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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지브리 스타일
둥글둥글 마냥 푸근해 보이는 얼굴. 단순하지만 초롱초롱하면서도 순해 보이는 눈. 아이들은 5등신에도 못 미칠 것 같은 깜찍함으로, 어른은 유럽 스타일의 8등신으로. 서정적이고 수채화 같은 몽글몽글하고 편안한 터치….
난리다. 휴대폰으로 SNS를 펼쳐 들자 지인들의 프로필 사진들이 온통 그림으로 바뀌고 있다. 평소 익히 알고 있던 사진과 닮아 있으면서도 분위기가 일본 유명 애니메이션을 연상케 한다. 곧 이어지는 메시지. “너도 ‘지브리 스타일’로 사진 바꿔 봐.”
한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 SNS가 소위 지브리 스타일 그림으로 도배가 되고 있다. 오픈AI가 지난달 25일부터 챗GPT에 사진을 리터치할 수 있는 기능을 넣으면서부터다. 기능 추가 때부터 사진의 변형으로 인한 오남용 등 부작용이 우려됐으나 예상과는 달리 상당수의 이용자들은 사진을 지브리 스타일 그림으로 바꾸는 데 열중했다. 오픈AI 측 엄살(?)에 따르면 지브리 스타일 그림 변환 시도 폭주로 챗GPT의 GPU(그래픽처리장치)가 녹아내릴 지경이라니 대단한 인기다.
지브리 스타일에서 말하는 지브리는 일본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 이름이다. 애니메이션의 신으로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끌었던 회사다. 비행기 마니아인 그가 이탈리아 정찰기 이름을 따서 지은 회사명이 지브리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웃집 토토로〉, 〈원령공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이 대표작.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든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미래소년 코난〉 등 그의 초기 작품부터 이어지는 지브리 작품들의 주제는 대부분 가족, 사랑, 환경, 반전 등으로 선명하다. 반면 화풍은 화면 속으로 손을 넣어 어루만지고 싶을 만큼 몽환적이면서도 서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으로 일관해 왔다. 아날로그 스타일의 작화를 고집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범람할 정도로 기술 첨단화가 대세인 요즘, 사진을 지브리 스타일 그림으로 바꾸려고 지구촌이 요란해진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첨단 디지털 물결 속에서도 서정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찾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문제는 챗GPT만으로 손쉽게 지브리 스타일 그림으로 사진 변환을 할 수 있다 보니 챗GPT가 학습한 그림 화풍의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놓고 논란이 불가피해진다는 점이다.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향후 추이가 궁금해진다.
이상윤 논설위원 nurumi@busan.com
2025-04-02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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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굴절버스
‘브라질이 낳은 세계적인 도시’하면 쿠리치바를 빼놓을 수 없다. 브라질 남부 파라나주의 주도로 국제사회에서 이 도시에 대한 찬사는 매우 화려하다. ‘지구에서 환경적으로 가장 올바르게 사는 도시’ ‘세계에서 가장 현명한 도시’라고 했을 정도다. 이런 찬사 뒤에는 ‘버스 왕국’이란 도시 별칭이 말해주듯 쿠리치바의 교통 정책이 있다. 지구촌에서 대중교통과 녹색교통의 모델 도시로 유명하다. 이곳의 교통 시스템은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중앙버스전용차로제(BRT)를 도입하는 데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런 쿠리치바의 대중교통 정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바로 굴절버스와 원통형 버스 정류장이다.
굴절버스는 2칸 이상의 차량을 서로 연결해 운행하는 버스를 말한다. 2칸 굴절버스는 길이가 18m 정도로, 대량의 승객들을 수송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다. 현재 유럽의 여러 국가와 미국, 브라질 등에서 운영되는 것도 이런 이유다. 1992년 굴절버스를 도입한 쿠리치바는 지하철이 없는 대신 이 버스가 주요 간선도로를 운행하며 그 역할을 대신한다. 쿠리치바와 주변 도시는 중앙버스전용차로로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어 시민 10명 중 8명가량은 매일 이 버스를 타고 출퇴근한다.
