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식의 일필일침] 잔도를 불태우지 못한 정당에 미래는 없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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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비상계엄 어느새 1년 되어가
국힘, 성찰 없이 여전히 침묵·회피 일관
극우 지지층 결집하려 안간힘만

박 부산시장 등 ‘사과’ 요구 쏟아져
자기반성은 윤석열 터널 벗어날 출구
중도 확장 같은 희망 얘기 가능해져

참 세월이 빠르다. 폭풍이 몰아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년이 다 되었다. 12·3 비상계엄 얘기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지만 그날의 충격과 상처는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국격은 흔들렸고 국민은 깊은 절망을 겪었다. 그럼에도 책임을 짊어져야 할 국민의힘은 지금도 침묵과 회피에 머물러 있다. 부끄러움도 성찰도 없다. 오히려 강경 투쟁으로 지지층을 묶겠다는 낡은 방식에 기대고 있다. 이것이 오늘 대한민국 보수가 맞닥뜨린 현실의 민낯이다.

이런 상황에서 곱씹어볼 이야기가 하나 있다. 중국 전국시대, 중원을 평정하고 초나라를 세운 항우는 자신의 맞수였던 유방을 쓰촨 일대의 한왕으로 보냈다. 사실상 변방으로 내쫓은 셈이다. 체념한 듯 길을 떠난 유방은 도착하자마자 책사 장량의 조언에 따라 자신이 지나온 잔도(棧道)를 과감히 불태웠다. 절벽에 걸린 아슬아슬한 통로인 잔도를 스스로 끊어버린 것이다. 퇴로를 닫은 그는 천하의 인심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고, 마침내 5년 만에 초를 무너뜨리고 한 제국을 세웠다. 버림이 있었기에 새로운 길이 열렸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국힘은 어떤가. 끊어내야 할 잔도를 오히려 붙잡고, 버려야 할 과거를 움켜쥔 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모순에 민심도 외면하고 있다. 불과 얼마 전 대선에서 40% 가까이 얻었던 지지는 장동혁 대표 체제 들어 거의 반 토막으로 추락했다. 당 지도부는 ‘중도는 없다’는 구호 아래 강경 일변도의 전략을 고집하지만 현실의 선거 지형은 중도가 당락을 가르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특히 부산을 포함한 도심권에서는 그 흐름이 더 뚜렷하다. 그럼에도 지도부는 마치 과거 방식만 되풀이하면 미래도 따라올 것이라 믿는 듯하다.

이런 분위기에서 박형준 부산시장의 최근 발언은 단순한 쓴소리를 넘어선다. 그는 “계엄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며 “상대가 밉다고 해서 우리의 잘못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보수가 잃어버린 윤리 기준을 회복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나경원 의원도 “계엄과 탄핵으로 정권을 내준 것만으로도 백 번 사과해야 한다”고 했다. 수도권과 부산의 초선 의원들까지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지방선거를 앞둔 그들의 발언이 정치적 계산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계산을 감안해도 지금 국힘이 선택할 수 있는 사실상의 유일한 출구가 ‘계엄 사과’라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동안 국힘 지도부는 계엄 사태에 대해 단 한 번도 정당 차원의 책임을 인정한 적이 없다. 일부 인사들의 개인적 사과가 있었을 뿐이다. 정치란 민심의 흐름을 읽고 그 요구를 실천하는 일이다. 지금 민심이 요구하는 것은 책임 있는 정치,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 변화다. 하지만 국힘은 여전히 ‘윤석열 터널’ 속에 머물러 있으며, 지난 정부의 ‘잔도’를 붙든 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피터 드러커가 말했듯이 혁신은 버림에서 시작된다. 버릴 것을 결정하지 못하면 새 길도 열리지 않는다.

지금 국힘이 돌아가야 할 지점은 ‘누구(who)를 위한 정치인가’가 아니라 ‘무엇(what)을 위한 정치인가’이다. 정치를 특정 인물 중심으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 당은 자연스럽게 극우적 틀에 갇히게 된다. 이는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종족의 우상’과 닮았다. 익숙한 것만 옳다고 믿는 오류다. 극우적 언어와 폐쇄적 지지층에 기대 민심과의 연결을 끊는 순간, 자멸은 시간 문제가 된다. 이 진리는 민주당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돌이켜보면 보수는 극우로 살아남은 적이 없다. 위기 때마다 스스로 잔도를 버리고 체질을 바꿔 왔다. ‘차떼기 사건’ 이후 박근혜 대표가 천막당사로 돌아가며 보여준 절박한 쇄신이 재도약의 계기가 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국힘에는 책임도 없고 반성도 없다. 최소한의 역사적 자각조차 보이지 않는다. 낡은 극우의 구명조끼만 붙잡고 있지만 그 구명조끼는 이미 부력을 잃었다.

민심은 이미 결론을 내렸다. 계엄은 명백한 잘못이었다라고. 민심은 또 묻는다. “국힘은 그 책임을 인정할 의지가 있는가?”라고. 이 질문에 국힘이 여전히 답하지 못한다면 중도 확장도, 범보수 재편도, 지방선거 승리도 요원하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왔다. 국힘이 미래를 말하려면 12·3 계엄에 대해 정당 차원의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 석고대죄면 더 좋다. 이는 “잘못했다” “죄송하다”는 상투적인 말 한마디로 끝낼 일이 아니다.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위에서 윤석열 정부의 잔도와 결별해 새로운 보수의 길을 설계해야 한다. 그래야만 다시 희망을 이야기할 최소한의 기반이 마련된다.

소크라테스는 “가장 큰 잘못은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 옛 말에 ‘재를 털어내야 숯불이 빛난다’고 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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