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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노란봉투법과 마스가의 이름값
표준국어대사전에 ‘이름’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이름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붙여서 부르는 말’로 정의한다. 이름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름을 잘 짓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부르기 쉬워야 하고 의미도 잘 담아야 한다. 우리는 통상적으로 다른 것과 구별하고 구별되는 것을 넘어 기억에 남으면 잘 지은 이름으로 인식한다. ‘이름값 한다’는 말은 최고의 칭찬 중 하나다.
지난 22일 국회에서 노동자의 권리 신장 내용을 담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이 통과됐다. ‘노란봉투법’이다. 2014년 법원이 쌍용차 파업 사태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47억 원의 손해배상액 청구 판결을 내리자 한 시민이 노란색 봉투에 작은 성금을 전달하기 시작한 데서 유래했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한 법인만큼 노동자들의 권익에 영향을 끼친 한 사건이 법의 이름이 됐다. 법의 유래, 의미를 곱씹어본다면 다른 것과 구별되고 기억에도 남는다. 연일 노란봉투법을 다루는 뉴스가 쏟아지면서 노란봉투법은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이달 초 미국과 우리나라의 관세 협상의 키워드 ‘MASGA(마스가)’. ‘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미국 조선 산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의미의 한미 조선업 협력 프로젝트다. 미국 조선소에 우리 조선 기업들이 투자하고 미국 해군 경비함 등의 건조에도 우리 기업이 참여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구호인 ‘MAGA(마가·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변형이다.
관세 전쟁 속에서 정부의 조선업 투자 의지가 5글자의 알파벳에 담겼다. 다른 나라와 구별됐고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도 움직였다. 자신의 대선 캠페인 구호를 차용한 재치에 트럼프도 엄지를 치켜들었다는 후문도 들린다. 마스가는 수조 원의 관세 폭탄을 막았다.
노란봉투법과 마스가. 우리나라 노동계, 산업계 전반의 대변화를 이끌 수 있을까. 제대로 이름값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노란봉투법의 취지가 진정한 노동자 권익 신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산업계의 반발을 넘어야 한다. 한국경영자총협회와 등 경제 6단체는 노란봉투법 국회 본회의 통과 후 바로 입장문을 배포해 “사용자 범위와 노동쟁의 개념을 확대하고, 불법 쟁의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한 노란봉투법이 통과된 데 대해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노란봉투법으로 외국 투자기업들의 투자가 위축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6개월의 유예 기간 동안 노사정은 다시 머리를 맞대야 한다. 법은 도구일 뿐이다. 법이 현실에서 적용돼 우리 사회의 노동자 권익 신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치열한 논의와 고민이 필요하다.
대대적인 조선업 투자를 약속한 마스가의 투자 방식이 자칫 우리나라가 미국에 퍼주는 형태의 투자여서는 안 된다. 미국 선박을 외국에서 건조하는 시대를 마스가가 처음 연다면 K-조선과 부울경의 조선 산업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후대가 2025년 8월을 우리 사회, 산업 발전의 변곡점으로 떠올리길 바란다. 노란봉투법과 마스가를 기억하길 바란다. 이름은 잘 지었다. 이름값을 할 차례다.
2025-08-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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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케데헌' 시즌2를 기다리며
한 달 전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던 일. 처음엔 회사 선배로부터 우스갯소리처럼 듣게 됐다. “만화 영화가 일종의 K무당 이야기인데, 여자애들 3명이 아이돌 그룹인데 악귀를 잡으러 다니고, 근데 그 악귀가 남자 아이돌이고….” 다음엔 친구가 “정말 재미있다”며 호들갑스럽게 한참을 떠들곤 유튜브에서 대표곡까지 찾아 들려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심드렁했다. 마지막엔 초등학생 아들이 금요일 저녁에 꼭 같이 봐야 하는 애니메이션이 있다고 강력 주장해 함께 시청하게 됐다. 결과는 대만족!
이미 예상했겠지만,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이야기다. 줄여서 ‘케데헌’. 올여름 가장 핫한 콘텐츠다. 애니메이션 영화는 넷플릭스 역대 흥행 영화 2위 기록을 만들었고, 스토리보다 강력한 중독성을 가진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에 영화의 배경인 한국, 서울을 상징하는 각종 굿즈까지 큰 인기를 얻으면서 현재 10억 달러(약 1조 3900억 원) 이상의 가치를 평가받는다고 한다. 놀랍고, 자랑스럽다.
‘케데헌’은 특히 OST 곡들이 하나같이 귀에 꽂히는 듯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영화 속 아이돌 헌터스가 부른 대표곡 ‘골든(Golden)’은 이달 들어 글로벌 음악 차트를 강타하고 있다. 지난 11일(현지 시간) ‘골든’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1위를 기록했다. 빌보드는 이를 두고 “‘핫 100’ 차트를 정복한 K팝과 관련된 아홉 번째 노래로, 여성 보컬리스트들이 부른 첫 번째 1위 곡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앞서 이달 1일에는 ‘골든’이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 100’에서 1위에 올랐다.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2012년 같은 차트에서 정상을 차지한 이후 13년 만이었다.
‘골든’을 따라 부르는 유명 가수와 연예인들의 ‘커버 챌린지’ 동영상이 쏟아지는가 하면, 북미와 영국 등에서는 오는 23·24일 1100여 개 이상의 영화관에서 ‘싱어롱 상영회’(영화 속 음악을 관객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는 상영 방식)로 ‘케데헌’을 상영할 것이라는 소식도 전해졌다.
덕분에 넷플릭스는 속편 제작과 영화 실사화, 뮤지컬 제작까지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판매하는 기념품을 사기 위해 관람객들의 대기줄이 끊이지 않는다는 소식 때문일까. 넷플릭스는 완구 등을 포함한 상표권도 단독 출원하며 사업 확장까지 예고하고 나섰다. 물론 넷플릭스가 ‘케데헌’의 수익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꽤나 배가 아프지만, K팝을 포함한 K컬처의 세계화를 확장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는 반갑지 않을 수 없다.
K팝은 어떤 매력이 있기에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걸까. 한 대중문화 전문가는 “북미나 영국 등 서구의 대중음악은 개인적 성향이 두드러져서 폭력, 자살, 성관계, 마약 같은 어둡고 암울한 정신세계를 포함하는 반면, K팝은 BTS의 ‘Love yourself’ 처럼 보편적 사랑과 자기애, 꿈과 미래 등의 밝고 건전한 가치를 다룬다. 여기에 음악성까지 더해져 확산력과 잠재력이 크고 전 세계 많은 이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을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80주년 광복절이 있는 올해 8월이라 그런가. 다소 생뚱맞지만, K컬처가 세계로 한껏 뻗어나간 이 여름, ‘케데헌’ 시즌2 소식을 기다리며 백범 김구 선생이 쓴 〈나의 소원〉 속 문장이 떠오른다. ‘나는 우리나라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입니다.’
