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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시베리아 작은 마을의 향토사박물관
지난달 하순 몽골과 동시베리아 바이칼 지방을 열흘간 여행하고 돌아왔다. 투르카 항에서 샤머니즘의 알혼섬까지 왕복 7시간을 멀미에 시달리며 바이칼 호수의 혼이라는 샤먼 바위와 13개의 세르게(성스러운 솟대)를 찾아간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제일 큰 충격은 부랴티야 자치공화국 바르구진 마을의 작은 향토사박물관이었다.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깨고 입헌군주제와 공화제로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 최초의 ‘운동권’ 지식인들인 데카브리스트. 쇠고랑을 차고 1826년에 시베리아로 111명이나 유배를 왔다. 이 마을에서 활동한 데카브리스트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간 것이었는데, 감동은 다른 데서 왔다. 꽉 찬 전시물, 작은 박물관의 종합적 역할, 운영자의 열정이 두루 놀라웠다.
바르구진은 한때는 광산으로 유명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6000명의 주민이 사는 작은 시골 마을이다. 수학과 정보학을 가르쳤다는 할머니 교사가 관장이고, 역사 선생이라는 딸이 운영실장을 맡아서 일하고 있다. 박물관은 동네 유일의 슈콜라(11학년 제 초중고) 부설로 마을 입구에 허름하게 서 있었다. 삐걱거리는 전시홀은 크게 3개인데, 안은 콘텐츠로 넘치고 있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마을에서 발견된 매머드의 이빨과 턱뼈, 마을 사냥꾼들이 남긴 총, 아이들이 만든 옛 코사크 성채와 마을교회 미니어처, 마을의 각종 생활 도구, 학교 깃발, 군(郡)과 마을의 문장(紋章), 데카브리스트 큐헬베케르 형제가 이 마을에서 야학을 연 증거, 그들이 조사한 광물 표본, 마을 유대인의 역사, 1848년 이 마을에 유배 온 헝가리 대시인 샨도르 페테피의 흔적까지, 없는 것이 없었다. 1904~1905년 러일전쟁 때 만주 심양 근처의 전투에서 이곳 출신의 참전 군인이 전리품으로 획득한 일본도 한 자루도 한쪽에 있고, 볼셰비키 혁명에 가담했던 이 마을 청년들의 유품과 사진, 1941~1945년 독소 전에 참전했던 이 학교 출신 청년들의 학교 졸업 앨범도 가지런하다. 학교 뒤의 목공소에선 사라진 옛집과 옛 목조 교회 등을 학생들이 작은 건축물로 복원하고, 마을 주민들도 마을의 역사와 주민 생활상을 보여주는 물건이라면 뭐든지 여기에 아낌없이 기증해왔다고 한다. 작고 낡았으나 내실로 충만한 이 작은 박물관은 외지인에겐 1648년부터 시작된 400년 가까운 마을의 역사를 타임캡슐처럼 한눈에 보여주는 귀한 문화시설이다. 학생들에겐 살아있는 역사교육, 생활교육, 체험교육의 현장이다. 주민들에게는 보존하고 싶은 모든 기억의 보물 창고다.
겉으론 평온한 것 같아도 여기에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상흔이 깊게 패 있었다. 할머니 관장이 느닷없이 젊은이들 사진 한 장을 가리키며 이 마을 출신으로 우크라이나전에서 전사한 청년들이라고 했다. 그 가운데에는 자기 손자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면 저만치 저기 어두운 구석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는 운영실장의 아들이 이 사진 속의 청년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할머니와 딸은 스스로 자신들에게 부과한 과업으로 개인적 불행을 억지로 덮으며 매일매일을 버티는 듯 보였다. 나는 울음을 참으며 조용히 한쪽 팔로 할머니를 안아드리고, 방명록에 몇 줄을 남긴 뒤에 박물관 문을 나섰다. 문화력은 요란한 소음 속에만, 큰 규모로 지은 국립박물관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진정한 문화의 힘은 조용한 조직력, 포기하지 않는 진정성, 대를 잇는 열정, 실력을 갖춘 작은 동네 박물관에 있을지 모른다. 거대한 서사와 지배계급에 초점을 맞춘 역사가 아닌 나와 우리의 작은 생활사, 미시사의 중요성을 마을을 산책하며 다시 느낀다. 아울러 내가 사는 부산 기장군 정관에도 지역사회의 향토사와 얽힌 이런 학교 박물관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밖에는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바르구진 마을에서 27년간이나 살면서 사면이 되어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지 않은 데카브리스트 미하일 큐헬베케르(1798~1859)의 무덤은 마을 공동묘지 뒤편에 있었다. 귀족으로서의 화려했던 삶을 버리고 그는 이 벽촌에서 읽기, 쓰기, 산수를 사람들에게 무료로 가르치고 가난한 이를 위해 새로운 농작물 실험을 했다. 약국과 병원을 자기 집에 열었고, 인근 지역의 광물자원과 지리를 연구했다. 그의 무덤 앞에서 작은 박물관의 전시물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다시 만지며, 데카브리스트들에 바친 러시아 문호 알렉산드르 푸시킨(1799~1837)의 시 ‘깊은 시베리아의 막장에서’를 중얼거려본다. ‘깊은 시베리아의 저 깊은 막장에/ 콧대 높은 인내를 보관하게나/당신들의 비통한 노동은/ 달음질치는 저 높은 생각과 함께 /절대로 사라지지 않으리…!’ 비가 조심조심 걷히기 시작하더니, 멀리 하늘 한쪽에서 시베리아를 데울 해님이 고개를 내민다.
2025-09-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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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개와 늑대의 시간, 한국 외교의 성패
지난주 중국은 국제사회에 ‘대국굴기’를 과시하는 두 장면을 연출했다. 그 첫 번째가 9월 1일 톈진에서 열린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였다. 2001년 출범한 이 협력체는 유라시아 최대 규모의 정치·경제·안보 플랫폼으로 이번 회의에는 20여 개국 정상과 10개 국제기구 수장이 참석해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시진핑 주석은 이 자리에서 “냉전적 사고방식과 패권주의, 보호무역주의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 있다”며 “보다 정의롭고 합리적인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를 구축하자”고 강조했다. 회의는 유엔과 국제기구 중심의 다자주의를 지지하는 공동선언을 채택했고, 중국 주도의 제도적·경제적 협력 기반을 한층 강화했다. 특히 미국의 고율 관세(50%)로 갈등을 겪다 7년 만에 회의에 복귀한 인도의 모디 총리를 향해 시 주석은 “용과 코끼리가 함께 춤춘다”는 표현으로 협력을 당부했다. 미국이 지난 20여 년간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축으로 삼아온 인도가 이번에는 중국 쪽에 발맞추는 듯한 행보를 보인 것이다.
이어 9월 3일에는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시진핑 주석은 “인류는 다시 한번 평화냐 전쟁이냐, 상생이냐 제로섬이냐의 기로에 서 있다”며 반패권주의 메시지를 발신했다. 열병식에서는 중국이 처음으로 육·해·공 전력을 통해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전략적 핵 3축 체계’를 공개했다. 그러나 세계의 시선을 가장 끈 장면은 시 주석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함께 망루에 선 모습이었다. 1959년 이후 66년 만에 재현된 이 장면은 북중러가 이해관계를 넘어 전략적 연대를 공식화했음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김정은의 북한이 강대국 외교의 틈바구니 속에서 나름의 생존 방식을 확보했음을 상징하고 있었다.
