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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전략적 명확성 시대'의 외교
전후 국제정치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게임’을 펼쳐왔다. 상대에게 의도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고, 동시에 상대가 쉽게 행동하지 못하도록 불확실성을 남겨 두는 외교 방식이다. 국제정치학에서는 이를 ‘전략적 모호성(strategic ambiguity)’이라고 부른다. 어떤 문제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기보다는 의도적으로 해석의 여지를 남겨 두는 방식이다. 상대가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들어 억지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협상과 타협의 공간을 확보하는 ‘여백의 외교 기술’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대만 문제다. 미국은 1979년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따로 ‘대만관계법’이라는 국내법을 제정해 미국이 대만을 방어할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서도 군사적 지원과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미국이 취한 이러한 모호성은 중국의 군사 행동을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중국과 외교 관계를 유지할 공간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도 마찬가지다. 집단방위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실제 군사 대응의 범위와 방식에 대해서는 일정한 모호성을 남겨 두었다. 동맹의 결속력을 유지하면서도 위기관리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장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략적 모호성은 국제정치에서 ‘알지만 모르는 척하는’ 일종의 암묵적 규칙이었고, 그것이 국제 질서를 일정하게 안정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최근 국제정치의 흐름을 보면 이러한 전략적 모호성이 점차 약화하고 있다. 이제 강대국을 중심으로 모호한 메시지 대신 명확한 입장을 거침없이 공개적으로 밝히고,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군사력을 포함한 일방적 행동으로 이어지는 패턴으로 옮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NATO 가입 배제라는 명확한 요구와 미국·NATO의 단호한 거절이 타협의 공간을 완전히 소멸시켜 전쟁을 불러온 사례로 해석될 수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동맹국과 경쟁국을 가리지 않고 대규모 관세 조치를 취하는 것도 외교적 메시지가 더 이상 완곡한 신호가 아니라 직접적인 요구로 바뀌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일본 역시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그간 일본은 헌법적 제한과 세계 유일의 원자폭탄 피해국이라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안보 문제에서 매우 신중하고 절제된 표현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다카이치 총리는 작년 11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대만 유사시 상황을 일본의 집단 자위권 행사가 가능한 ‘국가 존립 위기 사태’로 판단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는 과거 일본 외교의 톤과 비교하면 매우 분명한 메시지다. 이에 중국은 중국인의 방일 자제와 희토류를 포함한 이중 용도 품목 전반에 대한 수출 통제 조치로 대응했다. 바야흐로 동북아 정세는 여지를 남겨두는 ‘전략적 모호성의 시대’에서 이제 입장과 의도를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전략적 명확성(Strategic Clarity)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심각한 딜레마를 안겨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미국은 이란 호르무즈 해협에 한국 함정을 파견하라고 ‘명확하게’ 요구하고 있다. 또한 미중 경쟁이 첨예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앞으로 양 강대국이 한국에 어느 편에 설 것인지 보다 ‘명확한’ 입장을 요구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은 단순하지 않다. 지나치게 분명한 입장을 취하면 외교적 공간을 스스로 좁히게 되고, 반대로 어정쩡한 모호성을 유지하면 상대로부터 신뢰를 잃을 위험이 있다. 더구나 경제와 안보가 긴밀하게 얽혀 있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면 이러한 딜레마는 더욱 복잡한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 외교는 프로다운 유능성을 요구받고 있다. 단기적 이익만 좇아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오가는 외교는 지속 가능하지 않을 뿐 아니라, 위기가 닥치면 진퇴양난에 직면할 수 있다. 따라서 핵심적인 국가 이익과 동맹이라는 원칙에 관한 문제에서는 단호하고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실행 방식과 정책 추진 과정에서는 국가가 오랜 세월 축적해 온 외교적 자산을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전략적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경험 많은 협상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최대한의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말하자면 원칙에서는 명확성을, 전략에서는 유연성을 구현하는 고차원의 예술을 끌어낼 수 있는 유능함이 필요하다. 이상론에 기대거나 단기 여론에 밀린 땜질식·아마추어식 외교는 국가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지금은 프로 외교의 시대다.
2026-03-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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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봄, 아침 산책, 다중문화 생각
이란 전쟁의 비극이 계속하여 세계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는 가운데, 그래도 봄이다.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도 싫고, 여러 모순을 해결하고 삶의 조건을 개선해달라고 일어선 시위 국민을 ‘폭도’와 ‘순교자’로 동시에 내모는 이란 내 지배세력도 못마땅하다. 늪으로 빠져드는 이 비극을 딛고서 그래도 세계가 관용과 공존의 정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가속페달을 밟으며 밑으로 밑으로만 추락할 것인가? 뒤숭숭한 마음을 안고 아침 산책을 나선다.
그래도 때가 되면 꽃은 피고, 새는 노래하고, 물빛은 짙다. 부산 기장군 좌광천을 따라, 저수지를 지나, 대천사로 오른다. 유리 나기빈(1897~1975)의 소설 제목에서 따서 내가 ‘어두운 참나무’라고 부르는 아름드리 벚나무가, 지석골을 굽어보며 오늘도 우뚝하다. 저 밑동에선 다시 온갖 벌레와 유충들이 우글거릴 거고, 쌀알같이 잔잔한 저 꽃망울들 위에 산들바람이 한 번만 더 불면 지나가는 고양이의 잔털에도 봄 향기가 짙겠다. 나뭇등걸에 앉아서 어제 일을 되돌아보며 멀리 아른아른한 청거북의 등에 괜히 시선을 던져본다. 밖은 전쟁으로 아우성인데, 이 안은 무릉도원이다. 평화로운 물소리, 새소리에 귀를 대며 어슬렁어슬렁 절 안으로 들어간다.
올 적마다 느끼는 거지만, 봄날이 오니 더한 것 같다. 다른 고향과 다른 문화적 배경을 안고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이 봄빛의 따스한 치마 안에서 서로에게 녹아들어 있는 느낌을 준다. 일주문 안쪽에는 왕방울 눈을 부릅뜬 인도 수미산 중턱에서 온 두 명의 사천왕 아저씨가 보초를 서 있고, 중앙아시아의 12지신, 낙태되거나 물에 빠져 죽은 어린아이의 영혼을 구제한다는 일본풍의 수자(水子)령 지장보살이 마당의 돌부처를 지키고 있다. 동남아시아 절의 관욕(灌浴) 문화, 중국 왕실의 전각과 처마, 조선의 왕들이 다닌 길을 이어받은 법당 중앙의 어간(御間), 산신각에서 뛰어나오는 수천 년 묵은 신령과 호랑이도 있다. 용왕, 칠성님, 돌 할미, 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우리 불교만의 나반존자 등도 이 작은 절간의 주인들이다. 뜯어보면 여러 국적의 여러 문화가 한 공간에 있고, 한국 문화라고 해도 민중문화, 양반문화, 궁중문화 등 지층이 다양하다. 포토존을 표시한다고 그랬는지, 홍문관을 연상시키는 저 옥당(玉堂) 벽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 올림포스산에서 온 듯한 서양 천사의 하얀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말하자면, 능청스럽다. 서로 낯설었을 상징과 표상들이 여러 사연을 안고 극동의 이 동쪽 끝에 모여 독특한 하모니를 내고 있다. 오랜 세월 부딪히며 하나의 둥그런 만다라를 이루었으면서 본래부터 근원이 하나인 듯이, 처음부터 한 가족이었던 듯이 천연덕스럽다.
오늘을 기준으로 굳이 역산해 본다면,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 전진의 순도 화상이 처음으로 한반도에 불교를 전한 이래 이 다색의 자연스러운 공간이 만들어지는 데 무려 1700여 년이 걸린 셈이다. 그러나 한 번이면 족하지, 또다시 그만한 세월을 기다려서 우리 사회를 다(多) 지층화, 다 음성화할 순 없을 것이다. 전술 전략을 잘 세우고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실천하여, 다시 하나 되는 시간을 인위적으로 크게 앞당겨야 한다. 그런데 이런저런 상념도 잠시, 점차 확전 되는 미국-이란 전쟁이 블랙홀이 되어 모든 걸 삼키고 앗아가 버린다.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1895~1925)의 예언대로 이 찬란한 봄기운, 뭇 생명의 부활, 문화 결합과 용융의 에너지마저도 저 거대한 악과 욕망 앞에선 그저 속수무책인 걸까? 결국은 물질 문명과 전체주의의 검은 쇠 손바닥이 우리의 작은 생명의 노래, 화합의 노래를 영원히 걷어가 버리고 말까? 이 악다구니에도 결국은 끝이라는 게 있을 건데, 그 끝은 도대체 언제 오는 걸까.
어둑어둑 저수지에 산 그림자가 비쳐들고, 물소리도 잦아졌다. 거북이들도 물 구슬을 뚫고 용궁으로 뛰어든 지 오래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만난 ‘어두운 참나무’, 오늘도 귀갓길을 잊고 한 소년이 흙바닥에 앉아 나무 밑동을 열심히 살피고 있다. 다중문화란 결국 생명 존중, 존재 간의 연민을 말할 것이다. 어제와 다른 빛깔과 다른 움직임의 오늘, 저 소년은 아침 등굣길에 그랬던 것처럼 돌아갈 때도 주변의 모든 사물과 생명의 변화에 일일이 반응하고 감탄하다가, 아마도 밤이 늦어야 집으로 돌아가리라. 러시아 숲엔 늑대와 곰이 우글거리는데 겁도 안 나는지…. 40리 밖 학교에선 사범대학을 갓 졸업하고 이 시골 학교에 부임한 새내기 선생님이 안절부절못하며 소년의 무사 귀가를 기도하고 있을 테고, 시커먼 언덕을 한참 오르내려야 나오는 소년의 통나무집에선 오늘도 홀어머니가 아들 녀석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터인데….