부산 강서구는 도시철도 강서선 사업 추진 시기가 최근 불투명해지면서 오는 7월 ‘강서선을 고려한 우선적 대중교통수단 기본구상 용역’을 시행할 예정이다. 이 용역에서 교통 수요가 높게 나타나면 굴절버스 도입을 검토할 계획이라고 한다. 강서구가 이런 신규 교통수단 도입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이유는 4월부터 10월까지 에코델타시티에 1만 세대가 입주하는 등 서부산권의 급증하는 교통 수요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국내에서는 세종시가 2020년 1월부터 굴절버스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굴절버스는 도로를 점유하는 면적이 넓고, 좁은 길에서의 운용 능력이 떨어지는 게 단점이다. 강서구는 평지와 넓은 도로를 확보하고 있어 굴절버스 도입을 검토할 만하다. 그러나 대량 승객 수송이 주목적이기에 승객 수 확보, 정류장 확보, 운영 효율성 등이 관건이 될 수 있다. 승객 수가 적으면 운영에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행 노선을 굳이 강서구 내로 국한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강서구~서면, 강서구~김해 등과 같은 교통량이 많은 구간을 연결하면 최소한의 승객을 확보할 수 있다. 굴절버스는 차량의 길이가 길기 때문에 이를 위한 정류장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 향후 강서구의 대중교통 체계가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궁금하다.
2025-04-0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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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물썰물] 조훈현과 최고위전
조훈현 기사는 세계 최연소인 9세에 프로에 입단했다. 일본 바둑 유학 때도 기대주로 주목받았고, 일본 프로로 재입단해 현지에서 맹활약했다. 일시 귀국했던 1974년 운명적 장면을 만난다. 9년의 해외 생활로 길이 낯설어 한국기원에 갈 때마다 택시를 탔는데, 모친이 옆집에서 택시비를 빌리는 모습을 본 것. 시장 야채 행상으로 생계를 잇는 어려운 가정 형편을 깨달은 충격은 컸다. 유학도 독지가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돈 걱정을 한 적이 없던 조훈현은 이날 결심한다. “바둑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일본 복귀 고민을 접고 생계형 바둑 기사로 거듭난 계기다.
1974년 〈부산일보〉 주최 최고위전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1959년 시작된 최고위전은 국수전 다음으로 오래된 타이틀이었다. 22세 앳된 조훈현은 결승에서 3판 연속 이겨 생애 첫 타이틀을 거머쥔다. 상금 30만 원은 미대에 입학한 여동생 학비에 보탰다. 그는 자서전 〈고수의 생각법〉에서 “그 이후로 생계를 위해 바둑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고 술회했다. 당시 〈부산일보〉 인터뷰에서 “국내 8대 타이틀 죄 따겠다”던 포효는 곧 이뤄졌다. 타고난 재기에 호승심까지 덧붙여진 조훈현의 질주는 아무도 막지 못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승부’는 그즈음 시작된 조훈현과 제자 이창호의 숙명적 대결을 그린다. 1990년 최고위전이 변곡점이었다. 결승 5번기에서 양측 모두 5시간씩을 채우는 처절한 혈투 끝에 제자가 반집을 이기며 타이틀을 빼앗는다. 스승이 37세, 제자는 15세 때 일이다. 스승의 황금기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제자가 커 버린 것이다.
당시 〈부산일보〉 1면 기사 제목은 ‘한국 바둑계 최대 파란’이었다. 이어 스승이 최고위 타이틀로 ‘바둑 황제’에 등극했는데, 16년 만에 제자에 타이틀을 빼앗긴 것은 “새로운 황제 탄생 예고”라고 전망했다. 이는 곧 현실이 됐다. 스승은 제자의 무차별 공습에 속속 타이틀을 빼앗겨 ‘무관의 제왕’까지 내몰렸다. 절치부심한 스승은 재기했고 제자와 경쟁하면서 해외 기전까지 휩쓸며 1990년대 한국 바둑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조훈현 기사는 은퇴했고, 최고위전은 중단되면서 명승부는 옛 이야기가 됐다. 하지만 바둑판에서 상대를 꺾어야만 했던 사제지간의 숙명적인 고뇌의 순간은 그 어떤 영화보다 더 극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또 답이 없지만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이 바둑이라며, 매 승부에 최선을 다하던 모습은 여전히 큰 울림을 남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2025-03-31 [1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