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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바다에서 바다로
지난주 부산 관광 미래 네트워크 회원들과 함께 팬스타 크루즈 미라클을 타고 2박 3일 일정으로 오사카 박람회장을 다녀왔다. 하루 동안만 엑스포장을 둘러보는 일정이 과연 의미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에 실패하고 재도전을 준비하는 부산의 입장에서 현장을 직접 체험해 보자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도 이번 방문은 특별했다. 1993년 대전엑스포 공식 도우미로 활동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회장 곳곳을 누비며 600명의 회장 도우미와 1200명의 전시관 도우미들과 함께 관람객을 맞이한 기억이 생생하다. 93일간 이어진 축제는 20대 대학생이었던 필자에게 잊지 못할 추억의 장과 함께 관광학자의 길을 제공해 주었다. 이번 오사카 방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학자로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부산 관광의 미래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여정이었다.
오사카 엑스포 방문길 크루즈 경험
이동 아닌 '관광' 자체 효능감 높아
박람회장 일본 청결 수준 명불허전
외국어 서비스 등 섬세함은 낙제점
관람객은 환대·소통만 기억할 따름
엑스포 재추진 때 타산지석 삼아야
오사카로 향하는 길은 크루즈 자체가 주는 설렘으로 시작됐다. 팬스타 크루즈 미라클은 엄밀히 말하면 대형 크루즈선은 아니고 페리와 크루즈의 중간쯤에 해당한다. 이것은 호텔 등급으로 따지자면 육성급이나 오성급 호텔이라기보다는 비즈니스호텔 또는 관광호텔급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좀 더 쉬울 것 같다. 규모는 작았지만 선상 생활은 기대보다 만족스러웠다. 객실은 쾌적했고, 사우나와 요가·줌바 프로그램, 저녁 식사 후에는 쇼와 이벤트 프로그램까지 마련되어 긴 이동 시간조차 여유롭고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세 끼 식사가 단조롭지 않고 균형 있게 제공되어 ‘이동’이 아니라 ‘휴식’을 체험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경험은 부산이 앞으로 해양관광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에 대한 작은 힌트가 되었다. 크루즈는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관광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박람회장에 도착하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일본 특유의 청결과 질서였다. 수많은 인파가 몰렸음에도 회장은 마치 개막 첫날처럼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바닥이나 조경, 안내 시설은 흠잡을 데 없이 잘 유지됐고, 화장실조차 시각과 후각 모두 쾌적했다. 10년 넘게 여러 지자체 축제 평가에 참여해 온 내 경험으로는, 이 정도의 청결 유지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일본이 가진 강점이자 우리가 배워야 할 대목이었다.
그러나 감탄만 할 수는 없었다. 오사카 박람회장의 상징인 대지붕링(The large roof ring) 주변의 식물은 고사하거나 잡풀이 자라난 부분이 많이 있어서 조금 아쉬웠다. 잡풀이 자라난 부분은 어쩌면 생명을 잇는다는 주제 측면이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확인하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의 전시관은 사전 예약제로만 운영되어 자유롭게 관람하기 어려웠고, 글로벌 행사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어 서비스는 부족했다. 한국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긴 대기 끝에 입장했지만, 전시 내 내레이션은 일본어로만 제공되었고 영어 안내도 일부에 불과했다. 관람객 참여 유도 역시 일본어 위주라 외국인 방문객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긴 대기 시간 동안 별도의 안내나 소통이 없었던 것도 아쉬웠다.
이 대목에서 1993년 대전 엑스포가 떠올랐다. 당시 우리는 줄을 서 있는 관람객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프리쇼 공간에서는 전시 영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곁들였다. 메인 영상관에 들어가기 전후로도 안내 멘트가 이어져 관람객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인공이 되었다. 덕분에 수많은 전시관 중 몇 개만 관람해도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이번 오사카 엑스포는 첨단 영상과 레이저쇼를 선보였음에도 설명이 없어 많은 관람객이 멀뚱히 서 있을 뿐이었다. 기술은 화려했지만, 관람객과의 교감은 실종된 느낌이었다.
이번 경험은 부산에 중요한 숙제를 던져주었다. 세계박람회를 꿈꾸는 우리는 단순히 새 공항과 전시장, 크루즈 터미널 같은 하드웨어에만 치중해선 안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관람객 중심의 운영 시나리오다. 긴 대기 시간도 즐거운 체험으로 바꾸는 섬세함, 다양한 언어로 제공되는 안내, 그리고 사람 사이의 따뜻한 교감이 필요하다. 기술은 도구일 뿐, 결국 관람객의 기억에 남는 것은 ‘환대’와 ‘소통’이다.
부산은 바다를 품은 도시이자 바다를 통해 세계와 연결되는 관문이다. 앞으로 수많은 크루즈 관광객과 MICE 산업 방문객이 북항으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단지 새로운 건물이 아니라, 그들을 맞이하는 도시의 태도다. 가덕신공항이 개항하기 전에, 부산은 어떤 누가 방문해도 불편하지 않을 관광도시 부산을 먼저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개인으로 와도, 단체로 와도 불편하지 않은 해양도시. 그것이야말로 부산을 진정한 해양관광의 메카로 만들고, 세계인의 기억에 오래 남을 엑스포를 완성하는 길일 것이다.
2025-08-2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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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연공서열 개혁 없이 '공대 한국' 만들 수 없다
2000년대에도 의대·치대·한의대 등 이른바 ‘메디컬 학과’의 인기는 대단했지만 요즘 같은 정도는 아니었다. 입시 학원에서 배포하는 정시 배치표(자연계) 최상위권에는 서울 소재 명문대학 의대와 더불어 서울대 이공계 학과들이 여럿 이름을 올렸다. 휴대전화·반도체·자동차·선박 등 우리 대기업의 수출이 나날이 증가하던 시절, 전기전자공학과·화학공학과·기계공학과를 의미하는 ‘전화기’ 학과들은 취업 보증수표처럼 여겨지며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2010년대 들어 지방대 의대들의 서울대 공대 추월이 시작됐다. 의대라면 대학 브랜드도 상관없다는 신호였다. 변화는 2020년대에 완전히 굳어졌다. 2020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대 수리공학부나 컴퓨터공학부 등이 자연계 상위 20위권에 이름을 올렸지만, 2022년부터는 의학 계열 학과들이 상위 20위를 모두 장악했다(종로학원 배치표 기준).
기업 보상, 성과 아닌 근속연수 중심
걸출한 인재에 천편일률적 보수 적용
연구개발에 열심히 몰두할 필요 없어
미국·중국 업체, 글로벌 '스카웃 전쟁'
10년간 연평균 3만 명 국내서 해외로
실적 중심 연봉 책정 등 대책 서둘러야
‘의대에 미친 한국’은 최근 청년층에서도 뜨겁게 논의된 이슈다. KBS가 지난달 방영한 ‘다큐 인사이트-인재전쟁’은 우리나라 의대 열풍을 ‘공대에 미친 중국’과 비교하며 큰 충격을 주었다. 무엇보다 요즘 중국이 1980년대 우리나라와 닮았다는 사실이 씁쓸함을 전했다.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을 꾀하던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자연계 최고 인기 학과는 의대가 아닌 공대였다. 수재들이 공대로 모여 치열하게 경쟁한 덕분에 우리나라 제조업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가 이런 흐름을 꺾은 계기가 됐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외환위기가 어떤 위기였나. 1997년 1월 한보를 필두로 삼미, 진로, 한신, 기아, 해태, 뉴코아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줄줄이 무너졌다. 기업들은 당장 불필요해 보이는 연구개발(R&D) 예산을 우선 삭감했다. 관련 인력들은 불황의 칼바람을 곧이곧대로 맞아야 했다. “이공계 일자리는 불안하다”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수능 도입 초기만 해도 반반이었던 인문계와 자연계 응시생 비율은 2000년대 초반 7대 3 이상으로 벌어졌다. 그때의 청소년·청년들이 지금 학부모가 됐다. 이들이 자녀에게 어떤 전공을 권유할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일에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안정적이면 보상이 작고, 보상이 크면 높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게 세상 이치다. 그런데 의사라는 직업은 안정적이면서도 높은 소득을 얻는다. 면허로 보호받기 때문이다. 의대 정원은 2025학년도 신입생을 제외하곤 2006년부터 줄곧 3058명으로 동결된 상태다. 고령인구가 크게 늘고 있고, K-뷰티가 각광받으며 외국인 관광객의 피부과·성형외과 수요도 급증하는 중이다. 의사로선 위험은 적은데 잠재 수익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반면 이공계 일자리는 안정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일단 산업 변화가 너무 빨라졌다. 정년 보장은 언감생심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었던 화학·정유·디스플레이·배터리 산업이 최근 큰 어려움에 직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성공한다고 해도 따르는 보상은 제한적이다. 기업의 보상 체계가 실적이나 성과가 아닌 근속연수를 중심으로 짜여있기 때문이다. 연공서열제는 걸출한 천재에 대한 보상을 평범한 직장인의 월급으로 제한한다. 제아무리 특출난 성과를 보인다고 하더라도 받는 보상이 무능한 상사보다 적다면 굳이 아등바등 연구개발에 몰두할 필요가 없다. 의대로 향하거나 회사에서 적당히 자리를 지키는 게 개인으로선 합리적 선택이 된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는 지난 6월 공개한 ‘한국의 고급인력 해외 유출 현상의 경제적 영향과 대응방안’ 보고서에서 “지난 10년간 연평균 3만 명의 이공계 인력이 해외로 유출됐다”며 “컴퓨터공학, 바이오공학, 로봇공학 등 첨단분야에서 인재 유출이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인재 유출의 주요 원인으로는 단기 실적 중심의 연구평가 체계, 수직적 조직문화와 함께 낮은 보상 체계가 꼽혔다. SGI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과 중심 보상을 강화하는 게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올해 초 중국에서 생성형 인공지능 딥시크가 공개되며 전 세계에 충격을 준 뒤, 샤오미가 딥시크 개발에 참여한 개발자 뤄푸리에게 스카웃 제의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1995년생인 그녀에게 샤오미가 제안한 연봉은 우리 돈으로 약 20억 원이었다. 어디 그런 연봉을 제안하는 기업이 샤오미뿐이며, 그런 제안을 받는 개발자가 뤄푸리뿐이겠나. 화제가 된 다큐멘터리의 제목처럼 세계적으로 ‘인재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 기업들이 전 세계 이공계 인재를 싹쓸이해 가는 동안, 우리 기업들은 연공서열 문화에 손발이 묶인 채 바라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2025-08-1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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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자산시장 불장에 대비하는 자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퇴직연금 ‘401K’의 암호화폐 투자 제한 규정을 해제하자, 비트코인은 11만 7000달러 선을 넘어서며 사상 최고가 갱신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암호화폐 친화적 경제학자 스티븐 미란을 연방준비제도(Fed) 이사로 지명하면서, 디지털자산시장의 대규모 불장(강세장)이 임박했다는 전문가들의 예측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은 이미 디지털자산시장 강세장에서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완성했고, 개인부터 기관까지 전방위적 투자에 나서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규제 미로에 갇혀 있고, 그 사이 우리 기업들은 하나둘 해외로 떠나고 있다.
