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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그렇다면, 기꺼이 '양비론자'가 되겠다
요즘처럼 양비론자의 설 자리가 없던 시절이 과거 또 있었던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12·3 계엄사태 이후 “너도 잘못이 없진 않잖아”라고 하면 ‘내란세력’으로 몰아가고, 굳이 “물론 상대의 잘못이 더 크지만”이라 말을 보태면 그땐 ‘양비론자’라 매질한다.
양비론을 비난하는 그 마음을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지금껏 아주 많은 경우에, 특정 사안의 논점을 흐리기 위한 수단으로 양비론이 악용돼 왔다. 많은 논쟁적 사안에서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한들 늘 똑같은 무게를 가지는 것은 아닐 터, 그걸 마치 대등한 듯 ‘등호’를 붙여 뭉뚱그리는 것에 물론 찬성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큰 잘못 앞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잘못이라 해서 아예 없었던 것처럼 눈감아지는 것 또한 반대다. 계엄 전후의 상황을 두고 치킨게임처럼 마주 보고 달리는 여야 모두를 탓하는 것이 그렇게 비난받을 일인가. 그런데, 시대의 양쪽 어느 한쪽에 서지 않으면 양쪽 모두에게서 비겁한 회색분자 취급을 받는다.
사사로이 군대를 동원하고도 무렴하게 애국을 핑계 삼았던 위정자를 위해 법조문 속 ‘날’(日)의 개념조차 제멋대로 해석한 사법부를 욕할 땐 정의롭다 하더니, 야당 대표의 유죄를 무죄로 뒤바꾼 사법부를 탓하면 흰 눈부터 치켜뜬다. 사법부는 ‘마치 내가 골프를 친 것처럼 사진을 공개했던데, 조작한 것’이라고 했던 야당 대표의 말에 대해 ‘골프를 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어떠한 단서나 근거도 없다’라고 판단했다.
노자의 도덕경에 이르길, ‘대교약졸 대지약우’(大巧若拙 大智若愚)라 했다. 뛰어난 솜씨는 서툰 듯 하고, 큰 지혜는 어리석은 듯 하다는 의미다. 무려 100페이지나 되는 판결문은 복잡한 법률적 수사로 빼곡하지만, 오히려 진실은 단순하다. 문제가 된 허위사실공표의 여러 핵심 중 하나는 그가 (과거 특정 시점에는) 몰랐다고 주장한 그의 부하직원을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에 있다. 그래서 그가 (예의 부하직원을 모른다고 했던 그 시점에) 부하직원과 함께 이국땅에서 골프를 쳤는지의 여부가 궁금한 거다.
그런데, ‘마치 내가 골프를 친 것처럼 사진을 공개했던데, 조작한 것’이라는 말의 뉘앙스 뒤로 ‘(사진은 조작된 것이니) 나는 골프를 친 적이 없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었다고 느끼는 나의 뇌 구조가 이상한 것인가. 하긴, 우리는 ‘날리면’을 ‘바이든’처럼 들었던 수많은 사람의 청각 구조가 이상하다고 주장하는 세력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굳이 덧붙이자면, 그는 당시 예의 부하직원과 함께 골프를 쳤다.
나의 이상한 뇌 구조보다 더욱 나를 걱정스럽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더이상 사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의 항소심 재판 결과가 불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항소심 판결이 잘못됐다고 하겠지만, 또한 누군가는 그것이 1심의 잘못을 바로잡은 판결이라고 반길 수도 있다.
두 판결 중 어디에 손 드는 것과 별개로, 하나의 사안에 대해, 심지어 새로운 증거나 진술도 없는 상황에서,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린 두 재판부를 지켜 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사법부의 판단은 그저 한 재판부의 생각일 뿐, 그것이 사회정의의 실현이라 믿을 수 있을까. 결국, 재판부가 바뀌면 판단 역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누군가는 재난영화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로맨스물을 좋아하는, 그런 취향의 차이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그런 재판부의 취향에 우리 사회의 정의를 맡겨야 한다. 공연히 마음 한구석이 얹힌다.
사사로이 위법한 군대를 동원했던 위정자의 탄핵심판 선고가 계속 미뤄지고 있다. 헌법재판관들의 취향 차가 엔간해선 좁혀지지 않는가 보다. 이번 선고만큼은 헌법재판관들의 취향이 부디 일반 대중의 상식에 가까운 것으로 모아지길 기대해보지만, 자꾸만 미뤄지는 것이 어째 영 불안하다. 소문도 흉흉하다. 인용에 손들 재판관 6명을 못 채워 선고일을 못 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는가 하면, 헌법재판소 기능을 마비시키기 위해 2명의 재판관 임기가 끝나는 내달 18일까지 선고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괴담도 떠돈다. 헌재 선고가 4월로 미뤄지면서 3월 마지막 주 전국 지표 여론조사에서 헌재의 탄핵심판 과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일주일 전에 비해 7% 가까이 하락했다.
이제라도 하루빨리 위정자의 탄핵심판 선고가 이뤄지길 바란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야당 대표의 대법원 판결도 조속히 진행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 그런 사람을 향해 양비론자라 손가락질한다면, 나는 당당하게 양비론자임을 자처하련다.
2025-03-30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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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너와 나의 거리
1990년대 중반, 처음 미국을 방문했을 때 발견한 가장 큰 문화적 차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였다. 말 그대로 ‘나’에게 타인이 물리적으로 얼마나 가까이 다가오느냐에 관한 것이다. 살면서 그 거리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미국의 어느 카페나 가게 계산대 앞에서 줄을 설 때, 어느 순간 뒤에 선 사람이 일정한 거리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형마트에서도 카트를 부딪거나, 어깨를 툭 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실수로 접촉이 발생하면 꼭 미안하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대한민국에서의 일상이 당연하지 않다는 걸 인지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무언가 이야기할 상황이 생겼을 때도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건네는 매너를 지켰다. 그런 행동들이 사람에게서 받는 스트레스를 많이 줄여 주었다. ‘역시 사는 곳이 넓으니 삶의 여유도 다르구나’라고 생각했다.
인구 밀도가 높은 대한민국에서는 때때로 나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줄을 선 사람이 내뿜는 숨을 고스란히 느낄 지경이었다. 거기서 대화를 하거나 통화를 하면 듣고 싶지 않은 개인사가 어지러이 귀에 들어와 박히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정중하게 “조금만 떨어져 달라”고 말해도 ‘왜 그러냐’는 표정이 돌아왔다.
서양 문화에서 말하는 사회적 거리의 마지노선은 1.2m라 한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개인적인 공간’을 지켜주는 것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관계 유지는 나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며, 무엇보다 개인의 독립성과 사생활 보호를 중시한다.
이후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두 문화에 장단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됐다. 상호 의존적이고 연고주의와 공동체 문화가 강한 대한민국에서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분명 당황스럽게 가깝다. 하지만 그만큼 인간적인 정이 존재했다. 누군가의 가족을 가까이에서 지켜주려는 DNA가 몸속에 흘렀다.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와 인생 이야기를 나누며 가슴이 훈훈했던 적도 많았다. 거리에서 불의의 사고가 나면 누구랄 것 없이 달려와 도와주는 모습이 그 증거다.
네트워킹을 그저 비즈니스 수단이라 여기는 외국인들이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정이 많은 공동체를 가진 K문화를 칭송하는 시대가 됐다. 공동 경제 커뮤니티 속에서 서로 의지하며 팍팍한 삶을 헤쳐가는 모습을 잘 보여준 덕이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갈수록 낯선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등장한 뒤 알고리즘과 SNS, AI라는 말이 상황을 급속히 악화시킨다. 2020년부터 코로나19 팬데믹이 ‘거리두기’라는 차가운 말과 함께 휩쓸고 지나간 뒤에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서로를 밀어내는 자석의 양극처럼 멀어졌다.
설상가상으로 2025년 3월을 지나는 대한민국은 어느 때보다 잔인한 시간을 견디고 있다. 가족과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도 조심스러워서 정치 이야기를 꺼낼 수 없다. SNS에서는 정치적인 토론 자체가 불가능해 보인다. 서로 눈치를 보며 입을 닫는 사이에 심리적인 거리감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어 버렸다. 정치적 양극화가 선을 넘어선 탓이다.
정치는 혐오의 대상이 아니다. 오롯이 우리의 미래다.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어떤 정책이 좋은지 이야기하고, 이를 정치인들이 수렴해 현실화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민주 사회다. 정치 문화 선진국에서는 견해가 다르다고 인간 관계까지 단절하는 경우가 드물다.
알고리즘의 미로에 갇혀 혐오만 하는 대한민국은 미래가 없어 보인다. 그런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일상의 민주주의와 헌법의 가치를 훼손하는 생각과 언행은 비판 받고 배척되어야 하나, 생각이 다르다고 단절을 택할 이유는 없다. 서양식 문화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는 다가오는 사람들을 꽤나 난처한 존재로 여길 테다. 개인 중심의 수평적인 문화가 강해지는 현실에서 공적인 영역에서조차 너와 나의 거리를 무조건 좁혀야 하는 것도 답이 아니다. 그렇다고 역사와 사회적 환경이 만든 가치를 애써 부정할 이유 역시 없다.
