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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지역을 위해 다시 공공의대 추진을
국립공공보건의료대학, 이른바 ‘공공의대’ 논의는 대입 수시와 닮았다. ‘현대판 음서제’가 될 거란 우려 속에 입시 결과나 졸업생 능력에 노골적인 의구심을 드러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수능 시절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서부산권 고교가 수시 이후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돌풍을 일으켰다. 국영수 일변도를 벗어던진 고등학교 풍경도 한결 자유로워 보인다. 제도의 기본 취지는 이해할 생각도 않고 폄하만 하지 않았나 반성해 보는 요즘이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사회다. 어느 제도든 그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은 있기 마련이었던 거다.
수시 이야기를 꺼낸 건 공공의대에 대한 거부감을 누그러뜨려야 할 시점이 됐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특히나 지역에서는 말이다.
공공의대 논의는 10년 전 박근혜 정부 시절 순천대 의대 관련 법안을 놓고 시작됐다. 사관학교처럼 학비와 기숙사를 전액 국비로 지원하고, 면허 취득 후에는 일정 기간 국가에서 지정하는 의료 취약 지역 공공의료기관에서 의무적으로 복무하도록 하는 게 골자다. 논의는 문재인 정부 시절까지 이어졌지만 반발이 상당했다. 그 후 바통을 넘겨받은 윤석열 정부는 공공의대 대신 의대 증원 쪽으로 가닥을 잡으며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 앉은 상태다.
지금도 ‘공공’의대가 배출한 의사와 그들의 의료 서비스를 믿을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크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불거진 의정 갈등에서 가장 큰 피해자가 된 건 지역이었다. 이제는 지역이 나서서 공공의대를 더 강하게 요구할 시점이다. 현장을 지킬 필수 인력도 아쉬운 터라 공공의대의 입시 결과와 의사의 질은 따질 계제가 아니다.
이달 경남 밀양에서는 밀양윤병원이 지역응급의료기관 지정을 자진반납했다. 응급실을 운영해야 하는데 의사 5명 중 전공의 출신 3명이 수련병원으로 돌아간다며 동시에 사직서를 낸 것이다. 이 병원은 밀양의 유일한 지역응급의료기관이었다. 강릉의료원 응급실에서도 의사 2명이 수도권 수련병원으로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혀 비상이다.
과연 이 난리통이 밀양과 강릉에만 그치고 말까. 모르긴 해도 하반기 전공의 모집이 가속화될 수록 지역의 응급의료 체계는 더 흔들릴 게 뻔하다. ‘우리 요구 안 들어줬으니 잠시 지방에 가셔 알바라도 하고 오겠다’고 생각한 전공의들이 과연 저들뿐이었을까.
급한 대로 경남도 등 일부 지역에서 지역 필수 의사제가 시범 운영에 들어갔고, 순조로운 출발을 보이는 모양새다. 경남으로 전입온 필수과 의사에게는 병원 약정 급여 외에 매달 400만 원의 근무 수당을 주기로 했다. 전입 환영금에 매달 양육 지원금까지 약속했더니 정원 24명에 19명이 지원했다.
그러나 지역의사제 자체는 대증 요법에 지나지 않는다. ‘의료 태업’ 사태를 거치며 수당 몇 푼으로는 고삐 풀린 의료진을 붙들어 둘 수 없다는 게 드러났다. 시급한 지역의 필수 의료 인력은 지역 필수 의사제로 충당하고, 장기적으로 부울경처럼 3~4개의 광역지자체가 뭉쳐서 지역별로 공공의대를 도입할 수 있도록 고삐를 조여야 할 타이밍이다.
이번 사태를 거치며 의료야말로 그 어느 분야보다 더 로컬이 강조되고 공공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걸 다들 여실히 깨달았다. 수도권을 제외한 지역 의대 출신 의사의 지역 정착률은 30% 안팎. 그 동네에서 의사 면허를 따도 그 동네에서 장사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지역에서 의사를 하는 게 싫다면 차라리 ‘로컬 보이’에게 그 기회를 주고 그에 대한 충성심과 의무를 요구하는 게 맞다. 적어도 40대까진 면허를 받은 지역에서 의술로 보답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후 거취는 스스로 자신이 정하도록 하면 될 일이다. 추가적인 지역 봉사에 대해서는 지역 필수 의사제 등으로 이를 보전한다면 더 큰 시너지가 기대된다.
다들 제 자식 의사 만들지 못해 안달인 시절에 의사 진입 장벽이 낮고, 지원도 파격적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는 건 지역 입장에서도 반길 일이다. 당장 지난해 의대 증원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수도권 극성 학부모의 전학 문의로 부산시교육청 전화통에 불이 났던 해프닝을 기억해 보라.
다행스러운 건 의외로 공공의대 추진에는 여야가 큰 대립각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의료계는 공공의대 논의마저도 반발할 게 뻔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의료계의 입장에 공감할 이들은 극소수다. ‘공공의대는 제대로 된 의사를 배출할 수 없다’는 논리로 다시 여론을 호도하겠지만 그간 의료계가 보여준 민낯이 너무 추했다.
서글프게도 당장 지역에서 필요한 건 의료진의 질에 앞서 의료진의 숫자다. 새 정부와 광역 지자체들의 빠르고 탄력 있는 공공의대 추진을 기대한다.
2025-08-24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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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지연된 정의'마저 내팽개친 광복절 특사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지연된 정의’조차 아쉽기만 하다. 국고보조금 부정 수급과 횡령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뒤늦게 징역 1년 6개월(집행유예 3년) 형을 확정 받은 윤미향 전 국회의원이 판결 선고 불과 4개월 만에 특별사면됐다.
징역 1년 6개월은 의원직 상실형에 해당한다. 그러나 윤 전 의원은 임기 4년을 보란 듯 채웠다. 터무니없이 지연된 재판 덕이다. 검찰 기소 후 무려 4년 2개월이 지나서야 판결이 났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윤 전 의원 사례를 두고 법철학의 오래된 경구를 떠올렸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그런데 이번 사면은 ‘지연된 정의’마저도 헌신짝으로 만들었다.
더 황당한 것은, 일부 정치권이 이번 사면을 ‘죄의 사면’이 아니라 ‘억울한 피해자 구제’로 포장한다는 점이다. 민주당 추미애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윤 전 의원을 ‘사법 피해자’로 표현했다. 돈만 세탁되는 것이 아니다. 범죄도 세탁된다.
굳이 다시 확인하지만, 법원 판결에 따르면 윤 전 의원은 명백한 범죄자다. 단순히 회계 절차를 소홀히 한, 예를 들어 단체 명의의 통장을 사용해야 함에도 개인 명의 통장을 사용했다던지 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2019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장례 당시, 조문객들이 낸 현장 조의금만으로도 장례비는 충분히 충당됐다. 그럼에도 윤 전 의원은 장례 후로도 한 달 가까이 SNS에 ‘장례비가 부족하다’는 글을 남겨 1억 2000만 원가량을 모금했다. 기부자들은 당연히 그 돈이 장례비로 쓰일 줄 알았지만, 그 중 1억 원 이상이 여러 시민단체 후원과 단체 활동가 자녀 장학금 등 엉뚱한 용도로 사용됐다.
그뿐 아니다. 윤 전 의원은 십수 년 동안 단체 지원금과 위안부 피해자 후원금 8000만 원 상당을 용도 불명으로 사용했고, 국고보조금 6000여만 원을 부정하게 사용한 혐의도 법원에서 인정됐다.
야당은 이번 사면에 대해 격분하고 나섰다.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사면 발표 직후 “사면권이 대통령 고유 권한이라고 하지만, 일말의 반성도 없는 파렴치한 범죄자들에게 면죄부 주는 사면은 모독”이라며 “국민의힘은 어떤 비리 정치인 사면에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야당이 모처럼 옳은 말을 하는구나’ 놀랐고, 그 말이 송 위원장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재차 놀랐다. 송 위원장은 격분하기 며칠 전 대통령실 관계자에게 자당 홍문종·정찬민·심학봉 전 의원의 사면을 부탁하는 문자를 보냈다. 홍 전 의원은 횡령, 정·심 전 의원은 뇌물수수로 각각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이들 모두 윤 전 의원과 함께 사면됐다. 송 위원장은 자신의 문자 내용 따윈 며칠 새 모조리 잊어버린 듯 하다.
송 위원장은 윤 전 의원을 ‘파렴치범’으로 규정했다. 같은 사면 명단에 오른 당 동료들에 대해선 뭐라고 평가할지 궁금하다. 혹여 추 의원이 그러했듯 ‘사법 피해자’라 우길 생각일까. 이렇게 제 식구는 사법 피해자로, 상대는 파렴치범으로 규정해 목소리를 높이고, 정작 뒤로는 포로 교환하듯 사면 거래를 한다. 이쯤 되면 대통령 특별사면권의 존재 이유 자체가 무색하다.