미, 퇴직연금 암호화폐 투자 제한 해제
8조 9000억 달러 디지털 자산 유입
비트코인 사상 최고가 갱신 기대 커져
제도 설계 지연 땐 글로벌 경쟁 밀려
부산, 블록체인 특구 지위 최대한 활용
혁신 기업 비즈니스 검증 환경 조성을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지니어스법’(GENIUS Act, 미국 스테이블 코인 국가 혁신 지침법)은 단순한 규제 완화를 넘어선다. 이는 달러 연동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으로 편입시켜 디지털 시대의 달러 패권을 공고히 하려는 국가 차원의 전략이다. 현재 스테이블코인의 99% 이상이 달러 기반이며, 대표주자인 테더(USDT)의 시가총액만 1400억 달러를 넘어섰다.
더 주목할 점은 테더가 미국 국채 보유량을 1270억 달러로 늘리며 한국을 제치고 세계 18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사들이 담보로 미국 국채를 대량 보유하면서 국채 수요가 증가하고, 결과적으로 금리 상승 압력은 줄어들며 미국의 재정 부담도 완화된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디지털 금융 영역까지 확장하는 치밀한 설계다.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안타까운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음악 저작권 기반 디지털 증권을 개발한 뮤직카우가 대표적 사례다. 국내에서는 규제 불확실성으로 영업 손실만 거듭하던 이 회사가 미국에서는 증권거래위원회(SEC) 승인을 받아 완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같은 기술, 같은 상품이지만 제도적 환경의 차이가 성패를 갈랐다.
국회에서 ‘디지털자산기본법’이 발의되고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시작됐지만, 속도는 여전히 더디다.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공존하는 시대가 다가오는데, 제도 설계에서 뒤처진다면 한국은 글로벌 디지털 금융 경쟁에서 변방으로 밀려날 위험이 크다. 시장 신호 역시 명확하다. 한때 한국의 뜨거운 투자 열기를 상징했던 ‘김치 프리미엄’은 사라졌고, 오히려 해외 가격이 더 비싼 ‘역프리미엄’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흐름은 정반대다. 비트코인 반감기 후 나타나는 4년 주기 강세장, 미국의 비트코인 ETF 승인, 상장 기업들의 대규모 비트코인 매입, 연말 금리 인하 전망까지 모든 조건이 사상 최대 규모의 불장을 예고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량이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도 시장의 팽창 모드를 뒷받침한다.
특히 401K 투자 제한 해제는 게임의 판을 완전히 바꿨다. 8조 9000억 달러 규모의 거대 자금이 디지털자산 시장으로 유입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미국 정부의 ‘묵시적 보장’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수천만 미국인의 노후 자금이 비트코인에 연동되면, 미국 정부가 비트코인 시장을 일정 수준 이상 방어해야 할 동기가 생긴다. 이를 간파한 미국의 개인과 기업들은 이미 ‘전략적 진입’에 나서고 있다.
그렇다면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부산은 준비하고 있는가?
부산은 대한민국의 블록체인 규제자유특구로 지정되었고, 디지털 금융 중심도시를 표방하고 있다. 하드웨어 인프라는 어느 정도 갖춰졌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소프트 인프라’다. 관련 기업과 인재가 모이고, 글로벌 디지털 금융의 흐름을 체감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부산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글로벌 수준의 디지털자산 콘퍼런스와 네트워킹 행사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며, 사람과 기업을 부산으로 모이게 해야 한다. 동시에 중앙정부가 부여한 블록체인 특구 지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샌드박스를 통해 디지털자산 혁신 기업들이 부산에서 실제 비즈니스 모델을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핵심은 유망한 디지털자산 기업이 서울에서 실행하지 못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검증하기 위해 싱가포르나 두바이로 나가지 않고, 부산에서 비즈니스를 검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부산의 대학과 공공기관이 참여하는 체계적인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구축하여 디지털 금융 전문가를 키우는 데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미국이 이미 달리고 있다면, 우리는 최소한 시동을 걸어야 한다. 불장은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가 된다. 부산이 그 선봉에 설 수 있을지는 지금 이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다. 대한민국의 디지털 금융 미래가 부산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2025-08-11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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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검찰 폐지"라는 구호에 가려진 빈틈
얼마 전 ‘검찰청’을 폐지하고 ‘공수청’을 신설한다는 뉴스 특보를 보고 두 눈을 의심했다. 헌법상 명시된 검찰 조직과 검사의 법적 권한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나 했더니 우려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지난 8월 5일 더불어민주당이 검찰 조직을 사실상 해체하는 내용의 검찰 개혁 방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검찰폐지”라는 구호 아래 제시된 이 개혁안에 따르면, 현재의 검찰청을 폐지하고, 법무부 산하에 공소청이라는 새로운 기소 전담 기관을 신설한다. 또한 수사는 경찰과 분리해 행정안전부 산하에 중대범죄수사청을 설치하고, 국무총리 직속의 국가수사위원회를 두어 수사 공정성을 감독하도록 한다. 개혁안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례 없이 파격적이다. 그동안 제한적으로 허용되었던 보완수사요구권도 전면 폐지하여,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없애고 기소권만 남겨 별도 기관으로 운영하겠다는 구상이다.
정치검찰의 폐해를 막고 검찰의 권한을 분산해야 한다는 개혁의 목소리에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2000여 명 검사 중 극소수의 일탈을 잡겠다고 검사의 손발을 묶어 형사사법 시스템을 흔드는 것이 능사인지에 대해 법조인으로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언뜻 보기에는 수사와 기소의 분리는 정치적 독립성, 권력 분산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현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사 구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수사 단계에서 확보되지 못한 증거나 누락된 정황이 보완되어 기소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 실체적 진실은 드러나지 못한 채 묻히기 쉽고, 현실에서는 피해자 보호의 사각지대를 만들 수 있다. 발표된 개혁안대로 진행될 경우, 공소청 검사가 수사 과정에 일절 개입하지 못하므로, 중수청이나 경찰이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고 수사를 마쳐도, 공소청은 보완을 요구하지 못해 부족한 증거로 기소해버리거나 아예 기소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검경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이 사건을 자체 종결한 이른바 ‘불송치’ 사건에 대해 피해자가 이의를 제기한 건수는 2021년 약 2만 5000건에서 2023년에는 4만 건 가까이로 늘었다. 이 중 검찰이 사건을 다시 들여다본 결과 기소로 전환된 사건도 1000건 이상이다. 수사 초기 판단에 대하여 검찰의 보완이 실질적으로 필요했음을 방증한다. 검찰이 재검토를 통해 놓쳤던 범죄 혐의를 드러내고, 기소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검찰의 독립적 판단은 현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실제 ‘부산 돌려차기 사건’에서도 경찰은 피의자의 성범죄 의도를 확인하지 못한 채 송치했으나, 검찰이 휴대전화 포렌식 등을 통해 결정적 증거를 확보, 중상해가 아닌 강간살인미수 혐의로 기소하여 중형이 선고되었다. 수사 초기부터 검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달라졌을 수 있는 결과다.