2025-08-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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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녹조라떼에 잠긴 세계유산, 언제까지 방치할 건가
한반도 선사 유적의 상징인 반구대 암각화가 세계유산에 등재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폭우로 잠겨 한 달 가까이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등재의 감격을 채 누리기도 전에 짙은 녹조 속에서 훼손 위기에 놓인 현실은 국가적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반구대 암각화는 지난달 12일 천전리 암각화와 함께 ‘반구천의 암각화’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등재의 기쁨도 잠시, 암각화는 쏟아진 비로 상부 일부만 물 위로 내민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지난달 19일 물에 잠긴 뒤로 3주가 넘었다. 대곡천의 물빛은 현재 ‘녹조 라떼’를 방불케 하고,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른다. 하류의 사연댐은 수문이 없는 월류형 구조여서 하루 약 30cm 배수 외에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
댐 수위는 현재 56m 정도. 지난달 침수 당시와 같아 암각화가 수면 위로 올라가는 52m까지 내려가려면 한 달 이상 걸린다고 한다.
이 답답한 현실은 이달 1일 울산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가유산청 주최 시민토론회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정부는 사연댐 수문 설치를 2030년까지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시민들은 5년 뒤 대책으로는 역부족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일부는 사연댐 해체와 반구천 일대 자연 복원 등 근본적 방안을 거듭 요구하기도 했다. 기후위기로 폭우가 반복되는데 장기 계획만으로는 유산을 지킬 수 없다는 우려에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대로 가다간 유네스코 ‘위험 유산’ 지정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위험 유산 지정은 선언적 경고에 그치지 않는다. 2007년 오만 ‘아라비아 오릭스 영양 보호구역’, 2009년 독일 ‘드레스덴 엘베 계곡’ 등이 경관 가치가 훼손됐다는 이유로 세계유산 자격을 박탈당했다. 반구대 암각화가 해마다 몇 달씩 ‘녹조라떼’에 잠긴다면 이런 불명예를 피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물론 당장 반구대 암각화를 물에서 건져낼 특단의 묘책을 찾기는 녹록지 않다. 울산 시민이라면 누구나 바가지라도 들고 가서 물 한 바가지씩 퍼내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식수원 문제도 여전히 핵심 걸림돌이다. 울산환경운동연합은 “암각화가 세계유산이 됐는데 물이 중요하냐”라면서도 “시민들이 사연댐 물을 양보한다면, 대체 식수원 마련은 정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문 설치가 오히려 유적 주변 환경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1965년 완공된 사연댐이 상류 대곡댐 건설 이후 식수 댐으로서 제 기능을 하는지 구체적인 검증도 필요하다. 암각화를 지키기 위한 단기 대책이든 장기 대책이든, 울산시가 안정적 대체 수원을 확보하도록 국가가 적극 지원하는 것이 사실상 유일한 해법이다.
내년 반구천의 암각화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부산 벡스코에서 세계유산위원회가 열린다. 그러나 자랑해야 할 유산이 녹조 속에 잠겨 훼손된다면 과연 어떤 평가를 받을까. 5년 뒤 완공될 수문만 바라보다가는 갓 등재된 세계유산의 참상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국제적 망신을 자초할 수 있다.
세계유산 등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등재 직후의 침수는 암각화 보존을 소홀히 한 우리 사회에 던지는 마지막 경고다. 반구대 암각화가 더는 ‘자맥질 유산’이라는 오명을 쓰지 않도록, 지금 당장 침수를 막을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2025-08-11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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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K조선과 지역 내 인구 이동
K조선이 인기다. K조선의 대표적인 기업인 삼성중공업, 한화오션, HD현대중공업의 주가는 연일 고공행진이다. 이들의 주요 생산 거점을 보면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은 경남 거제, HD현대중공업은 울산에 있지만 주요 관련 부품업계가 부산에 있기에 부산 지역 경기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달 부산 지역 상용근로자가 100만 명을 처음으로 넘었다. 상용근로자란 1년 이상 계약이 유지되고 4대 보험을 적용받는, 이른바 안정적인 일자리를 뜻한다. 상용근로자 100만 명 돌파의 이면에는 K조선 훈풍의 수혜가 있다는 것이 부산시의 설명이다.
K조선 훈풍의 숨은 수혜도 있다. 지난달 HD현대중공업의 특수선 설계 파트가 부산에도 사무실을 열었다. 이로써 삼성중공업, 한화오션은 물론 대기업 조선 3사의 R&D 및 설계 파트가 부산에 둥지를 틀게 됐다.
부산에 둥지를 튼 배경에는 인력 확보의 용이성이 있다. 울산, 거제에 비해 도시 인프라가 잘 갖춰진 부산에 인재들이 거주하기를 희망한다. 심지어 울산, 거제에서 일하지만 이미 거주를 부산에서 하는 직원들이 많았다는 것이 조선 3사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부산 입장에서야 대기업 R&D 관련 일자리가 생기기에 환영할 일이다. 한편으로는 경남, 울산은 일자리와 인구를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스럽기도 하다. 수도권으로 지역의 인재가 ‘블랙홀’처럼 빨려가듯 지역 내에서 부산이 또 다른 블랙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다.
하지만 부산에서 울산과 경남으로 가는 인구는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2024년 동남권 인구 이동 통계에 따르면 부산은 서울(-5795명), 경기(-3574명) 다음으로 경남(-3473명)으로 인구 순유출이 진행 중이다. 주된 사유는 직업이었다.
부산시 입장에서는 수도권 유출 외에도 경남으로의 인구 유출을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는 수도권 유출처럼 우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환영한다. 지난달 17일 상용근로자 100만 명 돌파 기념 행사에서 박형준 부산시장은 “울산, 경남으로의 인구 유출은 동남권의 경제가 원활해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뜻이고 이는 결과적으로 부산도 도움이 되는 선순환 구조”라고 밝히기도 했을 정도다. 대기업 조선 3사의 부산 R&D 센터 개소 역시 울산, 경남에서의 좋은 실적 덕이다. 사실상 이론적으로 생각하던 동남권 선순환 구조의 ‘실사판’이다.
