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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키아프리즈, 헤어질 결심은 아닌 거죠?
키아프와 프리즈가 끝난 지 두어 달이 지났어도 화젯거리가 되는 것은 그만큼 인상이 깊었다는 말일 것이다. 2022년에 5년간 공동 개최하기로 계약했으니 내년에 계약이 종료되기 때문에 앞날을 논의할 때이다. 자본을 쫓는 아트페어이니 어떤 방향으로 결론이 날지 궁금하다.
2025년 키아프 아트페어는 여러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었지만,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전시된 무라카미 다카시 작품이다. 무라카미 특유의 화려한 구성은 물론이고 일본 전통 회화에서 무로마치 시대부터 등장했던 화려한 금빛 바탕을 한 작품은 사람들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예술성이나 작품성을 떠나서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또 이 작품은 ‘키아프리즈’라고도 불리는 이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 두 아트페어가 비즈니스 목적에 따라 결합한 상품이라는 점을 최적하게 상징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관람객에게 국제적인 갤러리가 다루는 작가들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명분을 세우지만 냉정하게 보면 한국 미술시장을 프리즈가 꽤나 긍정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이 동거는 합의되었을 것이다. 키아프 역시 활력이 떨어지는 아트페어에 무언가 조치가 필요했기에 쌍방이 계약서에 서명했을 것이다. 일단 여기까지는 성공적이라고 평가들 한다.
하지만 관람객, 프리즈, 키아프 모두에게 이익일 것 같았던 기묘한 동거 계약은 각자에게 손실 요소가 증가하리라고 판단되면 계약 종료를 선언하리라는 것은 당연하다. 자본주의 사회의 꽃이며 아이콘이 아트페어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익을 감소시킬 가장 큰 요소는 무엇보다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일 것이다. 올해에 두드러지게 프리즈 실적이 좋았다고 여러 평가가 있었던 반면, 상대적으로 키아프는 그렇게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국내 주요 갤러리 30여 곳이 프리즈에 참가하면서 키아프에 참가하지 않은 갤러리가 있었다. 이런 상황을 키아프에 참가했던 다수 국내 갤러리는 불안한 눈빛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들 시장을 고스란히 프리즈에 스스로 내주었다는 자조감을 느끼면서 어쩌면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할 때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 아트페어가 시작된 것이 40년(화랑미술제가 1982년 시작됨)이 넘는 동안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도 꾸준히 덩치를 키워온 한국 미술시장이지만, 더 다양하고 의미 있는 메시지가 담긴 상품(작품)을 찾아야 할 시기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미술 애호가 혹은 관람객은 수준 높은 예술적 경험을 위해 카아프리즈의 헤어질 결심을 반대할지도 모른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10-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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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현대조각의 한 페이지를 용접으로 남긴 조각가 송영수
경부고속도로 중간쯤에 있는 고속도로휴게소 1호인 추풍령휴게소는 90년대까지만 해도 많은 이가 낭만과 추억을 쌓던 곳이었다. 지금은 다른 고속도로가 많아져 명성이 퇴색되면서 그곳에 건립된 나들목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직접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서울대 교수였던 송영수는 1970년 경부고속도로 준공 기념으로 추풍령에 세울 조형물을 의뢰받았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심장마비로 짧은 예술가 삶을 마치고 말았다. 그는 서울 태생이지만 천안에서 자랐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미술에 재주가 있어 서울대 조소과를 진학했지만, 곧바로 터진 6.25전쟁 때문에 서울대가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제대로 수업받지 못했다. 1953년 다시 서울로 복귀하면서부터 제대로 된 수업을 받고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중반까지도 조각계는 일제강점기에 서구적인 조각 기법이 들어온 이래 크게 변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김복진을 비롯해 김경승, 김종영, 윤효중 등이 일본 유학을 통해 배워 온 조각 양식은 사실적 묘사에 바탕을 둔 인물상이 대부분이었고, 1949년 시작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이외에는 마땅히 조각을 발표할 기회도 없었다. 50년대를 통틀어 개인전에서 조각을 발표한 횟수는 4, 5회가 전부일 정도였다. 이런 상황은 송영수도 비슷했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진학해 1958년 석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그는 스승 김종영의 영향을 받아 구상적인 인물상을 주로 발표했다. 전통적인 조각 재료인 돌과 석고로 제작한 것들이다.
송영수는 다른 이처럼 유일한 발표장이었던 국전에서 1953년 2회부터 56년 5회까지 연속해서 특선을 받아, 1957년 국전 추천작가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57년 국전에 그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용접 기법으로 제작한 추상성을 띤 작품을 출품했다. 6회 국전에는 송영수 이외에 몇몇 조각가들이 용접으로 만든 작품을 출품해 조각계가 변화하고 있음을 알렸다. 이는 한국전쟁으로 외국에서 서구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책자가 유입되었고, 일본 잡지를 통해서도 용접을 활용한 조각과 조각가가 소개되었기에 생긴 기류였다. 또 아이러니하게 전쟁이 엄청난 고철을 만들어 냈고 이를 절단하고 붙일 수 있는 용접 기술이 수입되면서, 조각에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송영수는 용접으로 작품을 제작하다가, 65년에 일본에서 동판이 수입되고부터는 동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새’이다. 그가 남긴 드로잉에는 “싸우다 죽은 새들”이라고 이 작품의 의미를 추론할 만한 글귀가 적혀 있다. 날카로운 날개와 심하게 꺾인 목의 형태가 의미를 잘 상징하고 있어 감상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듯하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9-2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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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백자달항아리가 예술작품이 된 까닭은
옛날에 쓰던 물건이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는 일은 그리 드물지 않다. 조선시대에 매일 밥상에 올랐을 그릇들이, 옷이나 이불을 넣었던 목가구가, 선비가 사랑방에서 쓰던 문방구들이 지금은 박물관 진열장에 넣어져 귀하게 대접받는다. 이것만 봐도 예술은 생활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 그릇인 백자달항아리도 언제부턴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미술품이 되었다.
