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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면세점'이 '본업'된 인천공항
인천공항이 5단계 확장을 주장하고 나서면서 가덕신공항 건설에 미칠 영향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인천공항 5단계 확장은 가덕신공항과 예산 배분과 우선 순위, 노선 확장 등에서 직접 경쟁 관계에 놓일 가능성이 높다. 이미 4단계 확장까지 마무리한 인천공항은 외국인 유입 확대 등 ‘허브공항’ 역할을 위해 5단계 확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인천공항은 정말 허브공항 역할을 하고 있을까.
인천공항은 2024년 4단계 확장 사업을 완료, 연간 수용 능력을 1억 600만 명으로 확대했다. 지난해 인천공항 국제선 여객은 7066만 9246명으로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7057만 8050명)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인천공항 5단계 확장을 추진하는 인천공항공사 등은 2033년 공항 시설이 또다시 포화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천공항 5단계 확장 사업은 제5활주로와 제3여객터미널과 화물터미널을 신규로 건설하는 내용이다. 6조 원이 투입되는 5단계 확장이 완료되면 인천공항은 연간 여객 1억 3000만 명을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인천공항 5단계 사업이 추진되면 2030년 가덕신공항 개항과 맞물려 신공항의 항공사, 국제선 노선 유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이 높다.
인천공항이 ‘허브공항’ 역할을 강조하며 ‘덩치 키우기’를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외국인 환승 등 허브공항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토교통부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국민의힘 김도읍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인천공항의 환승률은 계속 하락하고 있다. 2021년 16.7%였던 인천공항 환승률은 2022년 15.6%, 2023년 12.8%, 2024년 11.6%로 떨어졌고 올해 상반기에는 11.2%에 그쳤다.
인천공항이 환승률 감소에도 ‘수요 증가’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국제선 노선 몰아주기도 있다. 최근 김해공항을 비롯한 지방공항의 국제선 수요가 늘고 있지만 항공사 국제선 노선은 인천공항에 집중돼 있다. 국토교통부 항공통계에 따르면 올 들어 8월까지 국내 공항의 국제선 운항 가운데 77%가 인천공항에 집중됐다.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75%에서 오히려 늘어난 수치다.
인천공항이 5단계 확장 사업의 근거로 제시한 국제선 수요가 과장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7월 국토부 장관후보자 인사청문회 당시 김도읍 의원은 인천공항의 수요에 대해 “정부의 제6차 공항개발종합계획보다 시기별로 300만~500만 명가량 더 높게 검토했다”고 비판했다.
인천공항의 수익 구조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장거리 노선을 사실상 독점한 인천공항은 출국자의 면세점 이용과 연계된 ‘땅장사’로 주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최근 10년간 인천공항 수익 가운데 착륙료, 탑승료 등 ‘항공 수익’은 20% 안팎에 머물러 있다. 반면 상업시설 사용료, 임대료 등 ‘비항공 수익’은 70% 안팎으로 높다.
인천공항의 비항공 수익 비율은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81%를 기록했다. 코로나19로 공항 이용객이 줄어들자 60%대로 줄었던 비항공 수익 비율은 이후 다시 상승해 지난해에는 77%를 기록했다. 인천공항의 경우 전체 수익 가운데 ‘상업시설 사용료’ 비율이 50~60%를 차지한다. 사실상 ‘면세점 장사’로 공항을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 때문에 인천공항이 5단계 확장에 나선다고 해도 결국 제3터미널 건설로 면세점을 확대하는 ‘땅장사’를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인천공항의 수익구조는 김해공항과 비교된다. 김해공항은 항공 수익이 전체 수익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0%대이고 비항공 수익 비율은 60%대다. 항공 수익 비율이 인천공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김해공항 수익에서 비항공수익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10년간 코로나19 기간을 제외하고 61~63%로 유지되고 있다. 김해공항은 ‘운항금지시간’에도 불구하고 국제선 수요가 꾸준히 늘어나면서 슬롯(항공기 이착륙 횟수) 이용률도 80~90%대를 유지하고 있다.
김해공항은 늘어나는 국제선 수요 등에 힘입어 매년 흑자를 보고 있지만 인천공항과 달리 상당 부분 수익이 한국공항공사 산하 적자 공항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이런 실정에도 일부 중앙 언론은 인천공항의 ‘수익성’만 높이 평가하면서 전체 지방공항을 ‘고추 말리는 공항’으로 매도하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가덕신공항이 개항하고 인천공항이 5단계 확장을 주장하는 2030년대에는 지역별 항공 수요에 변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이 때문에 정부가 항공 소비자의 편익과 직항 노선 확대에 중심을 둔 공항 정책을 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2025-10-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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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1200만 관중 신기록… 챔피언은 누가 될까
국내 프로 스포츠 사상 최초로 단일 시즌 1200만 관중을 돌파한 올해 프로야구가 진정한 챔피언을 가리는 포스트시즌에 접어들었다.
2025 KBO리그는 관중 관련 기록을 경신한 한 해였다. 역대 최초 개막 2연전 전 구장 매진 달성을 시작으로, 매 100만 단위 관중을 모두 역대 최소 경기로 달성했다. 또 지난 9월 5일에는 지난해 작성한 단일 시즌 최다 관중 기록(1088만 7705명)을 넘어서며, 최종 관중 1231만 2519명을 기록했다.
전체 경기 수의 약 46%인 331경기가 매진됐다. 역대 최초로 160만 관중을 돌파한 삼성을 비롯해 LG, 두산, KT, SSG, 롯데, 한화, NC, 키움 등 9개 구단이 한 시즌 최다 관중 기록을 경신했다.
이제 남은 관심사는 단 하나. 올해 대망의 우승팀이 누가 될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정규시즌을 1위로 마친 LG는 2년 만에 통합 우승에 도전한다. LG의 대항마로 가장 먼저 꼽히는 팀은 아쉽게 정규시즌 우승을 놓친 2위 한화다. 또 3위 자리를 꿰찬 SSG와 4위 삼성이 막판 상승세를 몰아 ‘이변의 주인공’을 노리고 있다.
이번 포스트시즌의 관전포인트는 LG가 통합 우승을 꿈꾸는 가운데 이를 저지하려는 한화와 SSG, 삼성의 도전으로 압축된다. 역대 포스트시즌을 살펴보면 우승 가능성이 가장 높은 팀은 역시 한국시리즈에 먼저 도달한 LG다. 전후기 리그와 양대 리그 시절을 제외하고 정규시즌 우승팀의 통합 우승 확률은 85.3%(35회 중 29회)에 달한다. 특히 정규시즌 우승팀은 2019년부터 6년 연속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다.
정규시즌 우승팀이 힘을 비축한 상태에서 난관을 뚫고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온 팀과 경쟁한다는 건 매우 큰 이점이다. LG는 후반기 막판 다소 삐끗했지만, 정규시즌에서 가장 꾸준한 성적을 냈다. 시즌 내내 1~2위를 달리다가 3위에 딱 하루 미끄러졌을 뿐, 지난 8월 7일 이후 선두 자리를 단 한 번도 뺏기지 않았다.
LG는 팀 타율 1위(0.278)와 평균자책점 3위(3.79)로 투타가 매우 안정돼 있다. 통합 우승을 달성한 2023년과 비교해 불펜이 다소 약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요니 치리노스-앤더스 톨허스트-임찬규-손주영으로 이어지는 선발진은 2년 전보다 훨씬 강하다. 또한 이미 우승을 맛보는 등 큰 경기 경험이 많으면서 결정적 순간에 맹활약을 해줄 선수들도 즐비하다.
이에 맞서는 한화는 강력한 ‘원투 펀치’ 코디 폰세와 라이언 와이스를 내세워 한국시리즈 챔피언을 노리고 있다. 정규시즌 우승을 놓쳐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사례도 다섯 번이나 된다. 2015년부터 시작한 10구단 체제로 범위를 좁히면 2015년 두산과 2018년 SK(현 SSG)가 각각 정규시즌 우승팀 삼성, 두산을 꺾고 한국시리즈를 제패한 바 있다.
특히 한화는 정규시즌에서 LG를 상대로 7승 1무 8패를 기록하며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정규시즌 마지막 맞대결이었던 지난달 대전 3연전에서도 2승1패로 우위를 보였다. 무려 7년 만에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은 한화는 내친김에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넘보고 있다. 한화의 한국시리즈 우승은 양대리그 시절이었던 1999년이 유일하다. 1000승 감독 중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우승 경력이 없던 김경문 감독도, 이번 가을야구에서는 그 한을 풀겠다는 각오다.
한화의 강점은 역시 강력한 선발 야구다. KBO리그 최초 ‘200탈삼진 듀오’ 폰세와 와이스를 필두로 류현진, 문동주가 선발진에 버티고 있다. 한화의 선발 평균자책점은 3.51로 리그 1위다. 시즌 막판 뜨거운 타격감을 보인 노시환을 비롯해 루이스 리베라토, 채은성, 문현빈, 이도윤 등 타선도 막강하다.
다만 가을야구 경험 부족은 한화의 아킬레스건이다. 한화는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이었던 2018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와일드카드 결정전 승자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에 1승 3패로 밀려 조기 탈락한 바 있다.
