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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부산·경남 행정통합 재추진의 현실과 조건
전국 곳곳에서 행정통합의 바람이 또 거세게 불고 있다. 국가적 화두가 된 수도권 일극 체제의 타파를 위한 방안으로 광역지자체 간 행정통합이 떠오르면서 여기저기서 관련 논의가 활발하다. ‘부울경 특별연합(메가시티)’ 무산의 쓰라린 기억이 있는 부산시와 경남도 역시 최근 대구시와 경북도의 행정통합 추진에 자극받아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두 지자체는 공론화위원회까지 출범시키며 통합 의지를 과시했지만 실질적인 통합 여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울산을 제외하고 행정통합 재추진에 나선 부산·경남의 승부수가 과연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그 조건과 변수를 살펴본다.
행정통합 공론화위원회 출범
부산·경남의 행정통합 재추진은 올해 6월 17일 박형준 부산시장과 박완수 경남지사가 부산시청에서 만나 ‘미래 도약과 상생 발전을 위한 공동합의문’을 발표하면서 다시 공식화됐다. 두 단체장은 이후 연내에 행정통합을 위한 공론화위원회 발족을 약속했는데, 이에 따라 지난 8일 공론화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더불어 ‘부산·경남 행정통합 기본구상 초안’도 함께 내놨다. 통합 지향점은 ‘대한민국 경제수도’, 방향은 주민 의사를 최우선으로 하는 ‘상향식 통합’으로 정했다.
행정통합 기본구상 초안으로는 우선 두 가지의 ‘계층제’ 방식이 제시됐다. 광역 단위인 도와 시를 폐지하고 새로운 통합 지방정부를 설치하는 ‘2계층제’와 반대로 도와 시는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이를 관할하는 상위 지방정부인 ‘준주(準州)’를 설치하는 ‘3계층제’ 모델이다. 두 모델 모두 혼란을 최소화하고 통합의 실효성을 높이려는 방식이지만 기초지자체와 광역지자체, 상위 지방정부인 준주 간 권한과 책임의 분배에 있어서 여전히 많은 부분이 모호해 적잖은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내년 12월까지 권역별 토론회, 전문가 토론회, 여론조사 등을 거쳐 행정통합 최종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공론화위원회가 어떤 최적의 해법을 내놓을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전제 조건은 압도적 주민 동의
경제수도 비전과 지역균형발전 필요성 등 온갖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부산·경남의 행정통합 재추진의 최고 관건은 압도적인 주민 동의와 정부 협조에 달려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첫 관문은 부산시민과 경남도민의 통합에 대한 여론 확인이다. 공론화위원회는 내년 상반기 중 여론조사로 이를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서 양 지역민의 찬성 의견이 높게 나오면 통합 특별법 제정 등을 비롯해 구체적인 통합 시점의 윤곽도 드러나면서 전체 추진 과정에 속도가 붙게 된다. 핵심은 찬성 여론이 우세해도 압도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이후 절차인 행정통합특별법 제정을 포함해 통합 지방정부에 필수적인 자치입법권 등 5개 분야 20개 특례와 관련된 정부 권한의 대폭적인 이양 요구에 힘이 실린다. 높은 찬성 여론은 당연히 여야 정치권에도 적잖은 압박 요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찬반 여론이 비슷하거나, 혹 반대가 더 많다면 통합 재추진은 동력을 잃게 되고 행정력 낭비 등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의 관심도 크게 떨어지면서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공론화위원회는 초기부터 찬성 여론을 어떻게 끌어올릴지 모든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행정통합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은 이미 지난해에도 매우 낮은 것으로 조사돼, 이번 재추진 과정에서도 최대 난제로 꼽힌다. 지난해 7월 부산시와 경남도의 발표를 보면 양 지역민의 69.4%는 행정통합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행정통합 자체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45.6%)이 찬성(35.6%)보다 높았다. 반대 이유로는 ‘통합의 필요성이나 당위성이 적다(50.5%)’가 절반을 넘었다. 불과 1년여 전의 주민 여론이지만 재추진을 선언한 지금이라고 해서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주민 인식과 여론 변화를 위한 양 시도의 구체적인 노력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행정통합 재추진도 그 출발 여건은 그리 우호적인 게 아닌 셈이다.
정부의 권한 이양도 관건
압도적인 주민 찬성 이후에는 정부의 협조 여부가 또 관건이다. 공론화위원회가 통합 지방정부에 필수적이라고 꼽은 자치행정·입법권, 자치재정·조세권, 경제·산업육성권, 국토이용·관리권, 교육·치안·복지권의 5대 분야는 정부가 자기 권한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어서 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현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통합 지방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밝히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권한을 쥐고 있는 중앙정부 부처 관료들의 속마음은 이와 다를 수 있어 결코 정부 권한의 순조로운 이양을 장담할 수 없다. 특별법 제정으로 실질적인 권한 이양을 강제해야 하지만 현재 국회 내 여야의 권력 구조상 이를 보장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역시 최종적으로는 지역민의 압도적인 찬성 여부에 따라 그 향방이 갈릴 것이다.
메가시티 트라우마와 선거 변수
부산·경남 행정통합 재추진 소식을 들은 지역민이라면 누구라도 2년 전 부울경 특별연합, 즉 메가시티 좌초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당시 문재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2023년 1월 공식 출범을 눈앞에 뒀던 메가시티가 5년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이유야 어쨌든 메가시티를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었던 당사자들이 다시 행정통합을 추진한다며 공론화위원회까지 출범시켰으니 언뜻 지역민들도 다소 혼란스러울 듯하다.
아마도 행정통합 재추진의 실질적인 시작은 메가시티 트라우마의 극복과 연결돼 있다고 여겨진다. 공론화위원회가 내년 말까지 최종 통합안을 내놓는다고 해도 이 부분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지역민의 마음속에 예전 트라우마는 언제든지 또 나타날 수 있다. 통합에 대한 의구심이나 열패감을 늘 느끼고 있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면 이번 시도 역시 두 광역지자체장의 ‘정치쇼’의 일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부산시와 경남도는 언제까지 통합을 완료하겠다는 시점을 못 박지 않았다. 주민 동의가 중요한 만큼 이를 지켜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반면 대구시와 경북도는 2026년 7월 1일 출범을 목표로 통합을 추진 중이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이 2026년 6월 3일임을 감안해 통합 지방정부의 출범 시한을 정한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대구·경북과 비교해 완료 시점을 특정하지 못한 부산·경남은 통합에 대한 자신감이나 확신이 다소 약한 게 아니냐는 생각은 숨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 시작한 통합 재추진이 행여 2026년 지방선거의 정치적 종속 변수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2024-11-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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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한강 작가 <소년이 온다> 일본어로 옮긴 이데 슌사쿠 번역가를 만나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작가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를 요약하는 한 구절이다. 작가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다루면서도 고발하거나, 투쟁하지 않는다. 대신 살아남은 자들의 트라우마를 드러낸다. ‘내 삶이 장례식’이라는 짧은 표현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독후감이 많다. 스웨덴 아카데미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는 선정 사유에 부합하는 구절이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거의 매일 울었다”고 회상했다. 번역가라면 어땠을까? 일본어판을 맡은 이데 슌사쿠(76·井手俊作) 번역가 역시 “번역하다가 울고, 그래서 쉬었다가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데 번역가는 한강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꼽았다.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인간의 심성은 인류에 보편적이다. 시대적 상황과 언어, 국경을 넘어서는 데 한강 작가의 문학적 성취가 있다.
일본 후쿠오카에 본사를 둔 〈서일본신문〉 기자 출신으로 2009년 정년 퇴직 후 본격적으로 한국 문학 작품을 일본에 소개하고 있는 이데 번역가를 화상으로 만났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전문 번역가의 세계에 발을 내디뎌 지금까지 최인호, 한승원·강 부녀 작가의 작품 4권을 일본에서 출간했고, 번역을 마친 미발표 작품도 몇 권이 있다. 그는 왕성한 활동의 비결을 묻자 “한국어가 평생의 애인”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 “한강 작가, 섬세함과 강인함 겸비”
한강 작가는 연세대 동문 선배인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과 〈병원〉을 좋아한다고 했다. 일본의 여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윤동주 시어에 감동해 번역·출판을 자처했다. 그는 ‘겉으로 약해 보이면서 피아노선처럼 팽팽하게 튕겨진 투명한 서정성’에 주목해 윤 시인을 일본에 알렸다. 이데 번역가는 “한강 작가도 겉으로는 상냥하고 섬세한 듯 하지만 피아노선처럼 투명하고 강인한 서정이 관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섬세함과 강인함. 이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겸비한 한강 작가는 감성이 풍부한 소설 언어가 특징적인데, 이 점이 다른 한국 작가와 차별화된다고.
또 한강 작가의 가계에 흐르는 시혼도 빼놓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강 작가뿐만 아니라 아버지 한승원 작가도 시인으로 활동했다. 아버지 한 작가의 〈저녁 노을〉을 사례로 들었다.
‘너,/ 가버린 사랑 때문에 오늘 / 하루 내내 슬픔 / 울분 못견디고 / 혀의 입술 깨물어 뜯어 / 머금었던 피 / 한꺼번에 뿜어 / 뿜어 놓았구나.’
슬픔, 울분, 체념 등 마음 속 응어리가 풀리는 서정이 붉은 석양에 겹쳐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시다. 이런 부친의 시혼을 딸이 계승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데 번역가는 한강 작가의 서정과 문체에 주목해 “언젠가 노벨상을 받을 거라 예감했다”고 밝혔다. 한편,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이 정해진 뒤 축하 행사나 기자 회견을 자제한 것을 두고 한강 작가다운 선택이라고 했다. 부조리한 폭력에 고통받는 인간의 본질을 파고든 작가로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 ‘소년이 우리에게 와 주었다’
〈소년이 온다〉는 2015년 한국문학번역원의 응모에 뽑혀 이듬해 일본에서 출간됐다. 응모 때 나이는 67세. 대다수 번역가가 한국 유학 경력이 있는 비교적 젊은 여성인데 반해 은퇴한 남성 번역가는 전례가 없다. 한강 작가와의 나이 차이도 무려 22세다. 응모 심사의 조건은 책의 4분의 1 분량을 번역해서 제출하는 것이다. 경력은 감안되지 않은 채 오로지 번역문 심사로 통과했다. 그의 후배 기자들은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는 동안 정평이 난 수려한 문장이 통한 것”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이 온다〉 번역 초기엔 궁금한 게 있으면 한강 작가와 이메일로 소통했지만 이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상하게도 일본어로 옮기는 데 그리 어렵지 않게 됐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원문이 지극히 명징해서 번역의 선택지가 달리 없었다”는 것이다.
번역 과정은 한강 작가와의 텔레파시 공명이었다. 한강 작가는 ‘이 세상에 왜 폭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의 끈을 놓지 않으며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집필 과정을 인내했다. “세 줄 쓰고 한 시간 울었다”는 한강 작가의 경험을 이데 번역가도 겪었다.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성”일 텐데, 이 점이 한강 작가의 문학이 전 세계적인 공감을 얻는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기억은 쉬이 휘발되기 마련이다. 희생자의 아픔이나 원통함도 결국 잊힌다. 하지만 때로는 기억해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 〈소년이 온다〉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마법 상자라는 게 이데 번역가의 생각이다. “40년도 더 된 사건의 주인공인 소년의 영혼이 지금의 우리 곁으로 와 준 것이 아닐까요?”
■ 부산, 윤동주, 한강 작가와의 인연
이데 번역가는 15살 까까머리 소년일 때 부산 라디오 방송의 단골 청취자였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의 월경 전파가 쉽게 잡히던 시절이다. 중학교 과학반에서 만든 자작 진공관 라디오가 밤마다 미지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었다. 한 여성 아나운서의 미려한 음색은 소년을 짝사랑에 빠뜨렸다. 종결 어미 ‘~입니다’의 ‘다’가 가슴 깊이 울렸다. 일본어 종결 어미 ‘타’와 느낌이 달라 “한국어는 아름다운 언어”라는 인식을 남겼다.
미지의 언어를 본격 배운 건 그가 볼혹에 접어들 때다.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1974년 서일본신문사 수습 기자로 입사한 그에게 한글을 익힐 기회가 찾아왔다.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취재가 필요하자 사내에서 한국어 학습을 독려했던 것. 한글을 깨친 다음 한국 문학을 지면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1994년 ‘빼앗긴 시혼 - 윤동주의 삶과 죽음’ 15회 연재가 출발점이었다.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후쿠오카형무소가 그의 집에서 지척이었다. 윤동주 기획은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가책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이 한국 문학에 주목하지 않던 분위기 속에 고군분투했다.
2009년 정년 퇴직 후 늦깎이 번역가로 변신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공모에 최인호의 〈타인의 방〉과 〈몽유도원도〉가 연거푸 선정돼 일본 독자에게 소개됐다. 2014년 전남 장흥에서 열린 이청준문학제를 취재해 ‘한(恨)과 생(生)-장흥, 한국 문학의 수맥’ 연재를 〈서일본신문〉에 게재했다. 이때 한국 작가들을 두루 만났는데 그중 한승원 작가 인터뷰가 인연이 됐다. 아버지 한 작가가 자신의 모친을 모델로 쓴 〈달개비꽃 엄마〉를 번역하게 된 것이다. 100세를 앞두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질긴 생명력과 사랑에 대한 서사다. 당시는 딸의 〈채식주의자〉가 국내외에서 주목받던 때다. 이때 이데 번역가는 ‘승어부’(勝於父), 즉 아버지를 넘었다는 말을 듣고는 딸 한 작가의 작품에 파고들게 된다. 그 결과 부녀 작가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긴 번역가가 됐다.