2026-03-2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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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RWA 혁명, 부산의 '인프라 금융'을 깨우다
최근 금융위원회가 혁신금융 일환으로 주요 금융기관들과 핀테크 기업들로 구성된 컨소시엄에 대해 조각투자 거래소 설립을 승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는 자본시장법의 테두리 안에서 디지털 자산이 제도권 금융으로 편입되는 중요한 변곡점이다. 그동안 뜬구름처럼 여겨졌던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자산이 실질적인 투자 상품으로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RWA(Real World Asset, 실물 기반 토큰화 자산)가 있다. RWA란 부동산, 미술품, 채권 등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자산을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토큰화한 것이다. 자산을 잘게 쪼개 디지털 증권 형태로 발행함으로써 과거에는 기관투자자나 자산가들만의 전유물이었던 우량 자산에 일반 개인들도 소액으로 투자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금융위, 조각투자 거래소 설립 승인
디지털 자산 제도권 금융 편입 전환점
해운·물류 인프라, 블록체인 결합 부산
‘선박 RWA’ 등 새 금융 모델 구현 가능
가덕신공항 등 사업에 이 방식 적용 땐
자금 조달, 사회적 합의 이끌 수 있어
사실 조각투자라는 개념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강남의 빌딩, 유명 작가의 미술품, 심지어 한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초자산을 바탕으로 한 상품들이 출시됐다. 그러나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지금까지의 성적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기초자산의 매력도’와 ‘수익성’의 한계였다.
이제는 관점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RWA의 진정한 혁신은 기존에 이미 활발히 거래되던 자산이 아니라, 수익성은 확실하지만 개인투자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웠던 거대 인프라 영역에서 일어나야 한다. SOC(사회간접자본) 사업, 선박, 항공기, 터널, 교량 등이 그 주인공이다. 이러한 자산은 운영 기간이 길고 현금 흐름이 안정적이지만, 단위 당 투자 금액이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에 달해 일반인의 투자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만약 RWA를 통해 이 거대한 자산을 소액 단위로 쪼개어 유통한다면, 금융시장에는 전례 없는 리테일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자 해양수도인 부산은 이러한 ‘인프라 RWA’의 최적지다. 부산이 가진 독보적인 강점인 해운과 물류 인프라는 RWA 혁신의 가장 강력한 병기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박 금융은 대표적인 ‘그들만의 리그’였다. 수천억 원을 호가하는 컨테이너선 한 척을 건조하기 위해선 대형 은행과 정책 금융기관의 복잡한 신용 공여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부산의 선박 금융 노하우와 블록체인 기술이 결합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부산은 이미 해양수산부를 비롯해 한국해양진흥공사(KOBC)와 다수의 해운사가 집결해 있는 동북아 물류의 허브다. 여기에 선박의 소유권이나 용선료 수익권을 토큰화해 유통하는 ‘선박 RWA’ 모델이 더해진다면, 부산은 단순히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넘어 ‘선박의 가치가 거래되는 글로벌 금융 플랫폼’으로 진화할 수 있다. 선박 건조 자산의 일부를 리테일 투자자로부터 조달하고, 투자자들은 선박 운영 수익을 투명하게 배당받는 모델은 부산만이 시도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RWA의 미래다.
필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덕신공항 건설과 배후 단지 조성 자금의 일부를 RWA 방식으로 조달할 것을 제안한다. 기존의 국책 사업이 정부 예산이나 대규모 채권에만 의존했다면, 이제는 ‘시민 참여형 디지털 인프라 펀드’를 구축할 때다.
이를테면 신공항의 핵심 수익원인 여객 터미널 면세점 입점 수익권이나 공항 주차장 운영권, 혹은 배후 물류 단지의 창고 부지 등을 자산화하여 토큰으로 발행하는 모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부산 시민들이 매달 적금을 붓듯 자신이 이용할 공항의 지분을 소액으로 소유하고, 거기서 발생하는 이용료와 면세점 매출의 일부를 디지털 지갑을 통해 실시간 배당받는 구조다. 이는 자본 조달을 넘어 신공항에 대한 시민들의 ‘주인 의식’을 고취하고, 국책 사업을 둘러싼 지역 내 갈등을 상생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사회적 합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시도는 세 가지 측면에서 효과를 낸다. 첫째, 금융의 민주화다. 국가나 지자체 주도의 우량 인프라 성과를 특정 자본가가 아닌 시민이 공유하게 된다. 둘째, 자산 유동화의 가속이다. SOC 사업에 민간 자금을 원활히 유입해 재정 부담을 줄이고 속도를 높일 수 있다. 셋째, 부산의 정체성 강화다. 블록체인 특구 부산이 시민과 기간시설을 공유하는 ‘디지털 금융 허브’ 사례를 제시할 수 있다.
RWA는 단순한 기술적 수단이 아니다. 자산의 소유 구조를 재정의하고 부의 분배 방식을 혁신하는 도구다. 부산의 거대한 항만이, 그리고 새로 지어질 신공항의 활주로가 디지털 토큰을 통해 시민들의 자산으로 연결될 때, 부산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글로벌 디지털 금융 도시로 도약할 것이다. 이제 ‘무엇을 쪼갤 것인가’에 대한 답은 명확해졌다. 작고 사소한 자산에서 벗어나 도시의 뼈대를 이루는 거대한 자산에 디지털의 숨결을 불어 넣어야 할 때다.
2026-03-1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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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용기는 어디에서 오는가
어느덧 개봉 한 달이 훌쩍 지난 ‘왕과 사는 남자’의 인기가 좀처럼 식을 줄 모른다. 노산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단종과 엄흥도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머지않아 1500만 관객을 돌파하리란 기대도 곳곳에서 심심찮게 들린다. 누구에게나 익숙한 소재의 영화가 오늘날 관객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 작품이 인정과 의리라는 오랜 가치를 과연 누가 지켜냈는지 새롭게 묻고 있기 때문이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한 수양대군의 정치적 야욕, 그리고 단종과 그 곁사람들의 비극적 희생을 다룬 서사물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일 것이다. 그는 1928년 ‘동아일보’에 이 작품을 연재하기 시작하며 단종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의 핵심이 ‘인정과 의리’에 있다고 말했다.
인정과 의리.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단종애사〉를 필두로 수많은 소설과 영화, 드라마는 어떤 역사적 인물이 인정과 의리를 지켰는지, 혹은 누가 그것을 저버렸는지에 주목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왕이자 어린 조카인 단종을 죽음으로 내몬 수양대군과 한명회는 신의를 저버린 자들로 재현되었다. 반면, 단종의 복위를 염원하며 목숨을 바쳤던 사육신, 도의가 사라진 세상을 등졌던 생육신은 숭고한 가치를 끝끝내 지켜낸 이들로 널리 칭송받았다. 국어 시간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사육신 성삼문의 절절한 시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왕과 사는 남자’는 이러한 인정과 의리라는 가치를 실천한 주체를 전혀 다른 공간에서 찾는다. 영화는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한 이들을 고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을 들으며 식음을 전폐하는 어린 왕 단종이 등장한다. 창백한 혈색, 갈 곳 잃은 눈동자에는 소년 왕의 두려움과 절망, 비탄이 뒤섞여 있다. 이윽고 그는 왕권을 잃은 채 궁궐과는 멀리 떨어진 청령포로 내몰린다. 작품은 한양의 권력 다툼 대신 외딴 유배지와 그곳에 깃들어 살아가는 이들을 서사의 전면으로 끌어낸다.
극 중에서 청령포를 유배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운 이는 광천골 촌장 엄흥도다. 유배된 한양의 고관대작을 통해 마을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자식에게 글공부를 가르쳐 입신양명의 꿈을 이루겠다는 지극히 속되고 사사로운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가 맞이한 유배자는 처절한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어린 소년 이홍위였다. 기대는 한순간 낙엽처럼 부스러졌다. 그렇지만 엄흥도와 광천골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은 그를 위해 정성스러운 밥상을 마련한다. 왕과 무지렁이 백성이 마주 앉은 밥상. 그곳에서 맺어진 친밀한 관계와 오가는 사사로운 이야기로부터 인정과 의리가 새롭게 싹튼다.
영화는 역사의 가장자리로 내몰려 잊힌 세인들의 사사로움에 눈길을 준다. 그리고 이홍위는 그들이 보여주는 인정과 의리로부터 정의롭지 못한 권력과 맞서 싸울 용기를 얻는다. 공허하고 무력했던 눈빛에는 다시금 강인한 의지와 결기가 감돈다. 용기를 얻은 것은 이홍위만이 아니었다. 엄흥도 역시 거대한 권력 앞에 마주 서기를 결단하고 그를 따라나선다.