윤 전 의원은 사면 직전 페이스북에 자신을 비난하는 이들을 향해 “참 불쌍하다”고 썼다. 맞다. ‘파렴치범’임에도 ‘사법 피해자’로 둔갑한 힘있는 사람들을 보며, 힘없고 빽 없는 선량한 서민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메마른 욕지거리 정도일 테다. 힘있는 사람들의 시선엔 그런 그들이 그저 불쌍하게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윤 전 의원은 당신이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들 중 과거 당신이 활동했던 단체에 기부한 이도 적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결국 당신이 함부로 쓴 후원금 또한 (일부이나마) 바로 힘없고 빽 없는 그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셈이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후원금이 엉뚱한 곳에 쓰인 것에 분노해 후원금 반환 소송을 벌였고, 법원은 “후원금을 모두 돌려주라”고 화해 권고 결정했다. 윤 전 의원은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윤 전 의원은 그들이 불쌍하다고 혀를 차기 전에 법원의 결정부터 따라야 할 테다.
그리고 이번 사면을 결정한 집권 여당의 모든 사람들, 또 사면을 거래하려 했던 야당 정치인들은 “법무부는 이용수 할머니에게 사면 여부를 여쭤봤나”라는 김재련 변호사의 질문에 답해야 한다.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이제 이용수 할머니를 비롯해 6명밖에 남질 않았다. 이용수 할머니는 윤 전 의원의 사면에 대해 말을 아꼈다. 윤 전 의원 사면에 대한 그분들의 심경을 함부로 추측할 순 없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하다. 어떤 권력도 그분들보다 먼저 윤 전 의원의 죄를 용서할 순 없다.
김종열 정치부장 bell10@busan.com
2025-08-1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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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가짜뉴스와 인포데믹
가짜뉴스가 아예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역사를 돌아보면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너만 알라’고 귀띔하는 저잣거리 소문이나 ‘카더라’ 마타도어가 민심을 이리저리 흔들기 일쑤였다. 누군가 의도하든 아니든, 그렇게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출렁거렸다. 순전히 오프라인 입소문을 타고 다녔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분초 단위 온라인 소통을 하는 상황이니 심각성이 더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얼마 전 국무회의에서 가짜뉴스에 대해 ‘징벌적 손해배상 도입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오로지 돈 벌려고 상습적으로 불법을 넘나드는 행태를 없애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손해배상을 강조한 것은 형사 처벌에만 의존해선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다. 검증 시스템을 갖춘 신문과 방송, 통신사 등 기성 언론과 달리 ‘아니면 말고’ 식의 허위 정보를 생산하는 이들에게 금전적 이득을 환수하는 등 경제적 부담을 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많은 국민이 유튜브 등 동영상 플랫폼,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네이버나 다음 등 포털사이트 앱으로 정보와 뉴스 소비 욕구를 채운다. 이들 플랫폼의 영향력이 기성 언론을 압도하면서 뉴스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가 갈수록 자극적인 정보와 뉴스를 쫓는다. 영상 조회수와 구독자 수, PPL 등 광고 수익 규모가 그들 사이에 부와 영향력을 상징하는 지표가 됐다.
‘신문·방송은 심심해서 안 본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크리에이터, 인플루언서라 불리는 이들이 속 시원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그 이상을 쏟아내니 ‘도파민 미디어 중독’에 빠지고, 알고리즘은 이용자와 결이 다른 콘텐츠를 시야에서 지워 버린다. 이용자들은 그렇게 정보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지 않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서 점점 좁은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나무 몇 그루가 숲인 양 착각한다. 사회적 갈등이 커지면서 유무형의 비용도 폭등한다.
이러한 구조를 악용해 독버섯처럼 퍼지는 가짜뉴스는 너무 많은 해악을 우리 사회에 남긴다. 전염병 대응이나 선거 등 국가적 의사 결정이 필요한 지점에서 늘 가짜뉴스는 눈앞을 흐리게 만든다. 정상적인 비판을 가짜 뉴스로 치부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논리가 허위정보 생산자의 뒷배가 된다. 온라인 상의 갑론을박이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적 광장의 절차인지, 가짜뉴스가 만든 난장판에 불과한지 헷갈리는 상황까지 와 버렸다.
바이러스가 항공기를 타고 세계를 넘나들듯, 근거 없는 음모론과 가짜 뉴스는 국경 없는 디지털 랜선을 따라 퍼진다. 검증되지 않은 가짜 정보와 뉴스가 디지털 공간에서 전염병처럼 퍼지는 이른바 ‘인포데믹(Infodemic)’ 위기다.
창궐하는 가짜뉴스가 일종의 바이러스라면, 결국 면역력 강화와 백신 접종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우선 미디어 면역력 강화가 시급하다. 학생과 성인을 대상으로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알리는 동시에 이용자 태도 교육을 확대하는 것이다. 영상 속 누군가가 명확한 출처와 근거를 가지고 말하는 것인지, 의심하고 검증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악순환이 반복될 뿐이다.
지금껏 언론이 저널리즘을 추구하면서 어떤 노력으로 수많은 역사적 변곡점을 탄생시켰는지 교육을 통해 배울 필요가 있다. 단순히 권력 감시와 비판, 정보 전달, 여론 형성 역할을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로는 부족하다. 변화와 혁신에 둔감한 언론의 반성도 필요하다. 생산하는 뉴스가 깊이와 신뢰를 주지 못하니 독자와 시청자가 대안을 찾아 떠난 것이라는 얘기다.
대통령이 제안한 손해배상 집행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물론 뒤따른다. 많은 플랫폼과 계정 이용자가 국외에 있거나 자신을 숨긴 익명 가짜뉴스 제작자가 많아서다. 표현의 자유 침해와 실효성 부족을 우려하는 반발에 주춤할 가능성도 있다. 비슷한 입법 시도가 수차례 좌초되었던 전례도 있다. 손해배상 대상 범위를 반복적이고 조직적인 경우로 좁히고, 불법 수익 환수와 함께 실질적인 피해 회복에도 눈길을 주는 등 여러 논의가 진행돼야 한다.
대통령이 던진 화두가 이번에도 일회성에 그치면 곤란하다. 정치적 진영을 떠나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인 가짜뉴스 정화를 위해 여러 겹의 단단한 조치와 집요한 노력을 다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힘 있는 사람을 디딤돌로 입신양명만 쫓는 이들이 아닌, 국민의 행복과 발전에 자신을 불태우는 이들이 미래를 이끌 수 있도록 건강한 민주적 공론의 장을 만들고 지켜야 한다.
박세익 디지털영상센터장 run@busan.com
2025-08-1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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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아직은 샴페인을 터뜨릴 때가 아니다
지난주를 달궜던 화두는 단연 한미 관세협상과 정부의 세제개편안이다.
우선 지난달 31일 극적 타결을 봤던 한미 관세협상은 한마디로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물론 이같은 평가는 새 정부의 첫 외교 시험대라는 경험 미숙과 정부를 구성한 지 채 얼마되지 않았다는 준비 부족, 현시점 우리나라의 국력 등을 십분 감안해서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날 고위공직자 워크숍에서 “노심초사하고 정말 어려운 환경이었다. 나라의 국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협상의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이 대통령의 하소연은 아쉽다.
우리나라가 힘을 키워야 한다는 진부한 표현은 말 그대로 진부하다. 미국 같은 세계 제1의 국가가 되지 않는 이상 모든 국가가 결국 무릎 꿇는 승자독식의 세계다. 자국 우선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트럼프의 미국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는 이미 각자도생의 시대에 들어섰다.
이 시점에 우리나라는 얼마나 힘을 더 키워야 한다는 걸까. 명목 GDP로 보면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는 세계 11위 수준이다. 현재 인구 등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가 세계 최상위권으로 올라가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특히 경제규모 세계 3위의 EU도, 세계 4위의 일본도 트럼프에게 굴복한 마당에 국력을 핑계 삼는 것은 현실 회피다. 우리나라의 경제적 위치는 이미 정해져 있고, 이를 바탕으로 협상을 한다. ‘힘이 더 있었더라면’ 이라는 변명은 패배자의 자기 위로일 뿐이다.
8월 1일이라는 시간에 쫓겨 우리나라의 경제규모 2배를 넘는 일본과 비슷한 퍼주기를 한 것은 사실상 협상의 실패다. 우리나라의 외환보유고를 감안할 때 너무 큰 규모이고, 향후 대기업의 미국 공장 신설과 이전으로 인해 국내 산업의 공동화가 심각하게 우려된다.
관세협상 기한을 넘기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할 뿐이다. 불확실성을 없앴다는 것에 협상의 성과를 부여할 만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협상 비하인드로 쏟아져 나오는 정부의 자화자찬은 지나치다. 관세 협상 타결이라는 큰 호재에도 불구하고 이날 국내 주식시장이 약세를 보였다는 점은 관세 협상 결과가 미흡했다는 또 다른 방증이기도 하다.
더 심각한 것은 사실 정부의 세제개편안이다.
관세 폭탄은 트럼프라는 특이한 캐릭터에 의해 전 세계가 눈물을 머금고 ‘삥’을 뜯기는, 대외적인 문제였다. 즉 우리나라만 피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관세 협상의 결과와 같은 날 발표된 세제개편안은 우리 정부의 ‘의지’로 결정된 것이다. 계속 ‘설’로만 흘러나오다가 결국 정부 확정안으로 나온 세제개편안은 지난 1일 국내 증시를 폭락시켰다. 코스피는 이날 하루 만에 3.8%, 코스닥은 4% 하락했다.
