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재파의 생각+] 세대 혐오의 정치학
최근 출시된 아이폰 17로 인해 ‘영포티(young forty)’라는 세대 용어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핸드폰이 출시된 직후 온라인에는 ‘아이폰 17은 영포티의 필수 아이템’이라는 제목과 함께 한 이미지가 밈으로 확산됐다. 이미지 속에는 젊어 보이려 애쓰는 중년 남성이 아이폰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이를 본 젊은이들은 ‘지름신을 막아준다’며 웃음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그 웃음에는 영포티 세대를 향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
사실 영포티라는 용어가 처음부터 부정적 멸칭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이 말이 처음 등장한 2015년 무렵만 해도 영포티는 트렌드에 민감하고 자기관리에 적극적인 ‘젊은 40대’를 뜻했다. 이들은 안정된 소득과 구매력을 바탕으로 문화와 소비를 주도했고 멋있는 중년의 모습으로 명명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는 크게 바뀌었다. 이제 영포티는 젊어 보이려 애쓰는 40대, 혹은 스스로 젊다고 착각하는 40대를 비꼬는 멸칭으로 쓰이고 있다.
최근까지 사회적 담론의 중심에 있었던 MZ 세대론이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영포티 세대론이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사회에서 세대론은 일정한 주기를 두고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매번 새로운 이름으로 사회적 갈등과 혐오를 조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대론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확산하는가. 다시 말해 특정 세대를 규정하는 담론이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가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세대론은 자본의 논리에서 시작된다. 기업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고 소비를 자극하기 위해 특정 세대를 명명하고 그 세대의 특징을 규정하는 마케팅을 펼친다. ‘MZ는 욜로(YOLO)와 플렉스(flex)를 즐긴다’, ‘영포티는 패션, 뷰티, 헬스케어 등 자기관리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는 식의 선언적 마케팅은 사실상 소비 지침에 가깝다. 기업은 세대를 구획하고 그에 맞는 상품과 서비스를 쏟아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자본주의 권력이 만들어낸 이름이 사회적 현상으로 굳어지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그 틀에 자신을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이 세대론을 만들어내면 정치권은 이를 세분화해 갈라친다. 정치권은 ‘MZ 이대남’을 보수 성향의 새로운 지지층으로 규정하고, ‘영포티 남성’을 진보 성향의 핵심 지지 기반으로 강조한다. 특정 세대를 ‘변화를 이끌 주체’로 띄우기도 하고 반대로 ‘기득권 집단’으로 몰아세우기도 한다. 실제로는 세대 내부의 목소리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단순화된 세대론을 활용해 자신에게 유리한 구도를 만들고 결과적으로 세대 간 갈등을 부추긴다.
미디어는 이러한 갈등 구도를 더욱 적극적으로 확대 재생산한다. 예컨대 ‘근무 5분 전 출근 못 한다는 MZ’, ‘영포티가 입으면 주가가 떨어져’와 같은 자극적 제목의 기사를 앞세워 조회수를 올린다. 이 과정에서 영포티는 자기 객관화를 못하고 20대에게 추근대는 기득권 세대로, MZ는 자기만 아는 이기적 젊은이 세대로 그려지며 풍자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또 알고리듬에 기반한 ‘필터 버블’ 효과로 이러한 확증편향은 점점 공고해진다. 결국 미디어는 세대론을 자극적 콘텐츠로 소비하며 사회적 분열을 확대한다.
대중은 자본, 정치,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점차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인다. 우리네 일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소한 갈등 그리고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발생한 갈등이 세대 구도로 포장되면서 세대 탓으로 돌려진다. 결국 사람들은 문제의 본질을 보는 것 대신 너희 세대의 문제라며 상대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데 익숙해진다. 이 과정에서 세대 갈등은 혐오로 증폭되고 확산된다.
물론 각 세대는 공통의 시간을 공유하며 나름의 문화적 특징을 형성한다. 그러나 세대를 하나의 이름으로 단순화하는 순간,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사람의 현실은 지워진다. 각 세대 내부에는 계층과 성별, 직업과 지역의 차이가 뒤섞여 있다. 같은 세대 안에서도 누군가는 상속받은 강남 아파트에 살고 누군가는 최저임금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세대론은 이러한 다층적 현실을 지워버리고 혐오의 언어만 남긴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이 붙여놓은 이름, 정치가 이용하는 프레임, 미디어가 부추기는 갈등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진짜 문제는 세대 갈등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불평등이다. 불안정한 일자리, 주거 불평등, 돌봄과 교육의 격차는 특정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세대를 탓하는 언어에 머무는 한 우리는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고 서로를 소모적으로 공격할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세대를 가르는 이름이 아니라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대의 언어다.
2025-10-16 [18:11]
-
[정훈의 생각의 빛] '몬도가네'의 환한 홀씨들
지난달 초 10년간 누렸던 ‘원도심 주민’ 생활을 청산하고 감천동으로 이사를 했다. 영주동에서 8년, 보수동에서 2년 거주했기에 정확히 10년을 채우며 살았던 부산 중구를 떠난 것이다. 물론 거주지만 옮겼을 뿐 주로 활동하는 공간은 여전히 중구다. 이런저런 이유로 가재도구는 양산에 있었는데, 양산에서 감천동으로 이사하는 일이 만만치가 않아서 걱정했다. 이삿짐센터에 연락해 우선 견적을 보고 이사 날짜를 정한 후, 이사하기 편하게 정리해야 할 물건들을 틈틈이 쟁여두거나 버리다가 이사 전날 양산으로 가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마음이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고작해야 한 달에 두어 번 들르는 게 전부였던 양산 공간이었지만 막상 떠나려니 찾아오는 서운함 때문이 아니었다. 당장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을 떠올리며 빨리 이 시기가 건너갔으면 하는 심정 때문이었다. 물론 이사 스트레스야 어디 나뿐만이겠는가.
인공지능이 창작마저 대체하는 시대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의지
작가들이 느끼는 불안감은 기우일뿐
요즘엔 이삿짐센터에도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왔는지 4명의 직원 중 팀장으로 보이는 사람만 한국 사람이었고, 나머지는 중국인이었다. 가을 초입이라고는 하지만 막바지 무더위가 절정이었던 날이었다.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팔과 다리에 온통 문신을 한 사람이 끼어 있었고, 다른 이들도 차림은 간편했지만 일하러 나온 사람보다는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듯 행색이 헐렁해 보였다. 나는 이들의 모습에 조금은 긴장했지만, 군소리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성실하게 짐을 내리고 올리는 모습을 보면서 잠시나마 첫인상만 보고 불안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집 앞 골목으로 진입한 5톤 트럭이 우리 집을 얼마 두지 않고 앞집 정원수 나뭇가지에 걸려 하는 수 없이 중간쯤 차를 세워 짐을 내려야 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불평하는 듯한 표정 없이 묵묵히 주택 2층에 있는 내 공간으로 짐을 부리고 대강이나마 정리를 해주었다.
산적들처럼 갑작스레 양산 집엘 들이닥쳤다고 스스로 상상하곤 피곤한 이사를 어떻게 마무리 짓나 내심 불안했던 나는,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간 것처럼 사태가 수습되고 나서야 비로소 생각하게 되었다. 워낙 세상 인심이 험해 어제까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눈앞에 버젓이 벌어지더라도 하등 놀랍지 않은 요즘이다. 여기저기 정리되지 못한 가재도구들이 산적했던 집을 옮겨야 하는 처지에서도 이삿짐센터 직원 첫인상만 보고 오늘날의 흉흉한 인심과 곧바로 연결 지었던 나 자신만 봐도 그렇다. 업무 중 간혹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나 짧은 영상을 보노라면 세상이 참으로 넓고, 다양한 가치관과 의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무수히 많다는 생각이 곧잘 든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세상이 천지개벽할 정도로 뒤바뀌었고, 불안한 미래가 가져다주는 의심과 불안이 팽배하였던 기억을 떠올린다. 하지만 지금은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AI(인공지능)의 놀라운 발전도 그 풍경 가운데 하나다. 그 기술과 기능의 고도화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글 쓰는 일이 업이다 보니 작가들과 만날 기회가 많은데, 요즘은 AI 때문에 작가 노릇도 이젠 접어야겠다는 식의 푸념도 자주 듣는 편이다. 이들에게 지금의 세상은 어찌 보면 몬도가네(mondo cane·개 같은 세상)다. 즉, 세상이 편리해진 만큼 창작마저 인공지능으로 대체되는 세태에 대한 일종의 불만이나, 그동안 비록 돈은 안되지만 ‘작가’라는 특수 신분이 주는 자부심도 이젠 내려놓아야 한다는 낭패감이 그런 말로 드러낸 것이다.
‘AI와 문학’이라는 타이틀로 각종 세미나나 학술대회를 비롯하여 잡지마다 기획 특집으로 분석하고 전망하면서, ‘문학’이 놀랄만한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응전하는 방법과 태도를 모색하고 있다. 이제 인간과 기계가 함께 작업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작품이 ‘제작’되어 독자의 소비를 이끄는 문화 시스템 속으로 작가들도 동참해서 걸어 들어갈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작가의 고유 영역인 창작의 독창성을 존중해야 하는지의 판단은 오롯이 작가 개인의 몫으로 남았다. 작가의 고유성을 역설하는 이도 AI가 주는 편리성과 절묘한 구성력에 유혹을 느끼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듯이, 시대에 발맞춰 이제 작가들도 구태의연한 창작 의식에서 벗어나 기술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는 이 또한 문학 고유의 창조적인 영역을 부정하지 않는다.
