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가덕신공항이 항공 물류 거점 돼야 트라이포트 완성된다
남부권 대표 공항이 될 가덕신공항을 진정한 수요자 중심 공항으로 만들기 위한 발걸음이 분주하다. 그 발걸음은 현재 인천국제공항이 독점하고 있는 항공 물류 시장에 내는 도전장이 시발점이 될 듯하다. 이 같은 도전은 가덕신공항에서 육상과 항만, 항공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복합 운송체계를 마련하겠다는 트라이포트 전략에도 부합하는 움직임이다. 부산시가 팔을 걷고 나선 이번 도전은 단순히 새로 생기는 신공항 하나의 전략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특정 공항에 집중된 국내 항공 물류의 취약점을 극복하고 국가 전체의 물류 시스템을 재편할 수 있을 진정한 물류 허브 구축에 대한 기대감까지 높이고 있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부산시는 가덕신공항 항공물류 거점 구축 실행계획 수립을 위한 용역을 이달 시작했다. 시청 발주 용역으로는 이례적으로 긴 기간인 18개월로 잡힌 해당 용역은 단순한 공항 인프라 개발이 목표가 아니다. 한 해 국내 항공 수출입 화물 291만 톤 중 99%가 넘는 물량인 288만 톤을 인천국제공항이 처리하는 항공물류 시장 재편을 위한 실행 전략 수립이 목표다. 현재 김해국제공항이 처리하는 항공화물은 연간 1만2000톤에 불과한 실정이다. 이 같은 항공물류 독점구조를 방치한다면 가덕신공항이 개항을 하더라도 동남권 관문공항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어렵다는 게 시의 판단이다. 시는 일단 가덕신공항 개항 시점에 맞춰 동남권 항공 물류 수요부터 파악한다는 방침이다. 동남권에서 항공편을 통해 화물을 옮길 인프라가 부족해 마지못해 인천을 이용하는 수요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역 기업 입장에서는 물류비 부담이 크고 시간 손실도 상당할 것인 만큼 이는 타당한 시도다. 이와 함께 유사시 발생할 수 있는 극단적 인천국제공항 항공 화물 집중의 폐해를 지적하고 안전을 담보할 물류체계 분산의 이점을 내세우는 전략도 병행할 듯하다. 항공 물류의 대부분이 반도체·전자부품·전자상거래·바이오 등 고부가가치 화물인 점을 감안하면 화주들에게 상당히 어필할 수 있을 논리로 보인다. 이번 용역은 활주로나 터미널 등 공급 인프라 중심이던 가덕신공항 관련 논의가 화주나 물류기업 등 수요자 중심 전략으로 전환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시도들이 인천국제공항의 항공 물류 처리 물량을 빼돌리는 수준에 머물러선 안 된다는 점이다. 제로섬 게임에 가까운 접근만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새 물동량 창출과 함께 국가 전체 물류 병목 현상을 선제적으로 푼다는 목표로 접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항만-항공 환적 인프라 등 트라이포트 인프라 구축도 서둘러야 한다. 그래야 가덕신공항을 항공 물류 거점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트라이포트 완성을 위한 마지막 방점이 될 수 있다.
[사설] 시외버스 컨테이너 정류소,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의 민낯
지난해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약 364만 명으로 공식 집계 이후 처음으로 300만 명을 넘어섰다. 현재 부산의 거리는 유럽과 동남아, 중국 등에서 찾은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국내 관광객도 역대 최고 수준이다. 부산은 명실상부한 관광도시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다시 찾고 싶은 부산’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기반 시설 정비도 필요하다. 그중 가장 시급한 것은 시외버스 교통 인프라라는 지적이다. 시외버스는 부산과 다른 도시를 촘촘하게 연결하는 실핏줄 역할을 한다. 하지만 관광객이 즐겨 찾는 해운대의 경우 아직까지 컨테이너로 된 시외버스정류소를 운용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부산일보〉 보도에 따르면 부산의 관문인 시외버스 정류소들이 열악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해운대시외버스정류소의 경우 컨테이너 가건물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가건물엔 승객들이 편안하게 이용할 변변한 편의 시설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 부산 관광 1번지로 꼽히는 해운대의 모습이라고 믿기 어려운 지경이다. 이 터미널은 부산에 숙소를 정한 뒤 울산과 대구, 경주 등 인접 도시를 관광하려는 외국인은 물론 내국인들도 다수 이용한다. 이 정류장 운영 업체는 부지 임차 계약 만료로 지난달 인근 아파트 상가로 이전을 추진했지만 주민 반발로 무산됐다. 부산시가 앞장서 하루빨리 현명한 해결책을 찾기 바란다. 문제는 부산시와 경남도가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시는 여객자동차법상 시외버스 운영 관련 인허가권이 경남도 등 인접 도지사에게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경남도는 “정류소 이전은 의견 조회를 거치는 등 부산시와 충분히 협의하기 때문에 사실상 부산시 관할”이라고 말했다. 시외버스 정책이 사실상 행정 사각지대에 방치됐다는 비난을 사는 것도 이런 이유다. 더욱이 2001년 동래구에서 금정구 노포동으로 옮긴 부산종합버스터미널은 접근성이 떨어져 25년째 부산 시외버스 거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부산시가 여전히 법적 권한 유무만 따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해운대시외버스정류소와 부산종합버스터미널의 실태는 부산시가 시외버스 인프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여실하게 드러낸다. 민간이 운영하더라도 시외버스는 공공재적인 성격이 강하다. 관광객과 시민 불편이 가중되고 있다면 시가 적극적인 행정을 펼치는 것이 마땅하다. 더욱이 사실상 터미널 역할을 하는 해운대시외버스정류소를 컨테이너 상태로 방치하는 것은 글로벌 허브도시와 관광도시 도약을 꿈꾸는 부산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부산의 기존 시외버스 인프라 정책을 철저하게 점검할 시점이다. 부산시가 해운대권 거점 조성과 부산종합버스터미널의 역할 재설정 등을 서둘러주길 당부한다.
