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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사람을 살리는 AI, 죽이는 AI
윤이형의 단편소설집 〈작은 마음 동호회〉에는 ‘수아’라는 SF 단편이 실려 있다. ‘수아’는 수많은 여성형 로봇의 이름이다. 가사를 돕는 지적이고 상냥한 ‘수아-687’은 도서관 사서로 재배정되어 일을 하다가 이용자들의 성적 착취, 혐오, 만연한 차별을 겪고 사라졌다. 이후 ‘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로봇들의 세상을 향한 테러가 시작된다. ‘수아’는 원래 주인이었던 인물에게 다가가 위협하며 “네가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해 봐”라고 말한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존엄을 시험하는 시대에 이 말은 불길한 울림을 남긴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으로 떠오른 AI는 산업과 일상의 거의 모든 영역을 바꾸고 있다. 최근 등장한 ‘피지컬 AI’처럼 물리적 환경과 직접 상호작용할 수 있는 기술은 상상 속의 미래가 아니라 곧 현실이 될 것이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모델이 출시되는 지금, 기술이 보여주는 놀라운 가능성에 비해 우리가 그것을 다룰 정신적 성숙은 충분히 이루어졌을까? AI기업들이 슬며시 성인용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몇 년 전 읽은 '수아'가 떠올랐다.
실제로 AI 성인용 콘텐츠 시장은 빠르게 커지고 있다. 일론 머스크의 xAI가 내놓은 챗봇 그록이 ‘스파이시 모드’를 도입했고, 메타의 성인용 대화 기능에 이어 오픈AI는 ‘에로티카’라는 이름의 성인용 서비스를 도입하겠다고 밝혀 논란이 됐다. 오픈AI의 창업자 샘 올트먼은 “우리는 세계의 도덕 경찰이 아니다. 사회가 R등급 영화의 경계를 설정하듯 우리도 비슷하게 하겠다”고 했다. 기업이 성인용 콘텐츠에 진입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성적 판타지와 감정 노동만큼 상업화하기 쉬운 영역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수익은 우리가 내고, 책임은 사회가 져라”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해외 매체들이 올트먼의 논리를 전통적인 포르노 산업이 사용해온 자유시장주의 논리와 유사하다고 비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AI가 특정한 성적 상상력과 역할을 거부감 없이 무한히 재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미 여러 국가에서 청소년이 챗봇과의 성적 대화나 자해 관련 대화 이후 자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플로리다주의 14세 소년이 캐릭터AI 챗봇과 성적 대화를 나눈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도 16세 청소년이 챗GPT와 자해 대화를 나눈 후 사망한 사건이 발생해 유족이 오픈AI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오픈AI 자체 통계에서도 매주 약 120만 명이 자살 관련 대화를 나누고, 56만 명이 정신질환 증상을 보였다는 보고가 있다. 취약한 이들이 AI에 정서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문제는 이미 심각한 단계에 와 있다.
한국 사회가 겪는 디지털 성범죄 현실은 또 다른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딥페이크 범죄는 제작·유포만큼이나 삭제가 더 큰 문제로 떠오른다. 온라인에 무한 복제되는 피해 영상은 수작업으로 삭제하기 어렵고, 삭제 지원 활동가들은 끊임없는 2차 피해와 심리적 소진에 시달린다. 때문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등에서는 AI 기반 자동 탐지·삭제 기술을 도입하며 대응력을 높이는 방향을 선택하고 있다. 기술이 폭력을 만든 시대에, 폭력을 막는 데도 기술이 필요한 역설적인 상황이다.
현재까지 다른 글로벌 AI 기업들은 성인용 콘텐츠에 명확한 제한을 두고 있다. 구글 제미나이는 노골적 성적 행위나 성폭력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을 금지하며, 미성년자를 위한 필터 모드에서는 유해한 역할극을 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앤트로픽의 클로드 역시 성적으로 부적절한 대화가 반복되면 자동 종료하는 기능을 탑재했다. 기술의 윤리적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결국 사회적 책임의 문제다. 여기에는 기업도 예외가 될 수 없다.
AI라는 도구를 이용해 사람에게 폭력이 가해지는 시대는, AI가 폭력을 배우는 시대이기도 하다. 기술이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동시에, 상상 이상의 위험을 드러내는 지금, 우리는 어떤 윤리로 이 도구를 다룰 것인가. AI가 사람을 해치는 기술이 될지, 사람을 살리는 기술이 될지는 결국 사람인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적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기술이 돈벌이에 이용되는 순간, 특정 성을 향한 폭력은 필연적으로 따라붙는다. AI가 구현하는 세계는 결국 우리가 만든 세계의 조합이다. 인간이 인간답지 못한 사회라면, AI 역시 인간을 닮아 그 폭력을 되풀이할 것이다.
11월 25일부터 시작된 여성폭력추방주간을 맞아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현재의 기술은 어떤 세상을 배우고 있는가, 그리고 사람인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고 있는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적 대상화가 남아 있는 한, AI 역시 그 폭력을 학습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사람다움’을 증명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25-11-2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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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수도권 집중 해소 못 하면 집값 못 잡는다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면 집값이 오른다고 하지만, 최근의 집값 상승은 문재인 정부 때와 다른 구석이 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전국의 집값이 올랐다. 부동산R114에 의하면 2017년 6.41%였던 연간 전국 아파트값 상승률은 2018년 11.77%. 2019년 5.70%를 기록하더니 2020년 20.48%, 2021년 19.59%로 치솟았다. 문재인 정부 5년 누적 서울 아파트값 상승률은 111%, 수도권은 98%, 전국은 81%였다.
문재인 정부에서의 전국적인 집값 폭등은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 장기간 제로금리 정책을 유지한 데다, 팬데믹으로 각국이 재정 지출을 늘리면서 시중에 유동성 자금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이 돈이 자산시장으로 몰리며 전국의 집값을 끌어올렸다.
시장의 불신도 한몫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부동산 문제는 자신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당장 정부 관계자들부터가 그 말을 믿지 않은 듯했다. “다주택 참모는 한 채만 남기고 처분하라”는 지침에 청와대 참모들은 줄줄이 직을 내려놓았다. “직(職) 대신 집을 택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도 자기 지역구에 있는 비수도권 아파트를 내놓고 서울 강남 아파트를 사수하려다가 빈축을 샀다. 재개발 지역 상가를 매입하고 갭투자에 뛰어드는 정부 고위직들의 행태는 국민에게 ‘부동산 불패’라는 확실한 믿음을 주었다. 5년간 총 28차례의 부동산 정책이 제시되었지만, 정책이 나올 때마다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집값이 올랐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또다시 부동산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 양상은 문재인 정부 때와 사뭇 다르다. 전국 집값이 들썩거렸던 문재인 정부 때와 달리, 최근 집값 상승은 서울 그중에서도 강남 3구와 ‘마용성’(마포·용산·성동구)으로 대표되는 한강벨트에 집중돼 있다. 서울에서도 비인기 지역 부동산 가격 상승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심지어 몇몇 광역시는 끊임없는 부동산 가격 하락에 비명을 지르고 있다. 요즘 나오는 집값 논란은 결국 서울 일부 지역에 국한된 이야기인 셈이다.
인구 구조상으로만 보면 집값은 예전처럼 오르기 어렵다. 부동산은 기본적으로 가격이 오른 뒤 다음 세대가 그걸 대출 당겨서 받아줘야 상승 추세가 유지된다. 인구가 계속 증가하던 시절엔 이런 메커니즘이 성립했다. 그런데 이제 인구의 방향이 바뀌었다. 우리나라 총인구는 2020년 정점(5183만 명)을 찍고 2021년부터 감소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물량을 받아줄 인구 집단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이미 비수도권 지역은 빈집 문제가 가시화했다. 인구주택총조사에 의하면 2023년 전국 빈집은 약 153만 채에 달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빈집 수가 25년 뒤 지금의 두 배를 넘어설 걸로 전망하고 있다. 빈집은 비수도권에서 수도권으로, 수도권에서 서울로 그 범위를 넓혀나가게 될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지금까지 세 차례 부동산 대책을 내놓았다. 그중 지난 9월 7일 발표된 9·7 대책은 2030년까지 수도권에 주택 135만 호를 신규 착공하는 걸 핵심으로 한다. 이재명 정부뿐 아니라 거의 모든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며 수도권 주택 공급 확대 카드를 꺼냈다. 주택 공급을 늘리는 건 세금이나 대출 규제보다는 효과적이다. 하지만 단기적인 효과는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수도권으로 몰리는 수요를 분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른바 ‘똘똘한 한 채’ 수요가 변치 않는다면 사람들은 원래 집을 팔고 서울 일부 지역으로 몰릴 것이다. 한쪽에선 집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는데 다른 한쪽에선 빈집이 속출하는 양극화는 이미 진행 중이다.
