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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해외 작가 명성에 갇혀 버린 부산 디자인 정책
거리를 걷다 보면 벤치나 가로등 등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가는 도시 시설물을 만난다. 우리는 이를 스트리트 퍼니처(street furniture)라 부른다. 공공 시설물로서 도시 및 공공 디자인의 주요 대상이기도 하다. 벤치, 가로등 외에도 버스 승강장, 교통 표지판, 신호등, 쓰레기통 등 다양한 시설물이 있다. 이들은 단순히 시설물을 넘어 도시 이미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이를테면 프랑스 파리나 미국 뉴욕의 고풍스러운 가로등처럼 말이다. 특히 벤치는 단순히 앉아 쉬는 기능 외에도 사람들 간의 교류 공간으로 활용된다. 그래서 ‘도시를 보려면, 그곳의 벤치를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만큼 벤치는 도시민 삶의 질을 보여주는 중요한 척도로 평가된다. 일본 도쿄의 롯폰기힐스에는 사용자의 편익을 고려해 다양한 디자인과 높낮이의 벤치들이 배치돼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도시가 시민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연스럽게 읽어낸다.
부산디자인진흥원은 지난해 처음으로 추진한 부산형 우수 공공 디자인 국제공모전을 통해 광안리해수욕장에 세계적인 산업디자이너 카림 라시드가 디자인한 가로등 2개와 벤치 2개를 설치한 바 있다. 라시드는 가구나 옷, 인테리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활동하고 있는 디자이너다. 한데 이곳에 설치된 그의 작품이 이용자 편의를 염두에 두고 설치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된다. 시민들은 선뜻 이 벤치에 다가가 앉질 못한다. 전문가들은 공공 디자인 설치 시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 ‘이용자의 편의성’를 꼽는다. 프랑스 작가 장 피에르 레노의 ‘생명의 원천’이라는 제목의 화분 모양 조형물이 근처에 있다 보니 벤치 보다는 예술 작품으로 먼저 다가온다. 누구나 쉽게 앉을 수 없다면 그건 이미 벤치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부산시는 지난해 11월 ‘빅 디자인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공공 디자인의 수준을 높여 부산을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겠다고 했다. 하지만 공공 디자인을 업그레이드한다는 것이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었는지 매우 궁금하다. 부산디자인진흥원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수억 원을 들여 부산형 우수 공공 디자인 국제공모전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시는 56억 원을 투입해 해외 유명 작가의 공공 시설물을 설치할 계획이다. 이 중에는 지방채도 포함돼 있다. 제대로 된 산업이 없어 청년들이 일자리를 찾아 지역을 떠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 시기에 굳이 빚까지 얻어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거리에 설치해야 하는지 쉽게 납득이 가질 않는다. 침체된 도시를 깨어나게 하고 지루한 거리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데는 한 번의 자극으로 족하다. 공공 시설물을 언제까지 해외 유명 작가의 값비싼 작품으로 채울 것인가.
도시의 공공 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이다. 성공한 도시는 공공 디자인의 중심에 사람을 두고 사람으로부터 디자인을 시작한다. 즉 물리적이고 시각적인 디자인 요소를 먼저 구축하고 이후에 사람을 맞추는 작업이 아니라 주민 또는 시민들의 요구와 형태를 먼저 분석해 디자인 결과물을 만든다. 아무리 훌륭한 무대 디자인도 배우가 연기하기 전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연극도 관객 없이는 의미가 없다. 스트리트 퍼니처 같은 공공 디자인도 이를 이용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에 의해 완성되고 사람과의 교감에서 진가를 발휘한다는 것을 부산시가 깨달았으면 한다. 디자인은 다른 나라의 좋은 사례를 참고할 순 있다. 하지만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특성에 맞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외부로부터의 ‘이식된 상징’을 강조하면서 엉뚱한 가치를 강요하기 일쑤다. 이 과정에서 도시의 정체성과 공공성은 소홀히 취급된다.
공공 디자인은 공공을 위한 디자인으로, 시민의 창조성을 활용하고 개발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하지만 부산시는 글로벌 허브도시를 추구하면서 지나치게 해외 작가의 명성에 의존하는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설령 지역 작가들이 세계적인 수준에 조금 못 미치더라도 이를 끌어올릴 기회의 장을 제공하는 것은 지자체가 할 몫이다. 우리가 발 딛고 있는 부산은 우리의 삶이 구현되는 소중한 장소다. 그렇기에 지역에 대한 애정과 지원이 더없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글로벌화라는 이름 아래 지역 문화는 점점 더 식민지화될 것이다. 경계해야 하는 이유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탈리아 베네치아, 그리스 산토리니 등 지역성을 살려 성공한 도시는 많다. 공공 디자인이나 도시 디자인은 그 지역이나 도시의 고유성을 담아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자긍심이 되어야 한다. 이게 지속 가능한 도시 경쟁력을 확보하는 길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5-03-11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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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설계 지침서 없이 국제공모 하려 했나
모든 운동 경기에는 규칙(rule)이 있다. 그걸 지키지 않으면 경기가 진행될 수 없고 승부를 가릴 수도 없다. 규칙이 없는 경기는 있을 수 없지만, 설령 규칙 없는 경기가 있다 해도 그 경기는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건축에서는 어떨까? 설계 지침서가 규칙 역할을 한다. 설계 지침서는 건물을 설계할 때 지켜야 할 사항을 명시한 지침서다. 이게 있어야 여기에 준해 관련 건물을 지을 수 있다. 흔히 건축 설계공모나 설계용역 등에 사용한다.
