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풍경이 보이는 음악, 드뷔시의 '판화'
음악평론가
클로드 드뷔시. 위키피디아
자료를 찾다보니 1월 9일에 초연된 곡이 꽤 많다. 차이콥스키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죽음과 변용’이 1890년 오늘, 러시아와 독일에서 각각 초연되었다. 생상스 피아노협주곡 5번이 1896년 파리에서 초연되었으며, 라벨 ‘밤의 가스파르’와 쇤베르크 현악4중주 2번은 1909년에, 본 윌리엄스의 ‘토머스 탤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은 1910년 오늘 초연되었다. 그리고 드뷔시의 피아노 모음곡 ‘판화’(Estampes)가 1903년 오늘 파리국립음악원에서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네스의 연주로 초연되었다.
드뷔시는 당시의 인상주의 미술이 시간 속에 변화하는 이미지를 포착하려 한 것처럼, 음색이 가진 미묘한 인상에 주목했다. ‘달빛’ ‘아라베스크’ ‘판화 같은 드뷔시의 피아노곡은 그 자체로 ‘귀로 듣는 그림’이라 하겠다.
제1곡 ‘탑’(Pagodes)은 동양의 사원에서 보이는 탑이 물에 비친 모습을 그리고 있다.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처음 듣게 된 인도네시아 자바의 가믈란 음악과 아시아 5음 음계의 영향을 잘 보여준다.
드뷔시 : 판화 - 메나헴 프레슬러(피아노)
제2곡 ‘그라나다의 저녁’(La soiree dans Grenade)은 하바네라 리듬과 반음계 장식을 써서 스페인의 정취를 나타내고 있다. 드뷔시는 ‘판화’를 작곡할 때까지 인도네시아나 스페인을 가본 적 없었다. 오직 상상의 세계에서 썼다. 이 곡을 들은 작곡가 마누엘 데 파야는 “어쩌면 민요 한 소절도 갖다 쓰지 않고서 이렇게나 훌륭하게 스페인을 그려냈는가”라고 탄복했다.
제3곡은 ‘비 오는 정원’(Jardins sous la pluie)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노르망디의 마을에 있는 정원을 묘사했다. “나뭇잎에 떨어진 빗방울이 반사되면 얼굴이 초록빛으로 물든다”라는 화가 블랑슈의 말에 영감을 받아 쓴 곡이라고 한다. 프랑스 동요 선율을 인용했다.
세 곡이 모두 무척 시각적인 이미지를 제공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정한 그림을 보고 쓴 작품은 아니다. 그림에서 나온 음악이 아니라 음악이 곧 그림처럼 펼쳐지는 작품이다.
정말 많은 연주자가 ‘판화’를 사랑해서 무대에 올렸지만, 오늘은 메나헴 프레슬러(Menahem Pressler)의 영상을 골랐다. 1923년 독일에서 태어나서 2023년으로 딱 100년을 살다간 피아니스트다. 전설적인 ‘보자르 트리오’를 창단하여 무려 53년의 세월을 같이했으며, 트리오를 해체한 후에도 90대까지 연주 활동을 계속했다. 영상은 2011년, 88세 되던 해 도쿄 산토리홀에서 가진 연주회의 한 부분이다. “이젠 나이가 들어서….”라고 엄살 부리고 싶을 때 이런 영상을 보면 낯이 부끄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