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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부산시장을 꿈꾸는가? 동천을 얘기하라
영국 런던의 템스강, 프랑스 파리의 센강, 일본 도쿄의 스미다강, 싱가포르의 싱가포르강…. 세계 유명 도시들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하천들이다. 이들 중 일부는 오염과 악취로 시민에게 외면받던 시절이 있었지만 체계적인 재생을 통해 도시의 얼굴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이들 강의 사례는 도심 속 강이나 하천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라 도시의 생명줄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이제 9개월 후면 시도지사 등을 뽑는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부산에서도 시장 후보들은 ○○○ 조성이나 건설 같은 거창한 구호나 담론을 앞다투어 쏟아낼 것이다. 물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시민의 일상,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도시의 삶에 대해 후보들이 얼마나 진지한 관심을 보일지는 회의적이다.
대부분의 도시는 물을 따라 성장해 왔다. 하천은 단순한 자연환경이 아니라 도시를 살리는 젖줄이다. 고대 군주의 덕목이 홍수와 가뭄을 다스리는 치수였다면 오늘날의 치수는 곧 도시재생과 맞닿아 있다. 현대의 도시들은 예외 없이 강과 하천, 수변 공간을 중심으로 시민의 삶을 설계한다. 특히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도심 속 하천은 습도를 조절하고 열섬을 완화하며, 생태적 회복력을 높이는 오아시스가 된다. 그런 점에서 도심 속 하천 동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동천은 단순한 하천이 아니다. 대한민국 근대산업의 발원지이자 근현대 부산의 역사다. 삼성, LG 등 한국 경제를 이끈 수많은 기업이 동천 주변에서 태동했고 부산의 대표 산업 신발도 동천과 함께였다. 수십 년간 악취와 오염의 대명사로 불려 왔던 동천이지만, 동시에 부산의 역사와 기억, 그리고 미래의 열쇠를 쥔 물길이기도 하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부산시장을 꿈꾼다면 반드시 동천 재생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천 재생은 북항 2단계 재개발과 연계할 수 있는 지금이 적기(適期)다. 동천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지난 20년간 부산은 동부산 개발에 집중해 왔다. 그 사이 원도심은 인구 감소와 상권 붕괴로 쇠락했다. 이 흐름을 되돌릴 물리적·상징적 축으로 동천이 주목된다.
동천 재생은 단순한 하천 복원이 아니라 도시 구조와 시민 삶을 새로 설계하는 일이다. 도심 경쟁력은 물론이고 환경·생태적 가치와 도시 역사·정체성까지 회복할 수 있다. 싱가포르의 싱가포르강, 일본 교토의 가모강은 강과 도심을 잇는 공간으로 거듭나며 도시 브랜드를 바꿨다. 부산도 못할 이유가 없다. 동천 재생은 부산의 미래을 다시 빚어내는 일이다. 그래서 통합적이고 지속 가능한 섬세한 설계와 전략이 요구된다. 물론 모든 것은 수질 개선이 전제다. 전문가들은 지류를 포함한 전면적 정비 없이는 동천을 맑게 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안전 또한 중요하다. 기후위기로 극한 호우가 일상화된 지금 범람 위험을 철저히 관리해야 시민 신뢰를 얻을 수 있다. 최근 5년(2020~2024년) 간 홍수 피해 하천의 93.6%가 지방하천이었다. 동천을 국가하천으로 승격해 정부 차원의 예산과 지원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복개 구간은 벗겨내 자연이 숨 쉴 공간으로 되돌려야 한다. 그러나 조급해서는 안 된다. 한 시장의 임기 안에 모든 것을 끝내려 한다면 ‘모래성’이 될 수 있다. 싱가포르도 강을 되살리는데 1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낙동강 물이 학장천과 가야천을 따라 흘러 동천과 만나는 더 큰 그림도 가능하다. 그 사이사이에 작은 공원들이 징검다리처럼 이어진다면 도심 한복판에서 낙동강까지 ‘녹지 회랑’이 펼쳐지는 생태도시 부산이 현실이 될 수 있다. 물길 위로 작은 배들이 오가며 도심을 가르는 풍경도 상상해 본다. 동천의 본래 이름을 되찾는 일도 필요하다. 1899년 동래부지도에는 동천이 ‘범천’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름을 되찾는 것은 도시의 역사와 정체성을 복원하는 일이다.
그동안 동천을 살리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직 시장 중에는 ‘자연하천 복원’을 내세워 대대적 정화사업을 추진했다. 또 다른 시장은 하루 수십만 톤의 바닷물을 끌어와 오염을 희석하는 해수도수사업도 벌였다. 도심 크루즈 운항을 제안한 시장도 있었지만 성과는 없었다. 결국 동천 재생은 부산의 숙원이자 희망 고문이 돼 버렸다. 하지만 이는 불가능한 일이어서가 아니다. 많은 이가 “동천 재생은 왜 안 되는가”라고 묻곤 한다. 그 답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실현하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도시는 결국 사람을 살게 해야 한다. 머물게 하고, 걷게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해야 한다. 그 시작이 바로 동천이다. 동천을 묻는 것은 결국 부산의 미래를 묻는 것이다. 시민들은 거대한 장밋빛 청사진 뒤에 숨겨진 ‘동천의 꿈’을 읽어낼 준비가 되어 있다. 이제 시장 후보들이 답할 차례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5-08-2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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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부산시가 가덕신공항 중심에 서라
가덕도신공항 건설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부지 조성 공사 우선협상대상자인 현대건설 컨소시엄이 사업에서 손을 떼면서 첫 삽조차 뜨지 못한 채 모든 일정이 멈춰 버렸다. 사업 출발점에서 발목이 잡힌 셈이다. 김해공항은 갈수록 공항 안전과 수용력 등의 한계에 이르고 있어 한시라도 신공항 건설을 지체할 수 없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쯤 되면 ‘2029년 개항’이란 목표가 사실상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건설사 이탈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부산시가 이 사업의 주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덕신공항은 수년 전부터 지역 균형발전의 상징이자 시민들의 오랜 염원이었지만, 실제 사업 구조는 철저히 중앙정부, 그중에서도 국토교통부 중심으로 설계돼 있었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는 인천국제공항과 가덕신공항의 추진 기반이 된 두 특별법을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하나는 1991년 제정된 ‘수도권신공항건설촉진법’, 다른 하나는 2024년 마련된 ‘가덕도신공항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다. 가덕신공항특별법은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기본계획 수립부터 시행까지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고, 부산시의 의견을 청취해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이에 부산시는 부지 보상과 정치적 협조에 그쳤고, 실질적인 주도권은 갖지 못했다. 반면 인천국제공항은 달랐다. 촉진법은 서울시장, 인천시장, 경기도지사의 의견 청취를 의무화하고 지자체가 시행자가 될 수 있도록 했다. 인천시는 공항과 연계한 도시계획과 교통 인프라를 주도하며 ‘인천공항경제권’의 중심으로 성장했다. 인천국제공항은 입지 선정부터 완공까지 약 10년이 걸렸고, 이처럼 빠른 추진이 가능했던 건 지자체를 공식 참여 주체로 인정한 법적 기반 덕분이었다.