증권거래세 인상, 대주주 주식 양도소득세 기준 10억 원으로 강화, 배당소득 분리과세 도입 등의 세제개편안에 실망한 투자자들이 매물을 쏟아냈다. 물론 그동안 코스피의 상승에 따른 피로감, 세계 증시의 조정기 등과 겹친 측면이 있지만, 세제개편안이 폭락의 트리거가 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국내 증시 투자자들의 실망을 넘어선 분노의 핵심은 정부의 정책 불신에 있다.
국내 증시는 올해 세계 상승률 1위를 기록할 만큼 가파르게 올랐다. 이는 이 대통령이 공약한 ‘코스피 5000 시대’에 기인한다.
자산이 부동산에 지나치게 몰린 우리나라 국민의 자산 배분 병폐를 없애기 위해 이 대통령은 증시 부양을 핵심 공약으로 잡았다. 이에 따른 상법 개정안 등은 증시에 불을 지폈다. ‘박스피’에 실망해 미국 증시에 투자했던 ‘서학개미’들도 많이 돌아왔고, 국내 주식 투자자들도 많이 늘었다. 국내 증시가 변했다고 보고 외국 투자자들의 투자금액도 대폭 늘었다.
기업의 실적이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닌데, 이 대통령의 증시 부양에 대한 강력한 의지, 즉 말만으로 이 모든 것들이 이뤄졌다.
이 때문에 이번 세제개편안은 정부의 정책에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이 잇따른다. 집값을 잡기 위한 대체 수단으로 증시에 힘을 몰아준다고 했다면 그에 따른 정책의 일관성이 유지돼야 함에도 그러지 못했다. 마치 코스피가 이미 5000이 된 것처럼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4일 취임해 임기를 시작한 지 불과 두 달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내각조차 다 구성하지 못한 시기에 벌써부터 새 정부에 대한 비판을 쏟아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윤석열 정권에 비해 새 정부는 국민의 기대치가 높다.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는 만큼 새 정부는 능력과 신뢰를 보여줘야 한다. 한 번 신뢰를 잃으면 회복하기 힘들다.
2025-08-0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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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최고의 파도는 아직 오지 않았다
부산이 모처럼 떠들썩하다. 한낮 기온이 35도를 훌쩍 웃도는 숨 막히는 폭염이 이어지고 있지만, 폭염이 끝난 뒤 올해 가을 그리고 겨울, 그 이후에 다가올 변화의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부산 시민들은 그 기대감에 올해 더위를 견디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퇴근길에 부산 동구 수정동 부산일보 본사 바로 옆 수정골목시장에 들렀다. 최근 해양수산부 이전 청사로 결정된 건물과 10여m 떨어진 시장이다. 시장 입구 만두 가게 사장님과 횟집 사장님은 더위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해수부 부산 이전 소식이 반가운 표정이었다. 만둣집 사장님은 “죽어가던 수정동 상권이 이젠 좀 살아날 것 같네요. 오시는 해수부 손님들 정성껏 모셔야지요”라며 미소 지었다. 횟집 사장님도 “해수부 직원분들 회 맛있게 성글어 드려야지예”라며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도 시장 상인들과 웃으며 대화할 수 있는 것이 기뻤다.
세계적 행사의 부산 유치 소식도 줄을 잇고 있다. 지난 15일에는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열린 두 행사에는 “Busan, Korea!”가 불렸다. 부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와 ‘마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세계마술연맹 월드챔피언십 개최지로 결정됐다. 지난 23일에는 세계 최대 도서관·정보 분야 국제 행사인 세계도서관정보대회 개최지도 부산으로 확정됐다. 2030 월드 엑스포 유치전 탈락의 아픔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국제도시’로서의 부산의 명성을 쌓기엔 더없이 좋은 기회임에 틀림이 없다.
롯데 자이언츠도 올해는 다르다. 올 시즌 가을야구를 볼 수 있는 날이 점점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2017년 이후 8년 만에 가을야구 진출 확률은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롯데는 한화 이글스, LG 트윈스에 이어서 올 시즌 10개 팀 중 세 번째로 50승을 넘어섰다. 롯데의 좋은 성적에 사직야구장 홈 경기 입장권 구하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를 넘어 ‘우주에서 별 따기’다. 사직야구장을 찾는 관중이 늘면서 구단 관계자들조차 입장권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미 롯데 팬들은 올가을 롯데 선수들이 써 나갈 이야기를 감상할 준비를 마쳤다.
이 같은 부산의 변화와 성과는 매우 반갑다. 하지만 부산 곳곳에 활기를 불어넣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여전히 부산 시민들이 체감하는 경제 상황은 꽁꽁 얼어붙어 있다. 민생회복 소비쿠폰이 전통시장과 상권에 활기를 넣고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 부산 인재들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서울과 수도권, 해외로 떠나는 현상은 큰 흐름이 되고 말았다. 부산으로 본사를 옮기는 기업들은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부산에 찾아온 좋은 발전 기회를 더 가꾸고 발전시킬 동력을 만들 인재들이 부산을 떠나고 있다. 서울·수도권에서 하루가 멀다고 들려오는 집값 폭등 소식에 부산 시민들의 허탈감은 커져만 간다.
지난 2021년 대한민국 서핑 국가대표팀 송민 감독은 2020 도쿄 올림픽 당시 한 지상파 중계 방송에서 한 발언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당시 송 감독은 ‘똑같은 파도는 오지 않는다’며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자신이 올라탈 미래의 파도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고의 파도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한 마디도 덧붙였다. 현재에 만족할 것이 아닌 다가올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부산은 해수부 부산 이전이라는 ‘파도’를 잘 준비해야 한다. 이번 파도는 그동안 바다 아래 가라앉아 있던 부산의 경기를 수면 위로 끌어올릴 중요한 기회다. 이번 파도에 올라타 파도 속을 항해할 기회이기도 하다. 해수부에 이어 해양 공공기관·대기업 이전과 해사법원 설치, 동남권 투자은행 설립 역시 또 한 번의 파도가 될 것이 분명하다. 두 번의 파도를 잘 준비하고 활용한 뒤에는 더욱 큰 파도에 올라탈 체력을 가질 수 있다.
부산은 울산, 경남과 함께 해수부 이전을 계기로 동북아 시대의 진정한 ‘해양 수도’로의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 부울경 지역의 조선, 자동차, 기계 등 전통적인 제조업 분야의 밑바탕에다 관광, 해운, 물류 분야가 더해져 다시 한번 성장해야 한다. 이 분야는 부울경이 가장 한국에서 잘 하는 분야임에 틀림이 없다.
여기에다 AI 시대를 맞이한 디지털 경제와 금융 기능이 강화된다면 부산 경제의 성장 엔진은 더 늘어날 수 있다. 해수부 부산 이전이라는 첫 파도는 마지막 파도가 아닌 오랜 기간 꿈꿔온 ‘세계 최고의 해양 도시, 부산’으로의 성장을 위한 첫걸음이어야 한다. 부산시는 물론 부산 상공계, 부산 시민은 파도를 맞이할 준비에 나서야 한다. 부산에 최고의 파도는 아직 오지 않았다.
2025-07-2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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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아이들이 홀로 죽지 않도록
지난 2일 밤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화재로 6세와 8세 자매가 목숨을 잃었다. 이 사고 8일 전인 지난달 24일에도 부산의 또 다른 아파트에서도 화재가 발생해 미처 대피하지 못한 어린 자매가 숨졌다. 부모는 외출 중이었고, 멀티탭이나 스탠드형 에어컨 주변에서 발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기적 요인에 스프링클러가 없는 노후 아파트라는 공통점이 있다.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잇따라 발생한 참사는 우리 사회 돌봄 시스템의 사각지대, 특히 야간 돌봄의 공백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드러낸 것이다. 맞벌이는 이제 평범한 삶의 조건이 됐고, 핵가족화는 보편적 현실이다. 그러나 이 변화에 걸맞은 안전망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위험에 노출되고,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다.
돌봄의 공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긴급 돌봄 서비스, 방과 후 돌봄 확대 등 정부와 지자체의 다양한 노력이 있지만, 현실의 사각지대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임을 이번 사고가 여실히 보여준다.
부산 전역에서 24시간 긴급돌봄이 가능한 센터는 단 한 곳. 그러나 그마저도 최근 3개월 동안 심야 시간대 이용자 수는 0명이었다. 홍보 부족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이용하려면 최소 4시간 전 예약이 필요하다. 가정으로 찾아가 아이를 돌봐주는 정부의 아이돌봄서비스도 긴급한 상황에서도 사전 소득 판정이 필요하고, 돌보미와 매칭이 되지 않으면 신청이 자동 취소된다. 지난해 시범 사업 기간에는 전국 기준 긴급 돌봄을 신청한 10명 중 6~7명, 단시간 돌봄을 신청한 10명 중 4명이 매칭에 실패했다.
돌봄 체계의 허점과 함께, 노후 주거지의 전기 안전 문제도 더는 외면할 수 없다. 건조하고 화기 사용이 많은 겨울철 화재가 많았던 과거와는 달리 에어컨 등 전자 기기 사용이 많은 요즘은 화재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많이 발생하고 있다. 2020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아파트 등 부산의 공동주택에서 발생한 화재의 약 30%가 전기적 요인이었다.
