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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추상화도 아닌데 묘하게 이해 안 되는 작품
이인성(1912~1950) 작품 ‘해당화’는 제목만큼이나 아름답지만 묘하게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무언가 살짝살짝 어긋나는 것이 친숙하게 보이지 않는다. 인간 세상일이 상식과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그리 이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인성은 대구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시절 ‘세계아동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해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서동진(1900~1970)에게 수채화를 배우다 일본에서 태평양미술학교를 다니게 된다. 서동진 후원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그는 ‘조선미술전람회’에 1929년부터 1944년까지 매년 출품하면서 ‘천재 작가’라는 소리를 들었다. 대표작은 대부분 조선미술전람회와 일본 관전(官展)에 출품했던 것들이다. 1934년 ‘가을 어느 날’ 특선을 시작으로 35년에는 ‘경주 산곡에서’로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고, 1937년부터 추천작가가 되었다.
관람자 눈에는 평온하고 따스하지만 친숙하지 않은 ‘해당화’는 조선미술전람회가 마지막으로 열린 1944년에 출품한 작품이다. 이때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라 일상은 물론이고 미술 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시기였지만, 욕심껏 크게 그린 그림은 관람자를 압도해 전람회가 열리는 동안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제작 배경이나 설명이 거의 없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해당화’는 어떤 역사나 단일한 사건을 이야기(1944년 입적한 한용운을 기린 것으로 해석한 글도 있다)한 것이 아니라, 공간(캔버스 화면)에 서로 연관성을 찾기 힘든 소재들로 구성돼 있다. 여러 소재가 등장하지만 서로 관계가 애매하다. 이 애매함이 가장 크게 보이는 부분은 등장인물의 관계이다. 엄마와 딸들이라고 하기에는 옷차림이나 행동이 우리 경험과 어긋난다. 셋이 자매라고 하기에는 나이 차이가 어색하다. 행동도 무엇을 하는지 제각각이다. 이런 애매함을 더 조장하는 것은 화면 분위기이다. 무채색으로 된 먹구름이 짓누르는 화면은 쓸쓸한 느낌마저 든다. 인물은 물론이고 뒤에 있는 염소인지 개인지 모를 동물도 정지되어 있다. 또 땅과 바다 그 사이에 있는 구릉 혹은 바위(?)도 논리적 전개로 볼 수 없다. 마치 ‘숨은그림찾기’ 하듯 숨겨놓은 우산, 소라, 잡목들, 심지어 해당화와 바다에 떠 있는 돛단배까지 비합리적이다.
한마디로 ‘해당화’는 풍경화가 아니라 이인성이 인위적으로 구성한 구상화이다. 기묘하게 어긋나 보이는 것을 늘어놓고 보니, 작가 의도가 이런 것인가 할 정도이다. 그는 아쉽게도 38세 나이에 경찰과 시비로 일어난 권총 오발로 사망했다. 전쟁통이던 1950년, 시대적 역사적 상황을 빗대면 인간사 그런 일은 다반사였을 것이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3-26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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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봄바람에 구름도 바다도 가만 있지 못하네
1874년 4월 프랑스 파리,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와 살롱전에서 낙선한 작가들의 그림을 본 비평가는 그저 ‘인상’이나 그리는 일당이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하지만 여기 출품했던 이들이 세계 미술의 역사를 뒤바꿀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인상파(Impressionism)에 대해서 그 비평가가 가졌던 몰이해는 15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에게 있는지 모르겠다.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공기에 따라 색이 변하는 것을 표현한 이래, 다시 또 햇볕 속에 다양한 색이 있다는 과학적 사실을 그림으로 표현하려던 이들이 인상파였다. 이런 인상파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일본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귀국한 고희동(1886~1965)부터이다. 그리고 인상파 이론을 잘 이해하고, 가장 인상파다운 작품을 남긴 작가는 오지호(1905~1982)라고 평가한다.
오지호는 동경미술학교 양화과에 1926년 입학해 인상파를 비롯한 당시 최신 미술 사조를 배우고 1931년 귀국한다. 이후 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알았던 김주경(1902~1981) 소개로 개성 송도고보 교사로 1935년부터 재직하며, 송악산 아래 초가에서 1944년까지 살았다. 이 시기 우리나라 최초로 원색판 화집인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1938)을 발간했다. 이 화집에 실린 김주경 작품은 남아있지 않고, 오지호 작품은 ‘시골 소녀’ ‘임금원(林檎園)’ ‘처(妻)의 상(像)’ 세 점만 현재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하면, 인상파는 자연 풍경의 변화를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인상을 캔버스에 기록하려 했다. 특히 인상파가 실현하려는 목적과 방법에 가장 잘 상응하는 것은 한반도 자연이라고 한 오지호의 주장을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자연은 원근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고 명징하다. 이 맑은 공기를 통과하는 광선은 물체의 내부까지 투과되어 표면색과 합쳐서 찬란하고 투명한 색조를 드러낸다.”
