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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하나뿐인 해변 파크골프장…“공 치는 재미가 환상적”
파크골프 인기가 해마다 폭발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한국 파크골프 동호인을 유치하기 위해 동남아에도 파크골프장이 속속 생겨나는 상황이다. 이달 초에는 베트남 냐짱(나트랑)의 셀렉텀 노아 리조트에 베트남 최초의 파크골프장이 개장했다. 그곳은 어떤 시설을 갖추고 한국 파크골프 동호인을 기다리는지 미리 다녀왔다.
■아름다운 파크골프장
딱! 철썩! 끼룩끼룩!
티샷으로 날아간 공의 경쾌한 타격음에 이어지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 울음소리. 한마디로 세상에 둘도 없는 환상적인 코스다. 첫 스윙을 시도한 파크골프 동호인들의 입에서는 동시에 탄성이 튀어나온다.
“야, 정말 멋지군!”
셀렉텀 노아 리조트의 파크골프장은 총 18개 홀 규모다. 그렇게 크지 않아 많은 인원을 소화하기에는 역부족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따라올 수 없는 큰 장점을 갖고 있다. 셀렉텀 코스는 과거 일반 골프 미니 경기장에 조성돼 공을 치는 재미가 남다르고, 노아 비치 코스는 해변에 자리를 잡아 사람을 홀리는 풍경을 자랑한다.
리조트 본관 앞에 마련된 셀렉텀 코스 9개 홀부터 돌아본다. 첫 홀은 리조트를 정면으로 마주보는 곳에서 시작한다. 벙커가 설치되고 코스가 구불구불한 데다 ‘ㄱ’처럼 꺾어진 홀뿐 아니라 티샷 지점과 홀컵 지점의 표고 차가 심한 홀도 있어 쉽게 공략할 수 없다.
셀렉텀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홀인원 부상’이 마련된 7번, 8번 홀이다. 7번 홀에는 고급형 풀 빌라 업그레이드 특전이, 8번 홀에는 에어부산 냐짱 왕복 항공권 1장이 부상으로 걸렸다. 거리가 20m 안팎이어서 홀인원에 도전해볼 만한 곳이다.
이번에는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코코넛 가든 앞에 마련된 노아 비치 코스에 도전한다. 1~6번 홀은 매우 단순한 형태로 이뤄졌고, 7~8번 홀은 꽤 아기자기하게 설치됐다. 노아 비치 코스의 최고 장점은 코코넛나무 숲에서 시원한 바다 풍경을 즐기면서 공을 친다는 점이다.
코스를 돌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거나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는 재미는 꽤 쏠쏠하다. ‘ㄱ’자 형태의 2번 홀에서는 백사장 위로 공을 치는 이색 경험을 할 수 있다. 해변을 배경으로 또는 해변을 바라보며 퍼팅까지 하는 환상적인 구간이다. 가장 시원한 사진이 나오는 코스는 7~9번 홀인데, 공을 치는 사람의 입에서 “정말 대단해”라는 탄성이 저절로 튀어나올 만한 곳이다.
노아 비치 코스에서 파크골프를 즐긴 뒤 1~6번 홀과 7~9번 홀 사이에 설치된 테이블과 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바로 앞에 미니바가 있는데 음료수, 주류, 간식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비용은 숙박비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모두 무료다. 바뿐만 아니라 셀렉텀 노아 리조트에서는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제공한다.
냐짱 파크골프 전담 여행사인 와이투어앤골프의 김대곤 대표는 “셀렉텀 노아 리조트 파크골프장 코스는 짧지만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깊은 인상을 얻을 수 있다. 휴가와 파크골프 체험을 겸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말했다.
■편안한 호캉스
파크골프를 즐긴 뒤 골프채를 숙소에 가져다놓고 간단한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다. 본관 앞은 물론 코코넛 가든 인근에도 풀장이 마련돼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두 풀장에는 가족 이용객이 넘쳐난다. 특히 코코넛 가든 옆의 풀장은 바다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위치여서 물속에 몸을 담그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보며 멍 때리기에 최적의 장소다.
풀장에서 물놀이를 만끽한 뒤에는 풀장 바로 앞의 레스토랑에 간다. 이곳에서도 음료수나 주류, 간단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맥주 한 잔을 들고 코코넛 가든으로 간다. 몸을 누일 수 있는 해먹도 있고, 바퀴 모양의 간이침대도 있다. 간이침대에 누워 맥주로 목을 축이고 눈을 감는다. 코코넛 나무 잎에 가려 햇살은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바닷가라서 바람도 꽤 많이 불어 정말 시원하다. 이대로라면 금세 잠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
백사장에서 갑자기 함성이 터져 나온다. 비치사커 경기가 벌어진다. 리조트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편을 갈라 축구를 한다. 옆에서는 숙박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비치발리볼을 즐긴다.
리조트 안에만 머무는 게 지루하다면 당일치기 투어에 나서면 된다. 리조트에서 40분 거리인 냐짱 시내에는 8~13세기에 지어진 고대 참파 왕국의 유적지인 힌두교 사원인 포나가르 첨탑이 있다. 또 1866년에 건설된 용선사도 있다. 돌아오는 길에는 냐짱 여행객의 필수코스라는 롯데마트에 들러 망고 관련 먹거리를 선물로 살 수도 있다.
냐짱(베트남)=남태우 기자 leo@busan.com
2024-11-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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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 ‘미인도’ 보려고 한 달 반 만에 10만 명 몰렸다
가을을 맞아 대구에 뜨거운 관심을 끄는 명소가 생겼다. ‘지역을 넘어 미래로 이어가는 문화보국 정신’이라는 슬로건 아래 9월 3일 개관한 대구간송미술관이다. 바로 옆에는 2011년 문을 연 대구미술관도 있다. 지난 18일 찾아간 두 미술관 주변은 온통 가을 단풍 천지였다. 미술관 관람을 갔다 뜻하지 않게 단풍놀이까지 즐기게 됐다.
■대구간송미술관
대구간송미술관은 2015년 7월 대구시청과 간송미술관이 분관 설치 협약을 맺은 지 9년 만에 문을 열었다. ‘여세동보’라는 주제로 국보·보물 40여 점 등을 소개하는 개관 기념 기획전이 진행되는데, 한 달 반 만에 관람객 10만 명을 넘을 정도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대구간송미술관에서 가장 먼저 들어간 곳은 산수, 인물, 풍속 등 다양한 회화와 책 등을 소개하는 제1전시실이다.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인지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발 디딜 틈도 없다. 정선, 심사정의 산수화와 신윤복, 김득신의 풍속화 등을 관람하려고 전시실 내에는 곳곳에 긴 줄이 늘어섰다.
학교에 다닐 때 미술책 등에서만 보던 국보 회화 작품을 직접 관람하게 된 사람들의 입에서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일부에서는 내부 공간이 너무 깜깜하다며 불평을 터뜨리지만, 주변을 어둡게 조성함으로써 오롯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대구간송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신윤복의 ‘미인도’만 배치한 제2전시실이다. 별도의 공간에 ‘미인도’ 하나만 가져다 놓고 소수 인원만 제한적으로 순서대로 들어가 볼 수 있게 했다. 모두 ‘미인도’만 보려고 미술관에 온 듯 입구에는 긴 줄이 늘어서 들어갈 순서를 기다린다. 오랜 기다림 끝에 관람한 ‘미인도’의 여자 주인공은 관심이 민망한 듯 부끄러운 미소를 짓는다.
제3전시실의 주제는 ‘훈민정음 해례본: 소리로 지은 집’이다. 국보이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전시된 곳이다. 혹시 복사본이 아니냐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시된 책은 놀랍게도 진본이다. 전시실 한쪽 공간에 한글을 주제로 만든 독특한 미디어 작품도 눈길을 끈다.
대구간송미술관에서 ‘미인도’ 못지않게 인기를 끄는 곳은 고려청자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모은 제4전시실이다.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등 여러 점의 국보 도자기가 전시돼 있다.
미술관을 빠짐없이 둘러봤다면 마지막 코스는 정선, 김홍도, 신윤복 등의 작품을 영상으로 재구성해 초대형 화면에 비추는 제5전시실이다. 편안한 안락의자나 전시실 바닥에 앉아 환상적으로 흘러가는 영상에 빠져든 관람객들의 표정에서는 재미있다는 느낌이 넘쳐난다.
■대구미술관
대구미술관은 대구간송미술관 지척에 있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에는 빨갛게 물든 대덕산 언저리의 단풍을 즐기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두운 실내에서 작품을 감상하느라 지친 눈을 풀어 주고 곳곳에 설치된 벤치에 앉아 맑은 공기를 쐬는 것도 좋다.
대구미술관 1층에서는 내년 2월 23일까지 우리나라와 이집트의 전설, 신화를 소재로 삼은 이집트 영상 작가 와일 샤키 특별전이 진행된다.
‘러브 스토리’는 우리나라 구전 설화와 전래 동화를 판소리로 재해석한 작품이지만 관람객에게는 매우 낯설고 독특하게 다가온다. 어린이들이 어른으로 분장해 출연한 ‘알 아라바 알 마드푸나 1’은 이집트 신화를 다룬 작품인데, 마치 드라마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나는 새로운 신전의 탐구’는 그리스신화와 이집트 종교의 연관성을 탐구한 작품이다.
각 작품 앞에는 벤치가 있어 편하게 앉아서 관람할 수 있다. 먼 이집트의 신화, 전설이 낯선 관람객에게는 지겨울 수도 있지만, 이색적인 문화와 주제를 경험한다는 점에서 1시간 정도 관람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대구미술관 3층에는 ‘몰입’이라는 주제의 디지털 가상 공간이 있다. 대구의 지역성과 역사성을 상징하는 지역 작가 15명의 작품을 10~20분짜리 미디어 영상 6개로 제작해 요일마다 달리 상영하는 체험시설이다.
지난 18일 상영된 작품의 주인공은 서양화가 서동진과 목판화가 김우조였다. 5~6평쯤 되는 작은 체험 공간은 환상적으로 연출된 두 화가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때로는 입체감을, 또 때로는 바람에 그림이 날리는 듯한 착각을 주면서 20분이라는 시간을 순식간에 지워 버렸다.
2024-10-24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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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 미소 같고 그리운 벗 같은 '연보랏빛 개미취 물결'
경북 문경시 호계면에 해발 360m 정도로 나지막한 월방산이 있다. 이곳 중턱에 있는 봉천사라는 작은 절이 2년 전부터 갑자기 SNS에서 인기 관광지 및 사진 촬영 명소로 떠올랐다.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이름도 독특한 꽃, 개미취 덕분이다.
