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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은 한강변에 지었어야 했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세계 최대 원전밀집지역인 동남권의 주민들은 수도권에는 왜 원전을 짓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 기술적으로 문제가 있는지요?”
2012년 4월 고리1호기 문제와 관련해 부산시청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당시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 김종신 사장은 이런 질문을 받는다. 이에 김 사장은 두고두고 동남권에서 회자되는 답을 남겼다. “수도권은 인구밀집 지역이라 원자력발전소 입지로 적합하지 않습니다.”
귀를 의심한 기자들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동남권도 인구밀집지역이지 않느냐”고 반박하자 김 사장은 “반경 몇 km 이내라는 기준이 있고…”라며 얼버무렸고 기자회견장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한강변 원전' 밈의 등장
원전 문제가 이슈로 떠오를 때마다 자주 소환되는 이 에피소드는 원전을 이고 사는 지역민의 분노를 넘어 원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으로 발전한다. 수도권은 2023년 기준 한전이 그해 판매한 전체 전력량의 40%에 가까운 전력을 소비할 만큼 전력 사용량이 많은 지역이다. 이런 '전기 먹는 하마' 수도권에 원전을 지으면 될 텐데 굳이 수도권 대척점인 동남권을 세계 최대 원전 밀집지역으로 만들고 전국 산야를 4만 개가 넘는 대형 송전탑으로 뒤덮는가에 대한 물음이다. 전문가들이 한수원 사장처럼 얼버무리는 사이 그 물음에는 답이 달리기 시작했고 결국엔 ‘원자력 발전소를 서울 한강 가에 지으면 좋은 점’이라는 밈으로까지 발전했다. 풍부한 수자원에다 송전 과정의 비용 절약, 수도권 일자리 창출 등 절묘한 풍자를 곁들인 밈에 많은 이들이 집값 안정화와 수도권 인구 밀집 현상 해결까지 가능하다며 호응하기도 했다.
다시 들여다 봐도 기발한 밈을 보면서 드는 의문점 하나. 과연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서는 처음 지을 때부터 동남권 등 수도권에서 먼 지역에만 짓자는 논의를 했던 것일까. 그래서 원전 부지를 처음 결정할 때의 과정을 밟기 위해 한전의 1970년 ‘원자력발전소 건설현황’을 직접 찾아봤다.
■첫 원전 부지 후보였던 한강변
당시 정부는 1964년부터 원전 부지 선정에 착수해 부산·울산 지방 외에 경인, 목포, 군산까지 모두 4곳에 대한 예비조사를 실시했다. 이듬해엔 국제원자력기구(IAEA) 조사단과 함께 경인 지방의 경기도 고양시 행주 지역과 부산·울산 지방의 고리와 송정(공수포) 등 3곳으로 후보군을 압축했다. 원전 입지 조건 검토에 있어선 행주 지역, 즉 한강변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러던 것이 한전이 최종적으로 ‘행주 지역은 인구조밀한 서울에 인접할 뿐만 아니라 계절에 따라 탁월풍(편서풍을 뜻하는 듯)이 서울을 향하여 부는 빈도가 높다’는 이유로 행주 지역을 최종 부지에서 제외하면서 고리 쪽으로 입지가 결정되고 말았다. 서울만 인구밀집 지역으로 챙기는 분위기는 그때부터 시작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내용이다. 탁월풍을 문제로 삼는다면 이후 전남 영광 같은 지역에는 원전을 설치해선 안 되는 거였다. 영광 한빛원전에서 사고가 난다면 탁월풍의 영향을 받게 되는 그 동쪽 지역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전기 더 필요하다는 수도권
이 와중에 지난달에는 최근 11개월 동안에만 수도권에서 데이터센터 사용 목적으로 엄청난 전기 사용 신청이 접수됐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전에 제출된 전력계통영향평가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8월부터 올해 상반기까지만 한전에 접수된 전기 사용 신청은 모두 290건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70%에 가까운 195건이 수도권에 집중됐으며 그 용량은 20GW에 이른다. 원전 하나의 전력 생산량이 1GW 내외인 점을 감안하면 무려 원전 20기를 가동해야 할 판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지금이라도 원전을 한강변에 지으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AI에게 원전을 한강변에 지을 때 나타나는 영향을 물어봤다. 널리 퍼져 있는 데이터를 AI가 학습한 결과물일 터이므로 타당성이 꽤 있는 답이 나오리라 기대했다. 역시나 AI가 내놓은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1. 송전 비용 절감: 수도권에서 전기 수요가 가장 많은데, 한강변에 원전을 지으면 소비지 근처에 발전소가 위치해 송전선로 설치와 유지 비용이 크게 줄어든다. 실제로 원전 송전망 구축 비용이 원전 전체 건설비의 1/3에 달한다는 분석이 있다.
2. 에너지 효율 상승: 전기 생산 지역과 소비지가 가까울수록 송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에너지 손실이 감소한다.
3. 풍부한 냉각수 확보 가능: 한강은 냉각수 공급량과 수온 면에서 원전의 기술적 조건을 충족한다는 평가가 있다. 냉각수로 충분히 활용이 가능하며, 일부 내륙국가들도 강을 발전소 냉각수로 활용하고 있다.
4. 사회적 갈등 비용 감소 및 지역 일자리 창출: 수도권 주민이 원전 수용에 적극적인 경우, 기존 해안지역 원전 수용 주민들의 부담을 완화하고, 서울 근교에 관련 일자리도 창출될 수 있다.
5. 인구 밀집 지역 내 사고 위험: 한강변은 수도권 인구가 밀집한 지역으로, 만에 하나 원전 사고가 발생할 시 그 피해 규모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질 수 있다. 안전 문제에 대한 국민적 정서와 심리적 저항이 매우 크다.
6. 생태계 영향: 냉각수로 활용한 뒤 배출되는 온수로 인해 한강 생태계가 변형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방류된 온수로 인한 평균 수온 상승, 국지적 생태계 파괴 등이 우려된다.
7. 폐기물과 안전 관리 문제: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방사성 폐기물 처리와 사고 후의 대규모 피난 및 관리 문제가 인구가 많을수록 복잡해진다.
5~7번의 경우 원전을 전부 폐기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수반되는 문제이며 동남권이 늘 머리에 이고 사는 문제이기도 하므로 논외로 하고 나머지 이점들을 고려한다면 한강변에 원전을 짓지 않아야 할 논리를 찾기가 더 어려울 듯하다.
■이제라도 한강변에?
수도권에서만 원전 20기 수준의 추가적인 전력 소비를 예고하는 나라에서 원전을 지역에만 잔뜩 지어놓은 기존 정책이 한계에 다다른 것은 명확해 보인다. 가동 중단 원전을 해체하겠다는 애드벌룬 이면에 사용후핵연료 처리 문제를 얼버무리며 영구 핵폐기장화 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게 현실이고 보면 정책의 한계를 인정하고 방향 전환을 시급히 모색해야 옳다. 수도권용 전력 송전을 위해 전국 산야에 4만 개 이상 설치된 거대 송전탑은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등을 위해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나야 할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 비용은 민도가 높아진 만큼 천문학적으로 올라갈 공산이 크다. 이 같은 비용까지 고려한다면 원전만큼은 혹시 추가 건립을 고려한다면 이제 한강변도 후보에 넣는 게 맞을 듯하다. 다행히 해외에서 새로 각광받는다는 SMR(소형 모듈 원자로) 같은 신기술의 등장은 부지 확보 문제 같은 것도 쉽사리 해결 가능하다니 더욱 고려해 봄직 하지 않은가.
특정 지역 주민들만 위험에 놓여도 괜찮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전력 생산 정책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됐다.
2025-08-2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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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금 ‘뚝딱’ 연금술 성공…금값 대폭락?
금은 매우 특별한 금속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금은 귀금속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인들이 금으로 투구를 만든 데 이어 세계 전역에서 최상위 지배 계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왕관과 팔찌 등의 제작에 금을 사용했다. 금을 신성하게 여겨 궁전이나 신전을 금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금은 인류 역사를 바꾼 금속이기도 하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실의 후원으로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는 등 15~17세기 유럽에 대항해시대 열풍이 분 것도 ‘황금 제국’을 발견하려는 열망에서 기인한다. 금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화폐 경제를 떠받치는 기둥이기도 하다. 통용 화폐들은 기본적으로 금본위제에 의해 그 가치를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 밖에 의료와 전자공업 등 많은 분야에서 금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인류는 고대부터 흔한 금속을 금으로 바꾸는 연금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시도를 이어왔다. 특히 중세 들면서 연금술이 크게 유행했다. 이후 실증적인 과학적 방법론이 도입되면서 연금술은 점차 퇴색됐다. 과거의 연금술은 실제로 금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화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최근 납 등을 활용해 금을 만들어내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인류가 고대부터 갈망하던 연금술이 우연이 아닌 정교한 연구 계획에 의해 결실을 거둔 것이다. 다이아몬드의 경우 인공 다이아몬드가 시장에 나오면서 희소성 하락으로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금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 유럽입자물리연구소, 납을 금으로
인류 최초로 연금술사들의 꿈을 현실화시킨 곳은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CERN은 주로 거대한 입자 가속기를 포함한 고도의 과학장비를 이용해 여러 가지 실험과 관찰을 진행한다. 이곳의 연구진은 프랑스에 설치한 거대강입자충돌기(LHC)를 통해 납을 금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 연구결과를 지난 5월 국제학술지인 '물리학 리뷰 저널(Physical Review Journals)'에 발표했다. 납을 금으로 바꾸는 과정을 실험적이고 체계적으로 구현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받는다.
LHC는 지하 100m 아래 설치된 거대 과학 실험 장치로 가속 터널 길이가 27km에 달한다. 입자를 빛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시켜 충돌 때 발생하는 물리 현상을 탐구하는 최첨단 장비이다.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져 있다. 양성자와 중성자, 전자가 몇 개인지에 따라 원자의 성질이 달라진다. 납은 82개의 양성자, 금은 79개의 양성자를 갖고 있다. 이런 특성을 고려해 CERN 연구자들은 LHC를 통해 빛에 가까운 속도로 납에 광자 빔을 충돌시켜 3개의 양성자를 방출하도록 했다. 그 순간 납이 금으로 변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원들은 2015~2018년 실시한 충돌 실험을 통해 860억 개의 금 원자핵(약 29조 분의 1g)이 생성됐다고 계산했다. 금 원자의 대부분은 약 1마이크로 초(백만 분의 1초) 동안 짧게 존재했다. 게재된 논문에서 연구진들은 "납을 금으로 바꾸는 것은 중세 연금술사의 꿈"이라며 "LHC에서 이 꿈이 실현됐다"고 밝혔다.
비록 연금술사들의 꿈은 이뤘지만 이 실험 결과의 미래 가치를 무조건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연구 결과가 전해지자 지구촌에서는 인류 역사와 함께 한 ‘금 불패 신화’가 이제 막을 내릴 것이라는 관측도 일각에서 제기됐다. 하지만 충돌 실험을 통해 얻은 금의 양이 극히 미미한 데다 이마저도 불안정해 이내 다른 입자로 분해됐다. 반면 LHC 운용에 소요되는 비용은 천문학적이다. 전기 비용만 수천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됐다. 즉, 연금술을 구현했지만 경제성을 확보하지는 못한 것이다. 따라서 LHC의 이번 성과가 당장 국제 금 가격 등에 영향을 줄 가능성은 없을 것으로 전망됐다.
■ 핵융합 기술, 수은을 금으로
지난달 미국의 한 스타트업 기업이 핵융합 기술을 이용해 수은을 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해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에너지 뉴스 매체인 에너지 리포터에 따르면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 자리한 ‘마라톤퓨전’이 핵융합 기술을 이용해 수은을 금으로 변환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마라톤퓨전은 핵융합로 내부에서 수은-198 동위원소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는 방법을 사용하면 금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중성자 충돌로 수은-198은 수은-197로 변환되고, 다시 이 수은-197은 며칠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안정적인 형태의 금인 금-197로 변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마라톤퓨전은 이 방식을 사용하면 1기가와트(GW)급 핵융합 발전소에서 연간 최대 5.4t의 금을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추산했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연간 5억 5000만 달러 이상에 달한다. 이 업체는 “이 방법이 대규모로 확장 가능하고, 실용적으로 달성 가능하며, 경제적으로 거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기술이 실현될 경우 일반적인 핵융합 발전소의 수익을 거의 두 배로 늘려 핵융합 에너지를 단순한 청정에너지 대안을 넘어 경제적으로도 매우 매력적인 대안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도 이어진다.
마라톤퓨전이 발표한 논문은 아직까지 전문가들이 논문을 평가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동료심사’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조금 더 추이를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또 이렇게 생산된 금은 방사성 물질이기 때문에 안전성을 위해 14~18년 정도 보관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기술이 상용화될 경우 핵융합 발전소는 전력을 생산하면서 부산물로 금을 대량 생산할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기존 금의 가치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 눈부신 기술 발전, 금의 미래는?
금은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꼽힌다. 가장 큰 이유는 희소성이다. 유통되는 금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공급 과잉에 따른 폭락 우려가 적어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한국거래소 기준 국내 금값은 3.75g(한 돈)당 56만 1788원. 2014년에는 17만 원 대에 거래됐다. 금은 인플레이션 등 경기 변동에 대비하는 헤지 기능뿐만 아니라 투자 측면에서도 ‘불패 신화’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내구성이 강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물성이 변하지 않는다.
금이 희소성을 현재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금을 얻으려면 땅에서 캐내거나 사금을 채취하는 등 여전히 전통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금협회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현재까지 채굴된 금의 양을 21만 6265t으로 추산한다. 채굴된 금의 대부분은 귀금속으로 가공돼 개인, 기업들이 갖고 있거나 각 나라 중앙은행과 금융기관들이 보관하고 있다. 경제성을 가진 미 채굴 상태의 금은 5만 4770t에 달한다. 1년 평균 지구에서 채굴되는 금의 양은 3t 내외로 추정된다. 이 속도로 향후 15년가량이 지나면 더 이상 전통 방식으로 금을 생산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물론 금은 지구 곳곳에 널려있다. 심지어 바닷물에도 섞여있다. 문제는 경제성이다. 예를 들어 바닷물의 경우 100만t당 약 6g의 금이 포함되어 있지만 채산성을 맞추려면 한층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값싼 물질을 금으로 변환하는 ‘연금술 방식’의 금 생산 방식, 채산성이 떨어지는 장소인 심해 등에 매장되어 있거나 바닷물에 미량 포함된 금을 경제적으로 채굴하는 기술 등의 등장과 상용화는 이미 예고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와 마라톤퓨전이 전한 소식은 그 서막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다만 실제로 금을 인위적으로 대량 생산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그런 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국제 협약을 통해 금 생산량을 조절할 가능성이 높다. 무분별한 생산으로 금의 희소성이 흔들릴 경우 금본위제에 근거한 기존 화폐 체계 등도 큰 충격을 받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금술’의 채산성을 높이려는 도전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금이 언제까지 ‘희소성’을 유지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2025-08-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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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K조선, 트럼프 마음 사로잡은 이유는?
최근 타결된 한미 관세 협상에서 가장 주목받은 키워드는 ‘마스가(MASGA·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는 단순한 산업 투자를 넘어 쇠퇴한 미국 조선업을 한국 기술력으로 되살리겠다는 전략적 제안이었다. 마스가 프로젝트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표적 정치 구호인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에 ‘조선업’을 의미하는 ‘Shipbuilding’을 더해 붙인 이름으로,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이다. 마스가 프로젝트는 1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펀드로 미국 현지 신규 조선소 건설뿐 아니라 기존 조선소 인수, 선박 건조, 공급망 재구축, 유지·보수·운영(MRO), 인력 양성 등을 하는 것이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1일 기자회견에서 “오늘 합의에 이르도록 가장 큰 기여를 한 부분은 마스가 프로젝트”라며 “트럼프 대통령도 한국 조선업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왜 K조선의 매력에 빠진 것일까.
■ 트럼프와 한국 조선업의 인연
트럼프와 한국 조선업의 인연은 2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적인 부동산 투자가였던 트럼프는 1998년 6월 4일 나흘 체류 일정으로 방한해 대우그룹 계열사였던 대우중공업(현 한화오션)의 거제 옥포조선소를 방문했다. 당시 트럼프는 개인 요트로 사용하기 위해 구축함 1척을 발주하겠다는 의향을 내비쳐 화제를 모았다. 방한 당시 옥포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구축함을 둘러보면서 즉석에서 발주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본체를 인수한 후 미국에서 내·외장 인테리어 작업을 거쳐 요트로 개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계약까지 성사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트럼프는 지난해 11월 재선에 성공한 뒤 당선인 신분으로 윤석열 전 대통령과의 첫 통화에서 “미국의 조선업에 한국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한국의 세계적인 군함과 선박 건조 능력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 선박 수출뿐만 아니라 보수·수리·정비 분야에서도 긴밀하게 한국과 협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7년 전 거제도의 한국 조선소를 직접 방문해 선박 발주까지 검토했을 정도니 한국 조선업에 대한 관심이 예전부터 있었던 셈이다.