최근의 화재도 스탠드형 에어컨과 실외기가 동시에 연결된 멀티탭에서 전기적 발화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고 당시 멀티탭에는 에어컨 본체와 함께 베란다 실외기도 연결돼 있었다. 에어컨 실외기처럼 전력 소모가 큰 전자제품의 경우 화재 예방을 위해 멀티탭에 다른 기기와 동시에 연결하지 않도록 권장된다. 하지만 법적 규제 사항은 아닌 탓에 일상에서 잘 지켜지지 않는다.
‘문어발식 콘센트’는 이제 단순한 생활 습관의 문제가 아니다. 화재를 유발하는 구조적 위험이다. 콘센트 화재는 부산에서 최근 5년간 27% 증가했다. 그럼에도 이를 규제하거나 점검할 제도는 미흡하다. 정기적인 전기 안전 점검은 법적 의무가 아니며, 노후 주택의 전기 시설 개선에 대한 지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는 다음 달 국정현안관계장관회의에서 부산 화재 참변과 관련한 범정부 종합대책을 발표할 계획이다. 이에 앞서 부산시는 원스톱으로 돌봄 시스템을 관리하는 ‘아동 돌봄 핫라인 콜센터’를 개설하기로 했다. 또한 야간 돌봄 공백 해소를 위해 돌봄 시설의 운영 시간도 늘린다. 여성가족부는 야간 시간대 긴급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는 저소득 가구를 대상으로 본인 부담금을 경감하고 긴급돌봄에 참여하는 아이돌보미에 대한 인센티브를 추가 지원하는 시범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복지부도 오후 10시 이후 연장형 돌봄시설 확대 방안을 검토할 방침이다.
정부는 신속한 화재 감지·경보가 가능한 ‘단독경보형 연기감지기’를 부산지역 돌봄 취약 세대에 우선 보급하고 향후 전국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전기안전멀티탭 교체·보급 사업도 추진한다. 산업부는 노후 주거 시설 아크(전기불꽃)차단기 설치 확대, 주택 임대·매매 거래 시 안전 점검 의무화, 금속 배관 교체, 비상차단기 보급 등 안전 대책을 논의 중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다. 이 모든 계획이 현장에서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취약계층의 경우 특히 더 세심한 점검과 지원이 필요하다.
돌봄과 화재 예방의 1차 책임은 물론 개인에게 있다. 그러나 돌봄은 가정의 책임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회적 과제다. 아이가 있는 가정이라면 누구나 돌봄 사각지대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아이들이 홀로 집에 남겨지지 않아도 되는, 설령 남겨지더라도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 사회. 그 기본은 돌봄 체계의 재설계와 안전 인프라의 공공적 보장이다. 취약 계층 주택의 경우,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안전 점검 비용을 지원하고, 필요한 경우 직접 시설 개선을 도와야 한다. 가장 기본적인 삶의 터전에서조차 안전을 위협받는 일이 없도록 사회 시스템을 꼼꼼히 정비해야 한다.
2025-07-2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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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여가부 잔혹사를 끝내자
얼마 전 부산시립박물관에서 ‘큰별쌤’으로 유명한 최태성 역사 강사를 만났다. 최 강사는 광복 80주년 기획전이 진행 중인 부산 박물관에 특강하기 위해 찾았다. 박물관 대강당이 가득 찰 만큼 사람이 많이 왔고, 최 강사는 ‘그날을 만든 사람들-부산의 독립운동가’라는 제목의 강의를 할 예정이었다.
강당에 들어서니 대형 화면에 ‘위대한 사랑의 역사’라는 큰 글씨가 적힌 영상이 비치고 있다. 최 강사는 “오늘 저는 위대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라는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알려지지 않은 부산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한다고 들었는데 뜬금없이 무슨 사랑 타령인가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최 강사는 1시간 30분 동안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전했다. 독립운동가들은 거사에 나가기 전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기록이다. 영화 ‘밀정’에서 이정재 배우는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을 연기한다. 독립운동 동지가 변절의 이유를 묻자 “독립이 될 줄 몰랐다”라고 답한다. 실제로 당시 많은 지식인, 지도자가 독립은 포기하고 일제와 타협해 조금 더 편하게 사는 길을 찾자고 주장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독립운동가는 죽음을 각오하고 거사에 참여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독립된 세상을 누릴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망설이지 않고 폭탄과 함께 뛰어들었고, 살아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도 타협 없이 죽음을 택했다. 그 마음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후손들은 독립된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앞서 싸운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실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현재 민주주의 역시 앞서 싸운 이들의 피와 땀으로 완성된 것이다.
최 강사의 이야기가 떠오른 건 여성가족부의 탄생 상황을 회상하다가 독립운동가들의 위대한 사랑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5년 부산일보에 입사해 처음 맡은 분야가 ‘여성·가족’이었다. 30년 전 ‘여성·가족’ 기사는 대체로 ‘슬기로운 주부 생활’에 관한 내용이었다. 가족 돌봄과 알뜰한 살림은 주부의 일이고, 그들의 희생과 봉사를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었다. 같은 직종, 비슷한 경력에도 남성 직원이 여성보다 승진, 연봉에서 유리했던 차별 상황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결국 돌봄, 젠더 폭력, 차별 등을 전문적으로 고민하고 정책을 펼칠 독립 부처를 요구하게 되었다. 당시 인권 운동, 여성 운동, 시민 운동을 하는 이들이 모여 여성부 설립을 위해 국민 서명을 받았고 집회도 열었다. 정부 관계자를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 어려움이 많았고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겠다며 선배들은 광장에서 몸과 마음을 다쳐 가며 싸웠다.
그렇게 2001년에야 여성부가 출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성부는 정권마다 위상이 크게 출렁였다. 남성 표심을 잡기 위해 ‘여가부 폐지’를 선거 공약으로 들고 나온 윤석열 정부 때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반대에 부딪혀 부서를 폐지하진 못했어도, 16개월째 장관을 공석으로 두며 여가부는 사실상 ‘식물 부서’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윤 정부 3년간 남성의 삶은 더 나아졌는가. 그렇지도 않다. 청년층의 고립, 구조적 차별은 심해졌고 ‘남성다움’에 대한 사회적 압박도 여전히 크다. 모든 국민이 보는 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버젓이 여성 신체에 대한 성희롱 발언을 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그 후보를 국회의원에서 제명시키자는 청원이 60만 명을 넘을 정도로 많은 국민이 분노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후보가 그 발언이 성폭력이라는 걸 사전에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여성가족부를 확대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성평등은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과 직결된 문제이다. 성평등가족부로 확대해 차별과 혐오, 고립과 폭력을 걷어내고, 다양성과 돌봄, 공동체를 회복하는 국가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국가 소멸 위기에서 출생은 한 가족의 문제를 넘어 사회가 돌봐야 할 일상의 단위라는 인식도 필요하다.
정권 변화에 따라 예산도 인원도 정책 방향마저 흔들리던 여가부 잔혹사는 이제 끝나야 한다. 다시 한 번 지극한 사랑을 바탕으로, 모든 국민이 공정과 평등을 누리는 세상을 열어 보자.
2025-07-1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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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건강한 부산의 미래를 위해
생활에 활기를 느끼고 싶다면 스포츠만큼 확실한 해답은 없다. 직접 운동을 해도 좋고, 다른 이들의 경기를 응원하는 것도 좋다. 땀 흘리고, 박수를 보내며, 공동의 감동을 나누는 경험은 개인의 건강을 넘어 공동체 전체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올해 부산의 스포츠 현장은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연초 부산의 여자 프로농구팀 BNK 썸의 드라마 같은 우승이 시작이었다. 지난 시즌 6개 팀 중 꼴찌였던 BNK 썸은 올해 창단 6년 만에 첫 승을 올리며 부산에 승리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프로야구에선 롯데 자이언츠가 봄을 지나 여름에도 리그 상위권을 유지하며 ‘가을야구’에 가까워지고 있다.
남자 프로농구 KCC는 스타 플레이어 허훈 영입과 ‘영원한 오빠’ 이상민 감독의 부임으로 다가올 시즌에 기대를 높이고 있고, 남자 프로배구 OK저축은행은 안산시에서 부산으로 연고를 이전해 부산의 배구 팬들은 올해 10월부터 안방 경기장에서 직관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더해 오는 10월 부산에서는 25년 만에 전국체전과 전국장애인체전이 연이어 개최될 예정이다. 전국체전은 단순한 스포츠 행사를 넘어 부산의 체육 역량을 전국적으로 확인받을 기회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듯 부산시는 지난 3월 전국 광역자치단체 최초로 ‘체육국’을 신설했다. 생활체육과 전문체육을 아우르는 전담 부서가 생긴 것이다. 시민 건강과 여가, 도시 브랜드를 동시에 끌어올릴 수 있는 체계적인 정책 기반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변화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부산의 공공 체육시설은 총 1866개로, 전국 17개 시도 중 9번째 규모다. 부산의 도시 위상에는 한참 못 미친다.
공공 체육 인프라 부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는 공인 육상경기장이다. 전국에 공인 육상경기장이 43개 있지만 놀랍게도 부산에는 한 곳도 없다. 부산에는 공인 경기장이 없어 전국 단위 육상대회를 개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10년 전에도 〈부산일보〉와 지역 체육계 등에서 공인 경기장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바뀐 것이 없다는 것도 황당한 대목이다.