최근 꺼진 줄 알았던 부산, 울산, 경남의 통합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는 모양새다. 지난달 경남 김해에서 박형준 부산시장, 김두겸 울산시장, 박완수 경남지사가 만나 부산-경남 행정통합은 예정된 일정에 따라 차질 없이 추진한다는 데 공감했다. 김두겸 울산시장은 부산-경남 행정통합이 성사되면 울산도 행정통합을 검토한다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부울경이 본격적으로 힘을 합치면 ‘K조선 선순환 실사판 시즌2’가 더 많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일자리로 인한 수도권으로 순유출이 여전히 많은 상황에서 경남, 울산에 좋은 일자리가 생기고 이로 인한 선순환으로 부산에 좋은 일자리가 생기길 기대한다. K조선 훈풍이 부는 이때가 ‘동남권호’가 본격 출항하기 딱 좋은 시기다.
2025-08-04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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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두 걸음째 고비맞은 '건강한' 음식, 포기는 금물
아이의 방학으로 고민거리가 더 생겼다. 도시락이다.
어떤 음식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느냐는 매일 숙제다. 바쁜 출근시간, 아이 도시락에 할애되는 시간은 많아야 20분 정도. 나 같은 이가 그 시간 안에 신선한 재료를 가지고 요리 다운 요리를 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다. 주어진 시간 안에 도시락을 싸내는 것이 최선인 상황에서 여러 종류의 가공육들은 자연스럽게 도시락의 주재료가 됐다.
매일 도시락과 사투를 벌이던 중 국립암센터와 대한암예방학회가 함께 만든 〈암 예방을 위한 식생활 지식 교과서〉 소개 기사를 준비하면서 책을 찬찬히 읽었다. 한번쯤 들어봤을 내용이지만 SNS 등에 떠도는 조각 정보의 진위를 가린다는 점에서 대단히 요긴하다.
환경 보호와 동물 복지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들이 주목하는 대체육에 대해선 암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명확한 과학적 근거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선을 긋는다. 책은 통조림이나 병조림 형태의 과일과 신선한 과일 사이에는 영양소 함량의 차이가 크지 않다고 밝힌다. 단 일부 통조림에는 통조림 캔에서 나온 비스페놀-A가 들어있을 수 있는데 이는 유방암 발생 위험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덧붙인다.
채소와 과일에 포함된 색소 성분인 파이토케미컬에 대해서도 상세한 설명을 더한다. 당근, 고구마, 호박 등 주황색 계열의 과채류는 베타카로틴을 함유하고 있어 폐암, 식도암, 위암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베타카로틴의 경우 혈중 농도가 높을 때 폐암 예방 효과를 보이지만 흡연자가 고농도로 섭취하면 폐암을 진행시킬 수 있어 베타카로틴 함유 영양제를 섭취할 때 주의가 필요하다.
책은 식습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16시간 금식 후 8시간 내 식사를 하는 16/8 방법의 간헐적 단식은 비만인 당뇨병 환자의 인슐린 수치와 혈압을 크게 감소시킬 뿐 아니라 식욕 억제 효과를 보였다. 일주일 중 5일은 규칙적인 식사를 하고 2일은 500~600kcal의 제한된 식사를 하는 5:2 방법의 간헐적 단식을 택한 사람의 65%가 체중 감량에 성공했다. 하지만 어린이와 노인, 저체중인 사람은 간헐적 단식을 하면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이 붙는다.
조리방법도 암 발생과 관련이 있다. 발암 물질인 다환방향족탄화수소는 지방이 많은 육류나 육류를 불에 직접 굽는 과정에서 크게 증가하기 때문에 지방이 적은 육류를 선택해 직화구이 방식 대신 찌거나 삶는 것이 바람직하다. 전립선암, 위암, 폐암 예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토마토의 리코펜은 기름과 함께 조리에 이용할 때 흡수율이 더욱 높아진다.
국제암연구소에서 발암 요인 1군으로 분류한 가공육에 시선이 머물렀다. 하루 50g씩 가공육을 섭취할 때 대장암 발생 위험이 18%씩 증가한다는 결과를 확인하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특히 한국인의 가공육 섭취량은 하루 평균 7.5g인데 반해 6~11세 15.5g, 12~18세 16.0g으로 아동·청소년의 섭취량이 높다는 대목에서 죄책감이 더해졌다.
애써 외면한 진실을 마주한 이후, 가공육 줄이기에 돌입했다. 가지고 있던 가공육을 버리고 굽기를 포기했다. 전날 미리 재료를 준비하고 시간이 다소 걸릴 것 같으면 아침잠을 줄였다. 야심차게 마련한 도시락에 대한 아이의 반응은 “엄마, 못 먹겠어.” 첫술에 배부를 수 있겠나. 단짠에 길들여진 입맛을 건강하게 되돌리는 것, 내가 해야 할 또다른 숙제다.
2025-07-28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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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센텀2지구는 판교가 될 수 있나
한때 글로벌 휴대전화 시장의 40%를 점유했던 노키아는 핀란드 헬싱키의 위성도시인 에스포에 본사를 뒀다. 노키아의 몰락 이후 에스포는 대기업에 의존하는 대신 유럽 전역의 스타트업이나 IT 업체를 유치하는 데 주력했다. 에스포는 북유럽 첨단산업의 요람으로 떠올랐고, 유럽 전체에서 특허 출원이 6번째로 많은 도시에 이름을 올렸다.
기자가 에스포에 방문했을 때 기업 유치 담당 공무원은 “지자체는 기업을 규제하는 주체가 아니라, 무엇이든 도와주고 키워주는 주체가 돼야 한다”며 “기업과 인재를 유치하는 일이 우리 시의 1순위 업무”라고 강조했다.
전통 산업이 쇠락하고 스타트업 수혈이 시급한 부산은 에스포의 예전 모습과 많이 닮았다. ‘부산형 판교 테크노밸리’를 꿈꾸는 센텀2지구 도시첨단산업단지(이하 센텀2지구) 조성 사업은 부산의 미래 먹거리 중에서도 핵심 과제다. 하지만 부산시가 에스포처럼 기업 유치에 명운을 걸었냐고 묻는다면 쉽게 답하기는 힘들다.
센텀2지구의 단독 시행자인 부산도시공사는 시에 “센텀2지구의 공동 시행자로 들어와 달라”고 요청했지만, 시는 이를 외면했다. 취재가 시작되자 시는 “협의를 하고 있으며 검토 중”이라고 입장을 바꿨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공동 시행자 참여 여부가 센텀2지구 조성 사업의 판도를 뒤바꾸는 결정적 요인은 아니다. 행정의 방향성과 의지의 문제다. 시가 사업의 공동 주체가 된다면 도시공사 수준에서 약속하기 어려운 각종 입주 혜택과 행정적 지원, 정책적 판단 등을 제공할 수 있다. ‘앵커 기업’을 움직이려면 지자체와의 약속이 필요하다.
앵커 기업 유치 없이는 서울의 IT 업체들이 쉽게 둥지를 옮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판교도 한국파스퇴르연구소처럼 글로벌 연구시설이 입주한 이후 기업 유치에 불이 붙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부산에서 기업하는 여건이 결코 판교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다. 서울과의 접근성은 언급할 필요도 없고 인재 수급이나 인프라 등에서 어느 것 하나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다.
