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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노년층 MBTI에 빠지다
MBTI는 카를 융의 초기 분석심리학 모델을 바탕으로 1944년에 개발된 자기보고형 성격유형검사다. 크게 4가지 기준에 의해 나눈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다시 분류한다. 젊은 세대에겐 서로의 MBTI 유형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 이미 자연스럽다. 심지어 MBTI가 자신의 유형과 맞지 않으면 아예 교제하지 않는다는 말도 나온다. MBTI 궁합, MBTI 연애 테스트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젊은 세대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MBTI 성격유형검사가 노년층으로 확산하고 있다. 노년층 MBTI 문화는 2020년부터 만 65세 이상 노인 대열에 합류한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년 출생)가 주도하고 있다. 이들이 ‘청년 노인’으로 불리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주목할 점은 베이비부머 세대 이전 세대들도 MBTI를 접하는 사례가 늘어났다는 것이다. 고령 노년층이 MBTI를 활용하는 방식은 청년 세대 또는 ‘청년 노인’과 다소 차이가 난다. 청년 세대가 주로 연애 등 이성과의 교제에 MBTI를 활용하는 반면 고령 노년층은 주로 행복한 노년기를 위해 자기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다. 특히 삶의 활력을 높이기 위한 상담이나 심리 치유 목적에 활용하는 사례가 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청년 세대가 자발적으로 MBTI 문화를 즐기는 반면 노년층의 상당수는 노인복지관 프로그램 등 교육 과정 등을 거쳐 MBTI의 세계에 입문한다는 점도 다른 점으로 볼 수 있다.
■ 자기 이해 폭 확대… 부정적 감정 탈출
노년층은 사회적으로 고립된 경우가 많다. 배우자 사망, 자녀들과의 절연,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인한 외로움, 우울 등 부정적 감정에 노출될 우려도 높다. 부산시노인복지관을 비롯해 부산과 울산, 경남 등 전국의 노인복지시설, 노인문화센터 등이 노인 정서 지원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MBTI 관련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이 프로그램의 주된 목적은 노인들이 MBTI 성격유형검사를 통해 자신의 성격이나 특성을 스스로 알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다면 부정적 감정에서 한층 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더욱이 자신만의 재능과 적성, 하고 싶었던 일 등을 파악, 제2 인생을 설계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한다. 통상 복지관 등은 전문가를 초빙해 노인 수강생들이 MBTI 검사를 진행하는 것을 돕는다. 참가자들이 검사 결과를 공유하거나 토의를 하는 시간도 마련한다. 노인들의 성격이나 재능에 맞는 건강한 여가 생활 향유, 그에 맞는 일자리 발굴 등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집단상담 통해 고독한 노년 탈출
혼자 사는 고령자들이 늘고 있다. 대화 상대가 없는 처지에 놓인 노인들도 많다. 2023년 기준 국내 65세 이상 고령자 중 혼자 사는 인구는 22.5%(213만 8000명)에 달한다. 독거노인 비율도 꾸준히 늘고 있다. 혼자 살다가 고독사하는 노인 수도 매년 늘고 있다. 보건복지부 ‘2022년 고독사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21년에 발생한 고독사 중 60세 이상은 1605명으로 전 연령대 3378명의 47.5%에 육박한다.
최근 이런 점을 감안해 MBTI를 활용한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개설하는 노인복지시설도 늘고 있다. MBTI가 노인들의 고독을 직접적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MBTI 상담을 주제로 다수의 참가자들을 모집한 뒤 정기적으로 만남의 시간을 갖도록 주선하는 방식이다. 특히 참가자를 동년배로 구성해 서로 비슷한 공감대를 토대로 동일 유형 및 반대 유형의 참가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제공한다. 누구라도 손쉽게 자가 검사를 진행할 수 있는 MBTI를 참가자의 대인 관계를 증진하는 매개체로 적극 활용 중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또래 노인 집단과의 정기적인 만남이 치매나 인지능력 저하 예방과 완화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 노인 부모 MBTI 알아야 ‘효자’?
노년층에 진입한 부모의 MBTI를 아는 자녀가 얼마나 될까? 의외로 자녀들은 부모의 성격, 특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의 MBTI를 추정해보라는 질문에 선뜻 답할 수 있는 자녀도 많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MBTI가 정확한 성격 검사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왜 부모의 MBTI까지 알아야 하느냐는 반문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노년층으로 진입한 부모의 성격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고령화와 각종 질병 등으로 간병이나 요양 보호가 필요한 상황에 처한 노령층을 제대로 보살피려면 부모의 성격을 최대한 고려한 조치와 선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MBTI는 정확한 검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손쉽게 부모의 기질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물론 고령층이 스스로 MBTI 검사를 진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자녀 등이 검사 문항을 부모와 함께 읽거나 읽어준 뒤 체크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면 부모의 MBTI를 비교적 수월하게 파악할 수 있다.
실제로 MBTI 검사를 통해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외향형, 대인 관계에 소극적인 내향형,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형,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사고형, 개방적이고 즉흥적인 인식형, 정리정돈을 잘하는 판단형 등 개략적인 성격 유형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런 검사 결과를 참작해 노쇠해져 가는 부모를 배려한 대화법이나 간병 또는 요양 방식 등을 정한다면 노령 부모에게 더 큰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예를 들어 말투에 민감한 감정형 부모에게는 부정적인 단어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이끌어가고, 사고형 부모에게는 자세한 설명을 통해 사안을 납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간병 등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 처했을 때도 외향형이나 내향형 성격을 감안해 요양 보호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좋다. 부모가 내향형인 경우 다수가 이용하는 요양병원에 입원을 시키는 대신 집에서 홈케어 방문요양 서비스를 이용하는 등의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김용식 부산시노인복지단체연합회 회장은 “MBTI를 잘 활용한다면 노인들의 정서 지원이나 교류 네트워크 확대는 물론 노년층 부모의 성격 특성을 자녀들이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2025-03-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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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대치맘’ 열풍, 왜 주목받나?
지난해 사교육비가 29조 원을 넘으며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정부가 2023년 수능 킬러 문항 배제 등 사교육 경감 대책을 발표했지만, 사교육 광풍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유튜브와 OTT 드라마, TV 시사 프로그램 등에서 ‘대치맘’으로 상징되는 강남 학부모들의 사교육 열풍을 다룬 콘텐츠가 주목받고 있다.
■이수지 ‘대치맘’ 패러디 화제
개그우먼 이수지의 ‘대치맘’ 캐릭터 연기가 화제다. 그의 대치맘 패러디 영상은 엄청난 조회 수를 올리고 있다. 이수지는 지난달 4일 자신의 유튜브 채널 ‘핫이슈지’에 ‘휴먼다큐 자식이 좋다’ 1편을 올렸다. 조회 수는 무려 839만 회(3월 20일 기준)다. 지난달 25일 올라온 2편의 조회 수도 547만 회(3월 20일 기준)에 달한다.
영상에서 이수지는 사교육 열풍의 중심에 선 가상의 ‘대치맘’ 캐릭터인 이소담(일명 ‘제이미맘’) 씨를 사실감 있게 연기한다. 그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엄마들의 교복으로 통하는 ‘몽클레르 패딩’을 입고 나온다. 영어와 한국어를 혼용하고 ‘~하지 않아요’라는 강남 엄마처럼 교양 있는 말투를 쓴다. 그 모습이 ‘대치맘’과 너무 흡사해 놀랍다는 평가다. 영상에서는 이소담 씨가 영어 이름이 ‘제이미’인 4살 아들의 사교육을 밀착 지원한다. 대치동 학원가는 셔틀버스를 잘 운영하지 않는다. 그는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 주는 ‘라이딩’을 위해 자동차에서 김밥으로 끼니를 때운다. 수행 평가를 위해 제기차기 과외를 비롯해 심지어 배변훈련 과외까지 알아볼 만큼 사교육을 신봉한다. 자녀의 원어민 선생님과 어설픈 영어로 통화하고, 아들의 평범한 행동에서 ‘영재적 모멘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수지는 대치동에서 펼쳐지는 사교육 경쟁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웃음 포인트를 영리하게 전달한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뒤처지지 않고 싶은 부모의 심리를 잘 파고들었다는 평가다.
■ 시사 프로그램 ‘7세 고시’ 조명
지난달 14일 방영된 KBS1 시사 프로그램 ‘추적 60분’은 ‘7세 고시, 누구를 위한 시험인가’를 주제로 대한민국 사교육 현실을 폭로했다. 대치동의 유명 영어학원과 수학학원에 들어가기 위한 레벨테스트, 이른바 ‘7세 고시’를 치르는 아이들과 부모들을 담았다. 여기에 나온 사례가 충격적이다. 한 학원의 ‘7세 고시’ 영어 모의고사 시험지를 본 영어 교사들은 혀를 내둘렀다. “유형이 수능시험 문제와 같다. 만 5세 아이들에게 추론을 물어보고 있다. 이것은 지적 학대에 이르는 수준이다”라는 반응이었다. 한 수학 학원의 7세 어린이 선발 시험 문제를 서울대 재학생들에게 풀어보도록 했다. 이들은 “아주 까다롭다. 어느 특목고 시험문제냐?”라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치맘 라이프’는 드라마 소재로도 활용됐다. 지난 3일 처음 방영한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라이딩 인생’은 7세 딸을 명문 초등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대치동 학원을 돌며 고군분투하는 워킹맘의 일상을 다루고 있다.
이처럼 강남 학부모들의 문화를 담은 콘텐츠가 인기를 끄는 것은 현실 세태를 생생하게 반영했기 때문이다. 교육 경쟁이 치열하고 경제적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강남 사교육에 대한 부정적 정서를 패러디를 통해 포착했다는 지적도 있다. 한편으론 진입 장벽이 높은 대치동 사교육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따라 하고 싶은 이들의 욕망을 건드리는 작용도 했다는 것이다.
■ 대치동은 욕망의 공간
대치동은 한국 사회에서 단순한 지리적 명칭이 아니다. 부동산과 교육이 결합해 계급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한국 사회 구성원의 성공을 향한 선망과 욕망이 집중된 곳이다.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하는 이곳에서 학부모는 단순한 보호자를 넘어 자녀를 위한 교육 기획자로 활동한다.
“대한민국이 다 무너져도 욕망이 남아 있는 이 동네는 절대 안 무너질 거야.” 지난해 초 방영된 tvN 드라마 ‘졸업’에서 대치동 학원 강사인 남자 주인공이 한 말이다. 여기서 ‘무너지지 않는 동네’는 대치동 학원가다. 콘텐츠 제작자들이 작품 배경으로 대치동을 꼽는 이유는 이렇다. 대치동은 열린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나 물리적으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기에 그곳을 내밀하게 엿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들의 호기심이 많기 때문이다.
변화의 조짐도 감지된다. 최근 유튜브, SNS 등 미디어가 활성화되면서 대치동은 한정된 이들만 접근할 수 있는 ‘닫힌 동네’가 아니라 누구나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이제 대치동은 특정 계층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대치동 학원들은 전국에 같은 시스템을 구축해 분원을 운영하기 때문에 사교육 열풍은 강남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로 확장됐다.
■ 학벌 위주 사회 벗어나야
‘대치맘’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마음은 편하지 않다. 과도한 사교육 열풍, 학업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어린아이들, 경제적 양극화 등 씁쓸한 현실과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또 과도한 경쟁 체제와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문화가 더욱 어린 시기까지 내려가고 있다는 점은 심각하다.
공교육만으로 원하는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없다는 부모들의 불안감, 학령 인구는 줄어도 갈수록 심해지는 입시 경쟁, 정보 불균형으로 인한 사교육 의존도 증가. 이런 문제들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대치맘’ 열풍은 이어질 것이다. 공교육이 더욱 강화되고, 의대 열풍, 학벌 위주 사회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창의적인 개성과 다양한 교육관이 존중받는 시대가 오길 기대해 본다.
