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곰곰 생각] 한국인 사용 설명서
전 세계적으로 유별난 주권자 의식
지도자 도덕·능력 가혹한 수준 요구
조선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져
정부 실패 반복 국가 불행 되풀이
성공 여부는 '대통령 효능감' 입증
퇴임 때까지 국민 눈높이 유지해야
대통령이 무장 병력을 동원해 의회와 법원을 무력화하려다 자리에서 쫓겨나고, 내란 혐의로 재판에까지 넘겨졌다. 9년 만에 대통령이 다시 탄핵되다니! 지한파 외국인들조차 ‘다이내믹 코리아’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방향타를 잃은 국정, 내우외환이 겹친 경제…. ‘대통령 민폐’의 후유증은 쓰리다. 조선 시대에도 백성에 뒷감당을 떠넘긴 ‘민폐 임금’이 많았다. 한데, 신하이건 백성이건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한국인이 지도자에 들이대는 도덕과 능력의 잣대는 엄격하다 못해 가혹한 건 역사적 맥락이 있다. 임진왜란의 끄트머리 1598년 선조 시절의 일화도 그중 하나다.
조선 시대에 군주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임금의 언행이 옳지 않으면 신하들은 부지기수로 명령 불복종을 감행했다. 갑자기 선조가 온천에 가겠다며 말을 대령하라고 성화를 부렸을 때도 마찬가지다. 전란에 국토는 유린되고 백성의 삶은 피폐해졌는데 무슨 한가한 나들이인가. 게다가 민초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준다. 병력과 내관, 궁녀 등 수천 명이 이동하고 숙식하는 사이 주민이 겪는 고역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수라상에 올릴 식자재를 대느라 농사에 지장이 생기고, 군 행렬과 주둔지로 농지가 훼손되거나 땅이 징발되는 게 예사였다.
신하들은 나라가 평온해지면 가자고 읍소했지만 선조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명나라와의 외교가 중차대한 시점에 명나라 장수 응접을 신하들에게 떠맡기면서 “내가 사직을 버리고 나갔다고 전하라”는 몽니를 부리기까지 했다. 온천행을 막는 데 토라져 조회도 거부했다. 이 소동은 복마(僕馬)를 담당하는 좌의정 윤두수와 병조판서 이항복의 불복으로 매조지됐다. “직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책망을 받을지언정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나이다.” 선조는 그제서야 “말을 점고(點考)하려 했을 뿐”이라며 물러섰다. ‘임금은 도량이 조금도 없고, 명령의 앞뒤가 안 맞다. 목욕 행차에 말 준비를 재촉한 것은 이목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고, 조용히 처변(處變)하는 도리를 잃었다.’ 사관은 붓을 꾹꾹 눌러 찍어 군주의 허물을 후대에 남겼다.
왕정 시대 선조들이 이렇게 반골이었는데, 공화정의 주권자인 오늘날 한국인들은 어떻겠나. 비근한 실례가 너무 많다. 박정훈 전 해병대수사단장은 ‘채 상병 순직’ 사건을 축소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고 집단항명수괴죄 처벌을 선택했다. 12·3 계엄 때 국회에 투입된 군경은 ‘소극적 임무 수행’으로 군 통수권자의 일탈에 반기를 들며 시민의 편에 섰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저항과 부동산 정책에 실패한 문재인 정부에 등을 돌린 표심은 결이 다른 것 같지만 ‘국민정서법’으로 읽으면 동전의 양면이다. 한국인들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를 노래로 만들어 시위에서 부르기까지 한다. ‘국가는 나를 위해 복무하라’는 요구다. 이는 ‘민주주의는 민심’이라는 관념으로 발전하는데,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특유의 집단의식과 단체 행동으로 나타난다.
한국 근현대사에 민주화 투쟁 서사는 많은 반면, 국가는 폭력과 무능 등 부정적 프레임 일색이라는 지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대통령 탓’을 입에 달고 살며, 국가에 갑질하는 존재라는 인식이다. 하지만 주인 의식으로 똘똘 뭉친 한국인의 정체성을 간과해선 안 된다. IMF 구제금융 위기를 탈출하려 온 국민이 금 모으기에 동참한 일은 한국인이 ‘우리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무려 349만 명이 장롱 속 금붙이를 자발적으로 내놓은 덕분에 IMF 차입금을 3년 일찍 갚고 국난을 타개했다. 국제 금 시세보다 낮아 개인적으로는 손해라는 지적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국가 위기 극복을 위해 온 국민이 경제적 손실을 무릅쓴 사례는 동서고금에 드물다.
이 나라 사람들은 국정 최고 책임자가 잘못된 길을 가면 순종하지 않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채찍을 든다. 한국인의 의식 속에 형성된 ‘대통령 사용 설명서’에는 국민이 주인이고 대통령은 부려지는 존재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패착은 한국인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됐다. 한국인들이 기대하는 ‘대통령의 효능감’을 외면했으니 민심과 엇박자가 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한국 대통령은 극한 직업이다. 온 국민이 주권자 의식으로 무장하고 대통령에 성과를 재촉하고 있어서다.
2주 뒤면 제21대 대통령이 선출된다. 신임 대통령에 당부하고 싶다. 전 세계적으로 유별나게 주권자 의식이 뚜렷한 한국인과 눈높이를 맞추겠다는 초심을 임기 내내 잊지 말아 주시기를 바란다. 대통령의 실패로 국가적 불행이 반복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이제는 성공한 대통령을 보고 싶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