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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고미술과 명화가 거래되는 마스트리흐트 테파프
프리즈(Frieze)가 2022년 국내에 상륙하면서 아트페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과 동시에 한국 시장도 주목받고 있다. 이뿐 아니라 아트부산, 부산국제화랑 아트페어(BAMA) 같은 지역 아트페어도 십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트바젤, 프리즈와 함께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테파프(TEFAF)가 열리는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마지막 날 행사장을 찾았다. 생경한 지명인 마스트리흐트시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국토의 남쪽 끝자락 국경이 반도처럼 돌출되어 있는 곳에 있어 독일, 벨기에와 국경이 맞닿아 있다. 좌우로 브뤼셀, 뒤셀도르프, 쾰른 등의 주요 도시와의 거리가 불과 100km. 한 시간이면 닿는 교통의 요지이다.
유럽미술박람회(The European Fine Art Fair)의 약자인 테파프(TEFAF)는 마스트리흐트에서 1988년 처음 문을 열었다. 아트바젤, 프리즈와 가장 큰 차별점은 고미술부터 현대 미술까지 망라한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도 마스터피스, 즉 거장들의 명화를 거래하는 시장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를테면 올해 가장 화제가 되었던 구스타프 클림트,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같은 작품이 거래되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구매자가 개인 컬렉터 뿐 아니라 주요 미술관, 박물관인 경우도 있다. 이밖에 고서, 골동품, 보석, 가구 등도 다루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참가 화랑들이 작품 설치를 마친 직후 바로 공개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 동안 엄격한 심사를 거친 후 작품 이력을 검증받고 또 작품성까지 인정된 후에야 비로소 전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팝업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세련된 전시 부스도 테파프만의 특징이다. 혹자는 아트바젤, 프리즈가 마치 시장과 같은 분위기라면, 테파프는 명품 백화점이라고 비유하는데, 그만큼 고급스런 분위기는 페어와 출품작을 돋보이게 했다.
마지막 날 방문했기에 작품 상당수가 판매 완료돼 있었다. 마침 안내 데스크에서 귀띰해준 곳도 각각 5000만, 4000만 달러에 낙찰된 피카소와 헨리 무어의 작품이 있는 한 갤러리였다. 이들 작품은 미술관에서나 만날 법한 작품이어서 가격만큼이나 흥미로웠다. 올해의 경우 국내 갤러리는 가나아트와 페이지 갤러리가 테파프에 참가했다. 디자이너 정구호씨가 직접 부스 디자인을 하고 출품까지 했다는 페이지 갤러리의 경우 12세기 고려시대 연회에서 사용된 청자 사자형 향로, 한국의 전통 목기인 반닫이를 플렉시 글라스로 재해석한 투명 반닫이 등을 선보였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해외에 알리는 장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테파프는 해마다 3월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5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다.
2025-03-2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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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프리츠커상 건축가가 만든 '룩셈부르크 필하모니'
룩셈부르크는 프랑스, 벨기에, 독일과 맞닿아 있으며 네덜란드와도 불과 50km에 떨어져 있지 않다. 3국이 면한 교통 요지여서 인구 60만 명에 불과한 이 나라의 국가명이자 수도인 룩셈부르크를 방문하거나 통과하는 일이 종종 있다. 시내 중심부를 지나던 중 백색의 독특한 외형을 한 건물이 인상적이어서 찾아봤더니, 프리츠커상 수상자인 크리스티앙 드 포르장파르크가 만든 ‘룩셈부르크 필하모니’였다.
룩셈부르크는 1995년 유럽의 문화 수도로 선정되는데, 그해 룩셈부르크 당국은 콘퍼런스와 콘서트홀이 동시에 가능한 건축물을 건설하기로 한다. 이어 모로코 출신의 건축가 크리스티앙 드 포르장파르크 프로젝트가 공모에 당선된다. 공사는 2002년부터 시작해, 개관은 2005년 6월에 했다. 콘서트홀의 공식적인 명칭은 조제핀 샤를로테 대공비 콘서트홀인데 현 앙리 대공의 어머니 이름이다. 각국 사절단과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식을 열었다. 당시 룩셈부르크는 유럽연합 이사회 의장국으로, 룩셈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룩셈부르크 공국의 의뢰를 받아 작곡한 펜데레츠키 교향곡 8번을 세계 초연했다.
크리스티앙 드 포르장파르크의 초기 아이디어는 자연스러운 필터를 통해 음악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흰색 강철로 만들어진 823개 정면 기둥이 3열로 배열된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내부 기둥열은 공연장을 담고 있으며, 두 번째 기둥 열은 외벽 창문을 지지하고, 세 번째 기둥열은 하중을 담당한다.
슈박스 형태로 디자인된 그랜드 오디토리엄은 2만㎥ 규모와 최대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직사각형이라는 평면의 제약을 극복하고 음향을 최적화하기 위해 8개의 상자 타워가 공연장 내부 양쪽 벽면에 불규칙하게 배치돼 균일한 사운드 분배를 한다. 잔향 시간은 콘서트홀로는 최적인 1.5~2초를 유지하고 있다. 무대 커튼의 유연성과 조절 가능한 음향 반사판을 설치한 덕분에 음향은 다양한 음악적 요구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룩셈부르크 필하모니도 그렇지만, 대부분 백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도시의 공연장과 다르게 2000년대 이후 완공한 콘서트홀은 설계 공모를 통해 대부분 스타 건축가의 작업을 통해 태어났다. 건축가 장 누벨이 디자인한 루체른의 KKL과 필하모니아 드 파리, 프랑크 게리가 디자인한 LA 디즈니 콘서트홀, 그리고 헤어초크 드 뫼롱이 디자인한 함부르크 필하모니가 대표적이다. 건축가의 개성만큼이나 눈에 띄는 형태를 가지고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적어도 21세기에 지어지는 문화 공간은 음향학적 기능과 요구는 말할 것도 없고, 디자인까지도 혁신적이어야 한다는 평소 생각에 일치하는 대목이다.