프랑스는 ‘조사판사’ 제도를 통해 일정 규모 이상의 중대 사건에 대해 법관이 직접 수사를 지휘하고, 독일은 검사에게 경찰 수사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 권한이 부여되어 있다. 영국 역시 경찰 수사 이후 기소 여부는 독립된 왕립검찰청(CPS)이 전담한다. 해외 어느 나라에서도 수사에서 사법적 통제가 완전히 배제된 구조는 찾기 어렵다. 조직을 분리하더라도 결국 철저한 검증과 보완을 거쳐 사건의 완결성을 담보하는 역할은 반드시 남겨두는 것이다. 단순히 권한 분산만을 앞세운 제도보다 책임성과 균형을 고려한 구조가 작동하도록 만든 것이다.
검찰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검찰이 정치적 사건에 개입하거나 수사권을 남용한 사례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견제와 폐지는 다르다. 모든 수사 기능을 박탈한 채 검찰을 해체하겠다는 주장은 법적 공백을 초래할 수 있다. 검찰의 직접 수사 개시는 원칙적으로 제한하되, 검찰이 한 차례 검토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병행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 최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공청회에서도 “검사가 끝까지 사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는 남겨두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이 나왔다. 수사, 기소의 분리는 권력기관 견제라는 명분이 있으나, 잘못 구현하면 피해자 보호와 범죄 대응력 약화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검찰 개혁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 개혁은 해체가 아니라, 구조의 정비여야 한다. 수사의 투명성 확보, 외부 감시기구의 강화, 수사자료 열람 절차의 확대 등 실질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특히 기소 결정 과정의 독립성과 책임성 확보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병행되어야 하며, 검찰의 권한 행사에 대해 시민이 감시할 수 있는 구조적 시스템 설계가 우선되어야 한다.
‘검찰 폐지’라는 구호에 가려진 빈틈을 직시하여,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실질적 인권보호와 형사 사법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길이 무엇인지 심도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2025-08-06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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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칭다오는 왜 세계적인 해양도시가 되었을까?
푸른 바다와 활기로 가득한 항구, 다채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우러진 부산. 우리는 이곳을 오래전부터 ’해양수도‘라 부르며 원대한 미래를 꿈꿔왔다. 그런데 어느새, 시원한 맥주 한 잔으로 익숙한 중국 칭다오가 불과 몇 년 사이 조용하지만 놀라운 속도로 세계적인 해양도시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적잖은 시사점을 안겨 준다. 부산과 칭다오는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오랜 항만 역사를 공유하며 바다를 중심으로 성장해온 공통점이 있다.
칭다오는 2022년 항만 물동량 세계 4위, 2020년에는 컨테이너 처리량에서 부산항을 앞질러 세계 6위에 오르며, 글로벌 물류 허브로서 독보적인 위상을 확립했다. 또한 해양 과학기술, 신산업, 문화관광 등 다방면에서 세계적 해양도시로 인정받고 있다. 신성장 동력 모색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라는 당면 과제를 해결해야 하는 부산에게 칭다오 성공 모델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는 귀중한 이정표가 된다. 특히 해양수산부의 연내 부산 이전이 공식화된 지금은 해양수도의 위상을 강화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결정적 전환점인 만큼 칭다오의 전략을 면밀히 분석하고 이를 부산 미래 구상에 어떻게 접목할지 심도 있게 모색할 필요가 있다.
중국 정부 연구·인프라 전폭 지원
해양 기업, R&D 시설 집적 유도
과학기술·신산업·문화관광 성장
우수 인재 유치, 기업 경쟁력 상승
해수부 이전 앞둔 부산에 시사점
미래지향적 산업구조 혁신 필요
칭다오의 성장에는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해양 과학기술 연구 지원과 인프라 구축 노력이 있다. 정부는 칭다오를 해양 과학기술 혁신의 중심지로 육성하기로 하고 중국해양대학교를 비롯한 세계적 수준의 연구기관과 R&D 시설, 해양 관련 기업 등을 집적시켰다. 해양 생물학, 지질학, 환경, 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도적인 연구와 산학연 협력이 이뤄졌다. 투자와 제도적 지원, 집적화는 우수 인재 유치와 산업 경쟁력 강화로 이어졌다.
부산 역시 해양, 수산 분야의 우수한 기관이 많지만, 이들의 잠재력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여전히 수도권 집중과 지방 기피 현상으로 인한 우수 인재 유입의 한계와 단순한 부처의 물리적 이전만으로는 해양 과학기술 허브로 도약하기에 역부족이라는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부산이 진정한 해양 혁신의 거점이 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지원 아래 공공기관, 연구소, 기업, 법률 및 금융 서비스 등 관련 주체들을 집적화하여 시너지를 일으키는 해양 클러스터 구축이 필요하다. 이러한 과감한 구조 혁신과 전략이 병행될 때 부산은 세계적 해양 혁신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칭다오는 전통 해양 산업에 머무르지 않고, 해양 바이오, 신소재, 심해 자원 개발, 해양 장비 제조 등 미래 고부가가치 산업에 과감히 투자하며 미래 성장 동력을 확보했다. 물류 중심 항만에서 벗어나 첨단 기술 기반의 해양 산업 생태계로 질적 전환에 성공한 사례다. 부산 역시 조선과 해운 등 기존 산업의 구조 전환은 물론, 해양 바이오, AI, 스마트시티 등과 같은 신산업 분야에서 성장 동력 발굴이 절실하다.
해수부 이전은 해양 금융, 해운·항만, 물류 등 전통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동시에 이러한 고부가가치 신산업을 육성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중앙정부 관련 부처와의 긴밀한 소통과 유기적인 협력은 필수적이다. 정부와의 물리적 거리에 따른 정책 효율성 저해를 극복하고, 국가 해양 정책을 신속히 집행할 수 있는 강력한 협력 체계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도시 이미지와 문화 콘텐츠 역시 해양도시 경쟁력의 핵심 요소다. 칭다오는 아름다운 해변과 근대 건축, 그리고 맥주 축제를 해양 문화관광과 결합해 도시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특히 아시아 최대 규모의 칭다오 국제 맥주축제는 매년 수백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대표 문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문화와 축제, 역사와 자연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칭다오의 도시 브랜드와 지역 경제는 함께 성장하고 있다. 부산 역시 해운대, 광안리, 영도, 다대포 등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해양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자원들을 단순한 관광지에 머무르지 않고, 해양 스포츠, 크루즈 관광, 해양 레저 등 부산만의 차별화된 콘텐츠로 발전시켜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시킬 필요가 있다.
칭다오의 사례는 부산에 분명한 교훈을 준다. 부산은 과거의 영광에 머무르지 않고 혁신을 통해 세계적 해양도시로 도약해야 한다. 이를 위해 칭다오의 일관된 정책 추진, 미래 지향적 산업구조 전환, 매력적인 도시 콘텐츠 개발 교훈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해야 한다. 아울러 해양 과학기술 인재 유치 장벽 해소, 중앙 행정과의 긴밀한 협력 체계 구축 등 부산의 실질적 과제들을 전략적이며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단순한 물리적 부처 이동에 그치지 않고 국가 해양 정책의 중심 도시로서 혁신과 협력을 병행할 때 비로소 부산은 진정한 동북아 해양수도로 거듭날 것이다.
2025-08-0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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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생애 첫 한의원 침 치료
여름 내내 한의원에 다니고 있다. 발목 부상 때문이다. 다섯 살에 처음 깁스를 착용한 이래로 거의 5~6년 주기로 발목을 다쳐왔다. 그때마다 정형외과에 방문해 엑스레이를 찍고 물리치료를 받고 깁스를 하는 일련의 과정은 이젠 너무 익숙하다. 인대를 다친 것이기 때문에 엑스레이에서는 늘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의사선생님은 말했다. “엑스레이 사진상으로는 깨끗하네요. 다행히 뼈는 이상이 없습니다.”
다만 지금 부상은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이전까지는 길을 걷다가 넘어지거나 발을 삐끗해 다쳤다면 이번에는 누군가에게 발을 밟혀서 다친 경우였다. 부상 후 치료를 마친 지 몇 주가 지났음에도 운동을 할 때면 이따금 통증이 느껴졌다. 병원에서는 명확한 원인이 보이지 않으니 딱히 치료법이 없었다. 휴식을 취하라는 조언과 더불어 진통제를 처방받았지만 효과는 일시적이었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통증에 대한 좌절과 함께 전통의학에 대한 호기심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치료를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올려보면 어렸을 적 탕약을 먹고 쓴맛이 진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한의원에서 받는 침, 부항, 뜸과 같은 치료는 뭔가 낯설게 느껴졌었다.
