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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오페라인가, 수난곡인가? 로시니 '스타바트 마테르'
									 
										
1841년 10월 31일, 로시니(1792~1868)의 걸작 ‘스타바트 마테르’ 개정판이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스타바트 마테르’는 ‘슬픔의 성모’ 또는 ‘성모 애가’로 번역되는 기독교의 오래된 시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을 떠날 때 곁에서 지켜보는 어머니의 심정을 담은 내용이다. 누구보다 정의롭고 따뜻하고 지혜롭던 아들이, 점령군에게 잡혀 십자가형을 당하며 죽어가는데, 그것을 아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머니가 있다. 종교적인 믿음을 떠나서라도 이 장면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슴 아픈 풍경일 것이다. 그래서 13세기부터 ‘스타바트 마테르’라는 제목으로 음악을 작곡했고, 특히 기독교의 수난절에 많이 연주했다. 그중에서도 페르골레시, 비발디, 보케리니, 드보르자크, 코다이 작품과 함께 불멸의 명곡 반열에 올라선 작품이 로시니가 만든 ‘스타바트 마테르’다.
이 곡은 로시니가 음악계에서 은퇴한 후에 만든 작품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37세가 되던 1829년 오페라 ‘기욤 텔’을 초연한 후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로시니는 맛있는 요리를 찾아다녔다. 그는 이런 말을 남긴 적 있다. “나는 평생 세 번 울었다. 첫째는 첫 오페라가 실패했을 때였고, 두 번째는 파가니니의 연주를 들었을 때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뱃놀이하다가 점심으로 준비한 칠면조 요리를 물에 빠트렸을 때였다” 그는 진정한 탐식가이자 미식가였고 요리 연구가이기도 했다. 당대의 유명한 요리사치고 로시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인 1831년에 스페인의 고위 성직자인 페르난데스 바렐라가 로시니에게 막대한 금액을 제시하면서 작곡을 의뢰했다. 로시니는 원래 마감 기한을 미룰 대로 미루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 곡을 의뢰받고서도 계속 게으름을 피우다가 결국 여섯 부분만 작곡하고, 나머지는 다른 작곡가에게 맡겨 발표했다. 이후 1841년에 정식 출판을 하기 위해 작곡을 보충하고 이듬해인 1842년 오늘, 파리에서 초연했다.
논란이 된 부분은 제2곡인 ‘cujus animam’(탄식하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기존 ‘스타바트 마테르’에선 전혀 볼 수 없던 오페라 아리아풍의 곡을 삽입해 놓았기 때문이다. 워낙 명성이 자자한 로시니였으니 망정이지, 평범한 작곡가였다면 욕만 잔뜩 먹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 특별한 곡은 테너들의 기량을 보여주는 명곡이 되어 독립적으로 무대에 오르는 일이 많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등이 잘 부르던 곡인데, 오늘은 1982년 팔레르모에서 태어난 테너 파올로 파날레의 리허설 장면으로 준비했다.
									 
										2025-10-30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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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죽기 전에 고른 곡, 쇼팽의 발라드 1번
									 
										오늘은 위대한 피아니스트 쇼팽(Frederic Chopin, 1810~1849)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태어난 날보다 떠나간 날이 더 마음이 쓰이는 작곡가가 있다. 주로 모차르트, 슈베르트, 멘델스존, 쇼팽처럼 일찍 세상을 떠난 경우가 그렇다. 쇼팽은 영국 연주 여행을 하는 동안 가뜩이나 좋지 않던 건강이 치명적으로 나빠졌다. 1849년 10월 17일 새벽에 쇼팽은 서른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죽어가면서 자신의 심장을 고국 폴란드에 묻어달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사실 쇼팽은 스무 살에 폴란드를 떠나온 뒤 죽을 때까지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평생 이방인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던 자신의 그리움과 아픔을 담아 폴로네즈, 마주르카 같은 곡을 썼다. 그래서 슈만은 쇼팽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속에는 특별하고 강력한 민족주의가 있다. 만약 러시아 황제가 쇼팽의 곡에 얼마나 위험한 발톱이 있는지 알았더라면, 분명히 그 음악을 금지했을 것이다. 쇼팽의 작품은 장미 속에 숨겨진 대포다!”
쇼팽의 가족은 그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심장을 따로 빼서 알코올에 보관해 두었다. 10월 30일 파리 마들렌성당에서 장례식이 치러지고 쇼팽의 몸은 파리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다. 그리고 이듬해인 1850년에 누나 루드비카가 동생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심장을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져가 성십자가성당에 안치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이야기 아닌가.
쇼팽이 남긴 네 곡의 발라드에도 이러한 민족주의 정신이 잘 나타난다. ‘폴란드의 영혼’이라 불리는 시인 미츠키에비치의 시에 자유로운 상상력과 굴곡진 이야기를 담아놓았다. 그중에서도 발라드 1번이 가장 사랑받고 있는데,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2002년 영화 ‘피아니스트’가 생각난다.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바르샤바에서 활동하던 유대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은 폐허가 된 건물 속에서 숨어 지내다가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된다. 너는 뭐 하는 사람이냐는 장교의 질문에 슈필만은 대답한다. “저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마침 그 집에 낡은 피아노가 한 대 있었고, 장교는 슈필만에게 피아노를 쳐보라고 한다. 어쩌면 삶의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얼어붙은 손을 비비며 그가 선택한 곡이 쇼팽의 발라드 1번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내게 죽기 전에 단 한 곡을 노래하라면 나는 무슨 곡을 부를까? 아마도 나는 이것저것 고르다가 빨리 결정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총을 맞았을 것 같다.
									 