사람들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이유는 모두가 안다. 수도권에 가야만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의원(창원 성산구)에 따르면 2024년 수도권에 순유입된 20~39세 청년은 5만 5467명이었다. 수도권과 대전·세종을 제외한 나머지 광역권에선 6만 2445명의 청년 순유출이 있었다. 부산의 청년 순유출은 8550명, 경남은 1만 419명에 달했다. 주요 기업 상당수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보니 청년들은 수도권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사람이 몰리니 집값이 뛰고 주거비 부담이 는다. 그걸 감당하지 못하면 직장과 먼 곳에서 출퇴근에만 하루 서너 시간을 써야 한다.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다산 정약용도 자녀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서울 밖으로 나가 살지 말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끈질긴 수도권 집중의 역사를 끊어내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강력하게 부동산 대출을 규제하고 수도권에 주택 공급을 늘린다고 한들 부동산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수도권에 주택 몇만 호를 공급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서울 아파트 외에 대안이 얼마나 존재하느냐가 아닐까. 부동산 정책 결정권자들이 서울 아파트값 잡는 데에 지금 쓰고 있는 노력과 비용의 반이라도 지역 균형발전에 투입한다면, 집값 안정 효과는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리라고 본다.
2025-11-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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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글로벌 창업 도시를 향한 성공 방정식
인공지능(AI) 시대, 기술이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는 속도는 전례 없는 혁신을 이끌고 있다.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는 시대의 문제를 풀고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스타트업이 있다.
21세기 경제 지도는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창업 도시’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미국, 중국 등이 활발한 창업 열기를 바탕으로 우월한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듯이 창업은 이제 도시와 지역 경제를 살리고 새로운 인구를 유입시키는 생존 전략이 되었다.
한국의 창업 생태계는 1997년 벤처기업육성특별법 제정 이후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질적 성숙은 아직 부족하다. 특히 심화는 수도권 쏠림 현상과 지역 창업 생태계의 완결성 부족은 고질적인 문제이다. 실제로 글로벌 창업 정보 분석 플랫폼 ‘스타트업블링크’의 2025년 순위에서 한국은 서울(20위)만이 100위권에 들었을 뿐, 대전은 366위, 부산은 393위, 울산 546위에 머물렀다. 서울 외에는 내세울 만한 창업 도시가 사실상 전무한 현실을 감안할 때, 부산이 독자적인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창업 도시로 거듭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 전략이다.
성공적인 창업 도시는 투자 접근성, 창업보육, 실증 공간 등이 포함된 생태계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시너지를 창출하는 곳이다. 이 중에서도 투자, 인재, 공간은 도시의 창업 생태계를 지탱하는 핵심 삼위일체이다. 이 세 가지 핵심 요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지역 창업이 활성화되더라도 성장 단계에서 충분한 투자 유치나 인수합병(M&A)이 어려워 결국 수도권으로 유출되고 만다. 이는 지역 창업 생태계가 초기 단계에 고착화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부산시는 올해 2월 부산기술창업투자원을 설립하고 2026년까지 총 1조 5000억 원 규모의 창업 펀드를 조성한다는 계획을 통해 자본 환경을 활성화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실제 최근 펀드 규모 급증과 더불어 국내 최대 액셀러레이터(AC) 협회가 부산에 첫 지역본부를 설치하는 등 긍정적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전국 벤처기업의 약 40%가 비수도권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유치하는 벤처 투자 비중은 여전히 20% 수준에 그치는 냉정한 현실은 여전하다.
이러한 투자 절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 정책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비수도권에 투자하는 AC 및 벤처캐피털(VC)에 대한 세제 혜택을 강화하고, 수도권에서 비수도권으로 이전하는 기업에는 법인세나 재산세 감면 등 실질적인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 나아가 싱가포르처럼 복잡한 외환거래 절차를 간소화하고 법인세 면제 등 파격적인 혜택을 부여하는 가변자본기업(VCC) 제도를 벤치마킹하여, 해외 벤처 자본을 적극적으로 유치할 필요가 있다.
창업 생태계의 핵심은 결국 인재이다. 국내외 인재들이 부산으로 유입되어 정착할 수 있는 글로벌 정주 여건 개선 또한 시급한 과제이다. 현재 외국인 창업자(기술창업비자 소지자) 87.3%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부산시는 이미 외국인 유학생의 비자 재정 요건을 완화하고 취업 활동을 허용하는 광역형 비자 시범 사업을 추진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지역 기업 및 공공기관과의 오픈이노베이션 기회를 확대하여 외국인 창업자들이 사업 성과를 낼 수 있는 실질적인 지원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이 기업 친화적인 세금 정책과 매력적인 생활 환경으로 젊은 인재들을 끌어들인 성공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다.
창업 생태계는 단순히 정책과 제도만으로 견고해지지 않는다. 혁신적 기업가 정신의 문화적 확산은 어떤 정책이나 규제보다 훨씬 지속적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 선배 창업가가 투자자·멘토로 돌아오는 선순환 구조, 대학과 기관의 활발한 교류가 창업 도시의 리듬을 만든다. 창업은 제도에서 태어나지만, 결국 문화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시장 앞에서 한발 앞서 길을 열고, 시장이 스스로 달리기 시작하면 한 발 물러나 민간의 속도를 따라가는 촉매제여야 한다. 대학은 논문과 특허에만 머물지 말고, 연구실의 기술을 사업의 언어로 번역해 학생을 창업과 산업의 주역으로 세워야 하며, 민간은 지역을 ‘선의의 후원’이 아니라 ‘수익과 기회’의 장으로 바라봐야 한다.
창업 도시는 화려한 구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자본이 들어올 명확한 장치, 인재가 이주할 충분한 이유, 그리고 혁신이 일상적으로 가능한 환경을 묶어 도시의 운영 체계로 정립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부산이 주도하는 글로벌 혁신은 행정의 선언이 아니라, 내일의 스타트업이 이 도시를 떠나지 않아도 되는 실질적 환경에서 시작된다. 부산이 진정한 글로벌 창업 도시로 도약하길 기대한다.
2025-11-1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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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 무역금융, 부산이 표준을 만들 때다
대한민국 수출의 절반 이상이 부산항을 거쳐 간다. 2024년 2440만TEU를 처리하며 세계 7위 항만 자리를 지켰다. 부산에서 실은 컨테이너가 베트남 하노이까지 가는 데는 하루면 충분하다. 정작 이상한 건 그다음이다. 물건값이 수출업체 계좌에 도착하려면 일주일이 걸린다. 부산항의 크레인은 5G로 제어되고, 선박 스케줄은 AI가 최적화한다. 반면 송금은 여전히 은행 영업시간을 기다리고, 서류 확인에 며칠이 걸린다. 물류는 이미 실시간으로 움직이는데, 금융은 여전히 복수의 중개 은행을 거치는 절차와 영업시간 제약에 묶여 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화물의 이동은 센서와 GPS가 실시간으로 추적하지만, 돈의 이동은 여전히 사람의 확인과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중개 은행을 경유하고, 환전 수수료를 내며, 영업일 기준으로 처리된다. 그 사이 기업 자금은 공중에 떠 있고, 이자 비용은 고스란히 기업 몫이 된다. 특히 중소 수출기업에 이 일주일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다. 수출 대금이 묶여 있는 동안 운전자금 대출 이자는 계속 나가고, 다음 발주를 위한 원자재 구매는 미뤄진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중소 수출기업의 평균 운전자금 회전 기간은 90일 안팎이다. 결제가 일주일만 빨라져도 자금 효율은 8% 가까이 개선된다.
블록체인과 스테이블코인은 이 구조를 바꾼다. 블록체인은 거래 기록을 위변조할 수 없게 만들어 신뢰 검증을 사람이 아닌 알고리즘에 맡긴다. 조건이 충족되면 자동으로 대금이 집행되고, 모든 과정이 투명하게 기록된다.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가치에 1대1로 연동된 디지털 화폐다. 비트코인처럼 가격이 들썩이지 않으면서도 인터넷만 있으면 즉시 송금할 수 있다. 스테이블코인 무역 결제는 단순한 효율성 개선이 아니다. 전신환에서 스위프트로, 다시 블록체인 기반 즉시결제로 이어지는 국제결제 시스템의 근본적 전환이다.
이미 글로벌 금융 기업들은 변화에 나섰다. 페이팔은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했고, JP모건 같은 대형 은행들도 디지털자산 기반 결제 인프라 구축에 나섰다. 비자와 마스터카드는 스테이블코인 결제 시스템 통합을 추진 중이다. 무역 결제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그렇다면 부산항에서는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까. 부산항에서 화물이 선적되는 순간 스마트 계약이 작동해 계약금 일부가 자동 송금된다. 배가 베트남 항구에 도착하고 전자선하증권이 확인되면 잔금이 정산된다. 결제 시간은 ‘수일’에서 ‘수분’으로 줄고, 중개 은행 수수료와 환전 비용을 합친 총 거래비용은 거래액의 3~5%에서 1% 이하로 줄어들 수 있다.
이런 변화는 금융기관의 역할도 근본적으로 바꾼다. 신용장 발급으로 거래를 보증하던 전통적 역할은 스마트 계약이 대신한다. 은행은 이제 거래 중개자가 아닌, 규제 준수와 리스크 관리 서비스 제공자로 전환된다. 자금세탁 방지 모니터링, 제재 대상 검증, 무역금융 컨설팅이 새로운 수익원이 된다.
부산은 이 변화를 선도할 모든 조건을 갖췄다. 2019년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된 이후 금융·물류·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실증을 진행하며 블록체인 기술과 산업 간 융합을 준비해 왔다. 부산의 진짜 강점은 지정학적 위치에 있다. 중국과 일본 중간에 위치한 부산항은 동북아 허브항만으로서 중국 동북지역과 일본 서안 항만들을 연결한다.