김상훈 논설위원 neato@busan.com
2025-03-2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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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개헌, 지방분권 개헌이 살길
12·3 비상계엄 사태에 따른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임박했다. 헌재의 탄핵 기각으로 윤 대통령이 복귀하길 바라는 국민의힘과 탄핵이 인용돼 대통령을 파면해야 마땅하다는 더불어민주당. 최근 거대 양당이 탄핵 찬반으로 나뉜 도심 집회에 편승해 ‘거리 정치’에 나서면서 여야 대립은 격화하고 있다.
정치권이 헌재를 압박할 의도로 여론몰이를 통한 지지세 결집에 몰두하는 탓에 국론 분열이 극심하고 사회는 갈수록 혼란스럽다. 이런 상태에서는 헌재의 탄핵 결정이 어떤 식으로 나오든 깨끗이 승복하기는커녕 보수·진보 진영 어느 한쪽의 거센 반발 등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다. 정국 불안을 초래한 정치의 쇄신과 국가 안정을 위한 근본 해법으로 개헌이 꼽힌다. 게다가 이왕 개헌을 추진할 바엔 국가와 지방의 미래가 걸린 지역균형발전에 실질적 효과가 있는 지방분권형 개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 헌법 개정 필요한 이유
윤 대통령의 독단적인 불법 계엄 선포가 개헌론에 다시 불을 지폈다. 1987년 9차 개헌으로 마련한 현행 6공화국 헌법을 38년 만에 다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지고 있다. 초유의 이번 대통령 내란 사태로 5년 단임 대통령제의 폐단이 여실히 드러난 만큼 제왕적 권한이 주어진 대통령제를 현실과 국민 눈높이에 맞게 수정·보완하자는 요구다. 대통령에게 집중된 막강한 권력과 역할을 분산하고 견제와 협력을 통해 민주적인 국가 공동체를 만들자는 게다.
이 같은 개헌 요구는 오래전부터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이슈가 될 때마다 여야가 정파적 이익이나 정치적 유불리만 따지며 충분한 논의를 기피하는 바람에 좌초되기 일쑤였다. 38년 전 군부독재 종식을 위해 급하게 만들어진 5년 단임 대통령제의 임기 중간에 총선이 치러지면서 여소야대 구도가 형성될 경우 여야 간 극심한 정쟁으로 국회가 마비되기 쉬운 점도 개헌의 당위성을 높인다. ‘87년 헌법’ 체제가 시효를 다했다는 것이다.
■ 개헌에 대한 여야 입장
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에서 궁지에 몰린 국민의힘이 내부적으로 개헌을 위한 의견 개진에 적극적이다. 일단, 여론이 여권에 부정적인 위기를 모면하는 한편 헌재의 윤 대통령 탄핵심판 결과에 대비하려는 포석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여당은 이달 4일 주호영 국회 부의장을 위원장으로 한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특위는 지난 13일 두 번째 회의를 갖고 이른 시일 내 개헌안을 내놓기 위해 박차를 가하기로 했다. 앞서 윤 대통령도 지난달 25일 탄핵심판 최종 변론에서 탄핵 기각에 따른 직무 복귀를 전제로 임기 단축 개헌 의사를 밝힌 바 있다.
반면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개헌 요구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민주당 역시 당 차원으로는 개헌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윤 대통령 탄핵을 최우선 당면 과제로 보고 개헌 논의에는 거리를 두는 모습이다. 조기 대선이 실시될 경우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로 꼽히는 이 대표 입장에서는 성급한 의견 제시가 이로울 게 없다는 판단도 작용했지 싶다. 이 때문에 이 대표가 개헌 논의에 서둘러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주문이 곳곳에서 잇따른다.
■ 다양한 방안과 움직임
구체적인 개헌 내용과 실시 시점에 대해선 생각이 제각각이다. 지난 4일 김형오 정의화 정세균 박병석 김진표 등 전 국회의장 6명과 정운찬 이낙연 등 전 국무총리 4명이 한자리에 모여 개헌을 논의했다. 이날 서울대에서 열린 ‘국가 원로들, 개헌을 말하다’라는 대담회였다. 여야를 망라한 이들은 대화·타협에 의한 협치와 정치 개혁을 위해 권력 분산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 의원 내각제(의회제), 중대선거구제 등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리고 지금이 개헌의 적기이므로 때를 놓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주로 여야의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인사들의 개헌 추진 의지가 강하다. 국민의힘에서는 오세훈 서울시장과 한동훈 전 대표, 유승민 전 의원이 임기 단축을 통한 개헌을 주장했다. 만일 조기 대선이 실시돼 당선되면, 대통령을 3년만 하고 개헌을 통해 2028년 대선과 총선을 실시하겠다는 식이다. 안철수 의원은 4년 중임제와 결선투표제 개헌을 내놓았다.
민주당의 경우 김동연 경기지사가 분권형 4년 중임제와 책임 총리제를 포함한 개헌을 약속하며 대통령 임기 2년 단축 의사를 밝혔다. 김부겸 전 총리와 김경수 전 경남지사 등 야권 대선 주자 대부분도 분권형 개헌에 동의한다. 김두관 전 의원도 최근 <헌법개정 제안서>란 책을 펴내고 다음 달 4일 부산에서 북콘서트를 열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대통령 권한과 임기를 조정하는 개헌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확산하는 분위기다. 한국갤럽이 지난 4~6일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54%)이 필요하지 않다는 응답(30%)의 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불의의 계엄 사태와 혼란스러운 탄핵 정국이 국가 위기와 경제 불안으로 이어지자 국민들이 고물가·고환율 등 직접적인 피해를 겪고 있어서 그럴 테다. 따라서 개헌 주장이 대선 등을 겨냥한 정치적 수사에 그치지 않고 실행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국가적 불확실성과 탄핵 후폭풍을 해소하며 국가 시스템과 정치 체제를 민주적으로 재정비할 필요성 때문이다.
■ 절실한 지방분권 개헌
우리나라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통해 세계 굴지의 경제·문화 수준을 갖춘 선진국으로 성장했으나, 정치 분야는 여전히 낙후돼 있다. 여야 간 극심한 정쟁과 극단적인 진영 갈등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감마저 감도는 요즘이다. 일상화한 정치 퇴행과 국정 공백 상황을 바로잡고 국가·사회적 안정을 꾀하기 위한 대책으로 개헌론이 대두되는 이유다. 시민·사회단체와 학계도 최근의 개헌 목소리에 힘을 싣고 있다. 특히 전국 시민단체들은 지방분권형 개헌 실시를 강력히 촉구한다. 나라를 살리고 진정한 지역균형발전을 이루는 데 지방분권 개헌이 가장 확실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이어서다. 수도권 일극체제와 지역 소멸에 따른 인구 절벽 현상으로 수도권과 지방이 공멸할 위기에 처한 현실에서 지방분권 개헌의 실행은 절실하다. 지난 4일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가 양원제, 중대선거구제, 4년 중임 정·부통령제 등을 뼈대로 발표한 ‘분권형 헌법 개정안’은 지방분권 강화를 위해 참고할 만하다.
지방분권 개헌은 대통령 권력의 분산뿐만 아니라 중앙정부 권한을 지방정부로 대폭 이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 부처가 예산과 인력을 좌우하는 현행 중앙집권적·수직적인 행정제도 아래에선 지자체의 자율성 발현과 지역 활성화는 요원할 뿐이다. 올해 민선 지방자치 30주년을 계기로 지방분권 개헌 추진이 급선무다. 자치 재정권을 비롯해 지방정부의 자치 권한을 강화해야 비수도권이 되살아나며 국가 발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겠다. 이를 위해 헌법에 실질적 지방자치와 재정분권 보장을 명문화해야 한다. 그래야만 헌법을 근거로 국가적으로, 범국민적으로 지방분권을 실효성 있게 추진하는 동력을 얻을 수 있다. 개헌 그리고 과감한 지방분권 개헌 추진은 더는 미뤄선 안 되는, 국민이 바라는, 시대가 요청하는 과제다. 여야는 부디 당리당략보다 국익을 앞세워 조속한 합의와 추진에 방점을 두고 비수도권 국민이 함께 잘 살기 위한 개헌 논의에 집중할 일이다.
강병균 대기자(大記者)·논설위원 kbg@busan.com
2025-03-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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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허망하고 씁쓸한 대왕고래 프로젝트, 어이할꼬
경북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은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를 개발한다는 일명 ‘대왕고래 프로젝트’. 지난해 6월 윤석열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직접 발표하며 온 국민의 눈길을 끌었던 이 프로젝트는 불과 8개월 만에 ‘희망 고문’으로 끝나고 말았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6일 “경제성을 확보할 수준이 아니다”라고 실토(?)하면서 대국민 사기극까지 거론되는 등 후폭풍이 만만찮다. “석유 발견”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국민을 상대로 정부가 섣부른 발표로 우롱한 셈이다.
■ 윤 정부의 실상 보여준 “석유·가스 대박”
대왕고래 프로젝트의 어이없는 실상이 국민에게 공개되면서 윤석열 정부에 대한 책임론은 물론 향후 정부의 다른 유전 개발 사업도 타격이 불가피하게 됐다. 되짚어 보면 이 프로젝트는 발표 당시부터 언론 매체와 정치권의 여러 의혹에 휩싸였다.
영일만 앞바다에 최대 140억 배럴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다면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환영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런데 단지 가능성이 높다는 정도의 검증되지 않은 내용을, 그것도 윤 대통령이 직접 국정브리핑 1호로 발표하면서 뭔가 ‘정치적 냄새’가 난다는 의혹을 자초했다. 브리핑에 배석했던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매장 가치가 삼성전자의 시가총액 5배 정도”라고 허풍을 떨었다.
당시 윤 정부는 4·10 총선 참패 후 국민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져 이를 만회할 정치적 소재가 절실하던 때였다. 결국 모든 국민이 솔깃할 ‘막대한 양의 석유 매장’을 발표하며 안팎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했지만, 채 1년도 못 가 스스로 “정무적인 이유로 많은 부담을 안고 이 프로젝트가 진행됐다”라며 같은 입으로 두말을 뱉고 말았다. 졸지에 국민만 바보가 된 기분을 느껴야 했다.
■ “윤 정부가 하는 일이 그렇지”, 그럼에도…
대왕고래 프로젝트는 큰소리쳤던 정부의 1차 탐사 시추 실패 자인으로 추가 사업 진행이 불투명해졌다. 사업을 계속 추진할 동력 확보 자체가 어려워졌다. 담당 공기업인 한국석유공사도 올해 안으로 2차 시추는 하지 않을 방침임을 내비쳤다. 게다가 프로젝트의 신뢰성과 가능성이 급락하면서 예산 확보는 물론 추가 탐사와 관련한 채권 발행 등 자금 조달도 매우 불확실해졌다. 국민적 신뢰가 바닥이고, 탐사 비용 조달마저 어렵다면 프로젝트의 명맥은 유지되기 어렵다.
프로젝트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 역시 부정적이다. 대통령 탄핵심판 이후 보수 정권이든, 진보 정권이든 간에 국민 신뢰에 심각한 타격을 입은 유전 탐사를 다시 시작하기는 쉽지 않다. 국민들의 숙원인 산유국의 꿈을 이처럼 정치적 계산으로 허망한 지경에 빠트린 윤석열 정부의 거칠고 엉성한 일 처리가 더없이 안타깝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유국을 향한 자원 개발은 무작정 포기할 수가 없는 사업이다. 정권과는 무관한 국가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처럼 하루아침에 우리 바다에서 석유나 가스가 펑펑 쏟아질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나 지나친 흥분은 삼가야 한다.
대신 넉넉하게 시간을 잡은 뒤 정밀한 분석을 통해 조용히 유전의 실체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 정부도 ‘대박’을 거론하며 국민들을 들뜨게 하지 말고, 국민들도 그런 소리에는 애초부터 귀를 닫는 편이 더 낫다. 학계에서도 1차 시추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만큼 앞으로 동해의 심해 지역 탐사를 통한 지질 데이터 축적과 분석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모두 새겨야 할 지적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전제 조건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정권·정치권의 정략적인 간섭 배제와 국민의 인내심이지 싶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5-02-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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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계몽령이라고 하는 그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선포한 계엄령을 두고 일부 인사들이 “계몽령” “계몽령” 한다. 그러하니, 계몽이라는 말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계몽, 스스로 밝게 하는 것
임마누엘 칸트는 계몽과 관련해 반드시 거론되는 철학자다. 1784년 발간된 그의 저작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계몽에 대한 상징적 정의로서 지금도 무겁게 회자된다. 그에 따르면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자신의 지성을 스스로 이용하지 못하는 상태다. 스스로 지성을 사용하지 못하니 왕이나 교회 등 지배층의 지도에 안주한다. 이를 벗어나려면 홀로 서려는 용기와 결단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칸트는 말했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언제나 스스로 생각하라!”
