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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취재가 시작되자
“배 째”를 외치며 그냥 버티는 이들이 있다. 배 째와 비슷한 종류로 “어쩌라고” “네가 그래서 무엇을 할 수 있는데” 등이 있을 것 같다. 종종 이런 류의 사람을 만난 이들은 대항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때로는 정말 법은 멀리 있다. 답답함이 극에 달하면 언론사에 제보를 하거나 커뮤니티에 글이라도 남긴다. 종종 이러한 사실을 알아챈 언론사에서 취재를 시작하면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최근 서울로 1박 2일 워크숍을 떠난 강원도 정선군청 공무원 40명이 단체 예약을 해놓고 노쇼(예약 부도)를 했다는 이야기가 자영업자들의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다. 노쇼를 당한 업주는 커뮤니티에 ‘정선군청에서 40명 단체 예약을 해놓고 예약한 적이 없다고 발뺌한다’며 ‘녹음파일을 들려주니 그때서야 인정했다’고 글을 썼다. 이 업주는 피해보상을 받고자 정선군청에도 연락했으나 “보상은 힘들다”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취재가 시작되자’ 정선군청은 행사를 맡긴 위탁 업체 측의 실수로 인해 노쇼 사태가 일어났고 업주에게 최대한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부산을 대표하는 절경이자 시민 휴식 공간인 이기대에 아이에스동서(주)가 고층 아파트 신축을 추진했다. 경관이 훼손된다는 우려에도 해당 관청인 남구청은 “법적 절차를 따랐을 뿐”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부산일보의 ‘취재가 시작되자’ 지역 여론이 들끓었다. 결국 여론 악화와 부산 시민 반발, 시민 정서에 배치된다는 점에 부담을 느낀 아이에스동서는 아파트 건설 포기라는 전향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러한 사례들이 쌓이며 커뮤니티에는 ‘취재가 시작되자를 당해야겠네’와 같은 밈도 유행하고 있다. ‘취재가 시작되자’라는 말은 어디서,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취재가 시작되자’를 풀이하면 논란이나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해결 의지를 전혀 보이지 않던 이들이 언론의 취재가 시작되거나 보도가 진행되어 사건이 공론화되자 황급히 상황을 수습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 때문에 배 째를 외치는 이들의 태세를 바꾸게 하는 마법의 단어로 인식되기도 한다. 커뮤니티에서는 게시글 1개보다 민원 1건이 낫고, 민원 1건보다 취재 1회가 문제 해결에 더 용이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다.
‘취재가 시작되자’가 왜 마법의 단어가 됐냐를 두고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어떤 이슈가 터져 시끄러워지면 당사자만 손해를 보기 때문일 수도 있고, 남의 시선이 중요한 한국 사회의 특성상 취재를 당한다는 것 자체가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분석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취재가 시작되자’는 언론의 순기능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우리나라의 언론 신뢰도는 낮은 편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가 지난 6월 발표한 ‘2024 디지털뉴스보고서’ 조사 결과 ‘뉴스를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답한 한국인은 31%에 그쳤다. 한국이 처음 조사에 참여한 2016년(22%) 이후 성적에 비춰보면 지난해 28%보다도 3%포인트 높아 역대 두 번째로 높은 수치긴 하다. 다만 조사국 평균 신뢰도(40%)보다 9%포인트 낮았고 아시아·태평양 11개 국가·지역 중에서는 최하점이었다.
언론의 힘은 ‘신뢰’다. 신뢰도가 낮다는 것은 그만큼 언론의 힘이 약하다는 뜻이다. 언론에 대해 혐오와 불신이 있는 상황에서 이러한 밈은 언론사들에게 힘을 주고 있다. ‘취재가 시작되자’ 같은 코너를 신설한 언론사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커뮤니티에서 ‘취재가 시작되자 당해야겠네’라는 밈을 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여전히 취재의 힘을 믿어주시는 독자들이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플랫폼에서는 클릭 수만큼이나 PIS(Post Interaction Score) 지표가 중요하다. 이는 좋아요, 댓글, 공유 등을 지수로 합산한 수치로 쉽게 말해 사람들이 페이지 게시물에 얼마나 참여했는지 알 수 있는 숫자다. 언론사로서는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예전 같으면 부산일보로 전화가 온 숫자, 격려나 반론를 담은 편지의 숫자, 편집국을 찾아와 감사 인사나 고성을 지른 숫자 정도가 될 듯하다. 그래서 ‘취재가 시작되자’의 마법이 발휘된 기사는 늘 PIS 지표가 상위권이다. 독자들이 원하고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소위 먹히는 콘텐츠인 셈이다.
앞으로도 ‘취재가 시작되자’가 마법의 단어로 남기 위해서 언론사의 노력만큼이나 독자분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다양한 플랫폼에서 접하는 부산일보의 콘텐츠에 댓글, 좋아요 등으로 콘텐츠 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중요한 키가 되어 주시길 바란다. 아울러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취재를 위해 많은 제보도 부탁드린다. 부산일보 제보 전화 051-461-4131, 또는 유튜브나 인스타 부산일보 채널은 ‘취재를 시작하기’ 위해 항상 열려있다. 장병진 디지털총괄부장 joyful@busan.com
2024-11-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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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초고령 사회와 디지털 금융의 딜레마
최근 지역 금융기관 관계자들과 만나 디지털 금융과 날로 발전하는 핀테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인터넷 뱅킹의 등장 이후 치열해진 경쟁 속에서 지역 금융기관들은 생존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비자 편의 측면에서 디지털화를 더욱 고도화하겠다는 그들의 계획을 들었다. 이에 자동적으로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3%를 넘겨 초고령 사회로 달려가는 부산의 현실이 머리를 스쳤다. 디지털 기기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이 이 과정에서 소외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섰다. 그들 또한 어두운 표정으로 이 문제가 그들에게도 ‘딜레마’라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대화 중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몇 년 전 지역화폐인 동백전이 출시됐을 때였다. 2019년 12월 30일에 첫 선을 보인 동백전 카드를 온오프라인에서 신청 가능했다. 기자는 자연스럽게 앱을 내려받아 실물 카드를 신청했고, 며칠 후 카드를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동백전의 10% 캐시백 혜택에 관심을 보이며 대신 신청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일이 꼬였다. 평소 부모님께 잘 해드리지 못한 아들이었기에 어머니를 위해 동백전 카드를 기꺼이 신청해 드리기로 했다. 어머니의 스마트폰에 앱을 설치하고 여러 정보를 입력했지만, 결국 공인인증서의 장벽에 막혀 카드 신청은 실패로 끝났다. 답답함에 은행에 직접 가서 발급받으시라 말씀드렸던 그날의 상황이 여전히 마음에 걸린다.
부산의 인구 구조를 생각하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길거리에서 은행 점포가 하나둘씩 사라지며 노인들의 금융 서비스 이용이 더욱 불편해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이 2021년 9월 발표한 ‘국내은행 점포 운영현황’에 따르면 그해 6월 말 기준 국내은행 점포 수는 총 6326개로 전년 말 대비 79개 줄었다. 이는 모바일뱅킹 등 비대면 거래의 확산과 점포 효율화의 결과다. 주목할 점은 인구가 많은 수도권과 주요 대도시가 전체 점포 감소의 77.2%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산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부산의 금융기관 점포 수는 지난해 말 기준 1898개로 2022년보다 29개가 줄었다.
디지털화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다. 이미 많은 식당에서 키오스크로 주문을 받는 것이 일상화됐다. 하지만 금융 업무는 단순한 편의가 아닌, 노인의 생활 안정과 직결된 문제이기에 상황이 더 심각하다. 앱을 통한 금융 업무는 계좌 이체, 잔액 조회, 대출 관리 등 필수 기능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밀번호, 인증서, 보안 절차 등 복잡한 과정도 거쳐야 해 노인들에게 심리적 부담과 혼란을 주는 것은 자명하다. 금융 서비스 접근의 어려움은 키오스크로 음식을 주문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생활에 큰 지장을 초래하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여러 방안이 필요하다. 우선 점포 폐쇄에 앞서 사전 영향 평가의 내실화가 필수적이다. 지난해 4월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 은행연합회가 펴낸 ‘은행 점포 폐쇄 내실화 방안’을 보면 점포의 문을 닫기 전에 고령층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고, 이를 점포 폐쇄 결정 과정에 반영해 이들의 불편을 사전에 예방할 것을 주문했다. 이를 위해 은행은 사전 의견 수렴 절차를 강화하고 평가 항목에서 고객 불편 요소의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기관은 또 점포 폐쇄 때 무인기기(ATM) 대신 계좌 개설 등 주요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고기능 자동화 기기(STM) 등의 대체수단 도입 필요성도 강조했다.
점포 폐쇄가 불가피하면 폐쇄 사유와 대체 수단, 도움 받을 연락처를 충분히 제공해 소비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면서 사후 평가 절차를 통해 불편을 최소화하는 필요성도 제기됐다. 이 밖에도 고령층의 디지털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한 교육도 중요하다. 모바일·인터넷 뱅킹, 키오스크 사용법 교육을 정기적으로 제공해 고령층이 디지털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아울러 직관적인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개발해 노인들의 사용 편의성을 높여야 한다.
