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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여름의 저녁은 수국의 빛으로 어두워지기에
수국이 비를 몰고 온다
이마를 짚어보고 수국 앞으로 간다 슬픔이 아닌 비를 몰고 왔기에 몸은 없고 감각이 없었다
밤의 진불암, 머리맡의 빗소리에 방문을 열면 큰 수국이 후두둑 푸른 빛을 내뿜었다
수국이 비를 내리게 한다고 믿은 적 있다
누군가 알아보지 못할까봐 그 사랑은 자주 색깔을 바꾸었다 아나벨 로사리오 블루스카이 인더레인
수국이라는 나라에서 부쳐 온 등기우편은 얼룩진 날짜 속 어디쯤을 떠돌고 있는지
진심을 다른 마음으로 숨기고 수국은 자꾸 피어났다 장마는 그치지 않는다
여름의 저녁은 수국의 빛으로 어두워지기에 마음이 단순해졌다
시집 〈초록의 어두운 부분〉 (2024) 중에서
수국은 한여름, 주로 장마철에 피는 꽃인데요. 물을 엄청 좋아한답니다. 토양에 따라 변하는 꽃 색깔 때문인지 변덕, 변심이란 꽃말도 있고 그와 달리 진실한 사랑이란 꽃말도 있는데요. 먼 곳에서 온 등기우편이 어딘가 떠돌고 있을 거란 문장이 거기서 온 것만 같습니다.
비는 자연현상이기에 앞서 사랑이나 너그러움 같은 고귀한 감정을 드러내 주는 어떤 믿음, 그래서 수국이 슬픔 아닌 비를 몰고 온다는 시인의 말에 공감해봅니다.
세상 모든 꽃들은 집착을 떠난 진불암의 것. 진심을 숨기고 드러나는 시를 닮은 듯합니다. 미스 사오리, 미카의 물떼새 같은 특이한 이름으로 불려지기도 하는 수국. 작은 꽃 하나하나가 모여 풍성하고 둥글게 뭉쳐진 꽃
송이가 이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8-2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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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숙등역
만덕고개 헐레벌떡 숨 고르다 지나쳤다. 있으면서도 없는 곳, 안개가 사람들만 잡아먹곤 한다는 굴다리 주위에는 흘러 고인 시간이 윤슬 되어 역류의 방식으로만 합류했다지. 나 한 번도 그곳이 있었으리라곤 생각 못했네. 만덕 지나 덕천 구포로만 고여 들었을 뿐, 어느 한갓진 뒷골목 밤길을 걷는 내 손을 꼭 잡은 어머니 신발 뒤축의 경사가 서녘으로 기울어 붉게 문드러지던 8월의 오후,
“인자 쫌만 걸으면 우리집잉께, 쩌그 식당에 들러 칼국수나 먹고 가자.”며 철퍼덕 주저앉아 낙동강 놀을 더듬던 눈길이 정물처럼 붙박힌 미궁 속에서 나 한때 머무른다네, 숙등의 지도는 안개만이 앞장서는 날이 잦았고, 때로는 갈퀴처럼 덜미를 쓰다듬는다네
시집 〈새들반점〉 (2022) 중에서
집으로 가는 중입니다. 숙등이 있고, 숙등역이 있습니다. 지나쳤지만 늘 있었던 곳. 우리에겐 가보지 못한 곳, 벌써 잊어버린 곳이 얼마나 많은지요.
낯선 곳에서 밀려오는 기억의 역류, 그리운 어머니를 마술처럼 만납니다. 인간의 기억은 동기나 욕구에 따라 왜곡되기도 한다는데요. 힘들고 지친 걸음 끝에 문득 만나고 싶은 목소리는 간절함이 아닐런지요.
기억과 상상의 연대, 되돌아오는 시간들. 혼자 걷는 밤의 뒷골목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머니와 함께 저녁노을 속에 서 있는 시인이 내 일처럼 쓸쓸해집니다.
흘러 고인 시간들이 모여있는 곳, 한치앞도 보여주지 않으려는 안개속에서 아슬아슬한 생의 뒷덜미를 쓸어주는 손길을 느낍니다.
