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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인구 변화와 도시의 미래
2023년 영국 남자 신생아 이름 중 ‘무함마드’(Muhammad)가 가장 많았다. 무슬림 이민 가정이 선호하는 ‘무함마드’는 ‘노아’ ‘올리버’ ‘조지’와 10년째 선두 경쟁 중인데 2022년 2위에서 이듬해 1위에 오른 것이다. 다산을 선호하는 이민자가 전체 출생률에 무시하지 못할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데, 이 현상은 독일도 마찬가지다. 2023년 태어난 신생아 중 무려 27.8%가 이민자 가정에서 나왔다. 2016년 통계를 보면 독일인 여성의 합계출산율(여성 1명당 기대 출생아 수)은 1.45명에 불과했으나 이민 여성이 1.95명이었던 덕분에 평균이 올라가 합계출산율 1.59명을 기록했다.
유럽은 인구 위기에 선방하는 사례로 꼽힌다. 2023년 독일의 합계출산율은 1.35, 영국은 1.44, 프랑스는 1.68이었다. 히지만 이민자 변수를 감안해야 유의미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즉, 저개발 국가의 젊은이들은 교육과 일자리의 기회가 있는 선진국으로 몰리고, 늙어 가는 선진국은 젊은 피 수혈을 통해 성장 동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민자 유입이 없었다면 ‘합계출산율 1명’의 저지선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
통계청의 지난달 26일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2024년 합계출산율은 0.75명이다. ‘찔끔’이긴 하지만 전년 대비 0.03명 증가했다. 부산(0.68명)과 서울(0.58명)은 특별·광역시 중 가장 낮았지만 역시 하락세를 멈추고 반전했다. 하지만 한국은 선진국에 비춰 보면 여전히 ‘국가 소멸’ 수준이다. 합계출산율이 1명 이하로 떨어지면 인구 반토막이 기정사실화되기 때문이다.
유럽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젊은 세대의 구직 행렬은 인구 구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한국도 유사 사례가 보인다. 2024년 출생 통계에서 경기도 화성시(1.01명)와 평택시(1.0명)는 일자리와 도시 성장의 상관관계를 실증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화성은 2년 연속 인구 100만 명을 넘겨 올해 특례시로 승격했다. 인구 유출이 심화되면서 지난해 인구 110만 명선이 무너진 울산(0.86명)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첨단 미래 산업과 전통 제조업의 대비이기도 하다.
일자리를 찾아 젊은층이 몰리는 도시는 성장 가도를 달리지만 노인만 남은 도시는 쇠락 일로를 걷는다. 인구 구조 변화로 도시의 미래를 읽는다면 화성·평택과 울산은 양극단에 서 있다.
■ 일자리, 청년 세대, 출생률 선순환
서울 수서에서 경기도 평택으로 이어지는 고속철도 SRT 라인은 약동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LG전자, 현대모비스 등 굴지의 대기업 공장과 연구 시설이 평택과 용인, 화성에 들어서면서 일대는 상전벽해를 거듭했다. 용인은 꾸준히 인구가 늘어 109만 명으로 울산을 곧 제칠 기세다. 특히 화성의 성장은 눈부시다. 인구 19만 명의 화성군이 2001년 3월 화성시로 승격된 지 23년 만에 100만 명을 돌파하며 폭풍 성장했다.
비결은 일자리다. 화성 내 22개 산업단지에 반도체·자동차·바이오 등 첨단 미래 분야 2만 7000여 개 기업이 입주해 끊임없이 젊은 인재를 빨아들인다. 동탄신도시 등에 정주 여건이 갖춰지고 수도권을 촘촘하게 연결하는 철도·도로 등 도시 기반 시설이 조성된 것도 한몫했다. 고임금 정규직 일자리를 찾는 전국의 취업 희망자들에 선망의 지역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 덕분에 주민 평균 연령은 39.3세로 낮아졌다.
2021년 기준 화성의 지역내총생산(GRDP)은 91조 417억 원으로,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1위였다. 울산의 79조 7620억 원보다 높고 부산(106조 5100억 원)을 바싹 추격할 정도로 큰 경제권으로 부상했다. 반도체 벨트 조성 등 대기업의 투자 확대도 예정되어 있으니 취업자는 더 몰릴 전망이다. 일자리와 청년 세대, 출생률이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 선순환되면서 도시 경쟁력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농촌 지역이었던 화성은 20년 만에 전국에서 가장 젊고 활기찬 대도시로 성장했다.
■ 청년이 살기 힘든 도시
1인당 GRDP 전국 1위, 중산층 노동자 도시…. ‘대한민국 산업수도’라는 자부심 깃든 울산의 수식어는 이제 옛말이 됐다.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췄지만 알짜배기가 빠져나가면서 울산은 갈수록 기력을 잃고 있다. 주요 대기업이 연구소와 엔지니어링 센터를 고급 인재 유치에 유리한 수도권으로 이전한 탓에 생산 기지로 전락한 것이다.
지난해 발간된 〈울산 디스토피아, 제조업 강국의 불안한 미래〉는 대기업 주력 부문이 떠난 울산에서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가 사라진 것이 도시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고 진단했다. 비정규직 하청 노동만 남은 지역에서 버틸 수 없는 청년 세대의 수도권 유출이 반복된다는 것이다. 청년이 떠나고 고령자만 남게 되니 도시의 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울산은 좋은 일자리 덕분에 인재가 유입돼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좋은 일자리에 인재를 빼앗기는 신세가 되면서 쇠락하고 있다.
■ 일자리, 도시 흥망 좌우
대도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첨단 기술 분야 일자리가 필수다. 미국의 노동경제학자 엔리코 모레티는 일자리를 매개로 도시의 성장과 쇠퇴를 연구했다. 모레티가 주목한 건 ‘승수 효과’와 도시 불균등 발전이다. 소프트웨어, 생명공학, 에너지 등 첨단 기술 분야에서 일자리가 1개 생기면 전문 및 비숙련 서비스 일자리 5개가 파생되는 ‘승수 효과’ 덕분에 도시가 성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첨단 산업이 특정 대도시에 집중되면서 도시 사이에 경제적 격차가 커지는 것이다. 실리콘밸리, 보스턴, 시애틀은 첨단 산업 덕분에 인재가 몰리고 번성하지만, 디트로이트, 클리블랜드 등 전통 제조업 중심 도시가 쇠퇴한 이유다.
화성·평택의 급성장이 설명되는 대목이다. 통계청의 ‘시군구 취업자수’ 통계를 보면 화성·평택에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일자리다. 화성의 2013년 상반기 취업자 수는 27만 3000명이었는데 2024년 상반기에 54만 7000명으로 곱절 증가했다. 평택도 21만 4000명에서 33만 7000명으로 큰 폭으로 성장했다. 일자리가 젊은 세대를 부르고 출생률도 높여 결국 도시의 활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확연하다. 일자리와 도시의 흥망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 부산, 지속 가능한 사회로 가려면
한국고용정보원 통계에 따르면 부산 청년 인구(15~29세) 비중은 2014년 6.69%에서 2023년 5.95%로 10년 내리 쪼그라들었다. 전국 17개 시도 중 감소 폭이 가장 컸다. ‘청년이 살고 싶은 도시’ 구호가 참담한 대목이다. 부산이 광역시 최초로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유일하게 ‘소멸 위험’ 경고를 받은 상황과 동전의 양면이다.
부산의 미래 전략에 대한 정답은 이미 나와 있다. 글로벌 허브도시의 미래상은 첨단산업이 번성하고 청년 세대가 꿈을 펼치는 곳이다. ‘부산형 판교 테크노밸리’라는 청사진으로 추진되는 센텀2지구 도시첨단산업단지를 비롯해 부산이 전통 산업 대신 미래형 산업 유치에 적극 나서는 까닭이기도 하다.
부산은 화성·평택의 길을 지향하지만 발 딛고 있는 현실은 울산과 판박이다. 부산이 미래를 기약하려면 첨단 미래 기술 중심의 산업 구조 혁신을 이끌어 내야 하고 그 결과는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일자리 창출로 이어져야 한다. 부산은 소멸과 지속 가능한 도시의 갈림길에 서 있다. 길잡이는 일자리다. -끝-
2025-03-19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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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고개 드는 개헌론, 화두는 ‘분권’
1987년 이후 없었던 개헌은 한국 정치의 숙명적 과제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면서 정치계, 학계,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고 있다. 이미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은 지난해 연말부터 ‘87년 체제’가 시효를 다했다는 인식은 널리 퍼졌다. 개헌의 필요성을 누구도 부정하기 힘든 변곡점의 시기. 개헌 논의의 방향성을 위해 개헌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살피고자 한다.
■9번 중 5번이 정권 연장용
한국에서 이뤄진 개헌은 좋지 않은 기억이 대부분이다. 1948년 제헌헌법 제정 이후 9차례의 개헌이 있었는데, 이 중 5차례가 정권 장악 또는 정권 연장이라는 불순한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1954년 2차 개헌이 그늘진 헌정사의 시작이다. 투표 결과 개헌에 필요한 표가 딱 1표 모자라자 집권 여당이 ‘사사오입’이라는 기상천외의 방법으로 부결을 의결로 뒤집었다. 1969년 6차 개헌은 ‘3선 개헌’으로 유명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3번째 연임이 가능하도록 헌법 규정을 바꾸기 위해 여당이 국회 본회의장이 아닌 별관으로 옮겨 날치기 통과 기술을 선보인 게 바로 그때다. 1972년 7차 개헌은 유신헌법의 선포였다. 개헌 작업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헌정사상 처음으로 공론화 과정이 생략됐다. 정체불명의 체육관 선거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99%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낳았다.
1980년 신군부가 체육관 선거를 모방한 8차 개헌은 유신헌법의 아류였다. 개헌을 논의할 국회가 존재하지 않았던 게 가장 큰 특징이다. 행정·입법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국가보위대책회의라는 불법조직이 개헌 작업을 도맡았기 때문.
개헌 역사의 대부분은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1980년대 두 차례의 개헌은 달랐다. 1980년 봄의 개헌 논의는 민주적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와 함께 대통령 권한에 대한 견제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대통령 직선제와 4년 중임제 방안이 그때 나왔다. 안타깝게도 이런 노력들은 신군부 집권으로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만다.
1986년 개헌 논의는 국민과 야당의 거센 요구가 정부 여당을 견인해 낸 결과다. 1987년 9차 개헌은 군부독재 종식과 형식적 민주 체제의 구축이라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당시 분출했던 다양한 의견들을 흡수하지 못한 한계도 분명하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우리 헌법은 동면 상태다.
■협력·견제를 통한 민주적 공동체로
‘87년 헌법’은 민주항쟁의 결실이지만 군사정권 시절의 잔재도 섞여 있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에게 국가원수 자격을 부여하고 계엄 선포권과 주요 인사 임명권, 법률안 재의요구권과 제출권 등 막강한 권한을 몰아준 게 대표적이다. 집중된 권력이 무능과 부패를 만날 때 어떤 참담한 결과를 낳는지 국민들은 똑똑히 보았다. 계엄·내란 사태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국정 운영의 민주성을 해치고 국민의 삶과 미래를 옥죈 권력 남용의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향후 개헌의 화두가 ‘분권’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권은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된 권력과 역할을 분산하고 협력과 견제를 통해 민주적 국가 공동체를 만들자는 의미다. 그런데 개헌은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휘둘려 매번 좌초되곤 했다. 현실적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역할 축소 문제를 먼저 논의하는 게 바람직하다.
국가 권력구조에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 대통령제와 의회제(의원내각제), 이를 절충하는 이원집정부제(분권형 대통령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권력구조에 따라 여러 가지 세부적인 선택지가 있다. 권력구조를 먼저 결정하고 대통령 임기나 중임 여부를 논의하는 것이 합리적인 방향이라는 뜻이다.
각각의 권력구조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대통령제를 유지했을 때의 위험성과 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를 채택했을 때의 위험성을 심도 있게 비교·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제의 경우 우리가 제대로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대통령제의 폐해 때문에 마냥 좋은 면만 봐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귀 기울일 만하다.
대통령제 자체보다 5년 단임제의 부작용에 주목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5년 단임 대통령제는 급히 만든 87년 헌법안의 결함인데, 전 세계적으로도 희소하다. 대통령 임기 중간에 치러지는 총선이 여소야대 현상을 빚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방분권 개헌은 시대적 과제
분권 개헌의 의미는 대통령 권한의 분산뿐만 아니라 중앙정부 권한을 지방정부로 이양하는 지방분권까지 포함한다. 1991년 지방의회가 부활하고 1995년 민선 1기 지방자치단체가 출범했지만 지방자치 관련 내용이 헌법에 반영된 적은 없다. 현행 헌법의 관련 조항은 제117조와 118조가 전부다. 그마저도 정부의 법률이나 법령에 따라야 한다는 규정이 사실상 지방자치의 손발을 묶고 있다. 이 규정을 바꿔 지방정부의 법적 지위를 명확히 해야 한다. 나아가 실질적 지방자치와 분권을 내용으로 하는 헌법적 보장이 강화돼야 한다.
지금 수도권 일극주의와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는 근본적 한계에 직면했다. 지방분권형 개헌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만드는 최선의 해법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이 독자적으로 발전 전략을 수립하고 입법·행정과 세입·세출 권한까지 갖는 실질적 권한이다. 제헌국회 당시, 수도권과 비수도권 의원 비율은 19.5% 대 80.5%. 제22대 국회에서는 56% 대 44%로 완전히 역전돼 있다. 중앙집중 현상이 얼마나 심화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수치다. 헌법에 국가균형발전 규정을 만들고 지방분권 확보를 위한 지역 대표형 상원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래서 나온다.