이렇듯 중국은 SCO 정상회의와 전승절 기념식을 통해 경제적·군사적 연대와 위상을 과시하며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새로운 규칙을 세우겠다고 정면 도전했다. 그러나 국제사회, 특히 유럽과 동아시아의 선진국들은 미국의 리더십에 의문을 품으면서도 여전히 중국을 그 대안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공들였던 푸틴과 김정은이 중국 쪽에 손을 맞잡는 모습에 적잖은 실망을 느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와 그로 인한 서방 내부의 균열이 시진핑의 ‘대국굴기’를 오히려 가속화하며 국제사회를 더 큰 불확실성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편 지난 8월 말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과 미국을 잇달아 방문했다. 역대 대통령들이 외교·안보의 중심축인 미국을 먼저 찾던 관례를 깨고 일본을 먼저 찾은 것은 일본과의 관계를 공고히 해 이를 미국과의 협력 강화에 지렛대로 삼으려는 실용적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어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밀도를 높이고 신뢰를 구축했다. 동시에 3500억 달러(약 487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하고 관세를 15%로 낮추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일본 사례에서 보듯 이 막대한 투자금은 사실상 미국 제조업 부흥에 일방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며, 투자 지연 시 관세가 다시 인상될 위험도 배제할 수 없다. 관세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더욱이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한미안보협력의 핵심인 북한 비핵화, 미국의 한반도 안보 공약, 확장억제 보장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핵보유국 지위를 주장해 온 북한은 중국·러시아와의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전승절 행사에서 드러났듯, 북한은 강성 대국을 내걸고 미중 사이를 오가며, 러시아에는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며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반면 한국에 대해서는 ‘적대적 두 국가론’을 내세우면서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결국 이재명 정부 외교의 핵심은 미중 전략 경쟁과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대립 구도 속에서 미국의 일방주의와 북한의 핵전략이라는 두 개의 과제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안보에서는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되, 경제와 비안보 분야에서는 중국과의 협력도 필요하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하면서도 ‘통일 경쟁’을 내려놓고 핵 리스크 완화와 군사 충돌 방지에 집중해야 한다. 나아가 민주주의와 규범에 기반한 국제질서 강화를 원하는 국가들과 연대해 미국의 일탈로 약화한 국제 공공재를 보완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지금 한국 외교는 황혼 녘, 멀리 있는 형체가 개인지 늑대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이른바 ‘개와 늑대의 시간’에 서 있다. 기회와 위협이 교차하는 이 불확실성의 시기에 실용과 원칙을 국력에 걸맞게 어떻게 조율하느냐가 한국 외교의 성패를 가를 것이다.
2025-09-08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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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스테이블코인, 은행 시스템의 위기 아닌 기회
최근 금융·블록체인 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스테이블코인이다. 디지털 자산 시장의 변동성을 최소화하고, 기존 금융시스템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결제·정산 수단으로의 가능성 때문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의 확산이 은행 본연의 사업 기반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필자의 회사는 부산시가 지원하고 우리은행이 운영하는 부산 디노랩(Digital Innovation Lab) 1기 기업으로 선정된 뒤 디노랩이 주최한 ‘오픈 이노베이션 데이’에서 블록체인 혁신 사업에 대해 발표할 기회를 가졌다.
이 행사에는 7개 기업이 참가했는데, 비댁스(BDACS)는 첫 번째 발표를 맡아 스테이블코인의 도입 필요성과 발행 구조, 그리고 각 이해관계자의 역할을 주제로 발표했다. 스테이블코인이 워낙 ‘핫’한 주제였던 만큼, 발표 직후 청중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특히 은행 관계자들이 보인 반응은 흥미로웠다.
은행들이 가장 먼저 지적한 우려는 수탁고 감소였다. 고객 자금이 은행 예금으로 유입되지 않고 스테이블코인으로 전환돼 외부 지갑에 보관된다면, 은행의 전통적인 수익 기반이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 제기된 우려는 빅테크와의 경쟁이었다. 글로벌 IT 기업들이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 경우 은행이 기존 금융상품만으로는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또 다른 지점은 전통 금융상품의 매력 약화였다. 예·적금이나 카드 서비스보다 더 빠르고 저렴한 대안이 등장하면, 고객을 붙잡아 두기가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라는 위기감이 엿보였다.
이에 대해 필자는 정반대 시각을 제시했다. 스테이블코인은 오히려 은행이 새로운 기회를 선도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 구체적 가능성은 여러 영역에서 확인된다. 우선 결제 인프라 혁신이다.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면 은행은 결제·송금 비용을 줄이고 해외 송금이나 대규모 정산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지금도 글로벌 결제망은 복잡하고 수수료가 높은데 스테이블코인은 이를 단순화해 고객에게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스테이블코인 연계 상품 개발도 가능하다. 은행이 직접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거나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예금·투자·대출 상품을 설계하면 기존 금융상품보다 더 매력적인 옵션을 고객에게 제시할 수 있다. 초기에는 다소 생소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은행이 블록체인 금융의 중심에 서는 길이 될 수 있다. 신사업 영역 확장도 있다. 블록체인 기반의 청산·결제, 디지털 자산 수탁, 글로벌 자본시장 연결 등은 은행이 그간 쌓아온 신뢰 자산을 바탕으로 진출할 수 있는 분야다. 과거 인터넷·모바일 뱅킹이 위기가 아닌 기회였듯, 스테이블코인도 은행에 ‘도전과 확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다.
이 흐름 속에서 은행들뿐 아니라 한국은행도 긴장하고 있다. 오랫동안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준비해 왔는데, 이재명 정부가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강한 의지를 표출하면서 보이지 않는 경쟁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특히 한국은행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활성화될 경우 해외로 국부가 유출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우려가 다소 과도하다고 본다. 이미 국내 자본시장은 해외 주식과 채권 투자에 활짝 열려 있으며 기업과 개인의 해외 투자 역시 일상화돼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국내외에서 사용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국부 유출로 이어진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글로벌 무역과 투자에서 활용된다면, 원화 국제화라는 긍정적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다.
한국의 IT 산업이 지금과 같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2000년대 초 ‘인터넷 버블’ 시절 이뤄진 과감한 인프라 투자와 기업가들의 혁신 덕분이었다. 당시의 시도는 지금의 네이버, 카카오 같은 토종 플랫폼이 글로벌 경쟁자들을 제치고 국내 시장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스테이블코인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불확실성과 우려가 더 크지만, 장기적으로는 금융 혁신의 생태계를 키우는 씨앗이 될 수 있다.
결국 스테이블코인은 은행에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다. 위기만 바라보면 새로운 경쟁자에게 밀려날 수 있지만, 기회를 본다면 결제 혁신, 상품 혁신, 신사업 확장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
특히 부산은 정부가 지정한 블록체인 특구로서 이 혁신의 최전선에 서 있다. 디노랩과 같이 부산시와 금융기관이 협력해 혁신 기업을 지원하는 시도는 좋은 출발점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스테이블코인 관련 기술과 서비스 기업에 대한 더 적극적인 지원과 실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래야 부산이 단순히 국내를 넘어, 아시아의 블록체인 금융 허브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2025-09-0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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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비혼주의자의 결혼 선언
10년 동안 비혼을 이야기하던 친구가 곧 결혼한다. 30대 초입에서 결혼 소식은 흔해진 지 오래지만, 이번에는 다소 놀랍게 다가왔다. 그만큼 그 친구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것 같다. ‘결혼 안 한다던 친구가 제일 먼저 결혼한다’는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는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무념무상으로 쳇바퀴 같이 굴러가는 일상을 살아가는 내게 이 소식은 오랜만에 ‘생각’이라는 걸 하게 했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함께 공부하고 토론해 온 페미니즘의 여정이 겹치며, 관점을 전환해주는 하나의 사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던 ‘제도’에 눈을 뜬 건 20대 초반이었다. 왜 여성만 당연히 가사 노동을 하는지, 왜 아이의 성은 아버지를 따르는지, 왜 육아와 돌봄은 당연히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는지, 익숙한 것들이 낯설게 보이던 시간이었다. 그 무렵, 한국 사회에는 여성 대상 범죄를 계기로 다시 한번 페미니즘의 물결이 일고 있었다. 친구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당연히 결혼해 출산과 육아를 전담할 미래를 그리고 있었던 나는, 처음으로 자신을 ‘비혼주의자’라고 소개하는 친구를 만났다. 나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왜 비혼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했는지’를 물었고, 친구는 “1인 가구야말로 자신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는 가족 형태라고 믿는다”고 답했다.
'혼자일 때 독립적이고 자유로움’ 인식
10년 전 비혼·독신 등 1인 가구 급증
최근 결혼·임신·출산 등 선택지 다양
각자의 욕망 솔직히 인정하는 분위기
남성·여성 성 역할 구분 짓지 않고
두 주체가 선택한 사랑 방식 존중을
학교에서 사회학 수업을 들으며 우리는 생각을 점점 더 구체화해 나갔다. 결혼, 임신, 출산은 여성의 주체성을 억압하는 제도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언어를 손에 쥔 첫 세대로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2015년 오마이뉴스에서 소개된 기획 기사 ‘결혼제도를 묻다 ④-비혼여성집담회’는 이렇게 전한다. “2015년에는 혼인 건수가 30만 건대까지 줄어들고, 1인 가구 비중이 전체 가구의 약 27%를 차지하는 등 비혼 및 독신 삶이 ‘소수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실제로 통계청 혼인 건수를 보면, 2015년 혼인은 30만 2800여 건으로 2003년 이후 최저였고, 1인 가구는 급증해 4인 가구를 제치고 대표적 가구 형태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결혼과 임신을 욕망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페미니즘을 지지한다면 비혼을 선택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느꼈고, 결혼과 출산을 원하는 마음이 스스로 모순처럼 여겨졌다. 그 경계에서 갈팡질팡하며 제도를 비판하면서도, 내 안의 욕망을 인정하기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의 선택지를 오히려 줄이는 관념이었다. 미국의 작가 록산 게이는 〈배드 페미니스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결정을 내릴 때조차 그것을 지지하는 기반 위에 서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놓치고 있던 지점이었다. 다른 여성의 결정을 지지하는 것이 곧 페미니즘의 정신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 세대는 더 복잡해졌지만, 동시에 더 자유로워졌다. 주변에는 결혼만 하되 임신과 출산은 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고, 결혼은 하지 않지만 아이를 낳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입양을 꿈꾸는 사람, 1인 가구를 유지하겠다는 사람도 있다. 분명한 것은 선택지가 다양해졌고, 각자의 욕망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요한 건 이 선택들이 더 이상 ‘정상 가족’에 비해 부족하거나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정상 가족의 경로를 따르지 않으면 어쩐지 잘못 살고 있다는 기분, 설명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는 각자의 방식이 자연스럽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흐름이 조금씩 자리 잡고 있다.