										2025-10-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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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와 바이올린
									 
										아일랜드의 국민 시인이라 불리는 토머스 무어는 1805년 초가을에 젠킨스타운 공원을 거닐다가 마지막으로 매달려있는 장미 한 송이를 보게 되었다. 애처로운 그 모습과 시간의 무심함을 담아 시를 썼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홀로 피어있네. 곱디고운 친구들 모두 시들어 사라져버렸네. 한때 친구이던 꽃도 없고 꽃망울조차 볼 수 없네. 붉게 빛나던 시절을 그리며 그저 한숨을 쉬고 또 쉴 뿐이네…. 이윽고 나 또한 그들을 따라가리니. 오! 이 황량한 세상에 누가 홀로 머무르려 하랴!”
무어의 시는 낭만주의 시대에 큰 인기를 얻었고, 아일랜드 민속 멜로디에 실려 19세기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은 노래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자 클래식 작곡가들도 이 노래를 편곡하거나 변주했다. 멘델스존의 피아노를 위한 판타지 작품15에서 이 선율을 들을 수 있다. 결정적으로는 1847년 프리드리히 폰 플로토가 만든 오페라 ‘마르타’에서 여주인공 마르타가 부르는 아리아로 쓰이면서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체코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하인리히 빌헬름 에른스트(Heinrich Wilhelm Ernst, 1751~1829)도 이 노래를 주제로 한 바이올린 곡을 작곡해서 자신의 명성을 알렸다. 에른스트는 단순한 민속 선율을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초절 기교 변주곡으로 편곡했다. 주제선율이 나온 후 6개의 변주가 이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더블 스톱, 왼손 피치카토, 하모닉스 등 바이올린의 각종 테크닉을 화려하게 선보이는 난곡이다.
에른스트는 오늘날 체코의 땅 모라비아에서 태어난 유태계 바이올리니스트다. 빈음악원에서 요제프 뵘과 요제프 마이세더에게 배웠고, 일찌감치 탁월한 바이올린 실력을 자랑했다. 그러던 중 1828년에 빈을 방문했던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는 파가니니의 뒤를 잇는 명인이 되기 위해 미친 듯이 연습했다. 심지어 파가니니 연주회를 따라다니며 그가 묵던 숙소 옆에 방을 잡고서 훔쳐 들으며 주법을 연구했다고 한다. 그 결과 파가니니와 함께 무대에 오르는 영광을 누렸으며, 그를 잇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평가를 얻었다.
1844년에 런던으로 이주하여 요제프 요아힘, 헨릭 비에니아프스키, 카를로 피아티와 함께 베토벤 현악4중주단을 결성하여 활동했고, 이후에는 프랑스 니스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곡 외에 ‘엘레지’ ‘오텔로 환상곡’ ‘론도 파파게노’ 등 멋진 바이올린 곡을 남겨놓았다.
인생도 계절도 뜨겁던 한 시절을 보내고 서늘하게 반추하는 시기를 맞게 된다. 그럴 즈음에 시와 함께 들어볼 만한 곡이다.
									 
										2025-10-0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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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누구나 좋아한다는 그 곡, 치고이너바이젠
									 
										1840년에 파가니니가 세상을 떠났다. 바이올린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과 바이올린으로는 불가능하다던 모든 것을 보여준 파가니니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과연 누가 그 뒤를 이어갈지 궁금해했다. 1820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앙리 비외탕, 1831년 헝가리 출신의 요제프 요아힘, 1835년 폴란드의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1838년 벨기에의 외젠 이자이 같은 사람이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1844년 스페인에서 그 누구보다 강력한 테크닉으로 무장한 파블로 사라사테가 태어났다.
사라사테는 어려서부터 바이올린 신동으로 유명했다. 10세 때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 앞에서 연주회를 했는데, 그의 연주에 감동한 여왕은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선물했다. 스페인 왕실의 후원을 받게 된 그는 파리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공부했고, 17세 되던 1860년에 파리 데뷔 연주회를 했다. 그 후로 세계를 순회하며 연주회를 이어갔다.
그의 연주회는 정말이지 파가니니가 다시 태어난 듯한 분위기였다. 사라사테의 연주를 들은 작곡가 랄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스페인 교향곡’을 작곡해서 그에게 헌정했고, 브루흐는 바이올린 협주곡 2번과 ‘스코틀랜드 환상곡’을 헌정했다. 생상스는 그의 연주를 듣고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 이상의 것을 들려준다”라고 감탄하면서 바이올린 협주곡 3번과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를 헌정했다. 사라사테 자신이 작곡한 곡도 많다. ‘카르멘 환상곡’ ‘서주와 타란텔라’ ‘스페인 무곡집’ ‘나바라’ 등은 지금도 널리 연주되는 곡이다.
‘치고이너바이젠’(Zigeunerweisen, Op. 20)은 ‘집시의 선율’이라는 뜻이다. 사라사테가 헝가리 지방을 여행할 때 들은 집시 멜로디를 바탕으로 만든 곡으로, 1878년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되었다. 매우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도입부가 귀를 사로잡는다. 이어 집시 특유의 애상에 잠긴 전개부, 그리고 정열적이다 못해 관능적인 결말부로 구성되었다. 즉흥적인 장식음, 선율의 자유로운 곡선, 불규칙한 박자의 혼합, 옥타브 도약, 강약 대비 등에서 집시적인 요소가 잘 나타난다.
사라사테는 1908년 9월 20일 프랑스 비아리츠에서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고, 자식도 없었다. 스타에게 흔히 따라다니는 스캔들이나 연애 이야기도 찾을 수 없다. 그저 연습과 연주가 삶의 모든 것이었다. 언론이 ‘바이올린의 천재’로 묘사하며 환호했지만, 정작 사라사테 자신은 그런 평가에 대해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나는 지난 37년 동안 하루 14시간씩 연습해 왔다. 그걸 모르고 사람들은 그저 나를 천재라고 한다.”
									 
