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왕사남'과 전세
영화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유배를 온 서울의 관료가 유배지 주민들에게 집을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리는 모습이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조선 시대에는 전체 관료의 4분의 1이 경험했을 정도로 유배는 일상에 가까웠다. 이에 갑자기 유배를 간 관료들은 낯선 지역에서 주거 문제 해결이 시급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현대의 전세 제도와 비슷한 ‘가사전당’이었다. 다산 정약용도 18년 동안의 강진 유배 기간 지역 유지에게 일정 금액의 재화를 맡기고 주택을 빌려 거주했다. 유배 기간 동안 맡겨 놓은 재화는 다른 이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하는 식으로 굴릴 수 있었기에 집주인에겐 자산 운용 기회가 됐다. 이 가사전당이 원시적 형태의 전세 제도라 할 수 있다. 조선 태조 때 ‘해전고’라는 부서에서 전당을 관장했을 정도로 오랜 전당의 역사가 집에까지 확장된 형태다. 전세가 제도화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라는 설이 있다. 개항과 일본인 거류지 조성 등과 맞물리면서 주택임대차 계약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1899년 4월 황성신문에 전세 관련 기사가 눈에 띄는 걸로 보아 그 시기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보인다. 전세 제도의 전국적 확산은 1970년대 산업화 이후였다. 이촌향도 현상으로 도시의 주택 수요가 공급보다 급증했으나 제도권 은행 대출 창구는 찾기 어려웠던 상황이 전세 확산을 부추겼다. 은행에 전세 보증금을 넣어두기만 해도 이자가 한해 10%를 넘을 정도였으니 집주인으로서는 짭짤한 이익이었다. 이후 집을 추가로 살 때 모자란 목돈 보충 통로로도 이용됐다. 그러던 전세가 이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지난달 부산지역 임차 거래 중 월세 비중이 72%였을 정도다. 전세금 반환용 주택담보대출 한도 축소와 다주택자 대출 규제 등이 이유로 꼽히지만 이자율로 계산해도 월세의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현행 예금 금리 2.82%를 기준으로 아파트를 2년 동안 3억 원으로 전세를 주면 기대수익은 월 70만 원 수준이다. 반면 같은 아파트에 월세 전환율 4.23%를 적용하면 월세는 105만 원 정도가 된다. 월세로 전세보다 50% 가량 수익을 더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전세가 사라지고 월세가 급증하는 현상은 시대가 바뀐 만큼 앞으로 더욱 심화할 듯하다. 이로 인해 향후 집 없는 서민들과 젊은이들만 더 많은 주거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2026-05-13 [18:16]
[밀물썰물] '딸깍'이라는 환상
“주말과 퇴근 후에 따로 공부한 노하우라서요. 회사에 공유는 힘들 것 같습니다.” 최근 직장인 커뮤니티 ‘리멤버’에 올라온 사연이 화제를 모았다. 마케팅 회사의 팀장이 인공지능(AI)을 잘 다루는 막내 팀원에게 프롬프트(AI에게 입력하는 지시문) 공유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는 내용이다. 글쓴이는 “자기도 남들이 만들어 놓은 문서 양식과 자동화 기능을 쓰지 않나”라고 토로했다. 500개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결과물은 회사 소유라도 과정의 노하우는 개인의 것”이라는 옹호와 “그럼 나도 후배에게 업무 노하우 가르치지 말아야 하나”라는 반박이 맞섰다. 비슷한 요청을 종종 받는 입장에서, 신입의 고집은 옳지 않다고 본다. 사람마다 기술 우위는 결국 좁혀지리라 보기 때문이다. 한때는 ‘프롬프트를 잘 쓰는 것’이 AI 활용 능력의 척도였지만, 이제는 꽤나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다. 새 기술이 나왔을 때 발 빠른 사람이 잠시 앞서갈 수 있다. 하지만 사용이 보편화될수록 ‘나만의 노하우’라고 우길 여지는 줄어든다. 그때 가서 과거의 인색함이 동료들 기억에 좋게 남을 리 없다. 공유하다 보면 자신도 더 사용법을 익히게 되고, 타인의 질문에서 아이디어를 길어 올리기도 한다. 다만 ‘팀장’ 쪽에도 짚어둘 대목이 있다. AI는 같은 프롬프트를 써도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계산기는 결정론적이다. 같은 식에 같은 숫자를 넣으면 누가 눌러도 결과가 동일하다. AI는 다르다. 무엇을, 어떤 순서로, 어떤 맥락에서 묻느냐에 따라 답이 갈린다. 