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김기철, 잊히지 말아야 할 이름
황석하 사회부 차장
김기철 씨는 1980년 3월 14일 부산 안창마을의 두 평 남짓한 단칸방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43세. 그는 임종 직전까지 제대로 된 진찰 한 번 받지 못했다. 황달과 폐질환 증세를 보였지만, 병의 근원은 고문 후유증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부산에서 기자 생활을 했던 언론인 조갑제 씨의 논픽션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는 ‘김근하 군 피살 사건’을 둘러싼 수사와 재판 과정을 추적한 기록이다. 경찰과 검찰, 법원, 언론이 고문과 조작, 오판, 오보로 얼룩진 사건을 어떻게 조작했는지 보여준다. 억울한 누명을 쓴 이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1967년 10월 17일, 화랑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 5학년 김근하(11) 군은 부산 서구 동대신동에 있는 학교를 나와 과외를 마치고 귀가했다. 근하 군은 그날 밤 늦게 부산시청 인근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집으로 돌아가던 근하 군이 유괴·납치된 뒤 살해된 것으로 보였다. 경찰은 사건과 무관한 인물을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냈지만, 이들이 모두 풀려나면서 수사는 결국 헛발질로 마감됐다.
검찰도 마찬가지였다. 김기철 씨는 이듬해 5월 5일 검찰에 구속됐다. 수년 전 범천공원에서 라디오를 빼앗았다는 혐의였다. 단순 절도 혐의로 시작된 사건은 곧 근하 군 살해 혐의로 확대됐다. 검찰은 김 씨 지인 김금식 씨의 허위 자백을 토대로 사건을 엮었다. 말 그대로 ‘생사람 잡는’ 수사를 벌였다.
김 씨에게 가해진 가혹행위 부분은 차마 눈으로 읽기 힘들 정도다. 그는 검사실로 불려가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두꺼운 가죽 수갑을 채워 세수조차 못 하게 했다. 검찰은 김 씨가 잠이 들면 감방 재소자들이 발길질하도록 유도했다. 한편으로는 김 씨에게 불고기가 놓인 술상을 차려놓고 자백을 회유했다. 그럼에도 김 씨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법원과 언론의 대응도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부산지법은 1968년 11월 22일 검찰의 엉터리 공소장을 토대로 김 씨 등 4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수사 검사를 치켜세우는 데 급급했다.
항소심은 달랐다. 1969년 3월 21일 김 씨 등은 전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 같은 해 7월 25일 대법원이 검찰의 항고를 기각했다. 하지만 육체와 정신이 무너진 김 씨는 끝내 병을 이기지 못했다. 아들의 누명을 벗기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던 김 씨의 부모 또한 차례로 세상을 등졌다. 근하 군 사건은 1982년 10월 17일 공소시효가 만료돼 영구 미제가 됐다.
1960년대 군사독재 시대 벌어진 일이지만,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무겁다. 이제는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내는 시대는 지났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피의자를 둘러싼 검찰의 회유, 이른바 '연어 술파티'와 같은 사건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김 씨에게 제공했던 '불고기 술상'과 묘한 기시감을 느꼈던 이유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수사권 조정과 보완수사, 공소청 설치, 헌법소원 등의 쟁점이 충돌 중이다. 정파적 유불리를 떠나 단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인권을 보호하고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김기철이라는 이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황석하 기자 hsh03@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