차림새부터 영락없이 가벼운 MZ 세대처럼 보였던 이삿짐 직원들이 물건을 손에 쥐고 옮기는 순간 보통 사람으로서는 흉내도 내지 못할 장인의 손길처럼 섬세하고 노련했던 기억을 새삼 되살린다. 과정이나 형식도 중요하지만 창작하는 내내 열정과 의지가 얼마나 지속되느냐가 작가에게 부과된 본래 능력이요 기능이다. 이 점을 잊지 않는다면 4차 산업혁명이라 일컫는 요즘, 글 쓰는 사람이 느낄 만한 불안감은 괜한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견지하는 태도야말로 작가 개개인이 하나의 홀씨처럼 우리 사회에 던지는 귀중한 선물이 되리라 믿는다.
2025-10-09 [18:09]
-
[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문화도시는 세계적인 꿈을 꾸어야 하는가!
‘제2의 도시’는 ‘제1의 도시’를 꿈꿔야만 하나. ‘문화의 불모지’ 부산시는 민선 8기 시정 슬로건으로 ‘글로벌 허브 도시’를 내세우며 부산 엑스포 도전을 선언했다. ‘119 대 29’ 전대미문의 참패였다. 객관적인 희망의 데이터는 처음부터 찾아보기 힘들었다. 2022년 1월 19일, 현 부산시장은 엑스포 유치를 위해 방문한 프랑스 파리에서 퐁피두센터 관장과 만나 부산 분관 설립을 합의했다. 2024년 7월 22일 부산시의회 행정문화위원회에 이를 제안해 비공개로 심의했다. 비공개 이유는 퐁피두 측과 비밀리에 협의한다는 합의 때문이었다. 결국, 같은 해 10월 14일 국회 국토위 국정감사에서 당시 업무협약(MOU) 체결 문서가 공개되며 만천하에 알려졌다. 이후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거센 반발이 일어나고 228명의 대학 교수까지 성명에 동참하면서 상황이 극도로 악화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퐁피두센터 부산 분관 설립은 지난달 9일 부산시의회 기획재정위원회의 ‘2026년도 정기분 공유재산관리계획안’ 심사를 통해 진통 끝에 통과되었다.
합의 내용을 몇 개만 살펴보자. 제2조 ‘사업 설명’에 ‘퐁피두센터 부산’을 퐁피두 측이 5년 동안 점유한다고 되어 있다. 즉 땅과 건물, 유지 보수, 퐁피두 센터 인력 등 모든 것은 부산시가 부담하는 것이다. 또한 ‘기획전 혹은 일부의 콘텐츠가 전 세계의 타 문화 시설에 제공될 수 있다는 것도 동의한다’라고 적시되어 있다. 5조 ‘재무 조건’에는 상설전, 기획전, 교육비와 브랜드 사용료를 합친 연간 120억 원과 세금, 운반비, 보험료 등의 모든 비용을 부산시가 부담한다고 되어 있다. 제9조 ‘언어와 준거법’에 따르면, 부산시와 퐁피두센터 양측은 이 기밀 문서를 프랑스어와 영어로만 작성하기로 하고, ‘본 양해각서는 프랑스법에 따른다’라고 협약했다.
기밀 협약 문건을 만들어 가며 ‘세계적인 미술관’ 분관을 부산에 세운다? 여기에는 어떠한 비밀이 내재되어 있을까. 곧 한화그룹은 서울 여의도 63빌딩에 퐁피두 분관을 개관하는데, KTX로 불과 2시간 30분 남짓 거리에 서양의 근대 미술을 추종하며 부산이 엄청난 기회비용을 지급하는 퐁피두 분관 유치. 그 까닭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의문투성이다.
‘지역 문화 주권 시대’라는 말은 정치판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이다. 실제 지역의 현장에서 체감하는 온도는 싸늘하기 짝이 없다. 왜 지역은 세계적인 꿈을 꾸어야만 지방이라는 촌스러움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요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지 싶다. 부산에서 만들어지는 문화와 미술 생태계가 비교되어야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세계적인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올해 8월까지 관람객 수가 400만 명을 넘었고, 연말까지 600만 명에 달할 거라는 예상을 다룬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는 세계 박물관 순위에서 5위권 안에 드는 수치다. 한국의 문화를 알기 위해 매일 줄을 서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산 혹은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지역’을 보고 싶어 한다. 굳이 부산에서 ‘퐁피두센터’를 만날 이유가 없다. 파리에 가면 된다. 굳이 ‘퐁피두’라는 이름을 빌려 서구적 세계화에 종속관계의 빌미를 만드는 일을 후세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문화 사대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공공 행정과 욕망을 시민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인정 욕망의 과잉 시대를 추종하듯 관의 주도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지역의 예술가와 시민들 각각의 삶을 존중하며 각자의 모습을 담아내는 도시가 되어야 세계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부산다운 도시로 살아간다. 이미 부산은 산과 바다를 품은 아름다운 도시로 소문나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또한 많은 예술가도 문화 이민을 오고 있다. 거시적 관점에서 생태계를 유지해야 함에도 예술인복지센터 하나 없는 게 현실이다. 생태계의 숙주와도 같은 문화 생산자들의 유입을 받아들일 장치 하나 없는 셈이다.
제일 우선시 되는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기후위기 앞에서 무슨 발상인가! 앞으로 닥칠 자연의 엄청난 재앙에 속수무책이다. 여태껏 잘 지켜온 천혜의 이기대 숲은 64%나 훼손될 우려가 있다. 콘크리트 건물 9개가 들어서면 숲은 사라진다고 보아야 한다. 무리한 일정으로 환경영향평가나 절차 없이 이 사업을 굳이 밀어붙이는 부산시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올해 말까지 계약이 체결되어야 한다고 한다. 부디 없던 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예술가들은 지금도 자기 자리에서 하루하루를 작두 타듯 하는 삶을 살아가기에도 벅차다. 이들이 더 이상 거리로, 현장으로 나가 모질음을 쓰게 하지 말자. 투명하고 상식적인 도시에 살고 싶다. 시민들도 마찬가지일 테다.
2025-10-02 [17:30]
-
[배학수의 문화풍경] 왜 우리는 춤을 보고, 추는가
얼마 전 울산 대학의 문화예술 아카데미에서 필자는 무용 철학을 강의하였다. 무용에 관한 철학적 토론은 주로 춤의 가치를 탐구한다. 무용 철학은 춤을 단순한 신체 움직임이나 예술 형식으로 이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왜 춤을 추며, 왜 춤을 감상하는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무용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관람 댄스인데 이것은 보는 춤이고, 둘째는 참여 댄스인데 이것은 추는 춤이다. 두 종류의 춤은 가치가 서로 다르다. 첫째 관람 댄스에 발레, 현대무용, 조선무용, 그리고 K팝 댄스와 같은 형식이 속한다. 이 경우 무용은 안무가가 구성하여 무용수가 무대에서 공연하는 작품이며, 관객은 객석에서 그것을 감상한다. 관람 댄스는 현실을 재현하기보다 가상의 세계를 창조한다. 발레 ‘백조의 호수’는 왕자와 백조 공주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세계를 형성하며, 마사 그레이엄의 ‘비’(Lamentation)는 슬픔에 잠긴 개인의 감정 세계를 만들며, 한성준의 ‘태평무’는 나라의 태평성대를 염원하는 왕비의 희망 세계를 구성한다.
둘째 참여 댄스는 소셜 댄스, 클럽 댄스, 스트리트 댄스처럼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춤이다. 관람 댄스에서 무용가와 관객은 분리되지만, 참여 댄스에서는 그러한 구별이 없다. 살사나 바차타, 왈츠, 힙합 댄스, 그리고 전통 강강수월래 같은 춤이 참여 댄스의 사례이다. 참여 댄스는 극장이 아니라 축제, 놀이, 의식, 사교의 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춤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이 물음은 관람 댄스의 경우 “왜 춤을 봐야 하는가”, 참여 댄스인 경우 “왜 춤을 추어야 하는가”의 문제이다. 서양에서는 20세기 초까지 춤의 담론은 관람 무용에 집중되었다. 형식론에 따르면 무용의 가치는 춤 자체에 있어서, 무용수의 기교, 안무의 구성, 그리고 움직이는 신체의 아름다움이 곧 가치이다. 반면 표현론은 춤을 무용가의 감정 표현으로 간주하고, 그 감정 표출에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반면 중국의 공자는 춤의 가치를 관객의 관점에서 평가한다, 무용 작품은 관객의 정신에 어떤 영향을 주는데, 여기에 춤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떤 춤은 관객의 마음을 지나치게 침울하거나 흥분하게 만드는데, 이런 것은 나쁜 춤이다. 반면 어떤 춤은 관객의 정신을 절도 있고 조화롭게 만드는데, 이런 춤이 좋은 춤이다.
20세기 독일의 하이데거도 공자처럼 예술 작품의 가치를 그것이 관객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서 바라보았다. 그의 진리론적 예술론을 무용에 적용하면, 춤은 인간과 세상의 진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진도 씻김굿은 무용수의 기교가 훌륭하거나 몸선이 예뻐서가 아니라, 공연을 보는 관객에게 인간 유한성의 진실을 알려 준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참여 댄스에서 춤의 가치는 외부인의 판단이 아니라, 참여자의 체험에 있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수피 댄스에서 무용수는 동그란 원을 그냥 반복해서 돈다. 거기에는 복잡한 동작 구성도 없고, 전문적 기교도 없다. 이런 춤의 가치는 춤추는 과정에서 개인이 얻는 초월적 체험에 있다. 힙합 댄스는 미국에 거주하는 아프리칸 아메리칸 그리고 라티노 청년의 저항적 표현이며, 그 반항의 자세에 춤의 가치가 있다.