해양수산부 이전처럼 정부의 강력한 드라이브로 해결될 일도 아니다. 시가 ‘특혜’에 가까운 혜택을 쏟아내야 업체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원칙과 규정, 절차만 지키다 ‘제2의 도시’ 타이틀을 반납하게 생긴 지난 수십 년의 행정을 곱씹어야 할 때다.
시는 지난달 방산업체 풍산의 부산 공장 이전이 가시화됐다는 보도자료를 대대적으로 냈다. 풍산 공장은 센텀2지구 사업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주민 반발로 한 차례 이전 논의가 무산된 바 있기에 고무적인 소식임에 틀림없다.
이는 센텀2지구 사업의 첫 발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 이전 작업이 속도를 내지 못하면 고스란히 사업 비용으로 쌓인다. 센텀2지구 사업 추진을 위한 공사채는 이자만 매년 수백억 원에 달한다. 게다가 땅값과 공사비마저 급속도로 오르고 있다.
판교를 벤치마킹한다고 해서 땅값인 조성원가마저 판교를 따라가선 안 된다. 이미 제3판교 수준으로 조성원가가 치솟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어느 것 하나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과거의 낡은 공식으로 접근하면 센텀2지구는 성공하기 어렵다. 부산시의 절실한 의지와 과감한 결단이 동시에 필요하다.
2025-07-2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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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전쟁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16일 캐나다에서 열린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에서 계획보다 일찍 귀국한 뒤, 지난달 22일 이란 핵시설을 공격하기까지 1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펼쳐진 현실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6일 ‘중동 상황’을 이유로 캐나다에서 급거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이른 귀국은 이스라엘과 이란의 휴전 협상 때문”이라는 발언이 알려지자, 트럼프 대통령은 “더 큰 일이 있다”며 발끈했다.
그 뒤는 모두가 알게 됐듯, 트럼프 대통령은 B-2 폭격기를 동원해 이란 핵시설에 벙커버스터 폭탄을 투하하는 결정을 내렸다. 앞서 이스라엘은 핵 위협을 원천 차단한다는 이유로 이란을 선제공격했다. 이에 이란이 미사일과 드론을 동원해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최강 미사일 방공망 ‘아이언돔’을 무력화하면서 ‘확전’으로 나아가는 상황이었다.
이때 트럼프 대통령은 이례적인 결정을 내린다. 이란 핵시설 타격이다.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미국이 꺼려온 타국 전쟁에 개입하는 일이었다. 특히 벙커버스터 투하는 이스라엘이 미국에 꾸준히 요청해 온 사항이었는데,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 카드를 썼다.
이 모든 과정은 마치 엔터테인먼트처럼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벙커버스터가 이란 지하 핵시설에 떨어지는 영상은 현실인지 할리우드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외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벙커버스터 투하 결정 시점부터, B-2 폭격기가 미국 어디에서 벙커버스터를 싣고 출발해 어떤 과정으로 투하됐는지 자세하게 보도했다. B-2 폭격기에 탄 조종사 2명의 준비 과정을 전직 조종사 인터뷰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사도 있었다.
우리나라 언론들도 외신 기사를 바탕으로 화려한 그래픽을 동원해 벙커버스터 투하 과정을 보도했다. 일련의 기사를 읽으면서 씁쓸함이 커졌다. 세부 정보를 자세히 알면 알수록 전쟁이 실제 사람이 죽고, 유족이 생기는 슬픈 일이 아니라 버튼 하나만 누르면 폭탄이 떨어지고 목표물이 파괴되는 엔터테인먼트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는 드론 폭탄만 해도 현실이라기보다 게임 속 한 장면 같아서 위화감을 느꼈었는데, 그 감각이 되살아났다.
최근 아주 오랜만에 찾은 극장에서 본 ‘미션 임파서블’ 마지막 시리즈가 시시하게 느껴졌던 건 이런 현실 때문이지 싶다.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영화답게 톰 크루즈 특유의 맨몸 액션이 이번에도 등장했다. 톰 크루즈가 맨손으로 경비행기에 매달려도, 실제 미사일이 떨어지는 현실만큼 실감이 나지는 않았다. 전쟁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닌데 영화를 뛰어넘는 현실에 착잡해졌다.
가자 지구에서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13일(현지 시간)에도 단지 배급소에 물을 길으러 갔을 뿐인 팔레스타인 어린이 6명이 이스라엘의 미사일 공격으로 숨졌다. 이스라엘군은 미사일 오작동이라고 해명했지만, 이미 스러진 목숨 앞에서 비겁한 변명으로 들린다. 전쟁은 엔터테인먼트가 아니다.
2025-07-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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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원화 스테이블코인, 이미 흐름은 시작됐다
요즘 국회와 금융권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다. 말만 들어서는 어렵게 느껴진다. 쉽게 말해 ‘블록체인 기술로 구현된 디지털 원화’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스테이블코인은 기존의 현금처럼 1 대 1 가치가 고정된 디지털 화폐다. 예를 들면 1코인은 1000원과 같은 가치를 가진다.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면 은행이나 카드사 중개 없이도 결제 속도는 더 빨라지고, 수수료는 줄며, 투명성도 높아진다. 특히 지역화폐나 온라인 결제, 해외 송금, 게임 머니 등 여러 분야에서 쓸 수 있다.
하지만 우려도 만만치 않다. 이러한 목소리의 근원지는 한국은행이다. 한국은행 이창용 총재는 지난 1일(현지 시간) 포르투갈 신트라에서 열린 유럽중앙은행(ECB) 포럼 정책토론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허용하면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의 환전이 가속화하고, 이는 자본 유출입 관리 규제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또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으로 통화 공급을 통제하기 매우 어려워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아직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이기에, 이러한 우려 역시 존중받아 마땅하다. 다만 우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사용되고 있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다윈KS는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테더 등의 가상자산을 환전해주는 ATM기 제작사다. 이 회사는 환전 뒤 잔돈을 지급하기 위해 원화 100원에 1 대 1로 연동된 디지털 머니 ‘DPEC(디펙)’을 자체 개발해 활용 중이다. 고객은 이를 페이퍼 월렛이나 선불카드(코나 DTK카드)에 충전해 사용할 수 있다. 일정 금액 이상이 모이면 현금 출금도 할 수 있다.
