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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도망쳐도 되는 사회
‘존버!’ 지면에 풀어쓰기 민망한 이 줄임말이 강조하는 바는 ‘끝까지 버텨라’다. 중도 포기란 없다, 끝까지 가지 못하면 낙오라는 집단 최면은 사회의 긴장감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도 같은 역할의 자기 암시다.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면 안 된다는 지상 명령은 사회 구조적으로 촘촘하게 작동해서 개인의 대안 모색은 원천 차단된다.
우리는 ‘도망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 살고 있다. 시련을 정면 돌파하지 않으면 현실 도피자, 실패자라는 손가락질이 돌아온다. 개인에 그치지 않고 가족의 수치가 된다. 이 암묵적인 규칙은 도덕률로 작용해 개인과 집단을 통제한다. 문제는 원치 않은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도 발목이 잡힐 때다. 결국 억지춘향은 마음의 병으로 이어진다. 원하는 바가 충족되지 않아서 생기는 우울증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미덕과 수치 체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가정과 학교를 거쳐 기성 사회로 진입하는 경로에 순응하지 않는 흐름이 나타난 것이다. 최근 통계에서 취업도, 구직 활동도 거부한 채 ‘그냥 쉰다’는 20대 인구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더 이상 버티지 않겠다’는 젊은이들의 절규인 셈이다. 전후의 가난과 산업화를 거치며 ‘버티기=생존’이라는 공식을 내면화한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통계청의 7월 고용동향을 보면 취직할 의사 없이 고용 시장 밖에 머무는 흐름은 상승 기세를 더하고 있다. 한창 직장 경력을 쌓으며 결혼과 출산, 주택 마련에 나설 30대의 ‘쉬었음’ 인구는 31만 2000여 명으로 집계됐다. 10년 전인 2016년(16만 8000여 명) 대비 무려 85.7%가 폭증한 결과다.
사회 초년병인 20대는 역대 최악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쉬었음’ 인구가 42만 1000여 명이었는데, 이 수치는 코로나19 유행으로 고용 시장이 얼어붙었던 2020년(40만 7000여 명)보다 높고, 2003년 통계 집계 이후로 7월 기준 역대 최고치다. 2016년 7월(24만 5000여 명)과 비교하면 71.8%나 껑충 뛰었다. 출생률 하락으로 20대 인구가 줄어든 조건을 감안하면 더 심각하다. 2016년 ‘쉬었음’ 20대는 또래 집단의 3.7%였는데, 올해는 7.3%로 갑절이나 뛰었다. 이 추세를 막지 못하면 조만간 20대 10명 중 1명이 사회와 단절되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쉬었음’ 항목은 실업자도 구직자도 아닌 채 쉬는 경우다. 실업률 통계에서도 빠지는 ‘쉬었음’ 인구가 늘면 자칫 실업이 줄고 고용이 늘어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는 세대 단절을 일으켜 장기간의 부작용을 초래한다. 학령과 취업 적령기를 놓쳐 경력 단절이 생기면 사회 복귀가 어렵기 때문이다.
과도한 경쟁에 대한 저항, 혹은 도저히 승산이 없어 보이는 미래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저항은 저성장 시대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사회 문제다. 중국에서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없는 과로 사회에 염증을 느낀 ‘탕핑’(躺平·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족의 퇴사 행렬이 이어졌다. 초경쟁 사회에서 성공에 대한 강박을 MZ 세대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행태를 비꼰 영어권 속어 ‘눈송이’(snowflake)도 같은 맥락이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행태를 눈 녹듯 사라지는 데 빗댄 조롱이다.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부작용을 먼저 경험한 일본에서는 청년 세대의 도망(회피) 현상이 우울증의 하나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정신의학계는 ‘도망은 수치’라는 의식이 옅어지는 데서 나아가 ‘버티면 더 위험하다’거나, ‘도망쳐야 이긴다’는 가치관 역전에 주목한다. 현실을 벗어나지 못해 겪는 고전적인 ‘멜랑콜리 우울증’과 대비되는 것이 도망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새로운 우울증, 즉 ‘신세대 우울증’이라는 것이다.
‘존버’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자발적으로 사회 진입을 거부하는 인구 집단이 급속도로 세를 불리는 현상은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의 규칙을 바라보는 청년들의 시각이 달라진 데 있다. 그래서 “도망치면 실패”라는 훈계는 설득력이 떨어졌다. 청년 세대에 외면당하는 사회가 지속 성장하고 번영할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인정과 포용력이다. ‘공백기’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하려는 청년 세대가 낙인과 배제의 문턱을 마주해야 한다면 세대 단절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도망쳐도 되돌아올 수 있는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과제다.
김승일 논설위원
2025-08-2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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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극우가 온다
극우 성향의 전직 역사강사 전한길 씨가 국민의힘에 입당하자 당이 ‘친길’(친전한길)과 ‘반길’(반전한길)로 쪼개졌다. 그는 아스팔트와 유튜브에서 횡행하던 ‘윤 어게인’(윤석열 전 대통령의 복귀)과 부정선거 의혹을 들고 와 당을 장악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윤석열과의 단절’을 외치는 혁신파는 ‘반극우연대’로 뭉쳐 맞서지만 당의 주류인 ‘언더 친윤’(숨겨진 친윤석열)은 “당의 다양성”이라며 눙쳐 버린다. 그 사이 “계엄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주장했던 인사는 당대표 선거에 출사표를 던졌다. 극우에 침식당하는 보수 정당의 난맥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극우는 더 이상 거리에만 있지 않다. 또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노년층에 국한되지도 않는다. 21대 대선 출구조사를 보면 ‘이대남’(20대 남성) 과반이 국민의힘을 지지했다.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난입했다가 체포된 시위대 과반이 20~30대였다. 이 흐름이 변방에 있던 ‘윤 어게인’ 세력을 정치권 한복판으로 밀어 올리고 있다. 젊은 세대의 정치적 불만이 비상식적으로 분출되는 현상을 더 이상 간과해선 안 된다. 이 점에서 미국은 반면교사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1기 때는 정치권의 아웃사이더가 부상한 배경으로 ‘백인 빈곤층’의 지지가 거론됐다. 제조업 몰락으로 피폐해진 저소득층이 트럼프에 몰표를 줬다는 거다. 트럼프가 공화당을 장악한 2기에 들어서는 변곡점을 맞는다.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의사당에 난입했던 시위대 다수가 중산층 백인 남성들이었던 것처럼, 미국의 정치 지형은 보수 색채가 짙어지는 수준을 넘는 정체성 변화를 겪고 있다. 극우적 선동에 빈곤층뿐만 아니라 중산층과 전 연령대가 포섭되고 있다는 의미다.
트럼프는 ‘지위 상실’에 대한 불안감을 부추겼다. 주류에서 추락하는 좌절감 또는 두려움을 자극해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고 이를 ‘정당한 분노’로 포장했다. 이민자, 여성, 비기독교, 유색 인종을 공공의 적으로 몰았다. 그들이 복지, 일자리, 사회적 지위를 빼앗아 갔다는 주장은 빈곤층뿐만 아니라 중산층의 영혼을 흔들었다.