이때 계몽은 타율적이지도 않고 피동적이지도 않다. 남이 이끌거나 만들어 주는 게 아닌 것이다. 자율적이며 능동적이다. 자기가 스스로를 밝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밝아지면 자신을 옭아매던 굴종 같은 낡은 껍데기는 벗어던지기 마련이다. 칸트가 정의하는 바 계몽이 그런 것이라면, 그로 인해 민중이 스스로 각성하고 마침내 봉건의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리는 혁명으로 이어졌다는 해석이 전혀 무리는 아니겠다. 여하튼, 이러한 계몽이 지금 “계몽령” 운운하는 그들이 말하는 그 계몽이 아님은 분명하다.
■국가가 국민을 교화한다?
본래 계몽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그리 자주 쓰였던 단어는 아니다. 쓰인 사례가 있기는 했다. 중국 송나라 때 주희의 <산학계몽(易學啓蒙)>이 그 하나로, 여기서 계몽은 ‘특정 학문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한다’는 일종의 해설을 의미했다. ‘어리석은 이를 가르치거나 깨우친다’는 의미로는 계몽보다는 훈몽(訓蒙)이나 격몽(擊蒙)이라는 말이 더 자주 쓰였다.
동아시아에서 계몽이 널리 쓰이게 된 데에는 일본의 영향이 컸다. 메이지유신 시기 일본 학자들이 서구의 칸트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의되던, 영어로 표현하면 ‘Enlightenment’라는 개념을 굳이 ‘계몽’으로 번역하면서 이후 동아시아에서도 계몽이라는 말이 보편화됐다.
출발부터 어긋났으니 칸트의 계몽이 뒤로 온전히 전해졌을 리 없다. 메이지 이후 일본 사회는 계몽이라는 말을 두고 혼선에 빠졌고, 시간이 흐르면서 칸트의 자기 각성에 기반한 계몽의 개념은 희석되면서 결국 학문의 공간에서만 남게 됐다. 특히 위정자들이 계몽을 ‘지식수준이 낮거나 인습에 젖은 사람을 가르쳐서 깨우침’이라는 동아시아 전래의 의미와 뒤섞어 그 쓰임을 굴절시켰다. 국가가 국민을 교화한다는 개념어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일본이 전체주의와 제국주의로 나아가는 사상적 발판이 됐다.
■계엄과는 함께일 수 없는 계몽
계몽령(啓蒙令)에서도 음험한 그 기운이 느껴진다. 계몽을 명령한다? 누구를 강제로 계몽한다는 건가. 지금 한국의 문맹률은 0%에 가깝다. 대학 진학률은 80%가 넘는다. 정보통신(IT) 환경도 한국이 세계에서 으뜸을 달린다. 이런 나라의 국민을 국가 또는 특정 세력이 계몽시킨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21세기 한국의 대다수 국민은 위정자들이나 소위 엘리트라는 계층보다 지적 수준이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으며, 스스로 자신을 밝힐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계몽한다는 말인가. 애초에 온 국민과 세계인이 목도한 계엄을 계몽이라고 우기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인 억지이고, 그에 부화뇌동하는 건 어설픈 식견에서 비롯한 몽매(蒙昧)일 따름이다.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서양도 계몽을 왜곡·오용한 경험을 갖고 있다. 18세기의 이른바 계몽군주가 그 예다. 좋게 표현해서 ‘깨어 있는 군주’이지, 실태로는 ‘절대왕정을 노리는 잔혹한 독재자’로 군림했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폭정을 일삼으며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들을 처단했다. 칸트에 따르면, 진정한 계몽은 계몽군주 같은 독선의 위정자를 거부하는 자아를 밝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계몽은 계엄과는 함께할 수 없는 정반대의 개념이다.
어쩌면 계엄을 계몽이라 진정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을 법도 하겠다. ‘하늘이 우리에게 보내주신/ 대통령이 태어나신 뜻깊은 오늘’이라는 류의 노래를 속없이 지어 바치고, 또 그 행태에 희희낙락하는 이들이 그런 무리일 테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busan.com
2025-02-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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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윤석열의 비상계엄과 코리아 디스카운트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과 구속 사태는 국내외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 사회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글로벌 투자자와 국제 사회의 신뢰를 흔들었다. 결국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Sell Korea’가 재연될 우려마저 낳고 있다. 국제적인 투자자가 특정 국가에 투자를 결정할 때 경제적인 요소보다 우선하는 것이 그 나라의 정치 상황이다. 해당 국가의 정치 상황이 혼란해서 투자자금을 회수할 수 없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한국 자산이 대량 매도된 ‘Sell Korea’ 사례는 한국 정치적 불안정이 경제 및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경고하는 선례이기도 하다. 국내외 경제 전문가들은 "정치는 경제보다 상위 구조"라며 "계엄 사태는 대외 신인도에 긍정적이지 않다"라고 말하는 등 비상계엄으로 인한 후폭풍은 한국 경제의 불확실성을 더 키우는 악재가 되고 있다. 내수 부진의 장기화, 빈약한 재정 기반, 미국 트럼프 2기 출범과 미중 경제전쟁 등으로 사면초가에 빠진 한국 경제에 적지 않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혼란과 'Sell Korea'의 교훈
'Sell Korea'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정치적 리스크와 경제적 불확실성 증가로 인해 한국 자산을 대량 매도하며 발생하는 현상이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은 불과 50여 일 만에 국가신용도가 6단계나 하락하며, 기업 연쇄 도산과 대규모 구조조정을 겪었다. 정치적 혼란과 경제적 관리 실패가 맞물려 대외신인도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외국 자본이 한국을 떠나기도 했다. 국가신용도가 하락하면 외화 차입 비용이 상승하고, 기업과 금융기관의 자금조달 여건이 악화되고, 곧이어 시장금리 상승과 개인 대출 악화로 이어진다. 이런 악순환은 국민 개개인의 삶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는 정치적 불확실성 증가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과 채권에서 대규모로 이탈하고, 코스피 지수 하락과 원화 가치 약세로 이어졌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수출입 비율이 통상 80%를 넘어서는 대외의존적인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에서 국내의 정치 혼란은 전 세계로부터 경제적 신뢰를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 경제 매체 포브스는 ‘윤 대통령의 절박한 묘책이 한국의 GDP를 위협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번 계엄령이 한국을 일본과 같은 ‘잃어버린 10년’으로 몰고 갈 가능성을 높인다”면서 “그 대가는 한국의 5100만 국민이 시간에 걸쳐, 할부로 치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을 정도다.
■정치적 불안정성과 외국인 투자 감소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구속 찬반 세력 간의 갈등은 정치적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윤 대통령이 탄핵 심판 대응과 법정싸움 등 끝까지 싸우겠다고 선언한 만큼 극단적 정치 양분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요인이 될 소지가 높다. 더 큰 문제는 정치 불확실성이 신속히 해소되지 않고 장기화되는 경우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정치적 갈등이 장기화해 경제활동에 영향을 미치면 신용에 부정적"이라고 경고했다. 해외 투자은행(IB)인 씨티는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1.6%에서 1.5%로 낮췄다.
■한국은행 GDP 감소분 6조 3010억 원 추정
비상계엄 사태로 내수 경기가 얼어붙으면서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크게 줄어들고 있다. 실질적으로 부산의 고급식당가에는 지난해 비상계엄 사태 이후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긴 상태이다. 2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계엄 전인 지난해 11월 28일 올해 성장률을 1.9%로 예상했으나, 현재는 1.6~1.7%까지 떨어질 가능성을 전망하고 있다. 다음 달 25일 수정 경제전망에서 종전 전망치보다 0.2~0.3%p 하향 조정이 불가피하며, 이 중 약 0.2%p가 계엄 여파 때문이라는 게 한은 판단이다. 올해 성장률을 1.9%로 가정한 실질 GDP는 2335조 4370억 원인데, 이보다 0.2%p 낮은 1.7%에서 실질 GDP는 2330조 8530억 원으로 4조 5840억 원 줄게 된다. 결과적으로 지난해 4분기와 올해 연간 성장률 전망치 하향 조정을 고려한 GDP 감소분을 모두 더하면 6조 3010억 원으로 추정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심화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한국 상장기업의 주식 가치평가 수준이 외국 상장기업에 비해 낮게 형성되는 현상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취약한 기업 지배구조, 미흡한 주주환원, 낮은 기관투자자 비중 등이 원인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최근 비상계엄과 대통령 구속 등 정치적 혼란이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국제금융시장 투자자들이 정치적 리스크가 큰 한국 시장을 피할 경우, 한국의 경제적 위상과 국제적 신뢰도가 약화될 우려마저 크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국정과제로 내걸고, 한국 기업과 시장이 국제적으로 제대로 평가받게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현상을 심화시킨 주범으로 등장했다. 금융시장에 그 충격이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언론은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를 두고 한국 경제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있다고 전한다. 블룸버그통신은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한국과 글로벌 금융시장에 혼란이 빚어졌고 국민과 투자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면서 "트레이더들이 불안정성에 대비해 안전자산으로 이동했다"라고 분석했다.
■환율 불확실성 급등
환율의 급격한 상승이 가장 우려스럽다. 12·3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 탓으로 작년 12월 한국 원화가치의 하락 폭이 전쟁 중인 러시아에 이어 주요 30개국(G30) 중 두 번째로 컸던 것으로 나타났다. 원화가치 하락은 수입 원재료를 중심으로 하는 국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고환율과 국제유가 상승이 겹쳐 휘발윳값도 상승세다. 정치 리스크가 환율을 흔들고, 떨어진 원화가치는 다시 물가를 자극하면서 ‘스태그플레이션’(물가 상승 속 경기 침체)에 빠질 가능성마저 점쳐지고 있다.
한때 1500원대까지 치솟았던 환율이 23일 1430원대로 내려서면서 큰 고비는 넘겼지만, 조만간 1500원 선을 넘을 것이란 우려도 배제하기 힘든 상황이다. 1500원대 환율이 뉴노멀이 되면 우리 경제는 ‘퍼펙트 스톰’(다발적 악재로 인한 복합 위기)을 맞게 된다. 한국 경제에 '정치 불안'이라는 새로운 불확실성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해외 투자 전문가들은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관세 부과 정책이 시작되면 원·달러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문화 강국 이미지와 소프트 파워 손상
한국은 K팝, 드라마, 영화 등을 중심으로 '문화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군이 동원된 비상계엄과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구속은 한국 문화에 대한 해외 소비자들의 호감을 잃게 만들고, K컬처 수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국 드라마, 영화, 음악 등 콘텐츠 소비자들이 ‘정치적 불안정 국가’라는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면, 한국 문화의 해외 확산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 한국 브랜드 이미지 실추는 이와 깊이 연결된 K푸드의 성장세도 둔화시킬 우려가 크다.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국가”라는 인식은 식품 안전성과 품질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미국, 유럽 등 주요 식품 수출 시장에서는 정치적 안정성을 주요 거래 기준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다.