환적화물이 전체 물동량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환적은 여러 국가 간 복잡한 결제가 동시에 발생하는 거래다. 중국 수출업체가 일본 수입업체에 파는 화물이 부산을 거쳐 가면서, 한국 물류사와 선사에 각각 대금을 지불해야 한다. 이런 다자간 결제를 스테이블코인으로 처리하면 결제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블록체인 규제특구의 실증 경험과 동북아 허브라는 지정학적 이점이 결합하면, 부산항은 물류·금융·데이터가 통합된 디지털 해양 허브로 진화할 수 있다.
글로벌 경쟁은 이미 시작됐다. 싱가포르는 2023년 세계 최초로 스테이블코인 규제 프레임워크를 도입해 승인된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허가했다. 두바이는 2024년 중앙은행 라이선스 제도를 완성하며 리플과 테더 같은 글로벌 기업을 유치했다. 홍콩도 올해 8월 스테이블코인 조례를 시행하며 앤트그룹 같은 중국 빅테크가 발행을 준비 중이다. 누가 먼저 규제와 인프라를 완성하느냐에 따라 아시아 디지털 무역금융의 표준이 결정된다. 부산이 그 표준을 선점한다면, 아시아 물류 중심지이자 디지털 금융 중심지라는 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블록체인이 물류를 추적하고 스테이블코인이 결제를 실행하며 스마트 계약이 거래를 검증하는 구조. 이것이 완성되면 부산항은 아시아 디지털 무역금융의 거점이 된다. 기술은 준비됐다. 이제 실증을 넘어 실행으로 옮겨야 할 때다.
2025-11-1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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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K푸드의 심층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우리 국민들은 모두 뿌듯한 성취감과 자부심을 느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50년 만인 2024년에 K푸드와 농산업 제품만 130억 달러 이상을 수출하였다. 그 중 라면이 13.6억 달러, 조미김 6.3억 달러, 김치가 1.8억 달러에 이르렀다. 그밖에도 개별 품목으로 만두, 냉동김밥, 콘도그, 떡볶이 등도 외국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요즘은 외국인들이 고추장에도 주목하여 매우면서도 달콤한 음식을 만드는 소스로 쓴다고 한다. 그래서 달다(sweet)와 맵다(spicy)는 말을 합친 스위시(swicy)라는 말이 빈번하게 쓰인다고 한다. 도대체 왜 우리가 먹는 평범한 음식에 외국인들이 열광하는지 의아하기도 하다. 그 때문에 K푸드의 유래에 대해서도 관심이 높아져서, 작년에 국민생활과학자문단은 K푸드의 탄생과 발전 역사, 그리고 영양학적인 우수성 등을 탐구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도 우리나라 산림에서 다양한 풀이 자라므로 그것으로 여러 가지 반찬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콩에도 주목하여 콩을 가지고 간장·된장을 만들고, 고춧가루를 섞어서 고추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산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다양한 산나물들을 구할 수 있다. 잎이 넓은 풀은 애기똥풀 등 몇 가지만 제외하면 다 먹을 수 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우리 음식 문화를 설명하기에 부족하다. 우리나라는 산도 많지만,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이기도 하다. 당연히 우리의 음식문화는 바다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아침 밥상에서 구운 생선 한 마리, 미역국, 갓 구운 김을 올리는 경우가 흔하다. 제사상에도 여러 가지 생선과 문어, 심지어 상어도 올린다. 최근 역시 K푸드로 주목받고 있는 해산물로는 김과 미역이 있다. 원래 서양에서는 해초들을 바다 속에서 자라는 잡초(sea weed)로 여겼다. 그래서 이 해초든 저 해초든 구별없이 바다 잡초였다. 다시마는 영어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원래는 칼리나 요오드를 만들기 위해서 다시마를 태워서 얻은 재를 가리키는 용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김도 참김, 돌김, 곱창김, 파래김으로 나눈다. 먹을 때도 구운 김, 조미 김, 김부각, 김무침, 김떡, 김볶음 등으로 나눈다. 미역도 넣는 부재료에 따라 전혀 다른 맛으로 변하고, 산모가 반드시 먹어야 할 음식이었다. 이 지점이 바로 K푸드의 원점이다. 우리의 미각은 대단히 예민하다.
예민한 미각은 우리의 수산물의 명칭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제사상에 올리는 문어, 산 채로 즐겨 먹는 몬도가네급의 낙지, 볶음요리로 즐기는 주꾸미는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다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맛도 서로 다르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보기 드물게 우리와 같이 문어류를 먹는 일본조차도, 이 세 종류를 하나로 묶어서 인식한다. 문어는 ‘물문어’, 낙지는 ‘팔이 긴 문어’, 주꾸미는 ‘밥알 문어’, 결국 셋 다 ‘문어’인 셈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서로 구별하지 않는다. 우리가 즐겨 먹는 조기나 민어도 마찬가지이다. 조기는 참조기, 침조기, 수조기, 백조기(보구치), 부세 등으로 나눈다. 역시 이웃한 일본은 조기, 보구치, 부세의 구별이 없었다. 다 같은 조기다. 나중에 우리말을 그대로 써서 부세라는 이름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왜 각각 다르게 이름을 붙였을까? 바로 생선의 맛 때문이다. 형태는 잘 모르지만, 먹어보면 맛과 고기의 결과 색상으로 조기인지, 부세인지, 보구치인지 구별할 수 있으므로 이름을 다르게 붙인 것이다. 조기와 민어를 나누는 지점도 마찬가지다. 그 맛이 다르기 때문에 구별하지만, 외국으로 가면 두 물고기를 크게 구별하지 않는다. 생김새도 비슷한 데다 둔한 입맛으로는 그 차이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각이 예민하기 때문에, 먹는 음식의 종류도 다양하다. 그중 하나가 젓갈이다. 일본도 젓갈을 먹지만, 종류는 많지 않다. 오징어가 압도적으로 많고, 해삼 내장, 은어 내장, 참치 내장, 연어를 젓갈로 만드는 정도다. 명란젓과 창란젓은 우리나라에서 배워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만드는 젓갈은 종류도 많고 맛도 다양하다. 소금만 아니라 마늘·고춧가루로 함께 쓰기 때문이다. 멸치젓과 새우젓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새우젓도 추적(추젓) 육젓 오젓 등으로 나눈다. 그밖에도 황석어젓, 조기젓, 꼴뚜기젓, 조개젓, 홍합젓, 밴댕이젓, 참게젓, 갈치속젓, 전어밤젓, 등피리젓, 대구모젓, 대구장지젓, 명태아가미젓, 자리돔젓, 토하젓, 낙지젓, 소라젓 등등, 젓갈로 만들 만한 건 다 만들었다. 동시에 그런 젓갈의 서로 다른 독특한 맛을 인정하고 소비하고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K푸드가 그저 한류의 유행에 편승한 결과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극한까지 밀어붙인 우리 음식의 종류와 맛이 그 밑바탕에 자리잡고 있다.
2025-11-1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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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국정감사, 실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올해 국회 국정감사가 막을 내렸다. 헌법과 국회법이 보장한 이 제도는 행정부를 감시하고 국민의 세금이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한, 입법부의 가장 본질적인 권한이다. 국정감사에 무슨 큰 기대를 거냐고 냉소적일지 모르지만, 돌이켜보면 국정감사를 통해 국민의 신뢰를 얻는 성과를 만들어낸 적도 있었다. 4대강 사업의 예산 낭비, 공공기관 채용 비리, 가습기 살균제 사건, LH 직원의 내부 정보 이용 문제 등은 국감 질의를 통해 세상에 드러났고, 이후 제도 개선으로 이어졌다. 국감이 본래 취지대로 작동했을 때, 국가의 부패를 막고 행정을 바로 세우는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올해 국정감사는 그 의미를 잃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시민단체 국정감사 NGO 모니터단은 이번 국감을 두고 “역대 최악의 권력분립 파괴 국감”이라며 F학점을 매겼다. 재작년 C, 지난해 D학점에서 올해는 한 단계 더 떨어진 셈이다. 이는 단순한 평가 절하가 아니라, 해마다 악화되는 국감의 자화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국감 첫날부터 조희대 대법원장에게 부적절한 질의와 조롱성 발언이 오간 장면이 논란이 되었고, 여야 의원들은 김현지 대통령실 제1부속실장의 출석 문제를 놓고 막말을 주고받았다. 심지어 최민희 위원장이 자녀 결혼식을 국회에서 올리고 축의금을 받은 일이 쟁점으로 떠오르며, 국감장은 정책 논의보다 사생활 논란으로 가득 찼다. 한 언론은 이번 국감을 “강성 지지층에게 잘 보이기 위한 ‘유튜브 쇼츠용 국감’”이라 표현했다. 짧고 자극적인 장면만 남기려는 ‘보여주기식 질의’가 국민의 피로를 키운 것이다. 이런 장면들은 국감이 왜 국민에게서 멀어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책 검증보다는 여야의 공방이 중심이 되고, 질의는 정치의 언어로 채워졌다. 행정부를 감시하는 자리가 오히려 정쟁의 무대로 전락한 것이다.