지방분권 확립은 재정분권의 뒷받침이 필수적이다. 우리나라 총조세 중 국세와 지방세 비중은 2023년 기준으로 각각 75.4%와 24.6%. 지방은 여전히 막대한 재원을 중앙에 의존한다. 스위스(54.9%), 캐나다(54.8%), 독일(53.7%), 미국(41.6%), 일본(37.5%) 등 주요 국가에 비해 현저히 낮은 지방세 비중을 높여야 한다.
개헌은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다. 탄핵 정국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는 개헌에 소극적인 입장이고, 국민의힘은 개헌을 국면 전환용으로 활용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정치 논리가 개입하면 개헌은 또다시 기회를 잃게 된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국가 내부 갈등과 대립은 커지고 국가 경쟁력은 약화될 게 뻔하다. 지역의 경쟁력 회복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국가 시스템 전반의 과감한 개혁이 ‘분권 개헌’의 성공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김건수 논설위원 kswoo333@busan.com
2025-02-19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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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부산시의 외국 명성 의존, 득일까? 독일까?
지난해 부산 문화판엔 두 개의 큰 움직임이 있었다. 하나는 프랑스 파리 퐁피두 센터 부산 분관 유치 움직임이었고 다른 하나는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지에 대한 외국 유명 건축가의 설계 참여였다. 공통된 점은 ‘외국 명성으로부터의 수혈’이었다. 이를 두고 부산시는 “이는 일종의 외부로부터의 자극 요법으로, 문화적으로 더 풍부한 도시를 만들려는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접근이나 방식이 무작정 나쁘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한 부산 시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하다. 그렇다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
■ 분관 유치 비밀협정서 ‘의문’
퐁피두 센터 부산 분관 유치는 도시 이미지를 국제적으로 강화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흔히 특정 도시가 유명 박물관이나 미술관 분관을 유치하려는 목적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부산시는 퐁피두 센터 분관이 도시의 문화적 품격을 높이고 관광객을 유치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이는 스페인 항구도시 빌바오에 구겐하임미술관이 들어서면서 도시 경쟁력을 높인 사례(빌바오 효과)처럼 퐁피두 센터 분관 유치 역시 이와 유사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퐁피두 센터 부산 분관 유치는 추진 과정부터 투명하지 못했다. 지역문화위원회와 시의회 심의 과정, 예술인과의 협의 과정 등이 없거나 비공개로 진행됐다. 퐁피두 측과 체결한 비밀협정서(양해각서)는 너무도 불공정하다. 협정서에는 부산시가 퐁피두 분관을 지어 주고 이를 퐁피두가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부산시는 미술관 건축에 필요한 재개발 비용을 전적으로 부담하면서 퐁피두는 아무런 부담 없이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계약 기간도 5년으로 한정돼 있다. 협정서가 프랑스어와 영어로만 작성된 점은 문화 주권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다. 이 외에도 협정서에는 굴욕적인 내용이 너무 많아 세세히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다. 이런 허술함과 문화 주권을 포기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부산 분관 유치는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 어떤 명분이나 실리도 이를 앞설 순 없다. 협정서에는 2025년 12월 31일까지 기본 계약을 하지 않으면 협약이 자동 폐기된다고 명시돼 있다.
■ “특정 지역 사업 허가 들러리”
지난해 부산시는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기획설계를 통해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면서도 창의적인 건축물을 건립하고자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시범사업 대상지로 3곳을 최종 선정했다. 부산시는 애초 특별건축구역 사업지 내 외국 유명 건축가의 설계 참여를 통해 부산을 문화적·건축적으로 더 풍부한 도시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나아가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설계를 통해 도시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도였다. 부산시가 세계적인 건축가를 초빙해 건축 디자인에 신경을 쓴 것은 이해할 만하다. 지역 공공 건축물이나 공동주택 등이 여전히 획일적인 디자인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외국의 유명 건축가와 굳이 컨소시엄을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한 당위성은 되지 못한다. 시범사업 대상지 선정 이후 반응도 미지근했다. 디자인 면에서 기대 이상의 작품도 보이지 않았다. 특히 대상지에 초고층 건물이 포함된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이 많았다. 심지어 “이러려고 외국 건축가와 협업했나” “왜 외국 건축가와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사실상 특정 지역 사업 허가를 위한 들러리 행사’라는 비판도 강하게 제기됐다. 동시에 지역 건축가의 역할 감소와 경쟁력 약화에 대한 우려와 함께 특별건축구역 인센티브가 잘못 사용될 경우 도시 경관을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받았다. 결과적으로 부산 도시 건축에 신선한 자극제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겼다. 세계 유명 건축가를 초빙해 특별건축구역을 설계하는 사업은 퐁피두 부산 분관 유치와 마찬가지로 부산시의 깊은 성찰과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 자체적인 문화 역량 키우는 데 방해
퐁피두 센터 부산 분관 유치와 세계 유명 건축가를 초빙한 특별건축구역 사업에 대한 시민들의 비판은 부산시가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다. 특히 퐁피두 센터 부산 분관과 같은 프로젝트는 단순히 문화적 스펙터클을 만들어내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부산 시민들의 일상적인 문화 향유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퐁피두 센터가 부산에 들어서면 세계적인 예술 전시와 문화 행사를 유치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부산 시민들의 문화적 자긍심을 높이고 일상적인 문화생활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면 되레 시민들의 문화적 소외를 초래할 위험도 높다.
외부 유명 건축가들의 작품이 부산의 도시 공간에 삽입될 경우 그것이 부산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설계한 건축물들이 부산 시민들의 생활과 가치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보다는 단기적인 관광 효과에 의존할 가능성도 있다. 지속 가능한 도시 발전을 위한 건축이 아니라 외부의 시각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형태로 나아간다면, 부산은 부산만의 독특한 문화적 매력을 잃을 위험이 크다.
외국의 유명 건축가와 문화기관 유치 전략은 부산이 자기 주도적인 문화 산업을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 외부 자원에 의존하면 장기적으로 부산의 문화와 건축 역량을 키우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으며, 지역 건축가들의 기회가 제한되고 부산만의 독자적인 정체성과 특성이 사라질 위험이 있다. 지나치게 외부 자원이나 명성에 의존하면 부산은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
■ 문화의 자발성 키워나가야 할 때
일본 현대 건축을 이끈 건축가로 평가받는 단게 겐조(1913~2005)는 1960년 증가하는 도시 인구 밀도를 해결하기 위해 ‘도쿄 도시계획 1960’을 제안했다.
이 계획은 도쿄만 바다 위에 기둥을 세워 2만 5000가구가 거주할 수 있는 모듈식 건물을 짓는 메타볼리즘 계획이었다. 메타볼리즘은 세계가 일본의 현대 건축에 주목하는 계기를 만든 건축 운동이다. 건물을 하나의 유기체 생물로 보고 건물도 성장하고 바뀌어야 한다는 건축 철학을 바탕으로 1970년대 이후 일본 건축가들은 해외로 활동 범위를 넓혀 국제공모대회를 통해 도시 설계와 연계된 대형 프로젝트를 잇따라 선보인다. 이는 일본 건축이 서구 건축의 일방적 수용에서 벗어나 독자적 길을 찾은 계기가 된다. 일각에서는 이 운동이 오늘날 일본이 건축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프리츠커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국가가 되는 데 기초가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문화는 외부의 영향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창의성이 중요하다. 외부 문화기관과 유명 건축가들이 부산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는 부산이 진정한 문화적 중심지로 자리 잡을 수 없다. 1960년대 일본의 건축가들처럼 우리도 부산만의 문화적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문화인과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나서서 지역 문화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 부산의 문화 주권이 확립되고 그 쇠퇴를 막을 수 있다. 부산 스스로 문화적 역량을 키워나가겠다는 자세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2025-01-2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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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AI 디지털교과서의 운명은
새 학기를 두 달도 남겨두지 않은 시점인데 인공지능 디지털교과서(AIDT)의 운명은 아직도 결정되지 않았다. 정부는 교육 개혁의 핵심 과제로 AIDT를 2025년 1학기부터 초·중등학교 일부 학년과 교과에 도입키로 했는데 국회가 야당 주도로 AIDT를 ‘교과서’가 아닌 ‘교육 자료’로 격하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며 제동을 걸었다. 이에 교육부가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재의요구권 행사를 요청키로 하는 등 강행 의지를 굽히지 않고 공방을 이어가는 중이다. 일선 교육 현장에서는 어느 박자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 교과서 vs 참고서 교육 현장 혼란
교육부는 2025년부터 초등학교 3·4학년, 중학교 1학년, 고등학교 1학년의 공통 교과인 영어, 수학, 정보 교과에 AIDT를 도입한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지난해 11월 검정 심사를 통과한 12개사 76종의 AIDT를 공개했다. 그런데 국회가 12월 26일 AIDT를 교과서가 아닌 교육 자료로 격하하는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을 본회의에서 통과시키면서 교과서 도입이 무산되는 분위기였다. 이럴 경우 AIDT 채택은 의무가 아닌 학교장 재량이 된다. 그런데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최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재의요구권 행사를 요청하겠다고 밝히면서 법적 공방이 지속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회 교육위원회는 17일 ‘AI 디지털교과서 청문회’를 실시한다. 교육부와 여당, 야당의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합의점을 찾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시도교육청별로도 AIDT 정책 수용에 온도 차를 보이고 있어 혼란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황서운 부산교육청 중등교육과장은 “AIDT 선정과 관련해 일선 학교에서 문의가 잇따르는 등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며 “교육부 방침이 정해지지 않은 만큼 2월 중순까지 최대한 선택을 늦춰 달라고 학교장에게 안내하고 있다”고 밝혔다.
■ 학생 맞춤형 디지털 교육 대전환
AIDT는 인공지능(AI) 기능이 탑재된 태블릿PC를 통해 개인 맞춤형 학습을 제공하는 도구다. 교육부는 2023년 6월 AIDT 추진 방안 발표를 시작으로 교사 연수와 인프라 확충을 진행하는 등 의욕적으로 추진해 왔다. 학생에게 맞춤형 학습 콘텐츠를 제공해 학습 흥미를 높이고 학습 격차를 해소한다. 교사에게는 학생 개개인의 학습 상황을 분석할 데이터를 제공함으로써 참여형 수업 설계와 맞춤 지도를 지원한다는 게 교육부의 설명이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잠자는 교실을 깨우고 미래를 여는 교육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역·소득 격차 없는 평등한 교육 환경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꿈도 제시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올해 신년사에서도 “AIDT를 활용한 디지털 교육 대전환으로 공교육을 통한 학생 개개인 맞춤 교육을 실현해 영포자·수포자 없는 교실을 만들겠다”며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교육부는 2028년까지 국어, 사회, 역사, 과학, 기술, 가정 등 전 과목으로 AIDT를 확대한다는 로드맵도 세웠다.
■ 디지털 과의존·문해력 저하 우려
교육부의 의욕적 추진에도 불구하고 교육 현장은 거세게 반발했다. 교사는 물론이고 학생과 학부모 모두 디지털 과의존과 문해력 저하 우려를 제기하며 AIDT를 유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AI 디지털교과서 중단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해 9월부터 한 달가량 진행한 AIDT 도입 중단 촉구 서명운동에 교사, 학생, 학부모 등 10만 명이 참여했다. 공대위는 국회에 △AIDT 교육 효과 검증 미흡 △학생 학습데이터 개인정보보호 체계 미비 △민간 기업에 대한 과도한 교육 재정 투입 △인지 중심 학습 편향 사교육 심화 등에 대한 철저한 점검을 촉구했다. 지난해 9월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AI BUS 2024 콘퍼런스’ 교육 세션에서도 교사와 학부모의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학부모들은 AIDT의 효과에 대한 평가가 부족한 상황에서 학생들이 디지털기기에 지나치게 노출될 위험만 안게 된다고 반발했다. 교사들도 학교 현장의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는데 학생 개인정보 데이터화에 따른 보안 문제 등 걱정이 한둘이 아니라고 했다.
■ 교육부 일방적 밀어붙이기 혼선 자초
교육 전문가들은 AIDT가 이명박 정부에서 스마트 교육이라고 밀어붙였던 디지털교과서의 운명과 판박이라고 지적한다. 2013년 도입 예정이었던 디지털교과서도 확인되지 않은 학습 효과와 심각한 컴퓨터 중독에 대한 우려로 교육 현장이 떠들썩했다. 결국 ‘세계 최초’의 디지털교과서는 당시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의 퇴임과 함께 학교 현장에서 사라졌다. AIDT도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적 숙의 과정도 없이 낯선 에듀테크 기술을 교육 현장에 전방위적으로 도입하겠다는 자체가 무리수라는 지적이다. 그럼에도 교육부는 현장 교사와 학부모의 우려에 아랑곳없이 밀어붙이며 반발만 키웠다. 지난해 8월로 예고했던 AIDT 검증도 11월로 밀리면서 졸속 추진 논란까지 자초했다. 조경선 전교조 부산지부장은 “학교 현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이유가 궁금하다”며 “교실은 학생이 집단으로 모여 사회를 배워가는 공간이기도 한데 문제은행식 디지털 학습 도구가 학업에 흥미를 잃은 학생을 변화시키고 수업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돌아봐야
7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한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CES)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합작 스타트업이 AI가 장착돼 아이가 문제를 풀면 정답을 체크해 주고 모르는 단어의 뜻도 가르쳐주며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싱크팰 태블릿’을 선보였다. 바야흐로 AI시대다. 학습 현장도 시대 변화에 맞춰 디지털 기술의 활용에 관심을 쏟아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조현식 포천초등학교 수석교사는 “공개된 AIDT는 기능적 측면에서 보완해야 할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학교 현장에서 교사와 학생이 피드백을 통해 고도화시켜 가야 한다”며 “AIDT를 통해 교사 중심의 수업을 학생들이 참여하는 쌍방향으로 바꾸고 교육 과정을 합리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교육의 본질적 가치 위에서 에듀테크 활용을 고민해야 한다는 근본적 문제 제기도 만만찮다. 교육은 인공지능에 맡기고 교사는 인성만 담당한다는 식의 발상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AI가 지적 학습 능력을 높이기는커녕 정신 건강과 전인적 발달에 심각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상존하는 게 현실이다. 교육은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이 직접 상호작용하는 불확실한 과정일 수밖에 없다. AI 기술로 획일화하고 계량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김한나 부산교사노조 위원장은 “AI를 코딩하고 새로운 기술을 창조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지 AI가 만든 세상을 터치만 하면 구현되는 걸 보고 문제 풀이만 반복하는 게 아이들 교육에 무슨 도움이 되는지 근본적 고민을 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2025-01-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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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윤석열’ 뒤에 ‘극우’ 있다
지난달 초 독일에서 쿠데타를 모의한 극우 테러조직이 적발돼 유럽 전체에 파란을 일으켰다. 독일 연방검찰에 체포된 이 테러조직은 극우 정당의 정치인이 포함됐으며, 나치식 국가사회주의 부활을 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군사장비를 갖추고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인종 청소’까지 계획했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2022년에도 군사조직을 갖추고 체제 전복을 노린 극우 단체가 적발된 적이 있다. 당시 이들은 연방정부와 의회의 주요 인사를 체포하고 과도정부를 세운 뒤 옛 독일제국을 복원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이 단체 조직원 중에는 현직 판사와 전직 군인도 있었다.