트럼프가 주창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에서의 ‘미국’은 모두의 미국이 아니다. ‘기독교 가정의 백인 가부장’에 걸림돌이 되는 소수자는 처단 대상이다. 이는 독일 나치의 갈라치기, 즉 분할 통치(divide and rule)와 판박이다. 내부의 특정 집단을 위험 세력으로 내몰아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오래된 극우의 전략이다. ‘대안 우파’(alternative right)가 퍼뜨린 피해자 프레임이 일반화되면서 미국은 극우적 혐오와 차별이 당연시되는 사회로 가고 있다. 급기야 ‘내 권리가 침탈당했다’는 논리는 동맹국에 관세 폭탄을 던지고, 미국에 제조업 투자를 강요하는 식으로끼지 왜곡된다.
“어떻게 만든 나라인데…!” ‘극우 트럼프’를 지탱하는 “내가 주인”이라는 정서는 아스팔트 태극기 부대 노년층의 울분과 겹친다. 우려스러운 것은 한국에서도 청년 세대, 중산층 전문직, 종교계로 극우 세력이 파고 들며 외연을 확장하는 점이다. 혐오와 차별이 정치 자산이 되고, 세대와 계층을 넘는 우향우 추세가 뚜렷한 미국의 낯선 풍경이 한국에서 재연되는 대목은 당혹스럽다.
물론 젊은 남성의 극우화 진단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수 있어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부모 세대에 당연했던 좋은 일자리, 결혼과 출산, 고급 아파트 그리고 노후 복지를 누릴 수 없게 되자 비뚤어진 집단 행동으로 나타나는 건 실재한다. 종래의 역할 모델이었던 가장이 될 수 없자 느끼는 남성성 상실감은 ‘극우 트럼프’를 만든 ‘억울한 약자’ 정서와 동전의 양면이다. 그 결과 여성과 외국인(중국), 장애인,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똘똘 뭉쳐쳐 거대한 회오리를 일으킨다.
일본의 극우 참정당이 외국인 경멸을 내세워 참의원 선거에서 약진한 것처럼, 극우의 기승은 저성장 시대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양극화가 심각한 한국은 인화성 불쏘시개가 널렸다는 게 문제다. 중산층 세습과 서울공화국, 정규직의 벽 등 불공정·불공평한 사회는 극우 세력이 덩치를 키울 수 있는 최적의 토양이다.
보수의 적통을 자처하는 국민의힘은 겨우 극우 역사강사 한 명이 일으킨 바람에 휘청댄다. 21대 대선에서 무려 1450만 표를 얻은 정당이라 믿기 힘들 정도다. 극우 바이러스에 대한 내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사례다. 거리의 극우가 제도권으로 진격하고 있다. 극우 포퓰리즘은 지금은 미약하게 보이지만 ‘분노의 빅텐트’가 펼쳐지는 건 시간문제일 수 있다. 민주주의 건강성을 지키는 견제 장치와 자정 능력 그리고 통합의 가치를 숙고해야 할 때다.
2025-07-2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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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국민주권정부 주민주권 시대 이끌어야
새 정부는 국민주권정부를 표방한다. 지난 4일 국회 로텐더홀에서 ‘취임 선서’가 있었지만 이와 별도로 ‘대통령 임명식’을 갖겠다는 발상과 같은 맥락이다. “국민이 대통령을 임명한 것”이라며 ‘주권자 국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12·3 비상계엄령이 초래한 헌정 위기를 국민의 힘으로 바로잡았다는 의미, 즉 국민이 주권을 되찾았다는 상징성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역대 정부는 정체성과 지향을 담은 명명을 통해 시대적·정치적 의미를 드러내 왔다. 김영삼 정부의 ‘문민정부’는 32년간 이어진 군부 시대의 종식을 상징한다. 헌정 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로 탄생한 김대중 정부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강조하기 위해 ‘국민의 정부’를 자처했다. 그 뒤는 모든 국민이 민주주의의 주체로 참여하는 것을 지향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시대’라는 명칭이 있었지만 국민적인 참여로 진행된 촛불 시위로 탄생한 점에서 ‘촛불정부’로 통칭됐다.
이재명 정부는 정치적 구호가 아닌 헌법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헌법에 명문화되어 있는 주권재민의 원리는 민주주의의 근간이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보편적 가치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심각한 공간적 불균형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해서 보면 국민주권의 실현에는 심화 과제가 보태진다. ‘국민’이 어느 지역에 거주하느냐에 따라 ‘주권’이 불균형하다면 국민주권주의에 물음표가 붙을 수밖에 없어서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소멸이라는 현실이 국민주권주의를 형식적 구호에 그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수도권에 인구·행정·정치·경제가 집중되며, 실질적으로는 ‘수도권 주권’ 체제가 고착됐다는 비판이 어제오늘 나온 게 아니다. 역대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지방 시대’ 등 화려한 구호가 걸렸지만 비수도권 국민에게는 번번이 ‘희망고문’으로 끝났다. 수도권 기득권이 공고한 탓이다.
예를 들어 1948년 제헌의회 200석 중 수도권(서울, 인천, 경기)은 32석으로 16%에 불과했다. 지금은 전체 지역구 의석의 약 48%다. 이제 수도권의 이익을 침해하는 국토균형발전 법안은 입법부를 넘기가 어렵게 됐다. 수도권 성역화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에 본점 소재지를 둔다’는 산업은행법 조항을 ‘부산에 둔다’로 개정하겠다고 대통령이 공약해도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혀 무산 위기에 처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국민주권은 국민이 국가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다는 의미다. 그런데 지역에 한정해서 보면 지역 주민은 지역의 미래를 결정할 수가 없다. 중앙정부의 재정과 정책 결정권에 예속되어 있어서다. 자치 행정 이외의 재정·교육·의료·산업 정책에서 지자체는 무기력할 뿐이다.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의 격차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 됐다. 서울이 지방의 생사여탈권을 쥔 불균형 구조가 지속된다면 국민주권 구호는 공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방이 주체가 되어 정책을 설계하고 재원을 집행하는 지방 분권이 실현돼야 국민 전체의 삶의 질이 평등해진다는 주장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가 된 지 오래다. 중앙정부 주도의 하향식 국가운영전략이 효율적이지 않고, 지역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원동력으로 국가 경쟁력을 키울 때가 됐다는 하소연도 귓등으로 흘리고 만다. 공공 기관의 찔끔 이전이나 인프라 개발 정도의 시혜성 조치만 반복되는 사이 지방은 소멸의 가속도가 붙고 있다.
1995년 6월 27일 민선 지방자치가 시작된 이래 정확히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지방에는 자치가 없고 주권도 없다. 주민주권을 국민주권의 지역적 구현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 자치입법권, 자치행정권, 자치재정권, 자치복지권 등 4대 지방자치권을 담은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국민투표는커녕 국회 문턱도 못 넘고 폐기된 것처럼 지방 분권은 강고한 중앙 집권의 벽에 가로막혀 있는 게 현실이다.