10년이 흐른 지금, 나는 친구에게 ‘어떻게 결혼을 결심했느냐’고 묻는다. 친구는 오랫동안 혼자일 때만 독립적이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둘이서도 서로의 주체성을 지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했다. 남성과 여성 모두 성 역할에 스스로를 구분 짓지 않고, 서로의 주체성을 지켜나갈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성의 육아와 여성의 직장 생활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 두 주체가 가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선택한 사랑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 그것이 2025년 우리가 그리는 이상적 가족의 모습 아닐까.
그래서 친구의 결혼 소식은 내게 단순한 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대를 관통하는 질문이자, 우리 사회가 어디까지 변했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계기였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세대의 고민을 증명하는 사건이자, 앞으로의 삶을 함께 모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지난 10년간 우리가 페미니즘을 통해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일지 모른다.
2025-09-0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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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바다에서 바다로
지난주 부산 관광 미래 네트워크 회원들과 함께 팬스타 크루즈 미라클을 타고 2박 3일 일정으로 오사카 박람회장을 다녀왔다. 하루 동안만 엑스포장을 둘러보는 일정이 과연 의미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에 실패하고 재도전을 준비하는 부산의 입장에서 현장을 직접 체험해 보자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도 이번 방문은 특별했다. 1993년 대전엑스포 공식 도우미로 활동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회장 곳곳을 누비며 600명의 회장 도우미와 1200명의 전시관 도우미들과 함께 관람객을 맞이한 기억이 생생하다. 93일간 이어진 축제는 20대 대학생이었던 필자에게 잊지 못할 추억의 장과 함께 관광학자의 길을 제공해 주었다. 이번 오사카 방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학자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부산 관광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여정이었다.
오사카 엑스포 방문길 크루즈 경험
이동 아닌 '관광' 자체 효능감 높아
박람회장 일본 청결 수준 명불허전
외국어 서비스 등 섬세함은 낙제점
관람객은 환대·소통만 기억할 따름
엑스포 재추진 때 타산지석 삼아야
오사카로 향하는 길은 크루즈 자체가 주는 설렘으로 시작됐다. 팬스타 크루즈 미라클은 엄밀히 말하면 대형 크루즈선은 아니고 페리와 크루즈의 중간쯤에 해당한다. 이것은 호텔 등급으로 따지자면 육성급이나 오성급 호텔이라기보다는 비즈니스호텔 또는 관광호텔급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것 같다. 규모는 작았지만 선상 생활은 기대보다 만족스러웠다. 객실은 쾌적했고, 사우나와 요가·줌바 프로그램, 저녁 식사 후에는 쇼와 이벤트 프로그램까지 마련되어 긴 이동 시간조차 여유롭고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 끼 식사가 단조롭지 않고 균형 있게 제공되어 ‘이동’이 아니라 ‘휴식’을 체험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경험은 부산이 앞으로 해양관광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한 작은 힌트가 되었다. 크루즈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관광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박람회장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일본 특유의 청결과 질서였다. 수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회장은 마치 개막 첫날처럼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바닥이나 조경, 안내 시설은 흠잡을 데 없이 잘 유지됐고, 화장실조차 시각과 후각 모두 쾌적했다. 10년 넘게 여러 지자체 축제 평가에 참여해 온 내 경험으로는, 이 정도의 청결 유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일본이 가진 강점이자 우리가 배워야 할 대목이었다.
그러나 감탄만 할 수는 없었다. 오사카 박람회장의 상징인 대지붕링(The large roof ring) 주변의 식물은 고사하거나 잡풀이 자라난 부분이 많이 있어서 조금 아쉬웠다. 잡풀이 자라난 부분은 어쩌면 생명을 잇는다는 주제 측면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의 전시관은 사전 예약제로만 운영되어 자유롭게 관람하기 어려웠고, 글로벌 행사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어 서비스는 부족했다. 한국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긴 대기 끝에 입장했지만, 전시 내 내레이션은 일본어로만 제공되었고 영어 안내도 일부에 불과했다. 관람객 참여 유도 역시 일본어 위주라 외국인 방문객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긴 대기 시간 동안 별도의 안내나 소통이 없었던 것도 아쉬웠다.
이 대목에서 1993년 대전 엑스포가 떠올랐다. 당시 우리는 줄을 서 있는 관람객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프리쇼 공간에서는 전시 영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곁들였다. 메인 영상관에 들어가기 전후로도 안내 멘트가 이어져 관람객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덕분에 수많은 전시관 중 몇 개만 관람해도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이번 오사카 엑스포는 첨단 영상과 레이저쇼를 선보였음에도 설명이 없어 많은 관람객이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기술은 화려했지만, 관람객과의 교감은 실종된 느낌이었다.
이번 경험은 부산에 중요한 숙제를 던져주었다. 세계박람회를 꿈꾸는 우리는 단순히 새 공항과 전시장, 크루즈 터미널 같은 하드웨어에만 치중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람객 중심의 운영 시나리오다. 긴 대기 시간도 즐거운 체험으로 바꾸는 섬세함, 다양한 언어로 제공되는 안내, 그리고 사람 사이의 따뜻한 교감이 필요하다. 기술은 도구일 뿐, 결국 관람객의 기억에 남는 것은 ‘환대’와 ‘소통’이다.
부산은 바다를 품은 도시이자 바다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관문이다. 앞으로 수많은 크루즈 관광객과 MICE 산업 방문객이 북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단지 새로운 건물이 아니라, 그들을 맞이하는 도시의 태도다. 가덕신공항이 개항하기 전에, 부산은 어떤 누가 방문해도 불편하지 않을 관광도시 부산을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개인으로 와도, 단체로 와도 불편하지 않은 해양도시. 그것이야말로 부산을 진정한 해양관광의 메카로 만들고, 세계인의 기억에 오래 남을 엑스포를 완성하는 길일 것이다.
2025-08-2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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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연공서열 개혁 없이 '공대 한국' 만들 수 없다
2000년대에도 의대·치대·한의대 등 이른바 ‘메디컬 학과’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요즘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입시 학원에서 배포하는 정시 배치표(자연계) 최상위권에는 서울 소재 명문대학 의대와 더불어 서울대 이공계 학과들이 여럿 이름을 올렸다. 휴대전화·반도체·자동차·선박 등 우리 대기업의 수출이 나날이 증가하던 시절, 전기전자공학과·화학공학과·기계공학과를 의미하는 ‘전화기’ 학과들은 취업 보증수표처럼 여겨지며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2010년대 들어 지방대 의대들의 서울대 공대 추월이 시작됐다. 의대라면 대학 브랜드도 상관없다는 신호였다. 변화는 2020년대에 완전히 굳어졌다. 2020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대 수리공학부나 컴퓨터공학부 등이 자연계 상위 20위권에 이름을 올렸지만, 2022년부터는 의학 계열 학과들이 상위 20위를 모두 장악했다(종로학원 배치표 기준).