개미취는 한국, 일본 원산의 국화과 풀로서 ‘기억’ ‘먼 곳의 벗을 그리다’라는 꽃말을 가졌다. 일본에서 꽃말도 한국과 비슷한 ‘잊지 않을게’다. 9~10월에 연한 자주색, 즉 연보랏빛 꽃이 화사하게 피어난다.
2022년부터 봉천사에서는 매년 ‘개미취 축제’가 열리는데 이색적인 이름과 연보랏빛 꽃 덕분에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올해도 오는 13일까지 봉천사 개미취 축제가 펼쳐진다. 만개한 꽃이 시들기 전에 봉천사에 서둘러 다녀왔다.
봉천사로 올라가는 경로는 산길인데도 꽤 넓어 운전하기 어렵지 않다. 문제는 주차다. 큰 절이 아니어서 주차 공간이 모자란 탓에 산길 구석구석에 차를 세워야 한다. 절 관계자와 인근 마을 주민이 주차 안내를 하는 덕에 막히는 일은 없지만 상당히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봉천사가 자리를 잡은 공간은 높은 곳은 아니지만 앞이 탁 트였다. 시골 마을 외에는 시야를 가리는 게 없어 너른 들판과 푸른 산이 펼쳐져 풍경이 꽤 시원하다.
절 아래 마을에서부터 개미취가 곳곳에 피어 봉천사에서 만날 절경을 예고한다. 본격적인 개미취 풍경은 주차장에서 시작한다. 주차장 앞 빈터에 개미취가 군락을 지어 피었다. 본격적인 꽃 축제 장소는 주차장을 지나 봉천사로 들어가는 길부터다.
봉천사 개미취 축제는 절과 지역 주민이 함께 진행하는 민간 행사다. 그래서 행사장 입구에서 입장료 1만 원을 내야 한다. 대신 음료수와 도토리묵을 대접한다. 입구에서 ‘사진 핫 스폿’을 소개하는 소형 팸플릿도 나눠 주니 참고해서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 된다.
봉천사 바로 앞에는 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 작은 한옥 건물이 보인다. 이 건물은 절이 아니라 400년 전에 안동 김씨 가문이 지은 병암정이다. 정자 옆에는 큰 소나무가 있는데 정자를 지을 때 심어 수령이 400년에 이른다.
병암정처럼 봉천사 주변에는 소나무 숲 외에 바위가 많은데, 개미취는 숲과 바위 주변에 집단으로 피어 있다. 미륵바위, 거북바위, 자미성바위 등 바위마다 이름이 있는데, 생긴 모양만큼이나 꽃과 어울리는 분위기도 달라 사진 찍는 재미가 남다르다.
개미취 하이라이트는 봉천사 본당과 바로 앞 부처상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과 바로 맞은편 큰 바위 언덕이다. 또 본당 왼쪽 자미성바위에서 바라보는 산 아래도 그야말로 절경이다.
개미취꽃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연보랏빛이 눈에 띄지 않지만 집단으로 어울린 모습에서는 색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개미취꽃 군락 사이에 감나무도 보인다. 아직 홍시가 되지 않은 주홍색 감이 대롱대롱 매달렸는데 연보랏빛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꽃 사이에 시가 적힌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봉천사 개미취를 잘 표현했다는 느낌을 주는 시다.
‘보랏빛 꽃바다에/ 봉황이 찾아들고/ 월방산에 달이 뜨니/ 개미취 꽃 아름답다/ 부처님/ 자비로운 미소/ 송이송이/ 스몄네(이만유 시 ‘봉천사 개미취’)’
봉천사 개미취 군락 곳곳에서는 꽃 속에 들어가거나 바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분주하다. 사진을 찍지는 않고 꽃밭 사이를 산책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봉천사 본당 옆 공터에 앉아 개미취 꽃과 산 아래 시원한 풍경을 바라보며 ‘멍때리기’ 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같은 곳에서 여행하더라도 즐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봉천사 개미취 축제만 보고 오기가 섭섭하다면 문경시에도 가 볼 만한 곳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문경새재도립공원은 이달 말부터는 화려한 단풍이 만개해 관람객을 기다린다. 또 가은역과 진남역 폐역에서는 레일바이크를 즐길 수도 있다. 이 밖에 문경생태미로공원, 문경에코월드, 옛길박물관 같은 이색 시설을 방문해도 된다.
2024-10-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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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리부팅시켜 준 바닷가 맨발걷기…2막 향해 다시 ‘큐~’ [맨발에 산다] ②
2022년 5월. 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 경기를 보기 위해 사직야구장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이었다. 속이 메스꺼워지더니 스멀스멀 구토까지 밀려왔다. ‘괜찮겠지, 금방 좋아지겠지’하고 참고 견뎌 봤지만, 증세는 야구를 보고 집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7년 전 진단받은 뇌경색이 재발한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안감이 엄습했다. 겪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견디기 힘들었던 당시의 절망감. 건물 외벽에 붙은 한글 간판을 보고도 무슨 내용인지 알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느꼈던 그 당혹감을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이 들고 덩치만 커졌다 뿐이지 한글조차 읽지 못하는, 영락없는 바보였어요.” 한여름 무더위가 긴 꼬리를 드리우던 9월 초 부산 광안리해수욕장에서 만난 남승혜(50) 씨. 2년 전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하다 스스로 어이없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일 이후로 2년 넘게 매일 같이 광안리에서 맨발걷기를 한다는 승혜 씨의 ‘맨발 생환기’를 들어 봤다.
다시 2022년이다.
승혜 씨는 그해 3월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앞서 2015년 뇌경색 진단을 받았던 승혜 씨는 부작용 우려로 코로나 예방 백신 접종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확진이 되고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뇌경색 증세가 나타난 것이었다. 코로나 후유증이었다. 곧장 처음 뇌경색 진단을 받았던 서울의 대형병원으로 향했고, 뇌경색 재발이라는 진단과 함께 수술을 권유받았다.
“바닷가에서 맨발걷기를 해 보는 건 어떨까요?”
평소 다니던 부산의 한 한의원 원장의 제안이었다. 평소 승혜 씨의 건강 상황을 잘 알고 있던 한의원 원장은 ‘바닷가를 맨발로 걸으면 혈액순환이 잘 된다’며 적극 권했다. 원장의 맨발걷기 제안은 수술을 망설이던 승혜 씨의 귀에 콕 박혔다. 마침 집이 광안리해수욕장까지 걸어서 5분이면 충분할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다음 날부터 바로 걷기 시작했다. 수술을 제안한 서울 병원에선 약 처방을 받고 퇴원했다. 수술은 6개월 후 경과를 보고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바닷가 맨발걷기 효과는 생각보다 빠르고 확실했다. 광안리 해변을 걸은 지 2주일 정도 되자 몸이 반응을 보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두 아이를 학교에 보내느라 온종일 지쳐 지내던 일상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피로감 탓에 오후 4시만 되면 어김없이 눈을 붙여야 했었는데, 어느새 ‘옛일’이 되고 있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틈날 때마다 광안리 해변을 누비느라 평소보다 몸을 더 움직였는데도 피곤함은 오히려 덜했다. 수시로 괴롭히던 감기도 멀리 달아났다. 가끔 찾아오더라도 예전처럼 오래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꼬리를 내렸다.
태풍이 몰아치거나 폭우가 쏟아질 때를 제외하고 매일 걷고 또 걸었다. 6개월 후 다시 찾은 서울 병원에선 더 이상 수술 얘기를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승혜 씨를 기쁘게 한 것은 더 이상 자신이 ‘덩치 큰 바보’가 아니어도 된다는 점이었다. 두 눈으로 글자를 보고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또 무슨 뜻인지 몰라 절망했던 자신이 더 이상 아니었다.
예상치 못했던 맨발걷기 효과는 삶의 방식도 바꿨다. 뇌경색이 재발할 무렵, 승혜 씨는 서울로 근무지가 바뀐 남편이 출퇴근할 수 있는 수도권으로 이사할 참이었다. 실제로 집을 구했고 계약까지 앞두고 있었지만 포기했다. 승혜 씨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한 광안리 맨발걷기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승혜 씨 가족은 결국 주말에만 함께할 수 있는 ‘이산가족’이 됐지만 아쉬움보다 감사함을 더 느꼈다고 한다.
‘맨발걷기의 기쁨’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이상 입 꾹 다물고 혼자 즐길 성격이 아니었던 승혜 씨는 맨발걷기 전도사로 나섰다. 대상은 양가 부모님 등 집안 어른은 물론이고 친구나 지인, 심지어 다른 학부모까지 제한이 없다. 광안리는 예배당이고, 맨발걷기는 찬송가인 셈이다.
승혜 씨는 대학교 때 학교 방송국 활동을 했고, 졸업 후에는 부산 KBS 리포터와 가톨릭평화방송 아나운서·피디 등 방송인으로서 20~30대를 보냈다. 마흔을 앞두고 덜컥 방송국을 그만두고 아이들 교육·놀이 시설을 열어 운영하는 모험도 했다. 사업을 접은 뒤엔 두 아이와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틈틈이 다녀온 가족 여행에 행복을 느끼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만난 질병과 이를 이겨내고 있는 승혜 씨에게 맨발걷기는 어떤 의미일까?
“처음엔 병이 재발한 걸 알고 절망했지만, 광안리 맨발걷기를 하면서 제 삶은 또 리부팅된 거죠. 그래서 요즘은 인생 2막을 위한 '큐 사인' 준비에 힘쓰고 있습니다.” 승혜 씨에게 두 번째 삶을 살게 해 준 맨발걷기는 '새 엔진'인 셈이다.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다시 뛸 수 있는 동력이 된 엔진. 리부팅된 엔진은 2년 동안 쉼 없이 가동됐다. 디지털소통지도사, 스피치 강사, 퍼스널 컬러 전문가, 라이브 커머스 전문가…. 승혜 씨가 자격증을 따거나 공부하고 있는 것들이다. 해외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 데 관심이 많다는 승혜 씨는 한국어 지도사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다. 광안리 바닷가 맨발걷기가 달아 준 승혜 씨의 날개가 어디까지 비상할지 궁금하다.
2024-09-1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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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만 송이 백일홍에 초대형 산수화까지…‘사진 맛집’ 제대로네!
‘산소카페.’ 그렇고 그런 커피 판매점 이름이 아니다. 놀랍게도 경북 청송군 애칭이다. 공기가 맑다고 해서 이런 귀여운 이름이 붙었다. 얼토당토않은 영어 슬로건에 비해 지역 이미지가 순식간에 마음에 깊이 박히게 만들어준다.
깨끗한 공기를 음미하러 산소카페에 다녀왔다. 4만여 평 부지에 백일홍 수십만 송이가 핀 청송정원은 물론 소설 <객주>를 담은 ‘객주문학관’이 하이라이트다. 여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그림도 있다. 출발하기도 전에 호기심부터 발동한다.