주민주권과 국민주권이 상충 관계로 인식되는 이 지점이 이재명 정부의 출발점이다. 주민주권과 국민주권은 상호 보완적 관계여야 한다. 주민주권의 실현으로 국민주권이 완성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국민주권정부가 주민주권 시대를 선도하는 것은 시대적 사명이다. 이재명 대통령 재임 기간이 지방소멸을 반전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돌파할 비상한 각오가 필요하다.
2025-06-1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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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한국인 사용 설명서
대통령이 무장 병력을 동원해 의회와 법원을 무력화하려다 자리에서 쫓겨나고, 내란 혐의로 재판에까지 넘겨졌다. 9년 만에 대통령이 다시 탄핵되다니! 지한파 외국인들조차 ‘다이내믹 코리아’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방향타를 잃은 국정, 내우외환이 겹친 경제…. ‘대통령 민폐’의 후유증은 쓰리다. 조선 시대에도 백성에 뒷감당을 떠넘긴 ‘민폐 임금’이 많았다. 한데, 신하이건 백성이건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한국인이 지도자에 들이대는 도덕과 능력의 잣대는 엄격하다 못해 가혹한 건 역사적 맥락이 있다. 임진왜란의 끄트머리 1598년 선조 시절의 일화도 그중 하나다.
조선 시대에 군주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임금의 언행이 옳지 않으면 신하들은 부지기수로 명령 불복종을 감행했다. 갑자기 선조가 온천에 가겠다며 말을 대령하라고 성화를 부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전란에 국토는 유린되고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는데 무슨 한가한 나들이인가. 게다가 민초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준다. 병력과 내관, 궁녀 등 수천 명이 이동하고 숙식하는 사이 주민이 겪는 고역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수라상에 올릴 식자재를 대느라 농사에 지장이 생기고, 군 행렬과 주둔지로 농지가 훼손되거나 땅이 징발되는 게 예사였다.
신하들은 나라가 평온해지면 가자고 읍소했지만 선조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명나라와의 외교가 중차대한 시점에 명나라 장수 응접을 신하들에게 떠맡기면서 “내가 사직을 버리고 나갔다고 전하라”는 몽니를 부리기까지 했다. 온천행을 막는 데 토라져 조회도 거부했다. 이 소동은 복마(僕馬)를 담당하는 좌의정 윤두수와 병조판서 이항복의 불복으로 매조지됐다.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책망을 받을지언정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선조는 그제서야 “말을 점고(點考)하려 했을 뿐”이라며 물러섰다. ‘임금은 도량이 조금도 없고, 명령의 앞뒤가 안 맞다. 목욕 행차에 말 준비를 재촉한 것은 이목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고, 조용히 처변(處變)하는 도리를 잃었다.’ 사관은 붓을 꾹꾹 눌러 찍어 군주의 허물을 후대에 남겼다.
왕정 시대 선조들이 이렇게 반골이었는데, 공화정의 주권자인 오늘날 한국인들은 어떻겠나. 비근한 실례가 너무 많다. 박정훈 전 해병대수사단장은 ‘채 상병 순직’ 사건을 축소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고 집단항명수괴죄 처벌을 선택했다. 12·3 계엄 때 국회에 투입된 군경은 ‘소극적 임무 수행’으로 군 통수권자의 일탈에 반기를 들며 시민의 편에 섰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저항과 부동산 정책에 실패한 문재인 정부에 등을 돌린 표심은 결이 다른 것 같지만 ‘국민정서법’으로 읽으면 동전의 양면이다.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노래로 만들어 시위에서 부르기까지 한다. ‘국가는 나를 위해 복무하라’는 요구다. 이는 ‘민주주의는 민심’이라는 관념으로 발전하는데,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특유의 집단의식과 단체 행동으로 나타난다.
한국 근현대사에 민주화 투쟁 서사는 많은 반면, 국가는 폭력과 무능 등 부정적 프레임 일색이라는 지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대통령 탓’을 입에 달고 살며, 국가에 갑질하는 존재라는 인식이다. 하지만 주인 의식으로 똘똘 뭉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 IMF 구제금융 위기를 탈출하려 온 국민이 금 모으기에 동참한 일은 한국인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무려 349만 명이 장롱 속 금붙이를 자발적으로 내놓은 덕분에 IMF 차입금을 3년 일찍 갚고 국난을 타개했다. 국제 금 시세보다 낮아 개인적으로는 손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온 국민이 경제적 손실을 무릅쓴 사례는 동서고금에 드물다.
이 나라 사람들은 국정 최고 책임자가 잘못된 길을 가면 순종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채찍을 든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 형성된 ‘대통령 사용 설명서’에는 국민이 주인이고 대통령은 부려지는 존재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패착은 한국인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됐다. 한국인들이 기대하는 ‘대통령의 효능감’을 외면했으니 민심과 엇박자가 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한국 대통령은 극한 직업이다. 온 국민이 주권자 의식으로 무장하고 대통령에 성과를 재촉하고 있어서다.
2주 뒤면 제21대 대통령이 선출된다. 신임 대통령에 당부하고 싶다. 전 세계적으로 유별나게 주권자 의식이 뚜렷한 한국인과 눈높이를 맞추겠다는 초심을 임기 내내 잊지 말아 주시기를 바란다. 대통령의 실패로 국가적 불행이 반복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이제는 성공한 대통령을 보고 싶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2025-05-2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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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고령 운전자를 대하는 불편한 시선
‘또 고령자 역주행 사고… 면허 반납은 고작 2.4%.’
지난해 서울시청역 역주행 사고 이후 고령자 운전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은 악화일로다. 관련 뉴스 제목이 부정적인 뉘앙스 일색인 것에서 단박에 드러난다. 지자체들도 면허를 돌려받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앞다퉈 현금 보상을 내걸었다. 하지만 반납률은 해마다 2%를 겨우 넘길 정도로 저조하다. 푼돈 받자고 이동권과 생계가 걸려 있는 운전대를 놓을 수는 없다는 노년 세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결과적으로 ‘장롱 면허’만 거둬들이는 실정이라 정책 효과는 미미하다.
‘인지 능력과 반응 속도 저하.’ 노인 운전이 위험하다는 근거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사회적 통념만으로 노인을 도로의 사고뭉치로 몰아가는 건 곤란하다.
우선 노인 교통사고 통계를 제대로 읽어 낼 필요가 있다. 65세 이상 운전자의 교통사고 건수는 2012년 1만 5190건에서 2023년 3만 9614건으로 11년 새 2.6배 늘었다. 전체 사고 중 고령자 비중도 같은 기간 6.8%에서 20%로 늘었다. 이 증가세가 면허 반납론의 근거로 곧잘 인용된다.