2025-03-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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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위기가 기회로, 건축과 디자인 성지가 된 비트라 캠퍼스
바일 암 라인(Weil am Rhein)은 라인강 동쪽 기슭에 있으며 독일에서 가장 남서쪽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스위스, 프랑스, 독일 3국 국경에 맞닿아 있으며, 스위스 바젤이랑 붙어 있다. 이곳에 위치한 비트라 하우스는 유럽에서 가장 잘 알려진 가구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이다. 가구회사 비트라(Vitra)는 1950년 스위스인 빌리 펠바움에 의해 시작됐다. 세계적인 디자이너와 협업을 통해 기능적인 디자인 가구를 제작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1981년 바일 암 라인에 있는 비트라 공장이 화재로 전소하면서 생산시설 대부분이 파괴됐다. 설립자인 펠바움은 위기를 기회 삼아 회사를 재건한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프랑크 게리, 자하 하디드, 안도 다다오 등의 건축가와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아 생산시설뿐 아니라 디자인 가구 쇼케이스 역할을 할 새로운 공장 단지를 계획하게 된다.
비트라 캠퍼스(Vitra Campus)로 알려진 공장 단지는 1980년대 중반부터 하나둘씩 완공되는 데 1989년 게리의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과 제조 공장, 1993년 하디드의 비트라 소방서와 안도의 콘퍼런스 파빌리온 그리고 알바로 시자의 두 번째 공장과 주차장, 2010년 헤어초크&드 뮈롱의 비트라 하우스, 2011년 사나(SANNA)에 의해 세 번째 공장이 완공된다. 공교롭게도 언급된 건축가 모두 프리츠커 수상자이다.
비트라 캠퍼스는 단순히 가구 공장이 아니라 디자인과 건축 애호가들에게는 중요한 베뉴가 되었다.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은 캠퍼스 내 최초의 공공건물이자 게리가 유럽에서 지은 최초의 건물이며, 안도의 파빌리온 역시 그가 일본 밖에서 처음으로 만든 작품이다. 심지어 하디드가 디자인 한 비트라 소방서는 그의 첫 작품이다. 어쩌면 이들을 세상에 알리는 견인차 구실은 비트라가 한 셈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디자이너 협업을 통해서 키워온 안목이 건축에서도 발현했다. 비트라 캠퍼스 내 시설은 각기 목적과 기능을 넘어 상징적인 역할을 함과 동시에 혁신과 창의성을 발휘하는 모티브가 되었고, 비트라 가구 역시 높은 품질과 시대를 뛰어넘는 창의성으로 유럽을 넘어 세계적인 가구 메이커로 자리매김했다.
제조와 물류 공장을 제외한 비트라 캠퍼스 내 시설은 특정 시간대 예약을 통해 건축 투어가 가능하다. 비트라 하우스는 언제든지 무료 방문이 가능하며, 디자인 뮤지엄은 특별전 형태로 시즌마다 열리고 있다. 2022년부터는 세계적인 정원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가 비트라 캠퍼스 내 사계절 생태 정원을 만들면서 화제가 됐다. 디자인을 넘어 건축 그리고 조경까지 이만큼 잘 만들어진 종합 선물 세트를 아직 만나본 적이 없다.
2025-02-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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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남반구 최대 컬렉션 갖춘 상파울루 미술관
포르투갈어로 ‘성(聖) 바울로’라는 의미인 브라질 상파울루의 인구는 2024년 기준 2280만 명으로, 남아메리카 도시 중 인구가 가장 많다. 미국 뉴욕과 멕시코시티를 능가하기에 아메리카 대륙 통틀어서 가장 큰 도시이다. 상파울루 비엔날레(1951년~ )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랜 역사가 있으며, 휘트니 비엔날레와 함께 세계 3대 비엔날레로 알려져 있다. 지구 반대편 브라질 상파울루의 이야기다.
이 도시의 ‘상파울루 미술관’(MASP)은 1968년 이탈리아 태생의 브라질 건축가 리나 보 바르디에 의해 디자인되고, 완성했다. 그는 현수(Suspension) 구조의 철근 콘크리트와 유리로 만들어진 건물을 고안했다. 미술관 메인 건물은 지상에서 8m 높이에 떠 있으며, 두 개의 거대한 콘크리트 보로 연결된 4개의 기둥으로 지지된다. 기둥 사이 거리는 74m로 건축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경간이었다. 이는 현수교인 광안대교를 떠올리면 되는데, 두 개의 주탑 사이에 길이 74m, 층고 7m의 2층 건물이 매달려 있는 셈이다. 이 경우 내력벽과 기둥이 존재하지 않는 대공간을 연출할 수 있다. 덕분에 상파울루 미술관의 메인 전시 공간은 단 하나의 전시실로 되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미술관 평면은 크고 작은 방의 연속으로 이루어졌으며 창이 없는 벽면이나 복도에 작품이 전시된다. 그런데 구획이 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방으로 된 상파울루 미술관, 게다가 양면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다. 메인 전시실은 작품을 걸 수 있는 벽면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 상파울루 미술관은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기상한 전시 방법을 생각해 낸다. 건축가는 정사각형의 콘크리트 블록 받침대 위에 강화 크리스털 패널을 놓고 그림의 전시 지지대로 사용하는 혁신을 이룬다. 이는 마치 화가의 이젤에 놓인 캔버스를 연상케 한다. 전시실 내부의 작품 수만큼 콘크리트로 지지된 크리스털 패널이 놓여 있으며, 작품을 설명하는 안내는 그림 뒷면에 배치돼 있다. 지금껏 방문했던 그 어떤 미술관보다 인상적인 전시 방법이다.