2022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SSG는 기적 같은 우승을 꿈꾸고 있다. ‘지키는 야구’가 팀 컬러인 SSG는 10개 구단 통틀어 가장 견고한 불펜(평균자책점 3.36)을 자랑한다. ‘홀드왕’ 노경은(35홀드)과 이로운(33홀드), 김민(22홀드), 그리고 마무리 투수 조병현(30세이브)으로 구성된 필승조가 강력하다.
삼성은 KBO리그 최초 50홈런-150타점 기록을 달성한 르윈 디아즈를 앞세워 파란을 일으키려 한다. 정규시즌 1~2위가 아닌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도 세 차례나 있었던 만큼 SSG와 삼성에게도 희망은 있다. 하지만 두 팀 모두 최종 승자가 되더라도 투수진의 체력 소모가 한화와의 플레이오프전에서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변현철 문화부 독자여론팀장 byunhc@busan.com
2025-10-13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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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해양수도 부산, 해양부시장이 필요하다
“부산에 분명 기회가 왔고, 실행해 옮겨야 할 타이밍인데 위원회 만들고 계획만 세우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입니다. 계획이 없는 게 아니에요. 아이디어가 없는 게 아니에요. 전문가들이 오랜 기간 공들여 만든 계획들이 다 있어요. 계획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실행할 사람이 없는 거죠. 더욱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어야 할 때입니다.”
“해양수산부가 부산에 온다고 해도 엄밀히 말해 해수부나 유관기관들은 전국구거든요. 해수부나 기관들이 직접 부산을 위해 뭘 해줄 수는 없어요. 부산시가 알아서 잘 활용하고 부산 것으로 만들어야 부산이 진짜 해양수도가 되는 거죠.”
부산이 진정한 해양수도로 거듭나려면 부산시 내에 ‘해양부시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부산이 해양수도로 도약할 수 있는 골든 타임을 맞이한 만큼, 해양 관련 전문성과 결정 권한이 있는 컨트롤 타워가 필요하다는 취지다.
부산이 가진 하드웨어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세계 7위 컨테이너 항만, 세계 2위 환적 허브라는 물리적 위용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해양 관련 기능들이 부산을 중심으로 집적돼 있어 부산이 가진 여건을 부러워하는 나라와 도시들도 많다. 하지만 부산항이 세계적인 물동량을 처리하며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사이, 정작 그 화물과 선박에 얽힌 부가가치는 다른 도시나 해외로 고스란히 흘러가고 있다. 예컨대 해양금융의 주도권은 여전히 서울과 해외에 있고, 해양보험이나 법률 서비스 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열심히 땀 흘려 화물을 나르고 있지만, 그 과실은 다른 도시들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부산이 실속을 차리지 못하는 이유로 부산이 가진 훌륭한 하드웨어를 구동할 강력한 운영체제, 즉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점을 드는 이들이 많다. ‘부산시 고위직에 얘기했더니 한 귀로 흘리더라. 몇 번 얘기했는데 해양엔 전혀 관심이 없더라’며 아예 입을 닫아버린 전문가도 있다.
하물며 민간기업들도 해수부 이전에 맞춰 발 빠르게 해양 관련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키우는 판에 부산시는 ‘해양농수산국’ 틀에 아직 갇혀 있다. 해양산업은 항만물류, 해운, 해양금융, 해양관광, 해양바이오, 해양에너지, 친환경 선박기술, 스마트 항만 등 도시의 경제, 산업, 일자리와 직결된 거대 산업이다. 항만 재개발은 도시 계획과, 해양금융은 금융 정책과, 해양 스타트업 육성은 창업 지원과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국 단위 조직은 다른 실·국과의 수평적 협력을 이끌어내고, 해수부, 부산항만공사 등 유관기관을 아우르는 수직적 조율을 해내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부서 칸막이에 막혀 시너지 효과는 나지 않고, 좋은 계획들은 서랍 속에 잠들게 된다.
해양부시장은 이 칸막이를 허물고 흩어진 역량을 한데 모으는 ‘사령관’이 돼야 한다. 부시장의 책상에는 부산의 미래 먹거리가 될 해양 신산업 육성 로드맵이, 머릿속에는 글로벌 투자 자본을 유치할 청사진이 있어야 한다. 때로는 부산항만공사와 머리를 맞대고, 때로는 중앙정부를 상대로 규제 혁신을 설득하며, 부산의 해양 자산을 어떻게 ‘돈’과 ‘일자리’로 바꿀 것인지를 현장에서 지휘하고 투자를 이끌어내야 한다. 싱가포르, 로테르담 등 세계 유수 항만도시들과 교류하고, 국제 해양박람회 등을 유치하며 해양수도 부산의 브랜드 가치도 높여야 한다. 부산의 해양산업, 인재, 재정, 국제협력까지 지원할 수 있는 해양수도특별법 제정도 이끌어내야 한다.
국장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느냐 반문할 수 있겠지만, 순환보직으로 수시로 바뀌는 국장이 해양수도 부산을 위한 전략을 실행하기에는 한계가 많다. 조직 규모나 예산도 턱없이 적다.
이는 결코 자리 하나 늘리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부산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투자’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시는 ‘항만·경제 부시장’을 중심으로 항만공사, 정부, 기업과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세계 2위 해양도시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부산도 해양부시장을 중심으로 단순 물류 허브를 넘어 해양금융, 연구개발, 법률 서비스가 어우러진 고부가가치 해양산업 클러스터로 도약해야 한다. 이는 단순 항구도시와 해양수도를 가르는 결정적 차이다.
해수부, 해양 관련 기관들의 부산 이전은 그저 ‘손님맞이’로 끝날 이벤트가 아니다. 부산의 미래 성장동력을 해양에서 찾을 수 있는 다시 오기 힘든 ‘골든 타임’이다.
“한강이 바다를 이길 수 있겠나! 부산 함 놀러 온나.” 한 달 전 제59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서울 휘문고를 꺾고 우승컵을 거머쥔 경남고 야구부 선수가 환희에 차 방방뛰며 한 말이다. 부산 시민들은 이 정도로까지 벅차 있다. 부산시도 이 정도는 돼야 해양수도 타이틀을 가져갈 자격이 있다.
2025-10-0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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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부산 로컬의 맛, 바다를 건너다
일본 후쿠오카의 작은 식당에서 매일 김을 굽는 연기가 퍼진다. 식당 안에서는 20대 일본 여성들이 라면 국물에 소주잔을 부딪친다. 한국 드라마에서 보던 장면을 직접 실현하고 싶어 찾아온 손님들이다. 직접 참기름을 짜고 김을 굽는 퍼포먼스로 충무김밥을 내놓는 ‘바비킴’은 부산 기업 보리에가 만든 새로운 분식 브랜드다. 부산 사람에게는 흔하디흔한 분식 메뉴지만, 일본 젊은 세대에게는 한국 문화를 체험하는 특별한 무대가 된다. 분식이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한류 콘텐츠와 맞닿은 문화적 경험으로 소비되는 순간이다.
바비킴은 후쿠오카에서 첫발을 뗀 뒤 현지 호응을 바탕으로 일본 전역 확장과 미국 진출을 준비 중이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해외 경험을 토대로 다시 한국 시장에 새로운 방식으로 도전하겠다는 구상이다. 한국에서 이미 수없이 소비되던 분식이 해외에서 ‘경험’이라는 가치로 재해석되고, 그 성공이 다시 국내 시장으로 역류하는 흐름이다. 작은 매장이지만 글로벌 도전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부산의 전통 어묵 브랜드 삼진어묵은 또 다른 길에서 세계화를 시도하고 있다. 1953년 자갈치시장에서 출발한 삼진어묵은 이미 부산과 전국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진 향토기업이다. 오랜 세월 부산 시민의 일상식이자 관광객의 기념품이었던 어묵은 이제 K푸드의 대표 주자로 해외 무대에 서고 있다. 호주 시드니, 베트남 호찌민, 대만 타이베이 등 해외 주요 거점에 매장을 열며 글로벌 소비자를 직접 만나고 있다. 어묵은 해외 소비자들에게 생소한 음식이지만, 단백질이 풍부하고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는 특성 덕분에 간편식·건강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바비킴은 오랜 F&B 경험을 가진 기업이 새롭게 내놓은 도전적 프로젝트다. 한국 드라마와 K컬처의 힘을 빌려 ‘문화 체험형 분식’을 만든다. 삼진어묵은 70년 가까운 역사를 기반으로 축적된 브랜드 자산을 활용해 ‘전통의 세계화’를 꾀한다. 둘 다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같은 궤적에 있다.
두 사례에서 찾을 수 있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역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일, 현지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일, 음식을 단순한 상품이 아닌 문화적 경험으로 바꾸는 일이다. 충무김밥은 남해안 선원들의 소박한 식탁에서 시작해 일본의 도시락 문화와 만나 새로운 메뉴가 됐고, 어묵은 자갈치시장의 전통 먹거리에서 출발해 오늘날 글로벌 간편식으로 진화했다. 바비킴 매장을 찾은 일본 젊은 세대가 드라마 속 장면을 재현하듯, 음식은 이제 국경을 넘어 문화를 체험하는 언어가 되고 있다.