■청송정원 백일홍
얼마나 화사한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다. 많은 꽃밭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넓으면서 꽃이 잘 핀 정원은 처음이다. 게다가 산소카페라는 애칭에 걸맞게 공기는 정말 맑아 풍경을 더 환상적으로 만들어준다. 이곳은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산소카페 청송정원’이다.
기온이 약간 떨어졌지만 여전히 덥다. 날씨를 고려해 청송정원 입구에서 우산을 빌려준다. 정원 안을 살펴보니 노란색, 빨간색 우산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보인다. 빨간색, 노란색, 분홍색 꽃 사이로 걸어가는 우산은 정원을 더 화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다.
백일홍은 주차장에서 가까울수록 밀집해서 잘 피었고 색감도 더 훌륭하다. 멀어질수록 꽃대가 짧은 데다 밀집되지 않고 듬성듬성 피었다. 청송정원 백일홍 꽃밭 곳곳에는 다양한 색깔의 의자, 사과 및 하트 모형, 그네가 포토존으로 설치돼 있다. 저마다 인생 샷 하나를 건지려고 열심히 촬영 중이다.
아쉬운 점은 사진 찍는 사람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설치한 시설에서는 좋은 사진을 얻기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또 넓은 정원에 그늘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어 무더위에 돌아다니는 게 너무 고통스럽다.
■객주문학관
청송정원에서 자동차로 5분만 달리면 객주문학관이 나온다. 폐교된 고등학교 건물을 증개축해 10년 전 문을 연 곳이다. 폐교를 활용해 조성된 시설 중에는 관람객에게 별 흥미를 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그야말로 ‘예외’다.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고 볼거리가 많다.
객주문학관은 청송 출신 소설가 김주영의 인생을 담은 곳이다. 관람은 3층 ‘김주영 작가실’에서 시작한다. ‘길 위의 작가 김주영’이라는 대형 입간판이 관람객을 환영한다. 김주영 친필 자료집, 각종 사진은 물론 그가 전국을 돌며 자료를 수집하다 골방에서 지쳐 곯아떨어진 모습을 담은 모형이 이어진다.
2층은 소설 <객주> 관련 자료가 전시됐다. 만화, 조형물, 인형 등을 활용해 <객주>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가 북한을 방문했을 때 찍은 각종 사진도 전시됐다.
객주문학관 주변 풍경도 시원하다. 문학관 뒤편에 작은 숲이 있어 쉬기에 좋은 데다 바로 앞에는 연꽃이 환하게 핀 저수지 두 곳이 있어 연꽃 사진을 담기에 제격이다.
■청량대운도전시관, 야송미술관
문을 닫은 초등학교를 청송 출신 이원좌 화백을 주제로 담아 바꾼 곳인데, 그야말로 이색적인 두 공간이다. 청량대운도전시관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산수화가 전시됐고 야송미술관은 세상을 흑백처럼 보이게 하는 특이한 사진 찍기에 최상의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뜻밖에 이곳을 찾아오는 관광버스가 꽤 보인다.
청량대운도전시관에는 그림이 딱 한 점 전시돼 있다. 길이가 무려 46m에 이르는 초대형 산수화 작품인 ‘청량대운도’다. 그림을 그린 사람은 5년 전 별세한 이 화백이다. 청량대운도를 사진에 담는 데에는 요령이 있다. 1층 그림 앞에 한 명을 세우고 2층에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 그래야 그림이 얼마나 거대한지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질 정도다.
야송미술관에서는 2층 대전시실에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도 이 화백 산수화 그림이 걸려 있는데 사진을 찍은 뒤 확인하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온통 하얀 내부 벽, 거의 흑백 같은 산수화 그리고 거무스름한 바닥에 비친 그림의 그림자까지 실내공간은 그야말로 흑백세상이었다. 색과 사진의 장난에 불과하겠지만 꽤 환상적이다. 사진기 품질이 떨어지고 사진 찍는 실력이 부족한 기자의 한 컷도 꽤 재미있는데, ‘프로페셔널’이 가서 찍는다면 과연 어떤 사진이 나올지 궁금해진다.
2024-09-1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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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고장’ 의령으로 ‘부자 기운’ 느끼러 갈까요
솔직히 경남 의령군이 부산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인 줄 미처 몰랐다. 남해고속도로 북부산톨게이트에서 의령군청까지 5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인구는 겨우 2만 6000여 명으로 경남에서 가장 작은 지자체라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당연히 느린 삶을 누릴 수 있는 ‘슬로 시티’여서 모든 게 여유롭고 한가로운 곳이다. 여기에서는 서두를 필요도, 조급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느긋하고 한가롭게 의병박물관과 호암이병철생가를 중심으로 의령을 한 바퀴 둘러보고 왔다.
■의병박물관과 솥바위
남해고속도로 군북IC에서 빠진 자동차가 함안군 함마대로를 달려 의병대로에 접어들자마자 남강변에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이 나타난다. 이곳이 의병 도시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인식시켜 주는 구조물이다.
동상을 지나친 자동차는 의령읍내에 위치한 의병박물관으로 향한다. 자동차는 박물관 앞에 세워도 되고 남강변 주차장에 세워도 된다. 의령군청 맞은편의 의병교를 건너자 눈앞에 거대한 의병탑이, 오른쪽에는 충익사가 보인다. 임진왜란 때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와 그 휘하에서 싸운 열일곱 장수를 기려 세운 건축물이다. 충익사에서 향을 피워 잠시 참배한 뒤 의병박물관으로 이동한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사립, 공립, 국립 박물관이 있지만 의병을 주제로 한 곳은 여기뿐이다. 사실 처음에는 의병박물관 방문을 주저했다. 실망스러울 게 분명하다고 짐작했기 때문이다. 전시물이 아주 많지는 않았지만 의병박물관은 기대 이상이다. 실망스러울 것이라고 의심한 게 미안할 따름이다. 의병에 대한 설명이 풍부했고, 특히 정암진전투를 주제로 만든 영상물은 어린이는 물론 어른도 재미있다고 느낄 정도다. 조금만 더 다듬으면 대단한 관광 명소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의병박물관에서 나와 왼쪽으로 10분 정도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면 의령구름다리가 나온다. 깊은 산속 계곡 사이에 매달린 구름다리는 더러 봤지만 시내 한복판 강 위에서 출렁이는 다리를 건너기는 처음이었다. 의령구름다리는 무서울 정도는 아니지만 꽤 흔들리는 데다 ‘다리를 다 건너면 부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니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구름다리는 세 갈래여서 이리저리 오가면서 다양한 풍경을 보는 재미가 있다.
다시 자동차를 몰고 의병박물관에서 5분 거리인 남강변의 솥바위와 정암루로 향한다. 한자로 ‘정암(鼎巖)’인 솥바위에는 ‘반경 8km 안에서 부자가 넘쳐난다’는 전설이 전한다. 그래서인지 삼성그룹, LG그룹, 효성그룹 창업자가 의령에서 태어났다고 의령 사람들은 믿는다. 사실이든 아니든 부자를 낳은 바위라면 찾아가서 기념사진 한 장 정도 찍어둘 필요는 있다. 모래사장만 누렇게 뿌려진 강에 나홀로 우뚝 선 솥바위는 정말 특이하게 생겼다. 솥바위에서 돌아나오는 길에 벽화가 보인다. 바위에서 금이 쏟아지는 장면이다. 이곳에서 기운이 닿으면 금덩이에 파묻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을까.
솥바위를 내려다보는 정암루는 곽재우 장군이 인근 정암진에서 벌어진 왜병과의 전투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정자다. 바로 앞에는 함안과 의령을 연결하는 1935년에 만들어진 트러스식 다리인 정암교가 있어 걸어 건널 수 있다.
■호암이병철생가와 망개떡
의령구름다리와 솥바위에서 부자가 되는 기운을 받은 김에 이번에는 정말 부자가 된 실존인물의 생가로 달려간다.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이 태어난 곳인 ‘호암이병철생가’다.
이병철생가가 있는 곳은 정곡면 장내마을이다. 우리나라 최고 기업의 창설자 생가여서인지 마을 입구에는 꽤 넓은 공영주차장이 만들어졌다. 아직 뜨거운 여름인데도 주차장에 적지 않은 차가 서 있는 걸 보니 꽤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부부끼리 오는 사람도 있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도 있다. 다들 부자 기운을 받으러 오는 게 분명해 보인다.
장내마을은 전체적으로 정리정돈이 잘 돼 여느 시골마을과는 달리 꽤 깔끔하다. 방문객을 고려해서 그랬겠지만 마을의 흙길을 모두 없애고 아스팔트로 덮어놓은 게 아쉽기는 하다. 뜨거운 날씨는 아스팔트 때문에 더 뜨겁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방문객들의 마음을 읽어서인지 가게를 비롯해 곳곳에 ‘부자’라는 단어가 넘쳐난다.
고 이병철 회장의 부모는 부농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생가는 시골집치고는 꽤 넓고 크다. 지금까지 다녀본 여러 생가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 같다. 생가를 재단장할 때 손을 본 것인지 정원도 잘 다듬어져 전체적으로 풍요롭고 넉넉해 보인다. 생가 뒤편은 숯골산 끝자락인데, 절벽 같은 지형에 숲이 우거져 집을 전체적으로 포근하게 보호한다는 느낌을 준다. 안내문을 보니 숯골산은 곡식을 쌓아놓은 형상이어서 생가를 명당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돌아 나오는 길에 공영주차장 한쪽에 의령의 전통음식인 망개떡 가게가 보인다. 여기까지 와서 망개떡을 제대로 맛보지 않고 갈 수는 없다. 더운 날씨에 오래 놔두면 상할 수 있기 때문에 16개가 든 한 상자만 고른다. 하나를 꺼내 먹어보니 정말 맛있다. 역시 여행은 보고 사고 먹는 재미로 다니는 것이다.
2024-08-29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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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조+맨발…‘서부산 첫 슈퍼어싱 챌린지’ 열기 뜨겁다
‘1만 명 맨발걷기 대축제’가 펼쳐질 세븐비치 어싱 챌린지 다대포해수욕장 편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26일 온라인 참가 신청을 받기 시작한 다대포 어싱 챌린지는 다음 달 28일 선착순 신청자 1만 명과 함께하게 된다. 온라인 접수 사흘 만에 신청자가 3000명에 육박할 정도로 참여 열기도 뜨겁다. 봄기운이 완연하던 지난 4월 21일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출발한 세븐비치 어싱 챌린지는 부산의 해수욕장 일곱 곳에서 차례로 ‘슈퍼어싱’ 맨발걷기를 하는 국민 건강 프로젝트. 6월 16일 광안리 편에 이어 9월 28일 사하구 다대포해수욕장에서 세 번째 걸음을 내디딘다.