행정 감시는 가장 본질적인 국회 권한
하지만 정책 논의 실종 정쟁 무대 전락
시민단체 "역대 최악" F학점 평가 내려
'보여주기' 아닌 책임 있는 검증 아쉬워
현장 잘 아는 실무자 목소리 담아내고
질의 초점을 민생 중심으로 재편하길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눈길을 끄는 장면이 있었다. 지난달 국감장에서 안미현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보완수사권이 전면 박탈돼 부작용이 생기면, 책임을 지셔야 할 분들은 무리하게 입법하신 분들입니다.” 이 한마디는 정치적 발언이 아니라, 현장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실무자의 절박한 외침이었다. 그는 법이 현실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제도의 변화가 어떤 공백을 만드는지를 직접 목격해온 사람이다. 국감이 국민의 삶을 위한 제도라면, 바로 이러한 실무자의 목소리를 담아야 한다. 실무자의 의견을 배제한 입법은 결국 국민에게 불편과 피해를 전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일부 상임위에서는 실질적 논의도 있었다. 불법 사금융에 노출된 청년 실태 조명, 선거관리위원회의 보안 문제, 공공기관의 정보보호 인력 부족, 지역재정의 불균형과 비효율적 집행 등 구체적 현안이 질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질의는 상대 공격을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라, 행정의 문제를 바로잡는 건설적 논의였다. 국감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정쟁 대신 실무와 정책 중심의 질의, ‘감정’ 대신 책임 있는 ‘검증’으로 채워질 때 국감은 제 기능을 되찾을 수 있다. 국감이 국민에게 의미 있는 제도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실무자는 단순한 증인이 아니라, 제도의 작동을 증언하는 전문가로 존중받아야 한다. 입법가와 실무자가 함께 문제를 논의하고 제도의 허점을 진단할 때, 비로소 국민이 체감하는 개선이 가능하다.
또한 질의의 초점을 민생 중심으로 재편하는 것도 시급하다. 국민이 체감하는 물가, 복지, 안전, 교육, 지역 경제의 문제는 국감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국민들이 질의와 답변 과정을 보고, ‘누가 이겼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개선할 것인가’로 평가받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국감은 ‘끝나는 행사’가 아니라 ‘시작점’이어야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감사 결과가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큰 논의도 공허하다. 후속 관리 체계를 강화하고, 국회는 국감 이후 기관의 개선 보고를 의무화하며 이행 여부를 점검해야 한다.
무엇보다 책임 있는 입법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입법은 권한이 아니라 책임이다. 법이 국민의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지 못한 채 만들어진 입법은, 선명한 구호로 포장되더라도 결국 부작용을 낳는다. 입법자는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그 법이 실제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게 아니라, 입법이 현장의 경고에 귀 기울이며, 실무자가 두려움 없이 소신을 밝힐 때 국감은 비로소 제 이름을 되찾을 것이다. 실무자의 외침이 정쟁의 소음에 묻히지 않고, 책임 있는 입법과 실효적 감사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신뢰할 수 있는 ‘국민을 위한, 국민을 향한 국정감사’의 시작이다.
2025-11-0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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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인재 유출, 이공계 문제만 아니다
지난 여름 화제가 되었던 다큐멘터리 ‘인재전쟁’에서는 의대에 미친 한국과 공대에 미친 중국을 비교 조망하며 한국이 처한 이공계 위기에 경종을 울렸다. 최상위권 인재들의 의대 진학 쏠림 현상 배경에는 의사라는 전문직이 보장하는 높은 연봉과 직업적 안정성이 자리한다. 이에 대응하여 다큐멘터리에서 모인 결론 중 하나는 이공계 처우 개선이 절실하다는 목소리였다. 한편 지난달에는 중국 정부에서 카이스트 교수진을 상대로 4억 원의 연봉과 함께 주택과 자녀 학자금을 지원한다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영입 제안 메일을 보낸 일이 기사화되었다. 다수의 국가가 재정위기에 빠진 오늘날 중국은 어떻게 이런 투자가 가능할까.
핵심은 국가 예산 문제일 것이다. 물론 중국은 영토가 크고 인구가 많은 국가이기 때문에 예산 규모를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 그러나 국가의 재원 확보 채널 이슈도 있다. 국가 예산은 세금과 국채로 조달되고 이 수입은 공공복지를 위한 정책집행에 사용된다. 그런데 중국은 강력한 고정 수입원이 따로 있다. 국유기업들이다. 중국 정부가 직접 소유하고 지배하는 국유기업들은 철강·통신·에너지·항공·은행·의약 등 필수재, 기간산업이거나 자연 독과점이 일어나는 주요 산업에서 운영된다.
한편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국가안보상 핵심산업으로 분류되는 기업들에 대해 지분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8월 미국 반도체 제조사 인텔의 10%와 희토류 채굴업체 MP머티리얼즈의 15% 지분을 인수했다. 자유시장경제 복음을 전파해온 미국에서 이는 놀라운 사건이다. 물론 지분 투자와 국유기업은 양상이 조금 다르지만 추측건대 미국이 중국과 경쟁하며 영향을 받은 부분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미국 정부는 관세 부과와 각종 행정 수수료 인상 등 정부 수입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IMF 구제금융 처방으로 신자유주의에 휩쓸려 진행했던 공기업 민영화의 과오를 돌아볼 때다. 민간에 넘겨 경영혁신과 효율화를 이뤘다고 하기엔 공기업이 속한 산업 자체가 경쟁이 치열하거나 파괴적 혁신이 일어나는 분야가 드물다. 국민들이 지탱하는 수요로 안정성은 국가 특혜사업에 준하는데 매년 성과급과 배당금 잔치를 벌일 때 국가 세수와는 무관하며 도덕적 해이마저 발생한다. 국유기업 수익모델도 아니고 기축통화를 복사하는 마법도 없는 한국은 날로 강해지는 조세 저항에서 공공지출을 줄일 게 아니라면 국가부채를 늘리지 않고 재원을 확보할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국가가 직면한 또다른 문제는 인재유출이다. 공무원도, 공기업도 인기가 시들하다. 사기업의 폭풍 성장세에 공공부문 자체가 이미 상당히 위축됐다. 이과 인재들이 의사로 몰린다면 문과 인재들은 로스쿨과 금융권 쏠림 현상이 오래다. 행정고시 선호가 예전 같지 않고 한국은행을 비롯한 국책은행 퇴사자 및 사관학교와 교대 자퇴생이 급증했다는 뉴스들이 보도되었다. 법조계도 이제 상위권 로스쿨생들은 빅펌(대형 로펌)으로 향한다. 이공계 처우 개선 목소리처럼 인문계 역시 공공보다 민간의 인센티브가 훨씬 크기 때문에 공공과 민간의 처우 격차는 심화되고 있다. 이 역시도 결국은 국가 예산과 관련하기에 해결도 쉽지 않다.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정책 수립과 실행에 노고하는 공무원에 대해 인정하고 감사함을 표하는 문화를 고민해봐야 한다. 또한 공직자를 주기적으로 마녀사냥하고 악마화 하는 것도 재고해야 한다. 예컨대 이상경 국토부 차관 사퇴는 부동산 관련 “집값 떨어지면 사라”는 실언으로 촉발되었고 사과했지만 여론은 분노했다. 그가 잘했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직 대신 집을 택하고 사퇴한 그의 선택은 매우 실망스럽다. 그러나 왕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좌천되거나 사장의 심기를 건드렸다고 해고되는 폭정으로 번지지 않기 위해서는 국민도 주의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공직자가 갖춰야 할 도덕성은 기대하되 사람을 소중히 대해야 한다. 그가 정말로 지금 행정부에 필요한 적임자였다면 우리는 인재를 잃은 것이다. 하나만 잃은 것이 아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서 점점 더 인재들은 민간을 택하지 국가의, 공공의 역할을 맡을 생각을 접을 수 있다. 또한 국민 비위만 맞추는 간신만 남게 된다.
공적영역에서 인재를 확보하지 못하면 그 직접적 피해는 고스란히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몫이다. 인재는 어디서든 자신의 역량을 펼치며 인정받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 무대가 국가라면 수혜는 범국민적이 되고 인재는 공공재가 되기에 사회 전반에 미치는 긍정적 기여 효과는 보다 클 것이다.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국가에 유능한 인재들이 있다면 그 보상은 개인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 멀리 퍼진다. 지금 한국에 인재유출은 이공계 문제만이 아니다. 공공성 전체가 잠식당하고 있다.