상파울루 미술관의 컬렉션 또한 라틴 아메리카를 넘어 남반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서양 미술 컬렉션으로 여겨진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회화 그리고 스페인, 플랑드르, 네덜란드, 영국, 독일 거장들의 걸작 상당수를 가지고 있으며, 근현대 보유 작품 또한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편이다. 반 고흐 회화도 5점을 보유 중이다. 쉽게 방문하기 힘든 곳이라 제법 두꺼운 도록을 한 권 구입했는데, 책 제목이 〈콘크리트와 크리스털〉이다. 전시 방법을 위해 고안된 장치도, 콘크리트와 유리 구조물로 된 상파울루 미술관 건물도 책 제목과 일치한다.
2025-02-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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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배터시 발전소의 재생, 런던서 가장 힙한 공간으로
런던 템스강변의 뱅크사이드 발전소가 영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으로 바뀐 이야기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상류 쪽으로 불과 5㎞ 떨어진 배터시 발전소(Battersea Power Station)는 꽤 오랫동안 방치돼 있었다. 배터시 화력발전소는 두 개의 발전소가 따로 건설돼 1955년 하나의 건물로 합쳐졌다. 아르데코 양식으로 지은 발전소는 한때 런던 전력의 20%를 책임졌지만, 뱅크사이드와 같이 환경문제로 1975년과 1983년 각기 문을 닫게 된다.
재개발 계획에 따라 부지만 사고 팔리기를 여러 차례. 한때는 프리미어 리그의 명문 구단 첼시의 새 경기장 부지로 언급되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2012년 말레이시아 국부펀드가 최종 주인이 되는데, 발전소 안에 상점과 카페, 레스토랑, 예술 및 레저시설, 사무 공간 그리고 주변으로는 주거용 숙박 시설이 들어서게 되는 계획을 세운다. 당시 매각 비용은 16억 파운드였지만, 2급 보존 건축물로 등재된 옛 발전소를 템스강에 어울리는 명소로 탈바꿈하는 데는 최종적으로 90억 파운드가 들었다. 굴뚝을 복원하는 데 680t의 콘크리트를 쓰고, 기존 벽돌 공장 두 개를 찾아내 벽돌 175만 개를 대체한다. 옥상정원만 빼면 발전소를 운영할 때와 똑같이 복원했다. 2022년 10월, 39년 만의 발전소 부활이다.
얼마 전 막을 내린 내셔널 갤러리 200주년 기념 반 고흐 전을 보기 위해 런던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배터시 발전소를 방문했다. 트래펄가광장 근처의 채링크로스역에서 다섯 정거장이면 닿을 곳이니 런던 중심가에서 불과 15분 거리이다. 연말연시라 배터시 발전소 내부는 방문객으로 넘쳐났다. 뱅크사이드 발전소는 터빈 홀을 대형 전시장으로 바꾸었지만, 배터시는 상점가와 식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브랜드와 개성 있는 로컬 브랜드가 조화를 이루었고, F&B도 각양각색이어서 레저와 문화, 쇼핑과 식음료까지 한 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독특한 분위기가 감각적인 체험을 하게 만들었다. 회색 연기를 내뿜던 굴뚝 중 하나는 런던 스카이라인과 템스강의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유리 엘리베이터 전망대로 재탄생했다.
또한 배터시 발전소는 단순히 재개발에 그친 것이 아니라 환경과 상생하는 재생의 의미로 녹지대와 함께 조성됐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프랑크 게리와 노먼 포스터가 배터시 주변 재개발 주거 공간 디자인을 맡았고, 발전소 옆엔 배터시 공원과 어린이 동물원이 들어섰다. 배터시 발전소는 템스 강변을 넘어 런던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원스톱 라이프 스타일 동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25-01-3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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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지역 기업 후원으로 만들어진 롤렉스 러닝 센터
새로운 도시를 방문하면 루틴처럼 하는 일이 있는데, 먼저 해당 도시의 공연장과 미술관을 찾아보고, 두 번째는 프리츠커 수상자들의 건축물이 있나 여부를 확인하는 일이다. 때로는 두 가지가 겹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용도의 건물을 만나기도 한다.
마침 스위스 제네바에서 일정이 있었고, 앞서 한두 시간 여유가 있어 이웃 도시 로잔을 방문했다. 덕분에 늘 궁금했던 ‘롤렉스 러닝 센터’를 찾아보기로 했다. 루브르 랭스와 뉴욕 신 현대미술관을 설계한 ‘사나(SANAA)’가 디자인했다.
롤렉스 러닝 센터라는 명칭만으로는, 제네바에 본사를 둔 롤렉스의 R&D 센터가 아닐까 생각해 출입에 대한 기대는 크게 가지지 않았다. 알고 보니 러닝센터는 EPFL 즉, 로잔 연방 공과대학교 내 연구 도서관의 명칭이었다. 대학 내 연구 도서관이지만, 특별한 통제는 없었다.
러닝 센터는 50만 권의 인쇄본을 소장, 유럽에서 가장 큰 과학 컬렉션을 보유한 연구 도서관이라고 한다. 내부 분위기는 말 그대로 러닝 센터, 대규모 학습 공간이었다. 라이브러리가 아닌 러닝 센터라 명명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형 독서실 같은 분위기였지만, 자유분방하게 보였던 이유는 공간 덕분이었다. 규격화된 공간이 아니라 ‘보이드(void) 건축’ 미학이 적용됐다.