수년 전 기자가 어머니의 동백전 카드 발급에 실패했던 경험은 단순히 자식의 도리를 다했는지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는 고령층이 경제적 자립과 사회적 참여를 이어갈 수 있도록 포용적인 금융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디지털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지만, 그 과정에서 노인들이 소외되지 않도록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통해 진정한 사회적 포용과 안정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2024-11-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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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단풍 아니고, 소나무재선충병입니다"
단풍의 계절이다. 완연한 가을을 넘어 초겨울에 접어드는 시점인 만큼, 전국의 산이 온통 붉게 물들고 있다.
등산객은 물론 고속도로와 국도를 운행하는 차량에서도 창밖으로 단풍 든 산을 바라볼 수 있다. 최근 경남 창원과 대구시를 연결하는 중부내륙고속도로와 창원~밀양을 연결하는 25호선 국도를 달리다보면 주변 야산이 온통 붉게 변했다. 완연한 가을인 만큼,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착각이다. 단풍인가 하고 자세히 보면 소나무가 죄다 재선충병에 걸려 죽어 있다. 상록수인 소나무 군락지에서 활엽수처럼 단풍이 들 수는 없는 일이다.
소나무는 우리나라 산림의 상징이자 민족의 정신이 담겨 2022년 ‘국민 선호나무’ 조사 결과 37.9%가 좋아하는 1위 수종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유독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자 재선충병으로 인한 소나무 고사 소식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50년에는 남한 지역 소나무 55%가 고사한다는 연구결과도 제시됐다.
재선충이 창궐하는 원인으로는 기후변화가 꼽힌다. 재선충은 식물에 기생하는 선충의 일종이다. 재선충병은 1mm 안팎의 재선충이 북방수염하늘소·솔수염하늘소 등을 매개로 소나무류에 침투, 양분 이동을 막아 나무를 고사시킨다. 재선충병에 감염된 소나무가 지난달 기준으로 경남에만 79만 2000그루로 집계됐다. 산림청은 올해 재선충병 피해가 심한 경남 밀양시와 경북 경주·포항·안동·고령·성주, 대구 달성 등 전국 7곳(4만 4878.6ha)을 특별방제구역으로 지정했다. 특별방제구역은 소나무재선충병 피해가 급증해 전량 방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이다.
재선충병의 빠른 감염 확산과 달리 방제를 위한 지방자치단체의 전문 인력과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다. 밀양은 경남에서 유일하게 특별방제구역으로 지정됐지만 예찰과 방제를 위한 전담인력은 담당자 1명뿐이다. 보다 못한 경남도는 최근 재선충병 전담 TF팀(3명) 신설을 밀양시에 요청했다.
방제 예산 상황은 더 심각하다. 밀양시는 2022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3년간 353억 1800만 원을 투입해 34만 327그루에 대한 방제 작업을 벌였다. 한 그루 방제에 설계·시공·감리 비용까지 포함해 15만 원(국비 70%, 도비 9%, 시비 21%)이 투입되지만, 올해 확보된 방제 예산은 20% 수준인 92억 원에 불과하다. 올해 상반기까지 10만 7000그루를 벌목하고 훈증·파쇄했지만, 나머지 40만 그루는 방치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인근 양산시도 예산 부족으로 지난달 말까지 피해 고사목 5만 2000그루 중 52%인 2만 7000그루만 제거할 방침이다. 백신도 없는 상태여서 감염된 소나무는 100% 고사한다. 특히 재선충 번식력은 암수 한 쌍이 20일 후 20만 마리로 불어난다. 감염 속도가 고속도로라면 방제는 비포장도로인 셈이다. 피해목을 빨리 제거해 확산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야 하지만 예산과 인력 부족으로 잠재적 피해 규모를 키우고 있는 형국이다.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해 애만 태우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들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경남도는 최근 재선충병을 국가 재난 차원에서 대응해 줄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현행 특별방제구역만이라도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울산시도 국가 재난 차원으로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관련 법령 개정과 재난안전특별교부세 지원 등을 건의했다.
특별재난지역은 사고나 자연재해 등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의 긴급한 복구 지원을 위해 대통령이 선포하는 곳이다. 특별재난지역은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라 자연·사회 재난을 당한 지역에서 지방자치단체 능력만으로 수습하기 곤란해 국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지정할 수 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지역, 2000년 동해안의 고성·삼척·강릉·동해·울진 등에 발생한 사상 최대 산불피해지역 등이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된 바 있다.
하지만 정부는 산림병해충인 재선충병을 전염병 등 국가가 관리하는 재난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지정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소나무 재선충을 이대로 방치할 경우, 사람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 수분이 빠진 소나무는 지탱하는 힘을 잃어 외부 충격에 약하다. 따라서 길가나 민가, 문화재 인근의 소나무가 쓰러지면 언제든 사람이나 문화재가 다칠 위험성이 있다. 특히 재선충에 감염된 나무는 잔뜩 마른 탓에 휘발성이 강해 산불을 확산시킬 수도 있다. 장마철 산사태 위험도 키운다. 이젠 재선충병은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차원의 방제 대책 마련과 기후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아열대 산림 수종 전환 사업이 시급하다.
2024-11-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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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한반도, 뱃사람 없이는 성장도 없다
사실 우리나라는 섬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삼면이 바다이고 북쪽은 아예 막혀있다. 어쩌면 섬보다 더 고립된 땅일 수도 있다. 이념으로 남북이 갈라지기 전, 먼 과거로 가더라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부터 이미 한반도 교역 중심은 해상이었고, 육로 비중은 작았다. 춥고 척박한 북쪽 땅을 건너는 것보다 우리에겐 바다를 오가는 게 훨씬 유리하고 익숙했다.
과거에는 한 국가의 경제력이 해상 무역 능력에 따라 좌우되기도 했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선 페르시아 유리잔이 나왔다. 인도의 왕족이 가야로 건너와 교류하기도 했다. 모두 바닷길을 통해 사람과 물건이 오간 결과로, 당시 해상무역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북쪽의 고구려도 땅을 건너는 것보다 평양과 원산에서 배를 띄워 중국과 교류했다.
만일 그때 한민족이 바다로 나아가지 못했다면, 우리는 대륙의 귀퉁이에서 고립돼 지내왔을 것이다. 고립된 문명은 발전이 느리고 국력이 허약해진다. 한민족이 아름다운 문화유산을 남기고, 정체성을 유지하며 한반도를 지키는 데 뱃사람들이 크게 기여를 한 셈이다.
산업화 이후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원양어선, 원양상선, 해외취업선 등 바다로 나간 선원들의 선상노동은 외화소득에 크게 기여했고, 6·25 전쟁 뒤 산업경제를 일으키는 단초가 됐다. 대한민국이 무역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컨테이너를 실어 나르는 배들이 있어 가능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민족은 뱃사람들이 없이 성장하기 힘든 땅에 살고 있다.
그러나 뱃사람들의 공헌이 제대로 인정받는 시대는 없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에 나서는 건 목숨을 담보로 하고, 선원들의 용맹함은 미덕으로 인정받아야 했다. 불행히도 예부터 위험한 일은 천한 이들의 몫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도 뱃사람들의 고된 노동과 열악한 환경 등이 묘사돼 있다. 조선 시대의 궁중 일기인 승정원일기에도 선원들의 고충과 함께 부족한 보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귀한 사람은 험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오랜 관념 탓에, 선원들은 금전적으로도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고, 사회적으로도 저평가됐다.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물론 신분과 직업을 연결 짓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은 옅어졌다. 배를 타면 육상에서 같은 일을 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받는다. 그럼에도 고되고 위험한 생활에 대한 보상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다면 경제적 부족분을 채울 수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 선원을 존경하는 풍토는 아직 없다.
선원에 대한 대우가 열악하다는 건 심각한 ‘선원 부족’ 현상이 입증한다. 바다로 나가겠다는 젊은 사람들은 점점 줄고 있다. 2021년 기준 육상 근로자 최저임금은 월 191만 4000원, 선원 최저임금은 월 236만 3000원이었다. 선원의 최저 월급이 23% 정도 더 많다. 배 위에서 겪어야 할 낮은 복리후생, 불완전한 가족 관계, 고립된 생활 등을 감내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규모다.
이미 전체 선원의 절반 가까이 외국인으로 채워진 배경이다. 2030년 국적 선박 3분의 1에 한국인 해기사 배치가 불가능해지고, 2050년이 되면 한국인 해기사가 4000명 이상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 자칫 대다수 대한민국 배들을 외국인 손에 맡겨야 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해운수산 업계는 군 면제 확대 등 젊은이를 바다로 유인할 파격적인 대책을 정부에 요구한다. 선원 부족이 업계의 문제를 넘어 국가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파격적인 대책이 시급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디지털과 해운이 결합하고 있는 시대적 추세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업계 자체의 문제도 크다. 기존 선원 조직들은 기득권화되고 있다. 선사들은 세련된 작업 환경을 만들기보다 투박한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업계가 스스로 변화며 진취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미래를 걸고 승선하는 젊은이들이 하나둘 늘어날 것이다.
육상의 평범한 시민도 바다에 나간 이들에게 종종 고마움 을 표하면 좋겠다. 뱃사람들이 경제적 목적을 위해 배에 탔다고 하더라도, 거친 바다를 가르는 일에 누군가 나서주었기에 대한민국 경제가 움직이고 있다는 건 인정해야 한다.