달항아리는 아무 그림도 기교도 없이 오직 장인의 순수한 마음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도 빌 게이츠도 샀고, 방탄소년단 RM도 샀다고 기사가 날 정도로 인기 있다. 그래서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도 온갖 상품으로 재제작되어 팔리고 있다. TV 홈쇼핑에서도,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광고한다. 이처럼 지금 우리는 조선시대에 달항아리를 만든 목적과는 아주 다르게 소비한다. 달항아리를 예술로 대접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품으로 변환하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
지난 3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18세기 조선 달항아리가 41억 원에 낙찰되었다. 낙찰받은 이는 미국인이라는데, 그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달항아리가 가진 아름다움을 진정 알고 샀을까. 아마도 달항아리가 예술 작품으로 바뀌는 긴 시간 속에서 형성된 우리 문화와 사상과 생활을 이해하고 낙찰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달항아리 형태와 색 그리고 역사가 만든 갖가지 이야기와 해석에서 형성된 미학, 더욱이 자신의 미적 취향에 들어맞았기에 샀을 것이다. 한마디로 달항아리를 부엌에서 쓰던 도자기 그릇이 아니라 한국에서 만든 예술 작품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시대는 달항아리가 옛날부터 예술 작품으로 다루어져 왔던 것처럼 착각할 지경이지만 조금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금세 이해할 수 있다. 달항아리를 만든 조선시대 도공은 부엌살림에 여유가 있는 집이라면 꼭 필요한 항아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 달항아리 크기나, 색이나 궁궐이나 지체 높은 집에서 사용했을 법하므로 주문 제작이었을 수도 있다. 하여튼 능숙한 장인은 특별한 기교나 재주를 부리지 않고 덤덤하게 물레를 돌려 항아리를 빚었을 것이다. 그 시대가 그런 항아리를 필요했기에 만들었을 것이다. 미술사에서 ‘시대를 반영한 것’이라고 흔히 표현하는 말에 딱 들어맞는 것이 달항아리다.
하지만 물건이 예술 작품이라는 지위에 올라가기에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거기에는 긴 시간 동안 쌓인 많은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이름도 없이 그저 항아리로 불리다가 백자달항아리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그 긴 세월 동안 우리 생활 곁에 있으면서 우리의 슬픔과 기쁜 이야기를 담아냈기에 지금 우리는 그것을 예술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9-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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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해운대 길거리에서 느닷없이 만난 조깅하는 사람들
부산도시철도 2호선 해운대역에서 부산기계공고 쪽으로 한 2분 걷다 보면 전광판에서 달리는 남녀를 운 좋으면 볼 수 있다. 이것은 영국 출신인 줄리안 오피의 작품인 ‘병사와 변호사’라는 공공조형물로 흔히 ‘건축물 미술장식 1% 법’으로 통칭하는 법에 따라 세워진 것이다.
1만㎡ 이상 건축물을 신축 혹은 증축할 때 건축주가 미술작품을 설치하도록 한 ‘문화예술진흥법’ 제9조에 따라 대략 건축비 1% 정도로 건물 앞에 미술 장식품을 설치한다. 이 법은 1972년 권장 사항이었으나 1995년 의무 사항으로 바뀌면서 많은 작품이 들어서게 되었다. 현재는 작품을 설치하는 대신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도 출연할 수 있다. 이 제도와 규정은 미술계에서 찬반이 많이 갈리는 법이긴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다. 해운대역 근처를 지나다 줄리안 오피의 작품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 이런 생각은 더 커질 것이다.