여기에는 글로벌 시장의 변화도 깔려 있다. 세계 소비자들은 대량 생산으로 표준화된 상품만을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지역성·스토리·경험이 결합된 상품을 선호한다. 글로벌 브랜드가 제공하지 못하는 틈새를 로컬 브랜드가 채운다. 부산에서 만들어진 어묵, 부산에서 온 분식이 해외에서 힘을 얻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로벌 시대의 경쟁력은 오히려 ‘로컬다움’에서 나온다.
부산이라는 도시의 특수성도 빼놓을 수 없다. 부산은 항구도시로서 바다를 통해 세계와 이어져 온 도시다. 일본·중국은 물론 미주·유럽과도 연결돼 있고, 다양한 문화가 섞이며 외부를 향한 개방성이 생활에 녹아 있는 도시다. 국제영화제, 크루즈 관광, 마이스 산업으로 세계와 접속해 온 경험도 로컬 브랜드의 해외 진출에 힘을 더한다. 이런 토양은 로컬 브랜드가 해외 시장에 도전할 때 강점으로 작용한다. 바비킴과 삼진어묵의 글로벌 진출은 단순히 한두 기업만의 성과가 아니라 부산이 가진 문화적·지리적 자산이 어떻게 세계와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과제도 분명하다. 개별 기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해외 진출에는 자본과 네트워크가 필요하고, 현지화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불가피하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이 적극 나서서 해외 전시·팝업·브랜드 홍보를 체계적으로 연결하고, 기업들이 안정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바비킴과 삼진어묵의 사례와 같은 성과가 부산 경제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세계화는 더 이상 대기업의 전유물이 아니다. 작은 분식집이 일본 젊은 세대의 문화 체험 공간이 되고, 부산 어묵이 대양을 건너 글로벌 식탁에 오르는 시대다. 부산 로컬 브랜드의 글로벌 도전은 단순한 해외 진출이 아니라, 지역 문화의 세계화이자 도시 전략의 진화다. 후쿠오카의 충무김밥, 시드니의 어묵 매장은 부산이 세계와 만나는 새로운 창이다. 작은 가게의 불빛이 해외 거리에서 환하게 빛날 때, 그 빛은 다시 부산의 내일을 밝힌다.
2025-09-29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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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인공지능과 기자의 일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를 한 인공지능 ‘사만다’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 2013년 개봉작 ‘그녀’의 배경이 바로 올해, 2025년이었다. 올해 개봉한 ‘미션임파서블’ 시리즈의 마지막 영화 ‘데드레코닝’에서 톰 크루즈가 맞서 싸우는 빌런은 핵전쟁을 획책하는 인공지능 ‘엔티티’다. 인공지능은 어느새 SF에서 일상으로 훅 들어왔고,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다.
장강명 작가의 르포 〈먼저 온 미래〉는 2016년 이세돌 9단과 구글 AI 프로그램 알파고의 대국 이후 바둑계를 취재해 인공지능이 사회에 가져올 변화를 경고한다. 인공지능 이후 바둑 고수는 예술성과 권위를 잃었고, 바둑 중계는 인공지능이 시시각각 승률을 계산해 보여주는 경마식이 됐다. 바둑의 가치와 프로 기사의 일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 변화는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작가는 이 질문을 소설가라는 자신의 직업으로 자주 돌린다. 소설을 쓰는 인공지능이 진화해 5분에 하나씩 하루에 훌륭한 장편 288편을 써낸다면 문학의 가치와 소설가의 일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작가는 바둑계에서 ‘인간의 바둑’을 이기고 지는 승패의 서사에서 찾는 흐름이 생긴 것처럼, 문학과 같은 예술에서는 창작자의 스토리텔링과 팬덤이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기자라면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인공지능은 언론의 가치와 기자의 일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최근 소식들은 이렇다. 네이버의 인공지능 뉴스 편집 알고리즘 때문에 가짜 ‘단독’과 유명인의 SNS를 베껴쓰는 뉴스가 늘었다는 연구가 있었다. 공영방송은 인공지능이 만든 영상을 메인뉴스에 써서 논란이 됐다. 미국에서는 한 신문사가 추천도서 기사에서 15권 중 10권이 존재하지도 않는 책으로 드러나자 인공지능으로 썼다고 인정했다. 구글의 인공지능 요약 서비스 때문에 트래픽과 매출이 줄었다며 소송을 건 언론사도 있었다.
인공지능은 이용자 취향에 기반한 알고리즘의 이름으로 ‘낚시성’ 기사 생산과 소비를 부추기고 있고, 인공지능으로 요약해서 보여주는 정보 때문에 정작 기사 원문을 읽는 사람은 줄어든다. 인공지능이 만든 가짜 정보가 버젓이 기사로 유통되는 일은 지금도 들키지 않았다뿐이지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가짜 추천도서 기사를 실은 미국 언론사가 인력을 20% 감축한 상태였다는 건 놀랍지도 않다.
이런 변화가 전적으로 인공지능 탓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클릭을 유도하는 기사의 폐해는 포털 뉴스 서비스가 등장했을 때부터 유구하다. 즐길 거리들이 늘어나니 기사 원문을 읽는 사람은 원래 줄고 있었다. 대규모 인력을 갖춘 기성 언론사 모델은 위기인 지 오래다. 인력이 줄고 뉴스 유통이 실시간이 되면서 기자들의 노동 환경과 삶의 질은 나아지기는커녕 나빠진 쪽에 가깝다.
대신 인공지능은 앞선 어떤 기술보다도 압도적인 능력과 속도로 이런 변화를 가속화시키고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 인공지능이 어떤 가치를 파괴한 뒤에야 우리는 그 가치가 어떤 의미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 묻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삶과 일의 방식을 뒤흔들 중대한 권한을 인공지능을 이끄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에게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먼저 온 미래〉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언론은 지금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할지만큼이나 언론의 가치를 다시 묻고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 시사인의 지난해 신뢰도 조사에서 유튜브 채널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은 ‘가장 신뢰하는 뉴스 프로그램’ 공동 2위였다. 미국에서는 ‘최고의 뉴스 브랜드’를 꼽는 설문조사에서 CNN 다음으로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크리에이터 조 로건이 2위를 기록했다. 언론을 언론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기자는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나. 인공지능은 언론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그럴듯하게 거짓말을 지어내는 인공지능의 환각 때문에 언론사의 기사가 더 가치가 높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신뢰성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최근 조사도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의 기사가 갖는 경쟁력에 기대를 갖게 한다. 응답자 절반 이상이 사진 대신 인공지능으로 만든 이미지를 쓰거나 인공지능에게 자료 조사를 맡긴 기사를 뉴스로 보기 힘들다고 답한 것이다.
인공지능과 연애하고 인공지능에 의존하다 목숨까지 버리는 사람들이 더 이상 새로운 뉴스가 아니게 됐다. 정치인과 국제분쟁 뉴스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감쪽같이 재현한 딥페이크도 이미 현실이 되었다. 인공지능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 질문을 던지는 것 또한 인문학뿐만 아니라 언론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그러기 위해서 더듬더듬 인공지능을 배우면서, 쉬운 냉소와 드문 낙관을 나누면서 기자들은 오늘도 마감을 한다.
2025-09-24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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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서울내기 다마내기'의 추억
‘고백의 역사’를 보셨는지 모르겠다. 광안대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98년 부산을 배경으로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을 되살리게 해 주는 영화다. 넷플릭스 공개 3일 만에 글로벌 톱10 비영어 영화 부문 3위에 올랐다. 전 세계 시청자들이 부산을 지켜보면서 가슴을 두근거렸을 테니 반가운 일이었다. 다소 유치하게 느낄 수도 있었던 스토리를 맛깔나게 만들어준 일등 공신은 바로 부산 사투리였다.
부산 출신 배우들이 많이 출연한 이 영화에서 부산말은 변방의 언어가 아니라 사실상 표준어였다. 주인공 박세리 역할을 맡은 서울 출신 배우 신은수의 부산 사투리 연기도 부산 사람이 볼 때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꽤 괜찮았다. 특유의 발랄함과 풋풋함이 사투리 연기와 어우러져 더욱 매력적인 캐릭터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오리지널 서울 사람이 부산말을 어떻게 그 정도로 찰지게 구사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신은수 배우는 촬영 수개월 전부터 부산 사투리 선생님에게 수업을 받고, 높낮이와 억양 등을 상세히 적어둔 대본을 통째로 외워버렸다고 했다. 그는 “부산말은 규칙이 있는 듯 없고, 단어마다 높낮이가 은근히 디테일하다”라고 말했다. 열심히 공부하다 보니 부산 사람은 의식도 못 하고 쓰는 것까지 알아차린 셈이다. 또 “한 끗 차이인데 언어를 새로 배우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듣기에는 똑같은데 선생님은 틀렸다고 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캐치하는 게 어려웠다”라고 덧붙였다.
부산말 배우느라 억수로 고생했던 모양이다. 오죽하면 앞선 영화 ‘반짝이는 워터멜론’에서 그가 했던 수어 연기보다 부산말이 더 어려웠단다. “참말로 욕봤다”는 말로 칭찬해 주고 싶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렇게 배우기 어려운 부산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우리 부산 사람들은 자부심을 쫌 가져도 되지 않을까.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랩송 같이 들리는 이 말놀이를 기억하는 분이 얼마나 있을지 궁금하다. 1950~1970년대에 아이들이 서울말을 쓰는 아이를 놀릴 때 의미도 모르면서 쓰던 표현이었다. 전학생이 서울말을 쓰면 이렇게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되레 부산에서도 서울말을 써야 대접받는 시대가 된 것 같다.