틈틈이 번역한 작품 몇 점을 서랍 속에 묵히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일본 독자들에게 꼭 선보이겠다고 다짐했다. 힘 닿는 데까지 한국 문학을 더 번역하고 싶다고 되뇐다. 한국어를 평생 사랑했기 때문이다.
2024-10-3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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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특별건축구역, 부산 건축에 자극제 되려면
부산시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참여하고 있고,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되면 혁신적인 설계안이 실현될 수 있도록, 건폐율, 용적률, 건축물 높이 제한 등의 건축규제 완화는 물론이고 행정 절차 간소화 등 행정적인 지원 혜택이 주어져서다. 이에 세계적인 건축가의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설계안을 통한 도시 경쟁력 강화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지역 건축가의 역할 감소와 경쟁력 약화라는 지적과 함께, 특별건축구역 인센티브가 자칫 오용될 경우 도시경관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아왔다. 이런 엇갈린 시선과 평가 속에서 18일 부산시청 대강당에서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 후보지에 대한 세계적 건축가들의 디자인 발표와 심사가 공개 진행된다.
시범사업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은 뒤로 하고, 이왕 하는 거 이제는 잘해야 한다는 것만 남았다. 여기서 ‘잘해야 한다는 건’ 무엇보다 기획 설계작(안)도 좋아야 하지만, 부산 도시 건축에 있어서 신선한 자극제가 될 만한 작품을 잘 선택(심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아온 지역의 가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음에도 단지 세계적 건축가라는 명성에 짓눌려 무분별하게 시범사업지로 선정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 어떤 설계작 들어왔나
시범사업 후보지와 각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세계적 건축가(18일 발표순)는 △용두골 복합시설-2포잠박(2Portzamparc) △미포 오션사이드호텔-오엠에이(OMA) △남포동 복합타운-엠브이알디브이(MVRDV) △영도 콜렉티브힐스-엠브이알디브이(MVRDV) △남천2구역 재건축정비사업-도미니크 페로 아키텍처(DPA)이다. 반여 오피스텔(마이어 파트너스) 사업은 기획 설계안 제출 마감 기한 내에 전시용 모형이 제출되지 않아 공개 발표만 한다.
후보지 용도는 호텔, 오피스텔, 레지던스, 복리·공공시설, 아파트 등 다양하다. 이들 후보지 설계작에 대한 총평을 하자면 아쉽게도 디자인적 측면에서 깜짝 놀랄만한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왜 이런 설계를 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도시 맥락적 차원의 근거 제시도 부족해 보였다.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도시 맥락을 읽어내기에는 현실적 한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다만 건축물의 입체감이나 신선함은 있었다.
이번 사업의 보조사업자로 참여하는 (사)부산국제건축제조직위원회의 이성호 집행위원장은 “세계적인 건축가와 손잡고 하는 것은 지역 건축사나 건축가들의 작품 퀄리티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지역 건축계와 시민에게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 위함이다”고 말했다.
후보지 설계작 심사는 18일 오후 5시부터 1시간가량 부산시 미래건축혁신위원회에서 한다. 심사 위원은 국내 6명, 국외 2명을 포함해 모두 8명으로 구성돼 있다. 심사 위원들은 디자인(안), 특례 적용 사항, 공적 기능, 지역과의 연계성 등을 중점적으로 평가한다. 이와 함께 20여 항목으로 구성된 ‘특별건축구역 지정 심의 체크리스트’도 평가 기준이 될 예정이다. 이 체크리스트는 대체로 공공성 평가에 무게를 두고 있다. 요컨대 ‘사회적 공공성’ 평가 항목으로는 자원 재이용·재생 촉진, 주변 경관 및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디자인을 요구한다. 이 외에도 새로운 공간 구성이나 건축 기술 도입, 기존 공간 환경과의 조화와 균형, 외부와 공유하는 지역 커뮤니티 또는 공지 조성 등이 주요 검토 사항이다. 심사 결과는 오는 22일 시 설계 공모 누리집을 통해 발표될 예정이다.
■ 지역 정체성 제대로 담아내길
부산시는 세계적 건축가들의 기획 설계를 통해 조화롭고 창의적인 건축물 디자인을 구현하고, 이를 통해 시민 생활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겠다는 계획이다. 부산국제건축제조직위원회는 “이번 시범사업에서 필요로 하는 작품은 혁신적인 디자인 그 자체”라면서 “새로운 디자인 방식이 제시되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혁신적인 디자인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곤 할 수 없다. 지역 건축계에서는 이에 못지않게 부산의 정체성과 매력을 잘 살린 설계안을 기대한다. 해양도시 부산의 독특한 정체성과 매력을 잘 살리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작품이 선정되길 바란다. 건축은 환경 안에 놓여 있고, 환경을 형성하며, 도시 환경과 대화한다. 디자인적 심미성도 중요하지만 도시 경관의 조화는 어쩌면 더 중요할 수 있다.
지역의 한 건축가는 “특별건축구역 선정작은 디자인과 건축가의 명성보다도, 지역성에 걸맞은 독창성이 우선됐으면 좋겠다. 즉 장소의 적합성에 부합되는 기능, 형태 그리고 공공공간의 아이디어 등 종합적으로 판단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별건축구역 지정 심의 체크리스트에도 담겨 있지만, 건축의 공공성은 충분히 고민되고 고려돼야 한다. 우리가 도시나 건축의 공공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도시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건축의 관점이 아니라 도시(Urban)의 관점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유지가 지배하는 도시 공간에서 공동체의 가치, 공유와 공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건축물을 보고 싶은 게 시민의 열망이다. 이런 건축물이 많을 때 그 도시는 ‘더불어’ 사는 삶을 구현하는 도시가 될 것이며,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지속가능한 도시의 참모습이 될 것이다. 강기표(아체 ANP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는 “세계적인 건축가라는 명성에만 의존해 명품백 하나 가진다는 내세우기식 사업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 부산 건축 도약 계기 되어야
부산시의 특별건축구역 시범사업은 천편일률적인 아파트나 성냥갑 건물을 막자는 의도여서 실험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각종 건축규제 완화 혜택은 도시 개발을 부추기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자칫 이 사업이 사업성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곤란하단 얘기다. 특별건축구역 지정으로 특색 있는 개발을 하면 낙후된 원도심을 재탄생시킬 수 있지만, 이미 그 지역엔 그와 상관없이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건축구역 시범지역 선정에 대한 종합적이면서도 일관된 철학이 요구되는 이유다. 이를 제어하지 못하면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다. 점(건축물)은 훌륭한데 선(주변 경관)을 해치는 건물만 남을 수 있다. 해안가를 점령한 나 홀로 초고층 건물이 그 증거다.
이번에 시범사업지를 선정해 놓으면, 그다음은 비슷한 작품이 나왔을 때 안 해 줄 수 없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합의 또는 용인될 수 있는 후보지가 선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뒷말이 없다. 설계작이 들어섰을 때 주변 경관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충분히 검토돼야 한단 얘기다.
이번 사업을 계기로 부산 건축이 한 단계 도약하려면, 시는 ‘세계적 건축가들이 과연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우리의 가치나 우리 지역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칫 ‘한국 건축가들은 별 볼 일 없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던져줄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여하튼 이번 시도가 부산 도시 건축에 신선한 자극제가 됐으면 한다. 더불어 이번 사업이 부산의 미래를 이끌어 갈 중요한 전환점이 되길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멋진 건축물이 최우선이 아니라, 부산의 정체성을 반영한 창의적인 디자인이면서 소통의 공간을 제공하는 건축물이 선정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4-10-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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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7광구' 2028년이면 일본에 넘어가나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 가능성으로 주목받는 ‘7광구’ 공동개발을 놓고 한일 간 막판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지난달 27일 도쿄에서 한일대륙붕공동개발협정에 따른 6차 한일공동위원회가 39년 만에 열렸다. 1978년 발효된 협정은 2028년 6월 22일 종료된다. 2025년 6월 22일부터 양국 중 일방이 협정 종료를 통보할 수 있다. 통보 기한을 9개월 남겨 두고 양측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것이다. 우리는 협정 지속을 통한 현상 유지를 바라지만 일본은 종료를 통보할 가능성이 높아 양국 간 합의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향후 한일 간은 물론이고 중국까지 가세해 7광구를 둘러싼 해양 영유권 분쟁 삼국지가 전개될 공산이 크다.
■ 기회의 땅 7광구 산유국 부푼 꿈
7광구는 제주도 남쪽 200㎞ 지역에서 일본 서쪽에 걸쳐 있는 8만 2000㎢ 마름모꼴 대륙붕 지대로 우리 국토 면적의 80%에 달하는 넓은 해역이다. 유엔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는 1969년 에머리 보고서를 통해 동중국해 대륙붕의 세계 최대 석유 매장 가능성을 발표했다. 같은 해 국제사법재판소는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이 분쟁 중이던 북해대륙붕 판결을 통해 ‘대륙붕 연장설’에 손을 들어줬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대륙붕 연장설에 입각한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을 공포하고 7광구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다. 7광구와 더 인접한 일본은 반발했다. 당시 시추 기술과 자본력에서 취약했던 한국과 국제법 논리에 밀리던 일본의 이해가 맞물려 1974년 7광구를 한일대륙붕공동개발구역(JDZ)으로 설정하는 협정을 체결했고 4년 뒤 발효됐다. 정부의 대대적 홍보 속에 국민들의 산유국 꿈도 부풀었다. 이즈음 정난이의 노래 ‘제7광구’가 앨범 발매와 함께 히트하며 국민적 열망을 반영했다.
■ 달라진 국제해양법, 일본의 속셈
협정 발효 후 양국은 공동개발에 나서 7개의 시추공을 뚫었고 3개에서 소량이지만 석유를 발견했다. 하지만 일본은 1986년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탐사 중단을 선언한 후 지금껏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협정 당시 ‘양국이 공동으로 시추·탐사를 수행해야 한다’는 독소 조항에 걸려 우리의 독자적 탐사도 힘든 상황이다. 일본 ‘침대 축구’에 속수무책인 꼴이다. 2002년까지 일부 공동 탐사가 진행되기도 했으나 본격적 시추가 필요하다는 우리 입장과 경제성이 없다는 일본 주장이 번번이 맞서 산유국 꿈도 희미해져 갔다.
일본의 소극적 태도 전환에는 국제해양법 변화에 따른 얄팍한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으로 배타적경제수역(EEZ) 개념이 도입돼 일본에 우호적 국면으로 바뀐 것이다. 대륙붕 연장이 아니라 육지 기준 200해리 EEZ를 인정하면 일본에 유리해진다. 한국과 일본은 EEZ가 중첩될 수밖에 없는데 ‘등거리 원칙’에 따라 중간선을 설정하면 7광구 90%가 일본 수역에 쏠린다.
■ 석유·천연가스 매장 가능성은
2005년 미국 우드로윌슨센터는 보고서를 통해 동중국해 천연가스 매장량을 사우디아라비아의 10배, 석유 매장량을 미국의 4.5배인 1000억 배럴로 추정했다. 배럴당 70~80달러로 계산하면 약 9000조 원에 이르는 경제적 가치다. 2002~2004년에는 한국석유공사가 7광구 일부 지역을 물리 탐사한 뒤 “원유 3600만 톤이 묻혀 있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7광구 대규모 석유 자원 실재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탄성 조사 결과 예상보다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7광구 전역 시추 등 객관적 탐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유가 상승과 기술 개발 등 환경 변화도 감안해야 한다. 중국은 7광구 서측으로 3개 유전을 운영 중이다. 구체적 매장량을 공개하고 있지 않지만 파이프로 원유를 운반하는 것을 감안하면 대규모로 추정된다.
■ 2028년 이후 7광구의 운명은
우리 정부는 2020년 석유공사를 조광권자로 지정하고 일본도 조광권자를 정해 공동 탐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코로나19 등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협정 종료를 앞두고 협상 테이블에 나왔지만 우리 입장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협정이 종료된다고 일본으로 영유권이 당장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경계 미획정 구역이 된다. 일본이 일방적으로 시추 등 영유권 행사에 나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쟁지역화할 경우 등거리 원칙과 일본 외교력을 감안하면 우리에게 결코 유리할 수 없다. EEZ 도입 후 1998년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에서 7광구 대부분이 일본 수역에 편입되고 제주분지를 따라 일부 지역만 공동관리수역으로 정한 전례도 있다.
중국이 더 문제다. 중국은 한일 JDZ 설정 때부터 반발했다. 협정이 종료되면 노골적으로 영유권 확장에 나설 공산이 크다. 동중국해 중국 수역과 7광구 제주분지(중국명 시후분지)가 연결돼 중국 시추 확장에 따른 ‘빨대효과’로 7광구 자원이 빨려 들어갈 우려도 있다. EEZ 등거리 원칙을 내세우며 한국을 배제하고 일본과 중국이 공동으로 탐사를 도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우리 정부 외교력 총동원해야
7광구는 해양 자원은 물론이고 안보 차원에서도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로서는 현 JDZ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외교력과 국제적 명분, 창의적 해법을 총동원해야 하는 상황이다. 시간도 우리 편이 아니다. 우리의 협정 이행 노력과 일본의 소극적 대응에 따른 신의성실 문제 등 국제법상 명분을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 측 공동 탐사 요구에 대한 일본 측의 대응도 하나하나가 분쟁 상황에 대비한 계산된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한미일 동맹을 지렛대로 이용하는 외교력도 필요하다. 7광구가 경계 미획정 구역이 되고 중국이 이를 교두보로 태평양 진출을 노골화하는 것은 미국도 결코 바라는 일이 아니다. 중국의 동중국해 영향력 확대는 일본으로서도 골치다. 외교적 역학관계로 얽혀 있고 그 속에 해법이 있을 수 있다.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감안하면 무엇보다 우리의 외교 역량 강화가 중요하다. 7광구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심과 정보 확보 등 면밀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한일어업협정 때 외교 역량 부족으로 일본에 당한 뼈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부산대 지질환경과학과 김기범 교수는 “7광구 중에서도 제주분지가 이어지는 4소구, 2소구가 석유 자원 매장 가능성과 관련해 핵심적 지역이고 다행히 우리 영해에서 가깝다”며 “해양 영유권은 과거사 문제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문제인 만큼 엄중하고 면밀한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24-10-0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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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세계유산 관리, 이대로 둘 것인가
지난해 9월 17일 일부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경남 김해시 대성동, 경남 함안군 말이산, 경남 합천군 옥전, 경남 고성군 송학동, 경남 창녕군 교동·송현동, 경북 고령군 지산동, 전북 남원 유곡리·두산리의 고분군이 그것이다.
