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라이프

    "좌충우돌 구르다보니
    이끼가 생겼다"

    전교 1등 하던 형과 달리 전교 꼴등인 중학생 동생이 있었다. 항상 형과 비교되었지만, 동생은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 보니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성향이 매우 높았다. 일찍부터 공부를 내팽개치고 본격 알바 전선에 뛰어들더니, 요리사가 되겠다고 정식 인가도 안 난 조리학교에 들어가 버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농사를 짓겠다고 귀농하는 등 좌충우돌의 연속이었다. 지금까지 경남 양산에 본사를 둔 유망 스타트업 ‘코드 오브 네이처’ 박재홍 대표(31)의 10대 시절 이야기였다. 박 대표는 현재 서울대 환경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쓴 논문으로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전교 꼴등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와 인터뷰한 내용을 일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나는 일찍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었다. 대신 돈에 관심이 많았다. 중학생 때 주식 계좌를 처음 열고, 모의 투자 대회에도 참가했다. 공부 대신 알바를 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선선히 동의서를 써 준 덕분에 샤부샤부 가게에서 설거지부터 시작했다. 이내 피자집으로 옮겨 피자와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손이 빠르다는 칭찬을 받았고, 한 단계씩 올라가는 재미가 있었다. 고등학교는 부산조리고에 진학했다. 졸업하면 시급을 더 준다는 말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정식 인가도 나기 전이었다. 요리사의 꿈은 현장 실습 과정에서 손을 다치는 바람에 멀어졌다. 대신 식재료 생산으로 눈을 돌렸다.열아홉에 농사를 짓겠다며 경남 함안으로 귀농했다. 초보 농사꾼의 고추와 참깨 농사가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귀농이 실패로 끝나던 무렵 시골집 지붕 위에 있던 이끼가 눈에 들어왔다. 이끼는 그늘지고 습한 곳에서만 산다고 생각했다. 찾아보니 이끼 종류는 너무 다양했다. 양지에 사는 이끼도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내가 본 건 햇빛이 강하고 건조한 지붕 위에서도 잘 사는 ‘지붕빨간이끼’였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천안에 있는 연암대 원예과에 진학했다. 교수님은 연구할 주제를 알아서 정하라고 했다. 나의 주제는 ‘이끼’였다.부산대 식물생명과학과에 편입하며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학교에 붙어 있던 창업 공모전 포스터가 운명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공모전에 목을 맸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 국내에서 열린 공모전에는 빠짐없이 다 나갔다. 농림축산식품부·산림청 청년창업 경진대회 ‘F-스타트업’ 대상, 부산시 창업 아이디어 경진대회 대상, 고용노동부 주최 소셜벤처 경연대회 부산 결선 2020 1위, 전국 결선 2020 대상, 기획재정부 대국민 혁신성장 정책공모(그린뉴딜 분야) 대상까지 모두 휩쓸었다. 코로나 시절이 되레 도움이 되었다. 대개 서울에서 대면으로 하는 최종 발표 심사가 코로나 때문에 비대면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자취방에 앉아서 발표하니 하루에도 몇 탕을 뛸 수 있었다.처음엔 공모전에서 많이 떨어지기도 했다. 하나가 붙으면서 심사 위원이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 뒤엔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심사 위원의 눈에 들만한 아이템을 추려서 나갔다. 공모전은 고객이나 투자자 관점에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점도 낮았고 변변한 영어 성적도 없었지만 시험 삼아 넣어 본 대기업 공채에서도 모두 합격했다. 공모전 스펙 덕분이었다.내 별명이 상금만 받고 ‘먹튀’한다고 해서 ‘공모전 헌터’였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공모전에서 1등을 내리 세 번 하는 동안 공교롭게도 계속 심사 위원이었던 분이 나를 불렀다. “공모전은 인제 그만 하고, 그 아이템으로 사업을 해 봐라. 내가 투자하겠다”라는 것이었다. 취업, 창업, 대학원 진학이라는 갈림길에서 고민을 했다. 2021년 ‘코드 오브 네이처’를 창업하면서 서울대 환경대학원에도 진학했다. 여러 공모전 대회에 참가하면서 만난 능력자들을 직원으로 채용했다. 모든 게 공모전 덕분이었다.자연의 천이(遷移) 단계에서 이끼가 가장 먼저 자란다. 그다음에 이끼를 둥지나 먹이로 삼는 곤충이, 또 곤충을 먹으려는 새가 나타난다. 이어서 동물이 돌아오고, 나무가 자라고, 숲이 생긴다. ‘코드 오브 네이처’는 산불 등으로 생명이 사라진 땅 위에 이끼를 기반으로 하는 복원 솔루션을 제공한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천이의 첫 단계를 만들어 내는 일을 하고 있다.우리가 개발해 품종 등록을 마친 이끼는 모두 7종류다. 양지에서 잘 버티고, 토양 속 영양분을 증대시키고, 유용한 미생물과 공생하는 품종이다. 산불이 난 지역에는 그늘이 없기에 양지에서 잘 버티는 품종을 선별해서 개발했다. 