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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가마우지의 얄궂은 운명
가마우지라는 철새가 있다. 대부분 해안에서 생활하지만 큰 강이나 호수에서도 볼 수 있다. 큰 것은 몸길이가 70~90㎝에 달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민물가마우지가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새는 헤엄을 치다가 잠수해 물고기를 잡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데 이 능력이 가마우지의 운명을 얄궂게 만들었다.
가마우지는 오래전부터 ‘물고기 사냥의 명수’로 불렸다. 타고난 사냥 실력을 보유한 가마우지를 사람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가마우지를 길들여 물고기 사냥에 이용했다. 이른바 가마우지 낚시법이다. 가마우지가 잡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도록 목 아래에 끈을 묶고 사냥을 시킨 뒤 잡은 물고기는 빼앗았다. 일은 가마우지가 다 했지만 그 성과물은 사람의 차지였다. 636년에 발간된 수나라 역사책 〈수서(隋書)〉에 고대 일본의 전통 낚시법이라고 소개돼 있다고 하니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듯하다. 어로법이 독특했는지 이탈리아 선교사 오도릭(1265~1331)이 쓴 〈동방기행〉에도 실려 유럽 사람들에게 동양의 신기한 풍물로 알려졌다고 한다.
한때는 일본의 한 경제평론가가 일본에 핵심 부품이나 소재를 의존하는 한국 수출 구조의 취약성을 빗대 ‘가마우지 경제’라고 말해 파장이 일기도 했다. 목줄(부품·소재)에 묶여 완제품 수출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 과실은 일본이 취한다는 점을 조롱한 것이다. 가마우지의 뛰어난 물고기 사냥 실력이 비꼼과 조롱의 소재가 된 셈이다.
최근 가마우지는 또 한 번 그 천부적인 능력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달갑지 않은 처지에 놓였다. 원래 러시아 연해주나 사할린이 서식지였던 가마우지가 기후변화 탓인지 점점 우리나라의 텃새로 습성이 변해 강가 등에 그대로 눌러앉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텃새가 된 것까지는 괜찮은데 물고기 사냥 실력으로 가는 곳마다 민물고기의 씨를 말리고 있는 것이다. 경남 산청의 경호강이나 덕천강, 경북 포항의 형산강 등 강 유역 주변 농어민들의 피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호소다.
지자체의 호소에 가마우지는 결국 지난해 말 환경부에 의해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됐다. 이후 일부 지자체는 최근 아예 엽사까지 동원해 직접 사냥에 나섰다고 하니 가마우지로선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다. 한때는 구경조차 쉽지 않았던 가마우지였건만 상황이 급변하니 이젠 인간의 총질만이 사나워진다. 이 모두 가마우지의 물고기 사냥 실력을 탓해야 하나.
2024-05-0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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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최저임금의 딜레마
산업혁명은 왜 프랑스나 독일이 아닌 영국에서 시작됐을까. 경제학에서 100년 넘게 뜨거운 주제였다. 영국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은 고임금을 원인으로 설명했다. 영국의 임금은 다른 나라에 비해 4~5배 높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산 효율의 향상에 적극적이었고, 노동력을 절감하는 기계 도입에 앞섰다. 반면 저임금 산업예비군에 안주한 다른 나라는 혁신에 뒤처졌다.
중국은 지역별 최저임금이 다른데 광둥성은 최상위권이다. 국내총생산 비율에서 수십 년째 중국 1위를 차지했던 광둥성은 해마다 두 자릿수로 임금을 올렸다. 문제는 고임금을 좇아 농민공이 광둥성으로 몰리면서 광둥성과 접한 지역은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린 것.
최근 한국에서는 임금 차등화 논의가 봇물을 이룬다. 강원연구원은 올 초 ‘강원도형 최저임금제’를 제안했다. 최저임금을 낮춰 기업 유인과 인구 유입 효과를 노리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원도 인력이 유출될 수 있다거나 유수 기업이 저임금을 노려 올 리 만무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서울시의회에는 노인 일자리 활성화를 위해 65세 이상은 최저임금을 제외하자는 건의문이 발의돼 세대 차별 논란을 불렀다.
내년 최저임금을 결정할 최저임금심의위원회가 구성돼 5월 중순 첫 회의를 갖는다. 이번에는 ‘시급 1만 원’의 험산도 버티고 있지만, 차등 임금제가 일으킬 삼각파도가 심상치 않을 전망이다. 업종별 차등제는 사문화된 규정이었으나 정부는 ‘돌봄 노동’ 등에 적용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민생토론회에서 외국인 가사·돌봄 노동자 임금 차등화를 제시했다.
최저임금은 딜레마를 안고 있다. 이익 집단화된 노사 모두 만족하지 않는다. 올해도 장외전부터 뜨겁다. 차등이 ‘차별적이고 위헌적’이라고 노동계는 반대한다. 막판에 노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회의장을 뛰쳐나가는 구태 재연이 불을 보듯 뻔하다. 졸속 심사가 벌써 걱정된다.