가덕신공항은 단순한 공항이 아니다. 부산의 미래 성장축이자, 국가 균형발전의 관문이다. 그런데도 정작 부산시의 역할은 줄곧 그림자에 머물렀다. 특별법이 국토부 중심으로 설계돼 있었다 해도 법 제정 이후 부산시가 보여준 실질적인 실행 전략은 매우 부족했다. 사업은 중앙의 관료적 속도 조절에 갇힌 채 진행됐고 지역의 현실과 절박함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 결국 시의 이러한 관망형 행정과 수동적 태도가 지금의 혼란을 불러온 원인 중 하나가 됐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부산이 전면에 나설 기회다. 현대건설의 이탈로 인해 발생한 공백의 시간을 부산시가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는 전환점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특별법 개정이 필요하다. 지자체 의견 청취 의무화, 지자체 참여형 협의체 설치, 공항 운영의 공동 관리, 지역 기업 우대 조항 명문화 등 부산시의 실질적 권한을 보장하는 법적 장치가 뒷받침돼야 한다. 이제 부산시는 단순한 협조자가 아니라, 사업 구조 조정과 리스크 분담, 기술 검증 등 실무 전반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실질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계속해서 국토부 주도의 계획에만 기대선 가덕신공항이 언제 착공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부산시가 나서야 가덕신공항 건설의 실질적인 첫 삽을 뜰 수 있고, 중단 없는 공항 건설이 가능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가덕신공항은 또 한 번 지역민의 ‘희망 고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바람이 멎은 바다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배는 제 손으로 노를 쥔 이들의 것이다. 지금, 부산시가 그 노를 쥘 때다.
지금 중요한 건 사고의 전환이다. 2030부산월드엑스포 유치 실패로 인해 급하게 공항을 완공해야 할 압박도 사라졌다. 지금은 활주로 2본 확보, 공항역사 설계 재검토 등 ‘빅딜 전략’을 통해 공항의 완성도를 높일 때다. 현실성 없는 2029년 개항에 매달리기보다는 다양한 대안을 마련해 국토부와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고, 부산이 원하는 인프라 구축 전략을 모색하는 편이 훨씬 더 실리적이다. 무엇보다 공항 자체가 흐지부지되지 않도록 방파제 등 일부 공사는 분리 발주해 조속히 착공해야 한다. 시민에게 ‘공사가 시작됐다’는 분명한 신호를 주는 것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 부울경 국회의원들이 가덕신공항을 국정과제에 반영해 달라고 요청하고, 활주로 확장과 공항 위상 격상 등을 요구한 점은 고무적이다. 개항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이 정도의 지역 중심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훨씬 실속 있는 선택이다. 다만, 이것이 일회성 성명이 아닌, 특별법 개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가덕신공항은 지난 수년 동안 수많은 논란과 기대, 정치적 셈법 속에서 오락가락했다. 그러나 이제는 명백하다. 이 사업이 다시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더 이상 중앙정부의 입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 부산시가 실질적인 주체로 나서야만 한다는 것 말이다. 시민들은 ‘부산시가 바람에 몸을 맡기지 말고 스스로 돛을 올릴 것’을 주문한다. 부산시는 그 열망에 응답해야 한다. 지금 부산에 필요한 것은 ‘관망’이 아니라 ‘중심’이다.
2025-07-17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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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부산 '철도 지하화'에 지하가 없다
경부선 부산역~부산진역 2.8km구간. 수십 개의 선로가 갈라지고 만나며 부산의 물류와 교통을 이끌어온 부산역 조차장과 부산진 컨테이너 야적장(CY). 이 공간이 바뀔 준비를 하고 있다. 이름은 ‘철도 지하화 통합개발 선도사업(철도 지하화 사업)’. 국토교통부가 추진하고 부산시가 팔을 걷었다.
부산역~부산진역 구간 철도 지하화 사업은 부산역 조차장과 부산진 CY를 포함한 총면적 약 37만㎡를 대상으로 진행된다. 부산은 바다를 품은 도시지만, 북항과 원도심은 오랫동안 철도로 단절돼 왔다. 눈앞에 바다가 있어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이를 해결하고 도시를 다시 연결하겠다며 부산시와 정부는 지난 2월 이 구간의 철도 지하화 계획을 발표했다. 다만 이 방식은 전통적인 지하화와 다르다. 일반적인 지하화는 철도를 지하로 옮기는 방식이지만, 이번 사업은 기존 철로 위에 높이 약 10m의 인공지반을 설치해 상부 공간을 개발하는 구조다. 이 인공지반 위에는 금융, 창업, 주거 공간은 물론 공원 등 다양한 도심형 복합 공간이 들어설 예정이다. 총사업비는 약 1조 8000억 원, 사업 기간은 2027년부터 2036년까지다. 조차장 중 일반 철도 기능은 부전역으로, 부산진 CY는 부산신항으로 각각 이전되며, 부산역은 고속철도(KTX) 전용역으로 전환된다. 정부와 부산시는 이 사업을 북항 재개발과 연계해 도시의 국제교류·금융·관광 기능을 강화하고, 부산을 글로벌 물류·비즈니스 허브로 육성할 계획이다.