신정민 시인
2025-08-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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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으나
허연 이불이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침대 위에
아무렇지 않게 엎드려 있던 형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으나
한 눈으로 누구의 전화인가를 확인한 형은
더이상 전화가 울리지 않도록
버튼 한 번 누르고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가 왔으나
전화를 받지 않은 형은
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전화가 끊어진 전화를 붙들고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형은
받지도 않은 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시집 〈종종〉(2025) 중에서
핸드폰이 현대인의 신체 일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소통, 업무 수단, 카메라, 쇼핑, 음악 감상, 카드 대체 등 생활 전반에 편리함의 혁신을 가져온 기기이지만, 인간의 삶이 이 스마트 폰과 함께 더욱 스마트해지고 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생활에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핸드폰,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핸드폰의 부정적 단면을 이 시는 보여줍니다.
심각해지고 있는 사회성 저하, 주의력 결핍 그리고 우울증과 같은 감정 조절 능력을 떨어뜨린다는 핸드폰. 건강한 삶을 위해 오프라인 일상과 대인관계에 집중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하게 하는 시편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8-1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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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행복합니다
상황은 사소합니다 시지프스가 바위를 잠시 내려놓고 땀을 식히는 중입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행복은 날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개별적인 시지프스, 삶의 의미를 음미하느라 행복합니다 지금 돌에서 잠시 벗어난 시간입니다 떨어진 돌을 잡으러 가는 시간이 아니라 산에 올려놓은 돌이 잠시 산에 머무는 시간입니다
시지프스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무의미하기보다 과일이 익어가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크는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돌을 내려놓고 저쪽에서 오는 중이고 더 먼 저쪽으로 가는 사이 비어 있는 곳에서 행복합니다 돌을 초과하여 돌보다 커져서 천천히 걷고 있습니다
-시집 〈분자적 새〉(2024) 중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 그 어떤 희망도 느낄 수 없을 때 우린 시지프스의 운명을 떠올립니다. 쉬지 않고 굴려야 하는 생활의 쳇바퀴. 프랑스의 작가 까뮈는 노동자들의 운명이 시지프스 못지않게 부조리하며, 이 부조리를 해결할 방법은 희망이 아니라 반항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반항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을 외면하지 않고, 도피하지 않고, 부딪치는 용기입니다.
이런 적극적인 태도만이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있는 힘을 갖게 해준다 합니다. 시인 역시 잠시 주어진 상황들을 내려놓고 흐르는 땀을 식히는 동안 자신의 삶을 들여다봅니다. 아이가 크고 과일이 익는 의미 있는 시간, 그것으로 행복하다 합니다. 불행의 반은 행복! 이른 새벽 물건을 배달하는 택배 아저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계단을 뛰어오르는 모습에서 건강한 힘이 보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8-05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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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녹(綠)의 미학
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 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 수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린 공기
시집 〈갈수록 자연이 되어가는 여자〉(2022) 중에서
쓸쓸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는지요. 그러나 미학은 아름다움의 본질을 연구하는 것. 그래서 시인의 쓸쓸함은 살아있음이 만들어준 아름다운 녹임을 노래합니다.
그 어떤 감정보다 무서운 쓸쓸함.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이 질병을 치료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쓸쓸함이라는 녹을 닦아낼 수 있는 연마제는 사랑뿐. 일상적인 대인 관계 안에서 인생을 배우는 것,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닦아가는 건 어떨까요.
삶의 모든 것을 부식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순 없겠지만, 녹이 슨 철제 조형물이 주는 멋스러움처럼 쓸쓸한 마음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벗처럼 동행해 본다면 그 또한 아름다움을 완성해가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7-2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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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장마
내 머리칼에 젖은 비
어깨에서 허리께로 줄달음치는 비
맥없이 늘어진 손바닥에도
억수로 비가 내리지 않느냐,
비여,
나를 사랑해다오
저녁이라 하긴 어둠 이슥한
심야라 하긴 무슨 빛 감도는
이 한밤의 골목어귀를
온몸에 비를 맞으며 내가 가지 않느냐,
비여,
나를 용서해다오
시집 〈천상병 전집〉 (2007) 중에서
생이 아름다운 소풍이었다던 고 천상병 시인이 서른한 살이던 1961년에 발표한 시입니다.
피할 수 없게 내리는 비, 온몸을 젖게 한 비, 평생을 가난하게 살게 한 비에게 시인은 사랑과 용서를 청합니다.
1967년 동백림사건, 다가오고 있는 시련 앞에서 미리 써둔 수난 고백 같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죄인이 된 시인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요. 용서를 하는 것과 용서를 받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요.
순수한 인간의 내면 속으로 걷고 있는 고독, 세상사의 온갖 번거로움을 군더더기 없이 걸러낸 서정이 애절하기만 합니다.