하지만 축제 분위기도 잠시, 지금 해당 지자체들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세계유산이 된 가야고분군들을 누가 관리하느냐를 두고 다투는 것이다. 정확히는 ‘가야고분군 통합관리기구’(이하 통합관리기구)를 어느 지자체가 유치하느냐의 다툼인데, 국가유산청을 비롯한 중앙정부는 수수방관하고 있어 좀체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차제에 세계유산의 관리 체계를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해시-고령군의 다툼
다툼의 주역은 김해시와 고령군이다. 김해시는 통합관리기구의 김해 설치를 촉구하는 건의문을 지난달 23일 국가유산청에 제출했다. 건의문은 김해시장만이 아니라 함안·창녕·고성·합천의 지자체장까지 참여한 공동 건의문이었다. 거기다 “통합관리기구의 김해 설치를 지지한다”는 경남도의회, 가락종친회의 입장문도 포함됐다. 지난 2일에는 김해시의회가 통합관리기구의 김해 설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김해시는 지난달 초에는 남원시에도 김해 설치에 대한 지지와 협력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령군은 이런 움직임에 반발하며 실력행사에 나서고 있다. 최근 구성한 ‘통합관리기구 유치 범군민 추진위원회’가 그것이다. 추진위원회에는 고령군민을 비롯해 학계 전문가, 공무원 등이 대거 참여한다. 고령군의회도 지난달 27일 통합관리기구 고령군 설립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같은 두 지자체 간 다툼은 경남도와 경북도 두 광역지자체로 확산할 조짐이라, 이러다 가야고분군 관리가 장기간 표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용역 결과 논쟁만 분분
세계유산이 된 가야고분군은 7개 기초지자체에 걸친 연속유산이라 지자체 간 통합 관리가 필수적이다. 유네스코도 세계유산 등재 조건으로 가야고분군의 통합 관리 체계를 구축할 것을 주문했다. 그에 따라 가야고분군이 있는 7개 기초지자체와 경남도·경북도·전북도 3개 광역지자체로 구성된 ‘가야고분군 통합관리지원단’은 통합관리기구를 지자체 공동의 재단법인 형태로 설립키로 하고, 지난해 8월 한국지식산업연구원에 ‘통합관리기구의 입지 선정과 운영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용역 결과는 올해 7월 발표됐는데, “김해가 최적지”라는 것이었다. 연구원은 입지 선정 지표로 인구, 지방세 규모, 지역총생산, 인구 증가율, 재정 자립도, 인구밀도, 관리 이동거리 등을 활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령군이 해당 결과에 반발하고 나섰다. 인구나 재정 규모 등 입지 선정 지표가 세계유산 관리·보존과는 무관한 데다 지나치게 김해에 유리하게 설정됐으며, 용역 결과 세부 내용도 공개되지 않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고령군은 또 용역 결과가 법적 구속력이 없다면서 통합관리기구가 김해에 들어서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가야냐 금관가야냐
고령군은 통합관리기구는 고령에 설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령이 대가야의 왕도였다는 점, 700여 개의 봉분이 있는 지산동 고분군이 면적이나 고분 수에서 다른 가야고분군보다 월등히 큰 규모라는 점, 국내 최대 순장 흔적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고령이 가야 문화의 대표성을 가지며, 따라서 통합관리기구는 고령에 설치되는 게 합당하다는 논리다. 고령군의 이런 주장에 경북도가 공감을 표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
김해시가 고령군의 이런 주장을 용납할 리 없다. 입지 용역 결과가 나온 만큼 소모적인 논쟁을 그치고 김해에 신속히 통합관리기구를 설치하자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김해가 가야 역사의 시초인 금관가야의 중심지였으며, 따라서 가야의 정체성이 오롯이 배어 있는 곳임을 강조한다. 김해시는 김해는 물론 김해와 인접한 경남 지역에 가야의 주요 유적이 밀집해 있다는 사실도 내세운다. 실제로 전국 가야 유적의 67%가 경남에 집중돼 있고,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가야고분군 7개 중 5개가 경남에 위치한다. 국립김해박물관, 국립가야역사문화센터 등 가야 역사와 문화 연구·보존을 위한 기관을 보유하고 있는 점, 교통망과 기반시설 등 세계유산의 관광자원화에 유리한 환경도 김해시가 내세우는 강점이다.
국가유산청의 수수방관
두 지자체의 다툼이 쉬이 끝날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다툼은 금관가야-대가야 대립 구도를 보이며 경남과 경북의 다툼으로 확대될 조짐까지 보인다. 이런 형편에도 김해시와 고령군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협상하는 대신 사실상 통합관리기구 입지 결정권을 가진 국가유산청에 매달린다. 김해시는 김해를, 고령군은 고령을 통합관리기구 설립지로 확정·발표해 줄 것을 각자 국가유산청에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유산청은 통합관리기구 설립은 지자체 협의사항이라며 수수방관하는 모습이다. 해당 지자체들의 중재 요청에도 조만간 관련 회의를 열겠다는 입장만 밝혔을 뿐, 구체적인 중재 의지는 보여 주지 않는다. 한국지식산업연구원의 연구 용역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진행한 용역이 아니라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해당 용역 결과가 통합관리기구 설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돼 논란을 증폭시킨다. 국가유산청이 이처럼 소극적인 자세로 대응하는 사이 가야고분군 관리 문제는 해법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형국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배가 산으로 가는 꼴”이라는 탄식과 함께 “세계유산 관리능력이 없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체계 정비할 좋은 기회
세계유산은 인류가 함께 보호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갖는다. 유네스코 등재보다 이후 지속가능한 관리 방향을 모색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그에 대한 법적 근거가 아직 불충분하다. ‘세계유산의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특별법’(이하 세계유산법)이 올해 5월 시행됐지만 세계유산협약과 그 운영지침이 규정한 사항을 충족하기에는 여전히 허점이 많은 것이다. 특히 가야고분군처럼 많은 지자체가 관여하는 세계유산의 경우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통합관리가 필요한데도 그에 대한 세밀한 기준과 절차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가야고분군 통합관리기구 설립을 둘러싼 작금의 분쟁도 여기에 기인한다. 통합관리기구를 국가유산청이 간명하게 지정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스스로 직영하면 좋을 텐데, 관련 조건이 까다롭고 책임 소재 등이 불분명하다 보니 각 지자체에 책임과 역할을 떠넘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사 극적인 타협이 이뤄져 어느 한쪽에 통합관리기구가 설치된다고 하더라도 예상되는 폐해는 많다. 특정 지역 고분군에 대한 관리 계획의 주체, 이해 관계자의 역할과 책임, 지자체 간 재정 부담 비율, 유적 정비 방식 등에서 이견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고, 그럼에도 이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수단이 현행 제도 아래에선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 그렇다. 지자체들이 세계유산을 경제적 이익 창출을 위한 관광자원으로만 여겨 각종 사업을 무분별하게 벌이는 폐단도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다.
세계유산 관리 체계를 새롭게 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그래서 제기된다. 보존에 미비점이 무엇인지, 외부로부터의 각종 개발 압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전문성과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관리기구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등에 대한 해답을 제도적 장치로 확실히 수립하자는 것이다. 세계유산 관리를 놓고 지자체 간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를 제어하고 조율할 중앙정부의 역할과 책임도 확대해야 한다. 가야고분군 통합관리기구를 둘러싼 이번 다툼이 어쩌면 그것을 위한 훌륭한 반면교사이자 다시 오기 힘든 기회인지도 모른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4-09-0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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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영화판 뒤흔드는 AI 영화
영화계가 대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다. 파란의 주인공은 인공지능(AI)이다. 정확히 말하면 AI가 만드는 영화. 카메라나 배우는 필요 없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영상, 음악, 후반 작업까지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이 가능해졌다. 생성형 AI 기술의 진보 덕분이다. 전문가들은 AI가 ‘영화 혁명’의 도구가 될 것이라 전망한다. ‘창작의 민주화’를 기대하는 긍정적 입장이 있는 반면, 예술의 또 다른 퇴행일 뿐이라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 AI 영화 대세론, 어떻게 봐야 하나.
■ AI의 기술적 진보
‘오펜하이머 모멘트.’ 미국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이 지난해 영화 ‘오펜하이머’를 선보이면서 언급한 이 말은 AI가 촉발한 영화판의 지각변동을 적확하게 상징한다. 원자폭탄 같은 새로운 기술의 폭발적 위력에다 애초 의도치 않은 파장의 가능성까지 내포한 순간. 이런 뜻의 오펜하이머 모멘트에는 AI가 원자폭탄에 이어 인류에게 또 하나의 중대한 변곡점이 되리라는 경고와 우려가 담겨 있다.
AI의 기술적 진보는 가위 폭발적이다. 최근 6개월 사이 AI 프로그램의 개발 속도는 쫓아가기 힘들 정도다. 획기적인 이정표는 지난 2월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공개한 생성형 AI ‘소라’다. 문장으로 된 명령어를 입력하면 최대 1분 길이의 고품질 동영상을 만들어 주는데 이 영상을 편집해 3~4분 길이의 영상은 물론 2~3시간짜리 영화, 연속 드라마도 제작 가능하다. 구글도 영상 생성형 AI 경쟁에 가세했다. 지난 5월 공개한 ‘베오’는 영상 생성에다 편집 기능까지 제공한다. 미국 스타트업 런웨이가 6월 출시한 ‘젠-2’와 최신 버전 ‘젠-3 알파’는 업그레이드된 AI 영상 제작 프로그램으로 한층 세밀한 감정 표현과 움직임을 구현해 낸다.
완성도 높은 ‘100% AI 영화’가 나오는 날, 수천억 원이 넘는 제작비 없이도 영화 제작이 가능한 날이 머지않았다. 기술 발전의 속도도 속도지만 AI 영화 수준은 감탄스럽다. 인간을 능가하는 솜씨가 신기함을 넘어 두려움마저 안길 정도다.
■ 영화판 거대한 지각변동
미국 할리우드는 영화 제작에 AI 프로그램을 활용한 지 오래다. 최근의 사례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신작 ‘히어’다. AI 디에이징(나이를 어려 보이게 하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67세 배우 톰 행크스의 19세·25세 외모를 만들어 눈길을 끌었다. 수많은 독립 영화들이 AI로 각종 실험을 하는 미국 영화계는 분위기 자체가 AI에 적극적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주요 국가들과 도시들이 AI 영화를 주제로 다양한 포럼을 통해 AI 시대를 준비 중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도 AI 영화에 대처하느라 부심한 모습이다. 지난 5월 제77회를 맞은 칸은 ‘몰입형 작품 경쟁 부문’을 새롭게 출범시킨 바 있다. 기술 발전에 맞춰 증강현실이나 가상현실 등으로 영화적 체험을 극대화한 영화들을 적극 수용한 것이다. 지난 2월에는 국제AI영화제가 사상 최초로 두바이에서 열렸다. 전 세계 500여 편의 AI 영화가 몰렸는데, 한국인 권한슬 감독의 ‘원 모어 펌킨’이 대상을 차지해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지난 7월 영화제 때 국내 처음으로 ‘AI 영화 국제경쟁 부문’을 신설했다. 부산에서는 영화의전당이 ‘부산국제AI영화제’ 개최를 예고한 상황이다. 전적으로 AI 영화만을 다루는 영화제는 국내 최초라는 점에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올해 12월 개최에 맞춰 이달 1일부터 21일까지 AI 기술로 제작된 작품을 대상으로 공모를 진행한 바 있다. AI 영화가 우리 눈앞의 현실로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하는 풍경들이다.
■ 창작의 민주화냐 예술의 퇴보냐
AI 영화 제작의 가장 큰 장점은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아이디어만 있으면 기술적 재능이 부족하거나 돈 없는 가난한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쉽게 영상을 제작할 수 있다. 영화 제작의 문턱을 낮춰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이른바 ‘창작의 민주화’가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두바이 국제AI영화제 대상작인 ‘원 모어 펌킨’의 경우 3분짜리 단편 영화로 제작 기간은 단 5일에 불과했다. 배우나 성우는 물론 카메라와 녹음, 조명 등 제작 인력마저 한 명도 없었다. 오직 생성형 AI로 모든 장면과 음성을 만든 이 영화는 지난해 국내 처음으로 저작권을 인정받은 AI 영화 ‘AI 수로부인’을 잇는 획기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AI 영화를 진정한 예술로 보기 힘들다는 회의적인 시선도 만만찮다. 다양한 영역이 교차하는 종합예술인 영화는 무수한 참여자들의 철학과 세계관이 어우러지는 창의성의 난장 무대다.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영상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는 AI 영화에서 인간의 총체적 고뇌와 노력이 스민 예술 고유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과학소설 작가 테드 창의 말이다. “합성 텍스트, 합성 이미지는 예술이 되기 어렵다. 예술은 표현의 한 형태인데 인공지능은 스스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나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 하향 평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비슷한 시각이다. 기존 데이터를 활용하는 만큼 평균 이상을 뛰어넘는 결과물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영화산업 전반의 하향 평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근본적으로는 데이터의 단순한 조합과 모방에서 진정한 의미의 창작은 일어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AI 영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부상 중인 문제가 저작권이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복합적인 논란을 야기하는 바, 이를 해결하려면 섬세하고 정교한 법적·윤리적 기준도 필요하다. 지난해 7월 시작된 할리우드 작가들의 대규모 파업 사태가 이를 방증한다. 작가들은 자신의 창작물이 AI 학습 훈련에 무분별하게 쓰이자 거세게 반발했다. 인공지능이라는 또 다른 기계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19세기의 ‘러다이트 운동’을 연상시킨다.