∎낙조 맛집과 슈퍼어싱의 만남
다대포해수욕장은 부산에서 몇 안 되는 전국구 일몰 명소로 이름나 있다. 부산엔 해안가를 중심으로 일출 풍경을 만나는 장소가 많다. 하지만 서부산권에 위치한 다대포처럼 낙동강 하구와 바다, 가덕도 등지의 산세가 어우러져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이런 이유로 매년 연말 전국의 해넘이 명소가 소개될 때 부산에선 다대포가 늘 대표 장소로 손꼽힌다.
단순히 해넘이가 ‘목격’된다고 명소로 불리지는 않는다. 다대포에 전국의 일몰 나들이객이 몰리는 데에는 드넓게 펼쳐진 백사장도 큰 몫을 차지한다. 다대포는 동해안권에 가까운 부산의 나머지 해수욕장과 달리 남해안권에 자리한다. 이런 입지는 상대적으로 해안 침식의 영향을 덜 받는 순기능을 해 많은 이들의 발길을 다대포로 이끈다.
낙동강 상류에서 떠내려와 쌓인 양질의 모래도 다대포해수욕장이 폭 150m 안팎의 여유로운 백사장을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다대포의 드넓은 백사장에 서서 지는 해에 반짝이는 윤슬을 배경으로 포즈를 잡으면 ‘인생 사진’ 하나 건지는 건 일도 아닌 것이 된다.
이런 천혜의 조건이 ‘낙조 맛집’ 다대포해수욕장을 오늘날 맨발걷기 성지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요즘 다대포에 가면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맨발로 해변을 누비는 슈퍼어싱족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인근 아파트 주민들은 물론이고 도심과 가까워 다소 번잡한 동부산권 해변을 피해 짬을 낸 이들도 몰려든다.
(사)부산걷는길연합 박경애 사무국장은 “다대포해수욕장은 해변의 경사를 못 느낄 정도로 평지에 가깝다”면서 “이는 신체가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며 맨발걷기를 할 수 있는 최고의 조건을 갖춘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맨발학교 최명솔 부산지회장은 “발바닥이 물에 충분히 닿은 상태에서 걸어야 슈퍼어싱의 접지 효과를 최대로 누릴 수 있다”면서 “조수 간만의 차가 커 갯벌 면적이 넓게 형성된 다대포야말로 슈퍼어싱의 명당 중 명당”이라고 치켜세웠다.
∎친환경생태에 ‘스마트’ 옷 입는 사하
부산을 얘기할 때 단골처럼 거론되는 것 중 하나가 ‘동서 격차’ 문제다. 교육과 교통, 문화생활 여건, 상권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부산의 서쪽 동네가 동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하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요즘 서부산 곳곳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눈여겨보면 이런 문제가 과거의 기억으로 남을 날도 머지않았다는 기대감이 생긴다. 그 중심에 사하구의 스마트한 변신이 빛을 발하고 있다.
낙동강 하류에 위치한 사하구는 2007년 문을 연 낙동강하구에코센터와 ‘부산의 허파’ 을숙도생태공원을 보유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공통 화두인 친환경생태도시로의 전환에 앞장서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사하구가 최근 스마트한 변신으로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다대포해수욕장 인근의 부산 대표 산업단지인 신평·장림일반산업단지가 ‘서부산스마트밸리’로 거듭나면서다.
사하구는 그간 정주 여건을 방해하던 노후 산단의 환경을 개선하는 동시에 전통 제조업의 첨단 미래 산업 전환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이런 결실이 전국 공모를 통해 이름 지은 서부산스마트밸리다. 이미 지난해 정부 공모 사업에 선정돼 3년간 19개 사업에 2546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사하구에서는 도시철도 동매역을 중심으로 4곳의 지식산업센터가 이미 건립 중이며, 나머지 10여 곳도 건립 준비에 착수한 상태다. 1호 지식산업센터인 ‘펜타플렉스 부산’이 입주를 시작하는 등 차곡차곡 결실을 거두고 있다.
∎‘다대포 맨발걷기’ 함께하려면…
세븐비치 어싱 챌린지 세 번째 다대포 행사에 참가하려면 우선 부산맨발걷기좋은도시운동본부 홈페이지(earthing.busan.com)에 접속해야 한다. 부산일보 홈페이지인 부산닷컴(busan.com)에 뜨는 팝업 창이나 사이트 주소를 직접 입력해 들어올 수 있다.
회원이 아니라면 신청에 앞서 부산닷컴 회원에 가입해야 한다. 신청 시 아이디(ID)와 비밀번호(PW)를 입력해야 하는데, 이때 부산닷컴 회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넣으면 된다. 회원 가입 및 참가 신청은 컴퓨터와 휴대폰에서 모두 할 수 있다.
가입과 신청 절차에 개인정보가 포함되기 때문에 전화로는 할 수 없다. 14세 미만 미성년자의 경우 회원 가입을 할 수 없지만 보호자와 동반할 수 있다. 그 외 문의 사항은 홈페이지의 ‘공지사항’과 ‘자주묻는질문’에서 확인하면 된다.
세븐비치 어싱 챌린지는 부산시, 부산일보사, 부산시의회, 부산상공회의소, BNK금융그룹이 공동 주최하고, 부산맨발걷기좋은도시운동본부가 주관한다. BNK부산은행, 반얀트리해운대부산, 부산미래IFC검진센터, 팬스타크루즈, 부산교통공사, 강림CSP, 금양, 송도해상케이블카, 대성문, 은산해운항공, 윈덤그랜드부산이 힘을 보탠다. 이들 기업의 후원으로 행사는 참가비 없이 무료로 진행된다. 참가자들에게는 배지와 생수, 신발 가방 등 기념품이 제공되며 추첨을 통해 푸짐한 경품도 주어진다.
2024-08-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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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루에 앉아 즐기는 독서삼매경이라니…산사에서 만난 '여름낙원'
오래전부터 꼭 가보고 싶은 사찰이었다. 2018년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이라는 주제로 통도사, 부석사, 법주사, 마곡사, 대흥사와 함께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경북 안동시 봉정사다. 무더운 날씨에 짙은 숲길에서 산책하고 누각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평안하게 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을 굳혔다. 산지 승원이라면 조용한 산중불교 전통을 이어 가는 곳이니 마음을 정화하기에도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만세루와 여왕의 돌탑
부산에서 2시간 이상 달려 중앙고속도로 서안동IC에서 내렸을 때 자동차 온도계가 섭씨 37도를 가리켰다. 봉정사 주차장에 도착하자 매표소 직원이 더운 날씨와 많지 않은 방문객을 감안해서인지 차를 몰고 위로 더 올라가라고 손짓한다.
소나무 숲길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이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면 된다. 숲길인 데다 거리도 600m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느리게 걸어도 10분이면 도착한다. 걷는 게 싫다면 봉정사 바로 아래까지 차를 몰고 갈 수도 있다. 물론 주말이나 성수기에 사람이 많이 몰리면 차로 올라가는 게 힘들지도 모른다.
덥지만 유명한 소나무 숲길을 걸을 생각에 그늘에 차를 세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폭염이 온몸을 덮치지만 숲길에 들어서는 순간 사정은 다시 달라진다. 소나무가 얼마나 크고 울창한지 하늘을 거의 가릴 정도다. 당연히 햇빛은 아래로 내려올 생각조차 못 한다. 덕분에 뜨거운 날씨에 아스팔트 도로인데도 그다지 덥다는 느낌은 다가오지 않는다. 젊은 부부와 딸로 보이는 어린이가 앞서서 걸어가는데, 그들도 무더위에 지친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소박한 일주문을 지나 다시 숲길을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봉정사로 들어가는 가파른 계단 길이 보인다. 땀을 흘리기 싫다면 옆으로 돌아가 작은 출입구인 진여문을 이용하면 된다. 문으로 들어가자 여러 사람이 넓은 누각에 앉아 쉬거나 깊은 명상에 잠긴 채 아예 수면을 취하는 특이한 모습이 나타난다. 명색이 사찰인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
사람들이 휴식하는 공간은 만세루다. 위로는 절의 중심인 대웅전을 올려다보고 아래로는 시원한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장소다. 전후좌우로 막힌 곳이 없다 보니 시원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온다. 사람들이 마음을 편히 내려놓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남들처럼 신발을 벗고 올라가 한쪽 구석에 앉아 등을 기둥에 기대 본다. 엉덩이가 바닥에 닿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책 한두 권만 가지고 가면 이곳에서 하루 종일이라도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몸이 충분히 쉬었다고 느끼는 순간 염불 소리가 들린다. 대웅전에 여러 사람이 앉아 있고 스님이 꼿꼿한 자세로 불경을 낭독한다.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절에서 염불하는 소리는 왠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을 받는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여러 색깔의 연등이 매달렸다. 절 한쪽 구석에 ‘백중 연등 접수’라는 문구가 보인다. 연등은 하늘을 가리고 마당에 연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엉뚱한 생각이 든다. 형형색색의 연등과 검은색 그림자는 같은 존재의 다른 표현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다른 존재인가.
만세루에 붙은 엉덩이는 떨어질 줄을 모른다. 몸은 시원하고 마음은 편안하니 엉덩이는 심신을 핑계 대면서 여기서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둘러봐야 할 곳은 많이 남았고, 찍어야 할 사진도 적지 않으니 편하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2022년 세상을 떠난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99년 봉정사를 방문해 돌탑을 쌓았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그날을 기념해 돌탑을 아직도 허물지 않았다는 것이다. 돌탑의 위치를 찾아가니 극락전 앞이다.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현재 건물은 고려시대의 것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간직했다고 한다. 극락전 바로 앞에는 역시 고려시대에 쌓은 삼층석탑이 있는데 여왕의 돌탑은 삼층석탑 앞에 있다. 그야말로 범부가 한 개씩 쌓은 평범한 돌탑이었지만 여왕이 돌 하나를 더 얹음으로써 영원히 잊히지 않을 유명한 돌탑으로 변신했다.
■영산암의 배롱꽃
봉정사에 가면 잊지 말고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우리나라 10대 정원이라는 멋진 중정을 가졌고 7~8월에는 주홍색 꽃이 피는 배롱나무로 유명한 영산암이다. 조그마하고 소박한 암자에 불과하지만 워낙 분위기가 안온하고 포근해서 영화 촬영 장소로 자주 활용되기도 했다.
영산암에 들어가려면 누구든지 고개를 숙여야 한다. 출입문인 우화루 아랫부분이 낮아 허리를 뻣뻣이 들면 머리를 부딪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출입문을 이렇게 낮춘 것은 모두에게 겸손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까.
