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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문화의 힘으로 정의와 민주주의를 긷다
최근 부산과 서울 등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부산광역시중구문화원에 모여 우애를 다진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한국작가회의 본회 소속 작가들이 지역을 순회하면서 집담회 형식의 대화를 하는 행사인데, 이번에 부산지회에서 열린 것이다. 중구 대청동에 있는 중구문화원 2층에 촘촘히 들앉은 회원들과 발제자 및 토론자들의 열띤 음성이 인상적이었던 행사였다. 두 번째 발제자였던 나는 발제에 앞서 중구문화원의 내력과 함께 복병산 일대와 대청동에 포진한 문화유산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였다. 참석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대청동, 광복동, 중앙동, 동광동, 부평동, 보수동 등 이른바 ‘원도심’을 형성했던 공간이 지닌 의미를 짧게나마 언급하고 소개하는 게 멀리 일부러 찾아온 서울 손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의 주제는 ‘더 많은 정의,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하여’였다. 다소 무겁고 거창한 주제여서 발제 내용을 구성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1678년 용두산공원 일대에 조성된 초량왜관 시대와 개항 및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쳐 한국전쟁의 상흔과 뒤이은 피란민들의 유입 등 부산이 역사적으로 빛과 그늘을 동시에 쐰 도시였다는 사실과 행사의 주제를 아우르고 싶었다. 중요한 점은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시위 행렬이 광복로와 대청로를 가득 메웠다는 점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 때에도 도심지였던 서면 일대와 함께 원도심의 간선도로가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는 시민들에게 열린 광장의 기능을 담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부산이 지켜온 정신적 기질 되살려
시민 자존감 회복하는 동력 삼아야
도시 곳곳 문학적 색채 적극 활용을
행사를 마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일행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가는 중간중간 설명이 필요한 도로나 건물이 보이면 그 공간이 지닌 의미를 전달하였다. 부산타워가 보이는 대청로를 끼고 용두산공영주차장 근처에 있는 적산가옥과 영화체험박물관을 가리키며 잠깐 설명을 마치고 저녁 뒤풀이가 예정된 식당으로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평소 손님이 많아 점심시간에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먹기가 힘들었던 식당이었다. 예약 인원보다 한 테이블 가량의 인원이 더 참석하여 더욱 분주한 자리였다. 부산과 서울 등지에 터를 잡고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들의 상견례를 겸한 자리여서인지 분위기는 차분하면서도 생기를 띠었다.
문학이 ‘정의’와 ‘민주주의’에 보탬이 되는 요소가 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꿈을 언어로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법률과 제도가 규제하지 못하는 온갖 부정적인 인간의 속내와 언행을 폭로하고,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구를 형상화하는 문학의 기능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다. 폭풍우처럼 휩쓸고 간 거리 곳곳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간 맑은 영혼이 있는 반면에,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의 피와 살을 희생하고자 하는 검은 영혼이 있다. 일제의 강점으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고, 해방이 찾아왔지만 이념 갈등으로 분열되고, 더욱이 한국전쟁으로 무수한 파괴와 살육이 진행되었던 속에서도 이곳 부산이 지켜온 정신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다.
밀물과 썰물처럼 온갖 사람과 물자가 빠져나가고 들어오는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시나브로 정착하게 된 문화와 정신은 현재 새로운 도시공간으로 탈바꿈하려는 기지개를 켜면서 그 알곡을 펼쳐 보여야 하는 때에 다다랐다고 본다. 세계유산위원회가 내년 부산에서 개최되면서 이곳의 위상이 한층 도약하는 계기가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시민들에게 안겨다 주었던 자존감 상실을 회복하는 일이다. 한때 서울 다음가는 대도시로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때가 있었다. 산업화 시기 부산은 청년들의 꿈과 희망을 보상해 준 도시이자 해양산업의 요충지로서 산업과 무역의 플랫폼 기능을 담당했던 공간이었다. 그런 도시였던 부산이 처한 현실을 감안하면 지금도 부산을 지키면서 부산 사람만의 기질과 인정을 지니고 베풀고 있는 지역민의 자존감을 되살리는 방법 가운데 문학도 능히 포함될 수 있다.
용두산공원 일대가 그동안의 번영과 쇠락을 거듭하는 중에 알게 모르게 형성한 문학적 색채를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시민들에게 뚜렷하게 각인되지 않았지만 여러 문화예술인의 마음으로 유전되어 온 언어의 쉼터, 다시 말해 시인의 체취가 군데군데 남아 있는 곳이다. 그중 하나가 부산 시단의 지킴이로서 동광동 백산기념관 부근 ‘강나루’란 주점을 운영하며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인들을 품었던 고 이상개(1941~2022) 시인의 3주기가 곧 다가온다. 그 주점에서 문화예술인들은 정의와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일상의 속살까지도 조곤조곤 나누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혁명까지도 말할 수 있었던 10평 남짓한 그 공간에 가을밤 어둠이 무겁게 가라앉아들 시각, 시인의 조용한 음성이 우리들 등을 어루만지는 듯한 늦여름이다.
2025-08-2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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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꿈에 그리던 ‘평양비엔날레’
“전쟁 통에 북으로, 남으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한국 근대사의 예술가들! 북으로 가족을 따라, 미군의 체포를 피해 떠났던 이쾌대 선생, 이석호 선생, 정을녀 선생, 정종여 선생. 그리고 40여 명의 선생들! 또 남으로 가족과 형제를 따라 남하한 원산항에서 출발하여 끝내 터를 잡지 못한 이중섭 선생, 한묵 선생, 장리석 선생, 박항섭 선생, 최영림 선생. 이처럼 훌륭한 선생들이 계셨기에 지금 우리는 성장할 수 있었고, 역사의 흔적을 따라 오늘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문화의 힘을 빌려 그간의 상처와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의 남과 북, 북과 남의 동질성을 이해해 가는 단초로 이 ‘평양비엔날레’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만천하에 우리는 처음부터 한민족이었다는 것을 당당하게 공표하는 것으로 그 서막을 엽니다. 그간 주변 열강의 지정학적 역학 관계 등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오랜 시간 나누어지고, 떨어져 서로 비방하기도 했지만, 굳건하게 견뎌 왔습니다.
오늘은 남과 북, 북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펼쳐 보이는 자리인데 이념을 떠나 한 민족으로서 말과 얼굴 그리고 문화 또한 언제나 하나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미술 잔치가 단초가 되어 더 많은 교류와 연대, 협력의 문화를 통해 통일의 그날이 올 때까지 천천히 갑시다. 그리고 서로를 인정하고 기다려 주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화해와 공존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서로의 실체를 확인하고 어루만져주며 ‘분단의 미술의 역사’를 한 민족으로 엮어 ‘통일의 미술사’를 재창조해야 하겠습니다. 남의 유채꽃, 북의 진달래가 만발할 때 우리 다시 만납시다. 어디든 어떻습니까. ”
잠에서 놀라 깨어났다. 너무나도 현실 같은 꿈속의 장면이었다. 며칠 전 광복 80주년 광복절 행사는 온 국민과 함께 다시 찾은 민주주의를 확인하며 서로 격려해 주는 축제 한마당으로 펼쳐졌다. 이번 광복절을 특별하게 느끼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헌정 질서 정상화와 국민주권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자리였기도 한 축제 한마당이었으니 말이다. 뜨거운 그날의 함성과 기운에 힘입어 꿈속에서 ‘평양비엔날레’가 열리고 개막식 개회사가 들려오다니 가슴 벅찬 기분이 든다. 잠시 물 한 사발 마시고 생각해 보니 마냥 낭만적인 꿈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생겨날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꿈으로 휘발되기 전에 꼼꼼히 기록해 둬야겠다. 제1회 ‘평양비엔날레’ 전시 감독!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다시 통일을 맞이하는 날을 접했다. 그 초석은 수상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1977년 ‘카셀 도큐멘터’에서 동독과 서독 미술가들의 불화가 오히려 두 나라가 통일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세계 미술사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세계 3대 미술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카셀 도큐멘터’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1980년대 초 ‘독일적인 미술’의 전통을 잇고자 하는 ‘젊은 야수’ 그룹의 등장과 그 변화를 추적하는 미술사학자들의 연구와 노력은 독일의 통일을 이루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독일 정부는 통일 기념행사로 독일 전역에 예술가들이 설치 작업을 할 수 있게 했으며 대주제를 ‘자유의 극한’으로 정했다. 작가들이 얼마나 통일의 자유를 갈망했는지를 미술로 표현해 주기를 기대했다. 과거에는 정치가 권력의 매체로 미술을 사용하였지만, 매체가 된 미술은 이제 그 매체를 통해 정치와 권력에 대항하고 국민의 자주적 목소리를 연대하는 세월을 맞이하였다. 동독 출신 극작가 하이너 뮐러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의 시간은 정치 또는 역사의 시간과 다른 것이다”라고.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없었던 이야기는 아니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섹션 중 하나로 ‘북한미술: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패러독스‘전이 열리면서 세간의 이목을 모았다. 광주비엔날레 재단과 광주시는 다음 해에 평양비엔날레 계획을 추진한 바 있었으나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민간에서도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이 주축이 되어 남북이 공유하는 기념일인 6·15와 8·15에 맞춰 대규모 전시회를 계획한 바 있다. 성공되지 못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좌초되었고, 불안한 남북 관계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부처의 예산 편성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일들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 이재명 정부에서는 문화예술 분야의 남북 교류 협력에 적극적인 실행력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20년 만에 다시 돌아온 통일부 장관의 의지, 부처 간의 협력체계를 강조하는 이번 정권에서 반드시 이를 시도해 보아야 한다. 지금이 적기다. 부산에도 부산비엔날레 조직위가 있고, 그동안 축적한 경험이 충분하다.