줄리안 오피라는 이름은 몰라도 서울역 건너편 서울스퀘어(구 대우센터빌딩) 벽에 사람이 걷는 전광판을 아느냐고 물으면 거의 안다고 답한다. 그만큼 줄리안 오피라는 이름보다 그의 작품이 더 유명하다. 밤에 서울역 대합실을 나서면 누구나 처음 대하는 장면은 줄리안 오피의 ‘걷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이다. 그는 런던 출생으로 데미안 허스트를 비롯해 ‘영국젊은예술가’(yBa)를 많이 배출해 유명한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를 졸업했다. 세부를 과감하게 생략해 굵은 선으로 단순하게 표현한 ‘초상화’ 시리즈와 ‘걷는 사람들’이 유명하다. 또 그의 작품은 평면만 머물지 않고 초대형 설치와 LED 전광판, 액정디스플레이, 렌티큘러 등 새로운 기술과 매체를 적극 활용한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제작 기준에 대하여 “그것을 내 방에 두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가끔 던진다고 한다. 이 질문이 그의 작품을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전 세계 대중이 좋아하는 이유 중에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눈을 즐겁게 하고 삶에 여유를 가지게 하는 미술작품을 우연히 마주치는 이런 경험은 많을수록 좋다. 이런 생활문화를 더 많이 퍼트리기 위해선 우리 눈높이를 높여야 한다. 미술관에도 가고 공연장도 자주 가야 한다.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은 외국에서 온 관광객의 필수 여행 코스가 되었다. 이들 국립기관의 위상도 예전과 달리 높아졌고,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열광하는 정도가 되었다. 무엇보다 좋은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전시 기획력과 전시 디자인이 우수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지난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그것도 개관 시각 오전 10시를 막 넘겨 들어간 전시장에는 이미 여러 젊은이와 나이가 머리에 앉은 관람객들이 심심치 않게 보일 정도였다. 5~6년 전과는 사뭇 바뀐 풍경이었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8-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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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전쟁을 겪고도 인간 본성을 간직한 시절, 그때 그 사진
느닷없이 온 광복을 맞이했던 것처럼, 여러 징후에도 불구하고 참혹한 전쟁을 치르고 6년이 흐른 명동. 그 시절에도 우리는 풋풋하면서도 순수한 모습을 간직하며 삶을 살았다. 광고사진 작가로 알려진 한영수는 그 따듯한 인간 본성을 순간 예술인 사진으로 새겨 지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한영수는 1933년 개성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덕분인지 어릴 때부터 그림과 사진에 취미가 있었다. 군에서 한국전쟁을 겪고 1955년 제대하고 나서부터 사진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집안 반대로 그림은 그릴 수 없었지만, 사진에 심취해 1958년 한국 최초 사실주의 사진 단체인 ‘신선회’에 가입하고는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는 사진 작업에 자신감이 붙자 1966년에 아예 사진연구소를 세워 광고와 패션 사진에 뛰어들어 개성 넘치는 작업으로 한국 광고사진 역사에 큰 흔적을 남겼다.
명동, 그래도 그때 가장 번화했던 곳과 그 주변을 찍은 사진들은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웃음을 간직한 서울 시민의 행동과 표정을 담아낸 작품이며 기록물이다.
1956년부터 1963년까지 한영수가 찍은 이 사진들은 1987년 ‘삶’이라는 작품집으로 발간되었고, 이후 대원사에서 출판한 작품집 〈내가 자란 서울〉 그리고 같은 제목으로 2017년에 서울역사박물관에서 공개되었다.
같은 해에 전 세계 사진작가들의 구심점인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에서 우리나라 사진작가로는 처음 ‘한영수: 사진으로 본 서울, 1956~1963’ 사진전이 개최되었다.
이와 함께 ICP가 그의 작품 15점을 소장하면서 한국의 사진예술을 국제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서울, 명동 사보이호텔 옆’, 이 작품은 요즘 눈으로 보면 단정한 차림을 한 남녀가 나란히 걷고 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다. 하지만, 요즘 답답한 나날처럼 높이 가로막은 벽은 한국전쟁의 상흔으로 시멘트는 떨어지고 벽돌은 맨몸을 드러냈다.
우연히 창문틀이 떨어진 곳에 눈길을 주자 지나가는 남녀 모습이 눈에 든다. 한영수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포착했다. 마치 희망을 잡아채듯이. 벽이 없었다면 단순한 풍경이었을 그 순간이 작가는 서사와 감흥이었다.
한영수의 작품에는 인간에 대한 따듯한 시선이 담겨 있다. 그 참혹하다는 전쟁을 겪고도 이런 삶이 존재한다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지만, 아무리 힘든 세상이라도 인간이 가진 심성은 간직된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에 하는 소리이다.
이 사진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8-1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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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변혁을 외치는 세상이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은 있다
해운대 모래밭에 깔린 어마어마한 파라솔을 비추며 피서철이 왔음을 알리는 뉴스는 이제는 예전 일이 될 듯하다. 촘촘히 솟은 건물로 감싸인 백사장을 오가는 파도만 있는 풍경은 예전만 못하다. 바닷바람의 시원함도, 풍경이 주는 낭만도 없는 해운대가 될지 조금 걱정스럽다.
도상봉이 부산에 있는 딸 집에 잠깐 머물며 1966년에 그린 ‘해운대 풍경’은 지금과는 전혀 다르다. 작가가 모래밭 한가운데서 달맞이고개 방향으로 화구를 놓고 그린 이 그림은 멀리 모래밭 뒤로 늘어선 얕은 집들과 달맞이고개 아래를 바다와 함께 굽이 도는 기찻길 따라 늘어선 집들이 보인다. 그 위 와우산에는 그 시절에 있었던 골프장을 그린 듯 황토색 길이 나 있다. 모래밭에는 파라솔 몇 개가 흩어져 있고, 오가는 사람, 파라솔 그늘에 있는 사람,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언뜻 보기에 담담하게 해운대 풍경을 캔버스에 옮겨낸 그림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눈으로만 보는 것이고 마음으로 읽지 못하는 것이다. 도상봉은 1902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났고, 1917년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근대기에 일본에 유학해 첫 번째로 서양화를 배운 고희동에게 그림을 배웠다. 이후 메이지대학 법대로 진학했으나 부모 뜻을 어기고 몰래 1923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한다. 근대기 1세대 화가인 도상봉은 주관적인 창작 의지보다는 일관되게 고전적인 자연주의 시각으로 보편적이고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그림에 엄격한 자세를 유지하며, 자연과 대상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철저하게 이해한 그림을 남기려 했다. 정밀한 화면구도와 풍경이 가진 시각적 구현을 위해 화면 구석구석 작은 붓질로 그리는 자신만의 원칙에 충실했다. 연도와 이름을 똑같은 필체로 항상 정확하게 쓴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원칙주의자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고 그가 온갖 일에 고집만으로 원칙을 지킨 사람은 아니었다. 대학생 시절 고향에서 처음 본 나상윤에게 첫눈에 반해 연애를 시작했지만 양 집안이 반대하자 둘이 대담하게 일본으로 가버리는 사랑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보통학교 때에는 3·1 만세운동으로 투옥당한 뒤로는 총독부가 주최하는 선전에는 한 번도 출품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전에는 세상을 떠나기 이태 전까지 매년 출품해,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자신만의 국가관을 실천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름다움(美)을 추구하고 도덕을 지키는 삶은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초였다. 그래서 공자도 칸트도 도덕과 미를 함께 이야기했다. 변화가 중요한 시대이긴 하지만 지켜야 할 원칙을 간과해 우리 사회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의미 없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7-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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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부산항은 다시 우리를 미래의 기대로 설레게 할까?