롤렉스 러닝 센터는 넓고 큰 단층의 판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사나의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콘크리트 슬래브와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군데군데 매스가 들어 올려져 아치를 만들고 있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형상인데, 들어 올린 판 하부는 자연스럽게 통로가 되어 사람들이 지나다녔고, 매스 중간에는 원형의 큰 중정이 있어 다채로움을 더했다. 완만한 아치형 콘크리트 슬래브에는 기둥이 일절 없으며, 슬라브 자체가 바닥에 면하면서 하중을 받고 있다. 이는 내부에 들어서도 계단 없이 자연스럽게 구릉을 오르는 느낌으로 공간이 연속된다. 경사면에는 다채로운 색깔의 빈백이 배치돼, 연구 센터라기보다는 라운지 같은 느낌도 든다. 대부분의 공간은 별도 칸막이 없이 구획돼 있으며, 일부 연구실만 구획됐다. 그룹 활동이나 기타 회의, 세미나를 할 수 있는 버블이라 불리는 독립 공간도 이색적이었다.
사나는 2004년 국제 설계경기를 통해 최종 선정됐는데, 당시 자하 하디드, 렘 콜하스, 장 누벨, 헤어초크 드 뫼롱 등이 경쟁했다. 2010년 2월 개장하고, 그해에 사나가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롤렉스 러닝 센터의 건축비는 총 1억 1000만 스위스 프랑(한화 1700억)이 들었으며 롤렉스, 로지텍, 네슬레 등 제네바 또는 인근 레만 호수에 본사를 둔 민간 기업들이 상당 부분 후원했다.
2025-01-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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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매년 '빈필' 신년 음악회 열리는 무지크페라인
빈 필하모닉(이하 빈필)만큼 바쁜 오케스트라가 없다. 전 세계를 누비며 투어 연주만 연간 수십 회를 하고 있으며, 해마다 여름이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오페라 연주를 비롯해 호스트 오케스트라 역할을 하고 있다. 연주가 많은 만큼 다양한 도시에서 빈필을 만날 수 있는데, 정작 빈필이 상주하는 빈 ‘무지크페라인’(Musikverein)에서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공연장 이름과 같은 무지크페라인(악우회)에 먼저 티켓이 돌아가서 일부 잔여 티켓만 오픈되기 때문이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연주회가 빈필 신년 음악회이다. 전 세계 모든 클래식 애호가에겐 꿈의 연주회인데, 이 티켓이야말로 가장 구하기 어려운 데다 값도 만만찮다.
빈필 신년 음악회는 해마다 신년 1월 1일 오전 11시 15분 무지크페라인에서 빈 출신의 작곡가 요한, 요제프 슈트라우스 음악을 중심으로 왈츠와 폴카, 행진곡, 서곡 등의 레퍼토리가 연주된다. 이탈리아 산 레모와 빈 시립정원에서 가져온 수만 송이 꽃들로 장식돼 특별함을 더한다. 실제 공연은 12월 30일 프리뷰 콘서트, 12월 31일 송년 음악회까지 세 차례 동일한 프로그램이 연주된다. 1939년 시작해서 2025년까지 80회가 넘는 동안 빈필 신년 음악회 지휘를 맡은 이는 18명이며 현재 활동하는 지휘자는 리카르도 무티, 주빈 메타, 다니엘 바렌보임, 프란츠 벨저-뫼스트, 구스타보 두다멜, 크리스티안 틸레만, 안드리스 넬슨스 7명에 불과하다.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이 무대에 오르며, 이는 지휘자 자신에게도 영광이다.
2025년 올해는 이탈리아 지휘자 무티가 맡았다. 1993년 첫 지휘를 시작으로 이미 6차례나 연주한 세계 최고의 지휘자 중 한 사람이다. 베테랑답게 두 시간 가까이 무대를 압도했다. 전통적인 앙코르곡인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할 때는 부드러웠으며, ‘라데츠키 행진곡’에서는 손을 내려놓고 표정만으로 오케스트라와 관객을 지휘하는 모습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공연 직후 2026년 빈필 신년 음악회의 지휘자가 발표되는데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야닉 네제 세겐으로 정해졌다.
빈필 오케스트라가 상주하고, 신년 음악회가 열리는 무지크페라인은 유럽을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음향이 좋은 콘서트홀(1744석)로 손꼽힌다. 특히 신년 음악회가 열리는 ‘황금홀’은 이름답게 화려하기 그지없다. 눈과 귀를 동시에 사로잡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2025년에는 부산도 콘서트홀 보유 도시가 된다. 부산에 앞서 서울, 성남, 일산, 대구, 통영, 인천, 부천에서 먼저 콘서트홀이 생긴 점을 감안하면 뒤늦은 감이 있지만, 가장 최근에 지어진 만큼 가장 성능 좋은 콘서트홀이 되리라는 기대를 해 본다.
2025-01-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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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기차가 주인공인 뮤지컬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
뮤지컬 ‘캣츠’, ‘오페라의 유령’을 작곡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약 20편의 뮤지컬을 작곡했다. 초창기 작품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비타’는 뮤지컬 무대를 넘어 영화로도 제작돼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하지만 흥행작임에도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작품 하나를 꼽는다면 1984년 만들어진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를 들 수 있다.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는 트레버 넌의 연출로 1984년 3월 런던 아폴로 빅토리아 극장에서 초연됐다. 이 작품은 2002년 1월까지 7406회 공연 기록으로, 당시 영국 웨스트엔드 뮤지컬 공연 역사상 5위에 랭크 되는 장기 공연 기록을 세운, 80년대를 대표하는 영국 뮤지컬 대작 중 하나이다. 특히 독일 보훔 전용 극장에서는 1988년 초연 이후 현재까지 35년 넘게 장기 공연을 이어 오고 있다.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의 가장 큰 특징은 기차가 주인공이란 점이다. 유럽인들에게 기차는 어릴 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재여서 전 연령층에 인기가 있다. 기차 경주라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고 있어서 출연진 전원이 기차 분장을 한 채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연기와 안무를 펼치게 되는데, 이 작품은 무대와 객석 상당 부분이 레이스를 위한 트랙으로 메워져 있다. 이 점이 롱런할 수 있는 비결인 동시에 쉽사리 무대에서 공연을 만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무대와 객석 상당수를 레이스로 만들어야 하기에 전용 극장이 불가피하고, 기존 극장을 개조할 경우 레이스를 위한 트랙이 객석 수 상당 부분을 잠식시켜서 손익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올해 런던 최고의 화제작은 웸블리 파크 극장에서 지난 6월 개막한 뮤지컬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이다. 2012년 영국 투어 당시 단 10회 런던에서 공연한 적이 있지만, 오픈 런 장기 공연은 2002년 막을 내린 이후 22년 만이다.