실제로 올해 초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2024년 한방의료 이용실태조사’에 따르면 젊은 세대일수록 한방의료 이용 경험이 낮아짐을 알 수 있다. 조사에서는 국민 중 67.3%가 평생 한방의료를 한 번이라도 이용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지만 연령별로 보면 차이가 있다. 20대 이하는 31.1%로 가장 낮았고 30대는 47.8%로 절반에 못 미쳤다. 반면 40대는 66.1%, 50대는 79.8%, 60대 이상은 86.6%로 나타났다.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한방의료 이용 경험이 뚜렷하게 증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용률의 차이는 각 연령대에서 경험하는 질환 유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2030세대는 한방의료가 상대적으로 강점을 보이는 질환의 발병 빈도가 낮고 통증이 발생해도 약을 사먹거나 진통제를 처방받아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40대 이상에서는 등·허리 통증, 디스크, 관절염 등 근골격계 질환과 신경계통, 순환계통 질환 등 반복적이고 장기적인 통증에 대한 치료목적으로 내원했다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주기적으로 한의원에 방문해 침 치료를 꾸준히 받은 결과 몸은 점차 반응하기 시작했다. 정강이부터 발가락까지 침을 맞고 난 후 처음엔 발등이 부푼 것처럼 느껴졌고 며칠 동안은 오히려 발 전체가 아프기까지 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분산된 통증 덕분인지 오히려 발목 통증이 점차 옅어졌다. 발목 인대가 홀로 지탱했던 힘을 주변 다른 근육들이 함께 떠안으면서 마치 발 전체가 발목의 부담을 나누는 동안 발목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한의사 지인에게 이 경험을 나누었더니 내 감각이 실제 한의학의 치료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한의학이 중시하는 ‘전체’와 ‘맥락’의 개념을 이야기해 주었다. 몸은 개별적으로 나뉜 부위들이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총체이며 증상은 그 흐름과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분보다는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독립된 개체보다는 끊임없는 상호작용과 연결 속에 놓인 관계적 존재를 탐구하는 철학이다. 또한 인위적이기보다는 우리 몸이 본래 가지고 있는 자연치유력을 통해 스스로 제 자리를 찾아 회복하길 촉진하는 철학이다.
생각해 보니 이런 철학적 원리는 신체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유효할 것 같다. 예컨대 정신의학과에서 우울증 약을 처방받아 복용하는 시스템은 효과가 신속하고 실용적이다. 하지만 우울증에 대한 감정의 뿌리를 살펴보고 맥락을 찾거나 문제 해결을 위한 근원에 도달하기엔 부족할 수 있다. 개인 차원이 아닌 집단 건강의 문제에 대해서도 원리는 유효할 것 같다. 곧 한 사회의 건강하지 못한 문제들에 대한 접근법도 한의학이 지닌 의료 철학처럼 보다 역사적인 시각과 총체적인 분석이 요구되곤 한다.
현대사회의 세계관은 대체로 전문화된 세부적인 관점과 미시적이고 단기적인 접근에 보다 익숙하다. 그런 면에서 지금의 근현대 철학과 이전의 전통 철학이 지닌 사상적 특징은 마치 거울상처럼 서로를 비춘다. 두 관점 모두를 조화롭게 품을 때 각자의 한계를 보완하며 더 넓은 지혜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양방과 한방도 서로의 빈틈을 메우며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한의학은 외국에서 대체의학으로서 점점 더 주목받으며 임상적 효용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두 의학이 지닌 우수한 의료 기술과 장점을 언제라도 모두 누릴 수 있는 의료 환경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든다.
2025-07-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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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이시바 총리의 ‘NO’ 발언과 미일 관세협정
“이것은 국익을 건 싸움이다.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마라.” “동맹국이라도 말할 것은 당당히 말해야 한다.” 2025년 7월 9일, 지바현 후나바시역 앞에서 열린 참의원 선거 유세 현장에서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미국을 향해 강도 높은 발언을 쏟아냈다. 이는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4월 2일 일본에 대해 24%의 고율 관세 부과를 공식 발표한 데 이어 자동차 등 주요 품목을 포함한 패키지 협상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7월 7일 오히려 25%로 상향된 관세를 일방적으로 통보한 데 대한 대응이었다. 미국에 안전보장을 의지하고 미국과의 보조를 최우선시해 온 자민당 출신 총리가 공개적으로 미국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대내외의 이목이 집중됐다.
사실 ‘NO’라고 말해야 한다는 주장이 주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일본은 1968년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뒤, 1980년대 들어 미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흑자를 기록했다. 이에 미국은 일본산 제품에 대해 관세·수입 규제를 강화했고 1985년에는 달러 약세와 엔고를 유도하는 플라자 합의를 추진했다. 이에 대응한 일본 정부의 저금리와 통화 팽창 정책은 자산 거품을 키웠다. 그리고 1990년대 초 이른바 ‘버블 경제’가 붕괴하면서 일본은 장기 불황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이 무렵 출간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1989년)은 미국에 당당히 맞서자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주목할 점은 미국의 압박이 1980년대와 2020년대 모두 자동차 산업을 겨냥했다는 점은 유사하지만, 1980년대의 NO가 자신감의 표현이었다면, 2025년 이시바의 NO는 물러설 곳 없는 절박함의 외침이라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NO 속에 성장기 일본과 쇠락기 일본이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과 협상 전 강경 발언으로 눈길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절박함의 외침
최근 선거 참패에 사퇴 요구까지 거세
협상력 약화 우려 속 15% 관세 확정
일본의 대미 대응 한국에 시사점 던져
설득력 있는 입장 표명, 실리 외교 핵심
물론, 이시바 총리의 발언은 감정이 아닌 전략이었다. ‘국익을 지키는 강한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통해 7월 20일 참의원 선거에서 반전을 노린 선택이었으며, 대미 순응이 오히려 국익을 해칠 수 있다는 외교 소신도 반영됐다. 실제로 그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대미 밀착 외교’를 비판하면서 대항마로 부상했으나, 자민당 총재 경선에서는 다섯 차례나 고배를 마셨고 아베 장기 집권하에 비주류로 밀려나 있었다. 그럼에도 2024년 10월 이시바가 총리에 취임할 수 있었던 것은 자민당 주요 파벌의 비자금 스캔들로 무너진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적임자로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시바 체제 아래 실시된 지난해 2024년 10월 27일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과 공명당 연립 여당은 과반 의석(233석) 획득에 실패했다. 이에 따라 이번 7월 20일 참의원 선거는 자민당의 장기 집권과 이시바 총리 개인의 정치적 생존이 걸린 중대한 승부처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자민당은 전체 248석 중 97석, 연립 여당 공명당을 합쳐도 122석으로 과반(125석)에 미치지 못했다. 유권자들이 ‘강한 리더’보다 고물가·생활고를 해결할 ‘생활 밀착형 지도자’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정계는 중·참 양원 모두에서 여소야대 국면에 돌입했고, 자민당 정권 유지 자체가 기로에 놓이게 됐다. 야당은 물론 자민당 내부에서도 ‘이시바 책임론’이 분출되며, 총리직 사퇴 요구가 거세졌다.
그럼에도 이시바는 지난 21일 기자회견에서 “미국과의 관세협정을 반드시 책임지고 마무리하겠다”며 총리직 유지를 선언했다. 그는 4월부터 대미 협상을 주도해 온 아카자와 경제재생상을 중심으로 협상단을 워싱턴에 파견했다. 정권 불안정으로 협상력이 약화되었다는 우려 속에서도 제8차 고위급 협상에서 일본은 자동차 관세 해결, 농업 부문 보호, 대미 투자 확대라는 3대 원칙을 고수했다. 다음 날인 22일(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상호관세를 15%로 인하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이는 일본의 5500억 달러 투자 약속과 8월 1일 관세 시한을 고려한 절충안으로 해석된다. 관세 인하 발표로 이시바 내각의 지지율은 일시적으로 반등했다. 협상 타결이 ‘국익 확보’로 이어진다면 이시바 총리의 리더십이 일정 부분 강화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국민 신뢰를 상실한 지도자가 국정을 이끌어 간다는 것은 이시바 스스로 밝힌 표현처럼 ‘가시밭길’이 될 수밖에 없다.
이시바 총리의 NO 발언과 관세 협상 과정은 한국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에 무조건 순응하거나 정면으로 충돌하는 양자택일을 넘어서, 때에 따라서는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NO를 통해 우리의 입장을 분명히 지속적으로 전달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외교적 성과를 국민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함으로써 외교와 정치의 선순환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재명 정부가 지향하는 실리 외교의 핵심일 것이다.
2025-07-2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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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칼럼] '이방인'과의 겸상
불현듯, 필리핀에서의 시간이 떠올랐다. 낯선 언어,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는 분명 이방인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나와, 지금 한국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같은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학생이었던 나는 한국인과 필리핀 현지인 사이의 묘한 관계를 느꼈다. 한국인들은 선주민들과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것을 꺼렸고, 식기구도 따로 썼다. 돌이켜보면 말이 통하지 않고 문화가 달라서 느끼는 차이점은 있었지만, 한국인이어서 차별받은 경험은 없었다.