이 수치 비교는 고령화로 인한 노인 인구 비중의 변화를 감안해서 볼 필요가 있다. 같은 기간 65세 이상 인구는 576만 6729명에서 943만 5816명으로 63.6%나 증가했다. 노인 인구 비중도 11.5%에 18.2%로 커졌다. 65세 이상 운전자가 늘면 사고 건수도 비례하기 마련이다. 인구 비중의 변화 요인을 뺀 채 사고 수치만 시계열 비교하면 고령자 사고가 급증한 것으로 인식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연령별 면허 소지자 100명 당 사고 건수를 비교해야 객관적인데, 이 통계를 보면 20세 이하가 매년 1위다. 그 뒤는 60대, 50대, 20대, 40대, 30대 순이다.
연령만으로 운전 적합도를 평가하기 어려운 대목이 택시 기사 고령화 추세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2023년 말 전국 개인택시 기사(16만 4334명) 중 60세 이상이 12만 4475명으로 75.7%다. 65세 이상은 51.4%인데, 부산처럼 고령화 속도가 빠른 곳은 60%가 넘었다. 고령 기사들이 핸들을 놓으면 당장 택시가 멈춘다. 개인마다 다른 건강 연령을 감안하지 않은 채 나이만을 기준으로 차량 운행 능력을 따지면 합리적인 해결책을 놓치게 된다.
“운전대를 놓으면 노화가 액셀을 밟는다.” 일본의 노인 정신의학 및 임상심리학 전문의 와다 히데키 ‘마음과 몸 클리닉’ 원장은 운전을 할 수 있다면 면허를 반납해선 안 된다고 충고한다. 운전을 그만두면 외출 기회가 줄고 집에만 머물게 되면서 신체와 정신 기능이 쇠퇴할 수 있다는 이유다. 일본에서도 시행 중인 면허 반납 제도를 노인 건강과 연계한 연구 결과가 근거다.
일본 쓰쿠바대학 연구팀이 건강한 65세 이상 2800명을 6년 간 추적한 결과를 2019년 발표했는데, 면허를 반납한 뒤 돌봄 서비스를 받게 된 비율이 현저히 높았다. 자가 운전을 그만두고 집에만 머문 경우는 계속 운전대를 잡은 경우에 비해 2.1배 높았고, 버스와 자전거를 이용한 그룹은 1.6배 높았다. 연구진은 외출 대신 집에서 머무는 시간의 증가와 신체, 정신 퇴화에 상관성이 있는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노인병학회지에 2016년 실린 ‘고령자 운전 중단과 건강 추이’ 연구도 같은 시사점을 준다. 운전 중단과 우울증의 연관성을 조사했더니 우울증 발병률이 두 배 높아졌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운전 중단에 따른 부정적 영향을 완화하려면 이동성과 사회 활동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국회예산정책처도 지난달 발간한 ‘고령 운전자 교통 안전 국내외 정책과 입법 현황’ 보고서에서 고령자의 이동성을 담보하지 않는 면허 반납, 운전 중지 정책은 사회적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보행 사고가 늘거나 건강과 삶의 질 저하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10년의 면허 갱신 주기를 65세 이상은 5년으로, 75세 이상은 3년으로 단축, 강화했다. 75세 이상은 인지능력 검사와 교통안전교육까지 의무화해 부적합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고령자 안전 운전을 위한 정책과 제도는 앞으로 더 심화 발전돼야 한다. 예컨대 앞서 일본과 미국 연구처럼 노인 세대의 이동성과 건강 유지의 상관성을 조사해 바람직한 정책 방향을 도출해 낼 필요가 있다. 고령자에 특화된 인지능력 검사를 추가하거나 유럽연합에서 의무화된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 등 비상시 오작동을 예방하는 기술 도입도 검토해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고령 운전자를 대하는 불편한 시선을 거두는 일이다. ‘신체 연령’이 젊은 노인의 운전을 막는 게 능사가 아니다. 건강한 노후와 안전한 이동의 균형점 모색은 초고령화 시대가 우리 사회에 던진 공동의 숙제다.
2025-04-17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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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트럼프 관세 전쟁, 공황의 그림자
“미국인들은 느려 터져서 생산성이 떨어져요.”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턴의 제너럴모터스(GM) 공장이 문을 닫자 대규모 실직 사태가 발생한다. 다행히 중국 푸바오그룹이 공장을 인수해 재고용하자 지역 사회는 활기를 되찾는다. 한데, 중국 관리자들은 미국인의 굼뜬 일머리에 속이 터진다. 반면 미국인들은 중국식 근면과 규율, 업무 강도, 그 결과인 높은 생산성에 충격을 받는다. 급기야 미국 직원들은 노조를 결성해 대항하려 한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아메리칸 팩토리’(American Factory·2019년)는 미국에 진출한 중국계 기업이 겪는 문화 충돌이 주제다. 이 다큐를 본 기업인이라면 미국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돈으로 건물을 짓고 장비는 들일 수 있으나 일하는 문화까지 살 수는 없다.
‘무역 전쟁은 좋은 것이고, 이기기 쉽다.’(Trade wars are good, and easy to win.) 2018년 3월 2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트윗은 관세 폭탄의 예고편이었다. 트럼프 1기 때는 중국만 두들겨 팼지만 2기에는 동맹국도 가차없다.
우아한 외교 수사는 사라지고 무쇠 주먹만 휘두르는 낯선 미국의 이면에는 제조업 붕괴가 있다. 1960년대 제조업은 국내 총생산(GDP)의 25%였는데 최근 11%로 떨어졌다. 생산력이 몰락하고 기생적 금융자본주의만 번성하는 이상한 나라가 됐다. 제조업 일자리 하나는 비제조업 분야에 3.4개의 일자리를 창출한다. 2000년 이후 제조업 일자리가 500만 개 이상 사라졌고 후방 효과로 비제조업 실업자까지 쏟아져 미국 사회가 입은 내상은 심각하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는 ‘미국인 다시 취업하기’ 캠페인인 셈이다.
트럼프 관세 전쟁의 본질은 ‘일자리 빼앗기’다. 밥그릇 앞에 이념도, 동맹도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5일 의회에서 인도, 중국, 한국을 부당 관세 국가로 콕 집어 지목한 뒤 “우방이든 적국이든 똑같다”고 선언한 배경이다. 이날 연설의 핵심은 “미국으로 생산 기지를 옮기지 않으면 더 높은 관세를 매기겠다”였다.
반도체는 상징적인 사례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 대만과 한국이 반도체를 ‘훔쳐갔다’는 표현까지 썼다. 미국에서 탄생한 반도체가 일본을 거쳐 한국과 대만으로 옮아간 과정은 자연스럽다. 한국과 대만은 적정 임금에 24시간 공정을 지탱하는 노동력 공급이 가능했다. 미국에서 불가능해졌기에 아시아로 넘어온 것이다. 하지만 반도체가 전략 물자로 부상하자 ‘미국에서 태어난 기술이니 도로 내놔라’는 억지가 시작됐다. 실제 한국의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대만의 TSMC의 팔을 비틀어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게 해 놓고 정권이 바뀌자 약속했던 보조금은 안면몰수할 기색이다.
