화로운 풍경화를 내걸었을까?” “이 추상화가 퐁피두라는 거대 자본 미술관과 부딪혔을 때 어떤 의미를 가질까?”로 질문을 바꿔야 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부산 작가들은 ‘해외 유명 브랜드(퐁피두)가 없어도 치열하게 예술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존재로서 증명’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퐁피두 부산 분관’ 본계약 체결 시한이 3월 말로 연장된 만큼 이들의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오션 뷰] 인공지능 대전환으로 새로운 150년 열자
1876년 2월 26일, 근대 무역항으로 첫 문을 연 이래 부산항은 대한민국 경제와 희로애락을 함께해 왔다. 지난 150년간 부산항은 대한민국 수출입 관문으로서 국가 경제성장을 뒷받침해 왔으며, 개항 150주년을 앞둔 지금 세계 2위의 컨테이너 환적 허브라는 위상을 듬직하게 지키며 앞으로의 150년을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마주한 대변혁기는 18세기 후반 증기기관이 가져온 산업혁명의 변화를 훨씬 능가하게 될 것이다. 지난 150년이 물동량이라는 ‘양적 성장’을 통해 부산항의 체급을 끌어올렸다면, 앞으로의 150년은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한 ‘질적 성장’에 기반해야 한다. 이 질적 성장이란 곧 고부가가치 성장을 의미하며, 디지털과 인공지능(AI)을 바탕으로 한 지능형 항만으로의 진화를 뜻한다. 1876년 개항 부산항 국가 경제 발전 견인 AX 통해 양적 성장에서 질적 전환 이뤄야 항만물류 전 과정 AI·로봇·자동화 도입 미래형 항만 도약 우리 손으로 만들어야 특히,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계기로 하여 부산을 중심으로 한 부울경이 해양수도권을 형성하고 부산항이 그 핵심에 있음을 고려할 때 부산항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부산항 AI 대전환(AX)’이 핵심 전략 과제로 급부상하고 있다. 부산항 AI 대전환의 시작을 언제로 봐야 할까? 필자는 그 시작점을 2024년 4월 개장한 부산항 신항 7부두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완전 자동화 부두’, ‘부두 내 무인 차량이 다니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물론, 개장 초기 몇 가지 시행착오를 겪었으나 이는 미래 지능형 항만으로 거듭나기 위한 학습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습득한 운영 데이터와 노하우는 이제 착공한 부산항 진해신항 자동화 부두에 밑거름이 될 것이다. 그럼, 2030년 완공 예정인 진해신항은 어떤 모습일까? 진해신항에는 국내 최초로 항만 하역 장비의 실시간 제어를 위한 피지컬 AI 기능이 탑재된 ECS(Equipment Control System, 하역 장비 통합 제어 시스템)가 도입될 예정이다. 즉, 기존 컨테이너 부두에서는 터미널 운영 시스템(TOS)이 부두 내 여러 하역과 이송 장비의 개별 작업을 지시하는 수준이었다면, ECS는 부두 내 모든 자동화 장비를 일괄 통제하고, 나아가 작업의 최적 배분까지 수행할 것이다. AI 대전환을 위한 부산항의 준비는 이미 진행 중이다. 먼저 디지털에 기반한 부산항 항만물류 통합 플랫폼인 ‘체인 포털(Chain-Portal)’을 통해 실시간으로 해상과 육지 간 화물과 선박, 부두의 운영 정보가 항만 이용자들의 물류 최적화를 위해 제공되고 있다. 특히, 부산항을 이용하는 1만 7000여 화물 차량 모두가 이용하는 모바일 앱인 ‘올컨e’(All Con-e)를 통해 매번 부두를 출입할 때 전자인수도증(E-Slip)이 전면 도입되어 사용 중이다. 화물차 기사들이 직접 수령해야 했던 종이 인수도증을 대신하기 때문에 ‘항만형 하이패스’라고도 불린다. 또 부산항에서 제공되는 디지털 기반 기능 중에는 대량의 화물과 다수의 트럭을 최적으로 연계하여 환적 화물 운송 효율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환적운송시스템(TSS)’ 서비스도 있다. 향후 체인 포털에 AI를 접목하여 부산항을 이용하는 선박과 트럭의 정확한 도착 시간을 예측하여 제공하는 기능 등을 갖추어 플랫폼을 점차 고도화해 나갈 계획이다. 한편, 항만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선박과 하역 현장에서는 AI 도입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바뀌게 될까? 