[사설] 삼성전자 긴급조정권 발동 전 노사 대화로 협상 타결해야
삼성전자 노사가 총파업을 사흘 앞둔 18일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다시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 앞서 삼성전자 노조는 오는 21일부터 18일간 총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이에 정부는 긴급조정권 발동 가능성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김민석 국무총리는 17일 대국민담화에서 “삼성전자 파업으로 국민 경제에 막대한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긴급조정을 포함한 가능한 모든 대응 수단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해외 출장 중이던 이재용 회장도 귀국 직후 “우리는 한 몸 한 가족”이라며 직접 대화와 타협을 호소했다. 정부와 기업 모두 이번 파업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절박함을 드러낸 셈이다. 정부가 긴급조정권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것은 그만큼 상황을 국가 경제 차원의 위기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긴급조정권은 발동 즉시 30일간 쟁의행위를 금지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지난 21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사용되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한국 수출과 반도체 산업의 핵심 축이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35% 안팎을 차지하고 삼성전자는 국내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의 25% 이상을 차지한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 노조가 예고한 18일간 총파업이 현실화돼 생산라인이 전면 중단될 경우 직간접 손실 규모가 최대 100조 원에 달할 수 있다고 추산한다. 삼성전자 파업은 단지 한 회사의 노사 갈등을 넘어 한국 경제 전체를 뒤흔들 수 있단 얘기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실제 세계 시장도 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삼성전자 생산라인이 흔들리면 경쟁국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홍콩의 한 언론은 삼성전자 파업 가능성을 두고 “중국 반도체 업체들에 역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이미 중국의 추격이 거센 상황에서 생산 차질까지 현실화하면 한국 반도체 산업의 주도권이 자칫 중국과 대만에 빼앗길 수 있다는 경고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삼성전자가 경쟁력을 잃는 순간 한국 반도체 산업은 단순한 ‘2등 추락’이 아니라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결국 핵심은 정부의 압박이나 노조의 강경 대응이 아니라 교섭 테이블이다. 삼성전자 파업 사태의 해법도 강제 개입보다 노사 간 대화와 타협에서 찾아야 한다. 반도체 산업 경쟁력과 노동권 보장은 어느 한쪽만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긴급조정권은 법적으로 가능하더라도 노사정 관계에 깊은 상처를 남길 수 있는 만큼 신중해야 한다. 다행인 것은 파국을 막기 위한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측은 노조 요구를 받아들여 교섭대표를 교체했고 노조도 기존 대표의 참관을 수용하며 한발 물러섰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강 대 강 대치가 아니라 한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지켜내는 일이다. 18일 중노위 조정이 극한 충돌을 막아낼 마지막 대화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새마을운동은 진행형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새마을 노래 첫 소절이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1970년대 우리의 아침은 늘 이 노래로 시작되곤 했다. 시골이 고향인 기자가 살던 마을도 다르지 않았다. 초가지붕은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흙길에는 시멘트가 깔렸다. 마을 어귀엔 커다란 공동 창고도 들어섰다. 이런 풍경은 산업화 시대를 지나온 한국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이게 새마을운동이었다. 이는 농촌 환경 개선과 생활 수준 향상을 목표로 추진됐다. 근면, 자조, 협동의 가치를 내세우며 ‘우리도 잘살아 보자’는 구호 아래 국민적 동원과 결속을 이끌었다.새마을운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그는 이를 국가 정책으로 추진하며 전국으로 확산시켰고, 직접 만든 새마을 노래는 운동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일각에서는 새마을운동의 정신적 기반에 가나안농군학교 설립자인 김용기 장로를 비롯해 몇몇 분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1962년 농군학교를 찾아 김 장로의 농촌 개혁론을 경청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다만 새마을운동을 두고 진보 진영과 일부 지식인 사회에서는 국가 주도의 동원 체제였다는 비판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최근 새마을운동이 이재명 대통령을 통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 4월 국무회의에서 지역 관광 활성화를 언급하며 ‘관광 새마을운동’을 제안했다. 