19세기 독일의 니체는 참여 댄스의 가치를 가장 잘 설명한다. 인생은 고통스럽고 세상은 부조리하다. 댄스는 그런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염세적 방관적 자세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삶을 긍정하는 행위이다. 니체는 후회, 죄의식, 열등감처럼 우리의 기분을 아래로 끌어내리는 생각을 중력의 정신이라고 불렀다. 춤은 그런 중력의 정신을 극복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발레의 ‘그랑 제떼’와 동래 학춤의 ‘날음새’는 무용수가 공중으로 날아서 중력의 정신에 저항한다. 이처럼 ‘당겨내림’에 저항하는 도약은 여러 댄스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브레이크 댄스의 헤드 스핀은 머리를 축으로 삼아 온몸을 회전시키는 고난도 기술이다. 보통 머리는 취약한 부분이라 보호해야 할 영역으로 여기지만, 댄서는 관습적 신체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머리를 오히려 힘과 균형의 중심으로 삼는다. 그 회전을 통해 몸은 정신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장이 된다.
무용 철학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보는 춤과 추는 춤은 왜 가치가 있는가? 춤은 신체의 미나 동작의 기교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진실을 드러내고 삶을 긍정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무대 위의 공연에서든, 공동체의 축제 속 춤판에서든 춤은 늘 우리에게 삶을 새롭게 사유하고 긍정할 기회를 제공한다. 춤은 인간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인생의 자세를 선언하는 철학적 동작인 것이다.
2025-09-25 [18:32]
-
[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초고령화 사회, 돌봄의 건축
주말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동생과 함께 거주하는 모친에게는 요양보호사가 주 5일 방문한다. 요양보호사도 이미 60세가 넘었다. 노인이 노인을 케어하는 ‘노노케어’는 이미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체계적이지 않다. 90세가 넘은 모친을 볼 때마다 삶과 죽음의 경계, 인간이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는 존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만 65세 이상이 20%를 넘겨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 20년 뒤인 2045년에는 37%까지 높아져 일본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가 된다고 하니 ‘노인과 바다’인 부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노인의 나라’인 대한민국에 대한 문제이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인구가 급격히 팽창했던 베이비붐 세대가 노인으로 편입되는 것과 인구 소멸이 함께 가져온 결과다. 지금은 다섯 명 중 한 명이 노인이라면 20년 후에는 세 명 중 한 명이 노인이라는 것이다. 미국 노인 복지 전문가 데이비드 버넷(버지니아커먼웰스대) 교수는 한국을 두고 “급속한 인구·사회·경제 변화를 겪는 국가의 전형”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늙음을 개인의 문제로 보는 게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준비해야 할 때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2024년 12월 기준, 전국 3892개 노인요양시설에 입소한 어르신은 41만 2000여 명에 달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조사(2013년)에서는 요양 시설 입소 노인의 68%가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이 중 절반 이상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족의 결정으로 입소했다는 것이다. 가족의 돌봄 부담, 주거 불안, 경제적 여건 부족 등으로 요양 시설에 입소하는 것은 그들에게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노인 돌봄을 핑계로 그들의 삶을 시설 속에 가두고 관리 대상으로 여겨왔다. 누구도 자신의 마지막을 시설에서 맞이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요양원이 아니라, 찾아가는 돌봄을 위한 지역사회 시스템이다. 하지만 현재의 제도는 이런 현실을 제대로 받쳐주지 못한다. 실버타운은 지나치게 비싸 중산층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공공임대는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돌봄이 필요한 순간마다 집을 떠나야 하는 구조는 노년을 불안하게 만든다. 재가 서비스, 요양병원, 요양 시설이 각각 따로 존재해 연속성이 없으니, 노인의 삶이 시설과 제도의 틈새에서 조각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나의 부모일 수도 있고, 미래의 내가 될 수도 있다.
선진국들은 이미 탈시설화를 국가 전략으로 채택하고 ‘집으로 찾아가는 복지’를 시작했다. 싱가포르의 ‘캄퐁 애드미럴티’는 공공임대주택 위에 주거, 의료, 상업, 커뮤니티 공간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복합단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병원이 있고, 이웃과 함께하는 정원이 있으며, 아이들이 뛰노는 놀이터와 도서관이 곁에 있다. 노년의 이동 불편을 건축이 대신 설계해 준 것이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휴마니타스’는 더 실험적이다. 대학생이 요양 시설에 무료로 거주하며 어르신과 생활을 나눈다. 세대 간의 교류를 건축이 의도적으로 설계한 셈이다. 일본은 ‘지역포괄케어시스템’을 통해 의료, 돌봄, 주거를 지역 단위에서 엮어내고 있고, 덴마크는 오래전부터 집에서 가능한 한 오래 살 수 있도록 재가 중심 돌봄 체계를 마련했다. 건축은 여기서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제도와 맞물려 돌아가는 사회적 장치가 된다.
한국 사회에도 무엇보다 연속성 있는 주거가 필요하다. 노인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가정과 청년, 은퇴 세대가 섞여 살아가는 ‘복합 공간’이 되어야 한다. 어린이집과 작은 도서관, 공유 부엌과 정원을 함께 두어 세대가 자연스럽게 만나는 곳, 다섯 명이나 열 명이 함께 사는 소규모 그룹홈은 또 다른 대안이 될 수 있다. 작은 가족처럼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이웃 공동체는 고립을 막아준다.
이런 변화는 건축가의 설계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노인 친화적인 집에는 세제나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고, 대학과 연계한 은퇴자 주거 단지를 시범적으로 지원하며, 기존 아파트를 ‘에이징 레디(노후에도 안전하게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을 미리 준비하는 것)’로 바꿀 수 있는 리모델링 표준을 제정하는 일 등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 나아가 도시는 ‘돌봄의 인프라’를 물리적 시설만이 아니라 생활권 단위의 사회적 관계망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결국 노년의 존엄은 물리적 공간과 제도적 장치, 현실적인 정책과 실행이 맞물려야 지켜질 수 있다.
초고령화 사회는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초고령화 사회의 도시와 건축은 모든 세대가 안전하고 편리하게 공존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핵심이다. 우리가 어떤 건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노년은 고립과 불안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존엄과 관계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2025-09-18 [18:05]
-
[김정화의 크로노토프] 키메라의 시대, 혼종의 리듬
처서가 지난 8월 끝자락 토요일 오후,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신작 〈키메라의 땅〉을 들고 부산콘서트홀 무대에 섰다. 작가 낭독은 이야기의 문을 열고, 이어진 앙상블 소리는 그 문턱을 넓혔다. 세종솔로이스츠 위촉으로 탄생한 김택수의 ‘키메라 모음곡’은 미래적 상상과 인간적 감각 사이를 크게 오가며 공간을 채웠고, 변이와 생성의 정서를 먼바다에서 끌어오는 듯했다. 그것은 낭독회도, 전통적 음악극도 아닌, 문학과 음악, 텍스트와 음향이 서로에게 기대며 다른 차원의 시간을 여는 장면이었다. 소설과 음악 작품의 제목처럼, 우리는 진정한 ‘키메라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했던 키메라는 더 이상 공포의 상징만이 아니다. 인공지능과 합성 생물학, 디지털과 아날로그, 전통과 실험, 지역과 세계가 얽혀 새로운 형상을 낳는 경계를 넘는 창조적 은유다. 경계가 흔들리는 시대에, 예술은 그 혼종성을 가장 예민하게 감지하고 반영한다. 내레이터의 목소리 위에 기악 음악의 질감이 포개질 때, 우리는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통한 시간의 결을 어루만진다. 한 장르의 독자성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매체가 서로를 변형시키며 만들어내는 ‘사이’의 경험은 이번 무대가 남긴 값진 감각이었다.
피란의 역사로 시작한 항구도시 부산은 본질적으로 뒤섞이고 열린 도시였다. 서양악기인 피아노가 가장 먼저 들어온 도시인 것처럼, 항구는 외부의 시간과 경험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장치였다. 부산은 늘 낯선 것들의 경계 위에 있었고, 그 경계성 덕분에 가장 먼저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는 도시였다. 개방과 융합 속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창조해 온 도시, 그 흔적은 곳곳에 겹겹이 쌓여있다. 이제는 북극항로라는 새로운 시대를 향해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면 도시의 문화적 랜드마크인 공연장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공연장은 단지 무대를 빌려주는 장소가 아니라, 도시의 뒤섞인 정체성을 감지하고 시대의 징후를 반영하는 울림통이어야 한다.
