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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세계적 관심받는 한국 '4B 운동'
8년 전쯤 언론재단의 해외연수자로 선정돼 미국에 1년 정도 산 적이 있다. 그때 지역의 농민이 농작물을 직접 파는 주말 시장을 자주 이용했는데, 나의 단골 가게엔 부모님을 도와주는 친절한 소녀가 있었다. 인사를 몇 번 하고 나니 그녀가 수줍게 한국을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한국을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물으니 ‘BTS’라고 답했다.
빌보드 1위를 비롯해 빌보드 뮤직어워드 3관왕, 전 세계 투어 매진 등 세계 대중음악사에 기록을 세우고 있는 BTS지만, 당시 나는 BTS를 잘 몰랐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방탄소년단’이라는 아이돌그룹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언급한 BTS가 방탄소년단이라는 걸 몰랐다. 자신의 우상 BTS의 나라에서 온 나를 특별하게 생각한 그녀에게 BTS가 누구냐고 물을 수 없었고, “굉장히 매력적인 아티스트다” 정도로 둘러댄 기억이 있다.
이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 BTS가 방탄소년단임을 알 수 있었고, 영어 이름이 방탄이라는 영어단어 ‘bulletproof’가 아니라 한국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 뿌듯했다. 비슷한 사례가 또 있다. 외국 여행을 하다 보면, 유튜브 한국 콘텐츠를 자주 본다는 외국인을 종종 만난다. 어떤 걸 즐겨보냐는 질문에 ‘먹방’이라는 답을 여러 번 들었다. 처음에는 생소한 발음의 영어 단어인 줄 알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더니, 외국인 친구가 대뜸 핸드폰 화면을 보여준다. 이런! 한국에서도 유명한 먹방 유튜버였다. 한국의 ‘먹방’ 콘텐츠는 전 세계인이 즐기고 있었고, ‘먹방’이라는 한국말 자체가 유명해졌다. 먹방에 등장하는 한국 음식에 대해 질문을 하는 외국인을 만나는 건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한국의 인물이나 상품, 사건이 유명해지면, 이젠 한국 단어가 고스란히 세계에서 통용되는 시대이다.
최근 미국 언론의 높은 관심을 받는 한국 단어가 있다. 한국의 ‘4B 운동’이다. CNN,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해 여러 언론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번 대선에 승리한 이후 미국 여성들이 한국 ‘4B 운동’을 주목한다고 보도했다. 언론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X, 인스타그램 등 SNS에도 한국 ‘4B 운동’이 해시 태그로 달리고 있다.
‘4B 무브먼트(4B Movement)’라고 표현한 한국의 ‘4B 운동’이 무엇일까. ‘4B 운동’은 비혼(bihon), 비출산(bichulsan), 비연애(biyeonae), 비섹스(bisekseu)를 말한다. 한국에서 흔히 반대 혹은 아니다라는 뜻으로 단어 앞에 한자어 ‘비(非)’를 붙여 사용하는 사례를 미국 언론이 그대로 언급한 것이다.
미국 여성들은 트럼프 당선인이 백인 보수주의 남성 집단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성 학대 혐의’ ‘재임 시절 구성한 보수 우위 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점’을 고려해, 앞으로 미국에서 여성의 평등권과 자기결정권이 약화될 것을 걱정한다. 특히 Z세대 젊은 여성들이 한국의 ‘4B 운동’은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물론 한국과 비슷하게 미국도 이런 내용을 담은 기사나 SNS에 극우 남성의 과격한 악플이 달린다. 젠더 갈등을 부추긴다는 비난도 있다.
외국에 한국의 ‘4B’가 소개되는 건 반갑지만, 정작 4B라는 것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빠졌다는 점은 아쉽다. 4B는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 미투 운동, 교제 폭력, 성별 임금 격차, 불법 촬영, 경력 단절, 페미니스트 혐오(미러링, 백래시 등) 등 여성에 대한 공격과 차별 속에서 여성들이 불안, 위협을 느껴 생겨난 현상이다. 사회적인 운동의 차원으로 확산시킨 것이 아니다. 한국 여성들은 차라리 데이트나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결정했고, 결혼한다고 해도 출산으로 인해 받게 될 피해를 더 이상 감수할 수 없다는 처절한 아우성이다.
사실 한국조차 4B를 젊은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의 치기 어린 무엇쯤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부가 출생률을 올리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지만, 해결은커녕 매년 출생률이 더 떨어진 건 여성들의 아우성을 잘못 해석한 탓도 크다.
전 세계가 주목한 한국의 4B는 국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고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정부는 아직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동네 통장도 이렇게 오래 비워두지 않는다는데, 이 같은 위기 상황을 다루는 주무 부처, 여성가족부 장관은 270일째 공석이다. 지난달 열린 여가부 국정 감사는 장관 없이 진행된 초유의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2024-11-17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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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아이’가 온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열두 살이었다. 그러니까 1985년 국민학교 6학년 어느 날, 지능을 갖춘 로봇 즉 인공지능(AI)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수업시간에 같은 반 여학생이 칠판 앞에서 들려준 영화를 통해서다.
인간과 기계가 싸우는 미래. 살인 로봇이 과거로 온다. 그의 임무는 인류저항군 지도자의 엄마를 제거하는 것. 그에 맞서 저항군도 그 여자를 지켜내기 위해 인간을 보낸다. 짐작했을 것이다. 명불허전, 〈터미네이터〉다.
로봇은 총을 맞고도 절대 죽지 않고 무표정하게 물건을 부수고 사람을 해친다. 악귀처럼 따라오던 로봇은 결국 공장 프레스에 눌려 제거된다. 이름(Terminator)에 걸맞지 않았지만 인간 입장에선 해피엔딩이었다. 집에 비디오가 들어와 영화를 직접 본 게 2년 뒤다.
40년이 흐른 현재. 시대적 화두가 AI다.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자신보다 똑똑한 존재를 마주한다. 2022년 출시된 챗GPT 덕에 AI의 탁월함과 쓸모를 체감했다. 2016년 알파고가 인간을 꺾었을 때의 충격과는 사뭇 다르다.
올해 노벨상은 AI 잔치였다.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AI 분야 연구자들이 받았다. 전문가들은 대략 2029년이 되면 ‘일반지능’(AGI)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한다. 인간의 명령 없이도 인간 지능을 뛰어넘어 자율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터미네이터〉의 배경이 된 미래가 2029년이다. 우연 치고는 공교롭다.
모 가댓은 자신의 책 〈AI 쇼크, 다가올 미래〉에서 AI가 딥러닝을 통해 인간의 10억 배까지 똑똑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것도 기하급수적으로. 쉽게 말해 인간이 파리라면, AI는 아인슈타인 수준이라는 것. 그는 한때 구글X의 신규사업 개발 총책임자(CBO)였다.
한 달 전 예상을 뒤엎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또 있었다. 한강(53)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이다. 한국 작가로서, 아시아 여성으로서 사상 처음이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 지난달 10일 스웨덴 한림원이 밝힌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다.
그의 작품 중 〈소년이 온다〉를 읽었다. 배경은 44년 전 5월 광주.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들에 대한 문학적 단죄이자, 죽은 자를 위한 초혼제 같았다. 이 작품은 연약한 인간의 몸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붙들린 머리채, 부풀어 오른 뺨, 송곳으로 헤집힌 손톱, 뼈가 드러난 손가락, 흘러내린 창자, 불 타는 몸…. 인간의, 인간에 의한 폭력과 고통의 기록들이다.
인간을 파고든 작가와 AI 연구자가 노벨상을 탄 것은 상징적이다. 이 상은 편리와 파괴라는 다이너마이트의 두 얼굴에 대한 반성으로 제정됐다. 한 작가는 〈소년이 온다〉에서 이렇게 썼다. “인간을 믿지 않는다. 어떤 표정, 어떤 진실, 어떤 유려한 말도 문장도 완전하게 신뢰하지 않는다. 오로지 끈질긴 의심과 차가운 질문들 속에서 살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의심과 질문의 결과일까. 올해 AI 분야 노벨상 수상자들이 AI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동안 인류가 개발한 모든 기술은 통제가 가능했다. 단 하나의 예외가 바로 AI. 달리 표현하자면 인공(人恐) 지능인 셈이다. 인간이 개입하는 순간 제 기능을 못한다는 게 딜레마다.
총칼은 그 자체로 의도가 없다. 하지만 AI는 의도를 가질 테고, 인간은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자율. 이 분야의 혁신적 사업가인 일론 머스크까지 핵무기보다 위험하다고 경고한 이유다. AI는 정녕 판도라의 상자인가.
한편으로 모 가댓 같은 이들은 AI가 곧 인간의 자식이라고 말한다. 아직 ‘아이’ 단계이지만 인간이 제공하는 정보에 좌우될 것이라고 본다. AI가 바르게 커가길 바란다면 인간부터 모범이 돼라는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숱한 전쟁과 살육을 떠올리면 할 말이 없다. AI에 대한 두려움은 곧 인간에 대한 불신과 연결된다.
AI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과연 ‘생명’은 무엇인가. 비생물적 존재인 AI를 생명이라고 볼 수 있는가. AI도 인간처럼 의식과 감정, 심지어 윤리관까지 갖게 될 것이다. 어떤 전문가는 우주에서는 전자적 특성이 지능의 주요 형태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처럼 동물적 특성을 지닌 지능은 과도기적 현상이고, 궁극적으로 ‘생물 이후의 생명’을 전망한다. 생각할수록 놀랍고도 무서운 이야기다.