바가지요금과 불친절 같은 생활문화를 개선하자는 취지였다. 이어 새마을운동중앙회를 찾아 박 전 대통령이 시작한 이 운동이 대한민국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기존 민주당 계열 정치권의 시각과는 다소 결이 다른 접근이다. 주목할 점은 이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이념이 아닌 실용의 관점에서 바라봤다는 데 있다. 세계의 평가는 오히려 더 우호적이다. 새마을운동은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 수십 개국에 전수됐고, 유엔도 한국형 농촌개발 모델로 주목했다. 관련 기록물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새마을운동을 둘러싼 국내 평가는 지금도 엇갈린다. 국가 주도의 강한 동원 체제였다는 비판과 산업화 과정에서 가난 극복과 농촌 환경 개선, 공동체 의식 회복에 기여했다는 평가의 공존이다. 중요한 건 과거를 흑백논리로 재단할 게 아니라 그 시대의 경험 속에서 우리의 나아갈 길을 찾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새마을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논설주간/상무이사
강윤경
수석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정달식
이상윤
김상훈
천영철
[데스크 칼럼] 뜨거운 재보선 냉담한 지선의 결과
세 사람이 얼마 전 tvN ‘유퀴즈’ 프로그램에 나온 이덕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덕화는 칠십 대인데도 여전히 멋이 있었다. 다들 한 번씩 따라 했던 ‘트라이’ 광고에 나왔을 때와 비교해도 크게 달라져 보이지 않았다. 이덕화는 자신을 젊게 보이게 만드는 한 제품의 광고 모델을 수십 년째 이어오고 있다고 했다. 때가 선거철인 만큼 이야기가 갑자기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한 한동훈으로 튀었다. 한 사람이 “한동훈이 부산에 뼈를 묻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부산을 알리는 광고 모델이라도 해주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한동훈과 맞붙는 후보가 누구냐”라고 물었다. 국민의힘 후보는 결정되기 전이어서 하정우라고 말해줬다. “영화배우 하정우?”라고 다시 묻기에 ‘하GPT’라고 답하니 그제야 알아듣는가 싶었다. 그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우리 동네(동래구)에도 이번에 선거해?”라고 묻는 게 아닌가.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라고 했다. 그는 이번 지방선거가 심하게 주객전도되었다고 깨우쳐 주는 스승이었다. 고작 2년짜리 국회의원 재보선에 가려 지방선거 의제와 후보가 잘 보이지 않는다. 평택을 국회의원을 뽑는 재선거가 이번 전국 선거에서 경쟁이 가장 치열하다. 민주당 김용남·국민의힘 유의동·조국혁신당 조국·진보당 김재연·자유와혁신 황교안 후보가 출마해 그야말로 용쟁호투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이러니 평택 국회의원 후보는 훤히 꿰고 있어도 평택 시장에 누가 나왔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1400만 명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경기도지사 선거조차 평택을에 가려 별 관심을 못 받고 있다. 뜨거운 부산 북갑 국회의원 보궐선거 때문에 부산시장이나 교육감 선거까지도 시들하게 비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는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국회의원직을 사퇴해 함께 치러지는 국회의원 보선 지역이 모두 5곳이나 된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축제인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전국 14곳의 국회의원 재보선은 주인공을 들러리로 전락시키는 심한 ‘민폐 하객’인 셈이다. 지난달 전남 순천 송광사에 갔다가 삼청교 중심에서 여의주를 문 용머리 돌을 만났는데 이름이 ‘공복’이었다. ‘용생구자(龍生九子)’, 용의 아홉 자식 중에 물을 좋아하는 ‘공복’이 다리가 무너지지 않게 지켜주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사실 개천에서 용이 나도 여의주를 물고 승천해 버리면 용만 좋지, 개천은 뭐가 좋나 싶다. ‘용꿈’이 나쁘다기보다 지역에는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공복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서울 집중 때문에 생겨났다. 모든 권력이 중앙정부에 집중되면 지역이 무시되기 쉽다. 지방선거는 중앙 권력을 지방으로 나누어 지역 스스로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치른다. 지역 권력을 감시하고 지난 4년간의 행정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이기도 하다. 지방선거의 주인공은 지방이다. 지금처럼 국회의원 재보선이 지방선거의 이슈를 잡아먹으면 풀뿌리 민주주의가 흔들리게 된다. 유권자들이 국회의원 재보선에만 관심이 쏠려 우리 동네 구청장·시의원·구의원 후보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후보는 후보대로 답답해서 아우성이다. 힘들게 쌓아 올린 한국 민주주의가 개인의 정치적 체급 올리기 때문에 흔들려서야 안 될 일이다. 걱정되는 지점이 또 하나 있다. 이번에 선출되는 구청장이나 광역의원들이 중간에 사퇴하고 2028년에 치러질 총선에 나설 때 말릴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나 구청장은 지역 조직·생활 민원·예산을 직접 다루기 때문에 국회의원 후보로 성장하기 좋은 자리다. 