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헌, 의지가 있기는 한가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정부가 ‘일하는 사람 기본법’과 함께 ‘근로자 추정제’를 추진하면서 각종 법령에 사용되는 노동자와 근로자의 혼용이 지적되고 있다. 지난해 여야 합의로 근로기준법의 ‘근로자의 날’이 ‘노동절’(5월 1일)로 개정된 뒤 용어 통일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 않다. 그 기원이 헌법이어서다. 우리 헌법 32조·33조에는 ‘근로자’의 권리와 의무가 명시돼 있다. 헌법을 고쳐야 하위 법령이 바뀌고 국민의 삶과 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사회를 통합하는 최고의 규범이다. 그 가치는 고정불변하지 않고 시대의 흐름에 조응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탄생한 제6공화국 헌법은 시대적 소명을 다했다. 정치권력과 수도권 집중의 폐해를 시정하자는 취지에는 여야 정치권뿐만 아니라 국민적 공감대가 이뤄진 상태다. 5·18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도 민주당은 물론 국민의힘 지도부가 여러 차례 약속한 바 있다. 의지만 있으면 제7공화국으로의 첫걸음을 뗄 수 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합의할 수 있는 헌법적 가치를 도출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대목이다.
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시민주도 헌법개정 전국 네트워크 회원들이 개헌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개정의 방향뿐만 아니라 시기와 방법도 민감한 이슈다. 지난해 22대 대선 때 개헌 국민투표를 동시 실시하는 제안이 나왔다가 불발되고, 대안으로 올해 6·3 지방선거 때 치르는 방안이 부상했다. 또 합의된 사안은 올해 지선에서, 권력 개편은 2028년 총선 때로 나누는 2단계 개헌론도 제안된 상태다. 정부는 국회의 공론화와 법 개정을 주시하고 있으나 여야의 극단적 충돌이 지속되면서 개헌 논의는 더디기만 하다.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지난 16일 청와대에서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 오찬에서 6·3 지방선거 때 여야 이견이 없는 지방분권, 지역균형발전 조항을 헌법 1조에 넣는 원포인트 개헌 국민투표를 시행하자고 제안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면서 분권공화국이기도 하다는 점을 천명하는 방식이다. 이는 지난해 12월 지방분권균형발전 부산시민연대의 설문에서 지선과 동시 투표(66.6%)와 함께 여야 합의 불발 땐 지방분권 개헌이라도 해야 한다는 의견이 71.2%로 압도적이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논란의 소지가 없는 지방분권 개헌이라면 순조로울 것 같지만, 현실은 안갯속이다. 정치적 속내나 필수 전제 조건을 하나하나 따지면 지뢰밭이 널려 있다. 국회 의결과 대통령 공고 등의 기간을 감안하면 개헌안을 도출할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가 1월 중 구성되고, 2월에 본격 활동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야는 머뭇거리고 있는 상황이다. 거대 여당의 입법 독주에 제1 야당 대표가 단식으로 맞서는 험악한 대치 상황이 대화를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또 개헌 논의가 시작되는 순간 모든 정치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여야 모두 몸을 사리는 기색이 역력하다.
개헌안은 국회 재적 3분의 2, 즉 200명 이상의 의원이 찬성해야 의결되고 30일 이내 국민투표에 돌입할 수 있다. 민주당으로서는 과거의 실패 사례가 있기 때문에 국회 통과 여부에 대해 조심스럽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대통령 중임제와 지방분권을 담은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지만,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이 표결에 참석하지 않아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투표 자체가 무산된 적이 있다.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국민의힘(107석)이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니 민주당이 의석수만을 앞세워 강행할 수 없는 구조다.
문재인 정부가 2018년 지방분권에 초점을 두고 발의했다가 폐기된 헌법개정안. 부산일보DB
또 국민투표법 개정도 의외의 복병이 되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4년 재외국민 투표권 제한 조항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는데 이후 12년째 국민투표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7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등과 간담회를 갖고 법안 처리를 당부했다. 하지만 이날 소관 행안위 국민의힘 간사는 불참했다. 국민투표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6·3 지선뿐만 아니라 2028년 총선 때도 개헌안을 놓고 국민투표에 부칠 수는 없게 된다.
개헌 논의에 가장 적극적인 우 의장이 제시한 로드맵은 6·3 지선과 2028년 총선으로 나눈 단계적인 개헌이다. 대통령 4년 중임제 등의 권력 구조 개편에 복잡한 셈법이 끼어들면 합의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정치적 논란이 없는 사안만 올해 지선에서 먼저 처리하자는 취지다. 이를 위해서라면 2월 개헌특위 출범, 3월 국민투표법 개정, 4월 국회 본회의 개헌안 상정, 6·3 지방선거·개헌 동시 투표의 로드맵이 가능하다.
39년째 바뀌지 않는 제6공화국 헌법은 뜯어고칠 곳이 너무 많지만, 작금의 정치 상황에서 단번에 개정하려고 나서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국민적 공감대 형성에 따른 단계적 처리가 현실적이다. 우선 합의 처리 가능한 국토균형발전 명문화 등으로 개헌안을 만드는 게 순리다.
분권형 개헌은 지방소멸을 저지하는 전환점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최근 지역민들의 실망감이 점차 커지고 있다. 올해 지선 때 개헌 국민투표를 치르자는 목소리는 잦아들고 총선으로 미루는 분위기가 노골적이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이재명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의 개헌 외면 분위기다. 무려 3시간에 걸쳐 25개의 현안 질문이 쏟아졌지만 헌법 개정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123대 국정과제 중 개헌을 1호로 올린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87년 체제 종식의 의지를 피력하지 않은 것이 개헌론이 처한 현실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왼쪽 다섯 번째)이 7일 국회에서 개헌에 필요한 국민투표법 개정을 위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관계자 등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연합뉴스
물론 대통령이 개헌 논의를 주도하면 논란을 부르기 십상이고, 개헌 주체는 국회가 맡는 게 옳다. 내용적,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도 여야 합의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을 넘겨받은 국회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여야 모두 지난 대선 때 개헌 공약을 내놨지만,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관성적 정치 투쟁에만 골몰한 채 나서지 않고 있다. 이재명 정부 집권 초기, 합의 가능한 최소 수준이라는 조건을 고려하면 올해 지선으로 마련된 개헌의 골든 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여야 모두 지방분권에 국가의 미래가 걸려 있다는 구호를 내건다. 그렇다면 균형발전의 핵심 동력이 될 분권형 개헌에 적극 나서야 한다. ‘대한민국은 분권공화국’이라고 헌법에 명시하면 광역 행정통합 추진도 내실화되고 속도를 낼 수 있다. 행정·재정 분권이 보장되지 않은 채 지금 추진 중인 광역권 통합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문제는 2년 뒤 총선 때까지 기다릴 만큼 지방의 위기는 한가롭지 않다는 데 있다. 정치가 국민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저버리고 당파적 이익에 급급하다면 존재 이유가 없다. 여야는 분권형 개헌안을 만들어 6·3 지선에서 국민의 총의를 물어야 한다.
김승일 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