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형은 감정이 되고, 움직임은 음악이 된다-홍승혜 개인전
커다란 스크린 원 위로 크고 작은 원과 막대, 십자 같은 게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공을 떠돌던 도형은 어느 순간 합체해 얼굴이 된다. 웃는 얼굴, 화난 얼굴, 놀란 얼굴, 삐진 얼굴…. 우리가 흔히 보던 ‘이모티콘’이다. 디지털 시대의 소통 수단인 이모티콘에 착안해 인간의 감정을 간결한 도형 언어로 풀어낸 영상 작품 ‘표정 연습’(2025)이다. 또 다른 작품 ‘우주로 간 스누피’(2019) 역시 아주 단순한 도형의 구성만으로 스누피의 우주여행을 상상하게 만든다.홍승혜(67) 개인전 ‘이동 중’(On the Move)이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가 꾸준히 탐구해 온 ‘이동성’ 개념을 기반으로 한 평면, 영상, 조각 등 24점을 선보인다. 작가의 작업 변모 과정을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23일 오후 4시엔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MEET THE ARTIST: 홍승혜’ 아티스트 토크가 마련된다.이번 전시는 ‘움직임’이라는 단일한 키워드에서 출발하지만, 그 양상은 단순하지 않다. 작가는 이를 세 가지 층위로 나눈다.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임을 내포한 평면, 실제로 움직이는 영상, 그리고 관객이 직접 이동시키며 개입할 수 있는 입체 작업. 이 세 갈래의 흐름은 전시 공간을 하나의 유기적 구조로 엮는다.작가는 이 모든 움직임의 근원을 ‘음악’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음악은 단순한 청각적 요소를 넘어선다. 멜로디, 리듬, 톤, 볼륨처럼 미술과 공유하는 개념 전반이 조형의 언어로 번역된다. “음색이라는 말에 ‘색’이 들어가듯, 음악과 미술은 이미 많은 어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내적인 운율, 음악성이 작업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내 작업은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일종의 춤이다. 마우스로 추는 춤”이라고 설명했다.전시장에 들어서면 다층적인 영상과 사운드가 맞물린다. 작가는 이를 ‘하나의 교향곡’에 비유한다. 각 영상은 독립된 성부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치밀하게 조율된 오케스트레이션을 이룬다. 실제로 그는 영상마다 사운드의 크기를 세밀하게 조정하며 균형을 잡았다. 관객은 어느 순간, 형태와 소리가 정확히 맞물리는 ‘싱크’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음악은 거의 모든 작업에 개입한다. 단 하나, ‘네잎클로버’만을 제외하고. 작가는 이 작품을 ‘무성’으로 남겨두며 오히려 대비를 만든다.흥미로운 점은 기술에 대한 그의 태도다. 작가는 첨단 기술에 집착하지 않는다. “로우테크에서도 충분히 흥미로운 결과가 나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방법을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느냐는 점이에요.” 아이패드 기반의 음악 작곡 앱(개러지밴드)을 활용해 직접 사운드를 만든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접근 가능한 도구를 통해 창작의 문턱을 낮추고, 방법론 자체를 열어두려는 의도다. 이런 덕분일까, 그의 디지털 작업을 보는데 온기가 느껴진다.작가의 또 다른 핵심 키워드는 ‘비추다’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무언가를 드러내고 조명하는 역할을 하기를 원한다. 실제로 영상 작업은 조명으로 기능하며, 공간 속 사물과 관객을 비춘다. “저는 누군가를 비춰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은유를 넘어, 작업의 기능적 구조로 구현된다. 작품은 대상이면서 동시에 매개가 된다. 이러한 태도는 ‘가족’이라는 주제에서도 드러난다. 단순한 도형의 배열로 구성된 서사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관계망을 형성한다.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 키워드는 보편적 서사로 확장된다.입체 작업에서는 관객의 참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부 작품은 직접 움직이고 재배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움직인다는 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뜻이죠.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유기적 기하학’ 개념과도 맞닿는다.그에게 작업은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관객의 해석이 필수적으로 개입한다. 그래서 그는 설명을 최소화하고, 질문과 응답의 방식으로 소통하기를 택한다. “관객의 피드백은 제 작업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결국 이 전시는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제시하기보다,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주되는 상태를 제안한다. 음악처럼, 그리고 움직임처럼.홍승혜는 서울대 회화과와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97년 사각 픽셀 작업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했고, 최근 벡터 문법을 도입하면서 보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전시는 6월 14일까지 열린다.