										2025-09-1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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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에이미 비치, 미국 여성 최초의 교향곡 작곡가
									 
										19세기 중반에 태어나 20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여성 작곡가 중에는 프랑스의 멜라니 보니스, 릴리 불랑제, 그리고 미국의 에이미 비치, 플로렌스 프라이스 같은 탁월한 인물이 있었다. 1867년 9월 5일, 뉴햄프셔에서 태어난 에이미 비치(Amy Beach, ~1944)의 원래 이름은 에이미 마시 체니였다. 피아니스트이자 성악가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음악을 접하며 자랐다.
그녀 역시 모차르트나 생상스 같은 천재들에게 따라다니는 전설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다. 세 살 때 악보를 보고, 다섯 살에 왈츠를 작곡했다고 하니 말이다. 피아노 실력도 마찬가지였다. 8세부터 보스턴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배웠고, 16세에 직업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며, 18세인 1885년 보스턴심포니 협연으로 모셀레스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공식 데뷔했다.
그러나 스물네 살 연상 외과 의사와 결혼한 후에는 혼자서 작곡만 할 수 있었다. 남편은 아내가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편은 1년에 2회로 연주회를 제한했고, 다른 사람과 같이 공부하거나 레슨을 받을 수 없다는 단서 조항을 걸었다. 말도 안 되는 조항이지만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그 정도로 편협했다. 그녀는 거의 독학으로 작곡 실력을 쌓다가, 1890년 보스턴에서 미사곡을 발표하면서 음악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29세 되던 1896년에는 ‘게일 교향곡’을 발표해서 보스턴심포니가 초연했다. 당시에 미국에 와있던 드보르자크가 흑인 영가와 인디언 선율을 차용하여 9번 교향곡 ‘신세계에서’를 선보이자, 비치는 “나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이니 아일랜드 선율로 미국 교향곡을 쓰겠다”라고 하며 게일 교향곡을 완성했다. 이 곡은 미국 여성 작곡가로선 최초의 교향곡이었다.
1910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본격적으로 피아니스트 활동을 시작했고 작품도 왕성하게 발표했다. 1925년엔 미국 여성 작곡가협회 초대 회장이 되었다. 그녀는 150여 곡의 가곡을 남겼을 정도로 시와 노래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그 외에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 오페라, 피아노 독주곡 등 다양한 구성으로 300여 곡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가장 자주 무대에 오르는 에이미 비치의 작품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로망스 작품23’일 것이다. 26세이던 1893년에 만든 3부 형식의 곡이다. 부드러운 피아노의 화음 위에 바이올린이 조용히 고백을 시작하다가 점차 감정이 고조된다. 격정을 토로한 후 다시 감정을 가라앉히며 포옹으로 마무리한다. 짧지만 아름다운 한편의 낭만적 서정시를 읽은 듯, 따뜻한 울림이 남는다.
									 
										2025-09-0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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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폴란드의 비르투오소, 모슈코프스키의 불꽃
									 
										연주자에겐 피할 수 없는 작곡가이지만, 일반인에게 낯선 작곡가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피아노의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 바이올린의 로돌프 크로이처, 첼로의 장 루이 뒤포르, 클라리넷의 루이 슈포어 같은 사람이다. 음악 전공생들의 입시 곡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이름이지만 실제 연주장에서 무대에 오르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1854년 8월 23일에 태어난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모리츠 모슈코프스키(Moritz Moszkowski, 1854~1925)도 그런 쪽으로 분류되는 사람이다.
내가 모슈코프스키의 곡을 처음 들은 것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전설적인 모스크바 콘서트 실황음반이 발매되었을 때였다. 1986년, 호로비츠가 서방으로 망명한 지 무려 61년 만에 다시 고국 무대에서 연주회를 하게 된 기념비적 음반이다. 스카를라티와 모차르트의 소나타로 시작하여 라흐마니노프, 스크랴빈, 슈베르트, 리스트, 쇼팽까지 연주한 후, 앙코르곡으로 그 유명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들려주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청중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 곡을 들었다. 그리고서 두 번째로 친 앙코르곡이 바로 모슈코프스키의 ‘에탕셀’(Etincelles)이었다. 제목처럼 마치 불똥이 튀는 것 같이 리드미컬한 스타카토가 빛나는 곡이다. 당시 83세의 호로비츠는 “요런 곡도 있지요” 하듯 매끄럽게 연주를 마치고서 활짝 웃었다.
피아니스트 얀 파데레프스키는 모슈코프스키를 “쇼팽 이후에 피아노곡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모슈코프스키는 쇼팽보다 44년 후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73년에 피아니스트 데뷔 무대를 가졌고 이어 유럽 투어를 하면서 과 파리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블라도 페를레뮈테르, 토머스 비첨, 요제프 호프만, 반다 란도프스카와 같은 훌륭한 제자를 배출했다.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였고, 작곡가이자 교수였던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서 54세에 은퇴했고, 이후 차츰 잊혀 갔다. 투자에 실패하면서 경제적으로도 몰락해 힘든 말년을 보내다가 위암으로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밝으면서도 서정적이다. 특히 200여 곡의 피아노 소품으로 사랑받았는데, 이 중에는 지금도 입시 단골 곡이라는 ‘비르투오소 연습곡 작품72’를 비롯해 ‘5개의 스페인 춤곡 작품12’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외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관현악 모음곡, 2대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작품, 교향시 ‘잔다르크’, 오페라 ‘마지막 무어왕 보압딜’, 발레음악 ‘라우린’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2025-08-21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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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살롱음악의 마지막 그림자, 세실 샤미나드
									 