지난 8일 부산 선적 대형 선망어선 135 금성호가 침몰해, 14명의 선원이 숨졌거나 실종 상태에 있다. 삼면이 바다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치열하고 급박한 최전선 산업 현장에 투입된 이들이다. 최대한 사고 수습에 집중하고, 모두가 희생자들에 대한 충분한 존경심과 애도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선원들을 합당하게 대우하지 않고 해양 강국을 운운하는 건 비겁한 행위다.
김백상 해양수산부장 k103@busan.com
2024-11-1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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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막말과 민주주의
일본 영화 ‘웰컴 미스터 맥도널드’는 말의 힘을 보여주는 웰메이드 코미디다. 평범한 주부가 쓴 각본이 라디오 드라마로 바뀌는 과정에서 펼쳐지는 막말 대소동이 일품이다.
원래 각본은 일본 어촌을 배경으로 애틋한 사랑을 그렸다. 그러나 여주인공을 맡은 퇴물 성우의 고집이 상황을 꼬이게 만든다. 주부 배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자신을 변호사로 소개하는 등 안하무인으로 연기한 것. 오로지 소리로만 연출하는 생방송 라디오 드라마이기에 가능한 ‘아무말 대잔치’다.
막말의 뒷수습은 상대 배우와 제작진의 몫이다. 줏대 없는 제작진이 여주인공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부화뇌동하면서 삽시간에 드라마 배경은 일본 어촌에서 미국 시카고로 바뀐다. 그리고 드라마는 산으로 간다. 여주인공의 막말에 상대라고 가만히 있었을까. 화가 난 남자 주인공은 ‘나는 어부가 아니라 미국인 파일럿 도날드 맥도날드’라고 질러버린다. 어촌에서 싹튼 작은 사랑의 드라마는 급기야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한 스펙터클 대서사시로 돌변한다.
이처럼 입을 떠난 순간 말은 하나의 현상이 된다. 코미디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대선을 불과 일주일 앞두고 여야를 넘나드는 막말 대소동이 벌어졌다. 발단은 지난달 27일 뉴욕 공화당 유세에서 불거진 한 코미디언의 발언. 찬조 연설자로 유세장에 나선 코미디언 토니 힌치클리프는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를 ‘떠다니는 쓰레기 섬’이라고 비하했다. 미국 내 푸에르토리코 출신은 60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심전심 히스패닉 유권자까지 덩달아 발끈하면서 미 대선 막판 최대 사건으로 비화했다.
상승세가 꺾였던 민주당은 공화당 지지자의 막말 한 마디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카멀라 해리스 캠프는 이 발언 영상을 광고로 만들고, 경합주의 푸에르토리코 출신 유권자들에게 문자 메시지로 대량 발송했다.
그러나 막말이 가져다준 호재는 잠시였다. 다음날 조 바이든 대통령의 눈치 없는 한 마디가 막말에 막말을 보탰다. 취재진이 전날 쓰레기 발언에 대한 입장을 묻자 “내가 보기에 유일한 쓰레기는 트럼프의 지지자들”이라고 답하고야 말았다. 말 한마디가 전세계가 주목하는 미 대선 판도를 흔든 꼴이 됐다.
추억의 미국 프로레슬링은 40~50대 남성이라면 누구나 익숙하다. 그 무대에서 ‘진짜 부동산 재벌이 맞느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마이크 하나 들고 종횡무진하던 게 트럼프 전 대통령이다. 벼랑 끝에서 호재를 만난 그는 환경미화원 복장을 하고 쓰레기 수거차까지 모는 퍼포먼스를 하며 해리스 부통령을 몰아붙였다.
이런 포복절도할 만한 시추에이션이 강 건너 불구경이었으면 좋으련만. 비슷한 시기 한국의 국정감사 현장에서는 ‘X발 사람 죽이네, 죽여’가 나오고 ‘법관 주제에’가 터져나왔다. 불구경하다 돌아보니 우리 집은 전소 단계가 아닌가 말이다.
잘못 뱉은 말 한마디에 많은 이들이 명성과 기회를 잃고, 다들 그것을 당연히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주워 담을 수 없는 말의 무거움에 다들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극단의 매체인 SNS가 덩치를 키우면서 말은 그 가치가 달라졌다. 배설하듯 내지르는 저열한 ‘사이다 발언’에만 열광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독버섯 같은 정치 팬덤이 SNS를 장악한 탓이 크다. 내가 지지하는 진영이라면 뭐든 옳고, 반대하는 진영이라면 뭐든 혐오스럽다는 유아적인 행태는 정제된 언어를 거부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말의 환경이 열악해지니 이를 나무라기는커녕 악용하는 잡배까지 날뛰는 중이다. ‘공공장소에서 할 소리인가?’ 싶을 정도의 막말을 내뱉어도 사회적으로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치 팬덤의 눈에 드는 순간 한순간에 말 주인은 ‘정치 셀럽’이 된다. 경륜과 인품에 대한 검증은 건너뛰고 악다구니 한 번이면 정치권 중심으로 가는 추잡한 지름길이 열리는 것이다. 충성심으로 포장된 막말을 내뱉는 시정잡배와 이를 SNS로 확대 재생산하는 악성 정치 팬덤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미국도 이번 대선 이후에는 ‘두 개의 미국’을 마주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대선에서 의회 의사당 폭동이 일어날 정도로 정치 지형이 양극화된 미국이다. 그 저변에는 막말과 정치 팬덤이 있다. 민주주의를 한발 앞서 받아들인 미국에서마저 이럴진대 한국도 민주주의가 효용 한계에 도달했다는 푸념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말은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말 속에 힘이 있는 까닭이다. 말이 빚어낸 현상과 그 결과는 오롯이 그 주인의 몫이다. 정제되지 않고 뱉어내는 공인의 막말에는 가혹할 정도의 사회적 철퇴가 내려져야 한다. 정치인의 막말에 관대했던 시절은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었다. 권상국 정치부 차장 ksk@busan.com
2024-11-06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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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지역 예타 사업, 언제까지 정부만 봐야 하나
“동남권 순환 광역철도가 기획재정부 ‘예비 타당성 조사 대상 사업’(이하 예타)에 포함됐다 하니 환영할 일입니다. 예타 결과 발표가 늦어지고 있는 부울경 광역철도를 보면 비슷한 길을 갈까 봐 걱정이 앞섭니다. 필요한 지방 국책사업은 예타 면제와 국가 시행이 이뤄져야 합니다. 관련 법 제정이나 개정이 필요합니다.”
경남 양산시의 한 간부가 며칠 전 동남권 광역철도의 예타 포함 사실을 접한 뒤 본 기자에게 건넨 푸념이다.
〈부산일보〉와 지역 정치권 취재를 종합하면 부산~양산 웅상~울산을 잇는 부울경 광역철도는 지난해 5월 기재부 예타에 포함됐다. 결과 발표가 올해 6월 예정이었으나 9월로 늦춰졌다가 다시 12월로 연기되더니 결국 내년 상반기까지 밀렸다.
결과 발표가 늦어지면서 ‘노선을 단축한다’ ‘단선으로 건설한다’ ‘사업이 물 건너갔다’ 등의 소문도 나돈다. 이 사업은 예타 신청 때 트램에서 경전철로, 웅상시가지 지하 건설로 사업비가 1조 600억 원에서 3조 400억 원으로 급증하면서 경제성 논란을 예고했고, 결국 발표도 지연되고 있다.
KTX 울산역~양산 상·하북~김해 진영을 잇는 동남권 광역철도도 국토교통부의 ‘사전 예비타당성 조사’(이하 사타)에서 10개월 이상 결과 발표가 늦어져 예타 통과 역시 장담할 수 없다. 양산시가지 지하 건설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업비(1조 9345억 원)가 사타 때보다 증액돼 경제성 문제가 불거질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경제성 확보를 위해 노선 변경, 역사 수 축소 등의 계획 변경과 이로 인한 결과 발표가 늦어지는 등 부울경 광역철도와 비슷한 길을 갈 가능성이 점쳐진다.
사업 시행 여부를 결정짓는 예타는 1999년 예산 낭비를 줄이는 차원에서 도입됐다. 예타는 인구나 경제력이 집중된 곳일수록 높게 나오는데 돈과 사람이 몰려 있는 수도권이 비수도권보다 유리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도입 20년이 지나면서 인구소멸 위기 등 시대 변화도 반영하지 못한다. 예타가 수도권 일극 주의를 심화시킨 결과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잇따른 이유다. 정부는 ‘예산 낭비, 선심성 사업’이라는 시민단체 등의 지적에도 일부 사업에 대해 예타를 면제해 주지만,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방 사업이 훨씬 많다.
어렵게 예타를 통과하더라도 지방 현안 사업들은 시행률도 떨어진다. 결국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수도권 인프라만 계속 확충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실제 윤영석(양산갑) 의원이 국토부 등으로 받은 국정감사 자료에서 이런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윤 의원이 ‘1~4차 국가철도망 구축계획(2006~2030년)’과 ‘광역교통 시행계획’ ‘도시철도법상 도시철도망 구축·완공 노선(공사 중 포함)’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수도권은 계획 노선 67개 중 45%인 30개가 완공됐지만, 비수도권은 계획 노선 75개 중 완공된 것은 19개(25.3%)에 불과했다.