청양고추나 샤인머스캣처럼 남들이 이 이끼를 쓰려면 로열티를 내야 한다.그까짓 이끼, 개발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기 쉽다. 신이 아닌 이상 생물종을 개발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우리가 개발한 7개의 이끼를 따라오려면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최소 7년이 걸린다. 이끼 개발비보다 우리 회사를 인수하는 게 싸게 치이니 외국계 기업에서 자꾸 인수합병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회사는 2019년에 일어난 강릉시 경포 일대 산불 피해지역 토양의 생명력과 생물다양성을 회복시키면서 조명받기 시작했다. 염해로 작물 생장이 어렵던 충남 태안 정주영 간척지도 2년 내 정상 토양의 80% 수준까지 회복할 것으로 전망된다. 많은 관광객으로 망가진 제주 도너리 오름은 이미 생태계 복원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우리가 하는 황폐화 토양 복원 수요는 국내보다 해외에 훨씬 많다.경남 양산에 본사, 서울에 지사를 둔 것도 주목받는 이유 중의 하나다. 사실 서울에는 재미있는 회사가 많지만, 지방에서 ‘코드 오브 네이처’는 독보적이다. 투자를 지역에 한정한 펀드나 지원금을 받기도 쉽다. 요구 사항을 지자체에 이야기하면 피드백이 바로 와서 좋다. 부산이나 경남은 청년 지원이 잘 되어 있다. 지역에 연고가 있는 스타트업이라면 지역에 내려오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세계적으로 달 표면이나 지구의 사막처럼 황폐한 땅을 농사 지을 환경으로 바꾸는 연구가 한창이다. 지난해에 참가한 ‘CES 2024’는 꿈을 우주로까지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마도 한국관에 있는 기업 중에서는 ‘코드 오브 네이처’에 해외 투자사를 비롯해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다녀간 것 같았다. CES에서 만난 미국 측과 협업해서 진행한 달과 화성 토양 복원 연구도 잘 끝났다. 우리 이끼와 미생물로 처리했을 때 달과 화성의 모사 토양에서 키운 보리의 낱알이 무겁고 많이 맺히는 것까지 확인했다. 이 기술이 상용화되면 영화 ‘마션’에 나오는 것처럼 우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된다. 인간이 우주에서 장기간 생활하려면 현지에서 경작하거나 지구에서 식량을 보낼 수밖에 없다. 지구에서 식량을 보내려면 천문학적 비용이 든다. 현지의 토양을 복원해서 작물을 생산하면 비용을 크게 절감할 수 있다.나는 지금 ‘우주 비행사’라는 다음 꿈을 꾸고 있다. 박사 논문도 이끼와 미생물로 우주 토양 복원, 중국 차밭 복원, 국내 간척지 복원 세 개를 엮어서 쓸 계획이다. 그런데 국내에는 이끼 관련해 연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아쉽다. 이끼가 유망한 분야라는 사실을 많이 알리고 싶다. 중고교에서 강연 요청이 오면 꼭 가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학생들에게 이끼의 매력에 한번 빠져 보라고 권하고 싶다.사람들은 전교 꼴등이 공부 잘하는 서울대 대학원생이 된 비결에 대해서도 궁금해하는 것 같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분야니까 가능했다. 국영수 같은 수능 공부를 하라고 했으면 절대 못 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공부는 싫은데 연구는 좋아한다. 연구하는 공부는 아무리 해도 피곤하지 않고 너무 재밌다.돌이켜보면 나는 정말 부모님을 잘 만난 행운아였다. 뭘 하겠다고 하든 부모님은 반대 없이 다 하게 해 주셨다. 실업계인 부산조리고에 간다고 해도 반대하지 않았다. 중학생이 주식 투자를 한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부나 하라거나, 안정적으로 돈을 벌라고 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에게 무관심했던 게 아니라 늘 응원해 주셨다. 나중에 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를 때도 부모님 반만 하더라도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릴 때부터 책 많이 읽히고, 아이가 공부하고 싶은 분야가 생기면 그때 지원을 해 주면 좋겠다. 우리 부모님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글·사진=박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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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과의 전쟁’ 중요한 건 <br />큰 목표보다 작은 일상들
    문화라이프

    ‘살과의 전쟁’ 중요한 건
    큰 목표보다 작은 일상들