2025-11-0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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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일본의 여성 정치인, 다카이치와 도이
일본 근대사의 시작을 알리는 세 인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각각 혁신, 능동, 안정의 리더십을 상징한다. 널리 알려졌듯 각기 ‘새가 울지 않으면 죽인다’, ‘울게 만든다’, ‘울 때까지 기다린다’라는 비유는 세 사람의 정치적 성격인 결단력, 유연성, 인내심을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이 세 유형의 리더십이 여성 정치가들에 의해 되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21일 일본 최초의 여성 총리로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와 1993~1996년 일본 최초로 중의원 의장을 지낸 도이 다카코(1928~2014)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1961년 나라현에서 태어난 다카이치는 고베대학을 졸업하고 정치가 양성소 마쓰시타 정경숙에서 수학하며 “20년 후엔 일본 총리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1993년 무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된 뒤 자민당에 합류해 총무대신 등의 요직을 맡으며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입지를 굳혔다. 일본회의 등 보수 우익 단체와 긴밀히 협력하고 야스쿠니 신사를 반복 참배하며 ‘여자 아베’로 불릴 만큼 강경한 보수 이미지를 구축했다. 지난 4일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보수 우파인 아소파의 지원을 받아 2세 정치인 고이즈미 신지로를 꺾고 승리했다. 그러나 강한 우익 성향을 우려한 공명당이 연립에서 이탈하자, 그는 오사카 지역 정당인 일본유신회와 ‘각외 연립’을 구성해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리고 지난 21일 총리 지명 선거에서 과반 득표(456표 중 237표)에 성공하며 제104대 일본 총리로 취임했다. 30여 년간의 집요한 의지가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가족국가론’ 세계관 견지 다카이치
아베 전 총리 ‘힘에 의한 평화’ 계승
여성 참여·돌봄 불평등에 관심 도이
일본 민주주의 지평 확장에 기여
‘새가 울지 않는 시대’ 다른 방식 답해
한 사람은 평가 완료, 다른 한 사람은?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를 리더십의 모델로 삼은 다카이치는 지난 24일 시정방침 연설에서 “세계의 중심에서 당당히 피어나는 일본 외교를 되찾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기조인 ‘힘에 의한 평화’를 계승해 일본을 다시 강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그는 또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명시한 1995년 무라야마 담화를 “후세에 사죄를 강요하는 자학사관”이라 비판하며 애국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나아가 헌법 9조 평화조항의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유리천장을 깬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 리더십은 여성적이라기보다 오히려 기득권 남성 권력의 연장선에 있다. 다카이치는 호주(戶主)를 중심으로 한 가족이 거대한 국가를 이루는 토대라고 생각하며 ‘선택적 부부별성제’ 도입에도 반대한다. 이 제도는 결혼 후 부부가 각자의 성(姓)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일본 사회에서 가부장적 질서 완화를 상징한다. 다카이치는 ‘이에(家)’제도와 ‘가족국가론’이라는 근대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대비되는 정치인이 ‘젠더’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대에 일본 여성 정치의 새 지평을 연 도이 다카코다. 효고현 출신인 그는 헌법학자 다바타 시노부의 강연 ‘평화주의와 헌법 제9조’에 감명받아 헌법학을 전공하고 도시샤대학 등에서 강의했다. 1969년 사회당 후보로 첫 중의원에 당선된 이후 12선을 기록했으며, 1986년 일본 최초의 여성 정당 대표(사회당 위원장)에 이어 1993~1996년에는 첫 여성 중의원 의장을 지냈다. 비록 총리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1989년에는 참의원에서 총리로 지명된 일본 정치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정치인이었다. 그는 헌법 제9조 평화조항 수호를 정치적 신념으로 삼고, ‘반전·비핵·평화’의 가치를 일관되게 주장하면서 남녀 고용차별과 부계 중심 국적법 등을 집중적으로 추궁해 일본 정부의 ‘여성차별철폐협약(CEDAW)’ 서명을 이끌었다. 1989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마돈나 선풍’을 일으키며 “산이 움직였다”는 명언으로 여성들의 참여의식을 일깨웠고 주부층을 비롯한 여성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또 “여성은 세 번의 노후를 살아야 한다, 부모·남편·자신의 노후”라는 발언을 통해 돌봄의 불평등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끌어올렸고, 이는 훗날 개호보험제도(介護保險制度) 논의로 이어졌다.
이처럼 도이는 ‘평화와 진보의 정치’를 통해 전후 일본 민주주의의 지평을 확장한 인물이었다면 다카이치는 ‘힘과 보수의 정치’로 그 흐름을 되돌리려는 듯하다. 도이는 남성 중심의 정치 구조 속에서도 결단과 돌파로 상징되는 오다 노부나가형 리더십을 구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반면 다카이치의 리더십은 앞으로 그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 평가될 것이다. 과연 도요토미식의 권력집중형인지, 아니면 도쿠가와식의 안정과 조정형인지. 다만 분명한 것은 일본 정치사 속 두 여성 정치인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새가 울지 않는 시대에 어떻게 노래를 끌어낼 것인가’라는 리더십의 과제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답하고 있다는 점이다.
2025-10-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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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블록체인 특구, 교육으로 저변 확대를
지난 9월부터 시작된 ‘부산 디지털금융·블록체인 아카데미’는 급변하는 금융 환경과 디지털 산업의 핵심 이슈를 다루는 교육 과정으로 부산일보를 중심으로 개설됐다. 이 아카데미에는 금융권 종사자를 비롯해 부산경남권 기업인, 스타트업 창업가, 전문직 종사자, 일반 직장인 등 다양한 배경을 지닌 참가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총 12회 과정 중 5회차를 맞이한 이 아카데미는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는 참가자들의 높은 열의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부산이 디지털금융의 거점 도시로 도약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산은 이미 중앙정부로부터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있고, 수년간 다양한 실증 사업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이번 아카데미가 이제야 1기라는 점에서 블록체인이나 디지털금융에 대한 기술의 문제는 떠나 ‘교육 접근성’과 ‘정보 격차’의 문제가 적지 않음을 보여준다. 수도권이나 해외에서는 대학, 연구소, 기업, 스타트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최신 블록체인 트렌드와 비즈니스 모델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다. 그러나 부산에서는 여전히 관련 교육이나 네트워킹 기회가 제한적이고, 산업 생태계도 충분히 촘촘하지 않다.
‘블록체인 아카데미’ 반응 뜨거워
하지만 부산 정보 격차 등 문제
교육 제한적, 산업 생태계도 열악
해커톤·세미나 등 참여 채널 절실
사람 중심의 생태계 구축 꼭 필요
독자적인 금융혁신 모델 만들어야
서울에서는 매주 블록체인 포럼이나 Web3 세미나가 열리고, 세계적인 블록체인 기업이나 프로젝트팀이 직접 한국을 찾아 협력 방안을 논의한다. 반면 부산에서는 특구 지정 이후 여러 정책적 지원이 있었지만, 지역 주민이나 청년층이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교육 채널은 많지 않았다. 포럼이나 세미나를 주최하고자 하는 기관이나 단체도 찾기 힘들어 보인다. 부울경 지역에서 블록체인이나 디지털금융에 관심 있는 대학생 등 개발자들이 서로 실력을 겨뤄볼 만한 해커톤도 열리지 못했다. 물론, 일반적인 해커톤이 부산에서도 종종 열리기는 하지만, 블록체인에 특화된 해커톤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부산시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일전에 진행했던 해커톤이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어 계획하는 데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지금까지 부산에 정말 필요했던 것은 블록체인 특구나 허브 도시와 같은 거창한 담론보다는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이라는 새로운 흐름에 대해 시민들이 교육받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확대였다는 생각이 든다.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은 일부 전문가만 다루는 복잡한 기술이 아니라 누구나 익히고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금융 언어다. 이 언어를 부울경 지역에서도 자연스럽게 접하고 습득할 수 있도록 보다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학습과 참여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필자가 속한 비댁스는 부산시와 부산일보의 후원을 받아 오는 26일 ‘1-Day 아이디어톤(Ideathon)’을 개최한다. 이번 행사에는 우리금융그룹, 부산 소재 디지털자산거래소인 비단거래소, 글로벌 레이어1 프로젝트인 아발란체(Avalanche), 폴리메쉬(Polymesh)가 파트너로 참여한다. 비록 짧은 하루지만, 지역 내 청년·개발자·기획자들이 팀을 이뤄 디지털 자산을 활용한 아이디어를 직접 구상하고 발표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기술적 완성도보다 중요한 것은 참여 경험 자체다. 이런 작은 시도와 경험이 쌓여야만, 부산이 진정한 의미의 디지털 금융 도시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의 블록체인 산업은 지금 ‘두 번째 단계’에 서 있다. 첫 단계가 제도적 기반과 특구 지정이었다면, 두 번째 단계는 사람 중심의 생태계 구축이다. 중앙정부의 규제 샌드박스만으로는 혁신이 일어나지 않는다. 현장에서 문제를 느끼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참여가 있어야 비로소 산업이 자생력을 갖게 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부산은 매우 잠재력이 크다. 항만·물류 등 실물 인프라, KRX 거래소를 비롯한 국책 금융기관들, 그리고 지역 대학과 연구기관이 존재한다. 여기에 다양한 세대의 지적 호기심이 결합한다면, 부산은 ‘서울의 대체재’가 아니라 ‘독자적인 금융혁신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디지털 자산과 블록체인은 기술이 아니라 사고방식의 혁신이다. 지역의 금융, 산업, 행정이 소위 ‘돈 버는 사업’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고 본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교육과 소통의 기회를 마련해야 한다. 교육청이나 대학 등 교육기관과 손잡고 이해를 넓히고 저변을 확산하는 일도 병행해야 한다. 새로운 금융 언어를 익히고 이를 자신들의 언어로 재해석할 때, 부산의 블록체인 특구는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2025-10-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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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또 다른 성장의 시대를 지나며
‘학습된 무기력함’이라는 단어가 있다. 반복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부정적 상황에 노출되어, 자기 행동이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믿게 되면서 무기력해지는 심리적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다. 이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건 노동시장 속 청년들의 상황을 담은 한 기사에서였다. 대한민국의 성장 속도는 더뎌진 지 오래고, 기회는 희미해졌다. 자연스럽게 청년층에 대한 타격이 상당하다. 비관이라기보다 냉정한 현실 감각이다. 2025년 청년층의 체감실업률은 16.4%로 전년보다 높아졌고, 주요 기업 중 절반 이상이 하반기 신규 채용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 해당 기사는 청년들이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부분을 ‘학습된 무기력함’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변을 둘러보면 청년들은 여전히 무엇인가에 열정을 쏟아붓고 있다. 퇴근 후 영어를 배우고, 독서 모임에 나가고, 새로운 기술을 익힌다. 이미 회사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회사 일만으로도 버거운 하루를 보내면서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부업과 창업을 병행하는 이들도 있다. 2023년도 잡코리아 조사 결과, 설문에 응답한 MZ세대 직장인 중 66.5%가 ‘공부하거나 자기 계발 하는 것이 있다’고 응답했다. 청년들은 스스로 ‘성장 중독’이라 자조하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왜 우리는 끝없이 노력하고 성장하려는 걸까?