2025-08-2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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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케이팝 데몬 헌터스, 자기 수용의 정신적 여정
2025년 6월 20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한 애니메이션 뮤지컬이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악귀 퇴치 액션을 넘어, 한 개인의 영적 성장을 탐색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케이팝 트리오 헌트릭스는 팝스타와 악귀 사냥꾼으로 이중생활을 하며, 음악으로 정신적 방패인 혼문을 형성하여 악귀들로부터 인류를 지킨다. 그러나 서사의 깊은 층위에서는 개인이 자기 수용 여정을 통해 선악의 갈등을 화해시키는 정신적 성장을 탐구한다. 이 글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개인의 영적 성장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며, 선과 악의 화해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
영화의 표면적 서사는 선악의 뚜렷한 대립을 보여준다. 헌트릭스(루미, 미라, 조이)는 용기와 희망의 노래로 혼문을 강화하며 귀마가 이끄는 악귀 무리와 싸운다. 대표곡 ‘골든’(Golden)은 영화의 선악 이원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적인 곡이다. 이 노래는 헌트릭스가 악귀의 보이 밴드 사자 보이즈에 맞서는 순간에 등장하여, 영원히 깨질 수 없는 혼문을 건설하겠다는 다짐을 표출한다. 선악의 이분법적 설정은 선과 악은 명확하게 구분되며, 선이 악을 이겨야 한다는 전통적 투쟁 서사와 일치한다.
인간 내면 이중성 탐구 영적 성장 묘사
악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용기
경쟁 일변도 삶에 진정성 의미 일깨워
그러나 이러한 겉 이야기에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영화 속 악귀들은 기독교의 지옥 불 속에 사는 악마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한국 민속의 도깨비나 귀신을 닮았다. 이들은 인간 내면의 두려움, 수치심, 자기 회의를 상징한다. 즉 헌트릭스가 싸우는 대상은 외부의 악마가 아니라,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내면의 악마들인 셈이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루미이다. 인간 어머니와 악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루미는 자신의 악마적 흔적을 숨기며 살아간다. 이 비밀이 드러나면 동료들과 팬들에게 외면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부정과 수치심은 그녀를 깊은 영적 불안, 즉 동요(desolation)의 상태에 빠뜨린다. 예수회 창시자인 이냐시오가 언급한 것처럼, 이는 혼란과 고립으로 점철된 영혼의 상태이다. 루미의 투쟁은 외부의 악귀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악마 같은’ 일부 때문에 사랑받을 수 없다고 속삭이는 내면의 목소리와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루미의 영적 성장은 월드 아이돌 어워즈를 앞두고 찾아온다. 그녀는 라이벌 그룹 사자 보이즈의 악귀적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 ‘테이크다운’(Takedown)을 연습하면서 이 노래를 불러도 좋을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점점 더 루미는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 사이에 장벽을 쌓아서 악을 추방하는 식의 이분법적 접근에 의문을 품고 그 노래를 부르는데 주저하게 된 것이다. 특히 사자 보이즈의 리더 진우가 가족을 배신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그의 인간적 영혼이 악귀로 전락한 것을 목격하면서 루미는 선악이 그렇게 별개의 존재인지 헷갈리게 된다. 이 의심의 순간은 이냐시오가 묘사한 것처럼 루미가 동요에서 평온(consolation)으로 변화하는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다, 그녀는 악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통해 비로소 내면의 평온에 다가선다.
이러한 루미의 여정은 사자 보이즈 콘서트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녀는 ‘왓 잇 사운즈 라이크’(What It Sounds Like)라는 노래에서 상처도 자신의 일부임을 용감하게 인정하며 새로운 혼문을 구축한다. “거짓말 없는 내 목소리, 바로 이런 소리야.” 기존의 혼문이 선악을 가르는 장벽이었다면, 새로운 혼문은 거짓 없이 이중적 본성을 수용하는 용기와 격려이다. 루미의 변화는 어두운 면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온전한 자아로 통합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는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를 통합하는 과정과도 같다. 우리가 부정하거나 억압해 왔던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림자 작업’은 ‘골든’에도 표현되어 있다. 루미는 공포나 기대 때문에 자신의 그림자를 은폐하지 않겠다고 힘차게 외친다. “난 숨기지 않겠어. 이제 빛날 거야.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이 배경이지만, 그 핵심 주제인 자기 수용은 전 세계 관객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한 한국계 미국인이 루미의 악귀적 흔적을 미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숨겨야 했던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갈등을 건드리고 있다. 완벽함보다 진정성을 강조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치열한 경쟁과 성공의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구원의 기회를 제공한다.
2025-08-1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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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기후 재난의 시대, 건축의 과제
올여름은 말 그대로 ‘극단’이다. 사상 최장의 폭염특보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간당 1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진다. 더위와 비가 교대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겹쳐 도시를 뒤흔든다. 폭염이 더 강력한 폭우를 부르면서 극단적인 여름철 날씨가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표준)’이 됐다고 한다. 지난봄 대형 산불 피해를 입은 지역은 복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폭우로 인해 토사 붕괴가 이어졌다. 급기야 일부 마을은 집단 이주를 결정해야 했다. 한편 도심 속 열섬 현상은 계층별로 생존 가능성을 갈라놓고 있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할 수단 없이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도시 빈민들에게 유독 가혹하다. 어느새 우리는 기후 위기라는 단어를 넘어 ‘기후 재난의 시대’에 들어섰다.
기후 위기의 문제 중 중요한 것은 ‘이전과 똑같이 회복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건축 역시 예전의 논리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멋진 형태나 고급 자재, 높은 용적률을 추구하는 설계를 넘어, 기후 재난의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고 공존할 수 있을지를 묻는 건축이다.
제19회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흥미롭고도 본질적인 탐구를 시작했다. 지난 5월 15일부터 11월 23일까지 세계 50여 개국 750여 명의 건축가, 예술가, 과학자, 수학자, 기후 전문가, 철학자, 요리사, 목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초대돼 총 280개의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총감독은 도시계획 건축가이자 MIT 교수인 카를로 라티(Carlo Ratti)다. 그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지성(Intelligens) : 자연적, 인공적, 집단적’으로 제시했다. 이는 단순히 인간의 지능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연계의 복잡한 생명 시스템, 인공지능이 내놓는 패턴과 해석, 그리고 인간이 집단적으로 축적해 온 생활의 지혜 모두를 아우르는 확장된 개념이다. 그것은 공간의 미학도, 기술의 과시도 아니다.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며 창의적으로 대응하는 능력, 즉 건축이 지닌 생존의 지능이다. 카를로 라티는 “우리가 직면한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인간의 설계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 인공 시스템, 그리고 인간의 집단적 지혜가 상호작용하는 복합적 지능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이 짓는 이 건축은, 지금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자연(Natural), 인공(Artificial), 집단(Collective)’이라는 세 개의 렌즈를 통해 건축을 바라본다. 이 세 키워드는 기후 위기 속에서의 건축이 마주한 윤리적·기술적 과제를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자연’ 지능은 생태계 자체가 지닌 적응력과 회복탄력성을 가리킨다. 기후 위기 속에서 인간 중심의 도시계획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지구 생태계의 일부로서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물길을 막지 않는 저지대 주거, 땅과 건물이 호흡하는 재료의 사용, 에너지 순환을 고려한 설계 등 자연의 리듬과 기후의 변화에 순응하는 감각이 도시 설계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인공’ 지능은 첨단기술과 데이터, 인공지능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건축 언어다. 드론을 이용한 재난 감시 시스템, AI 기반 설계 도구, 기후 시뮬레이션을 통한 도시 구조 분석까지, 기술은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의 진보가 곧 삶의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마트 도시, 탄소저감형 건축물도 결국 그 안에 담기는 인간의 경험과 공동체의 삶을 고려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집단’ 지능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내는 지혜다. 공동체 주도형 도시 재생, 시민 참여 설계, 전통 지식과 현대 기술의 융합. 이러한 시도는 기후위기에 적응하기 위한 유연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특히 이번 비엔날레는 지역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우며, 다국적 기업 중심의 개발 논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유도한다. 더 이상 스타 건축가의 작품이 아닌, 시민들과의 협업, 지역의 기억, 공동체의 주체적 참여로서 완성되는 건축을 말한다. 기후 위기 시대에 건축은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살아남는 연대의 기술이어야 한다. 그 방향은 단 하나의 도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떤 공간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묻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건축은 이제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이다. 환경에 영향을 덜 주는 설계가 아니라 근본부터 다른 설계 방식을 논의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도 근본적으로 다시 질문되어야 한다. 기후 재난은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새롭게 짜야 할 일상이다. 건축이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과 자연, 기술과 공동체가 새롭게 맺는 관계를 설계함으로써,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기후 위기의 한복판에서, ‘건축’에 기대야 하는 이유다.