해당 서비스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ICT 규제 샌드박스 승인을 받아 사업화됐다. 다윈KS 이종명 대표는 “어찌 보면 저희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하는 사례를 사실 지금 하고 있는 것”이라며 “관련 법제화가 진행되면, 이미 현장에서 운영 중인 다윈KS의 디지털 머니 시스템에 즉시 적용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홍콩, 싱가포르 등 금융 선진국들은 이미 블록체인 기반 금융 인프라를 빠르게 구축 중이다. 글로벌 전통 금융기관들 역시 이들 네트워크에 속속 참여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이 자체 플랫폼과 생태계를 갖추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서울대 경영대학 이종섭 교수는 이를 두고 “남들은 증기기관차를 탈 때 한국은 여전히 말을 타고 다닌다”고 비유했다.
서클이나 테더 같은 해외 기업들이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국내 결제·송금 시장을 장악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해보자. 이럴 경우, 한국의 카드사와 은행, 기존 결제망은 설 자리를 잃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술 실험과 인프라 구축은 ‘모 아니면 도’의 문제가 아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제도를 갖춰야만 시작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우려는 있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변화의 흐름에서 완전히 소외될 수 있다. 제도는 시행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를 고쳐 나가며 다듬어가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니라, 방향성과 의지다.
2025-07-07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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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노쇠한 '조선 도시'에 믿을 건 외국인 노동자뿐?
전국 228개 기초지자체 중 청년(20~39세) 인구가 가장 빠르게 줄어드는 곳, 바로 경남 거제다. 얼마 전 한국고용정보원이 발표한 ‘청년층 이동과 지역의 인구 유출 보고서’를 보면 2014년 7만 7244명이었던 거제시 청년 인구는 2023년 4만 6283명으로 3만 960명 감소했다. 연평균 -1.26%꼴이다.
청년층 비중도 전국 평균에도 못 미치고 있다. 거제시 청년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지역 19~39세 인구는 5만 2781명이다. 이는 전체 인구 23만 8671명 중 22.1%로 전국 평균 22.6%보다 낮은 수준이다. 청년 중에도 젊은 층에 속하는 19~24세 인구는 1만 326명에 불과했다.
청년 기준을 15~39세로 했던 2020년 첫 조사에서 32.1%로 전국 평균(31.9%)을 웃돌았던 거제시 청년 인구 비율은 2022년 28.3%를 기록하며 전국 평균(30.5%) 밑으로 떨어졌고, 이번 통계에서도 전국 평균을 넘지 못했다. 한때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젊은 도시’였던 거제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걸까?
거제는 세계 조선 빅3로 손꼽히는 삼성중공업과 한화오션 사업장이 있는 명실상부 조선 도시다. 2000년대를 전후해 조선업이 초호황을 누리면서 지역 경제도 덩달아 신바람을 냈다. 인구도 급증해 자급자족이 가능한 30만 명에 육박했다.
그런데 2015년을 기점으로 해양플랜트 악재에다 상선 발주 시장까지 얼어붙으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양대 조선소가 경영난에 허덕이자, 정부는 국가 기간 산업 경쟁력 강화를 명분으로 고강도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일감이 바닥난 상황에 감원 칼바람까지 불면서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하나, 둘 거제를 등졌다. 8만 명을 훌쩍 넘겼던 조선업 직접 종사자 수는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다 2022년을 전후해 업황은 살아났지만 노동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불황을 거치며 임금 수준이 크게 낮아진 데다, 경기 부침이 심한 조선업 특성상 호황이 지나면 언제든 다시 칼바람을 맞을 수 있다는 불안감도 여전한 탓이다.
이 때문에 업계에서는 일감은 넘쳐나는데 일할 사람이 없다는 하소연이 잇따랐다. 이대로는 수주한 선박 납기를 맞추기 힘들 것이란 우려와 함께 조선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에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외국인 노동자 확대였다. 이후 지역 조선업계에도 외국인 노동자가 대거 수혈됐다. 2021년 5404명에 불과했던 거제 지역 외국인 수는 올해 5월 말 기준 1만 5465명으로 세 곱절 늘었다. 덕분에 업계는 급한 불을 껐지만, 부작용도 적지 않다.
일자리 대부분을 외국인 노동자가 차지하면서 정작 지역 노동자는 일자리를 찾아 지역을 떠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이 때문에 조선업 활황에도 정작 지역 인구는 줄어드는 구조적 문제도 드러나고 있다. 게다가 외국인 노동자들은 급여 대부분을 본국으로 송금하는 실정이라 지역 경제에는 긍정적인 소비 효과를 주지 못한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이제 외국인 노동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지만, 이대로는 장기적 관점에서 지역의 성장 기반은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지역과 산업 그리고 인구 문제를 아우를 수 있는 정책을 더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2025-06-3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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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직장 내 괴롭힘, 그리고 영화 ‘밀양’의 메시지
최근 재주목 받고 있는 영화 ‘밀양’. 직장 내 괴롭힘을 한 번이라도 당해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자식을 잃은 신애가 교도소에 있는 아들의 유괴범을 찾아간다. 그녀는 절망 끝에서 용서라는 마지막 고비를 넘고자 한다. 그 순간, 유괴범은 담담하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제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아들을 잃은 그녀는 이 한마디에 다시 한 번 무너진다. 도대체 누구에게 용서를 받았는지, 영화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영화 속 ‘하나님’은 오늘날 한국 사회의 메타포라 볼 수 있다. 직장 내 폭행이나 갑질, 성희롱 등 직장 내 괴롭힘 사건에서 가해자 대다수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조직에 남고, 정작 피해자에겐 트라우마와 악몽이 삶의 일부가 되는 현실을 선명히 보여준다. 피해자는 무너진 자존감과 정체성,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 속에서 지옥 같은 삶을 견디는데 말이다.
통계는 이 비극을 수치로 입증한다. 직장 내 괴롭힘 피해자 10명 중 7명은 회사를 자발적으로 퇴사한다. 반면 가해자의 약 90%는 그대로 조직에 남는다. 일부는 30년 넘게 재직한다는 보고도 있다. 이 비정상적인 풍경이 너무나도 익숙한 게 한국 사회 문화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그 중심에는 가해자 중심의 조직 구조가 단단히 놓여 있다.
심리학자들은 가해자의 자기 합리화 기제를 지적한다.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 가해자는 “순간의 실수였다”, “내 본심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땐 너무 힘든 상황이었다”, “그 사람도 날 자극했잖아” 식의 자기 구원 서사를 만든다. 영화 ‘밀양’ 속 유괴범 역시 그렇다. 그의 “신께 용서 받았다”는 말은 피해자를 향한 사죄가 아니라, 자신의 죄책감을 없애기 위한 자기중심적 언어였다.