일부 시민들은 인공지반을 덮는 방식을 두고 “부산역 철도 지하화에는 지하가 없네”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하는 분명 아래를 뜻하지만 부산의 지하화는 마치 터널화에 가깝다. 그만큼 낯설다. 물론 이 방식이 고육책이라는 것을 안다. 부산시와 국토부는 “철로를 옮길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인공지반으로 철로 상부를 덮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북항과 원도심을 잇는 공간적 단절을 이렇게라도 잇겠다는 부산시의 의지도 읽힌다. 도시 공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상부를 개발해 국제교류지구 등으로 활용하겠다는 전략도 주목된다. 또 지하화 공사를 하지 않고 인공지반을 설치하면 공사 기간이라도 열차 운행을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문제는 인공지반 설치로 인해 철도 지하화 구간과 기존 도심 간에 높이 차(단차)가 생긴다는 점이다. 이는 도심과 항만을 잇겠다는 사업의 본래 취지를 무너뜨릴 수 있다. 전문가들은 “단차로 인해 보행 흐름이 끊기고, 도시 경관도 저해될 수 있다”며 우려한다. 이런 구조로는 도심 단절 해소 효과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미국 뉴욕의 허드슨 야드, 프랑스 파리의 리브 고슈, 일본 도쿄 신주쿠의 복합터미널처럼 철도 위 인공지반으로 도시 공간을 성공적으로 재창조한 사례도 있다. 우리도 비슷한 시도 앞에 서 있지만, 부산은 이들과는 다른 맥락을 안고 있다. 부산역과 항만 사이 철길은 단순한 교통 인프라가 아니라 도시 단절의 상징이었다. 이 벽을 허무는 것은 단순한 개발 사업 이상의 무게를 가진다. 우리가 기대했던 지하화란, 단순한 시설 개선을 넘어서 끊겼던 도시의 흐름을 다시 잇고, 꿰매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부산시는 경부선 철도 지하화는 도시 재생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하지만 부산이 진정으로 도시의 기능을 회복하고 원도심을 되살리려 한다면 이 개발 사업은 더 치밀하고 정교한 고민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도시 계획은 불가피함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공간을 단순히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살아갈 사람들의 삶을 설계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시간은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부산 철도 지하화 기본계획이 올해부터 내년까지 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단차 문제, 도시와의 연결성, 시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설계 요소들이 충분히 담겨야 한다. 부산시는 “인공지반의 가장자리를 경사로 처리해 접근성을 높이거나 상부 공간을 공원이나 커뮤니티 시설로 조성해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걸 뛰어넘어야 한다. 미국의 컴퓨터 과학자 그레이스 호퍼(1906~1992)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 가장 치명적인 말은 ‘지금까지 항상 그렇게 해왔어’라는 말이다”라고.
북항 재개발이 도시의 몸통이라면, 철도 지하화는 원도심과 바다를 이어주는 혈관이다. 그 혈관이 막힘이 없어야 한다. 단차를 넘어설 수 있는 창의적인 설계, 보행자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잇는 공공공간, 상업과 삶이 공존하는 균형 있는 배치가 요구된다. 이 사업이 성공한다면, 부산은 더 이상 항만과 도시가 따로 노는 도시가 아니라, 바다와 도시, 과거와 미래, 사람과 공간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살아 숨 쉬는 도시로 재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5-06-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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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부산오페라하우스 흔들림 없이 가는 길
부산 북항 바닷가에 ‘비정형 외피’를 입은 새로운 건축물이 그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바로 부산오페라하우스다. 독특한 파사드 구현을 위해 공법 문제로 한때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2023년 5월 재개돼 2025년 4월 말 현재 공정률은 55%에 이르렀다. 부산시와 운영 주체인 클래식부산은 내년 말 준공 후 6개월가량 임시 운영 또는 정비 기간을 거쳐 2027년 하반기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오페라하우스는 부산 시민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문화예술의 상징이며, 해양도시 부산의 위상을 높일 핵심 공간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상징이 되려면 단순한 건축을 넘어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따라야 한다. 개관까지 2년 남짓 남았다. 다행히 당초 개관이 2024년 10월이었기에 창작오페라 제작과 전문 인력 양성에 일찍이 착수했지만, 그렇다고 남은 시간이 절대 넉넉하진 않다.
클래식부산은 오페라하우스 개관작으로 몇 가지 작품을 검토 중이며, 그중 바다의 정서를 담은 베르디의 오페라 ‘오텔로’가 유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다. 개관 기념 창작오페라로는 ‘새야 새야’를 준비 중이다. 클래식부산 측은 완성도 높은 작품을 통해 관객의 공감을 얻고 오페라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시민만으로는 장기 공연의 관객을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관광 콘텐츠와 해외 관객 유치 전략도 함께 고민하고 있다. 이런 노력은 고무적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개관일’은 아직 확정하지 않았다. 클래식부산은 2027년 9월 또는 4분기 개관을 예상하지만, 공정률이 이제 겨우 절반을 넘긴 상황이고 과거 공사 지연으로 개관 날짜를 쉽게 못 박지 못하는 처지다. 일정이 불투명한 탓에 성악가 캐스팅이나 해외 협업 등 공연 준비에도 차질이 우려된다. 오페라는 수년 전부터 준비가 필요한 예술이다. 그렇기에 지금 시점에서 예측 가능한 개막 일정 확정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이는 향후 콘텐츠 기획과 운영 전략의 출발점이자 기반이기도 하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본다. “과연 멋진 건물 하나, 몇 편의 뛰어난 공연만으로 오페라 문화가 뿌리내릴 수 있을까?” 오페라는 고전 예술이자, 인간의 욕망과 갈등, 사랑과 비극을 무대 위에서 풀어내는 종합예술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는 어렵고 낯선 장르다. 건축의 위용만으로는 이 거리감을 좁힐 수 없다. 오페라하우스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관객이 있어야 하고, 관객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해와 공감의 통로가 필요하다. 그게 바로 교육 등의 아카데미 프로그램이다. 청소년 워크숍, 해설형 콘서트, 무대 체험 같은 접근이 시민을 오페라와 연결하는 다리가 된다. 이 교육은 개관 이후가 아니라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래야 2027년 무대에 진짜 관객이 설 수 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중장기적으로는 부산의 이야기를 담은 창작오페라를 만들어 나갈 필요도 있다. 부산은 도시 전체가 서사다. 임진왜란의 격전지이자 조선통신사의 출발지, 한국전쟁 당시 피란수도였던 이 도시는 오페라가 요구하는 서사의 보물창고다. 실제로 과거 창작 오페라 ‘부산성 사람들’, ‘윤흥신’ 등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지역 역사와 예술을 연결한 시도였지만 아쉽게도 일회성에 그쳤다. 부산 앞바다에서 생을 마감한 윤심덕의 이야기, 강남주 전 부경대 총장의 역사소설 〈유마도〉에 담긴 조선통신사의 여정 역시 훌륭한 오페라 모티브가 될 수 있다. 특히 〈유마도〉를 바탕으로 제작된 무용극 ‘춤, 조선통신사-유마도를 그리다’는 일본 진출을 앞두고 있어, 이를 오페라로 확장하는 시도도 검토해 볼만하다. 이런 작품이 무대에 오른다면 단지 공연이 아니라 부산의 정체성을 예술로 말하는 일이 될 것이다. 꼭 지역 소재만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지나치게 지역주의에 빠져서도 곤란하다. 그러나 부산에서만 볼 수 있는 ‘부산형 오페라’ 하나쯤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구오페라하우스 역시 개관 이후 지역 이야기를 담은 창작오페라를 꾸준히 무대에 올리며 지역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해 오고 있다.