■ “반국가 세력” 말하는 그들
규모는 다르지만 12·3 비상계엄의 전모와 몹시도 흡사하다. 여러 증거와 증언들로 점차 확인되고 있는 바, 12·3 비상계엄에서는 군대를 동원해 정치인을 체포하고 국회와 선관위를 장악하기 위한 군사작전이 펼쳐졌다. 이 같은 비상계엄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자신에게 닥친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벌인 무모한 시도였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하지만 그게 이번 내란 사태의 본질을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윤 대통령 뒤에 버티고 있는 극우 세력을 주시해야 한다. 어쩌면 윤 대통령은 그들의 대리인 내지 행동대장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른바 부정선거론에서 그 정황을 짐작하게 된다. 올해 4·10 총선 등 지난 선거에서 선관위 중심의 부정이 있었다는 주장인데, 이에 대해서는 선관위, 국가정보원, 사법 당국이 모두 근거 없다고 일축했다. 그런데도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의 주요 타깃 중 하나로 선관위를 지목했다. 지난 12일 대국민 담화에서 그는 “선거 관리 전산시스템이 엉터리라 선거 결과를 신뢰할 수 없다”는 취지로 말했다. 사실상 부정선거론를 대변한 것이다.
부정선거론은 극우 성향의 인사들이 유튜브 등을 통해 줄곧 제기해 온 음모론이다. 이들은 “전자개표기 조작” 운운하며 결국은 지난 총선 때 수개표를 30년 만에 부활시키기까지 했다. 지금도 이들은 선관위 개혁을 요구하며 부정선거 주장을 그치지 않는다. 선관위를 주요 타깃으로 삼은 이번 비상계엄은 이런 극우 성향 인사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확인·강요하기 위해 대통령을 추동해 빚은 결과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상당수 극우 성향 인사들은 현재 국회 다수 의석을 확보한 야당을 입법독재 세력으로 규정하면서 종북 좌파라고 비난한다. 실제로 한 극우 성향 인사는 “부정선거로 다수당이 된 민주당이 입법독재를 하는 게 비상사태가 아니면 무엇인가”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지난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강변했다. 지난 12일 담화에서는 “거대 야당의 의회독재에 맞서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지키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야당은 종북 반국가 세력인 셈이다. 극우 성향 인사들의 주장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인식이고, 그런 이유로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뒤에 극우 세력이 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윤석열 정권 움직인 그들
이런 상황은 우연이 아니다. 돌아보면, 극우 세력이 윤석열 정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했음을 알 수 있다. 한동안 정치권 외곽에 머물던 극우 성향 인사들은 현 정부 들어 대거 공직에 진출해 영향력을 확대했다. 고용노동부 장관, 국방부 장관, 통일부 장관, 방송통신위원장,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 등 정부 주요 공직과 산하기관에 극우 성향 인사들이 포진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부정선거론을 설파하고, 윤 대통령으로 하여금 ‘헌정질서 파괴 세력들’을 해체할 것을 주문했다.
대통령실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강기훈 국정기획비서관실 선임행정관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강 선임행정관은 극우 정당으로 평가된 자유의새벽당 대표 출신으로, 21대 총선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정은 반헌법적’이라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그런가 하면 독립기념관 등 역사·학술 단체 등에도 극우 성향 인사들이 대거 포진해 우리 사회를 이념의 극한 대결로 치닫게 만들었다. 요컨대, 극우 세력은 윤석열 정권 초기부터 주도적으로 국내 정치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12·3 비상계엄 이후 탄핵 정국에서도 이들 극우 세력은 목소리를 낮추지 않는다. 반성은커녕 오히려 비상계엄 논거를 유튜브 등을 통해 전파하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자유통일당(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가 초대 대표를 지낸 극우 성향의 개신교 기반 정당) 비례대표 2번 공천을 받았던 석동현 변호사는 “체포의 ‘체’ 자도 꺼낸 적이 없다고 한다”며 윤 대통령을 감쌌다. 그는 현 탄핵 정국에서 윤 대통령의 ‘입’을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이를 빙자해 그 스스로 비상계엄 옹호 목소리를 높인다.
심지어 이들은 “여론을 바꾸기 위해 광장에 나와야 한다”라며 지지층을 부추겨 집단행동을 선동한다. 전광훈 목사가 특히 열렬하다. 지난해 10월 유튜브를 통해 ‘계엄령을 발동해 국회 동의를 받기 전에 국회의원 300명을 체포해 버리면 된다’는 발언을 한 그는 연일 탄핵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비상계엄을 옹호하고 2차 계엄을 주장해 한 시민단체로부터 내란 선동·선전 혐의로 고발당해도 멈추지 않는다. 지난 18일 경기도 안산에서 열린 집회에서는 “윤 대통령은 해줄 일 다했다. 이제 광화문에서 우리가 마무리를 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쯤이면 이번 내란 사태를 의도하고 촉발시킨 주체가 어떤 세력인지 여실히 확인된다.
■ 민주주의 흔드는 그들
12·3 비상계엄 이후 벌어지고 있는 현 상황에 대해 사람들은 “한국 민주주의의 저력” 운운한다. 틀린 말은 아니만, 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인식이다. 엄밀히 말해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여전히 위기 상황이다. 내란 사태를 추동한 극우 세력이 건재하고, 무엇보다 이들이 지금도 집권 여당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주류의 목소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데도 아닌 국민의힘 내부에서 단말마처럼 터져 나온 고백에서 드러난다. 김상욱 국민의힘 의원이 “국민의힘이라는 보수당 안에 극우라는 암 덩어리가 자라버렸다”고 탄식하고,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당, 그런 당으로 가는 것은 극우적인 그분들하고 궤를 같이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게 그렇다.
국민의 80% 가까이가 윤 대통령 파면을 요구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대통령 한 사람 탄핵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극우 세력이 건재하는 한 민주 헌정질서는 언제든 다시 위협받을 수 있다. 괜한 걱정이 아니다. 과거에 그런 사례가 빈번했다.
해방 직후 극심한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중도 정치와 통일 정부 수립을 지향하던 몽양 여운형은 극우 세력의 표적이 돼 무려 11차례나 테러를 당했고 1947년 12번째 테러에서 결국 죽임을 당했다. 가까이로는 불과 5년 전인 2016년 12월 16일의 국회의사당 습격 사건이 있다. 공수처 반대와 박근혜 탄핵 반대 시위를 벌이던 소위 ‘태극기 부대’ 등 극우 집단이 국회의사당에 불법 진입을 시도해 국회의원과 경찰을 폭행한 사건이다. 12·3 비상계엄은 극우 세력에 의한 그런 폭력 행위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극우 세력과 그에 휘둘리는 정치는 언제든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이번 내란 정국의 본질은 바로 거기에 있다.
2024-12-2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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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12·3 비상계엄
소설가 한강이 10일(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공식 시상식에 참석해 문학상 메달과 증서를 받았다. 바로 일주일 전, 한국인은 역사의 창고에 폐기된 줄 알았던 비상계엄의 망령을 목도했다. 45년 세월의 공백을 일순 무너뜨린 현실의 비현실성 앞에 2024년 끝자락을 힘겹게 통과하던 국민들은 몸서리쳤다. 한강 작가와 12·3 사태는 ‘계엄’이라는 이름의 국가폭력을 통해 매개된다. 1980년 계엄군에 짓밟힌 광주의 아픔을 아로새긴 〈소년이 온다〉는 폭력에 대한 사려 깊은 성찰로 세계적 보편성 차원에서 문학성을 인정받았다. 소설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소설을 방불케 하는, 믿기지 않는 역사의 아이러니 앞에서 국가폭력과 민주주의, 정치의 근본에 대해 생각해 본다.
■ 되풀이되는 비극의 역사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프랑스 혁명을 다룬 칼 마르크스의 저작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언급된 이 말을 ‘한 번은 비극적 종말, 또 한 번은 행복한 결말’로 해석한다면 커다란 오해다. 나폴레옹의 조카인 루이 보나파르트가 1799년 쿠데타를 모방해 1852년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사건을 역사의 우스꽝스러운 광대극으로 비꼰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폭거를 저 경구에 비춰본다면? 아직은 비극이 될지, 소극(笑劇)이 될지, 해피엔딩이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느덧 2024년 달력의 마지막 페이지. 내년이면 2025년 을사년이다.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대한민국에 의회주의를 부정하는 반헌법적 계엄 시도가 있었다는 현실은 세월의 착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계엄. 국가 안전을 위협하는 중대한 위기 상황에서 군대를 동원해 행정권과 사법권을 통제하는 비상조치를 가리킨다.
그동안 대한민국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모두 13차례였다. 광복 후 국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시대였던 1950년대와 군사정권 시절인 1960~70년대에 주로 집중됐다. 대부분의 계엄 조치가 권력 유지나 정적 숙청을 위한 불순한 목적이 대다수였다. 그럴 때마다 시민들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용도로 악용됐으니 역사의 어두운 그늘이다.
특히 주목되는 시대는 박정희 군사정권이다. 자신의 권력 행사에 국민적 동의가 뒤따르지 않자 1970년대 내내 비상상황을 강조했다. 정당성이 부족한 정치집단이 국가적 위기를 명분 삼아 내세우는 것이 ‘비상사태론’이다. 그 뒤에는 공포를 조장해 권력을 이어가려는 탐욕이 숨어 있다. ‘영원한 긴급상황’ 개념이 그렇게 도출됐다. 국민들의 삶과 이성까지 옥죄고 정치를 한참 후퇴시킨다는 점에서 역사적 범죄에 가깝다는 게 학자들의 평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 지속됐던 계엄의 시기는 1979~81년으로 기록된다. 대통령의 서거로 인한 권력 공백을 틀어쥔 전두환 신군부 세력은 그해 10월 27일부터 무려 440일간 비상계엄을 지속했다. 그 한복판에서 빚어진 비극이 5·18이다.
■ 폭력에 대한 한강의 성찰
7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 한덕수 총리가 긴급 담화를 발표하던 즈음,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이 진행됐다. 비상계엄 후폭풍이 여전히 거세던 10일, 한강은 스톡홀름 콘서트홀에서 열린 공식 시상식에서 한국인 최초이자 아시아 여성작가 중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메달을 품에 안았다.
한강은 그동안 잘 다뤄지지 않았던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비극에 깊이 천착해 온 작가다. 따라서 2024년 12월 3일 자행된 국가폭력 앞에서 한강의 문학을 떠올리는 것은 더없이 자연스럽다.
2014년 작 〈소년이 온다〉는 계엄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소년의 삶과 고뇌를 다룬다. 작품 곳곳에 광주의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대신 죽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소년의 시선과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취한다. 소설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나’는 한강과 구분되지 않는다. ‘나’는 말한다. “그들이 희생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 오해였다. 그들은 희생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기 남았다.” 그래서 ‘소년이 온다’는 제목은 주체로서의 현재형을 의미한다. 5·18은 계속되고, 광주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올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2021년 작 〈작별하지 않는다〉도 ‘종료’될 수 없는 역사의 현재진행형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한강의 다른 작품들 역시 역사적 사태를 배경 삼아 인간 내면을 깊이 파고든다. 작품들을 관통하는 근원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폭력을 거부하면서도 폭력으로 이뤄진 세상을 견디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고뇌에 문학의 핵심이 있다.
■ 진정성의 정치는 가능한가
12·3 비상계엄은 한강이 문학을 통해 고발했던 그 옛날 국가폭력의 양상과 다르지 않았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라고 쥐여준 권력과 총칼이 국민을 향했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가 시도됐다는 사실은 오히려 더 큰 충격이다.
이번 계엄 폭거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선한 정치, 진정성의 정치는 가능한가. 막스 베버는 가르친다. “정치의 중요한 수단은 합법적 폭력이며, 악마적 힘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선한 정치를 믿는 것은 정치의 본질을 모르는 위험하고 순진한 일이라는 것이다. 정치 행위는 그 의도와 달리 결과가 어긋나기 일쑤이고 심지어 정반대로 흐른다. 이것이 ‘정치의 비극성’이다.
정치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나. 베버가 말한, 다음과 같은 정치적 소명 의식을 가진 정치인이 필요하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살아 있는 시민정신, 축적된 민주주의의 힘이 이를 견인해야 한다. 이런 정치적 소명이 온 세상을 물들일 때 국가폭력의 반복을 막을 수 있으리라.