AI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을 학습한다. 어쩌면 이 글을 포함해서. AI가 통합돼 ‘우주적 지혜’를 갖게 된다면 어떤 거대한 결론에 도달할까. 인간의 득도(得道)에 비춰볼 때 그 역시 생명이고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인간은 더 인간다워야 할 것이다. 인간과 AI의 차원을 넘어 모든 존재의 해피엔딩을 바라며.
PS. 이 글의 첫 문장은 <소년이 온다>에 대한 오마주임을 밝힌다.
김마선 페이퍼랩 본부장 msk@busan.com
2024-11-1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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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사는 곳이 대입을 좌우하는 나라
서울 학생들이 서울 명문대에 훨씬 많이 간다. 부산 사는 학생들은 가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단순하게 인구 비율만으로 따져 봐도 뭔가 이상하다. 2018년 기준 국내 일반고 졸업생 가운데 서울 출신은 16%에 그친다. 그런데 당시 서울대 진학생 가운데 서울 출신 학생 비율은 32%나 된다. 강남은 더하다.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 출신 학생은 국내 4%밖에 안 된다. 그러나 서울대 진학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자그마치 12%에 달한다.
서울 살면 서울대 가기가 훨씬 쉽고 지방에 살면 그렇지 못하다. 예전엔 꼭 그렇지는 않았다는 게 문제다. 1980년대 부산의 주요 고교들은 한 해 서울대에만 수십 명씩 보내며 진학 성과를 놓고 경쟁했다. 많게는 한 학교에서만 한 해 40~60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다. 지금 부산엔 서울대에 한 명도 못 보내는 고교가 수두룩하다. 서울과 비교하면 지역 특목고들의 진학 성과도 영 뒤처진다. 지방 학생은 갈수록 서울대에 가기 어려워진다는, 서울 학생이 더 많이 서울대에 간다는 막연한 현실 인식은 통계로도 정확히 입증된다. 서울대에 진학한 고3 학생 비중은 서울이 2000년 0.90%에서 2018년 1.30%로 0.4%포인트(P) 증가했다. 그 사이 지방광역시는 0.73%에서 0.46%로 0.27%P 떨어졌다.
상위권대 ‘지역별 비례선발제’를 제안해 파장을 일으킨 한국은행의 지난 8월 보고서. ‘입시경쟁 과열로 인한 사회문제와 대응방안’이라는 제목의 37쪽짜리 보고서는 ‘참담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는 가난하지만 잠재력이 높은 지방 학생보다 평범하지만 부유한 서울 학생이 좋은 대학에 입학할 기회를 더 많이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한 보고서는 이렇게 결론 맺는다. 학생의 수학 성적 등으로 판별한 ‘잠재력’보다 ‘사는 지역’이 대학 진학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부산에 사는 공부 잘하는 학생보다, 서울 사는 공부 좀 덜 잘하는 학생이 좋은 대학에 갈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말이다. 보고서는 학생의 △잠재력(학업 능력 또는 지능) △부모 경제력 △거주 지역 등의 요소를 비교해 상위권대 진학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했다. 분석 결과 학생 잠재력보다는 거주 지역과 부모 경제력이 진학 결과에 훨씬 더 중요한 요소로 나타났다. 서울과 비서울 지역 서울대 진학률을 비교했을 때 서울과 비서울 격차에 미치는 영향은 ‘거주 지역 효과’가 92%, 학생 잠재력 차이는 8%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된다. 학생 잠재력과 부모 경제력을 분석한 연구에선 상위권대 진학률 격차에 경제력 효과가 75%, 잠재력 차이는 25% 기여하는 것으로 유추됐다.
학생이 사는 지역과 부모 경제력은 결국 ‘우수한 사교육 환경’으로 모아진다. 서울, 더 좁혀서 강남의 월등한 사교육 환경과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입시 성과로 직결된다는 뜻이다. 결국은 ‘강남 사교육’이 우리나라 대학 입시의 가장 강력한 변수라는 분석이다. 자녀를 우수한 대학에 보내기 위해 부모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서울 입성이다.
보고서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상위권대 지역별 비례선발제는 지역별 학령인구 비율에 따라 신입생을 선발하는 모델이다. 이럴 경우 학생 수준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더불어민주당 백승아 국회의원이 최근 서울대에서 받은 자료를 봐도 그렇다. 지난 2월 서울대 학부를 졸업한 학생 가운데 지역균형전형 출신의 평균 졸업 학점은 3.67점(4.3점 만점)으로 서울대 학부 졸업생 전체 평균 학점인 3.61점보다 0.06점 높다.
국민의힘 박수영(부산 남구) 국회의원이 최근 지역별 비례선발제 시뮬레이션을 통해 지난해 서울대 입학생 수를 조정한 결과를 보면 효과가 체감된다. 서울은 1306명이던 입학생이 603명으로 줄어 703명이나 감소한다. 부산은 147명에서 206명으로 서울대 입학생이 59명 늘어나게 된다. 울산은 50→87명(37명 증가), 경남 133→248명(115명 증가), 대구 173→176명(3명 증가)으로 조정된다. 반면 서울과 함께 대전(22명 감소), 세종(37명 감소)만이 줄고 나머지 지방은 모두 입학생이 증가한다. 박 의원은 “이대로 가면 대한민국은 망한다는 데 공감한다”면서 지역별 비례선발제 공론화에 앞장서겠다고 한다. 한은 보고서는 하버드대 정치학과 앨런 교수를 인용하면서 비례선발제 제안을 마무리한다. ‘앨런은 대학 내 지역적 다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인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점을 언급했다…대학이 인재를 선별하기 위해서는 학생이 성장한 환경을 고려해 학문적 재능 등을 평가해야 하며 출신 지역은 이러한 환경을 반영하는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역설하였다.’ 대한민국의 절반인 지방이 지역별 비례선발제 공론화의 목소리를 얼마나 크게 모아 나갈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2024-11-0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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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특별건축구역이 던진 물음, 마천루와 빈집
지영이가 ‘남천동 아파트’로 이사 간다는 소식에 반 전체에 난리가 났다. 수정동 산복도로 아래 단칸방에 여섯 식구가 살거나 좌천동 조부모 집에 얹혀 자라던 아이들에겐 12층 아파트에 살게 된 지영이가 부러웠을 테다. 지영이는 집에서 고물상을 해 형편이 괜찮던 친구보다 더 부잣집 아이처럼 보였다. 친구 몇몇은 지영이 새 집까지 다녀와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아파트엔 유나백화점 개점 때 처음 타 본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40여 년 전 국민학교 같은 반 친구가 삼익비치타운으로 이사 간 옛 기억을 떠올린 건 ‘부산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 대상지 발표 때문이다. 글로벌 허브도시를 지향하는 부산시가 도시 이미지를 높일 방법의 하나로 꺼내든 카드가 특별건축구역 제도다. 민간 사업자가 세계적 건축가와 손잡고 만든 설계 기획안을 선정해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게 사업 골자다. 최근 대상지 3곳이 선정된 직후, 세간의 관심은 삼익비치타운에 세운다는 최고 99층짜리 마천루에 쏠렸다. 층수, 연면적 등과 함께 프랑스의 건축 거장이 참여한 설계 디자인 정도만 공개됐는데도 연일 화제다. 셈 빠른 사람들은 부동산 시세 분석에 한창이다. 분양가가 6000만~7000만 원에 이를 거란다. 수억 원대 분담금을 조합원들이 감당할 수 있느냐는 걱정인지 질투인지 모를 얘기도 오간다. 집값이 천문학적으로 뛸 것이라는 부러움도 겹친다. 인근 부동산에 급매물이 싹 들어갔다는 보도도 나왔다.
2008년 도입된 특별건축구역은 전국에 수십 곳이 지정돼 있으나 실제 사업 과정에서 지자체와 사업자 간 다툼, 사업 주체 내부 갈등 사례도 적지 않다. 정부도 수년 전 특별건축구역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활성화를 시도하고 있다. 부산시도 이번 3곳을 더해 7곳까지 늘린 특별건축구역 사업을 더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시범사업에 뛰어들었다 고배를 마신 사업자들이 벌써 차기 공모를 준비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99층 건물에 집중된 관심과는 별개로 이번 특별건축구역 공모는 현실적인 숙제들을 남겼다. ‘세계적 건축가가 참여하면 인센티브를 부여한다’는 방식부터 논란이 됐다. 부산에 새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시도는 이해하지만 건축계에서는 ‘거장 권위와 명성에 기대는 행태’ ‘국내 건축가 소외’ ‘지역 정체성 실종’ 등 비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는 다양한 사업자 참여에도 허들이 됐다. 건축비가 치솟은 상황에 거액을 주고 거장을 초빙하는 일은 또 다른 비용 상승 요인이다. 창의적이고 지역 특색을 충분히 담은 건축의 등장을 막는, 또 하나의 ‘그림자 규제’다. 한 공모 도전자는 40억~50억 원의 설계비를 부담했다는 후문이다.
결과적으로 민간 사업자 사업성만 높여줬다는 쓴소리도 있다. 시가 제시한 인센티브는 건축물 높이 제한 적용 배제, 최대용적률 1.2배 이내 적용 등으로 사업자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것들이었다. 최종 경쟁에 오른 후보지 6곳 중 4곳이 40층 이상 초고층 건물 설계안을 제시했다.
이번 공모에는 해운대구와 수영구 등 해안을 개발하려는 사업자들이 주를 이뤘다. 소위 ‘돈 되는 곳’들이다. 최종 경쟁 대열에 든 후보지에 서부산이나 중부산 등 부산 내륙 지역에서 진행되는 사업은 없었다. 공모가 또 하나의 동서 격차의 계기로 작동한 셈이다. 부산 원도심이나 내륙 지역에선 “부산 랜드마크는 해안가 사람들에게만 허락되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하다. 부동산업계에선 ‘삼익비치타운이 메인이고 나머지는 구색 맞추기 아니냐’는 반응도 나온다.