선박의 컨테이너를 고정하는 고위험 작업인 라싱(Lashing)과 선박을 부두에 고정하는 줄잡이 분야에 로봇을 투입하는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러한 피지컬 AI 기술에 더해 부두 내에서 컨테이너를 자율주행으로 운송할 항만 모빌리티의 도입은 그간 고위험 작업 구역으로 여겨지던 항만 현장의 위험도를 획기적으로 낮추고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데 일조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피지컬 AI, 로봇·자동화 기술이 영향을 미치게 될 노동 분야와의 사회적 협의는 노사정이 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지난 150년, 부산항은 숱한 위기를 기적 같은 회복력으로 이겨내며 세계가 주목하는 글로벌 허브로 우뚝 섰다. 우리가 마주한 AI 대전환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며, 앞으로 우리의 선택과 실행이 대한민국 항만의 새로운 150년을 이끄는 엔진이 될 것이다. 이 거대 전환기를 맞이하여 부산항만공사는 ‘선도자(First Mover)’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대변혁기, 명확한 목표 아래 수립된 전략을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실행해야 한다. 부산항의 미래는 우리 손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공감] 은색 등불 하나 켜고
커피를 내리는 남자의 손가락이 빛난다. 아니, 오른손 검지를 덮은 커다란 은색 반지가 번득인다. 도대체 저 투탕카멘 마스크 문양 반지는 어디서 파는 것인가. “만들었어요.” 마음을 읽었을까. 남자가 커피잔을 건네면서 잠시 두 손을 치켜들어 보여준다. 요즈음은 장신구를 직접 만들 수 있는 공방이 유행이라고 한다. 관심을 가지면 보이는 법. 동네마다 반지 공방이 이렇게 많은 줄 처음 알았다. 연인과 부부와 동료와 친구들이 저마다의 문양으로 만든 기념 반지를 끼고 손을 포갠 사진들을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내친김에 전화 예약을 하고 작업장을 찾았다. 나는 편편한 실버 링에다 수필가답게 에세이라는 영문을 새기기로 했다. 그러면 창작의 마음가짐이 단단해질 것만 같았다. 얇은 실버 막대 하나가 앞에 놓여졌다. 이것을 한 시간여 다듬으면 반지가 될 것이다. 좀 더 긴 것을 선택하면 팔찌가 만들어질 터이고 넓은 것을 두드리면 목걸이 펜던트도 가능하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러나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 비단 이 작은 금속만 그러할까. 자식되기 친구되기 부모되기 어른되기 그리하여 점점 인간이 되어 가기…. 내 삶도 새로운 ‘되기’의 연속 과정이었지만 제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늘 형태만 일그러졌다. 이 막대도 망치질과 사포질을 하고 불을 가하여 마침내 반지되기에 이를 것이다. 은 막대에 힘을 주니 약간 휘어진다. 이제 영문 펀치에서 단어 ‘ESSAY’를 순서대로 골라 도장 각인을 할 차례다. 망치로 두세 번 때려서 단번에 글자를 새겨야 한다. 그런데 기계 작업이 아니므로 간격과 높이를 맞추기 어렵고 의도대로 찍히지 않으니 쉽지만은 않겠다. 실전에서는 첫머리 글자부터 비뚤배뚤 튀어 오른다. 어찌하겠는가, 핸드메이드의 매력에 의미를 둘 수밖에.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도 어긋날 때가 얼마나 많았는가. 당신이 틀렸다고 우긴 것도 모두 틀렸던가. 나도 틀릴 수 있고 당신도 맞을 수 있는데 그것을 깨닫는 데는 참으로 오래 걸렸다. 글자도 새겼으니 둥글게 말아서 이음새를 붙여준다. 은가루를 녹여 틈을 메우고 토치로 용접한다. 파란 불꽃에서 점차 붉은 열꽃을 뿜어내니 끝과 끝이 만나 고리를 이루었다. 뜨거워도 조금만 참으면 연결되는 것. 세상일이 그럴진대 불꽃이 일기도 전에 포기하거나 과욕을 부려서 시커멓게 그을리기도 했었다. 접합한 상처는 울퉁불퉁해도 사포로 다듬으면 매끈해질 수 있는 법. 천천히 순리대로 따르면 다 해결되었다. 손가락 사이즈를 재고 기다란 쇠봉에 줄을 긋는다. 한 짝만 끼는 것이 반지(半指)이고, 쌍으로 끼는 것을 가락지라 했던가. 반지의 원형이 둥근 이유는 테두리 밖으로 마음이 벗어나지 말라는 뜻이라지. 쇠봉을 돌려가면서 나무망치로 두들기고 사포질하니 반드르르해졌다. 뭐든지 깎고 다듬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한눈파는 사이에 상처가 나고 출혈도 생긴다. 그래도 애벌레의 환골탈태처럼 고통 뒤의 환희경도 있지 않은가. 문득, 캐나다의 철근 반지 이야기가 떠오른다. 퀘벡의 세인트 로렌스강 다리 붕괴 사고 때 많은 작업자의 희생이 있었다. 이후 토목기술자들은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 무너진 구조물에서 뽑아낸 강철로 반지를 만들어 끼게 되었다. 그 의식은 나태해지려는 마음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엄청난 피해를 상기하며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라는 무언의 충고였다. 쇠반지가 엔지니어의 소명 의식을 새기듯이 내가 만든 은반지 역시 작가정신을 받들도록 할 것이다. 드디어 반지의 광택 작업이 끝났다. 밋밋하던 손가락에 채워본다. 반짝! 은색 등불 하나, 온몸을 밝힌다.