2025-08-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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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도시를 기억하는 소리
도시는 소리를 기억한다. 삶이 지나간 흔적, 계절이 남긴 여운, 그리고 한 시대를 관통한 음악의 결은 도시의 공기 속에 축적되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머문다. 도시의 정체성은 시간과 공간에서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도시는 사람들의 모든 행위가 쌓이는 장소이며, 서로 다른 목소리가 각자의 의미와 엮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음악적 사건도 도시라는 ‘공공의 장’에 고요하면서도 깊은 자취를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부산문화회관이 선보인 상반기 기획 시리즈는 부산 클래식 음악계가 주목할 만한 음악적 사건이었다. 지난 2월 20일부터 7월 25일까지 이어진 ‘사운드 오브 부산: 브람스 교향곡 전곡 사이클’이 바로 그것이다. 얼핏 보면 고전적 레퍼토리의 단순한 재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실험적 시도가 담겨있었다. 지역에 있는 네 개의 민간 오케스트라가 각각 한 작품씩 맡아 릴레이 형식으로 무대를 이어가며, 그 실험에 참여했다. 유나이티드코리안오케스트라,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 부산네오필하모닉오케스트라,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주역이었다. 음악적 지향점, 운영 방식, 심지어 재정적 여건까지 제각각인 단체들을 하나의 기획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차이들은 오히려 ‘지역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며, 다층적 소리의 경험으로 통합되었다.
브람스는 교향곡이라는 또 다른 장르에 도달하는 데 20년이 넘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베토벤 이후 교향곡 형식에 대한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선배 음악가들의 유산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데 거의 생애의 절반을 바친 셈이다. 그러나 이후에 작곡된 교향곡들은 훨씬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오랜 사유가 풍성한 창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브람스의 여정처럼, 지역 예술단체들의 브람스 교향곡 전곡 연주는 단순히 위대한 레퍼토리의 재현을 넘어, 지역 예술생태계가 나아가야 할 철학적 방향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것은 ‘브람스를 연주했다’는 결과보다 ‘부산이 예술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 과정이었다.
이번 기획에는 지역 예술생태계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있었다. “지역 오케스트라의 중심이 지역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예술의 정체성을 꽃피울 것인가?”라는 질문은 예술가뿐 아니라, 우리나라 공공예술기관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지역성은 예술의 부가적 요소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한다. 이는 ‘문화 균형’을 실현하겠다는 정책적 선언을 넘어 ‘공공성’이 실현되는 실천적 원칙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기획은 외부의 유명 오케스트라나 협연자를 초청하는, 이른바 ‘이벤트성 쇼핑형 기획’과 달리, 지역 예술단체들이 주체적으로 관객과 호흡한 ‘과정 중심’의 ‘예술 실천’이었다. 공공극장이 자발적으로 민간 예술생태계를 연대의 틀로 엮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시리즈는 각 오케스트라가 가진 개성적인 해석을 통해 같은 작곡가의 또 다른 얼굴들을 펼쳐 보였다. 음악은 더 이상 악보 위에 머무는 텍스트가 아니라 도시의 사건이 되었고, 공연장은 감상의 공간을 넘어 도시의 기억이 쌓여가는 사유 장소로 확장됐다. 공연장은 공동체가 가진 기억과 정체성을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상징적 공간이다. 부산문화회관의 프로젝트는 공공극장이 단지 물리적 현장이 아니라, 지역 예술의 시간과 정체성을 되새기는 ‘기억의 장소’라는 점을 일깨웠다. 고전적 사유가 지역 오케스트라의 손길을 거쳐 부산이라는 ‘도시의 소리’로 자리매김한 순간이었다.
특히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예술감독 오충근)는 부산 출신 작곡가 김종완의 신작 〈완성의 여정〉을 브람스 〈교향곡 1번〉과 함께 연주하며, ‘공존의 형식’과 ‘부산의 소리’가 병행할 수 있음을 알렸다. 전통과 창작, 고전과 현재, 중심성과 지역성이 하나의 무대 안에서 공존하고 변주되는 방식으로 오늘날 공공극장이 추구해야 할 예술 기획의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공공극장과 민간예술단체가 하나의 무대 안에서 이룬 동등한 파트너십은 부산 예술이 나아가야 할 미래의 모습이다.
모든 기초학문이 그렇듯이, 기초예술도 단기간에 수치화된 성과로 드러나기 어렵다. 특히 클래식 음악처럼 느리고 반복적이며, 즉각적인 결과가 보이지 않는 예술 장르는 행정 효율이나 예산 논리와 충돌하기 쉽다. 그러한 점에서 지역 공공예술기관은 ‘예술의 시간을 함께 견디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수치화되지 않는 감각의 축적, 공동체가 함께 쌓아가는 정서적 기반, 반복되는 예술 경험이 만들어내는 도시적 리듬은 더디지만, 반드시 도시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예술적 실험은 지금부터 시작이며, 부산의 크로노토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5-07-3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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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케이팝 데몬 헌터스’ 성공의 함의
지난달 2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에 공개되자마자 40여 국가에서 영화 부문 1위를 차지했고 공개 4주차까지도 글로벌 영화 순위 1, 2위를 지켰다.
영화에 수록된 노래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영화에 수록된 ‘Your Idol’은 미국 스포티파이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BTS의 ‘다이너마이트’도 넘지 못한 기록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 수록된 다른 노래 ‘Golden’은 빌보드 글로벌(미국 제외), 글로벌 200 차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글로벌 차트 석권한 K애니메이션
자부심과 자조 사이 엇갈린 시선
콘텐츠 주도권보다 완성도 중요
문화 보급 방식도 혁신 필요한 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미국 할리우드의 소니픽처스에서 케이팝을 소재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즉 미국에서 만든 한국 배경의 이야기인 셈이다. 따라서 대사, 노래가 영어로 이루어졌지만 이야기 배경이 서울이고 등장인물이 한국인인 만큼 작품 곳곳에 한국의 모습과 문화가 담겨 있다.
여자 아이돌 헌트릭스의 의상에는 노리개가 달려있고 남자 아이돌 사자보이스는 도포를 입고 갓을 썼다. 이들은 피로를 풀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대중목욕탕에 가고, 설렁탕을 먹으러 식당에 가서는 수저 아래 휴지를 깐다. 이 외에도 무속 의식에 사용되는 사인검과 신칼, 호작도의 호랑이와 까치 등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현대문화까지 외국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 묘사가 디테일하게 살아있다.
‘메이드인 USA K콘텐츠’의 성공에 대한 국내 언론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민족주의적 관점의 ‘국뽕형’이다. 한국 콘텐츠가 우수해 세계에 통한다, 우리 고유의 문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콘텐츠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식의 논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막대한 예산을 들여 자국의 문화를 홍보하는 중국 영화를 우리가 보지 않는 것처럼, 우리 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만든 콘텐츠는 세계에서 외면받을 것이 자명하다.
두 번째는 이렇게 좋은 K콘텐츠를 우리가 만들지 못했다는 ‘자조형’이다. 우리의 케이팝 아티스트와 프로듀서가 작업에 일부 참여하기는 했지만 한국 창작자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으로 기획, 제작하고 투자, 배급해 성공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 나아가 향후 K콘텐츠의 제작 주도권을 뺏기고 우리 창작자와 문화 산업이 소외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제기한다.
그러나 K콘텐츠를 꼭 우리나라에서만 만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외국에서 K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더욱 장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한류 4.0 시대를 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한류 발전 단계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나눈다. 한류 1.0 시대는 지리적 근접성과 문화적 유사성이 강한 동북아 국가를 중심으로 한국 드라마가 확산한 한류의 태동기이다. 한류 2.0 시대는 K팝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 전체와 일부 서구 문화권으로 한국 문화가 퍼져나간 한류의 성장기이다. 한류 3.0 시대는 드라마, K팝과 같은 특정 장르가 아닌 K문화 전반이 전 세계로 널리 확산하는 한류의 확산기이다.