부산시와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는 지난달 13일 부산항 북항 제1부두 내 물류창고 등을 대상으로 ‘글로벌 창업허브 부산’ 건립을 위한 국제설계공모를 시작했다. 2026년 상반기 개소를 목표로 북항 1부두 내 창고를 리모델링해 프랑스 파리의 ‘스테이션 F’처럼 세계적인 창업 공간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 공모는 1단계 지명 신청과 2단계 제안 공모를 거쳐 최종 설계안을 선정하기로 했다. 이에 지난달 24일까지 지명 신청서를 받아 2월 3일 지명 건축가를 선정하고, 5일부터 이들이 낸 설계안을 대상으로 심사를 해 3월 말에 최종 당선자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37개 팀의 지명 신청을 받아 지난 3일 제안 공모에 참여할 5개 팀을 선정한 뒤 2단계에서 사실상 멈춰 있는 상태다. 1단계 지침서는 공모 이전에 마련됐지만 정작 2단계 제안 공모에 적용될 설계 지침서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지역의 한 건축가는 “2단계 설계 지침서가 준비되지 않아 공모 일정이 지연된 것은 국제적으로 우사”라고 지적했다. 여러 국제설계공모를 보더라도 설계 지침서 미비를 이유로 당초 일정이 늦춰지는 일은 거의 없다. 사업 주관사인 부산시로서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공모 대상지인 부산항 북항 1부두와 물류창고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1912년 준공된 1부두는 부산과 외부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관문이었다. 또한 이곳은 과거의 아픔과 희망이 공존하는 장소로 부산시문화유산으로 주목받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준비 중이다. 이런 공간인 만큼 국제설계공모에 앞서 보존과 리모델링의 범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설계 지침서에 구체적으로 명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1단계 지명 신청 공모에서 밝혀진 대로 물류창고의 연면적을 기존 4213㎡에서 9128㎡로 확장하는 계획이라면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안내도 2단계 설계 지침서에 명확히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건물 증축(복층)과 구조 보강이 필요한데 이는 간단하지 않은 작업이다. 또한 문화유산을 다뤄본 경험이 없는 업체가 선정되었을 경우 협업체를 둘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하다. 부산시와 발주처는 이러한 사항들이 충분히 정리된 상태에서 국제설계공모를 진행해야 했다. 하지만 2단계 제안 공모 전에 설계 지침서를 마련하지 못한 것은 관련 부서 간 협의나 전문가들과의 심도 깊은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부산시와 창조경제혁신센터는 뒤늦게 이런 문제점을 인지하고 제안 공모에 참여할 5개 팀에 양해를 구하고 공모 진행을 일시 중지시켜 놓았다. 애초 부산시나 센터는 1단계 공모 후에 논의해도 충분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단순한 대지에 건물을 세우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결국 경기 규칙도 제대로 만들지 않고 팀만 먼저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 셈이다.
1부두 창고에 글로벌 창업허브가 굳이 들어가야 할 당위성도 여전히 부족하다. 과거 도시들은 외적 성장에 집중했으나 현재는 문화예술을 바탕으로 창조적 콘텐츠를 만들어 고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일본 요코하마 아카렌가 창고 사례는 부산이 참고할 만하다. 원래 선박 세관 검사장이었던 이 창고는 도시 재개발을 통해 역사성을 살리며 문화와 상업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이제는 요코하마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로 자리 잡았다. 도시가 사랑받기 위해선 시민과 방문자가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필요하다. 요코하마는 역사와 스토리가 있는 아카렌가 창고를 활용해 사람을 모이게 하고 공간을 변화시키며 도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부산항 1부두 창고가 아카렌가 창고를 뛰어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려면 부산시의 고민이 좀 더 필요하다.
21세기 도시는 창조성 안에서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며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도시의 정체성을 잘 담은 도시 브랜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사람의 성격 유형을 나타내는 MBTI처럼 도시에도 고유한 정체성이 있다. 도시 정체성을 찾아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부산시의 도시 정책, 그리고 행정의 약점은 이런 도시설계를 가볍게 여긴다는 점이다.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고민하고 숙고해야 한다. 도시설계에 대한 부산시의 고민이 더 세밀하고 깊었으면 한다.
2025-02-20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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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부산 주거 공간, 그 혁신을 기다리며
그룹 블랙핑크의 로제가 팝스타 브루노 마스와 협업한 히트곡 ‘아파트(APT.)’가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에서 지난주 5위에 올랐다. 새해 벽두에는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100에서 2위에 오르기도 했다. 발매 3개월 만에 ‘아파트’가 다시 역주행하며 그 인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덕분에 윤수일의 ‘아파트’에 대한 재조명은 물론이고 주거 공간인 아파트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다. 이를 계기로 ‘로제의 아파트발 주거 공간 혁신’도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파트하면 부산을 빼놓을 수 없다. 데이터만 보더라도 부산은 빠르게 아파트화되고 있는 도시다. 2년 전 주택 인허가 물량의 98%가 아파트였다.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올해 부산 지역 아파트 분양 물량은 최대 1만 8000가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미분양 사태가 일어나고 자재비가 올라도 여전히 아파트 물량은 쏟아진다는 얘기다. 이대로라면 아파트가 도시를 빼곡하게 채울 날이 머지않았다. 천편일률적인 형태에 고층화 단지화까지. 이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부산은 빠르게 획일화되어 가고 있다. 일찍이 독일의 실존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사람들은 보통 남들이 살아가는 방식, 즉 평균적 일상성을 따라 살아간다. 대개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 자신보다는 자기 밖의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며,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따라 잡담하고, 그들을 따라 애매하게 행동함으로써 서로 동질화하고 평균화를 꾀한다”고 말했다. 마치 우리의 주거 선호 양상이 이와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파트는 분명 생활의 편리를 가져왔다. 하지만 도시가 아파트로 채워지면서 그 장점은 상쇄될 만큼 부정적인 요소도 많다. 주거 공간의 획일화는 도시의 단조로움을 초래하고 그 생기마저 앗아가고 있다. 여기에다 우리 사회는 저출생, 고령화, 인구 감소 등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가족 해체가 진행되고, 더는 국가가 이를 대신해 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제는 기존의 주택과 공동체 모델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간을 고민해야 할 때다. 속된 말로 ‘돈 되는’ 아파트만 지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어쩌면 그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지금은 부산의 주거 형태가 단조로워졌지만, 과거 30~40년 전만 해도 부산은 달랐다. 당시에는 나름대로 공동체가 살아 있었다. 1970~1980년대에 지어진 부산의 아파트는 대부분 5층짜리였고, 전원도시 개념을 도입해 단지 내 넓은 공간과 풍부한 녹지, 격자형 도로가 설치되었다. 1980년대에는 자연 지형을 활용한 테라스형 아파트도 부산에서 시작됐다. 특히 망미주공 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테라스형 아파트로 지금 봐도 조경이나 공간 효율성에서 손색이 없다. 수정동 국일주택, 남부민동 동천빌라 등도 이 시대의 혁신적인 공동 주택이었다. 이들은 대지를 무작정 깎아내지 않고, 산복도로의 경사면이나 굴곡을 그대로 살려 자연과 어우러지는 주거 형태를 구현했다.