■ 마스가, 관세 협상의 게임체인저
이러한 맥락을 간파했던 우리 정부는 K조선을 지렛대로 삼아 미국과 막판 관세 협상을 벌이면서 마스가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정부는 관세 협상 당시 ‘마스가’ 프로젝트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마스가’를 인쇄한 모자를 만들어 갔다. 마스가 협력안을 담은 가로, 세로 1m 패널을 이용해 프로젝트 내용을 압축적으로 담는 치밀함을 발휘했다. ‘마스가’ 모자 시안은 6월에 이미 챗 GPT를 이용해 디자인해뒀다고 한다. 골프를 좋아하는 트럼프의 취향을 반영해 빨간색 모자를 최종 발탁했다. 그 뒤 동대문의 섬유 업체들을 수소문해 직접 찾아가 비밀리에 제작했다. 마스가 모자는 관세 협상이 급진전함에 따라 워싱턴 직항 항공기를 통해 김정관 산업부 장관 등 협상단에 전달됐다. 협상단은 이 모자와 마스가 프로젝트 개요를 담은 패널을 가져가 트럼프 대통령,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 등 미 고위급에 양국 산업 협력의 필요성을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지난 3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마스가 모자’ 실물을 공개하며 “조선이 없었으면 협상이 평행선을 달렸을 것”이라며 “마스가 프로젝트 제안이 이번 협상의 열쇠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조선 투자 아이디어가 협상의 게임체인저가 된 것이다.
■ 미국은 왜 조선업 재건에 매달리나
조선업 재건은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하는 제조업 부흥 계획의 핵심 퍼즐 조각이자, 중국의 해양 패권 장악 시도를 견제하는 주요 수단이다. 미국은 한때 세계 최강의 조선 강국이었지만, 이제는 산업 기반 자체가 붕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간·해군 조선소를 막론하고 시설 노후화, 인력 유출, 투자 부족 등으로 선박 건조 역량이 급감했다. 미 해군은 기존 함정을 유지·보수하는 것도 벅찬 상태다.
미국 조선업 쇠락을 야기한 원인의 하나로 꼽히는 게 20세기 초 제정된 ‘보호무역주의’ 법률이다. 1920년 제정된 ‘존스법’은 미국 내 연안 해상 운송은 미국에서 건조된 선박과 승무원에 대해서만 허용하고 있다. 1960년대 제정된 ‘번스-톨레프슨 수정법’은 국방·군사 관련 선박은 반드시 미국 내에서 건조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두 법률 모두 외국 기업의 미국 내 조선시장 진입을 사실상 가로막아 왔는데, 자국 산업 보호를 위해 시행된 법률이 오히려 산업 경쟁력을 저하하는 부메랑으로 작용한 것이다. 여기에다 1980년대 이후 보조금 축소와 과도한 산업보호정책 등으로 경쟁력을 상실하며 현재 세계시장 점유율이 1% 미만으로 떨어졌다. 지난해 전 세계에서 발주된 1910척 중 미국 조선소가 수주한 물량은 2척에 불과하다. 특히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핵항공모함, 이지스함 등 첨단 군함과 달리 상선 부문의 건조능력이 사실상 상실됐다. 이 때문에 상선 건조 능력 부활은 미국에서도 주요 과제다.
미국이 조선 약소국으로 전락한 사이 글로벌 물류의 90%가 움직이는 바닷길을 중국이 잠식하고 있다. 세계 129곳 항만과 글로벌 물류 데이터도 장악하고 있다. 중국의 세계 조선 시장 점유율은 50%를 넘겼고, 보유 군함 수는 미국을 앞질렀다. 미 의회조사국(CRS)은 4월 “중국 해군은 이미 370척 이상을 보유한 세계 최대 해군으로 2030년까지 435척의 함정을 보유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 해군은 지난해 기준 296척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에 비해 조선업 인프라가 절대적인 열세에 처한 미국의 위기감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 조선업계 미국 진출 기회 삼아야
이번 마스가 프로젝트는 한국 조선업계의 미국 시장 진출 물꼬를 터줄 계기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업계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미국 해군 함정 건조 및 MRO 시장 진출 가능성이다. 미국은 2054년까지 연간 300억 달러(약 42조 원)를 투입해 기존 296척의 보유 함정 수를 381척으로 늘린다는 계획이다. 마스가 프로젝트를 통해 이 가운데 일부 물량을 한국 조선업체가 수주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현재 한국 조선소는 미국이 안보를 이유로 외국 조선소에서 미 해군 함정 건조를 금지한 ‘번스-톨레프슨 수정법’ 때문에 비전투함 MRO만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예외’를 인정하면 전투함 MRO나 공동 건조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또 상선 건조 기술이 일본보다 우수하고, 이지스함 등 전투함 구축 능력과 크레인 제작 기술을 모두 갖춘 한국 기업들이 미국 조선업 부활 시장에 올라탈 기회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조선업 재건 의지는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될 수 있어 한국엔 장기적 먹거리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또 미국 조선업 부흥은 한국 조선업에 장기적 성장 기회 제공, 글로벌 시장 진출 교두보 확보, 기술 확산 및 국방·안보 협력 확대에 긍정적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반면 조선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분야가 아니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초기부터 과도한 투자에 나서기보다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주는 식의 ‘살라미식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 조선업의 공급망이 끊겨 있고, 숙련 인력도 고갈돼 정상 궤도에 올리기까지 예상보다 시간과 비용이 더 들어갈 수도 있다. 또 미국에 산업 생태계 자체를 이전하는 수준의 기술∙인력 유출을 주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업계 안팎에서 제기된다.
2025-08-0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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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AI 댕냥이, 누구나 성공할까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SNS를 열면 눈이 휘둥그레지는 이미지와 영상이 쏟아지는 세상이다. 댕냥이(개와 고양이) 셰프의 활약은 흔하고, 코끼리와 사자가 올림픽 다이빙 챌린지를 벌이는 초현실적인 장면도 낯설지 않게 됐다. 의인화된 동물 주인공이 사랑과 배신을 연기하는 ‘AI(인공지능) 펫 시네마’가 유튜브 쇼츠, 틱톡에서 1억 뷰를 기록하는 것도 예사다. 사람은 드러나지 않은 채 AI 아바타와 합성 음성을 내세워 팟캐스트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익명 콘텐츠’(Faceless Content)도 급부상하고 있다.
독창적이고 기술적 완성도도 높은 콘텐츠는 거대한 트래픽을 일으키고, 그에 비례한 수익을 가져간다. 기획 단계에서 제작, 홍보, 수익화까지 일관된 흐름이 확립된 상황에 AI 기술 발전이 더해지면서 새로운 디지털 크리에이터 산업은 빛의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SNS에는 체험기를 가장해 “몇백만 원의 월 수입을 놓치지 말라”는 제작 노하우 강의 홍보가 넘친다. 굿즈(기념품) 시장도 꿈틀대고, 조회수 쏠림으로 온라인 광고 시장까지 재편되고 있다.
브랜드·제품·업소 홍보 영상이나 유튜브 촬영 때 필요했던 장비와 모델, 전문 인력이 모두 AI로 대체되면서 초래된 파급 효과는 크다. 숏폼과 AI 기술의 화학적 결합은 크리에이터 진입 장벽을 허물었다. AI 서비스가 무한 경쟁에 들어가면서 간단한 지시문(프롬프트)으로, 혹은 명령어 입력 없이 사진만 업로드해도 영상물로 바꿔주는 템플릿과 프리셋이 넘쳐난다.
정말 초보자도 동물을 춤주게 하고, 하늘을 날고, 괴수로 변신하는 영상을 만들 수 있을까. 기자가 직접 AI 도구를 활용해 숏폼을 제작하면서 최근 경향을 진단하고 향후 전망까지 짐작해 봤다.
■ 숏폼과 AI 결합 새 콘텐츠 산업 부상
인스타그램 릴스, 유튜브 쇼츠, 틱톡 등 숏폼은 AI가 만들어 낸 요지경 볼거리로 넘친다. 깜찍한 미니어처 사람은 제품과 업소 홍보용으로 인기다. 미니어처 일꾼들이 음식 주변에 깨알같이 붙어 요리를 하거나, 여성의 얼굴에 매달려 메이크업에 분주한 장면은 입소문을 전파하는 데 효과 만점이다. 현실 세계를 압축한 디오라마(입체 모형)도 공간 이미지 홍보에 곧잘 이용된다. 반려동물 의인화는 가장 인기가 많은 장르다. AI로 탄생한 고양이와 강아지 캐릭터에 서사가 겹쳐 공감대를 얻으면 인기 폭발이다. 일시적인 유행을 넘어 새로운 콘텐츠 산업으로 부상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댕냥이가 회식을 하면서 건배하거나, 김밥을 썰고 찌개를 끓이는 영상 제작의 문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챗GPT로 생성한 캐릭터 이미지를 클링(Kling)에 업로드한 뒤 영상 변환 지시문을 입력해서 숏폼을 얻었다. 이어 <부산일보> 제작진을 미니어처로 만들어 취재에서 윤전과 배달까지 신문의 전 과정을 동적으로 구현한 것도 챗GPT와 영상 생성기를 순차적으로 거쳤다. <부산일보> 팟캐스트에서 뉴스를 전달하는 ‘익명 콘텐츠’ 형식은 헤이젠(Heygen)에 5세 아바타 이미지를 올린 뒤 음성 합성을 입혀 제작했다. 배경 음악이 필요하면 수노(Suno)를 이용했다.
만들고 보니, ‘AI가 뚝딱 만들어 줄 것’이라는 통념은 절반만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손품을 팔지 않고 허투루 뽑아 내는 것도 물론 가능하지만, 의미를 부여할 만한 수준을 얻을 수는 없었다. 영상에 작은 허점이라도 남으면 시청 몰입감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캐릭터가 동일성을 유지하는 게 관건이었다. 정확한 지시문이 없으면 얼굴이나 옷차림, 연령대가 갑자기 달라지기 십상이었다. 또 카메라 각도와 움직임, 조명, 빛깔 톤 등 시각적 기획도 정확히 명령하지 않으면 의도를 벗어나기 일쑤다. 즉, 프롬프트 엔지니어링(명령어 설계)의 정교함이 성공을 좌우한다.
■ 반려동물 귀여움에 스토리 힘 더해야
조회수 대박을 터뜨린 AI 영상의 공통점은 공을 들인 프롬프트 엔지니어링과 함께 치밀한 기획 능력을 꼽을 수 있다. 애완 동물을 앞세운 AI 영상물도 귀여움에 그치지 않고 문화적, 감정적 서사가 결합될 때 바이럴(viral·빠른 확산) 효과를 얻는다. 건배하고 요리하는 댕냥이를 보는 건 즐겁지만, 압도적 관심을 모으는 건 다른 차원의 문제다. 즉, 스토리의 힘이 있어야 한다.
김치찌개 끓이는 진돗개 영상을 보면 반려견에 투영된 인간의 삶을 느낄 수 있다. 찌개가 바글바글 끓을 때 진돗개가 비장의 신라면 스프를 탈탈 털어 넣는 장면은 무릎을 치게 만든다. K푸드에 호감을 가진 외국인에도 어필할 수 있는 지점이다. AI의 생성 기술도 중요하지만 동시대인의 공감이 핵심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다. 돈이 되자 영혼 없는 불량품이 소셜 공간을 어지럽힌다. AI의 무한 복제·생산 기능을 악용한 대량의 부실 콘텐츠가 횡행하는 것이다. 급기야 유튜브, 페이스북 등에서도 수익 배분 차단 조치로 칼을 빼들었다.
■ AI 쓰레기 ‘슬롭’ 퇴출될 수 있을가?
개나리광대버섯은 예쁘게 생겼지만 먹으면 큰일난다. 맹독성이기 때문이다. 가관인 것은 개나리광대버섯이 “항산화 작용이 뛰어나 체내 유해물질을 제거하고 노화를 예방한다”고 소개하는 블로그가 많다는 점이다. 검색하는 수고를 조금만 들이면 “아마톡신이라는 맹독을 가지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버섯”이라는 정보를 알 수 있지만, 팩트 확인을 등한시한 것이다. 가끔은 생성형 AI조차도 틀린 정보를 제공할 때가 있다.
이런 허위 정보가 버젓이 활개치는 것은 조회수가 광고 수익에 직결되는 탓이다. 구글 애드 센스나 쿠팡 파트너스 수익을 얻으려면 콘텐츠는 다다익선이니 베끼거나 짜깁기를 동원하는 것이다. 하향 평준화가 나타나는 이유다. 생성형 AI 기술이 발달하자 뉴스 링크나 본문을 업로드하기만 하면 짧은 영상을 뚝딱 만들어 주는 서비스까지 생겼다. 언론사가 아닌 데도 대량의 최신 뉴스를 전달하며 조회수를 가져가는 채널이 존재하는 이유다. 유튜브 파트너 등에 등록하면 광고 수익을 배분받기 때문에 생겨난 편법이다. AI 도구로 대량 생산된 콘텐츠가 범람하자 이를 지칭한 ‘AI 슬롭(Slop)’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쓰레기나 오물을 뜻하는 영어 단어에서 유래했다.
SNS에 흔한 ‘가장 위험한 동물 TOP 10’ 따위의 부실하고 반복적인 영상물이 바로 ‘슬롭’이다. 자극적인 썸네일로 클릭을 유도하지만, 내용은 천편일률적이다. 화를 내거나 우는 동물 등 비현실적이고 억지스러운 장면도 많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올 3월 ‘우리가 알아야 할 AI 통계 15가지’에서 “소셜 미디어 이미지의 71%가 AI로 생성된 것”이라면서 ‘비진정성 콘텐츠’(Inauthentic Content)의 도전에 맞닥뜨렸다고 지적했다. 지난해 미국인 SNS 사용자 조사에서는 ‘낚시성(Clickbait) 제목에 짜증’(80%), ‘조작·연출된 비진정성 콘텐츠에 피로감’(69%), ‘반복적인 콘텐츠에 불쾌감’(58%) 등 불만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유튜브를 운영하는 구글은 지난 7월 15일 공지를 통해 대량 생산되거나 반복적인 콘텐츠 등 ‘비진정성 콘텐츠’를 수익화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했다. 페이스북 운영사 메타 역시 ‘독창적이지 않은 콘텐츠’를 퇴출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대량 생산·반복·비독창적 콘텐츠의 수익화가 제한되거나, 알고리즘 추천에서 배제되는 정책이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정책 변화는 창의적인 1인 크리에이터에게 문호가 열린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 진정성과 독창성 우선 원칙을 매개로 소셜 플랫폼 간에 사용자와 광고주의 신뢰를 얻으려는 경쟁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관건이다. 문제는 수익이 우선인 거대 플랫폼이 광고를 유인하는 트래픽에 초연할 수 있을지 여부다. 인터넷 ‘스팸’을 계승한 AI ‘슬롭’을 퇴출시키려면 소셜 플랫폼의 자정 노력도 필요하지만 공공적인 통제를 병행하는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2025-08-0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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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이강인, 이번 싸움은 다르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드디어 진짜 승부가 시작된다. 전 세계 축구팬들의 시선이 쏠린 UEFA(유럽축구연맹) 슈퍼컵이 오는 8월 14일 새벽 4시(한국 시간) 이탈리아 작은 도시 우디네의 스타디오 프리울리에서 열린다. 이제 20일도 채 남지 않았다. 단판 승부로 펼쳐지는 이 대결은 특히 한국 팬들에게 각별하다. UEFA 챔피언스리그(UCL) 우승팀 파리 생제르맹(PSG)과 UEFA 유로파리그(UEL) 우승팀 토트넘 홋스퍼가 맞붙는 이번 경기에서 손흥민과 이강인이라는 두 한국 축구의 아이콘이 마주 서기 때문이다. 유럽 무대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K-더비다. 이 특별한 맞대결은 이미 한국 축구팬들의 뜨거운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물론 변수도 있다. 손흥민이 이적할 가능성, 혹은 두 선수 중 한 명이라도 주전 명단에서 제외될 가능성이다. 그 불확실성마저 팬들의 심장을 뛰게 만들고 더 기다려지게 한다.