얼마 전 나는 포천 이주노동자센터를 방문해 ‘한국에 와서 한국인과 한 번도 겸상한 적 없다’는 세 명의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들과 한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내가 보고 경험한 대로, 한국인들은 역시나 이주민들과 겸상하지 않는 모양이다. 함께 밥을 먹던 이주민 중 한 명은 공장에서 일하다 한국 사람에게 맞아서 전치 2주가 나왔었다는 이야길 했고, 다른 한 명은 공장 일을 하다 팔을 다쳤는데 공장주의 무리한 지시로 아픈 팔로 일을 했다는 이야길 했다. 모두 2025년에 일어났다고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한국에 온 이방인들은 그런 일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최근 경북 구미시의 한 아파트 공사장 지하 1층에서 하청업체 소속 베트남 국적 일용직 노동자가 앉은 자세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어 큰 충격을 안겼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119 구급대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숨진 상태였고, 발견 당시 체온은 40.2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일 구미의 최고기온은 38.3도로, 7월 관측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고온 환경에 의한 온열질환을 사망 원인으로 추정했다. 고용노동부는 “해당 현장의 작업을 전면 중단하고, 폭염 안전 대책 이행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고 입장을 내놓았다.
이러한 비극적인 사례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불운이 아닌, 이주노동자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은 이미 130만 명에 달하는 이주노동자와 함께하는 사회로 진입했으며, 이들은 우리 사회가 기피하는 3D 업종의 빈자리를 채우며 경제 성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고용허가제 하에서 사업장 변경이 어렵고, 인권 침해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은 그들을 더욱 고립시키고 있다. 열악한 주거 환경과 의료 접근성의 한계 또한 이들이 겪는 고통을 가중시킨다.
부산 역시 이러한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부산 지역 제조업에서는 외국인 근로자 인력난이 심화되고 있으며, 이는 이주노동자들이 단순 노동 기반의 제조업을 선호하지 않고 더 나은 임금과 근무 환경을 찾아 이동하려는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는 이들이 현재 처한 환경이 만족스럽지 않음을 방증하는 것이며,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이탈을 선택하는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부산의 많은 중소 제조업체들이 외국인 근로자의 잦은 이직과 이를 제어할 수단이 없음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결국 이주노동자들의 권익과 처우 개선이 곧 우리 지역 산업의 지속 가능성과도 직결됨을 시사하는 셈이다.
현 정부는 인력난 해소를 위해 이주노동자 도입 규모를 확대하고 있으나, 이는 단순히 노동력 공급을 늘리는 것을 넘어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안정적인 정착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실적인 대안으로는 고용허가제(E-9)의 경직성을 완화하여 이주노동자들의 사업장 변경의 자유를 확대하고, 노동 착취를 방지하기 위한 법적, 제도적 감시를 강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한 열악한 주거 환경 개선과 의료 접근성 확대 등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를 보장하여 이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과 캠페인을 지속하여, 이들을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자 함께 발전해나갈 파트너로 인정하는 문화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것도 함께 가야 한다.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포천 이주노동자센터의 김달성 목사는 이주노동자와 선주민들이 함께 밥을 먹는 ‘코이노니아’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코이노니아는 친교, 교제 등을 뜻하며 그리스에서 유래한 단어다. 단순히 친목을 넘어서 어떤 대상이나 목적에 함께 참여하고 동참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서 ‘겸상’이 오랜 시간 공동체의 깊은 유대감을 의미해왔음을 고려할 때, 이주민과의 식탁은 그들의 아픔과 슬픔,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들을 단순히 노동력으로만 보지 않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려는 시도들이 매우 필요하다. 나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데 1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각자의 자리에서 벽을 허무는 첫 발걸음을 내디뎠으면 한다.
2025-07-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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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닫히는 청와대, 열리는 도모헌
2025년 8월, 청와대가 다시 문을 닫는다. 2022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과 함께 개방된 청와대는 3년 만에 다시 대통령 집무실로 복귀할 준비에 들어가는 것이다. 259억 원의 예산이 확보되었고, 14일부로 전체 개방이 종료되며 내달 1일부터는 일반 시민의 출입이 전면 중단된다. ‘국민에게 돌려준 청와대’는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회귀하는 셈이다.
이번 청와대 복귀는 단순한 공간 이동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시민의 거리, 정치와 공간의 관계, 관광과 정체성의 문제를 함께 안고 있는 중대한 전환이다. 윤석열 정부는 ‘탈권위’와 ‘소통’을 기치로 청와대를 개방했지만, 용산 대통령실은 업무 동선의 비효율, 보안 취약, 주민 불편 등의 문제를 노출했다. 이에 이재명 정부는 다시 청와대로 복귀하려 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권위의 상징’을 다시 열어둘 수 있느냐는 논의가 시작됐다.
대통령 집무 공간 회귀하는 청와대
서울 중심 정치 관광 콘텐츠의 퇴조
반면 부산시장 관사 작년 전면 개방
부산 콘텐츠가 주목받을 기회 부각
폐쇄와 개방 사이 공간 주인 물어야
도시 가치 담는 공간 구현 가능해져
청와대 개방은 상징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시민 참여의 경험이었다. 경복궁과 북악산을 잇는 도심 관광축의 핵심으로 기능했고, 하루 수만 명의 내외국인이 이곳을 방문하며 서울 관광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관광객들은 단지 사진을 찍는 것을 넘어, “대통령이 일하던 곳을 내가 걷고 있다”는 상징적 체험을 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전직 대통령의 집무 공간이나 관저를 박물관 혹은 관광지로 활용하는 사례는 많지만, 현직 대통령의 거주 및 집무 공간이 이렇게 전면적으로 개방된 사례는 매우 드물다. 이러한 전례 없는 개방은 서울 관광의 질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기록됐으나 이 공간은 다시 봉인된다. 봉인 후에는 보안 강화와 행정 효율성이 우선되며, 관람 기능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서울 도심 관광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청와대 개방이 가져온 시민 경험은 단절되고, 정치 공간의 폐쇄성은 부활할 가능성이 크다.
비슷한 시기, 부산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한때 대통령 별장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부산시장 관사로 쓰이던 공간이 시민에게 전면 개방됐다. 광안대교 앞 황령산 자락에 위치한 이 공간은 지난해 리모델링을 마치고, ‘도모헌’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본관과 야외 정원, 공유 오피스, 시민 강연장, 카페 등으로 구성된 이 장소는 이제 더 이상 권력의 공간이 아니다. 시민의 회복과 소통, 창작과 휴식의 공간이다. 그동안 ‘지방 청와대’라 불리며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곳이 문화예술과 여가, 휴식의 복합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청와대가 닫히고, 부산시장 별장이 열리는 이 장면은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한다. 지방도 권력의 공간을 시민의 공간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실천의 사례이자, 공공공간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이는 관광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부산은 이 공간을 단지 시민 편의시설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한때 대통령이 머물렀던 공간’, ‘지방 청와대’라는 역사적 스토리는 정치사와 문화관광을 결합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여기에 피란수도 부산의 역사, 부마민주항쟁, 임시수도청사와 민주공원 등과 연계하면 정치·역사·시민성 중심의 스토리텔링 관광이 가능하다. 이는 단지 과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도시 이미지와 시민 정체성을 함께 설계하는 일이기도 하다.
청와대 개방이 종료되면서 서울 중심의 정치 관광 콘텐츠는 자연히 약화될 수밖에 없다. 이는 오히려 지방 도시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수도권 중심의 문화자원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지역 고유의 역사적·정치적 콘텐츠가 관광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기 때문이다. 부산은 피란수도라는 유일무이한 정체성을 가진 도시이자, 산업화와 민주화의 상징이 혼재하는 곳이다. 이러한 복합적 역사성과 공간성을 어떻게 체계화하고 콘텐츠화하느냐에 따라 부산은 ‘열린 도시’, ‘시민의 도시’라는 이미지를 더욱 굳힐 수 있다.
이제는 공간을 단지 건물의 용도가 아니라, 기억의 장소, 체험의 현장, 민주주의의 물리적 구현 공간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든 부산시장 별장이든, 더 이상 권력을 위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시민과 소통하고, 도시의 가치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나아가야 한다. 도시는 권력의 방식에 따라 닫히거나, 시민의 방식에 따라 열릴 수 있다. 부산이 선택한 ‘개방’의 방식은 단지 정치적 상징을 넘어서, 관광, 문화, 교육, 도시 브랜딩까지 연결되는 포괄적 가치 창출의 기회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공간을 통해 어떤 미래를 만들고 싶은지를 다시 물어야 할 때다. 청와대는 닫히지만, 부산은 열리고 있다. 그리고 그 열린 문은 시민을 위한 문이며, 미래를 향한 문이어야 할 것이다.
2025-07-1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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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기록적인 폭염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부산에서는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비극적인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화재로 어린 자매들이 세상을 떠난 소식이 그 중 하나다. 부모가 일터로 나간 사이 화재로 목숨을 잃은 어린 남매를 애도했던 정태춘의 노래도 벌써 35년 전 이야기다. 믿어지지 않는 현실 속에서 시민들의 충격과 슬픔은 오래 지속되었다. 아직 살아갈 날들이 많이 남은 어린이들이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어른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다. 이 재난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서 돌봄 사각지대와 주거환경 문제까지 사회적 의제로 해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비극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아이들이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삶을 잃어버린 또 다른 사건이 얼마 전 부산에서 있었다. 같은 학교 세 명의 고등학생이 스스로 삶을 마감한 사건이 그것이다. 진로 고민과 입시 스트레스, 학교 운영의 구조적 문제 등이 원인으로 거론됐지만, 그 어떤 이유도 이 죽음을 온전히 설명하진 못한다. 가족에게 마지막 사랑을 전할 만큼 다정했던 이들이 정작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가족과 친구, 교사들이 겪고 있을 고통 역시 다 헤아리기 어렵다. 문제는 이와 같은 사건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사고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삶을 버리고 있다는 사실 역시 또 다른 종류의 재난이다.
