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올해는 '천만 영화' 탄생할까
이자영 문화부장
일본 영화 ‘국보’ 현지서 기록적 흥행
지난해 한국 영화는 천만 관객 ‘0편’
영화산업 저력 확인할 신호탄 기다려
거장 감독 신작 ‘대박’ 흥행도 좋지만
신인·독립영화 지원 등 다양성 확보를
3시간에 가까운 러닝 타임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 영화 ‘국보’(2025)를 뒤늦게서야 관람한 이유다. 이미 멀티 플렉스에선 찾아보기 힘들어진 뒤라 리클라이너 상영관 같은 건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러나 걱정과 달리 175분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가부키 분장을 한 배우들의 섬세한 표정 연기가 스크린을 가득 채웠고, ‘인간 국보’를 향한 이들의 광기에 가까운 예술 열정은 한시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플랫폼으로 넘어오기 전 영화관을 찾은 것은 역시 잘한 결정이었다. 물론 생소한 발성과 몸짓의 가부키 공연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몰입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영화 ‘패왕별희’(1993)의 경극이나 드라마 ‘정년이’(2024)의 여성 국극이 그러했듯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예술 장르를 새롭게 접하는 즐거움이 오히려 더 컸다고 할까.
재일 교포 이상일 감독이 만든 이 영화가 일본 영화의 흥행 기록을 새로 쓰고 있다. 지난 18일 기준 관객 1370만 명, 흥행 수입 193억 엔을 넘어섰다. 일본 실사 영화 흥행 수입 1위 기록을 이미 지난해에 갈아 치운 바 있다. ‘춤추는 대수사선 더 무비2: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2003·173억 엔)가 세운 기록을 22년 만에 뛰어넘어 화제가 됐다. 일본 현지에선 가부키 공연을 찾는 관객까지 늘고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파급효과가 크다고 한다.
반면 한국 영화의 최근 성적표는 처참하다. 지난해 1000만 관객 영화는 전무했고, 관객 500만 명을 넘긴 작품은 ‘좀비딸’(2025) 단 한 편에 불과했다. 코로나19 이후 영화관을 찾는 관객이 줄어든 가운데서도 ‘범죄도시2·3·4’(2022·2023·2024) ‘서울의 봄’(2023) ‘파묘’(2024) 등 ‘천만 영화’는 꾸준히 나왔던 것과 확연히 달라진 양상이다.
이창동 감독이 8년 만에 선보이는 새 영화 ‘가능한 사랑’도 영화관 개봉 대신 넷플릭스 공개를 택해 영화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일부에선 이를 ‘극장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보고 있을 정도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이탈한 관객은 회복될 조짐이 없다. OTT 플랫폼이 급성장한 가운데 젊은 층을 중심으로 관객의 취향은 더욱 더 세분화되고 있다.
그러나 극장을 중심으로 한 영화산업은 관객 감소에 따른 수익 감소, 투자 위축, 제작 인력 이탈이 가속화하면서 개봉 편수마저 눈에 띄게 줄었다. 관객이 즐길 만한 다양한 콘텐츠 공급 자체가 어려운 구조적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나마 새해엔 구교환·문가영 주연의 멜로 영화 ‘만약에 우리’(2025)가 입소문을 타고 흥행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25일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만약에 우리’는 전날까지 누적관객수 190만 명을 돌파했다. 지난해 연말 개봉한 이 영화는 이미 개봉 12일 만에 손익분기점(110만 명)을 넘긴 바 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관객 200만 명은 가뿐히 넘길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멜로 영화가 200만 관객을 넘긴 것은 2019년 ‘가장 보통의 연애’(292만 4000여 명)가 마지막이었다. 젊은 세대에게 두 남녀의 연애와 성장 스토리가 많은 공감을 얻으면서 정통 멜로 장르의 부활에 대한 희망마저 읽힌다.
영화계에선 특정 장르에 편중된 투자,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국 영화가 살아날 수 있다고 본다. 새로운 장르에 대한 도전과 실험이 이뤄질 수 있는 산업적 토양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영화의 경쟁력이 된 과감한 시도와 신인 감독들의 성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독립·예술영화에 대한 지원을 포함한 다양한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
높아진 극장 문턱을 낮추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진행되는 ‘문화가 있는 날’ 제도를 매주 수요일로 확대 시행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OTT처럼 구독료를 내고 극장에서 일정 횟수를 저렴하게 볼 수 있는 ‘구독형 영화 패스’ 도입도 검토하고 있다.
다행히 올해는 거장 감독의 신작 개봉이 잇따라 기대를 모은다. 먼저 설 연휴를 앞두고 류승완 감독의 ‘휴민트’가 관객과 만난다. ‘곡성’(2016) 이후 10년 만에 신작을 선보이는 나홍진 감독의 ‘호프’도 7월 개봉을 예고하고 있다. 연상호 감독의 ‘군체’도 기대작이다. ‘천만 영화’로 상징되는 ‘대박 영화’에 대한 바람은 우리 영화산업의 저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검증된 감독들의 대작을 만나는 기쁨도 크지만, 관객의 허를 찌르는 의외의 작품을 만나고 싶은 갈망도 크다. 소위 말하는 ‘대박’ ‘중박’ 영화가 골고루 나오고, 관객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줄 독립·예술영화도 더 풍성한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