[기고] 초고령 부산, 창의적 노화가 미래를 바꾼다
“창의적 노화라니,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이 안 된 사람한테는 사치지요.” 최근 세계노인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하던 날, 일본의 한 노인복지학 교수가 내게 던진 말이다. 필자가 발표한 주제는 중장년·노년기의 창의적 활동이 생애 후반기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일본의 교수는 기초연금·의료·돌봄이 우선이라는 현실적 이유를 들었다. 그 말은 이해되지만, 일본처럼 초고령화가 심화된 사회에서조차 창의적 노화를 ‘사치’로만 보는 시각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왜냐하면 바로 그런 사회일수록 창의적 노화가 더 절실하기 때문이다. 창의적 노화가 사치처럼 보일 수 있는 현실은 분명 존재한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OECD 최고 수준이며, 기초연금만으로 기본생활 유지가 어려운 노인도 많다. 돌봄 공백, 만성질환, 고립·우울 등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적지 않다. 복지 현장에서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후순위로 밀리는 구조 역시 현실의 무게를 반영한다. 이런 상황에서 ‘창의적 노화는 사치’라는 지적은 어느 정도 타당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우리 사회는 저출산과 유아교육의 위기를 말할 때 ‘유아기 창의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노년기의 창의성은 논의하지 않는다. 창의성은 특정 연령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필요한 인간의 기본 역량이다. 창의적 활동은 정서적 활력, 몰입 경험, 삶의 만족도를 높이며, 특히 신체·인지 기능이 저하되는 노년기에는 우울·무기력·사회적 위축을 완화하는 보호요인으로 작용한다. 어떤 일에 창의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창의성은 설렘이고, 몰입이며, 삶을 다시 앞으로 밀어주는 동력이다. 이 불씨가 사라지면 일상의 힘도 잦아든다. 그래서 창의성은 노년기를 다시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역동력이 된다. 이 관점에서 창의적 노화는 선택적 여가가 아니라 복지의 확장이다. 영국 예술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예술 활동에 꾸준히 참여한 고령자는 의료 서비스 이용률이 37% 낮았고, 우울·치매 위험도 감소했다. 창의적 활동은 개인의 취미를 넘어 건강·돌봄 비용을 줄이는 사회적 자원이다. 유로스타트(유럽연합 통계청)의 분석에 의하면 덴마크·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의 65~74세 노인 중 80% 이상이 최근 1년간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한다. 이는 생활안정 기반 위에 저비용 문화·학습 프로그램을 결합해 노년층을 지역축제·공공 프로젝트의 주체로 이끈 결과다. OECD 역시 문화 활동이 삶의 만족도·정신건강·인지 기능과 유의미하게 연결된다고 보고한다. 반면 한국의 현실은 다르다. 2023년 통계청 노인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노인의 문화·여가 활동 참여율은 35.5%, 예술·창작 활동 참여율은 12%에 그친다. 부산은 고령 인구 비율이 이미 22%를 넘는 초고령사회임에도 문화예술 활동 참여율은 전국보다 낮은 20%대 후반이다. 비용, 접근성, 프로그램 부족은 반복적으로 지적되는 장애요인이다. 특히 원도심·산복도로 지역의 고립 위험군 증가 추세는 문화 접근성이 곧 지역 복지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삶의 후반기에 새로운 전성기를 연 사례는 창의적 노화가 공허한 이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미국의 그랜마 모지스는 평생 농장을 돌보며 살다가 78세에 처음 붓을 들었고, 그 늦은 출발은 1500점 이상의 작품으로 이어졌다. 프랑스의 마티스는 말년에 거동이 어렵던 시기에도 가위와 종이로 ‘컷아웃’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완성했다. 영국의 메리 델라니는 70대에 종이 모자이크 작업을 시작해 1000점이 넘는 식물화를 남겼다. 한국의 박서보 화백 역시 생애 후반기까지 작업을 멈추지 않으며 노년기의 창작 역량이 어떻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들의 경험은 창의성이 젊음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깊어질수록 다른 방식으로 발현될 수 있는 역량임을 증명한다. 노화는 쇠퇴의 시간이 아니라 숙성의 시간이다. 젊음이 속도와 가능성의 시기라면, 노년은 깊이와 의미를 발견하는 시기다. 그 깊이를 창작의 힘으로 전환할 수 있도록 돕는 일, 그것이 초고령사회 부산이 선택해야 할 미래전략이다. 창의적 노화는 사치가 아니라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필수 자원이다.