왕위를 되찾으려는 노력은 무산되고 결국 단종은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엄흥도의 용기는 그치지 않는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라는 경고에도 차가운 강물에 떠내려가는 시신을 건져 올려 장례를 치른다. 그 장면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떠올리게 한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조국 테베를 배신한 오빠 폴뤼네이케스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배신자의 장례를 금지한 국법을 어기고 그의 시신을 매장하려 했다. 그 일로 안티고네는 감옥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 비극은 국가의 명령과 인간의 당위적 도리 가운데 무엇이 우선하는가를 날카롭게 질문한다. 엄흥도가 취한 비범한 행동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한낱 산골 촌장에 불과했지만, 인간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숭고한 신의와 도리를 지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어리고 쇠약한 단종의 모습은 언뜻 오늘날 젊은 청년들을 떠올리게 한다. 강파르고 불안정한 현실에 내던져진 청년들의 모습 말이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를 바꾼 위대한 영웅들의 거대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힘겹고 숨 가쁜 삶을 버텨 내게 하는 소박하고도 친밀한 인정과 의리의 이야기일 것이다. ‘왕과 사는 남자’가 많은 관객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도 여기 있다. 역사는 마주 앉은 밥상처럼 기록되지 못한 평범한 존재들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이홍위와 엄흥도가 보여준 진정한 용기가 비롯된다.
2026-03-1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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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유가 급등에 관광도시를 다시 묻는다
드디어 봄이 왔다. 농장의 이중 비닐을 걷어도 될 만큼 날씨가 풀리고 봄꽃이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이맘때면 늘 기대되는 것이 벚꽃 시즌이다. 하지만 올해 봄은 예년과 조금 다른 느낌이다. 설렘보다는 이동이 먼저 걱정된다.
나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부산에서 경북 왜관을 다녀온다. 그렇게 다닌 지도 벌써 10년이 되어 간다. 평소 같으면 일요일 경부 고속도로와 부산·대구 고속도로는 관광버스와 나들이 차량으로 꽤 붐비는 편이다. 그래서 조금만 늦게 출발해도 상당한 정체를 각오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번 주말에는 올라가는 길도 내려오는 길도 예상보다 한산했다.
사람의 이동이 기반인 관광 산업
중동전쟁 따른 유가 급등에 민감
운임 인상 등에 따른 영향도 다양
국제·국내 관광 희비 엇갈릴 수도
급변하는 환경 속 관광도시 부산
진지하게 새 전략 고민 시작해야
그 이유를 짐작하게 한 장면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 다른 곳보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표가 붙은 한 주유소 앞에 자동차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제서야 왜 도로가 한산했는지 이해가 갔다. 치솟은 기름값 때문이다. 유가가 급등하면서 사람들의 이동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이다. 꼭 필요한 외출이 아니라면 이동을 줄이려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는 듯하다.
최근 중동 정세가 심상치 않다. 특히 이란을 둘러싼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국제 유가는 빠르게 반응해 왔다. 중동은 세계 원유 공급의 핵심 지역이기 때문에 작은 정치적 충돌이나 군사적 긴장만으로도 국제 유가는 크게 출렁인다. 문제는 유가 상승이 단순한 에너지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경제와 관광 흐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관광 산업은 사람의 이동을 기반으로 하는 산업이다. 이동에는 교통비가 따른다. 대표적 교통수단인 항공기 관련 산업에서도 항공유 가격은 가장 중요한 비용 요소가 된다.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 항공유 가격도 오르고 결국 항공 운임 상승으로 이어진다. 여행 비용이 높아지면 관광 수요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만 유가 상승이 관광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단순하지 않다. 국제 유가 상승은 장거리 이동 비용을 높여 국제 관광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동시에 환율 상승이라는 변수도 함께 작용한다. 환율이 오르면 외국인 관광객 입장에서는 한국 여행 비용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효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화 가치가 약세를 보일 때 외국인 관광객이 증가하는 현상은 여러 차례 나타난 바 있다.
내국인 관광 흐름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가 상승과 항공료 인상은 해외여행 수요를 줄이는 요인이 된다. 이때 일부 여행 수요는 해외 대신 국내 관광으로 이동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 관광 시장에 일시적인 활력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유가 상승이 장기화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교통비와 물가 상승이 동시에 나타나면 여행 자체를 줄이는 소비 위축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유가 상승은 국제 관광과 국내 관광 모두에 복합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관광도시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관광객 이동이 줄거나 관광 패턴이 바뀌면 관광도시 경제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관광은 숙박, 음식, 쇼핑, 교통 등 다양한 산업과 연결되어 있는 도시 경제의 중요한 축이기 때문이다.
부산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관광 전략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부산은 외국인 관광객 300만 명을 돌파하며 글로벌 관광도시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중국과 대만 관광객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등 다양한 국가에서 부산을 찾는 관광객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부산이 국제 관광도시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글로벌 관광도시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관광객 수 증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산이 지향하는 도시 비전은 ‘시민이 행복한 도시’, ‘즐거운 도시’, 그리고 ‘글로벌 허브도시 부산’이다. 관광 역시 이러한 도시 비전과 함께 발전해야 한다. 관광객이 찾는 도시이면서 동시에 시민이 즐길 수 있는 도시가 될 때 관광도시는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갖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관광 인프라 역시 더욱 세밀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다양한 국적의 관광객을 위한 언어 서비스뿐 아니라 할랄 음식, 채식 식단, 종교적 생활환경 등 문화적 차이를 고려한 관광 환경이 필요하다. 단순히 방문하는 도시가 아니라 머무르고 싶은 도시가 되어야 한다.
치솟은 유가는 단순한 에너지 가격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국제 관광 흐름과 국내 관광 구조를 동시에 바꾸는 신호일 수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관광도시는 새로운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부산이 시민에게는 행복하고 즐거운 도시가 되고 세계인에게는 매력적인 관광도시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관광 환경 속에서 더욱 탄탄한 준비가 필요하다. 지금이야말로 부산 관광의 방향을 다시 점검해 볼 때다.
2026-03-1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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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금융중심지 추가 지정과 결단
서울과 부산에 이은 금융중심지 추가 지정이 논의되고 있다. 먼저 왜 금융중심지 육성이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 가능한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금융중심지 지정이 국내 금융산업의 지역 간 배분 논쟁으로 흘러가면 자칫 땅따먹기식이 되어 결론이 어떻든 상처만 남을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국제 금융도시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뉴욕, 런던, 홍콩, 싱가포르, 두바이는 물론 베트남, 카자흐스탄 같은 후발 주자들을 분석한 전문가들은 다음의 세 가지 축을 공통 요소로 지적한다.
첫 번째 축은 금융 법규를 포함한 규제 체계다. 이는 다시 세 가지 요소로 나뉘는데 그 첫째 요소는 금융 거래 규제 법규이다. IT 발달로 거래는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더구나 금융회사 간 경쟁 격화로 그 소요 시간은 점점 더 단축되고 있다. 부담할 리스크는 크게 증가하는 반면 이를 검토할 시간은 부족하게 된다. 규율 제도가 국제적 기준과 차이가 나게 되면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하는데 이는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점이다. 그래서 후발 금융중심지들은 금융 법규의 국제 정합성을 가장 최우선시하여 영미 법규를 적극적으로 채택할 뿐만 아니라 분쟁 해결을 위한 사법시스템도 과감하게 영미법적으로 개편하고 있다.
두 번째 요소는 금융 감독 방식이다. 국가별로 금융 감독 방식에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감독기관의 개입이 금융회사의 자율에 맡겨야 할 영역까지 확대되거나 개별 거래에 지나치게 깊이 관여하게 되면 경영 자율성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책임에 기반한 창의와 혁신도 발휘되기 어렵게 된다. 감독과 검사에 대한 금융회사의 신뢰도 중요한 요소다. 감독 방식과 태도가 국제적 정합성을 벗어날 경우 글로벌 기업에 큰 부담 요인이 되고 결국은 진출 자체를 주저하게 만든다.
셋째 요소는 외환거래 자율화이다. 외환거래가 불편하면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장기적으로 머물지 않는다. 외환거래 자율화는 국제 금융 생태계의 기본 조건에 가깝다. 만일 외환거래 자유화가 국제수지나 국내 외환시장에 야기할 교란이 우려된다면 금융중심지-역외 간 거래와 금융중심지 내 거래는 자율화하되, 국내 다른 지역과의 거래는 차단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고 본다.
두 번째 축은 어떨까. 조세 등 인센티브 제도이다. 법인세율, 금융 종사자의 소득세율은 국제 금융도시 경쟁에서 사실상 가격표 역할을 한다. 현행 우리나라 조세 경쟁력이 국제 금융중심지들과 경쟁하기에는 너무 낮다는 점이다. 국내 금융회사들의 비수도권 이전을 이끌기에도 부족한 세제 인센티브로 글로벌 금융회사와 전문 인력을 유치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더 강한 인센티브 패키지가 필요하다.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에게 남는 게 무엇이냐”는 반론이 따른다. 그러나 두바이는 초기부터 과감한 인센티브를 제공했고, 시간이 흐른 지금 그 금융은 두바이 경제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았다. 정부가 추진 중인 5극 3특 정책도 특정 지역을 우대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력을 갖춘 전략적 기능을 어디에, 어떻게 집적시킬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기능이 다른 거점에는 제도와 인센티브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센티브의 지역 간 형평성만 강조하다가는 더 큰 국가적 손실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세 번째 축은 정주 여건이다. 이 중 단연 교육 환경이 가장 중요하다. 금융 전문가들은 높은 수준의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는 집단이다. 자녀가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어떤 인센티브도 장기 체류를 끌어내기 어렵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언어 환경이다. 후발 국제 금융중심지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쾌적하고 안정적인 주거, 원활하고 편리한 국제·국내 교통인프라, 신뢰할 수 있는 의료 서비스도 빠뜨려서는 안 될 중요 요소이다.