선조들은 예악(禮樂)에서 그 길을 일찍이 말했다. 예가 몸의 경계를 세운다면, 악은 마음의 결을 맞춘다. 서로 다른 재료의 소리를 아우르는 팔음은 중용을 잃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루는 ‘화악(和樂)’을 가르쳤다. 그것은 곧 도시의 조화이기도 하다. 섞임은 타락이 아니라 조율의 미덕이며, 조율은 ‘듣는 법’에서 시작된다. 결국 도시는 소리를 크게 내기보다 서로의 숨결에 귀 기울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기획한다’는 태도다. 외부 유명세를 소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지역 맥락과 시대 질문을 프로그램의 구조 속에 심는 일이다. 이번 무대처럼 세계적인 텍스트와 한국 작곡가의 신작이 한 작품의 결을 이해하고, 하나의 호흡으로 만나는 순간, 공연장은 소비의 장소에서 상상의 장소로 바뀐다. 이름을 더하려 들지 않아도 된다. 정확한 음정으로 도시의 질문을 말하는 것, 명성을 빌리지 않고도 스스로 맥락과 목소리로 무대를 만드는 태도다. 그것이 곧 자기 기획의 핵심이다.
공연장에 울리는 박수 사이에 스며든 짧은 침묵, 로비를 지나가던 낮은 대화, 바깥 유리창을 스치던 바람과 풍경은 무대와 악보 밖의 음표가 되어 ‘뮤지킹 음악하기’를 완성한다. 새 레퍼토리나 익숙한 곡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어떻게 듣고 서로 묶어내느냐에 달려 있다. 결국은 ‘듣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서로를 조금 덜 말하고, 한 박자만 더 기다려 주면 된다. 프로그램이 늘 화려할 필요도 없다. 한 작품을 오래 준비하고, 한 지역의 이야기를 천천히 붙잡는 시간이 쌓이면 도시의 음색도 자연스레 깊어진다. 부산콘서트홀과 곧 문을 열 오페라하우스가 그 시간을 품는 그릇이 된다면, 공연 목록의 화려함보다 우리가 어떻게 달라졌는가가 기록될 것이다.
우리는 종종 다른 도시의 사례를 말하지만, 도시의 길은 모방이라기보다 창조적 조율에 가깝다. 해양이라는 본성, 확장되는 문화 인프라, 지역 창작자의 네트워크, 국제적 협업의 통로라는 이질적 요소들을 한 무대에서 만드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굳이 정책적 언어로 번역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연습이 좋은 습관을 만들고, 그 습관이 공간의 품격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그 과정 자체가 곧 도시의 전략이 된다. 우리는 낯선 세계를 이해할 수 없을 때, 그 세계의 리듬부터 듣는다. 예술은 그 리듬을 미리 들려주는 언어다. 키메라의 시대를 먼저 듣는 도시만이, 그 시대를 먼저 살아볼 수 있다. 공연장을 실험실이자 공명통으로 삼아 자기 언어로 시대를 말할 때, 비로소 문화도시 부산이 된다. 이 도시에 남겨야 할 것은 ‘누가 왔다 갔다’는 화려한 목록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만들었는가’라는 우리만의 연대기다. 미래는 열린 마음으로 먼저 경험하는 도시의 것이다.
2025-09-11 [18:02]
-
[백재파의 생각+] 상탈 러닝 논쟁을 지켜보며
최근 즐거운 취미가 생겼다. 그것은 바로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 함께 러닝을 하는 것이다.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한마디 말도 섞지 않고 뛰기만 하지만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같은 노래를 들으며 같은 호흡으로 뛰고 있자면 딸아이의 마음이 어렴풋하게나마 전해지기도 한다. 또 힘든 달리기가 끝나고 하이파이브를 할 때면 말은 안 해도 전우애와 같은 가족애가 생긴다.
그런데 며칠 전 딸아이가 갑자기 러닝 가기가 싫다고 했다. 딸아이도 내심 나와 함께 러닝 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느꼈던 터라 그 이유를 물어봤다. 아이가 말하길 러닝 자체는 싫지 않지만 집 앞 공원에는 웃통을 벗고 뛰는 아저씨들이 많아 왠지 징그럽고 위화감이 들어 러닝 가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그날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공원으로 차를 타고 이동해 러닝을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현행법상 처벌 대상 아니라고 하지만
법은 최소한의 기준, 최선의 답 아냐
제재 아니어도 '탈의·착용 원칙' 필요
공동체 공론장 만들어 '최적선' 찾길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상의 탈의 러닝에 대한 의견을 찾아보았다. 기록적인 폭염이 지속되고 있어서인지 뉴스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상의 탈의 러닝에 대한 논쟁이 뜨겁게 벌어지고 있었다. 주된 논지는 이렇다. 상의 탈의 러닝 반대 측은 공공장소에서 맨몸을 드러낸 채 운동을 하면 타인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으니 상의를 벗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반면 찬성 측은 상의 탈의 운동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이를 규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 침해라는 입장이다.
찾아보니 실제로 공공장소에서 상의 탈의를 하는 행동에 대해 제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었다. 2015년 경남 양산에서 한 남성이 집 근처 공원에서 상의를 탈의하고 일광욕을 하다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알몸을 지나치게 내놓거나 가려야 할 곳을 내놓아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준 사람’이라는 경범죄처벌법의 과다 노출 조항에 따라 범칙금을 부과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했다. 헌재는 조항의 ‘지나치게 내놓는 것’, ‘가려야 할 곳’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해당 조항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후 헌재 결정에 따라 해당 조항은 ‘공개된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성기, 엉덩이 등 신체의 주요한 부위를 노출해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준 사람’으로 개정됐다. 따라서 과다 노출은 성기나 엉덩이로 특정되며, 상의 탈의를 하여 상체를 노출한 행위는 경범죄에 해당하지 않게 됐다.
그러나 ‘법적으로 문제없으니 괜찮다’는 주장은 우리의 정서상 용인되기 힘든 부적절한 상체 노출을 모두 허용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를테면 상의를 말아 올려 배를 드러내 놓거나 아예 상의를 탈의하고 다니는 이른바 ‘베이징 비키니’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으니 괜찮다고 할 수 있을까. 법은 최소한의 기준일 뿐 공동체를 위한 최선의 해답은 아니다. 따라서 ‘불법이 아니니 해도 된다’는 태도에서 한 걸음 물러나 타인을 위한 자제와 배려를 공공의 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다고 상의 탈의 러닝을 일괄적으로 제재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전용 체육공원, 육상 트랙, 지정된 러닝 코스 등 운동 목적이 분명한 장소에서는 상의 탈의를 허용하고, 다목적 공원이나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대중 시설과 연계된 곳에서는 상의 착용을 기본 규범으로 삼는 것이다.
또 기타 판단이 어려운 장소의 경우 해당 시설의 관리 주체가 시설의 운영 목적과 이용객 특성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이용 규칙으로 상의 탈의 규정을 정하면 된다. 그리고 이용객에게 상의 탈의 가능 시간과 구획 등에 대한 구체적 안내와 완만한 계도를 병행한다면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상의 탈의 논쟁을 지켜보며,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 방식이 지나치게 법조문에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상의 탈의 문제를 두고 ‘법에 없으니 무조건 허용’ 대 ‘법을 만들어 처벌’이 맞붙는 장면은 우리 사회가 결과(처벌)만 원하고 과정(토론)은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모습을 민낯으로 보여준다.
법은 범죄냐 아니냐를 가르는 이분법적 틀로 설계돼 있어 우리 일상의 미세한 맥락과 다양한 장면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법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논의는 거칠어지고 때로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갈등이 생겨나기도 한다. 결국 법은 사회 문제 해결의 ‘최저선’일 뿐 ‘최적선’이 아니다.
최적선은 법이라는 최저선 위에 공동체가 공론장을 열어 토론하고 합의할 때 비로소 그려진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시민들이 성숙한 태도로 토의하고 그 결과 공동체가 납득할 수 있는 합의에 이를 때, 규제는 오히려 가벼워지고 자유의 폭은 넓어진다.
2025-09-04 [18:05]
-
[정훈의 생각의 빛] 문화의 힘으로 정의와 민주주의를 긷다
최근 부산과 서울 등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부산광역시중구문화원에 모여 우애를 다진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한국작가회의 본회 소속 작가들이 지역을 순회하면서 집담회 형식의 대화를 하는 행사인데, 이번에 부산지회에서 열린 것이다. 중구 대청동에 있는 중구문화원 2층에 촘촘히 들앉은 회원들과 발제자 및 토론자들의 열띤 음성이 인상적이었던 행사였다. 두 번째 발제자였던 나는 발제에 앞서 중구문화원의 내력과 함께 복병산 일대와 대청동에 포진한 문화유산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였다. 참석자들은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대청동, 광복동, 중앙동, 동광동, 부평동, 보수동 등 이른바 ‘원도심’을 형성했던 공간이 지닌 의미를 짧게나마 언급하고 소개하는 게 멀리 일부러 찾아온 서울 손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의 주제는 ‘더 많은 정의,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하여’였다. 다소 무겁고 거창한 주제여서 발제 내용을 구성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1678년 용두산공원 일대에 조성된 초량왜관 시대와 개항 및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쳐 한국전쟁의 상흔과 뒤이은 피란민들의 유입 등 부산이 역사적으로 빛과 그늘을 동시에 쐰 도시였다는 사실과 행사의 주제를 아우르고 싶었다. 중요한 점은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시위 행렬이 광복로와 대청로를 가득 메웠다는 점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 때에도 도심지였던 서면 일대와 함께 원도심의 간선도로가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는 시민들에게 열린 광장의 기능을 담당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부산이 지켜온 정신적 기질 되살려
시민 자존감 회복하는 동력 삼아야
도시 곳곳 문학적 색채 적극 활용을
행사를 마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일행들을 데리고 식당으로 가는 중간중간 설명이 필요한 도로나 건물이 보이면 그 공간이 지닌 의미를 전달하였다. 부산타워가 보이는 대청로를 끼고 용두산공영주차장 근처에 있는 적산가옥과 영화체험박물관을 가리키며 잠깐 설명을 마치고 저녁 뒤풀이가 예정된 식당으로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평소 손님이 많아 점심시간에는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먹기가 힘들었던 식당이었다. 예약 인원보다 한 테이블 가량의 인원이 더 참석하여 더욱 분주한 자리였다. 부산과 서울 등지에 터를 잡고 창작 활동을 하는 작가들의 상견례를 겸한 자리여서인지 분위기는 차분하면서도 생기를 띠었다.
