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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물의 종착지
물에게는 낮은 쪽이 앞이다. 물의 감각은 오직 높낮이다.
물은 혼자서 또 집단으로 묻힐 곳을 찾는다. 물은 서로를
불러모아 충만한 부피이면서 때로 바닥을 들어내면서, 조금
더 낮은 수위를 찾아 먼 쪽으로 우회하면서 굽이를 만들기도
한다
강은 곡선을 사랑한다. 물이 사라지는 곳은 기존의 물이
새로 들어오는 물을 몸으로 끌어안는 바다 깊이다.
바다 깊이에서 하늘 구름으로 머물다 다시 땅을 찾는 큰
동그라미를 물은 그린다. 사람이 보는 것은 언제나 물 행보
의 한 단면이다. 물은 태양처럼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물은
언제나 운동 중이다. 시간처럼 정지할 줄 모른다
시집 〈별빛 탄생〉 (2025) 중에서
노자의 도덕경에 보면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 온갖 것을 섬길 뿐 그들과 겨루는 일이 없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을 향해 흐를 뿐이라 했지요. 만물을 이롭게 하는 물. 그래서 물은 도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합니다. 그런데도 물은 그 공로를 인정받자거나 그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습니다. 만물을 이롭게 하고 있다는 것마저 의식하지 않습니다. 이 시를 읽는 동안에도 물은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순환하고 있겠지요. 곡선을 사랑하며 움직이는 물. 구름이 되기 위해 움직이는 바다. 물이 물을 온몸으로 끌어안는 바다가 가까이에 있어 좋습니다. 물의 종착지는 어디일까요. 사람의 눈물은 어디쯤일까요. 물처럼, 물처럼 되라는 말씀을 되뇌이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
2026-02-10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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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핑계
어떤 사람이
눈이나 꽃처럼
거저 오는 걸 좋아하면 가난하다는 것이고
가난하면 세상에 미안한 일이 적다
어떤 이는
사람이 살려고
너무 애쓰는 일을 재앙이라고도 했는데
가난하면 사랑하는 자식들이 다툴 일이 없고
세상 떠날 때도 소풍 가듯 가벼워서 좋다
가난은 언제 어디서나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힘이 세고
가난은 비싸다
사랑과 가난은 감출 수도 없지만
사람들이 대부분 가난하게 사는 데는
다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시집 〈나는 용서도 없이 살았다〉 (2025) 중에서
가난은 ‘간난’(艱難)이라는 한자에서 온 말인데, ‘난’이라는 글자는 진흙밭에 새가 빠져 있는 모습, 즉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옛말에 가난은 돈 주고 살 수 없단 말이 있고, 가난이 가장 훌륭한 유산이란 말도 있습니다. 모두들 힘든 요즘에 위로가 되는 말일지 모르겠습니다. 잘 살고 싶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을 자처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잘 사는 것이 세상에 미안한 일이란 시인의 문장을 되뇌이게 됩니다. 가진 게 없어 잃을 게 없는 가난. 생각해보면 우린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빈곤을 살고 있습니다. 이미 잘살고 있는데도 뭔가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느낌은 스스로를 가난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합니다. 물질적인 것 이외에도 건강한 정신 같은 값진 가치들이 필요한 세상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길, 잘할 수 있는 길을 걸으면 행복해지고 결코 가난하지 않다는 것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2-03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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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탄피
하늘에 박힌 총알 하나
별 사이를 뚫고 떨어진 약속의 파편
가끔 흔들려
빈 땅에 도착해 철컥거리다
금속 비명을 낸다
누가 걸쇠를 걸었을까
동그랗고 노란 총알
차가운 숨결 속
장전되는 총구
명중이어야 해
숨을 멈추고 기다리는 순간
방아쇠를 당긴다
탕!