이들 세 가지 핵심 축이 구현되는 마지막 조건은 국민적 합의와 정치적 리더십이다. 국제 금융은 신뢰의 산업이다. 정책이 일관되고 지속되지 않으면 어떤 금융회사도 장기 투자를 결정하지 않는다.
국내 금융중심지 추가 지정으로 국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진정으로 국제 금융중심지 육성을 원한다면 국내외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야 한다.
이상의 3대 축을 국제 수준으로 끌어올릴 결단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이 금융중심지 추가 지정을 앞둔 지금 우리가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이다.
2026-03-0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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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당신의 죽음은 안녕하십니까
얼마 전 〈부산일보〉를 통해 부산시의 공영장례가 부실하게 운영되어 이른바 ‘꼼수 장례’가 반복될 수 있다는 기사를 접했다. 최소 6시간으로 규정돼 있는 조문 시간을 단축하거나 조문이 공지된 시간에 빈소가 치워지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공영장례는 연고가 없거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장례를 치를 수 없는 이들의 존엄한 죽음을 돕는 제도다. 부산시는 2022년부터 공영장례 조례를 시행하여 햇수로 4년을 맞았지만 지난해에도 부실한 운영이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다.
기사를 접하면서 17년간 여성인권지원센터‘살림’에서 활동하며 겪었던 여성들의 죽음이 떠올랐다.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언니, 스스로 삶을 마감한 언니, 성구매자에게 살해된 언니…. 가족과 연락이 오래도록 끊겨 있거나 겨우 연락이 닿아도 시신 수습과 장례를 포기해서 활동가들이 대신 상주가 되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연고자인 언니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활동가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천도제를 치러 준 일도 있었다. 정경숙의 〈완월동 여자들〉에는 그 장면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살림’이 천도제를 지냈다는 소식에 완월동의 여성들은 “고맙다. 우리가 죽으면 누가 초상 치러줄까 걱정했는데 이제 안심이 된다”라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고 전한다. 20대 초반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이도 있었다. 멀리서 가족과 연락이 닿아 장례를 치렀지만 무연고 시신으로 처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다른 무연고자의 유골과 함께 봉안했다. 담당 활동가는 매년 그의 기일에 추모를 하러 공공봉안시설을 방문했다.
부산시 공영장례 부실 운영은
죽음에 대한 공적 인식 드러내
사회 활동가로서 접했던 죽음
공동체와의 연결성 되짚게 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죽음까지
외면 않는 사회가 될 수 있길…
완월동에서 나왔음에도 무연고자로 병원 중환자실에서 삶의 마지막 몇 개월을 보내야 했던 내담자 언니의 죽음도 잊을 수 없다. 새벽에 시신을 수습해가라는 병원 측의 연락을 받고 슬픔과 황망함에 어쩔 줄 몰라 울었던 당시의 내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다행히 성당에 다녔던 언니를 위해 신도들이 장례를 치러주고 미사를 올렸으며 가는 길 내내 추모와 애도를 함께 했다. 그때 장례를 치르고 정성스럽게 애도한다는 것이 살아가는 이에게도 크나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 공동체의 바깥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일은 인권 활동가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세상과 공동체 밖으로 소외된 삶의 연속선에 그 죽음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년학자 이기숙은 “죽음은 인간의 경험 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며 “함께 애도하는 것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가족과 종교라는 공동체는 죽음 앞에서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오늘날 사회에서 죽음은 더 이상 이러한 사적 공동체만의 몫이 아니다. 1인 가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고, 고령화는 이미 우리 사회의 일상이 되었다. 실제로 무연고 시신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무연고 시신 처리 현황에 따르면 부산시는 2012년 61건에서 2024년 683건으로 10배 넘게 증가했다. 서울, 경기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우리는 출생과 양육을 국가 정책의 문제로 받아들이면서도, 떠남은 여전히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부산반빈곤센터 임기헌 활동가는 죽음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공영장례가 자선이 아니라 기본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바탕으로 공영장례 조문단을 운영한 결과 처음에는 자선과 봉사의 마음으로 시작했던 시민들이 ‘존엄한 죽음은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공영장례는 이러한 시민들의 변화에 호응하는 정책이며, 시민들의 뜻을 제대로 새길 때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정책이기도 하다.
헬렌 니어링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사랑과 떠남은 삶의 일부이다.” 실제로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삶의 일부로서 죽음을 생각한다. 또한 죽음은 우리가 어떻게 사회나 공동체와 연결되어 있는지 새롭게 인식하게 만든다. 무연고자의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가는 곧 우리 자신의 마지막을 어떻게 상상하는가의 문제이며, 우리 사회가 어떻게 삶의 존엄을 지켜나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 죽음을 존엄한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때, 공영장례는 애도하고 애도받을 권리를 실현하는 좋은 정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공영장례는 우리 사회가 죽음을 얼마나 공적 책임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애도하고 애도받을 권리를 회복하고 공영장례와 같은 좋은 정책을 밑거름삼아 새로운 장례 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죽음을 외면하지 않는 사회, 시민의 관심과 좋은 정책은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끝없는 여정 속에 있다.
2026-03-04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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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전기가 곧 자본인 시대, 부산의 '에너지 경제학'
우리는 하루를 전기와 함께 시작한다.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지고, 밤새 충전된 스마트폰으로 아침을 연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흐르는 전기는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가장 조용하고도 강력한 자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조용한 에너지가 도시의 위상을 바꾸고 산업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지난 1월, 정부는 그동안 지연되었던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의 이행을 공식화하며 신규 대형 원전 2기와 소형모듈원자로(SMR) 1기 건설을 확정했다. 유력 후보지로 거론되는 동해안 벨트는 이번에도 우리 부울경 인근이다. 지역 사회에서는 또다시 수도권을 위한 ‘전기 공장’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하지만 철저한 안전장치와 제도적 혜택이 전제된다면, 역설적으로 이 상황은 부산에 위기이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수도권의 현실을 볼 때,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하나가 필요로 하는 전력만 무려 15GW, 이는 원전 약 10기 규모와 맞먹는 수준이다. 전력 자급률이 60%에 불과한 수도권은 이미 포화 상태다. 송전 과정에서 사라지는 전력 손실 비용만 연간 1조 6000억 원에 달한다. 최근 대두되는 ‘수도권 원전 건설론’은 현 전력 공급 체계의 모순이 임계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방증이다. 위험은 지방에 집중되고, 소비는 수도권에 몰리는 이 불균형한 전력 구조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최근 정부와 국회는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을 시행하며 “전기는 생산되는 지역에서 쓰이게 해야 한다”는 ‘지산지소(地産地消)’의 대원칙을 세웠다. 이에 따라 ‘송전 거리 비례 요금제(지역별 차등요금제)’ 도입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요금 체계 변화가 아니다. 바야흐로 자본과 기술, 인재가 ‘싼 전기’를 찾아 이동하는 ‘에너지 경제학’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부산의 경쟁력은 명확하다. 단순히 전기가 남는 도시가 아니라,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전력 공급망을 갖췄다는 점이다. 지난해 지정된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은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한다. 특화지역 내에서는 ESS(에너지저장장치)를 활용한 유연한 전력 운영으로 산업용 전기요금을 실질적으로 낮출 수 있다. 특히 데이터센터에 필수적인 UPS(무정전 전원장치)를 대체할 ‘ESS 기반 구독형 서비스’는 기업의 초기 투자 부담을 크게 줄여준다. 자본 효율성을 중시하는 AI·플랫폼 기업에 이는 매우 강력한 유인책이다.
변화는 이미 숫자로 증명되고 있다. 현재까지 부산에 유치된 데이터센터 투자 규모만 12조 7000억 원에 달하며, 마이크로소프트 등 15개사가 부산을 선택했다. 여기에 대한민국 해저 광케이블의 90%가 연결되는 통신 인프라는 부산을 단순한 항구 도시에서 데이터가 흐르는 ‘글로벌 디지털 물류 허브’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풍부한 전력’과 ‘초고속 통신망’, 그리고 원전 인접 지역의 가격 경쟁력까지 갖춘 도시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더 큰 가치는 ‘전기의 양’이 아니라 ‘전기의 질’이다. 구글을 비롯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이제 24시간 끊김이 없는 ‘무탄소 에너지(CFE)’ 사용을 기업의 필수 조건으로 요구한다. 원전이라는 확실한 무탄소 기저 전원과 수소 에너지 인프라를 동시에 갖춘 부산은 최적의 대안이다. 깨끗하고 저렴한 에너지가 있는 곳에 데이터센터가 들어서고, 그 위에 AI·반도체 등 고부가가치 산업이 뿌리내린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지역 청년들이 머물며 성장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진다.