부처는 붓질에 있다
불화(佛畵)는 불교사상을 알리고 포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화는 통일신라 시대의 ‘대방광불화엄경변상도(大方廣佛華嚴經變相圖)’이다. 신라의 화가 솔거가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삼국 시대부터 사찰 건물에 불화를 그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불화는 절이나 박물관에서 만나는 오래전 그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은 바닥에 엎드려서 불화를 그리고 있었다. 불화는 살아 있었다. “자주 가던 통도사 대웅전을 유심히 보다 그림의 색이 아주 많이 바래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오래된 소중한 국가유산의 복원과 보존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하다가 ‘국가유산수리기능자 화공’이라는 단청 관련한 국가 자격증이 있다는 것을 알고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하루 10시간 이상 연습하며 무릎·어깨·손목 통증으로 정형외과를 드나들었지만, 현장에서 단청을 그리는 시간이 꼭 한번 왔으면 좋겠습니다.” “단청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다 이토록 가까이서 그 유산과 명맥을 지키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우리의 문화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단청에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화가를 이르던 말이 ‘화공(畫工)’이다. 요즘 세상에도 화공이 되기 위해 몸을 갈아 넣는 사람들이 있었다. 국가유산수리기능자 화공은 전통 건축물에 단청을 입히거나 벽화, 모사 등을 수행할 수 있는 전문 역량을 갖춘 사람에게 국가유산청에서 부여하는 국가전문자격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만난 한 블로그에는 이 같은 내용의 합격자 수기가 줄줄이 올라와 있었다. 뜻밖에도 부산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는 ㈜원여동양미술연구소였다. 이곳에서 이승규 대표와 노해 책임연구원 부부를 만났다. 알고 보니 홍익대 동양화과를 졸업한 노해 작가는 2018년 부산에서 연 첫 개인전에서 ‘별화(別畵)’로 화제가 되었다. 별화는 사찰 건물에 회화적인 수법으로 그린 그림 또는 장식화다. 용, 거북, 봉황, 기린, 사자, 학, 오리, 사군자 등이 주 대상이다. 혼자 보기 아까운 별화를 대중에 알리고 싶은 마음에 건축물에서 떼서 종이로 옮겼다고 했다. 별화 작가는 예술가이자 역사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힘든 직업이다. 그래서 요즘엔 별화 작가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노 작가가 별화에 관심을 가진 건 불교 전문 사진가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어린 시절 주말에 눈 떠 보면 이미 산사로 가는 차 안에 실려 있었다. 다시 눈 떠보면 절이나 탑 앞이었다. 아버지를 좇았지만, 아버지의 눈은 단청이나 탑에 가 있었다. 도대체 저기에 뭐가 있어 저렇게 오래 보고 있나 궁금해졌다. 그곳에는 부처님 외에도 꽃이나 동물 등 별화가 그려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불화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대학에 가서는 어려서 아무 생각 없이 봤던 것들을 그리게 되었다. 대학을 마치고는 동양화 기법을 적용한 현대미술을 할 생각이었다.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전통 회화의 색을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아버지의 말대로 중요무형문화재 불화장(佛畵匠) 이수자 이승규 씨에게 불화를 배우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제지간인 두 사람이 연애해서 나이 차를 극복하고 결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부가 된 지는 7년이 되어 간다. 이승규 작가는 지난해 9월 서울 인사동에서 제자 38명과 함께 ‘괘불-부처의 법을 펼치다’ 전시를 열었다. 조선 시대에 탄생한 괘불은 큰 행사 때 야외에 불단을 차리고 두 기둥에 거는 야외 행사용 대형 불화이다. 괘불은 큰 것은 높이가 15m에 달해 건물 몇 개 층 크기라 한 공간에 여러 점을 걸기가 불가능하다. 이 전시는 원본을 축소하거나 현대적으로 구현해 만든 여러 형태의 괘불을 갤러리 안에서 한눈에 감상하도록 만든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았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조선 시대 괘불 120여 점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이 작가의 어머니는 신심 깊은 불자였다. 그는 이 시대의 불모(佛母)로 꼽혔던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 기능보유자 석정 스님의 마지막 제자가 되었다. 스님은 금강공원 식물원 북쪽 금정산 기슭에 자리 잡은 선주산방에서 불화를 그렸다. 이 작가는 20대 후반에 제자로 들어가 10년 넘게 스님을 모셨다. ‘원여(圓如)’라는 법명도 스님이 지어줬다. 둥글 원(圓), 같을 여(如)자.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다. 2012년 스님이 입적한 뒤 독립해서 화실을 차렸고, 거기서 지금의 아내 노해 씨를 만났다. 원여동양미술연구소의 슬로건은 ‘예술이 기술이 된다’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뜻의 법고창신(法古創新)이란 단어를 생각나게 만든다. 이 작가는 옛날 것으로부터 현대에 쓸 수 있는 것을 찾아내기를 좋아했다. 