완전한 주거 공간이라고 할 순 없지만, 지난해 부산의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 대상으로 선정된 관광숙박시설인 ‘영도 콜렉티브 힐스’는 구도심 지역에서 공동 주택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던져주고 있다. 전통적인 수직적 호텔 구조에서 벗어나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수평적 호텔 형태를 도입한 이 건물은 주변 구도심 지역과 잘 어우러지도록 디자인됐다. 이 프로젝트는 전문가들로부터 “부산의 빈집 문제와 인구소멸 위기 지역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부산의 주거 공간이 나아갈 방향은 경기도 성남 판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난해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일본 건축가 야마모토 리켄이 설계한 판교하우징은 각 건물을 연결하는 공동 덱을 2층에 설치해 이웃들이 모임을 갖거나 놀이터, 정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하이데거는 “깊은 권태를 벗어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실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존이란 다른 사람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존재 가능성을 기획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주거 공간에 대입해 보면, 획일적인 아파트 대신 사람들이 자기만의 삶의 방식에 맞춘 공간을 설계하고 구축하는 것을 실존이라 할 수 있다. 이제라도 부산의 주거 공간이 지역의 지형과 특성을 살린 공간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아울러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혁신적인 모델도 필요하다. 1980년대의 특별한 공동 주택 실험들을 재조명하고, 여기에 안전과 창의성이 더해진다면 훨씬 다양한 주거 공간이 탄생할 것이다. 부산의 주거 공간 혁신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 혁신을 기다린다.
2025-01-1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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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지금 이 순간, '시민 불복종'이 답이다
“불의한 정부가 또 다른 불의의 하수인이 되기를 요구한다면 나는 법을 어기라고 말하는 바이다.” 이는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명저 〈시민 불복종〉에 나오는 말이다. 현대 민주국가는 법에 따른 지배를 확립하면서 공정성과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정의로운 국가를 보장할 수는 없다. 불의한 정부가 등장할 수 있는 현실 속에서 ‘시민 불복종’은 종종 정부의 부당한 요구와 명령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쓰인다. 이 책이 출간된 지 170여 년이 지났지만, 소로의 말은 최근의 ‘12·3 비상계엄’ 정국과 맞물려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지난 3일 밤, 윤석열 대통령은 뜬금없이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국회의 신속한 대처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면서 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됐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위헌적이고 위법한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특히 윤 대통령이 국회의사당에 계엄군을 투입해 국회의원들을 밖으로 끌어내라고 지시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이는 부조리한 국가권력에 의한 사실상의 헌정 유린이었다. 일부 국무위원과 군, 경찰 고위 관계자들은 이러한 불의에 동조했으며 여당 의원들 또한 이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 결과 계엄을 선포한 윤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은 지난 7일 대다수 여당 의원의 표결 불참으로 무산됐다. 대통령의 위헌적 행동에 대해 국회가 탄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지만, 대부분의 여당 의원은 당파에 갇혀 이를 거부했다. 그들은 국민 대신 대통령을 택하고, 권력의 그늘로 숨어들었다.
14일 오후 윤 대통령 탄핵안이 다시 표결에 부쳐진다. 국민의 눈과 귀가 온통 여기에 쏠릴 것이다. 표결 무산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하지만 여당은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윤 대통령의 상황 인식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12일 계엄 관련 대국민 담화에서 그는 “헌정질서와 국헌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비상조치였다”라고 했다. 스스로 탄핵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인간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권력을 뺏긴 걸 더 오래 기억한다”고 했다. 이게 권력의 속성이지만 여당은 알아야 한다. 여전히 정권이나 국가권력을 지키려 한다면, 오히려 당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국민의 시선은 차갑고 따갑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라 했다. 죽기를 각오해야 그나마 당이라도 존립할 수 있다. 소로는 “개인에게 양심보다 다수가 우선이라면 도대체 양심을 무엇에 쓰라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단 한 사람의 양심적인 인간이다”라고 했다. 지금 이 순간 여당 의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다.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입법기관이다. 헌법 제46조에 따르면 국회의원은 국가 이익에 우선해 양심에 따라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대통령이 위헌적인 계엄을 선포한 지금, 여당 의원들이 정당법을 들먹이며 당론 뒤에 숨는다면 이는 진정한 입법기관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당론이 불의에 대한 복종을 강요하거나 불의한 결정이라면 소로의 말처럼 자신의 양심을 되돌아봐야 한다. 만약 이래도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 계엄령 발령 후 불법과 불의에 대항해 국회로 달려온 시민들의 행동을 본받아야 한다. 국회 앞에 집결한 시민들은 군경과 그들의 차량을 저지하며 저항하지 않았던가.
여당이 윤 대통령에 기대어 새로운 국면 전환이 있기를 은근히 바란다면, 이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설령 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주장하듯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지킬 목적으로 계엄을 선포했다 하더라도, 이미 그것이 국격의 추락과 이로 인한 국민의 상처와 아픔을 상쇄할 수는 없다. 국민을 처단의 대상으로 인식했다는 것 자체가 지도자의 자격을 이미 잃어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탄핵 표결 불참이나 탄핵 반대는 자살골에 불과하다. 여당이 미적거리더라도 결국 시간에 달렸지 탄핵을 피할 순 없다. 여기서 시간을 끌면 국가의 혼란만 가중될 뿐이며 국민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국민들의 관심 속에 2016년 잠시 귀국한 자리에서 “나는 대한민국의 시민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이 순간, 그 시민의 자세가 여당에 절실히 필요하다. 앞서 안철수 의원처럼 양심에 따라 소신투표를 해야 한다. 개인의 양심과 헌법적 책임, 그리고 국민에 대한 진정한 책임감으로 말이다. 다가오는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여당 의원들이 양심을 따르기를 바란다. 불의·불법에 복종한다면, 당의 미래도 없다. 나아가 여당은 이 정국을 만든 것에 일말의 책임을 느끼고 더 늦기 전에 대국민 사과도 해야 한다. 이게 느닷없이 갇혀버린 ‘윤석열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이다.