기업 보상, 성과 아닌 근속연수 중심
걸출한 인재에 천편일률적 보수 적용
연구개발에 열심히 몰두할 필요 없어
미국·중국 업체, 글로벌 '스카웃 전쟁'
10년간 연평균 3만 명 국내서 해외로
실적 중심 연봉 책정 등 대책 서둘러야
‘의대에 미친 한국’은 최근 청년층에서도 뜨겁게 논의된 이슈다. KBS가 지난달 방영한 ‘다큐 인사이트-인재전쟁’은 우리나라 의대 열풍을 ‘공대에 미친 중국’과 비교하며 큰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요즘 중국이 1980년대 우리나라와 닮았다는 사실이 씁쓸함을 전했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을 꾀하던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자연계 최고 인기 학과는 의대가 아닌 공대였다. 수재들이 공대로 모여 치열하게 경쟁한 덕분에 우리나라 제조업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가 이런 흐름을 꺾은 계기가 됐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외환위기가 어떤 위기였나. 1997년 1월 한보를 필두로 삼미, 진로, 한신, 기아, 해태, 뉴코아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줄줄이 무너졌다. 기업들은 당장 불필요해 보이는 연구개발(R&D) 예산을 우선 삭감했다. 관련 인력들은 불황의 칼바람을 곧이곧대로 맞아야 했다. “이공계 일자리는 불안하다”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수능 도입 초기만 해도 반반이었던 인문계와 자연계 응시생 비율은 2000년대 초반 7대 3 이상으로 벌어졌다. 그때의 청소년·청년들이 지금 학부모가 됐다. 이들이 자녀에게 어떤 전공을 권유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일에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안정적이면 보상이 작고, 보상이 크면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그런데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이면서도 높은 소득을 얻는다. 면허로 보호받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은 2025학년도 신입생을 제외하곤 2006년부터 줄곧 3058명으로 동결된 상태다. 고령인구가 크게 늘고 있고, K-뷰티가 각광받으며 외국인 관광객의 피부과·성형외과 수요도 급증하는 중이다. 의사로선 위험은 적은데 잠재 수익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반면 이공계 일자리는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일단 산업 변화가 너무 빨라졌다. 정년 보장은 언감생심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었던 화학·정유·디스플레이·배터리 산업이 최근 큰 어려움에 직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성공한다고 해도 따르는 보상은 제한적이다. 기업의 보상 체계가 실적이나 성과가 아닌 근속연수를 중심으로 짜여있기 때문이다. 연공서열제는 걸출한 천재에 대한 보상을 평범한 직장인의 월급으로 제한한다. 제아무리 특출난 성과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받는 보상이 무능한 상사보다 적다면 굳이 아등바등 연구개발에 몰두할 필요가 없다. 의대로 향하거나 회사에서 적당히 자리를 지키는 게 개인으로선 합리적 선택이 된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는 지난 6월 공개한 ‘한국의 고급인력 해외 유출 현상의 경제적 영향과 대응방안’ 보고서에서 “지난 10년간 연평균 3만 명의 이공계 인력이 해외로 유출됐다”며 “컴퓨터공학, 바이오공학, 로봇공학 등 첨단분야에서 인재 유출이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인재 유출의 주요 원인으로는 단기 실적 중심의 연구평가 체계, 수직적 조직문화와 함께 낮은 보상 체계가 꼽혔다. SGI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과 중심 보상을 강화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올해 초 중국에서 생성형 인공지능 딥시크가 공개되며 전 세계에 충격을 준 뒤, 샤오미가 딥시크 개발에 참여한 개발자 뤄푸리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95년생인 그녀에게 샤오미가 제안한 연봉은 우리 돈으로 약 20억 원이었다. 어디 그런 연봉을 제안하는 기업이 샤오미뿐이며, 그런 제안을 받는 개발자가 뤄푸리뿐이겠나.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의 제목처럼 세계적으로 ‘인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기업들이 전 세계 이공계 인재를 싹쓸이해 가는 동안, 우리 기업들은 연공서열 문화에 손발이 묶인 채 바라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2025-08-1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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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자산시장 불장에 대비하는 자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퇴직연금 ‘401K’의 암호화폐 투자 제한 규정을 해제하자, 비트코인은 11만 7000달러 선을 넘어서며 사상 최고가 갱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암호화폐 친화적 경제학자 스티븐 미란을 연방준비제도(Fed) 이사로 지명하면서, 디지털자산시장의 대규모 불장(강세장)이 임박했다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은 이미 디지털자산시장 강세장에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완성했고, 개인부터 기관까지 전방위적 투자에 나서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규제 미로에 갇혀 있고, 그 사이 우리 기업들은 하나둘 해외로 떠나고 있다.
미, 퇴직연금 암호화폐 투자 제한 해제
8조 9000억 달러 디지털 자산 유입
비트코인 사상 최고가 갱신 기대 커져
제도 설계 지연 땐 글로벌 경쟁 밀려
부산, 블록체인 특구 지위 최대한 활용
혁신 기업 비즈니스 검증 환경 조성을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지니어스법’(GENIUS Act, 미국 스테이블 코인 국가 혁신 지침법)은 단순한 규제 완화를 넘어선다. 이는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편입시켜 디지털 시대의 달러 패권을 공고히 하려는 국가 차원의 전략이다. 현재 스테이블코인의 99% 이상이 달러 기반이며, 대표주자인 테더(USDT)의 시가총액만 14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더 주목할 점은 테더가 미국 국채 보유량을 1270억 달러로 늘리며 한국을 제치고 세계 18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담보로 미국 국채를 대량 보유하면서 국채 수요가 증가하고, 결과적으로 금리 상승 압력은 줄어들며 미국의 재정 부담도 완화된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디지털 금융 영역까지 확장하는 치밀한 설계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안타까운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음악 저작권 기반 디지털 증권을 개발한 뮤직카우가 대표적 사례다. 국내에서는 규제 불확실성으로 영업 손실만 거듭하던 이 회사가 미국에서는 증권거래위원회(SEC) 승인을 받아 완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같은 기술, 같은 상품이지만 제도적 환경의 차이가 성패를 갈랐다.
국회에서 ‘디지털자산기본법’이 발의되고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시작됐지만, 속도는 여전히 더디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공존하는 시대가 다가오는데, 제도 설계에서 뒤처진다면 한국은 글로벌 디지털 금융 경쟁에서 변방으로 밀려날 위험이 크다. 시장 신호 역시 명확하다. 한때 한국의 뜨거운 투자 열기를 상징했던 ‘김치 프리미엄’은 사라졌고, 오히려 해외 가격이 더 비싼 ‘역프리미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흐름은 정반대다. 비트코인 반감기 후 나타나는 4년 주기 강세장, 미국의 비트코인 ETF 승인, 상장 기업들의 대규모 비트코인 매입, 연말 금리 인하 전망까지 모든 조건이 사상 최대 규모의 불장을 예고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량이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도 시장의 팽창 모드를 뒷받침한다.
특히 401K 투자 제한 해제는 게임의 판을 완전히 바꿨다. 8조 9000억 달러 규모의 거대 자금이 디지털자산 시장으로 유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미국 정부의 ‘묵시적 보장’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수천만 미국인의 노후 자금이 비트코인에 연동되면, 미국 정부가 비트코인 시장을 일정 수준 이상 방어해야 할 동기가 생긴다. 이를 간파한 미국의 개인과 기업들은 이미 ‘전략적 진입’에 나서고 있다.
그렇다면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부산은 준비하고 있는가?
부산은 대한민국의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되었고, 디지털 금융 중심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하드웨어 인프라는 어느 정도 갖춰졌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소프트 인프라’다. 관련 기업과 인재가 모이고, 글로벌 디지털 금융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부산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글로벌 수준의 디지털자산 콘퍼런스와 네트워킹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사람과 기업을 부산으로 모이게 해야 한다. 동시에 중앙정부가 부여한 블록체인 특구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샌드박스를 통해 디지털자산 혁신 기업들이 부산에서 실제 비즈니스 모델을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핵심은 유망한 디지털자산 기업이 서울에서 실행하지 못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검증하기 위해 싱가포르나 두바이로 나가지 않고, 부산에서 비즈니스를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의 대학과 공공기관이 참여하는 체계적인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구축하여 디지털 금융 전문가를 키우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미국이 이미 달리고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 시동을 걸어야 한다. 불장은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가 된다. 부산이 그 선봉에 설 수 있을지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대한민국의 디지털 금융 미래가 부산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2025-08-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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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검찰 폐지"라는 구호에 가려진 빈틈
얼마 전 ‘검찰청’을 폐지하고 ‘공수청’을 신설한다는 뉴스 특보를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헌법상 명시된 검찰 조직과 검사의 법적 권한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했더니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8월 5일 더불어민주당이 검찰 조직을 사실상 해체하는 내용의 검찰 개혁 방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검찰폐지”라는 구호 아래 제시된 이 개혁안에 따르면, 현재의 검찰청을 폐지하고, 법무부 산하에 공소청이라는 새로운 기소 전담 기관을 신설한다. 또한 수사는 경찰과 분리해 행정안전부 산하에 중대범죄수사청을 설치하고, 국무총리 직속의 국가수사위원회를 두어 수사 공정성을 감독하도록 한다. 개혁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례 없이 파격적이다. 그동안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던 보완수사요구권도 전면 폐지하여,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없애고 기소권만 남겨 별도 기관으로 운영하겠다는 구상이다.