떨어지는 탄피
몇억 광년의 빛
나를 뚫고
빛을 삼킨 어둠 속
너는 빛을 꿰뚫는다
시집 〈지구에 붙은 컵은 책상 위에서 떨어지지 않아〉(2025) 중에서
겨울은 사계절 중에서도 별을 보기 가장 좋은 계절입니다. 은하수 서쪽으로 기우는 별들이 유난히 또렷한 건 차가워진 대기 때문입니다. 오리온자리. 큰개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안드로메다와 오리온도 맨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왜 빛나는 별 하나를 하늘에 박혀 있는 총알로 보았을까요. 별빛은 왜 떨어지고 있는 탄피로 보았을까요. 한때 백령도에서 군인들의 심리상담을 했던 시인의 독특한 이력이 이 시의 출발지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것들 중에는 우주쓰레기도 많다는데, 이 시를 읽는 동안 겨누었지만 빗나가던 일상들, 얼어붙은 삶의 추위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쇠붙이보다 차가운 겨울 올려다보며 내가 쏘아올린 별은 어디서 빛나고 있는지, 무엇을 향해 살고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6-01-2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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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꽃길만 걸어요
꽃길만 걸으라는
편지를 받았어요
비단길만 걸어요
꽃 글씨를 받았어요
어찌 나 혼자
꽃잎 살결과 비단 날개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겠어요
당신이 올 때까지
꽃길과 비단길은 피하며 걷겠다고
길바닥에 박힌 돌부리를 캐내고 있겠다고
편지를 써요
비단을 수놓던 바늘쌈으로
누군가의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파내는 사람이 되겠다고
답장을 썼다가 지워요
그러다가 결국
당신 편지를 베껴 써요
당신도 꽃길만 걸어요
당신도 비단길만 걸어요
시집 〈그럴 때가 있다〉 (2022) 중에서
덕담은 단순한 격려의 말을 넘어 심리적 안정을 주고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살면서 꽃길만 비단길만 걸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힘든 길 말고 좋은 길 함께 걷자, 마음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피하고 싶은 삶의 고통 혹은 불행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긍정적인 계기가 되어주기도 한다는 것.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가치를 잃지 않는 태도로 살다 보면, 힘겨움도 삶의 일부임을 받아들일 줄 아는 힘이 생긴다는 것. 그래서 우린 서로에게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는 응원과 축복을 전합니다. 상생의 연대를 이룰 수 있는 이타(利他), 좋은 말은 좋은 일을 이끈다는 걸 생각하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
2026-01-2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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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친구
시골의 초등학교 2학년 때 지각을 할 것 같아
열심히 달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팔과 무릎이 까져 아파서 울려고 하는데
뒤따라 달려오던 아이도 내 옆에 넘어졌다
그러자 울음 대신 웃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우리는 서로 손잡고 벌떡 일어나 함께 달렸다
40년 뒤 내가 친구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때 고마웠어”
“뭐가?”
“어릴 때 니가 내 옆에 일부러 넘어져준 거”
“짜식, 뭐 그런 걸 아직도 하하하......”
-시집 〈악의 평범성〉(2025) 중에서
친구는 옛 친구가 좋다는 속담이 있지요. 단순히 가깝고 오래된 사이를 넘어 서로 존중하고, 믿음이 있는 사람. 어려울 때 곁에 있고, 몸이든 마음이든 아플 때 언제나 내 편인 사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인정해주는 사람. 힘들 때 의지할 수 있고 슬픔도 나눌 수 있는 사람.
나의 잘못을 내 편에 서서 고민해주는 사람.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자발적이고 평등한 사람. 가장 편하게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사람.
그렇게 내 삶에 활력과 행복을 더해주는 사람. 이처럼 진정한 친구가 한 사람만 있어도 잘 살아온 것이라 합니다.