철도 건설에 투입된 사업비도 수도권은 106조 원을 계획해 45조 원이, 비수도권은 82조 원을 계획해 22조 원이 각각 투입됐다. 항공 정책 사업비도 인천국제공항은 지난 10년간 10조 원이 투자됐지만, 김해국제공항을 포함한 지방공항은 8400억 원에 그쳤다. 최근 5년간 광역교통 개선 대책 집행 현황도 수도권에 4조 8000억 원이 투입됐지만, 비수도권에는 380억 원이 들어갔다.
국회에서는 이런 문제 해결을 위해 개별 사업을 지정해 예타 면제 등을 규정한 특별법을 발의하고 있지만, 통과가 여의찮다. 윤영석·김태호(양산을) 의원이 최근 각각 동남권 광역철도와 부울경 광역철도의 예타 면제 등을 규정한 ‘특별법’을 발의했다. 나아가 윤 의원은 부울경을 하나의 특별시로 만들어 독자적인 재정·행정권을 행사하는 가칭 ‘부울경특별시’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방 개별 사업마다 예타 면제와 국가 시행을 규정하는 특별법을 매번 발의할 수는 없다. 행정이 공공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 조성하는 ‘조장 행정’을 하듯이 ‘지방 국책사업 중 필요한 사업에 한해 예타 면제와 국가가 신속하게 시행’하는 관련 법 제정이나 개정을 적극적으로 검토할 때다.
부울경 광역철도와 동남권 광역철도는 765만 명이 거주하는 부울경을 하나의 교통망으로 연결하면서 1시간 생활권을 현실화한다. 인적·물류 교류 활성화로 경제공동체 구축에 도움이 되고, 시도민 교통 불편 해소로 인구 유출을 방지하는 효과도 기대되는 등 ‘조장 행정’이 필요한 사업이다.
정부 역시 수도권이 갈수록 모든 것을 빨아들이면서 저출생 야기는 물론 국가 경쟁력마저 떨어뜨리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만큼 국가 미래를 위한 적극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할 것이다.
김태권 동부경남울산본부장 ktg660@busan.com
2024-11-04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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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아파트 아파트
1983년 단독주택에 살다가 부모님을 따라 동래구에 있는 높은 건물로 이사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름, ‘아파트’였다. 그때만 해도 부산에는 아파트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국민학교 반 친구들은 대부분 단독주택에 살았다. 공동주택이라면 기껏해야 다세대 연립주택 정도였다. 골목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이웃에 누가 사는지 다 알았다. 산이 많은 부산이라 평평하고 너른 느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답답하지도 않았다. 사방을 둘러보면 나즈막한 집들 너머로 푸른 산, 하늘이 보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아파트는 단독주택을 점점 밀어냈다. 아니 정확히는 지워버렸다. 아파트는 그렇게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과 재산 증식의 꿈이자 애증의 보금자리가 됐다. 제조업 호황에 취해 산업 혁신 노력을 게을리하는 사이에 빈 땅, 주택이 밀집한 지역,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40년이 지난 2024년, 부산은 아파트만 가득한 도시가 되어 버렸다. 길을 걸어도, 차를 타고 보아도 높은 아파트들이 산과 하늘을 가린다.
2006년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에서는 주거지 중 아파트가 서울 36.8%, 부산 43.9%였다. 2014년에 서울 42.6%, 부산 51.5%로 부산의 경우 절반을 넘어섰다. 2022년에 서울 43.5%, 부산 57.3%로 서울에 비해 부산의 아파트 점유율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아파트는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건인 양극화 현상도 극명하게 드러낸다. 2022년 대한민국 광역시의 아파트에 사는 저소득층이 40.69%에 그친 반면 중소득층 69.96%, 고소득층은 83.87%에 달했다.
지난 18일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라며 중독성 강한 가사를 반복하는 노래 ‘아파트(APT.)’가 세상에 나왔다. 제2의 ‘강남스타일’이라며 세계적인 신드롬이 일고 있다. 블랙핑크 멤버 로제와 팝스타 브루노 마스가 협업한 이 한국적인 노래는 지난 29일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8위, 각국 음원 차트를 휩쓰는 등 K팝 여성 가수로서 각종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노래 ‘아파트’를 접한 외국인들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도대체 아파트가 뭐냐”고 궁금해했다. 아파트는 영어 Apartment를 한국식으로 부른 일종의 콩글리시다. 미국에서 아파트는 대체로 건물 소유주에게 월세를 내는 임대아파트를 뜻한다. 개별 소유자가 가진 아파트형 혹은 빌라형 주거 공간은 콘도라 부른다. 우리나라처럼 전세와 월세, 자가가 뒤섞인 드높은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형태는 찾아보기 힘들다. 고층 닭장과 같은 구조물 속에 대다수 인구가 사는 나라 역시 몇 되질 않는다.
25층 높이 아파트인 집으로 미국인 친구들을 몇 번 초대한 적이 있다. 이들은 미국과 달리 생활편의 시설 등이 가까이 밀집한 ‘콤팩트 시티’ 부산을 놀라워했다. 마당도 없이 높이 쌓아 올린 아파트 속 아래위층 사이에서 살아가는 모습에 복잡미묘한 경이로움을 표현했다. 학교나 수용소처럼 관리사무소의 안내 방송이 집 안에 쩌렁쩌렁 울릴 때 더욱 그랬다. 바닷가 드높은 건물들이 오피스 빌딩이 아니라 대부분 아파트라는 사실에도 충격을 받은 눈치였다.
노래 ‘아파트’의 소재는 손을 쌓아 올리면서 특정 숫자에 걸린 이가 술을 마시거나 벌칙을 수행하며 분위기를 띄우는 즐거운 놀이다. 청년들이 대학 엠티 등 술자리에서 즐기는 게임이라는 점 역시 씁쓸한 현실을 반영한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만 보고 자랐으니 당연히 놀이의 소재가 된 것이다.
요즘 K문화의 확산으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부쩍 늘고 있다.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에 따르면 올해 9월까지 외국인 입국자는 1260만 9633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7.5%나 증가했다. 지난 9월 부산의 등록 외국인도 5만 3353명으로 지난해에 비해 11.8%가 늘었다. 이들이 한국인의 애환이 서린 아파트의 역사를 속속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다.
과거 부산시 등 지자체가 처음에 세웠던 숱한 도시계획, 지구단위계획에는 분명 이상적인 공간 배치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상업 지역, 사무 공간이 결국 아파트로 채워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시간을 20~30년 전으로 되돌려 부산 바닷가 아파트 중 3분의 1이라도 글로벌 기업의 한국 캠퍼스 등 일자리가 많은 오피스 건물로 채워 나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랬다면 청년들이 지금처럼 번듯한 일자리가 없어 정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축소 도시’를 고민하는 부산에 지금이라도 미래를 내다보는 도시 비전을 만들고 실천해야 우리 아들딸들이 터를 잡고 살 수 있다. 저출생과 인구 감소, 초고령 도시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아서는 안 된다.
2024-10-3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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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감사는 가장 아름다운 응답
‘물고기보다 낚시법!’이란 슬로건으로 장애인들에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부산의 한 장애인 지원 단체가 얼마 전 의미 있는 행사를 치렀다. (사)부산국제장애인협의회(회장 강충걸)가 지난 10~12일 경남 진해 해군교육사령부에서 ‘제30주년 통일 염원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 정신 계승 해군 병영 체험’을 연 것이다.
부산국제장애인협의회는 1991년 8월 한라산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소통과 화합,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장애인 통일염원 대행진’ 행사를 시작했다. 그 뒤 매년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이순신 장군 유적지, 해군·해병대 등에서 행사를 이어왔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였던 2020년과 2021년에는 행사를 열지 못했고, 마침내 올해 30주년 행사를 했다. 민간단체가 공익성 있는 행사를 30년간 이어왔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장애인들에게 소중한 나들이 기회를 제공하고, 문화예술 향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도 이 행사의 미덕이다.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슬로건으로 시작된 이 행사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통일 염원을 위해 평화통일 결의문을 낭독하고 백두산의 물과 흙, 한라산의 물과 흙을 섞는 ‘합수합토제’를 거행한다는 점이다. 행사도 이순신 장군 유적지나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이어받은 해군과 해병대 등 상징적인 장소에서 연다. 최근 10년 내 행사 장소를 복기해 보니 2016년 해군사관학교, 2017년 경남 통영시 한산도, 2018년 경북 포항시 해병대 1사단, 2019년 전남 여수시 전라좌수영 유적지, 2022년 전남 해남군 전라우수영 유적지(명량대첩기념공원), 2023년 충남 아산시 현충사, 2024년 해군교육사령부 등이었다.