옛것을 그대로 답습하기보다 자꾸 발전시켜 시대에 맞는 걸 만들고 싶어 한다. 불화를 제작할 때 사용하는 선조들의 전통 기법을 현대적으로 체계화해 특허 실용신안을 2개나 취득했고, 원여동양미술연구소는 NICE 기술평가에서 우수기술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신중탱화(神衆幀畵)는 불교를 수호하는 다양한 신들을 묘사한 불화다. 그가 지난해에 만들어 경기도 용인 연화암에 모신 신중탱화는 뭔가가 달라 보였다. 신 중의 한 분이 뜻밖에도 스마트 폰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연화암 주지 성혜 스님이 “우리 절 신중탱화는 다른 절하고 뭔가 달랐으면 좋겠다. 현대적인 것을 넣어도 되지 않겠냐”라고 먼저 제안한 게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이 작가가 “스마트폰이 좋겠는데 기왕이면 아이폰보다 갤럭시를 넣자”라고 호응했다. 그렇게 불기 2570년 사상 처음으로 갤럭시 폰을 든 대자제천천왕이 탄생했다. 감로탱화(甘露幀畵)는 영혼을 천도하는 불교 의식에 사용되는 불화다. 아귀(餓鬼)에게 감로(甘露)를 베푼다는 뜻이다. 아귀는 좁게는 돌아가신 조상, 넓게는 중생의 고통을 집약한 존재이기도 하다. 부산 기장 묘관음사 주지 서강 스님은 감로탱화를 의뢰하며 “옛날 거 말고 요즘 세태를 반영해서 그렸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 결과로 지금 묘관음사에는 고기 굽고 와인 마시고, 자동차 사고가 나고, 총을 쏘며 전쟁하는 감로탱화가 그려져 있다. 또 지난해에는 아이패드를 이용해 단청 문양부터 전통회화 작품을 완성하는 온라인 수업을 열고, 굿즈를 만들기도 했다. 너무 멀리 있는 줄 알았던 불화에 이처럼 시대상이 반영되니 더욱 공감이 된다. 이 작가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는 “이번에 약사여래삼존도, 관음보살도, 아미타여래삼존도, 달마·혜가단비도 등 범어사 대웅전 벽화 4점이 국가지정문화유산(보물)으로 지정되는 매우 기쁜 일이 생겼다. 벽화는 보존에 신경 쓰지 않으면 금방 훼손이 되어 버린다. 불화를 그리는 사람으로서 시민들이 보물들을 꼭 친견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노 작가도 “불화를 처음 배울 때 먹으로 선 긋는 연습을 6개월 동안 했다. 선 하나하나가 시간이고, 그 시간이 쌓여 지금까지 왔다. 엎드려서 몇 달씩 뼈를 깎는 고통과 몸을 희생해 가면서 불화 한 점이 탄생하고, 부처님이 나투시게 되니 정성스럽게 봐주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바닥에 꿇어앉아 불화를 그리는 모습이 마치 고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 불화를 그리고 있던 분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김소라(부산 해운대구 중동) 씨는 “대학원에서 불교 미술사를 공부했다. 아이들이 크고 나서 내가 좋아했던 불화를 그려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지 2년쯤 되었다. 한 땀 한 땀 새겨 나간다는 느낌으로 그리니 몸은 조금 힘들지만 정신 건강에는 좋다. 더 배우고 싶어서 모사공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모사공(模寫工)은 전통 회화나 서적 등의 문화재를 원래의 모습과 똑같이 그려서 복원하거나 보존하는 문화재 모사 전문가다. 불교에서는 모든 생명체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다시 보니 힘들게 불화 그리는 분들이 구도(求道)하는 모습으로 느껴졌다. 글·그림=박종호 기자
가는 봄 아쉬워 산 올랐더니 진홍빛 춘정 가슴에 사무치더라
매서운 열기가 봄을 밀어내고 있다. 5월 중순인데도 낮 최고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날씨가 연일 계속된다. 가는 봄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절기는 이를 허락치 않는다. 매화·산수유에서 시작한 봄꽃들이 찬란한 벚꽃을 지나 봄꽃의 마지막인 철쭉에게 봄을 맡긴다. 가는 봄이 아쉬워 철쭉 군락지인 지리산 바래봉을 찾았다. ■직접 걸어야 감동이 완성되는 바래봉 지리산 바래봉(1165m) 철쭉 군락지 산행은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됐다. 능선을 따라 철쭉으로 붉게 물든 바래봉의 모습에 넋을 잃었다. 여기저기 꽃구경을 다녀봤지만 산 전체를 철쭉이 장악한 곳은 없었다. 철쭉의 붉은 기운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급히 찾아보니 아직 늦지 않았다. 4월 하순 무렵 바래봉 산 아래쪽부터 꽃이 피기 시작하지만 정상 부근은 이달 말까지 철쭉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급한 마음에 한걸음에 바래봉으로 달려갔다. 지리산 바래봉은 ‘발산(鉢山)’이라고도 한다. 봉우리 모양이 나무로 만든 승려들의 밥그릇인 바리와 비슷하게 생긴 데서 유래했다. ‘삿갓봉’이라고도 하는데, 승려들이 쓰고 다니던 삿갓 모양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바래봉이 국내 최고의 철쭉 군락지로 떠오른 데는 재미난 사연이 있다. 지리산 서쪽에 위치한 바래봉 일대는 숲이 매우 울창했다. 1970년대 초 이곳에 한국·오스트레일리아의 시범 면양 목장을 조성하게 된다. 그런데 식성이 좋은 면양이 잎에 독성이 있는 철쭉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식물을 먹어 치웠다. 사람이 철쭉을 먹으면 구토와 어지러움 등을 느끼고 사망에도 이를 수 있을 정도로 독성이 강하다. 당시엔 이 지역이 출입금지 구역이어서 일반인들은 목장 철쭉꽃의 아름다움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산악인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이후 사진작가들의 멋진 작품이 발표되면서 일반인들에게 큰 관심을 끌게 됐다. 바래봉 철쭉은 일반적인 산철쭉과 비교해 색이 훨씬 짙고 선명한 진홍빛을 띤다. 