선정 기준을 더 명확히 하고 세분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인다. 이번 공모에도 공공성을 평가하는 별도 체크리스트가 있었고, 심사위원들도 전문가적 식견을 발휘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실제 건축 시 예상되는 문제나 부작용이 충분히 검토됐는지는 의문이 든다. 몇몇 건설사 관계자는 건축비, 시공 어려움 등으로 99층 건물이 제대로 지어질 수 있을지에 고개를 내저었다.
빈집 문제에 대한 고민이 오간 일은 다행스럽다. 엠브이알디브이(MVRDV)의 위니 마스가 설계한 관광숙박시설 ‘영도 콜렉티브 힐스’다. 수직적 고층건물을 포기하는 대신 1~3층짜리 블록 형태의 수평적 건물들을 지어 작은 마을을 이루겠다는 계획이다. 그것도 영도의 경사지 3119㎡ 땅에 말이다. 심사위원들도 빈집 문제에 새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평가를 내놨다.
부산시가 첫 시도의 긍정적 결과는 살리되, 더 명확한 특별건축구역 사업 방향을 찾길 기대한다. 부산 전역을 더 골고루 나누고, 창의적이면서도 지역 특색을 살린 아이디어를 찾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랜드마크 몇 개가 더 생겨 관광객은 찾아오더라도 지금대로라면 남천동 아파트로 이사 가는 ‘수정동 지영이’를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들이 현재 머무는 곳을 바꾸려는 공동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2024-10-27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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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희망 고문’ 언제까지…
조금 시간을 거슬러 올해 1월 1일로 돌아가 보자.
〈부산일보〉 1월 1일 자 1면 톱 기사 제목은 ‘솟아오른 청룡의 해, 부산이 다시 뛴다’이다. 이어 이날 사설 제목은 ‘새해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의 비상 견인하자’이다. 제목만 봐도 내용에 대해 감이 오겠지만, 2023년 말 엑스포 유치 실패를 딛고 새해엔 글로벌 허브도시로 새롭게 도약하자는 거다. 1월 2일 자 1면 톱 기사 제목은 ‘지속가능 도시 향한 부산 대개조 서막 올랐다’이다. 신년 기획 시리즈 주제를 ‘리뉴얼 부산’으로 택했다. 부산을 리뉴얼하기 위해 분야별 최대 현안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 등을 집중 해부했다.
기사의 내용 중 핵심적인 것만 추려보면 저출생, 청년 유출, 고령화 등을 유발하는 부산의 낡은 시스템을 올해는 싹 바꾸는 시작점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부산의 최대 현안인 글로벌 허브도시의 초석을 다지며 북항재개발 조속 추진, 가덕신공항 적기 개항, 산업은행 부산 이전, 에어부산 분리 매각, 복합리조트 건립 등에 대해서도 총망라돼 있다.
10개월 전에 나온, 오래된 기사를 굳이 이토록 자세히 언급하는 이유는 어쩌면 내년 초에도, 혹은 내후년 초에도 신년 기사로 읽을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독자 입장에서는 해마다 되풀이되는 기사도 새롭게 다가오고, 또 그래서 필자를 비롯한 기자들도 비슷한 내용들을 쓰기도 하고, 신문도 팔리고 있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하더라도 몇 년째 되풀이되는 주제를 앵무새같이 말해야 하는 것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이전 몇 해 전부터, 그리고 올해 들어 10개월 동안 ‘감감무소식’ ‘불발’ ‘차질’ 등의 부정적인 제목인 달렸던 기사들의 대부분은 부산의 최대 현안이라고 불리는 것들이었다.
엑스포 유치 실패 이후 그나마 부산 시민의 동력을 모을 거라 기대했던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은 금방이라도 입법화가 될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10개월 동안, 130여만 명의 시민 서명을 받는 등 발버둥을 치고 있지만 국회 통과는 미지수다. ‘민주당의 반대’라는 공통점에서 산업은행 본사 부산 이전도 진전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부산항 북항재개발은 대역사인 만큼 곳곳이 암초다. 북항재개발 2단계 사업은 추가 사업비 문제로 참여 기관들이 사업 타당성 검토에 다시 나서면서 사업계획 수립 용역이 중단된 채 시간만 끌고 있다. 벌써 마무리돼야 했을 북항재개발 1단계의 화룡점정인 랜드마크 부지는 결국 최근 원점 재검토로 재용역에 착수한 상태다. 랜드마크 부지를 비롯한 북항재개발 일대에 복합리조트를 건립해야 한다는 안도 답보 상태다. 부산 상공계에서는 일본과 인천 등의 사례를 들며 외국자본과 관광객 유치를 위해 복합리조트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부산시는 랜드마크 부지에 대한 별다른 대안도 없으면서 복합리조트 건립에는 시큰둥한 반응이다.
에어부산 분리 매각 문제도 하세월이다. 아시아나항공의 주채권자인 산업은행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고, 실제 소유주인 대한항공은 부산시와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대통령실 등 정부에서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 듯하다. 부산 거점 항공사 확보가 시급한 상황에서 이처럼 에어부산 분리 매각 문제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부산시는 거점 항공사 지원 조례를 만들어 놓고도 제대로 된 예산조차 책정하지 않고 있다.
그나마 가덕신공항 건설은 다른 사안에 비해 나은 편이다. 부지 조성공사 입찰이 4차례나 유찰됐지만 현대건설 컨소시엄과 수의계약을 맺고 내년에는 착공에 들어갈 예정이다. 물론 유찰 과정에서 시간이 지체되며 조기 개항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같이 부산의 현안들이 지지부진한 것은 전적으로 부산 정치권과 부산시의 책임이다. 시민들은 모든 힘을 몰아주고 있지만 이를 결집해서, 맨 앞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주체들이 제 할 일을 못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야를 둘러싼 정국이 꽁꽁 얼어붙은 상황에서, 지역 차원에서 어쩌겠느냐는 항변도 다소 공허하다. 틈새를 노려 지역 현안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력이고 정무 능력이다.
양비론은 지양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부산의 현안을 둘러싸고 국민의힘은 나태하고 무능하다. 민주당은 우유부단하고 무심하다. 부산시는 이를 돌파할 역량이 부족해 보인다. 이런 상황이라면 올해 남은 2개월도 무의미하다. 부산이 나아질 것이라는 끝없는 ‘희망 고문’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어김없을 듯하다.
부산 정치권과 시의 각성이 절실하다. 올해 내가 시민들을 위해 무엇을 하나라도 했나, 둘러보라. 이것저것 핑계 대고 변명만 할 게 아니라 자기반성부터 먼저 하라. 언제쯤 ‘고문’이 빠진 희망의 기사로 채워질까.
2024-10-20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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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침례병원 정상화 공약을 지켜보며
보궐선거 이슈로 부산 금정구가 시끌벅적하다. 초반에는 조금 잠잠하다 싶었는데, 민주당과 조국혁신당이 후보 단일화를 결정하면서 지난주는 내내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11~12일 주말 사이 끝난 사전투표 참여율은 20.63%로 높게 기록됐다. 전국의 다른 3곳의 선거구에 비하면 저조한 감이 없지 않지만, 금정의 높은 사전투표율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오는 16일 본투표까지 얼마나 열기를 더해갈지 관심을 모은다.
특히 이번 보궐선거 기간 동안 이재명, 한동훈 두 여야 대표는 경쟁하듯 부산 금정구를 찾아 김경지, 윤일현 구청장 후보에 대한 지지 유세를 이어가고 있다. 양당은 각각 정권 심판에 힘을 실어달라고, 다시 한번 보수에 기회를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 여야가 공통적으로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침례병원 공공병원화’ 공약은 어쩐지 마음이 쓰인다. 또다시 무위에 그치는 허무한 약속은 아닐지 못내 의구심이 드는 탓이다.
침례병원은 서부산에서 살았던 기자의 기억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동구 초량동에 병원이 있었을 때는 맹장이 터져 응급수술을 받았던 고교 동창을 위로하러 가기도 했고, 중앙대로 변에 위치해 있어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늘 익숙하게 보아오기도 했다. 1999년 금정구에 새 건물을 지어 이전한 이후에는 어쩐지 가장 좋은 시설과 훌륭한 인력으로 가동되는 것 같아 ‘이 동네에 이렇게 큰 병원이 생겨서 여기 사람들은 참 좋겠구나’라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튼튼해 보이던 병원은 2017년 초부터 휴업을 연장하다가, 결국 그해 7월 파산했다. 병원의 휴업 사실을 우연히 접하고 첫 보도를 한 기억도 생생하다. 그해 내내 법원의 파산 선고, 정상화를 위한 토론회, 금정구민들의 서명운동, 정부가 나서줄 것을 촉구하는 청와대 앞 집회 등등 침례병원을 되살리기 위한 움직임을 주시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영 병원 또는 국립치매센터로 탈바꿈해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병원으로 정상화를 이루게 해달라는 지역민의 바람을 지난 정부가 끝내 별다른 응답 없이 외면한 것도 안타깝게 지켜봤다.