										“여자가 작곡하는 건 마치 개가 뒷다리로 걷는 것과 같다더군….” 세실 샤미나드는 여성 작곡가의 처지를 이렇게 비교하며 한숨지었다. 음악사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목받지 못한 작곡가들이 많다. 중세 시대의 작곡가 힐데가르트 폰 빙엔, 바로크 시대 프란체스카 카치니, 바바라 스트로치, 그리고 모차르트의 누이인 난넬과 멘델스존의 누이 파니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근대에 들어서도 여성이 직업음악가가 되는 길은 여전히 험난했다. 1857년 8월 8일, 파리에서 태어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활동한 세실 샤미나드(Cecile Chaminade, 1857~1944)에게도 힘든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8세 때 작곡한 악보를 본 조르주 비제는 세실을 “나의 작은 모차르트”라고 칭찬하면서 파리음악원에 입학시키라고 부모에게 말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아버지는 여성이 음악을 하는 것을 반대했고, 그 때문에 음악원에 들어가지 못한 세실은 비제와 고다르에게 개인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18세 되던 해에 첫 콘서트를 열었고, 유럽을 돌며 자신의 길을 개척했다.
여성 작곡가를 턱없이 무시하던 환경에서 그가 선택한 분야는 아기자기한 피아노 음악이었다. 당시엔 피아노가 대중화되면서 아마추어 연주자가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소품들 일명 ‘살롱음악’이 유행했는데, 세실의 음악은 이 분야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그의 음악을 좋아해서 직접 윈저궁에 초대해 연주를 들었다. 1913년에는 교황이 수여한 성 요한 훈장을 받았고, 이어 여성 작곡가로서는 최초로 레종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영국과 미국에선 각지에 ‘샤미나드 클럽’이 생길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그의 카네기홀 공연은 금세 매진되었고, 루즈벨트 대통령이 별도로 백악관에 초청해서 연주를 들었을 정도였다.
대중은 그를 좋아했지만, 비평가나 음악계에선 반응이 신통찮았다. 특히 1차 세계대전 이후 음악계가 실험적인 음악과 대중음악으로 양분되면서 그의 인기는 시들해지고 살롱음악은 과거의 유물로 잊혀갔다.
그는 약 350개의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피아노 소품이나 바이올린, 플루트를 동반한 소품이 매력적이다.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는 ‘스카프 댄스’, 6개의 연주회용 연습곡에 나오는 ‘가을’, 6개의 멜로디 중 ‘아랍풍의 자장가’ 등이 사랑스럽다. 플루트 입시 과제곡으로 유명한 ‘플루트를 위한 콘체르티노’는 그가 1902년에 파리음악원 입시곡으로 출품한 작품이다. 세실 샤미나드의 대표곡 중 하나이며, 여름밤에 옷과 자세를 다 풀어놓고 멍하니 듣기 좋은 음악이다.
									 
										2025-08-07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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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시마노프스카, 쇼팽 이전의 녹턴
									 
										7월 25일은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마리아 시마노프스카(Maria Szymanowska, 1789~1831)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그녀는 마치 클라라 슈만이 그랬던 것처럼 탁월한 여성 작곡가이며 천재적인 피아니스트였다. 쇼팽보다 앞서 녹턴과 폴로네이즈를 작곡한 사람이고, 가장 먼저 암보로 연주한 피아니스트였다. 괴테가 그녀의 연주를 듣고선 당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훔멜보다도 뛰어나다고 극찬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바르샤바에서 양조업자의 딸로 태어난 시마노프스카는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유제프 엘스네르, 프란치세크 레셀, 카롤 쿠르핀스키 등 최고의 폴란드 음악가에게서 개인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학생이었지만 바르샤바음악원에는 입학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남학생에게만 입학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마리아는 1810년에 파리로 가서 독주회를 가졌다. 이 독주회에서 그녀의 연주를 들은 작곡가 케루비니는 존경의 표시로 판타지 C장조를 헌정했다.
그러나 당시의 여성에게 최고의 미덕으로 강요되는 것은 결혼이었다. 그 완고한 벽을 뛰어넘을 수 없어서 폴란드로 돌아온 마리아는 부유한 지주와 결혼했다. 세 아이를 낳아 길렀지만, 남편은 그녀가 공개 석상에서 연주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결국 어떤 보상도 받지 않는 조건으로 이혼하고서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며 연주 생활을 이어나갔다.
여성, 이혼녀, 어머니라는 모든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연주회에서 악보를 보지 않고 외워서 진행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암보로 연주하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그녀의 연주회는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시마노프스카의 뒤를 이어 클라라 슈만이나 리스트도 암보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쇼팽, 리스트, 슈만 같은 동시대의 음악가들이 모두 그녀에게 찬사를 보냈다. 작곡가 훔멜도 시마노프스카에게 자신의 곡을 헌정했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공주를 가르치는 궁정음악가로 초빙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인도에서 시작하여 유럽까지 번진 콜레라가 그녀를 덮쳤고, 시마노프스카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42세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
약 100곡의 피아노 음악을 남겨 놓았는데, 그중에는 연습곡, 전주곡, 로망스, 마주르카, 폴로네이즈, 녹턴 등 서정적인 살롱풍의 음악이 많다. 흔히 쇼팽의 전유물처럼 생각되는 영역을 한 시절 전에 개척해나간 여인, 시마노프스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2025-07-24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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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거슈윈, 경계에 선 음악
									 