해발 고도가 높아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강해 꽃잎의 색이 더욱 선명한 것이다. 고도 차로 산 아래 꽃이 지더라도 정상부는 만개하는 경우가 많다. 늦은 봄까지도 화려한 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이유다. 바래봉 철쭉의 또 다른 매력은 나무 모양에 있다. 양들이 철쭉 주위의 풀을 뜯으며 나무 아래쪽을 정리해준 덕에 둥글둥글한 모양이다. 다른 지역과는 달리 사람 키보다 큰 철쭉이 터널을 이루며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바래봉의 철쭉은 바래봉 정상에서 서쪽 아래까지 4km 이상 넓게 퍼져 있는데, 팔랑치에서 1.5km쯤에 가장 밀집돼 있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용산리에서는 매년 4월 말부터 5월 중순까지 바래봉 철쭉 축제를 열고 있다. 올해로 30년째다. 용산마을에 도착하니 철쭉 축제가 한창이다. 평일 오전이어서 관람객들은 많지 않았지만, 축제 관계자들의 움직임은 분주하다. 바래봉 철쭉 군락지까지는 3가지 루트가 있다. ‘지리산 허브밸리 주자장(용산마을)- 바래봉 삼거리-정상-바래봉 삼거리-허브밸리 주차장’으로 원점회귀하는 코스로 잡았다. 왕복 9.6km 정도이고, 5~6시간 소요된다. 이 코스는 초반에 조금 가파른 길을 지나면 대체로 완만하지만 다소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가장 대중적이고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다. 등산로 입구 안내소 옆에 지리산 운봉 바래봉 유래를 적은 바위 조형물이 눈길을 끌었다. 이곳에서 바래봉 정상까지는 4.2km로 가는 내내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임도로 돼 있다. 임도를 따라 오르다 보면 곳곳에 등산객들을 위한 쉼터(정자)가 마련돼 있다. 산 아래쪽에서는 철쭉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봄을 아쉬워하다 시들어가는 철쭉의 모습만 간간이 눈에 띄었다. 1시간 여를 올랐을까. 철쭉의 모습은 없고, 지리한 임도만 계속됐다. 아상(我相)이 올라왔다. “너무 늦어 정상에도 꽃이 없는 거 아냐?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나?” 등등 갖가지 짜증이 몰려왔다. 나 뿐아니었다. 앞서 가던 등산객 커플의 짜증스런 말투가 들려왔다. 등산과는 관계없는 이야기인데 짜증이 섞여 있다. 이들도 아상이 올라온 것일까. 철쭉만 보려고 했고, 보이지 않으니 짜증이 났다. 다른 사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건 당연하다. 잠시 앉아서 호흡에 집중하고 나니 다른 것들이 보였다. 왕성한 푸른 기운을 간직한 나무와 풀들, 그리고 이들 사이로 날아다니는 나비와 벌레들. 정겨운 새소리들. 정말 경이로운 모습이다. 철쭉을 조금 내려놓으니 한결 가볍고 편안하다. ■팔랑치에서의 감동이 정상까지 이어지다 바래봉 중턱쯤 올라왔을까. 드디어 철쭉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활짝 핀 진홍빛 철쭉들이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며 반겼다. 바래봉 삼거리에 놓여 있는 물품보관대가 눈길을 끌었다. 이곳에서는 바래동 정상과 최고의 철쭉 군락지가 있는 팔랑치을 다녀올 수 있다. 정상에 오르기 전에 팔랑치로 발길을 옮겼다. 바래동 삼거리에서 팔랑치까지는 왕복 1.8km. 철쭉 최대 군락지의 모습이 궁금했다. 팔랑치에 접어들자 마자 등산로 양쪽으로 핀 철쭉이 반겼다. 그동안의 고생이 보상 받은 기분이었다. 평일인데도 많은 등산객들이 철쭉의 마지막을 담으려고 줄을 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촬영에 방해 되지 않게 걸음을 재촉하며 팔랑치 전망대로 향했다. 진홍빛 철쭉 사이에 간간이 모습을 드러낸 하얀철쭉은 백옥같이 선명했다. 팔랑치 전망대에 오르니 능선이 온갖 진홍빛으로 물들었다. 아직 만개하지 않는 꽃들이 있었지만 바래봉 최고의 철쭉 군락지다운 자태가 드러났다. 팔랑치 전망대에 오른 등산객들도 철쭉들의 향연에 넋을 잃은 모습이다. 바래봉 정상이 궁금했다. 오던 길을 되돌려 바래봉으로 향했다. 바래동 삼거리까지 되돌아가는 길은 또다른 매력이 있다. 팔랑치로 가는 길에 능선을 봤다면 되돌아가는 길엔 꽃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흰철쭉과 함께 있던 하얀꽃인 이팝나무도 눈에 들어왔다. 순백했다. 팔랑치의 감흥이 가시기 전에 바래봉 정상에 올랐다. 바래봉은 또다른 느낌이다. 철쭉이 능선을 타고 바래봉 정상까지 이어져 있다. 특히 진홍빛의 철쭉을 깔고 지리산 천왕봉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이다. 바래봉에서는 천왕봉을 비롯해 중봉, 제석봉, 촛대봉, 형제봉, 토끼봉, 반야봉 등 지리산 주요 봉우리들을 감상할 수 있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웅장한 지리산을 풍경을 바라보며 아주 작은 인간을 느꼈다. 바래봉 정상 부근 곳곳에서 철쭉을 배경으로 추억을 담으려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몸통은 없고 꽃들 사이에 등산객들의 얼굴만 가득하다. 바래봉 정상은 등산객들로 또 다른 줄이 생겼다. 정상석의 인증샷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정상석을 배경으로 요즘 유행하는 미니미 사진(요정샷)을 찍으려 사람들로 장사진이다. 정상석 뒤 10여m에 사람이 서면 사람이 요정처럼 작게 보인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진이다. 바래봉을 한걸음에 달려오게 만든 사진과 같은 장면은 아니었지만, 늦은 봄 진홍빛을 한껏 품은 철쭉을 볼 수 있었다는 게 행운이고, 감사하다. 하지만 하산하는 길은 그리 즐겁지 만은 않았다. “바래봉 철쭉이 옛날 같지 않아. 이렇게 듬성듬성하지 않았어, 얼마나 이뻤다고. 모든 게 기후 변화 때문이야” 바래봉 정상에서 만난 한 등산객의 말이 하산 내내 뇌리에 남았다.