문학이 ‘정의’와 ‘민주주의’에 보탬이 되는 요소가 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꿈을 언어로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법률과 제도가 규제하지 못하는 온갖 부정적인 인간의 속내와 언행을 폭로하고, 인간 내면에 자리 잡은 자유와 해방에 대한 갈구를 형상화하는 문학의 기능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다. 폭풍우처럼 휩쓸고 간 거리 곳곳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간 맑은 영혼이 있는 반면에, 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의 피와 살을 희생하고자 하는 검은 영혼이 있다. 일제의 강점으로 수많은 이들이 희생되고, 해방이 찾아왔지만 이념 갈등으로 분열되고, 더욱이 한국전쟁으로 무수한 파괴와 살육이 진행되었던 속에서도 이곳 부산이 지켜온 정신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다.
밀물과 썰물처럼 온갖 사람과 물자가 빠져나가고 들어오는 속에서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보였지만, 시나브로 정착하게 된 문화와 정신은 현재 새로운 도시공간으로 탈바꿈하려는 기지개를 켜면서 그 알곡을 펼쳐 보여야 하는 때에 다다랐다고 본다. 세계유산위원회가 내년 부산에서 개최되면서 이곳의 위상이 한층 도약하는 계기가 되겠지만 중요한 것은 시민들에게 안겨다 주었던 자존감 상실을 회복하는 일이다. 한때 서울 다음가는 대도시로 전국 각지에서 부산으로 몰려드는 때가 있었다. 산업화 시기 부산은 청년들의 꿈과 희망을 보상해 준 도시이자 해양산업의 요충지로서 산업과 무역의 플랫폼 기능을 담당했던 공간이었다. 그런 도시였던 부산이 처한 현실을 감안하면 지금도 부산을 지키면서 부산 사람만의 기질과 인정을 지니고 베풀고 있는 지역민의 자존감을 되살리는 방법 가운데 문학도 능히 포함될 수 있다.
용두산공원 일대가 그동안의 번영과 쇠락을 거듭하는 중에 알게 모르게 형성한 문학적 색채를 지워버려서는 안 된다. 시민들에게 뚜렷하게 각인되지 않았지만 여러 문화예술인의 마음으로 유전되어 온 언어의 쉼터, 다시 말해 시인의 체취가 군데군데 남아 있는 곳이다. 그중 하나가 부산 시단의 지킴이로서 동광동 백산기념관 부근 ‘강나루’란 주점을 운영하며 수많은 문학인과 예술인들을 품었던 고 이상개(1941~2022) 시인의 3주기가 곧 다가온다. 그 주점에서 문화예술인들은 정의와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일상의 속살까지도 조곤조곤 나누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혁명까지도 말할 수 있었던 10평 남짓한 그 공간에 가을밤 어둠이 무겁게 가라앉아들 시각, 시인의 조용한 음성이 우리들 등을 어루만지는 듯한 늦여름이다.
2025-08-28 [18:04]
-
[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꿈에 그리던 ‘평양비엔날레’
“전쟁 통에 북으로, 남으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한국 근대사의 예술가들! 북으로 가족을 따라, 미군의 체포를 피해 떠났던 이쾌대 선생, 이석호 선생, 정을녀 선생, 정종여 선생. 그리고 40여 명의 선생들! 또 남으로 가족과 형제를 따라 남하한 원산항에서 출발하여 끝내 터를 잡지 못한 이중섭 선생, 한묵 선생, 장리석 선생, 박항섭 선생, 최영림 선생. 이처럼 훌륭한 선생들이 계셨기에 지금 우리는 성장할 수 있었고, 역사의 흔적을 따라 오늘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문화의 힘을 빌려 그간의 상처와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의 남과 북, 북과 남의 동질성을 이해해 가는 단초로 이 ‘평양비엔날레’가 될 것입니다. 오늘 만천하에 우리는 처음부터 한민족이었다는 것을 당당하게 공표하는 것으로 그 서막을 엽니다. 그간 주변 열강의 지정학적 역학 관계 등으로 인해 우리 민족은 오랜 시간 나누어지고, 떨어져 서로 비방하기도 했지만, 굳건하게 견뎌 왔습니다.
오늘은 남과 북, 북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펼쳐 보이는 자리인데 이념을 떠나 한 민족으로서 말과 얼굴 그리고 문화 또한 언제나 하나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시간입니다. 오늘 이 미술 잔치가 단초가 되어 더 많은 교류와 연대, 협력의 문화를 통해 통일의 그날이 올 때까지 천천히 갑시다. 그리고 서로를 인정하고 기다려 주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화해와 공존의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는 서로의 실체를 확인하고 어루만져주며 ‘분단의 미술의 역사’를 한 민족으로 엮어 ‘통일의 미술사’를 재창조해야 하겠습니다. 남의 유채꽃, 북의 진달래가 만발할 때 우리 다시 만납시다. 어디든 어떻습니까. ”
잠에서 놀라 깨어났다. 너무나도 현실 같은 꿈속의 장면이었다. 며칠 전 광복 80주년 광복절 행사는 온 국민과 함께 다시 찾은 민주주의를 확인하며 서로 격려해 주는 축제 한마당으로 펼쳐졌다. 이번 광복절을 특별하게 느끼는 국민이 많을 것이다. 헌정 질서 정상화와 국민주권의 원칙을 재확인하는 자리였기도 한 축제 한마당이었으니 말이다. 뜨거운 그날의 함성과 기운에 힘입어 꿈속에서 ‘평양비엔날레’가 열리고 개막식 개회사가 들려오다니 가슴 벅찬 기분이 든다. 잠시 물 한 사발 마시고 생각해 보니 마냥 낭만적인 꿈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 생겨날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꿈으로 휘발되기 전에 꼼꼼히 기록해 둬야겠다. 제1회 ‘평양비엔날레’ 전시 감독!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1990년 10월 3일 독일은 다시 통일을 맞이하는 날을 접했다. 그 초석은 수상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1977년 ‘카셀 도큐멘터’에서 동독과 서독 미술가들의 불화가 오히려 두 나라가 통일에 대해 숙고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세계 미술사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세계 3대 미술 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카셀 도큐멘터’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낸 것이다. 1980년대 초 ‘독일적인 미술’의 전통을 잇고자 하는 ‘젊은 야수’ 그룹의 등장과 그 변화를 추적하는 미술사학자들의 연구와 노력은 독일의 통일을 이루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독일 정부는 통일 기념행사로 독일 전역에 예술가들이 설치 작업을 할 수 있게 했으며 대주제를 ‘자유의 극한’으로 정했다. 작가들이 얼마나 통일의 자유를 갈망했는지를 미술로 표현해 주기를 기대했다. 과거에는 정치가 권력의 매체로 미술을 사용하였지만, 매체가 된 미술은 이제 그 매체를 통해 정치와 권력에 대항하고 국민의 자주적 목소리를 연대하는 세월을 맞이하였다. 동독 출신 극작가 하이너 뮐러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의 시간은 정치 또는 역사의 시간과 다른 것이다”라고.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없었던 이야기는 아니다. 2018년 광주비엔날레 섹션 중 하나로 ‘북한미술: 사회주의 사실주의의 패러독스‘전이 열리면서 세간의 이목을 모았다. 광주비엔날레 재단과 광주시는 다음 해에 평양비엔날레 계획을 추진한 바 있었으나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민간에서도 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민예총)이 주축이 되어 남북이 공유하는 기념일인 6·15와 8·15에 맞춰 대규모 전시회를 계획한 바 있다. 성공되지 못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좌초되었고, 불안한 남북 관계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부처의 예산 편성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일들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 이재명 정부에서는 문화예술 분야의 남북 교류 협력에 적극적인 실행력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 20년 만에 다시 돌아온 통일부 장관의 의지, 부처 간의 협력체계를 강조하는 이번 정권에서 반드시 이를 시도해 보아야 한다. 지금이 적기다. 부산에도 부산비엔날레 조직위가 있고, 그동안 축적한 경험이 충분하다.
2025-08-21 [17:56]
-
[배학수의 문화풍경] 케이팝 데몬 헌터스, 자기 수용의 정신적 여정
2025년 6월 20일, 넷플릭스에 공개된 한 애니메이션 뮤지컬이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악귀 퇴치 액션을 넘어, 한 개인의 영적 성장을 탐색하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케이팝 트리오 헌트릭스는 팝스타와 악귀 사냥꾼으로 이중생활을 하며, 음악으로 정신적 방패인 혼문을 형성하여 악귀들로부터 인류를 지킨다. 그러나 서사의 깊은 층위에서는 개인이 자기 수용 여정을 통해 선악의 갈등을 화해시키는 정신적 성장을 탐구한다. 이 글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개인의 영적 성장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살펴보며, 선과 악의 화해에 대한 통찰을 얻고자 한다.
