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곡우
류성훈(1981~)
계절이라는 말이 인연의 뒷모습을 닮아갑니다 당신과 차나무 밭을 처음 보았던 날 가지 뒤에 숨어 피는 꽃들도, 피고 지는 풀빛 무수한 시간들이 동그랗고 단단하게 묻히는 모습도 보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대해 들려줄 줄도 몰랐습니다 추억하기 위해서도, 뜨거운 마음들 돌아 돌아 더 짙어지기 위해서도, 시든 이파리 위를 더 힘줘 걸어야 할 봄도 있었기에 나는 오래 미뤄야 할 안부에 대해 궁리했습니다 아무리 부쳐도 읽히지 않을 편지처럼 그냥 계속 말하고픈 때가 내게도 오게 마련이었나 봅니다 당신이 좋아하던 계절을 먼저 떠올리듯 풍향을 바꾸는 한낮, 살아 한 번 더 보고 싶단 말조차 전할 수 없어 다행이던 뒷모습이 흰 봉오리처럼 아른거립니다
-시집 〈산 위의 미술관〉 (2025) 중에서
곡우는 24절기 중 봄철에 있는 6번째 절기입니다. 매년 4월 20일을 기준으로 봄비가 내려 모든 곡식을 기름지게 한다는 때입니다.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는 말이 있어 농가에서는 비를 기다리기도 하는 때입니다.
새싹과 새순이 돋아나고, 곡물 재배가 성한 시기인 봄철을 맞아 농사 시기를 본격적으로 알리는 절기.
모판에 볍씨를 담그고, 못자리를 깔고, 그 어느 때보다 품질 좋은 찻잎을 따는 때. 살찐 숭어떼들이 산란기를 맞는 무렵. 그리고 나무에 물이 가장 많이 오른다는 곡우.
살아 한 번 더 보고 싶단 말조차 전할 수 없는 안부가 왜 다행인지 자꾸만 되물어보지만 비를 기다리는 마음처럼 시든 이파리 위를 걸어야 할 봄도 있다는 말에 괜히 홀로 마음을 적시게 됩니다.
신정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