내 친구는 누구인지, 난 누구의 친구인지 생각해봅니다. 누군가 다가오길 기다리기보다 먼저 마음을 열고 그 사람의 친구가 되어보는 건 어떨런지요. 신정민 시인
2026-01-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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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새해는 그대 차지
천지는 또 한 번 새로워졌어라
가슴마다 약속도 새로 새로워져라
기적은 땀과 함께
행운도 땀과 함께
믿으며 믿으며 기쁜 땀 흘려지고
땀방울 모여 강물이 되면
강물처럼 우리도 커지고 깊어지고
땀방울 마침내 바다 이루면
바다처럼 우리도 넓어지고 푸르러지리니
가슴아,
땀을 믿는 뜨거운 가슴아
사랑과 건강과 행운을 약속하는
금년 새해에도
기적은 그대 차지
-시집 〈둥근 세모꼴〉 (2011) 중에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한 해를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기적이자 축복입니다. 가능성이 희박해서 기대조차 하기 힘든 소원이지만 우리가 흘리는 땀방울들이 모여 강이 되고 바다가 되는 그 기적을 이룰 수 있노라, 희망을 가져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중에는 기적이 없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과 모든 것이 기적이라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있다 합니다. 자신과의 약속, 뜻하는 일들이 이뤄지길 기원하는 시인의 응원에 힘이 생깁니다.
소소한 일상이지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다 보면 바라던 기적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삶의 이유를 찾는 동안 흘리게 될 땀방울들을 믿어보기로 합니다.
2026년 붉은 말의 해, 올 한 해 모든 분들이 만사형통의 기적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신정민 시인
2026-01-0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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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안부
북쪽에 눈이 오는지요?
저녁은 끓였는지요?
게사니들 대가리 주억거리듯
처마 끝에 청천벽력 눈이 오는지요?
양들에게 먹이 주듯 한밤중에 새끼 받듯
그 새끼에게 젖 물리듯 눈이 오는지요?
큰 산 벼랑에도 눈이 치는지요?
눈을 퍼서 가마솥에 끓이는지요?
마당귀 그 솥 안에도 캄캄하게 눈이 오는지요?
-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 (2025) 중에서
누구에게나 그리운 사람이 있습니다. 전하지 못한 마음이 있습니다. 거위가 고개를 끄덕거리듯 양들이 새끼에게 젖을 물리듯 눈이 오는 날, 텅 빈 하늘이 하얗게 꿈틀거리는 날이면 더 깊어지는 그리움.
말주변이 없어 어떻게 인사를 건네야할지 미루다 놓치기 쉬운 안부. 인사치레 같고 때론 형식적인 것 같아 주저하게 되는 안부. 섣불리 건네기 머쓱한 안부.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하고 넘기기 쉬운 안부.
그러나 그곳의 날씨는 어떤지 혹은 밥은 먹었는지와 같은 가벼운 안부 속엔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한겨울 추위 잘 지내시길 바라는 기별.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오늘, 살아있는 모든것들에게 이 시를 빌어 평안하시길 전합니다. 안부를 받지 못한 누군가에게도 따듯한 마음 대신 전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12-30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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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오늘 별이 뜨는 이유에 대해
늙은 할머니 앞에서 느리게 걷고 있는 늙은 개
할머니가 멈추고
줄의 곡선이 펴지기도 전에
늙은 개는 멈춰선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
흘러가는 시간을 흘러가게 그냥 두는 것
애초에 거기 있었던 마음처럼
할머니가 걸음을 떼자
늙은 개는 동시에 걷기 시작한다
둘은 그렇게 끝까지 곡선이다
왼발은 왼발
오른발은 오른발
구름을 밟고
물 위를 걷듯
나는 조용히 구령을 붙여본다
오늘은 참 많은 별이 뜨겠구나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2024) 중에서
시를 쓰면 자신의 베란다에서 키우는 꽃들에게 제일 먼저 읽어준다는 시인. 언젠가 자신의 부음을 생전에 좋아하던 채송화가 제일 먼저 받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시인. 문상객으로 기르던 식물들이 와준다면 행복하겠다는 시인에게 오늘 별이 뜨는 이유가 저렇듯 선명합니다.
흘러가는 시간을 흘러가게 그냥 두는 할머니와 늙은 개의 동행. 구름 밟듯 물 위를 걷듯 쉬엄쉬엄 지나가는 모습으로 걷는다는 것.
오늘 나의 별들은 어떤 이유로 반짝일까 생각해봅니다. 바쁘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인 줄 알고 그렇게 사느라 사람들과의 거리를 미쳐 헤아리지 못했던 실수, 팽팽하게 잡아당긴 관계들이 떠오릅니다.