[이상훈의 시그니처 문화공간 이야기]세계 최초의 공개형 수장고 미술관 로테르담 DEPOT 디포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뮤지엄파르크에는 유럽을 대표하는 미술관 가운데 하나인 보이만스 판 뵈닝언 미술관(Museum Boijmans Van Beuningen)이 자리하고 있다. 초기 컬렉션을 기증한 프란스 보이만스와 후원자 다니엘 판 뵈닝언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 미술관은 중세 회화부터 현대미술, 디자인, 조각, 사진까지 약 15만 점 이상의 방대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유럽 미술사의 주요 작품들을 소장한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관람객이 실제로 보는 작품은 전체 소장의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수장고 안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계 주요 미술관 대부분의 공통된 구조이기도 하다. 실제 전시되는 작품은 전체 컬렉션의 5~10% 수준에 불과하며, 나머지는 온도와 습도가 조절된 공간에서 관리된다. 관람객은 완성된 전시만 보지만, 미술관 시스템의 대부분은 사실 ‘보이지 않는 공간’ 속에서 작동한다. 로테르담은 바로 이 지점을 뒤집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줄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이었다. 그 결과 탄생한 건물이 디포 보이만스 판 뵈닝언(DEPOT Boijmans Van Beuningen)이다. 2021년 개관한 이 건물은 네덜란드 건축사무소 MVRDV가 설계했다. 외형은 거대한 은빛 항아리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건물은 주변 도시 풍경과 하늘, 공원을 반사하며 끊임없이 표정을 바꾼다. 건축은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주변 풍경을 끌어안는다. 마치 도시 전체를 표면 위에 담아내는 거대한 렌즈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내부 구조다. 디포는 일반 미술관처럼 완성된 전시만 보여주지 않는다. 관람객은 회화와 조각, 사진, 디자인 작품들이 실제로 어떻게 보관되고 이동하며 복원되는지를 직접 본다. 복원실과 포장 공간, 거대한 수장 랙 시스템까지 공개되며, 미술관이 단순한 감상의 장소가 아니라 보존과 연구의 시스템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이는 기존 미술관의 권위적 구조를 상당 부분 해체하는 시도이기도 하다. 건축적으로도 상징적이다. 일반적인 미술관은 빛을 통제하기 위해 폐쇄적 외관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만, 디포는 정반대다. 거울 외피를 통해 도시와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도시 풍경이 건물 표면에 실시간으로 반사되며, 미술관은 더 이상 닫힌 문화시설이 아니라 도시 경험의 일부가 된다. 옥상에는 숲처럼 조성된 공간과 레스토랑이 들어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머물 수 있다. 과거 비공개 시설이었던 수장고가 공공 플랫폼으로 바뀐 셈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더 이상 단순히 ‘좋은 건물’만 보러 가지 않는다. 그 공간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어떤 철학으로 운영되는지, 도시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함께 경험한다. 디포는 그 변화의 상징이다. 보이지 않던 공간을 드러내고, 숨겨진 시스템을 공개하며, 문화의 뒷면까지 도시 경험으로 전환한다. 로테르담은 다시 한번 건축을 통해 미래 문화 공간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부산에서 아시아로, 플랫폼으로 확장하는 ‘아트부산 2026’ 개막
