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 도시의 경계가 중심이 되다. 필하모니 드 파리
아트컨시어지 대표
이상훈, 아트컨시어지 대표. 부산일보DB
파리 북동부 라빌레트 공원(Parc de la Villette)은 오늘날 현대 문화 공간의 실험장이지만, 그 출발점은 산업 시설이었다. 19세기 후반 이곳에는 파리 최대 규모의 도축장과 가축 시장이 자리하며 도시의 식량 공급을 담당했다. 그러나 1970년대 도축장이 폐쇄되면서 약 55ha(헥타르)에 이르는 거대한 유휴 부지가 파리 도심 인근에 남게 되었다. 이 공백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당시 도시정책의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 공간을 단순한 공원이 아닌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국제 설계 공모를 진행했다. 당선자는 스위스 출신 건축가 베르나르 츄미였다. 그는 자연 풍경 중심의 전통적 공원 대신 ‘사건이 일어나는 도시적 무대’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공원 전역에 약 120미터 간격으로 배치된 붉은 철골 구조물 ‘폴리(Follies)’는 전망대, 전시장, 카페, 놀이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담으며 공원을 하나의 문화 플랫폼으로 조직했다. 그 결과 라빌레트 공원은 단순한 녹지가 아니라 공연과 전시, 영화 상영과 축제가 이어지는 도시 문화 실험장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 문화지구의 정점을 이루는 건축물이 바로 필하모니 드 파리(Philharmonie de Paris)다. 라빌레트 공원 끝자락에 자리한 이 공연장은 2015년 개관 이후 파리 음악 문화의 새로운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설계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가 장 누벨(Jean Nouvel)이 맡았다.
건물의 외관은 전통적인 콘서트홀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회색빛 알루미늄 패널이 겹겹이 덮인 외피에는 약 34만 개의 금속 조각이 모자이크처럼 배열되어 있는데, 이는 하늘을 나는 새의 군집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패턴이다. 멀리서 보면 건물은 마치 공원 위에 솟아오른 거대한 금속 지형처럼 보인다. 하지만 핵심은 내부 공간에 있다. 2,400석 규모의 메인 콘서트홀은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이 둘러싸는 빈야드형 구조로 설계되었다. 이 방식은 관객과 연주자 사이의 거리를 줄이고 음악적 몰입감을 높이는 현대 공연장 설계의 중요한 모델이다.
필하모니 드 파리는 단순한 공연장이 아니다. 이 건물 안에는 음악 교육시설과 전시 공간, 리허설룸,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 등이 함께 운영된다. 즉, 음악을 감상하는 장소를 넘어 음악을 배우고 경험하는 문화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라빌레트 공원에 이미 자리 잡고 있던 시테 드 라 뮈지크(Cité de la Musique)와 함께 이곳은 오늘날 파리의 중요한 음악 클러스터를 형성하고 있다.
파리의 문화 중심은 오랫동안 루브르와 오페라 가르니에 같은 역사적 건축물이 자리한 센강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필하모니 드 파리는 도시의 문화 지도를 북동쪽으로 확장시켰다. 과거 도축장이 있던 산업 지역이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음악 문화 공간 가운데 하나로 변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