오늘은 앞만 보고 달리느라 뒤처진 영혼이 따라올 수 있게 가만히 기다려주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합니다. 신정민 시인
2025-12-2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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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밈
여러 번 소리 내 부르면 가운데가 텅 비는 이름
우스꽝스럽게 눈 모으고 혀 내민
들여다볼수록 더 모르겠는 얼굴이 거기
우리가 알고 있는 그가 정말 그였는지
각자의 기억에서 그는 오리너구리거나
종이비행기거나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누구로도 완성되지 않는
어느 날 도시 한복판에 뜬 오로라였던
처음엔 상상이었지만 나중엔 정말 그렇게 믿은
모두의 첫사랑이자
모두의 사기꾼
우리가 말없이 공유했던 거짓은 무엇이었을까
저마다의 상실감은 저마다의 몫
원양어선을 탔는지 선교사로 오지를 떠돌았는지
어느새 기별 없이 완전히 사라진
우리 다 죽고 없는 저기 뜬소문처럼
단 하나의 빛으로 살아남은
-시집 〈제너레이션〉(2025) 중에서
시는 대상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상상력이 이끄는 낯설고 모호한 움직임입니다. 판단이 아니라 일종의 모험입니다.
이 시는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 혼돈, 모호함의 언어 마술, 그 매혹을 보여줍니다. 밈(meme)은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되는 생각, 행동, 스타일 등의 문화적 요소를 의미합니다.
스스로를 복제하며 퍼져나가고 모방되고 변형되며 확산되는 것들. 무수히 많은 방향이 동시에 움직이는 시와 밈이 닮았단 생각이 듭니다. 상상으로 시작했으나 믿게 된 일들. 단 하나의 빛으로 살아남은 뜬소문일지도 모릅니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는 것들. 빛의 속도로 복제되고 확산되는 현상들 속에서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거짓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
2025-12-1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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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저쪽
새끼들을 거느린 오리가 이쪽을 옮긴다 어미 한 마리에 예닐곱 마리 오리 병아리가 줄을 서서 옮기는 이쪽, 차들이 멈춰 서서 오리떼가 길 건너로 무사히 이쪽을 옮겨가기를 기다린다 저쪽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쓸 이유가 없다 이쪽을 옮겨가면 더 고즈넉한 것, 이쪽을 옮겨가면 더 아득한 것, 이쪽을 옮겨 가면 더 환한 것, 이쪽이 조심조심 오리떼를 타고 저쪽으로 건너간다 오리떼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차들을 세우고,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위대한 사업에 사람과 차들을 동참시킨다 길 건너 저쪽이 나란히 줄 선 오리떼가 옮겨오는 이쪽을 기다린다
-시집 〈분홍이라니〉 (2025) 중에서
새끼들을 데리고 안전한 물가나 서식지로 이동하는 어미 오리를 보며 시인은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는 위대한 사업을 봅니다.