기자는 2017년부터 취재 또는 동행을 하며 매년 행사에 참여해 왔다. 특히 올해 행사에서는 ‘해군 병영 체험’이라는 진귀한 경험까지 하게 됐다. 행사에 참여한 장애인,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조함 실습, 소화방수 훈련을 체험했다. 장애인 참가자들의 표정에선 활기가 넘쳐 보였다. 이들이 행사 참여를 통해 협동, 단결, 희생, 인내와 충무공 정신을 배우고, ‘하면 된다’는 도전 정신과 용기, 자신감을 키워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행사 마지막 날 저녁에 펼쳐지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어울림 한마당대축제’는 멋진 하모니의 무대다. 올해는 해군교육사령부 군악대와 농악대 협연, (사)시읽는문화(이사장 김윤아)의 시극 ‘충무공 이순신’ 공연, 발달장애인 ‘이지투게더’ 합창단 공연, 청소년 극단 ‘하이파이브친구들’의 뮤지컬 공연, 사회복지법인 든솔 청년장애인 공연단의 태권도 시범 등이 있었다. 특히 초대 가수 서정아, 윤영아의 공연에서는 많은 참가자들이 무대 앞으로 나가서 흥겨운 춤을 추고 노래를 따라 불렀다.
행사에는 매년 400~500여 명의 장애인과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한다. 30회 행사까지 누적 참가자만 1만 8000여 명에 달한다. 다행히 행사 때마다 날씨가 좋았고, 단 한 번의 안전사고도 없었다고 한다. 강충걸 부산국제장애인협의회장은 이에 대해 “이건 기적이다. 하늘이 도왔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했다. 30년간 행사를 굳건하게 이어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역 상공인들의 지지와 후원이 있었다. 30주년 행사에도 부산상공회의소 양재생 회장, 부산금정로타리클럽(회장 박진규), 부산아동복지후원회(회장 이상규), 눈사랑안과의원(원장 전웅찬), (주)와이씨텍 박수관 회장, 당코리 이영재 회장, 원촌산업기계 하용일 대표이사, BCM커피머신백화점 고주복 대표 등이 힘을 보탰다고 한다.
이번 행사 뒤 부산 동구 초량동 부산국제장애인협의회 사무실에는 참가자들의 감사 편지가 답지했다. 이들은 편지를 통해 해군 장병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병영 체험을 통해 ‘할 수 있다’는 군인 정신을 배웠으며 전투수영, 조함 실습 등 새로운 경험을 해 좋았다는 반응이 많았다. 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배우고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다짐도 있었다. 편지마다 행사 참여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듬뿍 담겨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강충걸 회장은 지난 4월 사진집 〈Thanks 365 이것 또한 감사하리라〉를 펴냈다. 자신이 대표를 맡고 있는 ‘영혼이 춤추는 도서관’ 개관 10주년을 기념해 만든 책이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 당시 23전 23승 불패 신화를 담은 해전지 사진 포함 240여 점과 감사와 관련된 365개의 명언이 실렸다. 사진작가인 주대선 H&J Company 대표가 사진을 촬영했으며, 도서출판 푸블리우스(대표 전민형)에서 펴냈다. 이 책에 실린 명언 중에 ‘감사는 가장 아름다운 응답입니다’가 인상적이었다. 30주년 행사 뒤 참가자들이 가장 아름다운 응답인 감사를 표하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펼쳐질 행사도 기대가 된다.
2024-10-28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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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작가와 독자 사이
“번역은 최고의 독서 길잡이입니다.”
무대 위 일본인 번역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객석의 한국 소설가는 공감을 표했다. 번역가는 이어서 번역이 아니라면, 한국 최고 걸작이라 불리는 대하소설을 이렇게 깊이 읽을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번역한 작품을 쓴 저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 인사를 받은 저자는 고 박경리 선생이다.
지난 토요일 통영에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일본의 한국 관련 서적 전문 출판사 쿠온이 소설 〈토지〉 전 20권 일본어 완역을 박경리 선생 묘소 앞에서 기쁜 마음으로 보고했다. 쿠온의 토지 완역 프로젝트는 총 10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원작 소설 완간 30주년이 되는 올해 ‘일본어판 토지 완역’이라는 새 기록이 추가됐다. 장소를 옮겨 진행된 기념식에서는 프로젝트와 관련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프로젝트가 시작된 2014년. 한국 문학 작품은 잘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 일본 출판계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작은 출판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말리는 사람이 더 많았지만, 쿠온 김승복 대표는 열정으로 프로젝트를 밀고 나갔다. 박경리 선생과 작품을 알리는 작업에 대한 책임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한 번역가와 편집자, 교정자, 감수자. 현장에서는 토지 완역 프로젝트팀을 ‘드림팀’이라고 불렀다.
기념식 축사에서 한 소설가는 작가 줌파 라히리가 남긴 “나는 번역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소개했다. 영어와 벵골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환경에서 자란 라히리는 〈나와 타인을 번역한다는 것〉에서 이탈리아 소설 〈끈〉에 압도돼 그 책을 번역하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고 밝혔다. 번역은 ‘장기이식이나 심장판막 수술만큼 위험하고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일’이지만 내가 매료된 작품을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한강 작가의 대표작 〈채식주의자〉를 세계에 알린 영국인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도 마찬가지였다. 독학으로 한국어를 배운 스미스는 한강 소설의 매력에 빠져 번역, 출판사 섭외, 홍보까지 앞장섰다. 작가와 좋은 번역가의 만남이 한국 첫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대단한 성과를 끌어냈다.
번역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최근 열린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한강 같은 작가’를 찾는 문의가 이어지는 등 한국 문학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좋은 번역으로 한국 문학의 매력을 널리 알리면, 해외 독자와 번역가가 같이 늘어난다. 번역가가 늘면 다양한 작품이 현지에 소개되고 한국 문학의 영향력도 더 커질 수 있다. 우수한 번역가 양성과 지원은 한국 문학의 해외 진출에 필수적이다. 2016년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국제부문 수상 이후 한국 문학의 국제문학상 수상은 31건이지만, 한국문학변역원의 번역출판지원사업 예산은 지난 5년간 18여억, 올해 20억으로 제자리걸음 중이다.
번역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유통망에서 소외된 작은 서점, 지자체에 떠넘겨진 독서 문화 증진 사업, 관련 예산 삭감 등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쏟아지는 뉴스에서 우리의 빈약한 현실에 대한 지적이 넘친다. K문학의 시대는 그냥 열리는 것이 아니다. 노벨문학상 특수에 편승한 깜짝 이벤트나 생색내기 지원에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 문학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지속성·체계성·다양성을 갖춘 정책 마련과 예산 집행이 필요하다. 한국 문학의 새로운 미래를 마주한 가을. 한국 문학의 저변 확대가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형태로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쓰는 작가와 읽는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통영 행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토지 완역 프로젝트를 향한 독자들의 응원이었다. 쿠온이 도쿄 진보초에서 운영 중인 책거리 서점 단골이라는 한 독자는 〈토지〉 각 권의 발행주기까지 꿰고 있을 정도였다. 통영에 오기 전 〈토지〉 20권을 모두 읽었다는 그는 일본 독자들이 책을 같이 읽고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독서회나 연구 모임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렇게 든든한 독자 우군이 있어 작은 출판사의 무모한 도전이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에서 맹렬히 활동 중인 한국 출판사 대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저는 쓰는 사람이기 전에 읽는 사람이라고 느낍니다. 고단한 날에도 한 문단이라도 읽고 잠들어야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한강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작가, 번역가, 편집자, 교정자, 출판과 서점 관계자… 수많은 손길을 거쳐 한 권의 책이 온다. 누구든 그 책의 독자가 될 수 있다.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한국 문학의 발전과 함께할 우리의 독서를 응원한다.
오금아 콘텐츠관리팀 선임기자 chris@busan.com
2024-10-23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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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일개 브로커가 나라 흔들 수 있는 이유
명태균 씨가 공개한 김건희 여사의 ‘철없는 오빠’ 문자는 김 여사뿐만 아니라 명 씨의 ‘수준’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 오빠가 당연히 윤 대통령일 것이라는 충격파를 던진 뒤 대통령실의 ‘친오빠’ 해명이 나오자 뒤늦게 ‘맞다’며 여론을 쥐락펴락했다.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치로 높이면서 ‘나 건드리면 대통령이 다칠 것’임을 암시하는 문자를 교묘하게 골랐다. 대통령 내외가 자기 과시형 정치 브로커에게 단단히 코가 꿰인 형국이다.
국민들은 이전까지 경남 일대에서 지역 정치인들을 상대로 알음알음 활동하던 명 씨가 어떻게 대통령 내외에게 접근해 수시로 만나고, 영부인이 ‘완전 의지하는’ 관계가 됐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전부터 그를 알고 지내던 경남 지역 정치인들의 평가도 “위험한 인물” “전형적인 선수”와 “탁월한 정치적 식견” “도사 느낌”으로 갈린다. 명 씨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민주당은 바람을 일으키지 않느냐. 나는 산을 만든다. 아무리 바람이 세도 산 모양대로 간다”고 했다. 여론 흐름을 뒤바꿀 수 있는 선거 구도를 자유자재로 만든다는 것인데, 내로라하는 정치권 책사들도 감히 하지 못할 얘기다. 명 씨의 정치 감각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자의식 과잉에 허세가 심한 건 분명해 보인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의도 주변에서 명 씨 류의 인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정치 현상이라는 게 너무 많은 변수들과 시시각각 뒤바뀌는 상황 때문에 한 치 앞을 예측하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정치학자들도 “~할 경우”라며 단서 조항을 다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그럴 듯한 논리와 오묘한(?) 화법으로 복잡한 정치 현상들을 ‘일도양단’ 식으로 정리하고, 누구도 확신하기 어려운 미래를 단호하게 제시하는 인물들이 있다. 선거 때만 되면 정치권 인사들이 찾아 다니는 ‘용한 도사’들과 흡사해 보인다. 이런 확신론자와 회의론자가 논쟁하면 누가 이길지는 불 보듯 뻔하다. 후자에 가까운 나는 그런 확신의 언어들을 잘 믿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복기해보면 맞는 얘기만큼 틀린 얘기도 많았다는 게 20년 정치권 취재의 경험이기도 하다. 단적으로 명 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했던 김영선 전 의원은 후쿠시마 오염수 사태 당시 수산시장의 수족관 물을 먹는 기행 정도나 기억되는 지리멸렬한 의정 활동 끝에 이번 총선에서 ‘컷오프’ 됐다.