예보를 무색하게 만들며 쏟아지는 빗속을 걷다 보면 맥없이 늘어진, 그러나 사랑과 용서를 남기고 떠나는 시인의 뒷모습을 만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7-2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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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모르는 게 아는 것이다
아는 척하기는 쉽지만
알기는 어렵다
모르기는 쉽지만
모르는 척하기 어렵다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모르는 척하다 보면
비로소 모르게 되고
정녕 모르다 보면
마침내 알기에 이르나니
고로 모르는 게
아는 것이다
시집 〈못 걷는 슬픔을 지날 때〉 (2024) 중에서
논어 위정편에 보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앎’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공자의 수제자인 자로가 사람들에게 스승 노릇을 하면서 잘못 인도하는 것을 보고 한 말입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희망과 기회가 있다 합니다.
모르는 게 약이란 말도 있고, 아는 것이 힘이다는 말도 있는데요. 알아야 행할 수 있고, 알아야 이겨낼 수 있고, 알아야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겠지만 아는 것과 아는 척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를 망가뜨리는 건 무지가 아니라 자만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현명함이겠지요.
보조용언 ‘척’은 그럴 듯 하게 꾸며낸 거짓입니다. 안다고 여겼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7-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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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해운대 밤 풍경
길을 잃은 아이는 나보다 먼 곳을 보는 사람 캄캄한 곳에서 환한 은하수를 관측하는 사람, 아이 하나가 울면서 해운대 백사장을 헤매고 있다. 사내인지, 계집애인지, 큰 울음소리는 성별마저 지워버린다. 울음은 사람을 만드는 성분이다. 비법이라고 할까. 저렇게 쉬지 않고 울다가 목이 쉬어서 목소리를 잃고 방향을 잃고 모르는 이를 따라가 버리면 큰일이다. 미아보호소에 데려다줄까. 파출소는 문을 닫았는데, 파도에 쓸려온 모래톱이 우주의 풍경 같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지? 분명 집에 있었는데, 해운대 밤 풍경 속에 나는 누워 있네. 길 잃은 아이는 울음이 창조한 풍선. 어떤 사람에게서 반송된 편지 같은 것. 미아, 떨어지는 별처럼 나도 그곳에 있었다
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2017) 중에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길을 잃는다는 건 인생의 필연적인 한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이 시는 실존적 위기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가 더 먼 곳을 보게 하고, 어둠 속에서 방향을 찾게 합니다.
가슴에 더이상 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 행복이 뭔지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길을 잃은 사람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디에 있는지 자신을 극복하려는 자는 삶의 의미를 질문하는 자입니다. 미아가 발생한 해운대. 아이의 울음을 헤아리는 동안 시인 역시 길을 잃어버린 아이가 됩니다. 아니 그 아이가 시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린 모두 미아의 감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울음이 사람을 만드는 성분이라 하니 나는 언제 울었는가, 무엇 때문에 울었는가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7-0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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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확보
벼랑처럼 여름이다 식물들은 쑥쑥 위로만 기어오른다 나는 날카로운 칼을 가진다 새삼 해변이 가까이 있었다 해변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화면에 비친 그곳은 낯설다 늘 모르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칼날에서 번뜩이는 햇빛이 칼보다 날카로운 게 불만이다 내가 식물성향보다 동물성향이 강한 게 불만이다 덩굴들은 여름에 가장 멀리까지 올라가 있다 나는 늘 땀으로 번들거리며 벼랑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희미한 한 사람이 밧줄 끝에 호의적으로 서 있었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다 나는 추락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하나 더 확보했다
시집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2012) 중에서
날카로운 칼은 날카로운 정신. 살아내야만 하는 여름은 험하고 가파른 또 하나의 벼랑입니다.
그 길을 오르는 것은 추락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하나 더 확보하는 것.
누군가는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기어오르는데, 우리의 여름은 언제나 땀으로 번들거립니다.
그래도 기어오르는 여름의 기분 강렬한 햇빛이 칼날보다 날카로워 불만이지만, 불만은 불만을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의 표명. 모르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화면 속 해변이 오히려 더 뜨겁습니다.
그러나 확보는 암벽등반에서 동행자의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로프를 조작해주는 기술.