한류 4.0 시대는 장르가 K문화를 넘어서 K라이프 스타일로 확대되고 전 세계의 주류 문화로 자리매김해 지속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누리는 한류의 지속기라고 지칭할 수 있다. 전 세계의 주류 문화로서 보편적으로 향유할 때 ‘어디에서’, ‘누가’ 콘텐츠를 생산했는지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한국에서 생산했든 외국에서 생산했든 그것이 얼마나 잘 만들어졌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제작에 참여한 짐 로포 리퍼블릭 레코드 회장은 빌보드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은 더 이상 K팝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대중문화 현상이 되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이제 한류 4.0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은 한류 4.0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로서 의의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을 바라보며 자조 섞인 한탄과 걱정을 하기보다 더 다양한 국가에서 더 다양한 K콘텐츠가 생산되고 제2, 제3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나올 수 있도록 응원해야 한다.
나아가 한류 콘텐츠 전반이 4.0 시대에 맞게 레벨 업해야 한다. 한국인을 해외에 파견해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에서 현지인 한국어 교사가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현지인 요리사가 자국 기호에 맞게 한국 요리를 만들어 누구나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도약해야 한다. 또 이렇게 될 수 있게 우리의 문화 보급 정책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성공에서 읽어야 할 함의이다.
2025-07-24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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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제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묻은 쓸쓸함
지난해 연말, 위법·위헌적인 대통령의 계엄 발령과 국회의 계엄령 해제부터 시작된 관련자 구속 및 대통령 파면과 대선, 그리고 3대 특검법 발의에 이은 특검의 행보에 이르기까지 숨 가쁜 정국에 국민은 분노와 환호가 교차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지난 7개월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나라가 수렁에 빠질 위험에 처할 때마다 어느 누구보다도 국민이 앞장서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수호하였던 역사의 패턴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순식간에 여야가 뒤바뀐 정치권과, 검찰의 숱한 기소와 압수수색을 감당하고도 국민의 선택으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상대 진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점점 높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나 같은 일개 소시민에게 ‘정치’는 그동안 헛구역질과 빈혈 그 사이거나 언저리에 자리 잡은 이상한 나라의 ‘협잡’과 같은 것이었기에, 최근 7개월 동안 벌어진 급박한 정세는 비로소 스스로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는 느낌이다.
20년 넘게 지지부진 북항 재개발
시민 라운드테이블로 공공성 확대
해수부 부산 이전 계기로 순항하길
따지고 보면 이 나라에 민주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든다. 짓누르는 자나, 이에 대항하여 권리를 되찾으려는 자나 늘 대의를 명분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명분을 잃은 세력이 활개를 치더라도 결국 명분을 고수하려는 세력이 이겨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까이에 있으면 멈칫거리거나 주저하는 일이 시간이 지나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 들여다보면 명약관화한 것이었음을 깨닫고서는 무릎을 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역사는 생생한 현실이 지층처럼 쌓인 무늬이되, 그 무늬가 만드는 물결을 아로새기는 더욱 큰 그림임을 새삼 재확인하게 되는 요즘이다.
최근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두고 잡음이 많다. 정부는 대통령 공약 사항이기도 한 해수부의 부산 이전을 시급히 착수하고 있고, 해수부 공무원 노조는 예전 세종시 정부 청사 이전을 실례로 들어 해수부 공무원에 대한 각종 지원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부산 이전을 극구 반대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파를 떠나 해수부가 부산에 오면 부산 사람으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정부 기관 이전으로 발생하는 경제 파급효과가 가뜩이나 침체된 원도심에 단비와도 같기 때문이다. 해수부 임시 청사는 현재 북항 재개발사업 지구를 지척에 둔 자리에 마련됐다. 임시 청사 시대를 거쳐 향후 정식 청사가 북항 재개발지구 사업 구역 내로 이전한다면 기존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 있던 해수부 부산항북항통합개발추진단 및 부산항만공사와 부산지방해양수산청을 잇는 해양 관련 국가기관 벨트와, 부산 최대 현안 사업 가운데 하나인 부산항 북항 재개발사업 지구가 맞물려 한국 해양 산업을 비롯한 해양 발전 로드맵을 위한 메카가 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항 북항을 방문한 자리에서 시민들을 위한 친수공간으로 계획하여 북항 재개발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후 20년이 넘도록 지지부진한 북항 재개발사업이 해수부의 이전으로 순항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국내 첫 항만재개발사업으로서 북항 재개발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부산 시민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크나큰 자부심으로 남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국가사업을 두고 해수부의 부산 이전에 딴지를 거는 몇몇 세력이 있다. 정파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반대부터 해대는 이들의 셈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부산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엽적이고 국지적인 논리에 따른 행동은 끝내 자신들을 향하는 화살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2013년 북항 재개발사업이 참여 기업의 사업 논리에 치우친 난개발의 우려가 제기되자 결성된 북항 라운드테이블의 활동을 되새긴다. 각계각층의 전문가와 공무원, 그리고 시민들이 참여한 라운드테이블이 여러 차례 검토와 회의를 거쳐 공공성을 확대한 북항 재개발사업안을 마련한 것이다. 이때 확정된 사업안을 바탕으로 하면서, 2019년 해수부 부산항북항통합개발추진단이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에서 발족됨으로써 추진력을 얻어 지금의 북항 재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공공의 이익을 가져오려는 게 국가사업의 최종 목표일진대, 이런 큰 그림을 외면한 채 당장 자기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세력의 목소리에 명분이 짓밟힐 때 지난해 연말 나라를 요동치게 만든 사태는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다. 또 한 번 그런 사태가 불거져서 그간 힘들게 쌓아두었던 시민들의 지혜와 역량을 또다시 소모해서야 되겠는가. 인간의 지혜와 슬기를 올바른 일에 쏟아부을 때 나라와 시민 개인의 성장은 자연 뒤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2025-07-1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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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예술정책은 현장으로부터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모든 것이 본래의 위치로 하나씩 제 자리를 찾고 민생경제가 회복되기를 모든 국민이 학수고대하고 있다. 우선, 미디어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진 점이 주목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한 달을 맞아 지난 3일 국민과의 소통을 위한 자리를 국내외 언론들과 함께했는데, 지역 풀뿌리 언론까지 참여시키는 세심함이 인상 깊었다. 작은 목소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반가운 기조다.
지난달 한 중앙 일간지에 ‘국립문화공간재단 설립, 대표에 블랙리스트 징계받은 전 문체부 관료’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이는 곧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 일파만파 퍼졌다. 내용인즉슨,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대선 사이 권력 공백기에 올해 3월 발표한 ‘문화 한국 2035’의 정책들이 무리하게 강행·추진되었고,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산하기관장 인사를 비밀리에 단행했다는 것이다. 국립문화공간재단과 여러 산하 기관 대표에 문체부 퇴직 관료 임명을 강행한 게 대표적 사례로 거론됐다. 보도 이후 새 정부 출범을 무시한 채 이권 장악을 시도한 것 아니냐는 문화예술계의 우려가 쏟아졌다.
문체부의 국정기획위원회 업무 보고도 도마 위에 올랐다. 윤석열 정부 시절 추진해 오던 ‘문화 한국 2035’ 정책을 구체적 계획 없이 새 정부의 ‘5대 문화강국 계획(2025~2029)으로 들이밀다 반려되었다. 언론에 보도되자 장관은 사의를 표명하였고 대통령은 이를 반려한 상황이다. 지금의 문체부는 혼수상태나 마찬가지이다.
지금 총리를 비롯해 각 부처에는 새로운 수장들이 속속 배치되고 있다. 필자는 지난 지면을 통해 6·3 대선 과정에서 문화예술 정책이 빠져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새 정부에서 문화예술 분야의 수장은 관료나 정치인이 아닌 현장 전문가가 배치되어야 한다. 최근 입방아에 오르는 문체부의 관료적 카르텔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 장관에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대수술을 단행할 적임자가 와야 하는 것이다.
새 정부는 지난겨울 광장에 모였던 민주주의의 열망과 감성을 기억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현장이 문화예술이었다.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는 문화강국을 구현하기 위한 첫 번째 실천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예술가와의 거버넌스가 없는 관료적 행정은 십여 년간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하달식 정책과 지원 체계를 관성처럼 되풀이해 왔다. 예술가들은 여전히 작두 타듯 지원서로 매년 시간을 채워가고 있다. 예술 현장은 더욱 다양해지고 문화 소비자는 늘어나는데, 지원 이후의 실질적 성과는 순환 구조를 마련하지 못한 채 일회성 행사로 소멸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현장 전문가 그룹과 행정이 협치해서 지속 가능한 정책들을 재정비해야 할 때다. 지방소멸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예술 생태계마저 바닥을 치고 있으니 이를 다시 정비하는 일은 절실하고 필요하다.