정치검찰의 폐해를 막고 검찰의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는 개혁의 목소리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2000여 명 검사 중 극소수의 일탈을 잡겠다고 검사의 손발을 묶어 형사사법 시스템을 흔드는 것이 능사인지에 대해 법조인으로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언뜻 보기에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는 정치적 독립성, 권력 분산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현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사 구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수사 단계에서 확보되지 못한 증거나 누락된 정황이 보완되어 기소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 실체적 진실은 드러나지 못한 채 묻히기 쉽고, 현실에서는 피해자 보호의 사각지대를 만들 수 있다. 발표된 개혁안대로 진행될 경우, 공소청 검사가 수사 과정에 일절 개입하지 못하므로, 중수청이나 경찰이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수사를 마쳐도, 공소청은 보완을 요구하지 못해 부족한 증거로 기소해버리거나 아예 기소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이 사건을 자체 종결한 이른바 ‘불송치’ 사건에 대해 피해자가 이의를 제기한 건수는 2021년 약 2만 5000건에서 2023년에는 4만 건 가까이로 늘었다. 이 중 검찰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결과 기소로 전환된 사건도 1000건 이상이다. 수사 초기 판단에 대하여 검찰의 보완이 실질적으로 필요했음을 방증한다. 검찰이 재검토를 통해 놓쳤던 범죄 혐의를 드러내고, 기소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검찰의 독립적 판단은 현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실제 ‘부산 돌려차기 사건’에서도 경찰은 피의자의 성범죄 의도를 확인하지 못한 채 송치했으나, 검찰이 휴대전화 포렌식 등을 통해 결정적 증거를 확보, 중상해가 아닌 강간살인미수 혐의로 기소하여 중형이 선고되었다. 수사 초기부터 검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달라졌을 수 있는 결과다.
프랑스는 ‘조사판사’ 제도를 통해 일정 규모 이상의 중대 사건에 대해 법관이 직접 수사를 지휘하고, 독일은 검사에게 경찰 수사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 영국 역시 경찰 수사 이후 기소 여부는 독립된 왕립검찰청(CPS)이 전담한다. 해외 어느 나라에서도 수사에서 사법적 통제가 완전히 배제된 구조는 찾기 어렵다. 조직을 분리하더라도 결국 철저한 검증과 보완을 거쳐 사건의 완결성을 담보하는 역할은 반드시 남겨두는 것이다. 단순히 권한 분산만을 앞세운 제도보다 책임성과 균형을 고려한 구조가 작동하도록 만든 것이다.
검찰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검찰이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거나 수사권을 남용한 사례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견제와 폐지는 다르다. 모든 수사 기능을 박탈한 채 검찰을 해체하겠다는 주장은 법적 공백을 초래할 수 있다. 검찰의 직접 수사 개시는 원칙적으로 제한하되, 검찰이 한 차례 검토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병행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최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공청회에서도 “검사가 끝까지 사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는 남겨두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이 나왔다. 수사, 기소의 분리는 권력기관 견제라는 명분이 있으나, 잘못 구현하면 피해자 보호와 범죄 대응력 약화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검찰 개혁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개혁은 해체가 아니라, 구조의 정비여야 한다. 수사의 투명성 확보, 외부 감시기구의 강화, 수사자료 열람 절차의 확대 등 실질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특히 기소 결정 과정의 독립성과 책임성 확보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병행되어야 하며, 검찰의 권한 행사에 대해 시민이 감시할 수 있는 구조적 시스템 설계가 우선되어야 한다.
‘검찰 폐지’라는 구호에 가려진 빈틈을 직시하여,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 인권보호와 형사 사법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길이 무엇인지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2025-08-06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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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칭다오는 왜 세계적인 해양도시가 되었을까?
푸른 바다와 활기로 가득한 항구, 다채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부산. 우리는 이곳을 오래전부터 ’해양수도‘라 부르며 원대한 미래를 꿈꿔왔다. 그런데 어느새,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익숙한 중국 칭다오가 불과 몇 년 사이 조용하지만 놀라운 속도로 세계적인 해양도시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적잖은 시사점을 안겨 준다. 부산과 칭다오는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오랜 항만 역사를 공유하며 바다를 중심으로 성장해온 공통점이 있다.
칭다오는 2022년 항만 물동량 세계 4위, 2020년에는 컨테이너 처리량에서 부산항을 앞질러 세계 6위에 오르며, 글로벌 물류 허브로서 독보적인 위상을 확립했다. 또한 해양 과학기술, 신산업, 문화관광 등 다방면에서 세계적 해양도시로 인정받고 있다. 신성장 동력 모색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부산에게 칭다오 성공 모델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귀중한 이정표가 된다. 특히 해양수산부의 연내 부산 이전이 공식화된 지금은 해양수도의 위상을 강화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결정적 전환점인 만큼 칭다오의 전략을 면밀히 분석하고 이를 부산 미래 구상에 어떻게 접목할지 심도 있게 모색할 필요가 있다.
중국 정부 연구·인프라 전폭 지원
해양 기업, R&D 시설 집적 유도
과학기술·신산업·문화관광 성장
우수 인재 유치, 기업 경쟁력 상승
해수부 이전 앞둔 부산에 시사점
미래지향적 산업구조 혁신 필요
칭다오의 성장에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해양 과학기술 연구 지원과 인프라 구축 노력이 있다. 정부는 칭다오를 해양 과학기술 혁신의 중심지로 육성하기로 하고 중국해양대학교를 비롯한 세계적 수준의 연구기관과 R&D 시설, 해양 관련 기업 등을 집적시켰다. 해양 생물학, 지질학, 환경,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도적인 연구와 산학연 협력이 이뤄졌다. 투자와 제도적 지원, 집적화는 우수 인재 유치와 산업 경쟁력 강화로 이어졌다.
부산 역시 해양, 수산 분야의 우수한 기관이 많지만, 이들의 잠재력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여전히 수도권 집중과 지방 기피 현상으로 인한 우수 인재 유입의 한계와 단순한 부처의 물리적 이전만으로는 해양 과학기술 허브로 도약하기에 역부족이라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부산이 진정한 해양 혁신의 거점이 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지원 아래 공공기관, 연구소, 기업, 법률 및 금융 서비스 등 관련 주체들을 집적화하여 시너지를 일으키는 해양 클러스터 구축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감한 구조 혁신과 전략이 병행될 때 부산은 세계적 해양 혁신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칭다오는 전통 해양 산업에 머무르지 않고, 해양 바이오, 신소재, 심해 자원 개발, 해양 장비 제조 등 미래 고부가가치 산업에 과감히 투자하며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 물류 중심 항만에서 벗어나 첨단 기술 기반의 해양 산업 생태계로 질적 전환에 성공한 사례다. 부산 역시 조선과 해운 등 기존 산업의 구조 전환은 물론, 해양 바이오, AI, 스마트시티 등과 같은 신산업 분야에서 성장 동력 발굴이 절실하다.
해수부 이전은 해양 금융, 해운·항만, 물류 등 전통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이러한 고부가가치 신산업을 육성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중앙정부 관련 부처와의 긴밀한 소통과 유기적인 협력은 필수적이다. 정부와의 물리적 거리에 따른 정책 효율성 저해를 극복하고, 국가 해양 정책을 신속히 집행할 수 있는 강력한 협력 체계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도시 이미지와 문화 콘텐츠 역시 해양도시 경쟁력의 핵심 요소다. 칭다오는 아름다운 해변과 근대 건축, 그리고 맥주 축제를 해양 문화관광과 결합해 도시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특히 아시아 최대 규모의 칭다오 국제 맥주축제는 매년 수백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대표 문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문화와 축제, 역사와 자연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칭다오의 도시 브랜드와 지역 경제는 함께 성장하고 있다. 부산 역시 해운대, 광안리, 영도, 다대포 등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해양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원들을 단순한 관광지에 머무르지 않고, 해양 스포츠, 크루즈 관광, 해양 레저 등 부산만의 차별화된 콘텐츠로 발전시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
칭다오의 사례는 부산에 분명한 교훈을 준다. 부산은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혁신을 통해 세계적 해양도시로 도약해야 한다. 이를 위해 칭다오의 일관된 정책 추진, 미래 지향적 산업구조 전환, 매력적인 도시 콘텐츠 개발 교훈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해야 한다. 아울러 해양 과학기술 인재 유치 장벽 해소, 중앙 행정과의 긴밀한 협력 체계 구축 등 부산의 실질적 과제들을 전략적이며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단순한 물리적 부처 이동에 그치지 않고 국가 해양 정책의 중심 도시로서 혁신과 협력을 병행할 때 비로소 부산은 진정한 동북아 해양수도로 거듭날 것이다.