										1937년 초에 거슈윈(George Gershwin, 1898~1937)은 어디선가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어 두통과 환각 증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의사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 문제라고 진단했고, 나중에서야 그것이 뇌종양인 줄 알아냈다. 그해 여름인 7월 9일에 거슈윈은 악보 작업을 하다가 쓰러져서 혼수상태에 빠졌다. 3일 후인 7월 11일에 종양 제거 수술을 받지만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불과 39세의 삶이었다.
거슈윈이 활동하던 시대는 1·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있었고, 금주법 시대와 대공황 시대가 겹치는 격동기였다. 그리고 음악사적으로 보면 재즈가 탄생한 시기이기도 했다. 역사 속에서 항상 소수자이던 유색인종의 음악이 주류 사회에 들어오는 때였다. 거슈윈은 백인이지만 그 역시 러시아 유대계의 피를 받은 이민자의 자식이었다.
거슈윈은 자신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음악은 그 시대와 사람들에 관해 얘기해야 한다. 내게 있어 사람들은 미국인이며 나의 시대는 현재다.” 그는 자신이 처한 시대와 주위 사람의 정서를 대변하는 음악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재즈였다. 재즈와 클래식의 결합을 통해 정말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했다.
거슈윈은 15세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서 브로드웨이 근처의 작곡가와 출판사들이 모여있는 지역, 이른바 ‘틴 팬 앨리’(Tin Pan Alley)로 갔다. 음악 출판사에 피아노 주자로 취직한 그는 파퓰러 음악 작곡가 생활을 시작했다. 거슈윈이라는 이름이 유명해진 첫 번째 곡은 21세에 작곡한 노래 ‘스와니’다. 이 곡의 악보가 백만 장 이상 팔리면서 그의 인생은 역전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자신의 음악 세계를 만들어냈다. 1924년 화이트먼의 밴드를 위해 작곡한 ‘랩소디 인 블루’가 엄청난 히트를 거두면서 그의 이름을 미국 전역에 알렸다. 이어 ‘피아노협주곡 F장조’가 호평을 받았고, 관현악곡 ‘파리의 미국인’으로 인기를 더했다. 그는 미국 사교계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1931년엔 ‘그대를 위해 부르리’라는 뮤지컬로 퓰리처상을 받았고, 1934년엔 오페라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여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졌다.
오늘 소개하는 ‘3개의 전주곡’은 원래 쇼팽이나 쇼스타코비치처럼 24개로 된 전주곡 세트로 계획했던 곡이다. 그러나 바쁜 일정 때문에 이어가지 못하고 1926년에 3개로 묶어 출판했다. 비록 짜임새 있는 세트는 아니지만, 거슈윈이 접목하고 싶어 한 블루스의 모티브와 재즈의 기운이 넘쳐흐른다. 피아노뿐 아니라 바이올린, 첼로, 클라리넷 등 다양한 악기로 편곡 연주되는 곡이기도 하다.
									 
										2025-07-1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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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리처드 로저스, PEGOT의 전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중에 나오는 명곡 ‘내가 좋아하는 것들’(my favorite things)의 가사는 “장미꽃에 맺힌 빗방울과 아기 고양이의 수염”(Raindrops on roses and whiskers on kittens)이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일상을 채우는 작고 귀한 것들을 나열한 후 “개에게 물리거나, 벌에 쏘이거나, 아무튼 슬퍼질 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면 슬픔이 사라지지”라고 맺는다. 왈츠풍의 음악이 우중충한 마음을 통통 튕겨서 구름 속으로 날려 보내는 듯하다.
이 음악을 쓴 사람은 1902년 6월 28일에 태어난 미국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Richard Rodgers, 1902~1979)였다. 43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작곡했고, 900개가 넘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는 텔레비전, 영화, 음반, 브로드웨이 할 것 없이 전 분야의 쇼 비즈니스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미국 문화계의 그랜드슬램 격인 에미상, 그래미상, 오스카상, 토니상을 모두 수상한 사람들을 ‘EOGT 클럽’이라 부르는데, 리처드 로저스는 여기에다 퓰리처상까지 받아 미국 최초로 ‘PEGOT’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다.
리처드 로저스의 곁엔 두 명의 천재적인 작사가가 있었다. 첫 번째 인물이 로렌츠 하트였고, 두 번째 인물이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였다. 세 사람은 모두 컬럼비아대학에서 공부했다. 하트와 ‘블루문’ ‘나의 사랑스런 발렌타인’ 같은 스탠더드 명곡을 만들었지만, 나중에 하트가 알코올 중독에 빠져 대본을 쓰기 힘들어졌다.
그때 나타난 사람이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다. 두 사람은 1943년에 만든 첫 작품 ‘오클라호마’로 뮤지컬 역사의 한 획을 그었다. 이어 1945년 ‘회전목마’, 1949년에 퓰리처상에 빛나는 ‘남태평양’, 1951년 ‘왕과 나’로 연이은 성공을 거뒀다. 그리고 1959년에 만들어낸 것이 바로 ‘사운드 오브 뮤직’이다. 그들은 총 35개의 토니상과 함께 15개의 아카데미상, 2개의 퓰리처상, 2개의 그래미상, 2개의 에미상을 받았다.
1965년에 로버트 와이즈 감독이 줄리 앤드류스를 기용하여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판을 만들었는데, 이 영화는 이듬해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편집, 편곡, 녹음의 5개 분야를 수상했다. 오늘 추천한 영상은 2015년 영국 BBC Proms 축제의 마지막 밤 콘서트를 담은 것으로, 소프라노 다니엘레 드 니스가 영화 속 마리아의 노래를 멋지게 이어 부른다.
한국의 소극장 뮤지컬로 시작한 ‘어쩌면 해피엔딩’이 올해 토니상 6개 부문을 수상해서 화제가 되었다. 로저스의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한국 창작 뮤지컬도 세계인의 무대로, 영화로, 콘서트로 이어질 것이라는 즐거운 상상을 해 본다.
									 