침례병원 정상화 문제는 이후 수년 간 진척이 없었다. 잊혀진 듯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 2021년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나선 박형준 당시 후보가 공약으로 내걸며 다시 이슈로 떠올랐다. 그가 당선된 후에는 윤석열 대통령 인수위원회가 부산의 15대 정책과제에 포함시켰고, 뒤이어 2022년에는 499억 원을 들여 병원 부지를 사들이는 계약을 체결했다. 최근 국감에서는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침례병원의 보험자병원 설립안을 연내에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에 상정하겠다”고 발언했다. 드디어 병원 정상화에 ‘청신호’가 켜졌다며 부푼 기대가 다시 확산되고 있다. 침례병원의 보험자병원 설립안은 지난해 12월 건정심에 상정됐지만, 심사가 이뤄지지 못하고 현재 소위원회에 머물러 있다. 이번에 건정심에서 이 안건이 통과(의결)되면 부산 침례병원은 비수도권 최초의 보험자병원 설립 절차에 돌입할 수 있다.
부산에 공공병원 하나 생기는 걸 두고 뭐 그리 호들갑이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십년 째 평균 기대수명 최하위, 노인인구 비율 최고치를 보이고 있는 부산은 이미 고령사회에 진입해 건강 이슈가 결코 가볍게 체감되지 않는다. 건강은 더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공적 책임이 필요한 사안이다.부산시도 이를 인지하고 부산의료원에 이어 2028년 서부산의료원 개원을 준비하고 있다. 여기에 침례병원까지 보험자병원이라는 새로운 모습으로 문을 연다면, 의료 안전성과 전문성이 확보될 뿐만 아니라 부산 전체의 의료 여건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다. 더욱이 열악한 지방 재정을 투입하지 않고 국가 재정으로 운영돼 부산으로서는 엄청난 의료 자산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 때문에 더더욱 이번 보궐선거에서 정치권이 공언한 침례병원 정상화 공약이 더 큰 무게감을 갖는다. 이들의 약속이 그저 가장 가려운 곳을 긁어주겠다고 말하면 선거에서 표를 더 받을 수 있다는 낡은 인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길 바란다. 금정구민은 여전히 이 공약을 냉소적인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약속에 대한 기대만큼 약속이 또다시 뒷전으로 밀려날 때 일어날 매서운 후폭풍도 감당해야 한다.
출근길에 침례병원 입구를 둘러보고 왔다. 진입로를 가로막고 있는 철제 펜스가 이번에는 걷힐 수 있을까. 7년 전 퇴직금과 체불 임금을 끝내 정산 받지 못하고 일터를 떠나야 했던 병원 종사자들, 병원 정상화에 목청을 높였던 당시 금정구의회 의원들,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와 시민단체 관계자들, 부산대병원 교수님들까지 많은 이들의 얼굴이 스쳤다. 지금 그들은 정치권의 침례병원 정상화 공약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2024-10-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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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유권자 고민만 더 커진 고약한 보궐선거
10·16 재보궐선거가 일주일여 앞으로 다가왔다. 영남에서 유일하게 선거를 치르는 부산 금정에는 여야 지도부 방문이 잇따르지만, 유권자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지난 4월 총선보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피로감은 더 커졌다. 입법 독주를 멈출 줄 모르는 야당은 부산에 관심이 더 없어졌고, 김건희 여사 리스크와 당정 갈등에서 헤어나오질 못하는 여권은 더 무기력해졌다.
기초단체장을 새로 뽑는 금정은 부산의 대표적인 보수 강세지역이어서 이번 전국의 재보궐선거에서 그리 주목도가 높은 지역은 아니었다. 지난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압승한 전국 선거 결과와는 달리 부산에선 국민의힘이 18개 선거구 가운데 17개를 휩쓸었다. 불과 6개월 만의 선거인데다 금정이 부산의 대표적인 여권 강세지역인 것을 감안하면,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질 것이란 것이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실제로 역대 선거에서 야권 바람이 거세게 분 2018년 지방선거를 제외하면 여권이 금정에서 모두 압승했다. 지난 총선에서도 국민의힘 백종헌 의원이 56.6%의 득표율로 민주당 박인영 후보(43.4%)를 13%포인트 넘게 따돌리며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지지율이 동시에 정부 출범 후 최저 수준으로 하락했다는 여론조사가 잇따르자 여권 내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선 윤 대통령뿐만 아니라 국민의힘의 전국 지지율도 30%를 밑돌기도 했다. 부산·울산·경남에서도 윤 대통령 국정 운영 평가에 대한 부정 응답 비율이 긍정보다 월등히 높다.
21대에 이어 22대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법안 강행 처리→대통령 거부권 행사→재표결 후 법안 폐기’의 도돌이표 국회에 대한 피로감에 더해 특검법을 둘러싼 김건희 여사 리스크는 여야 표대결에서는 물론, 민심도 임계점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실은 마이웨이를 고집하고 있고 당정은 독대를 둘러싼 갈등 국면에서 헤어나오질 못한다. 사전 조율 없이 독대를 요청했다는 내용을 언론에 먼저 흘리는 한 대표 측이나, 곧바로 불쾌한 반응부터 보이며 만남을 외면하는 대통령실의 한심한 모습에 지지층도 등을 돌리는 모습이다.
부산을 비롯한 PK(부산·울산·경남)는 지난 총선에서 여권에 개헌 저지선을 지켜준 구세주 같은 지역이었지만, 이 지역 민심도 예전만 못하다. 월드엑스포 유치와 산업은행 이전 등 이번 정부가 약속했던 부산 발전 공약 중에 이뤄진 것은 거의 없다. 최근엔 여권 일각에서도 쉽게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분석이 나온다. 만약 국민의힘이 금정에서 패할 경우 여권의 자중지란은 가속화될 수 밖에 없다. 인천 강화까지 기초단체장 선거 4곳을 모두 패하는 경우 책임론을 둘러싼 당정의 갈등은 극에 달할 전망이다.
부산에서의 민주당 상황도 국민의힘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여당에 실망한 유권자들이 민주당에 쉽게 표를 주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지난 총선에서 전국적 완승에 도취된 탓인지, 참패 수준의 부산 선거에 대한 복기가 전혀 없다. 당시 수도권에 공을 들이며 부산은 외면했다. 산업은행 이전과 글로벌 허브도시 특별법 등 부산의 핵심 현안은 민주당 지도부에 철저히 막혔다. 18석 중 고작 1석을 건진 총선 이후 부산 민주당의 상황은 더 나빠졌다. 친명(친이재명) 일색의 지도부가 꾸려져 친노(친노무현)·친문(친문재인) 도시였던 부산도 친명 색채가 강화되면서, 양 진영의 분열이 가속화되는 양상이다. 친노·친문 일부는 이미 조국혁신당으로 노선을 바꿨고, 이 대표 사법리스크 현실화 이후를 고민하는 야권 인사도 부쩍 늘었다.
이 와중에 친명 핵심이자 지난 국회에서 산업은행 부산 이전 반대 최선봉에 섰던 김민석 최고위원은 최근 부산을 찾아 궤변 수준의 ‘책임 떠넘기기’로 빈축을 사기도 했다. 산업은행법 개정안 통과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는 오세훈 서울시장을 뜬금없이 끌어들인 것이다. 국민의힘 당론인 산업은행법 개정은 김 최고위원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들의 반대로 지난 국회부터 수 년째 막혀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권 심판과 탄핵을 외칠 뿐 부산에 대한 메시지는 찾아볼 수 없다. 그나마 6일 조국혁신당과 야권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여권과 맞대결이 성사됐지만, 단일화가 결코 본선 승리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이미 균열이 생긴 야권 지지층을 대거 투표장으로 향하게 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부산 금정을 비롯해 인천 강화, 전남 영광·곡성 기초단체장 4명과 서울시교육감 1명을 뽑는 이번 ‘미니 재보선’은 누가누가 더 못하나 싸움이다. 당을 보고 판단하는 대다수 유권자들은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고약한 처지다.
2024-10-06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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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딥페이크 성범죄와의 전쟁
지난 26일 국회에서 딥페이크 성범죄 처벌을 강화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이 통과했다. 제작 때 처벌 최고형을 5년에서 7년으로 늘리고, 시청하거나 소지, 구입, 저장 때에도 3년 이하 징역으로 처벌할 수 있도록 했다. 청소년 성보호법 개정안을 통해서는 성착취물을 이용해 아동 청소년을 협박 강요했을 때 처벌하는 조항도 만들었다.
전국의 딥페이크 성착취물 피해 학교 명단이 SNS에 유포된 지 한달 만의 일이다. 올해 초 미국의 유명 여가수 테일러 스위프트의 딥페이크 성범죄물이 전 세계적으로 공분을 산 후, 국내서도 피해 소식이 간간이 전해졌다. 같은 학교 학생이나 교사의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만들어 판 고등학생이 경찰에 잡히거나 대학별로 여학생들의 딥페이크 성착취물이 공유된다는 보도들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서 이 신종 성범죄의 심각성은 공유되지 않았다. 그 사이 텔레그램에서는 ‘지능(지인능욕)방’, ‘겹지(겹지인)방’이 20만 명 넘는 회원 수를 자랑하며 활개를 쳤고, 피해자는 늘어만 갔다. 그러다 8월 말 한 중학생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딥페이크 성착취물 피해 학교 명단이 X(옛 트위터) 등에 공유되면서 전국의 초·중·고교는 발칵 뒤집혔다.
명단에 포함된 학교 학생을 포함해 많은 10대 여학생은 혹시나 자신도 피해를 입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텔레그램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동안 피해자인 줄 몰랐다가 그제야 피해를 인지한 학생들이 속출했다.
언론에서는 연일 딥페이크 성범죄물에 대한 보도가 이어졌고, 교육청과 경찰청에서는 긴급 TF팀을 만드는 등 대책을 쏟아냈다.
