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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가을 저녁 빛
비탈밭 고구마를 캐 한 짐
지게에 져오는 아버지 숨소리
멀거니 밀물 든 서해
바라보는 휘는 억새꽃
누진 솔가지 타는 냄새
낮은 산허리 감는 연기
-시집 〈곁에 머무는 느낌〉(2024) 중에서
풍경이 말을 한다. 정갈하게 가라앉은 가을 저녁의 풍경이 수묵화의 언어로 살아나 가슴에 스며든다. 가슴에 스며든 이미지는 한때의 추억, 한때의 영혼을 불러내 그리운 시기로 날아가게 한다. 풍경은 마음을 흔들어 우리로 하여금 몽상에 잠기게 만든다.
이미지의 포착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랑이다. ‘황혼에 물든 가을 저녁, 비탈진 밭의 고구마, 지게 진 아버지의 구부러진 허리와 가쁜 숨소리, 그 옆 발치에 휜 억새꽃, 밀물로 둥글어진 서해안, 낮은 산허리를 감아 오르는 저녁연기.’ 이 모든 풍경은 부드럽고 따뜻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그것은 둥근 이미지를 통해 순수했던 시절에 대한 열정을 표현한다. 이런 이미지에 잠기게 될 때 속된 감정들은 씻겨나간다. 존재를 울리는 풍경의 시는 우리의 마음을 정화(淨化)하여 가장 정겹고 순수한 한때로 돌아가게 한다. 김경복 평론가
2024-11-1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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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물의 경전
한 잔의 차가운 물
단순한 목축임만일까
푸르른 하늘 뜻을 따르는
저 순천한 강물도, 바다도
끊임없이 소리쳐 외쳐대는 폭포도
창문에 쏟아지는 소나기도
비 그친 후 한 방울씩 듣는
낙숫물 소리에도
해독할 수 없지만
경건한 독경소리 스며있는 건 아닐까
바람에 일렁이며 햇살 받아 반짝이는
저 황금빛 그림 글씨
심오한 깨우침의 경전 아닐까
-시집 〈물의 경전〉(2018) 중에서
순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 때쯤은 언제일까? 물같이 고요하고 담백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는 얼마쯤의 정신적 수양을 갖추고 있어야 할까? ‘저 순천한 강물’이나 ‘소나기 낙숫물’ 속에서 ‘경건한 독경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의 경지는 어느 정도일까? 그리워라, ‘바람에 일렁이며 햇살 받아 반짝이는 저 황금빛 그림 글씨’. 언제나 마음의 갈증을 풀어주고 ‘심오한 깨우침’을 주는 저 ‘물의 경전’!
오정환 시인은 시로 이런 마음을 풀어내고 있다. 그때 시는 마음을 닦는 도량 같은 것. 공자도 시를 두고 천지지심(天地之心)이라 했다. 시심(詩心)이 도심(道心)이 되는 셈이다. 도를 말할 때 ‘물’의 형상이 중요하다. 일찍이 노자가 도의 형상을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하여 물의 속성에 빗대었다. 시인은 이를 시 속의 이미지로, 더 나아가 시를 쓰는 행위로 구현하고 있다. 부산이 낳은 물의 시인의 마음이 윤슬 같은 이미지로 반짝이고 있다.
김경복 평론가
2024-11-12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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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폭포
떨어진다는 것은
부수어짐
이전의 나를 버리고
다른 내가 된다는 것이다
삶의 여울을 돌아 나와
세월의 무서운 속도에 몸을 맡기고
뒤돌아볼 겨를이 없다
다시 살 수 없음이여
무서워 말라 상처를
만나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그대 만난 나처럼
-시집 〈상처가 나를 살린다〉(2001) 중에서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부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자신을 부술 수 있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시인은 부수는 것이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숨, 그것이 재생 혹은 승화라고 확신한다면 누군들 그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많은 사람은 그리하지 못한다.