트럼프의 목표는 제조업 회생, 즉 일자리 창출이다. 그 수단이 관세다. 관세는 제품 가격에 흡수되어 미국 소비자에 전가된다. 캐나다가 미국의 25% 관세에 맞서 미국에 수출하는 전기에 25% 수출세를 부과한다고 엄포를 놓았는데, 이는 가구당 월 100달러(우리 돈 15만 원)의 생활비를 증가시킨다. 물가 앙등이 촉발한 경기 침체의 위기 경고가 미국 내에서도 나오는 이유다.
미국이 상호 관세를 부과하고 세계 각국이 맞대응하면 물가 앙등, 무역 감소, 경기 침체는 필연적이다. 전문가들은 경기 침체를 넘어 대공황까지 우려한다. 1930년대 세계 경제를 붕괴시킨 대공황과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어서다. 당시 미국은 자국 산업 보호를 명목으로 스무트-홀리 관세법을 제정해 최고 60% 관세를 매겼다. 다른 국가들이 보복 관세로 맞선 결과 세계 무역은 65% 감소했다.
10일 미국 주식 시장이 폭락했는데 이유는 전날 트럼프 대통령이 경기 침체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우리가 엄청난 일을 하는 중인데, 과도기가 있을 것”이라고 한 것이 발단이었다. 경기 침체를 감수하겠다는 의지 표명이 불안 심리에 불을 질렀다. 트럼프의 관세 전쟁을 ‘거래의 기술’로만 이해하는 건 금물이다. 트럼프에 있어 ‘엄청난 일’은 산업 구조의 근본적 개혁이고 이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이어서 관세 폭탄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세계 각국은 트럼프 1기 때와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임기 4년의 트럼프가 무서워 미국에 공장을 지을 턱이 없다. 12일 유럽연합이 최대 50%의 보복 관세로 반격한 것은 준비된 선전 포고다. 글로벌 경기 침체는 불가피하고 벌써 대공황의 그림자까지 어른거린다. 내수 비중이 높으면 그나마 버티겠지만 수출 의존도가 높은 데다 대미 흑자가 큰 한국은 시계제로다. 트럼프의 호언장담과 달리 ‘무역 전쟁은 나쁘고 이기기도 쉽지 않다.’ 승자 없이 모두가 패자가 될 뿐인 이 무역 전쟁을 피할 길이 없는 처지가 참담하다. 한국은 최악 시나리오를 각오해야 한다.
2025-03-13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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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부산 교육, 감원 아닌 결원 대책이 필요하다
정부가 올해 초·중등 교사 정원 2232명을 감축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학령 인구의 감소에 대비한 ‘중장기 교원 수급 계획’에 따른 것이다. 저출생 여파로 교사 감원이 시작된 게 10년이 넘었다. 정원 축소가 발표되면 그때마다 교원단체와 교사들이 교육의 질 하락을 우려하며 반대하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
출생 통계를 보면 취학생 급감은 기정사실이다. 따라서 교사 수를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다. 지난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2017년생은 35만 7771명이었는데, 2023년생은 23만 28명으로 35.7% 감소했다. 부산 초등 교사 수는 지난해 7480명에서 올해 7380명으로 100명 줄었다. 중등 교사 수는 6806명에서 6691명으로 115명 감소했다. 내년에도 각각 100명가량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학교 현장에서는 학생과 교사 수를 단순 비례해서 조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맞선다. 교육부의 ‘교사 1인당 학생 수’ 기준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학교나 학급 수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도시 내 학교 신설이나, 고교학점제에 따른 분반 수업 등 각 수업 현장에서 교사가 더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부산 금정구와 동래구 소재 인접한 세 곳의 초등학교를 보면 일률적인 정원 관리가 녹록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A초등은 지난해 인근 신축 아파트 학생 수요 예측이 어긋나 낭패를 봤다. 모듈러 교실을 증축하고 22명의 기간제 교사까지 고용했지만 입주 지연과 전입 미달로 추가 편성한 학급 정원은 15명에 못 미쳤다. 재학생은 한 학급에 27명씩 빽빽하게 배정해 놓고 새 학급을 신설했다가 허를 찔린 것이다.
인접한 B초등은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 학급 정원이 30명까지 치솟는 과밀 학급으로 변했다. 반면 주택가를 끼고 있는 C초등은 한 학년에 한 학급씩으로 줄어 교사 정원도 대폭 줄었다. 이 경우 소수의 교사가 수업 외 학교 업무까지 부담해 교사들 사이에 기피 1순위다.
부산 교사 감원 문제를 한층 심각하게 만드는 해묵은 고질병이 하나 있다. 정규 교사의 빈자리를 채우지 않는 결원 비율이 전국 최고인 점이다. 부산 공립학교 증등 교사의 지난해 결원은 1270여 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높은 17.64%였다. 전국 평균 6.6%의 세 배에 가깝고, 후순위인 서울, 인천, 광주가 8%대인 점에서 부산의 심각성이 드러난다. 문제는 병가나 휴직으로 인한 일시적 결원이 아니라는 데 있다. 정년·명예퇴직으로 빈자리가 발생해도 채용을 하지 않아 결원율이 전국 최고가 된 것이다.
부산의 D고는 올 신학기에 23명의 교사를 받는데, 이 중 타 학교에서 전입되는 교사는 7명뿐이고 나머지는 신규 임용 6명, ‘미배치’ 10명이다. ‘미배치’란 부산시교육청이 채용하지 않고 결원으로 관리하는 정원이다. 해당 학교가 기간제 교사를 선발해야 된다. 예컨대 국어 교사 정원은 7명인데 정교사가 3명만 배정되면 나머지 4명이 계약직 자리다. 기간제 교사의 비중이 늘면 수업 시수나 담임 배정 등에서 크고 작은 신경전이 벌어진다.
여기에 고교학점제 시행으로 다양한 분반 수업이 추가 개설되면서 교사 부족은 도돌이표가 된다. 교사가 원적 학교를 두고 여러 학교를 순회하거나, 시간 강사 전담 등 수업 운영 방식이 예전처럼 단선적이지 않다는 게 교사들의 지적이다.
부산시교육청은 정원을 채우지 않은 채 결원을 유지하는 고육책을 택한 이유를 극심한 저출생 탓으로 설명한다. 지금 부산 고교생 한 학년이 2만 4000명 전후인데 초등생은 1만 4000명 전후로 뚝 떨어진다. 부산의 출생률이 획기적으로 반등하지 않는 한 20년 뒤에는 초미니 학교가 늘고 교사는 남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교육청은 결원을 유지하는 대신 정원 외 기간제 교사와 시간 강사 예산을 확보해 일선 학교를 지원한다는 계획이지만 현장과의 괴리감은 어쩔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인구 추이에 따른 합리적인 수준의 교사 감원은 설득과 공감의 영역이다. 하지만 부산은 감원되는 와중에 결원도 늘어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유독 부산에서 왜 이 문제가 방치됐는지 성찰이 필요하다. 작금의 교육감 재선거에 출마하려는 후보자들에게도 묻고 싶다. 전국 최고 비율의 교사 결원 유지가 부산의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교육 환경인가. 20년 후 취학 인구 감소에 대비한다고 지금 세대의 공교육 내실화는 소홀해도 되는가. 현장의 문제의식과 정책적 판단 사이에서 합리적인 균형점을 찾을 수는 없나.