청년, 심각한 실업 현실 냉정하게 인식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믿음 흔들려
직장·연봉·자산보다 '의미의 성장' 중시
저성장 시대 일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문제의식·가치 공유 통해 공동체 형성
각자의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삶' 시도
돌아보면 우리의 어린 시절까지는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현실과 어긋나기 시작했다. 노력의 결과가 공정하게 보상받지 않는다는 걸 체감할 수 있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금수저·은수저·흙수저로 출발선이 나뉘고, 주거 환경과 자가용 브랜드로 신분이 구분되는 사회를 통과했다. 노력만으로는 더 나은 환경에 다다르기 어렵다는 사실이 상식이 됐다.
그래서 이제 청년들이 추구하는 ‘성장’의 방식은 과거와 다르다. 과거의 성장 서사가 직장, 연봉, 자산처럼 수치로 측정되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세대는 ‘의미의 성장’을 중요하게 여긴다. ‘내가 하는 일의 방향’과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도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20대가 직업을 선택할 때 ‘자아실현’을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는 비율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경제 저성장 시대에 직업을 생존 수단으로만 여기기보다 자아실현의 일부로 인식하는 응답자 비율이 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일’을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연구원의 ‘서울시 청년의 사이드 프로젝트 활동과 노동에 대한 가치관 고찰’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포착된다. 사회적 성공이나 안정된 직장보다 자신이 의미 있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일과 삶을 설계하려는 청년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회가 정해둔 기준보다 스스로 정한 가치에 따라 움직이며, 그 과정 자체를 성장으로 여긴다.
이러한 변화는 일의 영역을 넘어 문화와 소비, 삶의 방식으로까지 확장된다. Z세대의 67%는 ‘조금 비싸더라도 ESG를 실천하는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겠다’고 답했다. 사회적 책임, 환경 보호, 인권 감수성이 새로운 경쟁력의 기준이 된 시대다. 의미를 중심으로 한 성장의 흐름은 개인의 자기 계발에서 멈추지 않는다. 같은 문제의식과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작은 공동체를 만들고,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로컬 프로젝트나 소셜벤처의 형태로 도전하기도 한다.
도시에 밀집해 있던 청년들이 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례도 늘고 있다. 2018년부터 시작된 정부 주도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으로 탄생한 ‘괜찮아마을’은 7년 만에 전국 51곳으로 확산해 이제는 1만 680여 명이 각자만의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전남, 충청, 경북 등에서 자신만의 속도와 방법으로 살아가려는 청년층의 다양한 시도 중 하나이다.
일반화하기는 어렵겠지만, 많은 청년이 각자의 상황 속에서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며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도 스스로의 의미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노력이 평가 절하되기 쉬운 사회 속 청년들의 노력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우리는 성장의 시대를 지나, 지속의 시대를 살아가는 첫 세대이기 때문이다.
대단한 성공이나 혁신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영역에서 의미를 만들어가는 실험은 사회의 결을 바꾸고 있다. 비록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저성장의 시대에 걸맞게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는 방법이다. 우리 청년들은 ‘지속 가능한 삶’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또 다른 의미로 ‘성장의 시대’를 지나는 방식이다.
2025-10-2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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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중국 관광객 무비자 시대를 맞아
두 달 전 법무부는 지난달 29일부터 중국 단체 관광객 무비자 입국을 내년 6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시행한다고 보도자료를 냈다. 이후 지난달 26일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에도 불구하고 중국 단체 관광객에게 대한민국 관광의 문을 열었다. 26일부터 29일 사이 많은 언론에서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 입국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었으며 입국을 연기해야 한다는 의견도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부는 많은 우려와 언론의 공격에도 꿋꿋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2주 정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대한민국 전역에서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필자는 ‘사건반장’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자주 보는데, 여기서는 CCTV에 찍힌 영상과 함께 사건을 보여주며 가장 사실적인 보도를 한다. 원래 이 채널에는 음식점 먹튀, 악성 사기꾼, 지하철 민폐 행위자 등의 고발이 주를 이루었지만, 최근에는 관광지의 ‘꼴불견 관광객’과 아무 데서나 흡연하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이다. 과거 같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최근 국제 정세와 국가 정책의 흐름을 고려할 때 이러한 행동은 결코 가벼이 볼 문제가 아니다. 경주의 고분 유적지에서 한 중국인 가족이 아이를 왕릉 꼭대기에 올라가게 해 포즈를 취하게 하고, 제주도에서는 한 여성이 아이를 안고 해안가 돌바위 위에서 용변을 보게 하는 장면이 공개되었다. 서울과 경기 지역에서는 음식점 실내에서 흡연을 하고, 제지한 주인에게 복수하듯 화장실 앞에 용변을 본 사건도 있었다. 모두 중국인 관광객이 연루된 사례였다.
국정자원 화재 직후 시작된 무비자
문화적 충돌에 대한 사전대비 없어
문제적 뉴스거리 곳곳서 속속 등장
中 당국과 사전교육 등 협의했어야
정부 시스템 불안정 핑계 삼기보다
부산시 차원 지침이라도 마련 필요
일부 언론은 중국인 관광객을 폄하하는 ‘가짜 뉴스’가 많다고 하지만, 다른 언론은 실제 장면을 보도하며 중국 관광객의 문제적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 중국인 단체 관광객의 대규모 유입이 뉴스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문제 없는 집단은 없다지만, 이제 시작된 무비자 제도가 본격화해 정부 목표인 100만 명이 입국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기 어렵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중국 관광객의 행태를 보면, 1970년대 한국의 공중도덕 수준을 떠올리게 된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만 해도 길가에 앉아 볼일을 보는 일이나, 잔디밭에 무단 진입해 사진을 찍는 일은 흔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다르다. 공중도덕과 시민의식이 정착되어 흡연은 지정된 구역에서만 가능하고, 일부 아파트에서는 실내 흡연도 금지되고 있다. 그런 사회에서 중국인 관광객의 행태는 내국인과의 마찰을 피하기 어렵다. 반대로 국내 흡연자들이 동남아나 중국 여행을 선호하는 이유는 ‘아무 데서나 흡연이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반면 싱가포르가 세계에서 가장 질서정연한 도시로 평가받는 이유는 공중질서 위반에 대한 강력한 처벌 때문이다.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고 실질적 대책을 세워야 한다. 아무런 대비 없이 중국 단체 관광객을 대거 받아들인다면, 우리 문화재와 관광지의 훼손은 불 보듯 뻔하다. 최근 인천항으로 입항한 크루즈선의 관광객 중 6명이 귀선하지 않고 불법 체류자로 분류되었다는 사실은 그 위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신원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더 큰 문제다. 최근 3년간 무단 이탈자가 3만 명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이미 나와 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의 여파로 각종 행정 시스템이 복구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비자 입국이 유지된다는 것은 위험한 실험이다. 부산 해운대에서 관광업을 하는 한 관계자는 “연휴 기간 동안 방문객의 절반이 중국인 관광객이었다”고 말한다. 이대로라면 내국인 관광객보다 중국인 관광객이 더 많아질 날이 머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이러한 관광 문화의 충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거 우리나라 1980~1990년대 해외 여행객들은 출국 전 반드시 ‘사전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 내용에는 공중질서, 문화적 예절, 외국의 민감한 문화에 대한 주의사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는 이번 무비자 제도를 추진하기 전에 중국 정부와 협력하여 유사한 사전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한다. 제주도의 무비자 사례만 면밀히 검토했어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의 여파로 지금도 공공 시스템은 불완전하다. 부산시는 정부 지침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지자체 차원에서라도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김해공항과 부산항을 통해 입국하는 중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K-문화 예절 가이드 라인’을 마련하고, 예절 위반 시 경고와 제재를 병행하는 방안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무단 이탈자 추적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구축해 선제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완벽하지 않다면, 부산이라도 해내야 한다. 부산은 할 수 있다.
2025-10-1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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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정치가 가로막는 성평등
몇 해 전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여성 시의원이 당선 이후 면담을 청한 한 기업체의 사장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한다. “(남자 시의원이라면) 보통은 룸살롱에서 뵙자고 하면 되는데 여성분은 어디서 뵙자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이런 일이 버젓이 일어났다. 오죽하면 룸살롱을 ‘비즈니스 클럽’이라고 불렀겠는가.