마침, 오늘은 5·18 비극을 잉태한 12·12 군사 쿠데타 45주년 되는 날이다. 역사에 이성의 간지(奸智)라는 게 있다면, 소설과 현실이 만나는 이 역사적 아이러니는 어떤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일까. 모든 우주는, 그리고 그 속의 개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의 사건은 총총한 그물로 연결된 개인, 공동체에, 그리고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한강 작가의 인식론이 이와 유사하다. 개인의 삶에 관여하는 역사의 비극을 아프게 살피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국가는 국민을 위해 어떤 형태로 최선을 지향해야 할까. 후세에 어떤 미래, 어떤 사회를 물려줄 것인가.
2024-12-1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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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드라마 '정년이'가 깨운 한국인의 국악 DNA
판소리를 근간으로 하는 여성국극을 조명한 드라마 ‘정년이’가 최근 시청률 16.5%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했다. 시골에 숨은 명창 출신 어머니의 끈질긴 반대에도 끝내 국극 배우가 된 정년이의 처연한 판소리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1950년대 선풍적 인기를 누렸던 여성국극이 드라마를 통해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판소리 등 국악에도 바람이 불고 있다. 어떤 이들은 심청이가 황후가 된 후 아버지를 그리며 부르는 ‘추월만정’을 배우 문소리와 김태리의 목소리로 듣고는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정년이’의 소리가 한국인에게 내재된 흥과 끼의 DNA를 깨우고, 우리 소리의 깊이와 맛을 알게 한 셈이다. 회사 엘리베이터 안에서 심청가를 흥얼거리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가야금 명인 김남순 부산대 명예교수는 “웹툰과 드라마가 일반인이 잘 모르고 있던 국악의 역사성과 예술성을 제대로 끄집어냈다”면서 “이제는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진 한국 전통음악을 세상에 드러내는 자신감과 공감대, 안목이 필요하다”라고 밝혔다.
■ 해외에서 주목받는 국악
2020년, 별주부와 토끼의 추격전을 담은 판소리 수궁가(토끼전)를 재해석해 전통적인 판소리에 현대적인 팝 스타일을 조화시켰던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바통을 이어받은 드라마 ‘정년이’는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K판소리 한류를 만드는 데 폭발적인 기여를 했다. OTT 디즈니플러스 글로벌 TV쇼 부문 6위를 기록하는 등 세계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미국 포브스가 ‘19세기 판소리의 연극 버전’이라고 국극을 소개하면서 K드라마 정년이 특집을 다루기도 했다. 노년층의 한물간 문화 유물로 치부됐던 판소리가 세계인 사이에서 가장 핫한 음악이 된 셈이다.
국립부산국악원은 이런 여세를 몰아 내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통신사의 여정을 그린 무용극 ‘조선통신사-유마도를 그리다’를 일본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정년이’와 같이 전통무용과 국악 등이 완벽한 무대를 이룰 예정이다. 부산국악원 판소리 단원 김미진 씨는 “해외에서 가사도 모르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데 객석에서 숨소리 하나 안 들릴 정도로 집중한다”면서 “최근 국악인들은 판소리와 국악으로 세계를 제패하는 꿈을 꾸고 있다”라고 밝혔다.
■ 대중화 신호탄 쏘나
대부분 국악인은 ‘정년이’ 드라마에서 스토리텔링과 음악에 대한 서사가 국악 대중화에 굉장한 기폭제가 됐다고 판단한다. 국악은 18세기 서양 오케스트라 음악보다도 더 오래됐지만, 제대로 된 해설과 스토리텔링이 없는 것이 한계였다. 한번 듣고 공감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12회 분량의 ‘정년이’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소리를 완성하며 겪는 어려움과 극복의 서사에 공감하면서, 한국인에 내재된 국악 DNA가 깨어나게 된 셈이다.
최근 국악 공연장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1인창극 공연을 하는 소리꾼 이향송 씨는 지난 17일 해운대 문화회관에서 초연된 1인 창극 ‘사자탈을 쓴 장산범’ 공연에서 “너무나 많은 분이 오셔서 즐겁게 보시고, 또 많이 울고 가시기도 하셨다”면서 “관객 반응이 이전보다 훨씬 뜨거워졌다”라고 말했다. 부산MBC 라디오 ‘가정 음악실’ 국악 코너 ‘모던 풍류’도 한 달에 1회 편성된 프로그램을 이제는 매주 진행하고 있다. 부산MBC 안희성 국장은 “최근 국악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몰랐던 매력을 알아간다’ ‘우리 소리에 귀가 트였다’ 등 청취자 호응이 훨씬 높아졌다”라고 전했다.
판소리 창극을 현대화하는 '데라클 엔터테이먼트'와 손잡고 전통 민담과 설화를 재해석하고 있는 소리꾼 이향송 씨는 최근 연말 파티에 춘향전 방자전 부분의 판소리를 하고 싶다면서 레슨이 들어오는 등 전례없는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고 귀띔한다. 일반인들이 우리 판소리가 이렇게 매력적이었나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런 추세를 반영해 국립부산국악원은 6·25전쟁 와중에 부산으로 피난 온 국악 명인들이 부산의 한 여관에 머물렀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근현대사 국악극 ‘대청여관’을 2025년도에 올릴 예정이다.
■ 젊은이 속으로 들어간 국악
젊은 국악은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 우리의 전통 유산 국악을 힙(hip·유행에 밝다)하다고 말할 정도이다. 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젊은이들이 향유하는 문화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부산에서도 전통을 넘나들면서 새로운 창작곡과 서양음악과의 콜라보를 통해 모험과 도전에 나서고 있는 국악 공연이 쏟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소리연구회 소리 숲’. 지난달 30일 젊은이들로 북적이는 부산 수영구 수변공원 옆 밀락더마켓에서 ‘2024원데이뮤직페스타BUSANWAVE’ 무대를 열었다. 전문 DJ에 의한 신스팝(synthpop)과 태평소 소리가 한데 어우러지면서 EDM으로 진화한다. EDM에 맞춰 머리를 흔들다가, 태평소와 피리 소리에 온몸을 휘청이기도 한다. 일몰의 광안리 바다를 보면서 피리와 플루트의 협연, 태평소의 농악을 현대화한 재즈 버스킹으로 장르를 넘나드는 무대를 엮어냈다.
소리연구회 소리 숲 김지윤 대표는 “정통성에 기반을 둔 국악의 재해석을 통해 서양음악과 어우러지면서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라고 밝혔다. 다음 달 13일에는 해운대 문화회관에서 ‘민요, 세계를 만나다’라는 주제로 초연 창작곡 7곡 등 모두 10곡을 국악기와 서양악기, 합창으로 풀어낸다. 국립부산국악원 판소리꾼 김미진 씨는 이날 과테말라 민요를 그 나라 언어인 마야어 판소리로 풀어낸다.
■ 20~30대 젊은 국악인 활동 두드러져
김미진 씨는 "최근 지역 출신 젊은 국악인이 대학 졸업 전후에 밴드를 결성해 전통을 기반으로 하면서 서양악기나 무용과 콜라버하는 공연 기획이 활성화됐다"고 평가했다.부산과 대구 등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청년국악그룹 ‘신민속악회 바디’. 신민속악회 바디는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전승받은 소리에 자신의 음악적 색을 입혀 다듬어놓은 소리를 의미하는 ‘바디’란 이름처럼, 전통음악을 새롭게 해석해 한국적인 특색과 창의성을 담은 음악을 창작한다. 바디 단원이자 아쟁 연주자인 정선겸 씨는 “끼와 전통국악 기반을 탄탄하게 다진 젊은 국악인들의 활동이 다채로워지고 있다”면서 “최근 K컬처에 대한 자부심, 자신감까지 합쳐지는 흐름”이라고 말한다.
갓 대학을 졸업한 판소리꾼 및 국악기 연주자들로 구성된 국악밴드 활동도 두드러진다. 국악그룹 ‘HAVE (헤이브)’ ‘이쁠’ 등도 모두 20대가 주역이다. 헤이브는 피아노와 첼로의 선율에 남도 굵은 성음을 얹은 '모던 판소리' 그룹이다. 이들은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만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20대 소리꾼 이향송 씨는 부산 문학가의 수필집 〈오늘도 소리도〉를 판소리와 국악기를 섞은 창작곡으로 풀어내기도 했다. 그는 “요즘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판소리 작품을 하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국악그룹 '이쁠'은 지난 8월 이탈리아 톨파와 페라라 지역의 가장 대표적인 버스커 축제(Ferrara Busker's Festival)에 초청됐다. 이쁠 단원 안이서 씨는 "그들에게 우리 음악의 독특한 음계와 선법 등의 소리를 들려주며 자연스레 가장 인기 있는 아티스트로 부상했다"면서 "전 세계인과 국악으로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부산대 김남순 명예교수는 “부산은 6·25전쟁으로 임시정부 시절 국립국악원이 처음으로 설립된 곳으로 국악의 전통을 갖고 있다”면서 “국악에 대한 본질을 놓치지 않고, 탄탄한 기본기를 갖춘 국악인이 세계적인 흐름에 맞춰서 발전한다면, 충분히 주류 음악으로 성장할 수 있다”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우리 민족의 예술성을 부각하는 많은 소재를 현대 작가들이 계속해서 발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라고 희망했다.
2024-11-27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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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부산·경남 행정통합 재추진의 현실과 조건
전국 곳곳에서 행정통합의 바람이 또 거세게 불고 있다. 국가적 화두가 된 수도권 일극 체제의 타파를 위한 방안으로 광역지자체 간 행정통합이 떠오르면서 여기저기서 관련 논의가 활발하다. ‘부울경 특별연합(메가시티)’ 무산의 쓰라린 기억이 있는 부산시와 경남도 역시 최근 대구시와 경북도의 행정통합 추진에 자극받아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했다.
두 지자체는 공론화위원회까지 출범시키며 통합 의지를 과시했지만 실질적인 통합 여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 울산을 제외하고 행정통합 재추진에 나선 부산·경남의 승부수가 과연 성과를 낼 수 있을지 그 조건과 변수를 살펴본다.
행정통합 공론화위원회 출범
부산·경남의 행정통합 재추진은 올해 6월 17일 박형준 부산시장과 박완수 경남지사가 부산시청에서 만나 ‘미래 도약과 상생 발전을 위한 공동합의문’을 발표하면서 다시 공식화됐다. 두 단체장은 이후 연내에 행정통합을 위한 공론화위원회 발족을 약속했는데, 이에 따라 지난 8일 공론화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더불어 ‘부산·경남 행정통합 기본구상 초안’도 함께 내놨다. 통합 지향점은 ‘대한민국 경제수도’, 방향은 주민 의사를 최우선으로 하는 ‘상향식 통합’으로 정했다.
행정통합 기본구상 초안으로는 우선 두 가지의 ‘계층제’ 방식이 제시됐다. 광역 단위인 도와 시를 폐지하고 새로운 통합 지방정부를 설치하는 ‘2계층제’와 반대로 도와 시는 그대로 두고, 그 위에 이를 관할하는 상위 지방정부인 ‘준주(準州)’를 설치하는 ‘3계층제’ 모델이다. 두 모델 모두 혼란을 최소화하고 통합의 실효성을 높이려는 방식이지만 기초지자체와 광역지자체, 상위 지방정부인 준주 간 권한과 책임의 분배에 있어서 여전히 많은 부분이 모호해 적잖은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내년 12월까지 권역별 토론회, 전문가 토론회, 여론조사 등을 거쳐 행정통합 최종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힌 공론화위원회가 어떤 최적의 해법을 내놓을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전제 조건은 압도적 주민 동의
경제수도 비전과 지역균형발전 필요성 등 온갖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부산·경남의 행정통합 재추진의 최고 관건은 압도적인 주민 동의와 정부 협조에 달려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첫 관문은 부산시민과 경남도민의 통합에 대한 여론 확인이다. 공론화위원회는 내년 상반기 중 여론조사로 이를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서 양 지역민의 찬성 의견이 높게 나오면 통합 특별법 제정 등을 비롯해 구체적인 통합 시점의 윤곽도 드러나면서 전체 추진 과정에 속도가 붙게 된다. 핵심은 찬성 여론이 우세해도 압도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이후 절차인 행정통합특별법 제정을 포함해 통합 지방정부에 필수적인 자치입법권 등 5개 분야 20개 특례와 관련된 정부 권한의 대폭적인 이양 요구에 힘이 실린다. 높은 찬성 여론은 당연히 여야 정치권에도 적잖은 압박 요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찬반 여론이 비슷하거나, 혹 반대가 더 많다면 통합 재추진은 동력을 잃게 되고 행정력 낭비 등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의 관심도 크게 떨어지면서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따라서 공론화위원회는 초기부터 찬성 여론을 어떻게 끌어올릴지 모든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행정통합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은 이미 지난해에도 매우 낮은 것으로 조사돼, 이번 재추진 과정에서도 최대 난제로 꼽힌다. 지난해 7월 부산시와 경남도의 발표를 보면 양 지역민의 69.4%는 행정통합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고 응답했다. 행정통합 자체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45.6%)이 찬성(35.6%)보다 높았다. 반대 이유로는 ‘통합의 필요성이나 당위성이 적다(50.5%)’가 절반을 넘었다. 불과 1년여 전의 주민 여론이지만 재추진을 선언한 지금이라고 해서 별반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주민 인식과 여론 변화를 위한 양 시도의 구체적인 노력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행정통합 재추진도 그 출발 여건은 그리 우호적인 게 아닌 셈이다.
정부의 권한 이양도 관건
압도적인 주민 찬성 이후에는 정부의 협조 여부가 또 관건이다. 공론화위원회가 통합 지방정부에 필수적이라고 꼽은 자치행정·입법권, 자치재정·조세권, 경제·산업육성권, 국토이용·관리권, 교육·치안·복지권의 5대 분야는 정부가 자기 권한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어서 정부의 결단이 필요하다.