*UEFA 슈퍼컵, 그리고 그 상징
슈퍼컵은 UEFA이 주관하는 클럽 대항전으로 챔피언스리그(UCL) 우승팀과 유로파리그(UEL) 우승팀이 단판 승부로 맞붙는다. 1972년 아약스와 레인저스 간 비공식 경기로 시작돼 이듬해 UEFA 공식 대회로 격상됐고, 매년 유럽 정상의 두 팀이 ‘진짜 유럽 챔피언’을 가리는 무대다. 우승팀은 단순한 트로피가 아닌 유럽 최강 클럽이라는 상징성을 얻는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AC 밀란 등 명문 구단들이 이 대회의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초기에는 컵위너스컵 우승팀이 참가했으나 1999년 대회 폐지 이후부터는 유로파리그 우승팀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2013년까지는 모나코에서 고정 개최됐지만, 이후 각국 주요 도시로 무대를 옮기며 유럽 축구팬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다. 시즌 개막을 알리는 전초전이자 클럽의 전력과 전술을 가늠해보는 상징적 경기로 자리매김했다. 상금은 크지 않지만, 팀의 위상과 브랜드 가치를 드러낼 기회라는 점에서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PSG와 토트넘, 팀 전력 분석
PSG와 토트넘 모두 이번 UEFA 슈퍼컵이 첫 출전이자 첫 우승 도전이라는 점에서, 어느 때보다 뜨거운 맞대결이 예고된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PSG가 한발 앞서 있다. 이번 시즌 챔피언스리그, 쿠프 드 프랑스, FA컵을 모두 휩쓸며 구단 역사상 첫 트레블(3관왕)을 달성했고, UCL 결승에서는 인터 밀란을 5-0으로 대파하며 유럽 정상에 올랐다. 데지레 두에와 뎀벨레를 중심으로 한 빠르고 창의적인 공격진, 안정된 중원과 조직력까지 갖췄다.
하지만 토트넘도 만만치 않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대 0으로 꺾고 41년 만에 유로파리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당시 손흥민은 “오늘만은 나를 전설이라 불러라”며 감격을 드러냈다. 손흥민을 중심으로 브레넌 존슨, 제임스 매디슨, 도미닉 솔란케 등이 이끄는 전방 압박과 날카로운 역습은 토트넘만의 색깔을 드러낸다.
PSG가 정제된 예술이라면, 토트넘은 날것의 에너지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가는 팀이다. 축구 스타일에서도 두 팀은 선명하게 대비된다. PSG는 속도와 창의성, 토트넘은 절제된 리듬과 직선적인 돌파가 강점이다. 하지만 단판 승부는 오롯이 전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간절함과 집중력, 그날의 흐름이 판도를 가른다. 결국 이 경기도, 한순간의 집중력과 실수가 운명을 가를 가능성이 높다.
*손흥민과 이강인, 결이 만든 한판 승부
손흥민과 이강인. 한국 축구의 현재이자 미래다. 손흥민은 이미 하나의 장르다. 한국 축구를 그 이전과 이후로 나눌 정도다. 유럽 무대에서 쌓아올린 기록들은 물론이고, 팀을 위해 포지션을 바꾸고 자신을 던지는 플레이가 그를 특별하게 만든다. 말없이 책임지는 토트넘의 주장, 침묵 속에 일을 내는 해결사. 그의 경기는 늘 드라마다.
이강인은 더 이상 유망주가 아니다. PSG의 10번이자 중심을 책임지는 플레이 메이커. 감각적인 왼발, 공간을 읽는 눈, 경기의 리듬을 조율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마요르카의 눈물과 발렌시아의 외로움을 거쳐 파리에서 정교하게 성장 중이다.
두 선수는 대비되는 성장 배경을 지녔다. 손흥민은 아버지 손웅정 씨의 철저한 기본기 훈련 속에서 절제와 희생을 배웠다. 이강인은 어린 시절부터 스페인 무대에서 경쟁하며 창의성과 공격성을 키웠고, 1대 1 돌파와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싸움닭 기질이 자연스럽게 체화됐다. 손흥민이 성실함의 결정체라면, 이강인은 감각의 총아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다른 환경과 문화 속에서 자란 두 선수는 오늘날 전혀 다른 색깔의 축구로 만개했다.
지난해 아시안컵 준결승을 앞두고 두 선수는 잠시 신경전을 벌인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의미의 충돌이다. 슈퍼컵은 손흥민의 돌파와 이강인의 패스가 충돌하는 무대다. 빌드업과 창조, 완결의 미학이 이들의 발끝에서 교차한다. 광고 문구처럼,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다.
*한국 축구 새 역사 보고 싶어
대한민국 축구의 시작은 1882년, 제물포(인천)에서 영국 선원들이 공을 차던 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5년에는 첫 공식 축구 경기가, 1921년에는 전국 규모 대회가 열렸으며, 1933년엔 조선축구협회가 창립됐다. 이후 FIFA 가입(1948), 월드컵 본선 진출(1954), K리그 창설(1983), 한일 월드컵 4강(2002)까지, 짧지만 치열했던 축구의 여정을 함께 걸어왔다.
그리고 이제 유럽 클럽 축구의 정점인 슈퍼컵 무대에 손흥민과 이강인이 나란히 선다. 이날 이들이 경기에 뛰는 것만으로도 한국 축구사에 있어 전례 없는 장면이다. 유럽 무대 한복판에서 한국 선수 두 명이 ‘유럽 최강’을 놓고 맞붙는 것은 그 자체로 시대적 상징이 된다. 경기 내용이나 결과를 떠나 손흥민과 이강인의 존재 자체가 한국 축구 팬들과 미래의 꿈나무들에게 오래도록 남을 울림이 될 것이다. 아직 이적이나 부상 등 변수는 남아 있지만, 국내 팬들과 언론은 벌써 ‘K-더비의 정점’이라며 기대를 쏟아내고 있다.
전문가와 도박사들은 PSG의 우세를 점친다. 특히 도박사들은 토트넘의 승리 가능성을 15% 내외로 낮게 평가한다. 그러나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승부의 향방과 관계없이, 팬들이 응원하는 진짜 주인공은 ‘우리’이기 때문이다. 이날 밤 우리는 TV 앞에 앉아 “저들이 바로 우리나라 선수야”라고 중얼거릴 것이다. 경기 후 유니폼을 맞바꾸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는 두 사람의 모습. 그 순간이야말로 한국 축구의 또 다른 역사가 될 것이다. 그 장면을 애타게 기다려 본다.
2025-07-2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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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도시철도' 문전박대 넋두리[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안녕하세요, 저는 올해로 딱 마흔이 된 부산도시철도입니다.
서울 도시철도에 이어 1985년 7월 19일 전국에서 두 번째로 태어나 지금까지 부산시민들의 발이 돼 온 녀석이지요. 그렇습니다. 이 편지가 배달되는 오늘이 바로 제 생일입니다. 범어사역에서 출발한 제가 범내골역까지 처음 달리던 때가 아직 생생한데 벌써 마흔 중년이 됐네요.
태어날 때부터 국내 최초로 중형 전동차를 도입했다는 얘기들로 떠들썩했는데 마흔이 되고 보니 조금 왜소해 보여 체급을 서울만큼 키워서 태어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체급이 작다 보니 터널이나 역 같은 시설까지 함께 작아서 유사시에 국철 형님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단점이 있어 아쉬움이 많이 남거든요.
그래도 마흔이 되는 동안 시민들의 응원 속에 4호선까지 근육도 좀 키우고 하루에만 85만 명이 넘는 분들을 실어나를 정도로 명실상부한 부산 대중교통의 등뼈가 됐다는 자부심은 큽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는 하루 승객이 100만 명에도 육박할 정도였지요. 아마도 내년이면 그동안 실어날랐던 분들이 100억 명에 이를 거 같아요. 부산시민 모두가 1인 당 3000번씩 저를 이용한 셈이 되니 저 스스로도 뿌듯하기 그지없어요. 한 연구에 따르면 통행·교통시간 감소에 따른 사회적 비용 절감, 건강증진 등 저로 인한 사회적 효과가 한해 평균 6800억 원에 달한다네요. 이용 승객 당 한해 90만 원 정도의 이익을 보는 셈이라더군요.
이 정도면 마흔 인생이 헛살진 않았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럼에도 제가 한 번은 이런 넋두리를 꼭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시민 여러분께는 그냥 알고 계시라고 드리는 말씀이고요, 정책을 쥐고 흔드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얘기들이에요.
제가 태어나기 한 해 전에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65세 이상 노인들을 대상으로 도시철도를 무료로 탈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서슬이 퍼런 시기였기에 대통령의 말은 법이나 마찬가지였고 이듬해 태어난 저에게도 그 지시는 그대로 적용이 됐지요. 노인들에 대한 복지가 그다지 두텁지 못한 이 나라에서 그나마 저런 복지라도 노인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환영해야 마땅한 일이라 봅니다. 하지만 이걸 그냥 도시철도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만 내팽개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저의 업계부(집이 아니니 가계부라 할 수는 없고 공기업이라고들 부르니 업계부라 부르는 게 맞지 않겠나 싶네요)에는 해가 갈수록 빨간색 숫자가 늘어만 갑니다. 그 중 60% 정도가 노인 무임승차 봉양으로 발생하고 있으니 허리가 휠 지경이지요. 6년 전만해도 노인 무임승차 봉양으로 인한 적자가 한해 1000억 원을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나 지난해엔 1700억 원을 넘어섰습니다. 그렇게 쌓인 적자만 1조 원이 넘을 정도랍니다. 업계부 적자 폭이 너무 빨리 커지는 바람에 낡은 전동차 교체 등 안 그래도 마흔에 접어들면서 여기저기 들어가야 할 비용들조차 감당하기가 힘들어졌네요.
도무지 혼자 감당하기가 어려워 옆집 코레일 형님네를 기웃거려 보니 그 형님네는 무임 수송에 따른 손실액의 60%를 정부로부터 국고보조금 형식으로 받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정부에 전체 무임 수송액의 절반 정도인 890억 정도라도 좀 주십사 했는데 매몰차게 문전박대를 당했네요. 저는 지자체 소속이라 국고보조금 지급 대상이 아니라면서요….
40년 동안 허리가 휘도록 노인 봉양을 해 왔는데도 그런 논리로 냉정하게 얘기하시니 저도 논리적으로 좀 얘기해 볼게요.
서슬 퍼런 시절 내려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도입된 노인 무임승차를 놓고 제가 어디 소속인지 여부를 따질 필요가 있나요. 노인 무임승차는 당연히 도입 주체가 정부이고 코레일 형님이 적자 보전을 받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지자체가 발의해 추진하지도 않은 시책을 수십년 동안 등이 휘도록 감당해 온 저를 지자체 소속이라는 이유만으로 내팽개친다면 누가 정부를 믿고 기꺼이 일을 하려 할까요.
다음으로 노인 복지는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가 추구하는 복지정책의 이념과도 궤를 같이하는 ‘기본’복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당연히 정부에서 일정 부분을 떠맡아야 한다고 봐요. 다른 복지와는 달리 노인에 대한 복지는 누구나 나이가 들 수 있으므로 차별을 얘기할 수 없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본복지의 이념에 가장 잘 들어맞기 때문이지요. 특히 부산은 전국 대도시 중에 가장 빨리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선제적으로 이 같은 복지 정책 도입이 필요한 곳 아닌가요.
노인 무임승차에 대한 직접적인 적자 보전이 타지역과의 형평성 문제로 힘들다고 끝내 외면하시려 한다면 다른 방법도 있어요. 부산에만 해당하는 논리적 근거를 적용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세계 최고 원전 밀집지 인근 지역에 대한 반값 전기료를 제게 선제적으로 적용해 주는 거죠. 그것만 하더라도 한 해 전기료 760억 원의 상당 부분을 아낄 수 있으니 노인 무임승차 적자분을 감당하기가 수월해질 테죠.
전 이제 막 마흔이 됐을 뿐입니다. 100세가 넘은 외국 도시철도 아저씨들에 비하면 아직 젊디 젊은 교통수단이지요. 앞으로도 부산시민과 함께 더 나은 가치를 만들기 위해 힘차게 뛸 각오가 돼 있어요. 다만, 등이 휠 것 같은 봉양 독박만큼은 정부가 어떻게든 지혜롭게 덜어주시길 바랄게요. 쉰에는 훨씬 건전해진 업계부를 들고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부산시민의 영원한 발 부산도시철도 올림.
2025-07-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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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요리] 예언, 합리적 전망일까 사기일까
예언 전성시대다. 대지진, 3차 세계대전, 대홍수, 핵전쟁 등 대재앙을 불러올 사안들에 대한 예언이 이어지고 있다. 최근엔 일본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는 한 만화가의 예언이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예언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말하는 것은 예언이라기보다는 전망이나 예측에 가깝다. 전망이나 예측은 주식 등을 거래하는 자본시장이나 국제 관계 등에서는 이미 일상화된 범주다. 흔히 말하는 통상적인 예언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비합리적 근거를 통해 미래 상황을 확정적으로 예단하는 것을 일컫는다.
비과학적, 반지성적인 것으로 의심되는 각종 예언의 사기성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인류가 현재까지 구축한 지식 체계로는 예언의 근거인 꿈이나 직감, 종교적 해석 등이 완전히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완전히 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언의 핵심 기저인 ‘운명론’도 같은 이유로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으로 분류되는 상황이다. 특히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을 경우 교묘한 말바꾸기 등을 통해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도 많다보니 이런 경우엔 사기 여부를 둘러싼 논란만 가열될 뿐이다. 예언은 인간의 불안한 심리를 파고든다. 난세일수록 다양한 예언이 속출, 사회적인 피해를 유발하는 사례가 많은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까지 등장한 수많은 예언 중 일부라도 적중했다면 인류가 현재까지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 꿈에서 본 7월 일본 대지진 예언
일본 만화가 타츠키 료가 발간한 ‘내가 본 미래’에는 올 7월 5일 새벽 4시 18분 동일본 대지진의 3배에 달하는 거대 쓰나미가 발생한다는 예언이 나온다. 1999년 처음 출간된 ‘내가 본 미래’는 타츠키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반복해서 꾼 꿈을 기록한 일기 형태의 만화다. 그는 1998년 인도 여행 중에 일본 대지진과 관련한 예지몽을 꾸었다고 주장한다. 일본 열도의 남쪽 태평양 부근이 '펑'하고 솟아오르는 장면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번 예언이 큰 파장을 몰고 온 것은 해당 만화에 2011년 동일본대지진과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을 예견하는 장면이 묘사돼 큰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본 정부는 지난해 시즈오카현 앞바다에서 규슈 앞바다까지 800㎞에 이르는 난카이 해구에서 수십 년 내 대지진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또 일본 정부가 이 문제와 관련해 꾸린 태스크포스는 지난 1월 “30년 내 이 지역에서 규모 8~9의 대지진이 발생할 확률이 80%”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7월 5일을 전후해 규슈 가고시마현 남쪽 해상의 유인도 7개, 무인도 5개로 이뤄진 도카라 열도에선 소규모 지진도 장기간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7월 일본 대지진설’까지 퍼지면서 불안감은 갈수록 증폭됐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7월 5일 우려했던 대지진은 발생하지 않았다. 예언이 현실화하지 않은 것과 관련, 이 작가는 당시 7월 5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를 지목한 것은 출판사의 의향이 많이 반영된 것 같다는 다소 알쏭달쏭한 해명을 내놨다. 그러면서도 ‘2025년 7월’에 중대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주장은 계속 이어갔다. 이에 따라 그의 예언의 진위 여부는 7월이 지난 뒤에야 판가름 날 전망이다.
일본 정부와 기상청은 이 예언에 대해 허위 정보라며 일축하고 있다. 일본기상청 장관은 지난달 기자회견을 통해 “지진은 날짜·장소·규모를 특정해 예측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소동 전락한 실패한 예언의 역사
1992년 한국은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목사의 휴거 예언 때문에 발칵 뒤집혔다. 휴거는 예수가 재림했을 때 믿음을 가진 자들은 하늘나라로 들려 올라가고,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은 7년 동안 환란을 겪다 종말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시한부 종말론인 셈이다. 이 목사는 당시 1992년 10월 28일 자정이 되면 전 세계 10억 명이 들려 올라갈 것이라며 정확한 시간까지 예언했다. 다미선교회 신도는 10만 명으로 추산됐다. 신도 중 상당수는 머리에 헬멧을 쓰고 휴거를 기다렸다.
1992년 10월 28일에 휴거가 발생한다고 한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휴거론자들은 이 날짜를 추출하기 위해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요한계시록을 차용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03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의사 겸 예언가로 1999년 지구 멸망을 예언한 인물로 유명하지만 이 예언도 맞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휴거론자들은 요한계시록 종말 부분에 ‘7년간의 짐승의 지배기’에 대한 언급이 있는 점을 감안,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 멸망 시점에서 7년 앞인 1992년에 휴거가 와야 한다는 앞뒤가 맞지 않은 논리를 펼쳤다. 휴거 날짜 추출 근거가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당시 휴거 예언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언론사들이 취재 경쟁을 벌인 데 이어 외신 기자들까지 몰려와 취재 경쟁에 합류했다. 하지만 휴거는 없었다. 휴거 예언은 결국 휴거 소동으로 막을 내렸다.