2025-08-0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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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생애 첫 한의원 침 치료
여름 내내 한의원에 다니고 있다. 발목 부상 때문이다. 다섯 살에 처음 깁스를 착용한 이래로 거의 5~6년 주기로 발목을 다쳐왔다. 그때마다 정형외과에 방문해 엑스레이를 찍고 물리치료를 받고 깁스를 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젠 너무 익숙하다. 인대를 다친 것이기 때문에 엑스레이에서는 늘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의사선생님은 말했다. “엑스레이 사진상으로는 깨끗하네요. 다행히 뼈는 이상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부상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이전까지는 길을 걷다가 넘어지거나 발을 삐끗해 다쳤다면 이번에는 누군가에게 발을 밟혀서 다친 경우였다. 부상 후 치료를 마친 지 몇 주가 지났음에도 운동을 할 때면 이따금 통증이 느껴졌다. 병원에서는 명확한 원인이 보이지 않으니 딱히 치료법이 없었다. 휴식을 취하라는 조언과 더불어 진통제를 처방받았지만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통증에 대한 좌절과 함께 전통의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치료를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올려보면 어렸을 적 탕약을 먹고 쓴맛이 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한의원에서 받는 침, 부항, 뜸과 같은 치료는 뭔가 낯설게 느껴졌었다.
실제로 올해 초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2024년 한방의료 이용실태조사’에 따르면 젊은 세대일수록 한방의료 이용 경험이 낮아짐을 알 수 있다. 조사에서는 국민 중 67.3%가 평생 한방의료를 한 번이라도 이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지만 연령별로 보면 차이가 있다. 20대 이하는 31.1%로 가장 낮았고 30대는 47.8%로 절반에 못 미쳤다. 반면 40대는 66.1%, 50대는 79.8%, 60대 이상은 86.6%로 나타났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한방의료 이용 경험이 뚜렷하게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용률의 차이는 각 연령대에서 경험하는 질환 유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2030세대는 한방의료가 상대적으로 강점을 보이는 질환의 발병 빈도가 낮고 통증이 발생해도 약을 사먹거나 진통제를 처방받아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40대 이상에서는 등·허리 통증, 디스크, 관절염 등 근골격계 질환과 신경계통, 순환계통 질환 등 반복적이고 장기적인 통증에 대한 치료목적으로 내원했다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주기적으로 한의원에 방문해 침 치료를 꾸준히 받은 결과 몸은 점차 반응하기 시작했다. 정강이부터 발가락까지 침을 맞고 난 후 처음엔 발등이 부푼 것처럼 느껴졌고 며칠 동안은 오히려 발 전체가 아프기까지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분산된 통증 덕분인지 오히려 발목 통증이 점차 옅어졌다. 발목 인대가 홀로 지탱했던 힘을 주변 다른 근육들이 함께 떠안으면서 마치 발 전체가 발목의 부담을 나누는 동안 발목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한의사 지인에게 이 경험을 나누었더니 내 감각이 실제 한의학의 치료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한의학이 중시하는 ‘전체’와 ‘맥락’의 개념을 이야기해 주었다. 몸은 개별적으로 나뉜 부위들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총체이며 증상은 그 흐름과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분보다는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독립된 개체보다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연결 속에 놓인 관계적 존재를 탐구하는 철학이다. 또한 인위적이기보다는 우리 몸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자연치유력을 통해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 회복하길 촉진하는 철학이다.
생각해 보니 이런 철학적 원리는 신체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유효할 것 같다. 예컨대 정신의학과에서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는 시스템은 효과가 신속하고 실용적이다. 하지만 우울증에 대한 감정의 뿌리를 살펴보고 맥락을 찾거나 문제 해결을 위한 근원에 도달하기엔 부족할 수 있다. 개인 차원이 아닌 집단 건강의 문제에 대해서도 원리는 유효할 것 같다. 곧 한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한 접근법도 한의학이 지닌 의료 철학처럼 보다 역사적인 시각과 총체적인 분석이 요구되곤 한다.
현대사회의 세계관은 대체로 전문화된 세부적인 관점과 미시적이고 단기적인 접근에 보다 익숙하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근현대 철학과 이전의 전통 철학이 지닌 사상적 특징은 마치 거울상처럼 서로를 비춘다. 두 관점 모두를 조화롭게 품을 때 각자의 한계를 보완하며 더 넓은 지혜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양방과 한방도 서로의 빈틈을 메우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한의학은 외국에서 대체의학으로서 점점 더 주목받으며 임상적 효용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두 의학이 지닌 우수한 의료 기술과 장점을 언제라도 모두 누릴 수 있는 의료 환경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2025-07-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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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이시바 총리의 ‘NO’ 발언과 미일 관세협정
“이것은 국익을 건 싸움이다.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마라.” “동맹국이라도 말할 것은 당당히 말해야 한다.” 2025년 7월 9일, 지바현 후나바시역 앞에서 열린 참의원 선거 유세 현장에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미국을 향해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4월 2일 일본에 대해 24%의 고율 관세 부과를 공식 발표한 데 이어 자동차 등 주요 품목을 포함한 패키지 협상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7월 7일 오히려 25%로 상향된 관세를 일방적으로 통보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에 안전보장을 의지하고 미국과의 보조를 최우선시해 온 자민당 출신 총리가 공개적으로 미국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대내외의 이목이 집중됐다.
사실 ‘NO’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본은 1968년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뒤, 1980년대 들어 미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흑자를 기록했다. 이에 미국은 일본산 제품에 대해 관세·수입 규제를 강화했고 1985년에는 달러 약세와 엔고를 유도하는 플라자 합의를 추진했다. 이에 대응한 일본 정부의 저금리와 통화 팽창 정책은 자산 거품을 키웠다. 그리고 1990년대 초 이른바 ‘버블 경제’가 붕괴하면서 일본은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 무렵 출간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1989년)은 미국에 당당히 맞서자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미국의 압박이 1980년대와 2020년대 모두 자동차 산업을 겨냥했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1980년대의 NO가 자신감의 표현이었다면, 2025년 이시바의 NO는 물러설 곳 없는 절박함의 외침이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NO 속에 성장기 일본과 쇠락기 일본이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협상 전 강경 발언으로 눈길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절박함의 외침
최근 선거 참패에 사퇴 요구까지 거세
협상력 약화 우려 속 15% 관세 확정
일본의 대미 대응 한국에 시사점 던져
설득력 있는 입장 표명, 실리 외교 핵심
물론, 이시바 총리의 발언은 감정이 아닌 전략이었다. ‘국익을 지키는 강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통해 7월 20일 참의원 선거에서 반전을 노린 선택이었으며, 대미 순응이 오히려 국익을 해칠 수 있다는 외교 소신도 반영됐다. 실제로 그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대미 밀착 외교’를 비판하면서 대항마로 부상했으나, 자민당 총재 경선에서는 다섯 차례나 고배를 마셨고 아베 장기 집권하에 비주류로 밀려나 있었다. 그럼에도 2024년 10월 이시바가 총리에 취임할 수 있었던 것은 자민당 주요 파벌의 비자금 스캔들로 무너진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적임자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시바 체제 아래 실시된 지난해 2024년 10월 27일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 연립 여당은 과반 의석(233석) 획득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이번 7월 20일 참의원 선거는 자민당의 장기 집권과 이시바 총리 개인의 정치적 생존이 걸린 중대한 승부처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자민당은 전체 248석 중 97석, 연립 여당 공명당을 합쳐도 122석으로 과반(125석)에 미치지 못했다. 유권자들이 ‘강한 리더’보다 고물가·생활고를 해결할 ‘생활 밀착형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정계는 중·참 양원 모두에서 여소야대 국면에 돌입했고, 자민당 정권 유지 자체가 기로에 놓이게 됐다. 야당은 물론 자민당 내부에서도 ‘이시바 책임론’이 분출되며, 총리직 사퇴 요구가 거세졌다.
그럼에도 이시바는 지난 21일 기자회견에서 “미국과의 관세협정을 반드시 책임지고 마무리하겠다”며 총리직 유지를 선언했다. 그는 4월부터 대미 협상을 주도해 온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을 중심으로 협상단을 워싱턴에 파견했다. 정권 불안정으로 협상력이 약화되었다는 우려 속에서도 제8차 고위급 협상에서 일본은 자동차 관세 해결, 농업 부문 보호, 대미 투자 확대라는 3대 원칙을 고수했다. 다음 날인 22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상호관세를 15%로 인하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는 일본의 5500억 달러 투자 약속과 8월 1일 관세 시한을 고려한 절충안으로 해석된다. 관세 인하 발표로 이시바 내각의 지지율은 일시적으로 반등했다. 협상 타결이 ‘국익 확보’로 이어진다면 이시바 총리의 리더십이 일정 부분 강화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국민 신뢰를 상실한 지도자가 국정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이시바 스스로 밝힌 표현처럼 ‘가시밭길’이 될 수밖에 없다.