필자도 독일 보훔에서 몇 차례 관람한 적 있지만, 본고장인 런던 무대에서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명불허전 웨버 음악이 더해져 흥미진진했으며, 다이내믹한 기차 레이스를 뮤지컬 무대에서 즐길 수 있다는 점은 정말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출연진은 원작의 독일 고속철 이체(ICE), 프랑스의 제베(TGV), 일본 신칸센 그리고 주인공인 러스티(영국의 증기기관차)에서 증기기관차는 그대로 둔 채 디젤기관차와 미래형 전기기관차와 수소 연료 기관차 등으로 캐릭터가 바뀌었다. 환경과 미래 에너지를 반영한 트렌드가 작품에도 반영된 것이다. 관객 중 상당수가 조손이 함께 뮤지컬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세대를 넘어서 한 작품을 사랑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024-12-2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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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최고의 대학 미술관, 하버드 미술관
미국 동부의 주요 도시를 목적지로 예술 여행을 할 경우는 보스턴을 시작으로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까지 4개 도시를 엮어서 가는 경우가 많다. 4개 도시 모두 미국을 넘어 세계 정상급 관현악단을 가지고 있으며, 최고의 국공립 미술관과 사립미술관이 있고, 보유한 컬렉션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여기에 일정을 조금 더 보태면 보스턴 인근 대학 도시 케임브리지에 소재한 하버드 미술관이다.
단순히 대학 미술관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동부 아이비리그 중에서도 최고 명문인 하버드 대학이 소장하는 컬렉션은 상상 이상이다. 하버드 미술관은 1895년 설립된 포그 박물관을 비롯해 1903년 설립된 부시-라이징거 박물관, 1985년 설립된 아서 M. 새클러 박물관 등 세 곳으로 구성돼 있다. 컬렉션은 고대부터 중세에 이어 현재까지 서양 회화, 조각, 장식예술, 사진, 판화 드로잉 등 약 25만 점에 이른다. 특히 이탈리아 르네상스, 영국 라파엘 전파, 19세기 프랑스 미술이 돋보인다. 모리스 베르트하임 컬렉션은 폴 세잔, 에드가 드가, 에두아르 마네,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 등의 걸작으로 구성돼 언제나 붐빈다.
2008년 하버드 미술관은 대규모 리노베이션 및 확장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 파리 퐁피두센터를 디자인 한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맡았다. 포그 박물관, 부시-라이징거 박물관, 아서 M. 새클러 박물관 3개를 통합해 갤러리 공간을 40% 넓히고, 유리로 된 피라미드 지붕을 추가한 아트리움은 자연채광이 내부로 들어와 중정 이상의 효과를 낸다. 전체 5층으로 되어 있는 미술관 지하부터 3층까지는 컬렉션 갤러리로 전시하고, 4층과 5층은 미술 연구센터와 보존센터로 학술 연구를 위한 공간으로 사용했다.
더욱 인상적인 건 하버드 미술관의 웹사이트(harvardartmuseums.org/collections)이다. 24만 4960작품 전부를 데이터베이스 했다. 작품 유형, 기간, 장소, 시기 등으로 필터링된 검색엔진을 사용해 손쉽게 찾을 수 있고, 이미지만 제공하는 도록보다 훨씬 입체감 있는 시각 자료와 출판물을 만날 수 있다. 모든 콘텐츠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오픈했다.
하버드 미술관 소장품 대부분은 각계각층의 동문과 주요 컬렉터가 기부한 작품이다. 철저한 자본주의로 점철된 미국 사회이지만, 기부 문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공익 역활을 한다. 하버드 미술관은 최근 방문한 어떤 미술관보다 인상적이었다.
덤으로 미술관 옆 건물 카펜터 시각예술센터는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가 미국 내 남긴 유일한 건물이어서 건축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하는 학도라면 필수 방문 코스이기도 하다.
2024-12-1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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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이너리, 예술이 되다
‘시그니처 문화공간’이라는 이름으로 연재하면서 그 범주와 경계에 대해서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번 글에서는 최근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방문한 한 와인 양조장(와이너리) ‘보데가(와이너리라는 뜻) 마르케스 데 리스칼’(Bodega Marques de Riscal)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 한다.
스페인은 이탈리아, 프랑스에 이은 세계 3위 와인 생산국이다. 포도 재배 면적으로만 보면 세계 최대이기도 하다. 프랑스가 스페인보다 면적이 넓지만, 포도 재배 북방한계선 위로 일부 국토가 면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스페인은 서쪽으로 갈리시아부터 남쪽으로 안달루시아 그리고 동쪽으로 카탈루냐 지방까지 이탈리아처럼 전 국토에서 와인을 생산한다. 하지만 스페인의 핵심 와인 산지는 단연 리오하(Rioja)이다. 통상 리오하 와인은 인근의 바스크, 나바라주에서 생산되는 와인까지 통칭한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이너리를 처음 방문한 건 바스크 지방에 있는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방문했을 때였다. 건축가 프랑크 게리가 디자인한 이 미술관은 1997년 개관과 동시에 이 지역을 넘어 세계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했는데, 와이너리가 위치한 엘치에고는 빌바오에서 남쪽으로 불과 120㎞ 떨어진 곳에 있다. 마르케스 데 리스칼 양조장이 세간의 관심을 증폭하게 된 것 역시 빌바오에서 성공을 거둔 프랑크 게리가 2006년 와이너리 내 특별한 건물을 디자인하면서 시작된다.