부산 교육계의 고질병인 교사 결원 문제에 대한 지역의 공론화가 필요하다. 그 해답을 찾는 과정이 부산의 교육 대계를 세우는 길이다.
2025-02-18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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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강한 달러'의 명암으로 본 트럼프 2기
미국은 점점 이상한 나라가 되고 있다. 현직 대통령이 재선 실패에 불복해 지지자들을 부추겨 국회 의사당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2021년 1월 유혈 사태 가담자 1200명 이상이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헌정 유린을 선동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선에 재도전해 중임에 성공하자 폭동 가담자를 애국자로 부르며 대규모 사면을 예고해 논란이 거세다.
트럼프 2기는 고율 관세로 ‘퍼펙트 스톰’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중국산에 60%, 나머지는 10∼20%의 보편 관세를 부과한다는 공약이 논란이다. 게다가 뜬금없이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를 합병한다며 군대 투입까지 경고하는 대목에 전 세계는 경악한다. 트럼프 재선은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세계 질서에 조종을 울린 것이다.
미국은 기술 강대국이지만 제조 약소국이다. 생산력이 몰락했다. 미국 스스로도 이상한 나라가 되어버린 것을 잘 안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미국 제조업, 방위산업 기반과 공급망 회복력 평가’를 수행하라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2017년 제출된 보고서는 암울하다. ‘2000년 이후 6만 곳 이상의 공장과 기업이 문을 닫았고, 제조업에서 5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2020년 미국 제조업 부문의 GDP(국내총생산)는 2조 1580억 달러였는데 서비스 부문은 6배 많은 13조 1000억 달러였다. 미국 중산층은 FIRE(Finance, Insurance, Real Estate), 즉 금융과 부동산에서 부를 창출한다. 땀 흘려 돈을 버는 일자리는 사라졌다.
원인은 국내보다 해외에 더 많이 유통되는 기축 통화 달러다. 미국은 달러를 마음껏 찍어 값싸게 상품을 수입하고 과소비 시대를 구가했다. 각국 중앙은행이 달러를 사들여 미국의 파티 비용을 대납하는 꼴이었다. 이 구조가 미국의 발등을 찍었다. 수출 경쟁력이 떨어졌고 탈제조업의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미국이 국제 질서를 쥐락펴락하는 힘이 압도적인 군사력에 뒷받침된 건 맞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장에 파병하지 않는 것처럼, 트럼프 1기 때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주장해 관철한 것처럼 미국은 피를 흘리는 전쟁에 지쳤다. 그 대신 효과적인 대체 수단을 찾았다. 달러가 ‘종이 군대’가 된 것이다. 달러 흐름을 차단하면 지구 반대편 눈엣가시들이 끔찍한 고통을 당하는 걸 깨닫게 된 계기는 북한 비자금이었다. 2006년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북한 계좌 동결은 ‘신의 한 수’였다. 북한이 강력 반발하면서도 돈을 찾기 위해 읍소하는 걸 보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대편의 무릎을 꿇리는 달러 제재의 위력을 발견했다.
결정적인 전기는 2022년 경제 규모 세계 11위 러시아의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퇴출이다. ‘달러 무기화’로 명명된 이 사건 이후 미국은 무수히 많은 러시아 기업과 개인을 금융 제재 리스트에 올렸다. 러시아가 수출 대금을 달러로 받지 못하면 경제는 망가지고 국민은 고통을 겪는다. 이란, 북한, 베네수엘라도 달러 제국에서 쫓겨난 뒤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미국 재무부가 작성한 수천 건의 제재 리스트는 미국 기업뿐만 아니라 달러를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는 전 세계에 적용된다. 동맹국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경남 김해의 한 기업이 미국산 기계와 부품을 러시아에 수출했다가 된통 혼났다. 미국은 은행을 경유하는 모든 거래를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고 위반 때는 가차없이 징벌한다. ‘달러 무기화’의 배경에 유엔(UN)의 무력화도 있다. 유엔 상임이사국 러시아와 중국을 겨냥한 유엔 제재가 불가능해졌으니 미국이 독자적인 ‘제재 전쟁’에 나선 것이다.
물론 달러 제국에 대한 도전도 끊임 없다. 영국·독일·프랑스가 미국의 이란 제재를 우회하는 유럽연합 내 은행 거래를 시도했다가 거액의 벌금에 좌절한 게 대표적이다. 베네수엘라의 석유 결제 수단 ‘페트로’도 쓴맛을 봐야 했다. 하지만 중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협력이 ‘페트로 달러’에 파열구를 낼 지 주목되고, 러시아, 중국, 브라질, 인도가 참가하는 브릭스도 달러 타도에 절치부심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의 제조업·일자리 붕괴는 소위 ‘킹 달러’의 부작용이고, 고율 관세는 이를 타개하려는 극약 처방이다. 강한 달러는 미국에 골병을 안겼지만 밖으로는 무자비한 제재를 휘두를 수 있는 힘을 부여했다. 이 모순적인 구조는 달러가 안전 자산으로 여겨질 때만 지속 가능하다.
오는 20일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다. 전 세계는 더 이상해진 미국을 목도하고 점점 더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미국이 주도했던 이념과 가치를 스스로가 허물고 일방주의로 치닫기 때문이다. ‘전능한 달러’에 대한 의구심과 도전은 거세질 수밖에 없다. 달러 제국의 아성은 지켜질 수 있을까. 트럼프 2.0 시대가 던지는 질문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2025-01-09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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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대통령, '국가 원수'에서 내려와야
러시아, 헝가리, 튀르키예. 21세기 들어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권위주의 체제가 확립된 나라들이다. 헝가리의 오르반 빅토르 총리는 영구 집권을 위한 개헌까지 강행한 끝에 18년째 장기 독재 중이다. 그는 지극히 형용 모순적인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라는 개념을 주창해서 국제적인 논란을 부른 장본인이다. 러시아와 튀르키예도 스트롱맨에 의한 종신 집권으로 가고 있다. 튀르키예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총리를 거쳐 대통령에 거듭 당선되면서 21년째 권좌에 앉아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6선을 채우면 84세가 되는 2036년까지 집권이 확실시된다.