    비만의 최대 적 ‘겨울’이 왔다. 기온이 떨어지면 몸은 본능적으로 에너지를 축적하려고 한다. 따뜻한 음식과 고칼로리 간식이 당기는 이유다. 반면 외부 활동은 자연히 줄면서 에너지 소모량은 줄어든다. 남은 에너지는 고스란히 살로 옮겨간다. 비만 악순환의 계절이 온 것이다. 턱선이 무너지지 않고 내년 봄을 맞을 방법은 과연 없을까. 없지는 않다. 겨울을 ‘체중이 늘기 쉬운 계절’이 아닌 ‘생활 리듬이 가장 쉽게 무너지는 계절’로 이해한다면, 다이어트 성공의 첫걸음을 이미 내디딘 것이나 다름 없다. 이번 겨울, 살 빼기가 아닌 ‘생활 리듬 지키기’를 목표로 삼는 건 어떨까. ■몸무게 집착에서 벗어나야살을 더 보태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면 비만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바꿔야 한다. 일반적으로 체중 증가는 ‘실패’로 간주되지만 실제 건강을 위협하는 것은 과도한 체지방과 대사 기능의 이상이다. 특히 복부에 지방이 집중된 내장 비만은 외형과 무관하게 혈압·혈당·지방간 위험을 빠르게 높인다.한국인에게 흔한 ‘마른 비만’도 문제다. 체중은 정상이지만 근육이 부족하고 지방이 많은 상태로,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지만 대사질환이 진행되기 쉽다. 좋은강안병원 가정의학과 이가영 과장은 “체중만으로는 건강을 판단하기 어렵다”며 “체지방률과 근육량이 실제 건강 수준과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고 설명한다. 비만을 외형의 문제가 아니라 ‘대사 건강이 보내는 신호’로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다.집에서도 체지방 상태를 간단히 확인할 수 있다. 줄자로 갈비뼈 가장 아래와 골반 가장 높은 위치의 중간을 재면 되는데, 남성은 허리둘레 90cm, 여성은 85cm 이상이면 체지방률이 비만에 해당한다. 체지방률은 남자 25%, 여자 32% 이상이 비만에 해당한다. ■첫걸음은 생활 리듬 정상화관점을 바꿨다면 특별한 식단이 아닌 ‘식사 리듬의 정상화’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겨울철일수록 아침을 거르고 배고픔이 밀려올 때 몰아 먹는 패턴을 반복하기 쉬운데 이 과정에서 혈당 변동이 커지고 체지방 축적이 더 활발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식사 속도 역시 다소 늦추는 것이 중요하다. 20분 이상 천천히 먹으면 포만감이 제때 형성되어 과식을 막아준다.단 음료와 고당식품은 겨울철 간식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혈당을 급격히 올리고 남은 에너지를 지방으로 변환하는 ‘가장 빠른 경로’다. 싱겁게 먹고 인스턴트 음식은 피하며, 술은 아예 끊어버리는 것이 현명하다.생활 리듬도 정상화해야 한다. 특히 운동은 체중 감량을 위한 단기 전략이 아니라 ‘근육을 지키는 생활 습관’으로 봐야 한다. 근육을 유지하는 것이 체중을 지키는 데 훨씬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겨울에는 실외 활동 감소로 근육 손실이 쉽게 진행되는데, 근육량이 줄면 같은 양을 먹어도 체중이 더 쉽게 느는 것처럼 느껴진다. 실내에서 스쿼트·런지·팔굽혀펴기 같은 간단한 대근육 운동을 꾸준히 반복하면 체지방 감소와 혈당 안정에 도움이 된다.추천되는 실내운동은 연령대별로 다양하다. 20~30대는 근력 유지를 위해 테니스, 복싱, 필라테스 등 적극적인 운동을 해볼 만하다. 40대는 근력이 줄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스쿼트나 플랭크, 덤벨 운동이 권장된다. 50대는 심혈관계 건강을 위해 수영·요가·실내 자전거를 하는 것이 좋다. 60대 이상은 낙상을 피하고 관절을 보호할 수 있는 맨손 체조, 균형 운동이 필요하다. 주 5회 이상, 하루 30~60분을 하되 바쁘면 20분씩 나눠 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 된다. ■약물, 해결책 아닌 보조수단병원에서 비만 치료를 위한 약물을 권하기도 한다.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위고비를 비롯한 삭센다, 마운자로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 기반의 약물로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GLP-1) 계열 비만 치료제로, 뇌 시상하부에 작용해 식욕을 억제하고 포만감을 유지시켜 음식 섭취량을 줄게 해 체중 감량을 유도한다.이들 치료제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지난 1일(현지시간) 처음으로 GLP-1 계열 비만 치료제와 관련된 공식 치료지침을 내놓고 장기 치료의 일부로 조건부 권장하면서 더욱 주목 받고 있다. WHO는 임신부를 제외한 성인들의 비만 치료를 위해 GLP-1 요법을 6개월 이상 장기간 사용할 수 있다고 제시하기도 했다.체중감량 효과가 가장 큰 것은 GLP-1/GIP 이중작용제인 마운자로로, 최대 20%다. GLP-1 단일 작용제인 위고비와 삭센다는 각각 15%, 10% 정도의 감량 효과를 보인다. 삭센다는 매일 주사하는 반면 위고비와 마운자로는 주 1회 주사한다. 치료 대상은 BMI(신체질량지수) 30 이상 또는 BMI 27 이상이면서 고혈압·고지혈증·당뇨·수면무호흡증 등 동반질환이 있는 경우다. 특히 당뇨나 수면무호흡증이 있으면 마운자로를 더 추천한다.하지만 약물은 살을 대신 빼주는 해결책이 아니라 생활 습관을 바로잡을 시간을 확보해주는 ‘보조 수단’일 뿐임을 인지해야 한다. 생활 패턴을 바꾸지 않는다면 약을 끊는 순간 체중은 제자리로 쉽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WHO 역시 이번 치료 지침 발표를 통해 의약품과 함께 건강한 식단, 신체 활동과 같은 개입을 제공하도록 권고했다. ■영양제로 건강 지키기살과의 전쟁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양 보충이다. 비타민 D는 우리나라 인구의 약 90%가 부족한 상태다. 실내생활, 자외선 차단제 사용, 겨울 일조량 감소로 인해 충분한 햇빛을 받기 어려운 데다 식품만으로 하루 권장량을 채우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루 800IU 이상 섭취하는 것이 좋으며, 지용성이기 때문에 식사 직후 섭취하는 것이 좋다. 다만 여러 영양제에 비타민 D가 포함되어 있어 과다 섭취는 피해야 한다. 비타민C와 B군은 겨울철 독감·폐렴 등 호흡기 감염병 예방에 도움이 되며, 에너지 대사 촉진과 피로회복을 지원한다. 수용성 비타민이므로 식사와 관계없이 일정한 시간, 주로 오전에 섭취하는 것을 권고한다.