2024-12-1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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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BIFF '서른 즈음에' 길을 묻다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30년 전에 발매된 가수 김광석의 4집 앨범 수록곡 ‘서른 즈음에’의 가사 중 일부다. 1996년 남포동 골목에서 쏘아 올린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지난달 스물아홉 번째 항해를 마쳤다. 그동안 BIFF는 부산의 도시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아시아 영화제 중 후발 주자로 출발했지만 빠른 시간 안에 세계적인 영화제로 성장하며 부산을 대표하는 문화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BIFF의 여정이 항상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2014년에는 영화 ‘다이빙벨’ 상영 논란으로 위기를 맞았고, 지난해에는 지도부 사퇴 등 내홍도 겪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BIFF는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노력으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통상적으로 한 세대를 30년으로 본다면 내년이면 BIFF는 한 세대를 맞는다. 서른 돌은 한 시대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30년을 준비하는 출발점이다. 이에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BIFF의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타 장르와의 연계다. 또 다른 하나는 주변 공간의 활용이다. 특히 타 장르와의 연계는 BIFF의 확장성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이제 BIFF는 단순한 영화 행사가 아니다. 부산과 이 시대의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지금까지 BIFF는 영화라는 틀 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영화인만 즐기는 축제라는 지적이 이를 말해 준다. BIFF는 영화 축제를 넘어 문화 축제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화제 개폐막식 때 영화인뿐만 아니라 지역의 다양한 분야 전문가들을 초청해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축제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영화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BIFF는 모든 게 영화로 시작해 영화로 끝난다”고 얘기할 정도다. 이는 영화 너머를 바라봐야 한다는 뼈 있는 충고이기도 하다. 이제는 ‘비욘드 시네마(Beyond Cinema)’를 추구하며 타 장르와의 연계성을 강화해야 한다. 영화제 기간 영화의전당뿐만 아니라 부산시립미술관이나 복합문화공간 F1963에서도 영화 관련 주제 전시나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 개폐회식 때 부산 시립교향악단의 선율을 감상하지 못하란 법도 없다. 이렇게 영화와 다른 예술 장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문화의 바다는 BIFF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서펜타인 파빌리온은 매년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영국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의 여름 임시 별관을 설계해 건축의 최신 트렌드를 선보이는 전시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완성된 파빌리온이 서펜타인 갤러리에 남아 건축과 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 작품으로 거듭난다. 그동안 자하 하디드, 프랭크 게리 등 유명 건축가들이 참여했으며, 올해는 한국의 조민석 건축가가 선정돼 그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BIFF에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BIFF의 ‘배우 특별전’을 서펜타인 파빌리온처럼 기획해 보는 것이다. 국내외 유망 건축가들을 통해 배우 특별전을 파빌리온 형태로 영화의전당 앞 APEC 나루공원에 설치해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게 한다면, BIFF는 더욱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멋진 건축물이 모여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과 같다. 또한 이러한 파빌리온은 시민들에게 ‘일상 속 영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영화의전당이 건물 앞 도로 지하화를 통해 APEC 나루공원과 수영강에 이르는 ‘영화의광장’으로 진화 발전하는 만큼 이에 대한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 단절돼 있던 길을 영화라는 끈으로 이어주면 금상첨화다. 이를테면 BIFF 개막식 때 초청 배우들이 배를 타고 수영강을 통해 영화의전당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수변 공간을 활용한 이벤트를 추진하면 BIFF의 인지도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 밖에 F1963의 현대모터스 전시관처럼 기업 유치를 통해 1층에는 자동차 전시관, 2층에는 영화관을 만들어 공간의 확장을 가져오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 영화의전당 인근 빈 공간을 활용하면 된다.
몇몇 영화인들은 “BIFF가 오로지 영화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융복합을 통한 확장이 필요하다. 이제는 영화를 넘어 문화, 월드 비전까지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이러한 제안은 BIFF가 서른 돌을 맞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나의 가슴은 설렌다/ 내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나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니/ 나 늙어진 뒤에도 제발 그랬으면.’ 영국의 계관시인 W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다. BIFF가 그런 설렘의 대상이면 좋겠다. BIFF의 ‘서른’을 기대한다.
2024-11-07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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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1000만 원 예산이면 어르신이 즐겁다 [정달식의 일필일침]
“뭘 사고 싶어도, 요즘은 시장 보기도 힘들다. 차 타는 것도 겁나고 동네 이웃 차가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얻어 타고 가서 물건을 사 오곤 하는데…. ” 올 추석 때 시골 고향에 갔을 때 팔순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께서 하신 얘기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일전에 온갖 것을 싣고 동네마다 다니며 물건을 파는 트럭을 TV에서 봤는데, 우리 마을에도 그런 차가 다니면 좋겠다”라며 말을 맺으셨다.
이제 대부분의 농어촌 지역은 70~80대 이상의 고령자가 주를 이루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이와 함께 식료품을 살 수 있는 가게조차 사라진 마을이 늘고 있다. 이런 곳을 흔히 ‘식품 사막(food desert)’이라고 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소매점이 하나도 없는 마을이 무려 73.5%에 달한다. 이는 농어촌 마을 대략 네 곳 중 세 곳은 내부에 구멍가게 하나조차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필품을 사려면 꼼짝없이 차를 타고 대형 마트가 있는 큰 동네나 면 소재지로 나가야 할 판이다. 어떤 이들은 필요한 물건을 배달받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이런 서비스는 도시에서나 누릴 수 있는 혜택일 뿐이다. 농어촌 어르신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단순히 편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 서비스다.
어머니가 얘기한 트럭은 가게가 없는 마을을 순회하는 이동식 마트 개념의 만물 트럭이다. 고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농어촌 지역에는 이런 서비스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농어촌 지역 지방자치단체는 아직 만물 트럭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다. 일부 지자체에서는 청년 인구 유입을 위한 정책들을 활발히 추진하고 있지만, 정작 지역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을 위한 정책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에 군 단위 기초지자체에서 지역 어르신들이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이동식 만물 트럭’을 운영해 볼 것을 제안한다.
군 단위로 보자면 만물 트럭 1~2대 정도면 충분하다. 3.5톤가량의 냉동·냉장 기능을 갖춘 트럭이면 더 좋다. 신선식품은 물론이고 온갖 일상 잡화를 싣고 1주일 혹은 10일 간격으로 마을을 순회하면 된다. 문제는 누가 만물 트럭을 몰고 물건을 판매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다면 지자체 사회복지팀을 활용할 수도 있고, 아니면 만물 트럭을 운영해 본 사람을 공모해 월급제로 운영할 수도 있다. 월급제로 하면서 수익 일부를 판매자가 가져가는 방식도 가능하다. 차량 구입비와 설치비 등을 제외하고 지자체가 월 1000만 원 정도의 예산을 확보하면, 지역 어르신들의 삶이 한결 윤택하고 즐거울 수 있단 얘기다. 만물 트럭은 판매에만 국한될 필요는 없다. 때론 형광등 교체 등의 간단한 도우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트럭은 마을 단위로 1시간 정도 머물다가 다른 동네로 가면 된다. 만물 트럭에 사회복지사가 동행한다면, 단순히 생필품을 판매하는 차원을 넘어 마을 어르신의 건강이나 안부를 확인하는 현장형 사회복지 기능도 수행할 수 있다. 만물 트럭은 시골에만 필요한 게 아니다. 부산 기장군이나 강서구처럼 도농복합지역에도 요긴하다. 지역 저소득·홀몸 어르신이나,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이 많은 곳이라면 더 좋다.