전국체전 개최지는 의무적으로 전국육상선수권대회를 개최해야 해서 부산시는 사직 아시아드주경기장을 보수해 급하게 공인을 받을 예정이다. 이마저도 사직야구장이 재건축 되면 아시아드주경기장은 임시 야구장으로 사용될 예정이어서 다시 공인 육상경기장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부산의 대표적인 체육시설 중 하나인 구덕운동장은 개발이 지연되며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 과거 시민들의 추억이 서린 공간이지만, 현재는 낙후된 시설과 불투명한 활용 계획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구덕운동장을 리모델링해 지역 체육의 허브로 만들겠다는 계획은 해마다 발표되지만, 실질적 착공이나 투자 확대는 지지부진한 상태다.
KCC 프로농구단의 경우, 연고지 경기는 부산에서 열리지만 훈련장이나 숙소는 다른 지역에 있다. 이름만 ‘부산 연고’일 뿐, 실질적으로 지역 경제나 체육 생태계에 기여하는 바는 미미한 상황이다.
이처럼 ‘열기는 뜨겁지만 기반은 취약한’ 구조는 오래가지 못한다. 스포츠는 단발성 이벤트로 꽃피지 않는다. 훈련하고, 참여하고, 관람할 수 있는 일상 속 공간이 갖춰질 때 비로소 시민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다. 단순히 경기장 몇 곳을 새로 짓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연령과 계층이 일상적으로 스포츠를 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부산의 체육 시설 인프라는 지역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 구·군 단위로 실내 체육관, 수영장, 트랙, 다목적 구장을 균형 있게 배치하고, 기존 시설의 개보수를 통해 지역 간 체육 인프라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또 프로 구단 유치에만 머무르지 말고, 실제로 지역 체육 생태계 안에서 상생할 수 있도록 기반 인프라와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체육 인프라는 도시의 건강을 측정하는 척도이기도 하다. 부산이 진정한 스포츠 도시로 도약하려면, 내실 있는 인프라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 시민들이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마음껏 운동하고,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부산의 내일을 더 건강하고 활기차게 만들기 위해선 무엇보다 체육 인프라 확충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산시의 체육국 신설은 반갑다. 단순히 기존에 각 부서에 흩어졌던 업무를 한 곳에 모아 놓은 것 이상의 역할을 기대한다.
송지연 스포츠라이프부장 sjy@busan.com
2025-07-0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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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공원 속 콘서트홀, 바닷가 오페라하우스
‘숲속 공연장’이라는 별칭을 가진 부산콘서트홀. 부산 첫 클래식 전용 공연장으로 지난 20일 개관했다. 부산진구 부산시민공원 내에 위치한 덕분에 창밖으로 푸른 나무와 잔디를 볼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인 곳이다. 지난 주말, 공연 중간 휴식 시간에 콘서트홀 바깥 풍경을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장면이 있다. 잔디밭 위에서 바람을 쐬는 관객들의 여유로운 한때를 보고 있으니, 그동안 즐겨 찾던 경남 통영국제음악당 야외에서 탁 트인 바다를 조망하던 관객들의 행복한 얼굴이 겹쳐졌다.
매년 봄 통영국제음악제가 열리는 기간이 되면, 클래식 애호가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그곳을 찾는다. 부산·경남 지역뿐 아니라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구 팬들이 몰려들어 음악제 기간엔 숙소 구하기도 쉽지 않다. 특히 올 3월 행사 땐 국내 클래식 팬들이 현재 가장 보고 싶어하는 연주자로 손꼽히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개막 공연 무대에 서게 되면서 그야말로 ‘피켓팅’(피가 튀는 전쟁 같은 티켓팅)이 벌어졌을 정도다.
이제는 부산도 그런 공연장과 음악 축제를 보유한 도시가 됐다.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클래식부산 정명훈 예술감독이 함께하는 부산콘서트홀 개막 페스티벌 티켓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게다가 2027년엔 바닷가 공연장인 부산오페라하우스도 부산항 북항에 문을 열 예정이다. 통영국제음악당처럼 바닷바람을 맞으며 좋은 공연을 기다리는 설렘을 부산에서도 곧 느낄 수 있게 된다.
부산의 랜드마크가 될 두 공연장의 장소성도 눈여겨봐야 한다. 콘서트홀이 위치한 부산시민공원은 일제강점기 서면 경마장, 광복 후 주한미군사령부(캠프 하야리아)를 거쳐 100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오페라하우스가 건설 중인 부산항 북항 역시 1876년 개항한 후 146년 만에 친수공간으로 재개발돼 시민에게 환원됐다. 이런 이야깃거리까지 더해진 두 공연장이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문화예술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해 본다.
장밋빛 전망만 나오는 건 아니다. 부산콘서트홀이 개막 페스티벌을 화려하게 치러내기는 했지만, 개관 초기 화제성을 이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적지 않다. 특히 유명 연주자나 오케스트라 공연에만 관객이 몰리는 편중 현상은 공연예술계의 해묵은 과제다. 한 지역 음악계 관계자는 개막 페스티벌의 관객 층이 눈에 띄게 젊어진 것에 대해 놀라움을 표했는데, 이 역시 개관 효과에 따른 일시적 현상은 아닌지 염려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새로운 장소를 방문하고 SNS에 인증하기 좋아하는 젊은 층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들을 지속적으로 유인할 좋은 콘텐츠 기획이 필수적이다. 미래 관객 발굴 노력도 다각적으로 시도해야 한다.
지역 음악 단체와의 상생 노력도 필요하다. 지난 20일과 21일 개관 기념 공연 ‘하나를 위한 노래’를 관람한 관객 중 일부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공연을 부산시립합창단이 아닌 창원시립합창단이 맡은 데 대해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개관 페스티벌을 마무리하는 지난 27일과 28일 콘서트 오페라 ‘피델리오’ 공연에 국립합창단과 부산시립합창단이 함께하긴 했다. 그러나 개막 공연의 상징성을 생각하면, 부산시립예술단의 적극적인 참여가 아쉽다는 반응이 나온다. 개막 페스티벌에 부산시립교향악단의 무대가 빠진 것 역시 비판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일각에선 “의도적 배제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부산문화회관, 부산시민회관 같은 기존 노후 공연장 시설 개선도 남은 숙제다. 공연을 보는 관객 입장에서도, 무대에 서는 연주자 입장에서도 상대적으로 시설이 더 좋은 공연장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부산콘서트홀이 클래식 전용 홀의 특성을 가진 만큼, 부산문화회관과 시민회관은 다양한 장르의 공연으로 시민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차별화 전략을 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향후 시설 투자가 병행되지 않으면, 관객의 발길이 끊길 것이란 위기감마저 감돈다. 장기적으로는 부산콘서트홀과 부산오페라하우스, 부산문화회관과 시민회관을 통합 운영할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발전적 경쟁도 필요하지만, 효율적인 시설 운영을 위해선 좋은 프로그램을 선별해 각 공연장에 배정하는 방식의 통합 운영이 장기적으로 상승 효과를 낼 수 있을 거란 목소리다.
부산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가 지역의 랜드마크로 우뚝 서는 것은 물론이고, 기존 공연장들도 제 역할을 다해 다채롭고 풍성한 문화예술이 숨쉬는 도시 부산이 되길 바란다. 이 같은 문화예술 자산은 국내외 관광객을 지역으로 끌어들이는 매력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부산의 새로운 먹거리, 성장 동력이 될 수도 있다. 부산시의 치열한 고민과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자영 문화부장 2young@busan.com
2025-06-2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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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사람이 추해지는 순간
교수 출신 한 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알만한 공기업 이사장으로 낙점을 받아 업무 보고를 받다 적잖게 놀랐단다. 급여나 복지에서 큰 메리트가 없다고 여겼는데 인사 파일을 열어보니 서울대 출신이 수두룩했다고. 공단의 핵심 사업 중 하나가 서울을 떠나서는 수행할 수 없는 업무라는 게 그 이유였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지방 이전은 안 하는 공기업’이라고 입소문이 나면서 오버스펙의 사원이 줄줄이 입사를 했다는 것이다.
균형발전은 지극히 양가적인 화두다. 수도권 일극주의를 치료할 해법은 균형발전이라고 떠들면서도, 속으로 나와 내 가족만큼은 열외라고 다들 생각한다. 같은 직장인으로서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젊은 시절 원치 않던 인사로 겪었던 서울 타향살이는 부산이 고향인 나 역시도 편치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개인사는 개인사일 뿐이라는 점이다. 개인의 욕심이 그럴싸한 대의명분으로 둔갑할 때 조직은 몸살을 앓게 된다. 조직은 고달픈 개인사를 보듬어 줘야 하지만, 개인이 그걸 명분 삼아 대자보 붙이고 동네방네 떠들게 방치해서도 안 된다. 언제나 그랬듯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게 원칙인 까닭이다.
경남 사천시를 우주항공복합도시로 육성하겠다는 대한민국의 의지는 첫걸음을 뗐다. ‘우주항공의 날을 기념은 해야겠는데 우주항공청은 멀리 있으니 가까운 경기도에서 기념식을 하자’던 과기부의 희한한 발상이 지난달 경남과 사천의 비난 여론에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대전의 항공우주연구원 노조가 나서서 우주항공청을 세종시로 돌려보내란다. 사천시 국회의원이 산하 연구기관도 본청이 위치한 사천으로 이전해야 한다는 개정안을 발의한 바로 다음 날에 벌어진 일이다.