바캉스라는 말이 어느새 듣기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여름은 푸른 바다가 으뜸이다. 하지만 기대와 희망으로 보는 부산 앞바다와 항구는 수십 년 전만큼은 아닌 듯하다. 바다가 주는 힘찬 생동감보다는 뭔지 모를 불안과 공포가 오리라는 막연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분주함이 아름다웠던 시절을 담은 이의주 작품 ‘부산항’을 보며 다가올 우리 미래를 곱씹어 본다.
이의주(1926~2000)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홍익대 회화과 제1회로 1948년 입학했다. 졸업한 뒤 곧바로 양정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교 온실에서 그렸던 작품 ‘온실의 여인’으로 1960년 제9회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다. 1968년 교사직을 사직하고 원광대 교수를 거쳐, 1974년부터 부산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로 자리를 옮긴다. 이후 부산에 정착하며 작고할 때까지 어떤 작가보다 부산을 사랑하여 부산 풍경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한편,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당시 국가 문화정책의 하나로 실행했던 ‘민족기록화사업’에 적극 참여해 정부가 의뢰한 작품과 그 외 기록화 작품 등 22점을 제작해, ‘민족기록화전’ 분야에서 대표적인 작가로 활동했다.
‘부산항’은 흰 구름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영도 봉래산의 파랑이 눈에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오른쪽 아래에 영도다리, 용두산공원에서 솟아오른 부산타워와 팔각정 그리고 왼쪽 멀리 수평선과 맞닿은 곳에 오륙도가 보여 부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산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위치가 가늠되면 어디서 본 풍경을 그린 것인지 궁금해 추측해 보면, 동아대 옆에 있는 400m 높이의 구봉산자락 어디 아닌가 싶다. 이처럼 그린 위치를 추측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사실에 기반한 풍경화이고, 이의주 작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항 앞바다에 오가는 크고 작은 배들과 푸른색 봉래산 밑에 자리한 영도 조선소에 촘촘히 늘어선 배, 높낮이가 저마다 다른 빽빽한 건물로 둘러싸인 풍경에 사람 하나 없어도 분주함이 느껴진다. 이 풍경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바닷물은 섬세하게 색감 차이를 두고 조금 빠른 필치로 표현하면서, 화면 가장자리에 있는 건물과 숲 등은 여러 색으로 뭉개버려 시선을 가운데로 끌어당긴다. 이점이 풍경화 ‘부산항’의 묘미이다.
지난 추억은 아름답기 마련이라고들 하지만, 이 작품이 그려졌던 시대에 순박한 우리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희망과 이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이런 희망과 자유가 줄어든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7-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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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동양화는 왜 역사성을 되찾는 의무를 짊어지게 되었을까?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기온과 습기, 전에 겪지 못한 기상현상이 일어나는 한여름이다. 어디 잠시라도 피할 수 있다면 하는 심정으로 박노수의 ‘버드나무 아래에서’를 들여다본다. 시리도록 푸른 청색 잎을 늘어트린 버드나무 가지가 우리 눈 앞을 가리고 그 여백 사이에 한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다. 멀리 옅은 노랑을 띤 달을 보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남정 박노수(1927~2013)는 충남 연기군에서 태어나 1945년 청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그림에 뜻을 두고 상경해 이상범에게 사사했다. 해방되고 서울대 미술학부가 생기자 첫 입학생으로 1946년 입학해 김용준, 노수현, 장우성에게 배운다. 1949년 제1회 국전에 입선을 시작으로, 2회 국무총리상, 3회 특선, 4회에 동양화로는 처음 대통령상을 받아 기성 화단에 진입하게 된다.
그의 독특한 이력 하나는 1회부터 1981년 30회로 국전이 끝날 때까지 참가한 것이다. 대통령상을 받은 이듬해 이화여대 교수가 되고 또 이듬해에 추천작가가 된 이유도 있겠지만, 그 말 많고 탈 많은 국전에 빠짐없이 참여했다는 것은 남들 눈과 평가보다는 자신의 예술을 담담히 실천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그의 작품에는 해방 이후 일제 잔재를 벗어나 민족미술을 수립해야 한다는 당면한 구호나 유구하고 거창한 동양화론과 화법을 추종하려는 노력은 찾기 힘들다. 1950년대에 여성 인물상을 소재로 하거나, 1960년대 중반까지 옛 선인들 시를 화제로 쓰거나 혹은 산수를 해체해 시대적 변화에 따라 조형성을 강조한 정도가 형태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1960년대 중엽부터는 오롯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만드는 데 힘을 쏟는다. 그 계기는 1965년 1년간 일본에 있으면서 일본 작가들이 석채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알고부터이다. 돌가루 물감인 석채 사용이 당시에 일제 잔재로 터부시되던 시절임에도 과감히 실험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부터 중심 소재는 한지 흰색으로 두고 그 외에는 화려한 색으로 채색해 소재를 도드라지게 했다. 또 근경을 최대한 크고 가깝게 그려 강조하면서 공간 깊이를 창조하는 형식도 이즈음에 등장한다.