미국에서는 1954년 12월 21일 자정에 대홍수로 종말을 맞는다는 이른바 ‘사난다 대홍수 예언’이 있었다. 가정주부와 대학교수 등이 대홍수를 예언한 편지를 받았는데 구원을 받으려면 ‘사난다 신’을 믿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은 이들은 사난다 신을 숭배하는 종교를 만들어 종말론을 알리며 포교에 나섰다. 신도들은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버리고 종말을 준비했다. 하지만 종말의 날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자들은 신이 자신들의 열성적인 기도에 감응해 홍수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어이없는 반응을 보였다.
바바 반가(1911~1996)라는 불가리아 예언가의 예언도 유명하다.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은 뒤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갖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체적인 날짜나 지역을 명시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표현을 사용해 예언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수많은 이들이 울고 바다가 육지를 삼킬 것이다’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거대한 국가가 조각날 것이다’라는 그의 예언이 1989년 소련 붕괴를 예견했다는 식으로 해석하곤 한다. 하지만 2010년 유럽 인구 멸종, 2014년 핵전쟁 발발, 2016년 유럽의 이슬람화, 2018년 중국의 세계 지배 등 연도를 지정한 그의 예언은 연이어 빗나갔다. 인도의 점성술사 쿠샬 쿠마르도 행성 정렬 등을 근거로 2024년 6월 18일 또는 29일에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고 예언했으나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인류의 역사는 예언의 역사라고 할만큼 각 시대마다 다양한 예언들이 난무했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더라도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널리 퍼진 예언서인 정감록이 있다. 정감록의 핵심은 ‘진인 정 도령이 나타나 조선을 멸망시키고 새 나라를 세운다’는 것. 하지만 이는 실제 역사와 괴리를 보였다. 이와 관련,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의 영역에서는 예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신약성경 테살로니카 전후서와 베드로 전후서 등의 서간문, 요한계시록(요한묵시록) 등에서도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종말론 등에 기반한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 예언에 대처하는 바람직한 자세
예언은 대체적으로 어떤 목적성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상당수 예언은 자신의 존재 부각, 모종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 등의 감춰진 의도를 갖고 있다. 다미선교회처럼 종교적 정체성 구축이나 신도 확보 등을 위해 예언을 활용하는 사례도 많다. 이밖에 예언을 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이나 장애로 인해 망상을 실제 현실이라고 믿는 경우도 상정할 수 있다. 특히 예언은 그 시대상과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거나 이용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예를 들어 정감록은 당시 무능한 지배권력의 폭정에 지친 민중들이 꿈꾸던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다미선교회 휴거 사태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향하는 시점에 대중들이 느끼는 세기말적 불안감을 교세 확장의 동력으로 삼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인류는 현재 인터넷과 SNS 등으로 모두 연결된 시대를 살고 있다. 지구촌 82억 명의 사람들이 실시간으로 뉴스와 가치관 등을 공유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확산으로 인해 개인과 국가의 빈익빈 부익부 등 경제 양극화 현상은 한층 이 시대 민중들의 삶을 한층 고단하게 만든다. 신냉전 체제가 갈수록 공고해지면서 국가 간 갈등도 깊어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과 이란의 대치 등 자칫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는 상황들도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지구촌 국가들이 보유한 핵탄두가 지난 1월 기준 1만 2241개에 달한다. 인류는 핵전쟁으로 인한 멸절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기후 위기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서 초대형 산불과 가뭄, 폭염 등이 발생하면서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이런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앞으로도 각종 예언은 이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예언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더욱이 요즘은 가짜뉴스 등 고의적으로 왜곡한 정보들이 온라인을 통해 무분별하게 유통되는 데다 개인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만 편식하는 경향도 무척 강해졌다. 특히 자기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틀린 사실조차 진실이라고 자기합리화하려는 경향성도 갈수록 커지고 있다. 즉, 우리 사회엔 인지부조화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객관적으로 합리적이지 못한 예언일지라도 개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우려가 무척 커진 것이다.
결국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위를 분별할 수 있는 건강한 ‘생각 근육’을 키우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특히 인류는 오랜 역사를 통해 세대를 이어가며 지적 체계를 한걸음씩 발전시켜왔다. 인류가 구축한 인문학적인 지적 체계들은 수많은 시간 동안 관찰과 실험, 가설 구축, 검증 등의 지난한 과정을 거친 끝에 확보한 귀중한 유산인 것이다. 이 지적 체계에 대한 지속적인 탐구를 통해 ‘속여도 속지 않는 지적인 인간’을 지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진의 경우 인공지능까지 등장한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예측 불가능한 돌발적·즉각적 영역에 속한다. 또 일본에서 진도 1 이상 지진이 해마다 2000회 정도 발생하고 많을 때는 6500회까지 일어나는 데다 수십 년을 주기로 대형 지진도 반복된다는 과학적 사실을 안다면 이번 대지진 예언에 대한 다소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가 일본 지진과 관련된 예언을 한다면 우연히 적중할 확률이 높다는 점도 알게 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 과학적 지식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왜곡된 정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인지부조화 현상을 겪을 우려가 있다. 특히 지진과 같이 경험칙에 기반한 예언은 인간의 불안감을 더욱 증폭시켜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든다.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는 매체 또는 SNS 접촉을 중단하고 공신력을 가진 정보 매체를 이용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2025-07-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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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러브버그’ 공습, 부산은 안전하나?
최근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여름 불청객 ‘러브버그’(붉은등우단털파리)가 집단 출몰하면서 시민 불편이 커지는 상황이다. 러브버그는 도심과 주택가, 산림을 가리지 않고 무리 지어 나타나 차량과 사람에 달라붙거나 시야를 가리면서 불쾌감을 주고 야외 활동에 지장을 준다. 러브버그를 두고 “유해 곤충이니 당장 퇴치해야 한다”는 의견과 “생태계에 유익한 익충이라 어쩔 수 없다”는 반론도 나온다. 수도권과는 달리 부산에서는 러브버그의 대량 출몰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 수도권은 ‘러브버그’와의 전쟁
러브버그는 그동안 은평·서대문·마포구 등 서울 서북부 지역에서 주로 목격됐다. 그러나 최근엔 서울 전역에서 출몰하고 있다. 서울시 통계에 따르면 러브버그 관련 민원은 매년 증가했다. 2022년 4418건이던 신고 건수는 2023년 5600건, 지난해 9296건에 달했다. 올해도 상반기에만 이미 4695건이 접수됐다. 러브버그 급증 현상은 시민 생활 전반에 걸쳐 불편과 위협이 확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러브버그는 두 마리가 붙어 떼로 몰려다니며 인간에게 달라붙어 혐오·불쾌감을 유발한다. 자동차 유리에 붙어 안전 문제를 불러오기도 하고, 사체가 쌓이면 산성을 띤 내장이 건축물과 자동차 등을 부식시킨다. 식당, 카페, 편의점 등 업장에 피해를 주어 매출 감소 같은 경제적인 피해로 이어진다. 최근 인천 계양산 일대에서는 벌레 사체가 등산로에 10cm 이상 쌓인 모습을 포착한 사진과 영상이 잇따라 SNS를 중심으로 올라온다.
■ ‘러브버그’ 부산은 괜찮은가?
러브버그가 수도권을 뒤덮은 데 비해 부산 지역 16개 구·군에는 아직 관련 신고나 민원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문가들은 정확한 원인을 단정할 순 없으나, 이동 범위가 좁은 러브버그 습성과 수도권에 비해 불리한 성장 환경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분석한다. 러브버그 성체는 일주일 안팎 활동하는데, 러브버그의 비행은 이동이 아닌 짝짓기에 목적이 있다. 번식 장소에서 다시 번식하기에 다른 장소로 확산하는 확률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공주대 생명과학과 도윤호 교수는 “2015년 처음 인천에서 발견된 이래 지금까지 수도권 주위로만 출몰하고 있다”며 “자동차에 붙어서 이동하는 ‘인위적 이주’ 등을 제외하면 수도권에 주로 출몰하는 러브버그가 부산권역까지 갑작스레 확산할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
또 러브버그 유충은 낙엽이 많이 쌓여 있고, 토양 유기물이 풍부한 곳에서 성장한다. 이에 수도권처럼 활엽수림이 많이 분포한 지역에서 성장하기 유리하다고 한다. 반면 부산은 소나무 같은 침엽수림의 비중이 비교적 높아 성장이 불리하다는 분석도 있다.
최근 한 시민이 부산에 러브버그 20마리를 채집통에 담아 숲에 풀었다는 소식이 온라인에 확산하면서 논란이 됐다. 이를 통해 러브버그가 부산에 확산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박현철 부산대 생명환경화학과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가능성이 작다고 전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외래종이 확산하기 위해서는 교미해서 알을 낳을 수 있는 적절한 번식 환경이 필요한데 이를 찾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유기물이 많은 장소에 갖다 놓지 않는 이상, 그냥 풀어놓고 날린다고 해서 확산할 가능성은 작다”고 말했다.
반면 김현우 낙동강에코센터 전시기획팀 곤충 모니터링 담당자는 “기후변화로 어떤 곤충이 국내에 대량 출몰할지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곤충의 종류도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모니터링을 하고, 상황의 변화가 발생했을 때 시의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에서 부산항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래종 해충인 유리알락하늘소가 몇 년 전 부산 삼락생태공원 등 낙동강 수변 지역에서 번식해 버드나무 서식지를 파괴하기도 했다”며 “물류 이동이 많은 부산항의 특성을 고려할 때 외래 곤충 유입 가능성에 대해 더욱 각별하게 신경 써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서울연구원은 ‘서울시 유행성 도시해충 대응을 위한 통합관리 방안’ 정책리포트에서 현재와 같은 추세로 기온 상승이 지속될 경우 2070년에는 한반도 전역에 러브버그의 확산이 예측된다고 분석했다.
■ 러브버그는 어떤 곤충
러브버그는 중앙아메리카와 미국 남동부 해안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는 약 1㎝ 크기 파리과 곤충이다. 공식 명칭은 ‘붉은등우단털파리’(학명 플리시아 니악티카)다. 짝짓기를 하거나 날아다닐 때도 암수가 쌍으로 다녀 ‘러브버그’로 불린다. 이 곤충은 생태계에 도움이 되는 ‘익충’이다. 토양 환경을 정화하고 꽃의 수분을 도우며, 어류·새·곤충의 주요 먹이가 된다. 이슬이나 꽃의 꿀을 먹고 사는데, 독성이 없고 사람을 물진 않는다. 밝은 불빛을 좋아해 도심에 특히 많이 발생한다.
러브버그는 초여름인 6~7월에 개체 수가 급증한다. 수컷은 3~4일 만에 죽고, 암컷은 약 1주일 동안 살면서 습한 땅에 수백 개의 알을 낳고 죽는다. 그동안 대규모로 나타난 뒤 2주가량이 지나면 개체 수가 급격히 감소한다. 전문가들은 7월 중순쯤엔 급격히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 국내 유입은 언제 됐나
외래종인 러브버그는 2015년 인천에서 처음으로 알이 발견됐다. 이후 2022년 서울시 은평구, 경기 고양시 등 서북부 지역에서 대량 발생하다가 지금은 서울시 25개 모든 자치구와 인근 경기 지역에서 보고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원래 중국 동남부·대만·일본 류큐 제도 등 북위 33도 이남 아열대 지역에 분포했는데, 기후변화와 함께 북상하다가 한반도까지 넘어왔다. 국립생물자연관이 중국과 대만, 일본 등지에 있는 러브버그 표본을 확보해 유전자 분석한 결과, 국내에서 발생하는 러브버그는 중국 산둥반도의 칭다오 지역에서 물류 교역 과정을 통해 인천으로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기후 위기와 산악 지역 주변의 도시 개발 등으로 이 벌레가 북쪽으로 확장한 것으로 본다. 러브버그는 LED 불빛을 좋아하며, 도심 열섬 효과에 강하다고 한다. 서울대 연구팀이 국내에서 채집된 러브버그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이들이 도시에 살기 적합한 살충제 저항성과 열 스트레스 적응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러브버그는 대개 민가와 가까운 공원이나 아파트 주변 등에서 많이 나타난다. 유충은 유기물이 많은 토양에서 잘 자란다. 도심의 정원, 가로수 아래, 쓰레기나 퇴비 등이 좋은 서식지가 된다.
■ 천적이 없는 이유
러브버그는 특별한 천적이 없다. 새, 개구리, 두꺼비 같은 대표적인 포식자들도 이 곤충을 잘 먹지 않는다. 신맛이 나고 끈적한 체액을 지녀 대부분의 새가 먹이로 선호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껍질도 단단해 개구리와 같은 양서류들도 먹기를 꺼린다. 이런 천국 같은 서식 환경이 대발생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원래 해외에서 새로운 생물이 유입되면 기존 생물들이 이들을 먹이로 인식하고 잡아먹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엔 천적이 없어서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조절되는 경우가 많다. 까치, 참새 같은 새들과 거미류, 사마귀와 같은 생물들이 러브버그를 잡아먹는 광경이 종종 목격된다고 한다.
■ 대처 요령과 방역 가능성은
전문가들은 러브버그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밝은색 옷을 피하고 어두운색 옷을 입을 것을 권한다. 러브버그가 밝은 색을 꽃으로 착각해 달려들기 때문이다. 야외 활동 시 피부 노출을 최소화하고, 창문이나 출입구 방충망의 틈새를 꼼꼼히 점검하는 것도 중요하다. 러브버그는 오래 비행하지 못하고 날개가 약하고 물을 싫어한다. 유리창이나 차에 붙은 러브버그는 물을 뿌려서 제거하면 된다. 또 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대발생 기간에는 생활 조명을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실내에 러브버그가 들어왔을 땐 분무기를 이용해 물을 뿌리고 휴지로 치우면 된다고 한다.
러브버그는 유충 시기 유기물을 분해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기여하기 때문에 익충으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법적으로 병해충 방제 대상이 아니다. 현재 국내 법령상 직접적인 방역·관리 대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등은 질병 매개 곤충에 대한 관리만 규정하고 있다. 자치구 차원 방역도 모기·바퀴벌레 등 위생 해충에 집중돼 있다. 살충제를 이용한 전면적 방제도 쉽지 않다. 러브버그가 전통적 해충이 아니며, 무분별한 화학 방역은 생태계 균형을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러브버그가 질병을 매개하지 않더라도 개체 수가 급증해 시민의 일상에 불쾌감을 주기 때문에 ‘유해성 도시 해충’으로 지정해 관리 대상의 폭을 확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지구온난화와 도시열섬 현상으로 제2, 제3의 러브버그 출현 가능성이 높아 보다 적극적인 방제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당분간 러브버그 관리 방안에 대한 갑론을박은 이어질 수밖에 없다.
2025-07-0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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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스피릿, 일본 보리소주 되다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일본에서 한국어를 일상에서 쓰는 곳이 있다. 도모다치(友達·친구) 대신 한국어 발음 그대로 ‘チング(친구)’로 쓰고, 친구끼리 놀자고 부를 때도 ‘(같이) ノラ(노라)’라고 한다. 바지는 ‘팟치(パッチ)’로, 밥과 배(선박), 아가씨는 아예 발음까지 같다. ‘도망갔다’를 통째로 음차한 ‘도망캇다’(トーマンカッタ)는 야반도주를 의미한다. 부산에서 50㎞ 떨어진 쓰시마(対馬), 여기서 30㎞ 남쪽에 위치한 이키(壱岐) 이야기다.
■ 한반도 교류 영향 ‘친구’ 상표 소주까지
이키는 일본 보리소주의 발상지로 독특한 맛과 향으로 인기가 높아 일본 전역으로 유통된다. 특이한 소주가 있는데, 상표가 ‘친구(ちんぐ)’다. 이 술을 만든 오모야(重家)주조는 ‘친구’를 상표로 등록한 이유를 한일 교류의 상징성과 지역 정체성을 담기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외래어 표기 때는 가타가나(チング)를 쓰는 게 원칙인데, 자국어와 같은 히라가나로 쓴 점에서 이 지역 사람들이 ‘한국 친구’를 대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키섬은 경남 거제도의 3분의 1 크기에 인구 2만 5000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보리소주 양조장은 7곳이나 되고, 양조장 투어까지 인기다. 이 보리소주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증류 기술에서 유래했다고 일본 국세청은 공식 문서로 인정하고 있다. 한국에서 증류 소주의 자리를 희석식 소주가 대체하며 주류로 떠오른 사이 일본은 우리에게서 배운 증류 문화를 발전시켜 오늘날 위스키 선진국 반열에까지 올랐다.
부산에서 이키섬으로 가는 뱃길이 코로나19 때 끊긴 여파가 길어지다 올봄 연결 배편이 취항하면서 다시 문호가 열렸다. 갓 볶은 보리에서 나는 구수함에다 왠지 낯선 산미까지 갖춘 이키 보리소주를 들이켜면서 조선의 ‘스피릿(spirit·증류주)’이 남긴 길고 긴 잔향을 음미했다.