이들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3권 분립의 견제와 균형 원칙은 의미를 상실한다. 무소불위의 강력한 지도자에게 입법·사법부와의 건강한 긴장은 거추장스런 존재다. 이처럼 선거로 선출됐지만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는 체제를 대의 민주주의와 구별해서 ‘위임 민주주의’(delegate democracy)로 분류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은 정치 암흑의 긴 터널에서 벗어나 자유 민주주의를 구가하는 정치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로 국민적 자부심은 짓밟혔다. 12·3 비상계엄령은 대통령의 통치 행위라는 합법의 외피를 쓴 채 3권 분립을 무력화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이었다. 계엄군의 선관위 장악 시도는 22대 총선 부정 꼬투리를 잡아 국회를 불법화하고, 해산하려는 수순으로 읽힌다. 계엄이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한국은 권위주의 퇴행 국가 명단에 추가되는 불명예를 안았을 것이다.
어쩌다 한국 대통령은 내란 수괴로 전락했을까. 불온한 일탈의 전조는 대통령의 표리부동에서 나타난다. 검찰총장 윤석열을 보수 정당의 대선 후보로 밀어 올린 건 그가 쌓은 공정과 상식 이미지 덕분이다. 권력에 돌직구를 날리면서 원칙대로 수사를 밀어붙이는 모습에 국민은 ‘효능감’을 기대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다짐은 불공정·불평등에 민감한 정서를 파고들었다.
윤 대통령의 밑천은 취임하자마자 바닥나기 시작했다. 영부인의 각종 의혹에 감싸기로 일관하면서 법 앞의 평등 원칙을 무색하게 했다. 수직적 당정 관계 고수도 국민의 눈높이를 한참 비켜 갔다. 대통령은 집권 여당에 충성을 강요하고, 친윤(친윤석열)계를 내리꽂아 쥐락펴락했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상징 자본이 무너지자 민심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국민이 대통령에 주문했던 것은 타협과 양보를 통한 민생 정치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국민을 바라보고 정치를 하지 않고 아집에 갇혔다. 야당과 이견을 좁히거나 협상을 통해 갈등을 중재하는 국민 통합의 역할도 철저히 외면했다. 국정 운영은 파행을 거듭할 뿐 성과가 날 리 없었다. 지지도는 폭락하고 특검과 탄핵 공세가 삼각파도처럼 몰아치는 한계 상황에서 끝내 폭주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헌정 파괴라는 극단적인 유혹에 빠지게 된 근저에 우리 헌법의 견제 기능 미흡을 지적할 수밖에 없는 점은 뼈아프다. 헌법은 대통령에 ‘국가 원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입법·사법부까지 통괄하는 ‘제왕적 대통령’ 노릇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셈이다. 대통령의 권한은 입법·사법부를 압도한다. 의회를 우회해서 상당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고, 사법부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군주정의 국왕 혹은 권위주의 정권의 스트롱맨에 어울리는 ‘국가 원수’는 자유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에는 없는 특별한 지위다. 제헌 헌법에 없던 ‘국가 원수’ 지위는 유신헌법에서 처음 등장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위헌적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다. 무력으로 헌정을 중단시킨 것이다. 그러고는 헌법 개정 국민투표를 실시해 유신헌법을 통과시키면서 ‘국가 원수’ 조항을 슬쩍 넣었다. 대통령이 입법·사법·행정부를 초월해 국민과 국토를 통치하는 ‘대권’(大權)을 쥐게 된 것이다.
12·3 내란이 52년 전 유신 시대를 흘러간 과거가 아닌 오늘날의 현실로 소환한 대목은 참담하다. 절대 권력의 유혹에 빠진 스트롱맨이 권좌에 앉으면 언제든 헌정 중단 사태가 재발할 수 있다는 경각심이 필요하다. 목하 분권과 지역균형발전을 내용으로 한 개헌 논의가 한창이다. 이참에 ‘제왕적 대통령’의 폐해도 손봐야 한다. 사생결단식의 정치 양극화도 ‘국가 원수’의 권능을 독차지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반대편을 처단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타협하는 정치 문법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대통령은 ‘국가 원수’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
2024-12-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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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정년 제도의 사용 연한
지난 4월 22대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300명의 평균 연령은 56.3세였다. 신중년(55~64세) 세대가 주축인 셈이다. 국회의 평균 연령은 임기 중인 3년 뒤에 일반 직장인의 법정 정년인 60세에 도달한다. 자정이 지나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예순이 되는 그날부터 갑자기 생산성이 뚝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일까. 국회의원이 60세에 접어들었다고 갑자기 활력을 잃지 않는 것처럼, 직장인들의 숙련도와 체력도 갑자기 떨어지지 않는다.
특정 나이에 이르렀다고 일자리를 떠나게 하는 제도는 합리적이지 않다. AI(인공지능)가 인간 노동을 대체하고, 수명이 늘어 100세 인생을 구가하는 시대라 더더욱 그렇다. 미국, 영국, 뉴질랜드가 정년 제도를 연령 차별로 규정하고 폐지한 이유다. 정년 제도의 사용 연한이 다했다는 인식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고령자 ‘계속고용’ 문제는 모든 선진국의 공통 현안이다. 일본에서는 ①정년 연장 ②정년 폐지 ③퇴직 후 재고용의 선택지를 줬다. 60세 정년 제도 자체는 유지한 채 자율에 맡긴 결과, ‘퇴직 후 재고용’으로 쏠렸다. 21인 이상 기업의 69.2%가 이른바 촉탁직 고용제를 도입했고, 아예 정년을 연장한 곳은 26.9%, 정년을 폐지한 기업은 3.9%로 나타났다.
한국과 같은 연공서열 임금 체계라서 고임금자를 정규직으로 유지하는 대신 비정규직으로 ‘계속고용’해서 일손 부족의 급한 불은 끄되 인건비 부담은 줄이려는 추세가 읽힌다. 반대로 영미권의 정년 폐지는 노동 유연성과 성과에 따른 연봉제가 뒷받침된 결과로 해석된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최근 고령자 ‘계속고용’에 대한 합의안을 내년 초까지 도출한다고 밝혔다. 경사노위 산하 ‘인구구조 변화 대응 계속고용위원회’에서 60세 이후에 계속 일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정년 연장 혹은 폐지, 퇴직 후 재고용 등 3가지를 논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년 연장론은 법정 정년보다 훨씬 빠른 실제 퇴직 시점과 65세 연금 개시 사이에 5년 이상의 단절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또 국민연금의 올해 월평균 급여가 59만 5520원에 불과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연금만으로는 생계난에 직면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다. 실제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1970년대까지 연간 100만 명씩 태어나다가 최근년 4분의 1 이하로 떨어져 미래 세대의 노동 시장 유입이 급감하는 사정과도 겹친다. 2차 베이비붐 세대가 현장에 더 머물러야 부족한 일손이 보충되는 한편 노인 빈곤도 해결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실제 행정안전부와 대구시가 시설관리, 경비, 미화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직 근로자 정년을 65세까지 단계적으로 연장하기로 했다. 민간 부문에서는 현대자동차 노사가 기술직 사원의 촉탁 고용을 기존 1년에서 2년으로 연장하기로 올해 단체협약을 갱신했다.