국회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은 한 달 동안 딥페이크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결과물이다. 처벌 사각지대를 보완했다는 점에서는 한발 전진한 것이긴 하지만 이번 법 개정만으로 딥페이크 성범죄에 면밀하게 대응하기는 부족하다.
우선 사법부의 처벌 의지가 뒷받침 되어야 한다. 딥페이크 성범죄는 그동안 법이 있어도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졌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딥페이크 성범죄자 확정판결을 받은 112명 중 실형은 43명에 불과하다는 통계도 있다.
게다가 딥페이크 성범죄 가해자의 대부분이 10대로, 상당수가 형사 처벌이 아닌 보호처분 대상이다. 형벌의 강화만으로는 범죄 예방은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현재처럼 학교 폭력 예방 교육 중에 스쳐 지나가듯이 실시하는 것으로는 교육 효과를 크게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딥페이크 범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느끼는 피해 정도가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가해자는 단순한 놀이로 생각하지만 피해자는 인격 말살을 경험한다. 이 둘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는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는 공감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플랫폼 기업의 불법 행위 방조에 대한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 이번에 문제가 된 텔레그램은 2019년 불법촬영물을 공유하는 N번방 사건으로 성범죄의 온상이라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성범죄뿐만 아니라 마약, 사기 등 각종 범죄 도구로 활용되지만 그동안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다. 규제를 강화했다가 관련 산업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보듯 디지털 범죄 특성상 피해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에 강력한 대응책이 필요하다. 텔레그램은 2021년부터 1000명 이상 가입한 채널에서 광고 수익이 발생하면 채널 운영자에게 수익의 50%를 주는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채널 가입자 유치에 딥페이크 성착취물은 좋은 미끼 상품이다. 딥페이크 성착취물이나 이를 만들어주는 AI 로봇 프로그램을 공유하면 보상을 해주기도 한다. 텔레그램은 단순한 메신저를 넘어 범죄로 수익을 벌어들일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불법은 온라인에서도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적용해 자체적인 필터링 권고와 범죄 발생에 대한 경고, 그리고 경고 누적에도 변화가 없을 땐 국내에서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조치까지 단계적으로 대응 수위를 높이는 규제가 필요하다.
AI 기술의 발달로 탄생한 딥페이크 성범죄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각종 범죄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것처럼, 딥페이크라는 새로운 기술을 입은 성범죄의 역사도 이제 시작이다. 딥페이크 성범죄가 여성의 성착취를 재미로 인식하는 성문화를 바탕으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는 성범죄 산업의 고전적인 문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은 이 신종 범죄와 싸움이 지난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10대 아이들이 주된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는 딥페이크 성범죄의 출현은 오래된 성범죄와의 전쟁에 우리 사회가 더욱 단호해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2024-09-2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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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기억하겠습니다, No. 11 최동원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낸 ‘불멸의 무쇠팔’ 고 최동원 감독의 13주기 추모 행사가 지난 14일 부산 동래구 사직구장 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한화 이글스의 류현진도 참여해 은사인 최 감독의 동상 앞에 헌화하고 묵념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괴물 투수’ 류현진과 ‘무쇠팔’ 최동원의 인연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화 1군 투수 코치였던 최동원은 스프링캠프부터 류현진의 가능성을 꿰뚫어 보고 김인식 전 감독에게 반드시 선발 투수로 기용할 것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최동원의 안목은 정확했다.
류현진은 데뷔 첫해 18승6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23을 올려 신인왕과 최우수선수(MVP)를 석권, 한국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투수로 성장했다. 2006년 여름 최동원은 시즌 도중 2군 투수 코치로 보직을 옮겼고, 2007년부터는 2군 감독직을 맡았다. 2008년을 끝으로 프로 지도자 생활을 마감했고, 지병인 대장암이 재발해 2011년 9월 14일 하늘의 별이 됐다.
최동원 동상이 건립된 건 그가 세상을 떠난 2주기인 2013년 9월 14일이었으며, 이때는 류현진이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 진출한 첫해였다. 류현진은 이후 MLB에서 활약을 이어가다가 올해 한화에 복귀한 것이다. 최동원은 롯데의 영웅인 것과 동시에, 이처럼 한화와도 인연이 깊다.
최동원의 ‘무쇠팔’ 본능은 고교·대학·실업 선수 시절에도 빛을 발했다.
경남고 2학년 때인 1975년, 황금사자기대회에서 당시 2관왕을 기록 중이던 최강 팀 경북고와의 경기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후, 바로 그 이튿날 선린상고와의 경기에서 8회까지 노히트노런을 기록하는 경이적인 투구를 선보였다. 3학년 때는 청룡기대회 승자 결정전에서 ‘해태 타이거즈 전설’ 김성한이 주전이었던 군산상고와의 경기에서 9이닝 동안 20개의 탈삼진을 잡고 완봉승을 거뒀다. 이어 최종 결승전에서 다시 마주한 군산상고를 상대로 12개의 탈삼진으로 완투승을 기록하며 청룡기를 거의 혼자 힘으로 제패하는 괴력을 발휘했다.
연세대 재학 시절인 1978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때 동아대와의 준결승전에서 나중 롯데에서 주전 투수로 활약한 임호균과의 1박 2일에 걸친 18회 연장 승부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14회까지 양 팀은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돼 다음 날로 경기가 이어졌다. 결국 최동원의 연세대는 김봉연의 솔로 홈런으로 1-0 신승을 거뒀다. 최동원은 같은 날 곧바로 열린 성균관대와의 결승전에도 선발로 등판해 9이닝 완투를 했다. 이틀 동안 무려 27이닝, 투구 수 375개에 12피안타, 33탈삼진, 2실점을 기록한 끝에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당시 최동원의 투혼이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는지, 상대 팀이었던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성균관대 감독이 경기 후 마운드에 올라 최동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할 정도였다고 한다.
최동원은 연세대를 졸업하고 당시 최고 수준인 3000만 원의 계약금을 받고 1981년 실업야구 롯데 자이언트에 입단했다. 그때부터 롯데 자이언트의 에이스가 됐는데, 특히 입단 당시 코리안시리즈 6경기 중 6경기에 모두 등판해 팀을 우승으로 견인한 일화는 아직까지 유명하다.
1981년 롯데 자이언트가 소화한 팀 전체 이닝이 36경기 324이닝이었는데, 그 중 206이닝을 신인이었던 최동원이 책임졌다. 그는 17승4패라는 아주 좋은 성적을 기록하며 팀을 코리안시리즈에 올려놓았다. 당시 상대 팀은 삼성 라이온즈를 대표하는 ‘프랜차이즈 스타’ 김시진, 장효조 등이 포진한 육군 경리단이었다. 롯데가 6차전 끝에 3승2패1무로 승리했다. 롯데의 우승과 더불어 최동원은 실업야구 최우수선수, 다승왕, 신인투수상을 수상하며 3관왕에 올랐다.
최동원은 코리아시리즈 6경기에 등판해 42와 3분의 1이닝을 던졌고, 2승1패 1세이브, 방어율 2.45를 기록했다. 특히 4차전 때 7회말까지 선발로 던지다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8회초 1루수로 보직이 변경됐고, 8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구원 등판해 깔끔하게 상대 타선을 막아 한 경기에서 1승 1세이브를 기록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1982년 소속 팀이었던 롯데가 프로로 전환됐기에 아마추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전력공사에 이적해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이유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1982년에 있었는데 이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서였다. 임호균, 심재원, 이해창, 김재박, 장효조 등도 한국 프로야구 원년에 데뷔를 하지 못한 선수들이었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한대화가 8회말 역전 스리런 홈런을 때려 일본을 5-2로 꺾고 극적으로 정상을 차지했으며, 최동원은 대표팀에서 또 한 번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2024-09-2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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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참모의 조건
훌륭한 지도자 뒤에는 언제나 뛰어난 참모가 있다. 참모의 역할에 따라 지도자의 위상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모든 역사를 관통하는 불변의 진리다. 유비가 중국 삼국시대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제갈량이라는 걸출한 책사 덕분이었고, 딕 모리스라는 세계적인 킹 메이커가 없었다면 아칸소주 법무장관이었던 빌 클린턴이 미국 42대 대통령에 당선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참모는 ‘윗사람을 도와 일을 꾀하는 사람’이나 ‘지모가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책사나 킹 메이커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 참모는 전략·전술에 능해야 하고 국내외 정세를 잘 꿰뚫고 있어야 한다. 지도자가 정확한 판단을 내리도록 조언하는 것도 참모의 역할이다. 리더가 잘못된 길을 갈 때는 목숨을 걸고 바로 잡을 수 있어야 한다. 지도자가 반대 세력도 과감히 끌어안을 수 있는 포용심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에겐 다양한 부류의 참모가 있다. 국무총리와 장·차관, 정보기관 수장, 공공기관장까지 수십명에 이른다. 넓은 의미로 대통령이 임명한 공직자는 모두 참모로 봐야 한다. 대통령실 멤버들은 핵심 참모로 분류된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 반환점을 앞둔 상황에서 과연 참모다운 참모는 얼마나 될까. 윤 대통령에게 쓴소리 하면서 혜안을 제시하는 유능한 참모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윤 대통령은 지난 2일 22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1987년 민주화 이후 현직 대통령의 국회 개원식 불참은 처음이다. 여러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핑계에 불과하다. 역대 대통령 중 국회가 마음에 들어서 개원식에 참석한 사람은 거의 없다. 삼권분립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국회가 협조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힘들다. 더욱이 지금은 거대 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가기 싫어도 가야 한다는 의미다.