‘항구’(1980)는 유럽 여행을 다녀와서 그린 것으로 비록 우리나라 항구를 그린 것은 아니지만, 공기가 어떻게 사물의 형태를 변화시키는지 볼 수 있다. 항구에 거칠게 휘몰아치는 이른 봄바람에 두꺼운 잿빛 구름도 바다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모습이다. 항구에 묶인 배는 물론이고 다닥다닥 붙은 몇 층짜리 건물도 바람에 춤추는 듯하다. 비약일지 몰라도 지금 우리들 마음에 빗댈 수 있을 듯하다.
얼마 전 모 공공미술관에서 개최한 오지호 특별전시가 끝났고, 2월에 시작한 ‘인상파’ 전시가 진행되고 있지만, 여전히 “인상파는 인상을 느낌으로 그린 화파”라는 오해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3-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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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예술도 상부상조해야 살아남는다
홀로·혼자·개성 등등, 이런 말이 최우선 가치를 갖는다고 생각되는 예술도 서로 돕고, 도우려는 행동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현악 4중주’의 서로 다른 소리가 화음을 이루어야 아름답듯이, 한 장에 여러 화가가 그린 ‘합작도’(合作圖)도 조형과 공간이 조화되어야 좋은 그림을 될 수 있다.
동양화에서 합작도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니지만 희귀한 것도 아니라서, 기억하는 작품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세상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해 국권을 잃었던 1900년대 초반 언제인가 그려진 것으로, 길(吉)한 의미를 뜻하는 꽃과 식물, 고동기(古銅器)나 도자기를 소재로 그린 ‘기명절지도’(器皿折枝圖)이다. 자신이 그린 기물 옆에 호(號)를 쓰고 낙관을 한 5명이 힘을 합쳐서 그렸기 때문에 합작도라고도 부른다.
오른쪽부터 보면, 괴석과 국화는 안중식(1861~1919)이, 고동기는 김규진(1868~1933), 영지와 대나무는 이도영(1884~1933)이 그렸고, 화분과 난은 김응원(1855~1921)이 그리고 가장 왼쪽은 연꽃과 게, 쏘가리는 조석진(1853~1920)이 그렸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그린 것인지 화제(畫題)도 없고, 작품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하지만 안중식이 1919년에 사망한 것을 고려하면 그 이전에 그려진 것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이들은 당시 장안에서 유명한 예술가들이었고, 사회지도층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었던 안중식과 조석진이 합작도의 시작과 끝을 맡았다. 그리고 한 가운데는 가장 젊고 안중식의 제자였던 이도영이 담당했다. 당시 사군자 중에서 ‘난’으로는 최고였던 김응원, 이렇게 넷은 1911년에 개설한 ‘서화미술회’에서 동양화를 가르치는 화사(畫師)였다. 고동기를 그린 김규진도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관직에 있었고, 장안에 사진관을 처음 열기도 했다. 하지만 그보다 장안에서 최고의 화가이며 서예가로 꼽혔고, 1915년에 ‘서화연구회’를 개설하여 서화미술회와 쌍벽을 이루는 교육소로 성장시킨 인물이었다.
이 합작도는 어쩌면, 우리의 근대화단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서화협회’를 설립하려는 논의를 시작한 1915년 이후 언젠가 그렸을 것이다. ‘서화협회’는 1918년부터 1936년까지 민간 전람회인 ‘서화협회전람회’를 개최하면서, 1922년에 일제가 시작한 ‘조선미술전람회’에 맞서 우리의 근대화단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한 중요한 단체였다. 이런 단체를 결성하기 위해 장안에서 미술교육에 활약하는 화가들이 모인 김에 서로의 뜻을 모으는 어느 때인가 그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1915년에서 19년 사이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작은 종이가 만든 좁은 공간이지만, 이 합작도를 보면서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하는데 필요한 것은 협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창대하고 아름다운 우주를 창조할 수 없다. 다른 소리와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다운 4중주를 연주할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이들과 상부상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작도를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2-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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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한겨울 삭풍 견딘 '매화꽃'을 쳐다본 의미는?
구멍이 숭숭 뚫린 괴석 뒤에 선 나뭇가지에 한겨울 바람을 견디며 매화꽃 송이가 맺혔다. 봉오리를 활짝 터뜨린 것, 싹을 틔우려는 것, 이제 막 꽃잎을 피우려는 것, 가지각색이지만 삭풍은 함께 견디어 냈다. 높은 혹을 가진 거위가 예리하고 날렵하게 꺾이고 꺾인 가지에 달린 매화나무를 지나며 무심코 고개 들어 꽃을 본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수묵화(사군자, 기명절지도 등)는 소재가 가진 깊은 뜻을 새기거나 음미하려고 그린 그림이다. 부연하면 역사 혹은 사건을 기록하거나 자신의 부귀를 알리려 그리는 서양화와 달리, 서화(동양화)는 몸과 마음을 수신(修身)하기 위해 그리거나 감상하며 마음을 다스리려는 것이었다. 이에 빗대어 이 작품을 생각하면 갖은 외압과 부당에 굴하지 않고 양심을 지키고 있는지 눈앞에 핀 매화꽃을 보며 스스로 물어보려는 순간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이 작품은 여기(呂紀, 1439~1505)의 ‘사자머리 거위’(獅頭鵝圖軸)이다.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명대 서화로 ‘경기도박물관’에서 기획한 ‘명경단청: 그림 같은 그림’에 출품된 작품이다. ‘사자머리 거위’가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지만, 이 그림은 시골에서 보았던 거위와 매화나무를 떠올릴 수 있게 사실적으로 그린 화조도(花鳥圖)이다. 명(明)의 9대 황제인 홍치(1488~1505) 연간에 활동한 여기는 사생파(寫生派)를 대표하는 궁정화가였으며, 화려하고 정교하게 그린 ‘화조도’를 최고로 평가받았다. 이처럼 격 높은 작가가 그저 오동통한 거위를 보라고 그렸을 리 없다. 매화와 사자머리 거위가 주제일 리 없는 것이다.