이시바 총리의 NO 발언과 관세 협상 과정은 한국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에 무조건 순응하거나 정면으로 충돌하는 양자택일을 넘어서, 때에 따라서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NO를 통해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지속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외교적 성과를 국민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함으로써 외교와 정치의 선순환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재명 정부가 지향하는 실리 외교의 핵심일 것이다.
2025-07-2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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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이방인'과의 겸상
불현듯, 필리핀에서의 시간이 떠올랐다. 낯선 언어,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는 분명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나와, 지금 한국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같은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학생이었던 나는 한국인과 필리핀 현지인 사이의 묘한 관계를 느꼈다. 한국인들은 선주민들과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것을 꺼렸고, 식기구도 따로 썼다. 돌이켜보면 말이 통하지 않고 문화가 달라서 느끼는 차이점은 있었지만, 한국인이어서 차별받은 경험은 없었다.
얼마 전 나는 포천 이주노동자센터를 방문해 ‘한국에 와서 한국인과 한 번도 겸상한 적 없다’는 세 명의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들과 한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내가 보고 경험한 대로, 한국인들은 역시나 이주민들과 겸상하지 않는 모양이다. 함께 밥을 먹던 이주민 중 한 명은 공장에서 일하다 한국 사람에게 맞아서 전치 2주가 나왔었다는 이야길 했고, 다른 한 명은 공장 일을 하다 팔을 다쳤는데 공장주의 무리한 지시로 아픈 팔로 일을 했다는 이야길 했다. 모두 2025년에 일어났다고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한국에 온 이방인들은 그런 일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최근 경북 구미시의 한 아파트 공사장 지하 1층에서 하청업체 소속 베트남 국적 일용직 노동자가 앉은 자세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어 큰 충격을 안겼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급대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숨진 상태였고, 발견 당시 체온은 40.2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일 구미의 최고기온은 38.3도로, 7월 관측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고온 환경에 의한 온열질환을 사망 원인으로 추정했다. 고용노동부는 “해당 현장의 작업을 전면 중단하고, 폭염 안전 대책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고 입장을 내놓았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례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불운이 아닌, 이주노동자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은 이미 130만 명에 달하는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사회로 진입했으며, 이들은 우리 사회가 기피하는 3D 업종의 빈자리를 채우며 경제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 하에서 사업장 변경이 어렵고, 인권 침해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은 그들을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열악한 주거 환경과 의료 접근성의 한계 또한 이들이 겪는 고통을 가중시킨다.
부산 역시 이러한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부산 지역 제조업에서는 외국인 근로자 인력난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는 이주노동자들이 단순 노동 기반의 제조업을 선호하지 않고 더 나은 임금과 근무 환경을 찾아 이동하려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이들이 현재 처한 환경이 만족스럽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이탈을 선택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부산의 많은 중소 제조업체들이 외국인 근로자의 잦은 이직과 이를 제어할 수단이 없음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결국 이주노동자들의 권익과 처우 개선이 곧 우리 지역 산업의 지속 가능성과도 직결됨을 시사하는 셈이다.
현 정부는 인력난 해소를 위해 이주노동자 도입 규모를 확대하고 있으나, 이는 단순히 노동력 공급을 늘리는 것을 넘어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안정적인 정착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실적인 대안으로는 고용허가제(E-9)의 경직성을 완화하여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확대하고, 노동 착취를 방지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감시를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한 열악한 주거 환경 개선과 의료 접근성 확대 등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를 보장하여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과 캠페인을 지속하여, 이들을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자 함께 발전해나갈 파트너로 인정하는 문화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것도 함께 가야 한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포천 이주노동자센터의 김달성 목사는 이주노동자와 선주민들이 함께 밥을 먹는 ‘코이노니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코이노니아는 친교, 교제 등을 뜻하며 그리스에서 유래한 단어다. 단순히 친목을 넘어서 어떤 대상이나 목적에 함께 참여하고 동참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서 ‘겸상’이 오랜 시간 공동체의 깊은 유대감을 의미해왔음을 고려할 때, 이주민과의 식탁은 그들의 아픔과 슬픔,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들을 단순히 노동력으로만 보지 않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려는 시도들이 매우 필요하다. 나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데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각자의 자리에서 벽을 허무는 첫 발걸음을 내디뎠으면 한다.
2025-07-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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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닫히는 청와대, 열리는 도모헌
2025년 8월, 청와대가 다시 문을 닫는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개방된 청와대는 3년 만에 다시 대통령 집무실로 복귀할 준비에 들어가는 것이다. 259억 원의 예산이 확보되었고, 14일부로 전체 개방이 종료되며 내달 1일부터는 일반 시민의 출입이 전면 중단된다. ‘국민에게 돌려준 청와대’는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회귀하는 셈이다.
이번 청와대 복귀는 단순한 공간 이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시민의 거리, 정치와 공간의 관계, 관광과 정체성의 문제를 함께 안고 있는 중대한 전환이다. 윤석열 정부는 ‘탈권위’와 ‘소통’을 기치로 청와대를 개방했지만, 용산 대통령실은 업무 동선의 비효율, 보안 취약, 주민 불편 등의 문제를 노출했다. 이에 이재명 정부는 다시 청와대로 복귀하려 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권위의 상징’을 다시 열어둘 수 있느냐는 논의가 시작됐다.
대통령 집무 공간 회귀하는 청와대
서울 중심 정치 관광 콘텐츠의 퇴조
반면 부산시장 관사 작년 전면 개방
부산 콘텐츠가 주목받을 기회 부각
폐쇄와 개방 사이 공간 주인 물어야
도시 가치 담는 공간 구현 가능해져
청와대 개방은 상징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시민 참여의 경험이었다. 경복궁과 북악산을 잇는 도심 관광축의 핵심으로 기능했고, 하루 수만 명의 내외국인이 이곳을 방문하며 서울 관광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관광객들은 단지 사진을 찍는 것을 넘어, “대통령이 일하던 곳을 내가 걷고 있다”는 상징적 체험을 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전직 대통령의 집무 공간이나 관저를 박물관 혹은 관광지로 활용하는 사례는 많지만, 현직 대통령의 거주 및 집무 공간이 이렇게 전면적으로 개방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러한 전례 없는 개방은 서울 관광의 질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기록됐으나 이 공간은 다시 봉인된다. 봉인 후에는 보안 강화와 행정 효율성이 우선되며, 관람 기능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서울 도심 관광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청와대 개방이 가져온 시민 경험은 단절되고, 정치 공간의 폐쇄성은 부활할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시기, 부산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때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부산시장 관사로 쓰이던 공간이 시민에게 전면 개방됐다. 광안대교 앞 황령산 자락에 위치한 이 공간은 지난해 리모델링을 마치고, ‘도모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본관과 야외 정원, 공유 오피스, 시민 강연장, 카페 등으로 구성된 이 장소는 이제 더 이상 권력의 공간이 아니다. 시민의 회복과 소통, 창작과 휴식의 공간이다. 그동안 ‘지방 청와대’라 불리며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곳이 문화예술과 여가, 휴식의 복합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청와대가 닫히고, 부산시장 별장이 열리는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한다. 지방도 권력의 공간을 시민의 공간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실천의 사례이자, 공공공간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는 관광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산은 이 공간을 단지 시민 편의시설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한때 대통령이 머물렀던 공간’, ‘지방 청와대’라는 역사적 스토리는 정치사와 문화관광을 결합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여기에 피란수도 부산의 역사, 부마민주항쟁, 임시수도청사와 민주공원 등과 연계하면 정치·역사·시민성 중심의 스토리텔링 관광이 가능하다. 이는 단지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도시 이미지와 시민 정체성을 함께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청와대 개방이 종료되면서 서울 중심의 정치 관광 콘텐츠는 자연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오히려 지방 도시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수도권 중심의 문화자원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지역 고유의 역사적·정치적 콘텐츠가 관광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부산은 피란수도라는 유일무이한 정체성을 가진 도시이자, 산업화와 민주화의 상징이 혼재하는 곳이다. 이러한 복합적 역사성과 공간성을 어떻게 체계화하고 콘텐츠화하느냐에 따라 부산은 ‘열린 도시’, ‘시민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더욱 굳힐 수 있다.