이쪽이 무사히 잘 건너오길 기다려주는 저쪽. 단순한 공간적 대립이 아니라, 구분되는 두 영역 또는 상태의 경계를 나타내는 이쪽과 저쪽은 삶과 죽음, 현실과 이상 같은 철학적 개념으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화자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개념이기도 하지요. 언제나 건너야 할 저쪽이 있는 이쪽. 그 경계를 넘으려 할 땐 결단이 필요합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무수한 경계들을 건너야 하는 생명들이 있습니다. 어미만을 믿고 따라가는 새끼들의 모습, 오리 가족을 따라 저쪽으로 건너가는 이쪽을 보며 알려지지 않은 곳으로 건너가고 있는 우리의 존재론적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12-09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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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조금새끼
아버지가 그렇듯 나는 조금새끼다
물 때 맞춰 들어왔다 나간 배 한 척
어머니는 나를 가졌다
물때마다 조금새끼들은 갯벌을 뒹굴고
파도 따라 떠돌았다
두드려도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빗장 걸린 문밖에 눈맞은 발자국과
발목 깊이 빠지는 갯벌 숨소리
문 안에는 높아지는 하늘이 있고
문밖에는 춤추는 바다가 들어있다
그물 속으로 투명한 아침이 온다
함께 바다로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동갑내 조금어른들이 있어
목까지 차오르는 갯벌을 마주보는
어미와 아비가 등 뒤에 서있다
갯벌 위로 밀려오는 바람은
물 높이에 멈춘 상처가 아문 뒤에도
조금 새끼들은 태어난다
어른이 되어서도 동갑끼리 놀려먹는
나는 춤추는 물결 아들이다
시집 〈무명島에 기대어〉 (2025) 중에서
‘조금’은 달과 지구와 태양이 나란히 있을 때 나타나는 바다의 현상으로 조석 간만의 차가 가장 적은 시기입니다. 이때 선원들은 출어를 포기하고 집에서 쉬는 경우가 많은데요. ‘조금새끼’는 이 시기에 잉태되었다가 태어난 바닷가 아이들을 부르는 이름입니다. 단순히 출생 시기를 말하기보다는 망망대해에서 풍랑과 싸워야만 했던 아버지들의 삶을 품고 있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하루 두 번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는 바다가 이들의 또 다른 아버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춤추는 물결의 아이들. 부르면 소금기가 묻어나는 아이들. 바다는 아버지를 데려다가 보름이 되어서야 돌려보내곤 했다는 어느 싯구가 있지만,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도 많다는 걸 생각하면 슬픈 이름이기도 합니다. 신정민 시인
2025-12-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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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동거
정확한 문장으로 잠꼬대를 하면
입가에 마침표 같은 점이 생긴대,
일기장을 꾹꾹 눌러쓰던 너를 눕히며
어디까지 읽다 말았니
백사장에 그린 그림들을
파도가 쓸어 모아 어느 섬에다 부려 놓는 이야기
바다를 본 적 없는 네게 바다를 들려주었다
책장을 넘기다 손끝이 베인다
누군가 밑줄을 그으며 우리를 읽는 거랬다
무릎 아래서 네가 막 잠꼬대를 시작한다
시집 〈미도착〉 (2025) 중에서
함께 산다는 건 무엇일까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봅니다. 입가에 점 하나 없는 걸 보면 나는 살아오는 동안 잠꼬대마저 정확하지 않았구나 생각해봅니다.
종이에 베인 상처가 누군가 우리를 읽는 동안 그어놓은 밑줄이라는 것, 오물오물 입속에 굴려봅니다. 함께 산다는 건 바다를 본 적 없는 사람에게 바다를 들려주는 것일까요. 소소한 일상을 파도가 어느 섬에 부려 놓듯 시인이 부려 놓은 담담한 문장들을 가만히 따라가 봅니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공간은 인간의 경험과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의미 있는 곳이어서 장소와 구별됩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기억들을 파도가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는 동안 백사장 같은 내 무릎도 누군가 잠꼬대를 할 수 있게 빌려주고 싶어집니다. 신정민 시인
2025-11-25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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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사각지대
사이드미러 시야를 놓쳐
옆 차를 조금 긁었다
미안하다는 말보다
보험 처리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장례식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날에는
바깥을 살펴야 할 눈길이
수시로 맘 속으로 되돌아왔다
사람이나 제도나
놓치고 그르친 일에 대해 왜
변명부터 앞세우는 것일까
표정이 자신까지 속이지는 못한다
마음의 사각지대를 찾기 위해
거울을 이리저리 돌리느라 얼굴이 화끈했다
시집 〈거미백합〉 (2024) 중에서
인간의 시야각엔 한계가 있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을 위해 반드시 살펴야 하는 곳, 살피지 않는다면 사고의 원인이 되는 곳입니다. 복지나 법률, 의료, 교통, 건축 등 규칙이나 규제가 건드리지 못하는 허점 등을 비유할 때에도 쓰이는데요.
바깥이라는 세상 곳곳에 있는 그 사각지대가 우리의 마음에도 있음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각지대를 살피지 못한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실수에 대한 태도가 인간적인 모습보다 제도적인 것일 때 부끄러운 것임을 느끼게 합니다.