										2025-06-26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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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스트라빈스키, 음악계의 카멜레온
									 
										피아니스트들이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다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곡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리스트 ‘마제파’, ‘메피스토 왈츠’, 발라키레프 ‘이슬라메이’, 라벨 ‘‘밤의 가스파르’ 같은 곡이 그런 식으로 악명을 날리는 곡이다.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의 피아노 버전 ‘페트루슈카’도 이 대열에 끼는 곡이다.
스트라빈스키의 국제적인 명성은 세르게이 댜길레프와 만나면서 시작된다. 댜길레프는 1909년 파리에서 ‘발레 뤼스’(Ballet Russe)를 창단하여 미하일 포킨의 안무로 ‘세헤라자데’를 공연, 유럽 무용계의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최고의 러시아 무용수들을 기용한 댜길레프는 자신의 무용 혁명을 받쳐줄 음악가로 스트라빈스키를 점찍는다. 1910년 스트라빈스키의 첫 번째 발레 음악 ‘불새’가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었고, 이듬해 ‘페트루슈카’가 뒤를 이었다. 이 두 편의 발레로 댜길레프 사단과 스트라빈스키는 유럽에서 첨예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1913년 ‘봄의 제전’으로 결정타를 날리게 된다.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110여 곡의 작품을 남기고 8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한 가지 사조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오르페우스 신화와 페르골레시, 바흐의 음악, 더하여 재즈, 탱고, 집시 음악, 심지어는 12음 음악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악적 소재를 받아들였다. 언론은 그를 두고 ‘음악의 혁명가’ 또는 ‘카멜레온 음악가’로 표현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 자신은 “나를 혁명가라고 부르지 말길 바란다. 관습을 깨트리는 사람에게 모두 혁명가라는 딱지를 붙인다면, 자기 할 말을 하기 위해 공인된 울타리 밖으로 나가는 예술가는 누구나 혁명가이지 않겠는가?”라고 멋진 말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는 1830년대 러시아 슈로브타이드 축제 기간을 배경으로, 사람이 아니라 인형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못생긴 인형 페트루슈카는 발레리나를 사랑하지만, 발레리나는 용감한 무어인 인형을 사랑하면서 삼각관계의 갈등이 벌어진다. 알렉상드르 브누아가 시나리오와 무대장치를 맡고, 안무는 미하일 포킨, 페트루슈카 역은 바츨라프 니진스키, 그리고 지휘는 피에르 몽퇴가 맡았다.
1921년 스트라빈스키는 이 발레 음악에서 세 곡을 뽑아 피아노 독주를 위한 모음곡으로 출판했고, 이를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에게 헌정했다. 1곡 ‘러시안 댄스’, 2곡 ‘페트루슈카의 방’, 3곡 ‘사육제’로 구성되었다. 악명높은 난곡이지만, 테크닉이 받쳐주는 연주자를 만나면 더할 수 없이 맛깔스러운 음악이 된다.
									 
										2025-06-1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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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세상의 모든 아침을 위하여
									 