■ 영화도시 부산의 기회?
올해 칸 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조지 루커스 감독의 말마따나 “AI 영화는 피할 수 없는 미래다.” 역사상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미래, AI 쓰나미 앞에서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의 문제’라는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의 사유를 빌리고자 한다. 그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될 때 기존 예술 형식과 내용을 답습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 사용자의 능동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강조했다. 베냐민의 관점은 오늘날 AI 창작 활동을 대하는 태도에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애써 외면하기보다는 주체의 관점에서 AI의 가능성을 면밀히 탐구해야 한다는 얘기다. AI가 예술적 지평 확대와 영화산업의 변화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그 속에서 인간의 창의성과 고유성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 영화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는 영화도시 부산도 이런 관점에서 미래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국내 처음으로 열리는 부산국제AI영화제는 소중한 기회다. AI와 예술의 융합 가능성, 한국적 콘텐츠와 AI의 결합 가능성을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AI라는 영화 물결 앞에서 적극적으로 어젠다를 제시하는 부산의 선도적 역할을 기대한다.
2024-08-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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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항공물류 전성시대, 가덕신공항 미래는
■ 전 세계 항공화물 배송 시장 급신장
“부산에서 살아 있는 방어를 썰어서, 다음 날 미국 전역으로 직배송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LA에 본사를 두고 있는 온라인 프리미엄 식품점 ‘뜻밖의한끼USA’. 인스타그램(@unexpectedmeal.la)을 통해서 한국의 고품질 수산물을 미국 한인 교포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스타트업이다. 뜻밖의한끼USA는 참치와 가자미, 방어 등 수산물을 부산에서 손질해 급랭한 뒤 항공편으로 미국 LA로 수입 통관한 뒤 미국 전역에 콜드 체인(Cold Chain)을 통해 유통한다. 최근에는 갑오징어와 명란까지 신선식품 상품군을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일본 등 해외 21개국에서 사용되는 해외 생활자 대상 구매 대행 플랫폼인 브링코(bringko). 21개국에 거주하는 20여 만 명 회원을 대상으로 브링코 앱과 인스타그램(@bringko_official)을 통해서 쿠팡, 네이버 등 국내 170여 개 온라인쇼핑몰 상품을 한꺼번에 통합결제·배송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국 쇼핑몰에서 구매한 제품은 FedEx, EMS, GEM, UPS, Pantos 등 다양한 제휴 특송사를 통해서 곧바로 항공으로 배송한다. 쇼핑에서 국내와 해외의 구분이 사라진 셈이다.
역직구 플랫폼 브링코는 연간 매출 200억 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의류, 뷰티상품에서 최근에는 김치, 반찬류 등 신선식품으로 상품군을 대폭 확대했다. 항공물류 덕분이다. 올해는 김치 주문과 동시에 강원도에서 담은 김치를 그날 오후에 픽업해 다음 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미국 등 21개국으로 배송하고 있다. 강원도에서 미국, 호주 등 소비자 집까지 항공물류 시스템을 통해 직배송한다. 김치가 소비자 집에 도착할 때는 먹기 좋은 상태로 익도록 배송 시간과 발효 온도까지 조절한다. 최근에는 꼬막, 마늘장아찌, 깻잎김치, 궁채나물, 고추장아찌, 섞박지 등 반찬류도 국내에서 주문 당일 만들어 비행기로 수출한다. 비행기를 이용한 신속한 배송이 기본이다.
제임스 최 브링코 부사장은 “전자상거래는 항공이 아니면 경쟁력이 없다”라고 단언한다. 최 부사장은 “해외 한국식품 소비자는 새로운 것, 한국에서 방금 만든 신선한 것을 먹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면서 “필요한 것을 빨리 받겠다는 소비자 니즈를 최대한 합리적인 가격에 항공으로 배송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경남의 딸기, 경북 복숭아 등 신선 농산물의 항공 수출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항공물류의 전성시대다.
■ 전자상거래 활성화로 항공화물 급증
여름철은 항공화물 비수기로 꼽히지만 국내 해외 역직구의 호조, 백신과 신선식품, ‘알테쉬’(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 등 글로벌 전자상거래 활성화로 항공물류산업은 유례없는 호황을 맞고 있다. 게다가 해운업이 중동전쟁 위기와 수에즈-홍해 항로 침체로 인한 바닷길 병목 탓에 남아프리카 희망봉 항로로 우회하면서, 화주들이 하늘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제품의 예민한 특성 탓에 항공기로만 운송하는 국내 반도체 수출이 되살아난 것도 원인이다. 지난 5월 인천공항 화물 물동량이 전년 동기 대비 16% 증가했고, 세계 항공화물 시장은 지속적인 항공화물 수요 증가로 인해 전년 대비 13.2% 증가했다.
대한항공은 물론이고, 제주항공, 진에어, 티웨이항공 등 저비용항공사(LCC)들도 화물 전용기를 도입하고, 밸리 카고(Valley Cargo) 화물량을 늘리는 등 역량을 키우면서 항공화물 시장이 재편되는 상황이다. 밸리 카고는 여객기의 수하물 공간을 이용해 화물을 운송하는 것으로, 화물기보다 공간이 작지만 상당한 양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다. 또한 주로 밤에 뜨는 화물기보다 업무시간인 낮에 도착지에 내려줄 수 있어 부가가치가 높은 편이다.
■ 부산권, 항공물류 기반 부재로 피해 심각
급증하는 항공화물의 90% 이상이 인천국제공항에 집중돼 있다. 2023년 말 우리나라 전체 항공화물 물동량 395만 톤 중 인천공항에서 약 360만 톤(90.1%)을 처리했다. 특히 수하물과 우편물을 제외한 순수 항공화물은 인천공항 독무대이다. 김해국제공항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수준이다. 인천공항은 공항과 항공물류단지 인프라, 다양하고 빈번한 장거리 항공 노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김해국제공항 인근 부산과 경남에서 수출 하는 딸기 등 농수산물을 비롯해 각종 화물 항공 90% 이상이 김해공항의 장거리 노선과 대형 밸리카고 부족으로 인해 인천공항으로 가는 상황이다. 실제로 2022년 인천공항을 통한 경남 항공화물 수출은 6만 3567톤에 이르고 있다. 농수산물을 수출하는 농어민들은 비용 상승과 상품 신선도 하락을 감내하면서도 거리가 가장 먼 인천공항을 울며 겨자 먹기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부산 본사의 포워딩 전문 회사인 트래닉스(주) 이준석 대표는 “김해공항은 제한적 근거리 노선이 집중되고, 장거리 국제노선이 없어 유럽, 미국, 중동, 남미 등 다양한 화물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면서 “부산권 화주들은 추가 물류비를 지불하고 인천공항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밝혔다. FedEx, DHL 등 글로벌 항공화물 특송업체 한국지사도 서울과 인천에 집중돼 있다.
■ 글로벌 해운사들 항공물류 사업 적극 진출
글로벌 해운 리더인 머스크(Maersk)는 더 이상 해운회사라고 표방하지 않는다. 2018년 ‘앞서간다(Stay Ahead)’ 전략 발표 이후 육해공을 아우르는 종합물류기업으로 기업 성격을 바꾸고 있다. 해운회사에서 이제는 항공과 포워딩, 철도, 육상 운송을 장악해 종합물류시스템을 제공하려는 목적이다. 머스크 측은 “우리의 경쟁사는 아마존 혹은 대한민국 택배회사가 될 수도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화물전용 항공사 머스크 에어카고(Aircargo)를 운영하고 있는 머스크는 2022년 항공물류에 강점을 보유한 독일계 세나토 인터내셔널(Senator International)을 인수했다.
머스크에 자극을 받은 경쟁 해운사 CMA CGM도 최근 항공화물사업부를 운영하며 2026년까지 항공기 12대를 추가할 계획이다. 대만 선사 에버그린(Evergreen)은 대만 국적 항공사인 에바항공(EVA Air)과 사업 결합을 통해 시너지를 내고 있다. 화물항공 브랜드인 에바항공 카고(EVA Air Cargo)를 통해 물류업을 강화했다.
신석현 동명대 항만물류시스템학과 교수는 “머스크가 해운회사에서 항공 등 종합물류회사로 변신하는 등 세계적으로 물류 흐름이 변화하고 있다”면서 “가덕신공항 개항을 앞두고 부산도 항공물류의 확대와 종합물류회사·국제 특송회사 유치, 인력 양성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 가덕신공항 화물 처리 용량 대폭 키워야
‘동북아 물류 중심’을 목표로 하는 가덕신공항의 항공화물 처리 능력이 지나치게 낮게 설정됐다는 비판도 거세다. 국토부는 가덕신공항 항공 수요를 2065년 기준 화물 33만 5000톤으로 잡았다. 인천공항 처리능력의 5%에 불과한 수준이다. 인천공항은 5단계 확장 사업으로 연간 1000만톤까지 화물 처리 능력을 높일 계획이다.
김가야 동의대 명예교수(한국기술사회 기술정책고문)는 “가덕신공항을 글로벌 복합물류 중심 공항으로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화물터미널 처리 용량과 배후물류단지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기본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고속철도와 부산신항 등 육해공 물류망을 기반으로 동남권 전체가 신공항으로 발전할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머스크 출신인 신 교수는 “특송물류, 국경 간 전자상거래 Sea&Air 복합운송, 콜드체인 물류 등에 특화하여 항공물류산업 생태계를 조성해 가덕신공항을 국가 간 전자상거래 허브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서 “개항에 앞서 유엔조달 물류창고 유치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2024-08-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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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65세 이상 인구 1000만 명 시대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주민등록인구가 이달 10일 기준 1000만 명을 넘어섰다는 소식은 단지 인구 구성만이 아니라 사회구조 자체도 전환기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국민 5명 중 1명꼴이 되면서 전반적으로 우리나라는 이전과는 다른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65세 이상은 노인복지법상 ‘노인’으로 분류돼 이제 우리나라도 노인 인구가 전체 20%를 넘는, 이른바 ‘초고령사회’을 코앞에 두게 됐다는 분석이다.
초고령사회의 도래는 노인 인구가 단순히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됐다는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갈수록 부양 인구가 급증한다는 점에서 연금 문제를 포함해 노동력 부족 등 복합적인 사회 문제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때에 따라서는 세대 간 갈등의 실마리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미 인구 추계상 예견은 됐었지만 이제 공식적으로 우리나라도 65세 이상 인구 1000만 명 시대를 맞은 만큼 국가적으로 이에 따른 법률 등 사회 체계의 재정비를 서둘러야 할 때가 됐다. 21세기 중후반 우리나라 사회 체계의 안정 여부가 여기에 달려있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노인 인구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지난 10일 기준 65세 이상 주민등록인구는 1000만 62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 5126만 9012명의 19.1%에 달한다. 현재의 노인 인구 증가 추세를 감안하면 내년에는 초고령사회 기준인 전체 인구 비중의 20%를 넘게 된다.
우리나라 노인 인구의 특징은 그 증가세가 매우 가파르다는 점이다. 10년 전인 2015년까지만 해도 65세 이상은 677만 5101명으로 전체 13.1% 수준에 그쳤다. 그러다가 2020년 850만 명에 육박하며 가파르게 증가한 이후 이번에 불과 4년 만에 1000만 명을 돌파했다.
광역시도 별로 보면 전남의 65세 이상 주민등록인구 비율이 26.67%로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이어 경북 25.35%, 강원 24.72%, 전북 24.68% 순이었다. 부울경을 살펴보면 부산은 23.28%, 경남 21.25%로 모두 20%를 넘었지만, 울산은 16.58%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초고령화 도시인 부산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전국 특별·광역지자체 가운데 그 비율이 가장 높았다.
노인 연령 기준은 이미 이슈화
노인 인구 비중 20% 돌파를 코앞에 두고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이슈는 노인 연령 기준의 재조정 문제다. 이 문제는 노인 복지 혜택의 수혜 여부 등 노인 정책의 기준이 되는 만큼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앞으로 기대 수명이 늘어나고 65세 이상 인구 역시 계속 늘 것이 이미 분명해진 상황에서 당장 이 기준부터 재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실정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노인 연령 기준 65세는 1981년 제정된 노인복지법의 경로우대에서 시작됐다. 기초연금, 지하철 무임승차 등 주요 노인 복지사업이 이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노인의 신체 여건을 비롯해 사회 여건 역시 적잖이 달라진 만큼 이 기준을 상향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노인 인구 급증에 뒤따르는 국가 복지 재정이 큰 부담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연령 재설정은 가장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미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은 2025년부터 10년마다 노인 기준 연령을 1세씩 단계적으로 올리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서울시 등 일부 지자체도 각종 노인 복지 혜택의 기준 연령을 만 65세에서 70세 이상으로 올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중한 접근을 주장하는 의견도 만만찮다.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가장 높은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령 기준 상향은 이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다 정년과 연계된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의 불일치 기간이 더 늘어나는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또 개인별로 천차만별인 노인의 건강, 소득 차이 등을 무시하고 일률적인 연령 기준 적용이 바람직하냐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연령 재조정은 복지 서비스 대상의 축소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연금·일자리 체계 개선 시급
노인 연령 기준 재조정과 함께 노후 대책으로 꼽히는 연금 개혁 역시 초고령사회의 핵심적인 관심사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저출생·고령화 시대는 국민연금 수급과 고갈 문제와 직결돼 있다. 거의 모든 국민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다. 현재 만 63세부터 받기 시작하고 2033년 65세로 늦춰질 국민연금 수급 기준은 오는 2055년께 바닥이 드러날 연금 재정을 감안하면 더는 해결 방안을 미룰 수 없는 상태다.