■ 한국 소주(燒酒) vs. 일본 소주(燒酎)
맥주, 와인, 청주 등 발효주에 열을 가해 기화가 빠른 알코올만 추출한 뒤 향미를 더해 숙성한 것이 스피릿, 즉 증류주다. 보리 농사가 잘 된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보리 발효주(즉, 맥주)를 즐기다 증류 기술을 알게 되면서 탄생한 것이 위스키(즉, 스카치)다. 벼 재배 지역에서 청주(한국), 사케(일본)를 즐겼고 이 발효주가 증류 소주로 발전한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니혼슈(日本酒)로 부르는 사케는 쌀 발효주인데, 어원이 우리말 ‘삭히다’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술은 문명 교류와 얽혀 있다. 몽고의 침략을 받은 고려는 몽고군이 갖고 온 소줏고리(증류기)를 통해 스피릿 제조술을 배웠다. 조선 왕조가 무역과 외교 목적으로 쓰시마와 이키에 소주를 하사하면서 증류 기술이 대한해협을 넘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 시대의 소주는 귀하디 귀한 존재였다. 쌀 1㎏으로 45도 안동소주 기준 720mL 1병을 겨우 얻을 수 있다. 단순한 음용 목적으로 쓸 수는 없고 제의나 외교에 쓰인 이유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조선의 임금은 쓰시마에 한 번에 많게는 몇십 병씩 하사했다. 식량 부족으로 수시로 금주령이 내려지던 시절이었으니 지나친 감이 든다. 국경 관리와 무역 경유지로 중요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데, 산지가 많고 농지가 부족한 쓰시마는 곡물이 부족해 소주가 뿌리내리지 못한 반면 이키는 쌀과 보리 농사가 적합한 평야라 증류 문화가 꽃피게 된다.
소주는 ‘불사를 소(燒)’와 ‘술 주(酒)’로 쓴다. ‘끓여 만든 술’이라는 의미다. 일본에서는 증류 소주가 심화 발전하면서 표기까지 달라졌다. ‘술 주(酒)’ 대신 ‘진한 술’, 즉 ‘주(酎)’를 써서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발효주에는 ‘酒’, 소주는 ‘燒酎’로 써서 구분한다.
■ 구연산 가득한 보리소주
조선 시대에도 맥주가 있었다. 15세기 어의 전순의가 저술한 ‘산가요록’에는 ‘맥주’ 레시피가 서술되어 있다. 멥쌀 한 말로 밑술을 만든 뒤 곱게 찧은 보리쌀 네 말로 덧술을 하라고 되어 있다. 곡물 비율로 보면 쌀 20%, 보리 80%다. 보리로 만든 술이지만, 오늘날의 맥주와는 다르고 ‘보리 막걸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에서는 한때 보리술 명맥이 끊겼지만, 최근 전남 강진, 제주도 등 보리 재배지에서 과거의 보리소주를 재현한 상품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키의 보리소주도 쌀로 1차 담금하고 2차 발효 때 보리를 추가한다. 곡물 비중은 쌀 3분의 1, 보리 3분의 2. 조선 맥주와 주재료의 비중은 엇비슷하다. 완성된 발효주는 증류를 거쳐 탱크나 오크통에 1년 이상 숙성한다. 숙성 기간과 용기에 따라 풍미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한데, 이키 보리소주의 맛과 향은 특별한 비법 덕분에 다른 지역 소주와 확연히 구별된다.
한국은 산업화 과정에서 타피오카로 발효한 주정(알코올 100%)에 물을 섞어 도수를 낮춘 희석식 소주가 각광을 받았다. 저렴한 데다 무색, 무취, 무미의 특성이 한국의 맵고 짠 음식과 궁합이 맞았다. 일본 소주는 쌀, 보리, 고구마, 메밀 4종류 곡물로 만드는데 제각각 원재료의 풍미가 개성적으로 드러나는 게 특징이다. 고구마소주를 머금으면 고구마 빼때기의 향이 생기발랄해서 강렬한 인상이 남는다. 쌀소주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단맛이 강점이다. 메밀소주는 메밀 특유의 고소하고 담백한 향을 느낄 수 있다.
이키 보리소주 맛을 보기 위해 양조장을 찾아 나섰는데, 이키노쿠라(壱岐の蔵)주조, 켄카이(玄海)주조는 무료 견학 프로그램, 자료관, 시음장을 갖추고 있어 친철한 설명과 함께 비교 음미할 수 있었다. 한데, 통상의 구수한 맛을 넘어서는 청량함과 신맛이 도드라진 점은 낯설었다. 익숙치 않은 소주 맛의 비결은 백국균이었다. 사케 제조 때 쓰이는 당화제 역할의 백국균을 이곳 이키에서만 전통적으로 사용한 결과, 맛의 차별화가 이뤄진 것이다. 백국균은 사케 맛의 특징인 구연산을 다량 생성하는데, 그 때문에 소주에서 경쾌한 산미를 느끼는 대목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친구’ 소주와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오모야(重家)주조는 코로나19 이후 견학 프로그램을 중단한 상태라 5월말 방문 당시 관람객을 받고 있지 않았다. 코로나19의 시간을 기다려 멀리 부산에서 ‘친구’가 찾아왔다고 하자 흔쾌히 방문을 허락했다. 이키를 떠나며 한일 양국의 친교를 상징하는 ‘친구’ 양조장 견학이 재개되기를 기원했다.
■ 지리적 표시 인증으로 전통 보존
전통주는 지역의 토양과 기후 조건이라는 테루아(terroir)와 함께 지역의 문화가 어우러진 결과다. 프랑스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생산된 특정 방식의 발포성 와인만을 ‘샴페인’으로 부르는 이유다.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의한 ‘지리적 표시(Geographical Indication, GI)’ 인증제는 지역의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제도다. 그 조건은 해당 지역의 농산물로, 지역 고유의 제법으로 빚은 술에 한정되고 인증을 받으면 저작권으로 인정돼 법적 보호를 받는다.
일본은 소주의 향토성을 보호하기 위해 일찌기 GI 인증을 통해 보호, 육성하고 있다. ‘이키 소주’라는 명칭은 이키에서 생산된 쌀과 보리, 물을 사용하고, 백국균 투입 등 전통적인 제조법을 고수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 고구마소주로 유명한 가고시마 지역도 ‘사츠마 소주’라는 GI 인증으로 보호받고 있다. 지역의 주력 산업인 농업과 직접 연계되는데다, 향토성과 지역 문화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지역 사회의 자부심을 이룬다.
일본의 소주 기술이 한반도에서 전래되었다는 점에서 한국 증류주 문화가 단절을 겪으면서 지체된 건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최근 전국 각지에서 증류주 신제품이 도전장을 내고 있는 상황은 반갑다. 쌀소주가 먼저 포문을 열었고, 그 뒤를 잇는 보리소주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병영, 황금보리소주, 백제보리소주, 가파도 청보리, 진한 블랙, 모리, 번트보리25, 사락, 애 등 전국적으로 다수의 보리소주가 출시되고 있다. 또 고창 복분자주, 진도 홍주, 서천 한산소곡주 등은 GI 인증을 받았다.
이키를 떠나오면서 ‘부산의 향토성’이라는 화두가 머리를 맴돌았다. 고구마 시배지였던 데에 착안한 ‘영도 고구마소주’나, 낙동강 하류 평야 논농사 지역인 점을 살린 ‘강서 쌀소주’는 가능하지 않을까? 지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술만큼 흡입력이 강한 관광 자원은 없다. 금정산성막걸리가 있지만, 지역 특산물과 향토성이 어우러져 스토리텔링까지 가능한 지역의 명품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 이키 가는 길 = 대아고속해운의 씨플라워호가 3월 쓰시마 항로에 본격 재취항하면서 부산항~이즈하라항 뱃길이 열렸다. 편도 2시간 30분. 온라인 예약 가능. 이즈하라항에서 이키 아시베항까지는 고속선 비너스호를 타야 한다. 편도 1시간 5분. ‘규슈 유센(九州郵船)’ 한글 사이트에서 예약 가능.
2025-06-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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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가 풀어 본 6월 모의평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여기 전설의 문제가 하나 있다. 2019년 대입 수능 국어의 비문학 영역 31번 문제다. 문제를 이미 접한 이들도 많겠지만 50대 ‘아재’ 세대인 필자는 처음 접하게 된 문제다. 옛날 과학 시간에 보았을 법한 그림과 영어 기호, 어휘들이 마구 등장하는 이 문제를 처음 접하고는 이 문제가 국어 영역에서 나왔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아무튼 전문가들이 국어의 비문학 영역이라고 출제한 문제라고 하니 한 번 풀어보기로 했다. 국어 영역이니 매일 글 다루는 입장에서 그래도 문제를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한참을 읽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순전히 글만으로 논리를 구성해 이해를 해 보려 해도 부피와 밀도, 질량, 거리 등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알지 않고서 저 문제를 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저런 분야에 관심을 갖고 기본지식이 있는 이과생에게 훨씬 유리한 문제이므로 국어 영역 평가 대상으로 부적절하지 않나 싶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이 문제는 킬러문항으로 꼽혔고 지나치게 난해한 출제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자 수능 출제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원장이 직접 송구스럽다며 사과를 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로부터 7년이 흘렀다. 그 사이 윤석열 전 대통령이 2023년 고교 교과과정을 벗어난 킬러문항 배제 등을 내세우자 수능을 손봐야 한다는 여론이 불붙은 적이 있다. 그해 말 있었던 수능에서 킬러문항이 사라지고 준킬러문항으로 대체됐다는 식의 소식이 전해졌다. 교육 당국은 이 같은 변화를 두고 그동안 출제를 놓고 온갖 시비에 휩싸였던 수능이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자평했다. 과연 그렇게 됐을까.
이달 초 마무리된 조기대선은 그 치열함과는 대조적으로 수능을 비롯한 대입 수험생들의 진학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가 나오지 않았다. 수시와 정시로 굳어진 대입체계가 해를 거듭해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으로 봤거나 고등학생이나 수험생들의 현실까지 들여다 볼 여유가 없거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학생들은 수시를 위한 각종 준비에서 과도한 스펙 쌓기에 시달리는 와중에 내신을 위한 교내 시험 준비에다 고교 교과서와는 별개 시험에 가까운 수능을 준비하느라 살인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도대체 이 모든 일들을 학생 스스로 다 해낼 수 있어야 한다는 당위론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졌는지가 궁금할 정도다. 자신들도 수험생 시절이 있었다면서 학생들에게 마냥 공부하기만 강요하는 기성세대들은 학생들이 치르는 모의평가라도 한 번 들여다 본 적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그래서 지난 4일 치러진 6월 모의평가를 한 번 직접 들여다 보기로 했다.
■50대 논설위원이 풀어본 국어
수험생들에게 '1교시의 악몽'으로 불린다는 국어에서부터 글을 주로 다루어 온 필자에게도 좌절감을 듬뿍 안기는 문제들이 즐비했다. 출제자가 교과서 내용 암기를 벗어나 상식선의 언어 능력을 평가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짐작되는 국어 10~14번 문제를 상식선의 언어 능력으로 풀어보기로 했다.
일단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지문이 길어 읽고 이해하는 데에만 한참 걸렸다. 그리고 곧장 좌절감이 몰려왔다. 청정 에너지인 수소의 운송 과정 장단점을 암모니아와 비교하고 수소연료전지의 친환경성을 강조하는 게 주요 내용이지만 상세한 화학적 원리 부분은 화학 공부를 손 놓은 지 오래돼 전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고교 과정에서는 이와 관련한 학습이 이뤄지는지 몰라도 글 내용만 가지고 완전히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나 다를까 문제는 화학적 원리에 대한 이해를 묻기 시작했다. 다시 지문과 보기를 오가며 읽어봤지만 결국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했고 한 지문에 딸린 4개의 문제를 푼 결과 2개나 틀리고 말았다. 화학 원리를 빼고 글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인 10번과 어휘를 묻는 13번은 맞췄다는 걸로 위안을 삼기엔 이런 문제를 풀어야 하는 수험생들이 너무 안쓰러웠다.
이에 대해 EBS 측은 수능특강 독서 249~252쪽 지문과 연계돼 있으므로 별 어려움 없이 풀 수 있는 문제였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그 지문조차도 그게 왜 국어의 독서 분야에 나와야 하는 것인지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 EBS 측은 수능 연계교재 지문 내용을 학습한 수험생이라면 저 문제 푸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하지만 왜 국어 공부를 하면서 저런 지문의 내용까지 학습을 해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가 없다. 저런 지문은 당연히 기존의 문과생에겐 화학 공부를 별도로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다. 국어는 그야말로 언어 이해를 다뤄야 하는 영역이 아니던가.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지 헷갈릴 정도다.
수학이나 탐구 영역은 공부를 놓은 지도 오래된 데다 별도의 학습이 필요하므로 관련 분야에 조예가 깊은 분들에게 분석을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수학이 문이과 통합으로 바뀐 뒤 많은 영역이 교과과정에서 빠지고 이에 따라 미분과 극한을 극도로 꼬아 만든 문제들만 새로운 경향이라고 출제되면서 그런 경향을 익히지 못한 수험생들을 수포자로 내몬다는 얘기들이 있으나 개인적인 능력으로는 확인이 어려운 듯해서다.
■공교육을 누가 망치고 있나
아무튼 모의평가를 일부나마 들여다 본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런 시험이 공교육을 망치는 주범이 아닐까’였다. 학교 수업과의 상관 관계보다는 차라리 지능검사나 적성검사에 가까운 시험이라는 게 개인적인 인상비평이다. 수능이 처음 등장할 때에도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목들에 대한 시험이 아니라 그야말로 대학에서 수학하는 데 필요한 적성을 검사해 대학이 참고하도록 하겠다던 게 첫 설계자들의 포부였다. 그런 포부에 비춰 본다면 교과 과정을 벗어나 온갖 적성과 지능을 검사한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아들 딸들이 그런 지능검사 같은 평가를 통해 진학할 대학이 달라진다고 한다면 거기에 동의할 학부모는 과연 얼마나 될까. 많은 학부모들은 지금도 학교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자신의 아들 딸들이 수능 시험 잘 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대입 체계가 완전히 바뀌지 않는 이상 수능은 끝내 지금처럼 교과서와 교과과정을 벗어난 길을 계속 갈 것이다. 그렇게 그 해 수험생들만 해마다 고통을 짊어지고 나면 끝나는 폭탄 돌림이 계속되는 사이 공교육 정상화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질 가능성이 높다. 수능 점수 기반으로 뽑는 정시 모집이 전체의 30%가 되지 않는다는 말만으로 자위하기엔 비루하다. 어차피 대학별 최저 등급을 맞추기 위해서라도 저런 류의 시험에 정력을 쏟아야 하는 건 학생들에게 변하지 않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이 모르는 사이 수능은 창의력과 응용력, 융합적 사고 따위 화려한 미사여구를 앞세우며 학교 교육과 점점 멀어지면서 국어 영역에서 화학 공부를 해야 하는 식이 돼 버렸다. 담당 과목 교사들도 풀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사교육 없이 학생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돼 버린 이 수능을 정상화하지 않고서는 공교육 정상화는 영원한 구두선으로만 남을 것이라 확신한다.
2025-06-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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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BTS는 다녀왔다, 제도는 변했는가?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드디어 군 복무를 모두 마치고 팬들 곁으로 돌아온다. 공익근무요원으로 대체 복무해 온 슈가가 오는 21일 소집해제하면 진, 슈가, 제이홉, RM, 지민, 뷔, 정국, BTS 모든 멤버가 군 복무를 마치게 된다. 구성원 모두 복무를 성실히 수행해 병역 의무 이행의 공정성을 직접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수년간 세계 무대에서 K팝의 위상을 높인 그들이었지만, 국방의 의무 앞에서는 단 한 명도 예외가 없었다. 이제 불과 일주일 뒤면 다시 7인 완전체로 돌아와 마이크를 잡을 준비를 마친다. 하지만 이들의 군 복무는 단순히 의무 이행을 넘어 우리 사회에 깊고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병역특례는 누구를 위해 제도인가?” 그리고 “지금의 이 제도는 과연 공정한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BTS도 다녀왔는데, 왜 또 이 이야기를 꺼내느냐”고. 하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다녀온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다녀왔음에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군대 잘 다녀왔습니다”라는 인사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대한민국 병역특례제도의 모순이다.
■ 병역특례, 왜 만들어졌나?