법안 개정이라는 게 이득을 보는 쪽과 손해를 보는 쪽의 입장이 갈리기 마련이다. 본회의를 통과하던, 폐기되던 법안이 꾸준히 발의되는 과정 자체는 건강한 입법 행위라고 봐야 한다. 한데 개정안이 나오자마자 산하 기관 노조가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지역 이기주의란다. 산하 기관이 본청을 우리 동네로 다시 옮기라는 선 넘는 발언까지 내지른다. 지난해에 우주항공청이 이전을 해도 연구개발은 여기서 계속할 테니 연구개발본부를 분리신설하자는 법안까지 발의했었다. 이쯤 되면 과연 지역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건 어느 쪽일까.
개인사를 대의명분으로 둔갑시키는 몰염치가 전국적인 유행이다. 수도 이전에 반대하며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은 관습헌법에 해당한다’라던 2004년 헌법재판소의 어이없는 판단이 빌미를 제공했다. 몰염치는 산업은행 부산 이전에서도 볼 수 있듯 현재진행형이다. 우린 못 간다고 버티는 여의도 금융노조를 앞세워 서울과 부산을 싸움을 붙이던 이가 협치를 진두지휘할 국무총리가 되겠다고 나선 상황이니 말이다.
내년 6월 치러질 지방선거는 이재명 대통령과 여당의 신임을 묻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미 내년 부산 선거에 대한 큰 기대를 내비쳤단다. 여야 간 승부는 여당이 공언한 해양수산부와 HMM의 이전 성공 여부에 갈릴 터다.
그러나 해수부와 HMM 이전이라고 무탈하게 진행될까. 달랑 연구기관 두 곳을 이전하자는 법안이 발의만 되어도 난리가 나는 세상이 됐다. 공공기관 이전에서 원칙이 깨지면서 그 후유증이 부산과 사천에 이어 전국을 돌며 환부를 들쑤신다.
조직 개편으로 한순간에 사라졌던 해수부를 다시 부활시킨 일등 공신은 부산 시민이다. 그런 해수부 내부에서도 부산 이전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공적자금이 투입된 HMM에서도 내부적으로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이 혼재한단다.
1차 이전 당시 부산으로 터를 옮긴 한국거래소의 올해 정기인사에서는 순환근무 지원자가 몰렸다. 내규까지 동원해 근무자를 선발했다니 고무적인 현상이다. 다른 공기업에서도 가족 이주를 거부하는 직원이 줄고 정주 만족도가 높아지는 추세다. 그 사이 부산 대학가의 금융 관련 학과 입결은 꾸준히 향상되고 있다. 원칙을 지킨 공공기관 이전이 가져다 주는 긍정적인 효과는 수치로 나타나고 있다. 무원칙에 부화뇌동했다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사람이 추해지는 건 내 욕심과 대의명분을 착각하는 순간부터다. 언제부터 녹을 먹고 사는 공직 사회에서까지 ‘악쓰고 뭉개면 우린 열외다’라는 식의 몰염치가 만연하게 됐을까. 순환근무 확대나 분소 설치 등으로 원칙에 상응하는 해법을 찾더라도 더는 소수의 악다구니에 휘둘려 지역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공공기관 이전의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권상국 지역사회부장 ksk@busan.com
2025-06-2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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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장기 표류 북항, 다시 쏠린 시선
약속 없는 점심때나 주말에 북항친수공원으로 향하곤 한다. 흥과 여유를 동시에 느낄 수 있어 마음에 쏙 드는 산책 코스다. 오가는 길에 캐리어를 끄는 관광객과 나란히 걸을라치면 짐짓 여행자 기분이 난다. 크루즈선이나 여객선이 시선에 들어오면 자연스레 휴가 계획이 떠오른다. 날씨가 궂다면 국제여객터미털 커피숍에 앉아 배며, 갈매기를 보며 잠시 여유를 갖는다.
개인적으로 무목적성의 일상 공간이지만 북항은 수시로 축제 공간이 된다. 지난달 18회째 행사를 마친 대표 항만축제 부산항축제는 매년 북항에 무대를 마련하고 손님을 맞는다. 지난 4~8일 맛집 등 로컬브랜드 110팀이 1부두 폐창고에 모여 연 축제 ‘포트빌리지 부산’엔 10만 명이 다녀갔다. 웬만한 백화점 매장을 뛰어넘는 집객 효과다. 2022년 2030엑스포 유치 때 BTS 단독 콘서트가 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렸을 때 티켓을 구하지 못한 팬들이 북항을 메운 장면은 부산 시민에게 남겨진 좋은 기억이다.
무엇보다 북항은 정치의 공간이다. 북항은 이재명 대통령 취임과 함께 부산에서 가장 ‘핫’한 곳이 됐다. 이 대통령은 후보 시절 해수부와 HMM 이전, 해사법원 본원 설립을 앞세워 부산을 해양수도로, 북극항로 거점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며 시민 지지를 이끌어냈다. 대선 마지막 유세 장소도 북항이었다. 취임 후 첫 국무회의에서는 해수부 이전 신속 추진을 지시하며, 다시 한 번 의지를 내비쳤다.
지역에서는 해수부와 HMM 이전 최적지로 북항을 꼽는다. 엑스포 유치 좌절 이후 시들하던 북항에 다시 한 번 관심이 모아지는 분위기다. 벌써 북항 주변 부동산에는 매물 문의가 쏟아진다고 한다.
민주당 집권 때마다 북항 소환이 반복되는 일은 우연만은 아니다. 1997년 부산항 신항 건설 계획과 함께 시작된 북항 재개발 논의를 구체화한 정치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2004년 9월 노 전 대통령이 ‘지역 발전 토론회’에 참석해 북항 재개발을 언급한 이후 개발이 본격화됐고, 2007년 기본계획이 고시됐다. 그즈음 북항을 직접 찾은 그가 ‘슬리퍼를 신고 아무때나 즐길 수 있는 북항을 만들겠다’고 한 ‘선언’은 아직 북항이 나아갈 방향으로 받아들여진다.
북항 재개발 밑그림은 문재인 정부 때 구체화됐다. 문재인 정부는 2017년 출범과 함께 ‘북항 재개발 사업’을 국정과제로 삼았다. 현재의 북항 재개발도 2020년 공개된 북항 통합개발 마스터플랜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국가 첫 대규모 항만 재개발 사례라는 시대적 과제와 정치인들의 선언, 시민 기대까지 더해졌지만 북항은 미래 공간으로 머물러 있다.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의미다. 단적인 사례가 북항 재개발 1단계 중 면적이 가장 큰 랜드마크 부지를 둘러싼 끝 모를 표류 사태다. 그동안 복합리조트, 돔야구장, 오픈카지노 등 수차례 유치 노력이 펼쳐졌지만 번번이 투자 유치 실패, 내국인 카지노 논란 등을 남기고 사그라들었다.
랜드마크 부지를 둘러싼 동상이몽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부산시는 외자 4조 5000억 원을 확보해 최대 88층짜리 ‘부산 랜드마크타워’를 지어 공연장, 미디어 파사드, 호텔, 헬스케어센터, 쇼핑몰, 스카이파크 등을 담은 영상문화 콤플렉스를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 중이다. 반면 사업 시행자인 부산항만공사(BPA)는 별도 활용 방안을 찾겠다며 독자 행보에 나서는 등 답답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민간에서도 최근 랜드마크 부지에 바다 야구장을 건립하자는 요구가 터져나왔다. 시민과 정치인 개인 차원에서 이어지던 바다 야구장 건립 요구가 지난 4월 부산의 한 기업인이 “북항에 야구장을 건립한다면 2000억 원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다시 불붙는 분위기다. 공공 영역에서 장기간 활로를 찾지 못한 탓인지 아직 제안 수준인데도 시민 호응이 뜨겁다. 부산상공회의소도 지난해 앵커형 랜드마크인 복합리조트 유치를 공식 제안한 바 있다.
사실 북항의 변화는 이제 시작 단계라 볼 수 있다. 부산 원도심과 남구, 영도구까지 아우르는 1~3단계 전체 개발면적 900만㎡ 가운데 1단계(155만㎡) 기반시설 조성을 이제 마쳤을 뿐이다. 처음 북항 재개발 닻을 올릴 당시 노 전 대통령의 뜻에 맞게 부산의 얼굴이 바뀔지, 숱한 난개발의 역사를 답습할지, 변곡점에 섰다.
이런 가운데 새 정부가 집권 초반부터 북극항로, 해양수도 등 연이어 부산을 ‘호명’하고 해수부와 HMM 이전 같은 구체적인 사업 추진 의지까지 밝히고 나선 것은 기회임에 틀림없다. 장기간 갈피를 잡지 못한 정부와 부산시, BPA에 가장 큰 책임과 권한이 있다. 한시바삐 머리를 맞대고 기회를 살릴 논의에 나서길 주문한다.
김영한 경제부장 kim01@busan.com
2025-06-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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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부산시, 의지보다 전략이 필요하다
대선은 끝났지만 부산시는 여전히 분주하다. 제21대 대통령의 국정과제 선정을 앞두고 지역 현안을 반영하려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지난 5일 열린 ‘대통령 부산 공약 국정과제화 보고회’도 그 일환이었다. 그러나 보고회는 부산시의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의지만을 확인한 자리였다. 시는 전략보단 의지를 앞세우고, 현실보다 명분을 강조하는, 이른바 ‘고집 행정’의 모습을 반복했다.