한국 사회의 문화적 문제도 주요 원인으로 거론된다. 한국 사회는 갈등을 회피하고, 체면을 중시하며, 집단의 평온을 유지하려는 성향이 강하다. 공감보다 회피, 진실보다 침묵, 책임보다 체면이 우선 시 된다. 그래서 피해자에게 “분위기를 흐린다”, “그만 좀 해라”,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냐?” 같은 말로 ‘용서’를 강요한다.
특히 “술에 취해 그랬다”, “몇 대 맞은 걸로 오버하냐?”라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직장 내 괴롭힘을 정당화하는 핑계로 쓰인다. 한국 문화가 이렇다 보니 직장 내 괴롭힘을 방관하는 이들도 많다. 방관자들로 인해 그동안 ‘가족’, ‘선배’, ‘동료’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많은 폭력과 폭언이 용인돼 왔는지 우리는 스스로 되물어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 사회가 여전히 형벌 중심의 구조인 점도 가해자에게 ‘가짜 반성’의 기회를 준다. 징계나 사과가 이뤄지면 사건은 끝났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피해자의 고통은 형벌로 끝나지 않는다. 실제 통계를 보면,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의 사과와 징계 후에도 피해자는 심리적 후유증에 시달린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조직 생산성에도 심각한 손실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WHO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손실은 연간 1조 달러에 달한다. 영화 ‘밀양’은 일상이라 여기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직시한다. 진짜 잘못한 가해자가 고통을 안고 반성하며 살아가는 게 정상적인 사회다.
2025-06-23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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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기다림을 해소하는 저출생 대책
“때 되면 다 한다. 걱정 안 해도 된다”
28개월 아이를 키우는 ‘초보 아빠’가 지난 2년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뒤집기를 언제 하지 하며 아이를 지켜볼 때도, 첫걸음마를 기대하며 아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순간에도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지나고 보니 그 말은 정답이었다. 조금 느릴지언정 때가 되면 다행히도 아이는 곧잘 성장의 궤도에 올라섰다. 어른들은 그냥 응원하고 기다려주기만 하면 됐다.
2년간 아빠로 살아가며 가장 크게 각인된 단어는 기다림이다.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기다림도 컸지만, 아이가 커가는 순간순간 겪어보지 못한 기다림과 마주해야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1년이 지나 맞벌이를 하는 탓에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야 했다. 저출생 시대에 어린이집을 보내는 일이 경쟁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린이집 신청을 하자 대기 순번이 나왔다. 앞 순번의 아이가 다른 어린이집으로 가면서 우여곡절 끝에 어린이집 개원 전날 어린이집에 가까스로 등록했다. 아내와 이야기했다. “우리나라 저출생 국가 맞아?”
아이가 아프자 기다림의 난도는 더 올라갔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개인 병원이 문을 여는 시간은 오전 9시다. 하지만 소아과에 가는 시간은 오전 7시다. 병원 문을 열기 전 ‘오픈런’을 한다. 오전 7시 병원 줄을 서기 위해 문 닫힌 병원 앞에서 기다렸다. 줄을 서 받아 든 번호표는 28번이었다. 경험상 한 시간에 12명 정도 진료가 이뤄지니 오전이면 진료할 수 있다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주말이 돼 기분 전환을 위해 간 백화점에서도 기다림은 이어졌다. 유아차를 끌고 도착한 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 타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엘리베이터 한편에 ‘유아차 우선 탑승’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지만, 유아차가 먼저 타기에는 너무 많은 인파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몇 대를 보내고 나서야 겨우 연신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외치며 아이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지난해 출산율 0.75명. 한 가정당 아이 한 명도 낳지 않는 시대. 하지만 현실 육아는 기다림과 경쟁의 연속이다. 정부는 아동수당을 늘리고 출산지원금을 늘리며 저출생 극복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하지만 아동수당이 늘어나고 출산지원금이 늘어나도 출산율은 극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냉정히 말해 수당이 ‘둘째를 낳을까?’ 하는 고민까지 이어지지는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테다.
실제로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인구정책평가센터에 따르면 지방자치단체의 출산장려금 100만 원이 증가할수록 출산율 증대 효과는 0.0089명에 불과했다. 정부가 0~1세 아동에게 2년간 1800만 원을 지급하고 200만 원의 바우처를 주는 정책인 첫만남꾸러미 정책도 예산 대비 큰 실효성이 입증되지는 않고 있다.
기다림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소아과 오픈런 해소, 어린이집 입소 대기 문제 해결, 백화점과 같은 대중 장소에서 유아차가 배려 받을 수 있는 사회적 에티켓 만들기 같은 것 말이다. 저출생 극복을 위해 엄마, 아빠의 기다림을 줄여줄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한 때다.
2025-06-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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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건강하게 익어갈 우리들의 여름
절밥, 그러니까 사찰음식의 매력에 2030세대가 푹 빠졌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주말인 지난 7~8일 서울 aT센터에서 ‘제4회 사찰음식 대축제’가 열렸는데, 이틀 동안 무려 2만 여 명이 다녀갈 정도로 인기였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5월 사찰음식이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개최된 행사라는 점도 의미 있지만, 20∼30대가 참석자의 57%를 차지할 정도로 젊은 층의 관심이 뜨거웠다니 놀라웠다.
이날 축제에서 선보인 표고버섯탕탕이찌개, 삼색두부찜, 시래기고추장구이, 늙은호박배추물김치, 육근탕, 석이버섯더덕초무침 같은 개성 있는 사찰음식이 요즘 젊은 친구들의 입맛에 맞았을까? 맵고 짜고 달고 자극적인 음식이나 햄버거 같이 빠르게 만들어진 인공의 패스트푸드가 아니라, 간소하고 담백하며 슴슴하고 소박한 자연식이 그들에게 은근히 스며든 것일까?
그러고보니 지난해부터 건강 트렌드는 이른바 ‘저속노화’가 대세다. 렌틸콩과 귀리, 현미로 만든 잡곡밥을 저속노화 식사법으로 소개해 화제를 몰고 온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의사, 정희원 교수는 노화를 촉진하는 음식을 줄일 것을 강조한다. 식단에서 설탕 같은 단순당과 흰 쌀밥, 빵 등으로 대표되는 정제 곡물, 붉은 고기와 동물성 단백질 등을 과감히 빼라고 조언한다. 튀김류, 버터, 마가린, 치즈 등도 줄여야 하고, 대신 푸른 잎 채소와 통곡물, 콩류, 견과류, 베리류 등을 더 섭취할 것을 권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세대 불문 각자 만든 저속노화 식단의 사진과 식재료 목록을 공유하는 게시물이 넘쳐난다. 중년·노년층에게도 건강식단이라는 것이 더이상 종합편성채널 속 먹거리 프로그램에 소개되는 음식이 아니다. 밋밋하기 그지 없는 건강식이 어느새 자랑 삼고 싶은 ‘힙한 습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찰음식에 대한 2030세대의 호응은 “천천히 늙어갈래요”를 표방하는 이들의 건강한 발로로 읽힌다.