이와 직결된 사안이 정년 연장이다. 대기업 일부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법률적으로는 아직 정식 공론화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다. 초고령사회를 맞아 충분한 대안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청년들의 일자리 확보와 상충할 수도 있어 섣불리 접근하기도 어렵다. 역시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공감대가 필수적인 사안이어서 국회를 중심으로 한 여야 정치권과 정부의 활발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제도권 내 논의는 미진하기만 하다.
이외 무임승차 등 노인 이동권 확보나 노인 기초연금 등 노인의 기본소득 보장, 노인성 질환 등 노인돌봄 강화 정책도 65세 이상 인구 1000만 명 시대를 맞아 발등의 불이 됐다.
노인 법률 체계도 손봐야
저출생·고령화로 대별되는 인구 상황을 맞아 우리나라의 역동성과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노인 인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변해야 한다. 여러 번 나온 말이긴 해도 노인도 국가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세대와의 조화로운 삶과 노인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초고령사회에 맞는 새로운 사회 체계 구축이 시급한 시점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우선은 노인 관련 법률 중 대표적인 노인복지법의 대대적인 조정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근래 국회입법조사처가 노인복지법의 개선 과제를 제시했다. 노인복지법을 초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인복지 분야의 기본법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제안했는데 경청할 만하다. 노인의 인권과 시민권 관점을 바탕으로 노인의 빈곤, 요양·돌봄, 평생교육 등 다양한 사업에 대한 원칙을 새롭게 세우고, 이에 맞춰 관련 법률 체계도 재정비할 것을 제안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놔두고라도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업이다. 이를 계기로 노인 연령 기준이나 연금 정책 등에 대한 공감대도 자연스럽게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65세 이상 인구가 한 사회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미증유의 일이다. 하지만 이미 현실로 닥쳤고 벌써 여러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우리나라 미래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일임을 감안하면 이제라도 법률 정비와 정책적 실행의 대원칙을 새로이 설정해야 할 시기다.
2024-07-2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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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가덕신공항 개항, 5년 만에 가능한가
국비 13조 4913억 원이 투입되는 부산 강서구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올해 초 공사 발주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정부는 활주로와 여객터미널 등 필수시설 건립을 2029년 12월까지 마치고 임시 운영에 들어간 뒤, 이듬해인 2030년 12월까지 지원시설 설치를 완료해 가덕신공항을 정식 개항할 계획이다. 그러나 공사 시작 전부터 논란이 일고 있다. 공항 부지 건설 공사가 두 번이나 유찰되자 일각에서는 공사 기간 부족 등을 이유로 개항 시기를 늦추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두 번의 공항 부지 공사 유찰로, 개항까지는 65개월 정도가 남았다. 착공이 올해 말 시작된다면 약 60개월이 남게 된다. 물론 토지 및 어업권 보상이 쉽게 해결되지 않으면 개항이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 이에 토지 보상 지연 등의 돌발 변수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공사 기간만 놓고 과연 5년여 만에 개항이 가능한지 따져보자. 또 2029년 12월 개항 일정에 갇혀 자칫 우리가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5년 내 공항 건설한 사례는
공항 건설은 계획 수립부터 설계, 시설 구축, 시험 운영 등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따라서 그 규모가 작든 크든 5년 안에 공항을 완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가덕신공항은 바다와 육지에 걸쳐 공항을 짓는 난도 높은 공사다. 건설업계 일부에서는 이를 애초 계획(사전 타당성 검토) 대비 절반인 5년 만에 마무리하려다 보니 무리하게 추진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유로 공항 부지 건설 공사 1, 2차 입찰이 유찰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하지만 현재의 기술력으로 5년 내 개항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해외 사례도 여럿 있다. 중국 베이징 다싱 국제공항은 2014년 12월 말에 공사를 시작해 2019년 9월 말에 5본의 활주로를 갖춰 개항했다. 건설 기간만 약 5년이 걸린 셈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이 공항은 ‘피닉스의 비상’을 모티브로 한 독특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을 자랑하며, 세계적으로 난도가 높은 공항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또한, 중국 동남부의 주요 관문인 푸저우 창러 국제공항도 1992년에 착공해 1997년에 개항했다. 건설 기간만 놓고 보면 5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신공항은 이보다 더 짧다. 2014년 6월에 공사에 들어간 지 불과 4년여 만에 공항을 완공했다.
상당수 국내 전문가들은 가덕신공항 건설에 있어 최대 쟁점은 해상 활주로 공사인데, DCM(심층 시멘트 혼합 공법), 케이슨(Cassion) 공법 등을 적용해 5년 만에 개항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 건설 방식·환경 다른데…
중국 다싱이나 창러 공항, 이스탄불 신공항의 사례는 공항이 육지에 건설되는 것이라 육지와 해양에 걸쳐져 이뤄지는 가덕신공항과 비교하는 건 다소 무리가 있다. 가덕신공항은 공항의 절반 가까이가 바다를 매립해 건설되기에 전체 공기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신공항은 활주로를 포함해 총길이가 4.2km다. 산봉우리(국수봉)를 완전히 깎아 그 위에 마련하는 육상 구간(1.6km), 바다를 메워 활주로를 닦는 해상 구간(2.6km)으로 나뉜다. 여객터미널과 화물터미널은 육상부에, 활주로와 계류장은 매립부지에 위치한다. 해상 구간의 경우 수심 30m 바다를 메워야 하는 대형 건설공사다. 따라서 가덕신공항과 외국의 다른 해상공항과 비교하는 게 더 타당성이 있다는 얘기다.
국토가 좁고 바다에 접한 아시아권의 국제 허브공항 중에는 해상공항이 많다. 중국 상하이 푸둥공항, 일본 나가사키·간사이·주부·나고야공항, 싱가포르 창이공항, 홍콩 첵랍콕공항이 대표적이다. 좀 더 넓게 보면 영국 지브롤터 국제공항, 호주 시드니 국제공항도 해상공항에 해당한다. 한데 이들 공항이 대부분 착공부터 개항까지 5년 이상이 걸렸다.
하지만 해상공항인 카타르 도하의 하마드공항은 2009년 공사를 시작해 2014년 5월 개항까지 불과 5년 걸렸다.
싱가포르 항만청은 2020년부터 초대형 자동화 항만 ‘투아스 메가포트’를 건설 중이다. 1~4단계 분리 발주로 공사를 시행 중인데 1단계는 우리나라 업체가 맡아 준공했다. 한데 36개월 공정을 29개월 만에 끝냈다. 물론 항만과 공항이란 차이점은 있다. 하지만 건설 환경은 유사하다. 현재 국내 기술력으로 5년 내 가덕신공항 조성은 충분히 가능하단 얘기다.
■ 부등침하 우려는
가덕신공항은 부등침하(지반이 불균등하게 내려앉는 현상) 발생 가능성이 높다. 활주로가 육상부와 해상부에 걸쳐져 있어 불규칙적인 침하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육상과 해상 연약 지반의 지지력 차이가 크면 바다 쪽 활주로가 육지 쪽보다 많이 가라앉아 이착륙이 방해받을 수 있다. 다만 이게 우려할 수준인가, 아닌가가 관건이다.
국토부는 대체로 “부등침하는 있지만 문제없는 수준”이라는 입장이다. 가덕신공항 건립 30년 후 최대 부등침하량은 육지부와 해상부가 이어지는 곳에 34cm 정도로 추정되는데, 이는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허용기준 이내로 공항 운영에 지장이 없다고 본다.
가덕신공항 기본계획 자문위원으로 참가했던 정문경 전 한국지반공학회 회장은 “가덕도 인근과 첵랍콕공항에는 연약지반이 한 개층만 있다. 그 아래에 암반이 나온다. 다른 지역의 경우 암반이 나왔다가 때로는 퇴적토가 나오는 등 불균등한 현상도 많지만 가덕도에는 그런 것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했다. 부등침하 가능성이 그만큼 낮다는 얘기다. 다만 몇몇 전문가들은 비행기 이착륙 안전을 위해 해상 활주로 꺼짐 현상을 준공 후 최대 30년간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록 사례는 다르지만 부산~경남 거제를 잇는 거가대교 침매터널의 경우 아직까지 함체(육지에서 만든 뒤 바다 밑에 빠뜨려 고정시키는 길이 180m 상당의 콘크리트 구조물)와 함체 사이에서 부등침하가 발생했다는 얘기는 없다. 거가대교는 2010년 말 개통했다.
■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일각에서는 2030엑스포 부산 유치가 무산된 상황에서 왜 가덕신공항 개항 시기가 여전히 중요한지 묻는다. 부산 시민들에게는 개항 시기가 중요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는 2030엑스포 개최를 위해 가덕신공항 건설이 불가피했다. 또한 신공항 사업이 정치 변수에 따라 심하게 요동쳐 왔기에 서둘러 공사에 착수하지 않으면 언제든 좌초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개항 시기를 못 박았던 것이다.
지금은 가덕신공항 개항이 늦어져서는 안 되는 새로운 당위성이 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유일 수 있다. 바로 대구경북(TK)신공항과의 항공물류 선점을 위한 선의의 경쟁 때문이다. TK신공항은 가덕신공항과 비슷한 2030년 개항을 목표로 한다. 활주로 길이도 3.8km로 엇비슷하며, 가덕신공항처럼 동남권 관문 공항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TK신공항은 해상공항인 가덕신공항과 달리 내륙에 위치하고 있어 활주로와 물류단지 등 인프라 확장이 용이하다. 이런 상황에서 TK신공항이 가덕신공항보다 먼저 개항한다면 구미산단 등 동남권과 충청권의 항공물류 수요는 TK신공항이 선점할 가능성이 크다. TK신공항 주변에 항공물류 수요가 있는 산업단지나 업종이 자리를 잡은 뒤에야 가덕신공항이 개항하면 이미 때는 늦다.
앞에 살펴본 것처럼 가덕신공항은 토지 보상비, 부등침하 문제 등 어떤 변수가 없다는 조건 아래 오롯이 절대 공기만 놓고 보면, 남은 5년으로도 개항이 가능하다. 물론 효율적인 계획, 강력한 협업, 차질 없는 추진이 전제되어야 한다.
향후 들어설 가덕신공항은 대한민국 관문 공항으로 발돋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1본 활주로로는 부족하다. 국토부는 2, 3차 확장 계획까지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한다. 활주로 하나만으로 글로벌 공항이라고 눈속임하는 우는 이제 없어야 한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국토부의 적극적인 고민과 역할을 기대한다.
2024-07-1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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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노인 연령 70세 상향의 조건
‘노후’(老後)는 애매한 표현이다. ‘늙은 이후’란 대체 언제를 말하는가? 시대가 변하고 개인별로도 사정이 달라 하나의 기준점으로 뭉뚱그리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60대·70대·80대가 다 같은 노인이 아닌 것과 같다.
우리나라에서 노인의 기준이 마련된 것은 1981년 노인복지법의 경로우대 대상이 65세 이상이 되면서다. 이후 도시철도 무임승차와 국민연금, 기초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 개시의 기준으로 65세가 적용됐다. 문제는 이 기준이 무려 43년째 그대로라는 점이다. 1981년 당시 기대수명은 66세였고 지금은 82.7세로 16년 이상 더 산다. 통계청의 ‘장기인구추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는 내년에 1000만 명을 첫 돌파한 1051만 명(20.3%)이 되고 20%를 넘겨 초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2072년에는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1727만 명(47.7%)으로 예상된다. 노인의 개념을 바꿀 때가 온 것이다.
‘노후’의 기준을 바꾸려면 고차원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높은 노인 빈곤율 해소가 핵심인데 정년 연장과 연금 개혁이라는 까다로운 변수가 난제다. 노인 연령만 덜컥 70세로 올리면 60세에 정년을 맞아 일터를 떠난 뒤 무려 10년 간의 소득 단절에 맞닥뜨린다. 2033년부터 65세에 지급이 개시되는 국민연금과도 엇박자가 난다. 기초연금도 마찬가지. 연금·정년·노인 연령은 서로가 전제 조건이면서 동시에 결과로 얽혀 있다. 세밀한 밑그림과 공론화에 이은 사회적 대타협이 필요하다.
■‘노인 연령 70세 상향’ 논의 본격화
일본 재계를 대표하는 게이단렌(경제단체연합회)은 지난달 노인 연령 기준을 70세로 올리자고 정부에 건의했다. 고령 인구가 늘자 사회보장제도의 재정 부담 경감과 고령자 재취업 필요성 때문이다. 이에 앞서 일본 정부는 65세 정년을 법제화했고 70세 정년을 권고하고 있다. ‘70세 노인’으로 가기 위한 사전 작업이 착착 진행 중인 것이다.