1858년 리오하 지역에 설립한 최초의 근대적 양조장이라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의 자부심은 2000년 들어서 ‘와인 도시’(The City of Wine)라는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와인 도시의 핵심 시설은 와이너리 외에 스파 시설을 갖춘 호텔과 리오하 지역 최고 셰프인 프란시스 파니에고가 이끄는 고급 레스토랑, 콘퍼런스 센터와 쇼핑센터가 있는 와이너리 방문자 센터로 이어진다.
1860년 지어진 오리지널 양조장에서 시작되는 와이너리 투어는 과거 전통부터 현대의 혁신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만날 수 있다. 게리의 건물에 이르러 정점에 다다른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보라와 분홍빛의 티타늄 패널은 묘하게 주변 환경과 어울렸다. 특별히 늦가을 낮은 키의 와인 밭이 붉고 노랗게 물든 가운데 우뚝 선 건물은 유난히 더 인상적이었다. 해마다 영국의 한 매체에서는 ‘월드 베스트 빈야드’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최고의 와이너리 랭킹을 매기는데, 마르케스 데 리스칼은 최근 몇 년간 최정상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웃에 위치한 ‘이시오스 와이너리’ 역시 상위에 올랐는데,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디자인했다. 이제 와이너리도 단순히 메이커로서 제조 공정을 담아내는 공간이 아니라 방문자에게 경험과 문화를 나누는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2024-11-2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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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건축과 미술, 공연까지… '칼루스테 굴벤키안 재단'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하자마자 이 도시의 주요 미술관과 공연 정보를 찾아보았다. 공교롭게도 꽤 흥미로운 전시 컬렉션과 오케스트라 연주가 같은 장소에서 열리고 있었다. 리스본에 위치한 칼루스테 굴벤키안 미술관과 동명의 오케스트라 연주회였다. 연주회 티켓을 받고, 공연 전까지 이웃 건물에 위치한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전시는 각기 다른 건물에서 열리고 있는데 현대미술관의 경우 잘 조성된 정원과 못을 지나서야 만날 수 있었다. 기존 굴벤키안 재단 건물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현대식 건물이었고, 정원까지 더해 동양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근 일본인 건축가 구마 겐고가 증축과 리노베이션을 했다. 굴벤키안 미술관 컬렉션으로는 고대 이집트 유물 등 동서양을 넘나드는 방대한 수집품부터 렘브란트와 루벤스, 모네와 마티스의 작품까지 만날 수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방대한 개인 컬렉션 중 하나라고 한다.
굴벤키안 재단의 하이라이트는 대극장과 오케스트라이다. 객석에서 바라본 무대 뒤로 정원의 우거진 수목을 볼 수 있게 대형 유리창으로 만들어져 있다. 아름다운 정원을 배경으로 무대가 있는 셈이다. 방문 당일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스타인이 부조니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협주곡으로는 드물게 합창단이 함께 공연했다.
축적된 큰 부를 가지고 생전 혹은 사후에, 예술과 교육, 사회 환원을 목적으로, 때로는 상속의 이유로 수많은 재단이 만들어진다. 대부분은 미술관에 국한된다. 우선 미술품 자체가 큰 자산이고, 시간이 거듭될수록 가치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굴벤스키 재단은 미술관과 공연장 그리고 오케스트라까지 운영한다. 오케스트라를 운영한다는 건 결코 녹록지 않다. 오케스트라 단원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고정비가 만만찮아서다.
칼루스테 굴벤키안 재단은 예술, 자선, 과학 및 교육 진흥을 위해 설립된 민간 재단으로 2017년 기준 39억 유로(한화 5조 8000억 원)의 자산을 보유 중이다. 이 재단은 포르투갈 석유 재벌인 칼루스테 굴벤키안의 유언에 따라 1956년 설립되었고, 재단 형태로 국가에 기증됐다. 아르메니아계 영국인인 굴벤키안은 생전에 이미 유럽에서 가장 큰 개인 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재 재단은 미술관을 비롯해 오케스트라, 발레, 합창단, 굴벤키안 과학 연구소, 굴벤키안 상, 굴벤키안 위원회를 포함한 수많은 기관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국적기인 대한항공이 리스본 직항편을 취항했다. 15시간 40분, 유럽 내 최장 거리이자 최장 시간 노선이다. 그동안 포르투갈 여행은 환승해서 찾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늘길이 열리면서 조금 더 가까워졌다.
2024-11-1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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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브랜드 미술관' 루브르와 퐁피두, 프랜차이즈 되다
바야흐로 미술관도 프랜차이즈 시대이다. 루브르 박물관은 2017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 개관했으며, 뉴욕에서 시작한 구겐하임 미술관은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이어서 스페인 빌바오, 그리고 아부다비에 오픈 예정이다. 퐁피두센터는 현재 파리 이외에도 스페인 말라가에 분관이 설치돼 있으며, 중국 상하이의 경우 2024년까지 웨스트번드 미술관과 계약돼 있다. 퐁피두 상하이가 개관했을 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참석했고, 여러 외신에서 ‘미술관 외교’가 시작되었다고 보도하는 등 화제가 됐다. 최근 국내에서도 한화그룹이 63빌딩에 퐁피두센터를 유치해 2025년 개관을 앞두고 있으며, 부산도 분관 유치로 시민단체와 논쟁 중이다. 모든 것들이 가능한 건 루브르, 구겐하임, 퐁피두 등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 가치이다.