그러나 명 씨 같은 사람들에게 빈약한 ‘타율’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 들어맞은 ‘한 수’는 오롯이 자신의 공이고, 이를 끊임없이 확대재생해 자신의 브랜드로 포장한다. 선거 판세를 가를 묘책라는 게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대선과 같은 큰 선거에서 그런 일들은 특정인의 아이디어가 아닌 집단 사고의 산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명 씨가 자신이 한 것처럼 말하는 지난 대선 당시 ‘윤석열-안철수 후보 단일화’는 당시 캠프 대다수의 사람들이 승리를 위한 방책이라고 봤다.
명 씨가 ‘박사’ 대접을 받은 무기는 여론조사였다. “윤석열이 홍준표보다 2% 높게 나오게 만드이소” 등 명 씨가 맞춤형 여론조사를 했다는 정황들이 공개된 녹취록을 통해 드러났다. 특정 이념 성향이 과표집되는 여론조사의 문제점은 익히 알고 있는 바다. 그러나 공표도 못 하는 비공식 여론조사로 민심을 움직인다는 것도, 수많은 다른 조사들과 상반되는 ‘튀는’ 여론조사로 ‘밴드웨건’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나로서는 정치 소설에나 있음직한 얘기로 들린다. ‘맞춤형 여론조사’로 할 수 있는 일은 심지와 지력이 약한 소수의 사람들을 현혹하는 정도 아닐까. 그 중 한 사람이 불행하게도 김 여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윤 대통령의 2022년 대선 승리에서 어떤 결정적 한 방이 있었나? 오히려 이준석 대표를 내치려다 끌어안고, 안철수와의 단일화도 미루고 미루다 선거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게 되자 막판에 어렵사리 성사됐다. 초반 승기를 불필요한 헛발질 끝에 ‘0.73%P’ 차이로 겨우 지킨 게 지난 대선 결과 아니었나. 윤 대통령이 그 시간을 버텨낼 수 있었던 힘은 다른 데 있지 않다. 2013년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한 기개 있는 검사의 모습, 여기에 정권의 허물을 힘으로 누르려 한 전임 정권의 비상식적인 국정 운영에 분노한 민심이 공명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어떤 예지력을 지닌 특정 인물의 묘책이 주효했던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윤 대통령을 최악의 지지율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는 당면한 문제들은 이젠 너무 곪고 곪아 해법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껏 국민 다수의 생각과 배치됐던 주변의 현란한 묘수들과 사사로운 감정들을 걷어내면 오히려 해법이 간명해질 수 있다. 바로 자신을 대통령의 자리로 올린 ‘공정과 상식’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전창훈 서울정치부장 jch@busan.com
2024-10-2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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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바이오에탄올 딜레마
현재의 자동차 기름값보다 더 싼 선택지가 있다면 정부의 정책 방향도 그 쪽으로 가야 한다. 그 방안이 불법·탈법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바로 ‘바이오에탄올’ 얘기다.
바이오에탄올은 탄소저감 활동의 일환으로 전세계 60여개 국가에서 휘발유에 섞어쓰는 정책을 쓰면서 최근 뜨고있는 연료다. 아직 우리나라는 의무사항이 아닌데 정부의 정책방향이 소비자가 아닌 기업이 먼저라는 점에서 비난론이 나온다.
바이오에탄올은 휘발유에 섞는 비율에 따라 미국은 10%, 유럽에선 국가마다 5~10% 선에서 차등 적용하고 있다. 브라질에선 일찌감치 도입해 현재는 27%까지 혼합률을 높였다.
미국곡물협회 초청으로 최근 미국 4개 주의 옥수수 생산지부터 다양한 사용처까지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옥수수는 바이오에탄올의 주원료다. 미국은 막대한 양의 옥수수를 바탕으로 관련 산업이 발달하면서 ‘바이오에탄올의 교과서’ 같은 곳이 됐다. 농장에서 생산된 옥수수가 에탄올 공장을 거쳐 주유소와 바이오에탄올을 사용하는 레이싱경기 등으로 큰 시장이 형성돼 있다. 학계와 미국국립연구소 등도 “탄소중립에 문제점 많은 전기차보다는 바이오에탄올이 제격”이라며 관련 연구 보고서나 세미나로 힘을 싣고 있다.
실제 미국에선 바이오에탄올의 원료인 옥수수가 남아돌아 관련 산업 육성에 적극적이다. 현재 옥수수 재배면적이 8000만 에이커(약 32.3만㎢)에 달하고 바이오에탄올은 연간 150억갤런(1갤런은 약 3.79L) 가량 생산되고 있다.
이에 미국은 2000년대 중반 휘발유에 10%의 바이오에탄올을 의무적으로 혼합해 사용하도록 하는 E10 혼합의무화제도(RFS)를 도입했다. 하지만 한국은 바이오디젤과 항공유를 제외하고 아직 사용 의무화가 돼 있지 않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시장 상황이 다르다. 대형 정유사들이 내수는 물론이고 수출에서도 한몫을 하고 있고, 국내 자동차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현대차그룹도 전기차를 주력 시장으로 키우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정부가 바이오에탄올 도입에 적극 나서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바이오에탄올을 도입하기 위해 옥수수도 결국 석유처럼 수입해야 하는데 똑같은 것이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바이오에탄올은 석유보다 저렴해 결코 똑같지 않다고 한다.
미국 네브래스카주에서 가장 큰 바이오연료 주유회사 보셀만 엔터프라이즈를 운영하는 보셀만 회장은 바이오에탄올에 대해 예찬론을 폈다. “전기차는 석탄발전소에서 전력이 생산되기 때문에 친환경적이라 말할 수 없죠. 기존 내연기관이나 주유 설비를 활용하면서 가장 쉽고 빠르게 탄소중립을 실천할 수 있는 바이오에탄올이 가장 좋은 솔루션이라 생각합니다.”
이 회사가 운영하는 주유소의 주유기에는 일반 휘발유부터 바이오에탄올을 각각 10%, 15%, 85% 비율로 혼합한 ‘E10’, ‘E15’, ‘E85’가 표시돼 소비자들이 선택할 수 있다. 휘발유, 고급휘발유, 경유로 단순하게 표시된 한국과는 사뭇 다른 주유소 풍경이다. 1갤런당 가격을 살펴보면 바이오에탄올을 혼합하지 않은 일반 휘발유는 3.639달러에 판매되고 있는 반면, E10은 3.089달러, E15는 3.039달러, E85는 2.489달러에 판매된다. 바이오에탄올을 많이 주입할수록 판매가가 낮아지는 셈이다.
한국에도 바이오에탄올이 도입되면 미국이나 브라질처럼 저렴하게 주유할 수 있을까. 일단 운반비가 원가에 추가될 수 있어 이 나라들보다는 다소 비용이 높아질 수 있다.
이에 미국곡물협회 한 임원은 “일본처럼 에탄올을 직접 수입하는 방법도 있지만 한국의 경우 바이오에탄올 주원료인 옥수수를 수입해 직접 가공하면 에너지와 식량 안보를 함께 챙길 수 있다”고 했다.
바이오에탄올의 또다른 장점으로는 옥탄가가 높다는 점이다. 옥탄가가 높은 가솔린일수록 이상폭발을 일으키지 않고 잘 연소하기 때문에 고급 휘발유로 평가된다. 대표적인 미국 자동차 경주대회인 나스카에선 바이오에탄올 15% 혼합 휘발유를 14년째 사용중이다.