부산을 넘어 아시아로 확장하는 ‘아트부산 2026’이 21일 언론과 VIP 프리뷰를 시작으로 4일간의 화려한 미술 축제의 막을 올렸다. 올해로 15회를 맞는 아트부산은 18개국 107개 갤러리가 참여해 24일까지(부산일보 4월 29일 자 18면 보도) 부산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열린다. 손영희 이사장은 “아트부산은 지난 15년간 컬렉터와 관람객,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해 왔다”면서 “올해는 작품 거래를 넘어 부산이라는 도시 안에서 예술과 라이프스타일, 교류 경험이 연결되는 플랫폼으로 아트부산을 확장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올해는 해외 갤러리는 26%를 차지하고, 신규 참가 갤러리가 총 31곳에 이르는 등 국제적인 스펙트럼이 한층 넓어졌다. 다수 갤러리가 미공개 신작과 솔로 프로젝트 중심으로 선보여 ‘전시형 페어’로서 눈길을 끌고 있다. 입장권 판매 실적도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 20일로 마감한 얼리버드 티켓 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매출 37%를 초과 달성해 역대 가장 빠른 초기 판매 흐름을 기록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커넥트’(CONNECT) 섹션에 출품된 무나씨(에브리데이 몬데이)의 대형 걸개 작품 ‘고사관수도’가 관람객을 맞는다. 커넥트 섹션은 아트부산의 특별 섹션으로, 개별 작가의 작품 세계를 집중 조명한다. 무나씨 외에도 서용선, 김은주, 박인성(윤선갤러리), 나점수(아트스페이스3)의 솔로 부스를 만날 수 있다. 특히 서용선(갤러리 엘엔엘)은 대형 조각 4점과 흉상 조각 4점, 판화 4점을 만날 수 있다. 김은주(맥화랑) 솔로 부스는 종이에 연필로 집요한 작업을 이어 온 21m짜리 대형 회화 작품을 전시한다. 이 작품은 워낙 대작이라 제작(2016년) 후 이번까지 단 세 번 일반에 공개됐을 뿐이다. 올해 커넥트는 도시가 지닌 물리적 풍경뿐 아니라 기억과 감정, 사회 구조가 중첩된 장소성을 함께 다룬다. 특히 고원석 큐레이터가 기획한 그룹전 ‘네크로 어바니즘: 시간의 지층’도 함께 운영되며, 폴 파이터, 애드 앳킨스, 이승애, 유화수, 박광수, 이인미 등이 참여한다. 올해 신규 섹션으로 선보인 ‘라이트하우스’(LIGHTHAUS)와 ‘디파인’(DEFINE)은 미술 중심 페어 구조를 디자인과 건축, 라이프스타일 영역까지 확장한 경우이다. 부스-인 구조를 통해 큐레이토리얼 기획과 공간 디자인을 함께 평가하는 방식을 도입한 라이트하우스는 부스를 단순한 거래 공간이 아니라 전시 단위로 전환하는 데 초점을 뒀다. 부산의 화랑 OKNPx츠타야 북스, 화이트스톤 갤러리, 우손갤러리, 피에스센터(PS CENTER) 등이 참여한다. 섹션별 갤러리 하이라이트로는 뉴욕·브뤼셀·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글래드스톤 갤러리가 원형 캔버스를 활용한 연작 형태의 우고 론디노네 신작 회화 3점을 아트부산에서 최초 공개한다. 알렉스 카츠의 대형 회화와 뉴욕 기반 한국 출신 작가 아침 김조은의 신작도 선보인다. 아와세 갤러리는 제2회 후쿠오카 어워드 수상 작가 소 소우엔의 2인 퍼포먼스를 필두로 부스를 구성했다. 출품작 대부분이 미공개 신작이다. 국제갤러리는 줄리안 오피 신작만으로 단독 부스를 구성했다. 리안갤러리는 ‘컬렉터스 룸’ 형식으로 이강소를 포함한 한국 동시대 미술 작가와 프리즈 2025, 아트바젤 2026에 참여한 에디 마르티네즈 등 글로벌 아트페어 라인업과 연결된 작가군을 교차 구성한다. 우손갤러리는 하반기 기획전 프리뷰 형태로 유키마사 이다 작품을 공개하고, 이인성미술상 수상 후 대구미술관 개인전을 개최한 이명미 작품을 전시한다. 피에스 센터는 구본창, 나레쉬 쿠마르 등의 작품을 소개한다. 하나금융그룹이 후원하는 제2회 하나퓨처아트어워드는 △히피한남 류지민 △캡션서울의 인사이드 잡(Inside Job) △비스킷 갤러리의 미유 야마다 3인이 파이널리스트에 올랐으며, 21일 현장 심사를 통해 최종 수상자로 1992년생 류지민을 결정했다. 류지민은 이화여대와 같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으며, 사라짐 이후에도 지속되는 풍경과 기억의 잔상에 주목하는 회화를 선보였다. 특히 그의 작품은 관찰된 현실과 개인적 기억을 생성형 AI 작업을 거쳐 가상의 이미지로 만든 뒤 이를 다시 작가가 섬세한 붓질 과정을 거쳐 회화로 완성됐다. 한편 아트부산의 시그니처 토크 프로그램인 ‘컨버세이션스’(CONVERSATIONS)는 건축, 미디어, 컬렉션, 시장 등 다양한 분야 전문가가 동시대 예술의 유통, 경험 구조를 조망하는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총 8개 섹션이 진행되며, 요한 르 탈렉 주한 프랑스대사관 문화교류협력 담당관,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 조주현 퐁피두센터 한화 수석 큐레이터, 류성희 영화 미술감독, 비비안 초우 아트넷 아시아 에디터 등이 참여한다. 아트부산 입장권은 전일권 15만 원, 1일권 4만 원으로 구성되며, 관람 시간은 22~23일 오전 11시~오후 7시, 24일 오전 11시~오후 6시이다.