예산이 부담돼 지자체가 선뜻 나서기 어렵다면 지역 농협과 손잡고 할 수도 있다. 물품 공급 체계와 탑차 등을 갖추고 있어 연계가 가능하다. 일부 지역에선 농협이나 지역협의체가 이동식 트럭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
이웃 일본은 식품 사막을 겪는 이들을 위해 일찍부터 이동 판매 차량을 운영하고 있는데, 2023년 기준 1200대에 달할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도 농림축산식품부가 소위 이동식 만물 트럭 형태의 ‘가가호호 농촌 이동장터’ 시범 운영을 몇몇 지자체와 협의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 지자체 차원에서 만물 트럭을 직접 운영하는 곳은 없다.
지방소멸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급격한 인구 감소는 이제 시골 마을의 생활 기반마저 위협하고 있다. 손님이 줄어들면서 가게가 문을 닫고, 이에 인구는 더욱 줄어드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도, 지역 농협도 더 이상 팔짱만 끼고 있어선 안 된다. 만물 트럭은 단순한 생필품 제공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어르신들이 다시 활기를 찾고, 사회적 고립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다.
오늘도 농어촌의 어르신들은 2022년 tvN에서 방영된 ‘우리들의 블루스’ 속 만물 트럭의 만물상(이병헌 분)을 한없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4-10-0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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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동천 살리기' 백년하청 안 되려면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2020년 10월 사망한 후, 이듬해 4월 유족 측은 이 회장이 평생 수집해 온 미술품과 문화재 2만 3000여 점을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이 소식에 가장 먼저 반응한 곳은 부산이었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곧바로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건희 미술관, 부산에 오면 빛나는 명소가 됩니다’라는 글을 올리며 부산 유치를 위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이어 수원, 세종, 광주, 대구, 창원 등 여러 도시가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으나, 결국 이 회장 소장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되면서 부산 유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부산시가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위해 좀 더 전략적으로 접근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 부산시는 해묵은 과제를 하나 들고나왔다. 그건 바로 동천 수질 개선 사업이다. 동천 살리기는 2024 파리 올림픽에서 센강이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면서 부산 시민들의 관심이 더 높아진 상황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최근 부산시는 동천의 수질을 개선하기 위해 하루 평균 7000t의 성지곡수원지 계곡물을 투입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몇 년 전 준설 작업처럼 동천을 살리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동천의 수질 개선은 지역의 숙원 사업이었으나 최근 10년간 진행된 해수 투입 대책마저 수백억 원의 예산만 낭비했다는 비판을 받는 실정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업 역시 부분적인 정화에 그쳐, 동천 살리기는 자칫 백년하청(百年河淸)이 될 가능성이 높다.
동천을 살리려면 부전천 등 대여섯 개의 동천 지류까지 전부를 손대야 한다는 게 관련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그들은 “생활오수의 하천 유입을 막는 분류식 하수관거 정비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이게 선행되지 않고서는 동천이 맑아지길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또 퇴적토 제거부터 철저한 정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땜질식 정비로는 절대 안 된다는 얘기다. 강 밑바닥까지 깨끗하게 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민, 민간단체는 물론이고, 기업의 참여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울산 태화강 생태 회복에도 이들의 참여가 큰 힘이 됐다.
그래서 다소 엉뚱한 제안을 해 본다. 바로 특정 기업을 지렛대 삼아 부산 동천을 살리자는 것이다. 서두에서 삼성그룹을 언급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부산은 삼성과는 오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동천 옆 서면 더샵 센트럴스타 자리는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제일제당이 있었던 곳이다. 동천과 삼성은 그만큼 인연이 깊단 얘기다. 기업의 재정적 참여를 통해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꼭 이런 도움이 아니어도 괜찮다. 기업이 할 일은 많다. 이에 상응해 동천에 특정 기업과 관련된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건설하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참여가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성사된다면 그 혜택은 오롯이 시민에게 돌아온다. 특정 박물관이나 미술관의 유치는 지역 문화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관광객 유입의 유인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삼성이 아니면 어떤가. 동천 주변에는 LG그룹의 시초인 락희화학을 비롯해 수많은 기업의 터전이 있었다.
이쯤 되면 일각에선 동천 살리기가 정말 그렇게 중요하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 대답은 “그렇다”이다. 동천은 부산의 미래이자 희망이다. 도심 한복판으로 냄새나는 탁한 물이 흐르는 것을 방치한 채 부산의 내일을 얘기할 순 없다.
동천은 근대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오롯이 품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큰 그림을 그릴 필요도 있다. 복개된 구간을 걷어내고 프랑스 센강이나 싱가포르의 싱가포르강처럼 배를 활용해 부산의 역사와 흔적을 관광객들에게 보여주는 길이 열렸으면 좋겠다. 뱃길 구간은 동구 미군 55보급창 인근에서 부산진구 광무교까지라도 괜찮다. 도시재생과 연계한 동천 개발은 싱가포르강 인근 클락키(Clarke Quay) 지역이 좋은 사례가 될 수 있다. 이곳은 세계적인 수변 관광지로 싱가포르의 역사 흔적을 보여주는 옛 건물과 현대적인 상업 시설이 강을 따라 펼쳐져 있어 관광객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싱가포르 정부가 1977년부터 10년여에 걸쳐 개발한 결과다. 동천 또한 도시재생과 연계해 장기 마스터플랜을 세운다면 못 할 것도 없다. 지금이라도 행정, 시민, 환경단체, 도시 디자이너 등이 적극 나서서 동천에 활기를 불어넣는 장기 계획을 세워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동천의 수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낱 꿈에 불과하다. 꿈이 현실이 되려면 부산시와 시장의 실행 의지가 필수적이다. 비록 힘들지라도 동천의 꿈이 꼭 실현되길 기대해 본다. 동천이 살아야 부산이 산다.
2024-08-29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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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부산 특별건축구역, 도시 미래 될 수 있나 ?