오메가3는 겨울 혈관 수축으로 높아진 심혈관질환 위험을 낮춘다. 혈중 중성지방 수치를 낮추고 내장비만을 감소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지용성이므로 식사 중이나 직후 복용할 때 흡수율이 높아진다.제일 중요한 것은 일상의 선택이 내일의 건강을 만든다는 인식이다. 소소한 생활 패턴의 반복은 몸을 안정적으로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비만은 의지 부족의 결과가 아니라 생활과 환경이 만들어낸 복합적 현상이기 때문에 치료 또한 지금의 몸을 탓하기보다 흔들린 생활의 균형을 천천히 되돌리는 과정이 돼야 한다.이 과장은 “비만 관리의 핵심은 얼마나 빨리 체중을 빼느냐가 아니라 내일의 몸이 조금 더 건강해지는 방향으로 생활 리듬을 다시 세우는 일”이라며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건강을 어떻게 바꿔놓는지 살피는 일이 체중계 숫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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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사가 <br />돼지국밥집 차린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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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가
    돼지국밥집 차린 이유는?

    “살아 있으니 밥을 먹을 수 있다. 밥 먹는 일 자체가 복이다. 맛있게 먹을 수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우리가 나쁜 감정을 표현할 때 ‘밥맛이 없다’라고 하지 않나. 밥맛이 없으면 인생 조지는 거다. 밥을 맛있게 먹는 순간이 인생 최고의 클라이맥스다.”밥을 연구한 ‘밥 철학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성의료재단 좋은병원들 구정회 회장은 소문대로 달변이었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오만 데 관심이 많다”라고 자인할 정도로 관심사 또한 다양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직원들과 함께 책을 읽고, 독서토론회를 즐긴다고 했다. 부산지식서비스융합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였다. 알고 보니 부산대 학보사 기자 출신에 부대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서 소설로 수상한 경력도 있었다. 24일에는 대한적십자사 부산지사 제32대 회장에 취임하는 액티브 시니어다.기자가 구 회장을 만난 이유는 뜬금없게도 돼지국밥 때문이었다. 좋은문화병원을 비롯한 5개의 종합병원과 7개의 요양병원 등 12개의 네트워크 병원을 운영하는 그가 돼지국밥집을 차렸다는 소문이 퍼져서였다. 지난 9월 말에 문을 연 부산 수영구 남천동의 돼지국밥집 ‘식복(대표 이정근)’에서 만난 구 회장은 수육과 돼지국밥을 앞에 두고 그 사연을 쏟아내기 시작했다.“내가 원래부터 식당 주인입니다.”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지만 설명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구 회장이 운영하는 병원 12곳의 환자를 합치면 3000명가량이 된다. 삼시세끼씩 해서 매일 1만 그릇씩 음식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원 밥이라 재료 기준이 엄격하고, 위생 기준은 높고, 일제 배식으로 효율은 떨어지는 악조건 속에서 식당을 한다는 이야기였다.소문의 주인공이 앞에 놓인 수육을 한 점 집어 들었다. 구 회장은 “수육은 식감이 중요하다. 집에서 수육을 하면 이런 맛이 나지 않는 이유는 숙성을 안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돼지고기를 숙성 냉장고에 사흘간 둔 다음에 만들어 쫄깃쫄깃한 맛이 살아난다. 한정식집에서 먹는 돼지고기가 퍼석퍼석한 이유도 전처리를 안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음식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인상적이었다. 가게 비법까지 거침없이 털어놓는 화법에선 성격이 드러났다.평생 의술만 펼치던 그가 돼지국밥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수육이었다. 병원 장례식장은 수육을 많이 소비한다. 그동안 수육을 납품받았는데 그 품질이 처음 들어올 때와 자꾸 달라지는 문제가 도저히 고쳐지지 않았다. 수육의 품질이 변하면 병원의 신뢰 또한 손상이 된다고 생각해, 아예 수육을 직접 만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육의 품질을 높이는 방법은 간단했다. 좋은 고기, 좀 비싼 고기를 쓰니 문제가 바로 해결됐다.부산 대표 음식 돼지국밥은 이제는 외국인이 즐겨 찾는 관광상품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식복의 개업에는 이 돼지국밥에 대한 평소의 불만이 크게 작용했다. 의사이자 경영자인 그가 보기에 위생상 불결하고, 서비스 철학이 없고, 인공 조미료를 퍼넣는 역전 식당 수준의 돼지국밥집이 너무 많았다. 부산시도 모범적인 돼지국밥집을 가려서 격려하지 않는 점이 아쉬웠다.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그가 수육 다음으로 육수 만들기에 들어갔다. 사골을 고아 뻑뻑하게 만든 뒤 인공 조미료를 퍼넣는 기존 돼지국밥 방식은 처음부터 경계의 대상이었다. 