새로운 ‘나’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협소한 자신을 부술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필요하다. ‘떨어진다는 것’이 헌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임을 온 영혼과 몸으로 알고 있어야 한다. 과단성과 열린 사고가 동시적으로 결합할 때 발생하는 아름다움! 폭포가 그러하다. 시인은 폭포의 가치를 ‘속도에 몸을 맡기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즉 ‘뒤돌아볼 겨를 없’이 과감하게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존재로 그려내고 있다. 그런 존재가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를 지사(志士)라 부를 수 있다. 소심하고 이기적인 자신의 모습을 ‘떨쳐 버리고’ 대의를 위해 용맹정진하는 사람, 그가 그립다. 김경복 평론가
2024-11-0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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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가을 저녁의 시
누가 죽어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시집 〈김춘수 시 전집 1〉(2004) 중에서
‘가을 저녁’의 노을은 늘 스산하고 서늘하여 쓸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가을이 주는 시듦에 저녁이 주는 꺼짐의 이미지가 결합하여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궁극적 관심의 대상인 ‘죽음’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도 한다. 그렇다, 죽음도 그리움의 대상이 될 수 있게 만드는 가을 저녁의 풍경! 붉게 사위어가는 가을 저녁의 대기는 온몸에 쌀쌀한 소름을 돋게 하면서 하늘 저 너머에 그리운 이들이 모여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게 되었을 때 그런 감정에 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낯선 감정이 낯선 세계를 창조한다. 그래서 시인은 이 아름답고 이상한 풍경으로 인해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죽음을 알 수 없는 세계로 ‘물같이 흘러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여 죽음은 두려움이지만 영원한 그리움이 되기도 한다. 김경복 평론가
2024-10-29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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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별 / 이상국(1946~ )
큰 산이 작은 산을 업고
놀빛 속을 걸어 미시령을 넘어간 뒤
별은 얼마나 먼 곳에서 오는지
처음엔 옛사랑처럼 희미하게 보이다가
울산바위가 푸른 어둠에 잠기고 나면
너는 수줍은 듯 반짝이기 시작한다
별에서는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별을 닦으면 캄캄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별을 쳐다보면 눈물이 떨어진다
세상의 모든 어두움은
너에게로 가는 길이다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1998) 중에서
어둠이 얼마나 짙고 고요해져야 ‘푸른 어둠’이 될까? 어둠이 푸름으로 뒤덮여 천지가 아름다워졌을 때 별은 ‘수줍은 듯 반짝이’며 돋아난다. 그 놀라운 변동에 ‘캄캄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떨림을 느낄 수 있고, ‘눈물이 떨어지는’ 충격을 맛볼 수 있다. 그때 푸른 어둠은 별을 비롯한 우주 전체를 살아있게 만드는 질료다.
이 모든 해석은 어둠에 특별한 색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푸름’이라는 색채는 신비한 아우라를 내뿜는다. 이에 나희덕 시인은 사랑으로 아픈 밤을 ‘푸른 밤’이라 했고, 이상화 시인은 타오른 열정을 ‘푸른 피’라는 말로 나타낸다. 푸른 이미지 계열은 대상의 생동감을 높여 준다. 그렇다면 소멸의 두려움을 가라앉힐 수 있는 ‘푸른 죽음’이라는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여 ‘세상의 모든 어두움은 너에게로 가는 길’이 됨으로써 ‘푸른 죽음’이 된다.
김경복 평론가
2024-10-2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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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늙은 식사
숭숭 구멍 뚫린 외양간에서
늙은 소 한 마리 여물을 먹는다
인적 드문 마을의 슬픈 전설
허물어진 담장 위에서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내린다
한낮의 논배미 출렁이는 산그림자를
되새김질하듯 물 한 대접 없이
우직우직 여물을 먹는다
어두워지는 때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움을 찾아 나선다는 것
따순 햇살 흠뻑 먹은 들녘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싶은,
우리 아버지 뜨뜻한 아랫목에서
벌겋게 밥 비벼 먹는다
-시집 〈식량주의자〉(2010) 중에서
느릿느릿 먹는 모습은 여유로운 식사 장면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힘이 빠져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먹게 되는 것을 가리킨다면, 그 모습은 애잔하기 그지없는 풍경이라 할 수 있다. ‘늙은 소’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물 한 대접 없이 우직우직 여물을 먹는’ 모습이 그러하지 않을까? 거기다 ‘되새김질’까지 하면서 먹는 모습은 무언가 안쓰럽고 처연해 가슴 먹먹한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늙은 소의 먹는 모습은 시인에게 늙은 ‘우리 아버지’의 식사 장면으로 전이되고 포개진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늙은 아버지의 ‘벌겋게 밥 비벼 먹는’ 모습은 늙은 소가 되새김질하며 여물을 먹는 것처럼 무심하고 쓸쓸하여 처연하게 느껴진다. 그것은 ‘어두워지는 때 무엇을 먹는다는 것은 그리움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비쳐 보이기 때문이다. 하여 홀로 어둠 속에서 음식을 씹는 것은 생의 덧없음을 반추(反芻)하는 것과 같다. 김경복 평론가
2024-10-15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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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가을의 기도 / 김현승(1913~1975)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게 하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시집 〈김현승 시초(詩抄)〉(1957) 중에서
가을이다. 새털구름 사이로 하늘이 청명하다. 물도 차가워져 정신이 한결 차분해지고 선명해진다. 이런 때는 누렇게 익은 벼들과 살랑대는 코스모스가 어우러진 금빛 들길을 하염없이 걷고 싶다. ‘겸허한 모국어’로 천지의 아름다움과 따뜻하게 내리비치는 가을 햇빛을 노래하고 싶다.