얼마 전 지인은 아내로부터 ‘귀가 후 소파에 누워 뒹굴뒹굴하지 말 것’과 ‘집안에서 사투리 쓰지 말 것’을 요구받았다고 했다. 평소 그의 언행을 보면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고 집안에서 묵언수행을 하란 말인지…. 취재차 만난 임영아 작가에게 들은 이야기도 충격적이었다. 부산에 있는 한 대학에 다닐 때 교수가 “PPT를 하는데 왜 사투리가 튀어나오냐”라고 질책했다는 것이다. 부산 사람도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써야 하고, 표준어를 못하면 교양 없는 사람이 된다는 말인지.
세상에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듣지 못하는 걸 듣는 사람도 있다. 최근 〈쓰잘데기 있는 사전:말끝마다 웃고 정드는 101가지 부산 사투리〉를 출간한 전주 출신 부경대 양민호 교수와 서울 출신 최민경 교수가 그런 사람 같다. 이들은 부산에 살면서 대체 불가능한 부산말이 있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통증을 표현하는 ‘우리하다’, 뜻을 모르는 부산 사람이 없는 ‘속닥하다’는 표준어로 그 뉘앙스를 제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바보축구온달’은 세 단어 모두 표준어로 이뤄졌지만 합치면 사투리가 된다니 헛웃음이 나온다.
두 저자는 이 책에서 “부산 사투리에는 부산의 시간과 정서, 생존과 유머,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가 담겨 있다. 하지만 정작 부산 사람들은 이렇게 재밌고 멋진 부산말을 제대로 자랑하지 않는 듯하다”라고 일갈했다. 예쁘고 좋은 부산말을 살려서 잘 사용하면 좋겠다는 이들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일본에는 사투리 사전이나 사투리를 쓴 손수건 등을 굿즈로 판매하지만, 부산에는 그런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롯데 자이언츠를 응원하는 부산팬들은 ‘아주라’와 ‘마!’ 같은 함축적인 말을 유행어로 만들었는데, 왜 그런 상품도 하나 안 만드는지 모르겠다. 세상에 부산말만큼 부산을 잘 드러내는 게 또 있을까.
10월 5일 ‘부산시민의 날’이 다가온다. 이날을 부산말을 쓰는 날로 만들면 좋겠다. 박형준 부산시장도 이날은 부산말로 연설하고, 지역방송 앵커들도 인사말 정도는 부산말로 시작하는 것이다. 〈부산일보〉를 비롯한 지역신문도 기사나 제목에서 부산말로 멋을 줘도 좋겠다. 학교에서도 부산말을 배우고 익히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싶다. 가을 야구의 시즌이 돌아오니 최동원 선수가 생각난다. 그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마 함 해 보입시더”라고 하지 않았을까.
2025-09-22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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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HMM 민영화의 원칙
길이 400m 폭 61m 높이 33.2m. 2020년 4월 부산항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HMM 알헤시라스호’의 위용은 대단했다. 20피트 컨테이너를 무려 2만 4000개나 한 번에 나를 수 있는 세계 최대 컨테이너선이었다. HMM(옛 현대상선)은 그 뒤로 3개월간 같은 크기의 배 11척을 인도받아 유럽 노선에 투입했다. 주인 잃은 현대상선을 산업은행과 한국해양진흥공사(해진공)가 넘겨받아 공적 자금을 과감히 쏟아부은 덕분에 현재 HMM은 세계 8위 수준의 수송 능력(선복량)을 갖추게 됐다.
현재 산은과 해진공이 보유한 HMM 지분 비율은 각각 36.02%와 35.67%다. 산은의 자기자본(BIS)비율은 13.9%로 금융당국 권고치 13%를 겨우 넘긴 상태다. HMM 지분이 자기자본의 15%를 넘기면서 위험가중치 1250%를 적용받게 돼, HMM 주가가 오르면 BIS비율이 낮아지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7월 HMM 지분에 대한 위험가중치 적용을 3년 미뤄줘 매각에 필요한 시간을 벌어준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전체 산업군 지원을 맡는 산은의 자금 공급 여력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일을 더 미룰 수 없기에 신임 박상진 산은 회장이 지난 9일 “HMM 민영화에 속도를 내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HMM 민영화 논의에 앞서 한진해운 파산의 교훈을 다시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소유 기업의 의지 부족, 정부의 해운업에 대한 몰이해가 겹치며 세계 7위 선복량과 글로벌 네트워크를 갖고 있던 한진해운을 공중분해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당시 채권단은 한진그룹에 긴급자금 7000억 원을 요구했지만 한진은 경영권과 함께 4000억 원을 내놓겠다는 입장으로 평행선을 달리다 법정관리와 파산에 이르고 말았다. 불과 3000억 원 차이였다. 2017년 선복량 기준 세계 13위에 불과하던 현대상선을 오늘날의 세계 8위 HMM으로 키우는 데 투입된 공적자금은 약 6조 8000억 원. 호미로 막을 일을 포클레인으로 겨우 막은 셈 아닌가.
돈 문제가 다가 아니다. 한진이 40년간 확보한 선박과 부두 지분 같은 유형의 자산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구축한 네트워크, 업계 전문 지식을 내재화 한 고급 인력들이 모두 산산히 흩어져버렸다. 무형의 자산은 돈을 쏟아붓는다고 당장 확보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재 HMM은 미주와 유럽, 아시아 노선을 동시에 운영하는 국내 유일 글로벌 원양 선사다. 민영화에 단순한 금융·기업 논리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국내 수출입의 최전선을 담당하는 필수 기간산업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공기업은 아니지만 실제 원양 선사가 맡는 공공적 성격의 업무에 맞게 소유 구조에서의 공공성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HMM 최대 주주인 산은 지분을 특정 기업이 독점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최근 포스코그룹의 HMM 인수 검토에 대해 해운업계가 강력 반발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다른 주력산업이 위험해지면 해운업을 먼저 희생시킬 가능성이 있고, 대형 화주이기도 한 기업이 자사 물량 위주로 해운업을 영위하면 기존 해운 생태계가 흐트러진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전재수 해양수산부 장관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단순한 해운 선사 한 곳 민영화 하는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적선사이자 기관으로서, 대한민국 해운산업이라는 측면에서의 지배구조 문제를 동시에 봐야 한다”며 HMM 민영화를 신중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다른 인터뷰에서 전 장관은 해운산업이 해양안보와 밀접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산은의 HMM 지분을 여수·광양부터 부산·울산·포항에 이르는 동남권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상공계가 나눠 갖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를테면 ‘지역성 강화’ 방안이다.
산은이 소유한 HMM 지분의 가치를 HMM이 지난 8월 실시한 자사주 공개매수 가격인 주당 2만 6200원으로 환산하면 약 10조 원에 이른다. 지자체와 상공계가 전체를 마련하기엔 부담스러운 액수다.
전 장관 아이디어에 생각을 보태보면 이렇다. HMM의 공공성 강화를 위해 해진공이 지분을 더 늘리는 것이다. 해진공이 굳건히 HMM 대주주 역할을 맡아 원양 해운의 공공성을 담보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원양 선사와 연결돼 아시아 역내 해운을 책임지는 근해 국적선사들이 지분 참여를 한다면 HMM의 해운 전문성과 연결성도 동시에 꾀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 화주기업들의 소액 지분 참여도 충분히 고려할 만하다.
부산으로 이전할 HMM의 지역성과 전문성, 공공성, 산은의 자본 건전성 제고를 모두 꾀할 수 있는 방안,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여러 분야 관계자들의 머리를 맞대볼 필요가 있다.
이호진 경제부 선임기자 jiny@busan.com
2025-09-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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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내란 세력 척결이라는 '절대 반지'
12·3 비상계엄은 무모한 도박이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은 자신과 측근들의 안위 뿐만 아니라 당시 집권당인 국민의힘의 명운까지 게임판 위에 ‘올인’했다. 도박은 실패했고, 위태로웠던 여야 간 힘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졌다. 계엄 역풍을 등에 업은 다수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결국 입법에 이어 행정 권력까지 차지했다. 여기에 내란 종식이라는 명분까지 손에 쥐었다. ‘내란 세력’이라는 단어가 주는 엄청난 위압감 앞에서 야당의 어떤 저항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 민주당으로서는 그야말로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절대 반지’가 수중에 떨어진 셈이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듯, 막강한 권력을 절제력 있게 행사하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때로는 정권을 떠받치는 핵심 지지층과 충돌을 불사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양립 불가능 지경인 여야 사이에 합의 정치에 대한 희망을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국회 시절에 누구보다 강성이었던 이재명 대통령이 임기 초반 통합과 협치를 강조할 때는 상당한 기대를 갖기도 했다.