문화는 단발성이 아니다. 이 외에도 부산형 오페라 페스티벌이나 지역 작가·작곡가·연출가의 레퍼토리 개발 등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 구축되었으면 한다. 이는 단순한 공연 프로그램을 넘어 지역 예술 생태계를 성장시킬 수 있는 토양이 되기 때문이다. 대구가 대구국제오페라축제(DIOF)를 통해 지역 예술 인프라를 키운 사례는 부산에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지역 인재들이 직접 공연 제작에 참여하고, 오페라 축제를 통해 일상적인 문화 행사로 자리 잡는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게 지속 가능한 오페라 도시가 되는 기본 요건이다. 오페라하우스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 담길 시간, 기억, 정체성이라는 문화를 짓는 일이다.
2025-05-1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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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성찰하라" 헌재의 죽비
지난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날 헌재는 윤 대통령의 잘못에 대해 엄중하게 책임을 묻는 동시에, 정치권을 향해 죽비를 내리쳤다. 헌재는 파면 선고와 함께 “대통령은 국회를 협치 대상으로 존중하고, 국회는 정부와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헌재의 윤 대통령 탄핵 선고 결정 요지에는 비상계엄에 이르게 된 과정과 관련해 ‘그럼에도 정치로 풀었어야 했다’는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다. 국회에 대해서는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정부와의 관계에서 관용과 자제를 전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결론을 도출했어야 한다’고 했다. 국회를 지칭했지만 거대 야당을 향해 협상과 타협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 말을 강조했을까? 헌재는 대통령에게 파면이라는 강력한 결정을 내렸지만, 국가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 정치권의 대화와 협력, 즉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헌재는 대통령과 국회의 권한과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양측의 협력 부족이 ‘대한민국호의 위기’에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한 셈이다.
헌재의 충고는 시의적절했다. 지금의 대한민국 정치권이 깊이 새겨야 할 중요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헌재의 탄핵 선고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다소 엇갈리지만, 적어도 이 충고만큼은 대체로 적절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러나 정치권은 헌재의 이런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는 듯하다. 다가오는 6월 3일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이슈에 집중하느라, 헌재의 충고를 되새길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오히려 종교계 일각에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통해 대의민주주의를 복원하자”, “정치권은 갈라진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회복하기 위해 진정성 있는 사과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올 뿐이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대화와 타협, 그리고 존중이라는 말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념과 정파적 입장만을 고수할 뿐, 소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이들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협력보다 자신들의 정치적 승리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이는 다수 국민이 우리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하다. 특히 이념 중심의 극단적인 대립은 정치적 합의를 어렵게 만들고, 국민에게 분열과 갈등을 안겨주고 있다. 물론 정치인들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은 민주주의의 건강한 모습이다. 하지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소통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결국 갈등과 분열로 치닫게 될 뿐이다. 헌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 대통령과 국회, 양측 모두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省察)의 시간을 요구한 것이다.
성찰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내면을 탐색하지만, 반드시 개인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흔히 “나는 나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이에 대해 “나는 나지만, 나 아닌 것도 나다”라고 답한다. ‘나’라는 존재는 ‘나 아닌 것’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하기 때문이다. 밖이 없다면 안도 없고, 안이 없으면 밖도 없는 이치다. 이 개념을 정치에 적용해 보면, 국민의힘은 더불어민주당이 있기에 존재감을 갖고, 민주당 역시 국힘이 있어야 존재감을 갖는 것이다. 일찍이 장자는 “모든 사물을 봄과 같은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하라(與物爲春)”고 말한 바 있다. 〈장자〉의 덕충부 편에는 “마음이 조화롭고 즐거워 타자와 연결되며, 그 즐거움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밤낮으로 끊임없이 타자와 더불어 ‘봄’이 되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다. 여기서 ‘봄’은 타인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공존의 상태를 말한다. 정치권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우리의 정치는 아직 상대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이 나라를 이끌어갈 정치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선이 끝나면 성찰할 타이밍도 놓치게 된다. 정치권이 진정으로 변화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바로 자기 성찰을 통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할 때다. 성찰 없이 대선에 임하고, 이념에 치우친 정치적 대립만을 반복한다면 이 나라는 또다시 슬픈 정치의 역사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이 소중한 기회를 놓친다면, 한국 정치의 회복은 한층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세종실록〉에는 성군 세종대왕조차 “잘못해서 후회한다”고 말한 기록이 10차례 이상 나온다. 그러나 세종은 단순한 후회에 그치지 않고, 철저한 자기 반성을 통해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 정치권에 필요한 것도 바로 그런 성찰의 자세다. 공자는 말했다. “잘못을 저지르고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짜 잘못이다(過而不改 是謂過矣)”라고. 제발 정치권이 반성의 시간을 갖고 과거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진정한 협치와 상생의 길을 걸어가길 바란다. 그게 대한민국이 사는 길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5-04-10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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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해외 작가 명성에 갇혀 버린 부산 디자인 정책
거리를 걷다 보면 벤치나 가로등 등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도시 시설물을 만난다. 우리는 이를 스트리트 퍼니처(street furniture)라 부른다. 공공 시설물로서 도시 및 공공 디자인의 주요 대상이기도 하다. 벤치, 가로등 외에도 버스 승강장, 교통 표지판, 신호등, 쓰레기통 등 다양한 시설물이 있다. 이들은 단순히 시설물을 넘어 도시 이미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프랑스 파리나 미국 뉴욕의 고풍스러운 가로등처럼 말이다. 특히 벤치는 단순히 앉아 쉬는 기능 외에도 사람들 간의 교류 공간으로 활용된다. 그래서 ‘도시를 보려면, 그곳의 벤치를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벤치는 도시민 삶의 질을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로 평가된다. 일본 도쿄의 롯폰기힐스에는 사용자의 편익을 고려해 다양한 디자인과 높낮이의 벤치들이 배치돼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도시가 시민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연스럽게 읽어낸다.