이는 결코 부산만을 위한 주장이 아니다. 수도권 과밀에 따른 국가적 에너지 비효율을 해소하는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다. 전기가 있는 곳으로 산업이 이동하는 것은 정책 선택이 아니라 물리적 법칙이자 경제적 순리다. 이 순리를 따를 때, 부산은 수도권의 ‘대안’이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 지도를 다시 그리는 새로운 성장 축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산업용을 넘어 주택용까지 포함하는 전면적인 차등요금제 논의에 속도를 내고, ‘지산지소’ 원칙 이행에 대한 흔들림 없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이와 함께 거대한 에너지·산업 시스템을 운용할 혁신 인재 양성도 필수적이다. 이미 지역 대학들은 반도체·에너지 융합 전공 등을 운영하며, 산업 현장에 즉시 투입 가능한 실무형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도시는 늘 선택의 결과로 만들어진다. 전기가 산업 경쟁력의 척도가 된 지금, 부산은 다른 도시들이 갖기 힘든 최고의 패를 손에 쥐고 있다. 수도권의 전력난이 심화할수록 부산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분명해진다. 에너지의 흐름이 바뀌는 지금, 전력 다소비 기업들을 부산으로 이끄는 일은 필연적 선택이자 부산의 재도약을 위한 전략적 승부수다.
2026-03-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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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픽셀 라이프' 시대, 우리에겐 '버디'가 필요해
글로벌 IT 기업인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에는 ‘버디’라는 온보딩(조직 안착) 제도가 있다. 사수와 부사수라는 수직적 위계를 넘어, 먼저 입사해 조직 문화를 익힌 동료가 신입 사원의 짝꿍이 되어 조직 생활의 꿀팁을 다정하게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5년 전 재택근무를 시작하고 어느 정도 적응을 마쳤을 무렵, 나 역시 나보다 10년 차 이상인 실무자의 버디가 되어드린 적이 있다. 나이와 연차를 불문하고 ‘먼저 가본 길’에 대한 사소한 경험을 나누는 행위가 긴장을 얼마나 따뜻하게 녹여내는지, 그분께 받은 정성 어린 감사 편지로 체감했다. 일하며 처음 받아본 긴 편지는 업무를 돕는 역할을 넘어, 누군가에게 실질적 힘이 되어 주는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었다.
최근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단연 ‘픽셀 라이프’다. 김난도 교수팀의 저서 〈트렌드 코리아 2026〉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거대한 메가 트렌드에 몸을 싣기보다 개개인이 독립된 픽셀처럼 파편화돼 자신만의 마이크로 트렌드를 짧은 주기로 소비하고 빠르게 전환한다. 이러한 흐름은 일터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특히 재택근무는 조직이라는 거대한 화면에서 하나의 ‘픽셀’로 분리되어 나온 상태에 가깝다. 사무실이라는 물리적 울타리 안의 구성원이 아니라, 각자의 독립된 공간에서 자신을 스스로 경영해야 하는 개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업무 능률을 높여줄 도구를 찾거나 온라인에서 동료를 찾는 행위는, 이 파편화한 일상에서 나만의 단단한 업무 환경을 구축하려는 노력이다.
개개인은 독립 픽셀 같이 파편화
재택근무는 이 같은 현상의 정점
수직적 위계 아닌 짝꿍의 중요성
훈계보다 넘어져 본 경험 나누면
치열한 삶에서도 연대·성장 가능
그런 짝꿍 같은 '버디'가 내 목표
문제는 이처럼 ‘분리된 픽셀’로 지내는 일상이 생각보다 날카로운 부작용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나 역시 재택 2년 반 만에 번아웃을 겪으며 휴직을 선택해야 했다. 마냥 편해 보이기만 하는 재택근무였지만, 홀로 성과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과 정서적 소통의 부재는 나를 서서히 갉아먹었다. 휴직 기간 내내 마음 한구석에는 ‘이대로 뒤처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자리 잡았다. 그때 읽은 구본형 저자의 〈그대, 스스로를 고용하라〉는 서늘한 각성을 주었다. 진정한 위기는 직책의 상실이 아니라, 스스로의 방향을 잃은 채 고립되는 데 있다는 지적이었다. 당시 내게 간절했던 것은 지시를 내리는 권위적인 멘토가 아니라, 파편화한 일상 속에서 삶의 속도를 조절해 줄 ‘버디’였다.
복직과 함께 누군가 나의 궤도를 수정해 주길 기다리기보다, 스스로가 버디를 찾아 나설 환경을 직접 구축하기로 결심했다. 회사라는 시스템이 챙겨주지 못하는 일상의 리듬을 스스로 관리하되, 그 과정을 혼자가 아닌 ‘느슨한 연대’ 속에서 해결하려고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시도가 비단 나만의 고군분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2026년 현재, 우리 사회는 이른바 ‘삶잘러(삶을 잘 살아내는 사람)’를 추구하는 활기로 가득하다. 모니터 앞에서 고립되는 대신 SMCC(서울 모닝 커피 클럽) 같은 커뮤니티를 통해 느슨하게 연결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새벽에 일어나 책을 읽고 러닝을 하며, 때로는 아침 커피 한 잔과 함께 DJ 음악에 맞춰 파티를 즐긴다. 누군가는 이를 유난스러운 유행이라 볼지 모르나, 사실 우리는 픽셀처럼 쪼개진 일상 속에서 나처럼 애쓰는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며 위로받고 싶을 뿐이다. 정답을 훈계하는 스승보다, 먼저 넘어져 본 경험을 담담하게 나눠줄 버디를 서로에게서 찾는 셈이다. 픽셀과 픽셀이 만나 더 선명한 화질을 이루듯,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개인들이 그렇게 연대하기 시작했다.
재택근무 6년 차가 된 지금, 과거와는 전혀 다른 리듬을 갖게 되었다. 점심시간이면 SNS를 통해 재택러들을 위한 ‘일잘러 꿀팁’을 공유하고, 영어 챌린지에 참여하며 끊임없이 스스로를 온보딩한다. 이는 단순히 N잡러가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고립된 환경에서 존재 이유를 확인하고,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한 치열한 과정이다.
내가 유버디라는 필명으로 〈부산일보〉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30 세대가 픽셀처럼 분절된 삶 속에서 느끼는 불안과 감정의 파고를 생생하게 전달함으로써, 기성세대에게는 새로운 시대의 일터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진심을 전하고, 동료 세대에게는 다정한 지지자가 되고자 한다. 자기만의 고독한 방에서 새 도전을 시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나의 글이 하루를 버티게 할 작은 이정표가 되길 바란다. 버디의 진정한 역할은 성공 신화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가 본 길의 걸림돌을 살짝 치워주는 다정함에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 닿아 삶의 리듬을 되찾는 데 작은 보탬이 되었다면, 오늘 버디로서의 할 일 하나는 끝냈다고 믿는다. 이제 당신의 다정한 버디로서, 차가운 모니터 속 뜨거운 세계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2026-02-2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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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축제 뒤, 부산 자본은 어디로 갔는가
해마다 9월이면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인을 불러 모으고, 11월엔 지스타가 벡스코를 가득 채워도, 사람과 함께 몰려온 자본은 축제가 끝나는 순간 빠져나갔다. 흥행은 부산에서, 수익은 수도권에서. 이 구조가 반복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투자를 구하려면 서울로 가야 했고, 자본이 있는 곳으로 기업도 따라 움직였다. 부산은 무대를 제공했지만 금융의 의사 결정권은 끝내 지역 안에 없었다. 부가가치가 결정되는 순간마다, 부산은 바깥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했다.
이번 조각투자 장외거래소 부산 유치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첫 시험대다. 금융위원회 예비인가를 받은 KRX(한국거래소) 컨소시엄에는 코스콤과 BNK금융 계열사 등 지역 금융기관이 참여했다. 설계 단계부터 지역이 참여했다는 점이 이전과 다르다. 본인가 요건 이행과 시스템 구축이라는 과제가 남아 있지만, 기회의 문은 열렸다. 그 문을 결과로 이어붙이는 것은 이제 부산의 실행력에 달려 있다. 조각투자 거래소는 자산을 쪼개 발행하고 시장에서 유통하는 자본 순환의 마지막 고리이자, 그 자산을 담는 그릇이다. 그렇다면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부산에는 이미 자산이 있다. 영화제와 지스타를 통해 부산이 공들여 키워온 콘텐츠 IP가 바로 그것이다. 영화제에서 발굴된 유망 콘텐츠나 지스타를 통해 가능성을 증명한 게임들은 흥행 잠재력이 충분함에도 자금 조달을 위해 서울의 벤처캐피털을 찾아가야 했다. 조각투자거래소가 생기면 상황은 비로소 달라진다. 영화 판권이나 게임의 미래 수익권을 조각투자 증권으로 발행해 시민과 투자자가 직접 참여한다. 흥행의 결실이 부산의 거래소를 통해 지역에 남는 구조를 만든다. 행사를 여는 도시에서 자본을 설계하는 도시로, 그 실질적인 시작점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변화의 의미는 금융 지형에 그치지 않는다. 부산의 창작자와 제작사가 외부 자본에 종속되지 않고 지역 시장 안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생태계의 변화다. 축제가 열릴 때 자본이 스쳐 지나가는 도시가 아니라, 축제가 끝난 뒤에도 자본이 남는 도시. 그 그림을 완성할 자산은 콘텐츠에만 있지 않다.