우리는 이미 숫자를 통해 그 심각성을 접하고 있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청소년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인 동시에 청소년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다. 여성가족부의 발표에 따르면 2023년도 청소년 자살 사망자 수는 인구 10만 명당 11.7명으로 13년째 청소년 사망원인 1위로 꼽히고 있다. 청소년의 자해·자살 입원율은 10년 새 86.7% 증가했고, 여자 청소년이 남자 청소년의 4배에 이르렀다. 한국 청소년의 학업 성취도는 선진국 최고 수준이지만 정신 건강 지표는 최하위권이다. 유엔아동기금(UNICEF) 아동연구조사기관인 이노첸티연구소가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아동의 종합적인 복지 실태는 36개 국 중 27위를 차지해, 역시나 하위권에 머물렀다.
교사단체와 시민단체는 청소년의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며, 우리의 과도한 입시경쟁중심 교육체제가 한계에 달했음을 지적한다. 청소년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교육이 이들에게 안전한 울타리가 되고 있는지 근본적인 점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종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 역시 학벌 혹은 성공 등에 대해 획일화한 이상적 기준이 존재하고 그런 잣대가 문화 전반을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줄 세우기가 쉬워지고, 끊임없이 비교하는 사회에선 열등감을 크게 느낄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한국 중고등학생의 47.3%가 학업이나 성적 때문에 불안하거나 우울하다고 답했다. 청소년 고민 상담의 유형으로는 정신건강과 대인관계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반면 학령인구는 줄었지만 사교육비는 30조 원을 넘어서고, 4세 고시, 7세 고시, 초등 의대반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도한 조기 사교육이 벌어지고, 향정신성의약품인 ADHD 치료제가 공부 집중력에 좋다는 이유로 품절 사태까지 빚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교육 지옥’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이해가 갈 정도다.
교육 개혁은 역대 정부의 오랜 화두로, 이재명 대통령 역시 대선 공약으로 ‘서울대 10개 만들기’를 제시했다. 지역의 국립대학에 대한 투자를 확대해 경쟁력을 높여 지방 소멸과 교육위기를 돌파해보겠다는 취지다. 교육을 중심으로 한 지역 발전은 가장 중요한 정책적 수단이기에 장기적인 비전으로 정책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돌볼 수 있는 근본적인 정책이 수반되어야 한다. 교육의 현장에 막상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큰 비극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20대에 발견한 폴 발레리의 시 구절은 혼란스러운 10대 시절을 위로했다. 청소년기는 누구에게나 복잡스럽고 혼란한 시기로, 김소영 작가의 말처럼 마음이 골짜기를 지나고 산마루도 오른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을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처한 상황은 재난상황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학교를, 지역을, 제도를 바꿔야 한다. 더 이상 아이들을 잃을 수 없다는 간절함이 우리 사회와 정책에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하고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혼란스러운 시간을 지나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그저 바람이 불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 마음을 먹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도 어른들의 몫이다.
2025-07-0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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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국민의힘, '차출 정치' 관행 끊어야
이재명 대통령의 시작은 제법 성공적인 걸로 보인다. 한국갤럽이 지난달 27일 공개한 정기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재명 대통령 직무수행 긍정 평가 여론은 64%(부정 평가 21%)를 기록했다. 대선 당시 득표율인 49.4%를 훌쩍 웃돈다. 부산·울산·경남에선 56%의 응답자가 “잘하고 있다”, 29%가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 대통령의 거친 캐릭터에 반신반의하던 중도층 지지율도 높아졌다. 상법 개정, ‘민생회복 소비쿠폰’ 지급 등 민생·경제 이슈를 속도감 있게 밀어붙인 게 영향을 끼친 걸로 보인다. 인사에서 일부 논란이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현재까지는 큰 잡음이 없는 편이다. 인사든 정책이든 기존에 예상됐던 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까닭이다.
국민주권정부의 안정적 출발은 처음부터 좌충우돌했던 3년 전과 대비된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 전부터 대통령실 이전 문제를 놓고 혼선을 빚었다. 그는 원래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약속했었다. 현실적인 여건이 녹록지 않았다. 그러자 느닷없이 서울 용산에 있는 국방부 청사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윤 전 대통령의 고집에 국군은 졸지에 방을 빼야 하는 신세가 됐다. 어디 대통령실 이전만 그랬나. 초등학교 5세 입학, 수능 킬러문항 폐지,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등 그의 임기 3년은 예측할 수 없는 국정 운영으로 점철됐다. 비상계엄은 클라이맥스였다.
권성동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지난달 12일 퇴임 기자회견에서 “지금도 왜 계엄을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이 오랫동안 정치에 몸담은 인물이었다면 이렇게 예측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입당한 지 4개월 만에 제1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고, 다시 4개월 지난 2022년 3월 대통령에 당선됐다. 정계에 데뷔하고 대통령이 되기까지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주변에 누가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국민의힘은 스스로 비상계엄과 탄핵이라는 불확실성을 초래한 셈이다.
보수 정당은 예전부터 외부 전문가를 영입하는 식으로 인물을 충원해 왔다. 김영삼·이회창 등 당의 리더들은 이른바 ‘YS 키즈’, ‘이회창 키즈’를 영입, 이들을 당 쇄신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1990년대 후반 영입돼 오랫동안 당내 소장파로 활약한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이 대표적이다. 외부 인재를 차출해 오는 건 기성 정치에 물들지 않은, 새 피를 수혈한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도 정도가 있다. 위기를 맞을 때마다 바깥에서 답을 찾는다면 당 구성원들의 사기는 저하될 수밖에 없다. 외부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현실 정치에 적응하느라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한다. 인적 구성의 교체가 잦아지면 유산은 계승되지 못하고 단절된다. 보수 정당이 선거 때마다 빅텐트를 외치고 뜨내기 리더를 옹립하는 건, 역설적으로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남아있는 인재풀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의 인재 시스템은 국민의힘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다. 기본적으로 민주당 근처에는 ‘상비군’이 많다. 2000년대 초반, 86세대 운동권 인사들은 언제든 차출돼 정치 현장에 투입될 수 있는 상비군들이었다. 이들에게서 더 이상 데려올 인물이 없어질 즈음엔 시민단체들이 그 역할을 대체했다. 같은 교수·변호사라 하더라도 오랜 세월 시민단체 활동을 통해 정치 근방에서 훈련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정치에 대한 이해도나 추진력 측면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2016년 제20대 총선 이후 계속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의 전성기는 비단 국민의힘 대통령들의 연이은 탄핵 때문만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탄핵이라는 결과 자체가 국민의힘의 취약한 인적 토대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1990년 3당 합당은 보수 정당의 압도적 우위 구도를 가져왔다. 신한국당·한나라당 때처럼 이들이 한국 정치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을 땐 굳이 사람을 키우지 않아도 됐었다. 보수 정당으로 인물과 자원이 쏠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보수 정당의 지역적 기반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지지층의 인구학적 특성 역시 갈수록 불리해지는 중이다. 다른 무엇보다 총선에서 연달아 3번을 깨지고 대통령이 두 번 연속 탄핵당한 정당이지 않은가. 명망가가 총선을 앞두고 정당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 우선순위 앞에 놓이는 정당은 국민의힘이 아닌 더불어민주당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당장 수도권도 험지라며 기피하고 전통적 우호적인 부산·울산·경남 지역 지지율에서도 앞서지 못하는 정당에 누가 오려 하겠나. ‘차출 정치’의 관행을 끊고 내부에서 사람을 키우지 않는다면, 국민의힘이 겪고 있는 비상 상황은 언제든 다시 반복될 것이다.
2025-07-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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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디지털 트윈으로 그리는 부산의 미래
매일 아침 출근길, 우리는 복잡한 교통 흐름 속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폭우나 예기치 않은 땅꺼짐 현상에 도심 기능이 마비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늘어나는 에너지 소비와 기후 변화로 인한 환경 문제에도 깊은 고민에 잠기게 된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현대 도시의 문제들, 과연 기존의 방식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만약 우리가 사는 도시의 보이지 않는 이면을 들여다보고, 미래를 예측해 선제적으로 대비할 수 있다면? 바로 이 질문에서 디지털 트윈(Digital Twin)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디지털 트윈은 현실의 부산을 마치 쌍둥이처럼 가상 세계에 똑같이 복제하고, 사물인터넷(IoT) 센서와 인공지능(AI), 시뮬레이션 기술을 통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주고받는 ‘살아 있는 디지털 도시’ 시스템이다. 교통량 변화, 전력 사용량, 대기 오염 수치, 지반 침하 위험 감지, 재난 발생 시 최적의 대피 경로 예측 등 도시의 모든 움직임을 실시간 분석할 수 있다. 도시가 ‘보인다’는 것은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새로운 정책이나 개발 사업이 가져올 영향을 미리 시뮬레이션하여 최적의 ‘정밀 처방’을 내릴 수 있다는 의미다.