확률적으로 그럴듯한 말을 이어 붙이는 원리 탓에 가짜를 진짜처럼 내놓는 ‘환각’ 증상도 남아 있다. 사용법을 배운다고 단숨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어제의 방법이 오늘은 통하지 않는 일도 흔하다. ‘딸깍’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마우스를 가볍게 누르기만 하면 AI가 결과물을 뚝딱 내놓는다는 어감이다. 그 말에는 ‘쉽게 한다’ ‘대충 한다’는 그늘이 따라붙는다. 이런 인식은 AI 사용자를 위축시키고 예비 입문자를 망설이게 한다. ‘딸깍’은 환상이다. 그럴 듯한 저품질 결과물로 만족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결과물의 품질을 가르는 것은 결국 사용자의 손때 묻은 노하우와 ‘암묵지’다. 이미 많은 직장인이 각자의 분야에서 갖추고 있을 소양이다. 남은 건 직접 써보는 일 뿐이다. 자전거를 처음 탈 때 설명서부터 펼치는 사람은 없지 않나.
2026-05-12 [18:02]
[밀물썰물] 사라진 황금사자상
이탈리아의 베니스는 세계 문화예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지닌 도시다. 매년 혹은 격년마다 전 세계 예술가와 영화인, 건축가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것은 그 이름만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국제 행사들 때문이다. 이 중 1895년 시작된 베니스 비엔날레는 각국이 경쟁하는 ‘미술 올림픽’으로 불릴 만큼 세계 최고 수준의 국제 미술 행사로 꼽힌다. 1932년 출범한 베니스 국제영화제는 세계 최초의 국제영화제로 기록된다.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 역시 세계 건축 담론을 이끄는 무대로 명성이 높다. 분야는 달라도 모두 베니스라는 도시 브랜드 아래 성장하며 세계 문화예술의 흐름을 견인한다. 이들 행사의 또 다른 공통점은 최고상이 모두 황금사자상이라는 점이다. 이 상은 우리에게도 낯익다. 2012년 김기덕 감독은 영화 ‘피에타’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2014년 제14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는 한국관이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왜 하필 사자일까. 기원은 베니스 공화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중해 무역을 지배했던 베니스는 성경 ‘마가복음’의 저자 성 마르코(마가)를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삼았고, 초기 기독교 전통에서 마가는 날개 달린 사자로 상징됐다. 오늘날 베니스 곳곳에서 황금 또는 청동 사자상을 쉽게 볼 수 있는 이유기도 하다. 결국 황금사자상은 성 마르코의 날개 달린 사자에서 비롯된 것으로 베니스의 역사와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최근 개막한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는 적잖은 아쉬움을 남긴다. 상징과도 같던 황금사자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국제 분쟁을 둘러싼 논란 속에 심사위원단 5명이 전원 사퇴했고, 결국 최고상 폐지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이들이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기소된 지도자가 있는 러시아와 이스라엘을 수상 대상에서 제외하겠다고 밝힌 지 불과 일주일 만이었다. 대신 비엔날레 측은 폐막일인 11월 22일 일반 관객 투표로 수상자를 결정하는 ‘관객상’을 신설했다. 예술은 현실과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다. 시대의 아픔과 사회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도 예술의 역할이다. 그렇다고 예술이 정치적 갈등에만 갇혀서도 안 된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함께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세계 예술인들의 꿈이었던 황금사자상이 지구촌 혼란 속에 제자리를 잃은 모습은 그래서 안타깝고 씁쓸하다. 전쟁이 미술 올림픽에까지 깊은 상처를 남긴 셈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6-05-11 [18:04]
“호르무즈해협 문제 단계적 기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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