개헌, 의지가 있기는 한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정부가 ‘일하는 사람 기본법’과 함께 ‘근로자 추정제’를 추진하면서 각종 법령에 사용되는 노동자와 근로자의 혼용이 지적되고 있다. 지난해 여야 합의로 근로기준법의 ‘근로자의 날’이 ‘노동절’(5월 1일)로 개정된 뒤 용어 통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 않다. 그 기원이 헌법이어서다. 우리 헌법 32조·33조에는 ‘근로자’의 권리와 의무가 명시돼 있다. 헌법을 고쳐야 하위 법령이 바뀌고 국민의 삶과 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최고의 규범이다. 그 가치는 고정불변하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조응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탄생한 제6공화국 헌법은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정치권력과 수도권 집중의 폐해를 시정하자는 취지에는 여야 정치권뿐만 아니라 국민적 공감대가 이뤄진 상태다.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도 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 지도부가 여러 차례 약속한 바 있다. 의지만 있으면 제7공화국으로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헌법적 가치를 도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개정의 방향뿐만 아니라 시기와 방법도 민감한 이슈다. 지난해 22대 대선 때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 실시하는 제안이 나왔다가 불발되고, 대안으로 올해 6·3 지방선거 때 치르는 방안이 부상했다. 또 합의된 사안은 올해 지선에서, 권력 개편은 2028년 총선 때로 나누는 2단계 개헌론도 제안된 상태다. 정부는 국회의 공론화와 법 개정을 주시하고 있으나 여야의 극단적 충돌이 지속되면서 개헌 논의는 더디기만 하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지난 16일 청와대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 오찬에서 6·3 지방선거 때 여야 이견이 없는 지방분권, 지역균형발전 조항을 헌법 1조에 넣는 원포인트 개헌 국민투표를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면서 분권공화국이기도 하다는 점을 천명하는 방식이다. 이는 지난해 12월 지방분권균형발전 부산시민연대의 설문에서 지선과 동시 투표(66.6%)와 함께 여야 합의 불발 땐 지방분권 개헌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견이 71.2%로 압도적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논란의 소지가 없는 지방분권 개헌이라면 순조로울 것 같지만, 현실은 안갯속이다. 정치적 속내나 필수 전제 조건을 하나하나 따지면 지뢰밭이 널려 있다. 국회 의결과 대통령 공고 등의 기간을 감안하면 개헌안을 도출할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1월 중 구성되고, 2월에 본격 활동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야는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이다. 거대 여당의 입법 독주에 제1 야당 대표가 단식으로 맞서는 험악한 대치 상황이 대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또 개헌 논의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정치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여야 모두 몸을 사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개헌안은 국회 재적 3분의 2, 즉 200명 이상의 의원이 찬성해야 의결되고 30일 이내 국민투표에 돌입할 수 있다. 