										“나는 아무것도 작곡한 적이 없어. 내 음악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어떤 이름, 즐거운 날들의 회상, 비에브르 강을 흐르는 물, 강가의 개구리밥, 쓰디쓴 쑥,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와 꿀벌, 그런 것들이 내게 가져다주는 선물일 뿐이지.” 알랭 코르노 감독의 ‘세상의 모든 아침’이라는 영화에서 생트 콜롱브는 제자가 된 마랭 마레에게 이렇게 가르침을 준다.
흔히 고음악으로 분류되는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클래식 초보자에겐 아득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비발디, 바흐, 헨델 정도? 조금 더 간다면 스카를라티, 몬테베르디, 퍼셀 정도를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명인은 수없이 많이 있다. ‘태양왕’으로 불리던 루이 14세 시절, 프랑스에 살았다는 생트 콜롱브와 마랭 마레라는 음악가 역시 프랑스를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겐 ‘남쪽물고기자리 알파별’ 정도로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파스칼 키냐르의 소설을 영화화한 ‘세상의 모든 아침’이 나오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1992년 세자르상 7개 부문을 휩쓴 이 작품은 개봉 첫해 프랑스에서만도 200만 장의 티켓이 팔렸다. 영화의 명성이 조용히 번져가면서 고전-낭만주의 음악에 치우쳐 있던 음악 감상이 바로크음악 붐으로 이어졌다. 영화에 사용된 고음악은 CD로 발매되어 전 세계적으로 300만 장 넘게 팔렸고 지금까지도 계속 재발매되고 있다. 음악을 맡은 고음악 연주자 호르디 사발 역시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다.
초야에 묻혀 비올라 다 감바를 연주하던 생트 콜롱브에게 구두 수선공의 아들 마레가 찾아와 음악 배우기를 청했다. 몇 번의 거절 끝에 생트 콜롱브의 제자가 되었지만, 출세에 목적이 있는 마레는 스승을 버리고 화려한 궁정 악사의 길로 뛰어들었다. 그는 당시 음악계 최고의 권력자인 장 바티스트 륄리의 눈에 들어 왕립오케스트라 단원이 된 후, 륄리가 죽으면서 직책을 이어받아 음악계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당시로선 드물게 72세까지 살면서 500여 곡의 음악을 작곡했다. 마레는 19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아이들에게도 음악을 가르쳐 차례로 악장직을 맡게 했다.
‘성 주느비에브 성당의 종소리’는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왕실의 화려한 옷을 입은 마랭 마레의 모습과 함께 흘러나오는 곡이다. 늙은 마레는 단원들에게 이 곡을 가르치면서 스승이 가르쳐준 진실된 음악의 길을 떠올리게 된다. “태양이 떠오를 때마다 아침은 오지만, 한 번 지나간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라는 멋진 말이 위대한 음악과 어우러진 명작이었다.
									 
										2025-05-29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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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자신의 발등을 찍은 지휘자와 '파사카유'
									 
										장 밥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 1632~1687)는 바로크 시대 프랑스 음악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음악가였다. 궁정 작곡가가 된 륄리는 당시 15세이던 루이 14세가 아폴론 신으로 출연하는 ‘밤의 발레’를 작곡하여 총애를 받았다. 이 곡으로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고, 륄리는 그때부터 ‘왕의 남자’가 되었다. 왕은 화려한 연회와 예술을 정치적 선전도구이자 통제 수단으로 활용했고, 륄리는 충직하게 이를 뒷받침해주었다.
1661년 5월 16일, 륄리는 왕실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고 그때부터 프랑스 음악의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는 작곡가이자, 연주자, 무용가로 활동했다. 예술적인 재능과 노력도 탁월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아첨 실력과 권모술수를 겸비하였기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식 오페라가 아니라 프랑스 특유의 ‘서정 비극’ 양식을 확립했으며, 프랑스 발레의 기본 구조를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프랑스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극작가 몰리에르와 함께 코미디 발레 ‘서민 귀족’ 등을 완성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왕으로부터 프랑스 오페라 제작의 독점권을 따내 전무후무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오페라를 올릴 수 없었다.
륄리는 왕의 전속악단에서 길고 화려한 지팡이로 바닥을 치며 박자를 맞추는 지휘를 했다. 이런 식으로 지휘봉을 휘두른 사람은 륄리가 처음이었다. 어느 날, 루이 14세가 병에서 회복한 것을 기념하고자 ‘테 데움’을 지휘하던 륄리는 지팡이로 자기 발등을 내려찍는 바람에 큰 상처가 생겼다. 상처 부위가 괴사하기 시작하자 의사는 발가락을 잘라내야 한다고 했다. 륄리는 그러면 춤을 출 수 없게 된다며 수술을 거부했고, 그 때문에 파상풍이 악화하여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권력의 어이없는 말로였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 ‘왕의 춤’이 루이 14세와 륄리, 몰리에르의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의 첫 장면이 바로 륄리의 지팡이 사고로 시작했다.
‘파사카유’(Passacaille)는 륄리가 세상을 떠나기 한해 전, 권력의 최정상에 있던 시절인 1686년에 초연된 오페라 ‘아르미드’ 5막 1장에 삽입된 춤곡이다. 파사카유는 스페인에서 생겨난 춤곡 ‘파사칼리아’가 프랑스로 흘러들어와 발레 춤곡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 후 이 춤곡은 바로크 시대 기악 모음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악 합주곡으로 연주하면 장엄하고 흥겨운 맛이 나지만, 피아노나 기타로 편곡된 곡을 들으면 꿈꾸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곡이다.
									 
										2025-05-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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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음악이 소환해준 풍경, '소녀의 기도'
									 