커다란 스크린 원 위로 크고 작은 원과 막대, 십자 같은 게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공을 떠돌던 도형은 어느 순간 합체해 얼굴이 된다. 웃는 얼굴, 화난 얼굴, 놀란 얼굴, 삐진 얼굴…. 우리가 흔히 보던 ‘이모티콘’이다. 디지털 시대의 소통 수단인 이모티콘에 착안해 인간의 감정을 간결한 도형 언어로 풀어낸 영상 작품 ‘표정 연습’(2025)이다. 또 다른 작품 ‘우주로 간 스누피’(2019) 역시 아주 단순한 도형의 구성만으로 스누피의 우주여행을 상상하게 만든다. 홍승혜(67) 개인전 ‘이동 중’(On the Move)이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가 꾸준히 탐구해 온 ‘이동성’ 개념을 기반으로 한 평면, 영상, 조각 등 24점을 선보인다. 작가의 작업 변모 과정을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23일 오후 4시엔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MEET THE ARTIST: 홍승혜’ 아티스트 토크가 마련된다. 이번 전시는 ‘움직임’이라는 단일한 키워드에서 출발하지만, 그 양상은 단순하지 않다. 작가는 이를 세 가지 층위로 나눈다. 움직이지 않지만 움직임을 내포한 평면, 실제로 움직이는 영상, 그리고 관객이 직접 이동시키며 개입할 수 있는 입체 작업. 이 세 갈래의 흐름은 전시 공간을 하나의 유기적 구조로 엮는다. 작가는 이 모든 움직임의 근원을 ‘음악’으로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음악은 단순한 청각적 요소를 넘어선다. 멜로디, 리듬, 톤, 볼륨처럼 미술과 공유하는 개념 전반이 조형의 언어로 번역된다. “음색이라는 말에 ‘색’이 들어가듯, 음악과 미술은 이미 많은 어휘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내적인 운율, 음악성이 작업을 움직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내 작업은 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일종의 춤이다. 마우스로 추는 춤”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다층적인 영상과 사운드가 맞물린다. 작가는 이를 ‘하나의 교향곡’에 비유한다. 각 영상은 독립된 성부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치밀하게 조율된 오케스트레이션을 이룬다. 실제로 그는 영상마다 사운드의 크기를 세밀하게 조정하며 균형을 잡았다. 관객은 어느 순간, 형태와 소리가 정확히 맞물리는 ‘싱크’의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이번 전시에서 음악은 거의 모든 작업에 개입한다. 단 하나, ‘네잎클로버’만을 제외하고. 작가는 이 작품을 ‘무성’으로 남겨두며 오히려 대비를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기술에 대한 그의 태도다. 작가는 첨단 기술에 집착하지 않는다. “로우테크에서도 충분히 흥미로운 결과가 나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방법을 많은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느냐는 점이에요.” 아이패드 기반의 음악 작곡 앱(개러지밴드)을 활용해 직접 사운드를 만든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접근 가능한 도구를 통해 창작의 문턱을 낮추고, 방법론 자체를 열어두려는 의도다. 이런 덕분일까, 그의 디지털 작업을 보는데 온기가 느껴진다. 작가의 또 다른 핵심 키워드는 ‘비추다’다. 그는 자신의 작업이 무언가를 드러내고 조명하는 역할을 하기를 원한다. 실제로 영상 작업은 조명으로 기능하며, 공간 속 사물과 관객을 비춘다. “저는 누군가를 비춰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말은 단순한 은유를 넘어, 작업의 기능적 구조로 구현된다. 작품은 대상이면서 동시에 매개가 된다. 이러한 태도는 ‘가족’이라는 주제에서도 드러난다. 단순한 도형의 배열로 구성된 서사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아이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하나의 관계망을 형성한다.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 키워드는 보편적 서사로 확장된다. 입체 작업에서는 관객의 참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부 작품은 직접 움직이고 재배치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움직인다는 건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뜻이죠.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유기적 기하학’ 개념과도 맞닿는다. 그에게 작업은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관객의 해석이 필수적으로 개입한다. 그래서 그는 설명을 최소화하고, 질문과 응답의 방식으로 소통하기를 택한다. “관객의 피드백은 제 작업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결국 이 전시는 하나의 고정된 의미를 제시하기보다,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주되는 상태를 제안한다. 음악처럼, 그리고 움직임처럼. 홍승혜는 서울대 회화과와 파리 국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97년 사각 픽셀 작업으로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했고, 최근 벡터 문법을 도입하면서 보다 유연하고 자유로운 이미지로 확장되었다. 전시는 6월 14일까지 열린다.
요괴를 모르면 일본을 알 수 없다
“요괴를 믿으십니까?” 이 책은 어느 날 유령 이야기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을 때부터 시작한다. 갑자기 강의실의 전깃불이 한꺼번에 나가는 게 아닌가. 원인을 조사한 결과, 전구가 과열되어 두꺼비집이 내려간 것으로 규명된다. 매우 드물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왜 하필 그때였을까. 인간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세계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받는 순간이다. 요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존재다. 요괴는 끝없는 상상력과 창의력의 세계에 산다. 전 세계를 사로잡은 일본 서브컬처의 뿌리에는 언제나 요괴가 있었다. ‘이웃집 토토로’, ‘고질라’, ‘귀멸의 칼날’은 뛰어난 요괴 영화다. 요괴는 이제 제품의 마스코트가 되고, 비즈니스의 매개물이 되기도 한다. <일본 요괴 도감 101>은 현대 대중문화 창작의 거대한 원천이 되어준 일본 요괴를 집대성했다. 요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일본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벰, 베라, 베로가 “빨리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외쳤던 기억이 선명하다. 갑자기 궁금해서 찾아보니 어린 시절 즐겨본 만화영화 ‘요괴인간’은 사상 두 번째 한일 합작 애니메이션이었다(첫 번째는 ‘황금박쥐’다). 숨어서 살아가던 이들 요괴 인간은 지금쯤 소원하던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책에 따르면 요괴의 종류는 형태를 바꾸는 요괴, 신비롭고 마법 같은 힘을 가진 생물, 자연을 뛰어넘는 신비로운 존재,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죽은 자의 영혼으로 구분된다. 여우 요괴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어느 날 남편이 아름답고 온화한 성품을 지닌 아내를 놀래주기 위해 몰래 집으로 되돌아온 게 화근이었다. 앉아 있는 아내의 기모노 자락 아래에 튀어나온 하얀 꼬리를 보고 말았다. 아내는 여우였다. 여우와 관련된 일본 신화는 한국의 구미호 이야기가 흘러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는 여우를 모시는 신사가 3만 개가 넘고, 유부 우동을 ‘키츠네(여우) 우동’이라고 부른다. 화장실 소녀 하나코상도 기시감이 있다. 소문을 듣고 세 번째 화장실 칸으로 간다. 아무도 없지만 문을 세 번 두드리며 “하나코상, 거기 있나요?”라고 속삭이면, 문이 천천히 열린다. 이 같은 도시 전설은 현대의 민담으로, 친구의 친구가 엿들었다는 식으로 사실처럼 퍼져나간다. 우물 유령, 꿈을 먹는 요괴, 보이지 않는 벽, 그림자 여성까지 요괴의 세계는 참으로 다채롭다. 이 책은 매력적인 요괴 그림 때문에 더 소장하고 싶어진다. 일본 에도 시대 우키요에(목판화)의 전설로 불리는 거장이 남긴 오리지널 판화는 고전 요괴의 원형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여기에다 마블 코믹스 등에서 활약 중인 현대 작가들의 작품까지 함께 어우러지고 있다. 고전 요괴들이 현대의 서브컬처 안에서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저자 잭 데이비슨은 ‘오키나와의 유령’, ‘일본 호러 바이러스’ 등 여러 다큐멘터리에 일본 민속 전문가로 출연했다. 옮긴이 강은정 씨는 영어를 못했던 게 트라우마로 남아 꾸준히 영어 공부에 매달린 결과, 영어를 우리말로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단다. 잭 데이비슨 지음/강은정 옮김/최준란 감수/공명/320쪽/4만 3000원.