도미니크 페로, 렘 콜하스, 리처드 마이어, 위니 마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들이다. 갑자기 이들을 호명한 이유는 부산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 후보지 설계를 맡아서다. 국내 건축 설계사와 컨소시엄 형태로 이루어진다. 최근 부산시는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 후보지 7곳을 선정했다. 최종 시범사업지는 10월쯤 4~5곳이 선정될 예정이다. 특별건축구역은 도시경관을 고려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건축물을 설계할 경우 건축법상의 건폐율, 건축물의 높이 등의 건축 규제를 완화해 주는 제도다. 부산시는 최종 시범사업지에 세계적인 건축가의 설계가 실현될 수 있도록 건축법 완화뿐만 아니라 기획설계비 일부 지원, 절차 간소화 등의 행정적 뒷받침도 할 방침이다. 앞서 부산시는 2020년 북항 1단계 재개발지역 등 4곳을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한 바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건축가들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특별건축구역 시범사업을 추진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부산시는 세계적인 건축가의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설계안을 특별건축구역에 적용하려는 이유를 “단순히 건축물의 형태와 기능을 넘어 도시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시도”라고 말한다. 도시 경쟁력의 중심에 건축 디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세계는 지금 도시 경쟁력이 국가 경쟁력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몇몇 도시는 건축 디자인을 통해 세계적 도시로 발전한 사례도 있기에 이 말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화 콘텐츠 강화나 생태도시 지향을 통해 자연스럽게 도시의 가치를 높인 사례도 많다.
부산시가 세계적인 건축가를 초빙해 건축 디자인에 신경을 쓴 것은 이해할 만하다. 지역의 건축 공사 중 상당수가 공동주택으로, 삭막하고 획일적인 디자인이 도시 경관을 저해하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부산시의 논리대로라면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를 초빙해 도시경관을 개선하는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외국의 유명 건축가와 굳이 컨소시엄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으로는 부족하다.
한편으로는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부산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외국 건축가에게 맡기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랄까. 특히 지역 건축가로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실제로 지역의 한 건축가는 “왜 굳이 외국 건축가의 힘을 빌리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한다.
이번 기회에 지역 건축계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건설사가 시장 논리에만 집착해 주거 다양성을 만들어내지 못한 것은 아닌지 성찰이 필요하다. 도시 행정도 마찬가지다. 장기적인 도시 비전 없이 근시안적으로 대응해 온 것은 아닌지, 싱가포르나 홍콩처럼 행정이 획일적인 아파트 설계를 막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세계적인 건축가와의 컨소시엄은 분명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다양한 문제점도 수반된다. 지역 건축가의 역할 감소와 경쟁력 약화는 물론, 특별건축구역 인센티브가 자칫 오용될 경우 도시경관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지금 당장 도시 고층화가 문제인데, 왜 용적률을 20%나 더 주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고층화로 인한 경관훼손과 주변 조망과 일조간섭, 기존 사업지, 이후 개발지와의 형평성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적어도 이게 해결되어야 부산의 특별건축구역이 도시의 미래가 될 수 있다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외국 유명 건축가와의 컨소시엄은 부산 도시 건축을 일깨우는 ‘일회성 죽비’이어야지, 연례 행사처럼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부산 도시 건축의 먼 미래를 고려할 때, 이는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외국 건축가와의 컨소시엄 같은 단기 처방이 아니라, 지속 가능성을 염두에 둔 장기적인 처방을 더 고민해야 한다.
부산시가 외국 건축가들과의 컨소시엄을 통해 특별건축구역 사업지를 선정하는 것은 분명히 전략적 선택이다. 적어도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초빙한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번 참에 부산 도시 건축이 한 발짝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멋진 건축물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부산의 정체성을 반영한 창의적인 디자인이면서 소통의 공간을 제공하는 건축물을 조성하는 방안이 담겼으면 좋겠다. 소위 혼(魂), 창(創), 통(通) 말이다.
세계적인 건축가와의 컨소시엄을 통한 부산 특별건축구역의 혜택은 도시의 미래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정교한 계획과 균형 잡힌 실행이 함께해야 가능하다. 무엇보다 부산의 도시환경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지속 가능한 도시 개발을 위한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일에 부산시가 소홀하지 않기를 바란다. dosol@busan.com
2024-07-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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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총괄건축가 언제까지 비워둘 건가
일본 구마모토현에는 건축을 통해 도시를 바꾸어 나가는 프로젝트가 있다. 바로 구마모토 아트폴리스 프로젝트(KAP)다. 1988년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추진된 건축물은 공공화장실, 경찰서 등 수십 개에 이른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지어진 건물은 대부분 그 지역 명물이 되었다. KAP의 성공 뒤에는 커미셔너(commissioner) 제도가 있었다. 민간전문가인 커미셔너는 사업 전반에 대한 기획과 각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이를 위해 건축가를 선정할 수 있는 권한도 갖는다. 특이한 점은 이 프로젝트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치단체장이 바뀌면 하루아침에 정책과 사업이 종종 중단되거나 소멸하는 우리의 현실과는 너무나 다르다.
일본에 커미셔너가 있다면 우리는 총괄건축가 제도가 있다. 민간전문가인 총괄건축가가 공공 건축물과 도시계획 등 공간환경 전반을 총괄 기획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하는 게 총괄건축가 제도다. 국내에서는 서울시가 2014년 처음 이 제도를 도입해 현재 4대 총괄건축가가 위촉돼 이어오고 있다. 한데 부산에서는 총괄건축가가 보이질 않는다. 부산시는 2019년부터 이 제도를 도입해 시행해 오고 있지만, 지난해 6월 김민수 2대 총괄건축가 임기 종료 후 이 자리는 1년 넘게 비어 있다. 이에 부산건축사회를 포함해 부산 지역 4개 건축 단체는 올해 초 부산시에 이른 시일 내 총괄건축가를 임명해 줄 것을 건의했다. 더불어 지역 사정에 밝은 인물이 새 총괄건축가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도 전달했다.
지난해에는 2030월드엑스포 부산 유치라는 지역 현안이, 올해는 4·10 총선이 있었다. 그동안 부산시 입장에선 나름대로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명분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명분마저 사라진 상황이다. 그런데도 부산시는 여전히 총괄건축가 자리를 비워두고 있다. 이렇다 보니 지역 건축계 일각에서는 부산시장이 총괄건축가를 둘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얘기도 들린다. 1년 넘게 총괄건축가가 공백 상태이기에 당연히 의심의 눈초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시점에서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부산시장은 새 총괄건축가를 위촉할 의지가 있는가?