앞선 국내외 사례를 보면 임금의 추이는 고차방정식을 따른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뜻밖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개인에게 임금은 생계뿐만 아니라 연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산업 구조 변화의 요인으로도 이어진다. 그런데 올해 최저임금 심의 시한은 6월 27일로 6주에 못 미친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사회적으로 중차대한 의제가 결정되는 구조다. AI(인공지능)와 로봇이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다. 그에 걸맞게 최저임금을 심의하는 조직과 과정을 혁신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2024-05-0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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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K성형의 명암
서울 강남 압구정동은 ‘세계 성형수술 중심지’로 불리는 한국에서도 ‘성형 1번가’로 꼽힌다. 그 비싼 임대료에도 건물 1곳당 성형외과가 하나꼴로 입주해 있을 정도다. 건물 전체를 성형 등 미용 관련 콘셉트로 채운 곳도 있다. 전국에서 전교 1등 한 애들은 다 압구정에 모여 있다는 우스개도 성형외과 의사들을 빗댄 말이다. 이런 압구정이 최근 외국인 성형 관광객들로 다시 북적인다고 한다. 호텔마다 얼굴에 붕대를 감고 다니는 외국인이 이제 낯설지 않은 풍경이란다.
한국은 명실공히 성형 대국이다. 최근 미국 매체 〈인사이드 몽키〉가 국제성형의학회 데이터를 근거로 ‘미용성형 대국 톱 20’을 선정했는데 한국이 인구 1000명당 8.9건으로 1위였다. 20대 한국 여성 4명 중 1명이 쌍꺼풀, 코 수술을 받았을 것으로 매체는 추정했다. 한국은 성형외과 의사들의 기술력도 세계 최고로 평가받는다. 미국은 물론이고 남미나 동남아시아 의사들이 배우러 온다. 이런 배경 때문에 K팝 아이돌이나 K드라마 주인공처럼 되겠다며 한국을 찾는 성형 관광이 성황을 이루는 것이다.
2010년대 이후 성형 대국으로 급성장하는 동안 한국의 성형 문화는 외신의 조롱과 비난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13년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참가자들의 외모에 차별성이 없다며 ‘성형 시스터즈’로 조롱하는 보도가 논란을 촉발했고 강남 성형외과에 설치된 턱뼈를 가득 담은 유리 상자를 ‘턱뼈탑’으로 희화화하는 보도도 있었다. 여성들의 뾰족해진 턱을 빗살무늬토기에 비유하며 놀리는 글이 인터넷 게시판을 달구기도 했다. 최근에는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가 ‘대한민국 성형 대국이 자부심이자 고통인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미성년자까지 성형으로 몰리는 외모지상주의 문화의 이면을 비판하기도 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환자가 처음으로 60만 명을 넘어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고 지난 29일 발표했다. 그런데 이들 한국 의료 관광에 나선 외국인 환자 중 절반 이상은 피부과와 성형외과를 찾았다. 국가별로는 일본, 중국, 미국 순이었다. 필수의료 공백에 따른 의대 증원을 둘러싸고 의정 갈등이 격화하고 있는 와중이어서 마냥 반길 수만도 없는 소식이다. 28일 서울 강남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피부비만성형학회 춘계학술대회 경연장에 의정 갈등으로 사직한 전공의들이 줄을 섰다는 소식까지 들려 씁쓸함을 더한다. 이게 지금의 대한민국 의료 민낯이다.
2024-04-3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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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백일해 유행
박목월·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일컬어지고 서정시 ‘승무’ ‘낙화’로 유명한 조지훈(1920~1968). 1971년 독재정권을 비꼰 ‘애국자’란 시로 등단한 뒤 경남 창원시 마산에서 활동하며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고 환경 파괴를 경고하는 시를 많이 쓴 이선관(1942~2005).
성향이 매우 다른 작품 세계를 보여준 두 시인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갓난아이 적에 호흡기 질환의 하나인 백일해(百日咳)를 심하게 앓았다는 것. 조 시인은 생전에 보기 드물게 키가 180cm나 되는 거구였으나, 아주 어릴 때 앓은 백일해 후유증으로 몸이 허약해져 평생을 질병에 시달리며 고생했다. 이 시인은 한 살 무렵 겪은 백일해 약물 중독 탓에 생긴 뇌성마비 2급 장애를 멍에처럼 지고 살아야 했다.