병역특례제도는 병역 의무의 일부 또는 전부를 대체 복무로 전환해주는 제도다. 1973년 국위 선양과 문화 창달에 기여한 예술 및 특기자에게 군 복무가 아닌 체육·예술요원으로 복무하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대체 복무지만 실질적으로 군 면제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례 대상은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국제콩쿠르 등 대회에서 입상한 체육·예술요원’ ‘국가 산업발전 목적의 전문연구·산업기능요원’ ‘공공의료 분야에서 복무하는 공중보건의사’ 등으로 나뉘지만, 현재는 대부분 체육·예술 분야 중심으로 운영된다. 체육인은 올림픽 3위 이내, 아시안게임 1위 입상 시 특례가 적용된다. 예술인은 국제예술경연대회 2위 이내, 국내 대회 1위 수상자, 또는 중요 국가무형문화재 전수 교육 이수자가 대상이다. 이들은 4주간의 기초 군사훈련과 544시간의 사회공헌활동을 수행하면 병역을 이수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이 제도의 타당성과 공정성에 대한 비판이 있어 왔다.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야구 대표팀이 참가국이 8개국뿐인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 병역 혜택을 받자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여론이 거셌다. 아시안게임 종목에 e스포츠, 바둑, 브레이킹댄스 등이 포함되며 “이게 과연 스포츠냐”는 논란도 이어졌다. 문제는 기준이 일관되지 않다는 점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 2006년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4강 진출 시에도 예외적으로 특례를 부여한 사례가 있어 제도가 공정하지 않다는 인식이 많았다.
■ BTS의 병역 의무 완료의 의미
BTS는 단 한 번도 병역 특례를 요구한 적이 없다. 영향력과 성취만 놓고 본다면, 충분히 특례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그 논의에서 한발 물러났다. BTS는 ‘국가 브랜드’로서 K팝의 위상을 세계에 알렸다. 빌보드 핫 100 정상, 전 세계 스타디움을 매진시키는 투어, UN 총회 연단에서 전한 세대의 목소리. 이는 기존 병역 특례 대상인 올림픽 메달리스트나 국제 콩쿠르 수상자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중문화의 파급력과 세계적 인지도 측면에서 더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국회와 여론은 수년간 BTS를 포함한 대중문화예술인의 병역 특례 확대에 대한 논의를 반복해 왔다. 그럼에도 BTS는 침묵했고, 조용히 입대해 복무를 성실히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다. 이들의 병역 이행은 단지 아이돌 그룹의 군 복무를 넘어, 우리 사회가 병역특례제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다시 던진다.
오늘날 MZ세대는 공정성과 다양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기회의 평등, 과정의 투명성, 결과의 납득 가능성이라는 기준을 통해 사회의 제도와 관행을 끊임없이 점검한다. 단순히 “다 같이 고생하자”보다는 “각자의 상황에 맞는 공정한 잣대가 있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 맥락에서 BTS의 선택은 하나의 ‘공정성 실험’처럼 작용했다. 그들이 특례를 받지 않았기에 오히려 ‘왜 이들은 특례 대상이 아닌가’라는 물음이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BTS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기존 병역특례제도의 정당성과 공정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다시 성찰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냈다.
■ 병역특례, 지금 그대로 공정한가
현행 병역특례제도는 특히 K팝 아티스트는 명시적으로 배제돼 있다. 이 기준은 심각한 시대착오성을 드러낸다. 문화의 중심이 명백히 이동했다. 전통 예술과 아마추어 스포츠만이 국가 이미지를 대표하던 시대는 지났다. 지금은 BTS의 월드투어가 수십만 관객을 동원하고, 넷플릭스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전 세계를 사로잡는 시대다. 이들이 쌓아 올린 문화적·경제적 가치와 국가 브랜드 제고 효과는 기존 특례 대상 분야의 성과와 비교해 결코 작지 않다. 오히려 더 널리, 더 깊게, 더 즉각적으로 한국을 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제도는 여전히 전통 문화 중심의 낡은 프레임에 갇혀 움직이지 않는다. 문화적 영향력의 판도가 바뀌었음에도 기준은 그대로 정지돼 있다.
BTS의 존재는 이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들은 UN 연단에 섰고, 빌보드 1위를 기록했으며, 한국의 소프트파워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병역 제도는 이들을 ‘국위 선양’의 자격을 갖춘 인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인기’에 기반한 문화 산업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관계자의 답변은 이제 시대착오적이다. 문제는 이 같은 특례 제도가 더 이상 “공정한 기준”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많은 국민이 체감하는 바와 같이, 어떤 분야의 인재는 병역 면제 혹은 대체 복무로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반면, 다른 분야의 인재는 오히려 병역이 경력 단절의 고통으로 작용한다. 특히 대중문화 분야의 세계적 성과는 정작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BTS는 UN 연설, 빌보드 1위, 미국 백악관 초청, 각종 국제 시상식 수상 등으로 국가 이미지를 드높였지만, 이 같은 성과는 병역특례 기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클래식은 되고, K팝은 안 되는’ 이 기준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
■ 모두가 BTS처럼 할 수 있는가
BTS가 비교적 원활하게 군 복무를 마칠 수 있었던 건 몇 가지 특수한 요건 덕분이었다. 이들이 보여준 성숙한 시민 의식도 큰 역할을 했지만, 무엇보다 이들은 세계적 성공을 이룬 ‘성장 완료형’ 그룹이었다. 데뷔 10년을 넘긴 그룹으로 탄탄한 팬덤과 뚜렷한 음악적 정체성도 공백을 감내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전 세계 팬덤 ‘아미(ARMY)’의 흔들림 없는 지지와 소속사의 전략적 대응도 주효했다. 솔로 활동을 통한 존재감 유지, 입대 시점 분산, 복귀 준비 등 체계적인 관리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K팝 산업은 훨씬 치열하다. 신인 그룹들이 쏟아지고, 데뷔와 동시에 글로벌 경쟁에 뛰어든다. 쉼 없이 콘텐츠를 생산하고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면 도태되는 구조다. 이런 환경에서 1년 반의 공백은 대부분의 그룹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 그렇기에 BTS의 선택이 모두에게 공정한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실질적 공정성은 단순한 형식적 평등과는 다르다. 병역 의무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이행 방식은 개인의 조건과 기여도에 따라 더 유연하게 설계될 필요가 있다. 이는 병역특례 혜택을 무조건 확대하자는 뜻이 아니다. 다만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제 BTS의 군 복무 사례는 중요한 질문을 남긴다. “현행 제도는 K팝과 현대 대중문화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공정성은 모두 똑같이 입대하는 것인가, 아니면 분야별 특수성과 기여 방식을 고려해 실질적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가?”
■ 병역특례 새 기준 수립할 시점
병역은 국민 모두에게 부과된 의무이자, 공동체에 대한 헌신의 상징이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예외는 신중하고 공정하게 설정돼야 한다. 다만 공정이 형식적 평등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진정한 공정은 기여에 대한 정당한 인정에서 출발한다. BTS의 모범적인 병역 이행은 우리 사회가 병역 의무와 예외 제도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어쩌면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이야말로 병역특례제도를 재검토하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기준을 마련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병역특례제도는 공정성 논란 속에 여러 차례 개편 논의가 있었지만, 특혜 시비와 형평성 문제로 번번이 무산됐다. 그러나 공정이란 ‘누가 혜택을 받는가’뿐만 아니라, ‘누가 배제되고 있는가’를 함께 따져야 한다. 클래식은 되고 K팝은 안 되며, 스포츠는 인정되지만 한류 문화는 배제된다면, 그 기준은 분명 낡았다.
전문가들은 병역특례제도를 비공식적으로 운영하기보다 투명한 기준과 국민 공감대 속에서 제도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성취’를 기준으로, 공개 심사를 통해 특례 대상을 선정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논의의 핵심은 단순한 ‘혜택 조정’이 아니라 국가가 보호하고자 하는 가치와 공정성의 기준을 새롭게 설정하는 일이다. 더 많은 청년이 다양한 방식으로 국가를 빛낼 수 있는 시대, 우리는 그들에게 구시대적 장벽이 아닌 합리적 인정의 길을 열어줘야 한다. 이제는 국가가, 사회가 답할 차례다.
“잘 다녀왔습니다”라는 BTS의 이 한 마디가 병역특례제도 개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길 바란다.
2025-06-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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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요리] 부울경의 미래 ‘반구천 암각화’
선사 문화의 정수를 담은 울산 울주군 반구천 암각화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전망이다. 반구천 암각화는 국보로 지정된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 '울주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 등 2종의 바위그림 유적을 일컫는다. 1971년과 1970년에 각각 발견된 이 암각화 유적들은 국보로 지정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다. 선사인들이 남긴 인류 최고의 걸작이지만 많은 국보 중의 하나로 취급 당하기 일쑤였던 것이다. 심지어 반구대 암각화는 아직까지 언제 또 물에 잠길지 모르는 서러운 세월을 감내하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너무 뒤늦은 감은 있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사실상 확정됐다는 소식은 정말 환영할 일이다.
반구천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반구천 암각화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리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부터 서둘러 수립해야 한다. 반구천 암각화는 울산에 자리하고 있지만 부산, 경남 등 동남권 전체를 세계적인 관광지로 발돋움시킬 수 있는 저력을 갖고 있다. 암반에 새겨진 바위그림들의 미학적 가치와 그 안에 담긴 웅장한 선사 해양 문화 스토리를 세계에 제대로 알리는 것은 물론 동남권 곳곳에 산재한 선사 유적을 하나로 묶어 글로벌 선사유적 관광벨트로 조성해야 한다. 세계유산에 걸맞은 종합적인 보전 대책과 스토리텔링, 세밀한 관광자원화 작업도 시급하다. 또 어딘가에 존재할 것으로 추정되는 제2의 반구대 암각화를 찾는 작업도 박차를 가해야 한다. 선사인들이 남긴 걸작이 빛을 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것은 인류에게도 큰 손실이기 때문이다.
특히 반구천 암각화 중에서도 반구대 암각화는 동남권이 신석기시대 강력한 해양문화 중심지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동남권이 해양을 매개로 활발하게 교류하던 초광역 생활권역이었다는 점도 알려준다. 반구대 암각화는 동남권 800만 시민들에게 역사적 동질성과 메가시티화의 당위성을 부여하는 귀중한 선물인 셈이다. 반구천 암각화의 세계유산 사실상 등재를 계기로 동남권을 진정한 메가시티로 발돋움 시키는 논의도 다시 이어져야 할 것이다.
■ 인류 최고 걸작…너무 뒤늦은 가치 인정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세계유산 분야 자문·심사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는 한국 정부가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반구천의 암각화에 대해 지난달 등재 권고 판단을 내렸다. 이코모스는 유산을 조사한 뒤 등재, 보류, 반려, 등재 불가 등 4가지로 분류해 세계유산센터에 권고한다. 등재는 최고 수준 권고에 해당한다. 등재 권고를 한 유산은 이변이 없는 한 오는 7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제47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이번 등재 권고로 반구천의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가 사실상 확정된 셈이다.
반구천의 암각화는 세계유산 사실상 등재 이전에도 인류 최고의 유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과정은 순탄치 못했다. 2010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이후 벌써 15년이 흘렀다. 오죽하면 ‘비운의 세계유산’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까. 이것은 반구천 암각화의 가치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아직까지 이뤄지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수몰 악순환 우려에 노출된 반구대 암각화의 참담한 현실은 또 어떤가. 늦깎이 등재는 우리 스스로가 이 귀중한 문화유산을 푸대접한 데 따른 당연한 결과였지 않을까. 오는 7월 정식 등재를 통해 반구대 암각화의 위대한 진면목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길 기대하는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울주군 대곡천(옛 이름은 반구천)에 위치한 반구대 암각화는 높이 약 5m, 너비 약 8m인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 암반에 다양한 고래, 고래잡이 모습, 거북 등 296점의 그림이 새겨진 선사 유적이다. 반구대 암각화가 조성된 시기는 3500~7000여 년 전 신석기시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포경 유적으로 평가 받는다. 즉, 인류 포경 문화를 알려주는 최초의 유산인 것이다.
특히 한반도가 접한 북태평양 연안의 독특한 해양 어로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더욱이 작살 맞은 고래, 어린 새끼를 데리고 있는 어미 고래 등 암각된 다양한 바위그림들의 아름다움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다. 형상을 단순화하면서도 특징을 세밀하게 포착한 절제된 미학의 세계는 선사 시대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암반을 빼곡하게 메운 바위그림들은 당시 대곡천에서 집단생활을 하며 가축을 기르고 바다로 나가 고래 등을 집단 사냥했던 신석기인들의 강인한 생활상을 세세하게 알려준다. 수천 년에 걸친 자신들의 삶을 문자가 아닌 바위그림으로 보여주는 반구대 암각화의 장엄함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선사 시대에 온 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천전리 명문과 암각화는 반구대 암각화에서 700m 정도 떨어진 대곡천 상류에 자리하고 있다. 높이 약 2.7m, 너비 9.8m 바위 면에 각종 도형과 글, 그림 등 620여 점이 새겨져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신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에 걸쳐 새겨진 암각화 군락인 셈이다.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시기에 왕과 왕비의 행차를 묘사한 글도 남아 있어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 인위적으로 다듬은 듯한 바위면은 아래를 향하여 약 15도 각도로 절묘하게 기울어져 햇볕이 잘 들지 않는다. 이런 조건 때문에 자연적인 풍화 과정을 비교적 잘 피해 현재까지 보전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에 접한 하천 바위 곳곳은 천전리공룡발자국화석을 간직한 유적지다. 공룡발자국화석은 대곡천 암각화를 한층 특별한 유적으로 자리매김시킨다.
■ ‘제2 반구대 암각화’ 찾아야 한다
반구대 암각화가 자리한 반구대 골짜기의 맑은 물은 대곡천을 따라 태화강에 합류, 동해로 흘러나간다. 강물이 동해와 맞닿는 지점 왼쪽에는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가 자리한 울산 동구 방어진이, 오른쪽에는 남구 장생포가 위치해있다. 장생포는 근대 포경산업의 중심지였다. 장생포 앞바다는 예로부터 밍크고래와 참고래 등 다양한 고래들이 회유하는 장소였다. 특히 이 일대는 귀신고래가 많이 유영하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귀신고래회유해면’이라는 이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신석기 시대의 지형은 현재와 달랐다. 울산 내륙에 자리한 대곡천이 현재보다 바다에 훨씬 인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집단으로 고래를 사냥할 만큼 강력한 해양문화를 가졌던 대곡천 신석기인들이 반구대 암각화에 고래 그림 58점을 새긴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점은 반구대 암각화 유적지가 과연 한곳에 그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정답은 현재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곡천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에 발맞춰 이제는 한층 정밀한 추가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실제로 1965년 사연댐 준공으로 반구대 암각화가 수몰되기 전에 다른 바위그림을 봤다는 이야기들이 지금도 전해진다. 특히 현재 반구대 암각화가 바위면을 사실상 거의 빽빽하게 채운 점으로 미뤄볼 때 다른 장소의 바위면에 암각화를 추가로 새겼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더욱이 암각화가 한 세대에 걸쳐 조성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여러 세대를 거쳐 조성된 데다 당시엔 종교적인 목적을 띤 점 등을 감안할 때 이런 추정은 설득력을 갖는다. 특히 당시 대곡천 신석기인 집단은 배를 타고 나가 함께 고래를 사냥할 정도로 인원 수도 많고 강력한 데다 식량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는 점으로 미뤄 여러 곳에 암각화를 남길 충분한 여력을 가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먼저 대곡천 일원의 물을 빼는 게 시급하다. 사연댐 건설 이후 수몰을 반복하는 반구대 암각화부터 구한 뒤 대곡천과 주변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사연댐 물을 일시적으로 줄이거나 잠수 전문가를 동원해 수중 조사를 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제2 반구대 암각화 발견 소식은 그 자체로 인류에 대한 큰 선물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와 함께 반구대 암각화에 대한 영구적인 보전 대책을 서두르는 등 반구천 암각화에 대한 대대적인 기반 확충 사업도 추진되어야 한다. 반구천 암각화의 진면목에 걸맞은 대우가 절실한 상황이다.