현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 통합 지방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밝히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권한을 쥐고 있는 중앙정부 부처 관료들의 속마음은 이와 다를 수 있어 결코 정부 권한의 순조로운 이양을 장담할 수 없다. 특별법 제정으로 실질적인 권한 이양을 강제해야 하지만 현재 국회 내 여야의 권력 구조상 이를 보장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역시 최종적으로는 지역민의 압도적인 찬성 여부에 따라 그 향방이 갈릴 것이다.
메가시티 트라우마와 선거 변수
부산·경남 행정통합 재추진 소식을 들은 지역민이라면 누구라도 2년 전 부울경 특별연합, 즉 메가시티 좌초의 기억을 떠올릴 것이다. 당시 문재인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2023년 1월 공식 출범을 눈앞에 뒀던 메가시티가 5년간의 노력이 무색하게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진 모습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이유야 어쨌든 메가시티를 말짱 도루묵으로 만들었던 당사자들이 다시 행정통합을 추진한다며 공론화위원회까지 출범시켰으니 언뜻 지역민들도 다소 혼란스러울 듯하다.
아마도 행정통합 재추진의 실질적인 시작은 메가시티 트라우마의 극복과 연결돼 있다고 여겨진다. 공론화위원회가 내년 말까지 최종 통합안을 내놓는다고 해도 이 부분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지역민의 마음속에 예전 트라우마는 언제든지 또 나타날 수 있다. 통합에 대한 의구심이나 열패감을 늘 느끼고 있다는 의미다. 더 나아가면 이번 시도 역시 두 광역지자체장의 ‘정치쇼’의 일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부산시와 경남도는 언제까지 통합을 완료하겠다는 시점을 못 박지 않았다. 주민 동의가 중요한 만큼 이를 지켜보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반면 대구시와 경북도는 2026년 7월 1일 출범을 목표로 통합을 추진 중이다.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이 2026년 6월 3일임을 감안해 통합 지방정부의 출범 시한을 정한 것이다.
물론 어느 쪽이 바람직한지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다만 대구·경북과 비교해 완료 시점을 특정하지 못한 부산·경남은 통합에 대한 자신감이나 확신이 다소 약한 게 아니냐는 생각은 숨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 시작한 통합 재추진이 행여 2026년 지방선거의 정치적 종속 변수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2024-11-13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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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한강 작가 <소년이 온다> 일본어로 옮긴 이데 슌사쿠 번역가를 만나다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한강 작가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를 요약하는 한 구절이다. 작가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을 다루면서도 고발하거나, 투쟁하지 않는다. 대신 살아남은 자들의 트라우마를 드러낸다. ‘내 삶이 장례식’이라는 짧은 표현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는 독후감이 많다. 스웨덴 아카데미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을 선보였다”는 선정 사유에 부합하는 구절이다.
한강 작가는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 거의 매일 울었다”고 회상했다. 번역가라면 어땠을까? 일본어판을 맡은 이데 슌사쿠(76·井手俊作) 번역가 역시 “번역하다가 울고, 그래서 쉬었다가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이데 번역가는 한강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꼽았다.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인간의 심성은 인류에 보편적이다. 시대적 상황과 언어, 국경을 넘어서는 데 한강 작가의 문학적 성취가 있다.
일본 후쿠오카에 본사를 둔 〈서일본신문〉 기자 출신으로 2009년 정년 퇴직 후 본격적으로 한국 문학 작품을 일본에 소개하고 있는 이데 번역가를 화상으로 만났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전문 번역가의 세계에 발을 내디뎌 지금까지 최인호, 한승원·강 부녀 작가의 작품 4권을 일본에서 출간했고, 번역을 마친 미발표 작품도 몇 권이 있다. 그는 왕성한 활동의 비결을 묻자 “한국어가 평생의 애인”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 “한강 작가, 섬세함과 강인함 겸비”
한강 작가는 연세대 동문 선배인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과 〈병원〉을 좋아한다고 했다. 일본의 여류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는 윤동주 시어에 감동해 번역·출판을 자처했다. 그는 ‘겉으로 약해 보이면서 피아노선처럼 팽팽하게 튕겨진 투명한 서정성’에 주목해 윤 시인을 일본에 알렸다. 이데 번역가는 “한강 작가도 겉으로는 상냥하고 섬세한 듯 하지만 피아노선처럼 투명하고 강인한 서정이 관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섬세함과 강인함. 이 이율배반적인 요소를 겸비한 한강 작가는 감성이 풍부한 소설 언어가 특징적인데, 이 점이 다른 한국 작가와 차별화된다고.
또 한강 작가의 가계에 흐르는 시혼도 빼놓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한강 작가뿐만 아니라 아버지 한승원 작가도 시인으로 활동했다. 아버지 한 작가의 〈저녁 노을〉을 사례로 들었다.
‘너,/ 가버린 사랑 때문에 오늘 / 하루 내내 슬픔 / 울분 못견디고 / 혀의 입술 깨물어 뜯어 / 머금었던 피 / 한꺼번에 뿜어 / 뿜어 놓았구나.’
슬픔, 울분, 체념 등 마음 속 응어리가 풀리는 서정이 붉은 석양에 겹쳐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르는 시다. 이런 부친의 시혼을 딸이 계승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데 번역가는 한강 작가의 서정과 문체에 주목해 “언젠가 노벨상을 받을 거라 예감했다”고 밝혔다. 한편,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이 정해진 뒤 축하 행사나 기자 회견을 자제한 것을 두고 한강 작가다운 선택이라고 했다. 부조리한 폭력에 고통받는 인간의 본질을 파고든 작가로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 ‘소년이 우리에게 와 주었다’
〈소년이 온다〉는 2015년 한국문학번역원의 응모에 뽑혀 이듬해 일본에서 출간됐다. 응모 때 나이는 67세. 대다수 번역가가 한국 유학 경력이 있는 비교적 젊은 여성인데 반해 은퇴한 남성 번역가는 전례가 없다. 한강 작가와의 나이 차이도 무려 22세다. 응모 심사의 조건은 책의 4분의 1 분량을 번역해서 제출하는 것이다. 경력은 감안되지 않은 채 오로지 번역문 심사로 통과했다. 그의 후배 기자들은 “문화부 기자로 활동하는 동안 정평이 난 수려한 문장이 통한 것”이라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소년이 온다〉 번역 초기엔 궁금한 게 있으면 한강 작가와 이메일로 소통했지만 이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상하게도 일본어로 옮기는 데 그리 어렵지 않게 됐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원문이 지극히 명징해서 번역의 선택지가 달리 없었다”는 것이다.
번역 과정은 한강 작가와의 텔레파시 공명이었다. 한강 작가는 ‘이 세상에 왜 폭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의 끈을 놓지 않으며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집필 과정을 인내했다. “세 줄 쓰고 한 시간 울었다”는 한강 작가의 경험을 이데 번역가도 겪었다.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성”일 텐데, 이 점이 한강 작가의 문학이 전 세계적인 공감을 얻는 대목이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기억은 쉬이 휘발되기 마련이다. 희생자의 아픔이나 원통함도 결국 잊힌다. 하지만 때로는 기억해야만 하는 고통이 있다. 〈소년이 온다〉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마법 상자라는 게 이데 번역가의 생각이다. “40년도 더 된 사건의 주인공인 소년의 영혼이 지금의 우리 곁으로 와 준 것이 아닐까요?”
■ 부산, 윤동주, 한강 작가와의 인연
이데 번역가는 15살 까까머리 소년일 때 부산 라디오 방송의 단골 청취자였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의 월경 전파가 쉽게 잡히던 시절이다. 중학교 과학반에서 만든 자작 진공관 라디오가 밤마다 미지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었다. 한 여성 아나운서의 미려한 음색은 소년을 짝사랑에 빠뜨렸다. 종결 어미 ‘~입니다’의 ‘다’가 가슴 깊이 울렸다. 일본어 종결 어미 ‘타’와 느낌이 달라 “한국어는 아름다운 언어”라는 인식을 남겼다.
미지의 언어를 본격 배운 건 그가 볼혹에 접어들 때다.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한 1974년 서일본신문사 수습 기자로 입사한 그에게 한글을 익힐 기회가 찾아왔다. 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취재가 필요하자 사내에서 한국어 학습을 독려했던 것. 한글을 깨친 다음 한국 문학을 지면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1994년 ‘빼앗긴 시혼 - 윤동주의 삶과 죽음’ 15회 연재가 출발점이었다.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후쿠오카형무소가 그의 집에서 지척이었다. 윤동주 기획은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가책 때문”이었다. 당시 언론이 한국 문학에 주목하지 않던 분위기 속에 고군분투했다.
2009년 정년 퇴직 후 늦깎이 번역가로 변신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공모에 최인호의 〈타인의 방〉과 〈몽유도원도〉가 연거푸 선정돼 일본 독자에게 소개됐다. 2014년 전남 장흥에서 열린 이청준문학제를 취재해 ‘한(恨)과 생(生)-장흥, 한국 문학의 수맥’ 연재를 〈서일본신문〉에 게재했다. 이때 한국 작가들을 두루 만났는데 그중 한승원 작가 인터뷰가 인연이 됐다. 아버지 한 작가가 자신의 모친을 모델로 쓴 〈달개비꽃 엄마〉를 번역하게 된 것이다. 100세를 앞두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질긴 생명력과 사랑에 대한 서사다. 당시는 딸의 〈채식주의자〉가 국내외에서 주목받던 때다. 이때 이데 번역가는 ‘승어부’(勝於父), 즉 아버지를 넘었다는 말을 듣고는 딸 한 작가의 작품에 파고들게 된다. 그 결과 부녀 작가의 작품을 일본어로 옮긴 번역가가 됐다.
틈틈이 번역한 작품 몇 점을 서랍 속에 묵히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일본 독자들에게 꼭 선보이겠다고 다짐했다. 힘 닿는 데까지 한국 문학을 더 번역하고 싶다고 되뇐다. 한국어를 평생 사랑했기 때문이다.
2024-10-30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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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특별건축구역, 부산 건축에 자극제 되려면
부산시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건축가들이 참여하고 있고, 특별건축구역으로 지정되면 혁신적인 설계안이 실현될 수 있도록, 건폐율, 용적률, 건축물 높이 제한 등의 건축규제 완화는 물론이고 행정 절차 간소화 등 행정적인 지원 혜택이 주어져서다. 이에 세계적인 건축가의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설계안을 통한 도시 경쟁력 강화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지역 건축가의 역할 감소와 경쟁력 약화라는 지적과 함께, 특별건축구역 인센티브가 자칫 오용될 경우 도시경관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동시에 받아왔다. 이런 엇갈린 시선과 평가 속에서 18일 부산시청 대강당에서 ‘특별건축구역 활성화 시범사업’ 후보지에 대한 세계적 건축가들의 디자인 발표와 심사가 공개 진행된다.
시범사업을 바라보는 상반된 시선은 뒤로 하고, 이왕 하는 거 이제는 잘해야 한다는 것만 남았다. 여기서 ‘잘해야 한다는 건’ 무엇보다 기획 설계작(안)도 좋아야 하지만, 부산 도시 건축에 있어서 신선한 자극제가 될 만한 작품을 잘 선택(심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살아온 지역의 가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음에도 단지 세계적 건축가라는 명성에 짓눌려 무분별하게 시범사업지로 선정하는 어리석음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 어떤 설계작 들어왔나
시범사업 후보지와 각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세계적 건축가(18일 발표순)는 △용두골 복합시설-2포잠박(2Portzamparc) △미포 오션사이드호텔-오엠에이(OMA) △남포동 복합타운-엠브이알디브이(MVRDV) △영도 콜렉티브힐스-엠브이알디브이(MVRDV) △남천2구역 재건축정비사업-도미니크 페로 아키텍처(DPA)이다. 반여 오피스텔(마이어 파트너스) 사업은 기획 설계안 제출 마감 기한 내에 전시용 모형이 제출되지 않아 공개 발표만 한다.
후보지 용도는 호텔, 오피스텔, 레지던스, 복리·공공시설, 아파트 등 다양하다. 이들 후보지 설계작에 대한 총평을 하자면 아쉽게도 디자인적 측면에서 깜짝 놀랄만한 작품은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왜 이런 설계를 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도시 맥락적 차원의 근거 제시도 부족해 보였다.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도시 맥락을 읽어내기에는 현실적 한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다만 건축물의 입체감이나 신선함은 있었다.
이번 사업의 보조사업자로 참여하는 (사)부산국제건축제조직위원회의 이성호 집행위원장은 “세계적인 건축가와 손잡고 하는 것은 지역 건축사나 건축가들의 작품 퀄리티가 떨어져서가 아니라 지역 건축계와 시민에게 신선한 자극제가 되기 위함이다”고 말했다.
후보지 설계작 심사는 18일 오후 5시부터 1시간가량 부산시 미래건축혁신위원회에서 한다. 심사 위원은 국내 6명, 국외 2명을 포함해 모두 8명으로 구성돼 있다. 심사 위원들은 디자인(안), 특례 적용 사항, 공적 기능, 지역과의 연계성 등을 중점적으로 평가한다. 이와 함께 20여 항목으로 구성된 ‘특별건축구역 지정 심의 체크리스트’도 평가 기준이 될 예정이다. 이 체크리스트는 대체로 공공성 평가에 무게를 두고 있다. 요컨대 ‘사회적 공공성’ 평가 항목으로는 자원 재이용·재생 촉진, 주변 경관 및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디자인을 요구한다. 이 외에도 새로운 공간 구성이나 건축 기술 도입, 기존 공간 환경과의 조화와 균형, 외부와 공유하는 지역 커뮤니티 또는 공지 조성 등이 주요 검토 사항이다. 심사 결과는 오는 22일 시 설계 공모 누리집을 통해 발표될 예정이다.