서울시는 최근 발표한 ‘인구정책 기본계획’에서 복지 혜택 기준을 70세 이상으로 바꾸는 방안을 포함했다. 생애 주기별로 다른 노인 복지 수요에 신축적으로 대응하자는 취지다. 국가의 일률적 복지의 빈틈을 지자체가 대응할 때 필요한 접근법이다.
여론도 노인 연령을 바꾸는 데 찬성으로 돌아섰다. 여러 지자체 여론 조사에서 ‘70세 상향’이 다수인 결과가 잇따랐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저고위)가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도 성인 66.1%가 노인 연령 상향에 동의했다. 현행 65세 유지를 바라는 비율은 17.5%에 그쳤다. 저고위는 올해 말까지 고령화 시대에 걸맞게 노인 연령 변경을 위한 로드맵을 제시할 예정이다.
한동희 노인생활과학연구소 대표는 노인 연령 조정을 ‘세대의 재구성’이라는 범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50대 이후 100세까지 인구 구성을 큰 틀에서 재조정하는 작업”이라는 의미에서다. 예컨대 지금 중소기업은 인력난과 숙련도 때문에 퇴직 이후부터 70세까지의 재취업 인력 상당수를 고용하고 있다. 하지만 통계상의 생산연령인구는 여전히 25~49세, 50~64세까지 구분한다. 현실과의 괴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 노인 빈곤율 OECD 1위
21대 국회 막바지까지 국민연금의 개혁을 놓고 진통이 거듭됐다. 보험료율(소득 대비 납부액 비율)과 소득대체율(소득 대비 수령액 비율)의 수치 조정, 즉 모수 개혁이라도 하자는 더불어민주당과 22대 국회로 넘겨 근본적인 구조 개혁을 하자는 여당이 맞서면서 결론을 내지 못했다.
이 지점에서 지난해 화염병 시위까지 부른 프랑스의 정년 연장 사례는 참고할 필요가 있다. 대통령 지지율이 역대 최저치인 20%대로 추락하고 총파업으로 반대 여론이 들끓었는데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개혁안을 고수했다.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자는데 왜 프랑스 국민들은 격렬히 저항했을까. 그 이유는 프랑스에서는 정년 퇴직하면 바로 연금이 개시되기 때문이다. 프랑스 연금의 보험료율은 27.8%, 정년 이후에는 소득의 약 60%를 연금으로 돌려받는다. 은퇴를 하면 세금과 생활비가 줄기 때문에 소득대체율 60%로 안정적인 노후 생활이 가능하다. 정년 2년 연장은 안락한 노년이 2년 늦어지는 것을 의미해 온 국민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한국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게 노인 빈곤율이다. 노인 빈곤율은 중위 소득의 절반 미만의 비중을 말하는데, 프랑스는 4.4%에 불과하고 OECD 국가 중 4번째로 낮다. 한국은 40.4%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나이가 들수록 빈곤율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는데 76세 이후는 무려 52.0%다. 늙은 것도 서러운데 가난에 허덕이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되려면
현재 한국의 국민연금은 소득의 9%를 내고 소득대체율 40%를 수령하는 방식이다. 프랑스에 비해 훨씬 덜 내고 약간 덜 받는 식이다. 그래서 고갈 시점이 예고돼 있다.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을 착실히 부은 덕분에, 혹은 공적 부조로 국가가 지급하는 기초연금이 늘어나서 결과적으로 소득대체율 합계가 OECD 권고 수준이자 프랑스와 같은 60%를 넘으면 이상적이겠지만 실현 가능성이 아주 낮다. 현실은 ‘노인을 위한 연금’과 동떨어져 있어서다.
통계청의 ‘2016~2021년 연금 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 중 기초·국민·직역·퇴직·주택·개인·농지연금의 밖에 있는 미수급자 비율이 9.8%나 된다. 그나마 수급자들이 받는 급여액 합계도 평균 월 60만 원에 불과했다. 수급액이 25만~50만 원인 구간이 43.3%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니 대다수 노인이 쥐꼬리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예컨대 가장 수급자가 많은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합해 월 50만 원 미만을 수령한다면 생활고에 허덕일 가능성이 높다.
은퇴 후 경제력이 미흡한 상황은 퇴직연금 일시 수령 비율이 96%에 달하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은퇴자들이 퇴직연금을 다달이 받는 대신 일시금으로 받아 빚을 갚거나 자녀 교육비, 주택 구입에 소진해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노인층의 빈곤이 사회문제로 떠오르니까 국가가 나선 게 기초연금이다. 기초연금은 사회보험이 아니라 소득 하위 70%를 대상으로 월 33만 5000원이 지급된다. 문제는 급속한 고령화로 수급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을 준다는 점이다.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기초연금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020년 0.8%에서 2080년 3.6%로 높아진다. 윤석열 대통령의 공약인 40만 원으로 인상되면 GDP의 4.4%다. 재정 부담을 줄이면서 노인 빈곤율을 떨어뜨리는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한국개발연구원은 노인 연령을 10년마다 1세씩 올리는 동시에 생산연령인구의 상한을 함께 올리는 방안을 제시한 적이 있다. 정년과 연금 개혁이 뒷받침됐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동시에 60~70대가 일터에 남을 수 있으려면 임금 체계의 변화도 필요하다. 국민·기초연금의 지속 가능성과 노인 빈곤율 감소의 균형점이 최우선이다. ‘70세 노인’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겠지만 결국 사회적 대타협으로 풀어야 한다. 100세 시대를 맞은 대한민국의 최대 과제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2024-06-2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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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김영미 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을 만나다
전쟁이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숫자라고 하고 흑사병보다 무섭다고도 한다. 날개 없는 추락에 ‘백약이 무효’라는 탄식도 들린다. 한국의 기록적 초저출생 이야기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합계출산율 1명이 안 되는,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것으로 예상되는 나라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미래의 희망을 잃어 가는 대한민국에 드라마틱한 반전이 가능한 것일까. 김영미 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부위원장(동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을 만나 초저출생 문제의 근본 원인과 대책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김 위원장은 저출생과 돌봄, 복지 정책을 연구해 온 전문가로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상임위원을 거쳐 2023년 1월부터 1년여간 부위원장을 맡아 국가 저출생 정책을 주도했다.
■ 2025년 합계출산율 0.65 바닥?
통계청은 장래인구추계를 통해 국내 합계출산율은 2025년 0.65명으로 바닥을 찍고 반등할 전망이라고 했다. 이는 2024년 0.7명이 바닥이라던 앞선 전망에서 후퇴한 것이다. 2025년 바닥 전망도 장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김 위원장은 너무 장기간 출산율 하락이 지속돼 반등의 계기를 만들 필요는 있다고 했다. 올해 혼인 건수가 전년 대비 소폭 반등한 것도 출산율에 긍정적 신호다. 하지만 금전적 인센티브 약간 더 주는 단편적 정책으로 출산율 0.1이나 0.01 올리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생각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회 전반의 구조 개혁을 시작해야 하고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 회복과 함께 청년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줄 수 있어야 출산율 회복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복합적 요인에 의한 퍼펙트 스톰
김 위원장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낮은 출산율이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저출생에는 사회·경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데 우리의 사회·경제적 지표가 유례없는 수준이라는 의미다. 그 요인들은 독립적이지 않고 복합적으로 결합해 ‘퍼펙트 스톰’으로 이어진 결과가 지금의 초저출생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청년들의 높은 경제적 불안과 실업률은 결혼 의지를 꺾었다. 청년층 내에서의 IT 종사자와 플랫폼 노동자로 대별되는 소득 격차 확대도 부정적 시그널이다. 높은 사교육비에 입시 위주의 일극화된 교육 경쟁, 끊어진 주거 사다리도 출산을 막는 최악의 환경들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의 남녀 임금격차와 긴 노동 시간, 일과 가정이 양립하기 어려운 노동 환경에서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게 기적이다.
수도권 집중과 초저출생은 동의어
선진국에 진입하면 혼인이 줄고 혼인 연령은 높아져 출산율 감소로 이어지는 게 추세다. 그럼에도 출산율이 OECD 국가 중에서도 기록적으로 낮은 것은 수도권 집중이라는 한국적 특수성에 기인한다는 데 김 위원장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우리의 출산율 감소가 ‘고밀도 수도권, 저밀도 지방’이라는 공간적 격차에서 비롯된 사회 이동형 출산 감소라는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갈수록 수도권 인구 집중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청년층의 수도권 쏠림이 더했다. 2015년부터 4차산업 기술 기반의 첨단산업이 수도권에 집중되면서 청년의 수도권 이동은 더 가속화하고 있다. 201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명대에서 등락하던 합계출산율이 2015년을 기점으로 추세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해 0명대에서 추락을 지속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 18년간 380조 원 쏟아부었지만
김 위원장이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 그 많은 예산을 쏟았는데 출산율이 떨어진 이유가 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2005년 위원회 출범 후 2006년 2조 1000억이던 예산이 2022년 51조 7000억 원으로 25배 급증했는데 합계출산율은 1.13에서 0.78명으로 거꾸러졌다. 명백한 정부 정책의 실패, 정치의 실패, 공동체의 실패다. 김 위원장은 18년간 380조 원을 썼다고 하는데 제대로 된 예산 집행이었는지 따져 봐야 한다고 했다. 천문학적 예산이라고 하지만 관련성과 효과가 낮은 정책 예산이 상당수 포함됐다. 아동가족을 지원하는 실질적 예산은 정체됐고 GDP 대비 아동가족 지출 비중은 OECD 최하위라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취임 후 저출생 정책을 전면 재검토해 재구조화하고 선택과 집중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체감도 높은 인구 정책 추진을 위해 인구정책평가센터를 설치하고 위원회 산하에 인구정책기획단도 만들었다.
■ 출산 정책에 한방은 없다
‘백약이 무효’ 아니냐며 회의감으로 운을 떼자,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출산 정책을 해 봤느냐고 반문한다. 아이들 미래가 달려 있는데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으냐는 것이다. 2023년에 부산에서 태어난 아이가 고작 1만 2900명에 불과한데 이 지경이면 지자체에서 출산 가정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라도 해 볼 수 있는 수준이다. 정책을 평가해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것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위원회의 출산 인식 조사 결과 먼저 필요한 게 청년 고용 불안 완화와 일·가정 양립으로 나왔다. 당장 청년들에게 체감도 높은 정책에 대한 선택과 집중으로 재정을 과감하게 쏟아부어야 한다는 게 김 위원장의 생각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 사회의 보다 근본적 구조 개혁부터 시작하고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추진해야 한다. 말뿐인 균형발전과 지방시대가 아니라 진정한 변화를 불러오기 위해서는 지역에 대한 과감한 경제력 배분을 통한 지역 재편성이 이뤄져야 한다. 균형발전을 외치면서 수도권 GTX 노선을 확대하는 이율배반적 정책 방향으로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저출생대응기획부(가칭)가 아동 돌봄 등 핵심 정책의 통합적 추진에는 긍정적 작용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 차원의 총체적 인구 전략 수립과 거버넌스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현재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위원장인 대통령의 역할이 제일 중요하다. 효과적이고 지속가능한 정책 추진의 결정적 동력이 대통령 의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아이 없이, 지역 없이 행복할까
“1억 원을 지급하면, 집 한 채를 주면, 1인당 기본소득 25만 원을 주면 애를 낳겠습니까. 출산 정책에 ‘한방’은 없습니다. 지난한 대화와 타협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야 합니다. 작은 개혁들이 점진적 변화를 만들고 사회 전반의 큰 물줄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김 위원장은 ‘아이가 없어도 괜찮은지, AI(인공지능)로 대체하면 되는 건지, 지역이 없어도 되는지’라는 근본적 물음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단지 출산율 숫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족과 함께, 아이와 함께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공포를 행복한 고민으로 전환하는 일이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는 반문이었다.
2024-06-1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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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김호중이 까발린 공권력의 민낯
지난 1일 오전 2시께 대전의 한 아파트 야외주차장. 승용차 한 대가 주차된 차량 7대를 들이받는 사고를 냈다.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운전자는 사고 직후 차를 버려둔 채 사라졌다. 경찰은 차 번호를 통해 운전자가 A 씨임을 확인했지만, 그는 휴대전화도 꺼놓고 잠적했다가 이틀 뒤에야 경찰서에 나타났다. A 씨는 음주 사실을 강하게 부인했고, 음주 측정에서도 혈중알코올 수치는 나오지 않았다. 끈질긴 추궁에 A 씨는 마지못해 “맥주 2잔 마셨다”라고 밝혔으나, 경찰은 혐의 입증에 애를 먹고 있다.
■ 꼼수의 전형
이쯤이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트로트 가수 김호중 씨다. 김 씨는 지난 9일 오후 11시 40분께 서울의 한 도로에서 택시를 충돌하는 사고를 낸 뒤 달아났다가 17시간 후 경찰에 출석했다. A 씨처럼 그도 처음엔 음주 사실을 부인하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인했고, 이후 다른 의혹들까지 불거지면서 사고 보름 만인 지난 24일 구속됐다.
A 씨와 김 씨, 두 사람에게서 일정한 패턴이 보인다. ‘음주운전 뺑소니’ 혐의를 받는 사고를 낸 후 잠적했다가 몸에서 알코올 성분이 다 빠져나간 한참 뒤에 경찰에 자진 출석한 것이다. 사고 당시 음주 정도를 확인하지 못하게 하려는 수법이다. 아는 사람은 안다. 이는 음주운전 관련 처벌을 피하려는 전형적인 공식이라는 것을.