콘텐츠가 출발점이라면, 부산항은 그 다음 무대다. 국내 최대 환적항인 부산항은 수산물·원자재·소비재가 쉼 없이 오가는 물류의 심장이지만, 그 흐름에서 파생되는 수익권을 지역이 직접 설계한 적은 없었다. 수산물 유통 수익권이나 해운 화물에서 발생하는 미래 수익 구조를 조각투자 증권으로 발행해 부산의 거래소에서 거래한다면, 부산항은 자본의 무게를 실어 나르는 통로에서 자본이 만들어지는 시장으로 바뀐다. 콘텐츠와 물류, 두 축이 하나의 자본시장 안에서 연결될 때 부산의 그림은 비로소 완성된다.
그러나 인프라는 시작일 뿐이다. 진짜 과제는 역량의 지역화다. 발행의 구조 설계부터 유통의 리스크 관리, 자산 표준화와 투자자 보호까지, 그 역량이 지역 안에서 갖춰지지 않는다면 플랫폼만 부산에 있고 핵심 판단은 외부에서 이뤄지는 또 다른 분업 구조가 반복될 뿐이다. 이번에는 기능이 아니라 역량이 남아야 한다. 인력은 기회를 따라 움직이고, 기회는 시장을 따라 형성된다. 부산시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할 일은 지역 대학·연구기관과 함께 전문 인력 양성 경로를 설계하는 것이다. 부산에 조각투자거래소가 문을 여는 날, 그 안을 채울 사람이 외부인뿐이라면 지역화는 허울에 불과할 수 있다.
조각투자는 아직 대중의 신뢰를 충분히 얻지 못한 시장이다. 그렇기에 설계의 출발점은 속도가 아니라 신뢰여야 한다. 이상거래 탐지, 투명한 공시, 안정적인 수탁·결제 구조는 경쟁력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이 체계를 외부 용역에만 의존할 경우, 거래소는 또 다른 취약성을 안게 된다. 한 건의 사고가 수년간 쌓아 올린 평판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수 있다. 지역 대학과 기술 기업이 보안과 운영 역량을 지역 안에서 키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뢰가 먼저 쌓여야 부산의 이야기가 투자 상품이 되고, 부산의 항만이 포트폴리오가 된다.
부산은 오랫동안 선언의 도시였다. ‘동북아 해양수도’, ‘글로벌 허브도시’, ‘스마트시티’. 비전은 매번 화려했지만 구조로 이어지지 않았고, 자본은 끝내 머물지 않았다. 조각투자거래소 유치가 그 반복과 다른 것은, 이번엔 선언이 아니라 설계에서 출발했다는 점이다. 발행·유통·수탁·보안이 지역 산업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자본은 비로소 머문다. 그 연결을 완성하는 것이 지금 부산의 과제다. 축제가 끝난 뒤에도 자본이 남는 도시. 그 답을 부산이 스스로 써야 할 때다.
2026-02-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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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지자체 홍보 지속가능성 묻게 한 '충주맨' 사직
‘충주맨’ 김선태 충주시청 뉴미디어팀 팀장이 공직을 떠난다. 그는 지난 13일 충주시 공식 유튜브 채널 ‘충TV’에 올린 영상을 통해 “공직에 들어온 지 10년, 충주맨으로 살아온 지 7년의 시간을 뒤로 하고 이제 작별 인사를 드리려 한다”며 사직 의사를 밝혔다. 7년을 마무리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36초. 댓글에선 간결한 퇴장에 “충주맨 답다”는 반응이 뒤따랐다.
선출직을 제외하면 충주맨 김선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무원일 것이다. 2018년 고등학교 동창인 조남식 주무관의 뒤를 이어 충주시 소셜미디어를 맡게 된 그는, 공무원 사회에선 상상하기 어려웠던 ‘B급 감성’의 웹 포스터로 온라인에서 주목받았다. 때마침 시작된 유튜브 열풍은 그에게 일생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인터넷 밈을 활용해 빠른 호흡으로 담아낸 그의 홍보 방식이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충TV는 2019년 개설되자마자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한때 97만 명에 달하는 구독자를 모으기도 했다. 약 21만 명인 충주시 인구의 네다섯 배에 달하는 숫자다.
충주시 뉴미디어팀장 돌연 퇴직 의사
7년 동안 독특한 시정 포스팅 유명세
전 시장 전폭 지원에 전국 인기 몰이
단체장 바뀌면 홍보 정책 대거 변경
6월 지선 뒤에도 유사 사례 우려돼
'홍보 브랜드는 자산' 인식 확산되길
충TV의 흥행에 조길형 전 충주시장의 역할이 컸다는 건 잘 알려졌다. 조 전 시장이 있었기에 충주맨도 엄격하고 경직된 공직사회에서 자기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 수 있었다. 같은 이유로 온라인에선 충주맨의 사직이 당연한 결과라는 반응도 나온다. 비단 공무원을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되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유튜브 댓글 창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충주맨이 계속 자리를 지킨다면 험한 꼴 당할 것”이라는 반응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시장 교체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조길형 전 시장은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처음 충주시장에 당선돼 내리 3선을 지냈다. 우리나라 지방자치법(제108조) 상 지방자치단체장은 세 번까지만 연달아 재임할 수 있다. 사람들이 벌써부터 우려하는 건, 우리나라에서 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시정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지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전임자와 후임자의 소속 정당이 다르기라도 하면 변화의 폭은 더욱 커진다. 전임자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다.
실제로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후 많은 지역에서 권력 교체가 이뤄졌다. 덩달아 슬로건·캐릭터 등 시의 홍보 브랜드도 바뀌었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더러는 ‘흑화(악화)’된 경우도 적지 않다. 대전광역시는 그런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대전은 2020년 9월 새 브랜드 슬로건으로 ‘대전 이즈 유(Daejeon is U)’를 채택했다. “대전이 바로 당신이다”라는 의미인데, 충청도 사투리 “대전이쥬”를 연상케 하는 문장으로 많은 이들에게 참신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 슬로건은 2022년 지방선거로 시장이 바뀌면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자리를 대체한 시정 구호는 ‘일류 경제도시 대전’. 조례 개정 없이 브랜드 슬로건을 내리고 시정 구호를 내건 데 따른 ‘꼼수 교체’ 의혹도 나온다. 경기 고양특례시 또한 시장 교체 이후 ‘고양고양이’ 캐릭터를 ‘가와지볍씨’로 교체했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시의 캐릭터를 시장 한 명 바뀌었다고 교체하는 게 타당하냐는 비판은 지금도 제기되고 있다.
지금 당장의 지지율만 놓고 보면 이번 지방선거에서 적지 않은 지방자치단체장들의 교체가 예상된다. 2022년 지방선거는 직전에 있었던 대선 효과로 국민의힘이 승리를 거뒀다. 지금은 상황이 반대로 바뀌었다. 한국갤럽이 지난 13일 공개한 정기 여론조사에 따르면 더불어민주당 정당 지지율은 44%를 기록했다. 국민의힘은 그 절반인 22%에 그쳤다. 부산·울산·경남에서도 더불어민주당(39%)이 국민의힘(24%)을 크게 앞섰다. 더군다나 지방선거는 선거 종류와 후보자 수가 많아 유권자들이 줄투표를 하는 경향이 있다. 단체장을 이기면 광역·기초의원도 줄줄이 이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단체장이 브랜드 교체를 결정했을 때 지방의회가 견제하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의미한다. 혈세 낭비는 오롯이 지역민들의 몫이다.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지자체 홍보의 중요성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수도권에서도 “양산시장이 누군지는 몰라도 양산시청 홍보팀 팀장과 주무관이 누구인지는 안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슬로건·캐릭터 등 브랜드도 지역의 자산인 시대다. 이 중요한 자산이 단체장 개인의 치적 쌓기용 도구로 전락해 새 단체장이 들어설 때마다 갈아엎어진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충주맨은 과거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당시 “시장님이 바뀌면 (자신도) 순장”이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낸 적이 있다. 지방선거를 목전에 둔 지금, 그 발언은 단체장 교체 시기마다 존폐의 기로에 서는 지자체 홍보에 지속가능성을 묻는 것만 같다.
2026-02-18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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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K문화 성공이 주는 도시 정책의 메시지
요즘 다양한 미디어와 채널에서 전 세계인이 한국문화를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접한다. 과거에는 콘텐츠 소비에 그쳤다면 이제는 K라이프스타일 자체가 하나의 글로벌 트렌드가 된 듯하다.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인처럼 살아보는 여행 코스를 체험하는 데일리케이션이 열풍이다. 치안이 안전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밤낮으로 즐길 거리가 많다는 것도 널리 알려졌다. 세계인에게 한국의 각종 문화 콘텐츠와 제품이 각광을 받는 지금, 문화처럼 도시와 주거 정책도 글로벌 표준으로 거듭날 방안은 없을까.