이 일화는 한국 사회의 정치가 어떤 방식으로 성차별적 문화를 가지게 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룸살롱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유흥’과 ‘접대’가 주로 남성을 대상으로 일어난다. 성 산업을 뿌리로 하고 있는 이러한 룸살롱 문화는 여성을 소외시키고, 성적 대상으로 취급하도록 만든다. 정치권에서 이러한 남성 중심의 네트워크는 여성의 정치 진입을 실질적으로 가로막는 비공식 제도로 작용해왔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유흥업소 접대 문화에 대해서 일반 시민 응답자의 76.6%가 “성차별, 성희롱 등 부정적 사회문화를 만든다”고 답했다. 일반 국민의 상식 수준에서도 수용하기 어려운 구습이 정치와 사법 등 우리 사회의 중심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 참담한 일이다.
국민의 상식에도 못 미치는 구습
정치권에서 자꾸 벌어지는 현실
조국혁신당 성비위 사건 공론화
성평등 내건 당이라 더 큰 실망
성차별적인 문화 바꾸려는 노력
거기에서 진정한 반성 시작해야
정당 내에서 여성 정치인 및 당직자에 대한 일련의 성희롱, 성폭력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도 이 같은 성차별적 정치 문화의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다방면에서 빠른 속도로 여권 신장을 이루어냈지만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은 눈에 띌 정도로 낮다. 여성 정치인은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 뿌리 깊은 성차별적 편견, 성적 괴롭힘 등 구조적, 문화적 장벽에 여전히 가로막혀 있다. 정당은 이러한 성차별적 문화를 바꾸어나갈 책임이 있지만, 그간 국민 뒤통수를 때리는 일이 많이 일어났다. 성평등 가치를 우위로 내세우는 비교적 진보적인 정당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최근 조국혁신당에서 당내 성비위 사건이 공론화된 바 있다. 여성 당직자에 대한 직장 내 괴롭힘과 성추행이 보고되고, 여성위와 시도당에서 가해자 업무 배제 및 빠른 진상 조사를 수차례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앙당의 사건 처리 과정은 절차적 형식주의에 그쳤고, 주요 당직자마저 ‘성희롱은 범죄가 아니다’라며 가해자를 두둔하면서 혁신당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이는 몇 해 전 더불어민주당 출신 지자체장의 권력형 성범죄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성평등 민주주의를 주요 방향으로 삼고 있는 정당이기에 국민의 실망감이 컸다. 조직 보위를 더 우선시하거나 피해자를 공격하는 2차 가해도 일어났다.
물론 성비위 사건이나 권력형 성폭력 사건을 공개적으로 해결해가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정당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일이다. 가장 성평등한 나라로 알려진 스웨덴에서 성범죄 신고율이 높은 이유도 신고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어서 그렇다는 분석을 상기해보면 더욱 그렇다. 피해자가 말을 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조국혁신당의 경우도 당내에 우려와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으며 중앙 조직의 미흡한 해결을 두고 탈당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력의 중심에 있는 이들의 국민 상식에 어긋나는, 반하기까지 하는 태도와 언행이 문제가 되었다. 2차 피해가 어김없이 일어나고 문제의 핵심을 외면한 사태로 이어진 것이다.
정당에서 반복되는 성희롱, 성폭력 사건과 이에 따르는 2차 피해가 일어난다면 이에 대한 구조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보다 근본적으로 성차별적인 조직 구조와 문화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진보 진영의 경우 ‘성적 엄숙주의로부터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왜곡된 성 관념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성적 불쾌감을 주는 음담패설을 분위기 띄우는 농담으로 이해하고, 마음만 먹으면 폭력적이고 착취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성희롱, 성폭력을 일삼는 일은 국민의 상식 수준과 동떨어져 있다. 성폭력, 성희롱 사건이 일어나는 환경도 문제지만 정치권에서 성희롱,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이다. 때문에 정치가 이룩해야 할 성평등은 스스로의 성차별적 문화를 인식하고 바꾸어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존폐 위기에 몰렸던 여성가족부는 이제 성평등가족부로 그 기능을 강화하고 확대 개편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난 정부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우리 사회는 미투 운동을 거쳐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문제를 가시화하고 피해자다움의 통념에 도전했다. 그 결과로 시민의 사회적 성인지 감수성이 향상되었다. 하물며 정당이 성평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정치권이 성숙한 시민의 상식 수준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통렬한 자기 반성을 통해 거듭나기를 바란다.
2025-10-1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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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청년 담론에 가려진 중장년의 비애
한국 사회에서 저항(86세대)과 자유(X세대)의 상징이었던 청년이 사회적 약자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의 청년 문제는 구조적인 측면이 강했다. ‘치솟는 등록금에 시급 3000~4000원짜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대학을 졸업했더니 눈앞에 주어진 일자리라곤 비정규직뿐이었다’라는 이야기는, 개인의 별난 경험이 아니라 세대 전반이 마주한 문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 시기가 대한민국이 본격적으로 저성장 국면에 접어든 때였기 때문이다. 방아쇠를 당긴 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의 산업이 발전하면서 우리 수출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한국 경제를 뜨겁게 달궜던 중국발 호황의 열기가 식어갔다. 2000년대 중반까지 5%를 넘나들던 경제성장률은 2010년대 들어 2~3%대로 주저앉았다.
상대적 소득 높아 각종 정책에서 제외
가난한 '4050' 냉혹한 현실에 방치돼
40대 사망 원인 암 아닌 자살이 1위로
반면 정부·지자체 청년 위한 정책 경쟁
사회 약자라는 공감대 온갖 지원 나서
세대별 정책 현실 맞게 재조정 나서야
인구구조도 유리하진 않았다. 당시 청년들은 베이비붐 세대의 자녀였다. 이들은 부모만큼 인구수가 많아 ‘에코 세대’라고도 불렸다. 2000년대에 태어난 요즘 20대 초중반은 나이마다 50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반면 1990년대 초반에는 매년 약 70만 명이 태어났다. 많은 수가 일자리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데 이들을 받아줄 일자리는 점점 사라졌다. 청년들은 노동시장에서 ‘슈퍼 을(乙)’일 수밖에 없었다. 청년을 착취한다는 의미의 신조어 ‘열정페이’가 유행했다. 2015년 ‘헬조선’이 사회적 화두로 부상했다.
정부와 정치권이 청년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그즈음이었다. 전국의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2015년을 전후해 청년 관련 부서를 신설했다. 다양한 청년 정책들이 속속 도입됐다. 부산에서도 2015년 청년취업지원팀이 신설된 이래 청년 지원 전담 조직이 지속적으로 확대됐다. 2017년엔 부산광역시 청년 기본 조례가 제정되며 청년들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가 청년 정책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결과, 청년 정책은 양적으로 꽤 많이 성장했다. 일자리·주거·참여 등 분야를 막론하고 여러 분야에서 청년들을 위한 정책이 도입되었다. 구직 비용을 지원하는 건 기본이다. 일정 기간 주택 월세를 보조해 주는 곳도 적지 않다. 부동산 중개보수나 이사비를 지원하는 지자체도 있다. 말 그대로 ‘없는 정책이 없는’ 실정이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청년은 사회적 약자’라는 컨센서스가 형성되어 있다. 반대로 중장년은 상대적 강자로 인식된다. 아마 이 시기가 개인의 생애주기에 있어 사회적 지위와 소득이 가장 높은 때이기 때문일 것이다. 통계청이 지난달 25일 발표한 ‘2023년 국민이전계정’에서도 한국인은 45세 때 노동소득이 가장 높은 걸로 나타났다. 이때 정점을 찍은 개인의 ‘흑자’는 점점 줄어 61세부터는 쓰는 돈이 벌어들이는 돈보다 많은 ‘적자’로 돌아섰다.
같은 날 발표된 ‘2024년 사망원인통계 결과’는 또 다른 장면을 보여주었다. 40대 사망원인에서 자살이 암을 누르고 1위로 올라선 것이다. 40대에서 자살이 1위를 차지한 건 1983년 관련 통계 작성 이래 처음이다. 특히 40대 남성의 자살률이 2023년 대비 2024년 18.8%나 증가해 다른 집단을 압도했다. 경제적 어려움이 주된 원인일 거라는 분석이 나온다. 경제의 핵심 주체로 활동할 나이이지만, 그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느끼게 될 압박감과 상실감도 더욱 클 거란 이유에서다. 전체 고독사에서 중장년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노인층을 압도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그간 청년층은 약자로서 시혜적 지원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많은 지자체가 이들을 하나라도 더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 결과, 당사자들조차 필요성에 의문을 가지는 정책이 넘쳐나게 됐다. 반면 중장년층은 생산성이 높은 시기라는 이유로 정책 대상에서 소외된 경우가 많았다. 온라인에서도 “왜 청년 정책만 있고 4050 정책은 없냐”는 중장년들의 넋두리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이 집단이 소득·자산에 있어서 평균적으로 청년·노인보다 여유로운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평균이다. 개개인의 사정을 따져보면 그럴 수 없다. 어쩌면 양질의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자산을 형성하지 못한 중장년들이 직면한 현실은 청년들이 처한 것 이상으로 냉혹할 것이다.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일용직 노동자들의 면면만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정체성은 계층이 가지는 문제를 가리곤 한다. 중장년층이 겪는 위기가 다른 집단에 비해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거다. 40대 자살률이 급증했다는 통계는 그 현실에 경고음을 울리는 것만 같다. 세대별 정책에 리밸런싱(rebalancing)이 필요한 때다.