영화의 표면적 서사는 선악의 뚜렷한 대립을 보여준다. 헌트릭스(루미, 미라, 조이)는 용기와 희망의 노래로 혼문을 강화하며 귀마가 이끄는 악귀 무리와 싸운다. 대표곡 ‘골든’(Golden)은 영화의 선악 이원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핵심적인 곡이다. 이 노래는 헌트릭스가 악귀의 보이 밴드 사자 보이즈에 맞서는 순간에 등장하여, 영원히 깨질 수 없는 혼문을 건설하겠다는 다짐을 표출한다. 선악의 이분법적 설정은 선과 악은 명확하게 구분되며, 선이 악을 이겨야 한다는 전통적 투쟁 서사와 일치한다.
인간 내면 이중성 탐구 영적 성장 묘사
악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용기
경쟁 일변도 삶에 진정성 의미 일깨워
그러나 이러한 겉 이야기에 깊은 의미가 숨어 있다. 영화 속 악귀들은 기독교의 지옥 불 속에 사는 악마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한국 민속의 도깨비나 귀신을 닮았다. 이들은 인간 내면의 두려움, 수치심, 자기 회의를 상징한다. 즉 헌트릭스가 싸우는 대상은 외부의 악마가 아니라, 우리 안에 숨어 있는 내면의 악마들인 셈이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루미이다. 인간 어머니와 악귀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루미는 자신의 악마적 흔적을 숨기며 살아간다. 이 비밀이 드러나면 동료들과 팬들에게 외면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부정과 수치심은 그녀를 깊은 영적 불안, 즉 동요(desolation)의 상태에 빠뜨린다. 예수회 창시자인 이냐시오가 언급한 것처럼, 이는 혼란과 고립으로 점철된 영혼의 상태이다. 루미의 투쟁은 외부의 악귀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악마 같은’ 일부 때문에 사랑받을 수 없다고 속삭이는 내면의 목소리와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루미의 영적 성장은 월드 아이돌 어워즈를 앞두고 찾아온다. 그녀는 라이벌 그룹 사자 보이즈의 악귀적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 ‘테이크다운’(Takedown)을 연습하면서 이 노래를 불러도 좋을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점점 더 루미는 선의 세계와 악의 세계 사이에 장벽을 쌓아서 악을 추방하는 식의 이분법적 접근에 의문을 품고 그 노래를 부르는데 주저하게 된 것이다. 특히 사자 보이즈의 리더 진우가 가족을 배신한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그의 인간적 영혼이 악귀로 전락한 것을 목격하면서 루미는 선악이 그렇게 별개의 존재인지 헷갈리게 된다. 이 의심의 순간은 이냐시오가 묘사한 것처럼 루미가 동요에서 평온(consolation)으로 변화하는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다, 그녀는 악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용기를 통해 비로소 내면의 평온에 다가선다.
이러한 루미의 여정은 사자 보이즈 콘서트에서 절정에 이른다. 그녀는 ‘왓 잇 사운즈 라이크’(What It Sounds Like)라는 노래에서 상처도 자신의 일부임을 용감하게 인정하며 새로운 혼문을 구축한다. “거짓말 없는 내 목소리, 바로 이런 소리야.” 기존의 혼문이 선악을 가르는 장벽이었다면, 새로운 혼문은 거짓 없이 이중적 본성을 수용하는 용기와 격려이다. 루미의 변화는 어두운 면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온전한 자아로 통합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이는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그림자를 통합하는 과정과도 같다. 우리가 부정하거나 억압해 왔던 내면의 어두운 부분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기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그림자 작업’은 ‘골든’에도 표현되어 있다. 루미는 공포나 기대 때문에 자신의 그림자를 은폐하지 않겠다고 힘차게 외친다. “난 숨기지 않겠어. 이제 빛날 거야. 그렇게 태어난 것처럼.”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한국이 배경이지만, 그 핵심 주제인 자기 수용은 전 세계 관객에게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한 한국계 미국인이 루미의 악귀적 흔적을 미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숨겨야 했던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존재하는 갈등을 건드리고 있다. 완벽함보다 진정성을 강조하는 이 영화의 메시지는 치열한 경쟁과 성공의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구원의 기회를 제공한다.
2025-08-14 [17:56]
-
[허동윤의 비욘드 아크] 기후 재난의 시대, 건축의 과제
올여름은 말 그대로 ‘극단’이다. 사상 최장의 폭염특보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간당 100mm가 넘는 폭우가 쏟아진다. 더위와 비가 교대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겹쳐 도시를 뒤흔든다. 폭염이 더 강력한 폭우를 부르면서 극단적인 여름철 날씨가 ‘뉴노멀(New Normal·새로운 표준)’이 됐다고 한다. 지난봄 대형 산불 피해를 입은 지역은 복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폭우로 인해 토사 붕괴가 이어졌다. 급기야 일부 마을은 집단 이주를 결정해야 했다. 한편 도심 속 열섬 현상은 계층별로 생존 가능성을 갈라놓고 있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할 수단 없이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그리고 도시 빈민들에게 유독 가혹하다. 어느새 우리는 기후 위기라는 단어를 넘어 ‘기후 재난의 시대’에 들어섰다.
기후 위기의 문제 중 중요한 것은 ‘이전과 똑같이 회복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건축 역시 예전의 논리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멋진 형태나 고급 자재, 높은 용적률을 추구하는 설계를 넘어, 기후 재난의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고 공존할 수 있을지를 묻는 건축이다.
제19회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흥미롭고도 본질적인 탐구를 시작했다. 지난 5월 15일부터 11월 23일까지 세계 50여 개국 750여 명의 건축가, 예술가, 과학자, 수학자, 기후 전문가, 철학자, 요리사, 목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초대돼 총 280개의 프로젝트를 선보이고 있다. 총감독은 도시계획 건축가이자 MIT 교수인 카를로 라티(Carlo Ratti)다. 그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지성(Intelligens) : 자연적, 인공적, 집단적’으로 제시했다. 이는 단순히 인간의 지능만을 뜻하지 않는다. 자연계의 복잡한 생명 시스템, 인공지능이 내놓는 패턴과 해석, 그리고 인간이 집단적으로 축적해 온 생활의 지혜 모두를 아우르는 확장된 개념이다. 그것은 공간의 미학도, 기술의 과시도 아니다.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며 창의적으로 대응하는 능력, 즉 건축이 지닌 생존의 지능이다. 카를로 라티는 “우리가 직면한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인간의 설계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 인공 시스템, 그리고 인간의 집단적 지혜가 상호작용하는 복합적 지능의 세계를 마주하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이 짓는 이 건축은, 지금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자연(Natural), 인공(Artificial), 집단(Collective)’이라는 세 개의 렌즈를 통해 건축을 바라본다. 이 세 키워드는 기후 위기 속에서의 건축이 마주한 윤리적·기술적 과제를 총체적으로 드러낸다.
‘자연’ 지능은 생태계 자체가 지닌 적응력과 회복탄력성을 가리킨다. 기후 위기 속에서 인간 중심의 도시계획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지구 생태계의 일부로서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물길을 막지 않는 저지대 주거, 땅과 건물이 호흡하는 재료의 사용, 에너지 순환을 고려한 설계 등 자연의 리듬과 기후의 변화에 순응하는 감각이 도시 설계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
‘인공’ 지능은 첨단기술과 데이터, 인공지능을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건축 언어다. 드론을 이용한 재난 감시 시스템, AI 기반 설계 도구, 기후 시뮬레이션을 통한 도시 구조 분석까지, 기술은 지금껏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의 진보가 곧 삶의 진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마트 도시, 탄소저감형 건축물도 결국 그 안에 담기는 인간의 경험과 공동체의 삶을 고려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집단’ 지능은 개인을 넘어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내는 지혜다. 공동체 주도형 도시 재생, 시민 참여 설계, 전통 지식과 현대 기술의 융합. 이러한 시도는 기후위기에 적응하기 위한 유연한 구조를 만들어낸다. 특히 이번 비엔날레는 지역의 목소리를 전면에 내세우며, 다국적 기업 중심의 개발 논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유도한다. 더 이상 스타 건축가의 작품이 아닌, 시민들과의 협업, 지역의 기억, 공동체의 주체적 참여로서 완성되는 건축을 말한다. 기후 위기 시대에 건축은 권력의 상징이 아니라, 살아남는 연대의 기술이어야 한다. 그 방향은 단 하나의 도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떤 공간에서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묻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건축은 이제 환경에 적응해야 할 때이다. 환경에 영향을 덜 주는 설계가 아니라 근본부터 다른 설계 방식을 논의해야 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도시도 근본적으로 다시 질문되어야 한다. 기후 재난은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새롭게 짜야 할 일상이다. 건축이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람과 자연, 기술과 공동체가 새롭게 맺는 관계를 설계함으로써,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기후 위기의 한복판에서, ‘건축’에 기대야 하는 이유다.
2025-08-07 [18:00]
-
[김정화의 크로노토프] 도시를 기억하는 소리
도시는 소리를 기억한다. 삶이 지나간 흔적, 계절이 남긴 여운, 그리고 한 시대를 관통한 음악의 결은 도시의 공기 속에 축적되고,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머문다. 도시의 정체성은 시간과 공간에서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도시는 사람들의 모든 행위가 쌓이는 장소이며, 서로 다른 목소리가 각자의 의미와 엮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음악적 사건도 도시라는 ‘공공의 장’에 고요하면서도 깊은 자취를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디딤돌이 된다.