의대 증원 문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의료계의 현실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의대 증원 자체에 회의적이다. 백번 양보해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해도 그 규모나 시기는 주도면밀하게 결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정부는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코 앞에 두고 의대 증원을 밀여붙였다. 그러자 지난 대선 때 윤 대통령을 지지했던 상당수 유권자들까지 돌아섰다. 집권당의 총선 참패는 예고된 셈이었다.
고집 부려서 될 일이 있고,안 될 일이 있다. 그리고 국정운영은 고집으로 되지 않는다. 최근 국정운영 지지율이 20%대에 불과한 것에서 드러났듯이 우리 국민들은 윤 대통령에게 국정 기조 전환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의료대란에 책임이 있는 인사들을 과감히 문책하고 의대 증원 문제를 원점에서 재검토 해야 한다. 곧 출범할 ‘여야의정협의체’ 결정을 전면 수용하겠다고 사전 약속해야 한다.
대통령의 참모는 자리에 연연해선 안 된다. 예리한 분석력과 판단력으로 국내외 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해서 대통령에게 정확하게 보고해야 한다.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을까 두려워서 보고하지 못하는 참모는 그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런 참모는 하루빨리 물러나야 한다. 그들을 대신할 유능한 참모는 주위에 많다.
여야 지도자의 참모들도 한심하기 그지 않다.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의 참모라면 그를 이번 당대표 선거에 출마시키지 말았어야 했고,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핵심 측근은 그와 열성 지지자를 서둘러 분리시켜야 한다. 우선 한 대표는 국민의힘 총선 참패에 적잖은 책임이 있는데다, 윤 대통령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윤-한 갈등이 계속된다면 한 대표는 상처만 입고 중도하차할 가능성이 있다. 이 대표도 친명계 정치인들과의 관계 정립이 필요하다.
요즘 박형준 부산시장의 인사를 보면 답답한 생각이 든다. 특히 최근에 단행된 정무라인 인사는 온전히 부산시장 선거용이다. 차기 대권과 관련된 인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차기 경쟁자인 오세훈 서울시장의 정무라인 인사와 극히 대조적이다. 단언컨대 박 시장은 현재 거론되는 차기 대권주자 중 가장 경쟁력 있는 인물이다. 풍부한 경험과 높은 식견,글로벌 마인드 등 다른 대권주자들이 갖지 못한 훌륭한 자산을 갖고 있다. 박 시장이 차기 대권경쟁에 적극 임해야 하는 이유다. 그런데도 그의 참모들은 시장 선거 준비에 올인하는 형국이다. 중앙 정치권 사정에 밝고, 인맥이 두터운 참모진을 대거 발탁해야 한다.
국회의원에겐 보좌관이 핵심 참모 역할을 한다. 보좌관이 국회의원 성패의 70% 이상 감당한다. 그런 점에서 상당수 부울경 국회의원들의 보좌진 구성은 낙제점을 면키 어렵다. 참모없는 리더는 존재할 수 없다.
2024-09-08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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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떠날 것인가, 구독할 것인가
국가나 기업, 조직은 왜 퇴보하는가. 미국의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1915~2012)이 파고든 주제다. 대강 정리하자면, 그는 기술발전에 따른 잉여(느슨함)가 퇴보를 초래한다고 봤다. 발전경제학자인 그는 2차 세계대전으로 파괴된 유럽을 재건한 ‘마셜플랜’에도 참여했다.
그가 1970년에 쓴 책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는 그런 퇴보 상황의 치유 방안을 다룬다. 떠나거나(Exit), 항의하거나(Voice), 충성하거나(Loyalty). 이 3가지 선택의 상호작용을 통해 회복 모멘텀을 만들 수 있다는 요지다.
부산이 퇴보하고 있다. 지역이 소멸하고 있다. 거대한 블랙홀, 수도권이 돈과 사람을 마구 빨아들인다. 그 결과로 수도권은 고도비만, 지역은 영양실조 상태다. 윤석열 대통령도 “과도한 집중을 막아야 한다”고 최근 밝혔다.
지역의 청년 유출(그로 인한 고령화)과 일자리 부족 문제를 굳이 여기에서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허시먼 식으로 보자면 이런 현실에서 지역민에게는 3가지 선택지가 있다. 지역을 떠나거나, 일극 체제에 항의하거나, 그도저도 아니면 군말 없이 잠자코 있거나.
청년들의 이탈은 곧 항의 기능의 약화를 부른다. ‘삶의 품질’에 관심 많고, 앞장서서 목소리를 내야할 주체들이 가장 먼저 떠나니 말이다. 지역에 오래 산 노인들은 충성도가 높지만 떠나기도 목소리를 높이기도 어렵다.
지역의 아우성에 야당은 무심하고, 여당은 무능하다. 인구 감소로 지역 정치권의 위상이 떨어지는 것도 걱정스럽다. 수도권 면적은 국토의 10%가 약간 넘지만, 국회의원 수는 절반에 육박한다. 이런 현실에서 누군가는 ‘우는 소리’를 해야 한다. 허시먼 식으로 중앙과 지방 정부, 정치권에 항의할 구심점이 필요하다.
필자는 지역언론에 답이 있다고 본다. 신문사에 근무해서가 아니라, 근무해 봤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꼭 〈부산일보〉가 아니어도 좋다. 〈경남신문〉 〈경상일보〉 〈매일신문〉 등 지역언론은 쓸모가 많다. 종이신문이든, 포털이든, 닷컴이든 지역언론에 관심을 갖는 것이 지역의 목소리를 살리는 길이다. 따지고 보면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도 지역신문이다.
회사로 배달되는 중앙지들 틈에서 가끔 다른 지역의 신문을 찾아본다. 명색이 일간지인데도 사나흘 뒤 우편으로 오는 것도 있다. 그 신문을 읽을 때마다 솔직히 드는 심정이 있다. 바로 ‘촌스럽다’는 것이다. 기사, 편집, 디자인, 광고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내가 25년째 만드는 〈부산일보〉는 어떨까? 다른 지역의 눈으로 보면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결국 돈과 인력의 문제다. 지역언론은 중앙집중 구조의 피해자이면서 이를 극복할 구심점이다.
‘촌(村)스럽다’는 것은 나쁘게만 볼 일이 아니다. 적어도 ‘관점’에서는 그렇다. 지역언론은 ‘전국의 지역화, 지역의 전국화’를 지향한다. 전국 뉴스를 지역 시각에서 재해석하고, 지역 이슈를 전국적 관심사로 만든다. 사회 고발이든, 정책 요구든, 약자의 목소리든 지역이 우선이다. 이를테면 ‘좋은 맹목성’이다.
장담하건대 만약 부산 언론이 없었다면 가덕신공항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가덕신공항을 추진할 때 서울 언론은 ‘멸치 말리는 공항’이 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그쪽의 시각이 대개 그러했다.
지난해 11월 부산엑스포가 좌절됐을 때 서울 언론은 비난의 글을 쏟아냈다. 사우디를 넘어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부산시와 시민, 정치권, 지역언론이 똘똘 뭉쳤기에 국가를 대표해 도전이라도 해볼 수 있었다.
엑스포 좌절 이후 서울 언론은 다시 가덕신공항에 대해 견제하기 시작했다. 명분은 ‘제대로 된 공항’이다. 그들 논리대로라면 멸치 말리는 공항을 제대로 만들자는 말인가?
이쯤에서 지역언론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반문이 있을 것이다. 매일 고민하는 것이지만 솔직히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평가는 독자들 몫이다. 잘한다면 ‘엄지척’을, 독자들로부터 멀어졌다면 ‘회초리’를 들어주시길.
미국은 ‘떠남’의 전통이 강한 나라다. 조국(영국 등)을 떠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고, 수틀리면 떠난다는 원칙 아래 정치(양당제도)와 경제(자본주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신대륙도, 서부도 없다. 필요할 때마다 ‘지금 여기에서’ 목청껏 외치면서 불만 사항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다.
부산시민공원은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보다, 온천천은 서울 청계천보다, 부산대는 하버드대보다 못할 수 있다. 그래도 우리가 아끼고 가꿔야 하지 않겠는가. 그 아낌의 대상에 비록 촌스럽지만 지역언론도 포함되기를 바란다. ‘공공재’로서, 분명히 보답할 것이다. 마감하면서 보니 이 글 또한 떠나는 독자들을 향한 하소연(Voice)임을 깨닫는다.
2024-09-01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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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어떤 목소리를 기억할까요
지난 22일 서울 종로구 씨네큐브광화문에선 의미 있는 행사가 있었다. 이날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2019년부터 이어온 ‘올해의 보이스’ 시상식을 연 것이다. ‘올해의 보이스’상이란 우리 사회의 진일보에 영감을 준 개인 또는 단체에 감사와 연대의 마음으로 수여하는 상으로, 최근 1년간 여성 이슈와 현안에 관심을 두고 활동한 개인과 단체를 선정해 상금과 상패를 수여한다.
올해 수상자는 일명 ‘부산 돌려차기’라고 불리는 사건의 피해생존자 김진주 작가, 기후 위기 시대의 대안 농업 방식인 ‘퍼머컬처’ 농법을 바탕으로 기후 위기 대응 활동을 해온 ‘소란’의 유희정 활동가, 2019년 ‘N번방’ 사건 관련 가해자가 춘천지법에서 재판받은 일을 계기로 디지털성폭력 재판 방청과 모니터링 등에 힘써 온 춘천여성민우회이다.
김진주 작가는 사건 조사 과정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 제기와 외부 활동으로 젠더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피해자다움)을 깨고 인식 변화에 앞장서 왔다. 가해자의 계속되는 협박과 2차 가해 속에도 활동을 이어왔고, 자신의 분투를 진솔하게 다룬 저서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를 펴내 주목받았다.
