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대통령이라는 시대정신
변정희 전 (사)여성인권지원센터 '살림' 상임대표
대통령 선거는 한국 사회 축소판
시대착오적 발언 남발에 더 실망
보수화와 여성 정책 실종도 뚜렷
성별은 정치적 계산 때만 등장해
여성 정책은 진영으로 설명 곤란
후보의 가치관 실종 아쉬운 이유
대통령 선거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계엄과 탄핵의 결과로 이어진 이번 선거는 민주주의의 위기 극복, 경기 침체와 불황의 돌파구로서 더욱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전문가들은 이번 선거의 핵심 키워드로 사회통합과 갈등해소를 꼽았고, 개헌 논의까지 굵직한 정치 과제들이 많은 만큼 변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도 크다. 그러나 역대 선거 중 가장 늦은 공약집 제출, 통합이라는 키워드가 무색할 정도의 네거티브 공방전으로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역대급 ‘노잼’ 선거라는 일각의 평가와 달리 선거운동 기간 내내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보여주어 마지막까지 조금의 긴장도 늦출 수 없다.
우선 시대착오적 발언들이 오갔다. 첫 신호탄은 김문수 후보가 쏘아 올렸다. 동료 여성 정치인을 ‘미스 가락시장’ 운운하며 낮은 성인지 감수성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후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안은 아니지만 판사의 룸살롱 접대 의혹을 두고 벌어진 공방에서 개혁신당의 함익병 공동선대위원장은 “내 나이 또래면 룸살롱 안 가본 사람이 없다”고 공개 발언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2004년 성매매 방지법이 시행될 당시 한 정치인이 성구매자 처벌에 반대하며 “(그렇게 되면) 남자들이 대부분 감옥에 갈 것”이라고 말한 것을 연상시킨다.
이번 대선의 또 다른 특징으로 전반적인 ‘보수화’와 ‘여성정책의 실종’을 꼽는 전문가들도 있었다. 광장의 주역이 2030세대 여성들이라는 평가와 별개로 각 후보 캠프에서 발표한 10대 공약에 ‘여성공약’이라고 할 만한 정책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여성정책의 실종은 적어도 이번 선거에서의 문제의 핵심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모두는 역대급 불황이라는 경제적 위기 속에 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힘이 민주적인 정치제도라는 것을 공감하는 보통의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2030세대 여성들은 물론 남성들이 당면한 문제는 똑같이 주거와 일자리와 같은 공통의 문제이며, 여성들의 경우 거기에 더해 안전의 문제까지 정책적 고민이 더 필요한 상황일 뿐이다.
사실 여성정책은 애초 진보나 보수의 의제로 뚜렷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박근혜 정부에서 성폭력이나 가정폭력 대응 정책이 강화되었던 것처럼 보수적 성격의 정부에서 더 적극적인 여성정책을 내어놓는 경우도 있다. 성폭력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이 보다 성평등한 사회를 앞당겨줄 것이 자명하다면 여성의제는 진보 프레임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여성의 정치세력화나 평등 의제를 적극 주장하는 여성운동 역시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문제는 여성정책을 고민하고 생산하는 정치 주체들의 가치관 실종이다. 성별은 표 계산을 위한 정치공학적 수단으로만 등장하는 것 같다. 보수든 진보든 각자의 가치 속에서 어떻게 여성과 돌봄, 안전과 같은 사회적 이슈들을 정책화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을 때 그 결과는 상상력의 빈곤으로 드러난다. 더불어민주당은 비공식적으로 ‘출산가산점제’ 공약을 언급하여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 국민의힘은 위헌적인 ‘군가산점제’를 다시 띄우며 채용갈등을 부추긴다는 비난을 받았다. ‘새로운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젊은 대통령 후보로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 이준석 후보는 굳이 1호 공약으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내세우며 여전히 반여성주의와 성별 갈등을 정치적 지지기반으로 삼고자 하는 것 같다.
지난달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2023년 국가성평등지수’는 65.4점으로 2022년(66.2점) 대비 0.8점 줄었다. 윤석열 정부 집권 1년 만인 2023년에 사실상 처음으로 하락했다. 지난 3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선진국 ‘유리천장 지수’에서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각자의 우선순위는 다를 수 있지만, 여기에 문제의식을 갖고 어떤 방향이 더 나은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테면 같은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더라도 성평등 정책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는 정부 부처 개편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쪽도 있을 수 있다. 여성가족부에서 추진해 온 정책들의 더 나은 방향 모색을 위하여 새로운 그릇에 담아보겠다는 의지적 표현이라면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 사회에서는 건강한 토론과 정책 생산이 시작될 것이다.
비상계엄과 탄핵의 결과로 이어진 대선인 만큼 민주주의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 국민의 염원이자 의지일 것이다. 시대의 열망에 부응하는 방법은 어떤 사회의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후보들의 가치관과 사상이다. 대통령 후보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고, 유권자로서 투표를 통해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다시 만난 세계’ 가사 중)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라는 희망도 함께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