새 정부가 목표하는 문화 민주주의를 통한 문화강국이 중앙에서 내려보내면 각 지자체와 문화재단들이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이다. K컬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는 대한민국의 위상이 이전과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류 열풍만 가지고 문화 강국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물론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위상은 높아졌지만, 문화산업과 문화 생태계는 구분해서 살펴봐야 한다. 기초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 예술가들의 보편적인 창작 활동에 대한 지원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이를 담보해 주는 장치는 국가가 마련해야 하고, 이는 법으로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최근 ‘예술인 기본소득’에 대한 대통령의 언급이 나왔다는 사실은 반갑다. 예술인 기본소득은 이미 해외 선진국에서는 실행 중인 사례이다. 우리나라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고, 이와 함께 ‘왜 예술인을 대상으로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예술을 바라보는 비예술인의 시선을 개선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긴 호흡을 갖고 지속 가능한 제도로 법제화해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는 예술인복지법 제2조 제2호에서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 대상자를 ‘예술 활동을 업으로 하여 국가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데 공헌하는 사람’으로서 문화예술 분야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고 있다.
다층적인 시각에서 지원 조건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예술인 증명이라는 시스템 외 예술가라는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다층적 제도를 반영해야 한다. 늘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진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다. 지금도 예술인들은 사회 어디에선가 숨도 못 쉬며 자신의 예술세계와 마주하고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다.
2025-07-10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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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덧없음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의미
해운대 해변 너머로 여름 해가 저물고, 황금빛 노을이 파도 위로 부서지는 순간, 부산의 여름 휴가객들은 묘한 기쁨에 휩싸입니다. 쌓아 올린 모래성이 파도에 쓸려가고, 밤하늘을 수놓던 불꽃이 이내 사라지듯, 이 찰나의 순간들은 일본의 미의식인 ‘모노 노 아와레’(物の哀れ)를 떠올리게 합니다. ‘덧없음 속의 애절한 아름다움’을 뜻하는 모노 노 아와레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유한성 철학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삶의 유한함이 오히려 삶의 의미를 형성한다는 하이데거의 사상은 부산의 여름 풍경과 어우러져 깊은 울림을 전달합니다.
모노 노 아와레는 18세기 일본 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에 의해 널리 알려진 개념입니다. 만개한 벚꽃이 이내 떨어지고, 화려한 축제가 며칠 만에 막을 내리듯,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 덧없음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한다는 깨달음이죠. 부산의 여름 역시 이러한 미의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해변의 모래성은 파도에 녹아내리고, 거리 공연은 인파 속으로 사라지며, 자갈치 시장의 싱싱한 해산물 만찬은 오직 기억 속에만 남습니다. 이 모든 덧없는 경험은 우리에게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영원하지 않은 것들 속에서도 진정한 여유를 찾으라는 모노 노 아와레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이데거의 유한성 철학은 서구 실존주의의 핵심입니다. 그는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이 유한한 세상에 던져진 존재이며, 늘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우리는 삶의 끝을 인지하며 불안을 느끼지만, 동시에 이 유한함의 자각이 삶을 충만하게 살아가도록 이끄는 촉매제가 됩니다. 축제에서 신나게 춤을 추고, 바닷가에서 맛있는 음식을 음미할 때, 이 모든 순간이 언젠가 끝날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더욱 그 순간을 붙잡으려 노력합니다. ‘오늘을 붙잡아라’라는 라틴어 구절은 ‘카르페 디엠’입니다. 이는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의 작품 오데스의 한 구절, ‘오늘을 붙잡고, 미래는 되도록이면 믿지 마라’라는 구절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구절은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며 현재 순간을 최대한 활용하라는 의미입니다. 모노 노 아와레가 덧없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가깝다면, 하이데거의 유한성은 덧없는 삶 속에서 우리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라는 절박한 부름인 셈입니다.
부산의 여름은 이러한 두 철학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는 장입니다. 5월 말부터 시작되는 해운대 모래 축제는 거대하고 정교한 모래 조각들이 며칠 만에 부서지기에 존재의 무상함을 은유합니다. 동시에 모래 작품들은 삶이 짧다는 것을 인지하고 진실하게 인생에 참여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며 하이데거의 유한성을 반영하죠. 매주 다른 패턴으로 밤하늘을 수놓는 광안리 M 드론 라이트 쇼는 순간순간 사라지는 빛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기억 속에만 남는 덧없음을 보여줍니다. 6월 말, 부산 콘서트홀 개관 축제는 시민 공원을 클래식 음악으로 가득 채우고, 잠시 울리던 음표는 이내 침묵 속으로 사라집니다. 부산 푸드 필름 페스타(6월 13~15일) 또한 팝업 푸드 트럭과 야외 영화 상영으로 주말과 함께 사라지는 감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며 무상함을 포착합니다.
이러한 부산의 예술은 한국적 미의식인 한(恨)이나 불교의 무상(無常) 개념과도 깊이 공명합니다. 한은 덧없는 아름다움이 사라질 때 느끼는 슬픔과 아쉬움의 정서로 발현되며, 불교의 무상(無常)은 모든 존재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본질을 깨닫는 가르침입니다. 범어사의 고요한 여름 풍경 속에서도 우리는 덧없음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부산의 예술가들은 덧없는 순간들을 기념하며, 사라지는 것에서 기쁨을 찾으며 유한한 삶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도록 이끌어줍니다.
2025년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열리는 여름 축제에 와 있는 당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당신은 라이브 밴드의 연주가 펼쳐지는 가운데, 음악과 바닷바람에 온전히 푹 빠져 관중들과 함께 춤을 추며 그 순간을 만끽합니다. 곧 행사가 끝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죠. 이후 팝업 푸드 트럭에서 신선한 회 한 접시를 맛보며 광안대교의 불빛을 감상합니다. 축제가 끝나고 푸드 트럭이 떠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당신은 그 덧없는 순간에 더욱 깊이 몰입하게 됩니다. 이는 모노 노 아와레의 애절한 기쁨에 공감하며, 유한성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들어내는 일입니다. 이번 여름, 부산에서 덧없는 삶이 선사하는 가장 아름다운 철학적 추억을 새겨보세요. 당신의 기억 속에 영원히 빛날 순간들로 말이죠.
2025-07-03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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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지역균형발전과 대한민국 코어 만들기
몇 년 전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한 적이 있다. 두어 달 정도 후 깁스를 풀고 나니 다리에 힘이 많이 빠져 있었다. 마음은 빤한데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초고령사회에서는 얼마나 건강하게 오래 사느냐가 중요하다고 곳곳에서 말하는 걸 들으니 슬그머니 걱정되기 시작했다. 결국 지난해 봄, 집 근처 헬스장을 찾았다. 하체 중심의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코어 근육이었다.
‘코어’(Core)는 중심, 핵심을 의미하며 지구의 중핵 부분이나 원자로의 노심(핵연료가 위치하여 핵분열이 일어나는 영역)을 뜻한다. 인체에서 코어는 척추, 골반, 복부 등 중심부를 말한다. 그것들을 지탱하는 근육이 코어 근육이다. 복부만 코어인 줄 알았는데 인체의 세로축과 가로축을 감싸는 근육 전체가 다 코어 근육이라 하니 나이가 들어도 곧은 자세를 가지려면 부위별 근력운동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운동 효과가 아주 더디게 나타나 힘들고 지루하기 짝이 없다.
건축 코어 공간, 건물 중심 기능 역할
소규모 건물 한쪽 배치·대규모 땐 분산
수도권 집중 벗어나 분산·균형 이뤄야
건축에도 ‘코어’가 있다. 건축에서 코어는 엘리베이터, 계단, 화장실, 기계실, 샤프트 등 수직 동선과 설비, 피난의 핵심이 전부 모여 있는 건물의 중심 기능 공간을 수용하는 중심축이다. 코어의 역할은 건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공간의 기준이 되기도 하며 기능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코어의 형태는 다양하고 그것의 계획에 따라 사무공간의 동선이 계획된다.
건축 설계를 할 때 코어 공간은 사무공간과 달리 수익성이 낮아 최소한의 규모로 계획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소규모 건축일 경우에는 건물 한쪽에 코어를 배치해 유효면적률을 높인다. 하지만 고층 건물이나 면적이 넓은 경우에는 구조상 불리하다. 한쪽으로 치우친 동선은 피난 시 불리하고 구조적으로도 안정적이지 못해서 건물 중앙에 코어를 배치하거나, 양쪽 끝에 배치하기도 한다. 이를 잘 이용하면 자연채광, 조망뿐 아니라 여유 있는 공간 배분으로 건축물이 더욱 살아날 수 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코어’는 어디일까? 바로 ‘서울’이라는 답이 나올 게 뻔하다. 지난 10년간 지방을 빠져나가 수도권으로 유입된 청년은 71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수도권 집중화 현상은 도시화 과정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이로 인해 지역의 기능과 인구가 줄어들어 지역소멸은 점점 더 가속화된다. 정부가 2000년대 이후부터 지역균형발전 약속을 반복하고 있지만, 국토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에 인구의 약 50%가 몰려 있다. 2022년 지역내총생산(GRDP) 통계를 보면, 수도권이 창출한 GRDP가 전국 총생산의 52.8%를 차지했다. 기업 수도 전국 기업 수의 52.65%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대한민국 전체 면적의 12%에 불과한 수도권이 대한민국의 절반이 넘는 경제 규모를 담당하는 셈이다.