[잠깐 읽기] 새 기다리는 재미
요즘은 새소리도 샤잠처럼 검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샤잠은 음악 검색 서비스로 잘 알려져 있다. 음악 한 구절만으로 제목을 찾듯, 새소리 한 마디로 소리 주인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진 분위기다. 탐조인이 조용히 늘어나고 있다. 주말이면 쌍안경을 들고 바다, 습지, 뒷산으로 향하는 사람들이다. 막상 가도 실제 새를 보는 시간은 단 몇 분. 머리 위 흰목대머리수리 날갯짓이나 꼬까울새가 둥지를 지으려고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다니는 짧은 순간이다. 가까이 왔다 싶으면 곧 날아간다. 탐조의 핵심은 오히려 기다림에 있어 보인다. “나무 뒤에 숨어, 꼼짝하지 말 것. 어떤 때는 금방 모습을 보이지만 때로 여러 해가 걸리기도 하니 낙담하지 말고 기다릴 것.” 책에서는 탐조가 기다림을 배우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오래 기다림 끝에 쌍안경에 포착된 새들은 귀해진다. 들여다보면 제각각 아종과 나이, 성별이 다른 법. 물웅덩이 헤매는 뒷마당 파랑새가 푸른박새라는 걸 아는 순간, 어디에나 있는 새들이 달라 보인다는 게 책이 말하는 탐조의 매력이다. 책에 따르면 단 6분만 새소리를 들어도 8시간 동안 불안이 누그러진다고 한다. 새 한 마리 제대로 보겠다는 일념으로 집중하다보면 과거와 미래 근심은 멀어지고 지금 이 순간만 남는다는 솔깃한 말을 한다. 탐조의 본격 탐구보다는 입문의 즐거움에 집중한 책. 쌍안경 선택법부터 관찰일지 작성법, 새 이미지와 소리 식별 앱 소개까지 탐조 실용 지침서로 유용하다. 다 읽고 나면 쌍안경 하나쯤 생활 필수템으로 장만해야 할 것 같다. 필리프 J 뒤부아·엘리즈 루소 지음/라이팅하우스/268쪽/1만 7000원.
[잠깐읽기]틀려도 괜찮아, 우리 삶은 ‘즉흥 연주’니까
재즈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왠지 모를 재즈의 우아함과 여유로운 정취에 이끌려 늘 마음 한구석에 관심을 품고 있었다. 자신을 ‘엉뚱한 사람’이라고 소개한 어느 재즈 가수의 에세이가 눈에 들어온 것도 아마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펼쳤다. 그런데 저자인 임미성은 프롤로그에서 “이 책은 재즈의 역사나 명반을 분석하는 해설서가 아니다”고 단호히 못 박는다. 약간의 당황스러움 속에서 호기심이 피어오른다. 그렇다면 저자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바로 ‘재즈적 시선’이다.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야기는 대체로 살아가며 겪는 실수와 오류를 삶의 자연스러운 ‘변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즉흥성, 파격, 유머, 조화 등 재즈가 가진 본연의 가치처럼, 우리의 삶 또한 애초에 정해진 악보가 없는 즉흥 연주와 같기에 ‘조금 틀려도 괜찮다’는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저자는 이러한 메시지를 프랑스 유학 시절의 일화부터 음식, 패션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일상의 소재를 빌려 이야기한다. 평범한 일상을 재즈적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저자의 엉뚱하면서도 묘하게 설득력 있는 논리를 따라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저자는 ‘재밌는 삶이 바로 건강한 삶’이라고 강조한다. 늘 노래하고 춤추는 기분으로 신명나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차가운 냉소가 아닌 유쾌한 웃음으로 타인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은, 재즈라는 음악적 이야기를 통해 사실상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사회적 울림을 전달한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각 글이 10~20페이지 내외로 짧아 가볍게 읽기 좋다. 그러면서도 연주 시간이 14~20시간에 달하는 곡을 소개하는 등 음악적 흥미도 놓치지 않는다. 이번 주말에는 일상을 재즈로 재해석하는 저자의 유쾌한 시선에 풍덩 빠져보는 건 어떨까. 임미성 지음/율리시즈/259쪽/1만 6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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