잘 나이들기 위한 건강한 습관은 ‘러닝 열풍’과도 맞닿아 있다. 온천천을 따라, 광안리해수욕장을 끼고, 사직보조경기장을 도는 열혈 러닝 크루들은 달리기에 한껏 적당한 초여름 날씨에 힘입어 각자의 건강을 채우고 있다. 낯설긴 해도 어느새 패션 아이템 반열에 든 러닝화와 운동복 시장은 계속해서 상승세를 타고 있고, 크고 작은 마라톤 대회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100세+α시대’에 간소하고 느린 것을 좇는 슬로우 라이프는 “건강하게 나이 들겠다”는 의지와 섞여, 이제 많은 이들의 일상이 됐다. 새 것보다는 오래된 것, 화려한 것보다는 단순한 것, 자극적인 것보다는 은은하고 심심한 것을 향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최소한의 할 수 있는 선에서 작게라도 한두 가지 실천해보는 건 어떨까. 내 경우엔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슬로우 조깅을 하고, 가능하면 하루 한 끼는 가벼운 샐러드로 대체하는 식으로 적응 중이다.
이제 곧 한여름이다. 벌써부터 일기예보 속 낮 최고기온이 30도를 찍는다고 하니 슬슬 예민해진다. 푹푹 찌는 듯 후끈대는 올 여름 무더위를 건강하게 이겨낼 수 있을지 두려움마저 꿈틀댄다. 그럼에도 초여름의 싱그러움이 가시기 전에, 집에서 시간을 들여 만든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가족, 지인들과 나누는 그 순간, 잔잔한 행복이 입가를 타고 흐를 것이라는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생물학적 나이는 모두 달라도, 이 여름을 각자의 방식으로 건강하게, 그리고 천천히 통과할 수 있길 바라본다.
2025-06-09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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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대선에 묻혀버린 기름 유출 사고
지난 4월 25일 울산 온산공단에서 에쓰오일 송유관이 파손된 뒤 매일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흙을 새로 까는 작업이 한창이다. 국내 석유화학업계 최대 공사라는 ‘샤힌 프로젝트’ 주변에서 케이블 매설 공사를 하던 중 그만 사달이 났다. 그날 4t의 원유가 왕복 4차선 도로를 뒤덮고 1km 떨어진 바다로 흘러들었다. 시공사인 롯데건설은 내년 4월까지 토양 정화 작업을 끝낼 참이다. 이만저만 품이 드는 게 아니나 사고 책임이 가볍지 않다. 그렇다면 바다는? 기름띠 제거 같은 방제 작업을 완벽하게 했다손 치더라도 사후 검증이나 실태 조사 등은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 테트라포드 깊숙이 엉겨 붙은 검은 독이 시나브로 바다에 풀리는지 모를 일이다. 시민들의 관심은 대선에 쏠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분위기다. 올해로 서른 번째 ‘바다의 날(5월 31일)’이 유독 씁쓸하게 느껴진다.
온산공단의 토양과 연안을 기름 범벅으로 만든 이 사고는 해양 도시의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재해 중의 중대재해’로 톺아봐야 한다. 사람이 죽거나 크게 다쳐야만 중대재해가 아니다. 안 그래도 수십 년 산업단지를 껴안은 대가로 온갖 중금속에 오염된 바다가 급기야 기름세례에 몸살을 앓는다. 죽어가는 온산 바다를 한 번 더 짓밟는 꼴이다.
기름 유출은 자칫 바다에서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끼친다. 먹이사슬의 기초인 플랑크톤을 죽게 하고, 물고기의 아가미를 틀어막는다. ‘자연의 콩팥’ 갯벌도 제 기능을 상실한다. 연안 생태계가 괴멸적 피해를 본다. 온산에는 갯벌도, 양식장도 없고, 기름띠도 서둘러 걷어냈으니 그저 괜찮다고 치부할 건가.
이 사고가 ‘땅속 화약고’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도 크게 우려스럽다. ‘공단에 무수히 깔린 지하배관은 과연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을까.’ 상당한 의구심이 생긴다. 사고 지점에만 0.8~2.5m 아래에 송유관과 화학, 가스 등 20여 가지 배관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굴착 과정에 조금의 실수가 있어도 치명적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지하시설물 통합정보시스템(GIS)으로 배관 위치를 미리 파악하게 돼 있다. 매설물 관리기관 등의 현장 감독도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도 이번에 지름 42인치 송유관에 천공을 내는 대형 사고가 났다. 원칙을 어겼거나, 감독에 소홀했거나, 매설 정보에 문제가 있었거나, 크고 작은 위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떤 경우이건 지하매설물 관리체계에 구멍이 난 것으로 봐야 한다.
관계기관 대응 체계도 허울만 요란하다. 노후 지하배관을 지상에 재설치하는 통합파이프렉 구축 사업은 법 기준을 맞추지 못해 10여 년째 하세월이다. 국가산단 지하배관을 관리하는 통합안전관리센터도 올해 5월 준공해 이제 걸음마 단계다. 배관 종류에 따라 관리부처도 제각각이다. 이대로라면 울산 국가산단에 깔린 1800여km 지하배관이 모두 언제 터질지 모를 지뢰밭이나 다름없다.
이번 기름 유출 사고는 도시 전반의 안전을 성찰하는 중요한 변곡점이 되어야 한다. 사고가 터질 때마다 불행 중 다행이라 여기면 답이 없다. 선제적이고 구조적인 예방책이 필요하다. 시간이 늘 우리 편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도시의 명운이 달린 산단 안전이 무슨 복권도 아니고 언제까지 행운에 기대야 하나.
2025-06-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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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대선과 암살의 기술
“야 우리나라 대통령 없어졌어.”
KBS 예능 개그콘서트의 한 코너에 개그맨 김원훈이 조진세와 고등학생 이진(일진보다 아래 단계란 뜻) 역할로 출연해 대뜸 내뱉은 대사다. 대통령을 다시 뽑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김원훈이 설명하더니 조진세에게 “너 누구 뽑을 거야”라고 묻는다.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조진세. 결국 “학생 신분이라 투표하기는 애매하기는 해”라며 위기를 넘긴다.
그리고는 경찰관 역할인 개그맨 송필근에게 “경찰관 아저씨는 투표권도 있는데 누구를 뽑을 거냐”고 묻는다. 송필근은 “경찰관복은 정당과는 무관하다”고 오해(?)를 푼 뒤 화를 내며 상황을 넘긴다.