대한민국 경제와 인구의 50% 이상이 수도권에 몰려 있으니 다양한 혜택들, 일자리, 교육, 의료, 문화 등의 기회도 수도권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수도권에 새로운 일자리가 많이 생기고 정주환경이 좋아지는 상황에서 수도권 집중은 당연한 결과다. 청년들이 떠나는 이유도 기회가 수도권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청년들이 떠나면 그나마 지역에 남아 있는 기업은 인재를 수급하지 못해 결국 수도권으로 옮기거나 생산성 혁신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결국 수도권 집중은 지역 소멸의 원인이자 결과로 악순환은 계속 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서울 중심의 수도권 전망도 그리 밝지 않다는 것이다. 수도권 인구 집중은 경쟁을 가열시키고, 주거비, 생활비, 교육비 등의 증가로 이어져 출산을 기피하는 요인으로 작용해 인구 감소로 이어진다. 결국 수도권 일극주의와 지역 소멸, 그리고 인구 소멸은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다.
건축 설계에 있어 소규모 건축물일 때는 한쪽에 코어를 배치해 공간의 효율성을 높이는 설계를 하지만 대규모 건축물일 때는 코어를 양쪽으로 분산시킨다고 앞서 말했다. 작은 구조에선 효율성이 중요하지만,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질수록 분산과 균형이 핵심이 된다.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구조 역시 마찬가지다. 수도권이라는 단일 코어에 모든 기능과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국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지역을 살리고, 국가 전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기능의 분산이 필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인 서울대 10개 만들기, 2차 공공기관 이전 등의 공약도 이 같은 인식에서 나왔을 것이다.
균형과 다핵의 힘으로만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당장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시키겠다고 하니 여간 반가운 게 아니다. 그렇다고 해양수산부 이전이 곧바로 지역균형발전을 가져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힘들고 지루하더라도 꾸준히 부위별 근력운동을 하다 보면 어느새 바른 자세를 잡게 되는 것처럼 다양한 인프라를 촘촘히 엮는 작업도 함께 해야 한다. 좋은 설계란 늘 보이지 않는 곳부터 튼튼히 다지는 법이다.
2025-06-26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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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화의 크로노토프] 부산콘서트홀, 새로운 소리의 좌표
6월 20일, 오늘은 부산의 오랜 꿈이 마침내 현실이 되는 날이다. 시민의 염원이 깃든, 부산 최초의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이 그 문을 활짝 연다. 포도밭 형태의 2000석 규모 콘서트홀과 400석의 챔버홀이 함께 들어섰다. 정교한 음향 설계와 자동화 무대 시스템을 갖춘 클래식 음악에 최적화된 독립 공간이다. 콘서트홀 정중앙에는 4423개의 파이프와 64개의 스톱을 갖춘 대형 파이프 오르간이 자리했다. 비수도권 최초로 설치된 이 오르간은 ‘공연장의 심장’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아름다운 건축물의 탄생을 넘어, 부산이라는 도시의 문화적 자존감과 예술계의 미래를 밝히는 등대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박래품인 피아노가 처음 들어온 도시 부산은 140년 만에 비로소 클래식 전용 극장을 갖게 되었다. 부산콘서트홀이 들어선 부산시민공원 일대는, 조선 시대에 연못과 저수지가 있던 풍요로운 땅이었다. 〈동래부지〉(1740년)에는 지금의 연지초등학교 뒤편에 ‘신지언(新池堰)’이라는 제방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당시 동래부에서 두 번째로 큰 저수지로 전해진다. 하지만, 이 터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어두운 그림자도 품고 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일제의 경제 침투가 본격화되면서 부산은 토지 수탈과 군사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일대는 경마장과 군사시설로 바뀌었다. 광복 후에는 주한미군기지 캠프 하야리아로 전용되며 시민의 발걸음은 오랜 시간 차단되었다. 2014년, 부산시는 이 땅을 ‘시민공원’으로 조성해 과거를 치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군이 남긴 폐기물과 오염 문제는 많은 논란을 낳아 ‘시민에게 온전히 돌아온 땅’이라고 단언하기에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시민 염원 깃든 첫 클래식 전용 공간
지역 예술 지속 가능 성장 이정표로
운영 전략·제도 구축 공공성 높여야
이 역사적인 땅 위에 음악이 울리는 새로운 랜드마크가 세워졌다. 개관 공연 시리즈는 스타 연주자 중심의 화려한 라인업으로 꾸려졌고, 정명훈 예술감독이 이끄는 아시아필하모닉오케스트라(APO)가 그 중심에 섰다. 환갑을 훌쩍 넘긴 부산시립교향악단은 개관 한 달여 전 단 한차례 시범 공연에 참여했을 뿐, 정작 공식 개관 무대의 주역이 되지 못해 아쉬움을 남겼다. 이후 이어지는 공연 시리즈 또한 스타 연주자와 대형 기획사 중심으로 대부분 편성되었다. 상징적인 인물의 등장은 부산콘서트홀의 국제적 위상 제고에 분명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 화려한 울림은 개관의 흥분을 넘어, 이 공간의 구조와 운영 방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예술감독이 지닌 상징성은 강력한 에너지로 큰 기대를 모은다. 다만, 이 공간이 세계적인 스타 연주자나 유명 오케스트라만을 위한 전용 무대로 고정된다면, 결국 시민의 세금으로 지어진 공연장이 지역 예술가들에게는 점점 낯선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 ‘예술은 특권이 아니라 권리’라는 명제 앞에서, 이 공간의 ‘공공성’과 ‘누구를 위한 무대인가’라는 질문은 결코 피할 수 없다. 공공성이 약해진 공간은 특정 권력이 좌우하는 전시형 무대로 전락할 위험이 있고, 동시에 특정 인물과 대형 기획사에 의해 독점되는 또 하나의 임대형 플랫폼으로 굳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러한 구조는 레퍼토리 구성과 운영 철학 전반에도 영향을 미쳐, 결국 지역 예술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할 수 있다. 세계적 스타를 불러 모으는 일회성 흥행에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지역 기반 예술이 뿌리내리는 장기적인 역할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제 시작이다. 부산콘서트홀은 여전히 ‘비어 있는 가마솥’이다. 새로운 예술의 시간에 이제 막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단순한 대관 시스템을 넘어, 공공성과 지역 예술생태계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정표로 삼을 운영 전략과 제도 설계가 절실하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도 지역 우선 정책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기획 단계부터 지역 기반 예술가의 창작을 중심에 두고, 예술과 행정이 함께 참여하는 협력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일회성 기념 공연의 찬란함보다, 지역 예술계의 예술적 내공이 깊이 뿌리내릴 때 그 반향은 훨씬 더 오래, 더욱 깊게 울려 퍼질 것이다. 니체는 “위대한 것은 언제나 천천히 자란다”라고 했다. 진정한 개관은 건물이나 시설이 아니라, 예술적 관계와 신뢰가 쌓이는 순간에 비로소 완성된다. 그 울림의 주체 또한 지역 예술 생태계 안에서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성장해야 한다.
부산 최초의 클래식 전용 공연장, 부산콘서트홀의 개관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곳이 예술을 사랑하는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예술가와 시민이 함께 숨 쉬며, 권위가 아닌 수평적 관계로, 경쟁보다 공존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더불어 부산만의 리듬과 감각이 깃든 무대가 시민의 예술적 삶이 중심이 되는 ‘공연예술의 진짜 좌표’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 이제 이곳에서 써 내려갈 새로운 부산 예술의 기억을 마음 깊이 응원한다.
