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그림자 무사와 진짜 일꾼

김길수 기자 kks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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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정당 갑옷 뒤에 숨은 허상 공천
계파 정치가 길러낸 가짜 주역
밀실 공천… 무너지는 지방자치
실체들의 경연으로 나아갈 때

오는 21일부터 6·3 지방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다. 그러나 선거의 막이 오르기도 전에 전국 곳곳은 공천 잡음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중앙당의 밀실 공천, 특정 인맥에 기대는 사천 논란, 모호한 경선 기준은 지방자치의 본령을 훼손하며 유권자의 신뢰를 흔들고 있다. 1980년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세상에 내놓은 영화 ‘카게무샤’는 권력의 본질에 대한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보고서다. 다케다 신겐이라는 전설적인 맹장의 죽음을 숨기기 위해 투입된 도둑 출신의 그림자 무사. 그는 주군의 목소리와 걸음걸이, 심지어 내밀한 버릇까지 복제하며 적들을 기만한다. 영화 속에서 그림자 무사는 잠시나마 다케다 가문의 영광을 연장하는 데 성공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승리는 철저히 ‘타인의 권위’를 빌려온 연극에 불과했다.

이 서사가 오늘날 한국 정치, 특히 6·3 지방선거를 앞둔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경고는 서늘하다. 영화 속 카게무샤는 주군의 존재가 지워지는 순간, 혹은 그를 지탱하던 갑옷이 벗겨지는 순간 한낱 미천한 존재로 돌아간다. 지금 대한민국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방선거 공천 과정은 어떠한가. 우리는 지역을 위해 헌신할 ‘진짜 인물’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거대 정당이라는 붉고 푸른 갑옷을 입은 ‘그림자 무사’들의 행렬을 보고 있는가. 한국 정치사에서 ‘그림자’의 역사는 뿌리가 깊다. 군사정권 시절, 최고 권력자 눈에 들어 발탁된 이들은 스스로의 정책적 비전이나 철학보다는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는 확성기 역할에 충실했다. 그들은 독자적인 대중 기반 없이 주군의 권위에 기생하며 권력을 누렸으나, 주군이 퇴장하는 순간 그들의 정치적 생명도 함께 증발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른바 ‘계파 정치’는 수많은 카게무샤를 양산했다. 특정 계파 수장의 사진을 명함에 박고,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지역구를 누비는 정치인들에게 독자적 비전은 사치였다. 그들에게 정치란 주민과의 소통이 아니라, 수장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공천장이라는 ‘대리 허가증’을 받아내는 기술에 가까웠다. 이러한 후광 정치는 정치인의 자생력을 앗아갔고, 한국 정치를 인물 중심의 대결이 아닌, 세력 간 진영 논리로 퇴행시켰다.

공천권이라는 막강한 칼자루를 쥔 중앙 정치권 앞에서 지방선거 후보들은 한 명의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정당의 명령을 수행하는 병사로 전락한다. 현재의 공천 시스템은 후보자들에게 ‘지역사회와 소통’보다 ‘공천권자와 친분’을 강요한다. 지역 현안을 해결할 혁신적인 정책을 고민하기보다, 당내 파벌 싸움에서 어느 줄에 서야 살아남을지를 먼저 계산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 후보 개인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정당의 기호와 당색만 남는다. 유권자들은 후보 얼굴을 보기 전에 정당 로고를 먼저 보게 되며, 이는 결국 ‘사람’이 아닌 ‘그림자’를 선택하는 기형적인 투표로 이어진다.

영화 ‘카게무샤’의 클라이맥스는 그림자 무사가 전장에 나섰을 때다. 그는 주군의 위엄으로 군사들을 통솔하려 하지만, 실질적인 전술 역량이 요구되는 긴박한 순간에 그의 허상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지방자치 현장도 마찬가지다. 정당 공천이라는 갑옷을 입고 당선된 후보들은 임기 시작과 동시에 한계에 부딪힌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고령화 문제, 교육 격차, 지방 소멸 위기 등은 정당 구호나 중앙 정치 논리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스스로의 철학과 정책 비전 없이 당선된 ‘그림자 시장·군수·구청장’들은 중앙 정치 바람이 바뀔 때마다 흔들린다. 그들의 지지 기반은 지역 주민이 아니라 중앙당 지지율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당 인기가 떨어지면 그들은 방어 기제도 없이 몰락하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 주민의 몫이 된다.

정당이라는 외피를 벗었을 때, 과연 지역을 이끌어갈 실질적인 역량이 있는지, 아니면 그저 권력을 좇는 텅 빈 갑옷에 불과한지 판별해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주군의 죽음이 탄로 나고 쫓겨난 그림자 무사는 다케다 가문의 깃발이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목격하며 절규한다. 그가 지키려 했던 것은 주군이었을까, 아니면 주군을 연기하며 누렸던 잠시의 권력이었을까. 교훈은 명확하다. 권력의 외피만으로는 체제를 유지할 수 없으며,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는 달은 태양이 나타나는 순간 사라진다. 이번 6·3 지방선거는 ‘그림자들 연극’이 아니라 ‘실체의 경연’이 돼야 한다. 이제 무대 위 가짜 주역들을 내려오게 하고, 진짜 일꾼을 세워야 할 시간이다. 지방자치 주인공인 유권자의 참여와 심판만이 그 열쇠다.



김길수 기자 kks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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