김 작가는 소감문을 통해 “이런 뜻깊은 상을 받을 줄 몰랐다. 당시 나는 절박했다. 매시 매초 사건은 다르게 흘러갔고 하루하루 가늠할 수 없었다. 재판 이후 이 시간이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주어질 생각을 하니 가만있을 수 없었다. 영원히 피해자를 표현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사실 김 작가는 부산일보 취재진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김 작가의 사건은 부산일보의 단독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고, 일회성 사건 보도를 넘어 지속적인 보도를 통해 수사부터 재판까지 모든 과정에서 피해자가 ‘제3자’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현 사법 시스템의 부실함을 낱낱이 보여줬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부산시는 범죄 피해자를 위한 원스톱 지원 시스템을 마련했고, 정부는 범죄 피해자의 재판 기록 열람권도 강화했다.
‘돌려차기’사건과 김 작가는 부산일보 젠더데스크인 나와도 인연이 있다. 젠더데스크로서 성범죄 사건 보도는 유난히 꼼꼼하게 모니터링을 하게 된다. 단어 하나에도, 표현 한 줄에도 피해자에게 또 다른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조심하게 된다. 사건에 대한 자세한 묘사, 자극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제목은 철저하게 배제하려고 한다. 기자협회 성범죄사건 기사 작성 가이드라인에도 이 같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돌려차기’라는 단어 사용을 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자칫 사건 자체를 희화화시키는 건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옷매무새를 비롯해 발견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묘사 역시 빼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피해자에게 괴로웠던 상황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건 2차 가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건을 상세하게 묘사해주길 부탁했다고 전해 들었다. 단순 폭행이 아니라 처음부터 성범죄를 노리고 접근했고 폭행으로 피해자는 정신을 잃었지만, 자신이 입었던 옷의 특징과 상황으로 볼 때 성범죄를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피해자가 직접 증명해야 했다.
‘돌려차기’사건은 젠더데스크로서 성범죄 기사 보도에서 하지 말라고 했던 걸 예외로 허용한 기사였다. 그만큼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는 뜻이다.
김진주라는 필명은 가해자의 폭행으로 인해 마비됐던 오른쪽 다리의 감각이 기적적으로 되돌아온 6월 4일을 기억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6월의 탄생석이 진주이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책 제목에 대해 “죽지 않았음에도 ‘죽는 것이 다행인가, 아니면 죽었어야 마땅했나’ 이런 고민을 했던 걸 담아낸 제목”이라고 설명했다.
올해의 보이스 상의 또 다른 주인공, 유희정 활동가는 서울 은평구에서 농부들과 함께 마을공동체를 운영하며 화학비료를 쓰거나 땅을 갈아엎지 않고 탄소를 땅에 가두는 유기 순환 농사를 짓고 있다. 유 활동가는 수상 소감에서 “40일 가까이 무더위가 지속되고 기후 위기가 가속되며 이전엔 없던 일들을 밭에서 만나게 된다. 이번 수상은 자연에서 만나는 일들을 더 많은 분들께 이야기하란 뜻 같다”고 했다.
춘천여성민우회는 활동가들이 36건의 성폭력 사건 재판 방청을 함께하며 피해자와 연대하고 가해자들에게 정당한 처벌이 내려지는지 감시해 왔다. 이경순 춘천여성민우회 대표는 “디지털성범죄는 피해자의 영혼과 육신을 철저히 파괴하는 범죄다. 가해자의 목소리만 높고, 피해자의 목소리는 검사나 국선 변호를 통해 약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여성이 죽어야만 겨우 귀를 기울일 정도”라고 꼬집었다.
살려달라는 성범죄 피해자의 목소리, 기후 환경 변화로 신음하는 지구의 목소리에 우리는 좀 더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게 곧 우리 모두를 살게 하는 길이다.
2024-08-25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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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한국 근현대사를 둘러싼 민감한 이슈를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되는 문장이다. 그런데 요즘 같아선 오히려 역사를 잠시 잊고 싶은 심정이다. 십수 년째 되풀이되며 슬슬 지겨울 법도 한 건국절 논쟁이 또 한 번 불붙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 시기가 1919년이냐 1948년이냐를 두고 다시 좌우가 충돌 중이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가 논쟁의 핵심. 이는 일제강점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빌미는 윤석열 정부가 제공했다. 정부 산하 국내 3대 역사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수장을 모두 뉴라이트 계열 인사로 교체하더니, 최근 독립기념관장마저 뉴라이트 성향이 짙은 인사로 채웠다. 뉴라이트 역사관은 대체로 임시정부 등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의 역할을 축소 평가하고, 대신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창한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한반도의 근대화,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줬다는 내용이다. 독립운동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을 정작 독립운동을 기리는 독립기념관장의 자리에 앉힌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다만 반발하는 측의 행태도 다소 과해 보인다. 광복회는 ‘뉴라이트 판별법’까지 내놓았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고만 말해도 일본의 식민지배 합법화를 꾀하는 이른바 친일파라는 식이다. 무모하다. 올해 초 이승만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개봉돼 큰 반향을 일으켰다. 누적관객수가 무려 100만 명을 훌쩍 넘었다. 이승만의 과(過)는 눈감고 공(功)에만 집중했다는 논란도 있었지만, 실관람객 평점이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광복회의 기준대로라면 그 영화에 좋은 평점을 준 시민 모두가 친일파인 셈이다.
물론 뉴라이트 역사관이라는 것이 듣는 이에 따라 다소 불편할 수도 있고, 또한 한국사회의 주류 견해도 아니다. 특히 조선인 위안부의 강제 동원을 부정(이미 일본 정부도 1993년 고노담화에서 강제성을 인정했다)하는 등 일부 내용은 재론의 가치도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여전히 학문적으로 충분히 다퉈볼 수 있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 시점에 건국 논쟁이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별개로 하더라도, 영토·국민·주권을 필수 요소로 하는 국가의 성립이 임시정부 당시에도 합당했냐는 의문이 마냥 억지스럽지만은 않다. 사료를 바탕으로 학자적 견해를 밝히고 토론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학문의 토론 과정이어야 할 역사 논쟁이 사상을 검증하고 불온자를 색출하는 작업으로 변질되고 있다.
급기야는 윤석열 대통령이 “(건국절 제정 논쟁이)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며 진화에 나섰다. 내 말이 그 말이다. 정작 이 진흙탕 싸움에 불을 붙인 것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대통령의 말에 크게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최근의 무의미해보이는 이념 논쟁에 대한 피로가 자칫 역사에 대한 무관심, 냉소로 이어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어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얼마 전 우리 정부는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일본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에 앞장서 찬성표를 던져 논란을 불렀다. 이를 두고 “과거의 강제노역 사실을 들춘들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변명한다면? 통 크게 찬성표 던져주고 우호적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이득이라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이런 것도 가능하다. “이제 와서 일본 정부가 공식 사과를 하는 것이 먹고 살기 힘든 위안부 가족들에게 무슨 도움이 되냐”고. 일본 정부가 주든 한국 정부가 주든 보상금부터 받으라는 소리로 들릴 수 있다.
대통령 말에 대한 과도한 확대 해석이라고? 과연 그럴까? 윤석열 정부의 대일 외교는 이미 이런 사고 체계 속에서 이뤄지고 있다. 최근 광복절 축사에서 대통령이 일본의 과거사에 대해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미 대통령은 먹고 사는 데 별 도움도 되지 않는 과거사 따위는 훌훌 털어버린 것 같다.
일본의 과거사에 면죄부를 주고 얼마나 많은 경제·안보적 이익을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위안부 할머니와 그 가족들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까지 조금 더 잘 먹고 잘 살고 싶지는 않다. 미래 세대 역시 마찬가지 심정일 거라 생각한다. 여전히 이 지긋지긋한 역사 논쟁들에 머리가 지끈지끈거리지만,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기 때문이다.
김종열 문화부장 bell10@busan.com
2024-08-1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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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우리 곁의 동천, 똥천
펄펄 끓는 여름날 모두가 흐느적거리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와, 물고기다.” “에이, 거짓말.” 누군가 피식대는 순간 유유히 헤엄치는 물고기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닌 물고기 떼였다. 일행들은 일제히 하천변 난간에 매달렸다. 뜻하지 않게 한여름 땡볕 길을 걷다 생긴 구경거리였다. 며칠 전의 일화가 여기서 마무리된다면 참 아름다운 풍경이겠지만,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저 물고기 잡아서 먹으면 (먹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겠지.” “웩, 똥물에 사는 걸 어떻게 먹어.” 물고기가 사는 물은 푸르죽죽한 것 같기도 하고 거무튀튀 누리끼리한 듯도 했다. 수면엔 시커먼 건더기가 이리저리 둥둥 떠다녔다. 누군가 인분이 아닐까 의심했는데 이 시대 대한민국에선 있어서는 안 될, 부산에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겠지. 하수를 푹 삭힌 듯한 역한 냄새도 코를 찔렀다. 섭씨 35도가 넘는 폭염으로 하천수가 발효되고 있는 건가 하는 무식한 생각이 들었다. 괜히 이 길을 걸었다. 우리는 울렁거리는 속을 붙들고 서둘러 동천을 빠져나왔다. 저 혼탁한 물에 사는 물고기는 생명력이 대단한 걸까. 아니면 물이 보기보단 덜 더러운 걸까. 혼란스러워 잠시 따져보고 싶었지만 유쾌하지 않은 경험은 얼른 지우고 싶을 뿐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부산 남구 문현혁신도시 이전공공기관 직원들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과 함께 동천 ‘썩은다리’를 건널 때마다 늘 나온 불평이다. 부산으로 이전한 공공기관 직원들은 동천과 처음 맞닥뜨리는 순간 깊이 절망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정착해야 할 부산에 대한 이미지가 ‘동천 수준’으로 곧장 수렴된다는 뜻이었다. 그들은 한동안 심한 자괴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부산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하천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수준 낮은’ 도시에서 가족과 함께 평생 살아가야 하는 현실을 부정하며 도망치고 싶었다고 입을 모았다. ‘내가 어쩌다 이런 곳까지 떠밀려 왔나’하는 생각으로 괴로웠다는 이도 있었다. 여러 이전기관 수많은 직원들은 약속한 듯 비슷한 말을 꺼내며 혀를 찼다. “부산시가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고도 동천 수질을 못 잡는다. 무능한 지방 행정의 상징이 바로 여기 우리 눈앞의 ‘똥천’이다.” 동천 악취에 기겁하던 이전기관 직원들은 시간이 흐르자 슬프게도 나쁜 환경에 슬슬 적응했다. 거리낌 없이 썩은다리를 건너 밥 먹으러 다닌다. 하지만 다른 지역이나 외국에서 온 방문객이 동천을 보며 눈을 찡그릴 땐 왠지 모르게 솟아오르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어렵단다.