지난해 9월 부산시는 총괄디자이너를 임명하면서 “총괄디자이너는 총괄건축가와는 별개”라 했다. 그래 놓고선 총괄건축가를 여전히 임명하지 않고 있는 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최근 이루어진 부산시 조직 개편에서 총괄건축가 등을 지원하는 전담 부서였던 총괄건축과가 없어진 것도 이런 의심을 증폭시킨다. 물론 부산시 관계자는 종전 총괄건축과에서 하던 일을 건축정책과에서 챙기고, 총괄건축가도 현재 그 적임자를 찾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쯤 되면 이런 설명마저 있는 그대로 들리지 않는다. 1년여 동안 못 찾았는지 안 찾았는지 궁금해진다. 이제는 부산시가 이 의문에 제대로 답해야 한다.
총괄건축가는 오랫동안 비워둘 자리가 아니다. 도시의 공간환경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주요 전략 프로젝트를 발굴해 이를 묶고 엮어 줄 사람이 바로 총괄건축가다. 지역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공공건축의 사업 방향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고, 지역 특성과 여건에 적합하게 진행되는지 살피는 것도 총괄건축가의 몫이다. 부산시가 정말 의지가 있다면, 하루빨리 총괄건축가를 임명해 파편적으로 움직이는 부산의 도시 재생 사업이나 도시 계획을 전체적으로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생태 도시, 보행 도시 등 부산만의 특색이 조화롭게 발현될 수 있는 미래지향적인 도시환경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박형준 부산시장이 주창하는 ‘15분 도시’와 연계하기 위해서라도 총괄건축가 제도는 필요하고, 멈춤 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그동안 총괄건축가 제도를 운영하면서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래서 앞서 시행된 총괄건축가 운영과 제도에 대한 평가도 필요하다. 문제점이 있다면 보완하고 장점은 강화해야 한다. 요컨대 부산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담고 미래 비전을 그리기 위해서는 지역 현안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총괄건축가가 필요하다. 지역을 잘 아는 인물이면서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면 금상첨화다. 총괄건축가에 대한 자리매김도 중요하다. 단순히 공급자와 시행자 사이에서 조정·자문하는 소극적인 역할이 아니라, 최고의 도시환경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건축적 이상과 경험을 적용, 실행하는 적극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도시는 시장이나 총괄건축가 같은 몇몇이 만들어가는 게 아니다. 하지만 막혀 있는 곳을 뚫어 줄 전문가적인 ‘통찰과 혜안’, 그리고 ‘침술’ 역할은 꼭 필요하다. 부산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런 중요한 자리가 1년 넘게 비어 있다는 건 말이 안 된다.
2024-06-2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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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영화의전당-수영강 연계 프로그램 모색하라
중국 저장성의 대표 관광지 항저우(杭州)는 우리에겐 제법 낯익다. 지난해 열렸던 하계 아시안게임 개최지가 바로 항저우여서 일 게다. 관광객 사이에선 “항저우에 가서 서호(西湖)를 보지 않으면 항저우에 갔다 왔다고 할 수 없고, 서호에 가서 ‘인상서호’(印象西湖)를 보지 않으면 서호에 갔다 왔다고 할 수 없다”라는 말이 회자된다. 서호는 항저우시 서쪽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다. 인상서호는 이곳에서 펼쳐지는 수상 뮤지컬로 영화 ‘붉은 수수밭’ ‘홍등’으로 유명한 장이머우 감독이 연출했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져 낭만적이면서도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놀라운 것은 호수 위에 무대를 세우고 그 위에 10cm 정도의 물이 채워진 상태에서 수백 명의 출연진이 연기를 펼친다는 점이다. 물 위를 걸으며 공연하는 배우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환상적이다. 기발한 상상력과 자연이 결합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한 게 바로 인상서호인 셈이다.
우리는 흔히 부산을 항구 도시, 해양 도시라 한다. 강과 하천을 끼고 있어 때로는 물의 도시라 칭한다. 물의 도시란 물이 공간의 형성과 변화에 영향을 주면서, 그 특성이 잘 나타나고 있는 도시를 말한다. 이를테면 이탈리아 베니스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프랑스 파리와 일본 도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도시는 수변 공간을 중심으로 도시의 역사적 맥락을 이어 나감과 동시에, 삶 속에 수변 공간이 형성돼 도시를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그렇다면 부산도 그럴까? 과거 부산은 크고 작은 강과 하천이 언덕과 조화를 이루며 그 속에서 삶이 공존했다. 부산 도심엔 수영강과 동천, 그리고 보수천을 비롯한 다수의 크고 작은 하천이 흘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바다로 흐르는 대다수의 하천이 복개돼 단지 해안 공간 중심의 해양 도시로만 인식될 뿐이다. 도로로 인해 생활 공간과 수변은 단절됐고, 물 공간 특유의 장소성을 가진 문화나 축제도 쉬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아이러니하게도 규모 있는 강이나 하천 말고는 우리 삶, 우리의 일상 가까이서 냇가나 실개천 같은 수변 공간을 만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동안 부산의 수변은 시민의 것이 아니었다.
10여 년간 부산시 숙원사업이었던 영화의전당 지하차도 건설이 최근 실시설계가 마무리돼 이르면 올해 10월께 공사가 시작된다. 영화의전당과 APEC나루공원 사이 차로를 지하차도로 만들고 지상 구간은 공원, 광장 등을 조성하는 것으로, 2026년 연말께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BIFF)가 열리는 영화의전당과 그 주변은 도심에 강이 흐르는 부산의 수변 이미지를 함축한 곳이다. 하지만 영화의전당은 차로에 둘러싸여 보행로를 비롯해 공간이 오랫동안 단절돼 있었다. 이번 공사를 통해 영화의전당은 나루공원-수영강과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돼 향후 수변 공간 접근성이 좋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그래서 하는 얘기다. 수영강에서 인상서호 같은 특별한 공연이 펼쳐진다면 어떨까? 오스트리아 호반 도시 브레겐츠의 야외 오페라 같은 공연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축구 경기장으로 사용되는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의 플로팅 플랫폼처럼 수상 무대를 만들어 활용하는 방안도 있다. BIFF 개폐막식 때 초청 배우들이 수영강을 통해 영화의전당으로 진입하는 것도 생각해 봄 직하다. 그동안 영화제가 한정된 공간에서 열리다 보니, 개폐막식 때 부산을 제대로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었다. 수영강에 덱을 설치해 영화의전당에서 나루공원-수영강-F1963으로 이어지는 길도 조성해 볼 만하다. 영화제 기간 외국인들이 부산을 찾았을 때 영화만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수영강에서 공연을 즐기고 인근 F1963에서 전시를 본다고 상상해 보라. 이 공간은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강과 문화, 공원이 한데 어우러지는 부산 대표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BIFF는 물론이고 부산이란 도시의 인지도도 높아질 것이다.