가까운 곳에서 서로를 부둥켜 안고 고된 삶을 견뎌온 그 DNA는 분명한 우리의 강점이다. 미국식 개인 존중이 가진 장점을 취하되, 공동체 정신을 온오프라인에서 균형감 있게 발전시키는 것이 더 현명하고 합리적이다. 그런 사회가 미래를 담보한다. 디지털 알고리즘이 주는 편리함 속에서도 우리 사회의 DNA를 품은 아들딸을 길러내는 것 역시 우리의 의무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같이 안 속상해야 더 좋아서’ 누군가를 도왔다는 주인공의 말처럼, 이해하며 공존하는 대한민국이 힘의 근원이다.
박세익 디지털영상센터장 run@busan.com
2025-03-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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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교육감 선거에 대한 단상
아름다운 해변을 끼고 있는 부산은 외지인들이 보기엔 한 번쯤 살아보고 싶은 곳이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전한 금융 공공기관이나 해양수산 공공기관의 관계자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부산에서의 삶에 만족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부산에 혼자 산다는 점이다. 아이들을 비롯한 배우자는 서울에 거주하고 있고, 본인만 부산에 내려와 있다. 물론 미취학 아동의 경우는 부산으로 데리고 오지만, 초등학교 고학년만 돼도 웬만해선 서울에 두고 온다.
아이들을 키우기엔 사교육뿐만 아니라 부산의 공교육도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의미다.
비단 외지인들의 경우만 그런 것은 아니다.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지 의구심이 든다. 단순히 ‘인 서울’ 명문대 입학생 수만을 따지는 게 아니다. 학력 신장만이 아니라 특기교육이나 인성교육 등 특색있는 교육이 필요한데, 그냥저냥 시간만 보내는 교육이 아닌가 하는 그런 의구심.
교육감은 지역의 ‘교육 대통령’이라고 불리는 중요한 자리다. 각 시도의 막대한 교육재정과 교육자치를 책임진다. 부산의 경우 연간 5조 원이 넘는 예산이 배정된다. 올해 부산시교육청의 예산은 5조 3351억 원에 달할 정도다.
교육감 선거는 교육의 자치 및 전문성 강화 등의 요구로 2006년 직선제가 도입됐다. 그전까지는 학교운영위원회가 투표하는 식의 여러 가지 간선제 방식이었으나 대표성이 떨어지고 조직선거나 금권선거 등의 비리에 취약하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변화를 겪었다.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의 교육감 후보 추천은 금지됐다. 부산시교육감 선거는 2007년 2월 첫 직선제 선거가 치러졌다.
하지만 부산시장 선거와 구청장 선거 등 지방선거에서 함께 치러지는 교육감 선거는 상대적으로 유권자의 관심도가 떨어진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해 버린 50대 이상의 유권자, 아이가 없는 미혼의 유권자들에게는 마치 남의 일로 치부된다.
이 때문에 초기의 교육감 선거는 ‘로또 선거’ ‘깜깜이 선거’ ‘묻지마 선거’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후보가 난립하면서 공약이나 인물보다는 투표용지 기재 순서가 당선을 좌우했기 때문이다. 1번 혹은 2번 등 앞번호를 뽑은 후보가 전국적으로 교육감으로 당선되면서 번호 추첨만 잘하면 당선되는 로또 선거로 전락한 것.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자 이후 진영 간 단일화 바람이 불었다. 난립하던 후보는 보수 진영이나 진보 진영이라는 진영 깃발로 모이면서 이념 대결로 치달았다.
로또 선거는 사라졌지만, 교육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정당의 교육감 후보 추천 금지라는 정당공천 배제 원칙은 사실상 유명무실화됐다.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뉜 교육감 후보자들은 특정 정당의 상징색을 입고 다니거나 선거 현수막과 포스터 등에 활용하고 있다.
다음 달 2일 치러지는 부산시교육감 재선거도 예외 없다. 정책이나 인물 대결이 아니라 사실상 이념 대결로 굳어지고 있다. 정책이나 인물 검증은 뒷전이고 진영 간 단일화에 목매달고 있다.
지난 15일 정승윤 후보와 최윤홍 후보가 단일화에 전격 합의함으로써 이번 선거도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양자 대결로 치러질 것으로 보인다. 여론조사 기간 등을 고려할 때 보수 단일화 결과는 오는 23일쯤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선거일인 다음 달 2일까지 열흘도 채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정책 검증이나 인물 검증의 기회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그동안 정책 홍보보다는 단일화에만 목맨 후보들은 교육감 선거를 정치인들의 선거와 다를 바가 없는 이념·진영 대결로 만든 책임이 있다.
2022년 6월 치러졌던 지방선거에서 부산시교육감 선거의 투표율은 49.1%였다. 지난해 10월 서울시교육감의 보궐선거 투표율이 겨우 23.48%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번 부산시교육감 재선거 투표율도 극히 저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지 않아도 이념 대결로 치닫는 교육감 선거가 진영 간 조직 대결로 전개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그동안 매치업이 결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책과 인물 검증에 소홀히 했던 언론도 남은 기간 분발해야 한다. 날카로운 검증의 칼을 들이대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교육감 선거는 아이들이 창의적이고 시민적 소양이 있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는지를 선택하는 문제다.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는 선거로 보면 안 된다. 교육감 선거에 관심을 가져야만, 부산의 교육이 살아날 수 있고 부산의 미래가 희망적일 수 있다.
최세헌 편집국 부국장 cornie@busan.com
2025-03-1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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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공교육,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난주 부산 모든 학교가 새 학기를 시작했습니다. 학생, 학부모 모두 긴장된 한 주 보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특히 초등학교에 첫 발을 디딘 어린이와 엄마, 아빠는 정말 잊지 못할 한 주를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학부모들은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이가 어떤 교육을 받을지 궁금증과 생각이 많으셨을 줄 압니다. 초등학교가 아이에게 많은 지혜와 다양한 경험을 제공해 주길 기대하셨을 것 같습니다. 학부모들은 ‘정말 공교육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최근 한 EBS 한국사 강사가 종편 예능 프로그램에서 한 발언이 화제가 됐습니다. 강사는 섬에서 사는 한 학생이 자신에게 보낸 이메일을 소개했습니다. 학생은 ‘자신도 유명 사교육업체 강사의 강의를 듣고 싶지만, 돈이 없어 EBS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편지에 담았습니다. 해당 강사는 EBS 강의가 한 학생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EBS 강의가 돈이 있는 사람도 들을 수밖에 없도록 질 높은 강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BS라는 질 높은 공교육 체제가 학생 누구나 평등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지난 1년여 간 교육 분야 기자로서, 초등학생 학부모로서 공교육을 바라봤습니다. 공교육이 사교육과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공교육 체제가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사업을 확인했습니다. 지난해 9월 부산 강서구 명지동에 문을 연 늘봄전용학교는 공교육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역할을 본 사례였습니다.
늘봄전용학교는 개별 초등학교에서의 방과후수업 수요를 모두 해소하지 못하자, 여러 학교 학생들이 한곳에 모여 방과후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제2의 학교’입니다. 학생이 모이니 학생 수가 많은 학교에서만 누릴 수 있었던 질 높은 수업이 가능해졌습니다. 덕분에 학생과 학부모의 공교육에 대한 만족도는 높아졌습니다. 늘봄전용학교가 학부모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부수적인 효과도 나타났습니다. 늘봄전용학교 주변 아파트 단지의 전셋값도 덩달아 올라간 것이죠. 별빛 도서관도 공교육만이 할 수 있는 사업입니다. 그동안 밤에는 아이들이 갈 수 없었던 학교 도서관의 문이 열리면서 초등학생들을 위한 도서관이 생겨났습니다. 별빛 도서관은 아이들이 주중은 물론 주말에도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아이가 엄마·아빠와 함께 손잡고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서 책을 읽는 모습, 부산 모든 어린이가 이런 혜택을 누리게 하는 것, 바로 공교육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부산 해운대구에 개교한 부산해군과학기술고 역시 좋은 사례입니다. 해군과학기술고 학생들은 일정 학습 기준을 충족하면 졸업 후 해군 부사관이 됩니다. 학생들이 다양한 꿈을 꾸고, 다양한 진로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역시 공교육이 해야 할 역할이겠죠.