■ 지역 정체성 제대로 담아내길
부산시는 세계적 건축가들의 기획 설계를 통해 조화롭고 창의적인 건축물 디자인을 구현하고, 이를 통해 시민 생활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겠다는 계획이다. 부산국제건축제조직위원회는 “이번 시범사업에서 필요로 하는 작품은 혁신적인 디자인 그 자체”라면서 “새로운 디자인 방식이 제시되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혁신적인 디자인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곤 할 수 없다. 지역 건축계에서는 이에 못지않게 부산의 정체성과 매력을 잘 살린 설계안을 기대한다. 해양도시 부산의 독특한 정체성과 매력을 잘 살리면서도 미래지향적인 작품이 선정되길 바란다. 건축은 환경 안에 놓여 있고, 환경을 형성하며, 도시 환경과 대화한다. 디자인적 심미성도 중요하지만 도시 경관의 조화는 어쩌면 더 중요할 수 있다.
지역의 한 건축가는 “특별건축구역 선정작은 디자인과 건축가의 명성보다도, 지역성에 걸맞은 독창성이 우선됐으면 좋겠다. 즉 장소의 적합성에 부합되는 기능, 형태 그리고 공공공간의 아이디어 등 종합적으로 판단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별건축구역 지정 심의 체크리스트에도 담겨 있지만, 건축의 공공성은 충분히 고민되고 고려돼야 한다. 우리가 도시나 건축의 공공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도시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건축의 관점이 아니라 도시(Urban)의 관점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유지가 지배하는 도시 공간에서 공동체의 가치, 공유와 공존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건축물을 보고 싶은 게 시민의 열망이다. 이런 건축물이 많을 때 그 도시는 ‘더불어’ 사는 삶을 구현하는 도시가 될 것이며, 우리가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지속가능한 도시의 참모습이 될 것이다. 강기표(아체 ANP건축사사무소 대표) 건축사는 “세계적인 건축가라는 명성에만 의존해 명품백 하나 가진다는 내세우기식 사업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 부산 건축 도약 계기 되어야
부산시의 특별건축구역 시범사업은 천편일률적인 아파트나 성냥갑 건물을 막자는 의도여서 실험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각종 건축규제 완화 혜택은 도시 개발을 부추기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자칫 이 사업이 사업성 확보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어서는 곤란하단 얘기다. 특별건축구역 지정으로 특색 있는 개발을 하면 낙후된 원도심을 재탄생시킬 수 있지만, 이미 그 지역엔 그와 상관없이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별건축구역 시범지역 선정에 대한 종합적이면서도 일관된 철학이 요구되는 이유다. 이를 제어하지 못하면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다. 점(건축물)은 훌륭한데 선(주변 경관)을 해치는 건물만 남을 수 있다. 해안가를 점령한 나 홀로 초고층 건물이 그 증거다.
이번에 시범사업지를 선정해 놓으면, 그다음은 비슷한 작품이 나왔을 때 안 해 줄 수 없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적으로 합의 또는 용인될 수 있는 후보지가 선정되어야 한다. 그래야 뒷말이 없다. 설계작이 들어섰을 때 주변 경관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충분히 검토돼야 한단 얘기다.
이번 사업을 계기로 부산 건축이 한 단계 도약하려면, 시는 ‘세계적 건축가들이 과연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우리의 가치나 우리 지역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칫 ‘한국 건축가들은 별 볼 일 없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우리 사회에 던져줄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다.
여하튼 이번 시도가 부산 도시 건축에 신선한 자극제가 됐으면 한다. 더불어 이번 사업이 부산의 미래를 이끌어 갈 중요한 전환점이 되길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멋진 건축물이 최우선이 아니라, 부산의 정체성을 반영한 창의적인 디자인이면서 소통의 공간을 제공하는 건축물이 선정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4-10-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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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7광구' 2028년이면 일본에 넘어가나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 가능성으로 주목받는 ‘7광구’ 공동개발을 놓고 한일 간 막판 줄다리기가 시작됐다. 지난달 27일 도쿄에서 한일대륙붕공동개발협정에 따른 6차 한일공동위원회가 39년 만에 열렸다. 1978년 발효된 협정은 2028년 6월 22일 종료된다. 2025년 6월 22일부터 양국 중 일방이 협정 종료를 통보할 수 있다. 통보 기한을 9개월 남겨 두고 양측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은 것이다. 우리는 협정 지속을 통한 현상 유지를 바라지만 일본은 종료를 통보할 가능성이 높아 양국 간 합의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향후 한일 간은 물론이고 중국까지 가세해 7광구를 둘러싼 해양 영유권 분쟁 삼국지가 전개될 공산이 크다.
■ 기회의 땅 7광구 산유국 부푼 꿈
7광구는 제주도 남쪽 200㎞ 지역에서 일본 서쪽에 걸쳐 있는 8만 2000㎢ 마름모꼴 대륙붕 지대로 우리 국토 면적의 80%에 달하는 넓은 해역이다. 유엔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는 1969년 에머리 보고서를 통해 동중국해 대륙붕의 세계 최대 석유 매장 가능성을 발표했다. 같은 해 국제사법재판소는 덴마크 네덜란드 독일이 분쟁 중이던 북해대륙붕 판결을 통해 ‘대륙붕 연장설’에 손을 들어줬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대륙붕 연장설에 입각한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을 공포하고 7광구에 대한 영유권을 선언했다. 7광구와 더 인접한 일본은 반발했다. 당시 시추 기술과 자본력에서 취약했던 한국과 국제법 논리에 밀리던 일본의 이해가 맞물려 1974년 7광구를 한일대륙붕공동개발구역(JDZ)으로 설정하는 협정을 체결했고 4년 뒤 발효됐다. 정부의 대대적 홍보 속에 국민들의 산유국 꿈도 부풀었다. 이즈음 정난이의 노래 ‘제7광구’가 앨범 발매와 함께 히트하며 국민적 열망을 반영했다.
■ 달라진 국제해양법, 일본의 속셈
협정 발효 후 양국은 공동개발에 나서 7개의 시추공을 뚫었고 3개에서 소량이지만 석유를 발견했다. 하지만 일본은 1986년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탐사 중단을 선언한 후 지금껏 소극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협정 당시 ‘양국이 공동으로 시추·탐사를 수행해야 한다’는 독소 조항에 걸려 우리의 독자적 탐사도 힘든 상황이다. 일본 ‘침대 축구’에 속수무책인 꼴이다. 2002년까지 일부 공동 탐사가 진행되기도 했으나 본격적 시추가 필요하다는 우리 입장과 경제성이 없다는 일본 주장이 번번이 맞서 산유국 꿈도 희미해져 갔다.
일본의 소극적 태도 전환에는 국제해양법 변화에 따른 얄팍한 계산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으로 배타적경제수역(EEZ) 개념이 도입돼 일본에 우호적 국면으로 바뀐 것이다. 대륙붕 연장이 아니라 육지 기준 200해리 EEZ를 인정하면 일본에 유리해진다. 한국과 일본은 EEZ가 중첩될 수밖에 없는데 ‘등거리 원칙’에 따라 중간선을 설정하면 7광구 90%가 일본 수역에 쏠린다.
■ 석유·천연가스 매장 가능성은
2005년 미국 우드로윌슨센터는 보고서를 통해 동중국해 천연가스 매장량을 사우디아라비아의 10배, 석유 매장량을 미국의 4.5배인 1000억 배럴로 추정했다. 배럴당 70~80달러로 계산하면 약 9000조 원에 이르는 경제적 가치다. 2002~2004년에는 한국석유공사가 7광구 일부 지역을 물리 탐사한 뒤 “원유 3600만 톤이 묻혀 있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7광구 대규모 석유 자원 실재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다. 탄성 조사 결과 예상보다 경제성이 부족하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7광구 전역 시추 등 객관적 탐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유가 상승과 기술 개발 등 환경 변화도 감안해야 한다. 중국은 7광구 서측으로 3개 유전을 운영 중이다. 구체적 매장량을 공개하고 있지 않지만 파이프로 원유를 운반하는 것을 감안하면 대규모로 추정된다.
■ 2028년 이후 7광구의 운명은
우리 정부는 2020년 석유공사를 조광권자로 지정하고 일본도 조광권자를 정해 공동 탐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일본은 코로나19 등을 핑계로 응하지 않았다. 협정 종료를 앞두고 협상 테이블에 나왔지만 우리 입장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협정이 종료된다고 일본으로 영유권이 당장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경계 미획정 구역이 된다. 일본이 일방적으로 시추 등 영유권 행사에 나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쟁지역화할 경우 등거리 원칙과 일본 외교력을 감안하면 우리에게 결코 유리할 수 없다. EEZ 도입 후 1998년 체결된 한일어업협정에서 7광구 대부분이 일본 수역에 편입되고 제주분지를 따라 일부 지역만 공동관리수역으로 정한 전례도 있다.
중국이 더 문제다. 중국은 한일 JDZ 설정 때부터 반발했다. 협정이 종료되면 노골적으로 영유권 확장에 나설 공산이 크다. 동중국해 중국 수역과 7광구 제주분지(중국명 시후분지)가 연결돼 중국 시추 확장에 따른 ‘빨대효과’로 7광구 자원이 빨려 들어갈 우려도 있다. EEZ 등거리 원칙을 내세우며 한국을 배제하고 일본과 중국이 공동으로 탐사를 도모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우리 정부 외교력 총동원해야
7광구는 해양 자원은 물론이고 안보 차원에서도 중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로서는 현 JDZ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길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외교력과 국제적 명분, 창의적 해법을 총동원해야 하는 상황이다. 시간도 우리 편이 아니다. 우리의 협정 이행 노력과 일본의 소극적 대응에 따른 신의성실 문제 등 국제법상 명분을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 측 공동 탐사 요구에 대한 일본 측의 대응도 하나하나가 분쟁 상황에 대비한 계산된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한미일 동맹을 지렛대로 이용하는 외교력도 필요하다. 7광구가 경계 미획정 구역이 되고 중국이 이를 교두보로 태평양 진출을 노골화하는 것은 미국도 결코 바라는 일이 아니다. 중국의 동중국해 영향력 확대는 일본으로서도 골치다. 외교적 역학관계로 얽혀 있고 그 속에 해법이 있을 수 있다.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감안하면 무엇보다 우리의 외교 역량 강화가 중요하다. 7광구에 대한 정부 차원의 관심과 정보 확보 등 면밀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한일어업협정 때 외교 역량 부족으로 일본에 당한 뼈아픈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부산대 지질환경과학과 김기범 교수는 “7광구 중에서도 제주분지가 이어지는 4소구, 2소구가 석유 자원 매장 가능성과 관련해 핵심적 지역이고 다행히 우리 영해에서 가깝다”며 “해양 영유권은 과거사 문제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문제인 만큼 엄중하고 면밀한 대응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24-10-0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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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세계유산 관리, 이대로 둘 것인가
지난해 9월 17일 일부 가야고분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경남 김해시 대성동, 경남 함안군 말이산, 경남 합천군 옥전, 경남 고성군 송학동, 경남 창녕군 교동·송현동, 경북 고령군 지산동, 전북 남원 유곡리·두산리의 고분군이 그것이다.
하지만 축제 분위기도 잠시, 지금 해당 지자체들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세계유산이 된 가야고분군들을 누가 관리하느냐를 두고 다투는 것이다. 정확히는 ‘가야고분군 통합관리기구’(이하 통합관리기구)를 어느 지자체가 유치하느냐의 다툼인데, 국가유산청을 비롯한 중앙정부는 수수방관하고 있어 좀체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차제에 세계유산의 관리 체계를 새롭게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해시-고령군의 다툼
다툼의 주역은 김해시와 고령군이다. 김해시는 통합관리기구의 김해 설치를 촉구하는 건의문을 지난달 23일 국가유산청에 제출했다. 건의문은 김해시장만이 아니라 함안·창녕·고성·합천의 지자체장까지 참여한 공동 건의문이었다. 거기다 “통합관리기구의 김해 설치를 지지한다”는 경남도의회, 가락종친회의 입장문도 포함됐다. 지난 2일에는 김해시의회가 통합관리기구의 김해 설치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김해시는 지난달 초에는 남원시에도 김해 설치에 대한 지지와 협력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령군은 이런 움직임에 반발하며 실력행사에 나서고 있다. 최근 구성한 ‘통합관리기구 유치 범군민 추진위원회’가 그것이다. 추진위원회에는 고령군민을 비롯해 학계 전문가, 공무원 등이 대거 참여한다. 고령군의회도 지난달 27일 통합관리기구 고령군 설립 촉구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같은 두 지자체 간 다툼은 경남도와 경북도 두 광역지자체로 확산할 조짐이라, 이러다 가야고분군 관리가 장기간 표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용역 결과 논쟁만 분분
세계유산이 된 가야고분군은 7개 기초지자체에 걸친 연속유산이라 지자체 간 통합 관리가 필수적이다. 유네스코도 세계유산 등재 조건으로 가야고분군의 통합 관리 체계를 구축할 것을 주문했다. 그에 따라 가야고분군이 있는 7개 기초지자체와 경남도·경북도·전북도 3개 광역지자체로 구성된 ‘가야고분군 통합관리지원단’은 통합관리기구를 지자체 공동의 재단법인 형태로 설립키로 하고, 지난해 8월 한국지식산업연구원에 ‘통합관리기구의 입지 선정과 운영방안에 대한 연구 용역’을 의뢰했다. 용역 결과는 올해 7월 발표됐는데, “김해가 최적지”라는 것이었다. 연구원은 입지 선정 지표로 인구, 지방세 규모, 지역총생산, 인구 증가율, 재정 자립도, 인구밀도, 관리 이동거리 등을 활용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령군이 해당 결과에 반발하고 나섰다. 인구나 재정 규모 등 입지 선정 지표가 세계유산 관리·보존과는 무관한 데다 지나치게 김해에 유리하게 설정됐으며, 용역 결과 세부 내용도 공개되지 않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고령군은 또 용역 결과가 법적 구속력이 없다면서 통합관리기구가 김해에 들어서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대가야냐 금관가야냐
고령군은 통합관리기구는 고령에 설치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령이 대가야의 왕도였다는 점, 700여 개의 봉분이 있는 지산동 고분군이 면적이나 고분 수에서 다른 가야고분군보다 월등히 큰 규모라는 점, 국내 최대 순장 흔적이 있는 점 등을 고려하면 고령이 가야 문화의 대표성을 가지며, 따라서 통합관리기구는 고령에 설치되는 게 합당하다는 논리다. 고령군의 이런 주장에 경북도가 공감을 표하며 힘을 보태고 있다.