총선에 한번 나왔던 사람이 구청장이 되어 인지도가 높아지면 다시 국회의원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쉽다. 이번 재보선처럼 국회의원 사퇴하고 광역단체장 나가는 건 놔두면서 기초단체장들이 총선 못 나가게 막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선출직 공무원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사직할 권리가 인정된다. 하지만 법적으로 자유롭다고 해도 정치적으로는 유권자와의 약속 위반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임기 도중에 그만두면 추진하던 사업이나 정책의 연속성이 끊어지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중도 사퇴로 인해 발생하는 재보궐선거 비용도 전액 세금으로 충당된다. 앞으로는 외국처럼 ‘중도 사퇴 시 일정 기간 출마 제한’이나 ‘사퇴 시 선거비용 부담’ 같은 예방 장치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보름 앞으로 다가온 이번 지선에서도 후보들은 임기를 끝까지 채운다고 약속하고, 늦었지만 공약에도 집어넣어야 한다. 유권자에 대해 책임지는 정치를 해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방선거의 주인공은 지방이다.
[노트북 단상] 판결문, 무너진 삶을 일으켜 세우는 첫 문장
“결코 여러분이 부족해서 이런 피해를 당한 것이 아닙니다.” 2024년 1월 피해자 229명을 양산한 부산의 180억 원대 전세사기 사건 선고 직후. 부산지법 동부지원 형사1단독 박주영 부장판사는 준비해 온 종이를 꺼내 피해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시 그는 검찰 구형량인 징역 13년보다 더 무거운 징역 15년의 법정 최고형을 선고했다. 이후 그해 말 해당 판결은 대법원에서 최종 확정됐다. 지난달 부산에서는 또 다른 전세사기 사건에서 중형 선고가 나왔다. 부산지법은 무자본으로 빌라를 지어 전세사기를 벌인 혐의로 기소된 건축설계사무소 대표 A 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고 피해자 2명에게 4억 원에 가까운 배상을 명령했다. A 씨는 지난 2018년 연제구에 18가구 규모의 빌라를 준공한 후, 보증금을 돌려줄 능력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3년 5개월 동안 12건의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며 총 11억 원의 보증금을 가로챈 혐의를 받는다. 전세사기는 단순한 재산 범죄를 넘어선다. 특히 사회 초년생과 청년층이 집중적으로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삶의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사회적 재난에 가깝다. 몇 년 전 부동산 가격 폭등 속에서 확산한 무리한 갭투자와 부실한 임대시장 관리, 허술한 제도는 전국에서 수많은 피해자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정작 법정에 선 피해자들이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 중 하나는 의외로 ‘소외감’이다. 재판은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판결문은 법리 중심으로 작성된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고통은 때로 ‘피해 금액’과 ‘양형 사유’ 몇 줄로 압축된다. 법정은 공정해야 하지만, 동시에 지나치게 건조해지기 쉽다. 이유가 있다. 실제 법조 기자가 접하는 다수의 판결문은 정형화된 문장 구조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판사 개인의 고민이나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 사건이 과도하게 몰린 현실 속에서 형사재판 역시 점점 처리 중심으로 흘러간다. 법관들 또한 수십 건의 사건을 소화해야 하는 환경 속에서 기계적인 판단으로 기울기 쉬운 구조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박 부장판사의 판결이 주목받았던 것은 단순히 형량 때문만은 아니었다. 피해자들을 향해 “여러분 잘못이 아니다”라고 직접 말한 장면은, 사법부가 피해자의 삶과 감정을 어디까지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특정 판사 개인의 ‘따뜻함’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왜 피해자의 고통을 언급하는 판결문이 특별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왜 인간적 언어가 담긴 재판이 드물게 느껴지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자는 과거 박 부장판사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인상적이었던 건 의외로 그의 경계심이었다. 그는 “따뜻한 법관처럼만 비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형사사법절차는 어디까지나 엄격하고 공정해야 하며, 판사는 감정보다 법리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 말은 오히려 중요한 균형점을 보여준다. 사법부의 역할은 무조건적인 공감이나 감상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법정은 냉정해야 하고 판결은 객관적이어야 한다. 다만 전세사기처럼 삶의 존엄마저 무너뜨리는 구조적 재난 앞에서는, 피해자를 단순한 사건 기록 속 객체로만 남겨두지 않으려는 사법부의 고민 역시 필요하다. 사법부가 보여줘야 할 것은 단지 엄한 형벌만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 판결문은 사건의 끝이 아니라, 무너진 삶을 다시 붙잡기 시작하는 첫 문장일 수도 있다.