BIFF는 부산이란 도시가 내세울 만한 대표적인 행사다. 올해로 29회째를 맞는다. 수변 공간과의 연계는 새로운 30년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 될 수도 있다. 부산시와 BIFF조직위원회, 영화의전당이 합심해 새로운 기회의 출발점인 영화의전당-수영강 연계 프로그램을 지금부터 꼼꼼하게 챙겨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지하차로 완공까지는 2년 정도 남았다. 연계 프로그램을 준비하기엔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다. 세계적인 문명비평가 제러미 리프킨은 “물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물과 협력할 방법을 찾으라”라고 말했다. 그동안 부산의 수변이 시민의 것이 아니었다면, 이제 시민에게 그 기회를 부산시가 만들어 주어야 한다. 수변 공간과 연계한 질 높은 프로그램 개발을 기대한다.
2024-05-21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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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식의 일필일침] '마을지기 사업' 부산 복지의 희망 싹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골 고향에 가는 편이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해 늘 마음 한구석엔 송구함이 앞선다. 근래 고향에 갔을 때다. 집에 가보니 몇몇 생활용품이 고장 나 있었다. 냉장고는 냉장실 냉기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화장실 물탱크의 물 조절 볼 탑은 연결 부위가 부러져 있었다. 나일론 빨랫줄은 낡아 햇볕에 옷을 널면 그 부스러기가 옷에 허옇게 묻어 나왔다.
냉장고는 서비스센터에 연락해 수리하고 나머지는 재료를 직접 사다 교체했다. 이번에는 시기가 잘 맞았다. 다행히 고향에 내려갔을 때 고장 난 것들을 수리·교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겨울철에 보일러가 고장 나거나 수도꼭지가 얼어 탈이 나면 손재주 좋은 이웃집 형님이 곧바로 고쳐주곤 했다. 그는 고장 난 걸 잘 수리해 줘 동네에선 1980~1990년대 TV에 나오던 만능 재주꾼 ‘맥가이버’로 통했다. 어머니는 이번에도 이웃집 형님에게 고쳐달라 부탁할 법도 했지만, 너무 자주 얘기하는 것도 미안하고 눈치가 보여 못 했다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일이 한꺼번에 많아진 거였다고 말씀하셨다.
요 몇 년 새 고향을 오고 갈 때면 마을 어르신들의 생활 속 문제들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사람이 동네에 상주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이를테면 맥가이버 같은 사람 말이다. 자식들 대부분이 객지로 나가 있어 도움을 요청할 젊은이들이 없는 시골 어르신들에게 맥가이버 같은 사람은 너무나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맥가이버의 필요성’은 시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저소득층, 한부모 가정,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등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필요하다. 다행히 부산은 수년 전 맥가이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2015년부터 ‘마을지기사무소 사업’이란 이름으로 시행하고 있다. 마을지기와 만물수리사가 상주하면서 집 수선, 공구 대여, 무인택배 보관 등 소위 ‘동네 맥가이버’ 역할을 한다. 주민이 마을지기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재료비와 출장비 등으로 일정액을 내면 된다.
부산에서 처음 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마을지기사무소가 13곳이었다. 차츰 주민의 호응을 얻어 2020년에는 50곳으로 늘어났다. 2022년 부산 금정구는 연간 1278건, 부산 중구는 1200건의 서비스를 주민에게 제공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 사업은 일몰제였다. 사무소 설치 후 3년간 부산시가 예산을 지원하고 이후에는 각 구·군 자체 계획으로 전환해야 했다. 이렇게 되자 마을지기사무소는 24곳으로 쪼그라들었다. 마을지기사무소가 줄어든 것은 각 구·군 예산 사정이 여의찮아서다. 매년 사무소 한 곳당 운영비가 6000만~7000만 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산 부족으로 이 사업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최근 부산시는 마을지기 지원 사업을 재추진할 뜻을 비췄다. 언론의 눈치를 보며 마지못해하는 느낌도 있다. 하지만 지역 내 취약계층과 복지 사각지대 주민들을 위해 마을지기 사업을 펼치는 것은 오히려 지자체가 앞장서 장려할 일이다.
부산은 노인 인구 비중이 전체 인구의 20%가 넘은 초고령 도시다. 그렇기에 노인에게 더 절실히 요구되는 마을지기는 부산에 꼭 필요한 사업이다. 부산은 다른 곳과 비교해 일상적인 편의시설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산복도로 지형을 가졌다. 그래서 더 적합한 제도기도 하다. 따라서 이참에 마을지기 사업을 더 세밀하게 다듬어 부산이 내세울 만한 대표적인 복지 사업으로 만들었으면 한다.
최근 들어 부산시는 도시 인구의 고령화와 1인 가구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당연히 고립된 노인도 늘어나면서 관계망 회복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나이 들면 말벗이 최고라 했다. 인공지능(AI)이 어르신의 말벗이 되는 시대에 살지만, 마을지기 역시 단순히 어르신들의 생활 불편만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따뜻한 말벗이 되어줄 수 있다. 관계망 복원 역할도 얼마든지 가능하단 얘기다.
마을지기 사업의 서비스 영역도 넓혀갔으면 한다. 소규모 아파트 단지나 산복도로 등 거주민을 위해 ‘찾아가는 마을지기’도 운용할 필요가 있다. 마을지기 사업이 좀 더 탄탄해지기 위해서는 부모가 거주하는 지역의 마을지기사무소에 ‘고향사랑기부제’처럼 자식이나 친척들이 일정 금액을 기부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검토해 볼 수 있다. 복지 전문가들은 “마을지기 사업은 한 동네에 온기를 불어넣고, 침체한 도시에 건강한 변화를 끌어내는 ‘촉매제’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가는’ 마을지기 사업이 부산에서 제대로 꽃피길 기대해 본다. 이는 갈수록 느슨해지는 도심 속 마을공동체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2024-04-16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