우리나라는 문화 강국으로 세계의 큰 주목을 받고 있지만 내부로 눈을 돌리면 지역 불균형 문제와 주거 불안을 안고 있다. 우리나라는 서울 등 수도권 인구가 50%를 넘어섰다. 수도 초집중형 국가인 일본은 수도권 인구가 전체의 30%, 프랑스는 파리권 과밀 인구가 국가 인구의 20%에 이른다. 우리는 선진국 중에서도 집중도가 높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수도권 집중이 고착화 구조가 아니라 전환 가능한 중간 단계에 머문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한층 다양한 균형발전 정책이 필요하다.
균형발전 정책과 함께 늘 이슈가 되는 것은 주택 공급 정책에 대한 논의다. 정부는 3기에 이르는 신도시 개발과 노후 주거지 정비사업을 통해 꾸준히 서울과 수도권 주택을 늘려왔음에도 수도권은 공급 부족인 상태이고 지방은 오히려 공급 과잉인 상태다. 그동안의 주택 공급 정책은 단기간에 양적 공급을 늘리려는 데 초점이 있었고 결국 주택 공급의 딜레마는 어디에 얼마나 공급할지 문제에 집중되며, 이는 곧 국가 균형발전 논의와 연결된다.
사실 주택 공급 정책과 균형발전 두 정책은 목표부터 엇갈릴 때가 많았다. 집값 안정을 위해 수도권의 공급을 늘리면 인구와 자원이 더 서울로 집중되고, 지방 발전을 위해 수도권 규제를 강화하면 서울 집값 급등 등 부작용을 감내해야 한다. 수도권 주택난 대응과 지방 살리기 사이에 우선순위가 엇갈릴 때마다 충돌이 표면화되었다. 충돌 원인은 주택 공급을 위한 정책의 단기성, 중앙집권적 정책 결정 구조, 수도권 집중 근본 요인의 잔존이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점이 존재하는 상태에서 국가 차원의 공간 정책과 시장의 힘이 충돌하며 정책 목표 달성이 어려웠다.
그런데 K컬처의 전 세계적 성공은 도시주거 정책 설계에 통합적 힌트를 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대중음악이 세계 주류시장에서 성공하기란 요원해 보였다. 여러 장벽이 존재했는데, 글로벌 시장 진입장벽이 높았고 자본과 인프라의 부족 등이 문제였다. 2000년대 이후 이런 장벽들은 창의적 전략으로 무의미해졌다. 디지털 플랫폼을 적극 활용하였고, 열성적인 팬덤과 커뮤니티도 자발적 마케팅 주체로 활약하여 자본 부족을 보완했다. 글로벌 협업과 현지화로 제작 규모와 품질을 향상시켰다. 지역 기반 축제와 인프라 확충으로 젊은 해외 팬들을 지역으로 유인했다. 정부의 지원 정책과 민간 투자의 혁신적 시스템으로 민관의 협력적 생태계를 구축했다.
이 외에도 K컬처 성공의 이면에는 전략적 조율이 있었다. 국내 시장을 등한시하지 않되 해외를 향한 혁신을 계속하며 로컬과 글로벌 요소의 전략적 결합을 이루었고, 국내외의 다원화된 허브를 형성하고 국내 각지에 특화된 행사와 시설을 마련했다. 생활문화와 산업의 결합으로 문화 향유를 관광 유통 제조산업과 연계함으로써 경제적 가치를 창출했다. K컬처 성공 전략은 상충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는 통합적 사고와 전략적 조화의 산물로서, 이는 곧 도시와 주거 정책에도 통섭의 지혜를 적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K컬처가 서울 일극 체제를 완화하고 여러 국내외 거점을 활성화했듯 주택·도시 정책도 다중 중심지 전략을 취할 수 있다. 둘째, 주택 공급에 지역의 생활문화와 산업을 결합하여 도시 정체성을 바꾸고 지속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 셋째, 다양한 주체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중앙정부, 지자체, 주민, 민간 기업의 공동 목표를 설정하고 비전을 실행할 수 있는 중심기관을 마련한다. 마지막으로 K컬처가 콘텐츠의 꾸준한 품질관리로 결국 성공한 것처럼, 주거의 질과 안전을 중시하고 주민들이 자부심을 느낄만한 지역 공동체를 강화하는 것이다.
K컬처가 보여준 유연하고 창의적인 생태계 구축의 사례는, 주택 공급 확대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두 가지 목표 통합에 값진 통찰을 준다. 주택 정책이 곧 지역 균형 정책이고 지역 발전이 곧 주거복지와 연결된다는 관점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가능함을 시사한다. 한국 문화의 세계적인 성공에서 해답을 찾는다면 우리의 주거 및 도시 정책 역시 글로벌 표준이 될 날이 멀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2026-02-09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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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세대가 만나면 도시가 자란다
지난달 스페인을 여행하며 마드리드 구시가지 센트로 지구의 한 라이브 음악 카페를 찾았다. 오래된 영화관을 개조한 이곳에는 매표소와 팝콘 가판대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주말 낮, 40대 밴드가 무대에 오르고 20대부터 60대까지의 사람들이 함께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이 공간을 영화관으로 기억하는 이들과 카페로 기억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같은 장소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을 지닌 세대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는 이 공간이야말로 이 도시가 지닌 힘의 정체였다.
부산 외곽을 운전하다 발견한 대형 실버타운은 이 장면의 정반대에 가까웠다. 노인을 위한 세심한 동선, 편리한 시설, 고급스러운 외관. 모든 것이 잘 갖춰져 있었지만, 사방이 대로와 도시 고속도로로 둘러싸인 그곳은 부산 시민의 일상적 생활권과는 분리돼 있었다. 부산시는 고령화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시니어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2025년부터는 ‘부산형 시니어 적합 직무 채용 지원사업’을 통해 60세 이상을 고용한 기업에 인건비를 지원하고, 각 구마다 노인복지관을 운영하며 교양·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노인 인구가 빠르게 늘어나는 도시에서 자연스러운 행정 대응이며 필요한 절차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멀리서 바라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있다는 점이다. ‘60세 이상 전용’, ‘노인복지관’, ‘경로당’이라는 명칭은 공간과 사람을 구분한다. 세대 분리는 정책 집행을 위해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일 수 있지만, 도시 전체의 지속 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분리는 한 세대의 경험과 기억이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전달되는 경로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세대 간 교류가 사라지면, 도시가 품어야 할 다양성 역시 함께 줄어들 것이다.
1505년 폴란드에서 제정된 ‘니힐 노비(Nihil novi)’ 법은, 공동의 동의 없이는 새로운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원칙을 담고 있다. 훗날 ‘우리에 관한 일은 우리 없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로 요약되는 이 원칙은 참여와 소통이라는 정치의 기본을 일찍이 제시한 사례다. 부산의 시니어 정책에도 이 원칙은 유효하다. 노인을 ‘분리’하고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여러 세대가 함께 기획하고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 생활권에 필요하다. 각 연령층을 위한 독립된 지원 제도는 이미 충분히 마련돼 있다. 이제는 세대가 출발선부터 함께할 수 있는 구조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예컨대 노인복지관과 도서관, 청년 문화공간이 각각 따로 존재하는 대신, 하나의 생활권 안에서 동선과 기능을 의도적으로 겹쳐 설계하는 것이다. 오전에는 노년층의 프로그램이 중심이 되고, 오후에는 학생과 청년들이 드나들며, 저녁에는 세대가 섞여 머무는 공간. 세대를 구분하는 간판 대신 시간과 사용 방식이 공간을 나누는 구조다. 중요한 것은 그 공간의 목적과 언어가 특정 세대에만 과도하게 기울어 있지 않은지, 이용 방식이 어느 한쪽의 편의만을 전제로 설계돼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외국어가 난무하는 환경, 특정 연령층의 사용 방식을 기준으로 한 안내와 동선은 의도치 않게 다른 세대를 배제한다. 특정 세대를 위해 새로운 건물을 짓거나, 특정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보다는 세대가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같은 공간을 쓰고, 같은 동선을 지나고, 같은 시간대를 공유하는 환경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 생각할 때다.
부산은 청년들이 떠나는 도시로 자주 언급된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이들이 ‘언젠가 돌아오고 싶은 도시’로 꼽는 곳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부산만의 도시적 감각 때문이다. 이 감각은 오랜 세월 부산을 일궈온 어른 세대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서로가 만나서 함께 어울릴 공간은 충분하지 않다. 이것이 지금의 부산이 안고 있는 모순이다. 세대 간 소통의 통로가 막혀 있으면 아무리 다양한 세대가 공존해도 도시는 그 힘을 활용하지 못한다. 위로부터의 정책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아래로부터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는 공간과 환경이다. 부산의 생활권 안에, 세대가 일상적으로 교차하고 각자의 기억이 공존하는 장소가 필요하다.
부산의 미래는 ‘노인을 위한 도시’도, ‘청년을 위한 도시’도 아니다. 서로 다른 세대가 같은 공간에서 만나 각자의 이야기를 나누고, 자연스럽게 배우는 도시다. 마드리드에서 만난 카페가 보여준 역동성을 부산의 골목에서도 찾고 싶다. 20대와 30대만 모인 ‘유행을 좇는 공간’이 주는 활기와는 다른, 세대가 섞일 때만 생기는 온기를, 오래된 기억과 새로운 꿈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공간을. 그것이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고 싶은 부산을 만드는 길이다.