부산디자인진흥원은 지난해 처음으로 추진한 부산형 우수 공공 디자인 국제공모전을 통해 광안리해수욕장에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카림 라시드가 디자인한 가로등 2개와 벤치 2개를 설치한 바 있다. 라시드는 가구나 옷, 인테리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다. 한데 이곳에 설치된 그의 작품이 이용자 편의를 염두에 두고 설치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시민들은 선뜻 이 벤치에 다가가 앉질 못한다. 전문가들은 공공 디자인 설치 시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 ‘이용자의 편의성’를 꼽는다. 프랑스 작가 장 피에르 레노의 ‘생명의 원천’이라는 제목의 화분 모양 조형물이 근처에 있다 보니 벤치 보다는 예술 작품으로 먼저 다가온다. 누구나 쉽게 앉을 수 없다면 그건 이미 벤치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부산시는 지난해 11월 ‘빅 디자인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공공 디자인의 수준을 높여 부산을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공공 디자인을 업그레이드한다는 것이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었는지 매우 궁금하다. 부산디자인진흥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수억 원을 들여 부산형 우수 공공 디자인 국제공모전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시는 56억 원을 투입해 해외 유명 작가의 공공 시설물을 설치할 계획이다. 이 중에는 지방채도 포함돼 있다. 제대로 된 산업이 없어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지역을 떠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시기에 굳이 빚까지 얻어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거리에 설치해야 하는지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침체된 도시를 깨어나게 하고 지루한 거리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데는 한 번의 자극으로 족하다. 공공 시설물을 언제까지 해외 유명 작가의 값비싼 작품으로 채울 것인가.
도시의 공공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이다. 성공한 도시는 공공 디자인의 중심에 사람을 두고 사람으로부터 디자인을 시작한다. 즉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디자인 요소를 먼저 구축하고 이후에 사람을 맞추는 작업이 아니라 주민 또는 시민들의 요구와 형태를 먼저 분석해 디자인 결과물을 만든다. 아무리 훌륭한 무대 디자인도 배우가 연기하기 전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연극도 관객 없이는 의미가 없다. 스트리트 퍼니처 같은 공공 디자인도 이를 이용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고 사람과의 교감에서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을 부산시가 깨달았으면 한다. 디자인은 다른 나라의 좋은 사례를 참고할 순 있다. 하지만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특성에 맞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외부로부터의 ‘이식된 상징’을 강조하면서 엉뚱한 가치를 강요하기 일쑤다. 이 과정에서 도시의 정체성과 공공성은 소홀히 취급된다.
공공 디자인은 공공을 위한 디자인으로, 시민의 창조성을 활용하고 개발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하지만 부산시는 글로벌 허브도시를 추구하면서 지나치게 해외 작가의 명성에 의존하는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설령 지역 작가들이 세계적인 수준에 조금 못 미치더라도 이를 끌어올릴 기회의 장을 제공하는 것은 지자체가 할 몫이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부산은 우리의 삶이 구현되는 소중한 장소다. 그렇기에 지역에 대한 애정과 지원이 더없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글로벌화라는 이름 아래 지역 문화는 점점 더 식민지화될 것이다.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탈리아 베네치아, 그리스 산토리니 등 지역성을 살려 성공한 도시는 많다. 공공 디자인이나 도시 디자인은 그 지역이나 도시의 고유성을 담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자긍심이 되어야 한다. 이게 지속 가능한 도시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5-03-1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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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설계 지침서 없이 국제공모 하려 했나
모든 운동 경기에는 규칙(rule)이 있다. 그걸 지키지 않으면 경기가 진행될 수 없고 승부를 가릴 수도 없다. 규칙이 없는 경기는 있을 수 없지만, 설령 규칙 없는 경기가 있다 해도 그 경기는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건축에서는 어떨까? 설계 지침서가 규칙 역할을 한다. 설계 지침서는 건물을 설계할 때 지켜야 할 사항을 명시한 지침서다. 이게 있어야 여기에 준해 관련 건물을 지을 수 있다. 흔히 건축 설계공모나 설계용역 등에 사용한다.
부산시와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는 지난달 13일 부산항 북항 제1부두 내 물류창고 등을 대상으로 ‘글로벌 창업허브 부산’ 건립을 위한 국제설계공모를 시작했다. 2026년 상반기 개소를 목표로 북항 1부두 내 창고를 리모델링해 프랑스 파리의 ‘스테이션 F’처럼 세계적인 창업 공간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 공모는 1단계 지명 신청과 2단계 제안 공모를 거쳐 최종 설계안을 선정하기로 했다. 이에 지난달 24일까지 지명 신청서를 받아 2월 3일 지명 건축가를 선정하고, 5일부터 이들이 낸 설계안을 대상으로 심사를 해 3월 말에 최종 당선자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37개 팀의 지명 신청을 받아 지난 3일 제안 공모에 참여할 5개 팀을 선정한 뒤 2단계에서 사실상 멈춰 있는 상태다. 1단계 지침서는 공모 이전에 마련됐지만 정작 2단계 제안 공모에 적용될 설계 지침서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지역의 한 건축가는 “2단계 설계 지침서가 준비되지 않아 공모 일정이 지연된 것은 국제적으로 우사”라고 지적했다. 여러 국제설계공모를 보더라도 설계 지침서 미비를 이유로 당초 일정이 늦춰지는 일은 거의 없다. 사업 주관사인 부산시로서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공모 대상지인 부산항 북항 1부두와 물류창고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1912년 준공된 1부두는 부산과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또한 이곳은 과거의 아픔과 희망이 공존하는 장소로 부산시문화유산으로 주목받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 중이다. 이런 공간인 만큼 국제설계공모에 앞서 보존과 리모델링의 범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설계 지침서에 구체적으로 명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1단계 지명 신청 공모에서 밝혀진 대로 물류창고의 연면적을 기존 4213㎡에서 9128㎡로 확장하는 계획이라면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안내도 2단계 설계 지침서에 명확히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건물 증축(복층)과 구조 보강이 필요한데 이는 간단하지 않은 작업이다. 또한 문화유산을 다뤄본 경험이 없는 업체가 선정되었을 경우 협업체를 둘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부산시와 발주처는 이러한 사항들이 충분히 정리된 상태에서 국제설계공모를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2단계 제안 공모 전에 설계 지침서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관련 부서 간 협의나 전문가들과의 심도 깊은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부산시와 창조경제혁신센터는 뒤늦게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 제안 공모에 참여할 5개 팀에 양해를 구하고 공모 진행을 일시 중지시켜 놓았다. 애초 부산시나 센터는 1단계 공모 후에 논의해도 충분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단순한 대지에 건물을 세우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결국 경기 규칙도 제대로 만들지 않고 팀만 먼저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 셈이다.