K팝 스타들이 출연한 한국 음식 광고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음식 장면들은 K푸드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지만, 한국 방문객이 줄고,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지면, 소비도 덩달아 감소할 수 있다. 또 다른 걱정은 표현의 자유 위축이다. 갈수록 양분화 되어가는 국내 정치 환경에서 창작자들과 언론까지 정치적·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계속되는 자기검열을 강화하면, 한국 콘텐츠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약화시킬 위험이 있다. 문화산업의 위축은 한국의 글로벌 소프트 파워 경쟁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미래 전망도 다소 비관적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조만간 발표할 관세 부과를 통한 무역전쟁과 더불어 국내 정치 불안은 한국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 해외 투자 전문가들은 “최근 금융시장이 트럼프 행정부가 시행할 미국 수입품 관세 인상을 가격에 반영하기 시작했는데, 국내(한국) 불확실성이 외부 압력에 더해지고 있다”라고 진단했다. 로이터 통신에서도 “계엄령 사태는 장기적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심화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라고 바라봤다. 외국 언론과 해외 투자 전문가들은 한목소리로 비상계엄과 대통령 구속, 탄핵 정국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심화시킬 것으로 진단했다. 또한, 밸류업 정책 등 현 정부의 정책이 추진 동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 기업, 사회 각계각층은 정치적 안정과 민주적 가치를 강화하며, 대외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첫 번째 노력이 국민 통합과 조속한 정치적 안정 확보를 통한 안팎의 신뢰 회복이다. 두 번째가 한국의 문화적 소프트 파워를 통한 국제 사회와의 협력과 이미지 업그레이드이다. 세 번째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기업 지배구조 개선, 정치적 투명성 강화, 국제 관계 안정화를 통해 장기적으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여 나가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극복하고,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2025-01-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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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대통령의 거짓말
“DJ(김대중)는 입만 열면 거짓말!” YS(김영삼)는 DJ가 거짓말쟁이라며 집요하게 몰아세웠다. 참다 못한 DJ가 반박했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아직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 모두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식언을 남겼다. YS는 대선 공약에서 “직을 걸고 지키겠다”던 쌀 시장을 끝내 개방하면서 대국민 사과했다. DJ는 대선 불출마·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했고 그때마다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정치 지도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 특히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언사는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에 직결된다. 그래서 대통령의 식언과 빈말, 말 바꾸기는 도덕적 비난으로만 끝날 수가 없다. 국가의 신뢰 기반이 무너지고, 사회적 혼란이 초래되는 위험천만함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됐다. 12·3 계엄령 선포 이후 43일 만이다. 윤 대통령은 본인의 언행과 가족·지인을 둘러싼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허술한 변명이나 발뺌식 해명, 궤변 또는 모르쇠로 대응해 비판을 자초했다. 게다가 금세 뒤집힐 것이 뻔한 거짓말도 주저하지 않아 국민에 큰 실망감을 안겼다. 이제 사법의 심판대 앞에 선 윤 대통령에게 진실의 시간이 시작된다. 피의자 윤석열은 대통령 윤석열이 타락시킨 언어의 부메랑을 피할 수가 없게 됐다. 국민들은 국정 최고 책임자 스스로가 훼손한 말의 무게감에 대해 엄중한 책임 추궁을 기다리고 있다.
■ 대통령 궤변이 낳은 ‘팩트 체크’ 보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집행했다. 이에 맞선 윤 대통령 측은 불법적인 법원 영장, 수사 권한이 없는 공수처의 불법 체포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날 윤 대통령은 영상 메시지에서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서 일단 불법 수사이기는 하지만 공수처 출석에 응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수사와 체포를 불법으로 규정한 데 이어, 자신이 체포되는 것이 아니라 ‘출석’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윤 대통령의 주장이 궤변으로 흐르는 일이 빈번해지자 대통령 주장을 받아쓰기하는 대신 참과 거짓을 비교하는 팩트 체크(사실 확인) 보도가 확연히 늘었다. MBC, JTBC 등은 15일 윤 대통령의 영상 메시지를 생중계하는 동시에 영장이 적법하게 발부된 사실 등을 따져 윤 대통령 주장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검증 보도를 내보냈다.
이날 궤변의 압권은 윤 대통령이 자신의 SNS 계정에 육필 원고를 올리고 부정 선거론을 장황하게 주장한 대목이다. 같은 날 CBS 시사 프로그램 ‘박재홍의 한판 승부’는 앞선 9일 국회 긴급 현안질의에 출석한 김용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의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언급을 소개하면서 부정 선거론은 망상이라고 일축했다. 김 사무총장은 윤 대통령의 대학 동기이자 친구로, 윤 대통령이 임명했다. 그는 국회에서 우리나라는 실물 투표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고, 사후 검증이 이뤄지기 때문에 투표 조작은 불가능하다고 친구인 윤 대통령의 주장을 반박했다.
검색 포털 네이버와 다음 뉴스 서비스에 신설된 ‘팩트 체크’ 항목에는 대통령 담화나 대통령실 발표가 나오면 진위 여부를 따지는 언론사 보도가 꼭 올라온다. 윤 정부 들어 등장한 현상이다. 국정 최고 책임자의 언사가 의심의 대상이 되고, 시시비비를 가려서 들어야만 하는 나라는 정상일 수 없다. 대통령의 말이 곧이곧대로 믿기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언어도단 상태가 아니고 뭔가. 극단적 유튜버의 일방적 주장만 울려 퍼지는 대신 서로의 말은 믿지도, 듣지도 않는 나라 꼴이 참담하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데는 윤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 언어의 타락, 신뢰의 추락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사실과 다른 발언을 쏟아냈다. 후보 토론회 때는 부인과 장모가 주식 투자로 손실을 봤다고 강변했지만 검찰 보고서에 모녀가 22억 원의 수익을 올린 사실이 적시돼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특검을 왜 거부합니까? 죄 졌으니까 거부하는 겁니다.” 대선 후보 시절의 공언은 김건희 여사의 의혹을 다루는 특검을 연거푸 거부하면서 식언이 됐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 씨에게 21대 총선 공천을 약속하는 통화 음성이 공개된 것을 계기로 대통령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 “취임 이후 명 씨와 접촉이 없었다”는 해명이 금세 거짓말로 드러나자 민심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12·3 계엄을 둘러싼 진실 공방에서 윤 대통령의 궤변은 허언증 수준으로 악화됐다. ‘경고하기 위한 계엄’이었고, ‘계엄은 대통령 고유 권한’이라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계엄에 간여한 군·경·국정원 간부들의 반대되는 진술로 모든 팩트가 무너졌다. 검찰이 제기한 공소 사실을 보면, 윤 대통령은 폭동 수준 규모의 무장 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했고, ‘총을 쏴서라도’ 국회의원을 끌어내라고 군·경과 국정원에 지시한 사실이 확인된다. 법원은 불법적 내란에 가담한 주요 종사자들 모두에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공수처 수사에선 진술을 거부하고, 헌재 탄핵심판에서는 본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2차 답변서에서 포고령 1호를 김용현 전 국방장관이 과거 군사정권 시절 문안을 베꼈다고 주장하면서 책임을 전가한 대목은 궁색하다. 최근 상황인 ‘전공의 처단’ 문구가 포함된 것이 설명이 안 되고, 원안에 있던 야간 통행금지 조항을 대통령이 빼라고 지시해 수정됐다는 대통령 해명과도 배치된다.
윤 대통령은 본인에 대한 강제 수사망이 조여 오자 되레 육필 원고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부정 선거론을 재차 제기했다. 극소수 극단 지지세에 기대려는 시도다. 보수 언론인인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최근 언론에서 “부정 선거론은 하나의 종교”라면서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지를 못한다고 개탄했다. 국정원 등 국가의 최고급 정보망의 꼭짓점에 있는 대통령이 유튜버 수준의 ‘카더라’ 정보에 휘둘리는 모습에 국민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그 결과 대통령의 언어는 분열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통합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신뢰마저 떨어뜨리게 된 것이다.
■ ‘말의 신뢰’ 없이 국정 수행 어려워
대통령 제도가 탄생한 미국에서 최고 지도자의 거짓말은 리더십에 치명상을 남긴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재선 실패가 실례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증세는 없다”면서 “내 말을 믿으세요”(Read my lips)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됐지만 2년 만에 공약을 깰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상황에 따른 선택이었지만 다음 선거에서 빌 클린턴 후보 측의 거짓말쟁이 프레임에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해 결국 낙선하고 만다.
전임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여 당선된 클린턴 전 대통령도 결국 거짓말로 탄핵 위기까지 처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백악관 인턴 여직원과의 성 추문에 대해 “성적 관계가 없었다”고 공개 부인했지만 거짓말로 드러나자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것이다. 여론은 성 추문 자체보다 대통령의 거짓말에 분노했다. 급기야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법정에 화상 출석해 성 관계를 인정하고, ‘부적절한 관계’를 뉘우치는 대국민 사과 연설 끝에 겨우 상원에서 탄핵을 면했다.
불법 도청 은폐 사실이 탄로 나면서 거짓말이 드러나자 사임한 리처드 닉스 전 대통령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 대통령은 국민 앞에 거짓말을 했다가는 가차 없이 단죄된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 앞에 진솔하게 사과한 경우에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 YS와 DJ 역시 허물이 있었지만 진정성이 있는 사과가 통했기에 국민의 용서를 받고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은 탄핵된 대통령을 수사한 검사로서 국민적 지지를 얻으면서 대통령 자리에 올랐지만, 임기 중 탄핵소추돼 수사를 받는 기구한 운명에 놓였다. 이로써 윤 대통령의 평가는 역사가 아닌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대통령 자신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이 불운을 자초한 책임은 말의 신뢰를 추락시킨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
내란 사태 이후 대한민국의 분열상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신뢰의 리더십 회복이 급선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어떻게 신뢰의 언어를 회복할 것인가이다.
2025-01-1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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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한답시고 문화재 훼손 “더는 안 돼”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2019년 7월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열린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소수서원을 비롯해 국내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여기엔 조선시대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이자 한국 서원 건축의 백미로 꼽히는 경북 안동의 병산서원(사적 제260호)도 들어 있다. 한데 최근 KBS 드라마 ‘남주의 첫날밤을 가져버렸다’의 제작진이 촬영 준비 과정에서 병산서원 기둥에 등을 달려고 못을 박아 논란에 휩싸였다. 이를 본 한 시민이 안동시에 문화재 훼손 신고를 했고, 한 건축가가 SNS에 문화재 훼손 장면을 목격했다는 글을 올리면서 공론화됐다. KBS 측은 사과했지만 시청자 청원 홈페이지에는 문화재 훼손 논란 관련 청원이 여러 건 올라와 있다. 청원 중에는 방영 취소 요청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국민들 역시 이런 행위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특히 드라마 촬영 등으로 인한 문화재 훼손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앞으로 보다 엄격한 관리와 감독, 재발 방지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방송사 문화재 훼손 잦아
병산서원은 이전에도 드라마 촬영으로 수난을 겪은 바 있다. 1999년 MBC는 드라마 ‘국희’ 촬영 때 병산서원 누각에서 기생파티 장면을 연출했다가 서원 모독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당시 제작진은 서원 곳곳을 드라마 속 기생집으로 그렸고, 서원 누각 만대루에서는 술판 장면을 촬영했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 중 문화재를 훼손하거나 그 공간에서 물의를 빚은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00년에는 KBS 사극 ‘왕과 비’ 제작진이 창덕궁 인정전 주변에 LPG 가스통을 묶어 놓고 가스 횃불을 설치하는 아찔한 상황을 연출해 지탄을 받았다. 2005년에는 SBS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 제작진이 드라마 촬영 중 덕수궁 외벽을 훼손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2007년 KBS 대하사극 ‘대조영’ 촬영 중에는 문화재인 문경새재를 훼손해 논란이 됐다. 당시 방송사 측은 문경새재 제1관문과 제2관문의 성벽과 기둥에 못질하고 철사를 동여매 비판을 받았다.
영화 촬영에서도 문화재 훼손 논란은 있었다. 2011년, 7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최종병기 활’은 충남 태안의 신두리 해안사구에서 말 타는 장면을 촬영해 천연기념물 보호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환경단체와 지역 주민들로부터 비난을 산 바 있다. 2012년 MBC 드라마 ‘무신’도 신두리 해안사구 보호구역 내에서 말타기 장면을 촬영해 논란이 됐다. 이처럼 문화재 훼손은 지속적으로 발생해 왔다.