싱가포르는 ‘버추얼 싱가포르’를 구축해 도시 계획부터 에너지 관리, 전염병 확산 예측까지 폭넓게 활용하고 있다. 일본 도쿄는 ‘프로젝트 플라토(PLATEAU)’를 통해 3D 도시 모델 기반으로 재난 대응 훈련과 자율 주행 실험 등을 진행 중이다. 핀란드 헬싱키는 탄소 중립 도시를 목표로 에너지 사용 최적화에 디지털 트윈을 핵심 도구로 사용하고 있으며, 영국은 여러 분야 데이터를 연결하는 ‘국가 디지털 트윈 프로그램’을 통해 사회 기반 시설 효율성과 복원력을 높이는 혁신을 이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부산은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다행히 부산은 국내에서 디지털 전환 실험을 가장 선도적으로 추진해 온 도시다. ‘에코델타 스마트시티’는 실시간 물 관리와 AI 기반 에너지 시스템 운영 등 디지털 트윈 기술 구현의 최적 시험장이다. ‘북항 재개발’ 또한 단순한 항만 기능 복원을 넘어, 스마트 항만 물류와 친환경 에너지가 결합된 복합 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디지털 트윈의 잠재력이 크게 기대된다. 특히 부산은 글로벌 해양 물류 도시이자 기후 위기에 대응해야 하는 연안 도시라는 점에서, 디지털 트윈 기술을 항만 운영 효율화와 재난 예측·대응 강화에 직접 활용하여 그 효과를 체감할 수 있는 최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와 함께 부산시는 부산진구 시범 사업으로 최근 시민 체감형 포털 ‘1365 트윈 부산’을 개설해 골목길 안전과 노후 건축물 관리 등 생활 밀착형 서비스를 제공하며 도시 문제 해결의 정밀성과 신속성을 높여가고 있다.
하지만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도 남아있다. 도시 곳곳에서 수집되는 방대한 데이터의 품질을 높이고, 해킹 등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며, 서로 다른 시스템 간에 데이터를 원활하게 공유할 개방형 표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데이터 주권과 시민 신뢰 확보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도 필요함을 시사한다. 또한, 첨단 기술의 혜택이 모든 시민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고, 시민들이 기술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교육과 참여 프로그램도 병행되어야 한다. 나아가 산·학·연·관이 긴밀히 협력하는 ‘디지털 거버넌스’ 구축 역시 필수적이다.
결론적으로 디지털 트윈은 도시를 운영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대전환’을 의미한다. 부산이 이러한 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잘 갖춰진 인프라 때문만은 아니다.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산 시민들의 개척 정신과 역동적인 문화, 그리고 동북아 해양 수도로서의 강점과 풍부한 산업 기반이 시너지를 창출한다면 부산은 기술 중심 도시를 넘어 데이터 기반 도시 혁신의 글로벌 모델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부산에 필요한 것은 기술과 인프라를 넘어 추진력 있는 실행 전략과 명확한 도시 비전이다. 부산시가 중장기 로드맵을 주도하고, 시민, 기업, 학계가 함께 참여하는 공론장을 만들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낸다면, 디지털 트윈은 도시 혁신과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부산은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도시로 도약할 준비가 되어 있다. 디지털 트윈은 부산이 미래를 예측하며 대응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자 미래를 여는 열쇠다. 급변하는 시대에 데이터 기반의 도시 전환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과 성장을 위한 필수 과제다. 지금이야말로 모두가 함께 데이터로 부산의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고, 담대한 항해를 시작해야 할 때다.
2025-06-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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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한국만 모르는 디지털 화폐 전쟁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주문한다. 토스페이로 결제하고, 친구에게 밥값을 카카오페이로 보낸다. 점심시간엔 네이버페이로 배달 주문을 마친다. 하루 종일 현금 한 장 만지지 않았지만, 모든 거래가 순식간에 끝난다.
“이렇게 편한데 굳이 스테이블코인(달러, 원화 등 기존 화폐 가치에 연동되는 디지털 화폐)이 왜 필요해?” 최근 한 디지털 금융 포럼에서 나온 질문이다.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디지털 금융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질문에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숨어있다.
우리가 매일 쓰는 간편결제 시스템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겉으로는 번개처럼 빠르고 매끄럽다. 하지만 그 뒤에선 여전히 전통적인 은행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다. 중앙화된 금융기관들이 층층이 쌓여 있고, 모든 거래는 이들을 거쳐야만 가능하다.
스테이블코인, 중개 기관 없이 정산
해외 송금 혁신·금융 소외계층 기회
미국, 법적 기반 마련 위해 잰걸음
국내, 법안 발의됐지만 초기 단계
부산 블록체인 특구 통해 실험 가능
데이터·경험 쌓은 뒤 전국 확산해야
스테이블코인은 완전히 다른 접근이다. 중개 기관 없이 바로 정산되고, 금융 자체를 코드로 자동화한다. 쉽게 말해 금융을 소프트웨어처럼 설계하고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은행 직원이 승인 도장을 찍는 대신, 스마트 컨트랙트가 자동으로 거래를 실행한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의 최근 행보는 예사롭지 않다. 지난 6월 미국 상원이 통과시킨 ‘GENIUS Act’를 보자. 민간 기업이 발행하는 스테이블코인에 대해 1대1 자산 담보, 준비금 투명 공개, 소비자 보호, 파산 시 환급 보장 등을 명문화했다. 미국 하원에도 ‘STABLE Act’가 계류 중이다. 두 법안은 조율을 거쳐 통합될 예정인데, 그 전략이 명확하다. 디지털 달러 인프라를 민간 혁신으로 실현하되, 공적 통제는 확실히 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이제 막 입법 논의를 시작했다. 민병덕 의원의 디지털자산기본법, 안도걸 의원의 담보요건 법안이 발의됐지만 아직 초기 단계다. 기술도 있고 시장 수요도 있지만, 제도와 정책은 여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이 도대체 왜 필요할까? 세 가지 이유를 들어보자. 첫째, 해외 송금의 혁신이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매달 고향에 돈을 보낸다. 지금은 달러를 거쳐 환전 비용과 중계 은행 수수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있다면? 달러를 경유하지 않고 본국 통화로 직접 송금할 수 있다. 빠르고 싸며, 복잡한 중개 과정이 없다. 금융 혜택이 노동자에게 직접 돌아가는 구조다.
둘째, 금융 소외계층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신용 점수가 낮거나 은행 계좌 개설이 어려운 사람도 블록체인 기반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은행은 고객을 평가하지만, 블록체인 금융은 프로토콜이 고객을 실행한다”는 말처럼, 기존 금융 시스템이 외면하던 사람들에게 문을 열 수 있다.
셋째, 국가 통화의 디지털 경쟁력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스테이블코인은 달러 기반인 USDC와 USDT다. 디지털 세계에서도 달러는 패권을 확장하고 있다. 우리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지 못하면, 디지털 경제에서도 원화는 주변부로 밀려날 수 있다.
물론 우려도 있다. 준비금 부실, 투기적 남용, 빅테크 독점 가능성 등 스테이블코인은 분명 양날의 검이다. 테라-루나 사태처럼 잘못 설계된 스테이블코인이 폭락하며 시장 전체를 흔든 사례도 있다. 하지만 위험을 이유로 문을 닫는 순간, 기회도 함께 사라진다.
해법은 바로 우리 곁에 있다. 부산 블록체인 특구다. 현재도 이 특구 안에서는 디지털 자산 실증과 스테이블코인 관련 실험이 가능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시간이다. 국회에서 입법을 통과시키고 중앙정부가 전국적으로 시행하는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흐른다. 그 사이 우리는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다.
디지털 금융은 국경이 없는 전쟁터다. 미국, 유럽, 싱가포르가 빠르게 움직이는 동안 우리만 회의실에서 토론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부산 블록체인 특구의 샌드박스 규제는 이런 딜레마를 해결할 열쇠다. 일단 실행하고 문제점을 찾아 보완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산에서 시범적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실증하고, 충분한 데이터와 경험을 쌓은 후 전국으로 확산하는 전략이 바로 그것이다.
한국만 아직 디지털 화폐 시대의 문 앞에 머물러 있다. 편리한 현재에 안주하며 미래를 놓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금융 질서의 주역이 될 것인가. 선택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은 바로 부산이 될 수 있다. 바다를 바라보며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 온 부산의 DNA가, 이번에는 디지털 금융의 새 항로를 여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지금이 바로 그 문을 열어야 할 시간이다.
2025-06-25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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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선악과(善惡果)와 선과 악
구약성경에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일로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하느님은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그들이 따먹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둘은 카인과 아벨을 낳았으며, 카인은 밭을 가는 농부가 되었고 아벨은 양을 치는 목자가 되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은 종교적 관점이 아니라 역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인류 역사에 대한 은유이다.