백일해는 한방에서 “기침이 100일을 간다”고 한 데서 유래해 붙여진 명칭이다. 보르데텔라균(Bordetella pertussis, 그람 음성균)에 감염돼 발생하는 제2급 법정 감염병. 이 질환은 처음엔 미열이 있는 감기처럼 시작해 가벼운 기침을 하지만, 2~3주째 증상이 악화하면 “흡” 소리와 함께 발작성 기침을 한다. 기침이 심하면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막히며 구토 현상을 일으킨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960년대만 해도 백일해로 죽는 영아가 많았을 정도로 영유아에게 치명적이다. 비말을 통해 전파된다. 정부는 1954년부터 디프테리아·파상풍 백신이 들어있는 DTP 백신으로 영유아 예방접종을 권장했다. 그러다가 1989년 DTaP(개량형 백일해 백신)를 국가필수 예방접종에 포함하자 백일해 발생 빈도가 눈에 띄게 줄면서 퇴치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최근 전국에서 어린이·청소년을 중심으로 백일해가 유행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24일까지 발생한 백일해 환자는 365명. 지난해 같은 기간 11명에 비해 33배가량 늘었으며 최근 10년간 가장 많은 수치다. 올해 같은 기간 부산에서도 전국 시도 가운데 세 번째 많은 47명이 감염됐다. 그동안 가끔 국지적으로 소수의 발병은 있었지만, 이같이 유행 수준인 건 이례적이다.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시기 철저했던 방역 체계와 개인위생 준수가 엔데믹(풍토병) 전환 이후 크게 느슨해진 영향일지도 모른다. 머잖아 인구절벽으로 국가소멸이 우려된다는 초저출생 시대가 아닌가. 아동과 청소년 한 명 한 명이 너무나 소중해진 만큼 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도록 보건 당국과 어른들의 각별한 신경이 요구된다.
2024-04-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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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뒤늦은 해원
대한민국의 1982년은 어떻게 기억되나. 먼저 떠오르는 건 프로야구 출범이다. 3월 27일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를 시작으로 프로야구가 첫선을 보였는데, 날마다 경기하는 프로야구의 탄생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물론 당시엔 알지 못했다. 정권 기반이 취약한 신군부가 국민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했던 이른바 ‘3S’(Sports·Sex·Screen) 정책의 소산이었음을. 새해 벽두인 1월 5일부터 야간 통행금지가 37년 만에 해제돼 유흥·윤락 업소가 크게 늘어났고, 영화계 쪽에는 성 묘사 검열 수위가 낮아져 에로영화가 범람했다. 그해 사회적 풍경들이 그랬다.
또 한편 군사정권은 국민들의 의식을 틀어잡기 위해 부심했다. 4월 10일 시작한 ‘의식개혁 국민운동’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를 비웃듯 경찰에 의한 사상 최악의 총기 난사 사건이 터진다. 4월 26일 경남 의령군 궁류면 오지마을에서 일어난 ‘우 순경 사건’. 우범곤이라는 순경이 지서에서 총기와 실탄, 수류탄을 탈취한 뒤 마을 사람들에게 무차별 난사했다. 56명을 죽이고 34명에 중경상을 입힌 희대의 살인극은 본인의 자폭으로 끝났다. ‘건국 이후 가장 쇼킹한 사건’을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사건이다. ‘최단 시간 최다 살상’으로 한동안 기네스북 기록에도 올랐다.
사건 전반을 보면, 결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날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광기를 부리는 동안 경찰의 신속한 대응은 없었다. 우 순경은 평소 난폭한 성격과 술버릇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의령경찰서 중 가장 오지인 궁류지서로 좌천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결국 경찰의 부실한 채용·인사 시스템이 낳은 참사였던 셈. 하지만 군사정권의 보도 통제로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도 못했다. 경찰은 공권력의 상징이다. 경찰 내부에서는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잊힌 시간이었던 이 사건의 희생자 추모 행사가 42년 만에 처음으로 열렸다고 한다. 26일 의령군 궁류면 평촌리 4·26 추모공원에서 진행된 위령제와 추모식에서 유가족들은 긴 세월 억누른 눈물을 쏟아냈다. 추모 움직임이 공식 시작된 건 2022년이었다. 그때 의령군이 추모공원 조성과 위령탑 건립 계획을 세웠다. 현재 추모공원 공사는 막바지 작업 중인데, 이번 추모식은 42주기에 맞춘 위령탑 완공과 함께 이뤄진 것이다. 늦어도 너무 늦은 해원(解寃)이다. 유족들의 아픔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기를 빈다.
2024-04-2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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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황매산 철쭉제
매년 이맘때가 되면 지천으로 피는 꽃이 철쭉이다. 산자락에서부터 능선을 타고 선홍빛으로 흐드러지게 피는 철쭉은 그 색깔과 영롱함에 반할 수밖에 없다. 봄의 대표적인 꽃으로 분홍색, 빨간색, 흰색 등 다양한 색상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철쭉이란 어원은 중국에서 사용하는 ‘척촉(척촉)’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이 꽃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가던 길을 더 가지 못하고 걸음을 머뭇거린다’라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철쭉 하면 떠오르는 여인이 수로부인이다. 〈삼국유사〉 헌화가에는 신라 성덕왕 시절 천 길 벼랑 끝의 철쭉이 아름답다고 하여 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수로부인에게 꺾어서 바친 이야기가 나온다. 수로부인은 그 노인에게 “한 다발 꽃분홍 철쭉이 나를 부르네/ 아프고 괴로웠던 추운 시절 잊게 하네/ 암소 끌고 오신 이여/ 꽃 바친 그 정성으로 올해 농사 가물지 않도록/ 천지신명이여 굽어살피소서”라고 답가를 보냈다고 한다. 철쭉은 전통 결혼식에서 신부의 머리에 꽂는 꽃으로도 사용되었을 만큼 한민족과 오랫동안 함께했다.