실제로 음주 측정을 거부해 법망을 빠져나가는 운전자들이 비일비재하다는 게 세간의 지적이다. 경찰이 사고 현장에서 음주 측정을 요구했을 때 이를 거부하면 ‘1년 이상 3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만 원 이상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진다. 그러나 김 씨처럼 아예 사고 현장을 벗어나면 음주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뺑소니까지는 모르더라도 최소한 음주 혐의는 벗어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SNS 등 온라인에서는 음주운전 처벌을 피하는 정보들이 횡행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법망 피하는 법을 자문해 주는 속칭 ‘음주 구제 일타 변호사’도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
■ 사법 방해?
그런 사실을 고려한다손 치더라도 김 씨의 사례는 훨씬 교묘하고 치밀하다. 김 씨는 음주운전 사고를 낸 뒤 도주했고 자택이 아닌 한 호텔에 은신해 있었다. 그는 17시간이 지나 몸에서 알코올이 모두 해독된 뒤에야 나타나 경찰 조사를 받았다. 그 사이 매니저가 김 씨의 옷을 입고 나타나 거짓 자백을 했다. 소위 ‘운전자 바꿔치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김 씨 소속사의 또 다른 직원은 김 씨가 몬 차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없앴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사고 차량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자신이 삼켰다고 진술했다. 김 씨와 소속사의 조직적인 증거 인멸 행위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경찰 조사에 임하는 김 씨의 태도도 문제가 됐다. 처음엔 “유흥업소를 방문한 것은 맞지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다가, 음주에 대한 여러 정황이 드러나자 “술잔에 입만 댔고 마시지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다 결국엔 “술을 마신 것 같다”면서 “양주는 거의 손도 안 대고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셨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밝혔지만, 경찰에 휴대전화를 제출하지 않다가 영장을 통해 압수되자 비밀번호를 온전히 알려주지 않는 등 수사에 비협조적인 모습도 보였다. 그러면서 김 씨는, 심지어는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에서도, 예정된 수 차례의 콘서트를 강행했다. 해당 콘서트들은 못 해도 수십억 원의 티켓 매출이 예상됐다.
김 씨의 행위가 공권력을 기망하는 사법 방해에 해당한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고가 발생하고 그 뒤 조사 과정에서 보인 김 씨의 태도가 공권력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우기고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 만연한 현 세태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 처벌은 미미
문제는 우리나라의 공권력이 그런 오만함과 무도함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2017년 B 씨는 운전 중 음주단속에 걸리자 경찰을 뿌리치고 편의점에 들어가 소주 한 병을 들이켰다. 음주 측정 거부 후 추가로 술을 마시는, 운전 시점의 음주량 확인을 무력화하기 위한 이른바 ‘술 타기 수법’이다. 결국 B 씨의 음주운전 사실은 입증되지 못했고, 경찰이 궁여지책으로 적용한 위계공무집행방해 혐의 역시 무죄로 결론 났다.
운전자 바꿔치기에도 법원의 처벌은 대체로 미온적이다. 실제로 2023년 광주에서 음주운전 사고를 내고도 자신의 모친과 운전자 바꿔치기를 시도한 C 씨에 대해 법원은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음주운전 사고를 낸 차량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없애는 행위에도 대부분 집행유예 등 낮은 형량이 선고됐다.
김 씨와 관련해 이런 저간의 사정 때문에 경찰의 고민이 깊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죄가 아닌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위험운전치상죄를 김 씨에게 적용할 방침이다. 위험운전치상죄는 정상적인 상태에서 운행할 수 없음에도 차량을 운행해 사람을 다치게 한 데 따른 처벌로, ‘1년 이상 15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상 3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다. 김 씨의 경우 사고 당시 혈중알코올농도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위험운전치상죄에 따르면 혈중알코올농도 기준과 상관없이 음주 자체가 위험운전에 영향을 미쳤다면 처벌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입증하기가 만만치 않다. 김 씨가 음주의 영향으로 정상 운전이 곤란한 상태였고, 그게 원인이 돼 사고가 발생했음이 증명돼야 하기 때문이다.
■ 무기력한 법
조직적인 증거 인멸 등 죄질이 나쁘고 수사기관을 농락하며 사법 방해를 일으킨 정황이 뚜렷해도 엄중한 처벌이 사실상 어렵다. 비슷한 문제가 다른 나라라고 없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선진국에선 관련 처벌 조항을 사전에 마련해 놓았다. 가까운 일본이 2013년 ‘과실운전치사상 알코올 등 영향 발각 면탈죄’를 도입한 게 그 사례다. 이는 음주운전 사실을 숨기려고 도피·잠적하거나 추가 음주를 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이다.
그에 비해 우리는 한참 뒤처져 있다. 대검찰청은 지난 20일에야 ‘술 타기 수법’ 등 음주 측정 방해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들어 달라고 법무부에 건의했다. 아마도 ‘스타 가수’ 김 씨의 사건이 아니었다면 그런 건의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법 당국이 관련 법 체계를 완비하려는 노력을 왜 좀 더 일찍 하지 않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요컨대, 건강성이 심각하게 훼손된 우리나라 법 체계와 공권력의 민낯이 김 씨 사건으로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법 체계는 세계 최고다. 그러나 빠져나갈 구멍도 세계 최고다”라는, 결코 웃지 못할 우스개가 세간에 통용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언제까지 이런 황당한 말에 고개를 끄덕여야 하나.
2024-05-29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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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곪을 대로 곪은 채용 비리, 선거 공정성에도 타격
“감사원 생활 24년 만에 이런 조직은 처음 본다.” 대체 어떤 조직이길래 대한민국의 모든 행정기관과 공무원 직무를 감찰하는 감사원의 고위 간부가 이런 말까지 했을까. 감사원 고위 간부까지 혀를 끌끌 차게 한 문제의 기관은 바로 선거관리위원회. 헌법 제114조에 그 역할과 조직 구성이 명시돼 있을 만큼 선거관리 전문 기관으로서 헌법적인 지위를 보장받고 있는 곳이다.
그런 선관위가 최근 직원 채용 등 내부 비리가 감사원 감사를 통해 알려지면서 한순간에 국민적 지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선거관리가 전문인 선관위는 국민들에게 ‘공정과 상식’의 대명사로 통하는 헌법기관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은 그동안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 선거 등을 총괄한 선관위의 공정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선거관리는 물론 내부 행정에서도 같은 수준의 공정성 기준이 지켜지고 있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감사원의 감사 결과는 국민들의 이런 생각을 송두리째 뒤엎었다. 그동안 직원 채용 등에서 상식 이하의 온갖 탈·불법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접한 국민들의 충격은 컸다.
■10년간 매년 상식 이하 특혜 채용
감사원이 이번에 실시한 ‘선관위 채용 등 인력관리 실태’ 감사는 그 대상이 2013년 이후 10년간이다. 그 이전에도 직원 특혜 채용 의혹이 제기됐으나 그동안 한 번도 제대로 감사를 받아본 적이 없는 데다 감사 범위를 넓힐 경우 얼마나 많은 채용 비리가 쏟아질지 가늠하기 어려운 점을 고려해 최근 10년간으로 기간을 한정했다고 한다.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다. 우선 인력 채용 과정에서 일어난 규정 위반만 무려 1200여 건으로 밝혀졌다. 10년간 중앙선관위에서 124차례, 지방선관위에서 167차례 진행된 경력 채용 중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비리나 규정 위반이 있었다. 3000명에 달하는 전체 선관위 직원 중 10%에 달하는 직원이 채용 과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감사원이 검찰에 수사 의뢰 등으로 넘긴 선관위 전·현 직원만 무려 49명에 달한다니 그동안 선관위의 내부 규율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알 만하다.
채용 비리를 구체적으로 보면 더욱 기가 막힌다. 특히 감사원 최고위직의 ‘아빠 찬스’를 통한 공직 사유화가 심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김세환 전 사무총장 아들 A 씨는 인천 강화군청에서 근무하다 2020년 1월 인천시선관위로 이직했다. 당시 인천시선관위는 정원 초과 상태였는데도 중앙선관위는 A 씨가 지원한 이후 경력 채용 인원을 추가 배정했다. 면접 위원 3명은 모두 사무총장과 친분 있는 내부 직원이었고 그중 2명이 A 씨에 만점을 줬다. 김 전 총장의 후임이었던 박찬진 전 사무총장의 딸 B 씨도 광주 남구청에 근무하다 2022년 3월 전남선관위에 경력 채용됐다. 이 과정에서 전남선관위는 외부 면접위원에게 점수 없이 서명만 기재한 평정표를 요구했고 선관위 인사담당자가 사후 면접 점수를 조작해 B 씨를 합격시켰다. 송봉섭 전 사무차장의 딸 C 씨도 충남 보령시청에 근무하다 2018년 1월 충북선관위로 이직했는데, 이 과정에서 인사 청탁이 있었다. 일주일 뒤 C 씨만 대상인 비공개 채용이 진행됐고 C 씨는 만점으로 역시 합격했다.
이외에 지방선관위 상임위원과 국·과장의 자녀 등 부당 채용 사례는 허다했고 무단결근 등 인력 관리도 엉망이었다. 시선관위의 한 사무국장은 8년간 무려 170일을 무단결근하면서 해외여행만 70차례 다녀왔다는 내용도 있다. 선관위의 도덕불감증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조직적인 감사 방해 행위도
내부 도덕불감증이 도를 넘어선 선관위는 감사원의 감사 진행 도중에도 국가기관으로선 해서는 안 될 감사 방해 행위까지 조직적으로 벌였다. 감사 시작 전 전직 사무총장 등 고위 간부의 자녀 채용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는 것은 물론 부하 직원 간 관련 메신저 내용까지 없애도록 했다. 자료 요구에 시간을 질질 끌거나 관련 서류를 고의로 훼손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선관위의 이런 고압적인 행위는 이전부터 있었다. 감사원과 선관위 간 ‘직무 감찰’을 둘러싼 공방이 30년 동안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채 계속된 탓이 크다. 1994년 감사원법 개정 당시 국회에서 직무 감찰 대상에 선관위 포함 여부를 놓고 논란이 일었고 2011년 18대 국회에선 선관위를 제외하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감사원과 선관위의 논쟁은 깔끔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감사원은 감사원법 제24조에 직무 감찰 대상 제외 기관으로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소속 공무원만 명시하고 있어 선관위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선관위는 헌법에 명시된 독립기관인 만큼 감사 대상이 아니라고 버텨왔다. 결국 선관위는 계속 직무 감찰 자체를 거부해 왔고 그러는 사이 선관위의 내부 비리는 곪을 대로 곪아갔다.
■“선관위 해체 수준 개혁” 규탄 봇물
국가 기관이라고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선관위의 행태가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분노를 넘어 허탈한 심정을 토로한다. 이렇게 부패하고 낯 두꺼운 기관이 최고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선거관리 업무라고 제대로 했겠느냐는 의심과 탄식도 나온다. 2022년 대선 때 코로나 확진·격리 유권자들이 기표한 투표용지를 소쿠리, 라면상자, 비닐쇼핑백에 담아 옮겨 놓은 일명 ‘소쿠리 투표’ 사태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총선 등 사전선거 부정 의혹도 따지고 보면 선관위 불찰로 인해 불거진 측면이 적지 않다.
이처럼 유례없는 내부 비리로 선거 업무의 공정성까지 의심받는 상황에서 선관위는 이제 안팎의 쏟아지는 개혁 요구를 뿌리치기 힘들게 됐다. 이미 전국 6000여 명의 대학 교수들이 참여하는 교수 모임, 정경희 국민의힘 의원, 자유변호사협회 등은 해체적 수준의 선관위 개혁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국민들도 이번에는 선관위가 강력한 쇄신과 개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여긴다. 국민에게 신뢰와 권위를 잃은 선관위가 과연 공정한 선거관리를 할 수 있을지 의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안팎의 들끓는 여론을 고려할 때 선관위 개혁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당장은 대법관을 비롯해 법관이 각급 선관위원장을 맡는 관행부터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또 선관위가 행정기관인 이상 정기적인 감사를 통해 외부의 견제를 받아야 한다는 국민도 많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결과가 지금의 참담한 선관위 추락이다.
현재 선관위는 감사원의 직무 감찰 권한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해 놓은 상태다. 감사원의 감사 범위가 명확히 어떻게 되는지 헌재의 판단을 받아보자는 것이다. 이르면 올해 안에 결론이 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 여론은 선관위에 부정적이다.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든 지금 선관위는 해체 수준의 개혁을 하지 않는 이상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다.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선관위의 존재는 국민은 물론 우리나라에도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4-05-1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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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한국 사회 중독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로 유명한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도박 빚을 갚기 위해 27일 만에 쓴 자전적 소설이 〈노름꾼〉이다. 도박중독자인 그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을 황폐화하는 도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소설 〈노름꾼〉에서는 도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로 “눈앞에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라고 설명한다. 도박이 마약보다 중독성이 더 강한 이유가 눈앞의 가능성에서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 중독될까? 인간은 쾌감을 느끼면, 뇌에서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된다. 쾌감을 맛본 인간의 뇌는 더 큰 자극을 원하게 된다. 그렇게 중독이 시작된다. 인간이 느끼는 쾌락의 정도는 초콜릿(55%), 게임(75%), SNS(85%), 성관계(100%), 니코틴(150%), 코카인(225%), 필로폰(1000%) 순이며 단계가 높을수록 중독의 강도가 세진다. 도박과 마약 등의 중독을 피하는 방법은 애초부터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범람으로 이런 중독에 접근이 너무나 쉬운 현실이다. 노력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중독이 한국 사회를 물들이고 있다. 인간을 황폐화하는 중독의 폐해가 청소년까지 확대되는 점은 심각하다.