한국산업은행 본사 이전과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부산시의 입장은 시의 전략 부재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두 과제는 대선 과정에서 대통령 공약에 포함되지 않았다. 산은 이전은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후보 당시 강한 어조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의 경우에도 특정 지역에만 ‘특구’ 형태의 특별법을 제정하는 방식에 반대 의견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도 부산시는 이 두 과제를 여전히 핵심 과제로 고수했다. 박 시장은 보고회에서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은 차질 없이 진행돼야 될 것이고, 산업은행 본사 이전도 지금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부산시로서는 놓칠 수 없는 과제”라고 힘주어 말했다.
박 시장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비장한 각오마저 느껴진다. 산은 이전 등의 필요성에도 물론 공감하는 바다. 그러나 정책은 이상과 의지만으로 추진되는 것이 아니다. 상황이 바뀌고 상대가 달라졌다면 그에 따라 협상의 접근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타협의 여지도 살펴야 한다. 국정과제 선정은 결국 중앙정부와의 협력 게임이며, 일방적 요구가 아닌 상호 조율의 산물이다. 국정 운영의 실질적 동력과 정치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우리의 소원은 통일’ 같은 밀어붙이기식 접근은 오히려 역효과만 부를 뿐이다.
그럼에도 부산시는 기존 입장만을 반복하고 있다. ‘왜 필요한가’에 대한 주장은 넘치지만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가’에 대한 전략은 결여돼 있다. 부산이 요구하는 과제 하나를 밀어붙이는 동안, 다른 현실 가능한 기회들이 무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제는 ‘기회비용’이다. 고집의 대가로 무엇을 잃는지도 냉정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실 부산시의 이러한 ‘고집 행정’은 처음이 아니다. 수 년 전 부산시는 대체거래소 출범을 강하게 반대했다. 표면적으로는 한국 증시의 규모를 고려한 ‘시기상조론’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부산에 본사를 둔 한국거래소의 위상 약화와 세수 감소, 나아가 부산 금융중심지의 위상 약화을 우려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거래소 역시 같은 입장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상황이 변했다. 2021년 1월 한국거래소 손병두 당시 이사장은 “금융환경의 변화로 대체거래소를 거부할 명분이 약해진 만큼 대체거래소와의 건전한 경쟁을 통해 투자자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겠다”며 사실상 입장을 선회했다. 부산 금융계 일각에서도 대체거래소 출범을 막을 수 없다면 오히려 부산에 유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당시 대체거래소 추진 주체의 가장 큰 걸림돌이 부산시의 반대였던 점을 고려할 때, 양측의 획기적 ‘딜’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왔다. 그러나 부산시는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2022년 11월 금융위원회는 대체거래소 사업 허가 신청 요건과 일정을 발표했다. 사실상 대체거래소 출범이 확정된 셈이다. 이후 부산시는 뒤늦게 유치 노력에 나섰지만, 허가 요건이 명확해진 이상 (그 조건만 충족하면 되기 때문에) 부산시가 제시할 수 있는 카드는 남아있지 않았다.
더이상 이런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실수가 되풀이될까 우려스럽다. 우려는 최근의 정치적 상황과 맞닿아 더욱 커진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야당이 된 부산시 정부가 여당인 중앙정부와 ‘협력’이 아닌 ‘경쟁’을 벌이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지역 발전이라는 본질적 목적보다, 그 정책과 성과가 어느 정당의 것인가에 집착하는 모양새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 단지 상대 당의 공약이라는 이유만으로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을 반대한 지역 국회의원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마냥 과한 상상력으로만 치부하기도 어렵다.
‘원칙’을 고수할 것이냐, ‘유연성’을 발휘할 것이냐, 선택은 언제나 쉽지 않다. 그러나 지금 부산시에 필요한 것은 조금 더 유연한 사고일 테다. 새 정부의 정책 기조를 고려해 협상 가능한 지점에서 실리를 챙기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이에 앞서 무엇보다, 당리(黨利)적 판단을 배제해야 한다. 가덕신공항 적시 개항 등 부산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여야가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이다. 정책 판단에 있어 어느 정당의 공인지 혹은 과인지를 따질 여유 따위는, 지금 부산에 없다.
2025-06-0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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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대통령과 바다
부산 사람들에게 바다는 자연 그 이상이다. 무심코 우리 곁에 있는 듯 보여도, 바다는 부산 역사의 무대이자 희망을 품게 하는 삶의 터전이다. 어떤 미사여구를 보태도 충분하지 않은 소중한 삶의 원천이다. 그런 의미를 간파한 역대 대통령 후보들은 선거 때마다 부산 바다를 주목했다. 유권자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대통령 후보들의 구애는 언제나 거대하고 화려했다. 어린 시절부터 듣던 그들의 모토가 ‘해양수도 부산’이었다. 거창한 이름 아래 그럴듯한 청사진을 그려내며 수많은 약속을 남겼다. 세계적인 항만 도시로 도약시키겠다거나, 동북아 물류 허브이자 해양 관광 중심지로, 첨단 해양 산업의 메카로, 글로벌 해양수산 중추 국가로 발전시키겠다는 그들의 말과 글은 매번 부산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바다를 내세운 대선 공약을 들고 “이번에는 믿어달라”며 팔을 힘차게 내젓고 소리치며 유세할 때마다, 시민들은 의구심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씨앗을 키웠다.
그렇게 화려했던 약속들과 함께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부산은 어떤 모습인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로 시작된 부산 북항 재개발 사업만 봐도 20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미완성이다. 2020년까지 완공하려던 목표는 2027년까지로 연장됐다. 수많은 난관 속에서 더딜 수밖에 없었을 거라 이해한다 해도 시민들은 이미 기다림에 지쳤다. 피로감과 실망감만 가득하다.
시민들이 바라는 건 거창한 구호나 단발성 지원이 아니다. 실제로 일어나는 변화다.
작은 실천이 부산 바다를 바꾼 사례가 있다. 2009년 부산 용호만 바닷가. 공유수면 매립 개발이 마무리되던 이곳에는 바다를 따라 높은 철조망이 둘러쳐질 예정이었다. 바다가 시민들과 철저히 단절될 위기였다. 당시 〈부산일보〉 보도를 통해 ‘시민에게 워터프런트를 돌려달라’는 여론이 일었다. 결국 용호만 일대는 산책로와 쉼터가 있는 공원 같은 수변 공간으로 탄생해 지금껏 시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부산시민들은 바다에서 평범한 일상을 즐기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 소박한 바람을 품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다 야구장’에 대한 염원이다. 1985년 준공돼 40년이 된 사직야구장은 대규모 리모델링이나 신축을 하지 않은 유일한 야구장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부산시의 재건축 계획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이제 부산시민들은 탁 트인 바다를 품은 야구장에서 경기를 즐기는 모습을 꿈꾼다. 2000억 원에 달하는 기업가의 기부 소식도 전해졌다. 전문가들 역시 바다 야구장이 부울경은 물론 전국에서 사람을 끌어들이는 부산의 새로운 랜드마크이자 원도심 부활의 상징이 될 것이라 입을 모은다.
유력 대선 후보들도 바다 야구장 건설 사업을 부산의 주요 공약에 포함할 것처럼 움직이다가 복잡한 이해타산을 핑계로 슬쩍 발을 빼면서 크고 작은 논란이 인다.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실현할 수 있다’는 전문가 의견에도 정치적 논리에 밀려 발을 떼지 못한다.
북항 바닷가에 들어설 오페라하우스가 있다지만 시민의 기대를 품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어떤 의사소통 과정을 거쳐 오페라하우스를 짓게 되었나를 돌이켜 보면, 그 누구도 시민 대다수의 열망이 오롯이 반영된 것이라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이번 6·3 대선에도 어김없이 많은 ‘바다 공약’이 등장했다. 북극항로 시대 해양 중심 도시 부산이라는 기치 아래 해양수산부와 HMM(옛 현대상선) 부산 이전, 해사법원 유치 등이 오르내린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선거용 공약 남발로 부산시민들이 헛된 기대만 가지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약속보다 더 중요한 건 실제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지 실천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이를 실현하는 일이다.
내일이면 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이 탄생한다. 예정에 없던 6월의 대통령 선거가 막을 내린다. 신임 대통령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혼란에 빠진 우리 사회를 안정시키려고 곧장 여러 국정과제 추진에 속도를 낼 것이다. 그 속에 부산 바다를 향한 공약을 반드시 포함해 실현할 책임이 그에게 있다.
부산 유권자들이 이번 대선에 던진 한 표, 한 표에는 청년 유출과 저출생, 수도권 과밀화로 소멸하는 지역에서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절한 바람과 기대가 담겨 있다. 그런 시민들은 새로운 대한민국 리더가 얼마나 진정성을 가지고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바다에 새겨진 약속, 시민들은 모두 기억하고 행동에 나설 것이다.
박세익 디지털영상센터장 run@busan.com
2025-06-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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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장미 대선, 아들의 선택은?
지난 주말 대학생 아들과 식사 자리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뽑을지 슬쩍 물어봤다. 지난 대선에서 누구를 지지했는지 알고 있기에 이번에는 지지하는 당이 변했는지 궁금해서였다. 아들의 대답은 나중에 TV 토론을 몰아서 본 뒤 결정하겠다는 거였다.