무엇보다 ‘호올로 있’고 싶다.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살아있음의 이 기꺼운 감각을 누려보고 싶다. 김현승 시인도 이를 느껴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은가! ‘고독의 시인’이 갈망하는 기도의 시간 속엔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가 들어있지만 가을이기에 영혼은 그것들을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표표히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깃털이 된다. 세상의 영화에 머물지 않고 한없이 솟구치는 성령의 구름이 된다.
김경복 평론가
2024-10-08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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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늙은 사자
죽음 곁에 몸을 누이고 주위를 돌아본다
평원은 한 마리 야수를 키웠지만
먼 하늘 마른번개처럼 눈빛은 덧없다
어깨를 짓누르던 제왕을 버리고 나니
노여운 생애가 한낮의 꿈만 같다
갈기에 나비가 노는 이 평화의 낯설음
태양의 주위를 도는 독수리 한 마리
이제 나를 드릴 고귀한 시간이 왔다
짓무른 발톱사이로 벌써 개미가 찾아왔다
-시집 〈늙은 사자〉(2016) 중에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늘 ‘죽음 곁에 몸을 누이고’ 살아가고 있다. 죽음이 풍기는 향기에 젖어 죽음이 드리우는 그늘 속에서 팔랑대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인해 의식을 갖고 죽음을 들여다보면, 죽음 역시 또렷한 의식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느낀다. 섬칫 두려운 눈길을 감지하게 되었을 때, ‘노여운 생애가 한낮의 꿈만 같’다고 한들 어찌 지나친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으랴!
그런 점에서 죽음을 담백하게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과의 응시 속에서 ‘이제 나를 드릴 고귀한 시간이 왔’음을 알아채고 죽음에 목숨을 순순히 넘길 수 있는 사람은 생의 완성이 어디에 있고 무엇으로 그것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깨우친 존재들이다. 하여 우리의 삶이 ‘먼 하늘 마른번개처럼 덧없’는 것임을 자각하는 일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양면에 걸쳐 어떤 장애에도 걸림 없이 지고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방편이 된다. 김경복 평론가
2024-10-0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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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점등(點燈)
이른 아침 학교 언덕길
고요한 시선 하나 나의 내면 엿본다
고개 돌려 숲속 관찰하니 직박구리 한 마리
바로 지척에서 나를 바라본다
엄마 젖에 매달린 젖먹이마냥 동백꽃에 매달려
말갛게 나를 바라본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제 아빠 대하듯 내 눈에 제 눈 맞춘다
순간, 내 망막이 그놈의 눈 안으로 빨려 들어가
환하게 점등되는 걸 느낀다 황홀하게
천 년 시간 저쪽의 도화원에 가 닿는 걸 느낀다
하, 얘 좀 봐? 나는 직박구리와 눈 맞추는 일이
가슴 떨려 못 견딜 지경이다 그러면서도
오래 지속하면 어느 찰나 저놈이 지리산 연곡사
동부도 속으로 날아가 버릴까 얼른
눈길 거둔다 그리고는 가슴 뿌듯하게
오늘 하루 나는 직박구리의 아빠야, 자랑해대며
아이들 가르칠 일을 즐겨 구상한다
-시집 〈천 년 시간의 저쪽 도화원〉(2014) 중에서
눈과 눈이 마주쳤을 때 스파크가 튄다. 튀는 불꽃은 놀라움, 기꺼움, 황홀함 등으로 번져 의식의 등불이 된다. 시인도 이를 알기에 ‘눈 맞춘’ 순간 ‘그놈의 눈 안으로 빨려 들어가 환하게 점등되는 걸 느낀다 황홀하게’라고 말하고 있다. 눈맞춤으로써 깨어나는 의식의 점등(點燈)! 의식에 불이 들어오는 순간 무료한 일상은 부서지고 세상은 신비로 피어난다.