하지만 소위 개혁 속도전을 벌이는 최근 여권의 행태를 보면 절대 반지의 위력에 흠뻑 취한 듯하다. 반대는커녕 ‘좀 과하다’는 지적조차 수용할 뜻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개혁 저항 세력으로 찍어 누르려는 고압적인 기류가 팽배하다. 사법부 개혁에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법원장들의 주문은 “자업자득”으로 몰아세우고, 왜 바꾸는지 설명이 부족한 정부 조직 개편을 비판하는 공무원에는 “불만이면 퇴사하라”는 날 선 목소리가 날아든다.
내란특별재판부든, 내란전담재판부든 결국 여권이 원하는 판결을 할 수 있는 판사로 바꾸기 위함이라는 본질은 같다. 정치 권력이 판사를 성향에 따라 취사선택하려는 행위 자체가 사법권 독립 침해이며,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다는 지적은 상식적이다. 여당 지도부는 이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상고심 선고에서 ‘정치 판결’을 내린 사법부가 독립을 외칠 자격이 있느냐고 비판하지만, 집권당이라면 그런 감정적인 대응이 우리 사법 시스템에 두고두고 미칠 해악을 더 깊이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방송통신위원회를 해체하고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를 새로 설치하는 법안 역시 다분히 감정적이다. 현 이진숙 위원장 ‘찍어내기’ 의도라는 걸 민주당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다. 이 위원장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특정인을 배제하기 위해 정부 조직의 근간을 흔들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내란 척결이라는 깃발 아래서 수단의 적절성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다.
검사의 힘을 남김없이 빼는 게 요체인 검찰 개혁안 또한 복수심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진보 성향의 법조인들조차 검찰의 보완수사권마저 사라질 경우 부실 기소와 사건 지체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를 쏟아내고 있지만 ‘검찰 없으면 나라가 망하냐’는 냉소적 반응만 넘쳐난다. 1% 정치 검사의 힘을 빼려고 99% 검사를 희생시키고, 사법 서비스의 질을 하락 시킨다면 이걸 개혁이라고 할 수 있나.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검찰에게 빼앗은 대부분의 권한을 넘겨 받는 경찰이 향후 ‘정치 경찰’이 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어디서 오느냐는 것이다.
내란 척결을 앞세워 지방선거 지형을 유리하게 만들려는 시도도 노골화되고 있다. 최근 행정안전부가 국민의힘 소속 지자체장을 겨냥한 감찰에 나선 것은 아무리 봐도 무리수다. 당일 행안부 지시 전 청사 폐쇄를 미리 해 계엄에 동조했다는 것인데, 일단 진위 여부가 명확하지 않고 그 날의 상황과도 맞지 않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계엄 당일 밤에 “계엄에 반대한다. 계엄은 철회돼야 한다”는 입장문을 전국 지자체 중 가장 먼저 발표했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박 시장은 사석에서 계엄을 강하게 비판한 기자의 칼럼에 깊이 공감하기도 했다.
물론 여권의 내란 공세가 힘을 받는 건 야당인 국민의힘이 자초한 측면이 크다. 계엄 직후 윤 전 대통령과 절연하고, 반성과 쇄신에 나섰다면 내란 척결이 지금처럼 야당을 향한 전가의 보도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탄핵 트라우마’만 되뇌던 국민의힘은 정반대 방향으로 역주행 했고, 지금도 ‘윤 어게인’ 세력과 기묘한 동거를 하면서 내란 동조 정당이라는 굴레에 스스로 매여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절대 반지는 종래에 그 파괴적인 힘을 주체하지 못해 주인을 스스로 자멸케 한다. 첫 탄핵 이후 탄생한 문재인 정부도 임기 초반 80%가 넘는 지지율을 보였지만, 부동산 정책, ‘조국 사태’ 등에서 여론을 무시한 독선적 행태로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절대 반지의 어두운 운명을 반복하지 않는 길은 무엇일까? 영화 주인공처럼 스스로 반지의 유혹을 떨쳐내는 길 밖에 없다.
2025-09-15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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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안갯속 부산·경남 행정통합
수도권 일극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광역자치단체가 추진하는 행정통합과 특별연합으로 전국이 혼란스럽다. 행정 전문용어인데다, 추진과정에 오락가락하는 지자체의 행보때문이다.
부산과 경남에서는 2022년 이미 만들어진 특별연합을 폐기하고, 다시 행정통합을 추진중인 상황이다. 박형준 부산시장과 박완수 경남도지사가 지난해 11월 경남도청에서 만나 수도권에 버금가는 ‘대한민국 경제수도’ 건설을 청사진으로 내걸며 부산·경남 행정통합 공론화위원회(이하 공론화위)를 출범시켰다. 공론화위는 지난달 29일 창원시 창원컨벤션센터에서 경남 중부권 행정통합 시도민 토론회를 마지막으로 부산과 경남 8개 지역을 순회하는 권역별 토론회를 종료했다.
공론화위는 8차례 토론회 성과를 발판으로 연말까지 행정통합 기본 구상안을 도출하고 두 지역민이 동수로 참여하는 여론조사를 해 행정통합 의사를 확인할 방침이다. 공론화위는 수도권 집중·인구 감소로 지방소멸이 현실화한 상황에서 토론회를 통해 “부산과 경남이 함께 가야 한다”는 공감대를 넓힐 수 있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통합여부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시도민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시도민 공론화 작업이 마무리됐지만 추진 동력은 갈 수록 떨어지는 상황이다. 그동안 토론회에서는 행정통합에 대한 시도민의 열기가 뜨겁지 않았다.
참여가 부족하면, 그만큼 추진력도 약해진다. 행정통합의 성패는 주민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지지의사를 표시하느냐에 달렸기 때문이다.
행정통합을 둘러싼 외부 여건도 좋지 않다. 올해 6월 대선으로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면서 특별연합 형태인 부산·울산·경남(이하 부울경) 메가시티가 오히려 지역 화두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지난 2022년 4월 부울경은 특별연합을 출범시켰다. 특별지자체 제도가 국내에 도입된 이후 최초 사례였다.
하지만 그해 6월 지방선거에 당선된 박완수 경남도지사와 김두겸 울산시장은 입장을 번복했다. 특히 울산시가 독자 노선을 선언하면서 동남권에서 부산과 경남만 행정통합을 논의 중이다. 또, 행정통합을 추진하던 일부 광역단체도 특별연합으로 다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재명 정부가 ‘5극(초광역) 3특(특별자치)’을 국정과제로 채택함에 따라 광주·전남을 비롯한 광역자치단체들이 정책 선회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행정통합에 적극적이던 대구·경북은 민선 9기 장기 과제로 넘기는 분위기다. 대구·경북은 지난해 통합 특별법안 초안을 완성했다. 두 주체 중 한 곳인 대구시의회 동의까지 얻었다. 하지만 경북도의회 동의 절차를 진행하던 중 비상계엄이라는 돌발상황이 벌어지면서 동력을 잃었다.
행정통합을 위해선 정부 차원의 입법과 지원도 필수적이다. 그러나 정부는 지자체의 자율적 행정통합에 대해 반대하지 않지만, 특별한 지원도 없다는 방침이다. 다만, 국정 방향인 ‘5극 3특’에 편승하면 권역별 전략사업을 지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후 대구·경북은 통합보다는 오히려 ‘5극 3특’ 정책에 보조를 맞추고 있다. 한때 행정통합을 추진하다 무산된 광주·전남도 지난달 27일 특별연합 출범을 위한 선포식을 가졌다.
부산·경남도 영향을 받고 있다. 지난 7월 25일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부산 타운홀 미팅에서 지방분권과 지역 균형 정책을 총괄하는 김경수 지방시대위원장은 ‘선 협력 후 통합’을 언급하며 행정통합보다는 메가시티를 강조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산·경남은 이제 막 행정통합 공론화 토론회를 마친 상황에서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기도 쉽지 않다. 내년 지방선거도 변수다. 누가 부산시장과 경남도지사로 당선되느냐에 따라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이미 민선 7기 때 합의한 부울경 메가시티 결성이 민선 8기에서 폐기되는 경험을 했다.
여기에 내년 지방선거 이후 부산·경남 두 지역의 지자체장 중 한 명이라도 소속 정당이 바뀐다면 기존의 행정통합 방향이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전망마저 제기된다. 부산·경남 행정통합은 주민참여가 낮은 상황에서, 내년 지방선거와 중앙 정부와 이견 등으로 안갯속을 걷고 있다. 전문가들은 행정통합의 완성을 위해 △정치적 리더십과 합의 △주민 공감 △제도 마련 등 3가지 요소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한다. 부산·경남에서는 3가지 요소 중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kks66@busan.com
2025-09-1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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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
올해 사회부 생활을 시작하면서 맡은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제보에 대한 ‘게이트 키퍼’ 역할이다. 매일같이 회사로 걸려오는 제보 전화, 선후배 기자들이 건네는 이야기, 주변 취재원들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제보까지, 많은 제보 가운데 무엇을 취재하고 기사화할지 취사선택하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단면을 보여주거나,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내 더 나은 사회로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판단되는 제보는 취해 취재 등 기사화 과정을 거치고,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 일방적인 주장만 일관하거나 사안이 너무 단편적이고 일면적인 제보는 배제한다. 취사선택의 기준은 제보의 내용이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공유하는 ‘상식’의 범주에 얼마나 벗어나 있느냐다.