정치 저관여자인 아들의 입장에서는 최소의 시간적 비용을 들여 검증하겠다는 의도였다. 그 또한 한 유권자의 선택이기에, 현재 TV 토론은 너무 이미지화됐다, 자극적이고 네거티브한 질문과 답변만이 난무한다, 품격 있는 태도보다는 공격적인 모습이 부각된다, 후보들의 공약을 심층적으로 검증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TV 토론 방식은 개선이 절실하다 등의 말을 미처 꺼낼 수가 없었다.
부모의 잔소리가 싫을 유권자를 위해 조용히 “그래도 공약 정도는 한번 보렴”이라는 말로 마무리 지었다. 나중에 〈부산일보〉에 게재된 대선 후보들의 공약 기사를 링크해서 보내 줄 생각이다.
최근 언론의 선거 보도를 보면 예전과 달리 대선 후보들의 공약을 검증하는 기사들이 눈에 많이 띈다. 바람직하다. 어쩌면 후보 간 지지율 격차가 많이 나서 기존의 경마식 보도가 재미없고 3년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탄핵당한 전 대통령에 대한 견제 심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국민의 눈높이에 많이 근접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한 마디 더 얹자면, 자화자찬일지 모르나 지금까지의 〈부산일보〉의 대선 보도는 소위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 미디어’들을 압도한다. 어느 정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철저하게 공약을 검증해 오고 있다. 특히 지방지 답게 부산·울산·경남의 지역 공약에 대해서는 지역민의 입장에서 낱낱이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언론의 돋보기 검증에 비해 이번 대선 후보들의 공약은 설익은 부분들이 많다. 탄핵에 따른 조기 대선으로 미처 준비할 시간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면죄부를 주기에도 성의가 많이 부족하다. 주로 예전 공약의 ‘판박이, 재탕’에 불과한 것들이 다수여서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다. 경기 침체와 ‘잃어버린 3년’으로 국민들이 이번 조기 대선에 거는 기대감과 열망이 높음에도 대선 후보들은 준비 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
우선,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제정, 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 등 기존 윤석열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정책들을 다시 내놨다. 전혀 새롭지도 않다. 지역 특화 전략도 부족하다.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이나 산은의 부산 이전은 번번이 국회에서 막혀왔지만, 이에 대한 해법은 없다. 특히 산은 이전의 경우 인력이나 시스템 이전에 대한 로드맵조차 없다.
또 GTX(광역급행철도) 전국 확대 공약은 부산만의 공약도 아닐뿐더러 이미 부산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부산형 광역급행철도(BuTX)와 겹친다. 기존 정권의 정책을 다듬은 수준에 불과하다. 막대한 재정과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실현 가능성마저 의문이 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 HMM 본사의 부산 이전, 해사전문법원 신설 등 ‘해양수도 부산’ 비전을 중심으로 한 공약을 내놨다. 해수부와 HMM의 부산 이전은 그동안 지역 해양수산계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던 현안이었다. 민주당에서 지역의 요구사항을 대폭 수용한 파격적인 공약이다. 덕분에 지역 공약의 주도권을 이 후보가 선점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이 후보 측의 ‘해양수도 부산’ 공약으로 그동안 지역에서 최대 현안이었던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과 산은 이전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또한 제기되고 있다. 또 해사법원의 경우 인천의 반발로 부산과 인천에 두 곳의 본원을 둔다는 것 또한 선심성 공약을 남발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는 ‘금융중심지 부산’에 방점을 찍었다. 부산에 본점을 둔 금융기관에 증권거래세 인하 등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부여해 실질적인 금융중심지로 도약시키겠다는 것과 더불어 데이터 허브 도시 조성, 북항 바다 야구장 건립 등 신선한 공약을 제시했다. 어느 정도 고민을 한 흔적이 엿보인다. 다만 해수부, HMM, 산은 등의 이전에는 부정적인 입장이어서 지역 현안과는 동떨어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후보들의 공약이 아쉽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선택해야 한다면 현실적이고 실현 가능한 공약을 ‘성의 있게’ 제시한 후보가 낫다. 대통령을 공약만 보고 뽑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공약도 보지 않고 뽑아서는 안 된다. 부산의 유권자라면 조금의 손품을 팔아서라도 후보들의 지역 공약을 살펴보길 권한다. 잔소리가 싫을 유권자 아들에게도 다시 한번 그렇게 권하겠다.
2025-05-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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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북항 바다 야구장에서 꿈꾸는 부산 프로 스포츠
지난 주말 부산 사직야구장과 구덕운동장은 부산 시민들의 함성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부산 연고 프로 구단인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가 나란히 삼성 라이온즈, 수원 삼성블루윙즈와 홈 경기를 치렀다. 사직야구장에는 만원 관중이 들어찼다. 17일 구덕운동장에서 열린 경기에도 올 시즌 홈 경기 중 가장 많은 8529명의 팬이 모여 열띤 응원을 펼쳤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는 올 시즌 초반 좋은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두 구단은 각각 올 시즌 ‘가을야구 진출’과 ‘K리그 1 승격’이라는 오랜 꿈을 이룰 가능성을 높여가고 있다.
부산 프로 스포츠는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 다른 지역 연고 구단들이 잇따라 좋은 성적을 내면서 프로 스포츠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민들의 높은 관심은 여러 지자체들이 프로 스포츠 인프라를 개선하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됐다. 팬들은 좀 더 쾌적하고 좋은 경기장과 인프라 속에서 프로 스포츠를 즐기고, 팬들의 더욱 뜨거워진 응원 속에 각 프로 구단은 더욱 좋은 성적을 냈다. 프로 스포츠 속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 셈이다.
반면 부산 프로구단과 부산시는 그동안 선순환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 팀 성적은 하위권을 밑돌았고, 구장 신축에 대한 논의는 불붙지 못했다. 그동안 사직야구장과 구덕운동장은 낡아갔고, 엄청난 유지보수 비용은 늘어갔다. 그 사이 한국 프로야구에서 서울·인천·경기를 제외한 비수도권 5개 구단 중 신축 구장이 없는 구단은 이제 롯데 자이언츠뿐이다. ‘조류 동맹’으로 일컬어지는 한화 이글스는 올 시즌부터 신축 구장을 이용하고 있다. 부산 아이파크와 K리그 3(3부 리그) 부산교통공사 홈구장인 구덕운동장 역시 1928년 준공부터 지금까지 보수공사를 거듭하며 명맥을 잇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가 시즌 중반으로 향하는 5월 중순까지 좋은 성적을 내면서 부산 시민들 사이에서는 올해는 ‘함 해보입시더!’라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는 경기장 밖 힘든 정치·경제 상황 속에서 시민들의 깊은 시름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비타민’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북항 바다 야구장 추진 소식은 ‘구도’ 부산 시민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부산 원도심 상권 부활의 심장이라고 할 북항 지역에 야구장을 짓자는 논의가 시작된 것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 10년 전인 2015년 2월 당시 서병수 부산시장과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겸 롯데 자이언츠 구단주는 함께 북항 부지를 바라보며 바다 야구장을 짓기로 의기투합(부산일보 2015년 2월 12일 자 1면 보도) 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 속에 양측 실무진들은 야구장 예정부지와 면적 등 세부적인 문제까지 검토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북항 야구장 건설은 손에 잡힐 것 같았지만, 부산시와 롯데의 대내외 여건 변화 속에 이뤄지지 못했다.
꺼진 줄 알았던 북항 바다 야구장 논의가 다시 달아오르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가 탄탄한 전력을 바탕으로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점차 부산 시민들과 롯데 팬들의 가을야구 진출 기대감이 커지면서 북항 바다 야구장 건설에 대한 열망도 높아지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선수와 팬들이 더 멋지고 나은 환경에서 모두 ‘행복 야구’를 즐기자는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정치권도, 지역 언론도 북항 바다 야구장 건설에 목소리를 키우고 있다. 여기에다 정철원 협성종합건업 회장이 북항 바다 야구장 건립을 위해 2000억 원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 야구장 신축 논의가 늘 예산 확보에 발목이 잡혔던 상황을 떠올리면 정 회장의 기부 약속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북항 바다 야구장은 단순히 야구를 즐기는 공간이 아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야구, 쇼핑, 문화, 컨벤션 기능이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으로 조성돼야 한다. 북항 바다 야구장은 부산 원도심을 되살리고 북항 재개발 사업을 이끌 핵심 사업이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북항 바다 야구장은 ‘구도 부산’을 지켜온 부산시민들의 자존심과 자부심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시설이 될 수 있다. 부산의 도시 브랜드에 활기와 열정을 더할 기회이기도 하다.
롯데 자이언츠와 부산 아이파크의 올 시즌 활약은 북항 바다 야구장 신설 논의 시작의 중요한 씨앗이다. 이제 롯데 자이언츠의 가을야구 진출·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떡잎을 틔우고, 부산시는 적극적인 행정 지원과 검토로 튼튼한 줄기를 뻗게 해야 한다. 든든한 밑거름이 될 부산 시민들의 열정 넘치는 응원은 이미 준비돼 있다. 북항 바다 야구장에서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의 9회 초 마지막 아웃 카운트, 9회 말 끝내기 홈런을 보며 환호할 수 있는 순간이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
김한수 편집부장 hangang@busan.com
2025-05-18 [17: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