조리 실무자가 인공 조미료를 넣지 않고 맛을 내려면 까다롭고, 비용도 많이 든다고 반대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는 “시원해야 하니까 무, 끈적하고 달아야 하니 대파, 잡내를 없애는 생강, 인공 조미료 대신 마늘을 넣으면 그 맛이 난다”라며 밀어붙였다. 말처럼 간단하지는 않았다. 사골은 하루 전에 물에서 우려내 잡내를 제거하고, 끓이면서 떠오르는 기름을 떠내는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했다. 그렇게 수육 되고 육수 되니, 대중들한테 우리가 양질의 돼지국밥을 선보이자고 의견이 모였다.‘부산의 정을 담은, 식복 돼지국밥’이라고 쓴 가게 간판에는 부산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수준급 돼지국밥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실제로 식복의 돼지국밥은 국내산 암퇘지 사골을 12시간 우려 진한 풍미가 나고, 일체의 인공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세제나 이물질을 흡수하지 않는 ‘무흡수 뚝배기’를 사용하는 이유도 건강을 생각해서다. 주방은 조리기능장으로 2002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팀 전속 요리사였던 이동석 총괄 셰프에게 맡겼다. 이렇게 정성이 든 돼지국밥은 때깔부터가 다르다. 만 원짜리 돼지국밥 한 그릇을 먹고 난 손님들은 대접받고 가는 느낌이 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구 회장은 돼지국밥과 병원을 연관시켜 다소 의외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는 “돼지국밥집에서는 만 원을 위해서 돼지고기를 삶고, 썰고, 서빙한다. 병원은 이제 너무 독점적인 권한, 지위, 습관, 정서를 가진 게 아닌가 싶다. 서민들이 만 원을 벌기 위해서 어떤 수고를 하는지 알면 병원에서 환자한테 비싼 MRI 비용을 받을 때도 좀 겸허한 마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돼지국밥집은 나한테는 인생의 실험적인 선택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선택에 대해 누군가 입을 댈지도 모르지만, 자영업에 대한 생각도 명확하게 밝혔다.그는 “우리나라에는 자영업자가 너무 많다. 할 게 없어 음식점 하는 사람도 많다. 나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할 일이 없어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의사도 편해지려고 개업하면 일이 안 된다. 의사의 개업은 자기 인생 최후이자 최선의 선택이어야 한다. 하다가 안 되면 복귀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라고 일갈했다. 식복에는 ‘배가 고파서, 밥을 맛있게 먹고 싶어서 밥집에 오는 이 순간이 행복하다’라는 그의 철학이 들어 있다. 식복의 대표가 아니라, 컨설턴트를 자임한 그는 낮은 수익성을 높이는 방안들에 대해 오늘도 고민 중이다.구 회장의 식복(食福)은 어릴 적 성장 환경에서 나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는 경남 함안 군북 출신으로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정착했다. 부모는 부산으로 공부하러 오는 친척 아이들을 다 받아들였다고 한다. 많은 친척과 한집에서 어울려 살아 아침이면 도시락이 열몇 개가 될 정도였다. 우리 식구끼리만 밥을 먹어 본 적이 없어 어려서는 원망스러웠지만, 커서 보니 그게 너무나 고맙게 여겨졌단다. 일찍 철이 들고 삶을 풍부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꾸라지가 든 어항에 천적인 메기를 한 마리 넣으면, 미꾸라지들이 메기를 피해 다니며 더 활발하고 건강해진다고 한다. 어쩌면 ‘식복’이 부산 돼지국밥계의 메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글·사진=박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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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양강 따라 절벽 잔도, <br />11월엔 황금빛 은행나무 금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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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강 따라 절벽 잔도,
    11월엔 황금빛 은행나무 금시당

    푸른 강을 따라 산길을 걷는 트레킹을 다녀왔다. 꽃밭에서 시작해 소나무 숲을 지나 절벽에 매달린 아찔한 잔도를 걷고, 500년 된 고택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강을 따라 돌아오는 아름다운 코스였다. 가을이 무르익는 경남 밀양시 ‘용두산생태공원 힐링 산책길’ 5km 코스가 바로 그곳이다.■삼문송림과 구절초삼문동공설운동장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으로 여행은 시작된다.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학교 대항 체육대회를 지켜보며 목청껏 ‘마음 약해서’를 외치며 응원전을 펼쳤던 추억을 떠올리며 운동장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걷는다. 50년 전에도 울창해 걷기에 좋았던 솔숲은 지금도 하늘을 뒤덮어 가을 나들이를 나온 많은 산책객을 따가운 햇살에서 보호해준다.밀양강 제방 아래 하얀 눈꽃이 쌓인 듯 화사한 화원이 펼쳐진다. 많은 사람이 즐겁게 웃으며 카메라는 물론 휴대폰 버튼을 찰칵거린다. 