꽃의 계절이다. 만개했던 벚꽃이 꽃비가 되어 흩날린 지 며칠 만에 계절의 여왕인 5월이 다가왔다. 봄을 만끽할 수 있는 축제도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다. 먹고 마시는 축제부터 눈을 즐겁게 하는 꽃 축제까지. 영남에서 꽃과 관련한 대표적인 축제가 경남 산청 황매산 철쭉제다. 오는 27일부터 5월 12일까지 산청군 차황면 법평리 황매산 일원에서 열린다. 태백산맥의 마지막 준봉으로 작은 금강산으로 불리는 황매산에는 5월 초부터 철쭉이 산상 화원을 이룬다. 황매산 해발 800~900m의 평원에 철쭉이 만개한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올해 철쭉제 주제는 ‘산청, 철쭉에 물들다’이다.
철쭉의 꽃말은 ‘사랑의 즐거움’이라고 한다. 어느 가수가 “바람의 향기 불어와 철쭉 꽃비가 내리면/ 그 옛날의 사랑이 그리워지네/ 나 그곳에 가리라/ 옛사랑의 추억을 찾아서/ 이렇게 그리운 밤에는 철쭉 꽃비가 내린다”라고 열창했다. 철쭉은 향기가 없지만, 그 가수에게는 바람에 실린 사랑의 향기가 느껴졌나 보다. 철쭉이 피는 이 계절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면 좋겠다. 철쭉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기억을 통해 우리네 신산한 삶에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이번 황매산 철쭉제에서 모처럼 사랑도 고백하고, 철쭉의 선홍빛에 물드는 시간이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꽃처럼 잠시라도 해맑을 수 있다면….
2024-04-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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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퇴계, 향산, 양산
지난 총선 때 한 후보가 자신의 저서 중 퇴계 이황의 사생활 관련 표현이 문제가 돼 곤욕을 치렀다. “감히 퇴계를 모독하느냐”며 유림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공맹에 견줘 이자(李子)로 칭송되는 성인을 폄훼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기실 퇴계가 대학자이자 민족의 사표라는 데 이론을 달 이는 별로 없다. 더구나 그는 매서운 절의(節義)를 가진 선비이기도 했다. 초야에서 정진하며 후진을 양성한 은인(隱忍)의 학자로 흔히 알지만, 이는 퇴계의 절반만 아는 것이다.
그의 본래면목이 잘 드러난 시가 ‘절죽(折竹·꺾인 대나무)’이다. ‘강항오조좌(强項誤遭挫·굳센 목덜미가 잘못 꺾어져도)/ 정심비소파(貞心非所破·곧은 마음이 깨지는 것은 아니어라)/ 늠연립불요(凜然立不撓·늠름히 서서 흔들리지 않으니)/ 유감격퇴나(猶堪激頹懦·오히려 무너지고 나약한 자를 격려한다네).’ 퇴계가 63세 때 지은 이 시에는 어떤 어려움에도 절의를 지킨다는 선비의 의연한 기상이 갈무리돼 있다.
퇴계의 절의는 대를 이어 전해졌고, 그 절정이 11세손 향산 이만도(1842~1910)다. 어려서 퇴계학을 전수받은 향산은 평소 선비로서 뜻 세움을 중히 여겼다. “뜻을 세우는 건 가슴에 대못 박는 것과 같아서 한 순간이라도 흔들려선 안 된다”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그의 부친도 마찬가지여서, 향산이 25세에 장원급제하자 “조정이 너를 죽을 자리에 두면 반드시 죽음으로써 선비의 책임을 다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향산은 고향 안동으로 돌아가, 퇴계가 그랬던 것처럼, 후학 양성과 학문에 몰두했다. 이후 일제의 침략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켰던 그는, 1910년 한일병탄이 발표되자 “죽음 말고 무엇이겠는가”라며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절했다. 안타깝게도 향산의 순절은 당시는 물론 해방 이후에도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향산이 선비로서 보여준 삶과 죽음은 망국지경에서 지식인의 선택과 결단이 어떠해야 하는지 숙고하게 만든다. 그의 자취를 좇아볼 법도 한데, 마침 양산시립박물관에 좋은 기회가 마련됐다. 26일부터 7월 21일까지 열리는 ‘양산군수 특별전’이다. 조선시대 양산에 부임해 칭송받은 역대 군수들의 면모를 소개하는 전시인데, 대상에 향산이 포함됐다. 향산은 1876년 양산에 부임해 목민의 의무를 다했다. 전시를 찾는다면 향산의 절의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성싶다.
2024-04-2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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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부산시 '금주 구역' 조례
미국 위스키 잭 다니엘의 본거지는 테네시주 무어 카운티(Moore County)인데, 정작 이 지역 식당이나 상점에서는 이 세계적인 토산주를 구입하거나 마실 수가 없다. 무어 카운티는 연방 금주법 폐지 뒤에도 주류 판매와 음주가 불법이어서다. 이런 지자체는 알코올이 증발해 버렸다는 비유로 ‘드라이(dry) 카운티’로 불린다. 그 반대는 ‘웨트(wet) 카운티’. 미국에서 500곳 이상의 지자체가 아직 ‘드라이’ 상태다.