2026-02-0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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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미국 우선주의'와 ‘동맹의 가치' 사이
새해 벽두부터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다.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사건들은 단순한 개별 국가 간 갈등을 넘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어 온 국제질서 전반을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지경학적 위기와 지정학적 대립이 맞물리며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거대한 전환기에 서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는 한마디로 파격적이다.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을 현지에서 체포해 미국 법정에 세우는 초강수를 두었고, 그린란드를 영토로 확보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해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동북아로 시선을 돌리면 대만 문제를 둘러싸고 중국과 일본이 정면으로 맞서며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여기에 장기화하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북러 접근, 그리고 높아지는 북한의 대남 공세 수위는 우리의 안보를 불안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격변의 흐름을 관통하는 핵심 기류는 무엇인가.
먼저, 기존 다자주의 질서에 대한 미국의 근본적 회의와 반발이다. 1945년 이후 국제사회는 국제연합(UN)을 중심으로 국제법과 다자협력 체제를 구축했고, 이는 자유무역과 평화를 제도화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 질서 아래에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등은 안정적인 안보와 무역 환경을 토대로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특히 중국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내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활용해 각종 특혜를 누리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 결과가 미국의 패권에 대한 본격적인 도전으로 이어지자 미국 내부에서는 기존 국제규범이 더 이상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불신이 확산됐다. 국제법과 다자협정이 오히려 미국의 전략적 선택을 제약하고 경쟁국의 부당한 이익을 방치한다는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운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은 이러한 분노와 회의의 집약체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국제법은 필요 없다”고 단언한 발언은 더 이상 규범과 외교적 수사에 얽매여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다음은 국제질서의 현상 변경을 시도하는 세력에 대한 미국의 타협 없는 견제다. 베네수엘라의 마두로 대통령 체포는 원유 결제 대금을 달러화 대신 중국 위안화로 전환하려는 시도를 차단하려는 의도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린란드에 대한 집착 역시 같은 맥락이다. 기후 변화로 열리는 북극항로는 미래 핵심 물류 통로가 될 가능성이 크며, 이를 선점하려는 중국과 러시아를 지금부터 차단해야 현상 변경을 막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여기에 그린란드에 매장된 막대한 희토류는 중국의 ‘자원 무기화’ 전략을 무력화할 전략 자산이기도 하다.
이러한 미국의 인식 변화는 동맹 체제에도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맹조차 미국 국익의 하위 개념으로 재편되고 있다. 과거에는 민주주의와 인권, 자유시장경제라는 공통 가치가 동맹을 결속시켰지만, 트럼프의 미국에서 동맹은 비용과 편익으로 계산되는 거래 관계에 가깝다. 미국의 전략에 보조를 맞추지 않는 동맹국은 언제든 특별 대우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냉혹한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일찌감치 읽고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취임 이후 트럼프 대통령과 개인적 신뢰를 구축하며, 안보 관련 법 개정과 동맹 현대화 요구에 신속히 화답하고 있다. 관세 협상 역시 빠르게 합의와 실행으로 옮기고 있다. 물론 일본 내부에 반발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최강국 미국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미국 우선주의’ 정책에 반하는 행동으로 미일 동맹이라는 핵심 가치를 희생할 수 없다는 전략적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국제정치는 냉엄하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형식에 그친 한미 간 신뢰 구축 제스처는 오히려 불신을 키울 뿐이다. 최근 한국의 온라인 플랫폼 규제에 대한 미국의 공개적 불만 표명이나 갑작스러운 25% 관세 부과 언급 역시 미국의 ‘우선주의’ 정책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양보 없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과 국제 정세 변화로 더욱 중요해진 ‘한미동맹의 가치’ 사이에 서 있다. 고약한 것은 전자를 만족시켜야 후자가 유지되고, 전자를 거스르면 후자가 위태로워진다는 점이다. 동맹의 가치를 낮게 본다면야 별개겠지만, 그것은 국가 운명을 건 거대한 모험이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감정이 아닌 현실주의에 입각한 냉정한 판단이다.
2026-02-02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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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블라디보스토크 하늘길 빨리 다시 열려야
발해의 동쪽 끝이었던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는 예부터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근대에 들어와서도 일본이나 미국보다 앞서서 한인 디아스포라가 처음으로 형성된 곳이며, ‘대한국민의회’라는 이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장 먼저 선 한국 독립운동의 북방 기지였다. 북방을 떠도는 유이민의 아픔을 노래한 일제 강점기 시인 이용악, 그의 시 ‘우라지오 가까운 항구에서’의 ‘우라지오’도 블라디보스토크를 말한다. 블라디보스토크라는 이름은 러시아어로 ‘동방을 점령하라!’라는 뜻으로, 1860년부터 러시아 제국 정부가 기울어가는 청나라를 겁박하여 차지하기 시작한 땅이었다. 도시로 성장한 건 146년 전인 1880년으로, 2018년 12월부터는 하바롭스크를 제치고 러시아 연방의 ‘극동 연방 구’의 ‘지역 수도’로 발돋움했다. 극동개발과 아시아 중시정책의 하나로 푸틴 행정부가 2015년부터 ‘동방 경제포럼’을 열고 있는 이 도시는 앞으로 남북문제가 다시 풀리고 부산~북극항로가 현실화될 경우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올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블라디보스토크와 부산 사이에 하늘길이 4년째 끊어져 있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진 이후에 줄곧 그렇다. 직항로가 닫혀있으니 사람과 물자의 왕래가 쉽지 않아서 재외국민, 경제인과 상인들, 유학생, 관광객들의 고충과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2011년부터 해마다 부산에서 열리던 부산~극동 러시아 경제포럼도 이래서 ‘개점휴업’상태다. 이전에는 이렇게 냉랭하지 않고 사이가 좋았다.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오가는 가까운 거리인데다 편 수가 많을 때는 주 12회나 다녀서 서로 왕래가 잦았다. 1992년 6월에 두 도시 사이에 이미 자매도시 협정이 맺어졌고, 협정 체결 20주년 축하행사가 부산시 대표단과 문화공연단이 참석한 가운데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성대하게 열리곤 했다. 9288km의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떠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역 근처에 앉아있으면 곳곳에서 부산 사투리가 들렸으며, 부산의 대형 병원이나 서면 의료단지도 러시아 환자들로 북적였다. 러시아엔 종합검진, 성형, 암 치료, 뼈 수술 수요가 많다. 이들이 예전의 독일이나 이스라엘에서 한국으로, 특히 높은 의료 수준과 비교하여 치료비와 물가가 싸고 산과 바다가 같이 있는 부산으로 많이 왔기 때문이다.
물론, 하늘길이 막혀있는 지금 상황에서도 배로는 연해주를 오갈 순 있다. 그리고 중국이나 몽골로 돌아서 가면 항공이나 기차로도 러시아 입국이 가능하다. 그러나 배는 멀리 강원도의 속초나 동해시를 거쳐야 하는데다 멀미, 독과점요금, 불편한 출항 일정 등으로 이용하기가 쉽지 않고, 우회 항공로도 비용, 시간, 편의성 면에서 문제가 많긴 마찬가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는 지인 올가(55)는 딸이 열성적인 한류 팬이라서 중국의 상하이를 거쳐 모녀가 함께 부산을 가끔 찾는다. 그런데 항공편 때문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직항이 있을 때보다 항공료도 2~3배 비싸고 환승 대기시간도 길어요. 한국정부의 서방 제재 동참, 러시아 정부의 한국에 대한 ‘비 우호 국가’ 지정, 그런 과거를 넘어서 이젠 직항로를 복구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라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하늘길을 계속 막고 있을까? 러시아 정부는 처음부터 항공망 폐쇄에 반대했다. 답은 대한민국이다. 일본 정부도 우리와 비슷하지만, 실리에 밝은 일본은 그래도 작년 초부터 크렘린과 물밑에서 직항 재개를 활발히 논의 중이다. 일본 방문을 원하는 러시아인들을 위해 올해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일본 비자 발급 센터를 다시 연다는 보도도 있다. 이렇게 서로 다투면서도 협력할 일을 찾아 협조하는 게 맞지, 아예 길을 계속 막고 있는 건 아니라고 본다. 한번 정한 정책이라고 끝까지 밀고 가는 아집과 고집이 문제를 계속하여 악화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에 러시아 측에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2023년 12월, 2024년 6월, 지난 1월 15일 등 세 번에 걸쳐 한러 관계의 실용적 접근과 회복을 강조하였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요지부동이다. 의아한 건 ‘민생 정권’이라는 현 정부의 태도인데,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직항로 폐쇄만은 앞 정부의 정책을 그대로 붙들고 있을 심산 같다. 이러다 보니 지난해 10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에서는 특이한 기자회견이 열렸다. 동북아평화연대 등 시민단체, 동포단체 등 128곳이 공동의 이름으로 “재외국민과 고려인 동포 15만 명의 이동권을 침해하지 말라!”라며 한·러 직항 항공편 재개를 직접 촉구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까지도 정부든 국회든 이에 대해 들은 척 만 척한다. 일단 막힌 하늘길부터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경제, 사회문화, 교육 등 여러 방면에서 부서진 두 나라 관계에 다시 핏기가 돌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원하는 북극항로도 한반도 쪽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설 것이다.
2026-01-28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