부산문화회관이 선보인 상반기 기획 시리즈는 부산 클래식 음악계가 주목할 만한 음악적 사건이었다. 지난 2월 20일부터 7월 25일까지 이어진 ‘사운드 오브 부산: 브람스 교향곡 전곡 사이클’이 바로 그것이다. 얼핏 보면 고전적 레퍼토리의 단순한 재현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실험적 시도가 담겨있었다. 지역에 있는 네 개의 민간 오케스트라가 각각 한 작품씩 맡아 릴레이 형식으로 무대를 이어가며, 그 실험에 참여했다. 유나이티드코리안오케스트라,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 부산네오필하모닉오케스트라, 인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주역이었다. 음악적 지향점, 운영 방식, 심지어 재정적 여건까지 제각각인 단체들을 하나의 기획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차이들은 오히려 ‘지역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며, 다층적 소리의 경험으로 통합되었다.
브람스는 교향곡이라는 또 다른 장르에 도달하는 데 20년이 넘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베토벤 이후 교향곡 형식에 대한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선배 음악가들의 유산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데 거의 생애의 절반을 바친 셈이다. 그러나 이후에 작곡된 교향곡들은 훨씬 빠르게 완성되어 갔다. 오랜 사유가 풍성한 창작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브람스의 여정처럼, 지역 예술단체들의 브람스 교향곡 전곡 연주는 단순히 위대한 레퍼토리의 재현을 넘어, 지역 예술생태계가 나아가야 할 철학적 방향에 관한 질문이었다. 그것은 ‘브람스를 연주했다’는 결과보다 ‘부산이 예술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를 묻는 과정이었다.
이번 기획에는 지역 예술생태계에 대한 깊은 고민이 담겨있었다. “지역 오케스트라의 중심이 지역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예술의 정체성을 꽃피울 것인가?”라는 질문은 예술가뿐 아니라, 우리나라 공공예술기관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시대적 과제이기도 하다. 지역성은 예술의 부가적 요소가 아니라 출발점이어야 한다. 이는 ‘문화 균형’을 실현하겠다는 정책적 선언을 넘어 ‘공공성’이 실현되는 실천적 원칙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기획은 외부의 유명 오케스트라나 협연자를 초청하는, 이른바 ‘이벤트성 쇼핑형 기획’과 달리, 지역 예술단체들이 주체적으로 관객과 호흡한 ‘과정 중심’의 ‘예술 실천’이었다. 공공극장이 자발적으로 민간 예술생태계를 연대의 틀로 엮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 모범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시리즈는 각 오케스트라가 가진 개성적인 해석을 통해 같은 작곡가의 또 다른 얼굴들을 펼쳐 보였다. 음악은 더 이상 악보 위에 머무는 텍스트가 아니라 도시의 사건이 되었고, 공연장은 감상의 공간을 넘어 도시의 기억이 쌓여가는 사유 장소로 확장됐다. 공연장은 공동체가 가진 기억과 정체성을 무의식적으로 쌓아가는 상징적 공간이다. 부산문화회관의 프로젝트는 공공극장이 단지 물리적 현장이 아니라, 지역 예술의 시간과 정체성을 되새기는 ‘기억의 장소’라는 점을 일깨웠다. 고전적 사유가 지역 오케스트라의 손길을 거쳐 부산이라는 ‘도시의 소리’로 자리매김한 순간이었다.
특히 부산심포니오케스트라(예술감독 오충근)는 부산 출신 작곡가 김종완의 신작 〈완성의 여정〉을 브람스 〈교향곡 1번〉과 함께 연주하며, ‘공존의 형식’과 ‘부산의 소리’가 병행할 수 있음을 알렸다. 전통과 창작, 고전과 현재, 중심성과 지역성이 하나의 무대 안에서 공존하고 변주되는 방식으로 오늘날 공공극장이 추구해야 할 예술 기획의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공공극장과 민간예술단체가 하나의 무대 안에서 이룬 동등한 파트너십은 부산 예술이 나아가야 할 미래의 모습이다.
모든 기초학문이 그렇듯이, 기초예술도 단기간에 수치화된 성과로 드러나기 어렵다. 특히 클래식 음악처럼 느리고 반복적이며, 즉각적인 결과가 보이지 않는 예술 장르는 행정 효율이나 예산 논리와 충돌하기 쉽다. 그러한 점에서 지역 공공예술기관은 ‘예술의 시간을 함께 견디는 장치’가 되어야 한다. 수치화되지 않는 감각의 축적, 공동체가 함께 쌓아가는 정서적 기반, 반복되는 예술 경험이 만들어내는 도시적 리듬은 더디지만, 반드시 도시에 차곡차곡 쌓여간다. 예술적 실험은 지금부터 시작이며, 부산의 크로노토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25-07-31 [17:59]
-
[백재파의 생각+]‘케이팝 데몬 헌터스’ 성공의 함의
지난달 2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에 공개되자마자 40여 국가에서 영화 부문 1위를 차지했고 공개 4주차까지도 글로벌 영화 순위 1, 2위를 지켰다.
영화에 수록된 노래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영화에 수록된 ‘Your Idol’은 미국 스포티파이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는데, 이는 BTS의 ‘다이너마이트’도 넘지 못한 기록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 수록된 다른 노래 ‘Golden’은 빌보드 글로벌(미국 제외), 글로벌 200 차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글로벌 차트 석권한 K애니메이션
자부심과 자조 사이 엇갈린 시선
콘텐츠 주도권보다 완성도 중요
문화 보급 방식도 혁신 필요한 때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미국 할리우드의 소니픽처스에서 케이팝을 소재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다. 즉 미국에서 만든 한국 배경의 이야기인 셈이다. 따라서 대사, 노래가 영어로 이루어졌지만 이야기 배경이 서울이고 등장인물이 한국인인 만큼 작품 곳곳에 한국의 모습과 문화가 담겨 있다.
여자 아이돌 헌트릭스의 의상에는 노리개가 달려있고 남자 아이돌 사자보이스는 도포를 입고 갓을 썼다. 이들은 피로를 풀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대중목욕탕에 가고, 설렁탕을 먹으러 식당에 가서는 수저 아래 휴지를 깐다. 이 외에도 무속 의식에 사용되는 사인검과 신칼, 호작도의 호랑이와 까치 등 한국의 전통문화에서 현대문화까지 외국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 묘사가 디테일하게 살아있다.
‘메이드인 USA K콘텐츠’의 성공에 대한 국내 언론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민족주의적 관점의 ‘국뽕형’이다. 한국 콘텐츠가 우수해 세계에 통한다, 우리 고유의 문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콘텐츠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식의 논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막대한 예산을 들여 자국의 문화를 홍보하는 중국 영화를 우리가 보지 않는 것처럼, 우리 문화를 홍보하기 위해 만든 콘텐츠는 세계에서 외면받을 것이 자명하다.
두 번째는 이렇게 좋은 K콘텐츠를 우리가 만들지 못했다는 ‘자조형’이다. 우리의 케이팝 아티스트와 프로듀서가 작업에 일부 참여하기는 했지만 한국 창작자 주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으로 기획, 제작하고 투자, 배급해 성공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 나아가 향후 K콘텐츠의 제작 주도권을 뺏기고 우리 창작자와 문화 산업이 소외되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까지 제기한다.
그러나 K콘텐츠를 꼭 우리나라에서만 만들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외국에서 K콘텐츠를 적극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더욱 장려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한류 4.0 시대를 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학계에서는 한류 발전 단계를 대체로 다음과 같이 나눈다. 한류 1.0 시대는 지리적 근접성과 문화적 유사성이 강한 동북아 국가를 중심으로 한국 드라마가 확산한 한류의 태동기이다. 한류 2.0 시대는 K팝을 중심으로 아시아 지역 전체와 일부 서구 문화권으로 한국 문화가 퍼져나간 한류의 성장기이다. 한류 3.0 시대는 드라마, K팝과 같은 특정 장르가 아닌 K문화 전반이 전 세계로 널리 확산하는 한류의 확산기이다.
한류 4.0 시대는 장르가 K문화를 넘어서 K라이프 스타일로 확대되고 전 세계의 주류 문화로 자리매김해 지속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누리는 한류의 지속기라고 지칭할 수 있다. 전 세계의 주류 문화로서 보편적으로 향유할 때 ‘어디에서’, ‘누가’ 콘텐츠를 생산했는지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한국에서 생산했든 외국에서 생산했든 그것이 얼마나 잘 만들어졌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제작에 참여한 짐 로포 리퍼블릭 레코드 회장은 빌보드와의 인터뷰에서 ‘이것은 더 이상 K팝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대중문화 현상이 되었다’고 했다. 이를 통해 이제 한류 4.0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은 한류 4.0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로서 의의를 가진다. 따라서 우리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성공을 바라보며 자조 섞인 한탄과 걱정을 하기보다 더 다양한 국가에서 더 다양한 K콘텐츠가 생산되고 제2, 제3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나올 수 있도록 응원해야 한다.
나아가 한류 콘텐츠 전반이 4.0 시대에 맞게 레벨 업해야 한다. 한국인을 해외에 파견해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에서 현지인 한국어 교사가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도록, 현지인 요리사가 자국 기호에 맞게 한국 요리를 만들어 누구나가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도약해야 한다. 또 이렇게 될 수 있게 우리의 문화 보급 정책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성공에서 읽어야 할 함의이다.