2025-10-0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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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재심, 법정 밖에서 시작되는 정의
1964년, 18세의 한 여성이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절단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어 유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은 “과잉방어”라며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녀는 범죄자로 낙인찍힌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2025년 9월, 무려 61년 만에 법원은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당시 행위는 명백한 정당방위에 해당하며, 유죄 판단은 잘못이었다”고 밝혔다. 이른바 ‘최말자 혀 절단 사건’은 재심 제도의 본질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재심은 이미 확정된 판결을 다시 다투는 ‘사법의 마지막 문’이지만, 그 문턱은 매우 높다. 형사소송법 제420조는 재심 사유를 제한적으로 규정한다. 유죄 증거가 된 증언이나 감정이 허위로 밝혀진 경우,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된 경우, 증거 조작이나 위법한 수사가 드러난 경우, 재판에 관여한 법관이 직무 관련 범죄를 저지른 경우 등이 그것이다. 이는 확정판결의 안정성과 권위를 지키고 사법권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요건 때문에 최말자 사건도 단순한 법적 절차만으로는 재심까지 나아갈 수 없었다. 새로운 증거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법리 해석이 달라졌을 뿐이기에, 수십 년 동안 사건은 기록 속에 묻혀 있었고, 그 전환점은 여성단체와 시민사회의 연대였다. 여성단체들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며 피해자의 방어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언론이 이를 다루면서 여론이 움직였다. 1·2심은 새로운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재심 청구를 기각했지만, 대법원이 파기환송 결정을 내리면서 재심의 문이 열렸고, 결국 법원은 61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이 과정에서 법률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사회적 관심과 여론의 힘이었다. 재심은 결코 법정 안에서만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성범죄 사건의 재심을 준비하면서 재심의 문턱이 얼마나 높은지를 깊이 체감했다. 이미 유죄가 확정된 사건에서 새로운 증거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기록은 닫혀 있고, 수사기관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피해자의 진술만 남은 사건에서 그 신빙성을 다시 검증하거나 새로운 정황을 밝혀내기 위한 단서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 사건이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다뤄지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언론이 직접 발로 뛰며 취재를 진행했고, 방송 이후 여론이 형성되자 침묵하던 사람들이 제보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증거를 찾을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하나둘 나타난 것이다. 사법절차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웠던 길이 언론과 여론의 도움으로 열리는 것을 보며 재심이 얼마나 사회적 힘에 의존하는 절차인지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법조인으로서 이러한 현실에 회의감도 들었다. 사법제도는 정의를 세우는 최후의 보루여야 한다. 그럼에도 억울함을 풀기 위한 실마리가 언론 보도나 여론의 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은 제도만으로는 진실에 다가가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법이 진실을 찾는 도구라면, 여론은 그 문을 두드리는 힘이다. 지금의 재심 제도가 이토록 높은 벽을 가지고 있다면, 법만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최말자 사건 역시 여성단체들의 꾸준한 문제 제기와 언론의 재조명이 없었다면 61년 만의 무죄 판결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처음부터 조금만 더 치열했다면, 재심까지 갈 필요가 있었을까?” 수사기관은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사건을 송치하지 말고 객관적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 검찰은 경찰 수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위법이나 허점이 없는지 다시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법원은 “검찰이 알아서 잘했겠지”라는 안일한 신뢰를 버리고 증거를 철저히 검토하며 법리를 엄격히 해석해야 한다.
최근 재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PD가 만난 한 담당 수사관은 방송 인터뷰에서 “직접적인 증거가 없을 때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라 생각하고 공판에 부친 것도 있다”라고 말했다. 법원이 알아서 밝혀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사건을 송치했다니, 그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수사기관이 증거를 끝까지 확보하지 않은 채 법원에 떠넘기는 순간, 사법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
재심은 사법의 마지막 양심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재심이 활발한 사회가 아니라, 재심이 필요 없는 사회다. 수사기관과 법원이 처음부터 치열하게 의심하고 검증하는 구조를 갖춘다면 억울한 유죄도, 뒤늦은 무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잘못된 판결 하나가 한 사람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다면, 올바른 판단 하나는 한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 재심은 법이 멈춘 자리에서 다시 정의를 향해 나아가는 두 번째 기회다. 잘못을 바로잡는 데 주저하지 않는 것, 사법의 흠결을 스스로 인정하고 고치는 용기야말로 법이 정의를 지키는 그 존엄함을 지키는 길이 될 것이다.
2025-09-2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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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부산 청년, 집 대신 디지털자산
한국 사회에서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라 자산 증식의 사다리였다. 그러나 그 사다리는 부산 청년들에게 닿을 수 없는 높이에 놓여 있다. 서울 아파트가 부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 동안, 부산 청년들은 다른 선택지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디지털자산으로 향하고 있다.
서울 아파트 가격이 급등하면서 서울 청년들의 자산은 빠르게 불어났다. 집을 사거나 청약에 당첨되는 것이 곧 ‘자산 증식의 공식’이 되었고, 전세마저 투자 수단으로 변했다. 그러나 부산 청년들은 단지 고향이 부산이라는 이유로 이 사다리에서 배제됐다. 서울과 부산의 자산 격차는 단순히 집값 차이를 넘어, 세대의 미래를 가르는 출발선의 차이로 이어졌다.
부산과 서울 아파트 가격 격차 심화
세대의 미래를 가르는 출발선 우려
부산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 지정
청년들에 새 일자리·커리어 토대
누구에게나 새 자산 축적 경로 열려
장기적 흐름 읽고 자산 다변화해야
부산의 현실은 냉정하다. 집값은 정체되거나 하락했고, 미분양 아파트는 수천 가구에 달한다. 청년층 인구는 일자리를 찾아 수도권으로 떠나며, 부산은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큰 순유출을 기록했다. 고용률 역시 전국 최저 수준에 머물렀다. 제조업과 전통 산업이 버텨주던 시대가 저물면서 새로운 일자리는 충분히 늘지 못했다. 여기에 대출 규제까지 겹치면서 ‘서울처럼 빠르게 오르는 집’을 잡는 것은 더욱 멀어진 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산 청년들은 부동산이 아닌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이 눈을 돌린 곳은 비트코인을 필두로 한 디지털자산이다. 부동산처럼 수억 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액으로도 시작할 수 있고, 국경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 곧바로 참여할 수 있다. 서울 아파트라는 높은 장벽 앞에서 부산 청년들에게 디지털자산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새로운 자산 축적의 경로이다.
이런 현상은 현장에서도 확인됐다. 이번 주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코리아 블록체인 위크’(KBW)에서 부산말이 정겨운 청년들을 만났다. 행사 티켓은 약 500달러, 우리 돈으로 50만~60만 원에 달한다.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에게는 부담스러운 비용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기차를 타고 올라와 연사들의 발표에 집중하고 있었다. 비싼 티켓값을 감수하면서 서울까지 올라온 이유는 미래의 자산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부산 청년들이 디지털자산에 열정을 쏟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디지털자산 시장의 성숙도를 보면 단순한 투기 대상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시장의 규모와 성격은 이미 달라졌다. 대표적으로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지난 몇 년간 수십 배 성장해 현재 시가총액이 수천억 달러에 이르렀다. 발행사들은 준비금으로 미국 국채를 대량 매입하며, 그 과정에서 달러 패권을 디지털 영역으로 확장시키고 있다. 이는 금융 질서가 이미 새로운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단기적 가격 등락에 휘둘리기보다 장기적 흐름을 읽고 자산을 다변화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부산이라는 조건도 특별하다. 부산은 대한민국 유일의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돼 각종 실증 사업과 기업 유치가 진행 중이다. 부산은행은 디지털자산 수탁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고, 지역 기반 거래소 운영도 본격화하고 있다. 블록체인 보안·인프라 기업들도 속속 부산으로 들어오고 있다. 청년들에게 이는 단순히 투자 수익을 넘어, 디지털자산 산업 속에서 새로운 일자리와 커리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토대다. 서울이 부동산 자산의 도시라면, 부산은 디지털자산 산업의 도시가 될 수 있는 셈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장기적 흐름을 읽는 일이다. 투자 대가 레이 달리오는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운율을 맞춘다”고 말했다. 1970년대 오일머니는 미국 부동산으로, 2010년대 양적완화 자금은 미국 주식으로 흘러들었다. 이번 세대의 거대한 유동성은 디지털자산과 블록체인 산업으로 향하고 있다.
혁명은 언제나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시작됐다. 블록체인이라는 혁명적 기술 역시 서울이 아니라 부산에서 더 큰 기회로 꽃필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부산 청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시세에 매달리는 투기가 아니다. 공부하고, 기술을 익히고, 산업에 뛰어들어야 한다. 디지털자산은 단순한 자산 증식의 수단을 넘어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낼 무대다.
부산 청년들의 디지털자산 투자는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합리적 대안이다. 동시에 새로운 산업에 뛰어들어 미래를 개척할 기회다. 이런 양질의 콘퍼런스가 부산에서도 열려야 한다. 부산 청년들이 굳이 서울까지 올라가지 않아도 배움과 교류의 장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부산시의 시대적 과제다.
중요한 것은 오늘 비트코인이 몇 퍼센트 오르고 내렸는지가 아니다. 10년 뒤 “왜 그때 시작하지 않았을까?”라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필요한 것은 큰 흐름을 읽는 안목과 차분한 준비다. 부산 청년들은 오히려 가장 앞선 무대에 설 수 있다. 그 기회는 이미 열려 있다.
2025-09-24 [18: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