첫사랑의 눈맞춤이 그러하지 않을까? 황홀한 교감은 세계 속에 살아있는 나의 존재성을 유감없이 느끼게 하고, 생의 기쁨과 의미에 눈뜨게 한다. 그렇기에 ‘점등’은 삶의 본질에 대한 본능적 직관이다.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것에 대한 발견이다. 시인도 본능적으로 이를 ‘천 년 시간 저쪽의 도화원에 가 닿는 걸 느낀다’로 고백하고 있다. 하여 시는 불의 성령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배화교(拜火敎)처럼 의식의 불꽃을 부르고 키워내는 의례다. 김경복 평론가
2024-09-2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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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풀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난다.
알고 보면 향기는 풀의 상처다.
베이는 순간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지만
비명 대신 풀들은 향기를 지른다.
들판을 물들이는 초록의 상처
상처가 내뿜는 향기에 취해 나는
아픈 것도 잊는다.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
-시집 〈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할 때〉(2015) 중에서
참으로 놀라운 시다. ‘베어진 풀에서 향기가 나’는 현상을 통해서 ‘향기는 풀의 상처다’란 명제를 유추해 내는 것은 보통의 통찰력이 아니다. 그 말은 상처가 곧 향기일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 속에서 상처는 고통, 악취, 죽음 등의 부정적 의미를 띤다. 그런데 상처가 향기가 된다는 발언은 상식을 넘어선다. 여기서 우리는 풀은 상처를 향기로 승화시키고, 상처는 향기가 될 수도 있다는 두 가지 역설적 진실에 눈뜨게 된다.
그로 인해 ‘상처도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말하는 마음의 경지에 대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상처를 두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은 상처가 가진 영향 때문일 것이다. 실제 상처는 흉터를 남긴다. 생각해 보면 흉터야말로 삶의 아픔과 고난을 이기고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무늬 아닐까? 상처의 흉터로 존재의 의미를 생생하게 자각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없다.
김경복 평론가
2024-09-1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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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첫사랑 그 사람은
첫사랑 그 사람은
입맞춘 다음엔 고개를 못들었네.
나도 딴 곳을 보고 있었네.
비단올 머리칼 하늘 속에
살랑살랑 햇미역 냄새를 흘리고,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파라.
내 손에도 묻어 있었네.
오 부끄러움이여, 몸부림이여.
골짜기에서 흘려보내는
실개천을 보아라.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울고 있었네.
시집 〈박재삼 시 전집 1〉(1998) 중에서
첫사랑은 강렬한 감각이다. 날카롭거나 뜨겁거나 짙거나 하는 것. 생의 처음에 주어지는 감각은 매우 낯설고 매워 시간을 초월하여 기억 속에 남아있다. 상대의 머리칼에서 풍기는 냄새는 의식의 원판에 새겨져 있어,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 냄새 어느덧 마음 아프’게 하는 감각으로 인화된다. 무엇보다 만지고 쓰다듬던 ‘내 손에도 그 냄새가 묻어 있’음을 느낄 때는 더욱 또렷한 감각으로 인해 애틋함을 달랠 길 없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놓쳐버린 사람에게 첫사랑은 그래서 ‘울음’이다. 세계마저 그 슬픔에 동조하여 ‘물비늘 쓴 채 물살은 울고 있고, 우는 물살 따라 달빛도 포개어진 채 운’다. 울음 속에서 그때의 감각은 더욱 생생해지고 가슴에 사무친다. 하여 ‘첫사랑 그 사람’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의식의 심층에 잠겨 일렁이고 있다가 그리움의 감각을 타고 전율로 피어난다. 김경복 평론가
2024-09-0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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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빙벽(氷壁) / 박영근(1958~2006)
겨울산은 나뭇잎 하나 붙잡을 것이 없다
침묵의 저 가파른 칼등
바람에 끌려다니던 눈송이들이
일제히 머리를 풀고
바위절벽에 얼어붙는다
어떤 생애의 화살이 날아와 깨뜨릴 수 있을까
흉터와 외침 위에
얼음 저며드는 벽화(壁畵)여
바람도
눈송이도
스스로 부딪쳐 불타올라
온몸으로 절벽이 된다
오오 고통만으로
저를 지키고 있는
저 겨울산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1997) 중에서
마음만은 차디찬 상태에 두기로 한다. 연일 불볕더위가 자심한 8월의 마지막 주간, 한겨울의 얼음산을 부른다. ‘바람에 끌려다니던 눈송이들이 일제히 머리를 풀고 바위절벽에 얼어붙는’ 모습을 그리자 가마솥 같은 더위가 급속히 냉각되는 느낌. 풀어진 몸에 소름 돋는 것 같고, 늘어진 정신에 으슬으슬 한기가 끼치는 것 같다.