[2030 칼럼] 약점을 품어 가능성으로
바쁜 도시에 살다 보면 절로 몸에 배는 암묵적인 규칙 같은 것이 있다. 그중 하나는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한 줄 서기이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위해 좌측을 비워두는 것은 어느새 도시의 공중도덕으로 자리 잡혔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서울에서 일을 시작한 후, 나도 그 속도에 물들었다. 하지만 안전을 고려할 때 한 줄 서기는 권장되는 행동은 아니다. 지하철 역사에도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걷지 마시오.” 부산으로 돌아와 지하철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려다 그 옆에 커다랗게 놓인 현수막을 발견하고는 미소가 지어졌다. “눈치 보지 말고 두 줄로 서세요.” 에스컬레이터 양쪽으로는 발자국이 두 개씩 그려져 있기도 했다.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한 줄로 비켜서기 어렵다. 아이 손을 잡은 부모도 에스컬레이터 한쪽을 비워두려면 오히려 더 불편한 자리에 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하철에 올라타니 이번에는 각 전동차의 맨 앞과 뒤에 있는 교통약자석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탄 부산 지하철 1호선에는 교통약자석이 4개씩 마주 보게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서울에서 보던 것보다 넉넉한 규모였다. 고령 인구가 많은 부산의 형편을 고려한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뿌듯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5월 가정의달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할머니를 모시고 동네의 유명 카페를 찾은 날이었다. 1층에서 함께 빵을 고르고 2층 카페에 오르려던 찰나,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게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는 한 손으로 난간을, 다른 한 손으로 내 손을 꽉 잡고 2층까지 올라야 했다. 체구도 작고 몸도 가벼운 분인데, 계단을 오르는 내내 손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나도 진이 빠질 정도였다. 2층은 연휴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여럿 보였다. “서울과 달리 부산에는 멋진 곳에도 어르신들이 많아서 보기 좋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지만, 이내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오르내렸을 계단이 떠올랐다. 고층도 아니고 고작 2층뿐이지만, 휠체어는 물론 노인 보행기는 계단 한 칸도 오르지 못한다. 고령 인구가 유독 많은 동네에서 새 단장을 한 카페에 엘리베이터 하나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도시는 늘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변모한다. 부산시 또한 여러 변화에 직면해 있다. 이미 맞이한 초고령사회인 부산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의 24%를 넘어 광역시 중 가장 빠르게 늙어가는 도시가 됐다. 이와 맞물려 청년인구는 꾸준히 유출되고 있다. 원래부터 관광도시였지만, 최근에는 더 많은 여행자의 사랑을 받으며 외국인 여행자 수가 늘어나고 있다. 다문화 가정을 이룬 이웃들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현상들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도시의 다양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이나믹 부산’에서 ‘Busan is good’이 된 지금, 이 도시는 다양한 사람들을 품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을까? 고령화는 그 질문의 출발점이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고령화 사회에 대처하는 방식이 곧 다양성을 수용하는 첫 번째 연습이 되는 이유다. 〈마이너리티 디자인〉의 저자 사와다 도모히로는 말한다, “사람은 모두 무언가의 약자이며, 소수자다.” 모든 도시에는 보이지 않는 기본 사용자가 있다. 빠르고, 젊고, 디지털에 익숙하고 몸이 건강한 사람. 계단은 그 사람을 기준으로, 키오스크는 그 손가락에 맞게 설계되곤 한다. 하지만 건장한 청년의 이동권에서 벗어나 보면 시각이 달라진다. 기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시는 이미 충분히 좁다. 어르신, 휠체어를 탄 장애인, 아이와 함께하는 부모, 무거운 짐을 든 여행자. 설계가 그들을 처음부터 상상하지 않았을 때, 그 좁음은 벽이 된다. 이들 역시 도시가 당연히 품어야 할 사용자인데 말이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였고, 청년을 지나 노년을 맞이할 것이다. 지금 키오스크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어르신의 모습이 먼 훗날 나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 이를 개인의 서툶으로 넘길 일은 아니다. 도시의 효율이 누군가에게는 긴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불편함을 도시의 과제로 읽어내는 일, 그리고 그것을 정책으로 옮길 사람이 누구인지 묻는 일이 남았다. 가장 느린 사람까지 상상하는 도시가 가장 다양한 사람을 품고, 결국 가장 많은 사람이 살고 싶은 도시가 되지 않을까. 눈앞의 작은 것을 제대로 보는 사람이 부산의 미래도 제대로 설계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편집국에서] 엘시티와 까르띠에