이와는 반대로 프랑스 자국에서는 미술관이 가지고 있는 브랜드파워와 가치를 지역과 중앙의 문화적 간극을 메우는데 활용 중이다. 루브르의 경우 파리에서 북쪽으로 200㎞ 떨어진 노르드파드칼레 지역의 랑스(Lans)에 위성 미술관을 2012년 개관했다. 인구 3만 명에 불과한 이 도시는 황폐한 광산 지역이었지만, 루브르 랑스 미술관으로 문화적 반등의 기회를 맞았다. 구축 시점엔 지역 사회의 반발이 있었지만, 현재는 연간 100만 명 가까이 미술관을 찾고 있으며, 파리에서 루브르 랑스를 방문하는 일일 관광상품이 있을 만큼 활기를 띄고 있다.
파리에서 동쪽으로 330㎞ 떨어진 메츠(Metz)는 로렌주의 주도이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50년 가까이 독일령이 되었다가 프랑스로 환원된 곳으로 2010년 퐁피두센터 분관이 생기면서 소도시 전시라는 예상을 뒤엎고, 개관 연도에만 90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할 만큼 성과를 냈다. 미술관 개관 이후 메츠를 찾는 관광객이 40% 이상 증가했으며, 예술 도시로 부활을 넘어서 주변 지역의 건설경기까지 부흥시켰다.
밖으로는 프랜차이즈 미술관으로 미술관 외교를 통해 문화적 가치를 알림과 동시에 적지 않은 수익을 창출하고, 내부적으로는 지역 간 문화적 간극을 메우는 프랑스가 부럽기도, 얄밉기도 하다. 브랜드 미술관 사례의 경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공교롭게도 언급된 미술관은 대부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건축가들이 디자인했다. 아부다비 루브르와 구겐하임은 장 누벨과 프랑크 게리가, 루브르 랑스와 퐁피두 메츠는 사나(SANNA)와 시게루 반이 설계했다. 두 번째의 경우는 개관 이후 프리츠커상을 받았으니, 선구안이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막연히 미술관의 브랜드에만 기댄 것이 아니라 미술관 건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는 이야기이고, 이 두 가지가 시너지를 내었기 때문에 성공 사례로 회자될 수 있었다.
2024-10-3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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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건축가 페터 춤토르의 발스 온천, 체감이 본질을 말하다
스위스는 국토 면적이 4만㎢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지만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 이탈리아 5개 나라와 국토가 맞닿아 있어서 어떤 도시를 여행하더라도 익숙한 지명이 나온다. 하지만 스위스의 온천 마을 발스를 목적지로 두고 인접 도시 쿠어를 경유했지만, 나타나는 표지판은 생경했고, 막다른 산길을 30여 분 지나서야 닿았다. 발스는 이렇듯 오지 중의 오지였다.
‘발스 온천’에 호기심을 갖게 된 건 페터 춤토르가 이 상업 시설과 호텔 인테리어를 디자인했기 때문이다. 2009년 프리츠커상 수상자가 되면서 유명해졌지만, 그는 여전히 소도시 쿠어에 작은 스튜디오를 가지고, 장인처럼 자기 작품을 추구하고 있다.
발스 마을에 본격적인 호텔 단지가 조성된 것은 1960년대 독일의 부동산 개발업자에 의해서다. 하지만 이내 파산했고, 소유권은 발스 커뮤니티로 넘어갔고, 춤토르에게 온천 건축을 의뢰했다. 1996년 완공된 발스 온천은 지역사회에 활기를 가져왔으며, 이 건물은 건축가의 대표작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7132 테르메(‘온천’이라는 뜻의 독일어)&호텔’이라는 고급 리조트로 바뀐 건 2012년 발스 커뮤니티가 소유하던 시설이 투자자 스토펠에게 매각되면서다. 첫 방문 때 온천 시설이 춤토르의 철학과는 상충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인 듯하다. 지역사회를 위해 설계한 자신의 프로젝트를 스토펠이 망치고 있다는 불평이 나올 법했다. 고급 레스토랑이 있는 리조트 입구는 미국 건축가 톰 메인이 재설계했고, 일본인 건축가 쿠마 겐고와 안도 다다오도 합류해 온천과 붙어 있는 또 다른 호텔 ‘하우스 오브 아키텍츠’ 내부를 디자인했다. 건축에 관심 있는 관광객에게는 매력이 될 수 있지만, 춤토르의 의도와는 괴리가 있었다.
이런 여건 속에서도 춤토르가 디자인한 건축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자연 채광마저도 제한적으로 허용한 온천 내부는 공간보다는 물이라는 물성에 더 초점을 맞춰 사용자가 체험할 수 있었고, 경사면에 지어진 온천 건물은 지역에서 채석된 암석과 편마암으로, 최대한 자연에 순응하려는 건축가의 의도가 엿보였다. 춤토르 건축의 특징인 ‘체감’이 공간에 녹여진 대표적인 사례였다.
장소의 특성과 그곳에서의 느낌과 경험을 중시하는 그의 건축은 흡사 존재에 대한 실재론이나 추상적인 정의가 아닌 인간의 실존적 측면에서 존재를 규명한다는 하이데거의 존재론과도 유사하다. 지역성과 물질성에 민감한 건축가의 접근법은 오늘날의 건축 문화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24-10-17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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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미니애폴리스에서 만난 피아니스트 임윤찬
서양의 교향악단 시즌은 대개 9월 중하순 시작해서 이듬해 6월에 막을 내린다. 지난 9월 말 미국 중북부 미니애폴리스에 위치한 미네소타 오케스트라의 2024/2025 시즌 오프닝 콘서트가 있었다. 협연자가 대한민국의 임윤찬이었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이틀에 걸쳐서 공연된 시즌 개막 연주회는 일찌감치 매진되었다. 마침, 멕시코 여행을 마치고, 미국을 경유해서 귀국을 앞두고 있던 터라 조금 우회하지만 미니애폴리스에 위치한 오케스트라 홀을 방문할 수 있었다.