■단순 실수로 볼 수 없어
일부 문화재 관련 전문가들은 방송사들이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문화재 훼손을 반복해 왔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을 단순 실수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다. 누가 봐도 상식 밖의 일이 사극 촬영장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KBS가 공공의 자산인 문화유산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상업적 목적을 위해 문화재를 훼손한 것은 공영방송으로서 공적 책임을 방기한 것이라며 실망스러워하고 있다. 이는 국민적 신뢰를 저버린 중대한 실책으로, 그동안 KBS가 문화재 보호에 경각심을 전혀 갖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재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이다. 한 번 훼손되면 원상 복구가 힘들기에 함부로 취급해도 될 대상이 아니다. 사소한 실수는 물론이고 미세한 기후변화나 주변 환경 변화에도 쉽게 변형되거나 손상될 수 있다. 그렇기에 문화재를 이용하고 관리하는 쪽 모두 이를 소중히 여기고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KBS 측은 “이번 사안을 계기로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침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어떤 내용이 담길지 몹시 궁금하다. 중요한 것은 문화재에 대한 방송가의 인식이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달라지지 않으면 문화재 훼손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촬영 지침 필요… 훼손 시 책임 물어야
문화재 훼손에 대해 책임을 묻는 사회적 분위기가 먼저 조성되지 않으면 이러한 사건은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방송가는 촬영 허가를 받았다고 해서 문화재 보호 기준을 무시하거나 간과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이를 위해 정부는 촬영 전후의 절차를 더 철저히 관리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100여 명의 스태프와 중장비가 동원되는 촬영 현장에서 문화재가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방송사들이 촬영을 위해 문화재를 훼손하더라도 그에 대한 처벌이 미미한 경우가 많다. 문화재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가 미비한 상황에서 방송사들이 자율적으로 문화재를 보호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법적 제재를 강화하고 문화재 훼손에 대한 처벌을 엄격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문화유산법) 제92조(손상 또는 은닉 등의 죄) 1항에는 국가 지정 문화유산을 손상했을 시 그 책임을 뚜렷이 묻고 있다.
촬영 현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 지침과 규제도 필요하다. 촬영 전 문화재 관리 기관의 전문가가 현장을 방문해 촬영 방식에 대한 조언을 제공하고 필요한 경우 촬영을 제한하는 등의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일각에서는 촬영 중 문화재를 훼손한 방송사에 대해 몇 년간 문화재에서 촬영하는 것을 못 하게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더 이상 촬영을 이유로 문화재가 훼손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2025-01-1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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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구멍 숭숭 뚫린 헌법’ 메우는 헌법재판소
윤석열 대통령의 위헌적인 12·3 비상계엄 선포는 우리나라 헌법 기관에도 대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헌법 기관의 구성과 권한을 둘러싼 논쟁과 다툼이 폭발하면서 이를 조정하고 해결해야 할 헌법재판소의 존재감이 급격히 높아졌다. 헌법과 관련된 정국의 핵심 이슈 대부분이 헌재로 향하면서 지금 헌재는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난’ 상태나 다름없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거의 40년이 된 낡고 해진 우리 헌법의 숭숭 뚫린 구멍을 헌재가 가까스로 메우고 있는 상황이 지금의 대한민국 헌정이라고 볼 수 있다.
■ ‘호떡집에 불난’ 헌재
헌법재판소의 근거는 우리 헌법 제6장에 나온다. 국가 기관으로 국회가 가장 먼저 등장하고 이어 대통령과 행정부에 관한 규정인 정부, 사법권을 담당하는 법원에 이어 헌법재판소 항목이 보인다. 관련 조문은 111조부터 113조까지 3개로, 하부 항목도 총 10개에 불과하다. 다른 주요 기관에 비해 적은 편이다.
하지만 지금 정국에서 헌재의 존재감이나 역할은 다른 기관을 압도한다. 여야 정치권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도 헌재의 결정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윤석열 대통령과 한덕수 국무총리를 비롯해 감사원장 등 헌법 기관들의 탄핵 사건이 줄줄이 헌재 재판관들의 책상에 놓여 있다. 여기다 헌법 기관이 행한 권한 행사의 적법성 여부를 다투는 권한쟁의 심판 사건도 한둘이 아니다.
법조계에 따르면 헌재에 계류 중인 탄핵 사건만 10건으로, 법정 처리 기한인 180일을 지키려면 올해 안에 이 모두를 처리해야 한다. 특히 2025년은 1988년 개소한 헌재가 가장 많은 탄핵심판 사건을 심리해야 하는 해라고 하니 그 고충이 짐작이 간다. 다행히 결원 재판관 2명이 지난 연말 임명돼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해도 헌재의 업무 과부하는 상수가 됐다.
■ 낡은 ‘87년 헌법’, 헌정 부담으로
헌재에 청구되는 사건은 국가 주요 기관과 관련된 것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반 국민도 공권력의 행사 또는 불행사로 인한 기본권 침해의 구제를 헌법소원 형식으로 헌재에 제기한다. 매년 접수되는 헌법소원 건수만 3000건에 육박한다. 정원이 9명인 헌재의 인적 구성으로는 국민의 헌법 수요를 감당하기도 쉽지 않다.
헌재의 상황이 여기까지 이른 데는 1987년에 마련된 현행 헌법 자체의 한계 탓이 크다. 제정된 지 40년 가까이 지나면서 헌법과 변화된 사회상 사이에 간극이 커졌기 때문이다. 모든 원인을 현행 헌법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해도 약 40년 전의 헌법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는 사실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헌재의 결원 재판관 보충, 대통령 권한대행의 대행 문제 등 여야 간 극심한 갈등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현행 헌법은 부칙을 제외하고 총 130개 조문으로 구성돼 있다. 이 130개 조문에 대한민국의 운영 원칙이 담겨 있다. 그런데 국가 운영이 갈수록 복잡다단해지면서 곳곳에서 허술함이 발견된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구멍이 숭숭 뚫린 우리 헌법의 민낯을 온 국민에게 드러냈다.
여기다 시대상이 바뀌면서 새로운 사회적 합의와 판단을 정립해야 할 상황이 속출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헌법의 규정력은 전혀 이를 담지 못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인류 최대의 현안으로 부상한 전 세계적인 기후위기와 인공지능 문제는 물론이고 국내로도 급속한 고령화, 지방소멸, 저출산, 낙태와 안락사 등 생명권, 이주 외국인 등 한둘이 아니다. 현행 헌법의 규정력이 미치지 못하다 보니 이와 관련한 분쟁 해결은 거의 헌재의 몫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1987년 헌법 체제의 많은 허점은 헌재의 결정으로 겨우겨우 메워져 왔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방식의 대처는 이제 분명한 한계를 맞았다. 헌법의 허점을 일일이 헌재의 결정에만 의존하는 시스템은 21세기에는 전혀 맞지 않다. 헌재의 역할은 앞으로도 여전히 중요하겠지만 그렇다고 헌재가 헌법과 관련한 모든 정치적 갈등을 처리하는 해우소가 돼서도 안 된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2025-01-0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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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북풍’이 ‘외환’을 몰고 온다면
북한의 존재는 우리에게 늘 리스크다. 코리아디스카운트도 결국 한반도 지정학적 리스크의 다른 이름이다. 북한의 행동은 크든 작든, 군사적이든 비군사적이든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친다. 권위주의 정권은 북한의 이 같은 움직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특히 선거철이면 판세에 영향을 줄 정도로 중요한 변수가 되기도 한다. 이름하여 ‘북풍(北風)’이다. 그런데 최근 비상계엄 정국에서 북풍이 논란이다. 비상계엄 분위기 조성을 목적으로 북한을 자극해 전시 상황을 유도했다는 의혹인데 사실로 확인될 경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태풍으로 몰아칠 전망이다.
∎선거 틈 노린 북한 대남 공작
북한의 선거 개입과 심리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87년 대선을 불과 19일 앞두고 발생한 ‘KAL기 폭파 사건’이 대표적이다.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는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 의한 공중 폭파 테러라고 발표했다. 북한이 88 서울올림픽 개최를 어렵게 할 목적으로 벌인 만행이라는 설명이었다. 선거 전날 김현희가 국내로 압송됐고 13대 대선은 노태우 민정당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 실패가 크게 작용했지만 북풍의 영향도 만만찮았다. 1995년 15대 총선을 일주일 앞두고 북한 무장 병력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침입해 총격전을 벌였다. 참패가 예상됐던 신한국당은 139석을 차지했고 원내 1당이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풍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2010년 발생한 북한의 천안함 폭침도 지방선거를 겨냥한 도발이라는 게 우리 정보 당국의 분석이었다. 천안함 사건을 둘러싼 음모론 등이 확산하며 선거철 단골 소재가 되기도 했다. 북한의 도발은 의도야 어찌 됐든 보수 진영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정권 차원의 북풍 정치적 활용
북풍이 보수 진영에 유용하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정권 차원에서 북풍을 조장하는 사례들도 나왔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는 ‘남한 조선노동당’ 가담자 95명을 적발해 이 가운데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총책 등 62명을 구속하고 300명을 추적 중이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국민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했고 당시 평민당 후보 김대중의 비서가 관여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김영삼 후보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 보수 진영이 노골적으로 북풍 공작을 벌이는 사건도 발생했다. 1997년 15대 대선 직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청와대 행정관 등이 중국에서 북측 인사들을 만나 무력시위를 해 달라고 요청한 이른바 ‘총풍 사건’이다. 이회창 후보가 이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거나 지시했는지 여부가 선거 기간 내내 쟁점이었는데 결국 선거는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의 승리로 끝났다. 이 사건과 관련된 대북공작원 흑금성의 일화를 다룬 게 영화 ‘공작’이다.
∎남북 화해 무드 조성에 신 북풍
2000년대 접어들면서 북한 변수는 영향력이 점차 줄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북한을 바라보는 인식이 많이 달라졌고 국민 의식도 변했다. 2002년 16대 대선에선 제2연평해전과 2차 북핵 위기로 북풍이 불었지만 ‘노무현 바람’을 꺾지 못했다. 2010년 천안함 침몰도 이명박 정부가 적극 활용했지만 그해 6월 지방선거는 여당 참패로 끝났다. 북풍의 위력이 미풍으로 변화는 사이 신 북풍이 일기도 했다. 남북 화해 무드로 진보 진영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된 것이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손을 맞잡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정상회담을 가졌고 북미 정상회담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그해 지방선거는 진보 진영에 대승을 안겼다. 그러나 정권 교체와 함께 남북 관계는 다시 경색됐고 국민들의 정서도 다시 냉정해졌다.
∎비상계엄을 위한 북풍 공작설
12·3 비상계엄 사태의 비선 실세로 지목된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수첩에서 ‘NLL(북방한계선)에서 북의 공격을 유도’라는 손 글씨가 발견됐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북한의 도발을 유도해 계엄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는 의혹과 맞물린다. 10월 북한이 남한 무인기가 평양 상공에 침투했다고 주장한 사건이 북한 자작극이 아닌 우리 군의 소행일 가능성도 제기되는 마당이다. 북한 오물 풍선 부양 시 경고 사격 후 원점 타격을 지시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국가정보원이 비상계엄 선포를 한 달 앞두고 백령도에서 북한이 띄운 오물 풍선을 ‘레이싱 드론’으로 여러 차례 격추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국가 안보를 위협하고 외환에 해당할 수 있는 엄중한 사안이다. 군 당국은 아직 이런 의혹들에 대해 공식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만큼 수사를 통해 낱낱이 밝혀야 할 일이다.
공작은 정보의 비대칭에서 비롯되는데 갈수록 세상은 투명해진다. 어설픈 북풍은 역풍을 부를 수밖에 없다. 하물며 북풍 공작이 국민들의 안전을 담보로 한 것이라면 용서받을 수 없는 외환의 죄다. 북한의 군사적 위협은 물론이고 심리전까지도 과학적으로 그 영향을 분석하고 대처해야 하는 게 국가의 책무다. 그게 북한이 의도하는 국론 분열과 혼란을 막는 길이기도 하다.