상상력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시인도 겨울산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무정하고 무심한 세월 속에서 ‘바람도 눈송이도 스스로 부딪쳐 불타올라 온몸으로 절벽이 되’는 상상은, 그것도 오직 ‘고통만으로 저를 지키고 있는 겨울산’을 떠올려 보는 것은 완벽한 세계를 품어보고 싶다는 의지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강인하고 올곧은, 그러면서 칼날같이 엄정한 상태에 이르고 싶다는 마음의 표상. 하여 ‘빙벽’은 영혼의 ‘가파른 칼등’이 된다.
김경복 평론가
2024-08-2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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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좋겠다, 마량에 가면
몰래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먼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시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 시집 〈저녁 6시〉(2007) 중에서
답답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 한 번 크게 몰아쉴 ‘숨구멍’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고 나만 아는 쉼터, 편안하고 쾌적하게 꿀잠을 잘 수 있는 곳. 그곳에선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는 것이 제격이고, ‘사람들의 눈총이야 알 바 아니’기 때문에 마음은 이미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하는 생각에 잠겨있을 것이다. 풍요와 자유가 보장되어 삶의 활기가 넘치는 곳!
이상향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곳에서 별다른 목적 없이 이리저리 거닐며 노는 것을 ‘소요유(逍遙遊)’라 할 때, 이는 동양적 전통의 오랜 꿈이다. 시인은 이를 조금 야릇하고 소탈하게 현실적 삶의 모습에서 구현해 내고 있다. 읽고 있으면 ‘마량’에 가고 싶은 생각이 물처럼 치솟는다. ‘누이의 손거울’ 같이 아름다우면서 자유로운 마량! 그런 곳에 ‘숨겨놓은 여인 데불고’ 가면, 누구나 제 알량한 여생이 거덜 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8-2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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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추억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보던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여름 가고
가을 가고
조개 줍는 해녀의 무리 사라진 겨울 이 바다에
잊어버리자고
바다 기슭을 걸어가는 날이
하루
이틀
사흘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1949) 중에서
그리움은 잊어버리자고 애쓸수록 더 잊혀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그리움에 사무친다는 말이 그런 경우다.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바다 기슭’은 구원의 장소다. ‘바다 기슭을 걸어보는’ 것으로 마음은 정화된다. 해소되지 않는 ‘추억’의 갈증은 사무치는 그리움의 부작용이다. 그래서 ‘하루 이틀 사흘’ 하염없이 바다 기슭을 걷는 사람은 구원과 형벌을 다 받고 있다. 그에게 그리움은 전혀 퇴색하지 않는 얼굴로 ‘여름 가고 가을 가’는 시간의 물결 속에서 어룽댄다.
그리움은 물러섬이 없다. 사람을 불러내 끝없이 헤매게 만든다. 젊은 날 박상규의 ‘하루 이틀 사흘’을 부르며 이송도, 해운대, 광안리 바다 기슭을 쏘다니던 것도 그리움의 성분 탓 아니었을까? 그리움은 독과 같아서 한 번 몸 안에 들어오면 광기에 휩싸여 천지를 떠돌 수밖에 없다. 참으로 기이하고 기구한 속성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8-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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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여는 시]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시집 〈그 여름의 끝〉(1990) 중에서
‘끝’은 절정의 감각이다. 완만한 기울기로 넘어감이 아니라 절벽 위에 서서 천 길 나락을 내려다보는 느낌. 절정은 이미 하나의 세계가 완성된 것이기에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고, 만약 다음 단계가 있다면 그것은 현재의 차원을 봉인하거나 절연하여 초월, 곧 윤회로의 비약만 있을 뿐이다. 계절의 상징에서 여름도 절정의 감각을 환기한다. 여름은 뜨거운 기운으로 생명의 활동이 정점에 이르도록 하는 계절이다. 그 이후는 가을·겨울로서 ‘조락(凋落)’의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 여름과 끝은 내포적 의미에서 필연적 상관성을 가진다.
한 사람이 ‘폭풍의 한가운데 있’으면서 어떠한 희망도 발견하지 못한 채 ‘절망’하게 된다면, 이것도 ‘끝’의 감각으로서 생의 절정감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절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생의 모든 에너지가 소요되는데, 그것을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는 일로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하여 ‘여름의 끝’은 한 세계가 완성되어 무너지고 또 다른 세계가 탄생하는 일이다.
김경복 평론가
2024-08-06 [1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