민주당으로서는 과거의 실패 사례가 있기 때문에 국회 통과 여부에 대해 조심스럽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대통령 중임제와 지방분권을 담은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이 표결에 참석하지 않아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투표 자체가 무산된 적이 있다.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국민의힘(107석)이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니 민주당이 의석수만을 앞세워 강행할 수 없는 구조다. 또 국민투표법 개정도 의외의 복병이 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4년 재외국민 투표권 제한 조항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는데 이후 12년째 국민투표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등과 간담회를 갖고 법안 처리를 당부했다. 하지만 이날 소관 행안위 국민의힘 간사는 불참했다. 국민투표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6·3 지선뿐만 아니라 2028년 총선 때도 개헌안을 놓고 국민투표에 부칠 수는 없게 된다. 개헌 논의에 가장 적극적인 우 의장이 제시한 로드맵은 6·3 지선과 2028년 총선으로 나눈 단계적인 개헌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 등의 권력 구조 개편에 복잡한 셈법이 끼어들면 합의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논란이 없는 사안만 올해 지선에서 먼저 처리하자는 취지다. 이를 위해서라면 2월 개헌특위 출범, 3월 국민투표법 개정, 4월 국회 본회의 개헌안 상정, 6·3 지방선거·개헌 동시 투표의 로드맵이 가능하다. 39년째 바뀌지 않는 제6공화국 헌법은 뜯어고칠 곳이 너무 많지만, 작금의 정치 상황에서 단번에 개정하려고 나서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따른 단계적 처리가 현실적이다. 우선 합의 처리 가능한 국토균형발전 명문화 등으로 개헌안을 만드는 게 순리다. 분권형 개헌은 지방소멸을 저지하는 전환점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최근 지역민들의 실망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 올해 지선 때 개헌 국민투표를 치르자는 목소리는 잦아들고 총선으로 미루는 분위기가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의 개헌 외면 분위기다. 무려 3시간에 걸쳐 25개의 현안 질문이 쏟아졌지만 헌법 개정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123대 국정과제 중 개헌을 1호로 올린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87년 체제 종식의 의지를 피력하지 않은 것이 개헌론이 처한 현실이다. 물론 대통령이 개헌 논의를 주도하면 논란을 부르기 십상이고, 개헌 주체는 국회가 맡는 게 옳다. 내용적,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도 여야 합의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을 넘겨받은 국회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여야 모두 지난 대선 때 개헌 공약을 내놨지만,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관성적 정치 투쟁에만 골몰한 채 나서지 않고 있다. 이재명 정부 집권 초기, 합의 가능한 최소 수준이라는 조건을 고려하면 올해 지선으로 마련된 개헌의 골든 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여야 모두 지방분권에 국가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구호를 내건다. 그렇다면 균형발전의 핵심 동력이 될 분권형 개헌에 적극 나서야 한다. ‘대한민국은 분권공화국’이라고 헌법에 명시하면 광역 행정통합 추진도 내실화되고 속도를 낼 수 있다. 행정·재정 분권이 보장되지 않은 채 지금 추진 중인 광역권 통합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문제는 2년 뒤 총선 때까지 기다릴 만큼 지방의 위기는 한가롭지 않다는 데 있다. 정치가 국민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당파적 이익에 급급하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 여야는 분권형 개헌안을 만들어 6·3 지선에서 국민의 총의를 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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