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맑은 날 날벼락이라는 공포를 예술화한 뭉크의 '절규'
				
				뭉크, 절규, 1895, 석판화. 뭉크미술관 소장.
				
			뜬금없이 뭉크의 절규가 머릿속에서 맴돈다. 맑은 푸른색이 이렇게 하늘에 높은 계절인데 공포를 떠올리는 것이…. 뭉크는 정신적으로 문제를 가진 화가였지만, 절규는 자신 혹은 우리의 비명을 그린 것이 아니다. 마구 쓰이는 자연의 비명이고, 불안한 사회가 짓는 절규이다.
1863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뭉크는 심각한 가족력으로 불안과 공포에서 시달리면서도 81년이나 살았다. 어머니와 누나가 결핵으로 사망했고, 여동생과 아버진 우울증을 앓았고, 남동생은 결혼하고 몇 달 만에 사망한 것이 뭉크의 가족력이다. 그는 공과대학에 진학했지만 바로 그만두고, 1880년 크리스티아나 왕립 드로잉아카데미에 입학해 그림을 배운다. 지지자의 후원으로 파리를 방문해 고흐와 고갱 등에게 영향받아 작품을 제작하던 그는 1892년 베를린미술가협회 초청으로 베를린에서 야심 찬 전시를 열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작품을 내려야 했다. 성(性)과 죽음을 그렸다고 신문과 비평가들 등쌀에 베를린미술가협회가 난상 토론을 벌이면서 급기야 협회가 둘로 쪼개지는 사태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베를린 분리파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만들었고, 뭉크가 “나는 파리에서 예술을 배웠고, 베를린에서 예술가가 되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유명 화가로 떠오르게 했다. 1910년대에 50대 뭉크는 베를린에서 젊은 작가들의 우상이 되었고, 1927년 베를린국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면서 북유럽을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는다. 이후 노르웨이로 돌아와 1916년 이후에는 오슬로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에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서 자기 작품을 퇴폐미술로 낙인찍어 83점을 압수하고 노르웨이를 점령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자, 그는 자신의 유산과 작품을 오슬로에 기증한다는 유서를 1940년 작성한다. 그리고 4년 뒤 1944년 평생 불안과 공포에 맞서던 생을 마감하고 만다.
뭉크의 ‘절규’는 1893년 파스텔로 처음 그려진 이후 파스텔 2점, 유화 혼합재료, 판화, 재료만 따지면 5가지 버전이 있다. 판화에 채색한 것까지 더하면 6가지가 있다. 1893년 두 번째로 그린 작품이 가장 많이 알려졌고, 1895년 판화와 파스텔로 다시 그렸다. 마지막 버전은 1910년 유화로 그려진 것이 남아 있다. 이 주제로 그린 작품이 30여 종이 넘을 정도로 뭉크에게 절규라는 주제는 그의 예술세계에서 큰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절규’는 1892년 1월 뭉크가 ‘자연을 관통하는 커다란 비명을 들었다’라고 기술한 것에서 흔히 생각하듯 화면 속 사람의 절규가 아니다. 이것이 1895년 파스텔로 그린 작품이 소더비에서 1억 2000만 달러에 낙찰된 이유이고, 자연의 비명을 우리에게 들을 수 있게 한 값이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