김해시가 고령군의 이런 주장을 용납할 리 없다. 입지 용역 결과가 나온 만큼 소모적인 논쟁을 그치고 김해에 신속히 통합관리기구를 설치하자는 입장이다. 그러면서 김해가 가야 역사의 시초인 금관가야의 중심지였으며, 따라서 가야의 정체성이 오롯이 배어 있는 곳임을 강조한다. 김해시는 김해는 물론 김해와 인접한 경남 지역에 가야의 주요 유적이 밀집해 있다는 사실도 내세운다. 실제로 전국 가야 유적의 67%가 경남에 집중돼 있고,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가야고분군 7개 중 5개가 경남에 위치한다. 국립김해박물관, 국립가야역사문화센터 등 가야 역사와 문화 연구·보존을 위한 기관을 보유하고 있는 점, 교통망과 기반시설 등 세계유산의 관광자원화에 유리한 환경도 김해시가 내세우는 강점이다.
국가유산청의 수수방관
두 지자체의 다툼이 쉬이 끝날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다툼은 금관가야-대가야 대립 구도를 보이며 경남과 경북의 다툼으로 확대될 조짐까지 보인다. 이런 형편에도 김해시와 고령군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협상하는 대신 사실상 통합관리기구 입지 결정권을 가진 국가유산청에 매달린다. 김해시는 김해를, 고령군은 고령을 통합관리기구 설립지로 확정·발표해 줄 것을 각자 국가유산청에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가유산청은 통합관리기구 설립은 지자체 협의사항이라며 수수방관하는 모습이다. 해당 지자체들의 중재 요청에도 조만간 관련 회의를 열겠다는 입장만 밝혔을 뿐, 구체적인 중재 의지는 보여 주지 않는다. 한국지식산업연구원의 연구 용역 결과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진행한 용역이 아니라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해당 용역 결과가 통합관리기구 설립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돼 논란을 증폭시킨다. 국가유산청이 이처럼 소극적인 자세로 대응하는 사이 가야고분군 관리 문제는 해법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형국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 “배가 산으로 가는 꼴”이라는 탄식과 함께 “세계유산 관리능력이 없다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체계 정비할 좋은 기회
세계유산은 인류가 함께 보호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보편적인 가치를 갖는다. 유네스코 등재보다 이후 지속가능한 관리 방향을 모색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그에 대한 법적 근거가 아직 불충분하다. ‘세계유산의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특별법’(이하 세계유산법)이 올해 5월 시행됐지만 세계유산협약과 그 운영지침이 규정한 사항을 충족하기에는 여전히 허점이 많은 것이다. 특히 가야고분군처럼 많은 지자체가 관여하는 세계유산의 경우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통합관리가 필요한데도 그에 대한 세밀한 기준과 절차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가야고분군 통합관리기구 설립을 둘러싼 작금의 분쟁도 여기에 기인한다. 통합관리기구를 국가유산청이 간명하게 지정하거나 그게 어렵다면 스스로 직영하면 좋을 텐데, 관련 조건이 까다롭고 책임 소재 등이 불분명하다 보니 각 지자체에 책임과 역할을 떠넘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설사 극적인 타협이 이뤄져 어느 한쪽에 통합관리기구가 설치된다고 하더라도 예상되는 폐해는 많다. 특정 지역 고분군에 대한 관리 계획의 주체, 이해 관계자의 역할과 책임, 지자체 간 재정 부담 비율, 유적 정비 방식 등에서 이견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고, 그럼에도 이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수단이 현행 제도 아래에선 마땅치 않다는 사실이 그렇다. 지자체들이 세계유산을 경제적 이익 창출을 위한 관광자원으로만 여겨 각종 사업을 무분별하게 벌이는 폐단도 미연에 방지할 필요가 있다.
세계유산 관리 체계를 새롭게 정비해야 할 필요성이 그래서 제기된다. 보존에 미비점이 무엇인지, 외부로부터의 각종 개발 압력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전문성과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관리기구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등에 대한 해답을 제도적 장치로 확실히 수립하자는 것이다. 세계유산 관리를 놓고 지자체 간 분쟁이 발생할 경우 이를 제어하고 조율할 중앙정부의 역할과 책임도 확대해야 한다. 가야고분군 통합관리기구를 둘러싼 이번 다툼이 어쩌면 그것을 위한 훌륭한 반면교사이자 다시 오기 힘든 기회인지도 모른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4-09-0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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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영화판 뒤흔드는 AI 영화
영화계가 대격변의 시대를 맞고 있다. 파란의 주인공은 인공지능(AI)이다. 정확히 말하면 AI가 만드는 영화. 카메라나 배우는 필요 없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영상, 음악, 후반 작업까지 영화 제작의 모든 과정이 가능해졌다. 생성형 AI 기술의 진보 덕분이다. 전문가들은 AI가 ‘영화 혁명’의 도구가 될 것이라 전망한다. ‘창작의 민주화’를 기대하는 긍정적 입장이 있는 반면, 예술의 또 다른 퇴행일 뿐이라는 부정적 시각도 있다. AI 영화 대세론, 어떻게 봐야 하나.
■ AI의 기술적 진보
‘오펜하이머 모멘트.’ 미국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런이 지난해 영화 ‘오펜하이머’를 선보이면서 언급한 이 말은 AI가 촉발한 영화판의 지각변동을 적확하게 상징한다. 원자폭탄 같은 새로운 기술의 폭발적 위력에다 애초 의도치 않은 파장의 가능성까지 내포한 순간. 이런 뜻의 오펜하이머 모멘트에는 AI가 원자폭탄에 이어 인류에게 또 하나의 중대한 변곡점이 되리라는 경고와 우려가 담겨 있다.
AI의 기술적 진보는 가위 폭발적이다. 최근 6개월 사이 AI 프로그램의 개발 속도는 쫓아가기 힘들 정도다. 획기적인 이정표는 지난 2월 챗GPT 개발사 오픈AI가 공개한 생성형 AI ‘소라’다. 문장으로 된 명령어를 입력하면 최대 1분 길이의 고품질 동영상을 만들어 주는데 이 영상을 편집해 3~4분 길이의 영상은 물론 2~3시간짜리 영화, 연속 드라마도 제작 가능하다. 구글도 영상 생성형 AI 경쟁에 가세했다. 지난 5월 공개한 ‘베오’는 영상 생성에다 편집 기능까지 제공한다. 미국 스타트업 런웨이가 6월 출시한 ‘젠-2’와 최신 버전 ‘젠-3 알파’는 업그레이드된 AI 영상 제작 프로그램으로 한층 세밀한 감정 표현과 움직임을 구현해 낸다.
완성도 높은 ‘100% AI 영화’가 나오는 날, 수천억 원이 넘는 제작비 없이도 영화 제작이 가능한 날이 머지않았다. 기술 발전의 속도도 속도지만 AI 영화 수준은 감탄스럽다. 인간을 능가하는 솜씨가 신기함을 넘어 두려움마저 안길 정도다.
■ 영화판 거대한 지각변동
미국 할리우드는 영화 제작에 AI 프로그램을 활용한 지 오래다. 최근의 사례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신작 ‘히어’다. AI 디에이징(나이를 어려 보이게 하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로 67세 배우 톰 행크스의 19세·25세 외모를 만들어 눈길을 끌었다. 수많은 독립 영화들이 AI로 각종 실험을 하는 미국 영화계는 분위기 자체가 AI에 적극적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 주요 국가들과 도시들이 AI 영화를 주제로 다양한 포럼을 통해 AI 시대를 준비 중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들도 AI 영화에 대처하느라 부심한 모습이다. 지난 5월 제77회를 맞은 칸은 ‘몰입형 작품 경쟁 부문’을 새롭게 출범시킨 바 있다. 기술 발전에 맞춰 증강현실이나 가상현실 등으로 영화적 체험을 극대화한 영화들을 적극 수용한 것이다. 지난 2월에는 국제AI영화제가 사상 최초로 두바이에서 열렸다. 전 세계 500여 편의 AI 영화가 몰렸는데, 한국인 권한슬 감독의 ‘원 모어 펌킨’이 대상을 차지해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발 빠른 행보를 보였다. 지난 7월 영화제 때 국내 처음으로 ‘AI 영화 국제경쟁 부문’을 신설했다. 부산에서는 영화의전당이 ‘부산국제AI영화제’ 개최를 예고한 상황이다. 전적으로 AI 영화만을 다루는 영화제는 국내 최초라는 점에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올해 12월 개최에 맞춰 이달 1일부터 21일까지 AI 기술로 제작된 작품을 대상으로 공모를 진행한 바 있다. AI 영화가 우리 눈앞의 현실로 성큼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하는 풍경들이다.
■ 창작의 민주화냐 예술의 퇴보냐
AI 영화 제작의 가장 큰 장점은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아이디어만 있으면 기술적 재능이 부족하거나 돈 없는 가난한 일반인들도 얼마든지 쉽게 영상을 제작할 수 있다. 영화 제작의 문턱을 낮춰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하는, 이른바 ‘창작의 민주화’가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두바이 국제AI영화제 대상작인 ‘원 모어 펌킨’의 경우 3분짜리 단편 영화로 제작 기간은 단 5일에 불과했다. 배우나 성우는 물론 카메라와 녹음, 조명 등 제작 인력마저 한 명도 없었다. 오직 생성형 AI로 모든 장면과 음성을 만든 이 영화는 지난해 국내 처음으로 저작권을 인정받은 AI 영화 ‘AI 수로부인’을 잇는 획기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AI 영화를 진정한 예술로 보기 힘들다는 회의적인 시선도 만만찮다. 다양한 영역이 교차하는 종합예술인 영화는 무수한 참여자들의 철학과 세계관이 어우러지는 창의성의 난장 무대다. 단 몇 줄의 문장으로 영상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는 AI 영화에서 인간의 총체적 고뇌와 노력이 스민 예술 고유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 과학소설 작가 테드 창의 말이다. “합성 텍스트, 합성 이미지는 예술이 되기 어렵다. 예술은 표현의 한 형태인데 인공지능은 스스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나 의도가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 하향 평준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비슷한 시각이다. 기존 데이터를 활용하는 만큼 평균 이상을 뛰어넘는 결과물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영화산업 전반의 하향 평준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로 이어진다. 근본적으로는 데이터의 단순한 조합과 모방에서 진정한 의미의 창작은 일어날 수 없다고 보는 입장이다.
AI 영화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부상 중인 문제가 저작권이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복합적인 논란을 야기하는 바, 이를 해결하려면 섬세하고 정교한 법적·윤리적 기준도 필요하다. 지난해 7월 시작된 할리우드 작가들의 대규모 파업 사태가 이를 방증한다. 작가들은 자신의 창작물이 AI 학습 훈련에 무분별하게 쓰이자 거세게 반발했다. 인공지능이라는 또 다른 기계에 대한 저항이라는 점에서 19세기의 ‘러다이트 운동’을 연상시킨다.
■ 영화도시 부산의 기회?
올해 칸 영화제에서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조지 루커스 감독의 말마따나 “AI 영화는 피할 수 없는 미래다.” 역사상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미래, AI 쓰나미 앞에서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중요한 것은 기술을 사용하는 주체의 문제’라는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의 사유를 빌리고자 한다. 그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될 때 기존 예술 형식과 내용을 답습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비판하면서 사용자의 능동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강조했다. 베냐민의 관점은 오늘날 AI 창작 활동을 대하는 태도에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애써 외면하기보다는 주체의 관점에서 AI의 가능성을 면밀히 탐구해야 한다는 얘기다. AI가 예술적 지평 확대와 영화산업의 변화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그 속에서 인간의 창의성과 고유성을 어떻게 유지해야 할지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국 영화를 선도하는 위치에 있는 영화도시 부산도 이런 관점에서 미래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국내 처음으로 열리는 부산국제AI영화제는 소중한 기회다. AI와 예술의 융합 가능성, 한국적 콘텐츠와 AI의 결합 가능성을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AI라는 영화 물결 앞에서 적극적으로 어젠다를 제시하는 부산의 선도적 역할을 기대한다.
2024-08-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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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항공물류 전성시대, 가덕신공항 미래는
■ 전 세계 항공화물 배송 시장 급신장
“부산에서 살아 있는 방어를 썰어서, 다음 날 미국 전역으로 직배송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LA에 본사를 두고 있는 온라인 프리미엄 식품점 ‘뜻밖의한끼USA’. 인스타그램(@unexpectedmeal.la)을 통해서 한국의 고품질 수산물을 미국 한인 교포들에게 직접 판매하는 스타트업이다. 뜻밖의한끼USA는 참치와 가자미, 방어 등 수산물을 부산에서 손질해 급랭한 뒤 항공편으로 미국 LA로 수입 통관한 뒤 미국 전역에 콜드 체인(Cold Chain)을 통해 유통한다. 최근에는 갑오징어와 명란까지 신선식품 상품군을 적극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일본 등 해외 21개국에서 사용되는 해외 생활자 대상 구매 대행 플랫폼인 브링코(bringko). 21개국에 거주하는 20여 만 명 회원을 대상으로 브링코 앱과 인스타그램(@bringko_official)을 통해서 쿠팡, 네이버 등 국내 170여 개 온라인쇼핑몰 상품을 한꺼번에 통합결제·배송하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국 쇼핑몰에서 구매한 제품은 FedEx, EMS, GEM, UPS, Pantos 등 다양한 제휴 특송사를 통해서 곧바로 항공으로 배송한다. 쇼핑에서 국내와 해외의 구분이 사라진 셈이다.