										대만의 문화에 대한 칼럼을 검색하다가 제목 하나가 눈에 확 들어왔다. “소녀의 기도-우리의 모든 쓰레기를 버리라는 부름”이었다. 가오슝의 청소차가 ‘소녀의 기도’를 울리며 나타나면 너도나도 쓰레기를 들고 모여든다는 내용이었는데, 아니 이럴 수가! 십수 년 전 한국에서도 똑같은 풍경이 있지 않았던가. 그 곡이 들리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쓰레기를 버려야 했다. 어쩌다 늦게 나서면 “아저씨. 기다려요!” 하면서 슬리퍼를 끌고 뛰어가야 했다. 음악은 그렇게 추억을 소환해준다.
‘소녀의 기도’는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테클라 봉다제프스카-바라노프스카(1834~1861)의 작품이다. 우리에겐 독일식 표기인 바다르체프스카로 알려졌다. 어떤 자료에는 1829년생 또는 1838년생으로 되어 있기도 한데, 죽은 해는 똑같은 1861년이니 많아야 32세, 적게 잡으면 2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말이 된다. ‘소녀의 기도’는 1856년에 출판한 소품으로 작품번호 4번이다. 그 외에도 다수의 피아노 소품을 남겼지만 다른 것은 모두 잊히고 오직 이 곡만 유명하다. 한국과 대만의 쓰레기차에서도 울리고, 일본 신칸센 열차가 출발할 때도 울리고, 학교에선 수업시간이 끝났을 때도 흘러나왔다.
이런 식으로 한 시대의 추억을 담당한 음악이 많다. 에디슨 와이먼이 작곡한 피아노곡 ‘은파’라든가, 리처드 클레이더먼(본명 필립 파제)의 히트곡 ‘아들린을 위한 발라드’ 같은 곡은 피아노 약간 배운 애들이 가장 뽐내며 치던 곡이었다.
우리의 일상은 나도 모르게 많은 클래식 음악으로 엮어져 있다. 대표적인 음악으로 하이든 트럼펫 협주곡 3악장을 들 수 있다. 연륜이 있는 사람에겐 ‘장학퀴즈’의 시그널 음악으로, 젊은 층에겐 ‘오징어 게임’에 흘러나온 음악으로 친근하다. 보케리니 현악5중주 3악장 미뉴엣은 영어 듣기평가에 단골로 흘러나오던 음악이다. 슈베르트 피아노5중주 ‘송어’ 4악장은 세탁기 종료음이나 식기 세척기 알람음으로 줄곧 우리 곁에 붙어 있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의 1악장, 멘델스존 ‘봄 노래’는 회사의 단골 통화 대기음으로 사용된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들으면 어디선가 차가 후진하는 듯한 느낌이 들고, 비발디의 사계 중에서 ‘봄’의 멜로디를 들으면 지하철 환승을 해야 할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을 몸에 붙이는 방법은 이렇게 생활 속에 있는 음악 중에서 맘에 드는 것을 골라 제대로 들어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한 번쯤 들어봤을 클래식, 멀리하기엔 너무나 가까운 클래식에서 하나씩 자신의 레퍼토리를 쌓아가노라면 언젠가 그 속에 풍덩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2025-05-01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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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말 달리자! 주페의 경기병 서곡
									 
										클래식 음악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레퍼토리가 정말 방대하다는 것이다. 텔레만이 쓴 곡만 3천 개를 헤아린다. 바흐, 하이든, 슈베르트도 1천 개 정도 되는 곡을 썼다. 비발디, 보케리니, 모차르트, 리스트, 글라주노프도 600곡이 넘는다. 그러니 매일 다른 곡을 열 곡씩 듣는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얼마나 듣겠는가?
나 역시 꽤 긴 세월 동안 클래식 음악을 들었고, 방송과 강의를 하고 몇 권의 책까지 썼지만, 여전히 수시로 튀어나오는 미지의 곡 때문에 당황한다. 아, 이런 곡을 여태 몰랐다니, 하면서 머리를 치는 것이 다반사다.
1819년 4월 18일에 태어난 주페도 우리나라에선 과소평가되는 작곡가라 할 수 있다. 그는 빈 오페레타의 전성기를 연 작곡가다. 스팔라토(현재의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서 태어났으며, 파도바대학에서 법률을 배우다가 빈 음악원으로 가서 작곡을 공부했다. 1846년에 안데어 빈 극장에 지휘자로 취임했고 같은 해에 오페레타 ‘시인과 농부’를 발표하여 인기 작곡가로 떠올랐다. 이후 칼 극장의 지휘자로 일하면서 ‘아름다운 갈라테아’ ‘경기병’ ‘이사벨라’ ‘보카치오’ ‘빈의 아침, 오후, 저녁’ 등을 발표하여 빈 오페레타의 거장이 되었다. 약 30개의 오페레타와 180 여개의 무대작품을 발표한 후, 1895년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오페레타와 그리 친하지 않은 한국에선 주페라고 하면 ‘시인과 농부 서곡’ ‘경기병 서곡’ 정도로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기병’은 1866년 빈에서 활동하던 시인인 카를로 코스타의 대본으로 만든 2막의 오페레타다. 경기병은 중무장한 기병이 아니라 가벼운 갑옷을 입은 채 말을 탄 기병을 의미한다. 특히 헝가리 마자르족의 후사르 경기병 부대는 유명했다. 그러나 이 오페레타에 나오는 경기병은 극 중에서 으스대는 발레단 사람들을 비꼬아서 부르는 말로 쓰였다.
서곡은 극 중에 나오는 5개의 멜로디를 엮어 3부 형식으로 만들었다. 관악기의 울림으로 시작하여 경기병의 말발굽 소리와 같은 행진곡이 나오는 부분이 1부, 용사들을 애도하는듯한 단조의 현악 선율이 멋진 2부, 다시 경쾌한 행진곡으로 마감하는 3부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1부에 나오는 관악 멜로디는 방송의 시그널 음악으로 애용되는 부분이라서 듣는 순간, “아, 이 곡이 그 곡이구나”하고 알아차릴 것이다.
‘경기병 서곡’을 들어보고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주페가 작곡한 다른 서곡과 ‘내 사랑 플로렌티나’ 같은 아리아로 옮겨가 보자. 좀 더 뒤져보면 주페의 ‘레퀴엠 D단조’처럼 멋진 곡이 도사리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될 것이다.
									 
										2025-04-17 [1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