유럽은 술에 너그러울 것 같지만 상당수 국가가 늦은 밤과 새벽에 주점에서 주류 판매를 금지한다. 영국 스코틀랜드는 과음을 막기 위해 주류 최저 가격제 MUP(Minimum Unit Pricing)까지 도입했다. 싼 맛에 너무 많이 마시지 말라는 취지다.
조선은 건국 때부터 금주가 ‘디폴트’(초기 설정)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술’ 키워드로 읽으면 금주령과 현실론의 투쟁사다. 임금들은 끊임없이 금주령을 내렸지만 결국 솜방망이였다. ‘거리에 술병을 들고 다니지 말라’고 어명을 내렸다가 ‘술주정하는 것만 금한다’며 단속을 완화했다. 다시 금주론이 강경해지자 ‘고기와 생선 안주 금지’라는 웃지 못할 고육책으로 음주를 억제하려 했다.
실록에는 임금 앞에서 만취 신하가 궁녀를 희롱하거나, 심지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주사를 부려 망신한 사례까지 나온다. 영의정 정인지는 술주정의 꼭짓점이다. 작취미성으로 어전에 나와 임금과 문답을 못하는 건 예사. 불콰해져 세조에게 ‘너’라고 하대하거나, 불교 심취를 비난해 술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파직과 귀양은 가볍고 목을 베야 한다고 신하들이 들끓었다. 세조는 요지부동으로 정인지를 두둔했다. “취중 실수여서 죄를 물을 것도 못 된다!” 주사에 관대한 내면 의식의 면면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부산의 어린이집·유치원, 공원, 정류장 등 공공장소에서 음주를 하다 적발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부산시의회 이종진 의원이 발의한 ‘건전한 음주문화 환경조성에 관한 조례’ 개정안이 지난 2월 본회의를 통과해 금명 시행된다. 이 조례로 지자체는 ‘금주 구역’ 지정과 단속·과태료 부과 권한을 갖게 됐다. 그간 너그러운 음주 문화 탓에 잘못된 음주 행태에 대한 예방 시스템이 없었다. 그사이 부산 음주율은 전국 최고 수준까지 치솟았다. 이 조례를 계기로 ‘음주 TPO’, 즉 시간(time), 장소(place), 상황(occasion)을 따지는 성숙된 음주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2024-04-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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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도시 입장료
“소음과 사생활 침해 때문에 도저히 창문을 열고 살 수가 없다.” “평일·주말 안 가리고 사람들이 몰려와 쓰레기를 마구 버리고 간다.”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는 세계 주요 관광지 주민들의 하소연이다. 특정 지역에 지나치게 많은 관광객이 몰려들면서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침해하는 과잉 관광(Overtourism)이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일부 관광지에선 주민들이 앞장서서 “이젠 제발 그만 좀 와 달라”고 할 정도다.
아프리카 서북부 해역에 위치한 카나리아제도는 스페인령 군도다. 화산 지형과 연중 내리쬐는 햇살로 유명해 전 세계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해 이곳엔 주민 220만 명의 7배가 넘는 16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 그러자 수만 명의 주민들이 ‘관광 중단’이란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로 나와 관광객들에게 항의하는 일이 최근 벌어졌다. 이러한 과잉 관광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프랑스 파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그리스 산토리니, 일본 오사카, 필리핀 보라카이 등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제주도와 서울 북촌 한옥마을, 부산 감천문화마을 등이 비슷한 경우다. 과잉 관광이 문제가 되자 지난해 초 프랑스에서는 루브르박물관의 하루 방문객을 4만 5000명에서 3만 명으로 제한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은 최근 연간 방문객이 2000만 명을 넘자 새 숙박 시설을 건설하지 않기로 했다.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다. 한때 25만 명이 넘었던 인구는 쪼그라들어 지금은 5만 명에 불과하지만, 관광객은 매년 2500만~3000만 명이 찾고 있다. 이렇게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주민들의 생활이 힘들게 되자 베네치아는 오는 25일부터 당일치기 방문 관광객을 대상으로 도시 입장료 5유로(약 7000원)를 부과하기로 했다. 6월부터는 단체 관광객 수를 25명으로 제한한다. 도시 입장료 부과는 세계 도시 중 처음이다.
이제 과잉 관광은 전 지구적 문제가 되고 있다. 얼마나 심각했으면 베네치아가 도시 입장료 부과까지 들고 나왔을까. 전문가들은 과잉 관광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자칫 관광지로서 매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에서는 인간과 지구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관광의 책임 있는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마침 22일은 지구의 날이었다. 온실가스 발생을 줄이기 위해 탄소 배출 감축에 노력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 모두 이 문제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할 때가 됐다.
2024-04-2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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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대마도 지진?