우화루 밖에서는 영산암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영산암은 건물 여섯 동이 사방을 에워싼 폐쇄형 구조로 돼 있기 때문이다. 우화루 아래로 고개를 숙여 들어가야 이 암자의 본래 모습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우화루 아래를 지나자마자 저절로 감탄이 터지게 만드는 고즈넉하면서 조용한 중정이 나타난다. 중정을 꾸민 장식이래야 소나무 한 그루와 배롱나무 한 그루, 그리고 작은 돌탑 하나가 고작이다. 그런데도 엄청난 화초를 심은 유럽 유명 궁전의 초대형 정원보다 더 아름다워 보인다. 봉정사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고건축의 미학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도 한옥의 아름다움과 다양한 표정을 담은 마당의 멋스러움에 넋을 빼앗기게 된다’라고 소개돼 있다. 정확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배롱꽃은 제철을 맞아 활짝 피었다. 화사한 주홍색 꽃이 푸른 숲속에 숨겨진 검은 기와지붕의 전각과 오랜 친구처럼 절묘한 조화를 이룬 모습은 보는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신발을 벗고 우화루에 올라가 마루에 앉아 본다. 만세루만큼은 아니지만 미세한 바람이 안팎으로 불어오는 게 꽤 시원하다. 이곳은 숲속이라서 그늘도 꽤 많이 져 만세루보다 차분한 느낌이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전망이 환상적이지는 않지만 마치 어릴 때 동네 뒷산에 숨겨진 ‘나만의 비밀공간’ 같은 느낌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만세루에 이어 우화루에서도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고 잠시나마 무더운 여름을 잊는다.
우화루에서의 휴식을 끝으로 봉정사에서 내려간다. 이곳은 가을 단풍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곳이다. 기후 위기 때문에 최근 수년간 제멋을 보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올해 가을엔 한 번 가봐야겠다. 여름 봉정사와 가을 봉정사의 차이는 어떨지 직접 확인해야겠다.
2024-08-01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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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밤바다 낭만 부럽지 않은 ‘분위기 깡패’ 포장마차촌 [별별부산] ⑤
여름이다. 지금 한창인 장마가 물러가면, 이 계절은 낭만파 애주가들에겐 밤바다에서의 한잔이 절로 생각나는 때이기도 하다. 이럴 때 ‘바로 거기지’라고 떠오르는 곳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개인적으론 전남 여수시에서의 경험이 강렬하다. 그중에서도 10여 년 전 창 너머로 돌산대교가 보이는 여수시의 한 횟집 2층에서 술잔을 기울인 기억이 우선 떠오른다. 당시 신문 기사에 제목을 달던 편집부 소속이었는데, 맛난 횟감과 운치에 더해 식당 벽에 붙은 지역 소주 업체의 ‘잎새주세요’라는 멋진 광고 문구가 잊히지 않는다.
낭만과 운치를 얘기하자면, 여수시 거북선대교 아래의 포차거리도 빼놓을 수 없다. 이름마저 ‘낭만 포차거리’가 아닌가. ‘여수 밤바다~’로 시작하는 장범준의 달콤한 감성 발라드곡이 밤새 울려 퍼지는 일대는 특히 외지 관광객의 ‘원픽 방문지’로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부산이라고 이런 낭만과 추억을 선사할 장소가 없을 리 있나. <부산일보> 인기 연재물 ‘별별부산’이 수소문해 봤다.
가장 먼저 후보에 오른 곳은 해운대 포장마차촌이다. 해운대해수욕장 해변 바로 뒤 주차장 쪽에 나란히 줄지어 선 이곳은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신선한 해산물을 즐길 수 있는 장소였다.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영화인들이 많이 찾아 유명해지기도 했다. 특히 고급 재료인 랍스터를 맛볼 수 있는 포차로 많이 알려졌다. 하지만 이곳은 해운대구청과의 약속에 따라 지난달 철거돼 지금은 명성만 떠돌고 있다.
해운대 포장마차촌이 사라졌다고 부산의 밤바다 낭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개구이를 대표 메뉴로 애주가들을 불러 모으는 서구 송도 암남공원과 해운대구 청사포 일대를 비롯해 사하구 다대포 몰운대 입구, 기장군 학리 방파제 등 밤바다를 향해 술잔을 들 수 있는 곳은 즐비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핫하고 힙한 장소로 정평이 난 곳은 따로 있으니, 바로 영도구 봉래동 봉래물양장 공영주차장에 자리 잡은 영도 포차거리이다. 이곳에서는 저마다 개성 넘치는 상호를 단 포차 23곳이 영업 중이다. 1980년대부터 뱃사람들의 시장기와 애환을 달래 주던 포차가 하나둘 들어서며 생긴 영도 포차거리는 코로나 팬데믹 시절 실내 영업 제한 ‘무풍지대’로 주목을 받으며 점차 다리 바깥 뭍사람들에게까지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영도 포차거리의 가장 큰 장점은 도시철도역에서 걸어갈 수 있는 입지다. 영도 포차거리는 일제 수탈기와 한국전쟁 피란기 애환이 가득 서린 영도대교(영도다리라고 흔히 불린다)에 접해 있다. 1호선 남포역 8번 출구에서 600m가 채 되지 않는 거리여서 영도대교를 건너 10분 안에 닿을 수 있다. 이런 입지는 운전 부담 없이 한잔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다.
두 번째는 속칭 ‘분위기 깡패’로 불릴 만한 주변 풍경이다. 애인이든 친구든 마음 통하는 이와 함께한다면 어디라도 좋겠지만, 이왕 부산에서 포차를 이용한다면 바다를 포기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앞서 언급했듯이 포차에 앉아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은 부산에서도 여럿이다. 하지만 ‘ㄷ자’ 형태의 봉래물양장을 둘러싸고 자리한 이곳에선 해수욕장과는 또 다른 항구의 비릿함을 품은 ‘찐 부산 분위기’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건배’하고 술잔을 들어 올리면 눈앞에 금방이라도 뱃고동을 울릴 것 같은 선박(주로 예인선)들이 도열해 있는 풍경 말이다.
포차 뒤쪽은 물양장을 마주 보고 솟은 고층 호텔 두 곳이 병풍을 치고 있다. 여기에 영도대교와 부산대교, 롯데백화점 광복점, 부산타워(용두산공원) 등 부산 원도심이 선사하는 주변 건축물들. 포차에 앉아 이들이 발산하는 경관조명을 보노라면 관광대국 싱가포르의 수변 명소 클라크키 노천카페에 자리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도 포차거리는 오후 4시께부터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인근에 마련된 수레 보관소에서 포차가 하나씩 이동해 차량이 떠난 공영주차장 자리에 터를 잡으면서부터다. 손님을 받는 시간은 포차 도착시간과 상관없이 일제히 오후 6시 무렵이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래야 공평하기 때문이다. 메뉴는 스무 가지가 넘는다. 곰장어·오돌뼈·고갈비 등 구이류부터 산낙지·문어숙회 등 해산물, 어묵탕·조개탕 등 탕류까지 대동소이하다. 가격은 대부분 2만 원으로 크게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 특이한 점은 LA갈비(2만 5000원)가 메뉴판에서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포차마다 2개씩 내놓는 야외 원탁 테이블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뜨겁다. 특히 주말엔 이른 시간부터 주변을 서성이며 테이블이 펼쳐지기를 기다리는 ‘조출족’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야외 테이블 이용 시간을 2시간으로 제한하고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매달 1·3주 월요일은 공식 휴무다. 태풍이 몰아닥치는 등 날씨가 심하게 궂은 날에도 쉰다.
50대 이상이 대부분이던 상인 연령층에도 변화가 생겼다. 코로나 이후 30대 젊은 사장이 하나둘 합류하면서다. 젊은 손님이 좋아할 만한 새 메뉴 선정이나 SNS 계정 운영 등 최근의 변화는 우연이 아니다. 상인회 윤종덕 회장은 “SNS를 통해 포차거리가 널리 알려지면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외국인의 발길도 늘었다”고 소개했다. 윤 회장은 이어 “상인들 역시 영도 포차거리가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상품 중 하나라는 마음가짐으로 손님을 맞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2024-07-04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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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빛 축제’ 즐기고, 상큼한 숲정원 만끽하고
경북 경주시 여행의 핫스폿인 황리단길에서 경주시청이 추천하는 향토음식 별채반에 찰보리빵까지 즐겼지만 밖으로 나갈 엄두는 나지 않는다. 뜨거운 태양이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첨성대, 그리고 동궁과 월지를 바라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그나마 조금 덜 더운 오전 일찍 두 곳은 물론 불국사까지 둘러보았길 망정이지 오후에 돌아다닐 계획을 잡았더라면 낭패를 당할 뻔했다. 오후에는 에어컨을 즐길 수 있는 실내공간을 돌아보고, 나무가 우거진 숲 그늘에서 편안히 쉬어가기로 했다. ‘경주에서 여름 나기’ 여행이다.
■경주엑스포대공원
처음에는 어린이만 좋아하는 공간인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곳곳을 둘러보면서 마음은 조금씩 바뀌었다. 화려한 ‘빛 축제’인 미디어아트는 물론 깊은 인상을 남기는 독특한 미술관, 그리고 자연사박물관까지 어린이는 물론 어른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장소였다. 각 건축물 사이에는 계림지 해먹공원, 화랑숲과 비밀의 정원, 아평지 등 숲과 연못이 설치돼 다양한 전시물과 체험을 즐기다 잠시 쉬기에도 제격이다.
뜨거운 햇빛을 피해 먼저 달려간 곳은 계림지 해먹공원이다. 이름 그대로 해먹은 물론 벤치가 대거 설치돼 편안히 앉아서, 또는 누워서 시간을 보내기에 좋아 보인다. 평소 즐기기 힘든 해먹에도 올라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본다. 걸어 다닐 때는 몰랐는데, 해먹에 누워 있으려니 제법 선선한 바람이 몸을 이리저리 간질인다.
해먹공원에서 졸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향한 곳은 실내에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미디어아트를 즐길 수 있는 경주엑스포기념관 ‘살롱헤리티지’다. 이곳에서 가장 흥미로운 공간은 민화에 나오는 동물을 증강현실(AR) 등 디지털로 만날 수 있는 ‘상상 동물원’이다. 벽과 바닥에는 빛을 이용한 민화 속 동물이 등장하는데, 손이나 발로 건드리면 반응을 보인다. 종이에 그림을 그려 스캐너에 집어넣으면 정면 벽에 영상으로 등장한다. 여러 사람이 올린 동물 그림은 퍼레이드라도 벌이는 듯 반복적으로 벽을 오간다. “내가 그린 그림이 지나가”라고 외치는 어린이의 얼굴에는 반갑다는 표정과 신기하다는 표정이 교차한다.
‘살롱헤리티’에서 나가면 바로 인근에 ‘찬란한 빛의 신라’라는 주제로 더 다양한 미디어아트를 보여주는 ‘천마의 궁전’이 관람객을 기다린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미디어아트는 첨성대 안으로 들어가는 형상을 상징한다는 LED 조명 조형물이다. 아무리 봐도 이걸 왜 첨성대라고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5분간 다양한 색으로 변화하는 조형물을 지나는 기분은 흥미롭다.