최근 부산과 인천의 아파트 지하에서 전기차 화재로 인해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전기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면서 계약 취소도 잇따르고 있다고 한다. 전기차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것도 바이오에탄올 도입 여론에 긍정적이다. 이를 시범적으로 도입해서 국민들이 주유시 기름값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4-10-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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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한강의 기적' 그 너머
“유튜브 다음은 뭐지? 다시 종이책이 아닐까?” 2019년 서울국제도서전 강연에서 한강 작가가 했던 말이다. 그가 했던 말이 정말 현실이 됐구나 싶을 만큼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매년 독서 인구가 줄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만 듣다가 한강의 책이 없어서 못 판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이상할 정도다.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이다. 한편으론 씁쓸한 생각도 든다. 평소 우리 국민이 그의 작품을 포함한 한국 문학과 책을 이만큼 아끼고 사랑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수년 전 영국 여행에서 런던의 서점을 방문했다가 한강 작가의 영어 책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덜컥 구매해 온 적이 있다. 데버러 스미스가 번역한 〈The White Book(흰)〉이었다. 이 책을 포함해 한강의 책을 여럿 소장하고 있지만, 기자 역시 완독했다 할 수 있는 건 〈채식주의자〉 정도다. 〈소년이 온다〉는 사 놓고도 절반밖에 읽어내지 못했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선물 받은 뒤 몇 달째 펼쳐 보지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5·18이나 4·3 같은 현대사의 아픔을 깊이 다루고 있는 그의 작품은 사실 가볍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국가적 경사는 온 국민이 그의 작품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우리나라뿐이랴. 해외에서도 한강의 책은 품절 상태로, 한글 책마저 동날 정도라고 한다. 지난 13일 〈부산일보〉와 인터뷰 한 한 20대는 “이번 주말 핫플레이스 방문 대신 한강 작가 책을 읽기로 했다”고 한다. 한동안 시내 카페에선 한강의 책을 읽는 사람을 자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유행처럼 그의 책을 들고 다니는 이들을 거리에서 심심찮게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잖아도 2030세대들에겐 ‘텍스트 힙’이 유행하던 참이다. 텍스트 힙은 글자를 뜻하는 ‘텍스트(Text)’와 ‘멋있는’이라는 뜻의 ‘힙(Hip)’을 합친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젊은 세대 사이에선 인쇄된 활자를 읽는 행위 자체가 특별해 보이는 모양이다. SNS에서는 ‘#북스타그램’ 혹은 ‘#책스타그램’ 같은 해시태그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책 읽는 사진을 공유하거나 독서 중 발견한 좋은 구절을 찍어 올리는 사람도 많다. 한강 작가의 수상 후엔 그의 대표작을 필사해 공유하는 챌린지도 생겨났다고 한다. 또 독립서점을 방문해 인증하는 등 독서하는 자신의 ‘힙’함을 알리는 방법도 다양하다.
그것이 과시욕이든 지적 허영이든 젊은 세대 사이에서 독서 열풍이 일고 있다는 현상 자체가 긍정적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문해력 논란이 일고 있는 세상 아닌가. 일부에서는 요즘 애들이 책은 안 읽고 유튜브 동영상과 숏폼 콘텐츠만 봐서 문제라고 혀를 끌끌 차지만, 기자는 문해력 논란이 그렇게 단순하게 볼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루한 한자어나 행정 용어가 시대에 맞게 바뀔 필요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근 논란이 된 ‘우천 시’나 ‘중식’ 같은 단어는 ‘비 올 때’나 ‘점심’처럼 자주 쓰는 말로 얼마든지 대체해 쓸 수도 있는 문제다. 같은 의미로 젊은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려면 ‘독서하는 사람이 멋지다’는 말보단 ‘책 읽는 사람이 힙하다’는 말이 당연히 더 효과적일 테다.
작가들이 고르고 골라 썼을 어떤 단어를 책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됐을 때의 즐거움, 그 단어가 갖고 있는 정확한 뜻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 곱씹어 보는 보람 같은 것을 맛본 이라면 책 읽기를 싫어할 수가 없다. 그 과정에서 어휘력도, 문해력도 자연스럽게 키워진다. 출간한 지 26년 된 양귀자의 〈모순〉이 베스트셀러 목록에 등장하는 등 ‘역주행’ 하고 있다는 소식에 뒤늦게 책을 구해 읽다가 기자 역시 그때 그 시절 소설에서 뜻을 제대로 알 수 없는 한자어 하나를 만났다. 그 단어가 뭐였던가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검색창에 미지의 단어를 입력해 그 의미를 알게 됐을 때의 흡족함만큼은 잊을 수가 없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불러온 서점가와 출판계의 행복한 비명이 한동안 계속되면 좋겠다. 간만에 불어온 국민적 독서 열풍도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지금 필요한 건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와 같은 예능 프로그램의 재등장일지도 모른다는 어느 후배의 말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강의 기적’을 이어가고 싶은 오늘이다. 더불어 다시 돌아온 종이책의 인기, 활자 읽기 트렌드가 신문으로까지 번지기를 바라 본다. ‘신문 읽는 사람이 힙하다’고 하는 날도 조만간 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자영 사회부 차장 2young@busan.com
2024-10-14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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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尹 동반자는 ‘교섭단체’ 아닌 ‘정당’이다
정당은 정치적으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인 결사체로 정권을 잡는 것이 지상목표이다.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입법부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해야 정국을 주도할 수 있고, 집권에 유리하기 때문에 국회의원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느냐가 정당의 실질적인 힘과 비례한다. 더불어민주당이 요즘 국회에서 무소불위의 입법권을 휘두르고 있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정당의 본질을 국회의원으로 동일시하는 인식이 강하고, 실제로 국회법·정당법·선거법 등 정치관계법에서는 국회의원 숫자를 기준으로 수많은 인센티브를 준다. 정당에 주어지는 국고보조금 규모는 소속 국회의원 의석수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다.
공직선거에서 후보자의 기호도 국회의원 의석순으로 매겨진다. 심지어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의 지지율이 아무리 높아도 자신이 소속된 정당의 국회의원 숫자가 적으면 기호는 뒤로 밀린다. 국회법 상의 교섭단체(우리나라의 경우 20명 이상)가 되면, 국고보조금을 비롯해 정책연구위원·입법지원비 등을 받을 수 있다. 상임위원장 배분에 참여할 수 있고, 모든 상임위에 간사를 둘 수 있어 쟁점법안을 다룰 때 강한 교섭권을 갖게 된다.
그렇다고 정당이 꼭 국회의원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금배지를 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국의 지역구를 책임지는 원외 위원장이 있고, 그 주변에서 책임당원(또는 권리당원)들이 주력부대를 형성한다. 또 수백만 명의 일반 당원(더불어민주당 480만 명, 국민의힘 410만 명)이 모세혈관처럼 여론을 형성하고 각종 선거에서 표를 이끌어낸다.
정당의 중요한 동력이 국회의원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집권할 수 없는 이유다. 역대 대선에서 소수정당이 승리한 경우가 적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국민회의는 1996년 총선에서 불과 79석을 얻는데 그쳤으나, 이듬해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당선시키고 정권 교체를 이뤘다.
2007년 대선 때 한나라당은 원내 제2당이었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승리했고, 2022년에는 국민의힘 원내 의석이 100석을 겨우 넘겼지만 윤석열 정권을 탄생시켰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일 여당의 원내지도부를 용산 대통령실로 초청해 만찬을 함께 했다. 추경호 원내대표를 비롯한 원내부대표단과 당 소속 국회 상임위원장 및 간사들이 대상이었다. 한동훈 대표는 빠졌다. 왜 그랬는지는 정치 문외한이라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날 원내 지도부 만찬에서는 지난달 24일 당 지도부 초청만찬 때보다 훨씬 분위기가 좋았다고 한다.
당 지도부 만찬 때는 한 대표를 비롯해 아무도 인사말을 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번에는 추 원내대표, 김상훈 정책위의장, 국회 상임위원장들이 돌아가며 발언했다. 한 대표와의 만찬은 1시간 30분 만에 끝났지만, 원내지도부 만찬은 2시간 15분으로 45분이나 더 길었다.
이날 만찬은 추 원내대표가 국정감사를 앞두고 의원들을 격려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대통령실에 제안해 이뤄졌다고 한다. 원내지도부를 만나 고무된 윤 대통령은 “우리는 숫자는 적지만 일당백의 각오로 임하자”고 독려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이 일당백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일반 당원들은 물론 수많은 지지층의 힘이 더해져야 한다. 단순히 여당 국회의원들만으로 거대 야당을 이길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들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여론과 그런 분위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당원들의 열망이 한데 모였을 때 여당의 국회의원들도 비록 소수이지만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국감을 앞두고 있다고 하지만 전체 당원과 보수 지지층을 아우를 수 있는 당 대표를 제외시킨 것은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한 대표는 지난 7월 전당대회 때 당원투표(80%)와 국민여론조사(20%)를 합해 62.8%의 압도적 지지율로 당선됐다. 아무리 미워도 당원과 지지층을 아우를 수 있는 당의 중심임에는 틀림없다.
결국 윤 대통령은 자신의 우군을 국민의힘이라는 ‘대중 정당’이 아닌 국회법 상의 ‘교섭단체’로 축소시키는 우를 범한 것이다. 요즘 윤 대통령 주변에는 자신의 친정인 검찰, 임명권을 행사한 행정부 장차관, 소수의 친윤(친윤석열)계 정치인들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윤 대통령이 자신과 임기 이후까지 함께 가야할 동반자는 국회의원들의 집단인 ‘교섭단체’가 아니라 당원과 지지층을 모두 껴안고 있는 ‘정당’이라는 점을 상기했으면 한다.
2024-10-0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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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서울시장이 지역균형발전 외치는 나라
초등학생 딸아이와 세계 국가별 수도 이름 맞히기 놀이를 하다보면 늘상 헷갈리는 나라들이 있다. 호주 수도하면 시드니부터 떠오르지만 캔버라가 맞고, 캐나다 역시 올림픽을 치른 몬트리올이 먼저 입밖으로 튀어나오지만 오타와가 수도다. 브라질 수도는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가 아니라 브라질리아고, 가까운 베트남도 경제적으로 발달한 호찌민이 아닌 하노이를 수도로 두고 있다. 이들 나라는 입법, 사법, 행정, 경제, 교육, 문화 기능 등을 주요 도시별로 적절히 분산하고 있다. 수도권 과밀 해소와 국가균형발전을 위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다.