지난해 5월 15일 아침, 동해를 뒤흔드는 규모 4.5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지는 동해 북동쪽 52km 해역. 동해에서 일어난 지진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 지난해 한반도와 주변 해역을 통틀어도 가장 강력한 수준의 지진이었다. 또 저 무렵 한반도 인근에서 발생한 44회의 지진 중 3분의 1이 이곳에서 발생했다. 근년 들어 동해 지진이 부쩍 많아진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올해는 새해 벽두부터 동해안 지진해일 걱정에 밤잠을 설쳤다. 1월 2일 일본 서부 이시카와현 노토반도 인근에서 규모 7.6 강진이 발생해 우리 해안으로 쓰나미가 밀려들었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쓰나미의 위협이 처음은 아니다. 1993년 일본 홋카이도 오쿠시리섬 북서쪽 해역에서 규모 7.8 강진이 발생해 동해안으로 최고 2.47m의 해일이 덮쳤다. 1983년엔 혼슈 서쪽 해역의 7.7 지진으로 쓰나미가 일었다. 각각 4억 원의 재산 피해와 3명의 사망·실종자를 냈다.
동해 지진에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는 건 이곳에 밀집된 원전 때문이다. 원전이 있는 부산 기장, 울진, 영덕 등은 죄다 동해안에 위치한다. 국내 원전은 규모 6.5 기준의 2~3배 강도를 견디게 설계돼 문제가 없다는 게 정부 설명이다. 하지만 큰 지진의 경험이 없다 보니 외국 자료를 토대로 내진설계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약점이라면 약점이다. 우리 환경에 잘 맞는지 아닌지 아직 잘 모른다는 얘기다.
지난 주말인 19일 밤 11시 28분, 긴급재난문자의 다급한 경고음에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일본 대마도 북동쪽 해역에서 발생한 3.9 규모의 지진을 알리는 정보였다. 동해와 남해를 잇는 이 일대는 과거에도 규모 5 이상의 강진이 발생한 곳이다. 부울경 지역에서 80여 건의 흔들림 신고가 접수됐다고 한다. 대만 강진 소식이 불과 3주 전의 일이라 국민들은 가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진앙지인 대마도 북동쪽 95km 해역이라면 부산 남동쪽 대한해협이다. 부산에서 54km 거리라서 우리가 더 가깝다. 그런데도 ‘대마도 지진’으로 발표된 것은 발생 해역이 일본 영해라서다. ‘국외 지진’으로 분류되니 어쩐지 안심은 되겠으나 이는 착시일 수 있다. 재난 정보의 신속함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추가 전송을 통해서라도 우리나라 어느 지역과 얼마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는지 세부 내용을 담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국내든 국외든 한반도에 영향을 주는 지진이라면 빈틈없는 경각심의 대상이 돼야 한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
2024-04-2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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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비공개 대국민 사과
우리 속담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는 말이 있다. 자기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상대방에게 간절히 비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본능은 원래 ‘책임 회피’에 가깝게 설계돼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잘못을 인정해 평판이 하락하고, 법적·도덕적 책임을 지는 사과 행위는 큰 용기와 진정성이 필요하다. 미국 하버드대 정신의학과 아론 라자르 교수는 저서 〈사과에 대하여〉에서 “갈등과 위기를 해소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바로 사과이며, 사과는 약자의 언어가 아니라 위대한 힘을 요구하는 리더의 언어”라고 지적했다. 그는 제대로 사과하는 방법으로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고, 유감을 표시하고, 그 이유에 대해 진상을 규명한 뒤, 책임지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잘못이 반복되지 않도록 개선 방향을 공표해야 한다”라고 제시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잘못을 구체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얼버무림, “만약~ 했더라면”이라는 가정법, 누가 잘못했는지 주체조차 애매한 수동형, “나로 인해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까~”라는 부정형 등 잘못된 사과로 화를 키우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공개 대국민 사과’로 나라가 시끌벅적하다. 윤 대통령은 4·10총선 참패와 관련해 국무회의 13분 모두발언을 통해 “옳은 방향과 좋은 정책 아래 최선을 다했다”면서 “국민이 체감할 변화를 만드는 데 모자랐다. 세심한 영역에서 부족했다”라고 말했다. 국민에게는 국정 최고 지도자로서 책임과 혁신 의지를 찾아보기 어려운 변명으로 비쳤다. 비난이 빗발치자, 대통령실 측은 4시간 뒤에서야 “대통령이 비공개회의에선 ‘대통령부터 국민의 뜻을 잘 살피고 받들지 못해 죄송하다’고 사과했다”라고 발표했다. 정작 사과를 받아야 할 대상인 국민은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비공개 대국민 사과’였다. 불난 집에 기름 붓는 격이 된 셈이다.