엘시티와 까르띠에. 6·3 지방선거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면서 최근 더불어민주당 전재수 부산시장 후보와 국민의힘 박형준 후보가 상대방을 공격하는 키워드다. 네거티브는 자극적이고 직관적이다. “그래서 까르띠에를 받았냐. 안 받았냐” “그래서 엘시티는 왜 안 파냐. 언제 팔 거냐”. 이게 요지다. 이해하기 아주 쉽다. 자신의 일상에 바쁜 정치 저관여층 유권자들에겐 이보다 더 어필하기 좋은 주제 거리는 없다. 그래서 ‘네거티브는 안 할 거다’라는 후보들도 막판 선거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한 번쯤 유혹에 빠진다. 2, 3등 후보들에겐 이보다 더 좋은 먹잇감은 없다. 전재수와 박형준. 진보와 보수 양 진영에서는 극좌와 극우가 아닌 비교적 합리적인 인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선거 초반엔 그래도 신사적인 이미지에 걸맞게 상대방에 대한 비난보다는 정책이 주를 이뤘다. 북항의 돔야구장, 영도 아레나 등은 신선했다. 언론은 물론 부산 시민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하지만 이들도 정치인이다. 선거가 정점에 달할수록, 판세가 접전일수록, 강렬한 네거티브라는 자극제가 필요했다. 이들 선거 캠프에서는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겠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새로운 팩트가 나오는 것도 아닌, 그저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이라고 생각하는 약점을 잡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X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부산 시민의 입장에선 슬프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라는 말로 위안받기에는, 이 같은 법적 혹은 도덕적 결함이 없는 인사가 부산시장 후보였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부산시장 못지않은 중요성을 가지는 부산시교육감 선거다. 현재 출마한 후보 3인 모두 사법리스크를 안고 있다. 아직까지 별다른 공약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부산시교육감 선거의 키워드는 사법리스크와 단일화뿐이다. 유권자들이 평가할 게 없다. 누가 당선돼도 법원 판결에 따라 재보선을 치러야 한다는 현실과 교육감 선거마다 항상 따라다니는 각 진보진영과 보수진영 단일화에 이제는 식상을 넘어 염증을 느끼게 된다. ‘부산에 이토록 인재가 없나’라는 자조적인 말이 나온다. 전국적으로 뜨거운 관심을 받는 국회의원 북갑 재보선은 또 어떠한가. ‘진짜 북구 사람’이 누구냐는 정체성 논쟁부터 ‘손 털기’ ‘카메라맨 꽈당’ 등 가십성 보도가 주를 이룬다. 나아가 빼놓을 수 없는 단일화 이슈만 매일 신문과 방송을 도배하면서 유권자들의 진을 빠지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투표를 안 할 수는 없다. 어쨌든 선택해야 한다.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해서, 또다시 ‘정책을 보라’ ‘일 잘하는 사람을 뽑아라’는 원론적인 말을 꺼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해달라. 최근 몇 차례의 대통령 선거에서 보듯이 일 못하는 사람과 일 잘하는 사람에 대한 효용성은 이미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이 때문에 〈부산일보〉는 6·3 지방선거 보도에서 ‘정책 검증’에 천착하고 있다. 각 후보자의 네거티브 언사, 가십성 기사, 단일화 이슈보다는 정책에 대한 분석과 평가를 지면에 전진 배치함으로써 지방선거를 정책 선거로 이끌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어떤 중앙지나 지방지보다도 많은 지면을 지방선거에 할애하고 있다. ‘블라인드 정책 오디션’ ‘PK 기초지자체 격전지 분석’ 등 각종 기획 시리즈를 게재하면서 유권자들의 바른 선택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또한 ‘HMM 반쪽짜리 본사 이전 우려’ ‘오페라하우스의 라 스칼라 공연 논란’ 등의 보도로 각각 전재수·박형준 후보의 경제·문화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선거판을 흔드는 화두를 제시했다. 물론 이 같은 보도로 양측 캠프로부터 볼멘소리가 나올 수도 있고 때로는 각 진영을 지지하는 독자들로부터 〈부산일보〉의 정파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기사 댓글은 온갖 정치색을 띤 말로 도배되기도 한다. 하지만 〈부산일보〉는 후보들의 말만 그대로 따라 쓰는 ‘받아쓰기’ 언론이 아니다. 〈부산일보〉의 모든 기자들은 공정 중립을 지향하며,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지 않는다. 자극적인 기사 대신 정책을 검증하는 기사는 일견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어느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 기사는 일부 독자들에게 외면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의 미래를 이끌 지방선거에서 일 잘하는 사람을 뽑기 위해서는 〈부산일보〉를 보라. 〈부산일보〉의 정책 검증 기사를 읽으면서 선택의 순간에 조금이나마 도움받기 바란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국 남는 것은 엘시티와 까르띠에뿐이다.