동천을 하염없이 방치하는 듯하던 부산시가 다시 동천 수질 개선에 나선다고 한다. 바닷물을 부산진구 광무교 쪽으로 끌어와서 방류하는 부산시의 시도는 여러 번 실패했다. 하천 바닥 오염토를 걷어내는 준설 공사도 지금껏 효과가 거의 없었다. 엄청난 예산과 노력을 투입했지만 악취 풍기는 동천 수질은 여전하다. 이번엔 부산진구 성지곡수원지 계곡물을 부전천 구간에서부터 별도로 끌어와 동천에 유입시키는 방안이 추진된다. 오염토 제거를 위한 준설 공사도 다시 이어진다. 시는 하루 평균 7000t가량의 성지곡 계곡물을 동천에 계속 흘려보내면 수질을 개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하지만 바닷물을 하루 최대 25만t씩 끌어올려 공급하는 방식으로도 동천 수질은 나아지지 않았다. 시의 거듭된 동천 수질 개선 정책 실패는 불신만 높였다. 성지곡 계곡물을 흘려 넣어 동천 물을 맑게 만들겠다는 최근 시 발표에도 반응이 시큰둥한 이유다.
동천은 부산 도심권 핵심 하천이다. 부산 최대 번화가 서면을 지나 동북아 금융중심지를 꿈꾸는 문현금융단지, 부산의 새로운 미래 공간 북항재개발지구로 이어지는 물길이다. 부산의 비전을 일구는 핵심 공간을 품은 동천. 이 물줄기에서 진동하는 악취를 방치한 채 부산의 내일을 기약하긴 어렵다. 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이전을 위한 선결 조건일 수도 있다. 만약 부산이 세계박람회(엑스포) 등과 같은 글로벌 메가 이벤트 개최에 다시 나선다 해도 더러운 동천을 외면해선 곤란하다. 전임 부산시장 시절 시는 동천 광무교~부암역 구간 물길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더불어 동천과 북항, 남항을 잇는 ‘시티 크루즈’를 띄우겠다는 장밋빛 구상을 함께 내놓았다. 냄새 풍기는 지금의 동천 모습을 보면 허황된 아이디어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맑은 물이 흐르는 동천에서 시티 크루즈를 타고 도심 곳곳을 누비는 건 공상일 뿐일까. 북적이는 문현금융단지에서 물길로 북항재개발지구와 남항을 거쳐 남포동을 오가는 구상을 현실로 이루긴 불가능한 걸까. 깨끗한 동천을 누리고 싶은 부산시민의 기대는 언제까지 헛된 꿈에 그쳐야 하는 것일까. 동천에 다시 칼을 빼든 박형준 부산시장의 의지에 희망을 걸어 본다.
2024-08-1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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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미술관과 아파트, 이기대 동상이몽
달맞이언덕과 함께 부산의 해안 비경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명소, 이기대에 일대 변화가 예고됐다. 무려 8000만 년 동안 생명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조용히 모습을 바꿔 온 역사를 꺼내지 않더라도 해안 탐방로를 한 번이라도 걸어본 사람이라면 왜 부산이 이기대를 사랑하는지, 또 지켜왔는지 저절로 느끼게 된다. 그 이기대가 크게 바뀔 모양이다.
이기대는 수년 내에 ‘숲 미술관’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굳이 이기대를 바꾸려 든다면 유일한 방법은 예술이어야 한다는 데에 적극 동의한다. 부산시는 이기대를 어떤 예술공간으로 만들지 용역을 진행하고 있고, 연내에 구체적인 밑그림을 시민들에게 내놓기로 했다.
이기대 숲 미술관을 이룰 시설도 하나둘 공개되고 있다. 변화의 첫걸음이 프랑스의 세계적 현대미술관 퐁피두센터 분원으로 향하고 있는 사실은 다행스럽다. 일도 꽤 진척된 듯하다. 며칠 전 부산시가 언론사 문화부 기자들 대상으로 연 간담회에서는 박형준 시장이 직접 나서서 퐁피두 분원 유치 현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퐁피두 분원 유치에 성공한다면 그 위치로 이기대 중간인 어울마당을 점찍었다고도 했다.
이기대와 퐁피두. 아직은 이질적으로도 느껴지지만 부산시는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다. 부산시가 설명하는 퐁피두 분원 규모도 상당하다. 퐁피두 측에 3만㎡ 부지를 내줘 연면적 1만5000㎡ 건물을 짓는다는 게 부산시 설명이다. 내·외부에는 전시실, 창작공간, 수장고, 커뮤니티홀, 교육실, 야외공원도 갖춘다.
퐁피두 분원은 최종 결실을 맺는다면 박 시장의 주요 업적이 될 것으로 보인다. 퐁피두 분원은 부산 전체로 보면 북항에 들어설 오페라하우스, 최근 준공한 부산콘서트홀, 부산 기장군에 문을 연 영화촬영소와 묶여 새로운 부산 예술문화 벨트가 꿰어질 핵심 고리이기도 하다.
이기대는 박 시장에게도 중요한 장소가 됐다. 그가 이기대를 활용하는 첫 정치인이 됐다는 의미다. 실제 박 시장은 지난해 10월 20일 연 기자회견에서 “해양문화도시로 만들기 위해 이기대를 활용하기로 했다”면서 “이날부터 이기대예술공원 기본계획 용역에 들어가 2024년 말까지 마무리 짓겠다”고 공언했다.
‘정치인 박형준’이 내세운 ‘이기대 활용법’은 그 자체로 ‘정치적 카드’가 됐다. 1997년 군사보호구역에서 해제된 이후에도 이기대는 전체적인 경관을 잘 유지했다. 오륙도 앞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선 일 정도가 아쉬운 변화였다. 이기대에 눈독을 들인 여러 건설업체가 개발 시도에 나서기도 했지만 부산시와 관할 지자체는 시민과 함께 해안산책로를 조성하고 국가지질공원 지정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이기대를 지켜왔다. 그 연장선에서 박 시장은 생태와 예술이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이기대를 바꾸겠다는 아이디어를 고안했고, 첫 행보로 퐁피두 분원 유치에 공을 들여왔다. 이기대 활용법 성공 여부에 따라 그의 정치적 발걸음도 바뀔 수 있다.
관건은 이기대의 본원적 가치를 지켜 활용하는 데 성공하느냐다. 이기대에 채울 시설을 유치하는 일 역시 간단치 않지만 이기대를 잃어버리지 않을 방법은 언제까지고 고민해야 할 숙제다. 퐁피두 분원이 들어와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부산 시민이 비행기가 아닌 버스를 타고 가 세계적 미술품을 향유할 기회를 얻는 일은 사실 큰 변화다. 지역 미술계에도 새로운 기회다. 아시아권을 비롯한 국내외 관광객이 퐁피두 작품을 보러 부산으로 몰려온다면 금상첨화다. 부산시는 이기대가 일본의 나오시마, 덴마크 루이지애나현대미술관, 독일 인젤홈브로이미술관처럼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비슷한 때, 이기대 가치를 무너뜨리려는 탐욕도 불거졌다. 사실 이기대는 개발업자들이 항상 군침을 흘리는 표적이었다. 고향 부산을 떠나 2008년부터 ‘서울 건설사’가 된 아이에스동서(주)가 이기대 길목에 아파트를 짓는 사업 인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건설사 계획대로 31층, 29층, 28층 등 3개 동 짜리 아파트가 들어서면 시민들은 이기대를 한눈에 볼 권리를 박탈당한다. 이기대 아파트가 부산에서 진행하는 마지막 사업이라는 게 아이에스동서 측 관계자의 해명이었는데, 부산에서 여러 차례 아파트 사업으로 재미를 본 건설사가 마지막으로 이기대를 망치고 떠나겠다는 꼴이다. 이런 시도는 아이에스동서 하나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앞장서서 이기대를 지켜야 할 행정기관이 오히려 건설사를 돕고 나서는 상황은 답답하기만 하다. 부산 남구청은 당초 용적률 200%까지만 허용된 해당 아파트 사업 부지에 대해 250%까지 올려 지을 수 있도록 제한을 풀어버렸다. 전문가들도 “세계적 미술관은 미술관과 주변부 조화가 너무도 중요한데 미술관 가는 길을 아파트가 막아서면 기능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이기대 숲 미술관이 아파트 입주민 미술관이 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2024-08-04 [1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