공교육은 사교육과 경쟁해서는 안 됩니다. 공교육은 기존 인프라를 십분 활용해 공교육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부산교육청이 올해 집행하는 예산만 5조 3000억 원이 넘습니다. 울산광역시 전체 예산 5조 1500억 원보다 더 많습니다. 공교육은 이제 ‘현상 유지’를 넘어 ‘도약’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올해 초등학생이 된 자녀를 둔 부모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다음 달 2일 부산교육을 이끌 부산시교육감을 뽑는 재선거가 치러집니다. 오는 13일에는 재선거 후보 등록이 시작됩니다. 보수, 진보 진영 후보 모두 자신이 부산교육을 이끌 적임자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후보들의 말에는 아직 공교육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교육감 후보들은 이제 5조 원이 넘는 부산교육청의 예산을 활용해 공교육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방안을 명확하게 제시하시길 바랍니다. 어린이집부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연령별·학교별로 공교육이 뻗어나갈 수 있는 ‘정책 미세혈관’을 찾길 제안합니다. 사교육 영역에서 하고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공교육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교육만이 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EBS 역사 강사가 언급했듯 돈이 없는 사람도, 돈이 많은 사람도, 사교육을 하지 않는 사람도, 사교육을 하는 사람도 부산교육청의 공교육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교육 체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유권자 역할도 중요합니다. 부산교육감 선거 투표율은 그동안 60%를 넘긴 적이 없었습니다. 내 아이가 더 좋은 공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교육감 후보에게 투표하십쇼. 공교육에 대한 지금의 관심과 열정이 식지 않도록 소중한 한 표를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김한수 편집부장 hangang@busan.com
2025-03-0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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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다시 부각되는 산업은행 이전
산업은행 이전 문제가 최근 다시 화두에 오르고 있다.
부산상공회의소는 최근 산업은행 본점 부산 이전을 위한 산업은행법 개정 촉구 국회 국민동의청원에 나섰다.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2023년 5월 산업은행을 부산이전 공공기관으로 고시했지만, 산업은행 본점을 서울로 명시한 산업은행법 개정안은 더불어민주당의 반대로 국회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 12·3 비상계엄과 그에 따른 탄핵 정국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국정과제로 추진해 온 산업은행의 부산 이전이 사실상 올스톱됐다. 이에 부산상의는 추진 동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산업은행 본점 부산 이전 불씨를 살리기 위해 국회 청원 카드를 꺼내 들었다. 부산상의 양재생 회장은 “정부의 행정절차가 완료된 산업은행 본점 부산 이전이 국회에서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제대로 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는 것에 지역 경제계는 참담함을 느낀다”면서 “국회 청원 방식으로라도 산업은행법이 개정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의 힘을 결집하겠다”고 강조했다.
야권 잠룡 중 한 명인 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지난주 부산을 찾아 산업은행 등 국책 금융기관 이전을 역설했다. 그는 “부산은 금융중심지로 지정됐지만 주택금융공사, 예탁결제원 등 몇 개 기관이 이전한 이후 중단돼 있다”며 “부산 금융중심지에는 정부의 정책 금융 기관들이 모두 와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 지사는 특히 “산업은행 하나 오는 것 가지고도 씨름을 해야 된다”며 반대 기류가 강한 당 내 분위기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정책금융기관은 부산에 집중하고, 민간 금융은 서울에 집중해 발전시키는 쪽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해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조기 대선 가능성에 산업은행 이전 문제가 지역의 주요 이슈로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산업은행 이전이 좌초되다시피 한 것은 부산으로선 어이가 없는 일이다. 2022년 대선 당시 윤석열 대통령이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 이후 국정과제로 추진돼, 당장 실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산업은행 부산 이전은 부산의 산업 구조 재편을 위해 추진돼 왔다. 기존 제조 산업 위주로는 돌파구를 못 찾는 부산 경제 부흥을 위해 산업과 물류 금융 기능을 결합하자는 취지다. 이런 이유로 노무현 정부 때 부산을 국제금융도시로 조성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되고, 이후 일부 금융기관들이 이전됐다. 그러나 기존의 이전 금융기관들이 지역 경제와 연계해 금융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기엔 한계가 명확했다. 이에 부산을 비롯한 부울경에선 지역 개발에 앞장설 수 있는 대형 정책금융기관인 산업은행 유치가 꼭 필요하다고 역설해 왔다. 수도권에 대응하는 또 다른 성장 축인 남부권 성장을 위한 필수 기관이라는 것이다.
민주당도 대선 당시 “수도권 일극주의로는 대한민국의 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며 균형발전을 위한 공약을 쏟아낸 바 있다. 그러나 대선 이후 민주당은 산업은행 이전을 철저히 반대했다. 21대 국회는 물론 현재 22대 국회까지 법 개정 문제는 전혀 진척이 없다. 지난해 4월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부산시당이 산업은행 이전을 1호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중앙당의 반응은 없었다. 지난해 부산지역 선거에서 민주당의 참패는 산업은행 이전과 부산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제정 등에 몽니를 부린 영향도 컸다. 지난해 총선에서 전국적으로 압승을 거둔 민주당은 부산에선 고작 1개 의석을 지키는 데 그쳤다. 지난해 10월 금정구청장 보궐선거에서도 민주당 후보는 40%도 안되는 득표율로 고배를 마셨다. 대권주자 선호도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는 이재명 대표의 지지율이 부산을 비롯한 PK(부산·울산·경남)에서 상대적으로 저조한 것에도 이러한 영향이 있다. 정부와 여당이 하겠다는 것을 막고 있는 민주당에 대한 지역민들의 불만이 많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한국갤럽이 지난달 11~13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장래 정치 지도자 선호도 조사(무선 전화 인터뷰 방식,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P), 자세한 내용 여론조사심의위 참조)에서, 이 대표의 PK 지역 지지율은 23%에 그쳤다. 전국 평균인 34%에 크게 못미쳤다. 또한 이 대표에 대한 ‘적극 반대’ 비율도 PK에서 높게 나타났는데, ‘절대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이 46%에 달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심판 결과에 따라 조기 대선이 올봄 열리게 된다. 이재명 대표가 민주당의 대권주자가 되면, 이 대표는 산업은행 이전과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을 두고, PK 민심을 두고 이번에는 어떤 선택을 할까.
2025-03-0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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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개헌이라는 기회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는 6공화국이다. 공화국의 구분은 헌법 개정을 통해 전면적으로 정치 구조가 바뀐 것을 기준으로 한다. 1987년 개헌을 통해 군부독재를 끝내고 대통령 5년 단임제를 시행한 이후 약 37년 동안 6공화국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개헌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온 것은 10년 가까이 됐다. 급변한 시대적 가치를 담은 헌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직접적인 이유는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한 임기 말과 정치적 혼란이었다. 6공화국 출범 후 총 8명의 대통령 중 5명이 본인이나 자녀가 구속됐으며, 1명은 검찰 조사를 받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대통령들의 불행은 극심한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졌다. 임기 중반 총선을 통해 여소야대 지형이 되고, 권력 변환기에 대통령과 주변은 검찰 수사의 대상이 되는 일이 반복됐다. 협력보다는 권력을 향한 투쟁의 구도가 굳어졌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그 정점에 나타난 현상으로도 해석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심판 이후 개헌 논의는 가속화 할 것이다. 비상계엄 직후 개헌을 먼저 언급 한 여당의 진정성부터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헌정 유린의 내란 공범 정당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개헌 이슈를 내놓았다는 의구심이 거둬질지 지켜볼 일이다.
조기 대선 국면에서 유리한 고지에 선 더불어민주당도 개헌안을 내놓을 것이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 대선 후보 시절 대통령 4임 중임제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당시 개헌의 구체적 시기가 언급되지 않아 신뢰를 얻기 힘들었다. 이번에는 다를까?
개헌을 추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문재인 정부 때 한 차례 경험한 바 있다. 2018년 3월 문재인 대통령은 4년 연임 대통령제를 내건 개헌안을 발의했으나, 한 달 만에 무산을 선언해야 했다. 여야 합의 불발로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례로 볼 때 누구나 개헌의 필요성을 언급하지만, 당리당략에 얽혀 현실적으로 통과가 어렵다는 비관론이 제기된다.
정치적 셈법 뿐만 아니라 개헌 절차의 난관도 만만치 않다. 개헌을 위해서는 우선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고, 국회 의결 후 30일 안에 국민투표를 해야 한다. 국민투표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권자 절반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 투표자 과반 이상의 찬성을 받아야 한다. 폭넓은 국민적 공감대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지금처럼 국론이 극한으로 분열된 상황에서 개헌이 어려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비상계엄선포와 이후 극심한 갈등을 거치면서 개헌은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가 됐다.
전쟁 때나 발동할 수 있는 계엄을 국회와 언론, 그리고 뜬금없이 전공의를 탄압하는 데 사용하려 한 12·3 비상계엄 사태는 국민들이 비상식적인 대통령을 선출했을 때, 대통령에게 계엄 권한을 주는 것이 맞는지 질문을 던진다.
한편으론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고 사법 처벌을 받고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지도 의문이다. 거대 야당이 탄핵과 특검 남발로 국정 발목 잡는 행태가 반복된다면 대한민국은 좌초하고 말 것이다. 기존의 정치적 혼란을 최소화할 권력 구조 개편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무엇보다 한국의 성장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이 기회에 국가 개조의 틀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성장이 멈추고, 결국 국가 소멸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개헌 논의에서 빠져서는 안 될 대목은 중앙 정부에 집중된 권력의 분산, 즉 지방 분권 개헌이다.
수도권이라는 하나의 엔진으로 대한민국의 성장을 더 이상 견인할 순 없다. 수도권과 같은 성장 거점을 지역에도 만들어야 한다. 우는 아이에게 떡 주듯이 중앙정부가 지방에 예산을 나눠주는 형태의 지역균형발전 정책은 더 이상 실효성이 없다.
헌법에 국가균형발전 규정을 강화해 지방정부가 독자적으로 발전 전략을 세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지방정부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하고, 실질적인 입법·행정·재정권을 보장해야 한다.