■ 동남권이 함께 꾸는 꿈…세계적 바위그림 관광벨트
인류의 소중한 보물인 두 개의 바위그림 유적을 품은 대곡천 일원은 그 자체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특히 예전부터 신라 시대 화랑들을 비롯해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많은 사회 지도층들이 이곳을 찾았다. 그들은 이곳의 수려한 풍광을 시와 글에 담았다. 반구대 일원엔 포은 정몽주를 기리는 모은정을 비롯해 반구서원, 집청정 등 다양한 역사 유적들도 공존한다. 또 반구대 초입에서 암각화에 이르는 오솔길의 고즈넉한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이미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완벽에 가까운 정취를 선물한다. 더욱이 울산엔 반구대 입구에 조성된 암각화박물관, 고래문화특구인 장생포의 고래박물관과 고래체험관 등 대곡천의 암각화와 관련된 문화 인프라가 상당수 조성됐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제 암각화 소재지인 울산뿐만 아니라 부산, 경남 등 동남권 3개 지자체가 함께 나서야 한다. 세계유산인 반구천의 암각화를 단순히 울산 지역의 유적으로 한정 짓는 것은 너무도 좁은 안목이다. 협소한 안목으로는 인류 최고의 유산인 반구천 암각화의 진면목을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없다. 억지스러운 주장이 아니다. 사실상 동남권은 선사 시대부터 하나의 생활권이었다. 즉, 세계유산 등재 의미를 반구천 암각화라는 걸작을 탄생시킨 선사 시대 동남권의 초광역적 생활 문화, 탁월한 문화적 가치 등을 포괄하는 쪽으로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반구천의 암각화 이외에도 다양한 선사 유적들이 동남권 곳곳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 유적들의 정점인 반구천 암각화의 세계유산 등재는 동남권이 보유한 선사 유적들의 가치까지 함께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할 때가 도래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역사의 시계를 기원전 1만여 년부터 부족국가가 생겨난 청동기시대 전까지로 돌려보면 신석기시대의 부산, 울산, 경남은 해양을 매개로 한 초광역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사슴 그림과 부산 동삼동 패총 토기에 그려진 사슴 그림이 양식상 동일하다고 한다. 울산 대곡천 거주 집단이 반구대에 고래 사냥 장면을 담은 암각화를 새긴 것과 관련해 동삼동 패총 신석기 문화층위에서도 다양한 고래 뼈들이 대량 출토됐다. 이 사슴 그림과 고래 뼈 등을 감안할 때 부울경은 신석기시대부터 같은 문화를 공유한 동일 생활권역이었다는 추정도 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동남권은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해 부산 복천동 고분 출토 암각화, 경남 함안 도항리 유적, 밀양 살내 유적과 의령 마쌍리 유적 출토 암각화, 사천 본촌리 유적 출토 암각화, 남해 양아리 서불과차 암각문 유적 등 풍부한 암각화 유산을 갖고 있다. 패총 등 선사 유적도 많다. 반구천 암각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공룡발자국화석은 부산과 경남 곳곳에서도 다수 발견됐다. 반구대 암각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동남권 전체를 세계적인 바위그림 유적 문화권, 해양선사 유적 문화권으로 묶어 초광역권 문화 관광 벨트를 조성해야 마땅할 것이다. 즉, 바위그림과 공룡 등 선사유적을 핵심 콘텐츠로 삼으면서 부산, 울산, 경남의 기존 관광 자원과 결합시키는 방식으로 동남권 글로벌 관광메카화를 꾀해야 한다. 이와 관련,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이탈리아 발카모니카 암각화, 스페인 동부 지중해 연안에 남겨진 선사 시대 후기의 암각화와 벽화군 등은 이미 세계적 관광지로 자리매김했다.
이제 동남권이 함께 머리를 맞대야 한다. 서둘러 반구천 암각화를 중심으로 한 다채로운 선사 유적 관광 로드맵과 스토리텔링 추진, 캐릭터 등 관광 상품 고안, 글로벌 관광객 유치 전략 구축, 세계적인 암각화 도시와의 교류, 글로벌 학술 세미나, 반구천 암각화에 대한 세계사적 관점의 정밀한 추가 연구 등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초광역권 관광 벨트를 매개로 한 컨벤션 산업 등의 활성화를 위한 장기적인 계획 수립도 시급하다.
특히 반구천 암각화의 진정한 가치에 대한 동남권 주민들의 자각도 시급하다. 반구천 암각화는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한 유산이자 이 땅에 살았던 선사인들이 후대에 전하는 뜻깊은 선물이다. 대한민국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진정한 ‘K문화’의 정수인 것이다. 반구천 암각화가 글로벌 관광 수요를 촉발시키는 등 동남권 경제를 지탱하는 미래 동력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 것도 이런 이유다. 동남권은 이제 전 세계 사람들이 반구천의 암각화 등 선사유적을 보기 위해 울산과 부산, 경남으로 몰려오는 꿈을 꿔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남권에 머무르고, 개발된 암각화 마스코트 등 관광 상품을 앞다퉈 구매하는 그런 날을 만들어야 한다.
더욱이 2029년 동남권 관문공항인 가덕신공항이 개항한다. 지구촌 곳곳에서 이제 곧장 동남권을 찾을 수 있다. 신공항을 계기로 부산과 울산, 경남 3개 도시의 교통 인프라도 대거 확충된다. 1시간 내외면 어디든지 도착할 수 있는 동일 생활권역으로 발돋움한다. 동남권이 반구천의 암각화를 매개로 함께 같은 꿈을 꾸고, 그 미래를 현실화할 시기가 드디어 도래했다는 생각이다.
■ 반구천 암각화와 동남권 메가시티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면 신석기 시대 한반도 남부는 동북지방, 서북지방, 중·서부지방, 중부 동해지방, 남해안지방 등 5개 권역으로 분류할 수 있다. 남해안지방은 나머지 4개 권역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사회문화적 동질성을 지녔다. 바다에 접해 살았던 이곳의 거주민들은 농업보다는 바다를 생계 기반으로 삼으며 신석기시대 해양문화시대를 주도했다. 남해안지방은 현재로 보면 부산, 울산, 경남, 전남 등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부산 동삼동 패총 유적지를 비롯해 암남동, 영선동 다대포패총과 울산 신암리, 경남 진해 안골포, 통영 연대도와 욕지도, 하동 목도, 창녕 비봉리 등에서 발견되는 다수의 패총과 주거 유적 등은 신석기시대 남해안지방이라는 초광역권의 존재를 입증한다.
반구대 암각화와 동삼동 패총 등 신석기시대 다양한 유물들은 당시 한반도 남부와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해양문화 중심지가 남해안지방이라는 점을 뒷받침한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미개한 원시인일 것이라는 일반의 오해와 달리 동삼동 패총 등을 남긴 신석기인들은 일본은 물론 한반도 서해안과 내륙 집단 등과 활발히 교류한 선진 해양문화인들이었다. 이들이 부울경에 남긴 조개 팔찌, 흑요석 등은 당시 한반도 남해안지방 거주 신석기인들이 먼바다를 자유롭게 넘나든 강력한 해양문화를 가졌다는 것을 알려준다. 창녕 비봉리 패총 유적지에서 출토된 8000년 전의 목선 유적 등은 당시 동남권 신석기인들의 첨단 기술과 문화를 엿보게 한다. 동남권의 신석기 시대는 용광로처럼 뜨거웠던 진정한 ‘해양문화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동남권 선사 유적의 정점인 반구천 암각화 중에서도 반구대 암각화는 동남권의 정체성에 동질성을 부여한다는 생각이다. 특히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해 부울경에 산재한 수많은 선사 유적은 신석기시대의 부울경이 이미 해양을 매개로 한 초광역권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결국 신석기시대 동남권은 바다를 매개로 함께 교류하고, 동질적 문화를 향유했던 메가시티였다는 게 기자의 견해이기도 하다.
현재 삐걱거리고 있지만 부울경을 하나로 묶는 초광역권화 또는 메가시티화는 예정된 미래다. 메가시티화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800만 명에 육박하는 동남권 주민들에게 자긍심과 동질성을 부여할 역사 스토리를 발굴하는 것이다. 메가시티화가 부울경 3개 도시의 혼인이라면, 사랑의 역사가 없는 형식적 결합은 파국을 맞을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울경의 역사엔 크고 작은 애증이 교차한다. 신석기시대 이후 부족국가 등을 거친 이후에도 신라와 백제, 가야 등으로 나뉘어 끊임없이 다툼을 벌였다. 고려와 조선 때도 부울경 내에선 문화적 중심과 변방이라는 논리가 작용하면서 진정한 통합을 이뤄내지 못했다. 그렇다면 현재 부울경 메가시티의 정체성을 신석기시대에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 원조 메가시티에서 찾는 것은 어떨까.
반구천의 암각화는 신석기시대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원조 메가시티적 삶을 보여줌으로써 미래 동남권 메가시티가 단순한 행정적 결합에 그쳐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는 듯하다. 반구천 암각화를 중심으로 동남권 문화권을 하나로 엮어내는 고도의 역사 복원과 발굴, 스토리텔링 작업이 3개 도시 공동 주도로 빠른 시간 안에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 부울경의 잊힌 정체성을 되찾아 이제 진정한 동남권 메가시티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반구천 암각화의 주문에 귀를 기울이길 기대한다.
2025-06-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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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트럼프, 왜 하버드 때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 아이비리그 명문대인 하버드대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2일(현지 시간) 하버드의 외국인 학생 등록 자격을 박탈하는 초강수를 뒀다. 하버드대가 ‘반(反)유대주의 근절’ 등 정부의 교육 정책 변경 요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버드대도 “국토안보부의 외국인 학생 차단은 불법”이라며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며 맞대응에 나섰다. 세계 최강국 미국과 초일류 대학 하버드는 왜 전면전을 벌이는 걸까.
■ 트럼프, 하버드에 공세 강화
트럼프 행정부와 하버드대의 갈등은 2023년 10월 이후 미국 대학가를 휩쓴 ‘친(親)팔레스타인 시위’ 대처를 둘러싼 입장 차이에서 촉발했다. 트럼프 정부는 지난달 캠퍼스 내 유대인 혐오 근절 등을 이유로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폐기를 비롯해 입학정책과 교수진 채용에 정부가 감시할 수 있는 권한을 하버드대에 요구했다. 하버드대는 ‘학문의 자유’를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는 연방 보조금 동결·삭감, 대학 면세 혜택 취소 등 돈줄을 옥죄기 시작했고 지난 22일(현지 시간)에는 외국인 학생 등록 자격인 ‘학생 및 교환 방문자 프로그램’(SEVP) 인증을 취소하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하버드대는 다음 날 학생 비자 취소 등 정부의 조치 이행을 막아달라는 가처분소송을 냈고, 연방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일단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6일(현지 시간) 소셜미디어에 “반유대주의적인 하버드대에서 30억 달러(약 4조 1000억 원)의 보조금을 회수해 미국 전역의 직업 학교들에 나눠주려 한다”며 ‘하버드 때리기’를 재개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하버드대뿐 아니라 컬럼비아대, 펜실베이니아대, 코넬대 등 다른 유명 아이비리그 대학에 대해서도 연방 지원금을 철회하는 등 교육기관 전반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캠퍼스 내 반유대주의 단속’이라는 명분 이면에 이들 대학의 진보색과 불온성을 위축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 하버드는 왜 타깃이 됐나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2기 시작과 함께 미국 명문 대학을 향해 공세를 퍼부었다. 연방 지원금을 무기로 대학의 ‘진보적 색채 지우기’에 나섰는데, 이제 화력을 하버드에 집중하고 있다. 하버드가 트럼프 행정부의 요구를 거부하고, 연방정부를 상대로 법적 소송까지 제기한 첫 번째 대학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대학이 펼쳐 온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이나 학내 친팔레스타인 시위를 빌미로 여러 대학을 탄압했다. 콜롬비아 대학 등 다른 명문대들은 일부 요구를 수용하고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하버드는 강경하게 맞섰다. 트럼프 행정부가 하버드를 ‘본보기’ 삼아 굴복시키거나 법적 분쟁에서 승리할 경우, 다른 대학들에도 강력한 선례와 압박 효과를 줄 수 있다.
원래 트럼프와 지지자들은 하버드를 비롯해 컬럼비아대, 코넬대, 프린스턴대 등 아이비리그 대학들을 ‘진보 엘리트주의의 상징’으로 규정한다. 그 가운데 하버드는 미국 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부유하며 ‘좌파 엘리트’ 상징의 핵심 대학이다. 하버드가 반기를 들자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정부 요구를 거부하고 예일·스탠퍼드대 등이 연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 입장에선 하버드를 굴복시켜야 대학과의 대결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다.
미국 언론들도 “트럼프 행정부가 대학의 소수인종 우대 정책(2023년 폐지됨)과 진보적 편향성을 뜯어고치기 위한 광범위한 정치적·법적 전략의 일환으로 하버드를 비롯한 엘리트 학교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단순히 대학 내 반유대주의 척결이 아닌, 보수 정치 이념을 사회 전반적으로 강화하려는 전략의 일환으로 하버드대를 집중 공격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관세 정책의 부작용으로 지지율 하락을 겪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층 결집을 위해 진보 엘리트를 향한 공세를 강화하던 중 하버드대가 타깃으로 떠오른 것이다.
■ 하버드, 진보 정책 브레인 센터
하버드는 1636년 설립된 미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으로, 미 건국보다 140년 앞선 역사를 자랑한다. 존 F 케네디, 버락 오바마 등 8명의 미 대통령을 배출한 최고 명문이다. 특히 진보 정책의 브레인 센터 역할을 맡아 ‘좌파의 본산’으로 불린다. 1960~1970년대 베트남 전쟁 때 반전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하버드는 지난해 기준 532억 달러(약 76조 원) 기금을 보유한, 미국에서 가장 돈 많은 대학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조치로 면세 혜택이 박탈되면 수십억 달러 손실과 함께 부유층 기부까지 줄어드는 연쇄 타격을 피할 수 없다.
2024~2025학년도 기준 국제 오피스 통계에 따르면 하버드대에 재학 중인 외국인 유학생은 전체 학생의 27.2%인 6793명이다. 한국인 유학생도 400여 명 재학 중이다. 하버드는 지난해 10월 유학생 출신 국가를 공개했다. 중국인 유학생이 가장 많았고, 이어 캐나다, 인도, 한국, 영국 순으로 나타났다.
■ 보수와 진보의 ‘문화 전쟁’
하버드를 향한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은 반유대주의 근절을 명분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실상은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로 대표되는 진보적 노선의 폐기를 요구하는 ‘문화전쟁’의 성격이 짙다는 시각이 많다. 다른 주요 엘리트 대학이 갖는 위기감의 본질이기도 하다. DEI 정책은 인종·젠더·민족 등 정체성을 차별하지 않고 사회적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다.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반차별 정책의 성과다. DEI는 원래 차별 해소와 통합을 지향하는 사회운동의 구호였다.
DEI를 둘러싼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립은 치열하다. 2021년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첫날 DEI를 정책으로 채택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DEI는 민주당 정부를 거치며 정부와 대학을 중심으로 제도화됐다. 그 과정에서 절차의 일방성과 내용의 편향성에 보수층이 반발했고, 트럼프 정부가 이번에 전면 백지화에 나섰다. 트럼프와 지지층들은 DEI 정책이 인종·젠더·민족 정체성에 바탕을 둔 차별로 본다. 그들은 채용이나 입학 등에서 인종 등을 배려해, 능력 있는 백인이 오히려 차별당하는 게 현실이라고 주장했다. 4년 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첫날 이를 폐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이유다.
하버드가 DEI 격전지가 될 조짐은 2년 전부터 있었다고 한다. 대법원은 2023년 인종별 쿼터를 둔 하버드의 소수계 우대 입학 사정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했다. 당시 DEI 진영이 크게 반발했는데, 그해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을 계기로 벌어진 반이스라엘 시위도 영향을 줬다. 시위대는 이스라엘의 전쟁을 인종차별의 연장선이라고 비난했다. 과격한 인종차별 구호가 난무하는데도 당시 클로딘 게이 총장이 미온적 반응을 보였고, 이에 보수층이 격앙했다.
■ 미 유학생 비자 인터뷰 중단 파장도
트럼프 행정부와 대학과의 전쟁은 미국 유학을 준비하는 외국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따르면 미국 국무부는 27일(현지 시간) 비자 발급 인터뷰에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심사를 의무화하는 제도 도입을 위해 유학생 비자 인터뷰를 일시 중단할 것을 전 세계 공관에 지시했다. 미 정부가 반유대주의 척결, 테러리스트 차단을 명분으로 미국에 유학 오려는 학생을 대상으로 사실상 ‘사상 검증’ 논란이 제기된다. 미국에 가려는 각국의 유학 신청자들에 대한 SNS 심사의 실효성 문제와 함께 비자 발급에 장기간 소요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교칙 개정에 저항하는 하버드대 등에 재정적 타격을 주려는 의도로 유학생의 입국을 일시 차단하는 방안을 꺼내 들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폴리티코도 “행정부가 이 계획을 시행하면 학생 비자 처리 속도가 심각하게 느려질 수 있다”며 “또한 외국인 학생에 크게 의존해 재정적인 수익을 확보하는 많은 대학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짚었다. 미국 대학 가운데 외국 국적 학생이 가장 많은 학교는 뉴욕대(NYU)로 27만 2000명이 재학 중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어 노스이스턴대(21만 명), 컬럼비아대(20만 3000명), 애리조나주립대(18만 4000명), 서던캘리포니아대(USC·17만 5000명) 순이었다. 현재 미국 내 한국 유학생은 4만여 명에 달한다.