신라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천마총 금관, 녹유귀면기와, 금동물고기를 구현한 미디어아트가 다음 차례다. 손이나 발로 건드리면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는 공간이어서 꽤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시간을 기록하다-삼국사기, 삼국유사’라는 제목의 방이다.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는 데다 꽤 신기한 인터랙티브 공간이어서 여기도 만져보고 저기도 만져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거울의 방’인 ‘연꽃’도 화려하기는 ‘시간을…’에 뒤지지 않는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다양한 연꽃무늬가 사방을 에워싼 거울에 새겨져 어디가 입구인지 출구인지, 어디가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천마의 궁전’에서 나와 오르막 숲길을 따라 걸어 ‘솔거미술관’으로 향한다. 뜨거운 태양만 아니라면 인근에 있는 ‘시간의 정원’과 ‘아사달조각공원’도 둘러볼 만하지만 무더위를 무릅쓰기는 쉽지 않아 이날만큼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솔거미술관’은 유명 건축가 승효상 씨의 작품이다. 마침 ‘현지우현’이라는 주제로 이응노 화백과 박대성 화백의 교류전이 오는 8월 4일까지 진행 중이다. 이색적인 그림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사실 많은 관람객이 이곳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최고 인기의 포토존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전시실에 설치된 큰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아평지 풍경이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설명하면 관람객 중 상당수는 이 통유리 앞에서 사진을 찍을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다. 직접 가서 풍경을 구경하고 사진을 찍어봐야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다.
■경북천년숲정원
경주엑스포대공원 실내공간에서 시원하게 에어컨 바람을 즐겼으니 이제는 야외에서 선선하게 숲 바람을 느낄 시간이다. 지난해 4월 개장한 ‘경북도 1호 지방 정원’ 경북천년숲정원이 목적지다. 이곳에 가기 전에 인터넷에서 다양한 글을 읽어보니 평가가 엇갈렸다. ‘더운 여름에는 가지 말라’는 글이 있는가 하면 ‘더운 여름에 시원하게 지내기 딱’이라는 반대 글도 있었다. 어느 게 맞는지 알려면 현장에 가 봐야 한다.
기자가 내리는 결론은 ‘후자가 맞다’는 것이다. 경북천년숲정원은 시원하고 청량하고 깔끔하고 상쾌한 공간이었다. 그늘이 없는 공간은 무덥기 짝이 없지만 상당 부분을 덮은 커다란 나무 숲 그늘 아래에서 쉬거나 걸어보니 이보다 좋은 여름 피서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북천년숲정원 입구에서는 햇빛 가리개용 종이 모자를 무료로 나눠준다. 공짜로 구한 모자를 쓰고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다리 위에서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사람들이 보인다. 다리 아래로는 작은 개울이 흐르는데, 개울 위에 통나무로 만든 외나무다리가 있다. 외나무다리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으면 시원한 풍경을 담을 수 있어 이곳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셔터를 누른다.
개울 양쪽은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산책로다. 위쪽은 목련길, 아래쪽은 무궁화길이다. 산책로에 설치된 벤치에는 사람들이 앉아 무더위를 피하는 중이다. 그곳으로 내려가 보니 햇살이 거의 들지 않아 상당히 시원하다. 왜 여기에 몰려 한참이나 앉아 쉬는지 이유를 알 만했다.
다리를 건너 직선으로 걸어가면 활엽수가 우거진 산책로가 보인다. 모자를 쓴 인부들이 자전거를 타고 산책로를 지나간다. 이제 네댓 살로 보이는 어린이는 혼자 킥보드를 밀며 신나게 바람을 가른다.
활엽수 산책로는 돌아나올 때 걷기로 하고 일단 개울을 따라 숲길을 걷는다. 환한 미소를 짓는 수막새를 모티브로 한 ‘천년의 미소원’을 지나니 다시 짙은 숲길이 나온다. 숲길 끝부분 담장 너머는 푸른 벼가 자라는 논이다. 숲길 끝에는 햇빛을 가리는 차양막이 설치되고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벤치가 보인다. 이곳에 누워 낮잠을 즐기면 세상에 부러울 게 없을 것 같다.
벤치마저 지나 다시 숲길을 걷다 보면 방금 본 활엽수 산책로가 길게 뻗어 있다. 숲길 사이 벤치에 앉아 산책로를 바라보며 한참 멍때리기에 들어간다. 지나다니는 사람은 드물고, 들리는 소리라고는 이름 모를 새 울음소리뿐이다.
아까 킥보드를 타고 지나갔던 어린이가 다시 산책로에 나타났다. 이번에는 지쳤는지 킥보드를 끌고 가다 한참이나 서 있더니 다리 앞에서 부모를 발견하고는 다시 킥보드를 신나게 밀어젖힌다.
정원 한쪽 구석에 화사하게 핀 보라색 버들마편초 꽃이 희미한 바람에 산들거린다. 뜨거운 태양에 지쳤는지 꽃도 고개를 약간 숙인 듯하다.
2024-07-04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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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 성당 순례하다 ‘승효상’ 만날 줄이야…
자동차 온도계가 무려 38도를 표시한다. 잠시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가자 후끈한 열기가 온몸을 감싸고 숨을 막히게 만든다. 깜짝 놀라 서둘러 차로 돌아간다.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 야외 여행을 추천하기는 불가능하다.
미리 살펴두었던 세 가지 행선지 가운데 가장 나중으로 생각했던 장소로 차를 돌렸다. 바로 경남 밀양시 하남읍 명례리 ‘명례 성지’다. 이곳은 1866년부터 6년간 이어진 병인박해 때 38세로 순교한 복자 신석복 마르코를 기리는 성지다. 그가 생전에 살았던 집이 있던 장소 일대를 성지로 조성한 것이다.
■경남 최초 한옥성당
명례 성지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간다. 가지가 무성한 고목이 짙은 그늘을 드리운 마당과 하얀색 건물이 나타난다. 건물은 셀프카페와 성물방으로 이뤄진 방문객센터인 ‘라우렌시오집’이다. 고목 너머로는 너른 들판이 펼쳐지는데 낙동강 자전거길 구간으로 유명한 명례생태공원이다.
바깥 기온은 38도를 오르내리지만 뜻밖에 명례 성지 안은 별로 덥지 않다. 고목 앞 벤치에 앉아 공원을 내다보고 있으려니 선선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고돈다. 두 눈을 감고 잠시 시원한 바람과 상큼한 공기를 음미한다. 마음은 평온하고 또 평온해지고, 차분하고 또 차분해지고, 경건하고 또 경건해진다.
정말 이상하고 신기하고 특별한 느낌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이런 감정이라면, ‘라우렌시오집’에서 따뜻하거나 차가운 커피 한 잔을 뽑아와 한 모금씩 음미하면서 이 자리에서 서너 시간이라도 앉아 있을 것 같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엉덩이를 들고 다리를 겨우 움직여 ‘라우렌시오집’ 옆에 ‘천주교 성지-명례천주교회’라는 간판이 붙은 정문으로 들어간다. 정문을 지나 길을 돌아서자 왼쪽으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과정을 묘사한 조각상 12개와 성모 마리아의 하얀색 조각상이 세워진 성모동산이, 오른쪽으로는 방금 본 고목보다 더 크고 가지와 잎이 더 무성한 고목이 나타난다.
조각상을 천천히 둘러본 뒤 고목을 향해 걷는다. 아주 작지만 매우 깊고 단아한 분위기가 매혹적인 기와지붕 건물이 나타난다. 1896년에 지어 경남 최초의 한옥성당이라는 ‘성모승천성당’이다. 지금 성당은 1936년 태풍 때 부서진 것을 2년 뒤 재건했다고 한다.
‘성모승천성당’ 내부는 우리나라 전통 시골 한옥 내부 벽을 허물고 서까래와 기둥 나무만 남겨놓은 형태다. 내부는 그다지 넓지 않아 20명 정도가 겨우 앉을 면적이지만, 거기에 짙게 배인 순교자의 깊은 신심은 온 세상을 덮고도 남기에 충분하다.
‘성모승천성당’ 앞은 가리는 게 하나도 없어 고목 사이로 성모동산과 넓게 펼쳐진 명례생태공원, 낙동강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당연히 이곳도 ‘라우렌시오집’ 앞의 정원만큼이나 시원하다. 도대체 이곳은 왜 이렇게 시원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을 지경이다.
■승효상 설계한 순교자성당
‘성모승천성당’ 앞에서 아름다운 풍경과 시원한 바람을 한참이나 즐긴 뒤 성지 안쪽으로 더 들어간다. 푸른 잔디가 깔린 공터가 나오는데 ‘신선복 생가 터’라는 표식이 보인다. 지금은 생가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잔디만 우거진 공간이다.
이곳에 마치 운동장 관중석처럼 생긴 구조물과 계단이 붙은 사각형 건물이 보인다. 이런 장소에 관중석과 계단이 왜 있는 것일까. 무엇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알고 보니 관중석은 관중석이 아니었다. ‘신석복마르코기념성당’의 지붕 격이었다. 생가 터와 관중석처럼 생긴 구조물 아래에 순교자 성당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각형 건물은 무엇일까. 건물에 다가가 보니 ‘순교탑’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이 건물은 종교적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석복 마르코의 승천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계단에는 올라가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있다. 계단은 ‘순교탑’ 구조물의 장식인데, 순교자가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형상화한 것이다. 마침 하늘의 구름이 갈라지며 하얀 빛이 새어나왔다. 순교자가 종교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승천할 때 하늘의 풍경이 저러했을까.
관중석 같은 구조물 오른쪽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신석복마르코기념성당’으로 이어지는 통로다. 성당은 정말 독특하다. 정형화된 모양이라고는 찾을 수 없고, 보는 방향에 따라 형태가 다르다. 한눈에 다 담을 수 있는 자리도 없다. 어디에서 사진을 찍어도 성당 전체 모습을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형 높낮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지어진 성당은 어떻게 보면 성 같기도 하다. 성당 주변은 마치 성벽으로 둘러싸인 모양이다. 정문 외에는 다른 곳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없다.
성당 내부는 하얀 콘크리트와 짙은 갈색 신도석으로 단출하게 이뤄졌다. 하얀색은 순수한 하늘나라를, 핏빛과 비슷한 갈색은 순교와 희생을 상징하는 것일까. 정말 그런 의도로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기자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그렇다는 것이다.