미국만 해도 정치·행정의 중심인 국가 수도는 워싱턴DC지만, 인구 밀집도가 가장 높고 월스트리트와 브로드웨이를 보유한 뉴욕이 ‘경제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는 구글, 페이스북, 애플 등 세계적인 빅테크 기업들의 본사가 밀집한 실리콘밸리가 있어 ‘글로벌 혁신 수도’로 불린다. 일본은 2014년부터 ‘국토 그랜드 디자인 2050’ 계획을 수립하고, 도쿄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과 나고야 중심의 중부권, 오사카 중심의 관서권을 ‘3대 메가시티’로 육성하고 있다. 중국도 상하이, 베이징, 충칭, 광저우, 우한 등 인구 1000만 명이 넘는 메가시티를 15곳이나 보유하고 있다.
반면 외국인들에게 대한민국의 수도를 물었을 때 서울 외에 다른 도시를 거론할 이들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다. 한국은 정치 경제 문화 외교 교육 의료에 하다못해 스포츠나 엔터테인먼트까지 모든 국가 기능과 인력, 자원이 철저히 서울 한 곳, 넓게 보면 수도권에 집중된 ‘서울공화국’이다.
2022년 기준 대한민국 인구의 50.7%, GDP(국내총생산)의 52.5%, 일자리의 58.5%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고 한다. 한국의 GDP 수도권 집중도는 일본(24.3%)의 2배, 미국(5.1%)의 10배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이는 명색이 대한민국 제2도시라는 부산과의 비교에서 보다 확연하게 드러난다. 부산의 인구는 327만 명으로 서울(935만 명)의 3분의 1 수준이다. 부산 GRDP(지역내총생산)는 113조 원으로 서울(528조 원)의 4분의 1에도 못 미친다. 매출액 기준으로 전국 100대 기업에 속하는 부산 기업은 한 곳도 없고, 그나마 1000대 기업에 28개가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한수 이남 최고 명문이라는 부산대가 서울의 10위권 대학과 비교해도 위상이 흔들리는 실정이다.
행정 수도를 표방하며 2012년 세종시가 출범한 지 12년이 지났다. 그 사이 행정기관 3분의 2 이상이 이전됐고, 40만 명에 육박하는 인구도 갖췄다. 하지만 수도권 과밀화 해소와 국가균형발전에 관해서는 눈에 띄는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울경의 시각에서 볼 때는 수도권 영역의 확장으로 여겨질 뿐이다. 편중이라는 표현으로는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한국은 철저하게 한 쪽으로만 기울어진 ‘기형 국가’다.
이런 가운데 국가균형발전 측면에서 대척점에 있다고 할 만한 부산과 서울, 양대 도시 수장의 대한민국 발전 해법을 들어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돼 큰 관심을 끌었다. 지난 8월 한국정치학회가 부산에서 개최한 하계 학술대회에서 박형준 부산시장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한국 미래 지도자의 길’이라는 주제로 특별 대담을 가졌다. 박 시장은 압축성장 이면에 수도권 일극주의를 초래한 옛 ‘발전국가’ 모델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할 수 없다며 수도권과 지방이 공생·발전하는 ‘공진국가’ 모델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이날 특히 눈길을 잡은 것은 오 시장의 지방 거점 대한민국 개조 모델이다. 오 시장은 전국을 수도권, 영남권, 충청권, 호남권 등 4개 권역으로 나누고 각각을 하나의 강소국가로 키워야 한다며 이른바 ‘4개 강소국론’을 설파했다. 중앙정부는 외교와 안보만 맡고 나머지 권한은 지자체에 넘기는 파격적인 권한 이양도 필수라고 강조했다.
오 시장의 이 같은 철학이 평소의 지론인지, 혹은 ‘대권 플랜’의 일환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수도권 올인 정책’의 최대 수혜자라 할 수 있는 서울시의 수장이 망국적인 수도권 일극주의 타파와 지역균형발전을 부르짖은 것은 대한민국 국토 비대칭 발전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한 장면이다.
부산과 서울의 라이벌은 국내 도시가 아닌 뉴욕, 도쿄, 싱가포르, 두바이와 같은 글로벌 도시다. 한정된 자원을 계속 서울에 쏟아부으면 한계효용은 감소한다. 서울 역시 ‘동네 여포’로 머물 뿐이다. 우리나라는 ‘잠재 성장력 저하’와 ‘초저출생’ ‘수도권과 비수도권 간 사회적 격차 심화’라는 3대 위기에 발목이 잡혀 있다. 대한민국이 새로운 성장 엔진을 만들려면 제2도시 부산이 서울 못지않은 혁신거점이 돼 글로벌 허브도시로 우뚝서야 한다. 오 시장의 냉철한 자가진단이 부산 사람 입장에서 반가운 이유다.
2024-10-0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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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아! 가을이다
드디어 가을이다.
지칠 줄 모르던 뜨거운 햇살 속 폭염과 열대야가 결국 물러났다. 낮의 햇살은 아직도 따갑지만, 아침저녁 부는 바람이 제법 시원하다.
지난여름은 정말 잔인했다. 밤낮 식지 않는 더위는 인간의 인내력을 테스트하는 듯했다. 삼복이 지나도, 추석이 지나도 폭염은 계속됐다. 기록적인 폭우로 전국이 물난리를 겪고 나서야 겨우 여름이 물러났다. 이 폭우를 기상청은 ‘200년 만에 한 번 내릴 만한 비’라고 했다.
올여름 충격적인 더위를 놓고 ‘이제 한국도 동남아 날씨가 됐다’ ‘계절의 개념을 다시 정리하자’는 말이 나온다. 이 가운데 ‘올해 여름이 앞으로 맞을 최고 시원한 여름일 수도 있다’는 말이 가장 충격적이다. 지구온난화로 점차 여름이 더워질 것이라는 경고다. 앞으로 이 땅에서 살아갈 자녀와 그 자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지독한 무더위를 모두 견뎌냈다. 지구와 우주의 움직임에 따른 온도의 변화를 속절없이 겪어야 하는 나약한 인간. 하지만 이를 이겨낸 모든 분에게 안부를 묻고 위로를 전하고 싶다. 주변 사람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다.
혹독한 여름을 간신히 견뎌낸 몸과 마음에 가을이 스며든다. 높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은 우리를 되돌아보게 한다. 더위와 싸우느라 지친 우리에게 주변 꽃을 돌아보고 솜털 구름이 멋진 하늘을 바라보게 한다.
하지만 주변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 다들 더위뿐만 아니라 힘든 세상살이에 녹초가 된 모습이다. 의대 증원을 둘러싼 의정 갈등은 끝이 없다. 자영업자 4명 중 3명은 수익이 월 100만 원에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특검과 거부권으로 허송세월하고 있다. 누구를 위한 나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부산은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청년들은 일과 돈을 찾아서 수도권으로 떠나고, 아파트 미분양 물량은 점점 늘어가고 있다. 지역 재개발 사업은 수익성을 담보하지 못해 지지부진하다. 제대로 된 대기업 하나 없는 부산은 ‘돌파구가 과연 있을까’는 푸념과 체념의 가운데쯤에 놓여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도전과 열정의 마음보다는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방관과 허무의 마음을 갖게 된다. 삶의 보람과 기쁨보다는 분노와 허전함이 커지고 있다.
그렇지만 가을이다. 단풍의 시간이고 낙엽의 시간이다. 바람은 말없이 지나간다. 익어가는 것은 다시 비우고 물러가는 것임을 아는 듯. 가을은 세월의 흐름을 절절히 느끼게 한다. 세월의 흐름을 느끼는 시간이야말로 인생을 사는 시간이다. 내가 존재하는 순간이다.
현실 속에서 허덕이지만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지독한 계절과 아픈 현실 속에서 나를 지키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이 같은 현실을 함께 버텨온 사람에 대한 상호 의지와 믿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를 위해 올가을에는 ‘감사의 마음’을 갖기로 했다. 그동안 나의 잘못으로 지키지 못한 약속은 없었는가? 무심코 뱉은 말로 스쳐 간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았는가? 지금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분에 넘친 은혜를 입었다. 염치없이 신세를 진 분들이 수없이 많다. 이 가을날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폭염의 잔인함이 어느새 끝나고 사람과 자연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이 뒤숭숭한 세상에 얼마나 고마운 선물인가.
이렇게 청명한 가을하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출근길 햇살과 맑은 하늘을 바라보니 바람까지 싱그러울 수가 없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한여름 소나기 쏟아져도 굳세게 버틴 꽃들과 지난겨울 눈보라에도 우뚝 서 있는 나무들같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저 홀로 설 수 있을까.”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율, 그리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쳐다보게 만드는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가사다. 은행잎, 소나기, 눈보라, 나무, 하늘 모두 아름답지만 ‘저 멀리 가고’ ‘오래 남지 않으며’ ‘홀로 설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힘들게 찾아왔지만 오래 가지 않을 가을날. 새로운 만남에 설레고 지금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에 감사의 마음을 가지자. 다시 한번 나를 알거나 앞으로 알아갈 모든 이들과 모든 것들에 뒤늦게 또는 미리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강성할 독자여론부장 shgang@busan.com
2024-10-02 [17: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