하지만 정년 연장이 만능이 아니라는 논쟁적인 지적도 있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신간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에서 인구 변화가 가져올 노동시장 불균형을 분석한 뒤 정년 연장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회복지서비스업, 운송업 등 수요가 급증할 업종과 부문은 정년의 의미가 없어진 반면, 청년 세대의 일자리가 기성세대와 달라 대체 효과가 없다는 의미에서다. 또 미래 청년 인구가 급감해도 대기업은 구인난을 겪지 않을뿐더러, 정년 연장으로 고령자까지 계속 고용할 가능성이 높다. 반면, 구인난에 시달리는 지방의 중소기업은 정년 연장의 혜택을 누리기 어려울 수 있다.
고령자 ‘계속노동’은 인구 추계와 일자리의 구조 변동, 노동 생산성 변화를 함께 분석할 때 해법이 도출될 테다. 또 ‘60세 이후’는 직장 내 연공서열형 임금 체계에 발목이 잡혀 있고, 사회적으로는 국민연금과 맞물려 있다. 업종, 부문별로 상황이 다른 점도 문제를 어렵게 한다. 과거처럼 일률적인 법 적용이 어려울 수 있다. 은퇴자를 내보내고 청년 신입사원을 뽑아야만 하는 사업장이 있는가 하면, 촉탁 재고용이 절실해진 업종이 있을 수 있다. 사회적 공론을 거치면서 업종과 부문별로 자율적인 시행착오가 불가피해 보인다.
1988년 국민연금 출범 때는 60세가 되면 연금 수급이 시작됐다. 당시 정년은 58세였다. 36년이 지난 지금도 정년 제도는 큰 틀에서는 동일하다. 고령자 ‘계속노동’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과정에 꼭 필요한 질문이 있다. 정년 제도는 여전히 유용한가. 즉,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제도인가를 밝혀야 한다. 어쩌면 해결책은 ‘정년’ 바깥에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정년 제도의 쓸모를 밝히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2024-11-0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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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일의 곰곰 생각] Z세대도 같은 뉴스를 읽는다는 착각
널린 게 뉴스인 세상이다. 반갑거나 도움이 되는 것만 있을 리가 없다. 때로는 지루하거나 귀찮고, 짜증과 화를 유발할 수도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올해 5~6월 20세 이상 3000명을 대상으로 ‘국민의 뉴스 이용과 뉴스 회피’에 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는데, 뉴스 이용자 72.1%가 뉴스가 보기 싫어 회피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이 선택적 혹은 지속적으로 뉴스를 거부하는 현상은 저널리즘이 믿음과 쓸모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걸 드러낸다.
회피 경험자는 뉴스에 야박한 감정이 있다. 뉴스를 보면 ‘스트레스를 받는다’(49.3%)거나 ‘화가 난다’(45.7%) 또는 ‘피곤하다’(42%)는 식으로 부정적 반응 일색이다. ‘정치 편향’(57.4%)이거나 ‘너무 많고, 반복적’(51.5%)인 탓이다. 이 때문에 ‘뉴스를 회피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27.9%에 불과했다. 독자가 뉴스를 기다리던 호시절은 끝났다.
이번 언론재단 조사 결과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20대, 즉 Z세대가 열심히 뉴스를 읽고 있다고 응답한 것이다. ‘뉴스를 회피한다’는 응답은 30대 76.5%, 40대 76.7%, 50대 78.3%, 60대 77.5%, 70대 이상 72.6%로 전 연령대에서 70%대 후반이었는데 비해 유독 20대는 47.3%로 큰 격차를 보였다. 20대가 뉴스를 멀리할 것이라는 통념이 깨지는 결과다. 20대의 ‘회피하지 않는다’는 응답도 무려 52.7%로 다른 연령대의 배 이상이었다. 이른바 ‘디지털 원주민’으로 불리는 Z세대의 모순된 듯한 이 응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필요한 질문이 ‘뉴스 회피’의 개념 중 뉴스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다. 예컨대 Z세대의 미디어 이용 습관을 질문하면서 레거시 미디어와 검색 포털에서 유통되는 기사만 기준으로 잡는다면 불일치가 발생할 수 있다. Z세대가 기성의 뉴스 생태계 속에 들어와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가 생각하는 ‘뉴스’는 SNS 친구의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에 올라온 사진과 영상, 해시태그를 비롯해 게임 대화방의 코멘트일 수 있다. 떠도는 정보와 저널리즘이 뒤섞여 경계가 모호해진 게 특징이다. 이들의 주 서식지인 SNS 생태계에서 ‘친구’들이 공유해 주는 소식은 정론 매체의 뉴스보다 신뢰도가 높다. 흥미와 관심 기반의 알고리즘이 더해지면 내게 도움이 되는 솔깃한 소식은 차고 넘친다. ‘친구’가 전해주는 소식은 대체로 즐겁고 도움이 되는데 굳이 회피할 까닭이 없다. 이런 이유로 ‘뉴스를 외면하지 않는다’고 응답했는데 다른 연령대와 같은 카테고리로 묶이면 곤란하다.
실제 이번 조사에 응답한 20대는 인터뷰에서 “SNS나 유튜브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고 대답했다. 파편화된 뉴스 소비 환경에서 뉴스를 편식하고 있을 공산이 크다. 20대의 낮은 뉴스 회피율을 뒤집어 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의 토끼 굴에 빠진 것처럼 만화경이 펼쳐지는 SNS 생태계를 기존 미디어 환경과 동일한 잣대로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어쩌면 ‘디지털 원주민’ 세대는 기성의 공론장을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렸다고 전제하는 것이 옳을지 모른다. 이른바 기성 담론의 바깥에 존재하는 ‘뉴스 아웃사이더’다. 이들은 기성 뉴스와 접점이 없지만, 자기네 세상에서는 다른 식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그것을 뉴스로 인식하고 있다. 공론장의 분절이다.
언론사 편집진의 견해가 담긴 뉴스를 소비하지 않거나 신뢰하지 않는 것을 회피의 범주에 넣어 해결책을 찾는 것도 당연히 필요하다. 서로 다른 견해가 경쟁하는 공론장을 통해 세상에 대한 소식을 얻지 못하는 국민이 늘어나면 여론 형성에 장애가 생기고 숙의민주주의 체제가 형해화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뉴스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20대와 어떻게 눈높이를 맞출 것인가의 과제가 추가된다. ‘뉴스 아웃사이더’가 실재하고, 또 점점 몸집이 커지고 있는 중이라면 이는 중대한 사회적 위협이다.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이야기에 벽을 치고 차단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딴 세상으로 떨어져 나가는 중이라면 방치해서는 안 된다.
우선 언론이 자초한 책임이 크다. 기존 문법과 구독자에 안주해서 미래 세대의 문법, 즉 ‘친구’의 화법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에 게을렀다. 사회적인 의제로도 다뤄야 한다. 젊은 세대의 공론장 이탈은 공동체 소속감, 연대감의 약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딴 세상에 가 있는 이들을 공론장 안으로 유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성세대가 미래 세대에 먼저 다가가야 할 책임이 있다.
2024-10-01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