이제는 공간을 단지 건물의 용도가 아니라, 기억의 장소, 체험의 현장, 민주주의의 물리적 구현 공간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든 부산시장 별장이든, 더 이상 권력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과 소통하고, 도시의 가치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시는 권력의 방식에 따라 닫히거나, 시민의 방식에 따라 열릴 수 있다. 부산이 선택한 ‘개방’의 방식은 단지 정치적 상징을 넘어서, 관광, 문화, 교육, 도시 브랜딩까지 연결되는 포괄적 가치 창출의 기회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공간을 통해 어떤 미래를 만들고 싶은지를 다시 물어야 할 때다. 청와대는 닫히지만, 부산은 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열린 문은 시민을 위한 문이며, 미래를 향한 문이어야 할 것이다.
2025-07-1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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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기록적인 폭염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부산에서는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비극적인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화재로 어린 자매들이 세상을 떠난 소식이 그 중 하나다. 부모가 일터로 나간 사이 화재로 목숨을 잃은 어린 남매를 애도했던 정태춘의 노래도 벌써 35년 전 이야기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시민들의 충격과 슬픔은 오래 지속되었다.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은 어린이들이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어른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다. 이 재난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돌봄 사각지대와 주거환경 문제까지 사회적 의제로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비극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삶을 잃어버린 또 다른 사건이 얼마 전 부산에서 있었다. 같은 학교 세 명의 고등학생이 스스로 삶을 마감한 사건이 그것이다. 진로 고민과 입시 스트레스, 학교 운영의 구조적 문제 등이 원인으로 거론됐지만, 그 어떤 이유도 이 죽음을 온전히 설명하진 못한다. 가족에게 마지막 사랑을 전할 만큼 다정했던 이들이 정작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가족과 친구, 교사들이 겪고 있을 고통 역시 다 헤아리기 어렵다. 문제는 이와 같은 사건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고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삶을 버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또 다른 종류의 재난이다.
우리는 이미 숫자를 통해 그 심각성을 접하고 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청소년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인 동시에 청소년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여성가족부의 발표에 따르면 2023년도 청소년 자살 사망자 수는 인구 10만 명당 11.7명으로 13년째 청소년 사망원인 1위로 꼽히고 있다. 청소년의 자해·자살 입원율은 10년 새 86.7% 증가했고, 여자 청소년이 남자 청소년의 4배에 이르렀다. 한국 청소년의 학업 성취도는 선진국 최고 수준이지만 정신 건강 지표는 최하위권이다. 유엔아동기금(UNICEF) 아동연구조사기관인 이노첸티연구소가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아동의 종합적인 복지 실태는 36개 국 중 27위를 차지해, 역시나 하위권에 머물렀다.
교사단체와 시민단체는 청소년의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며, 우리의 과도한 입시경쟁중심 교육체제가 한계에 달했음을 지적한다. 청소년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교육이 이들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되고 있는지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 역시 학벌 혹은 성공 등에 대해 획일화한 이상적 기준이 존재하고 그런 잣대가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줄 세우기가 쉬워지고, 끊임없이 비교하는 사회에선 열등감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한국 중고등학생의 47.3%가 학업이나 성적 때문에 불안하거나 우울하다고 답했다. 청소년 고민 상담의 유형으로는 정신건강과 대인관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학령인구는 줄었지만 사교육비는 30조 원을 넘어서고, 4세 고시, 7세 고시, 초등 의대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도한 조기 사교육이 벌어지고, 향정신성의약품인 ADHD 치료제가 공부 집중력에 좋다는 이유로 품절 사태까지 빚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교육 지옥’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이해가 갈 정도다.
교육 개혁은 역대 정부의 오랜 화두로, 이재명 대통령 역시 대선 공약으로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제시했다. 지역의 국립대학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경쟁력을 높여 지방 소멸과 교육위기를 돌파해보겠다는 취지다. 교육을 중심으로 한 지역 발전은 가장 중요한 정책적 수단이기에 장기적인 비전으로 정책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근본적인 정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교육의 현장에 막상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큰 비극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20대에 발견한 폴 발레리의 시 구절은 혼란스러운 10대 시절을 위로했다. 청소년기는 누구에게나 복잡스럽고 혼란한 시기로, 김소영 작가의 말처럼 마음이 골짜기를 지나고 산마루도 오른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처한 상황은 재난상황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학교를, 지역을, 제도를 바꿔야 한다. 더 이상 아이들을 잃을 수 없다는 간절함이 우리 사회와 정책에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그저 바람이 불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 마음을 먹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른들의 몫이다.
2025-07-0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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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국민의힘, '차출 정치' 관행 끊어야
이재명 대통령의 시작은 제법 성공적인 걸로 보인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7일 공개한 정기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 여론은 64%(부정 평가 21%)를 기록했다. 대선 당시 득표율인 49.4%를 훌쩍 웃돈다. 부산·울산·경남에선 56%의 응답자가 “잘하고 있다”, 29%가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대통령의 거친 캐릭터에 반신반의하던 중도층 지지율도 높아졌다. 상법 개정, ‘민생회복 소비쿠폰’ 지급 등 민생·경제 이슈를 속도감 있게 밀어붙인 게 영향을 끼친 걸로 보인다. 인사에서 일부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현재까지는 큰 잡음이 없는 편이다. 인사든 정책이든 기존에 예상됐던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까닭이다.
국민주권정부의 안정적 출발은 처음부터 좌충우돌했던 3년 전과 대비된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전부터 대통령실 이전 문제를 놓고 혼선을 빚었다. 그는 원래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약속했었다. 현실적인 여건이 녹록지 않았다. 그러자 느닷없이 서울 용산에 있는 국방부 청사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윤 전 대통령의 고집에 국군은 졸지에 방을 빼야 하는 신세가 됐다. 어디 대통령실 이전만 그랬나. 초등학교 5세 입학, 수능 킬러문항 폐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그의 임기 3년은 예측할 수 없는 국정 운영으로 점철됐다. 비상계엄은 클라이맥스였다.
권성동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달 12일 퇴임 기자회견에서 “지금도 왜 계엄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이 오랫동안 정치에 몸담은 인물이었다면 이렇게 예측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입당한 지 4개월 만에 제1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다시 4개월 지난 2022년 3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계에 데뷔하고 대통령이 되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국민의힘은 스스로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불확실성을 초래한 셈이다.
보수 정당은 예전부터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는 식으로 인물을 충원해 왔다. 김영삼·이회창 등 당의 리더들은 이른바 ‘YS 키즈’, ‘이회창 키즈’를 영입, 이들을 당 쇄신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1990년대 후반 영입돼 오랫동안 당내 소장파로 활약한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이 대표적이다. 외부 인재를 차출해 오는 건 기성 정치에 물들지 않은, 새 피를 수혈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정도가 있다. 위기를 맞을 때마다 바깥에서 답을 찾는다면 당 구성원들의 사기는 저하될 수밖에 없다. 외부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현실 정치에 적응하느라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한다. 인적 구성의 교체가 잦아지면 유산은 계승되지 못하고 단절된다. 보수 정당이 선거 때마다 빅텐트를 외치고 뜨내기 리더를 옹립하는 건, 역설적으로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남아있는 인재풀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인재 시스템은 국민의힘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다. 기본적으로 민주당 근처에는 ‘상비군’이 많다. 2000년대 초반, 86세대 운동권 인사들은 언제든 차출돼 정치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상비군들이었다. 이들에게서 더 이상 데려올 인물이 없어질 즈음엔 시민단체들이 그 역할을 대체했다. 같은 교수·변호사라 하더라도 오랜 세월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정치 근방에서 훈련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정치에 대한 이해도나 추진력 측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2016년 제20대 총선 이후 계속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전성기는 비단 국민의힘 대통령들의 연이은 탄핵 때문만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탄핵이라는 결과 자체가 국민의힘의 취약한 인적 토대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1990년 3당 합당은 보수 정당의 압도적 우위 구도를 가져왔다. 신한국당·한나라당 때처럼 이들이 한국 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을 땐 굳이 사람을 키우지 않아도 됐었다. 보수 정당으로 인물과 자원이 쏠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보수 정당의 지역적 기반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지지층의 인구학적 특성 역시 갈수록 불리해지는 중이다. 다른 무엇보다 총선에서 연달아 3번을 깨지고 대통령이 두 번 연속 탄핵당한 정당이지 않은가. 명망가가 총선을 앞두고 정당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우선순위 앞에 놓이는 정당은 국민의힘이 아닌 더불어민주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당장 수도권도 험지라며 기피하고 전통적 우호적인 부산·울산·경남 지역 지지율에서도 앞서지 못하는 정당에 누가 오려 하겠나. ‘차출 정치’의 관행을 끊고 내부에서 사람을 키우지 않는다면, 국민의힘이 겪고 있는 비상 상황은 언제든 다시 반복될 것이다.
2025-07-02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