부울경은 수 년동안 통합을 위한 노력을 진지하게 해 왔다. 현실적으로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수도권에 버금가는 성장 동력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는 지역이다. 그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도록 법 정비가 필요하다.
개헌 논의가 단순히 중앙 정치권의 권력 구조 개편에 머문다면 반쪽짜리 개헌이 될 것이다. 큰 사회적 혼란 속에서 개헌의 공감대가 고조되고 있는 이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야 비상계엄이라는 위기가 국가 성장의 새 판을 짜는 기회가 될 수 있다.
2025-02-2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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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하얼빈 빛낸 '태극전사들'
8년의 기다림 끝에 찾아온 아시아 최대의 겨울 스포츠 축제인 2025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이 8일간의 열전을 끝으로 지난 14일 막을 내렸다.
‘겨울의 꿈, 아시아의 사랑’을 슬로건으로 내건 이번 대회엔 역대 동계 아시안게임 중 가장 많은 34개국, 1200여 명의 선수들이 출전했다. 6개 종목 222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대한민국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16개, 은메달 15개, 동메달 14개를 획득해 종합 2위를 확정했다. 우리나라가 역대 동계 아시안게임 최다 금메달을 획득한 2017년 삿포로 대회(금 16·은 18·동 16개)에 버금가는 성적이다.
대한체육회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경기 단체의 분석 등을 토대로 우리 선수단의 목표 금메달 수를 11개로 잡았는데 태극전사들이 기대 이상의 선전을 펼치며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 특히 이번 대회에서 대한민국 선수단은 삿포로 대회에 이어 종합 2위를 수성해 1년 앞으로 다가온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의 기대감도 더욱 커졌다.
태극전사들의 종합 2위 수성을 이끈 일등공신 종목은 역시 쇼트트랙이었다. 한국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 걸린 9개 금메달 가운데 6개를 수확하며 역대 동계 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최다 금메달 타이기록을 썼다.
1999년 강원 대회와 2003년 아오모리 대회에서도 한국은 6개 금메달을 가져온 바 있다. 한국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6개 외에도 은메달 4개와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어 총 13개 메달을 따냈다.
아시안게임 기록을 두 차례나 경신한 최민정은 한국 여자 선수 최초로 대회 3관왕에 올라 쇼트트랙 강국다운 위용을 뽐내는 데 앞장섰다. 또 지난 시즌 세계 랭킹 1위에 오른 김길리는 첫 국제종합대회 무대에서 2관왕에 등극하는 뛰어난 기량을 과시했다.
다만 쇼트트랙 마지막 종목이었던 남녀 계주에서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다. 남녀 모두 결승선을 앞두고 중국 선수들과 충돌해 메달 획득에 실패한 것이다.
스피드 스케이팅에선 ‘신빙속여제’ 김민선이 예상대로 2관왕을 차지했고, 2005년생 ‘샛별’ 이나현도 처음 출전한 아시안게임 무대에서 2관왕에 오르며 쾌속 질주를 함께 이끌었다. 김민선과 이나현의 맹활약으로 한국 빙속은 금메달 3개, 은메달 5개, 동메달 4개를 따내 쇼트트랙과 더불어 메달 사냥을 주도했다.
특히 한국 빙속의 간판으로 부상한 이나현을 재발견한 것이 큰 성과였다. 이나현은 노원고 재학 중이던 2024년 1월 여자 500m 주니어 한국 신기록, 주니어 세계 신기록을 연거푸 갈아치우며 한국 빙속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그는 조명을 받은 지 1년 만에 출전한 국제종합대회에서 굵직한 성과를 내며 내년 동계 올림픽 전망을 밝게 했다.
설상 종목의 선전도 특히 빛났다. 스노보드 슬로프스타일에서 이채운, 하프파이프에서 김건희가 정상에 올랐고, 프리스타일 스키 하프파이프 우승 후보로 꼽혔던 이승훈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를 비롯해 스키·스노보드를 통틀어 금메달 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6개가 나왔다. 러시아 출신의 귀화 선수 예카테리나 압바꾸모바는 한국 바이애슬론에 사상 첫 동계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안기기도 했다.
하지만 빙속 장거리 종목 세대교체 숙제는 이번 대회에서도 드러났다. 만 36세 이승훈이 여전히 대표팀 장거리 선수들을 이끌었다. 이승훈은 남자 팀 추월에서 후배들과 은메달을 획득하며 역대 한국 선수 아시안게임 최다 메달(9개) 금자탑을 쌓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나를 넘어설 기대주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우수한 선수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국내 훈련 환경이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에서 유일한 스피드 스케이팅장은 낡은 태릉 빙상장뿐이다. 이마저도 철거 이슈가 맞물리면서 제대로 된 보수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피겨 스케이팅에선 차준환과 김채연이 일본 출신 아시아 최고 피겨 스케이터인 가기야마 유마, 사카모토 가오리를 꺾고 극적으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차준환은 이번 대회 금메달로 병역 혜택을 받아 문제없이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올림픽을 준비할 수 있게 됐다.
이제 ‘포스트 차준환’ 찾기는 한국 피겨의 당면한 과제가 됐다. 차준환과 함께 출전한 김현겸은 국제 무대와 큰 격차를 보였다. 어린 유망주가 많은 여자 싱글과 비교했을 때 남자 싱글의 선수층은 너무 얇고 허약하다.
차준환의 컨디션에 따라 한국 피겨 남자 싱글의 성적이 좌지우지될 수 있는 환경이다. 당장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 올림픽 국가별 쿼터가 다음 달에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 결과에 따라 배분된다. 차준환의 몸 상태에 쿼터 확보 수가 달렸다. 대한빙상경기연맹 차원에서 좀 더 전폭적인 지원이 필요해 보인다.
2025-02-1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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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위로와 공감에 인색한 시대
2025년 새해가 시작된 지 40여 일이 지났지만, 올해는 유난히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이 아니다. 국민 일상을 뒤흔든 12월 초 계엄령과 이어진 대통령 탄핵 심판은 진행 중이고 12월 말 무안에서 발생한 제주항공참사도 명확히 해결되지 못한 채 유족은 아픔을 호소하고 있다.
비극적인 상황은 끝나지 않았지만, 한편에선 벌써 대한민국 특유의 조급증이 등장했다. 큰 사건이고 비극인 건 맞지만, 이제 비슷한 이야기 그만할 때가 되지 않았냐는 말이다. 실제로 언론사로 전화해 계엄령, 탄핵, 제주항공참사 같은 기사 대신 밝고 희망적인 기사를 요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물론 올해만 이런 건 아니다. 앞서 겪었던 국가적 참사 때도 모진 말을 쏟아내는 혐오의 목소리가 있었다. 수백 명의 아이를 잃어야 했던 세월호 사건 때도 그랬고 2022년 이태원 참사 역시 그랬다. “인제 그만 하자” “보상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냐” “유족 뒤 특정 정치세력이 의심된다” “죽은 가족 팔아 이득을 보자는 거냐” 같은 주장이 인터넷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예사로 들을 수 있었다. 심지어 유족의 행사에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이들도 있었다. 이태원 참사 당시 유족은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했던 국가, 사고에 대처하지 못한 기관에 대한 원망으로 무너졌지만, “쓸데없이 그런 곳에 왜 놀러갔냐”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더 아팠다고 토로했다.
이번 제주항공참사 역시 유가족 대표는 자신을 향한 악플에 대해 눈물로 호소했다. 실제 유가족이 아니라는 거짓 주장부터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다는 억측이 그랬다. 사망자와 유족을 비하하는 글을 작성한 이들을 찾아내 법적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지만, 여전히 오늘도 인터넷 세상에서 혐오의 목소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 이렇게 공감과 위로가 인색하게 된 걸까. 서종택 고려대 명예교수는 ‘우리는 무엇에 공감하나’라는 글에서 인간이 그동안 추구해 오던 편안하고 고통 없는 문명은 비인간화를 초래했다고 분석한다. 비인간화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는 일명 ‘무통 사회’라는 병리 현상을 낳았다.
서 교수는 마치 지금의 인간은 아픔이나 슬픔이 전이되지 못하는 절연체가 된 것 같다고 표현했다. 형광등의 불빛이 우리를 안도케 하는 것은 불이 켜지기까지 순간의 긴장감에 있다. 스위치를 눌렀을 때 짧은 시간의 깜박거림, 그 감응의 시간이 우리를 초조하게 하지만 마침내 불이 켜지며 경이롭게 한다. 감응하지 않은 센서는 늘 우리를 어둠 속에 서 있게 한다.
인간적인 문명사회를 찾아가다가 비인간화가 나타났지만, 우리는 그 현상과 싸우며 다시 인간화를 회복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아픔을 공유하고 공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감응 연습이 필요하다. 미세한 울림과 떨림에 주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적인 삶이다. 위로와 공감이 인색한 현재, 우리는 다시 감응하는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참사를 대하는 태도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그들의 고통을 헤아려보고 그들의 슬픔을 존중하고 기다려줄 수 있어야 한다. 애도와 슬픔을 끝내는 시간을 타인이 정해줄 수 없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식의 대응은 혐오의 사회를 심각하게 할 뿐이다.