1부두 창고에 글로벌 창업허브가 굳이 들어가야 할 당위성도 여전히 부족하다. 과거 도시들은 외적 성장에 집중했으나 현재는 문화예술을 바탕으로 창조적 콘텐츠를 만들어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 요코하마 아카렌가 창고 사례는 부산이 참고할 만하다. 원래 선박 세관 검사장이었던 이 창고는 도시 재개발을 통해 역사성을 살리며 문화와 상업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요코하마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로 자리 잡았다. 도시가 사랑받기 위해선 시민과 방문자가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필요하다. 요코하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아카렌가 창고를 활용해 사람을 모이게 하고 공간을 변화시키며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부산항 1부두 창고가 아카렌가 창고를 뛰어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려면 부산시의 고민이 좀 더 필요하다.
21세기 도시는 창조성 안에서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며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도시의 정체성을 잘 담은 도시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사람의 성격 유형을 나타내는 MBTI처럼 도시에도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 도시 정체성을 찾아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부산시의 도시 정책, 그리고 행정의 약점은 이런 도시설계를 가볍게 여긴다는 점이다.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고민하고 숙고해야 한다. 도시설계에 대한 부산시의 고민이 더 세밀하고 깊었으면 한다.
2025-02-2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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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부산 주거 공간, 그 혁신을 기다리며
그룹 블랙핑크의 로제가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협업한 히트곡 ‘아파트(APT.)’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에서 지난주 5위에 올랐다. 새해 벽두에는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100에서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발매 3개월 만에 ‘아파트’가 다시 역주행하며 그 인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덕분에 윤수일의 ‘아파트’에 대한 재조명은 물론이고 주거 공간인 아파트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이를 계기로 ‘로제의 아파트발 주거 공간 혁신’도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파트하면 부산을 빼놓을 수 없다. 데이터만 보더라도 부산은 빠르게 아파트화되고 있는 도시다. 2년 전 주택 인허가 물량의 98%가 아파트였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올해 부산 지역 아파트 분양 물량은 최대 1만 8000가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미분양 사태가 일어나고 자재비가 올라도 여전히 아파트 물량은 쏟아진다는 얘기다. 이대로라면 아파트가 도시를 빼곡하게 채울 날이 머지않았다. 천편일률적인 형태에 고층화 단지화까지. 이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부산은 빠르게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 일찍이 독일의 실존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사람들은 보통 남들이 살아가는 방식, 즉 평균적 일상성을 따라 살아간다. 대개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 자신보다는 자기 밖의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 잡담하고, 그들을 따라 애매하게 행동함으로써 서로 동질화하고 평균화를 꾀한다”고 말했다. 마치 우리의 주거 선호 양상이 이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는 분명 생활의 편리를 가져왔다. 하지만 도시가 아파트로 채워지면서 그 장점은 상쇄될 만큼 부정적인 요소도 많다. 주거 공간의 획일화는 도시의 단조로움을 초래하고 그 생기마저 앗아가고 있다. 여기에다 우리 사회는 저출생, 고령화, 인구 감소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가족 해체가 진행되고, 더는 국가가 이를 대신해 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제는 기존의 주택과 공동체 모델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을 고민해야 할 때다. 속된 말로 ‘돈 되는’ 아파트만 지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어쩌면 그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지금은 부산의 주거 형태가 단조로워졌지만, 과거 30~40년 전만 해도 부산은 달랐다. 당시에는 나름대로 공동체가 살아 있었다. 1970~1980년대에 지어진 부산의 아파트는 대부분 5층짜리였고, 전원도시 개념을 도입해 단지 내 넓은 공간과 풍부한 녹지, 격자형 도로가 설치되었다. 1980년대에는 자연 지형을 활용한 테라스형 아파트도 부산에서 시작됐다. 특히 망미주공 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테라스형 아파트로 지금 봐도 조경이나 공간 효율성에서 손색이 없다. 수정동 국일주택, 남부민동 동천빌라 등도 이 시대의 혁신적인 공동 주택이었다. 이들은 대지를 무작정 깎아내지 않고, 산복도로의 경사면이나 굴곡을 그대로 살려 자연과 어우러지는 주거 형태를 구현했다.
완전한 주거 공간이라고 할 순 없지만, 지난해 부산의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 대상으로 선정된 관광숙박시설인 ‘영도 콜렉티브 힐스’는 구도심 지역에서 공동 주택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던져주고 있다. 전통적인 수직적 호텔 구조에서 벗어나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수평적 호텔 형태를 도입한 이 건물은 주변 구도심 지역과 잘 어우러지도록 디자인됐다. 이 프로젝트는 전문가들로부터 “부산의 빈집 문제와 인구소멸 위기 지역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부산의 주거 공간이 나아갈 방향은 경기도 성남 판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난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이 설계한 판교하우징은 각 건물을 연결하는 공동 덱을 2층에 설치해 이웃들이 모임을 갖거나 놀이터, 정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하이데거는 “깊은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실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존이란 다른 사람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존재 가능성을 기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주거 공간에 대입해 보면, 획일적인 아파트 대신 사람들이 자기만의 삶의 방식에 맞춘 공간을 설계하고 구축하는 것을 실존이라 할 수 있다. 이제라도 부산의 주거 공간이 지역의 지형과 특성을 살린 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아울러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모델도 필요하다. 1980년대의 특별한 공동 주택 실험들을 재조명하고, 여기에 안전과 창의성이 더해진다면 훨씬 다양한 주거 공간이 탄생할 것이다. 부산의 주거 공간 혁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 혁신을 기다린다.