최근 부산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이른 아침 시간 골프를 치는 사람이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모래에서는 벙커샷 연습을 하고, 인조 잔디에서는 퍼팅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에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황당하면서도 학교 운동장을 골프 연습장으로 활용하는 기발함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여름방학 기간이었지만 분명 학교에서는 방과후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다. 학교라는 공간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깨는 몰상식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이라는 판단에 따라 제보 내용은 사회부 기자들의 취재를 거쳐 기사화됐고, 해당 기사는 많은 독자들의 공분을 일으켰다.
사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상식 파괴’ 장면과 마주한다. 오늘도 많은 신문과 방송,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상식을 저버린 이들의 말과 행동들이 전해진다.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부산의 한 등산로에 파크골프장을 만들어놓고 이용한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부산의 한 시내버스에서는 한 승객이 좌석에 앉아 양산을 펴고 있다가 다른 승객들로부터 불편한 시선을 받기도 했다.
강원도의 한 해수욕장 인근 정자에는 한 캠핑족이 텐트를 설치하고, 텐트를 고정하기 위해 바닥에 피스까지 박아 이슈가 됐고, 대전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 돗자리를 펴고 고추를 다듬는 주민에게 문제를 제기하자 자신의 차를 곧 댈 것이라는 황당한 대답만 들었다는 사연이 소개되기도 했다.
일상의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닫히는 지하철 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은 승객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는 한 승객의 핀잔에 되레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뭐라고 그러냐”며 큰소리를 치며 승강이를 벌인다. 한 호텔에서는 두세 살배기 아이 둘을 데리고 호텔 수영장을 찾은 한 부모가 수영장 정비 시간이 됐음에도 수영장을 이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수영장을 더 이용하게 해달라고 떼를 쓰고 언성을 높인다. 상식을 저버린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다가 얼굴이 화끈거렸던 최근의 경험들이다.
과거에는 그냥 지나쳤을 법한 이런 풍경들이 이제는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의 발달로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다. 덕분에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더 자주 목격하게 됐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가 과연 건강해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깊어진다.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편리함이 우선시되는 시대, 개인의 삶과 가치가 중요시되고 사회 규범과 공동체 의식은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건강한 상식을 지닌 국민은 매번 분노하지만, 곧 잊힌다. 상식을 저버린 악행들은 또다시 반복된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에서 비롯된 네 가지 도덕적 단서, 사단(四端) 중 하나로 ‘수오지심(羞惡之心)’을 들었다.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잘못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이다. 그는 부끄러움이 사라진 곳에는 탐욕과 이기심이 채운다고 했다. 상식이 파괴되는 숱한 일상들로 채워지고 있는 오늘날에도 꼭 되새겨봐야 할 덕목이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의 최소 조건이다. 규범과 원칙이 존중받고, 예측 가능한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회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구성원들의 단순히 지식이나 논리적 판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공유하는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모이고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의 구성원은 자신의 행위가 사회적 규범이나 공동체의 도덕적 가치에 어긋났음을 깨달을 때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한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개인들이 많아질 때, 비로소 사회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된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끊임없이 성찰하고, 상대를 배려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사회부 기자들이 상식을 저버리는 황당무계한 사건·사고들을 기사로 전하는 일이 사라질 날들을 기대해본다.
2025-09-08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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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정의선의 로봇 사랑
2022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IT·가전 전시회 CES에서 화제 가운데 하나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사족 보행 로봇 ‘스팟’과 함께 무대에 오른 장면이었다. 당시 정 회장은 “매일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는 것처럼 언젠가는 사람들이 스팟을 데리고 다니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2년후인 지난해 말 스팟이 미국 비밀경호국 요원과 함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플로리다주 팜비치 마러라고 리조트의 자택 주변을 순찰하는 장면이 언론에 공개됐다. 정 회장의 예고가 현실이 된 것이다.
이미 싱가포르 혁신센터 HMGICS에는 로봇개 품질 검사원으로 스팟이 투입돼 있다. 국내에선 기아차 광명 공장에서 로봇개가 활동하고 있다.
올 연말에는 현대차의 글로벌 생산라인에 본격 투입된다.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를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신공장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의 조립라인에 시범적으로 넣기로 한 것이다. HMGICS 내 차량 내부를 조립하는 의장 단계에도 ‘아틀라스2’ 투입이 예정돼 있다.
로봇이 자동차 생산에 들어가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어서 글로벌 자동차 업계도 예의주시하고 있다.
로봇은 배터리만 교체하면 24시간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산성이 획기적으로 높아질 수 있어서다. 하지만 정의선 회장에게는 단순한 생산성 향상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는 듯하다. 사용자 범위와 노동쟁의 대상을 확대하고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 청구를 제한하는 등 노조에게 막강한 권한을 주고 기업을 옥죄는 이른바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제2·3조 개정안) 국회 통과 등 집권 여당·정부의 노조 지원과 한국 노조의 과도한 요구를 컨트롤할 수 있는 ‘대항마’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현대차 울산공장과 기아 광주공장을 가보면 토요타 일본 공장이나 르노코리아 부산공장과 사뭇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라인의 한두 명은 휴대폰을 하거나 신문을 읽는 장면이다. 비상 상황에 대비하고 휴식을 위한 차원이라고 하지만 다른 글로벌 공장들에는 흔하게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자동차 생산성을 나타내는 지표인 UPH(시간당 생산대수)를 보면 바로 국내 현대차 공장의 현주소를 알 수 있다. 현대차 미국 앨라배마공장과 체코 공장은 UPH가 70에 육박하지만 울산공장의 경우 평균 45에 그치고 있다. 임금은 반대다. 지난해 현대차의 노동자 평균 임금은 약 1억 2400만 원이고, 미국 자동차 빅 3의 평균임금은 8만 4000달러(약 1억 1700만 원)이다.
고임금임에도 생산성은 미국의 3분의 2수준인 상황에서 정 회장의 로봇 전략은 오히려 박수받을 일이 아닐까.
정 회장은 지난달 이재명 대통령과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정상회담 때 지난 3월 발표한 4년간 총 210억 달러 투자에서 50억 달러(약 7조 원)를 추가한다고 했다. 미국에 연 3만 대 규모의 로봇 공장을 짓기로 한 것이다.
가뜩이나 미국 내 현대차그룹의 연간 자동차 생산량을 100만 대에서 170만 대로 확대키로 해 현대차·기아 노조가 한국 내 생산라인 축소를 우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메가톤급’ 소식을 추가로 알린 것이다.
현대차 노조는 발끈했다. “외국 투자에 대한 허탈함과 불안감을 느낀다. 성과에 걸맞는 공정한 분배와 조합원에 대한 투자가 가장 가치 있는 투자”라고 비판했다.
최근 미국의 관세 부과 등으로 올 2분기 영업이익이 1조 6000억 원이나 감소했는데도 현대차 노조는 임단협에서 억지에 가까운 요구를 늘어놓고 있다. 현대차뿐만 아니라 현대제철, GGM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에서도 파업 등 노조 이슈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 생산라인에서 근로자가 로봇으로 대체되면 상황이 바뀔 수 있다. 로봇 투입만으로 ‘생산성 향상’과 ‘노조 대응력 강화’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된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나아가 이번 달 중순 국내 기관 투자자들을 대거 이끌고 미국 보스톤다이나믹스 본사를 방문할 것으로 알려졌다. 로봇 투자를 본격적으로 이끌고 기업 가치를 올리기 위함이다. 증권가 반응도 좋다.
정 회장이 4년전 로봇 회사를 인수할 때만 해도 “일본 자동차 업체들처럼 포기할 것” “상업적으로 휴먼 로봇은 실패할 것”이라는 반응이었으나 이젠 그룹의 탄탄한 미래를 보장하는 ‘신의 한수’로 인식되고 있다.
배동진 서울경제부장 djbae@busan.com
2025-09-0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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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말라버린 호수에서 그려보는 북극항로
요즘 종종 1960년대 중앙아시아 목화 산업이 태동한 시절의 뒷이야기를 생각해 본다. 이 시기 우즈베키스탄 지역은 세계적인 목화 산업지로서의 터를 닦았다. 산업 규모가 전성기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지금도 우즈베키스탄은 세계 6~7위 목화 생산국이다. 목화산업이 무너지면, 이 나라 경제는 주저앉는다.
목화산업의 번영은 1950~1960년대 관개 사업의 결과다. 당시 소련 정부는 ‘흰 황금’이라 불리던 목화 생산을 늘리기 위해, ‘아랄해’ 호수로 향하던 강들에 댐과 운하를 지었다. 관개수로가 깔리고 물이 들어오자, 마른 땅은 목화 재배지가 됐다. 1960년대 말 이미 아랄해의 수위가 빠르게 내려가는 게 관찰됐지만, 목화가 가져올 번영에 가려 자연의 경고는 보이지 않았다. 희망에 들뜬 시기였다.