화원 입구에 ‘구절초’라는 팻말이 붙었다. 국화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향기가 완전히 다른 꽃이다. 여행 초입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환한 꽃을 마음껏 구경하게 되다니 이번 일정도 행운에 행운이 겹칠 모양이다.제방을 넘어가면 밀양 산책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삼문송림이 나타난다. 2002년 ‘제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을 차지한 곳이다. 이곳에서는 수령 100년을 넘은 곰솔 6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밀양강을 따라 삼문송림을 걷는다. 소나무 사이에는 빽빽하게 심어진 푸른 식물이 보인다. 매년 9월 보라색 꽃이 활짝 피면 가슴이 쿵쿵 뛸 정도로 아름다운 맥문동이다.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부는데 이제는 가을이어서인지 시원한 걸 넘어 차갑게 느껴진다. 송림 사이를 걷는 사람도 적지 않고, 강 쪽을 향해 놓인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강물만 바라보며 ‘멍 때리기’에 몰입한 사람도 보인다.삼문송림이 끝나는 부분은 여름에는 시원한 물놀이장으로 이용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낮은 콘크리트다리가 놓였다. 이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절벽에 매달린 잔도로 갈 수 있게 된다.■밀양강 잔도다리를 건너 맞은편 용두산 산자락을 따라 돌아서면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수변산책로, 즉 잔도가 나타난다. 지난 7월에 개통한 곳이니 그야말로 ‘신상’이다. 경치가 아름답고 시원한 데다 사진 찍기에도 좋아 많은 사람이 찾는 인기 명소로 자리를 잡은 장소다.잔도는 구간에 따라 용두산 10~20m 절벽에 매달렸다. 절벽 아래로는 까마득한 밀양강이 흐른다. 이곳에는 용두보, 밀양 사람들은 용두목이라고 부르는 시설물이 있는데 옛날부터 여름철 물놀이장으로 인기가 높던 곳이다. 이곳의 물 흐름을 잘 모르는 객지 청년들이 해마다 한두 명씩 익사하는 사고가 일어나 지역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용두목에는 물놀이 가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용두산 잔도 풍경은 듣던 대로 굉장했다. 푸른 숲으로 뒤덮인 용두산, 산 정상 부분에 자리 잡은 호젓한 절, 아래로는 절벽과 유유히 흐르는 강 그리고 절과 강 사이 절벽을 따라 이어진 아찔한 잔도.개장 반년도 안 돼 SNS 핫플로 인기를 얻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잔도가 조금 짧아서 5분이면 끝난다는 점이다. 그래도 경치가 워낙 좋다 보니 짧다는 아쉬움을 덮고도 남을 만큼 찾을 가치는 충분하다.잔도를 한 번만 걷고 끝내기는 아쉬워 두세 번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한다. 잔도는 삼문공원 쪽에서 올라가는 것보다는 반대편, 즉 용궁사 쪽에서 내려오는 게 더 아름답다. 사진도 용궁사에서 삼문공원 방면으로 내려가면서 찍는 게 더 잘 나오고 풍경이 좋은 장소도 많다.잔도가 끝나는 부분에서 여정을 끝내지 않고 나지막한 산길을 더 걸어가기로 한다. 깔끔하게 잘 정리된 산책로여서 걷기에 어려움은 전혀 없다. 흙길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구불구불한 데크길이 나타난다. 길을 걷다 뒤를 돌아보니 숲 사이로 멀리 밀양시 왼쪽 부분인 가곡동과 전사포리 전경이 나타난다.데크길의 마지막은 해발 129m 용두산 꼭대기에 설치된 달팽이전망대다. 꽈배기처럼 꼬인 모양으로 올라가는 전망대 모양이 달팽이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이번 산책길에서 눈을 가장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장소가 여기여서 용두산을 찾는 사람은 꼭 이 전망대에 오른다.소문대로 달팽이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풍경은 기가 막힌다. 밀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나왔지만 이렇게 훌륭한 전망을 가진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달팽이전망대에서는 용두산 잔도와 밀양강, 그 너머 용평2교 다리와 경부선 철로 그리고 그 너머 밀양 시내 풍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정말 아름답고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하고 황홀한 전망이고 경치가 아닐 수 없다. 이곳에 온 사람들이 왜 하나같이 극찬을 쏟아내는지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마침 공기가 맑아 먼 곳까지 아주 깨끗하고 선명하게 잘 보이니 풍경은 더 훌륭하게 느껴진다.■금시당 은행나무달팽이전망대에서 돌아가는 대부분 산책객과 이별하고 다시 산성산 일자봉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오른다. 일정 목표는 등산이 아니라 트레킹이어서 목적지는 물론 일자봉이 아니다.산길이라고 해도 사실상 평지나 다름없는 산책로여서 걷는 데에는 큰 어려움은 없다. 분위기는 차분하고 공기는 맑은 길이어서 혼자서 또는 서너 명이 조용히 걷는 데에 이보다 좋은 곳은 없다.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이 나온다. 그곳에서 왼쪽 길을 따라 간다. 조금 더 걸으면 정자가 나오고 다시 두 갈래길이 나타난다. 