검은 먹선이 동양화에서는 중요한 조형 요소이기에 깊이 연구해 색과 조화되도록 사용하려 노력했다. 이런 요소를 담은 그의 작품은 노쇠한 느낌이 아니라 시각적 참신함과 마음의 여운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해방 이후 동양화는 일제의 청산과 민족의 전통을 찾으려 노력했다. 동양화가 아니라 한국화로 바꾸려는 운동도 있었다. 하지만 21세기인 지금은 동양화 아니 한국화의 세계는 어둡기만 하다. 현대미술 혹은 현대성 성격을 추구하지 못한 이유로 효력이 사라진 것일까?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7-0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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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1950년 6·25, 잊으면 안 되는 비극마저 망각한 듯
하긴 참혹한 전쟁이라지만 75년 전 일이다. 휴전 중이라 해도 일상을 반복해야 하는 우리 머리가 망각에 드는 것은 어쩌면 보통 일로 치부할 수 있다. 그렇지만 하루라도 아니 잠깐이라도 머리에 되새겨 놔야 우리가 누리는 안녕과 평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안다.
6·25전쟁에 종군한 작가는 많지만 긴박하고 위험한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도, 전쟁이 주는 파괴와 폭력과 잔인함으로 얼룩진 인간의 어둠을 담은 작품도 거의 없는 듯하다. 변영원의 ‘반공여혼’은 긴박감이나 잔인함과는 거리가 있지만, 전쟁의 폭력성 느낌 때문인지 머릿속에 남는다. 이 작품은 1952년 전쟁 중에 그렸던 것을 1957년 제1회 ‘신조형전’에 출품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의아한 것은 당시 주간지 기사는 ‘멸공의 혼’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멸공의 혼’, ‘멸공의 여혼’으로 2000년대까지 혼동돼 쓰다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부터는 ‘반공여혼’으로 바뀐 것 같다. 그 연유가 궁금하다. 참, 이 작품은 2021년 10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열린 ‘경계 없는 초현실주의’에 초청받아 출품되기도 했다.
이 작품은 배경이 검정과 붉은색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경계는 파상형으로 비스듬한 사선이다. 한 무리가 배경에서 앞으로 빠르게 뛰어나온다. 무리라고 한 것은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눈으로 추측되는 형태 때문에 인체를 비구상으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무리는 저마다 총부리나 대포알을 품고 눈을 부라리며 한곳으로 향하는 모습을 원근법으로 처리했다. 최대한 발걸음을 넓혀 급박하게 뛰어나가며 총을 쐈는지 동그란 총부리에서는 연기, 아니면 어두운 하늘을 나는 새인지 모를 도형이 검정 배경 위에 그려졌다. 입체주의 혹은 초현실주의 아니 두 가지가 보인다고 설명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으면 그만이지.
변영원은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1949년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곧이어 터진 전쟁 탓에 그림에 열중하지 못하다가 겨우 휴전이 되어서야 다시 화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이때는 민족 전통을 계승해 한국성을 찾는 것이 미술계 당면과제로 여겼고, 그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가 활동한 신조형파의 “현대미술의 생활화에 직접 행동한다”라는 선언은 지금 생각해도 꽤 신선하게 다가온다.
작가는 우리 역사에서 문화예술은 모두 현실을 반영한 창조적 정신이 깃든 것으로 형성되어 왔다고 주장한다. 이를 계승해야 한국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당시 처절한 현실인 6·25전쟁을 ‘반공여혼’으로 창작한 것이리라. 그런데 지금은 한국성을 어떻게 찾으려는지….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6-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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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이번 장마가 끝나면 그나마 깨끗한 세상이 올까?
곧 닥칠 장마를 소리 없이 내리는 비를 보며 기다린다. 겨우내 불협을 만든 불온한 공기와 올봄 내내 아귀 벌이던 다툼을 이 장마가 쓸고 갔으면 하는 부질없는 마음이 들어서이다. 굵은 장맛비가 만든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는 우타가와 히로시게(1797~1858)의 ‘오하시 아타케의 저녁 소나기’가 으뜸이다.