이 장면은 커뮤니티에서 ‘개그콘서트 암살단’이란 제목으로 화제가 됐다.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것이 ‘댓글 테러’는 물론 여러 곤란한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를 개그맨들도 알았기에 이를 개그 소재로 썼을 터이다. 과거 정권의 블랙리스트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활동이 끊기는 ‘사실상 암살’이 이뤄진 적도 있다.
암살 가능성은 수치로도 드러난다. 2023년 발표된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사람들이 크게 느낀 사회갈등은 ‘보수와 진보’(82.9%)가 가장 많았다. ‘빈곤층과 중상층’(76.1%), ‘근로자와 고용주’(68.9%)보다 더 높았다. 2년이 지났지만 이 갈등이 줄었다고 느끼는 이들은 없다. 굳이 수치를 나타내지 않더라도 체감되는 정치 성향에 갈등은 극에 달해있는 느낌이다.
여론과 트렌드에 민감한 마케터들이 이런 분위기를 놓칠 리 없다. 부산 향토기업 대선주조는 제21대 대선 한정판 특별 에디션을 출시했다. 대선주조의 브랜드 ‘대선159’가 대선과 동음이의어라는 점을 활용한 캠페인이다. 상표에는 ‘함께 대선 합시다’라는 간결하고 핵심적인 메시지를 흰색 배경 상단에 배치했다. 암살을 우려했기 때문일까. 태극기 이미지로 대통령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주요 정당 상징 색상을 디자인 요소로 활용하는 다소 ‘수비적인’(?) 모습도 보였다.
대선주조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매번 비슷한 전략을 쓰고 있다. 2017년 당시 카피는 ‘대선으로 바꿉시다’였다. 2017년 1월 ‘시원’(C1)을 대체하는 ‘대선’을 출시하고 5월 대선을 겨냥해 ‘대선으로 바꿉시다’라는 대선 마케팅을 펼친 셈. 이런 마케팅이 잘 통했기 때문일까. 당시 대선주조의 시장 점유율은 10%대에서 50%대로 올랐다. 5년 뒤인 2022년 대선을 앞두고도 대선주조는 ‘대선, 당신의 선택은’이라는 카피를 내걸고 캠페인을 진행했다. 아쉽지만 결과는 신통치 못했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소비자에게 크게 각인되지 못한 것은 확실하다.
이번 대선주조의 ‘함께 대선합시다’ 마케팅이 성공하기를 기대한다. 요즘 지역 기업 대선주조의 시장점유율은 2017년에 비해 많이 떨어져 있다. 대선 마케팅의 성공으로 지역 기업이 살고, ‘함께’해야 한다는 고민도 깊어진다면 더 바랄 것도 없다. 다행히 시장에서는 대선주조 마케팅 분위기가 좋다는 말도 들린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소주 한잔 하며 속을 터놓으면 오해하고 미워할 일도 좀 준다. 이번 대선도 제발 좀 그랬으면 좋겠다.
2025-05-2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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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단상] '입만 터는 문과놈들' 행동할 차례다
기승전‘의료수가’.
의료담당이 된 지 두 달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의료수가(의료행위에 대한 대가)’다. 진료 과목·기관 규모에 관계없이 첫 만남의 통과의례와도 같은 말이기도 했다. 이들은 ‘의료수가 현실화’가 지역·필수의료 분야 공백을 메우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강조했다. 의대 정원‘만’ 확대하는 것은 소위 돈 되는 진료분야의 쏠림 현상만 가속화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의료수가는 국민 모두가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공공의료보험제도 아래 책정된 기준이다. 적정 수가 기준은 따로 없지만 OECD의 세계 각국 비교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현행 의료수가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분명하다. 그 덕분에 의료 문턱이 낮아지고 병원 이용에 대한 국민 부담도 크게 줄어들었다.
문제는 진료과목별 급여진료 기준 비용 대비 수입(원가보전율)이다. 안과 등 특정과목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100%를 넘기지 못한다. 병원 입장에선 급여진료를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인 셈이다. 원가보전율이 특히 낮은 소아과, 산부인과는 인구 감소와 맞물려 줄폐업이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병원들은 대신 비급여 항목을 늘려 수익을 보전한다. 최근에 만난 한 의사 역시 ‘손’으로 수술을 성공적으로 해낼수록 적자가 커지는 바람에 비급여인 ‘보조’ 수술용 로봇을 활용해야 하는 현실을 자조했다.
필수의료 대부분은 낮은 의료수가로 인해 인력 부족이 디폴트가 됐다. 대한의사협회(의협) 의료정책연구원이 2023년 국민·의사 215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필수의료 인식 조사’에서 국민은 과도한 업무부담(39.1%)과 낮은 의료수가(19.2%)를, 의사들은 낮은 의료수가(58.7%)와 법적 보호 부재(15.8%)를 필수의료 분야의 인력 부족의 주된 원인으로 꼽았다. 의협이 같은 해 전국 의대 본과 학생 811명을 대상으로 한 인식조사 결과도 마찬가지. 의대생 2명 중 1명(49.2%)는 필수의료 기피 현상의 원인으로 ‘낮은 의료수가’를 꼽았다. 낮은 의료수가가 필수의료 인력부족의 주된 원인으로 두루 인식된 것이다.
중증외상분야 권위자이자 드라마 ‘중증외상센터’ 주인공의 모델이 되기도 한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이 지난달 군의관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한 작심발언은 의료수가 문제에 더욱 힘을 실었다. 강연에서 “한평생 외상외과에서 열심히 일했지만 바뀐 건 하나도 없었다. 내 인생은 망했다”고 토로한 그는 ‘탈조선’과 ‘NO 바이탈(필수의료)’을 권했다. 이는 치료를 하면 할수록 적자 규모가 커지는 우리나라 필수의료체계에서 평생 헌신한 그의 절망이었다.
올해 건강보험 수가협상 막이 올랐다. 의정갈등 장기화로 인한 상급 종합병원 피해 복구에 수조 원이 투입된 상황에서 의료수가 현실화는 논란이 된 세월만큼 갈 길이 멀다. 지역·공공의료 공백이 갈수록 커지는 상황에서 현실화 해법을 찾기란 녹록지 않다. 하지만 일차의료 강화, 국민주치의 제도 도입, 중증질환·전문의 중심의 상급 종합병원 구조전환 등 의료전달체계 재정비 논의가 이뤄지는 지금이 기회가 될 수 있다. 의대 정원 확대를 기반으로 한 공공 인프라 확충 등의 움직임도 호기라면 호기다.
이 원장이 분노했던 ‘입만 터는 문과놈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때가 왔다. 정권 창출에만 급급하거나 갈라치기로는 국민을 위한 길을 찾을 수 없다. 의료 붕괴를 막고 양질의 의료 시스템이 유지되도록 행동으로 나설 차례다. onlypen@
2025-05-19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