탄핵 심판이 진행 중인 윤석열 정부의 실패 원인 중 하나는 국민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했고 제대로 사과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소통을 통해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정치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과의 소통이란, 국민의 삶에 대한 ‘공감’ ‘이해’ ‘책임’이 전제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참사에 대한 정부의 사과는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 책임감의 발로이자 정부가 피해자에 대해 그런 자세를 가지겠노라고 공식적으로 알리는 결의의 표시다. 그런 점에서 정부의 사과는 말 한마디로 끝내는 일회성 행위가 아니라 후속 실천까지 아우르는 일련의 행위 목록이다. 윤 정부는 이태원 참사를 비롯해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산업재해 희생자 등 정부의 사과를 기다리는 이들과 소통하지 못했고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했다.
‘갈등을 대하는 자세가 한 사회의 실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마다 살아온 삶의 조건이 다르므로 공동체에서 갈등은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개인화가 심해지며 갈등의 형태는 다양해지고 커질 수밖에 없다. 소통과 공감, 위로야말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들이다.
김효정 젠더데스크 teresa@busan.com
2025-02-0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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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투명해야 '산다'
지난해 11월 18일 국회에서 열린 박장범 KBS 사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MBC 기자 출신인 민주당 정동영 국회의원이 박 후보자에게 저널리즘(Journalism)의 어원을 물었다. 16년 선배의 질문에 박 후보자는 답을 못했다.
디우르나(diurna). 매일매일 기록한다는 뜻의 라틴어다. 정 의원은 기록의 기본은 정확성이라고 지적하며 박 후보자가 지난해 초 진행한 윤석열 대통령 인터뷰를 꼬집었다. 김건희 여사가 받은 디올백을 박 후보자는 ‘쪼만한 파우치’라고 말했다. 그때 인터뷰를 제대로 했더라면 윤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처지일까?
저널리즘은 태생적으로 민주주의 편이다. 뉴스를 취재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이 활동은 17세기 계몽운동의 영향으로 싹을 틔웠다. 왕과 귀족 등 지배층이 독점하던 정보를 대중과 공유하면서 공론장으로 자리 잡았다.
대중과 함께했던 기자라는 직업이 요즘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먼저 디지털 쓰나미의 영향이 크다. SNS에 글과 방송이 넘쳐난다. 더 이상 기록이 기자의 전유물이 아닌 세상이다. ‘기레기’라는 조롱이 상징하듯 기자에 대한 인식은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여기에 그 능력을 가늠할 수 없는 기계까지 등장했다. AI(인공지능)는 웬만한 글과 이미지, 그래픽을 척척 만들어낸다. 과연 기자는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기자들은 매일 기사 쓰고, 편집 하고, 사진 찍느라 바쁘다. 하지만 냉정히 봤을 때 다른 누군가가 자기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곳은 ‘레드오션’이다. 또 종이신문은 디지털에 비해 느리다. 따라서 정보가 이미 노출됐다는 가정 아래 깊이와 폭을 달리해야 한다. 무엇을 추구하느냐만큼 중요한 게 무엇을 버리느냐다.
어원이 말해주듯 저널리즘은 아주 단순한 일이다. 기자(記者)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아무 꾸밈도 없이 무덤덤하게 ‘적는 자’라는 뜻이니. 그러나 그 단순함에 심오함이 있다. 매일매일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것은 정확성 외에도 판단력, 통찰력, 성실, 용기, 봉사정신 등 진실을 다루는 자의 자기 규율을 요구한다.
필자가 ‘투명성’(Transparancy) 개념을 처음 접한 것은 2014년 미국 미주리대 저널리즘스쿨 연수 때다. 기사가 생산되는 과정과 근거를 뉴스 소비자에게 투명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객관성’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전직 기자인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이 쓴 〈저널리즘 기본 원칙〉에서도 취재 경위, 취재원, 편견 가능성, 충돌하는 증언, 기자가 모르는 것 등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직’해야 독자가 정보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다는 뜻. 역으로 팩트와 논리가 부족하면 투명할 수 없다.
만약 주변에 신문이나 스마트폰이 있다면 아무 기사나 한번 보자. 과연 실명 취재원이 얼마나 있는가. A 씨, B 사, C 관계자라는 표현이 수두룩할 것이다. 취재원 보호의 필요성이 없는데도 익명을 남발한다. 길게 보면 투명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취재원의 실수나 속임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투명성은 다른 책에서도 발견된다. 칩 히스·댄 히스의 〈스틱〉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사람들 뇌에 쏙쏙 박히게 하는 노하우를 모았다. 그 방법 중 하나로 제시한 것이 ‘검증 가능성’이다. 검증하려면 당연히 근거가 제시돼야 한다. 믿을지 말지는 상대방이 결정하겠지만 검증 가능성 자체가 신뢰를 준다는 것이다.
그동안 기자들은 ‘객관성’(Objectivity)을 굉장히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주관을 배제하고 최대한 객관적으로 사안에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객관성은 종종 변질된다. 기계적 중립성이나 양비양시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논란’ 보도, 기계적 균형, 형식적 요건 흉내 내기 등이 대표적이다.
객관성 원칙은 인간이 본래 객관적일 수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한계를 인정하고 최소한 ‘방법적 객관성’이라도 추구하자는 것. 그 방법이 여러 가지인데 비판기사를 쓸 때 당사자로부터 반론을 듣는 것이 단적인 예다. 하지만 이마저도 잘 안 지켜진다. 언론보도 피해와 관련한 언론중재위 신청을 보면 이유야 어떻든 반론권 보장이 안 된 게 다툼의 주원인이다.
좋은 저널리즘은 좋은 비즈니스일까. 한때 좋은 기사는 돈이 되었다. 그 돈은 다시 좋은 기사를 생산하는 데 쓰였다. 탐사보도 황금기가 경제적 풍요 시기와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종이신문은 자체로 신뢰를 보증했다. 그러나 ‘광고모델’은 예전 같지 않고, 디지털 환경에서는 좋은 저널리즘이 발붙이기 힘들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한 방법은 ‘근본’을 돌아보는 것이다. 매일매일 기록하겠다는 정신, 그 속에 정보와 맥락과 재미를 담아내려는 노력은 저널리즘의 ‘오래된 미래’다. 그게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길일지 모른다. 종이든 디지털이든, 플랫폼이 본질은 아니다.
김마선 페이퍼랩 본부장 msk@busan.com
2025-02-02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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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무엇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2022년 대통령 선거 때 난 투표하지 않았다. 참정권을 얻은 이래 대선을 건너뛴 건 처음이었다. 역대 최고의 비호감 선거, 아무리 양보해도 찍고 싶은 후보가 없었다. 올해는 2년 이른 대선을 치를 것 같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찍고 싶은 사람이 없다.
공수처가 왜 내란 사건을 수사하는지, 토를 다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불감당에 손들고 검찰에 사건을 이첩했다. 신문사 문화부장이 왜 칼럼에 선거 이야기를 하는지, 토를 달 것 같기도 하다. 미리 변명하자면, 지금부터 하려는 것은 선거 혹은 정치 이야기라기보다 남은 연휴 동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은 한 권의 책 이야기다.
미국 하버드대 교수인 스티븐 레비츠기와 대니얼 지블랫이 함께 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국내에 출간된 지 5~6년이나 된 책이 최근 서점가에서 ‘역주행’ 중이라고 한다. 문화콘텐츠 플랫폼 예스24에 따르면, 올 1월 사회정치 분야 베스트셀러 20위권 안에 재진입했다. 지난해 12월의 어느 밤 한국의 민주주의가 한순간에 무너질 뻔한 아찔한 상황을 TV 화면으로 생생히 목격한 사람들이, 도저히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납득할 수 없어 그 이유를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무엇이 한국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가. 물론 최근의 위기는 부정선거 음모와 국회 내 반국가세력의 존재를 맹신하는 극단적 대통령이 불러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한 해답이 될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에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극단주의자는 언제나 존재했다. 다만 과거의 그들은 대체로 정치의 변두리에 머물렀다. 문제는, 이제 그들은 정치의 중심에 서있다는 점이다.
비상계엄 이후 우리는 극단주의자가 권력을 잡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실감했다. 이에 전문가들은 권력자의 권한 축소를 위한 다양한 방법(개헌)에 새삼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나는, 왜 극단주의자가 이처럼 손쉽게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됐는지가 더 궁금하다. 심지어 기호 1 극단주의자와 기호 2 극단주의자의 비호감 대결인 선거도 부지기수다.
책은 극단주의 포퓰리스트들이 어떤 조건에서 일국의 리더로 선출되는지, 선출된 독재자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 여러 나라의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트럼프를 비롯해 극단주의 포퓰리스트들은 어떻게 권력의 중심부에 다가갈 수 있었을까. 책은 이들을 선거 전에 걸러내는 정당의 ‘문지기’(게이트키핑) 기능이 사라진 것을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는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언젠가부터 유튜브에서 극단적 목소리를 내던 사람이 선거를 앞두고 특정 정당에 입당하고 또 공천을 받는다. 정당은 그들(극단주의자)의 가치관이 자당의 정치이념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저 그들 손에 얼마나 많은 열성 표가 쥐어져 있는지를 셈할 뿐이다. 지금의 대통령은 또한 어떠한가. 유튜브 출신은 아니지만, 조국 사태 당시 유튜브 스타 못지 않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 결과, 보수의 이념 따위는 모르겠고 그저 이길 수 있다는 표 계산만으로 보수정당의 대통령 후보가 됐다.