2024-12-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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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국민의힘 정당해산 가능할까
■ 민심 거스르자 국민 분노 ‘들불’
탄핵안 가결 뒤 국민의힘 행보가 심상찮다. ‘탄핵 찬성’ 입장을 밝힌 한동훈 대표는 5개월도 못 돼 사퇴하고, 친윤계 권성동 의원이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향후 비상대책위원회도 ‘친윤’ 일색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아졌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되레 전면에 나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국민의힘은 7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1차 표결에 대다수가 불참했다. 14일 2차 표결에 참여하긴 했지만 반대표를 던진 의원이 85명에 달한다. 국민의힘이 비상계엄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이유다. 뼛속 깊이 반성해도 모자랄 판에 여전히 민심의 반대편으로 달리고 있으니 그 아집이 불안불안하다. 최근에는 헌법재판관 임명 추천을 반대하면서 탄핵심판 절차에 연일 제동을 걸고 있다. 사실상 ‘극우 정당’의 길이다.
이런 행태를 국민들은 어떻게 볼까. 탄핵 정국 속에서 이미 국민의힘 해체 요구가 나온 바 있다. 대통령의 위헌적 행태를 비호하는 정당은 해산돼야 한다는 목소리다. 정치적인 비판을 넘어 헌법상 ‘정당해산’ 사유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공식적인 문제 제기는 지난 9일 국회 청원 사이트에 올라왔다. 국민의힘이 위헌정당이라며 정당해산 심판을 헌법재판소에 청구해 달라는 국민동의 청원이다. 일주일 만에 동의자 30만 명을 넘긴 청원은 내년 1월 8일까지 진행된다. 5만 명 이상이 동의하면 소관 상임위원회에 회부된다.
■ 통합진보당 사례에 비춰보면
국민의힘 정당해산은 가능할까. 헌법 8조 4항을 보자.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어긋날 때는 정부가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재 심판에 의해 해산된다.’
정당해산 결정의 선례가 있다.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에 제기된 정당해산 심판 청구를 받아들였다. 이석기 전 의원 등 일부 당원이 연루된 ‘내란 음모’ 사건이 당 차원의 민주적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행위라는 게 다수의견이었다. 재판관들은 실행 능력이 의문시되는 의원의 발언만 갖고도 당 차원의 목적과 활동으로 확대 해석했다. 그러면서 ‘피청구인(통진당)의 주도세력(이 전 의원)의 목적과 활동은 피청구인에 귀속된다. (…) 당 구성원에 대한 개별적인 형사처벌로는 정당 자체의 위험성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해산 결정 외에는 대안이 없다’고도 했다.
이 판단에 비춰볼 때,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행위 역시 정당해산의 사유에 해당한다. 허무맹랑한 얘기가 아니다. 국군 통수권자의 특수부대 동원,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침탈, 주요 정치인 체포 지시, 정치 활동 전면 금지 및 언론·출판의 자유 박탈 등의 기본권 제한 획책이 있었다. 헌법 원리를 부정하고 민주적 기본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로 봐도 무방하단 뜻이다.
윤 대통령이 국민의힘 주도세력이라는 점도 명확하다. 국민의힘 당원으로 대선 후보 경선을 통해 후보에 선출됐고 대통령이 된 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계엄 사태 이후에도 국민의힘은 대통령의 탈당이나 제명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국정을 책임지는 집권여당으로서 국민의힘은 지금도 계엄 선포를 합리화하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이 ‘한 몸’이라는 건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다.
통진당은 이 의원의 내란 음모 혐의만으로도 정당해산 결정을 받았다.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실제 행동을 통해 민주 질서를 위협하고 헌정을 유린한 경우다. 그리고 국민의힘은 의원 대부분이 여전히 이를 옹호하는 분위기다. 어떤 게 더 위중한가. 정당해산 국민 청원은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 현실적으로는 힘들다지만…
그러나 국민의힘 정당해산은 현실적으로 이뤄지기 힘들다. 전문가들의 전망도 대체로 비슷하다. 정당해산 심판은 국회가 아니라 행정부 권한이다. 법무부만이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헌재에 청구할 수 있다. 국민 청원이 국회 소관 상임위로 회부된다 해도 국회가 심판을 청구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민의힘 정당해산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법리적으로 보더라도 헌법이 규정한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해석이 쉽지 않다. 민주적 기본질서는 ‘폭력적 지배 없이 다수를 존중하고 소수를 배려하는 체제’를 뜻한다. 국민의힘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이를 위배하는지, 탄핵 반대가 헌법 위반 행위인지, 명쾌하게 가려내기 힘든 측면이 있다. 학자들 중에는 헌정 체제 자체를 부인하고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정도에 이르렀을 때만 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예컨대, 독재 정당으로 규정된 정당이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 밖에도 의원 108명의 직무 정지가 합당한 것인지, 정당해산 말고는 다른 대안은 없는지, 따져봐야 할 논점들이 적지 않다.
여당의 정당해산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하더라도 국민의힘은 어째서 정당해산 청원이나 해체 요구가 제기되는지 근본 원인을 돌아봐야 한다. 국민 70% 이상이 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고 있다. 이 흐름은 일시적인 게 아니라 역사의 거센 물줄기다. 지금은 탄핵에 찬성한 ‘부역자’를 색출하겠다고 선동할 때가 아니라 잘못을 반성하고 국민 지지의 길을 찾아야 할 시기다. 계속해서 대통령의 위헌적 행태를 비호한다면 더 이상 정당의 미래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국민의힘은 8할 가까운 국민을 버리고 정녕 ‘소멸’의 길을 걷고 싶은가.
2024-12-2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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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탄핵 정국, 한국 ‘외교적 고아’ 되나!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으로 외교 리더십의 공백이 심화되면서 한국 외교가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패권국 사이에 끼어있는 한국이 ‘고립무원' ‘외교적 고아’의 처지에 놓인 셈이다. 내년 1월 트럼프 복귀를 앞두고, 향후 한 달여 동안 모든 외교적 초점은 ‘트럼프 2기’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2기의 출범으로 인한 불확실성에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까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한중, 한일 관계도 외줄타기를 하듯 위태롭다. 게다가 러시아 파병을 결행한 북한의 핵무장 능력 강화 등으로 주변국과의 협력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는 상황이지만, 이런 난제를 풀 대한민국의 수장이 사라졌다. 피의자로 입건된 한덕수 국무총리가 윤석열 정부의 외교 정책을 강행하기 쉽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거대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윤석열 정부의 외교 정책에 극렬하게 반대를 해왔기 때문에, 과도기적 성격을 가진 정부가 정책 수정도, 유지도 힘든 ‘딜레마’에 빠지는 상황이다.
■‘미국 우선주의’ 트럼프 2기 대응은
‘트럼프’가 돌아왔다. 대한민국 앞에도 풀어야 할 난제가 쌓여 있다. 돌아온 트럼프 당선자는 더욱 강화된 ‘미국 우선주의’를 예고했다. 트럼프는 줄기차게 동맹국의 방위비 분담금 증액 및 자주적 방위 역량 강화, 미국의 불필요한 군사적 개입 축소를 공언했다. 트럼프는 대미 흑자국인 한국을 ‘머니 머신’이라고 부르면서 합의한 방위비 분담금의 9배 증액(연간 100억 달러)과 관세 인상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일방적 요구에 의해 이미 합의한 분담금까지 인상할 경우 자칫 국내 여론의 반발과 동맹국 미국에 대한 신뢰 상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반미 성향의 정치 지형을 만들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이나 관세 장벽, 보조금 축소 등 정책 변화가 놓여 있다. 또, 반도체, 전기자동차, 배터리 등 주력산업에 대한 리스크 관리가 절실하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행정명령을 통해 인플레감축법(IRA)과 반도체법에 따라 미국에 투자한 외국기업에 제공하던 혜택을 없애거나 축소할 예정이다. 민주당 정권 시절에 강화됐던 미국 주도의 공공외교와 민간 차원의 외교·친선·협력도 상당 부분 중단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한국 외교 관계에서 완충재 역할을 했던 민간 영역이 축소될 수 있다는 우려이다.
한국으로서는 트럼프 인수위를 상대로 한 적극적인 외교, 범정부 컨트롤 타워의 선제적 가동이 시급한 상황에서 외교 공백 사태가 뼈아플 수밖에 없다. 특히 일본·호주·필리핀 등 한국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국가들과의 다자 안보 협력 강화, 새로운 안보 협력체 구성, 한미일 안보 협력, 미국과의 핵 안보 협의체 실효성 제고 등이 표류할 위기에 놓였다.
■미중 전략경쟁과 한국
트럼프 2기는 중국 견제에 한국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중국의 군사적·경제적 부상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과의 협력을 한층 강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전문가들은 “미중 이익 갈등과 체제 경쟁이 혼합되고, 중국이 보복적인 관세·경제 정책을 실행하면 미중 관세전쟁이 터지고, 자동적으로 한국도 관여할 수밖에 없게 된다”라고 예고한다. 하지만, 중국은 2016~2017년 사드 및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이미 폭력에 가까운 외교 수단을 한국 정부와 재계에 휘둘렀다. 중국은 롯데 손보기를 통한 협박과 보복을 일삼았고, 그 영향으로 오히려 한미일 안보·경제 협력 강화를 초래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중국에 대해 60~100% 공격적인 관세 부과와 기업별 제재를 실행하고, 그 칼춤에 한국이 어쩔 수 없이 맞장구를 칠 경우 한중 간의 갈등 고조마저 우려된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이 정확한 상황 묘사일 정도다.
부경대 중국학과 서창배 교수는 “트럼프 2.0 출범과 함께 미중 전략경쟁 심화를 우려하는 중국 정부는 주한 중국대사 지위 국장급 승격, 비자면제 조치 등 한국과 화해 분위기 조성에 노력했고, 사실은 한국과 더 긴밀하게 협력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서 “지금은 시국이 정리될 때까지 관망하고,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본격적인 양국 관계 진전과 협상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밝혔다.
■국교 정상화 60주년, 한일 관계 미래는
한일 양국은 2025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까지 양국의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높아지면서 한일 관계도 출렁일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역사 문제에서 한국이 기대하는 수준의 전향적 태도를 보일 수 있을지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달 24일, 사도광산 추도식으로 불거진 한일 갈등은 불안정한 양국 관계를 그대로 표출했다. 일본의 선의에만 의지했던 윤석열 정권의 ‘선한 외교’가 실패한 셈이다.
지난 10월 치러진 중의원선거에서 참패한 이시바 내각의 정권 지속 여부도 불확실하다. 자민당은 15년 만에 소수 여당으로 전락했고, ‘비주류파’인 이시바 총리는 당내 장악력이 약하다는 평가다. 내년 7월 치러질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한다면 야당에 정권을 넘겨주는 불안정한 상황이다. 이시바 내각이 한일 관계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쉽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시바 총리는 외교적 성과를 통한 지지율 상승 목적으로도 트럼프 취임과 동시에 조기 미일 정상회담을 가질 전망이다. 이미 총리 보좌관이 지난달 20일부터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캠프 인사들과 회동했고, 조기 정상회담 일정을 조율한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 외교의 초침이 점점 빨리 돌아가는 상황이다. 엄중한 국제 정세 아래 한일 간 긴밀한 소통과 협력이 더욱 중요한 시점이지만, 한국만 외톨이로 전락할 수 있는 상황이다. 양국은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에 따른 방위비 부담, 한미일 경제·군사 협력 등 공감대를 강화해야 할 상황이다. 현재 주한 미국대사관 홈페이지에는 블링컨 국무장관과 조태열 외교통상부 장관이 ‘한미일 삼각 협력을 강조한 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하지만, 트럼프 2기가 3국 간 협력을 기조로 한 바이든 행정부의 외교 정책을 계승할지는 미지수다.