2025-01-1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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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지금 이 순간, '시민 불복종'이 답이다
“불의한 정부가 또 다른 불의의 하수인이 되기를 요구한다면 나는 법을 어기라고 말하는 바이다.” 이는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명저 〈시민 불복종〉에 나오는 말이다. 현대 민주국가는 법에 따른 지배를 확립하면서 공정성과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정의로운 국가를 보장할 수는 없다. 불의한 정부가 등장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시민 불복종’은 종종 정부의 부당한 요구와 명령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쓰인다. 이 책이 출간된 지 170여 년이 지났지만, 소로의 말은 최근의 ‘12·3 비상계엄’ 정국과 맞물려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지난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은 뜬금없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국회의 신속한 대처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위헌적이고 위법한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특히 윤 대통령이 국회의사당에 계엄군을 투입해 국회의원들을 밖으로 끌어내라고 지시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이는 부조리한 국가권력에 의한 사실상의 헌정 유린이었다. 일부 국무위원과 군, 경찰 고위 관계자들은 이러한 불의에 동조했으며 여당 의원들 또한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계엄을 선포한 윤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은 지난 7일 대다수 여당 의원의 표결 불참으로 무산됐다. 대통령의 위헌적 행동에 대해 국회가 탄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대부분의 여당 의원은 당파에 갇혀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국민 대신 대통령을 택하고, 권력의 그늘로 숨어들었다.
14일 오후 윤 대통령 탄핵안이 다시 표결에 부쳐진다. 국민의 눈과 귀가 온통 여기에 쏠릴 것이다. 표결 무산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지만 여당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상황 인식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2일 계엄 관련 대국민 담화에서 그는 “헌정질서와 국헌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비상조치였다”라고 했다. 스스로 탄핵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인간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권력을 뺏긴 걸 더 오래 기억한다”고 했다. 이게 권력의 속성이지만 여당은 알아야 한다. 여전히 정권이나 국가권력을 지키려 한다면, 오히려 당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국민의 시선은 차갑고 따갑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라 했다. 죽기를 각오해야 그나마 당이라도 존립할 수 있다. 소로는 “개인에게 양심보다 다수가 우선이라면 도대체 양심을 무엇에 쓰라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의 양심적인 인간이다”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 여당 의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다. 헌법 제46조에 따르면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에 우선해 양심에 따라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대통령이 위헌적인 계엄을 선포한 지금, 여당 의원들이 정당법을 들먹이며 당론 뒤에 숨는다면 이는 진정한 입법기관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당론이 불의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거나 불의한 결정이라면 소로의 말처럼 자신의 양심을 되돌아봐야 한다. 만약 이래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계엄령 발령 후 불법과 불의에 대항해 국회로 달려온 시민들의 행동을 본받아야 한다. 국회 앞에 집결한 시민들은 군경과 그들의 차량을 저지하며 저항하지 않았던가.
여당이 윤 대통령에 기대어 새로운 국면 전환이 있기를 은근히 바란다면, 이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설령 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주장하듯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지킬 목적으로 계엄을 선포했다 하더라도, 이미 그것이 국격의 추락과 이로 인한 국민의 상처와 아픔을 상쇄할 수는 없다. 국민을 처단의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것 자체가 지도자의 자격을 이미 잃어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탄핵 표결 불참이나 탄핵 반대는 자살골에 불과하다. 여당이 미적거리더라도 결국 시간에 달렸지 탄핵을 피할 순 없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국가의 혼란만 가중될 뿐이며 국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국민들의 관심 속에 2016년 잠시 귀국한 자리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시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이 순간, 그 시민의 자세가 여당에 절실히 필요하다. 앞서 안철수 의원처럼 양심에 따라 소신투표를 해야 한다. 개인의 양심과 헌법적 책임, 그리고 국민에 대한 진정한 책임감으로 말이다. 다가오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여당 의원들이 양심을 따르기를 바란다. 불의·불법에 복종한다면, 당의 미래도 없다. 나아가 여당은 이 정국을 만든 것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더 늦기 전에 대국민 사과도 해야 한다. 이게 느닷없이 갇혀버린 ‘윤석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다.
2024-12-1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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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BIFF '서른 즈음에' 길을 묻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30년 전에 발매된 가수 김광석의 4집 앨범 수록곡 ‘서른 즈음에’의 가사 중 일부다. 1996년 남포동 골목에서 쏘아 올린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지난달 스물아홉 번째 항해를 마쳤다. 그동안 BIFF는 부산의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시아 영화제 중 후발 주자로 출발했지만 빠른 시간 안에 세계적인 영화제로 성장하며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BIFF의 여정이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2014년에는 영화 ‘다이빙벨’ 상영 논란으로 위기를 맞았고, 지난해에는 지도부 사퇴 등 내홍도 겪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BIFF는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노력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통상적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본다면 내년이면 BIFF는 한 세대를 맞는다. 서른 돌은 한 시대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30년을 준비하는 출발점이다. 이에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BIFF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타 장르와의 연계다. 또 다른 하나는 주변 공간의 활용이다. 특히 타 장르와의 연계는 BIFF의 확장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제 BIFF는 단순한 영화 행사가 아니다. 부산과 이 시대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지금까지 BIFF는 영화라는 틀 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영화인만 즐기는 축제라는 지적이 이를 말해 준다. BIFF는 영화 축제를 넘어 문화 축제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제 개폐막식 때 영화인뿐만 아니라 지역의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해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영화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BIFF는 모든 게 영화로 시작해 영화로 끝난다”고 얘기할 정도다. 이는 영화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는 뼈 있는 충고이기도 하다. 이제는 ‘비욘드 시네마(Beyond Cinema)’를 추구하며 타 장르와의 연계성을 강화해야 한다. 영화제 기간 영화의전당뿐만 아니라 부산시립미술관이나 복합문화공간 F1963에서도 영화 관련 주제 전시나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 개폐회식 때 부산 시립교향악단의 선율을 감상하지 못하란 법도 없다. 이렇게 영화와 다른 예술 장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문화의 바다는 BIFF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매년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영국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의 여름 임시 별관을 설계해 건축의 최신 트렌드를 선보이는 전시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완성된 파빌리온이 서펜타인 갤러리에 남아 건축과 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 작품으로 거듭난다. 그동안 자하 하디드, 프랭크 게리 등 유명 건축가들이 참여했으며, 올해는 한국의 조민석 건축가가 선정돼 그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BIFF에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BIFF의 ‘배우 특별전’을 서펜타인 파빌리온처럼 기획해 보는 것이다. 국내외 유망 건축가들을 통해 배우 특별전을 파빌리온 형태로 영화의전당 앞 APEC 나루공원에 설치해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게 한다면, BIFF는 더욱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멋진 건축물이 모여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과 같다. 또한 이러한 파빌리온은 시민들에게 ‘일상 속 영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영화의전당이 건물 앞 도로 지하화를 통해 APEC 나루공원과 수영강에 이르는 ‘영화의광장’으로 진화 발전하는 만큼 이에 대한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 단절돼 있던 길을 영화라는 끈으로 이어주면 금상첨화다. 이를테면 BIFF 개막식 때 초청 배우들이 배를 타고 수영강을 통해 영화의전당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수변 공간을 활용한 이벤트를 추진하면 BIFF의 인지도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 밖에 F1963의 현대모터스 전시관처럼 기업 유치를 통해 1층에는 자동차 전시관, 2층에는 영화관을 만들어 공간의 확장을 가져오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 영화의전당 인근 빈 공간을 활용하면 된다.