대통령이 구속된 지금도 여전히 많은 극단주의자가 목소리를 높인다. 과격 시민들의 ‘법원 습격’을 애써 옹호하고, 아직도 부정선거와 중국을 연결시킨다. 일부 정치평론가들은 그들을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정치 바보’라며 오히려 걱정한다. 당장은 추종자들의 환호에 취해있지만, 극단의 정치로는 중도를 끌어안을 수 없고, 결국 다음 선거에서 고배를 마시게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혹은 저러다 당내 경선 후엔 슬그머니 중도인 척 할 거라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 중 누군가는 선거철 말바꾸기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극단의 정치로도 얼마든지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거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들의 전망이 마냥 틀렸다고 말할 자신이 나에겐 없다. 당장 최근의 차기 대선 좌우 양자대결 여론조사만해도 그렇다. ‘극단의 경쟁력’이 예전만큼 약해보이지 않는다. 결국 많은 정치인이 극단화되는 것은, 그들이 볼 때 오늘날 유권자 역시 극단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가. 민주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어쩌면 대통령의 극단주의가 아니라, 정치인의 극단주의가 아니라, 우리 안의 극단주의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극단주의자인가. 열에 아홉은 아니라고 대답할 테다. 그러나 그저 ‘나는 (혹은 우리는) 옳고 그들은 틀리다’라는 작은 신념에서도 극단주의는 싹튼다. 우리 안의 작은 극단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경계의 날을 벼리기 위해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다. 어쨌든 이 글은 어디까지나 책 이야기이므로….
김종열 문화부장 bell10@busan.com
2025-01-2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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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비상계엄이 몰고온 어둠 걷어내려면
19일 새벽 국민들은 ‘현직 대통령 구속’이라는 또 하나의 불명예스러운 역사를 마주했다. 윤석열 대통령 극렬 지지자들과 보수 유튜버들은 법치주의의 전당인 법원에 난입해 경찰을 폭행하고 시설물을 파손했지만 일반 국민들은 비교적 차분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듯해 그나마 다행스럽다.
이제 윤 대통령은 법원 구속영장 발부로 서울구치소 3평 독방에서 일반 재소자와 똑같이 생활하며 수사와 탄핵심판에 대응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12·3비상계엄’을 야기한 윤 대통령의 ‘결단’을 이해할만한 그 어떤 단서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답답하다. 최근 페이스북에 공개된 ‘국민께 드리는 글’이 윤 대통령 항변의 가장 최신 버전이다. 글은 윤 대통령이 새해 초 직접 작성했고, 분량도 200쪽 원고지 44쪽에 달한다. 어느 정도 진심도 담겼으리라.
하지만 글을 읽은 이들은 여전히 논리가 황당하고 내용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윤 대통령은 글에서 ‘부정선거’ 주장을 또다시 꺼내며 ‘이 상황을 전시, 사변에 준하는 국가 비상사태라고 판단했다’며 ‘국가 기능을 정상화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계엄 선포 이유를 댔다. 또 극우 유튜버 수준의 상황 설명을 반복하며 ‘증거가 너무나 많다’고 했지만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계엄 성격과 관련,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 ‘소규모 미니 병력으로 초단시간 계엄’이라 규정 지었다. 그러면서 ‘독재를 하고 집권 연장’을 위한 계엄이 아니었다고 항변했다. 이런 주장도 전 국민이 생중계로 무장 군인이 국회 장악 시도에 나서는 위법적 상황을 지켜보고, 공수처와 검찰 수사를 통해 계엄 절차상 위법성이나 무력 사용 지시 정황이 어느 정도 드러난 마당에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수사와 탄핵심판을 마주한 윤 대통령 대응도 국민을 갑갑하게 한다. “법적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과도 다르다. 아니, 모든 절차를 부정함으로써 설득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 듯 보인다. 윤 대통령 측은 헌재 탄핵심판 서류 수취 거부, 공수처 출석 요구 거부, 법원 체포영장 이의신청, 체포영장 거부, 헌법재판관 기피 신청, 공수처 조사 진술·날인 거부, 법원 체포적부심 청구 등 모든 단계에서 ‘딴지’를 걸었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국민들은 여전히 “극우 유튜브에 사로잡혀 망상에 빠졌다” “이 나라에서 가장 많은 정보와 권력을 쥔 사람이 내린 판단이 맞느냐”는 주장에 더 귀기울인다. 보수층에서조차 윤 대통령이 법적 다툼을 포기하고 지지세를 결집해 정치적 해결을 하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헌법과 법률을 잣대 삼아 실체적 진실을 좇아야 할 수사당국과 정치권은 반복되는 헛발질로 국민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다. 초기 수사기관 혼선, 내란죄 수사권 논란 등 우여곡절 끝에 수사의 키를 잡게 된 공수처는 여전히 미덥지 못하다. 수사권 이첩 이후에도 체포영장 발부를 놓고 ‘법원 쇼핑’ 논란을 일으키더니 체포영장 집행 때도 경찰에 손을 내밀고서야 가까스로 윤 대통령 신병을 확보했다. 그나마 법원이 윤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겨우 체면치레는 한 수준이다. 법원 역시 ‘형사소송법 적용 제외’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권은 진실보다는 이해득실 따지는 데에만 혈안이 된 듯하다. 더불어민주당은 강경 일변도로 몰아치며 민생 대신 정치적 이해만 좇는 모습을 보인다는 의심을 자초하고 있다.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고발, 일방통행 식 특검법 발의 등을 반복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탄핵의 시계를 빨리 돌리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윤대통령 사형 선고” 발언이나 ‘카톡 검열’ 논란 등 민주당 의원들의 오만도 더해졌다. 이런 조급함에 국민들은 거꾸로 ‘거대 야당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결국, 지지율이 국민의힘에 뒤지는 여론조사 결과까지 받아들었다.
국민의힘도 6인 체제였던 헌재 구성을 바로 잡으려는 절차를 막아서더니 체포영장 집행을 막으려고 대통령 관저로 몰려갔다. 계엄 사태를 책임지려는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오히려 백골단을 자처하는 청년들의 국회 기자회견을 주선한 일은 어처구니 없었다.
선포부터 해제까지 6시간 만에 결론 난 계엄이지만 후폭풍은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더 늦기 전에 윤 대통령은 사법 절차에 맞춰 ‘헌법 수호 책무’를 지겠다고 결심한 이유를 국민에게 충실히 밝혀야 한다. 사법당국도 차분하고 분명하게 진실을 밝혀나가길 기대한다. 최고지도자와 국가기관의 오판과 실책은 그 파장을 짐작하기도 어렵다. 대통령 구속을 맞닥뜨린 극렬 지지자들은 이미 전례없는 ‘법원 테러’를 감행할 만큼 흥분한 상태다.
2025-01-19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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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돗대산과 무안공항의 눈물
사고 소식을 접하곤 곧장 22년 전으로 되돌아갔다. 소방대원들이 들것을 마주잡고 비탈길을 허겁지겁 달려 내려오던 그날. 모두가 울부짖듯 헉헉대며 돗대산 진흙탕길을 오르내렸다. 봄비에 물러진 산길에 푹푹 빠지는 발을 빼내며 산비탈을 오르다 보니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 동강난 항공기 동체, 매캐한 연기, 숯덩이로 변한 어떤 형체들 그리고 아득한 절규. 2002년 4월 15일 낮의 참혹한 사고 현장이다. 중국 베이징에서 김해국제공항으로 향하던 중국국제항공 CA-129편이 경남 김해시 돗대산에 충돌한 사고다. 승객과 승무원 등 모두 167명의 탑승자 가운데 129명이 결국 비통하게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당시 사회부 기자로서 참사 현장을 취재하며 공감한 울분과 비탄은 마음과 몸 깊은 곳에 고스란히 쌓였다.
조종석에서 살아남아 구조된 당시 30세 중국인 기장 우신루는 사고 기종 보잉767 비행 경력 300시간이 채 되지 않는 초보였다. 사고 원인을 취재하면서 김해공항은 주변에 높은 산악 장애물들이 포진해 상황에 따라 안전성에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공항이라는 사실을 이때 알게 됐다. 악천후 시 고난도 항법이 필요해 항공기 조종사들이 첫손에 꼽는 이착륙이 어려운 활주로였다. 결국 사고는 조종사 과실과 김해공항의 입지적 취약성이 함께 빚은 인재였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인명 희생의 울분은 부산·울산·경남 신공항 요구로 분출돼 가덕신공항으로 이어졌다.