■심화되는 북러 군사·기술 협력
러시아 파병 실행에 따른 북러 간 군사 기술 협력 심화와 북중러 삼각 협력 구도 형성이 한반도를 둘러싼 가장 우려할 안보 위협이다. 중국마저도 최근 러시아 국방장관의 방북 시 중러 연합 공중연습을 실시했다. 북·중·러 삼각 구도마저 형성되는 상황이다. 향후 제일 큰 과제는 북한 핵 위협 방지다. 핵 개발은 물론이고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핵 물질도 문제다. 이 상태로 진행하면 2047년이면 북한이 보유할 핵 물질 누적 생산량은 핵탄두 500개 분량으로 추정된다. 이미 단거리미사일은 완성됐고, 극초음속 중거리미사일이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도 러시아와의 군사 기술 협력으로 5~10년 안에 완성될 전망이다. 신형 잠수함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탑재하고 내년부터 한반도 주변 해안을 누빌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취임 초기에 북한 김정은을 다시 만나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엉터리 협상을 벌일 경우 한국은 물론이고 동북아시아의 안보에 엄청난 위협이 된다. 북한의 러시아 파병 등으로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는 가운데, 북한 문제에 대한 한미일 3국의 공동 대응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형국이다.
■정상외교, 2025년 10월 경주 APEC에서 정상화 가능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정세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지만, 과연 한국의 과도기 정부가 한미, 한중, 한일, 남북 관계에 불어닥친 위기를 극복할 역량이나 의지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현실적으로 대통령의 해외순방은 물론이고, 정상급 외빈의 방한도 쉽지 않은 상태이다. 수출과 외교가 핵심인 대한민국, 세계 10대 경제강국에서 정상외교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한국 외교가 사면초가에 내몰린 상황이다. 외교 전문가들은 이번 비상계엄 사태의 결론과 관계없이 내년 상반기까지 정상외교 공백을 기정사실화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물론, 한덕수 국무총리나 우원식 국회의장이 ‘대타’로 나설 수 있지만, 무게감과 대표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제관계 전문가들은 “계엄 정국에 따른 수사와 탄핵, 조기 대선까지 염두에 둘 경우 한국 정부가 외교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고, 여야 정치권이 합세해서 국가대표로 거센 파도를 헤쳐 나가야 한다”면서도 “하지만 정상외교의 정상화는 2025년 10월 경주 APEC(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즈음에야 가능하지 않을까 예상한다”라고 우려했다. 대한민국의 국제 정세가 산 넘어 산인 지경이다.
2024-12-14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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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시국선언과 계엄, 그 결말
올해 8월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윤석열 정권의 ‘계엄 시도’ 의혹을 제기했다. 김 최고위원은 “(김용현 경호처장의) 국방부 장관으로의 갑작스러운 교체는 계엄령 준비 작전이라는 것이 저의 근거 있는 확신”이라고 밝혔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계엄 선포와 동시에 국회의원을 체포·구금하겠다는 계획을 꾸몄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전했다. 당시 대통령실은 “괴담 선동”이라며 펄쩍 뛰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지난 3일 밤늦게 느닷없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왜 그랬을까.
■지성들의 잇단 시국선언
윤 대통령은 국회의 예산 삭감과 검사 탄핵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그보다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주목할 부분이 있다. 근래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대학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이다. 최고 지성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시국선언을 통해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한다.
대학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은 지난 10월 28일 가천대 교수노조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참여 인원은 현재까지 70여 개 대학에서 4000명이 넘는다. 이들의 시국선언문에는 김건희 여사 관련 의혹 해소, 특검 도입 등도 있지만 윤 대통령의 퇴진이 주로 언급됐다. 서울대 교수·연구자 525명의 시국선언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윤 대통령이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야 한다. 한국 사회의 장래를 위해서 그의 사퇴는 필연적이다”라고 선언했다.
교수들이 앞장서니 대학생과 졸업생도 시국선언 행렬에 동참하고 있다. 경북대, 국민대, 강원대 등 전국으로 확산 중인데, 고려대에서는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대자보가 등장해 “대학은 시대에 질문을 던지고 옳지 못한 것에 분노하고 목소리를 내 왔다”며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다.
■시민과 예술·종교계까지
윤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은 시민사회와 종교계 등 전방위로 뻗어가고 있다. 대전에선 퇴직 교사들이 “국정농단 세력이 우리의 제자일 수 있다는 점에서 부끄럽다”며 “모든 권력 남용과 국정농단의 근원인 윤석열 대통령이 퇴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공감연대라는 이름의 시민단체는 지난 3일 부산, 서울, 광주 등 전국 7개 장소에서 1067명이 서명한 ‘윤석열 대통령 퇴진 요구 시국선언문’을 동시에 발표했다. 같은 날 해병대 예비역들이 ‘채 해병 사건’과 관련해 윤 대통령 탄핵과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행위예술가들이 지난 2일 ‘윤건희 정권을 파면한다’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재미 한인 교수 등 해외에서 활동하는 교수·연구자들의 시국선언도 온라인을 통해 펼쳐지고 있다. ‘보수 텃밭’으로 여겨지는 대구·경북 지역에서도 지식인 396명이 지난달 26일 “윤 대통령에게 어떠한 가능성도 기대하지 않는다”며 윤 대통령 퇴진을 촉구했다. 그에 앞서 지난달 7일 부산에선 송기인 신부 등 원로 인사 등 214명이 “윤석열 대통령은 스스로 물러나야 한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천주교 사제 1466명은 지난달 28일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내고 “헌법 준수와 국가 보위로부터 조국의 평화통일과 국민의 복리 증진까지, 대통령의 사명을 모조리 저버린 책임을 물어 (윤 대통령) 파면을 선고하자”고 주장했다.
■민주화 지켜낸 시국선언들
과거에도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은 현대 한국사의 주요 고비마다 터져 나왔다. 이승만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지식인, 학생, 예술인, 종교인 등의 시국선언은 부당한 권력에 저항의 상징이자 민주주의를 이끌어내고 지켜낸 동력이었다. 1960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의 시국선언이 대표적인 예다. 이날 시국선언이 발표되면서 이틀 뒤인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사임을 발표했다. 1986년 3월 28일 고려대 교수 28명은 ‘현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제목의 시국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과 언론·사상·표현의 자유를 요구했다. 이후 5월 중순까지 29개 대학에서 785명의 교수들이 시국선언을 이어갔고, 이는 ‘6월 항쟁’을 이끄는 데 큰 힘이 됐다. 그 뒤에도 시국선언은 우리 사회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경종과 방향타 역할을 해 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이후 2년 반 동안 독불장군의 모습을 보였다. 자신과 주변을 향한 세간의 비판엔 귀를 닫고 ‘오직 나만이 옳다’는 식으로 국정을 밀어붙였다. 검경 등 사정기관은 물론 군과 방송 등 주요 보직에 자기 사람들을 앉혔으니 무서울 게 없었을 듯하다. 그러나, 짐작건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시국선언은 무시하기 힘들었을 테다. 지역과 계층을 불문하고 자신의 퇴진을 요구하는 거센 민심을 어찌 견디겠는가. 지난 3일의 비상계엄 선포는 어쩌면 그런 다급함에서 나온 최후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계엄 따위로 막을 수 없다
민심은 준엄하다. 계엄 따위로 어찌할 수 없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들도 시민의 저항을 계엄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억압하려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4·19 혁명’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부마항쟁’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계엄을 이용했다. 하지만 그렇게 계엄에 기댄 정권의 말로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윤 대통령의 계엄 시도는 더욱 초라해 불과 6시간 만에 좌초했다. 하마터면 유혈 사태로 번질 뻔했던 윤 대통령의 계엄 시도가 국회의 신속한 해제 결의로 차단된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는 결국은 시민의 적극적인 지원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날 긴박했던 상황에서 서울 시민들은 국회로 나가 계엄군을 막아섰고, SNS로 소식을 전했고, 전국의 시민들은 가슴을 졸이며 사태를 주시했다. 당일 부산에서도 시민들이 거리로 나가 계엄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밤새 눈뜨고 있었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예리코 성의 함성?
시국선언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부산대 교수회가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의 즉각 퇴진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을 4일 발표했고, 서울대를 비롯한 대학생들의 시국선언도 잇따르고 있다. 종교계도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사태로 들끓고 있다. 천주교를 대표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는 4일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를 바라보는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이란 성명서를 내고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사과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개신교 단체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이날 “윤석열 대통령은 무릎 꿇어 사죄하고 사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원불교 역시 교무단 명의의 성명을 통해 “배은 중생 윤석열은 마땅히 하야하거나 탄핵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교계에선 불교인권위원회가 “윤석열 대통령 등은 반드시 국민적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규탄했다. 이렇듯 이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건 단 하나, ‘윤석열 퇴진’이다. 바야흐로 예리코 성을 무너뜨린 여호수아 군의 함성을 방불케 한다.
2024-12-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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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도시 부산, ‘빅(Big)’과 ‘품격’ 사이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최근 국내 주요 도시들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이는 부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배경에는 좋은 도시디자인이 곧 그 도시의 경쟁력이자 얼굴이 된다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디자인 자체가 도시 간 경쟁의 핵심 요소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부산시는 최근 ‘부산을 바꾸는 빅 디자인(Big Design)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2026년까지 도시를 새롭게 디자인해 시민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총 610억 원을 투입한다. 행복한 시민, 매력적인 도시를 목표로 도시 비우기 사업, 품격 있는 부산 거리 디자인 조성, 글로벌 야간 관광 명소화,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시민 관점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가 배려받는 도시 조성, 공공디자인 시민 참여 확대 등 총 8개 분야를 중점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그러나 ‘빅’, ‘품격’을 바라보는 관점의 논란과 더불어 화려한 수사(修辭) 뒤에 따르는 공허함이 있다.
■과연 ‘빅’이라 할 만한가?
부산시는 품격 있는 부산 거리 디자인 등 8개 분야 중점 과제를 통해 부산을 디자인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빅 디자인 프로젝트다. 하지만 아쉽게도 깊게 와닿지 않는다. 중점 과제를 살펴보면 종전 부산시가 추진했던 디자인 개념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 배려 디자인 등은 이전에도 강조돼 왔던 개념이다. 이는 도시디자인에 있어 기본이다. 그런데도 빅 디자인이라는 게 다소 낯 뜨겁다. 빅 디자인 허브센터 등 부산시는 무언가를 인공적으로 만들고 디자인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부산 시민에게 더 필요한 것은 풀과 나무, 길, 공원, 벤치가 있는 도시 환경이다.
빅 디자인이라는 거창한 이름보다는 시민들이 일상에서 느낄 수 있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소확행적 접근’이 오히려 중요하다. 도시 비우기나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디자인은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확행적 디자인에 오히려 더 가깝다. 도시디자인이나 공공디자인의 역할은 간결하고 편안한 환경을 조성해 자연과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행 방해 요소를 보행 공간에서 분리하는 도시 비우기는 부산을 ‘걷고 싶은 도시’, ‘걷게 하는 도시’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길이 좁아서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이야기할 수 있는 광장이 있고 걷고 즐길 수 있는 자연과 문화가 있다면, 그 도시는 살고 싶은 도시, 사랑받는 도시가 될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도시디자인이 시행된다면, 애써 ‘빅’을 강조하지 않아도 시민들에게 디자인 프로젝트가 ‘더 크게’ 다가올지 모른다.
■도시 품격은 어디서 오는가?
부산시는 291억 원을 들여 국제공모 우수디자인으로 선정된 가로등, 벤치 등 공공시설물을 부산의 관문 지역과 관광지 등에 설치해 품격 있는 거리 디자인 조성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품격 있는 거리라는 표현은 주관적이고 모호하며,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품격 있는 거리의 기준은 무엇이고, 또 누가 판단할 것인가?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품격은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를 의미한다. 이는 매우 상대적이다. 품격의 높고 낮음을 판가름할 기준은 개개인의 시선에 있다.
도시의 품격과 시민의 삶을 결정하는 척도는 화려함이 아니다. 거리의 디자인은 단순히 시각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안전과 편의성, 그리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고려해야 한다. 흔히 내로라하는 세계적 문화도시인 빈, 런던, 뉴욕, 파리의 공통점은 ‘걷기 좋은 도시’라는 것이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걷기 좋은 도시, 서울’, ‘쉼이 있는 도시공간’을 모토로 산책로와 공원, 벤치를 확대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다.