사람이 사는 사회나 사물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하는 곳. 너무 가까이에 있어 혹은 무언가에 가려 있어 보이지 않는 곳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요. 관심을 갖고 주변을 살펴야 할 생각지대에 대해 생각게 하는 시편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5-11-1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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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민화 41
단풍이 꽃보다 붉단 말 거짓 아니네
시월 서리 한 잔에 벌써 신명이 돌아
저 어깨춤 들썩이는 것 좀 보아
연지 곤지를 찍어도 저리 붉을까?
단풍이 꽃보다 더 곱단 말
거짓이 아니네
나이보다 더 굽은 등걸
몸을 틀어 어깨춤 들썩이는 것 좀 보아!
저 나이에도 어찌 신명이 있을까?
봄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도
이팔만 청춘이 아니라네
서리 곱게 머리에 이고도 마음 다시 붉으니
단풍이 꽃보다 더 곱단 말 거짓이 아니네
두고 봐, 니들도 그때가 올 테니
신명은 늙지 않고 단풍만 드는
붉은 가을, 그때가 올 테니
낙홍춘정(落紅春精)
단풍이 꽃보다 붉단 말 거짓 아니네
시집 〈민화〉 (2024) 중에서
나뭇잎에 단풍이 드는 이유는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준비입니다. 나뭇잎과 가지 사이에 있는 떨켜층 때문에 햇볕이 줄기로 가지 못하면서 엽록소가 파괴되는 것인데요. 나무종류별로 나뭇잎의 색이 다른 건 자기만의 색소의 종류와 함유량 때문이랍니다.
낮과 밤의 온도 차가 클수록 아름답다는 단풍. 시인은 인생을 단풍에 비유하면서 낙엽 또한 봄의 생명력만큼 애틋함을 노래합니다. 늙지 않는 사람 없고, 그렇게 나이 들어 가는 삶도 곱디고운 것. 한 생을 살아낸 삶이 ‘그때’를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떨켜가 있을 것입니다.
나이듦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고 소박한 유유자적의 마음을 갖는 것. 황혼의 인생이 단풍보다 아름답단 말도 거짓 아닐 것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5-11-1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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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동백꽃 부처
흰 구름 돛단배 떠가는 박물관 뒤뜰
얼굴 없이 몸만 남은 돌부처 옆에서
참수형장 망나니 칼춤 비명 소린 듣지 못했으나
우두커니 선 동백나무 아래
붉은 피 뚝뚝 듣는 동백꽃, 그러니까
아프면 아프다 말했어야지
누구나 상처받는다는 석가 예수 농담 사이
오늘이 그 마지막이라고
묵언 중인 돌부처가 단호히 말했다
누추한 슬픔에도 무릎을 굽히지 않고
동백꽃 숲에서
피어서 여를, 땅에 떨어져 여를
울컥울컥 더운 피 동이로 게워낸 목울대로
열심(熱心)으로 피운 뜨거운 꽃
절망을 딛고 선 부활의 몸짓이란 듯
피 흘리는 투사의 구호를
눈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프다
시집 〈물꽃〉 (2024) 중에서
동백꽃과 동백나무는 부산시를 상징하는 꽃과 나무입니다. 추울수록 진하고 큰 꽃잎을 피우는 동백은 만개한 꽃이 송이째 떨어지는 바람에 지켜야 할 절개나 지조로 비유되곤 합니다. 삶의 무상(無常), 지는 동백처럼 가장 아름다울 때 떠나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그 누구보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꽃말을 가지고 있는 동백.
시인은 아픈데 아프다 말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투사들을 동백에서 봅니다. 피 흘리는 투사의 구호로 듣습니다. 그 어떤 힘 앞에서도 결코 무릎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외칩니다. 혹한을 견디며 싹을 틔우고 있을 꽃의 희망, 꿀벌과 나비가 찾아오는 그 날을 준비하고 있는 것 아닐런지요.
동박새와 직박구리가 찾아와 세상이 결코 추운 곳만은 아니란 걸 노래해주지 않을런지요.
신정민 시인
2025-11-04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