대개 오케스트라 전용 홀은 영미권에서 콘서트홀이라고 부르거나 심포니 홀 또는 필하모닉 홀이라고 부르는데 특이하게도 미니애폴리스와 디트로이트의 경우는 오케스트라 홀이라고 부른다. 실제 공연장 명칭으로 쓰는 곳은 두 곳이 유일하다. 처음 방문하는 공연장이었지만,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비교적 인근 도시인 시카고 심포니나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위상에 비하면 미네소타 오케스트라는 미국 내에서도 메이저 관현악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네소타 오케스트라가 상주하는 오케스트라 홀을 마주하자,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객석 수가 2100여 석에 달하고, 1층 좌석 수만 1200석이었다. 공연장 내부는 음향학적인 이유로 로비와 1인치 간격으로 분리돼 진동과 소음을 원천적으로 차단했으며, 무대 뒷면에서 시작해서 천장으로 흐르는 대형 큐브는 오케스트라 홀의 내부 인테리어 디자인 콘셉트였다. 2013년 리노베이션 당시 음향 개선을 위해 추가되었고, 실제로도 그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한다. 당시 약 4000만 달러(한화 약 542억 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미니애폴리스는 미시시피강을 끼고 발달한 미네소타주 최대 도시이지만, 도심 인구만 보면 40만 명이 조금 넘는 중소 도시이다. 하지만 인접 도시의 광역 인구까지 합하면 350만 명 가까이 된다니, 오케스트라 홀뿐 아니라 이 도시를 머무는 동안 방문한 주요 미술관의 규모와 대단했던 컬렉션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광역 인구까지 따지면 부산과 맞먹는 규모이다.
상반기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국내 투어에 통영과 부천이 포함된 데 반해 부산이 빠졌던 이유에 콘서트홀의 유무가 아닐지 조심스럽게 추측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부산도 곧 콘서트홀을 가지게 된다. 국내에서는 서울 두 곳과 성남, 고양, 대구, 통영, 인천, 부천에 이어 9번째이다. 평소 도시의 인구수와 문화적 퍼실리티가 비례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생각하면 한참 늦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제라도 콘서트홀 보유 도시가 된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기쁘며, 기대 또한 크다. 늦었던 만큼 개관 준비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2024-10-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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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독립기념일에 찾은 멕시코시티 소칼로 광장
2015년 개봉한 007시리즈의 24번째 영화 ‘007 스펙터’의 인트로 장면에 등장하는 망자의 날 퍼레이드는 멕시코시티의 소칼로(Zocalo) 광장이 배경이다. 영화 속 이 장면이 계기가 돼 첫 멕시코 여행을 떠났고, 몇 차례 멕시코를 방문하는 동안 부정적 선입견은 점차 매력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멕시코 여행의 안전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은 여전하다. 하지만 이는 미국인의 시선으로 만든 범죄 영화에 나타난 다소 과장되고 부정적인 시선의 단편일 뿐, 평균적인 멕시코 모습은 아니다.
사실상 멕시코는 남미와 중미를 통틀어서 가장 잘사는 나라이며, 기원전 2000년 전부터 아즈텍과 마야 문명을 꽃피웠다. 우리보다 20년 앞선 1968년 올림픽을 개최했고, 2026년엔 미국, 캐나다와 함께 월드컵 공동 개최가 확정돼 사상 최초로 세 차례 월드컵을 개최하는 국가가 된다. 또한 정치, 화학, 문학 분야에서 이미 3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보유한 나라이기도 하다.
지난 16일 멕시코시티에 머물렀는데, 이날은 공교롭게도 멕시코의 독립기념일이었다. 소칼로 광장은 말 그대로 축제의 현장이었다. 이날 마주한 멕시코 국민들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자국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이 온몸으로 느껴졌는데, 이는 백인, 인디오, 그리고 국민 대다수인 메스티소(혼혈) 가릴 것 없었다.
멕시코 독립 전쟁은 스페인의 지배에 저항해 1810년 9월 16일 일으켰고, 11년간의 치열한 전쟁 끝에 1821년 8월 24일 코르도바 조약을 체결하면서 끝났으며, 그 결과 멕시코가 독립하게 된다. 보통은 독립을 쟁취한 날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하지만, 멕시코는 이 전쟁을 시작한 날을 독립일로 기념한다. 무려 300년 동안 멕시코는 혹독한 식민지 시기를 보내며 약탈당했다. 고유 언어는 사라졌고, 종교와 문화도 모두 스페인의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독립했다는 점은 이들에게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이 기간 멕시코시티뿐 아니라 주요 도시의 랜드마크와 거리는 멕시코 국기 색깔인 초록, 하얀, 빨간색 조명과 배너로 장식되고, 도시 곳곳에선 국가 이미지와 관련된 파생 상품을 판매했다. 이 중 가장 놀라웠던 건 현직 멕시코 대통령 관련 굿즈였다. 캐릭터 인형을 비롯한 갖가지 상품이 거리의 상점을 메우는데, 퇴임 2주를 앞둔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정치인이 이렇게 국민의 사랑을 받는 모습은 부러움을 넘어 신기하기까지 했다. 헬조선이라는 자조적인 단어가 유행하고, 계층과 세대, 젠더 문제 등으로 갈등하는 대한민국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우리가 2002년 월드컵 이후 저들처럼 하나 된 적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머물렀다.
2024-09-19 [17: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