아랄해는 세계 4위 호수였다. 크기가 한때 6만 8000㎢에 달했다. 남한 면적의 3분의 2 정도다. 이랬던 아랄해가 강물 유입이 줄기 시작하고, 50년 만에 10분의 1 정도로 면적이 줄었다. 호수 대부분은 염분을 품은 사막이 됐다. 호수가 사라진 땅은 달구어져 기후가 크게 변했고, 모래바람은 주변까지 황폐화했다. 주민들 사이엔 폐질환부터 다양한 건강 문제들이 발생했다. 어업에 의존하던 도시들은 폐허가 됐다. 호수가 사막이 된 ‘아랄해 비극’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함께 소련의 대표적인 환경 재앙으로 꼽힌다.
오래전 다큐멘터리로 본 우즈베키스탄 목화 산업의 뒷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맴도는 건, 녹아가는 북극에서 말라가는 아랄해가 떠올라서다. 북극항로 개발에 들뜬 우리의 모습과 1960년대 아랄해 주변의 희망찬 분위기가 묘하게 닮은 느낌이 있다. 같을 순 없지만, 비슷한 구석은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목화 산업이 그러했던 것처럼, 냉정하게 말하면 북극항로 개척 기회도 환경이 망가지면서 생겼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한국 면적의 8배 이상의 북극 빙하가 사라졌다고 하고, 10년마다 면적이 13% 줄었다는 관측 결과도 있다. 무척 빠른 속도로 녹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북극항로 개척 기회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기후위기 증거이다.
북극 빙하는 태양으로부터 오는 빛을 반사하는 역할도 한다. 빙하 손실은 기후위기의 결과이자 동시에 위기를 더 키우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여름에 북극 해빙이 사라지는 때가 올 수 있다는데, 봄가을에도 그런 날이 온다면 북극항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즘엔 부산의 북항 일대가 상당 부분 물에 잠겨 있을 수도 있다.
북극항로를 접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련이 관개 공사를 접었다면 아랄해의 사막화는 멈췄겠지만, 지구온난화는 대한민국 혼자서 대응할 수 없다. 우리 의사와 상관없이 빙하는 녹을 것이다. 당장 오늘 전 인류가 탄소 생산을 멈춰도, 이미 대기에 탄소가 많이 쌓여 있어 긴 시간 지구는 뜨거워지고 북극은 녹는다. 짧은 뱃길이 생겼는데 굳이 길게 돌아가는 것 자체가 탄소를 더 뿜는 일이다.
그래서 북극항로는 상당 부분 현실화를 앞두고 있고, 대한민국은 여기서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성공하면 부산이 물류허브 도시로서 한 단계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도 설득력이 있다.
다만 북극항로를 추진하면서도, 기후위기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것을 인식하면 좋겠다. 바닷길이 열리는 대신 빙하가 사라지고 있고, 북극곰과 바다코끼리 등이 터전을 잃어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한 번씩 떠올렸으면 한다. 얻는 기쁨이 크다고 잃어버리는 것들에 소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가 기후위기에서 기회를 얻고 성공한다면, 기후위기 해결에 더 노력하는 것이 도의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해양 분야의 무탄소 기술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거나 녹색 에너지 비율을 높이는 식의 노력이 쌓이면, 북극항로 개척자로서의 명분도 함께 얻을 수 있다. 기후위기에 편승하기보다 위기 해결사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거다. 이런 노력은 북극항로에서 대한민국의 입지를 넓히는 데도 효과적일 것이다.
지금 우즈베키스탄은 수출에서의 목화 비중을 줄이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이미 많은 것이 무너져 쉽지가 않다고 한다. 만일 소련이 아랄해 주변의 물길을 돌릴 때, 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다면 지금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북극항로도 마찬가지다. 북극항로 개척이 성공하려면, 경제적 가치를 계산해 내는 능력도 있어야 하지만, 지금 무엇을 잃고 있는지 알아채는 통찰력도 필요하다. 경제적 가치에 더해 공존의 의미를 고민하고 미래 세대를 배려할 줄 알 때, 지속가능한 북극항로를 그을 수 있다.
2025-09-01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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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가야진용신제, 국가 무형유산 승격돼야
문화유산은 단순히 과거를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자, 미래 세대가 이어받을 정체성의 근간이다.
국가 무형유산은 무용·음악·놀이 등 형태는 없지만,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무형의 문화적 산물을 정부가 지정한다. 6월 30일 현재 종묘제례악, 북청사자놀음 등 162종이 지정돼 있다.
이들 무형유산은 ‘무형유산의 보전과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가유산청 무형유산위원회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지정된다.
최근 경남도 무형유산 제19호인 ‘가야진용신제(이하 용신제)’가 국가 무형유산 승격을 위한 재심의를 앞두고 있어 지역사회 관심도 뜨겁다. 재심의는 오는 11월 중에 열린다.
용신제의 국가 무형유산 승격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양산시는 2015년과 2019년 국가 무형유산 지정을 추진했다.
그러나 제례 관련 자료 부족, 국가 제례 의식과 민속학적 요소(풍물놀이 등)의 결합 근거 부족 등의 이유로 연속 고배를 마셨다.
양산시는 2023년 하반기 세 번째 도전에 나섰고, 앞서 지적된 문제를 보완했다. 이 결과 지난해 2월 승격의 첫 관문인 국가 무형유산 신규 조사 대상으로 지정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양산시는 과거 용신제 때 사용했던 제기와 복식까지 복원해 그 어느 때보다 조선 시대 제례 의식에 근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해 10월, 현장 실사에 해당하는 지정 인정 조사까지 마쳤다.
하지만 올해 초 무형유산위원회 전통지식분과는 ‘보류’ 결정을 내렸다. 11월 중에 열리는 재심의가 사실상 승격 여부를 가를 중요한 분수령인 셈이다.
재심의에서 용신제의 역사 가치와 학술적 의의를 충분히 전달해야 한다. 두 차례 승격 실패 원인이었던 국가 제례 의식에 가미된 민속학적 요소가 ‘용신제의 명맥’ 유지를 위한 불가피한 시대적 상황이라는 점을 위원 한 명, 한 명에게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한다.
일제 강점기 때 용신제가 금지됐지만, 지역민이 밤중에 제단을 옮겨가면서 제를 올리는 식으로 명맥을 이었다. 근래에는 전승·보존을 위해 시제와 용신제에 기우제를 통합하고, 시민과 관광객이 함께하는 행사로 발전시켰다.
이는 전통이 단절되지 않기 위해 불가피한 결합이었다. 다시 말해 용신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시대적 여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었다.
위원들 역시 마을 사람들이 용신제 전승·보전을 위해 민속학적 요소가 가미됐으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감안해 재심의에 나서야 할 것이다.
용신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까지 이어진 국가 제례로 중사에 해당할 만큼 국가적 의례였다. 용신에게 뱃길의 안전과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던 행사인 동시에 농경 사회의 생존을 좌우하던 물관리와도 직결됐다.
예로부터 용을 ‘미르’라 부르며 비와 물을 다스리는 존재로 여겨졌다. 물관리가 곧 농사의 성패를 좌우했던 수도작 문화권에서 뿌리 깊은 신앙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따라 용신제는 뱃길을 위한 제례에 머물지 않고, 국가와 농경사회를 함께 지탱한 종합적 의례였다.
과거에는 낙동강 가야진을 비롯해 흥해(동), 공주(서), 한강(북) 등 4대 강 유역에서 모두 행해졌으나 오늘날 온전히 전승·보존된 것은 가야진용신제뿐이다. 이 때문에 학술 가치와 역사적 희소성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용신제가 단순한 지역 행사가 아니라 국가적 차원의 문화유산으로 승격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승격이 되면 이는 단순히 국가 무형유산 한 종목이 늘어나는 차원을 넘어 낙동강 뱃길 복원 사업과 수변공원 활성화 등 양산시가 추진 중인 관광 자원화 전략에도 큰 힘을 싣게 된다.
나동연 양산시장의 핵심 공약과도 맞닿아 있어 침체된 지역 경제 회복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동시에 양산시가 ‘문화유산의 고장’으로서 위상을 높이는 계기도 될 것이다.
무형유산은 전승이 곧 생명이다. 유물은 보존만으로 그대로 남는다. 그러나 무형유산은 반드시 사람을 통해 이어져야만 맥이 끊기지 않고 살아있을 수 있다.
용신제의 국가 무형유산 승격은 안정적인 전승·보존 환경 마련과 함께 양산의 정체성, 더 나아가 우리 모두 역사적 뿌리를 지켜내는 문제다. 삼국시대 낙동강 물길을 타고 1300년 이상 이어진 역사의 제의가 오늘날 다시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용신제의 국가 무형유산 승격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2025-08-27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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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에어부산, 기업 가치 우려 커진다
진에어에 의한 흡수합병을 앞두고 에어부산의 기업 가치 축소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항공기 도입 등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에어부산은 시장점유율도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에어부산의 ‘소극 경영’이 계속될 경우 에어부산 기존 주주들이 진에어와의 합병에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진에어 중심의 저비용항공사(LCC) 3사 합병이 실제로 이뤄질 경우 ‘공정한 합병 비율’이 문제가 될 전망이다. 에어부산의 기업 가치가 낮아지면 진에어 주식과의 교환 비율도 낮아지게 된다. 에어부산의 기존 주주로서는 손해가 커지는 셈이다.
에어부산은 2020년 정부의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통합 발표 이후 투자 위축 등으로 기업 가치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 LCC 통합 발표 이전인 2019년 에어부산과 진에어는 각각 26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어부산은 LCC 통합 발표 이후 보유 항공기가 계속 줄어서 현재는 20대만 보유하고 있다.