1. 집단 도박으로 부산교육청 진상 조사까지
인터넷 사용이 일상화하면서 온라인 도박 중독 청소년은 계속 늘어나는 추세이다. 과거에는 도박을 하기 위해서는 일부러 도박장을 찾아야 했지만, 지금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도박이 가능해졌다. 국내에 도박 중독에 빠진 숫자만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지난해 9월 25일부터 올해 3월 31일까지 6개월간 ‘청소년 대상 사이버 도박 특별 단속’을 벌여 청소년 1035명을 검거했다. 연령별로는 고등학생이 798명으로 가장 많았고 중학생 228명, 초등학생도 2명 포함됐다. 최저 연령은 9세였다. 청소년들이 도박을 처음 경험하는 평균 나이는 11.3세로 집계되고 있다. 부산경찰청은 청소년 대상 사이버 도박 서버를 운영한 중학생 등 114명을 붙잡아 이 중 도박 서버 운영자 20대 A 씨를 도박 공간 개설 혐의로 구속 송치하고, 도박 서버 운영 총책 중학생 B 군 등 11명을 불구속 송치했다. 중학생인 B군은 ‘바카라’와 ‘룰렛’ 등 21개의 도박게임을 개설한 뒤,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게임머니 충전 및 환전 명목으로 돈을 받아 도박 게임을 진행하고 수수료를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초등학생과 여중생 2명을 포함한 중·고등학생 등 총 98명의 청소년이 돈을 걸고 바카라와 룰렛 등의 도박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 중 한 중학생은 도박 중독에 걸려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서도 학생들이 집단으로 온라인 불법 도박인 스포츠 토토를 하면서 부산시교육청이 진상조사에 나섰다.
도박 중독으로 상담받는 청소년도 매해 늘고 있다. 한국도박문제예방치유원 부산·울산센터에서 지난해 진행한 청소년 도박 중독 상담은 450여 건으로 1년 전보다 4배 가까이 급증했다. 도박 중독으로 병원 진료를 받은 부산지역 청소년도 2019년까지 연간 한 자릿수에 머물다 2022년에는 16명까지 늘어났다.
도박은 결국 돈과 관련되어 있다. 친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친구들의 권유로 자연스럽게 도박에 참여하게 된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행위가 중독이 되고, 도박 자금 마련을 위해 고리대금, 금품 갈취, 특수 협박 등 범죄로 이어진다. 학업, 가족 및 교우 관계 등에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게임적 요소의 강렬한 재미와 쾌감, 돈벌이 등이 도박에 중독되는 원인이다.
부산울산도박문제예방치유센터 김정은 센터장은 “친구가 하니깐 따라서 한다는 호기심에서 온라인 불법 도박에 입문하다가 점점 몰입돼 중간 관리자의 역할까지 맡는 등 과거 n번방처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면서 “태생적으로 온라인 미디어 세대인 청소년 문화도 이를 가속시키고 있다”고 지적한다. 인터넷에서 도박 정보 습득과 공유, 향유까지 부모나 교사가 따라갈 수 없는 속도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방송통신위원회 등에서 심의와 통제를 하고 있지만, 청소년들은 가볍게 규제를 넘어서면서 자기들만의 문화로 만들고 있다. 단속에 걸리더라도 ‘나만 억울하게 걸렸다’라고 생각하는 문화도 한몫을 하고 있다고 한다. 불법 도박을 끊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김 센터장은 “도박 중독에 빠진 학생 본인과 학부모, 전문가들의 인식에 큰 차이가 난다”면서 “학부모도 ‘우리 아이는 괜찮겠지’라는 안이함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행동과 통장 계좌 등을 유심히 살펴야 하며 불법 도박에 가담하거나 중독 증상이 보이면 법적인 처벌까지 가는 부분을 인식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 청소년 100명 중 2~3명 “마약 해봤다”
현대의 삶이 쉽고, 빠르고, 편리하게 얻는 것이 이익이라는 생각에서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은 생략돼 버린다. 도박이 돈을 버는 과정보다 얼마 벌었느냐가 중요시되는 세태의 상징적인 단면이다. 마약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와 외로움, 고독감에서 스스로 극복하기보다는 손쉽게 외적 약물에 의존해 인스턴트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마약 중독으로 이어진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성인과 청소년 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마약류를 사용하는 이유로는 즐거움·쾌락 추구 등의 목적보단 우울과 스트레스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는 응답이 많았다. 또한, 청소년 응답자 100명 중에서 2~3명은 “마약을 해봤다”고 답했다. 중독을 일으키는 대부분의 약물은 쾌락을 극대화하는 데 그 효능이 있다. 약물에 의해 강하게 유발되는 기쁨은 일상생활에서 얻을 수 없는 느낌이다. 한 번 맛 들이면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마약은 재범률이 50%에 육박하고, 국내에서도 잠정적으로 100만 명가량으로 추산될 정도이다.
부산마약퇴치운동본부 김상진 상임이사는 “마약은 시작 한 번이 곧 중독의 길로 접어드는 길”이라고 경고한다. 어떤 환경에서 시작됐든 한 번의 즐거움으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는 것이다. 김 상임이사는 “최근 마약 범죄에서 주요한 경향은 연령의 하향화”라면서 “조금이라도 일찍 예방 교육을 받아서 마약의 위험성을 인지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이제 ‘청소년 마약’까지 걱정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실제로 30대 이하 마약류 사범이 전체의 59.7%를 차지한다. 2012년 30대 이하 마약사범 비율은 35.5%였으며, 5년 후인 2017년은 42%로 6.3%포인트 증가한 반면, 최근 5년간은 18%포인트 증가하였다. 2022년 19세 이하 마약류사범은 전체 마약사범의 2.6%, 481명으로, 2012년 38명 대비 12배, 2017년 119명 대비 4배 이상 증가했다. 20대 마약류 사범은 2000년 1658명에서 2023년 8368명으로 5배 이상 늘었다. 10~20대 마약류 사범의 증가 폭이 가장 컸다. 성장기 청소년 마약류 범죄는 정신적·육체적·사회적 손실을 불러온다.
마약도 도박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인 흐름과 깊은 연관이 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중독학과 학과장인 홍성민 신부는 “중독은 쾌감의 보상이 빨리 나는 특징이 있다”면서 “과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현대인들은 기다리기보다는 편리하게 즉각적으로 쾌락을 얻는 것에 매료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 신부는 “중독에 빠지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삶 전체의 변화 없이는 치유가 불가능하다”면서 “근원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다른 데서 쾌감이나 혹은 만족감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중독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오래 걸리는 것은 중독되지 않습니다!” 중독 문제를 연구해 온 홍 신부의 작심 발언이다.
2024-05-0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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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세월호 10주기가 던지는 질문
팽목항. 목이 메는 이름이다. 불러도 불러도 응답 없는 이들의 아우성이 환청으로 나부끼는 현장이다.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삶은 그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유족들만 그런 게 아니다. 무참함을 지켜본 국민들 대다수가 그렇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얼마나 바뀌었나. 10년 세월이 남긴 세 가지 질문을 통해 되돌아본다.
1. 진상 규명은 이뤄졌나
그날의 진실은 여전히 미궁이다. 원인 규명 작업은 출발부터 흔들렸다.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참사 205일 만에 출범했는데, 수사·기소권이 없었고 인력·예산은 부족했으며 관련 기관 협조는 제한적이었다. 명확한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2017년, 세월호가 인양되면서 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가 출범했다. 목표는 침몰 원인을 밝히는 것. 그런데 선체 내부에 문제가 있다는 ‘내인설’과 외부 충격에 의한 ‘외력설’을 동시에 제시한 채 역시 결론을 내지 못했다. 2018년 사회적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가 기록을 넘겨받아 3년 반 동안 추가 조사를 벌였다. 또다시 내부 이견이 팽팽히 충돌했다.
일단 침몰의 직접적 원인은 분명하다. ‘배가 좌현으로 기울어 제대로 고박되지 않은 화물이 쏠리면서 선체가 복원성을 잃었다.’ 하지만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기술적 한계 때문에 확증되지 못했다. 사참위가 제기한 해군·해경의 세월호 CCTV 데이터 조작 및 DVR 바꿔치기 의혹도 2021년 특검 수사 결과 ‘증거·혐의 없음’으로 결론 났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니 참사 책임자 처벌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세월호 선장과 승무원, 청해진해운 관계자는 실형에 처해졌으나, 해경의 경우 6급 공무원 2명만 유죄가 선고됐을 뿐 지휘부는 무죄 판결을 받고 면책됐다.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는 동안 특조위, 선조위, 사참위, 특검과 검찰 특별수사단 등 공적인 조사 기구가 여러 차례 구성됐음에도 속 시원한 진상 규명은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한편 이런 목소리도 있다.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나 참사 순간의 세부적 사실관계 파악에 너무 매달렸다는 것. 그 때문에 결함 있는 배의 출항이라든지 해경의 구조작업 실패 같은 참사 전후의 총체적 진실을 밝히는 일이 더 힘겨워졌다는 관점이다.
유족들은 납득할 만한 근거만 있다면 어떤 결정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역 없는 조사가 더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통령 기록물을 비롯해 해경 레이더 영상, 국가정보원 사찰 정보 같은 미공개 자료가 완전히 공개돼야 한다고 유족들은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2. 사회는 얼마나 안전해졌나
“대형 사회재난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 최근 동아대 긴급대응기술정책연구센터의 재난안전인식 조사에서 응답자의 60%가 이렇게 대답했다. 국민들은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가 재난 관리와 안전 대비에서 별반 나아진 게 없다고 보는 것이다. 되레 응답 비율은 4년 전 조사 때보다 11.5%P나 높아졌다. 왜 그런 걸까.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 비극이 끊이지 않아서다. 불과 이태 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이태원 참사의 기억은 생생하다. 위기 앞에서 또다시 정부의 무기력이 드러났고, 159명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인파 밀집 사고의 예방과 사후 대응에서 모두 실패한 인재로 기록된다.
돌이켜보면, 안전 불감증이 낳은 대형 참사는 최근까지 한시도 끊긴 적이 없음을 알 수 있다. 2017년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29명 사망), 2018년 경남 밀양 세종병원 화재(47명 사망), 2020년 경기 이천 물류창고 공사장 화재(38명 사망), 2023년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침수(14명 사망) 등등. 그때마다 당국의 통제와 대처는 부실했고, 관련 매뉴얼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 예방이나 교육은 있으나 마나였다. 부산도 예외는 아니어서 초량 지하차도, 학장천 산책로 등지에서 안타까운 인명사고가 잇달았다.
이는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탄생한 재난 컨트롤타워가 제 역할을 못 했다는 방증이다. 2014년 해경·소방 기능을 흡수해 재난안전 분야를 총괄하는 국민안전처가 신설됐다. 하지만 2년 8개월 만에 간판을 내렸고, 이후 이를 이어받은 재난안전관리본부가 행정안전부에 설치됐다. 본부장은 행안부 차관급인데 현재로선 안전 관련 최고 직급이다. 국무회의 참석이 불가능한 구조에서 재난안전 대책이 제대로 작동될 수 있을지 우려가 끊이지 않는다. 정확한 사고 원인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도맡는 별도의 독립기구 설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전문가들은 재난 대응 방식의 근본적인 변화에 방점을 찍는다. 사고 수습이나 복구도 중요하지만 ‘예방’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경우 재난 예방과 대비에 70%를, 대응 복구에 30%를 투자한다고 한다. 한국의 경우는 정반대 비율에 머물러 있다.
3. 마음의 상처는 아물었나
10년이라는 세월이 길어 보여도 심리적 고통을 치유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세월호 유족들은 대부분 조현병과 우울증, 자살 충동의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 진상 규명에 매진하다 보니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정부 지원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으니 냉혹한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세월호 피해 지원 특별법’에 따라 유족들에게 의료비를 지원해 왔다. 지급 기간은 시행령에 따라 ‘2024년 4월 15일까지’로 정해져 있다. 정부가 시행령을 새로 고치지 않으면 의료비 지원은 올해로 끊기는데, 형평성 문제와 재정 건전성 때문에 지원 연장이 어렵다는 입장이다. 시한을 고치는 법안이 21대 국회에서 발의되기도 했으나 논의가 미뤄져 자동폐기 직전이다. 미국은 2001년 9·11 테러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비 지원을 2090년까지 지정해 사실상 평생을 보장한다. 국가 재난으로 발생한 트라우마 치료에 기간을 두는 것 자체가 사회적 책무의 방기에 가깝다. 참사 피해자에 대한 장기적 지원은 선택 아닌 필수여야 한다는 뜻이다.
재난으로 인한 마음의 속병은 신체적 장애보다 후유증이 길다. 정상적인 애도와 트라우마 치료 과정을 거치지 못한 참사 피해자들은 더 그렇다. 트라우마는 3년, 5년, 10년을 주기로 가중되고 그때마다 숨어 있던 것이 터져 나온다고 한다. 전문적인 심리 치료를 통해 이들의 고통을 보듬는 정책 지원이 그래서 중요하다. 여기에는 유족은 물론 참사를 목격하거나 구조에 투입된 사람을 비롯해 인근 거주민 등도 포함될 수 있다.
앞서 제기된 세 가지 질문은 국가적, 범국민적 자성과 성찰을 전제로 한다. 우리의 시선은 늘 해결해야 할 숙제, 미흡한 실천들에 집중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월호 10년’은 고통의 시간이었으나 많은 걸 바꿔 놓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후의 사회적 재난을 바라보는 하나의 기준이 됐고, 재난에 더 신경 쓰고 안전 문제에 더 민감한 공동체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이들이 바로 유족들과 참사 피해자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덕분에 우리는 어렵게나마 한발 한발 나아간다. 더 이상의 참극이 일어나지 않는 소망의 사회를 향해.
2024-04-17 [1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