2025-06-1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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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재파의 생각+] 열람실 없는 도서관
최근 도서관이 바뀌고 있다. 과거 책을 빌리고 공부만 하던 공간에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새로 태어나고 있다. 새로 개관하거나 리모델링하는 도서관들은 칸막이가 없는 자료실, 계단형 열람석, 휴게 공간을 넓게 배치해 개방적인 공간에서 독서와 휴식,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게 만들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 강좌 및 동아리 활동을 위한 다목적실을 마련해 시민들의 문화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며 도서관에 따라서는 영화 감상실과 같은 특화된 문화 공간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처럼 도서관이 복합 문화 공간으로 바뀌면 다양한 사람들이 더 많이 도서관을 찾게 되고 다채로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게 돼 시민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진다는 장점이 있다. 나아가 특색 있는 도서관을 지으면 다른 지역 사람들까지 불러 모아 지역 경제에 긍정적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일례로 2023년 개관한 강원도 인제 기적의 도서관은 복합 문화 공간의 명소로 이름을 알리면서 인제군 인구의 6배가 넘는 18만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실제로 요즘 도서관에 가 보면 멋진 인테리어와 밝은 분위기가 마치 카페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아이를 동반한 가족들, 연인과 친구들이 계단형 열람석에 모여 앉아 오손도손 담소를 나누며 책을 읽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행복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차분히 앉아 책을 읽자니 적잖이 불편하다. 계단형 열람석은 의자와 달리 허리 받침이 없고 바닥이 딱딱해 긴 시간 앉아서 독서하기가 어렵다. 또 여러 자료를 펼쳐 살펴보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구조다. 개방형 로비 소파에 앉아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인테리어 효과에 초점을 맞춰서인지 소파의 높이와 등받이 간격, 탁자와의 높이 등이 독서 및 공부에 적합하지 않다.
아무래도 익숙한 열람실에서 책을 읽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열람실을 찾아보지만, 열람실은 다목적실과 전시실, 영화 감상실과 같은 문화 공간으로 대체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문득 트렌드를 좇느라 도서관의 본질을 등한시한다는 우려가 든다.
도서관법 3조 1항에 따르면 ‘도서관이란 국민에게 필요한 도서관 자료를 수집·정리·보존·제공함으로써 정보이용·교양습득·학습활동·조사연구·평생학습·독서문화진흥 등에 기여하는 시설’로 정의된다. 그런데 독서와 학습을 위한 장소인 열람실을 아예 없애는 것은 도서관 본연의 기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으로 읽힌다.
공공도서관에서 열람실이 사라지며 도서관에서 학습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이 사설 독서실이나 스터디 카페 등으로 쫓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독서실이나 스터디 카페 한 달 이용 비용이 적게는 10만 원에서, 많게는 20만 원까지 들어 저소득층 청소년이나 청년 취업 준비생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고 교육부와 몇몇 지자체는 비어 있는 공공시설에 공공 스터디 카페를 만들거나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스터디 카페 이용 비용 일부를 지원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열람실이 원래 있어야 할 도서관에서는 열람실을 없애고, 설립 목적이 다른 엉뚱한 공공시설에 열람실을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문화 공간으로서의 도서관과 학습 공간으로서의 도서관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도서관 문화 공간의 이용 실태를 자세히 파악해 이용이 저조하거나 비효율적인 공간을 열람실로 조성한다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것으로 생각된다.
가령 2021년 재개관한 부산 북구 만덕 도서관은 기존 열람실을 없애고 그 자리에 작은 영화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만덕 도서관 홈페이지 작은 영화관 예약 현황에 따르면 2025년 1월에서 5월까지의 이용객은 월평균 45.8명으로 하루 2명도 이용하고 있지 않다. 또 지난 8일 국회부산도서관 전시실의 경우 필자가 2시간 동안 이용객을 관찰한 결과, 화장실을 잘못 찾아 들어온 어린이 한 명과 전화를 하러 들어온 아저씨 한 명 외 관람객은 아무도 없었다. 이처럼 이용이 저조한 공간은 열람실로 조성하고 문화 프로그램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공간은 현재처럼 문화 공간으로 잘 활용한다면 모두가 만족하는 도서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국회부산도서관 벽에는 ‘인류의 삶을 바꾸는 사람은 도서관에서 나온다’는 문구가 있다. 비록 인류의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서관 열람실에서 자신의 꿈과 목표를 위해 인내하고 노력하여 마침내 그들의 인생을 스스로 바꾼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요즘 유행과 추세에 맞지 않는다며 무조건 열람실을 없애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열람실을 적극적으로 지켜내야 할 의무가 강조된다.
2025-06-1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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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의 생각의 빛] 버려야 할 때 버리지 않으면 찾아오는 것
올해부터 마음먹은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책에 관한 것이다. 진작에 사서 읽지 않고 쌓아둔 책을 한 권씩 꺼내어 완독하고자 결심했다. 그래서 책장에 꽂혀 있거나 쌓여 있는 책의 목록을 훑어볼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러한 결심은 물거품이 될 공산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책은 드물었고, 기껏해야 필요한 부분만 골라 읽거나 앞부분만 읽다가 그만둔 책들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짬이 날 때마다 앞으로 읽거나 들춰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책부터 정리를 하자, 마음먹지만 매번 생각에만 그친다. 사방을 가득 채운 서재를 꿈꾸었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그런 로망이 부질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책이란 것도 알고 보면 공간만 차지하는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물건과 다른 점이 있다면 두고두고 소비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사실뿐이다. ‘기억저장소’라 할만치 내가 기억하고 떠올린 사실을 대차 대조할 수 있는 요긴한 물건임과 동시에, 평생 마음에 담아두고 살아야 할 정보와 지혜의 화수분임은 누구나 알고 있다.
이는 책이 사람에게 안기는 선(善) 기능이다. ‘4차산업혁명 시대’라는 요즘 종이책보다는 전자문서나 스마트폰을 비롯한 인터넷 활용도가 높아서 독서 같은 아날로그 형의 지식 공유가 시들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책의 유용성과 상징성은 무시할 수 없다. 젊은 날 지적 호기심에 여기저기 사다 모았던 책들이 몇 번의 이사로 그 부피가 줄어들다가도 어느새 차곡히 공간을 메운다. 책장에 꽂힌 책을 하릴없이 뽑아 든 채 낱장을 스르륵 넘기면 오래 묵은 종이 냄새가 밀봉된 병뚜껑을 따면 흘러나오는 향처럼 코끝을 간지럽힌다.
하지만 언젠가는 작정하고 버려야 할 책이다. 언제까지 데리고 다닐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애지중지하는 물건이지만 버려야 할 때 버리지 않으면 결국 화살이 되어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이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간 쌓아둔 책을 정리하면서 버리는 일은 단순한 물건 정리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하는 행위다. 그러므로 좀 더 나은 자신을 가꾸기 위한 단장(丹粧)이자 준비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기존의 지식과 이론 및 정보가 일종의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되어 녹슬고 이끼가 낄 때 사람은 낡아 간다.
낡은 세계는 늙은 세계이고, 이 늙은 세계는 우리를 우매하고 병들고 시들게 한다. 이 세계에 오랫동안 빠져 있는 사람은 기존의 인식에 갇혀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흔히 보수(保守)를 진보와 대립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따지고 보면 보수의 가치를 지키는 자만이 진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실에서 한 발짝 나아가려는 진보의 의식은 지금까지 쌓인 전통의 순기능이 지니는 가치를 진지하게 되씹는 자리에서 생겨난다.
‘보수주의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는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1729~1797)는 계몽주의 시대 여느 철학자들이 주창한 개인의 이성과 자유의 중요성보다는 공동체의 전통과 역사의 가치를 중요하게 바라보면서 기존의 질서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그는 귀족계급의 환심을 샀는데, 상류층은 자신이 지닌 기득권을 빼앗기는 사상의 물결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보수’는 300년 전의 영국 사회에 들이닥쳤던 거대한 사회변동과 무관하게 기득권의 이익과 주장에 찬성하는 무리나 목소리로 전락했다. 그 기득권의 이익이나 주장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가치를 둘러싼 의미보다는 몰상식과 몰이해에 바탕을 둔 엉뚱한 궤변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논리가 허술할뿐더러 자기주장을 자신의 논리로 깨뜨리거나 뒤집는 역설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도 이런 맥락에서라면 비껴가지 못한다. 새로운 사회현상이나 구조를 앞당기자고 외치면서도 정작 구태에 젖어 있는 인식과 습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수든 진보든 스스로 자신의 이념이나 사상을 굳이 옭매거나 규정지어 세계를 바라볼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모든 공동체의 일원에게도 좋으면 추구해야 한다. 여기에 보수나 진보가 끼어들 틈이 없다. 책을 버리지 못하고 주저하는 마음은 책을 더 쌓아두기 위해 벽면 하나를 허무는 일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을 수가 있다. 역사적으로 증명이 된 안 좋은 습성이나 인식을 버리지 못해 찾아오는 것은 비단 자멸뿐만은 아니다. 자멸한 자리에 세워야 하는 땀과 노력이 뒤따르게 되는 법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2025-06-0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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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Come Together!