[김은영의 문화시선] '작은 미술관'도 도시 숨결
서울 성북구립 최만린미술관,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 부산 중구의 복병산작은미술관. 이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주택을 개조해 만든 구립(또는 공립) 미술관이라는 점이다. 경남 거제의 해조음 미술관 역시 같은 맥락에 놓인다. 비록 임시적 선택에서 출발했지만, 주택을 매입해 리모델링한 뒤 미술관으로 전환했다. 해조음 미술관은 현재 부산·경남 작가들의 작품을 시대별로 정리해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사립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시도 자체가 이미 의미가 있다. 대구 수성구의 ‘스페이스 들안’(가칭)은 이러한 흐름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킨 사례다. 주택과 도심 유휴 공간을 리모델링한 이 프로젝트에는 약 41억 원의 공공 예산이 투입됐다. 지하에는 수장고와 전시 공간을 확보하고, 지상에는 사무 공간을 배치해 기존 주택 개조 미술관이 안고 있던 구조적 한계를 보완했다. 무엇보다 주목할 지점은 이 과정 전반을 구청이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공간 재생을 넘어, 지역 문화 인프라를 전략적으로 구축하려는 행정의 의지가 읽힌다. 프랑스의 저명한 미술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인 앙리 프랑수아 드바이유 방한 소식을 듣고 돌아본 경주의 더안미술관은 또 다른 결을 보여준다. 전통 한옥 구조를 기반으로, 200년 된 고택에서 영감을 얻어서 만들었는데 전시와 컬렉션이 남달랐다. 설립자인 백진호 관장은 한의원과 미술관을 하나의 철학 아래 묶는다. 몸의 균형을 회복하는 의학과 감각과 내면의 균형을 일깨우는 예술은 하나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공립 미술관과는 다른 방식이지만, ‘작은 미술관’이 어떤 깊이를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 지점에서 질문은 자연스럽게 부산으로 향한다. 부산은 공·사립을 통틀어도 미술관 인프라가 충분하다고 보기 어렵다. 대형 미술관의 유치와 운영에만 시선을 둘 것이 아니라, ‘스페이스 들안’과 같은 방식의 소규모 공공 미술관을 적극적으로 실험할 필요가 있다. 도시의 문화적 위상은 몇몇 상징적 건축물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골목과 생활권 곳곳에 스며든 작은 공간들이 도시의 호흡을 만든다. 대형 미술관이 막대한 예산과 관람객을 전제로 안정적인 기획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작은 미술관’은 그보다 훨씬 가볍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다. 실험적인 전시, 지역 작가에 대한 지속적인 조명, 동시대 담론에 대한 민감한 반응은 이런 공간에서 더 잘 가능하다. 물론 전제는 필요하다. 지속 가능한 운영을 위해서는 기획 예산을 포함한 안정적인 재원 구조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짓는 일’이 아니라 ‘지속하는 일’이다. 부산이 지금 고민해야 할 것도 바로 그 지점이다.