연말 무안국제공항 제주항공 참사 소식에 어딘가 깊이 숨어 있던 아픔이 별안간 되살아났다. 처참한 제주항공 사고 장면들을 대할 때마다 돗대산 사고 모습이 오버랩된다. 혼재되는 경험으로 슬픔과 고통은 증폭된다. 물론 두 사고와 직접 관련된 유가족의 한없는 비통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불길에 휩싸였다 잔해로 남은 무안공항 현장 모습을 바라보기 힘겹다. 현장과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끔찍한 슬픔이 전해져 가슴이 미어진다. 희생자 유가족이 참사 현장을 처음 찾은 지난달 29일의 오열 장면을 접하고선 같이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 전 중국 여객기 추락 사고 희생자 유가족이 돗대산 사고 현장에 처음 오른 날도 그랬다. 유족들은 여객기 동체 아래 잔해를 맨손으로 긁으며 희생자 흔적을 찾았다. 하늘로 간 가족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돗대산 정상 땅바닥을 헤집어 팠다. 장신구 보석 조각과 불길에 훼손된 옷가지 등 유류품을 찾아내며 쓰러졌다.
여객기 참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비극적 사고에 따른 슬픔과 고통이 다시는 없기를 기도만 하고 있기엔 우린 여전히 너무 허술하다. 이번 참사 희생을 키운 것으로 지목되는 무안공항 활주로 끝 콘크리트 둔덕만 봐도 그렇다. 인류는 이미 오래 전 활주로 끝 콘크리트 둔덕 사고를 경험하며 큰 교훈을 얻었다. 2004년 캐나다 핼리팩스공항에 착륙하던 화물기가 활주로를 이탈해 로컬라이저 지지용 콘크리트 둔덕에 충돌했다. 이 사고로 7명이 치명상을 입었다. 캐나다 정부는 사고 이후 공항 활주로 종단안전구역 콘크리트 둔덕을 완전히 제거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나, 우리나라에선 여객기가 콘크리트 둔덕에 충돌해 179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벌어졌다. 미국은 1990년대부터 주요 공항에 항공기 이탈 방지 시스템(EMAS)을 갖추기 시작했다. EMAS는 활주로를 벗어난 항공기 속도를 급격히 줄여 주는 시설이다. 현재 미국 공항 71곳과 대만 타이베이 쑹산공항, 일본 도쿄 하네다공항 등에 EMAS가 완비됐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느 공항에도 이 안전시설은 없다.
늘 지역공항을 비하하는 데 혈안이 돼 지역공항 무용론을 펴는 우리 내부의 적도 국내 항공안전을 위협하는 원흉이다. 제주항공 사고 직후 서울 언론들과 이른바 수도권 ‘항공마피아’ 세력들은 경제성에 토를 달며 지방공항 회의론에 불을 붙인다. 지방공항 한계와 미비점을 지적하면서도 안전성 보완엔 딱히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들의 단골 레퍼토리인 ‘공항 포퓰리즘’ ‘고추 말리는 공항’ 등의 표현은 지긋지긋하다. ‘서울공화국’을 대변하는 서울 언론들은 최근 기다렸다는 듯 특별법에 따라 이미 진행되고 있는 가덕신공항 사업에도 다시 시비를 건다. 국민의 절반이 수도권에 사는 게 사실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지역에 산다. 수도권에만 제대로 된 공항이 필요하다는 건 수도권 중심론자들의 패권적 지역주의일 뿐이다. 이제 무엇보다 무안공항을 비롯한 대한민국 지방공항들의 안전성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다. 부울경 지역의 경우 한층 더 안전한 가덕신공항 운영을 위해 활주로 1본 추가와 너비 확장 등의 과제 해결에 역량을 모아야 할 때다.
2025-01-12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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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항상 깨어 있으라
언론사 경제부장으로서 매일 경제 뉴스를 접하다 보면 요즘처럼 암울한 적이 없다.
긍정적이고 밝은 기사를 골라서 지면에 싣고 싶지만, 그럴만한 기사가 없다. 온통 부정적인 기사뿐이다.
최근 〈부산일보〉에 나온 경제 관련 기사를 살펴보자.
‘정부 “올해 경제성장률 1.8%”…반년 만에 0.4%P 낮춰’ ‘지역제조업 내년 경기 전망 코로나19 수준…4년 만에 최저치’ ‘건설업 생산 7개월째 감소…역대 최장기간 하락’ ‘고환율에 중소기업 비명, 1년 환차손만 10% 넘어’ ‘나스닥 33% 오를 때 코스닥은 23% 추락…한국 증시 1년간 254조 증발’ ‘금융정책 수장들 “올해 불확실성 크다”’ ‘재계 새해 화두 “위기를 기회로”’ ‘강달러에 기름값 12주째 상승’ ‘커피값마저 오른다’ ‘새해 벽두부터 줄줄이 인상…다시 고개 드는 물가’ 등등.
우리나라가 이제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고 올해는 수출마저 부진할 수 있다는 우려부터 그동안 잠잠했던 물가가 고환율로 다시금 요동치고 자영업자들이 줄폐업한다는 전망까지. 우리 모두를 우울하게 하는 기사들로 도배돼 있다.
물론 경기 침체 장기화로 인한 경제 불안은 지난해를 관통한 주제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정부가 간간이 발표하는 경제 정책들로 앞으로 나아질 것이라는 최소한의 희망은 품었다.
한 달 전, 12·3 비상계엄 사태로 빚어진 정국 혼란은 이런 희망마저 앗아가고 있다. 사실, 경제의 가장 큰 적은 ‘불확실성’이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불확실성이 제거된다면 사회는 또 그 방향으로 적응해 간다. 하지만 결과를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은 불안감을 극대화한다.
환율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로 인해 원달러 환율은 1400원대가 굳어졌고, 12·3 비상계엄 사태로 이젠 1500원대 진입이 유력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가 뜨면 환율은 치솟는다. 탄핵이 디폴트값이 됐고, 그에 반하는 것들은 불확실성을 고조시키는 요소가 됐다.
고환율의 문제점은 일부 수출 대기업들엔 고수익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반면 서민층의 생활고를 가중시켜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환율 상승이 수입 가격 상승을 부추겨 물가 상승을 가져오고 서민층에게는 소득 감소 효과를 증폭시킨다. 이 같은 실질소득 감소 현상은 소비 부진으로 이어져 내수 위축을 낳고 있다.
환율이 1500원 선까지 치솟으면 외환 당국이 외환보유액을 이용해 시장에 개입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 외환보유액이 감소하면서 해외 투기 자본의 공격 등이 현실화할 우려가 있다. 문제는 한 번 오른 환율이 이전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역 현안들도 불확실성에 갇혀 있다. 나라를 삼킨 거대 이슈에 매몰됐다. 지난해 1년 내내 공을 들였던 글로벌허브도시특별법, 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 에어부산 분리매각, 복합리조트 건립 등 굵직한 현안들은 올스톱이다. 나라가 혼란스러운데 지역 현안들을 우선적으로 챙길 동력도, 여유도 없다.
탄핵 정국이라는 블랙홀에 경제도, 지역 현안도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불확실성이 언제 해소될지 쉽게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이다.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을 때만 해도 순탄해 보였던 정국은 반성 없는 무리로 인해 갈수록 혼란만 더해지는 느낌이다.
보통 어수선한 분위기의 연말을 지나 새해를 맞이하면 차분해지고 새로운 희망을 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제각각 새해의 목표를 정한다. 국가도 그렇다. 새해를 맞이해 대통령실이나 중앙부처에서는 새로운 경제, 사회 정책들을 발표하고 비전을 제시한다. 국가나 개인이나 그 목표를 향해 또 한해를 나아간다.
그런데 올해는 그 어떤 목표를 세우기가 쉽지 않다. 정부가 그러하고, 개인도 붕 뜬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새해를 맞는 필자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불확실할 때,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 거대 이슈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하찮은 일이라 느껴지더라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은 흔들리지 말고 제 일을 묵묵히 해나가야 한다는 것.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을 가지지 못한 필자로서는 이럴 때일수록 자신의 중심을 잡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가난한 집에는 부모를 공대하는 효자가 나오고, 나라가 어지러워 반역의 무리가 날뛸 때는 그를 반대해 싸우는 충신이 나온다는 옛말이 있다.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각자가 본연의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개인은 단단해져야 한다. 내 중심은 내가 잡아야 한다. 그리고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2025-01-0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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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새해엔 '무해력, 원포인트업, 아보하' 하세요
‘푸른 뱀의 해’라는 을사년이 겨우 이틀 뒤라니….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간다고 느껴지는 세밑이다. 나이 드는 만큼 세월 가는 속도도 빨라진다는 우스갯소리가 허투루 들렸는데, 이제는 매해 체감하는 속도가 진심 다르다.
매년 이맘때면 서점가에 등장하는 책이 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와 소비자학과가 내놓는 〈트렌트 코리아〉다. ‘트렌드 코리아 2025’는 기후감수성(기후 변화의 민감성을 바탕으로 한 소비자와 기업의 태도), 옴니보어(Omnivore·여러 분야에 관심을 갖는 잡식성 소비), 그라데이션-K(단일민족의 정체성을 넘어 다양한 글로벌 문화를 수용하는 한국), 토핑경제(표준화된 기성제품 대신 나만의 취향과 개성을 토핑처럼 덧붙여 강조하는 소비 트렌드) 등 10개의 키워드를 제시했다. ‘아, 내년은 우리 사회가 이런 흐름을 타겠구나’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고 재미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무해력, 원포인트업, 아보하 3가지 키워드는 크게 공감이 됐다.