조선에서 ‘기러기’(거위 조상이 기러기이다)는 노인의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그렸고, 중국에서는 거위를 높은 벼슬아치를 상징한다는 소리가 있으니, 이를 종합하면, 거위는 학식이나 지위가 있는 나이 지긋한 선비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징인 거위가 지조와 절개를 뜻하는 사군자(四君子) 매화를 바라본다는 것은 자신이 한 행동과 생각을 되돌아본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중국 남북조시대(5~6세기)에 활동했던 사혁(謝赫)이 〈고화품록〉(古화品錄)에서 말한 ‘화육법’(畵六法)은 그림을 비평(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하지만, 그리는 법이기도 하다. 자연과 사물이 가진 외양을 모방해 그대로 옮겨내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정신까지 옮겨야 진정한 서화가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림을 진정으로 완성하는 일은 그림이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고 몸으로 실천하여 수행하는 것까지이다. ‘사자머리 거위’를 다시 해석하면, 거위가 매화를 쳐다본 뜻은 높은 도덕과 절제심을 갖추기 위해 수행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경고이며, 스스로에 대한 다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2-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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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고통 마주하려 극혐하는 뱀 그린 20대 천경자
‘푸른 뱀’의 해(을사년)가 밝은지 며칠 지났지만, 기대보다 불안의 소리가 크다. 희망을 말하는 이들이 사라졌다. 기대와 희망보다는 고통과 시련에 과감히 마주해야 한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20대의 천경자(1924~2015)는 뱀 수십 마리를 일부러 그렸다. 스스로 두려움에 맞서기 위해서다. 그녀 삶의 태도에서 지혜를 엿보게 된다.
천경자는 ‘여자미술전문학교’(일본 도쿄)에서 일본화를 배우고 귀국하던 중에 도움받은 명문대 중퇴생과 1944년에 결혼하여 아이 둘을 낳았다. 1948년에는 전남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해 형편이 좋아지나 했지만, 장결핵을 앓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생계를 위해 핏덩이 아이 둘을 키우며 광주와 목포에서 교사로서의 일과 그림 그리기를 같이했다.
그러다 목포 전시회에서 유쾌하고 활달한 남자를 만난다. 이게 새로운 불행의 시작이다. 깊은 사랑이 긴 기다림으로 된 이유는 그가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1950년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나라의 존망이 위기에 있었고, 사랑하던 동생은 결핵으로 1951년에 세상을 떠난다. 약도 제대로 먹이지 못한 죄책감은 그녀에게 가장 큰 고통과 시련이었다.
1951년 어느 날, 아픔과 고통을 마비시킬 정도로 무서운 것을 찾다 광주역 앞에서 뱀을 파는 것을 기억했다. 천경자는 그 뒤로 매일 드나들며 뱀을 관찰하고 스케치한다. 고통을 잊기 위해 몸서리치도록 징그러운 뱀을 마주하며 그리고 또 그렸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생태’(1951)이다. 날카로운 삼각형 머리를 들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푸른 뱀, 알록달록 꽃무늬로 치장한 뱀, 두 마리가 서로 엉켜 교미하는 듯한 모습으로 고통과 시련을 담아냈다. 정면을 주시하는 뱀의 머리에서 서늘함을 볼 수 있다.
지루한 휴전회담이 지속되던 1953년 3월, 천경자는 임시수도인 부산에 개인전을 열기 위해 온다. 먼저 ‘대한미협전’(부산 칠성다방에서 개최)에 ‘생태’와 ‘닭’ 등을 출품했는데, ‘생태’는 징그럽다는 이유로 주방 바닥 한 귀퉁이로 밀려났다. 이 그림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안 시인 공초 이상순이 동네방네 소문내는 바람에 손님이 몰려들었다. 이어진 남포동 ‘국제구락부’(현주소는 중구 남포길34)의 개인전에는 아예 다방 문을 닫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사람들은 ‘생태’라는 그림의 의미를 구구절절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챘다. ‘고통은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마주하는 것이다’라는 사실을 말이다. 이 작품은 천경자라는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계기가 된다.
진짜 예술가는 고통과 시련을 회피하지 않는다. 70여 년 전 가녀린 몸으로 온 세상을 마주했던 20대에 이름없는 화가 천경자의 자세를 오늘 다시 새겨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2025-01-08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