미국 교육계에서는 트럼프 행정부의 유학생 비자 인터뷰 일시 중지 조치가 대학에 미칠 파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미국 국제교육자협회(NAFSA)는 2023~2024학년도 100만 명이 넘는 유학생이 미국 경제에 약 440억 달러(61조 6000억 원)의 기여를 한 것으로 추정했다.
■ 트럼프발 ‘대학과의 전쟁’ 향방은?
그동안 초강대국 미국의 경쟁력 중의 하나는 자유롭고 혁신적인 대학이었다. 대학이 자율과 독립의 원칙에 따라 전 세계 인재가 모여들어 세상을 선도하는 혁신을 이뤄내면서 미국의 경쟁력을 높였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과학·기술·수학(STEM) 분야에 집중된 유학생 유입은 미국의 기술 혁신과 경쟁력 유지에 핵심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대학 길들이기를 위한 압박 조치가 오히려 자국의 성장 동력 저하와 경쟁력 약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독단적 정책이 미국 대학을 위기로 내모는 셈이다. 외국인 유학생 확보에 타격을 입고, 보조금 등 정부 의존도가 높은 대학들이 트럼프의 파상 공세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최고 권력과 최고 지성 간의 정면충돌의 향방이 미국과 세계의 미래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당분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2025-05-3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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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밥맛 역전 가능할까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쌀은 단백질 함량이 적어야 맛있는데, 한국에서는 수확량을 늘리려 비료를 많이 쓰기 때문에 단백질 비중이 커집니다. 품질보다 양을 중요시하는 것이지요. 일본 쌀에 비해 질이 떨어집니다.’
21일 일본 포털 야후재팬에 배포된 ‘한국 쌀 인기 급등, 전문가 진단’ 기사는 재배법과 미질 차이에 따른 우위를 따졌다. 이 기사는 최근 일본 쌀값이 폭등하자 온라인에서 한국 쌀을 구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한국에까지 와서 쌀을 구입하려는 일본인이 늘어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기사에서 짐작되듯이 일본인은 미질에 민감하다. 스시(초밥)의 밥알은 풀어지듯 씹히면서도 쫀득해야 하고, 사케(일본 전통주) 재료 쌀은 전분 외의 잡성분이 적어야 된다. 일본에서 벼 종자 개량 기술이 발달한 이유다.
하지만, ‘한국산은 질보다 양’이라는 관념은 과거에는 옳았지만 지금은 틀렸다. 일본계 벼 품종이 특유의 찰기와 윤기로 한국 시장에서 절대적 강자였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육종 기술이 역전되면서 벼 재배 면적 기준으로 일본계의 비중은 4%로 폭락했다. 한국 자체 개발 품종이 선전하면서 50년 간 한국인의 식탁을 점령했던 고시히카리, 아키바레(추청)는 퇴출 중이다. 왜냐고? 한국산 밥맛의 경쟁력이 월드 클래스급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일본의 기억 속에 있는 과거의 한국 쌀은 퇴장했다. 쌀값 폭등 덕분에 일본이 마주한 한국 밥맛은 예상 밖의 진화를 거듭한 결과물인 것이다.
□ 한반도 전래 쌀 재배 기술 발전시킨 일본
“쌀은 대단히 위험한 음식이다!”
음식 만화 ‘맛의 달인’ 저자 가리야 데츠는 일본인들이 쌀에 집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온 국민이 쌀 중독증을 앓고 있는데, 그 이유가 “밥이 너무 맛있기 때문”이란다. 밥을 너무 좋아해서, 맛있게 먹으려 반찬을 짜게 만드는 탓에 성인병까지 유발한다는 주장은 과장과 엄살이 섞였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도 있다.
일본은 미질에 진심이다. 일본 사케 양조장은 특정 벼 품종을 확보하려 직접 농사를 짓는 곳이 많다. 주조호적미(酒造好適米), 즉 술을 담그는 데 최적으로 개량된 품종만 100여 개가 넘는다. 쌀알이 큰 편인 야마다니시키, 고햐쿠만고쿠가 대표적이다. 술에 잡미를 유발하는 단백질과 지방 성분이 최소화되게끔 개량됐다. 탄수화물의 결정체인 심백(心白)이 많아야 깔끔한 사케의 맛을 낼 수 있다. 초밥용 쌀은 부드럽게 씹히되 점성이 느껴져야 하고, 초를 섞은 뒤 풀어지지 않아야 한다. 대표 품종이 고시히카리다.
일본 최초의 벼 재배지는 한반도 남부와 가까운 일본 사가현 요시노가리. 한반도 등에서 벼 재배 기술을 가진 세력이 기원전 3세기부터 건너가 농경 사회를 형성하고 정주 문화를 발전시켰다. 일본이 문명 시대로 진입하는 혁명을 일으킨 셈이다. 근대 이후 일본은 쌀 재배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는 한반도로 역류했다. 20세기 초반 일본 농학자들은 쌀을 열대형인 인디카와 온대형인 자포니카로 나누는 등 전 세계 쌀 육종 기술을 선도하기에 이른다. 적어도 1960년대 한국이 일본을 뛰어넘는 육종 기술의 자립을 이루기 전까지 한국은 줄곧 일본의 그늘에 있었다.
□ 한국, 세계 최초 자포니카·인디카 교잡 성공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인구 증가로 쌀이 부족해지는데 미국 곡물 원조가 유상으로 바뀌자 쌀 증산에 정권의 명운을 걸게 된다. 맛의 자포니카, 양의 인디카.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두 품종의 장점을 고루 갖춘 교잡종에 욕심이 가는 건 당연했지만 언감생심이었다. 육종 선진국 일본도 일찌감치 포기한 터였다. 교잡종이 불임이라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불굴의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중앙정보부 요원이 이집트에 잠입해 일본 품종으로 만든 열대성 자포니카 ‘나다’ 종자를 밀반출할 정도로 총력을 쏟아부었다.
획기적인 다수확 품종의 꿈은 결국 600여 차례 교배 실험 끝에 현실화된다. 1969년 허문회 박사가 불임이 아니면서도 인디카의 좋은 형질을 유지한 교잡종 IR667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훗날 통일벼로 명명된 이 신품종을 언론은 ‘벼 곱절 거둘 수 있다. 기적의 쌀 재배 성공’이라고 환호했다. 당시 국정 최대 현안이었던 보릿고개 극복과 극일 정서를 감안하면 국가적 쾌거다.
통일벼는 식량난에 처한 한국은 물론 저개발 국가에 복음이었다.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네팔, 베트남, 부탄에서 통일벼 계통을 받아들였고, 한국은 지금도 아프리카 국가들에 현지 기후와 토양에 맞는 개량종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인디카와 자포니카 교잡에 성공한 것은 과학기술의 성과에 그치지 않는다. 동아시아에서 벼와 벼농사에 대한 담론은 국가적 정체성과 맞물린다. 또 일제 강점기 때 일본 품종과 농업 기술을 강제로 받아들였던 한국이 일본도 포기한 육종에 성공한 것은 일본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 행보를 걷는 계기가 됐다. 통일벼 개발 성공으로 자신감을 얻은 농학자들이 1970년대 이후 한국 논을 점령한 일본계 품종 타도에 나선 것은 기술적 자부심의 발로였다.
□ 아키바레 등 일본 품종 50년 만에 퇴출
1970년대 한국에 들어온 아키바레는 단숨에 한국인의 밥상을 점령했다. 고슬고슬해서 식감이 좋고 식어도 밥맛이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학계와 농업 당국은 이를 한국 육종 기술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로 받아들였다. 신품종이 속속 개발됐고, 농민과 소비자들의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1989년 국산 품종인 동진이 아키바레를 누르고 재배 면적 1위에 오르는 성과를 낸다. 이어 해들, 알찬미, 새청무, 삼광, 일품, 친들, 영호진미 등 국산 주자들이 약진했다.
한국산 품종의 경쟁력은 어떨까? 농촌진흥청 주최로 2013년 초밥용 쌀 블라인드 테스트가 있었다. 국산 품종과 고시히카리를 무작위로 주고 일식 요리사들에게 초밥을 만들게 한 결과, 국산인 호품과 신동진이 고시히카리를 제치고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밥맛의 역전이라고 할까.
이처럼 국산 벼 품종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지난해 전체 재배 면적 69만 4404㏊ 중 아키바레, 고시히카리, 히토메보레, 밀키퀸 등 일본계는 도합 2만 7766㏊, 4%에 그쳤다. 2017년 11%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일본 품종은 경기도의 재배 면적이 컸는데, 외래종과는 어울리지 않는 ‘임금님쌀’ 브랜딩에 대한 문제의식까지 겹치면서 최근년 경작지가 급감하고 국산으로 속속 대체되는 추세다.
□ 한국 밥맛 호평하는 일본 소비자
한국 품종 쌀은 지난달 첫 10t이 일본에 수출되어 완판되고 추가 선적도 이어지고 있다. 쌀 수출은 통계가 작성된 1990년 이후 35년 만에 최대 물량이다. 일본 온라인 쇼핑몰 아마존 내 한국 농협 페이지에서는 전남 해남산 ‘땅끝햇살’이 불티나게 팔렸다. 품종은 국산 새청무다. 밥맛에 까다로운 일본 소비자들의 구매 후기는 호평 일색이다.
“일본의 혼합미보다 낫다. 다시 구매하겠다.’ ‘찰기 있는 식감이 좋았다. 맛있었다.’ ‘기대 이상의 맛이어서 놀랐다.’ 일본산에 비해 저렴한 가격 경쟁력의 영향도 컸지만, 사실상 일본 소비자에 처음 노출된 상황에서 밥맛에 후한 점수를 받은 것에 의미가 있다.
이는 벼 재배에 있어 한일 사이 ‘기울어진 운동장’ 시대가 끝났다는 점을 시사한다. 대등한 밥맛 경쟁 시대로의 전환인 셈이다. 한국과 일본은 고대로부터 쌀 재배를 매개로 문명 교류와 함께 미묘한 자존심 대결을 이어왔는데, 이번 일본 쌀 가격 폭등 시기에 한국산 쌀의 품질 수준이 재조명되면서 변곡점을 만났다.
사실 벼 품종뿐만 아니라 밥 짓는 기술에서도 한국은 열세였지만 극적인 반전을 이룬 상태다. 한국 기업들이 전기밥솥에 가마솥 내부의 초고압 원리를 구현하면서 밥 짓는 기술에서도 역전이 일어났다. 밥솥 내부 밀폐로 증기압을 높여 끓는점을 100℃ 이상 올리는 기술인데, 쌀을 빠르고 고르게 익혀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윤기와 점성을 유지하게 만든 것이다. 한국 주부들이 더이상 일본의 코끼리표(조지루시) 전기밥솥을 선망하지 않게 된 이유다.
일본 쌀값 폭등이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로 한국의 신품종 쌀이 일본 소비자들을 만나게 됐다. 엇갈리는 평가가 있지만 적어도 일본 소비자 만족도는 합격점을 받고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벼 재배와 밥 짓기 기술로 교류해 온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개성적인 밥맛 경쟁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2025-05-24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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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부산이 '2찍' 도시라니
“부산은 망할 만한 도시다. 덮어놓고 국힘계 찍는 ‘2찍’들만 사는 도시가 받은 인과응보다.”
지난 번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란을 통해 부산이 망하기 시작한 시점을 논(·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5032415442648839)했더니 댓글에 이 같은 반응들이 적잖게 올라왔다. 중앙집권 시대에는 부산을 콕 찍어 20년 넘도록 규제를 해 온 대한민국이 지방자치 시대에는 부산만 특별대우 못 해준다며 역차별을 하는 바람에 부산이 쇠락했다는 게 칼럼의 주된 내용이었으나 많은 이들이 부산의 정치 성향 때문에 빚어진 결과라며 비판을 가해왔다. ‘2찍’이라는 멸칭까지 동원한 이 비판은 과연 얼마나 진실일까.
■민주당이 부산서 받은 표
가장 최근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부터 살펴보자.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 부산지역에선 총 18개 의석 가운데 국민의힘이 17개 의석을 차지하며 거의 싹쓸이를 하다시피 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북구갑 한 곳에서 전재수 의원만 당선됐을 뿐이다. 결과로만 보면 부산 유권자들은 국민의힘에 몰표를 준 게 확실해 보인다. 아마도 부산을 ‘2찍 도시’라 부르며 욕하는 이들은 이 결과를 들이대려 할 것 같다.
하지만 후보들이 받은 표를 한꺼풀 더 깊이 들여다 보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부산 전체 유권자가 던진 표(더불어민주당이 불출마한 연제구 제외) 가운데 국민의힘은 49.7%를, 더불어민주당은 41.5%를 각각 받았다. 득표율 8%P대 차이에 불과한 이 결과를 놓고도 부산을 과연 ‘2찍 도시’라는 멸칭으로 부를 수 있는가.
그럼 2000년 치러졌던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어땠던가. 당시 선거에서도 국민의힘의 전신인 미래통합당은 15석을 챙긴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3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당시 선거 득표율도 미래통합당은 52.92%, 더불어민주당은 43.99%로 의석 수만큼의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
역대 대통령 선거 부산지역 득표율을 살펴봐도 제18대 선거 때 문재인 후보가 39.87%를 기록한 것을 필두로 제19대 문재인 후보가 38.71%, 제 20대 이재명 후보가 38.15%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대통령 선거조차 40% 가까운 ‘콘크리트’ 민주당 지지세가 유지됐다는 얘기다.
이처럼 일정 수준 이상의 민주당 득표율이 꾸준히 나오거나 심지어 박빙의 득표율을 기록하는데도 불구하고 ‘부산은 작대기만 꽂아 놔도 국민의힘 계열이 당선된다’는 프레임이 작동한 것은 이를 부추기는 ‘범인’이 있기 때문이다.
범인 색출을 잠시만 미루고 시간을 조금만 이전으로 돌려보자.
■제도만 바꿨을 뿐인데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1985년 2월초 어느날 부산 동구 부산일보 앞 도로. 유세차를 타고 가던 민주한국당 김정길 후보는 확성기를 통해 “아빠는 박찬종 찍고 엄마는 김정길 찍어 주이소”라는 희한한 구호를 외쳤다. 당시 부산을 중심으로 무시무시한 바람을 일으키던 신한민주당의 박찬종 후보와 정면대결을 하지 않겠으니 자신을 도와달라는 뜻이다. 그 구호 하나로 인해 어이없게도 득표율에서 김정길 후보가 1위, 박찬종 후보가 2위를 하는 선거 결과가 나왔다. 그럼에도 김·박 두 후보는 사이좋게 나란히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당시 국회의원 선거 제도가 중선거구제였기 때문이다. 부산의 중·동·영도구를 한 선거구로 묶어 선거를 치른 결과 4명의 후보 중 득표율 1·2위 두 후보가 당선된 것이다. 부산 전체로는 지역구 12석 가운데 3개 야당이 9석을 가져가는 파란이 일어나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가슴을 서늘케 했다.
이쯤이면 눈치 빠른 이들은 앞선 프레임의 범인을 찾아냈을 듯하다. 그렇다. 바로 현행 소선거구제가 잘못된 프레임이 나오도록 하는 범인이다. 한 표라도 더 많이 받은 오직 한 명만이 당선되도록 함으로써 민의의 왜곡을 극대화해 올바른 대표성 확보에 허점을 보이는 게 소선거구제의 치명적 단점이기 때문이다. 민의의 왜곡으로 인한 극단적 결과는 선거 결과를 믿지 못하고 부정선거론이 판을 치는 토양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만약 최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가 중선거구제였다면 부산지역에선 18개 의석 중 더불어민주당이 최소 8석 정도는 확보하지 않았을까.
■개헌보다 더 서두를 일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최근 한국 사회가 개헌론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못내 아쉽다. 1987 체제 헌법의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헌을 하지 않고서도 싹쓸이로 인한 전횡의 부작용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 가정은 의미가 없다고 해도 수년 전 정치개혁 논의가 만발했을 때 국회의원 선거 제도만 중대선거구로 바꿀 수 있었다면 제대로 된 민의 반영으로 극단적 정치 혼란을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정치 세력 간에 협상과 타협을 할 수밖에 없는 다당제가 자리를 잡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6·25 전쟁 이후 급속 성장을 위해 1등에게만 모든 걸 몰아주는 방식으로 효율성을 극대화해 온 사회다. 한 집안에선 장남에게만, 국가적으로는 수도권에만, 선거에서는 최고 득표자에게만 몰아줘 온 게 지난 역사다. 그 역사의 끝자락에서 우린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하지만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때처럼 군사 정권 하에서도 중선거구제로 다당제가 자리잡았던 시기도 분명 있었다. 조기대선 이후 한국 사회가 거듭나기 위해 개헌론만큼이나 선거 제도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해야 하는 이유다. 아니, 선거 제도에 대한 논의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2025-05-17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