이번 여름도 호의적인 누군가의 협조로 오르고자 하는 곳까지 완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7-0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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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평화 나누기
일상에서 작은 폭력을 거부하며 사는 것
세상과 타인을 비판하듯 내 안을 잘 들여다보는 것
현실에 발을 굳게 딛고 마음의 평화를 키우는 것
경쟁하지 말고 각자 다른 역할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
일을 더 잘 하는 것만이 아니라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좀 더 친절하고 더 잘 나누며 예의를 지키는 것
전쟁의 세상에 살지만 전쟁이 내 안에 살지 않는 것
총과 폭탄 앞에서도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 것
폭력 앞에 비폭력으로, 그러나 끝까지 저항하는 것
전쟁을 반대하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이 평화의 씨앗을 눈물로 심어 가는 것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2010)중에서
평화는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러나 분쟁과 다툼 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우호적이며 조화를 이루는 평화는 쉽지 않은 듯합니다. 이익 충돌에 의해 발생되는 갈등들. 이 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몇 가지 지침을 제시합니다. 평화가 적극적인 행동의 산물이라는 걸 알게 해줍니다.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이 없는 평화. 모두가 무기를 버리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를 생각케합니다.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인 6·25는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임을 인식하고, 급변하는 세계의 움직임 속에서 우리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모색이 절박합니다. 지켜지지 않는 인권과 가난, 그리고 다양한 재난들도 평화를 무너뜨린다는 것 함께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6-2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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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밥2
나는 오늘도 밥을 먹고 밥을 벌러 나간다
나에게 밥이 되어 줄 이들을 만나러 간다
내 밥은 공부 밥이어서 늘 달고 맛나다
나는 내 밥에게 더운 참밥이 되기 위해
따듯한 말을 주머니에 가득 담아간다
우리가 서로에게 밥이 되어주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관계일 때
세상은 단 밥이 가득한 거대한 솥이 된다
-시집 〈초록, 눈부신 소란〉 (2024) 중에서
밥은 생명이고 즐거움입니다. 노동이고 위로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밥심으로 삽니다.
먹을 게 넘치는 오늘날에도 누군가에게 안부를 물을 때 밥은 먹었는지 묻고, 언제고 다시 만나자는 얘기를 ‘밥 한번 같이 먹자’라고 합니다.
흔히들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모르겠다 하는데 둘 다 왠지 짠합니다. 밥벌이의 힘겨움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여기, 서로에게 밥이 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관계, 상생(相生)을 노래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학문과 인성을 두루 익히는 공부. 그 공부 밥이 달고 맛있다는 스승이 있어 든든합니다. 배 불리 먹어도 소용없는 허기, 따듯한 말 한마디로 채울 수 있다는 것. 단 밥이 가득한 세상에 눈물 젖은 밥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6-1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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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작은 신이 되는 날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먼지 한점인 내가
먼지 한점인 당신을 위해
기꺼이 텅 비는 순간
한점 우주의 안쪽으로부터
바람이 일어
바깥이 탄생하는 순간의 기적
한 티끌이 손잡아 일으킨
한 티끌을 향해
살아줘서 고맙다,
숨결 불어넣는 풍경을 보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날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2021) 중에서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는 톨스토이의 단편 소설도 생각나고, 우주를 한 사람으로 축소시키고 그 사람을 신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던 빅토르 위고의 말도 생각납니다. 사람의 본능에 가까운 감정, 우리가 바라는 행복은 그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점 티끌인 내가 나를 그리고 너를 사랑하기에, 안이면서 밖인 우리가 서로를 귀하게 여길 줄 알기에 아슬아슬한 삶의 위기를 넘기곤 합니다. 우리 안에 신의 성품이 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작은 신이 됩니다. 표현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랑. 그러나 널 사랑한다는 말 깊은 곳에 그러니 너도 날 사랑해야 한다는 어쩌면 폭력일지 모르는 사랑도 있음을 함께 생각해봅니다. 신정민 시인