몇몇 영화인들은 “BIFF가 오로지 영화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융복합을 통한 확장이 필요하다. 이제는 영화를 넘어 문화, 월드 비전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이러한 제안은 BIFF가 서른 돌을 맞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나의 가슴은 설렌다/ 내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나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니/ 나 늙어진 뒤에도 제발 그랬으면.’ 영국의 계관시인 W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다. BIFF가 그런 설렘의 대상이면 좋겠다. BIFF의 ‘서른’을 기대한다.
2024-11-0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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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000만 원 예산이면 어르신이 즐겁다 [정달식의 일필일침]
“뭘 사고 싶어도, 요즘은 시장 보기도 힘들다. 차 타는 것도 겁나고 동네 이웃 차가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얻어 타고 가서 물건을 사 오곤 하는데…. ” 올 추석 때 시골 고향에 갔을 때 팔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께서 하신 얘기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일전에 온갖 것을 싣고 동네마다 다니며 물건을 파는 트럭을 TV에서 봤는데, 우리 마을에도 그런 차가 다니면 좋겠다”라며 말을 맺으셨다.
이제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은 70~80대 이상의 고령자가 주를 이루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이와 함께 식료품을 살 수 있는 가게조차 사라진 마을이 늘고 있다. 이런 곳을 흔히 ‘식품 사막(food desert)’이라고 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소매점이 하나도 없는 마을이 무려 73.5%에 달한다. 이는 농어촌 마을 대략 네 곳 중 세 곳은 내부에 구멍가게 하나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필품을 사려면 꼼짝없이 차를 타고 대형 마트가 있는 큰 동네나 면 소재지로 나가야 할 판이다. 어떤 이들은 필요한 물건을 배달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런 서비스는 도시에서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일 뿐이다. 농어촌 어르신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단순히 편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서비스다.
어머니가 얘기한 트럭은 가게가 없는 마을을 순회하는 이동식 마트 개념의 만물 트럭이다. 고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농어촌 지역에는 이런 서비스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농어촌 지역 지방자치단체는 아직 만물 트럭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청년 인구 유입을 위한 정책들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지만, 정작 지역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정책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군 단위 기초지자체에서 지역 어르신들이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이동식 만물 트럭’을 운영해 볼 것을 제안한다.
군 단위로 보자면 만물 트럭 1~2대 정도면 충분하다. 3.5톤가량의 냉동·냉장 기능을 갖춘 트럭이면 더 좋다. 신선식품은 물론이고 온갖 일상 잡화를 싣고 1주일 혹은 10일 간격으로 마을을 순회하면 된다. 문제는 누가 만물 트럭을 몰고 물건을 판매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지자체 사회복지팀을 활용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만물 트럭을 운영해 본 사람을 공모해 월급제로 운영할 수도 있다. 월급제로 하면서 수익 일부를 판매자가 가져가는 방식도 가능하다. 차량 구입비와 설치비 등을 제외하고 지자체가 월 1000만 원 정도의 예산을 확보하면, 지역 어르신들의 삶이 한결 윤택하고 즐거울 수 있단 얘기다. 만물 트럭은 판매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때론 형광등 교체 등의 간단한 도우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트럭은 마을 단위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다른 동네로 가면 된다. 만물 트럭에 사회복지사가 동행한다면, 단순히 생필품을 판매하는 차원을 넘어 마을 어르신의 건강이나 안부를 확인하는 현장형 사회복지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 만물 트럭은 시골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부산 기장군이나 강서구처럼 도농복합지역에도 요긴하다. 지역 저소득·홀몸 어르신이나,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많은 곳이라면 더 좋다.
예산이 부담돼 지자체가 선뜻 나서기 어렵다면 지역 농협과 손잡고 할 수도 있다. 물품 공급 체계와 탑차 등을 갖추고 있어 연계가 가능하다. 일부 지역에선 농협이나 지역협의체가 이동식 트럭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웃 일본은 식품 사막을 겪는 이들을 위해 일찍부터 이동 판매 차량을 운영하고 있는데, 2023년 기준 1200대에 달할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농림축산식품부가 소위 이동식 만물 트럭 형태의 ‘가가호호 농촌 이동장터’ 시범 운영을 몇몇 지자체와 협의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지자체 차원에서 만물 트럭을 직접 운영하는 곳은 없다.
지방소멸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급격한 인구 감소는 이제 시골 마을의 생활 기반마저 위협하고 있다. 손님이 줄어들면서 가게가 문을 닫고, 이에 인구는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도, 지역 농협도 더 이상 팔짱만 끼고 있어선 안 된다. 만물 트럭은 단순한 생필품 제공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어르신들이 다시 활기를 찾고,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오늘도 농어촌의 어르신들은 2022년 tvN에서 방영된 ‘우리들의 블루스’ 속 만물 트럭의 만물상(이병헌 분)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4-10-08 [17: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