역직구 플랫폼 브링코는 연간 매출 200억 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의류, 뷰티상품에서 최근에는 김치, 반찬류 등 신선식품으로 상품군을 대폭 확대했다. 항공물류 덕분이다. 올해는 김치 주문과 동시에 강원도에서 담은 김치를 그날 오후에 픽업해 다음 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미국 등 21개국으로 배송하고 있다. 강원도에서 미국, 호주 등 소비자 집까지 항공물류 시스템을 통해 직배송한다. 김치가 소비자 집에 도착할 때는 먹기 좋은 상태로 익도록 배송 시간과 발효 온도까지 조절한다. 최근에는 꼬막, 마늘장아찌, 깻잎김치, 궁채나물, 고추장아찌, 섞박지 등 반찬류도 국내에서 주문 당일 만들어 비행기로 수출한다. 비행기를 이용한 신속한 배송이 기본이다.
제임스 최 브링코 부사장은 “전자상거래는 항공이 아니면 경쟁력이 없다”라고 단언한다. 최 부사장은 “해외 한국식품 소비자는 새로운 것, 한국에서 방금 만든 신선한 것을 먹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면서 “필요한 것을 빨리 받겠다는 소비자 니즈를 최대한 합리적인 가격에 항공으로 배송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경남의 딸기, 경북 복숭아 등 신선 농산물의 항공 수출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항공물류의 전성시대다.
■ 전자상거래 활성화로 항공화물 급증
여름철은 항공화물 비수기로 꼽히지만 국내 해외 역직구의 호조, 백신과 신선식품, ‘알테쉬’(알리익스프레스·테무·쉬인) 등 글로벌 전자상거래 활성화로 항공물류산업은 유례없는 호황을 맞고 있다. 게다가 해운업이 중동전쟁 위기와 수에즈-홍해 항로 침체로 인한 바닷길 병목 탓에 남아프리카 희망봉 항로로 우회하면서, 화주들이 하늘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제품의 예민한 특성 탓에 항공기로만 운송하는 국내 반도체 수출이 되살아난 것도 원인이다. 지난 5월 인천공항 화물 물동량이 전년 동기 대비 16% 증가했고, 세계 항공화물 시장은 지속적인 항공화물 수요 증가로 인해 전년 대비 13.2% 증가했다.
대한항공은 물론이고, 제주항공, 진에어, 티웨이항공 등 저비용항공사(LCC)들도 화물 전용기를 도입하고, 밸리 카고(Valley Cargo) 화물량을 늘리는 등 역량을 키우면서 항공화물 시장이 재편되는 상황이다. 밸리 카고는 여객기의 수하물 공간을 이용해 화물을 운송하는 것으로, 화물기보다 공간이 작지만 상당한 양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다. 또한 주로 밤에 뜨는 화물기보다 업무시간인 낮에 도착지에 내려줄 수 있어 부가가치가 높은 편이다.
■ 부산권, 항공물류 기반 부재로 피해 심각
급증하는 항공화물의 90% 이상이 인천국제공항에 집중돼 있다. 2023년 말 우리나라 전체 항공화물 물동량 395만 톤 중 인천공항에서 약 360만 톤(90.1%)을 처리했다. 특히 수하물과 우편물을 제외한 순수 항공화물은 인천공항 독무대이다. 김해국제공항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수준이다. 인천공항은 공항과 항공물류단지 인프라, 다양하고 빈번한 장거리 항공 노선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김해국제공항 인근 부산과 경남에서 수출 하는 딸기 등 농수산물을 비롯해 각종 화물 항공 90% 이상이 김해공항의 장거리 노선과 대형 밸리카고 부족으로 인해 인천공항으로 가는 상황이다. 실제로 2022년 인천공항을 통한 경남 항공화물 수출은 6만 3567톤에 이르고 있다. 농수산물을 수출하는 농어민들은 비용 상승과 상품 신선도 하락을 감내하면서도 거리가 가장 먼 인천공항을 울며 겨자 먹기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부산 본사의 포워딩 전문 회사인 트래닉스(주) 이준석 대표는 “김해공항은 제한적 근거리 노선이 집중되고, 장거리 국제노선이 없어 유럽, 미국, 중동, 남미 등 다양한 화물 수요를 충족할 수 없다”면서 “부산권 화주들은 추가 물류비를 지불하고 인천공항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밝혔다. FedEx, DHL 등 글로벌 항공화물 특송업체 한국지사도 서울과 인천에 집중돼 있다.
■ 글로벌 해운사들 항공물류 사업 적극 진출
글로벌 해운 리더인 머스크(Maersk)는 더 이상 해운회사라고 표방하지 않는다. 2018년 ‘앞서간다(Stay Ahead)’ 전략 발표 이후 육해공을 아우르는 종합물류기업으로 기업 성격을 바꾸고 있다. 해운회사에서 이제는 항공과 포워딩, 철도, 육상 운송을 장악해 종합물류시스템을 제공하려는 목적이다. 머스크 측은 “우리의 경쟁사는 아마존 혹은 대한민국 택배회사가 될 수도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화물전용 항공사 머스크 에어카고(Aircargo)를 운영하고 있는 머스크는 2022년 항공물류에 강점을 보유한 독일계 세나토 인터내셔널(Senator International)을 인수했다.
머스크에 자극을 받은 경쟁 해운사 CMA CGM도 최근 항공화물사업부를 운영하며 2026년까지 항공기 12대를 추가할 계획이다. 대만 선사 에버그린(Evergreen)은 대만 국적 항공사인 에바항공(EVA Air)과 사업 결합을 통해 시너지를 내고 있다. 화물항공 브랜드인 에바항공 카고(EVA Air Cargo)를 통해 물류업을 강화했다.
신석현 동명대 항만물류시스템학과 교수는 “머스크가 해운회사에서 항공 등 종합물류회사로 변신하는 등 세계적으로 물류 흐름이 변화하고 있다”면서 “가덕신공항 개항을 앞두고 부산도 항공물류의 확대와 종합물류회사·국제 특송회사 유치, 인력 양성을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 가덕신공항 화물 처리 용량 대폭 키워야
‘동북아 물류 중심’을 목표로 하는 가덕신공항의 항공화물 처리 능력이 지나치게 낮게 설정됐다는 비판도 거세다. 국토부는 가덕신공항 항공 수요를 2065년 기준 화물 33만 5000톤으로 잡았다. 인천공항 처리능력의 5%에 불과한 수준이다. 인천공항은 5단계 확장 사업으로 연간 1000만톤까지 화물 처리 능력을 높일 계획이다.
김가야 동의대 명예교수(한국기술사회 기술정책고문)는 “가덕신공항을 글로벌 복합물류 중심 공항으로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화물터미널 처리 용량과 배후물류단지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기본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고속철도와 부산신항 등 육해공 물류망을 기반으로 동남권 전체가 신공항으로 발전할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머스크 출신인 신 교수는 “특송물류, 국경 간 전자상거래 Sea&Air 복합운송, 콜드체인 물류 등에 특화하여 항공물류산업 생태계를 조성해 가덕신공항을 국가 간 전자상거래 허브로 발전시킬 수 있다”면서 “개항에 앞서 유엔조달 물류창고 유치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2024-08-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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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시선] 65세 이상 인구 1000만 명 시대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주민등록인구가 이달 10일 기준 1000만 명을 넘어섰다는 소식은 단지 인구 구성만이 아니라 사회구조 자체도 전환기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국민 5명 중 1명꼴이 되면서 전반적으로 우리나라는 이전과는 다른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65세 이상은 노인복지법상 ‘노인’으로 분류돼 이제 우리나라도 노인 인구가 전체 20%를 넘는, 이른바 ‘초고령사회’을 코앞에 두게 됐다는 분석이다.
초고령사회의 도래는 노인 인구가 단순히 전체 인구의 20% 이상이 됐다는 의미를 훨씬 넘어선다. 갈수록 부양 인구가 급증한다는 점에서 연금 문제를 포함해 노동력 부족 등 복합적인 사회 문제가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때에 따라서는 세대 간 갈등의 실마리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미 인구 추계상 예견은 됐었지만 이제 공식적으로 우리나라도 65세 이상 인구 1000만 명 시대를 맞은 만큼 국가적으로 이에 따른 법률 등 사회 체계의 재정비를 서둘러야 할 때가 됐다. 21세기 중후반 우리나라 사회 체계의 안정 여부가 여기에 달려있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노인 인구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지난 10일 기준 65세 이상 주민등록인구는 1000만 62명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 5126만 9012명의 19.1%에 달한다. 현재의 노인 인구 증가 추세를 감안하면 내년에는 초고령사회 기준인 전체 인구 비중의 20%를 넘게 된다.
우리나라 노인 인구의 특징은 그 증가세가 매우 가파르다는 점이다. 10년 전인 2015년까지만 해도 65세 이상은 677만 5101명으로 전체 13.1% 수준에 그쳤다. 그러다가 2020년 850만 명에 육박하며 가파르게 증가한 이후 이번에 불과 4년 만에 1000만 명을 돌파했다.
광역시도 별로 보면 전남의 65세 이상 주민등록인구 비율이 26.67%로 전국에서 가장 높았다. 이어 경북 25.35%, 강원 24.72%, 전북 24.68% 순이었다. 부울경을 살펴보면 부산은 23.28%, 경남 21.25%로 모두 20%를 넘었지만, 울산은 16.58%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초고령화 도시인 부산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전국 특별·광역지자체 가운데 그 비율이 가장 높았다.
노인 연령 기준은 이미 이슈화
노인 인구 비중 20% 돌파를 코앞에 두고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이슈는 노인 연령 기준의 재조정 문제다. 이 문제는 노인 복지 혜택의 수혜 여부 등 노인 정책의 기준이 되는 만큼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앞으로 기대 수명이 늘어나고 65세 이상 인구 역시 계속 늘 것이 이미 분명해진 상황에서 당장 이 기준부터 재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실정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노인 연령 기준 65세는 1981년 제정된 노인복지법의 경로우대에서 시작됐다. 기초연금, 지하철 무임승차 등 주요 노인 복지사업이 이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노인의 신체 여건을 비롯해 사회 여건 역시 적잖이 달라진 만큼 이 기준을 상향 조정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노인 인구 급증에 뒤따르는 국가 복지 재정이 큰 부담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연령 재설정은 가장 손쉽게 떠올릴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미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은 2025년부터 10년마다 노인 기준 연령을 1세씩 단계적으로 올리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서울시 등 일부 지자체도 각종 노인 복지 혜택의 기준 연령을 만 65세에서 70세 이상으로 올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중한 접근을 주장하는 의견도 만만찮다.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가장 높은 노인 빈곤율과 노인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령 기준 상향은 이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다 정년과 연계된 연금 수급 개시 연령의 불일치 기간이 더 늘어나는 문제도 간과할 수 없다. 또 개인별로 천차만별인 노인의 건강, 소득 차이 등을 무시하고 일률적인 연령 기준 적용이 바람직하냐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연령 재조정은 복지 서비스 대상의 축소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만큼 이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이 관건이 될 수밖에 없다.
연금·일자리 체계 개선 시급
노인 연령 기준 재조정과 함께 노후 대책으로 꼽히는 연금 개혁 역시 초고령사회의 핵심적인 관심사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저출생·고령화 시대는 국민연금 수급과 고갈 문제와 직결돼 있다. 거의 모든 국민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걸려있다. 현재 만 63세부터 받기 시작하고 2033년 65세로 늦춰질 국민연금 수급 기준은 오는 2055년께 바닥이 드러날 연금 재정을 감안하면 더는 해결 방안을 미룰 수 없는 상태다.
이와 직결된 사안이 정년 연장이다. 대기업 일부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만 법률적으로는 아직 정식 공론화 단계에 이른 것은 아니다. 초고령사회를 맞아 충분한 대안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청년들의 일자리 확보와 상충할 수도 있어 섣불리 접근하기도 어렵다. 역시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공감대가 필수적인 사안이어서 국회를 중심으로 한 여야 정치권과 정부의 활발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아직 제도권 내 논의는 미진하기만 하다.
이외 무임승차 등 노인 이동권 확보나 노인 기초연금 등 노인의 기본소득 보장, 노인성 질환 등 노인돌봄 강화 정책도 65세 이상 인구 1000만 명 시대를 맞아 발등의 불이 됐다.
노인 법률 체계도 손봐야
저출생·고령화로 대별되는 인구 상황을 맞아 우리나라의 역동성과 생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노인 인구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변해야 한다. 여러 번 나온 말이긴 해도 노인도 국가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세대와의 조화로운 삶과 노인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초고령사회에 맞는 새로운 사회 체계 구축이 시급한 시점이다.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우선은 노인 관련 법률 중 대표적인 노인복지법의 대대적인 조정과 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근래 국회입법조사처가 노인복지법의 개선 과제를 제시했다. 노인복지법을 초고령화 시대를 맞아 노인복지 분야의 기본법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제안했는데 경청할 만하다. 노인의 인권과 시민권 관점을 바탕으로 노인의 빈곤, 요양·돌봄, 평생교육 등 다양한 사업에 대한 원칙을 새롭게 세우고, 이에 맞춰 관련 법률 체계도 재정비할 것을 제안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놔두고라도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업이다. 이를 계기로 노인 연령 기준이나 연금 정책 등에 대한 공감대도 자연스럽게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65세 이상 인구가 한 사회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미증유의 일이다. 하지만 이미 현실로 닥쳤고 벌써 여러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우리나라 미래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일임을 감안하면 이제라도 법률 정비와 정책적 실행의 대원칙을 새로이 설정해야 할 시기다.
2024-07-24 [17: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