이번에도 ‘금시당’이라는 안내판이 붙은 왼쪽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고른다.다소 험한 내리막길을 10분 정도 따라 가다 보니 역사가 깊은 고택이 나타난다. 16세기 사화를 겪고 권력과 정치에 환멸을 느낀 이광진이 관직을 내던지고 귀향해 만들어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별서인 금시당·백곡제다.줄여서 단순히 금시당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특히 11월 늦가을에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유명한 곳이다. 이유는 딱 한 가지다. 집을 지을 때 함께 심었다는 수령 500년의 울창한 은행나무다. 가을이 되면 수만 장이나 되는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변해 온 세상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때문이다.아쉽게도 아직 은행나무 잎은 노랗게 물들지 않았다. 여전히 한여름인 듯 파랗기만 하다. 환상적인 풍경이 연출되려면 다음 달 중순 이후까지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5km 산책 코스를 사진까지 찍으면서 걷다 보니 2시간이나 걸렸다. 금시당 앞 벤치에서 잠시 앉아 간단한 샌드위치와 커피 한 잔으로 점심을 대신한다. 이광진이 이곳에 별서를 만든 이유는 강이다. 바로 앞으로 밀양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그 너머로는 너른 평야여서 경치가 좋기 때문이다. 벤치에 앉아 천천히 흐르는 밀양강을 내려다보니 이광진이 왜 여기를 택했는지 금세 수긍이 된다.이제는 돌아갈 차례다. 귀환 코스는 아까와는 달리 산성산 산자락을 따라 이어지는 옛 산책로 ‘아리랑길’이다. 올 때 길은 넓고 편했지만 가는 길은 좁고 다소 불편하다. 두 명이 동시에 걷기는 어렵고, 반대편에서 한 명이 오면 비켜줘야 한다. 하지만 윗길보다 더 조용하고 호젓해서 진짜 오솔길을 걷는 느낌을 느끼기에는 더 낫다.돌아가는 길은 올 때 길보다 조금 짧다. 사진을 찍을 만한 감동적인 포토존도 없기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이유도 없다. 그나마 인상적인 곳은 ‘무암(巫岩)’으로 불리는 ‘구단방우’다. 용두산에 신의 기운이 넘쳐 흐른다고 생각한 과거 무당들이 굿을 하며 치성을 드린 곳이다. 구단방우는 ‘굿을 한 바위’라는 표현이 사투리 발음 그대로 적힌 이름인 모양이다.구단방우를 지나면 이번에는 용두보가 나타난다. 객지에서 물놀이하러 왔다 목숨을 잃은 많은 젊은이가 수장된 곳이다. 옛날 사람들은 물 아래에 귀신이나 신령이 있어 낯선 이들의 다리를 잡아끌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 많은 곳이니 무서우면서 신령한 곳으로 여겨졌을수도 있다.용두보를 지나면 다시 잔도가 나타난다. 산자락을 감싸 도는 길을 따라 걸어 삼문동공설운동장으로 향한다. 고향이지만 처음 걷는 길이다 보니 낯설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도 고향이니만큼 마음은 푸근했고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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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과 사람과 바다가 <br />어울려 빛을 나누는 공간
    문화라이프

    책과 사람과 바다가
    어울려 빛을 나누는 공간

    지난달 30일 늦은 오후 부산항 북항 앞바다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부산역과 북항친수공원 사이에 있는 쌍둥이 주상복합빌딩 ‘협성마리나G7’ 1층 어딘가에서 감미로운 선율의 재즈음악이 흘러나왔다. 100여 명의 관객은 5인조 재즈 밴드 ‘리치파이’의 반주에 맞춰 마이클 잭슨의 노래 ‘Love never felt so good’을 흥얼거렸다. 소극장이나 카페가 있는 건 아닐까 살짝 안을 들여다 보자 놀랄만한 공간이 펼쳐졌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거대한 둥근 책장에 수많은 책들이 꽂혀있는 이곳은 도서관이다.□관광객도 즐겨 찾는 도서관‘북두칠성 도서관’은 부산에 사는 사람들이나 부산을 찾은 관광객들에겐 특별한 도서관이다. 밤하늘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큰곰자리’ 처럼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껴안아 준다. ‘책이 사람을 만나 빛이 되고 길이 되는 공간’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다. 북항 재개발 사업과 함께 세워진 이 주상복합빌딩의 시공사가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부산역에서 북항으로 이어진 보행덱을 통해 G7 빌딩으로 이동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면 정문이 보인다. 얼마 전 개장해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북항친수공원에서는 횡단보도를 이용해 이순신대로를 건너면 바로 만날 수 있다.입구부터 펼쳐진 원형의 서가는 일반적인 일자(ㅡ) 형 서가와는 다르다. 북두칠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별자리 모양을 모티브로 설계된 이 서가들은 각기 다른 주제를 담고 있는 독특한 구조다. 책 분류도 십진법을 따르지 않았다. △문학 △예술·기술과학 △테마 서가 △언어·자연과학 △유아·아동 △철학·사회과학 △역사·여행 등 7개 분야로 분류됐다.장서는 대략 1만 6000여권. 열람만 가능하고 대출은 되지 않는다. 