2025-07-24 [18:09]
-
[정훈의 생각의 빛] 제자리로 돌아가는 발걸음에 묻은 쓸쓸함
지난해 연말, 위법·위헌적인 대통령의 계엄 발령과 국회의 계엄령 해제부터 시작된 관련자 구속 및 대통령 파면과 대선, 그리고 3대 특검법 발의에 이은 특검의 행보에 이르기까지 숨 가쁜 정국에 국민은 분노와 환호가 교차한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지난 7개월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정말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으로 나라가 수렁에 빠질 위험에 처할 때마다 어느 누구보다도 국민이 앞장서서 민주주의와 정의를 수호하였던 역사의 패턴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순식간에 여야가 뒤바뀐 정치권과, 검찰의 숱한 기소와 압수수색을 감당하고도 국민의 선택으로 선출된 대통령에 대한 기대가 상대 진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점점 높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나 같은 일개 소시민에게 ‘정치’는 그동안 헛구역질과 빈혈 그 사이거나 언저리에 자리 잡은 이상한 나라의 ‘협잡’과 같은 것이었기에, 최근 7개월 동안 벌어진 급박한 정세는 비로소 스스로 민주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고 있는 느낌이다.
20년 넘게 지지부진 북항 재개발
시민 라운드테이블로 공공성 확대
해수부 부산 이전 계기로 순항하길
따지고 보면 이 나라에 민주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든다. 짓누르는 자나, 이에 대항하여 권리를 되찾으려는 자나 늘 대의를 명분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명분을 잃은 세력이 활개를 치더라도 결국 명분을 고수하려는 세력이 이겨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까이에 있으면 멈칫거리거나 주저하는 일이 시간이 지나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 들여다보면 명약관화한 것이었음을 깨닫고서는 무릎을 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역사는 생생한 현실이 지층처럼 쌓인 무늬이되, 그 무늬가 만드는 물결을 아로새기는 더욱 큰 그림임을 새삼 재확인하게 되는 요즘이다.
최근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두고 잡음이 많다. 정부는 대통령 공약 사항이기도 한 해수부의 부산 이전을 시급히 착수하고 있고, 해수부 공무원 노조는 예전 세종시 정부 청사 이전을 실례로 들어 해수부 공무원에 대한 각종 지원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부산 이전을 극구 반대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파를 떠나 해수부가 부산에 오면 부산 사람으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 정부 기관 이전으로 발생하는 경제 파급효과가 가뜩이나 침체된 원도심에 단비와도 같기 때문이다. 해수부 임시 청사는 현재 북항 재개발사업 지구를 지척에 둔 자리에 마련됐다. 임시 청사 시대를 거쳐 향후 정식 청사가 북항 재개발지구 사업 구역 내로 이전한다면 기존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 있던 해수부 부산항북항통합개발추진단 및 부산항만공사와 부산지방해양수산청을 잇는 해양 관련 국가기관 벨트와, 부산 최대 현안 사업 가운데 하나인 부산항 북항 재개발사업 지구가 맞물려 한국 해양 산업을 비롯한 해양 발전 로드맵을 위한 메카가 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이 부산항 북항을 방문한 자리에서 시민들을 위한 친수공간으로 계획하여 북항 재개발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후 20년이 넘도록 지지부진한 북항 재개발사업이 해수부의 이전으로 순항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국내 첫 항만재개발사업으로서 북항 재개발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다면 부산 시민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크나큰 자부심으로 남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중요한 국가사업을 두고 해수부의 부산 이전에 딴지를 거는 몇몇 세력이 있다. 정파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반대부터 해대는 이들의 셈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으로 부산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엽적이고 국지적인 논리에 따른 행동은 끝내 자신들을 향하는 화살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2013년 북항 재개발사업이 참여 기업의 사업 논리에 치우친 난개발의 우려가 제기되자 결성된 북항 라운드테이블의 활동을 되새긴다. 각계각층의 전문가와 공무원, 그리고 시민들이 참여한 라운드테이블이 여러 차례 검토와 회의를 거쳐 공공성을 확대한 북항 재개발사업안을 마련한 것이다. 이때 확정된 사업안을 바탕으로 하면서, 2019년 해수부 부산항북항통합개발추진단이 부산항국제전시컨벤션센터에서 발족됨으로써 추진력을 얻어 지금의 북항 재개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공공의 이익을 가져오려는 게 국가사업의 최종 목표일진대, 이런 큰 그림을 외면한 채 당장 자기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세력의 목소리에 명분이 짓밟힐 때 지난해 연말 나라를 요동치게 만든 사태는 언제라도 벌어질 수 있다. 또 한 번 그런 사태가 불거져서 그간 힘들게 쌓아두었던 시민들의 지혜와 역량을 또다시 소모해서야 되겠는가. 인간의 지혜와 슬기를 올바른 일에 쏟아부을 때 나라와 시민 개인의 성장은 자연 뒤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2025-07-17 [18:04]
-
[서상호의 오픈 스페이스] 예술정책은 현장으로부터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모든 것이 본래의 위치로 하나씩 제 자리를 찾고 민생경제가 회복되기를 모든 국민이 학수고대하고 있다. 우선, 미디어를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진 점이 주목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한 달을 맞아 지난 3일 국민과의 소통을 위한 자리를 국내외 언론들과 함께했는데, 지역 풀뿌리 언론까지 참여시키는 세심함이 인상 깊었다. 작은 목소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반가운 기조다.
지난달 한 중앙 일간지에 ‘국립문화공간재단 설립, 대표에 블랙리스트 징계받은 전 문체부 관료’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이는 곧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 일파만파 퍼졌다. 내용인즉슨, 탄핵소추안 가결 이후 대선 사이 권력 공백기에 올해 3월 발표한 ‘문화 한국 2035’의 정책들이 무리하게 강행·추진되었고,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가 산하기관장 인사를 비밀리에 단행했다는 것이다. 국립문화공간재단과 여러 산하 기관 대표에 문체부 퇴직 관료 임명을 강행한 게 대표적 사례로 거론됐다. 보도 이후 새 정부 출범을 무시한 채 이권 장악을 시도한 것 아니냐는 문화예술계의 우려가 쏟아졌다.
문체부의 국정기획위원회 업무 보고도 도마 위에 올랐다. 윤석열 정부 시절 추진해 오던 ‘문화 한국 2035’ 정책을 구체적 계획 없이 새 정부의 ‘5대 문화강국 계획(2025~2029)으로 들이밀다 반려되었다. 언론에 보도되자 장관은 사의를 표명하였고 대통령은 이를 반려한 상황이다. 지금의 문체부는 혼수상태나 마찬가지이다.
지금 총리를 비롯해 각 부처에는 새로운 수장들이 속속 배치되고 있다. 필자는 지난 지면을 통해 6·3 대선 과정에서 문화예술 정책이 빠져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새 정부에서 문화예술 분야의 수장은 관료나 정치인이 아닌 현장 전문가가 배치되어야 한다. 최근 입방아에 오르는 문체부의 관료적 카르텔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새 장관에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대수술을 단행할 적임자가 와야 하는 것이다.
새 정부는 지난겨울 광장에 모였던 민주주의의 열망과 감성을 기억할 것이다. 그 대표적인 현장이 문화예술이었다. 시민사회가 중심이 되는 문화강국을 구현하기 위한 첫 번째 실천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다. 예술가와의 거버넌스가 없는 관료적 행정은 십여 년간 중앙에서 지방으로 내려보내는 하달식 정책과 지원 체계를 관성처럼 되풀이해 왔다. 예술가들은 여전히 작두 타듯 지원서로 매년 시간을 채워가고 있다. 예술 현장은 더욱 다양해지고 문화 소비자는 늘어나는데, 지원 이후의 실질적 성과는 순환 구조를 마련하지 못한 채 일회성 행사로 소멸하는 일이 다반사이다. 현장 전문가 그룹과 행정이 협치해서 지속 가능한 정책들을 재정비해야 할 때다. 지방소멸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예술 생태계마저 바닥을 치고 있으니 이를 다시 정비하는 일은 절실하고 필요하다.
새 정부가 목표하는 문화 민주주의를 통한 문화강국이 중앙에서 내려보내면 각 지자체와 문화재단들이 수행하는 방식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이다. K컬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는 대한민국의 위상이 이전과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류 열풍만 가지고 문화 강국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물론 국가주의의 관점에서 위상은 높아졌지만, 문화산업과 문화 생태계는 구분해서 살펴봐야 한다. 기초예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 예술가들의 보편적인 창작 활동에 대한 지원은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다. 이를 담보해 주는 장치는 국가가 마련해야 하고, 이는 법으로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최근 ‘예술인 기본소득’에 대한 대통령의 언급이 나왔다는 사실은 반갑다. 예술인 기본소득은 이미 해외 선진국에서는 실행 중인 사례이다. 우리나라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고, 이와 함께 ‘왜 예술인을 대상으로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예술을 바라보는 비예술인의 시선을 개선하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다. 긴 호흡을 갖고 지속 가능한 제도로 법제화해야 한다. 이미 우리나라는 예술인복지법 제2조 제2호에서 예술인 고용보험 가입 대상자를 ‘예술 활동을 업으로 하여 국가를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풍요롭게 만드는 데 공헌하는 사람’으로서 문화예술 분야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고 있다.
다층적인 시각에서 지원 조건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예술인 증명이라는 시스템 외 예술가라는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다층적 제도를 반영해야 한다. 늘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진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다. 지금도 예술인들은 사회 어디에선가 숨도 못 쉬며 자신의 예술세계와 마주하고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다.
2025-07-10 [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