바깥 기온은 38도를 오르내리지만 순교자성당 내부는 마치 에어컨을 틀어놓은 것처럼 시원하다. 실제 에어컨은 보이지 않는 걸 봐서는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열을 차단해 냉방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어떤 이가 이렇게 훌륭하고 경건한 성소를 설계했을까. 정말 궁금해졌다. 자료를 찾아보다 머리를 탁 쳤다. 승효상 건축가였구나. 그렇지. 순교자성당을 돌아보는 내내 지난달 다녀온 경북 군위군 사유원이 머리를 맴돌았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성당 입구 쪽 벽에는 머리를 빡빡 깎고 눈을 감은 사내의 두상이 붙었다. 뒤에는 광배처럼 보이기도 하고, 성긴 나뭇가지 같기도 한 장식이 새겨졌다. 두상의 주인공은 성당의 주인인 신석복 마르코다.
명례 성지 순례를 마치고 명례생태공원을 잠시 걸었다. 다행히 소나기가 내린 덕분에 기온은 순식간에 26도로 내려가 덥지 않다. 아름다운 성지를 돌아보고 나온 마음은 무겁다.
명례 성지는 종교적 신념, 정신적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내버린 ‘성인’이 살던 곳이었다. 밀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맞서 싸운 독립투사를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고장이었다. 또 성폭력을 피하기 위해 투신한 아랑의 정절을 높이 사 아랑각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해마다 음력 4월 16일 아랑제라는 축제를 열었다. 옛 밀양은 그야말로 ‘충의와 의절의 고장’이었다. 그런데 요즘 밀양에서 발생했던 이른바 ‘집단 성폭력’ 때문에 전국적으로 시끄럽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명례 성지를 떠나는 옛 밀양인의 심경은 복잡하다.
2024-06-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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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하루는 잠시 안녕”…적도 바다에서 즐긴 초여름 자유
올해 여름 바캉스는 미리 떠나기로 했다. 목표는 단 며칠이라도 피곤한 일상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휴대폰 로밍 서비스를 신청하기는커녕 이심(eSIM)이나 휴대용 와이파이 단말기도 빌리지 않았다. 인천공항에서 휴대폰을 끈 뒤 적도 인근인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로 가는 항공기에 오른 것은 오후 5시 무렵이었다. 다섯 시간을 날아 코타키나발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트라 하버 리조트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쯤. 이제 세상에서 완전히 차단된 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사흘의 ‘일상 탈출’이 시작된 것이다.
■리조트의 호캉스
지친 몸의 피로는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아침 일찍 깨지 않을 수 없다. 굳게 닫힌 테라스 문틈으로 들려오는 어린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와 풍덩거리는 물소리 때문이다. 눈을 부비며 테라스로 나가자 시원한 풍경에 잠이 확 달아난다. 오른쪽으로는 푸른 바다의 잔잔한 파도 사이로 햇살이 반짝인다. 바다와 리조트 사이에 마련된 초대형 야외 수영장에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아침 수영을 즐기는 중이다.
서둘러 대형 수건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간다. 먼저 야외 수영장에 뛰어들어 몸에 가득한 피로부터 씻어낸다. 이어 바다 바로 앞에 설치된 비치파라솔 아래 리클라이너 벤치에 몸을 누인다. 덥지도 차지도 않은 바닷바람이 선선하게 온몸을 휘감고, 나지막하게 찰랑거리는 파도소리는 자장가처럼 머리를 감돈다. 이미 싸울 의지를 잃은 두 눈은 스르르 감겨버린다.
옆방에서 뒤늦게 깨어난 지인의 재촉 때문에 늦은 아침식사를 해결하고, 이번에는 셔틀버스를 타고 골프장으로 향한다. 사람이 많지 않아 복잡하지 않았던 덕분에 시원한 바닷바람을 즐기며 느긋하게 공을 친다. 카트를 직접 몰고 이동하다 우연히 지나치는 사람들을 만나면 밝은 미소로 인사한다. 그들의 얼굴에도 멋진 풍경만큼이나 아름다운 웃음이 가득하다.
골프장에서 돌아온 뒤 다시 대형 수건을 들고 야외 수영장으로 내려간다. 이번 자리는 야외수영장에 설치된 파라솔이다. 물속에서 깔깔거리며 웃는 소녀들, 구명대를 착용한 채 아빠 품에 안겨 물놀이를 즐기는 어린 아이, 인스타그램에 올릴 멋진 사진 한 장을 건지려는 여성들, 히잡을 쓴 것도 모자라 온몸을 옷으로 두른 이슬람 여성, 남편은 어디 갔는지 혼자서 멍때리기에 여념이 없는 할머니….
같은 리클라이너 벤치이지만 바다 바로 앞과는 다른 분위기다. 다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어도 어쨌든 즐겁고 신난 것만은 눈치 챌 수 있다. 세상에 사람 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없다는데, 벤치에 드러누운 채 눈만 굴려 수영장을 둘러보는 지금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마누칸 섬의 자유
둘째 날 목적지는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마누칸 섬이다. 리조트 수영장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섬으로 가는 사이 배 위에서 즐기는 패러세일링, 제트스키, 바나나보트는 온몸에 짜릿한 전기를 흘려보낸다.
마누칸 섬 선착장에 내리면 두 얼굴의 해변이 손님을 맞이한다. 선착장 왼쪽은 섬의 사설 숙소에 묵은 고객만 이용할 수 있는 폐쇄형 해변이고, 반대쪽은 입장료만 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자유형 해변이다.
마누칸 섬 오른쪽 해변은 정말 독특하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숲 바로 앞에 오염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평화로운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섬에서 바다를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도 다양하고 이채롭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모습은 파도에 밀려 떠내려 온 통나무에 등을 기대 온몸을 태우면서 독서하는 젊은이다. 그는 과연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 젊은이 옆에서는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두 노인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오수에 빠졌다.
바다에서는 환한 표정으로 물놀이를 만끽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구명조끼를 입은 채 장난을 치는 두 소녀, 물에 몸을 담근 채 두 소녀를 지키듯이 바라보는 맨머리 노인, 검은색 차도르를 온몸에 두르고 바다에 뛰어들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는 이슬람 여성들, 그들 옆에서 짧은 치마와 민소매 원피스 차림으로 역시 사진을 찍는 동양인 여성들, 조금 더 먼 바다로 나가 스노클링을 만끽하는 젊은이들…. 역시 세상은 넓고 인생의 표정은 다양하다.
■이국 일몰과 멍때리기
코나키나발루에 가면 반드시 일몰을 구경하라는 게 많은 블로거, 유튜버의 조언이었다. 바다 너머로 떨어지는 일몰은 영원히 잊기 어려운 장관이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다. 수트라 하버 리조트만이 아니라 코타키나발루의 여러 해수욕장에는 늦은 오후만 되면 일몰 사진을 찍으려고 많은 사람이 몰린다. 탄중아루 비치와 코콜 힐 그리고 베링기스 비치는 도시와 하늘, 바다를 한눈에 담을 수 있는 3대 해변 일몰 명소라고 한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일몰 자체만으로는 황홀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바다와 섬, 산 그리고 어선이 어우러져 관람객을 무아지경에 빠뜨리는 부산 사하구 다대포 일몰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야외 수영장 시설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주변 분위기와 어우러질 경우 사정은 달라진다.
여행 사흘 내내 오후 6시 무렵이면 야외 수영장으로 내려갔다. 낮과는 달리 수영복을 입을 필요도, 대형 수건을 들고 갈 필요도 없다. 그냥 원하는 자리를 찾는 안목만 있으면 된다. 이 시간이면 늘 해변 바의 테이블에는 빈자리가 없다. 대부분 젊은 부부나 연인이다. 가족이나 친구, 또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은 테이블보다는 해변 석축이나 잔디밭을 선호한다.
자리는 어떻든 사실 상관이 없다. 그냥 먼바다에 시선을 고정하고 천천히 기울어가는 해를 보면서 멍때리기만 잘하면 된다. 집에서도 가끔 창밖으로 낙동강 너머로 지는 일몰을 바라보면서 멍때리기를 한다. 아무 생각 없이,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아무 곳도 바라보지 않으면서 모든 걸 비우는 것은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지금 이곳은 부산에서 수백 km 떨어진 외국이다. 멍때리기를 끝으로 사흘간의 자유는 막을 내린다.
2024-06-0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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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 이탈리아에서 ‘놀멍쉬멍’…이게 크루즈 여행이지!
배를 타고 외국을 간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상황을 고려하면, 선박 편이 전혀 낯설 이유가 없다. 대륙을 벗어나는 여행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다. 실제로 부산에서는 일본을 오가는 페리가 운항한 지 오래다. 배편 해외여행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처음은 부산항에서 카멜리아호를 타고 후쿠오카로 갔을 때였다. 12시간을 꼬박 배에 머물렀는데, 심야에 마땅히 즐길 거리도 없어 선실에서 술을 좀 마시다 잠을 잔 게 전부였다. 이번엔 크루즈선을 탔다. 선박으로 해외를 간다는 사실 빼고는 모든 게 달랐다. 단순히 배 크기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여행지로 떠나기 위한 이동 수단인 페리와 승선 자체가 관광과 휴양을 포함한 ‘여행’이 되는 크루즈를 같은 범주로 묶는 건 아무래도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차오, 이탈리아 입국을 환영합니다
바다 위 리조트, 떠다니는 도시(혹은 국가) 등 크루즈를 일컫는 말은 다양하다. 볼거리와 놀거리, 먹을거리 등 여행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배 안에서 충족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크루즈 여행을 잘 표현한 수식어다.
4박 5일간 경험한 이탈리아 선사 코스타크루즈의 코스타 세레나(Costa Serena)호는 한마디로 ‘바다 위에서 즐긴 이탈리아’였다. 로마신화를 콘셉트로 한 선내 장식과 디자인 요소는 물론이고, 올리브오일과 각종 파스타, 해산물을 아낌없이 내놓는 식사는 지중해 이탈리아를 유람하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차오(ciao)’라는 인사말도 자주 듣게 된다. ‘안녕’이라는 뜻의 이탈리아 말이다.
11만 4500t 규모의 대형 크루즈인 코스타 세레나호는 선체 길이가 부산국제금융센터 높이와 맞먹는 290m에 이른다. 1500개 객실에 최대 3700여 명의 승객을 수용한다. 승무원 수도 1000명에 달한다.
규모에 걸맞게 부대시설도 넉넉하다. 우선 워터슬라이드를 포함해 4개의 실내외 수영장이 있다. 12층과 9층 선미 쪽 수영장엔 온수가 보글거리는 자쿠지가 딸려 있다. 수영장 주변과 맨 위층 갑판 덱엔 선베드가 여유 있게 놓여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잔뜩 멋을 부리고 인생 사진을 건질 포인트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다만 바라봐도 저절로 힐링이 된다.