대선후보들이 제시한 10대 정책 공약은 단순한 약속이 아니라 후보자의 국가관, 사람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축이다. 경제, 민생, 사회복지, 외교, 국방, 안보, 지역 균형발전 등 주요 정책이 망라된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는 문화정책 이슈를 찾아볼 수가 없다. 지자체 선거 때에도 문화정책은 ‘단골 메뉴’인데 하물며 나라의 대통령을 뽑는데 어느 정당 하나 제대로 된 공약을 제시한 바가 없다. 내란의 내상이 심해서인가! 그렇다면 문화정책을 더욱 강화해 혼돈의 사회에서 국민의 치유와 회복에 더욱 절실히 나서야 하는 시기인데 말이다.
1948년 유엔 총회에서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기본적 인권, 경제, 사회적 권리 외에 제27조항에 공동체의 문화생활에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2001년 유네스코는 문화다양성을 ‘사회 혹은 사회적 집단의 지적, 감성적, 윤리적, 정신적 생활의 총체’로 정의했다. 문화다양성이 개인과 집단의 정체성, 독창성을 유지함으로써 현재와 미래를 견인하는 중요한 전제임을 확인하고, 시민 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문화다원주의 정책을 강조한다. 올해는 문화다양성 유네스코 선언 20주년을 맞이한다. 문화체육관광부도 매년 5월 21일(세계 문화다양성의 날)부터 1주일간 문화 다양성 주간을 설정해 대국민 캠페인을 11년째 진행하고 있다. 2025년에는 부산, 전북, 전남문화재단이 지역 중심으로 협력해 진행한다. 타 시도와 비교한다면 부산문화재단은 평소 문화다양성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다문화를 넘어 예술 치유와 포용적 실천, 그리고 장애·비장애 구분 없는 예술적 시도는 앞서가고 있다. 다만, 일련의 활동들이 시민 사회 속으로 스며들며 온도를 같이하는지는 의문이다. 현장의 힘을 믿고 민간 영역과 협력해야 하는데, 기관과 관계자 중심의 행사에 치중해 시민들의 인식과 참여가 부족한 실정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의 문화는 단순히 국가가 주도하는 하달식의 지원 정책을 넘어서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도하는 방식으로 확장되고 있다. 전문 예술가의 계승 발전에 머물 것이 아니라 시민 사회가 주도하는 자율성, 문화 다양성, 포용성 그리고 차별 없는 시선과 관점으로 재정립되고, 단순 복지의 개념에서 더 확장되어야 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화정책의 방향과 시대적 요구는 창의적 창제작의 환경을 넘어 예술가·비예술가 구분 없는 예술로 치유하고 예술로 소통하는 정책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아동, 초고령, 장애, 복지, 의료, 돌봄 등은 앞으로의 사회가 동행해야 할 분야다. 그 가운데 돌봄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 부산은 ‘노인과 바다’라는 수식어가 붙는 초고령사회의 대표적 도시이다. 사실 아이들부터 고령인구까지 많은 사람은 이미 예술로 ‘돌봄’을 하고 있다. 이를 좀 더 체계화해 어떻게 ‘돌봄의 문화’를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고립’과 ‘고독’이라는 현실 앞에 문화적 안전망을 만들 수 있다. 언제까지 복지에만 맡길 것인가. 예술에 대한 존중과 예술가와의 동반 성장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 그간 예술인을 대상으로 수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예술가의 여건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힘들고 공공 의존도만 높을 뿐이다. 이를 어떻게 풀지가 숙제다.
‘다시 현장에 다가가는 정책’을 통해 기후 위기, 불평등, 인구 및 지역 소멸, AI 발전, 젠더·세대 갈등과 혐오, 미디어 환경 변화 등 급변하고 앞으로 마주하게 될 다양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후 위기는 극한 강도로 찾아오고, 한반도를 사람이 살아갈 수 없는 땅으로 만들고 있다. 전국 228개 시군구 중 121곳이 소멸 위험 지역이다. 대한민국 공동체가 지구상에서 지워지고 있는 것이다. 지방 도시의 소멸은 대한민국 소멸의 바로미터다.
며칠 뒤면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한다.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급하게 대선을 준비하느라 공약은 그랬다고 칩시다. 함께 나은 세상으로 갈 때는 단디 챙겨 보입시다.” 문화! 대단하게 우아하거나 세계적일 필요는 없다. 두 정부가 후퇴시킨 문화정책을 반드시 다시 돌려놓는 게 먼저다. 적재적소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그 무엇보다 옳다. 그것이 시작이다.
비틀스 노래 ‘Come Together’가 떠오른다. ‘그가 말했어./난 너를 알고, 넌 나를 알지. /내가 네게 말해줄 수 있는 건 네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거야./함께 모여! 지금 당장, 나를 넘어서…’ 이 노래는 196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캠페인 노래로 만들어졌다가, 비틀스의 히트곡이 되었다. 비틀스가 해체되기 직전에 만들어진 곡으로 그들의 음악적 진화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분열된 사회에 대한 통합’의 메시지와 멤버 간의 갈등이 교차 되는 아이러니한 곡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에 꼭 어울린다.
2025-05-2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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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학수의 문화풍경] 행복의 철학, 목표 추구의 여정
우리는 흔히 “행복은 ○○를 소유하는 것” “행복은 △△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행복이 욕망이나 소망의 달성 여부에 달려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물론 원하는 것을 얻는 기쁨이 순간적으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과연 행복의 본질이 그 찰나의 만족감에만 머무는 것일까? 많은 이들이 행복을 소망이 충족되는 상태라고 믿지만, 김영랑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이러한 통념과는 다른 깊은 통찰을 우리에게 전한다.
시에는 활짝 핀 모란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는 없다. 시인은 모란이 피는 짧은 시간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순간을 간절히 기다리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희망과 설렘, 그리고 기다림 자체의 가치를 노래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라는 구절은, 아직 모란이 피지 않은 현재를 단순한 ‘기다림’의 시간이 아닌,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아직’의 시간으로 인식하게 한다. 드디어 5월 초 모란은 활짝 핀다. 그러나 ‘드디어’의 시간은 얼마 가지 못한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모란은 이내 떨어져 시들어 버리고, 만개의 환희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라는 허무함으로 변모한다.
시인은 ‘모란이 뚝뚝 떠러져 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흰 서름에 잠길테요’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허무함은 모란이 피는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욕망이 충족된 순간의 기쁨은 찰나에 불과하며, 감각 적응 현상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강도가 점점 더 약해지기 때문이다. 감각 적응은 냄새나는 방에 들어가도 좀 시간이 지나면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감각이 지속적인 자극에 둔감해지는 현상을 말한다. 모란은 피는 순간 이미 지고 있는 것이다. “찬란한 슬픔”이라는 모순적 시어는 목표 달성에 수반하는 양면성, 즉 즐거움과 동시에 허무함이라는 이중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김영랑의 시에서 모란이 피어나기까지의 기다림은 평온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그것은 혹독한 겨울의 추위와 눈바람을 맞으며 인내하는 고통의 시간 같은 것이다. 우리는 흔히 행복을 고통 없는 안락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마치 따뜻한 햇볕 아래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 듯 편안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곳으로 나아가는 여정에는 필연적으로 난관이 수반된다. 많은 이들이 고통을 회피하며 안락한 영역에 머무르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자세로는 진정한 행복에 결코 다다를 수 없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행복의 패러독스이다. 어떤 사람들은 고통을 회피하기 위해 행복 자체를 포기하고 컴포트 존에 머무르고자 한다. 컴포트 존이란 친숙하고 안전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심리적 상태이다. 우리는 늘 다니는 길로만 다니며, 이전에 했던 일만 하고, 친구들하고만 만나는 등 컴포트 존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위험과 불안, 그리고 도전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많은 이들은 컴포트 존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면서 목표를 낮추거나 목표를 세우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컴포트 존 안에서 체류하고자 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진정한 행복은 마치 험준한 산을 오르는 등반과 같다. 숨이 차고 다리가 아픈 고통의 순간들 덕택에, 사방으로 툭 트인 정상의 전망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행복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을 제시한다. 하나는 ‘소유 지향적인 삶’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 지향적인 삶’이다. 소유 지향적인 삶에서는 물질적 풍요와 성공을 통해 행복을 얻으려 한다. 더 좋은 집, 더 비싼 차, 더 높은 지위를 갈망하며 끊임없이 소유를 늘리는 삶에서 행복은 불안정하고 일시적이다. 반면, 존재 지향적인 삶에서는 자기 자신의 성장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 자신을 창조하고 타인과의 발전적 교류 속에서 환희를 경험하는 사람은 잘 나가는 타인을 질투하지 않는다. 우리가 소유 모드의 삶으로부터 존재 모드의 삶으로 전환한다면, 대중의 시기를 득표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현대 민주정치의 선거 전략에도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안락함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변화와 성장에 집중하며, 목표를 향해 용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김영랑의 시처럼, 모란이 피기까지의 인내와 기다림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행복의 깊이를 깨닫게 될 것이다. 고통을 회피하는 안락함 속에서는 결코 피어날 수 없는, 값진 행복의 꽃을 말이다.
2025-05-22 [1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