먼저 무해력(無害力). 작고 귀엽고 순수해서 해를 주지 않는 것들이 사랑받으며, 그 존재만으로 가지게 되는 힘을 뜻한다. 사방이 공격해오는 것만 같은 이 살벌한 세상에서 무해력은 많은 이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다. 올해 초까지 국내에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신드롬을 일으켰던 푸바오가 무해력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겠다.
이와 함께 나다움을 잃지 않는 새로운 자기계발의 패러다임, 원포인트업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더욱 번성할 전망이다.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조금씩 성취하고, 도달 가능한 작은 목표를 세워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성장하는 건데, 올해를 강타한 러닝크루 열풍이 시작점일 수도 있겠다. 꼭 러닝이 아니더라도 하루 단위로 소소한 목표를 이뤄내면서 일상 속에서 성취감을 느끼는 일은 ‘진정한 고귀함은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나보다 나아지고 있는 것’이라는 뜻깊은 표현을 떠올리게 한다.
또, 아주 보통의 하루라는 뜻의 아보하는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을 겪으면서 평범한 일상을 빼앗길 뻔했던 많은 이들에게 널리 회자되고 있는 용어다. 가히 이달의 최고 인기 키워드가 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아보하는 행복의 과시로 변질된 소확행에 대한 피로이자 반발로 읽힌다. 작더라도 확실하게 행복을 추구하고 나아가 그것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과시해왔던 행위는 어쩌면 되레 행복을 방해하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고백하자면 나도 소셜미디어 광풍에 동조돼 ‘예쁜 집밥 사진 쯤은 SNS에 올려야 하지 않나’ 하는 찜찜한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던 것을 반성하게 된다.
2024년은 개인적으로 굵직한 이벤트가 있었다. 연초에는 갑상선암이 발견돼 수술과 입원으로 혼미한 시간을 보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원망의 마음이 일기도 했지만, 차츰 몸 속에 자리잡은 암 조직을 도려내고 제대로 건강을 챙기자는 쪽으로 생각이 옮겨갔다. 고맙게도 수술은 잘 끝났고, 건강식을 가까이 하게 됐으며, 사부작사부작 꾸준히 몸을 움직이는 생활에 재미를 느끼고 있다.
그뿐인가. 보름 전에는 생애 처음으로 돋보기 안경을 맞췄다. 태어나 단 한번도 안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준수한 시력을 자랑했건만, 업무 특성상 근무시간 대부분을 커다란 모니터와 마주하고 있으니 갈수록 눈이 피곤해졌고 차츰 스마트폰이나 책 속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게 됐다. 흰 머리, 팔자주름, 퇴행성 관절염에 이어 노안까지 찾아온 건데, 연거푸 닥친 노화현상이 씁쓸하기도 했지만, 어쩌지 못하는 현실을 그저 평온하게 통과해보자는 다짐으로 정리하고 있다.
뱀의 해, 내년에는(고작 이틀 뒤지만) 올해의 나보다 한두 발짝 정도라도 앞서 나가고자 한다. 코리아 트렌드에 맞게, 나다움을 잃지 않겠다는 것을 기본값으로 두고 말이다. 올해 하루 1만보 이상 꾸준히 걸었으니, 새해에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뛰어보려고 한다. 띄엄띄엄 먹었던 생야채 샐러드는 더 열심히 챙겨 먹고, 올해 겨우 한달 정도 체험 수준에 머물렀던 명상을 다시 시간 내어 시도해볼 생각이다. 스스로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셀프 위로’도 시작할까 한다. 나를 가장 날 알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역시 나일 테니까. 잠자리에 들기 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오늘 하루 감사했던 일, 스스로 잘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양팔로 나를 안아주는 루틴을 만들면 긍정 에너지가 샘솟을 것만 같다.
다시 트렌드 키워드로 돌아가, 독자 여러분께 건네는 새해 인사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 풍진 세상에서 오늘 하루 잘 버텼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잘하고 있는 것입니다(아보하). 작은 일상은 소중할 뿐더러 힘도 세기에(무해력), 오늘 실천할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해 꾸준히 이뤄내면서 여러분 만의 가치를 끌어올리시길(원포인트업) 기원합니다.”
김경희 편집부장 miso@busan.com
2024-12-2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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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비정상의 연속… 대한민국 희망 있나
최근 계엄과 이후 지속되는 어지러운 탄핵 정국에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다시 발견하기는 정말 어려운 것일까. 윤석열 대통령의 생뚱맞은 계엄과 해제 이후 정치권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들은 거의 죄다 납득하기 어려운 것들뿐이다.
여당은 계엄 해제와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당대표를 몰아낸 후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여전히 싸우며 아직 비상대책위원장도 선출하지 못하고 있다. 당 내 탄핵 반대파가 많은 상황에서 친윤(친윤석열)계 원내 중진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추대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탄핵에 찬성하는 국민 여론과 어긋난 행보다. 계엄과 탄핵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친윤계 중진이 원내대표에 이어 비대위원장까지 차지하면 ‘계엄 옹호당’ 이미지를 벗을 수 없을 것이란 비판이 당내에서도 제기된다.
윤 대통령의 탄핵심판을 늦추기 위한 꼼수 행보도 논란이다. 윤 대통령은 지난 12일 담화에서 “비상계엄 선포는 합헌적인 통치행위”이며 “탄핵하든 수사하든 당당히 맞서겠다”고 했지만 그의 공언과는 다른 행보를 보인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 사태를 수사 중인 공조수사본부의 출석 요구에 불응하고 있다. 앞서 공조본은 지난 16일 윤 대통령에 첫 소환 통보를 한 바 있다. 그러나 대통령비서실과 경호처 모두 출석 요구서 수령은 자신들의 업무 소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편을 통해 전달된 출석요구서도 ‘수취 거부’로 반송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공조수사본부는 지난 20일 윤 대통령에게 오는 25일 정부과천청사 공수처로 출석해 조사받으라는 내용의 2차 소환요구서를 보냈다. 윤 대통령이 2차 소환에도 응하지 않으면 공수처가 법원에 체포영장을 청구하는 방안도 검토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또 윤 대통령은 탄핵심판에 넘겨진 뒤 지금까지 헌법재판소가 보낸 관련 서류를 받고 있지 않고 있다. 헌재는 지난 16일부터 탄핵심판 접수 통지서 등 각종 서류를 윤 대통령 측에 우편, 인편, 전자 송달 등 여러 방법으로 보내려고 시도하고 있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관저에 우편으로 보낸 서류는 ‘경호처 수취 거절’로, 대통령실로 보낸 서류는 ‘수취인 부재’로 배달되지 않았다. 헌재는 여러 방안을 검토 중으로, 27일로 예정된 윤 대통령 탄핵 사건의 첫 변론준비기일을 일정 변경 없이 진행한다는 방침이지만, 윤 대통령이 그때까지 대리인을 선임하지 않거나 불출석할 경우 공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에선 윤 대통령이 문형배·이미선 헌법재판관 임기가 끝나는 내년 4월 18일 이후로 탄핵 선고를 늦추려는 시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두 사람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명한 진보 성향 법관이다.
‘침대 재판’은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인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게 따라붙는 꼬리표이기도 하다. 이 대표는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으로 지난달 1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의원직 상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의원직을 잃는 것은 물론 10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돼 대선에도 출마할 수 없다. 이 대표는 1심 판결에 대해 항소했지만, 아직 2심 변호인은 선임하지 않고 있다. 2심 개시를 위한 ‘소송기록 접수통지서’ 수령을 두고도 우편을 통한 자택 송달이 잇따라 불발됐다가 지난 18일에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표는 최근 ‘불법 대북송금’ 재판에서 법관 기피 신청을 했다. 법관 기피를 신청하면 통상 재판이 2~3개월 늦어진다. 이 대표는 지난 7월 수원지법에서 재판하는 이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옮겨 달라고도 신청했다. 이 사건에서 이 대표는 지난 6월 기소됐지만, 공판준비기일만 네 차례 열렸을 뿐 본격 재판은 시작도 하지 못 했다.
이 대표의 지연 전략은 조기 대선 가시화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탄핵 사건은 헌재 사건 접수 후 180일 이내에 선고해야 하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리는 91일이 걸렸다. 윤 대통령이 파면되면 60일 이내에 차기 대선이 열려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을 기준으로 보면 내년 5월 대선이 치러진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강조한 ‘6·3·3 원칙’(1심 6개월, 2·3심 3개월)에 따르면 이 대표의 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확정 판결은 내년 5월까지 나와야 한다. 만약 1심 판결대로 확정되면, 이 대표는 10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돼 대선에 나설 수 없다. 이 대표는 재판을 지연시키며 대권을 잡으려 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계엄을 선포했다는 윤 대통령은 고의적인 심판·수사 지연 의혹을 불식할 수 있도록 책임 있게 행동해야 한다. 이 대표도 재판을 늦춰 조기 대선을 치르려는 꼼수를 더 보이지 말아야 한다.
2024-12-22 [17: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