에어부산은 오는 9월 모기업인 아시아나항공으로부터 항공기 1대를 추가로 리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화재사고로 전손 처리된 항공기를 대체할 항공기를 마련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1대가 추가된다고 해도 전체 기단은 지난해와 마찬가지인 21대에 그친다.
반면 진에어는 코로나19 이후 보유 항공기가 계속 늘어나 현재는 31대를 보유하고 있다. 항공사의 핵심 자산인 항공기 보유에서 큰 차이가 나면서 에어부산과 진에어의 매출 격차는 2019년 2770억 원에서 2024년 4546억 원으로 벌어졌다.
대구를 연고지로 선택한 티웨이항공과 비교하면 에어부산의 투자 축소는 더 두드러진다. 티웨이항공은 2019년 당시 에어부산보다 2대 많은 28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계속해서 투자를 확대해 현재는 43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 에어부산과 티웨이항공의 매출 격차는 2019년 1773억 원에서 2024년 5300억 원으로 커졌다.
에어부산의 경쟁 LCC들은 코로나19 이후 빠르게 투자를 확대하며 덩치를 키웠다. 특히 티웨이항공은 진에어의 노선을 할당받는 등 LCC 통합의 간접적인 수혜를 누리면서 노선을 확대했다. 조만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보유하고 있는 중국 노선의 운수권도 재배분될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 역시 통합LCC 3사(진에어, 에어부산, 에어서울)을 제외한 항공사에 돌아갈 전망이다.
항공기 확보 등 투자를 하지 않은 에어부산은 시장점유율(탑승객)도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공시 자료에 따르면 에어부산의 국내선 시장점유율은 코로나19 이전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해 2018년에는 14.1%를 기록했다. 그러나 LCC 통합 방침이 발표된 2020년 이후 ‘산업은행 체제’로 운영되면서 점유율은 정체 상태를 보였고 이후 2022년 13.7%, 2024년에는 11.6%로 줄었다. 에어부산은 특히 대한항공 출신으로 경영진이 교체된 올해 상반기에 국내선 점유율이 8.1%로 급감했다. 에어부산의 국제선 점유율도 2023년 5.3%에서 2024년에는 5.1%, 올 상반기에는 4.5%로 감소했다.
에어부산은 항공기 사고로 인한 기재 감소와 정비 문제로 인한 운항 감소를 점유율 하락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에어부산과 마찬가지로 항공기 사고가 발생한 제주항공의 올해 상반기 국내선 점유율(14.7%)이 지난해(15.4%)에 비해 불과 0.7%포인트(P) 줄어드는 데 그친 것과 큰 차이가 난다. 에어부산을 ‘흡수합병’하는 진에어 역시 합병으로 인한 노선 배분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상반기 국내선 시장점유율이 지난해에 비해 1%P만 줄었다. 진에어의 올해 상반기 국제선 시장점유율은 지난해에 비해 오히려 1%P 상승했다.
진에어는 코로나19 여파로 쌓였던 수천억 원대 결손금을 털어내고 배당 재개를 검토하는 등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반면 모자란 항공기에 정비 문제까지 발생한 에어부산은 수년째 무배당을 이어가고 있고 2분기에는 100억 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기업 합병 과정에서 피합병 기업 주주들은 기업 가치가 과소평가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실제로 지난 1월 아시아나항공 주주총회에서도 대한항공과 통합하는 과정에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에어부산도 투자 실종과 실적 악화가 계속된다면 ‘기업 가치 축소’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김종우 서울경제부 부장 kjongwoo@busan.com
2025-08-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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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해양금융, 물이 들어왔다
부산이 세계 1위 자리를 꿰차는 동안 인천·서울은 12위에 그친 역량.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서울보다 10년, 20년은 뒤처진다는 소리를 들으며 늘 서울 뒤꽁무니를 쫓아가기 바빴던 부산에 서울은 물론 세계 모든 도시를 제치고 세계 1위의 영광을 안겨준 것이 있다면 이를 무기로 한번은 제대로 승부를 걸어봐야 하지 않을까.
노르웨이 메논 이코노믹스(Menon Economics)가 격년으로 발간하는 메논 보고서 〈2024 세계 주요 해양 도시〉는 부산을 해양기술 부문 세계 1위, 해양도시 종합순위 10위로 평가했다. 종합순위로는 세계 1위 싱가포르, 4위 상하이, 7위 도쿄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4번째로 높은 수준인데, 다른 영역에서는 받아보지 못한 성적표다. 서울·인천은 해양도시 종합순위 26위, 해양기술에서는 12위를 차지했다. 지역의 한 전문가는 서울과 인천을 다 합쳐도 부산을 못 이기는 유일한 분야가 해양이라고 내심 기뻐했다.
부산은 한국 조선 클러스터의 중심지로서 고부가가치 메가선박과 저탄소 선박 건조, 조선소 선대 규모, 해양기술 기업의 높은 이익, 신조선의 높은 시장 가치, 해양기업의 특허권 수 등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해양기술 1위 자리를 꿰찼다.
해양수산부 이전을 계기로 부산의 산업 전반이 ‘해양’에 초점을 맞춰 발빠르게 체질을 바꿔가고 있다. 부산시는 아예 해양수도 부산의 의제를 발굴하고 선도할 컨트롤타워를 만들기로 했다. 잊혔던 ‘해양 DNA’가 되살아난 듯 ‘아 맞아, 우리가 제일 잘하는 게 이거였지’ 라며 제자리를 찾아오는 느낌이다. 국제문화도시, 블록체인특구, 글로벌금융허브 등 멋져 보이는 키워드가 많지만 다른 도시는 흉내낼 수 없는, 부산만이 가질 수 있는 대표 타이틀은 해양도시다.
해양은 그 확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 더욱 매력적이다. 전통 주력 산업인 수산, 조선, 항만물류는 물론이고, 해양금융, 해양에너지, 해양바이오, 해양기후 등 넓혀갈 수 있는 영역들이 다각도로 많다. ‘노인과 바다’라는 비아냥에나 쓰였던 바다가 부산에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줄 ‘내 안의 보물’이란 걸 새삼 깨닫고 있는 듯 하다.
이 중 금융은 특히 해양산업 확장의 핵심 동력이다. 조선업과 해운업, 항만물류 등 굵직한 해양의 영역들은 모두 대규모 자본이 오랫동안 묶여 있어야 해 선뜻 돈을 넣기가 쉽지 않은 구조인데, 그 사이사이에 개입해 자금이 원활하게 돌 수 있게 하는 것이 해양금융의 역할이다. 자금에 숨통이 트이면, 산업에도 활기가 돈다. 예컨대 최근 부산은행이 지역 중형조선사인 HJ중공업에 1억 6400만 달러에 이르는 대규모 선수금환급보증(RG)를 발급해주면서 선박 건조 계약이 원활히 진행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금융 분야에서는 해양금융을 마중물 삼아 부산을 세계적 해양도시로 키워보자는 고무적인 분위기가 감지된다. 물 들어올 때 배를 저어야 한다는 것이다. BNK부산은행은 조직개편을 통해 선박금융팀을 해양금융부로 격상시키고 본격적인 해양금융 시대 채비를 하고 있다. 부산은행은 그전부터 산업은행에 있던 선박금융 전문가를 스카웃 하는가 하면, 민간은행 중 유일하게 선박금융팀을 꾸린 곳이기도 하다. 공공 영역에서는 한국해양진흥공사가 해양금융을 이끌고 있고, 최근 동남권을 해양금융과 물류의 전진기지로 키우겠다며 북극항로 종합지원센터를 신설했다.
해운사, 조선사들이 부침을 겪는 동안 우리나라 해양금융도 많이 위축이 됐는데 그나마 부산에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고, 꾸준히 양성되고 있다. 부산국제금융진흥원의 해양금융센터는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과 협약을 맺고 해양금융 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개발에 힘을 합치기로 했다.
금융업계에서는 특히 HMM 부산 이전에 기대를 크게 걸고 있다. 해운, 조선, 선박금융기관, 화주 등 해양금융의 주역들이 모두 부산에 모이게 되는 건 물론이고, 해양법률과 서비스 등 관련 산업들도 부산으로 와 산업 전반이 확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전문가는 해수부 이전보다 부산에 더 좋은 것이 HMM 이전이라며, 한마디로 “거대 자본 덩어리가 내려오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싱가포르는 국가 정체성을 포트 시티(Port City)로 밀어붙인 덕분에 굳건한 해양도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르웨이도 해양기술과 조선업을 바탕으로 재생에너지 강국의 길을 걷고 있다. 부산이 조선, 해운, 해양에너지 기업의 자금 조달 허브가 된다면 한국은 물론 글로벌 투자자들도 너도나도 부산을 찾게 될 것이다. HMM 유치를 위한 적극적인 노력과 함께 해양금융을 위한 조례와 예산 마련, 직제 개편 등 부산시의 더욱 적극적인 행정을 기대한다. 노인과 바다라지만, 부산의 힘은 언제나 노익장 같은 바다에서 나온다.
이현정 경제부 차장 yourfoot@busan.com
2025-08-20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