히로시게는 몰라도 반 고흐가 따라 그린 일본목판화인 우키요에(浮世繪)라고 하면 “아~” 할 것이다. 에도 말기에 활약했던 그는 당시 일상과 풍경을 운치 있게 표현한 최고의 화가로 꼽힌다. 후지산보다 큰 파도를 그린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와 함께 자포니즘을 유럽에 퍼트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1603년 쇼군이 막부를 에도에 설치하고 상업이 발달하자 부를 축적한 죠닌(상공인)이 등장한다. 이들은 계급제에 막혀 신분 상승을 꿈꾸는 대신에 말초적인 오락 거리인 가부키와 통속소설을 문화로 발전시키고, 심지어 유곽도 번창케 한다. 이런 현상에 우키요에도 있었다. ‘우키요’는 불교에서 덧없는 세상을 뜻하고, 지금 순간의 쾌락을 표현한 그림이 ‘우키요에’이다. 에도에 목판으로 찍은 책이 유행하자 삽화라는 그림 수요도 급증한다. 그러더니 아예 그림만으로도 즐기는 책이 출판되면서 우키요에는 독립적인 장르로 발전한다. 이윽고 큰돈이 벌리는 산업으로 성장하자, 목판과 종이 제작술이 발전하고 서적 유통과 기획까지 분업화된다. 결국 우키요에는 국제적인 산업으로 확대되고 유럽에까지 퍼져 화가와 미술 애호가의 수집품이 된다. 히로시게는 2만 점이나 되는 작품을 남겼으니, 얼마나 큰 시장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히로시게가 제작한 ‘동도명소’(1831)가 처음으로 성공하자, 또 다른 직업이었던 정화소(에도의 소방서) 말단 관리직을 바로 사퇴한다. 곧이어 발표한 ‘동해도53차’(1833)가 일본에 여행 붐을 일으킬 정도로 대성공하자 많은 문하생도 생겼다. 1856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가 가장 애착했던 것은 ‘명소에도 100경’이다. 그중에 52경이 ‘오하시 아타케의 저녁 소나기’이다.
이 그림은 짙은 습기에 희미하게 보이는 건너편 아타케(배를 정박시키는 군영지)와 화면 오른쪽에서 만나는 오하시(대교) 위에 굵은 비를 맞으며 서둘러 건너는 남녀를 그리고 있다. 옷도 신발도 비를 피하려 머리에 쓴 것도 행동도 제각각이다. 다리 위 빗줄기를 슬쩍 생략한 배려에 사람들 모습이 생생하다. 가깝게는 검은색, 멀리는 회색으로 소낙비 내리는 공간을 만들어 스미다강 건너 습기에 갇힌 군영지를 아스라이 그려낸다. 비싼 수입 물품인 감색으로 칠한 다리 아래에 푸른 강물은 감상자에게 청량감을 부여해 습한 우울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6-0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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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알면 허세나 소문을 쫓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박수근(1914~1965)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난 뒤 얻어진 명성이라 아쉽긴 하지만. ‘만약’은 정말 쓸데없는 말이지만, 그가 돌아와 다시 화가를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어려울 것 같다.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미술은 인정받기 어려운 세상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면 머리는 감옥’이라는 이 저잣거리 표현은 빈곤은 정신(머리)을 먹을 것(생계)에만 집중시킨다는 뜻이다. 박수근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7살 때 가세가 기울어 보통학교 졸업이 끝이었다. 당연히 미술 전문교육을 받지 못했다. 지난 회에 소개한 일본 에도시대 오카다 코린과 달리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창한 문화자본을 한 푼도 가지지 못했다.
6·25전쟁 때 빈 몸으로 월남한 박수근은 일 년여 동안 미군 피엑스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최빈국이던 한국에서 창조 정신이 절대적인 화가를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로 일반인 정신(머리)으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좋은 작가는 많았다. 박수근도 이 부류에 속하는 작가였다. 아니 오히려 그 누구보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더 열심히 창조 활동을 했다. 하루하루를 직장인처럼 그림 그리는 일에 매달린 것은 오카다 코린처럼 달리 다른 방도도 재주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미군 병사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번 돈으로 구한 작은 판잣집 마루를 화실로 삼아 창작열을 불태웠다.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퇴원한 다음 날 1965년 5월 6일 박수근은 이 세상 포도청을 벗어났다. 그냥 주부로 살던 박완서는 그해 10월 ‘박수근 유작전’ 기사를 보고 전시장을 찾았다. 미군 피엑스에서 서로 도우며 어려운 시절을 견딘 인연을 모른 체할 수 없어서였다. 저잣거리 말, 참 인생은 알 수 없다. 여기서 그녀의 숨어있던 창작 욕망을 일깨운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을 만난다. 잎사귀 하나 매달지 않은 고목이 아니라 혹독한 삭풍은 견디며 찬란한 봄을 기다리는 ‘나목’으로 본 그녀는 5년 뒤 장편소설로 현상공모에 당선된다. 이후 1993년 발표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자전적 소설로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박수근 작품이 없었다면 박완서는 목구멍 포도청에 매달려 살았을지 모른다. 예술 하면 밥 빌어 먹는다는 야단으로 천대하던 시절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미군 병사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미국인들은 박수근 그림을 알아보고 수집해 간 시절이기도 했다. 만약 박수근이 지금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여전히 너무 적다고 단념할 것이 뻔하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5-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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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아이리스 또 다른 이름 제비붓꽃으로 유명한 그림
고흐의 ‘아이리스’만큼이나 유명한 그림은 오카다 코린(1658~1716)의 ‘제비붓꽃’으로 일본 국보이다. 쇼군 통치 기구인 막부를 에도로 옮기고 일본 경제가 크게 성장하자 미술을 비롯한 여러 문화가 발전한다. 코린의 제비붓꽃도 금박과 비싼 돌가루 물감을 사용해 그린 그림으로 18세기 에도의 경제를 상징하는 본보기이다.