[오션 뷰] 부산항, 이제는 크루즈를 꿈꿔야 한다
6·3 지방선거는 지역 권력 재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16개 시도지사와 교육감, 수많은 기초단체장과 지방의원을 새로 뽑는 이번 선거는 대한민국의 미래 방향성을 가늠하는 정치적 분기점이 될 것이다. 특히 부산은 그 어느 때보다 복합적인 정치 지형 위에 서 있다. 중앙 정치와 지역 정치의 균열, 여야의 역학 관계, 그리고 지방소멸이라는 국가적 과제가 부산이라는 도시 위에서 교차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분명한 사실 하나는 부산의 미래가 바다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는 공감대다.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예외 없이 해양산업을 핵심 공약으로 제시했다. 물론 세부적인 비전과 접근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가 도시의 품격을 결정할 것이다. 부산은 오래전부터 해양수도를 자처했다. 그러나 정작 해양수도란 무엇일까를 자문하는 노력은 등한시한 것 같다. 해양수도란 항만 물동량이 많거나 조선소가 밀집한 도시를 뜻하는 게 아니다. 세계적인 해양도시는 산업과 물류를 넘어 사람과 문화, 관광과 소비가 바다를 통해 흐르는 도시다. 그 변화의 중심에 크루즈산업이 있다. 미국 마이애미와 스페인 바르셀로나, 싱가포르와 홍콩은 크루즈를 단순한 관광상품으로 보지 않는다. 도시의 관문이자 국가 브랜드 전략으로 활용한다. 크루즈선이 얼마나 입항하는지, 얼마나 많은 승객이 머물며 소비하는지가 도시 경쟁력을 대변하는 시대다. 부산 역시 산업항 시대를 지나 ‘미항(美港)’으로 진화해야 한다. 지금의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은 그런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하루에도 수천 명의 국제여객과 크루즈 승객이 오가지만, 정작 승객들이 머물고 소비하며 부산의 매력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은 부족하다. 세계적인 크루즈터미널의 경쟁력은 외관과 함께 규모, 입출국 수속 속도가 중요하다. 입국에 두 시간, 출국에 한 시간이 걸리는 항만은 글로벌 크루즈 시장에서 선택받기 어렵다. 관광객에게 시간은 곧 돈이다. 그렇지 않아도 제2크루즈터미널 논의가 조심스레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갑자기 늘어난 수요에 임시방편으로 급하게 대응하려는 생각은 부산의 미래를 오히려 망칠 수 있다. 그럴듯한 건물을 하나 더 짓는 데 그치지 말고 부산의 새로운 랜드마크를 만든다는 사명감을 부산시장 후보들이 가지면 좋겠다. 최소 3~4개의 갱웨이를 동시에 운영할 수 있는 시스템, 입국과 동시에 관광과 쇼핑, 문화가 연결되는 동선 설계, 터미널 자체가 소비와 체험이 살아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북항의 랜드마크 부지를 크루즈터미널로 활용하는 큰 그림을 조심스럽게 제안한다. 북항 재개발 사업이 마무리된 지 수년이 지났지만 랜드마크 부지 활용안은 여전히 겉돌고 있다. 이 공간을 부산 크루즈 시대를 여는 핵심 거점으로 활용한다면 부산과 북항의 도시 브랜드를 동시에 강화할 수 있다. 부산역과 북항, 국제여객터미널, 그리고 미래의 제2터미널을 하나의 거대한 해양문화축으로 연결하는 상상도 가능하다. 공중보행로와 복합상업시설, 야간관광 콘텐츠가 유기적으로 결합한다면 원도심 전체를 살리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의 원도심은 자체 수요 창출이 어려운 구조다. 최근 국제정세 변화로 중국발 크루즈선이 부산으로 몰리고 있다. 하지만 외교 환경이 바뀌면 썰물처럼 빠져나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부산의 매력을 세계에 각인시킬 골든타임이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도 든다. 마침 부산 크루즈업계 종사자들이 힘을 모아 부산크루즈산업협회를 출범시켰다. 선사와 여행사, 대리점 등이 참여했고 크루즈산업 발전을 위한 데이터 구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접안과 동시에 관광이 시작되는 시스템, 세계적인 크루즈항의 기본 경쟁력을 갖추는 노력도 함께하고 있다. 크루즈는 결코 행정 논리로 성장하는 산업이 아니다. 민간의 상상력과 시민의 공감, 그리고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민 공감이다. 시민이 어떤 상상을 하느냐에 따라 크루즈산업도 도시의 미래도 달라진다. 북극시대는 그런 공감 속에서 상상하고 실현해 나갈 수 있다. 부산~북극~유럽으로 이어지는 북극 컨테이너 항로 개발은 물론이고, 부산을 모항으로 일본 와카나이(홋카이도 최북단)~사할린 섬~북극으로 연결하는 크루즈 루트 개발을 선제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유럽에 가지 않아도, 미국의 알래스카 크루즈가 아니라 부산에서 빙하와 오로라를 경험하는 북극 크루즈 투어를 상상해야 할 것이다. 부산은 잠재력이 큰 도시다. 이번 부산시장 선거는 단순한 정치적 승패를 넘어 해양수도 부산의 미래를 진지하게 설계하는 시간이 돼야 한다. 부산항은 ‘세계적인 미항’을 꿈꾸고 만들어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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