유료 멤버십인 폴라리스 멤버십에 가입하면 오리지널 굿즈 제공과 함께 도서 대출이 가능하다. 음식물 반입과 반려동물 출입은 금지돼 있다.□테마 서가·관광 기념품 판매도북두칠성 도서관의 가장 핵심공간은 테마 서가이다. 역시 7개의 공간(별 하나~별 일곱)으로 책이 비치됐다. △별 하나, 지식을 넓히는 인문교양 △별 둘, 감수성을 키우는 문학 △별 셋, 사람을 키우는 교육 △별 넷, 마음을 치유하는 심리 △별 다섯, 지구를 살리는 에코 △별 여섯, 세상을 바꾸는 젠더수업 △별 일곱, 인생을 배우는 모험 등으로 구성됐다. 이곳의 북큐레이팅에는 김미향 작가(인문교양), 김경집 교수(교육), 정선영 교수(심리), 이윤숙 에코페미니스트(에코), 정희진 박사(젠더수업), 이다혜 작가(모험) 등이 참여하고 있다.‘달빛 서가’는 달의 모양이 조금씩 변하듯 매월 주제를 바꿔가면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만날 수 있다. 이번 달 주제는 '우정이라는 이름의 다양한 얼굴'이다. 이제는 멀어져 버린 친구에 대한 기억을 통해 마음을 위로받고 추억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한다.또 겨울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을 위해 판타지부터 포근한 일상 힐링 만화까지 다양한 작품을 준비했다. 현실을 잠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고 싶은 이들을 만화 속 세계로 초대한다.열람실은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 아니 도서관 전체가 열람실이라고 해야 할까. 도서관 구석구석에 놓인 커다란 방석에 몸을 묻거나 반쯤 기대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자연스럽다.계단형 서가인 ‘책오름 광장’에서 책을 읽는 모습도 눈에 띈다. 계단과 아담한 광장이 어우러진 문화공간으로 강연과 공연 등의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평소에는 편하게 독서할 수 있는 장소이다.‘글길학당’과 ‘글고운학당’은 독서 소모임과 토론·세미나가 열리는 소통과 배움의 공간이다. ‘아트 홀’은 연주회나 전시 등의 소규모 문화 이벤트가 열린다. 행사가 없을 때는 캠핑 의자에 앉아 독서를 즐기면 된다.‘꿈틀이방’은 책과 함께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이 자라나는 성장의 공간이다. 아이를 데려온 부모를 위한 개인 사물함과 모유 수유실도 마련돼 있다.도서관 입구 쪽에 마련된 탁자에는 북두칠성 도서관 굿즈를 볼 수 있다. 책과 함께 한 특별한 순간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도서관이 자체 제작한 오리지널 굿즈가 준비돼 있다. 그 옆에는 부산 지역 작가와 청년작가, 마을주민, 관광객들이 함께 개발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오랜지 바다’라는 공간도 있다. 오랜지 바다는 이런 일을 하는 마을기업의 이름이기도 하다.□4년 동안 18만 명 다녀가2021년 5월 개관한 이후 꾸준히 방문객들이 늘어 올해 11월 기준으로 연인원 18만 명이 방문했다고 한다. 평일에는 어린이를 데리고 오는 가족 단위 방문객이 많고, 주말에는 절반 가량이 관광객이라고 한다. 부산역이나 부산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기 시간을 이용해 찾기도 하고, SNS 등에서 이야기를 듣고 일부러 방문하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책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행사로도 입소문이 났다.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도담도담 아카데미’에는 지금까지 1만 4500여 명이 찾았다. ‘찐영어 잘하는 언니와 동화·게임 속으로 풍덩’, ‘북두칠성도서관으로 나랑 별 보러 가지 않을래’ 등과 같은 프로그램이 모두 841회에 걸쳐 진행됐다.‘해질녘 콘서트’도 인기 있는 이벤트이다. 매월 다양한 아티스트와 함께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달 30일 오후에 열린 해질녘 콘서트에선 재즈 밴드 ‘리치파이’가 정통 재즈곡과 함께 팝 음악을 편곡해 들려줘 갈채를 받았다.해질녘 콘서트는 싱어송라이터, 밴드, 클래식, 성악, 국악 등 다앙한 장르의 음악가들이 초청돼 매달 한 차례 열렸다. 지금까지 53차례의 콘서트가 열려 6200여 명이 찾았다.독서클럽 ‘싱글남녀 연애이야기’는 ‘솔로’인 남녀 각 6~7인으로 꾸린다. 한 달에 네 번 열린다. 지금까지 40기, 560명의 미혼남녀가 참여했다. 20~30대의 독서 문화를 장려하기 위해 시작했는데, 독서토론 뿐만 아니라 심리상담, 성격검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인기를 끈다. 독서클럽을 통해 사귀거나 약혼을 한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엔 결혼에 골인했다고 자진신고한 커플도 나왔다.지난해부터 시작한 ‘성인 클래스’에는 퍼스널컬러, 미술심리, 와인, 명리학, 조향, 메이크업, 체형진단 등 다양한 주제로 92개의 프로그램이 개설돼 1130여 명이 수강했다. 이번 달에는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말차’에 대해 공부하는 클래스(17일 오후 7시 30분)를 준비했다. 차 전문가인 이영희 뷰티풀차문예당 대표가 강연자로 나선다.개관 때부터 사서로 일하고 있는 이혜민 씨는 “북항 재개발 지역에 세워진 빌딩이 단순한 상업적 공간을 넘어서 문화와 지식의 가교 역할을 하고, 지역 주민과 관광객에게 새로운 문화와 여가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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