국민이 대통령에게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당당하게 책임을 지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모습이다. 대통령에게 사과는 정치의 끝이 아니라, 위기를 벗어나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성공적 사과는 국민과 손상된 관계를 회복시켜 지지자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실수보다 더 나쁜 게 사과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윤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사과의 방법을 배워야 할 듯하다. 고물가와 고환율 등 사과할 일이 집채만 한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
2024-04-18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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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나는 솔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했다. 많은 해설이 가능하지만, ‘음과 양이 만나 어우름이 도(진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무방하겠다. 여하튼 음과 양이 만나면 격렬하게 반응한다. 서로 어우르며 만물을 키워 낸다. 인간에서 음과 양은 곧 여와 남이다. 여와 남이 짝이 되면 격하게 사랑하고 역시 어울어 생명을 일궈 낸다. 여남의 짝짓기는 그래서 고결하고 신성하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한다. 통계가 증명한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결혼은 19만 4000여 건. 2011년에는 32만 9000여 건이었다. 줄어드는 속도가 가히 무섭다. 결혼은커녕 연애조차 꺼려한다. 실제로 전국 미혼 여남 중 “연애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24%에 불과하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최근 발표됐다. ‘연애는 손해’라는 생각이 젊은이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런데 그런 세태에 맞춤하지 않은 현상이 있다. 연애와 결혼을 주제로한 짝짓기 예능 프로그램이 여러 방송 채널을 통해 큰 인기를 끄는 현상이다. 현재 방영되는 짝짓기 프로그램은 5~6개 정도인데, 그중 하나가 ‘나는 솔로(SOLO)’다. 시즌을 이어가며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여기서 소개된 사연을 모르면 항간의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다. 미혼 여남들이 일정한 공간에서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주고받으며 짝을 찾는 과정이 보는 이들까지 웃고 울린다.
이를 모방해 김해시가 만든 인구정책 프로그램이 ‘나는 김해 솔로’다. 김해 각지 명소에서 1박 2일간 미혼 여남에게 데이트할 기회와 환경을 제공한다. 이게 요즘 시쳇말로 대박을 치고 있다. 지원자가 몰려 남성은 못 해도 10 대 1, 여성은 3 대 1의 경쟁률을 통과해야 한다. 참가자들의 만족도도 높다. 지난 13~14일 한 캠핑장에서 진행된 행사에선 미혼 여남 각 10명이 참여해 무려 5쌍이 짝이 되는, 그러니까 50%의 성공률을 보였다.
연애와 결혼을 기피하는 요즘 젊은이라고 해서 이성을 향한 욕념까지 없는 건 아닐 터이다. 하기야 기회만 주어지면 언제든 격하게 사랑의 불꽃을 피우는 게 젊음의 진정 아니겠는가. 맘껏 연애하시라. 혼자 살기도 각박한 세상에 연애는 손해라고? 사람이 굳이 여남으로 구분돼 세상에 나오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음양의 도리는 곧 어우러짐이고, 여남 역시 서로 어울러야 한다. 걱정일랑 접어 두고 당당히 “나는 솔로다” 외치며 짝을 찾으시라.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4-04-17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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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운동복 선정성 논란
윔블던 테니스 대회는 역사적 명성만큼이나 엄격한 드레스 코드로 유명하다. 대회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색을 착용해야 한다. 상·하의와 신발, 모자, 양말은 물론이고 속옷까지 순수 흰색이어야 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왕과 귀족들이 옷에 밴 땀 얼룩을 예의에 어긋난 것으로 여긴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첨단 기술과 패션이 주도하는 현대에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다. 앤드리 애거시는 까다로운 드레스 코드를 비판하며 3년간 윔블던을 보이콧하기도 했다. 2023년에야 여자 선수들에게 어두운색의 속바지가 허용됐다.
스포츠 세계에서 복장 논란은 끊이지 않는 이슈다. 2021년 유럽 비치핸드볼 선수권 대회에서는 노르웨이 여자 대표팀이 비키니 하의 대신 반바지를 입고 출전했다. 비키니가 불필요한 성적 시선을 유발하고 움직이기 불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주최 측이 복장 규정을 위반했다며 선수 한 명당 150유로씩 벌금을 물려 논란에 불을 붙였다. 이에 미국 가수 핑크는 “기꺼이 벌금을 대신 내겠다. 계속 뜻을 밀고 나가길 바란다”며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선수들이 규정된 복장을 갖춰야 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다. 문제는 스포츠 복장 논란이 많은 경우 상업적 이해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다. 2011년 세계배드민턴연맹은 미니스커트 유니폼을 도입하면서 “관객들이 배드민턴 경기에 다시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발표해 구설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 한국여자농구연맹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쫄쫄이’ 유니폼을 도입했다 2년 만에 철회했다. 연맹 관계자의 ‘눈요깃감’ 발언으로 여성 선수를 성적 대상화한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기 때문이다.
2024년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공개된 미국 여성 육상팀 경기복이 다리를 따라 골반 위까지 깊게 파인 ‘하이컷 수영복’으로 드러나 성적 대상화를 부추긴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미국 육상연맹이 왁싱 비용을 지불하라’ ‘여성 선수 경기복이 남성보다 옷감이 적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이 경기복은 절대 성능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등 비판이 쏟아졌다. 도쿄올림픽에서 원피스 수영복 대신 몸통에서 발목까지 가리는 ‘유니타드’를 입고 출전했던 독일 여자 기계체조 대표팀의 사라 보시 선수는 “모두가 입어야 한다는 게 아니라 모두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경기의 본질에서 벗어난 복장 논란이 스포츠 정신일 리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강윤경 논설위원 kyk93@
2024-04-1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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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무효표'의 표심
“무효(無效)!” 일반적으로 아무런 효력이나 효과가 없음을 일컫는 말이다. 어떤 행위나 노력의 결과를 기대할 수 없기에 보통 무효는 부정적으로 취급될 때가 많다. 사람들도 대체로 의도적으로 한 자신의 행위가 무효로 처리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무효의 행위를 하는 경우가 영 없지는 않다. 선거에서 무효투표 행위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지난주 치러진 4·10 총선에서 역대 최다의 무효표가 속출해 이를 둘러싼 해석이 분분하다. 애써 투표장까지 가서 투표를 하면서도 유효한 의사표시로 인정받지 못하는 행위를 일부러 벌인 것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5일 공개한 비례대표 투표 결과를 보면 무효표가 130만 9931표로 전체 투표수의 4.4%를 기록했다.