우리의 단군신화도 역시 역사적 은유이다. 곰과 호랑이는 동물에 대한 토템신앙을 보여주고, 신석기 단계를 가리킨다. 하늘에서 풍백, 우사, 운사를 거느리고 내려온 환인은 청동기와 농경문화를 가진 우월한 집단을 상징한다. 단군신화가 신석기에서 청동기 단계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에덴동산이라는 낙원을 상실한 이야기는 인류가 채집, 수렵, 어로의 구석기 단계에서 농경과 목축의 신석기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셈이다.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나무 열매를 마음대로 따먹을 수 있었고, 짐승도 잡고 물고기도 잡을 수 있었다. 채집, 수렵, 어로 생활이다. 그러나 에덴동산을 나온 단계에 이르러 그 자식들은 농경과 목축에 종사하게 되었다. 에덴동산이 인류문명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농경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실낙원 이야기가 역사적인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면, 선악과도 무엇인가를 은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선악과가 열리는 나무는 하느님이 심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류가 선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담과 이브는 알몸으로도 서로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 그러나 선악을 구별하게 되면서 옷을 입게 되었다. 과연 인류는 어떻게 세상을 선악으로 구별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자연의 순환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농경과 목축을 영위하게 된 결과이다.
지금의 농사와 목축도 자연의 조건에 크게 좌우된다. 초보적인 농경·목축 단계에서는 그 영향력이 지대하였을 것이다. 홍수, 가뭄, 이상 기온 등은 농경민 전체의 삶을 좌지우지할 만큼 강력하였으리라. 순조로운 자연의 순환과 삶을 위협하는 자연의 순환을 경험하면서, 인류가 볼 수 없는 세상 저편에서 자연을 순조롭게 운행하는 선한 존재와 자연을 흉폭하게 만드는 악한 존재가 있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이 순간 인류는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변화를 맞는다. 드디어 추상적인 관념을 갖게 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누어 보고,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조차 선과 악으로 나누는 거대한 이분법(Grand Dichotomy)에 도달한 것이야말로 현생인류의 정신적 원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선한 신과 악마의 대립이 대표적이다.
동일한 이분법은 우리에게도 있다. 음양의 이분법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극한 대립을 초래하는 관념이라면, 음과 양의 이분법은 조화와 균형의 이분법이다. 태극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양의 세력이 강해지다 보면 이미 그 속에서 음이 나타나고, 음이 커지고 있는 중에도 양이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는 음양의 상호보완적이고 조화로운 대립조차도 원래 나눌 수 없는 하나였다고 생각해 왔다. 동시에 세상을 선과 악으로 극단적으로 나누어 보지 않았다. 선의 건너편에는 불선이 있을 뿐이다. 즉 선의 반대편에 악한 존재가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거나 선을 행하지 못하는 존재를 상정한 것이다. 그러기에 한 시대 전에는 구걸하는 거지도 “적선합쇼”라는 품격을 갖춘 말을 썼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는 나는 선, 상대는 악이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상대가 나와 왜 다른지를 생각하지 않고, 나만 선이라고 확고하게 단정하는 순간 대화와 타협이 설 자리를 잃는다. 조선시대에도 당쟁이 있었고, 그 당쟁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좀먹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처절한 당쟁의 과정에서도 우리는 군자이고, 상대는 소인이라고 생각하였을 뿐, 선과 악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보수와 진보도 각각 자유와 평등, 그리고 파이 키우기와 파이 나누기 중 어느 쪽을 우선할 것이냐는 정도만 다를 수 있다. 양쪽 모두 중요한 가치이자 과정이다. 어느 한 쪽을 중시한다고 해서, 상대를 악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대통령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태극기에 그려진 음과 양의 세계, 그리고 나아가 대동(大同) 세계를 만들기를 기대해 본다.
2025-06-2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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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로365] 사랑이 끝나고 남은 빚… 법정으로 간 연인들
“그땐 정말 결혼할 줄 알았어요.” 사랑이 끝난 자리에 돈 문제가 남는 것만큼 씁쓸한 일이 또 있을까.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이 이별 후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법정에서 서로를 할퀴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최근 SNS에는 젊은 연인 사이에 고가 명품을 선물하거나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등 ‘통 큰 사랑’을 과시하는 모습이 넘쳐나지만, 그 이면에는 관계 파탄 후 금전 문제로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많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수많은 약속과 금전적 지원이 ‘빚’이라는 현실의 무게로 돌아온 것이다.
문제는 연인 사이에서 금전 거래를 할 때 명확한 서류를 작성하거나 구체적 증거를 남기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이다. 서로 사랑하고 믿는다는 이유로 굳이 그런 형식을 취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연인 사이에 오간 돈이 ‘차용’인지 ‘증여’인지를 구별하는 건 사건의 핵심이다. 차용이라면 반환 의무가 있지만, 증여는 그렇지 않은데, 법적 분쟁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바로 ‘입증책임’이다. 계좌이체 내역이 있으면, 대여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이체 내역은 돈이 건네졌다는 것만을 입증할 뿐이다. 상대방이 그 돈이 증여나 호의로 준 돈이라고 주장할 때 반박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법원은 ‘다른 사람의 예금계좌에 금전을 이체하는 등으로 송금하는 경우 그 송금은 소비대차, 증여, 변제 등 다양한 원인에 기하여 행하여질 수 있는 것이므로, 그러한 송금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소비대차에 관한 당사자의 의사합치가 있었다고 쉽사리 단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또한 두 사람이 연인 관계에 있는 남녀 간이라고 하여 금전 수수의 원인을 곧바로 증여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그 원인이 대여인지 증여인지는 돈을 주고받은 경위와 용도, 당사자들의 경제 사정 및 구체적 생활 관계, 액수, 반환 의사 유무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고 판시했다.
관계 파탄 뒤 법정 공방 사례 많아
금전 거래 물증 남기는 경우 적고
차용·증여 가릴 증거 제시 쉽지 않아
로맨스 스캠 사기까지 기승 피해 늘어
법원은 송금 메모 등 정황 통해 판단
금품 오고간 기록 남기는 성숙함 필요
필자가 맡았던 사건이 떠오른다. 남자는 여자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많은 선물과 용돈을 줬고, 어느 날 남자는 돈을 불려 결혼 자금으로 사용하자며 여자에게 투자를 권했다. 여자는 남자를 믿고 대출까지 받아 돈을 건넸지만, 수익금을 주겠다는 남자는 소식이 깜깜했고, 알고 보니 투자금은 도박 자금으로 사용되어 결국 그 관계는 파탄이 났다. 여자는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남자는 그동안 줬던 용돈으로 퉁치자고 응수하면서 법정 다툼이 시작된 것이다. 장기간에 걸쳐 두 사람이 주고받은 돈 액수는 비슷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남자가 준 돈은 증여였고, 여자가 준 돈은 투자금이었다. 게다가 도박 자금으로 사용된 그 투자금은 사기 편취금이 되어 형사사건에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법원은 문자, 송금 메모, 통화 녹취 등 주변 정황을 통해 실제 의사를 판단한다. “나중에 꼭 갚아줘”, “이건 빌려주는 거야” 같은 표현이 있었다면 반환의 가능성이 더 높게 인정된다. 반대로 기념일, 생일, 이벤트 등 특별한 날에 보내진 금전이나 선물은 증여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그 외에도 교제 기간, 금전의 규모, 경제력 차이 등도 고려 대상이다. 명의신탁 문제도 복잡한 쟁점이다. 차량을 연인 명의로 등록하거나, 공동 창업을 하며 한 사람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해두는 경우, 관계가 틀어진 뒤엔 실소유권을 놓고 법적 다툼이 불가피해진다. 단순히 “돈은 내가 냈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하다. 거래 내역, 명의자와의 문자, 사용 권한 등이 모두 입증 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연애 감정을 악용하는 ‘로맨스 스캠’ 사기 범죄까지 기승을 부리면서, 순수한 마음을 이용당하는 피해자들이 더욱 늘고 있다. 사랑과 사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씁쓸한 세태다. 법정에서 만난 전 연인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그땐 서로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법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법은 증거를 요구한다. 그래서 연인 사이에도 ‘기록’이 필요하다. 반드시 차용증까지는 아니더라도, 문자나 이체 메모 같은 작은 흔적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돈을 건네면서 메모를 남긴다는 건 다소 삭막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신뢰를 지키는 방법일 수도 있다. ‘혹시 헤어지면 어쩌지?’라는 불안감에 차용증을 쓰는 것이 아니라, ‘혹시 모를 상황에서 서로에게 부담을 주지 말자’는 성숙한 배려의 표현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사랑이 끝나면, 감정은 사라지지만 돈거래는 남는다. 남은 돈을 두고 다시 법정에서 마주하게 되지 않으려면, 감정과 거래는 분리되어야 한다. 감정으로 맺어진 관계라도, 돈이 오간다면 그 순간부터는 기록이 필요하고, 그 끝이 법정에서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법정에선 감정보다 증거가, 믿음보다 문서가 더 큰 힘을 가진다.
2025-06-18 [1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