드넓은 세레나호 구석구석에서는 다양한 게임과 놀이, 축제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3층 메인홀은 일종의 바처럼 운영된다. 삼삼오오 모여 맥주를 마시며 재즈 가수나 성악가의 라이브 공연을 감상하고 댄스파티에 참가하면 된다. 5층까지 3개 층을 튼 대극장에서는 아크로바틱 쇼 등 전문 배우들의 다양한 무대 공연이 펼쳐진다.
∎3대가 함께하는 해외여행
코스타 세레나호에 동승한 부산티엔씨 최재형 대표는 크루즈 여행의 최대 장점으로 “한번 출국하면 귀국 때까지 이동할 일이 없는 것”을 꼽았다. 실제로 크루즈선에서는 무거운 여행 가방을 끌고 숙소를 옮기거나 낯선 교통수단을 이용해 새 목적지를 찾을 일이 전혀 없다. 현지 맛집을 검색해 예약하거나 줄을 서는 것도 마찬가지다. 젊은 사람도 만만치 않은 일을 고령의 부모나 어린 자녀를 동반해 해낸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승하선 때 짐이 가득한 캐리어를 들고 낑낑거릴 일조차 없다. 지정 장소에 두기만 하면 객실이나 터미널로 배송이 되기 때문이다.
코스타 세레나호에서는 3대가 함께 온 가족 여행객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었다. 3대가 함께, 또는 따로 즐길 거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앞서 얘기했듯이 선내에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는 온갖 이벤트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선내 생활이 시끌벅적 요란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세레나호에는 조용히 책을 읽을 수 있는 도서관과 예배당도 마련돼 있다. 꼭대기 층인 13층엔 100m 길이의 트랙이 있어 햇볕이 강하지 않은 아침저녁에 가벼운 러닝으로 땀을 흘리기 제격이다. 트랙 가운데 그물망으로 둘러쳐진 코트에서는 농구와 풋살을 할 수 있다. 최신 러닝머신과 운동 기구가 있는 헬스장도 무료로 운영된다. 10층엔 탁구대와 테이블 축구 게임기가 있어 가족이 함께 흥겨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어린 자녀를 위한 키즈클럽도 운영된다.
9층 실내 수영장 옆에서는 온종일 액티비티가 진행된다. 농구공이나 축구공을 활용한 가벼운 게임부터 댄스 강습, 버블쇼 등 세대를 아우르는 이벤트로 심심할 틈을 주지 않는다. 어른들을 위한 카지노와 선상 로또, 유료로 운영되는 스파와 뷰티살롱, 사우나도 크루즈 여행의 재미를 더해주는 포인트다.
∎부산항 모항으로 내달까지 8항차 운영
5월부터 국내 여행사들이 전세 운영(차터)하는 코스타 세레나호는 내달까지 부산항을 모항으로 8차례 운항된다. 23일 출항하는 4항차가 끝나면 이달 26일, 31일, 6월 3일(이상 팬스타 엔터프라이즈) 일본 도시(니가타, 사세보, 하코다테, 아오모리 등)에 기항하는 3항차 운항이 예정돼 있다. 롯데제이티비가 운영하는 마지막 8항차는 6월 24일 부산항을 출발해 사세보, 가고시마, 후쿠오카에 기항한 후 부산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다.
언어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한국 여행사가 전세 운영하는 만큼 한국인 크루가 상주하며 한국어 안내방송이 제공된다. 선내 프로그램의 장소와 시간 등을 안내하는 한국어 선상 신문도 객실마다 배달된다.
운항 중엔 포켓 와이파이나 유심칩으론 인터넷이 되지 않는다. 인터넷을 이용하려면 유료 패키지를 구매해야 한다. 카카오톡이나 인스타그램, 페이스북을 쓸 수 있는 소셜미디어 패키지가 하루에 11달러로 그나마 싼 편이다. 인터넷이나 이메일은 안 되지만 보이스톡 통화는 가능하다.
뷔페와 정찬 레스토랑 이용은 기본 선실료에 포함돼 있지만 스테이크와 피자, 스시 식당은 유료로 운영된다. 이탈리아 선사답게 젤라또 가게도 있다. 면세점 물건 구입비 등 선내에서 사용한 모든 비용은 미리 예치한 현금이나 객실 열쇠(코스타카드)에 등록한 신용카드로 정산된다.
2024-05-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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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매화·벽화에 홀리고 달콤한 열대과일 향에 반하고
겨울이 끝났다는 걸 알리는 비가 한두 차례 내리더니 기온이 꽤 높아졌다. 4월을 눈앞에 둔 세상은 이제 완전히 봄으로 접어드는 모양새다. 새 계절의 향기를 즐기기 위해 봄나들이에 나섰다. 대구 달성군과 달서구에서 고택과 매화, 초가집과 벽화 그리고 수목원과 야생화를 만나고 왔다.
■남평문씨본리세거지
남평문씨본리세거지는 한반도에 목화를 도입해 대량 재배에 성공한 문익점의 후손이 대대로 살던 곳이다. ‘본리’는 행정구역명이며 ‘세거지’는 오랫동안 살아온 곳을 의미한다. 이곳은 2016년 드라마 ‘달의 연인’을 통해 우아한 고택과 주변의 아름다운 목화, 매화가 널리 알려져 특히 유명해졌다.
세거지는 문익점과 관련 있는 곳이어서 입구에는 대형 문익점 좌상이 설치됐다. 좌상을 중심으로 뒤쪽은 고택과 목화밭, 왼쪽은 연못, 오른쪽은 매화밭이다.
주말이면 길이 막힐 정도로 세거지에 많은 사람이 몰리는 이유는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좌상과 매화밭이 함께 들어오는 사진을 찍으면 그야말로 명장면이다. 또 세거지를 배경으로 삼아 목화밭을 찍어도 훌륭한 풍경사진이 된다. 하이라이트는 홍매화와 백매화가 어우러진 매화밭이다. 만개한 매화가 훌륭한 배경이 돼 주기 때문에 어디에서 찍더라도 ‘인생샷’이 완성된다.
충분히 사진을 찍었다면 세거지를 한 바퀴 둘러볼 차례다. 고택 안에는 아무 때나 들어갈 수는 없고 문화해설사에게 미리 문의하면 안내를 들으며 살펴볼 수 있다. 일단 문익점 좌상을 중심으로 오른쪽 매화밭을 지나 세거지 담장과 골목길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본다.
세거지 주변 논밭에는 봄을 알리는 풀과 야생화가 하나둘씩 머리를 내민다. 흙담장으로 둘러싸인 골목길 안에는 아직 떠나기 싫어하는 겨울마저 따스한 햇살을 즐기고 있다. 키가 큰 나무들이 세거지 곳곳에 우뚝 서 즐거워하는 여행객에게 미소를 보인다. 수령 100년을 넘은 보호수인 소나무와 회화나무의 높이에서 세거지의 깊은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매화밭, 목화밭, 세거지를 한 바퀴 둘러본 뒤 연못으로 자리를 옮긴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소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고택과 연못 그리고 두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한 장 찍어도 좋은 그림이 된다. 하지만 연못은 사진보다는 주변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따스한 봄 햇살을 즐기는 게 더 제격이다. 집에서 미리 내려온 드립커피 한 잔을 천천히 마신다. 코를 간질이는 게 커피 향인지 봄의 내음인지 헷갈릴 즈음 춘곤증마저 느껴진다. 확실히 봄은 봄이다.
■마비정 벽화마을
남평문씨본리세거지에서 자동차로 천천히 5~6분 정도 달리면 마비정 벽화마을이 나타난다. 2013년 ‘런닝맨’, 2020년 ‘동네 한 바퀴’에 등장해 유명세를 얻은 마을이다. 담장에 대충 그림만 그린 다른 벽화마을과는 달리 동네 전체가 그림에 파묻혀 벽화와 어우러진 곳이어서 신기한 분위기를 주는 공간이다.
벽화마을 입구에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모티브를 얻은 벽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그려졌다. 마을을 찾은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벽화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바로 위 공터에서는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잔파를 다듬는다. 한 남성 어르신은 무얼 그리 잘못했는지 다른 여성 어르신에게서 잔소리를 듣는다.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동네 사람으로서의 정이 담긴 잔소리다.
초가집의 노란 벽에는 소나무 고목과 하트, 그리고 낡은 창살이 그려졌다. 노란 볏짚 지붕과 색이 바랜 벽화가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초가집 벽과 담장에는 곶감과 항아리가 담겼다. 인근 마비정마을회관 담장 그림에서는 개구쟁이들이 신나게 놀이를 즐긴다. 농촌체험전시장의 나무 담장에는 펌프와 물장수 지게가 그려졌다. 지게를 지는 척하거나 펌프 손잡이를 누르는 척하면서 재미있는 사진을 찍는 장소다. 마을 곳곳의 담장에는 노란 금잔화가 수줍게 머리를 내미는 중이다.
■대구수목원
부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구수목원에 들렀다. 자동차로 남평문씨본리세거지에서 3~4분, 마비정 벽화마을에서 9~10분 걸리는 곳이다. 두 곳과는 다른 분위기에서 봄기운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기대했던 대로 대구수목원에는 봄의 향기가 흘러넘친다. 곳곳에서 파릇한 풀이 피어나고 노란 개나리는 환한 미소로 만개해 화사한 햇살을 만끽한다. 많은 사람이 점퍼를 벗어던지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책하는 중이다.
선인장‧다육식물원에는 분홍색 제라늄과 부겐빌레아가 활짝 피어 선인장으로 가득 찬 실내 공간을 환하게 빛낸다. 산책하러 나온 노부부는 식물원 앞에 활짝 핀 하얀 매화와 노란 개나리를 연이어 바라보며 얼굴에 환한 미소를 담는다. 식물원 앞의 분재원 앞에는 뒤집어놓은 항아리를 배경으로 매화가 하얗게 피었다. 산책객들은 뜻밖의 풍경을 발견하고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파란 잔디가 하나둘씩 머리를 내미는 잔디광장 맞은편 화목원에서는 노란 수선화가 활짝 피었다. 그렇지 않아도 올봄에는 수선화를 구경하러 갈 생각도 했는데 뜻하지 않게 대구에서 만나게 됐다.
대구수목원 중앙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이색적인 시설이 나온다. 바로 바나나, 멜론 등 열대과일이 주렁주렁 매달린 열대과일원이다. 지금 과일이 열렸는지 궁금했는데, 입구 쪽에 새파란 바나나가 줄기째 주렁주렁 달렸다. 카사바 등 여러 식물 사이로 파파야 열매가 보이더니 과일원 끝부분을 돌아서자 만백유, 레몬 등 연노란색 과일 수십 개가 상큼한 향기를 풍긴다.
손을 내밀어 눈앞에 매달린 과일 하나를 따 먹고 싶다는 충동을 누르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신기한 마음과 아쉬운 심정을 함께 남긴 채 대구수목원 산책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돌아간다.
2024-03-21 [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