2025-06-10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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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인생
그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살아도 이렇게 살게 될 거야
스무 살에 연애를 하고
둬번쯤 긴 키스를 꿈꾸다가
사소한지 모르는 결혼을 하고
사소한지 모르는 이별을 하고
헐떡헐떡 뛰어가 버스를 타고
잠시 숨을 멈추는 동안
사소하고 사소하게 정찰표를 들여다보네
하루에도 몇 번씩 엘리베이터로 승천을 하고
에스컬레이터로 세상을 굽어보며
내가 종족의 한 명임을 짐작하네
문득 별이 가까이 오는 저녁이면
뉴스를 보며 내가 그 여러 통계의 하나임을 실감하고
사소하고 사소하게 잠드네
그리고
사소하고 사소하게 꿈의 피켓을 드네
인생이여, 내가 간다고
그 여자는 소리쳤다
-시집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 (2024) 중에서
삶을 지긋이 바라보며, 어루만지던 시인이 인생을 사소하고 사소한 것이라 전합니다. 보잘것없는 인생. 그렇게 살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사는 제게 사는 게 뭔지 한 수 일러줍니다. 다시 살아도 정말 이렇게 살게 될까 하는 생각도 잠시, 사소하게 여겨지는 날들을 귀하게 여겨보려 합니다. 그래서 “인생이여, 내가 간다”는 외침에 힘을 내어봅니다. 엇비슷 사는 것 같지만 같은 인생 없고,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 그 어떤 삶에도 모범 답안 같은 것 없을테니 주어진 지금을 잘 사는 것, 그것이야말로 생의 진경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정민 시인
2025-06-04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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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삶이라는 도서관
다소곳한 문장 하나 되어
천천히 걸어나오는 저물녘 도서관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거구나
서가에 꽂힌 책들처럼 얌전히 닫힌 입
애써 밑줄도 쳐보지만
대출받은 책처럼 정해진 기한까지
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한 뒤
조용히 돌아서는 일이 삶과 다름없음을
나만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는 위안
혼자 걸어 들어갔었는데
나올 땐 왠지 혼자인 것 같지 않은
도서관
시집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2022) 중에서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게 말하는 것’이란 시인의 말이 되뇌여집니다. 인간의 삶을 수많은 말들이 저장되어있는 도서관에 비유한 시에서 반성과 성찰과 위안을 읽어봅니다.
나는 너무 많은 말을 하며 살고 있구나 생각합니다. 혼자 걷는 외로움과 두려움. 주어진 대로 열심히 살다가 어쩌면 대출받은 것일 수도 있는 삶을 조용히 반납하는 일. 다 말하지 않고 더 말하는 시. 나도 내 삶에서 혼자서 걸어 나오는 든든한 문장이었음 좋겠습니다. 조용하고 변함없는 친구, 지혜로운 상담자, 인내심 많은 선생님인 책을 통해 나만 외로운 게 아니었다는 위안을 얻고 싶습니다.
성실히 읽고 깨끗이 반납해야 하는 우리의 삶. 우리는 서로를 읽으며 배우는 책입니다. 문득, 살아온 날들을 글로 쓴다면 책 열 권은 거뜬할 거라던 노모의 말이 생각납니다.
신정민 시인
2025-05-2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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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신문
활자들만 모른 체하면
신문은 이리저리 접히는 보자기,
나는 신문이 언론일 때보다
쓸쓸한 마른 보자기일 때가 좋다
그 신문지를 펼쳐놓고 일요일 오후가
제 누에발톱을 툭툭 깍아 내놓을 때가 좋다
어느 날 삼천원 주고 산 춘란 몇 촉을
그 활자의 만조백관들 위에 펼쳐놓고
썩은 뿌리를 가다듬을 때의 초록이 좋다
예전에 파놓고 쓰지 않는 낙관 돌들
이마에 붉은 인주를 묻혀
흉흉한 사회면 기사에 붉은 장미꽃을
가만히 눌러 피울 때가 좋다
아무래도 굴풋한 날 당신이
푸줏간에서 끊어온 소고기 두어 근
핏물이 밴 활자들 신문지 째로 건넬 때의 그 시장기가 좋다
이젠 신문 위에 당신 손 좀 올려보게
손목부터 다섯 손가락 가만히 초록 사인펜으로 본떠놓고
혼자일 때
내 손을 가만히 거기 대보는 오후의 적막이 좋다
시집 〈그대를 바라는 일이 언덕이 되었다〉 (2024) 중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신문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신문지들을 야채 보관할 때 쓰고, 유리창 닦을 때 쓰고, 비에 젖은 신발에 끼워넣을 때 쓰곤 했는데요. 이 시를 읽는 동안 그때에도 살아있었을 활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뒤늦게 생겨, ‘활자들만 모른 체 하면’ 첫 행이 자꾸만 되뇌여집니다.
편집과 교정 그리고 글쓰기에 대한 자부심으로 탄생한 글들. 목숨이 하루뿐일지도 모를 신문지 위에서 녹록치않은 여유를 부려보고 있는 시인의 하루가 눈에 선합니다. 신정민 시인
2025-05-20 [1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