한 도시나 사회가 건강하려면 공통의 추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이 많아야 한다.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 카페가 아니라, 공원과 벤치와 같은 공짜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많을수록 살기 좋은 도시다. 휴게 공간이 많은 도시가 곧 걷기 좋은 도시이자 살기 좋은 도시인 것이다. 흔히 도시 전문가들이 벤치의 디자인이나 그 속에 깃든 배려를 통해 그 도시가 지향하는 정신이나 철학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국제공모 우수디자인 작품을 거리에 설치했다고 해서 그 거리가 품격 있는 거리가 되는 게 아니란 얘기다. 벤치는 작고, 사소한 것이지만 여기서부터 스토리가 담기고, 사람 중심의 도시디자인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 도시는 살기 좋은 도시, 품격 있는 도시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의 품격은 우리 국민들이 만들어 가듯이, 품격 있는 도시 또한 그 안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다양한 노력에 의해 만들어진다. 예술성 높은 공공시설물 하나 더했다고 품격이 딸려오는 건 아니다. 도시의 품격은 그 안에 머무는 사람들의 삶을 떠나 논할 수 없다. 외국 디자이너의 예술성 높은 공공구조물 하나에 부산이란 도시의 품격이 좌우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사용자 중심의 도시디자인 돼야
디자인은 단순히 간판을 정비하고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부산에 필요한 디자인은 공공분야 혁신의 한 방법으로서, 부산 시민의 생각과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는 스위치 역할을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공공서비스디자인이다. 8개 중점 과제 중 공공디자인을 활용한 사회문제 해결,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디자인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공공디자인은 경제적 가치보다 시민의 안녕과 행복 같은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또한 대다수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고,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시공간의 질적 수준을 높여주는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목표다. 이를 위해서는 공급자 중심의 서비스가 아닌, 수요자와 사용자 중심의 서비스 디자인이 필요하다. 현장에서 주민들의 요구 사항을 파악하고 수렴하는 것은 물론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도시디자인에 있어서 건강한 시민의식에 기초한 참여는 필수적이다. 부산시의 공공서비스디자인 시민참여 프로그램 운영은 이런 점에서 매우 바람직하다. 시민들의 참여로 도시가 모습을 갖추어가는 과정은 시민들에게 자부심을 부여하고 도시에 대한 애착을 갖게 만든다. 시민들이 필요에 의해 디자인 개선안을 만들고, 그 의견을 따라 시행된다면 실용성과 활용성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도시디자인은 단순히 2차원적 공간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3차원, 4차원적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도시기본계획과 함께 가야 하며, 문화, 복지, 안전, 교육, 환경 등 다양한 분야와 연계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디자인 도시 부산이 성공할 수 있다. 도시디자인은 우리의 삶과 문화가 담긴 도시의 영혼을 디자인하는 것이다. 단순히 멋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깊은 생각과 공간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도시 전문가들은 흔히 “사람이 느끼는 편안함의 정도가 바로 도시디자인의 수준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부산시가 만들어가야 할 품격 있는 도시는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부산시가 추구해야 할 디자인 도시도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철학이 있는 도시디자인, 사람을 향하는 도시디자인을 통해 도시는 더욱 풍요로워지고, 살아 있는 도시, 살맛 나는 도시가 될 것이다.
2024-11-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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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조선업 몰락 교훈 잊은 트럼프
미국령 푸에르토리코가 2017년 허리케인 마리아로 인해 괴멸적 타격을 입었을 때 일화다. 고립된 주민들은 식량과 음료수, 연료 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당시 뉴올리언스에 정박해 있던 노르웨이 선적 그린피스 선박이 구호품을 운반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외국적 선박의 국내 운항을 금지하는 존스법에 발목이 잡혔다.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존스법이 미국 해운업을 보호하고 있다’는 고집을 피우며 버텼지만 재난 상황이 심각해지자 사상 초유의 ‘10일 면제’ 조치를 발동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열흘 만에 컨테이너 53개에 물자를 싣고 푸에르토리코에 기항하는 건 불가능했다. 인도주의 활동조차 보호무역의 규제를 피하지 못한 것이다.
1920년 제정된 존스법은 ‘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의 정수로 꼽힌다. 미국에서 건조되고, 미국인이 소유하고, 미국인 승무원이 일하는 선박만 미국 내 항구를 오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자유무역에 반하는 이 보호 조치가 104년간 이어지면서 조선과 해운 분야는 경쟁이 없는 시장으로 전락했고 조선업은 쇠퇴했다. 미국은 상선은 고사하고 군함조차 건조와 유지·보수·정비(MRO, Maintenance, Repair and Overhaul) 분야에서 경쟁력을 상실한 상태다.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윤석열 대통령에게 조선 분야에 협조를 요청한 까닭이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GA, Make America Great Again)면서 징벌적 관세와 강한 달러를 밀어붙일 참이다. 경제 전쟁 중인 중국뿐만 아니라 동맹인 한국과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무역주의를 거스르는 과잉 보호 탓에 조선·해운산업이 몰락한 교훈을 잊었나? 미국발 무역전쟁 광풍에 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은 커져만 가고 있다.
■ 과보호가 빚은 경쟁력 상실
존스법은 ‘연안무역법’(Merchant Marine Act) 제27조를 지칭한다. 미국 내 해상 운송 권한을 미국 선박에 한정하는 규제다. 당초 전쟁이나 국가 비상사태에 대비해 선박 건조 능력과 필수 인력을 유지하려는 취지로 도입됐다.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고비용과 경쟁력 저하의 악순환에 빠져들면서 회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항구와 내륙 수로에서 시장 경쟁이 사라지자 선박 운송료의 고삐가 풀렸다. 화주들은 저렴한 도로와 철도 수송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화물 수요가 줄어들자 해운업계는 신규 선박 발주를 하지 않게 되고 조선업계는 일감이 줄어 쇠락하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상업용 선박이 4만 척 있지만 55%가 미시시피강에서만 운항하는 바지선이다. 2010년 이후 건조된 선박 10척 중 9척이 바지선과 예인선이었을 정도로 편중돼 있다. 1000t 이상 원양 선박은 노후화 탓에 2000년 이후 193척에서 99척으로 감소했다. 미국 컨테이너선 4척 중 3척이 20년 이상, 65%는 30년 이상 노후된 선박이다. 미국에서 대형 선박 건조가 줄어든 것은 터무니없이 비싸고 느린 공정 탓이다. 미국 싱크탱크 카토(CATO)는 2017년 <존스법 : 미국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부담> 보고서에서 미국 내 피더선 건조 비용이 1억 9000만~2억 5000만 달러(우리 돈 2660억~3500억 원)인 반면, 한국, 중국 등에서는 3000만 달러(우리 돈 420억 원)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카토 보고서는 가동 중인 124곳의 조선소 중 군함, 잠수함, 원양 화물선, 시추 장비 등 중형 선박을 건조할 수 있는 중대형 조선소는 22곳에 불과하다면서 한국과 일본, 중국이 제각각 1000~2000곳씩 보유하고 있는 것에 비교했다.
존스법은 군함의 건조와 정비에 차질을 준 것에서 나아가 군사 기동력까지 약화시켰다.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군은 군수 물자 수송을 외국적 상선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책임자인 한 장성은 의회에 출석해 “외국 선박의 지원 없이 존스법을 따르는 미국 선박만 투입했다면 수송에만 3개월이 더 걸렸을 것”이라며 존스법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 밀주업자와 침례교회 동맹
미국 조선·해운업계는 고정된 국내의 상선 및 군함 수요를 독점하기 때문에 최소 이익이 보장된다.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해외로 수출하는 미국 기업은 비용 절감을 위해 외국적 선박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조선·해운업계의 취약성이 가중되는 구조다. 전 세계 선박 건조는 중국과 한국이 주도하고 있는데, 올해 10월까지 점유율에서 중국이 65%, 한국이 26%를 차지했다. 미국 조선산업의 점유율은 0.1% 수준으로 의미가 없어진 상태다.
자유무역주의 전도사였던 미국이 과잉 보호를 고집한 결과는 참담하다. 하지만 조선·해운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존스법은 여전히 건재하다. 비효율·고비용을 이유로 폐지론이 끊임없이 제기되지만 번번이 국익을 앞세운 규제론에 밀린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 상황을 두고 ‘밀주업자와 침례교회’ 이론까지 등장한다. 이해가 엇갈리는 집단에 의해 금주법이 지탱된 데 대한 비유다. 검은 돈을 벌게 되는 밀주업자와 도덕적 권위를 얻는 복음주의 교회. 대척점에 선 두 집단이 금주법을 지킨 아이러니의 판박이라는 것이다. 카토 보고서는 외부 경쟁자가 퇴출된 뒤 업계와 규제 기관, 정치인들끼리 기득권이 공고화됐다고 분석한다. 미 의회 16개 위원회와 6개 연방 기관이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얽혀 존스법을 관리·감독하면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 후퇴 모르는 보호주의
현재 미국 해군은 노후화에다 유지·보수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 존스법에 의거 수리를 하려면 미 본토로 돌아가야 하는데 시일이 소요되고 현지 조선소의 비용과 기술도 한계에 다다랐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됐지만 보호주의는 요지부동이다. 존스법을 완화하거나 폐지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대신 동맹국을 끌어들여 해결하는 임시방편이 동원된다. 한국과 일본 민간 조선소에까지 미 해군 함정 MRO를 맡기는 식이다. 경남 거제의 한화오션 등이 속속 미국 MRO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조선업 수주에 청신호이긴 하나 미국 정부가 자국 조선소와 일자리 보호를 핑계로 언제 돌변할지 몰라 안심할 수만은 없다. 취임 전부터 벌써 이차전지 보조금 폐지론을 흘려 한국 기업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다. 약속했던 반도체 보조금도 마찬가지. ‘트럼프 2.0’ 행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를 핑계로 과거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고 보고 대처해야 한다.
■ 무역전쟁 불가피… 불확실성 커져
‘트럼프 2.0’ 행정부는 강경 보호무역주의를 공언하고 있다. 미국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징벌적 고율 관세를 무기로 삼겠다는 식이다. 선거 유세 때 국내 산업 보호와 해외에 뺏긴 일자리 회복을 위해 모든 수입품에 10~20% 관세를 매기겠다고 공약했다. 특히 중국에는 60% 관세를 물리겠다고 엄포를 놨다. 관세 부담을 안겨 생산 거점을 미국으로 옮기게끔 강제한다는 발상이다. 하지만 미국의 일방적 관세 장벽에 중국과 유럽은 보복할 것이고, 따라서 전 세계적인 무역전쟁은 불가피하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무역전쟁이 발생하면 2026년까지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이 1.3% 감소할 것으로 경고했다.
하지만 휘발유 세금을 올리면 공급자가 아닌 소비자에게 부담이 돌아가는 것처럼 관세 장벽의 부메랑은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관세 전쟁의 효과 분석을 보면 결국 자국 기업과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다. 뉴욕 연방준비은행과 콜롬비아대, 프린스턴대가 공동으로 발표한 <2018년 무역전쟁이 미국 물가와 복지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고율 관세로 정부 세수가 늘긴 했지만 오른 세금만큼 제품 가격이 인상됐다. 결국 그 부담은 미국 기업과 소비자들에 고스란히 전가됐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와 관료 중 고율 관세 정책의 효율성에 찬성하는 이는 없다. 하지만 ‘트럼프 2.0’ 행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을 태세다. 이미 첫 번째 임기 때 다자간 자유무역협정인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에서 돌연 탈퇴한 전력이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까지 탈퇴하는 초강수를 둘 수도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트럼프 2.0’ 행정부는 자유무역주의를 무시하고 보호무역주의를 전면화할 것이다. 모순 덩어리인 존스법이 조선·해운업을 몰락시키고도 100년 넘게 건재하는 것처럼 미국은 스스로의 경쟁력을 무너뜨릴 보호주의 깃발을 내리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무역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벌써 전운이 감돈다. 미군 MRO 수주로 한국 조선업에 ‘반짝 호황’이 올 수는 있겠으나 나머지 산업 전반의 기상도는 흐림 일색이다. 수출 주도로 경제 성장을 일군 한국 경제 앞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장기 불확실성 시대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한국은 비상한 각오와 대비책이 필요하다.
2024-11-23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