일본 ‘린파’를 대표하는 오카다 코린은 고흐보다 늦은 44세에 그림을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을 활동했다. 교토의 유명한 포목상 집안에 태어나 화려한 문화를 누리며 자랐고, 동생 오카다 겐잔도 유명한 도공이 되었다. 형은 가업을 물려받고, 대신 많은 유산을 받은 코린은 유흥과 고급문화에 돈을 펑펑 썼다. 그 여파로 재산을 탕진하고 빚까지 지게 되자, 이를 타개하려 어쩔 수 없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사실, 어릴 때부터 글과 그림을 비롯해 여러 예술을 배워 온 그는 중국 문인화와 화려한 일본화를 섭렵한 ‘가노파’ 야마모토 소켄의 가르침을 받았기에 자신이 있었다. 또 관리나 다이묘 등 돈 많은 후원자에게 많은 주문을 받을 자신도 있었다. 기록으로는 1697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제비붓꽃’은 1701~1704년 사이 부유한 후원자 주문으로 그려졌다고 한다.
이 작품은 8세기 헤이안 시대에 출현한 ‘이세 이야기’에 나오는 미카와 야쓰하시(아이치현 동부)에 피는 제비붓꽃을 6폭 병풍 1쌍으로 그린 것이다. 리드미컬한 제비붓꽃은 일부 형태가 반복되지만, 뛰어난 장식성으로 일본문화와 현대 디자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일본 지폐 5000원권에 실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 최고급 재료를 사용한 것 말고도, 이 작품은 군청색과 금색(노랑)이라는 보색 체계를 사용해 감상자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위험한 색 배치이지만, 지금 감각으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세련미를 품은 작품이다.
예술에 대한 감각은 최고의 미를 겪어 봐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문화 자산을 풍부하게 경험했던 어린 시절과 다양한 문화가 탄생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에도의 막대한 자본이 일본의 대표적인 미감인 화려함과 수수함이 교묘히 섞인 코린의 작품을 탄생시킨 밑거름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경제가 발전해야 미적 감각이 높아지고 문화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도쿄 네즈미술관은 아이리스 아니 제비붓꽃이 필 시절에 코린 작품을 중심으로 기획전을 연다. 올해도 벌써 시작했다. 코린의 이 작품과 유사한 것이 뉴욕 메트로폴리탄(MeT)미술관에 있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5-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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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허구한 봄꽃 중에 그 꽃만이 의미 있는 이유
가장 비싼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그림 중 하나인 ‘아이리스’(1889)는 붓꽃을 그린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게티미술관 소장품이 유명하다. 고흐는 고통 가득한 삶에 좌절하지 않고 예술을 향한 마음으로 이겨냈다. 작품에 매긴 숫자가 아니라.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고통을 알아야 행복이라는 꿀맛을 안다. 고흐는 성공한 자신의 예술 세계를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의 예술 정신이 얼마나 위대한지 안다. 고흐는 네덜란드에서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어릴 적 그림 공부를 했지만, 곧 그만두었다. 16살(1869)에는 화상인 큰아버지 추천으로 ‘구필화랑’에 취직했다. 여기서 7년 동안 근무하면서 여러 물의를 일으켜 해고되고,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한다. 1879년엔 보조 목사를 하던 중 조울증이 도져 아버지는 정신병원까지 물색하며 고흐를 집으로 돌아오라고 한다.
이후 목사 보조, 노동자의 삶과 광부 생활을 거쳐, 1880년 말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브뤼셀로 돌아온 그는 1881년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또 중간에 그만둔다. 아카데미의 가르침보다 자신만의 창조성을 찾으려 했다. 고흐가 사망한 해가 1890년이니까, 불과 10년 만에 위대한 창조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세상을 떠났다.
고흐의 초기 작품은 어둡고 칙칙했다. 1885년 동생 테오가 주선해 전시했지만 실패했다. 고흐는 영업을 더 잘해 보라고 했지만, 테오는 인상파처럼 밝지 않고 너무 어둡다고 되받아쳤다. 부실한 식사와 과도한 폭음·흡연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도 테오의 말을 기억하고 1886년 루벤스의 작품을 보고 색채를 연구한다. 특히 네덜란드 안트베르펜 항구에서 일본화 우키요에를 만나면서 이국적인 구도와 색채에 심취해 자신의 작품에 적용하면서 깊이 연구했다. 1886년에는 파리로 이사하면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고, 생을 마감하는 계기가 되는 고갱을 처음 만나게 된다.
그러나 2년 만에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1888년 요양을 위해 프랑스 남부 아를로 떠난다. 여기서 고갱과 두 달을 함께 작업하다 싸우고 헤어진다. 여러 설이 있지만, 이를 자책해 귀를 잘라 매춘부에게 선물하는 등 기행을 보이자, 주변 사람들 민원이 빗발쳤다고 한다. 고흐는 아를에서 30㎞ 떨어진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하고는 1주일 만에 마음을 다잡고 정원에 핀 붓꽃을 그린다. 게티미술관 소장품도 이때 그린 것이다. 테오도 이 작품을 알아보고는 앙데팡당전에 출품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아이리스’가 지금도 위대한 작품인 것은 예술을 향한 도전을 상징하는 꽃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의 삶과 예술을 알아본 우리가 진정한 삶의 표상일지 모른다. 이 복잡한 세상 오늘만이라도 위안받고 싶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4-2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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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1915년 광화문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10년 전 1915년, 광화문 광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안중식(心田 安中植, 1861~1919)이 ‘백악춘효’(白岳春曉)(1915)라고 제목도, 풍경도 같은 것 두 점을 그렸을까? 인상파처럼 시간 흐름에 따른 빛을 그린 것은 아닐 것이고. 그해 광화문 광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안중식은 소림 조석진과 고종황제 40주년 기념 ‘어진도사도감’을 주관한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었다. 또 최초 미술 교육기관인 ‘서화미술회’ 화사(교수)로 우리 근대 화단 형성에 크게 기여한 화가이기도 하다. 1919년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러니까 ‘백악춘효’는 그가 식견과 필력이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인 54세 때 그린 작품이다.