숫자로 친다면 거대 양당의 비례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와 더불어민주연합, 조국혁신당에 이어 4번째로 많은 것인데, 만일 ‘무효표당’이라는 정당이 있었다면 3석 정도의 의석 확보가 가능한 수치라고 한다. 부산에서도 투표자 194만여 명 중 약 4.8%가 비례대표 선택에서 무효표를 던졌다고 하니, 무효표에 담은 표심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무효표가 왜 이렇게 많은지에 대해 전문가들은 거대 정당의 꼼수 위성정당 등 비례대표 정당의 난립으로 유권자의 혼란과 반발이 극대화된 결과라고 대체로 설명한다. 성인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알려진 우리나라에서 글자를 몰라 무효표가 양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면, 어느 정당도 마음 둘 데가 없어 일부러 무효표를 만들었다는 해석이 더 가슴에 와닿는다. “어떤 비례 정당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라는 것이다.
투표 포기와 달리 투표율 계산에 포함되는 무효표를 이처럼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표시로 본다면 정치인들의 분발과 각성을 촉구하는 ‘투표 밖의 투표’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무효표를 던지는 행위가 절반을 넘지 않는 한 정치인들에게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는 견해도 병존한다. 무효표의 정치적인 의미 부여에 부정적인 입장이다.
정치적 의사표시든 아니든 간에 어쨌든 갈수록 비례대표 무효표가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닌 듯싶다. 오죽했으면 자신의 한 표가 무효가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렇다고 투표를 포기하기도 마뜩잖으니 유권자들만 안쓰러울 따름이다.
2024-04-1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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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오래된 미래 '부부 각방'
부부가 따로 잔다고 하면 으레 “싸웠냐” 따위의 곱지 않은 반응이 돌아오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부부 각방’이 ‘국룰’이었다. 태종실록에는 국정 과제로 ‘부부 별침(夫婦別寢)’을 논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아들인 세종 시절 성리학자들은 한술 더 떠 남녀유별을 저자에까지 확대하려 시도했다. 신하들이 남녀가 섞여 앉지 않고, 물건을 직접 주고 받지 않는다는 등의 예기 규정을 들어 거리에서 남녀가 같이 걷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청했으나 세종은 현실에 맞지 않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의 행동을 규제하려는 사대부들은 끝내 주거 공간에서 내외를 구현했다. 원래 양반가 부부는 몸채에서 함께 지냈는데, 유교 격식과 법도를 주거에 구현하면서 남성은 사랑채, 여성은 안채와 부엌으로 분리됐다. 식사 때 모여도 남녀가 따로 앉아 식사를 했다.
일본에서는 세분화된 각방 조사가 실시되고 있어 추세를 알 수 있다. 세키스이하우스 주거생활연구소의 2022년 조사에 따르면 고령화와 각방은 상관관계가 있다. 55~64세(54.8%), 65~69세 (62.7%)는 과반이 각방을 사용한 반면 25~34세(27.6%), 35~44세(35.1%)는 각방 비율이 낮다. 따로 자게 된 이유로는 ‘코골이·이갈이·잠꼬대’, ‘생활 리듬이 달라서’, ‘선호 온도 등 환경 차이’ 등 숙면 보장이 가장 많았다. 물론 ‘나 홀로의 시간을 갖고 싶다’는 프라이버시 이유도 있었다.
최근 미국에서 숙면을 위해 따로 침실을 쓰는 ‘수면 이혼(sleep divorce)’이 확산된다는 외신이 전해졌다. 미국수면의학회(AASM) 조사에 따르면 부부 3분의 1 이상이 따로 자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 9년 차로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여배우 캐머런 디아즈도 CNN에 나와 “침실을 따로 쓰는 걸 정상으로 여겨야 한다”며 ‘수면 이혼’ 예찬론자로 나섰다. 굳이 ‘이혼’이라는 표현을 왜 썼나 싶지만, 건강한 수면 생활을 위한 각방론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년 퇴직 이후 부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갑자기 늘어나서 미묘한 스트레스가 생기는 사례를 주변에서 왕왕 접한다. 사실 부부가 함께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자고 있는 동안이다. 수면 시간까지 스트레스가 쌓이고 불면과 피로감이 누적된다면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상황에 맞게 관계의 행복감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를 찾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중요한 건 부부 간의 정서적 거리감이다.
2024-04-14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