‘백악춘효’는 광화문을 중심으로 광장과 경복궁, 백악(북악)산을 그린 수묵담채화이다. 두 점을 거의 비슷하게 그렸지만, 근정전과 경회루는 시점이 다르다. 여름에 그린 작품(왼쪽)은 신록이 우거져서 푸르다 못해 검다. 가을에 그린 작품(오른쪽)은 그 빛을 많이 잃었다. 그런데 어딘지 두 점 모두 쓸쓸함이 묻어난다. 지금 광화문 광장과는 전혀 딴 세상이다. 그때도 서울 중심이었기에 인파가 넘쳐났을 것인데 말이다. 그림에는 적막강산이다. 광화문 현판을 놓고 말 많았던 기억으로 현판을 찾아보니, 글자 없이 비었다. 또 이상한 것은 해태상 하나가 사라졌다. 나무 뒤에 숨었는지 보아도 흔적이 없다. 심전은 수수께끼 같은 그림을 왜 두 점이나 그렸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1915년 일을 알아야 한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편에 선 일본은 기세가 등등했다. 그때 우리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1910년에는 경술국치를 당해 국적을 잃었다. 이는 일본이 치밀하게 세운 계획을 수행한 결과였고, 1915년 우리를 회유할 야욕을 드러냈다. 그것은 바로 조선 물품을 모아 전시하는 박람회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로, 경복궁에서 열렸다. 9월 11일부터 10월 30일까지 열리는 동안 166만 명이나 다녀갔다. 서울 인구가 15만 명도 안 되던 시절에 일어난 엄청난 행사였다. 육조거리가 있던 광화문 광장에는 일본풍 물품이 넘쳐났다. 경복궁에는 박람회장으로 쓸 이상한 건물이 들어섰다.
심전은 한탄했을 것이다. ‘춘효’(春曉)는 당나라 시대 맹호연이 자연의 삶을 노래한 시 제목이다. 양귀비와 환관에 휘둘려 국정이 문란해져 민심이 어지럽던 시대에 지은 노래였다. 이 제목을 가져다 쓴 뜻을 생각하면, 쓸쓸함이 왜 묻어나는지 알 수 있다. 다시 100년 뒤, ‘2025년 봄에 무슨 일로 광화문 광장이 난리였지’라며 궁금해하지 않을까?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4-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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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추상화도 아닌데 묘하게 이해 안 되는 작품
이인성(1912~1950) 작품 ‘해당화’는 제목만큼이나 아름답지만 묘하게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무언가 살짝살짝 어긋나는 것이 친숙하게 보이지 않는다. 인간 세상일이 상식과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리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인성은 대구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시절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해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서동진(1900~1970)에게 수채화를 배우다 일본에서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니게 된다. 서동진 후원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 1929년부터 1944년까지 매년 출품하면서 ‘천재 작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대표작은 대부분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 관전(官展)에 출품했던 것들이다. 1934년 ‘가을 어느 날’ 특선을 시작으로 35년에는 ‘경주 산곡에서’로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고, 1937년부터 추천작가가 되었다.
관람자 눈에는 평온하고 따스하지만 친숙하지 않은 ‘해당화’는 조선미술전람회가 마지막으로 열린 1944년에 출품한 작품이다. 이때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라 일상은 물론이고 미술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시기였지만, 욕심껏 크게 그린 그림은 관람자를 압도해 전람회가 열리는 동안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제작 배경이나 설명이 거의 없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해당화’는 어떤 역사나 단일한 사건을 이야기(1944년 입적한 한용운을 기린 것으로 해석한 글도 있다)한 것이 아니라, 공간(캔버스 화면)에 서로 연관성을 찾기 힘든 소재들로 구성돼 있다. 여러 소재가 등장하지만 서로 관계가 애매하다. 이 애매함이 가장 크게 보이는 부분은 등장인물의 관계이다. 엄마와 딸들이라고 하기에는 옷차림이나 행동이 우리 경험과 어긋난다. 셋이 자매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어색하다. 행동도 무엇을 하는지 제각각이다. 이런 애매함을 더 조장하는 것은 화면 분위기이다. 무채색으로 된 먹구름이 짓누르는 화면은 쓸쓸한 느낌마저 든다. 인물은 물론이고 뒤에 있는 염소인지 개인지 모를 동물도 정지되어 있다. 또 땅과 바다 그 사이에 있는 구릉 혹은 바위(?)도 논리적 전개로 볼 수 없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 숨겨놓은 우산, 소라, 잡목들, 심지어 해당화와 바다에 떠 있는 돛단배까지 비합리적이다.
한마디로 ‘해당화’는 풍경화가 아니라 이인성이 인위적으로 구성한 구상화이다. 기묘하게 어긋나 보이는 것을 늘어놓고 보니, 작가 의도가 이런 것인가 할 정도이다. 그는 아쉽게도 38세 나이에 경찰과 시비로 일어난 권총 오발로 사망했다. 전쟁통이던 1950년, 시대적 역사적 상황을 빗대면 인간사 그런 일은 다반사였을 것이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3-26 [1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