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성수의 과기세] 전화 탄생 150주년에 부쳐
우리에게 밸렌타인데이로 익숙한 2월 14일은 ‘전화 탄생일’이기도 하다. 전화를 처음 발명한 사람으로는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꼽힌다. 1995년 세계 일류를 지향하는 우리나라 모 기업의 광고는 ‘역사는 1등만을 기억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벨의 사진을 커다랗게 실었다. 1876년 2월 14일 벨은 전화에 대한 특허를 엘리샤 그레이보다 2시간 빨리 제출했고, 그 결과 벨은 전화의 발명자로 후대에 널리 알려졌지만, 그레이는 일반인들이 기억하지 못하는 인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얼마나 진실일까?
전화에 대한 아이디어는 그레이가 벨보다 먼저 떠올렸다. 그레이는 웨스턴 일렉트릭의 공동 창립자로 다중 전신기에 골몰하다가 1874년 전화의 가능성을 알게 되었다. 그레이는 동료 전문가들에게 전화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으나 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전화에 대한 아이디어가 유럽에서 이미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전화는 장난감에 불과해 상업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레이는 전화를 제쳐두고 다시 전신기 개발에 집중했다. 만약을 대비해 1876년 2월 14일 전화에 대한 ‘특허 보호 신청서’(patent caveat)를 제출했다.
그레이가 전문가였다면 벨은 아마추어였다. 미국 보스턴 대학의 농아학교 선생이던 벨은 일과가 끝나면 실험을 즐겼다. 그는 훗날 장인이 되는 가디너 허버드의 후원으로 다중 전신기에 관한 연구를 추진했다. 허버드는 벨이 다중 전신기를 개발하면 딸 메이블과의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했다. 그러던 중 벨은 1875년 6월 2일 전화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일련의 연구를 수행한 후 1876년 2월 14일 특허를 신청했다.
벨이 그레이보다 2시간 빨리 특허를 출원했다고 하지만, 두 사람의 서류가 몇 시에 들어갔는지 확실히 알려주는 증거는 없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특허권을 신청하는 타이밍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에서는 서류를 먼저 접수한 사람이 아니라 발명을 먼저 한 사람에게 특허권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특허제도는 오랫동안 ‘선발명주의’(first to invent rule)에 입각했으며, 2013년에야 ‘선출원주의’(first to file rule)로 변경됐다.
1876년 3월 7일 미국 특허청은 벨의 특허를 승인했다. 그로부터 3일 뒤에는 벨이 실험 중에 컵에 담긴 액체를 쏟아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조수가 옆에 있는 줄로 알고 “미스터 왓슨, 이리 와 보시오. 볼 일이 있소”(Mr. Watson, Come here! I want you.)라고 말했다. 그런데 왓슨은 전화로 연결된 다른 방에 있었고, 메시지를 들은 후 곧바로 벨의 방으로 왔다. 앞의 글귀는 ‘세계 최초의 전화 메시지’로 평가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과 언론에 의해 계속해서 회자됐다.
벨은 이후에도 전화를 개량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 진행해 1877년 1월 30일 두 번째 특허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1877년 7월 9일 벨 전화회사가 설립되어 전화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전화의 상업화가 본격화된 1877년 말에 전화에 대한 공식 특허를 신청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레이는 자신의 설계 내역을 벨이 훔쳐서 사용했다고 주장했으며, 두 진영의 공방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전화를 처음 발명한 사람이 안토니오 무치라는 주장도 있다. 이탈리아 출신의 무치는 1856년부터 1870년까지 여러 종류의 전화기 모델을 실험한 후 1871년 특허 보호 신청을 진행했다. 보호 신청은 3년 동안 유효했기 때문에 1874년 갱신되어야 했지만, 무치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무치가 정식 특허를 내기 위해 웨스턴 유니언 전신과 협의하는 동안에 전화기 모델과 설계도를 잃어버렸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무치는 1879년 벨을 사기 행위로 고소했지만, 10년 뒤에 무치가 세상을 떠나면서 재판은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았다.
그로부터 100년이 넘게 흐른 2002년 미국 하원은 무치의 공로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무치에게 10달러의 신청 비용만 있었더라면, 벨에게 특허권이 부여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다소 과장된 면도 있어 보이는데, 10달러가 그리 큰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상원은 하원의 결의안을 투표에 회부하는 것을 거부했다.
전화 발명과 관련된 사람의 수는 5명을 넘어선다. 사실상 19세기 중엽에는 전화 발명 시도가 본격화하면서, 다수의 사람이 전화에 도전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특정한 시기에 전화를 발명했다기보다는 몇몇 사람들이 전화를 비슷한 시기에 발명했다는 논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른바 ‘동시 발명’ 혹은 ‘복수 발명’의 논리인 셈이다. ‘누가 전화를 최초로 발명했는가?’하는 문제에 쉽게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전화로 세계 최초의 특허를 받고 그것으로 사업을 벌인 공은 여전히 벨의 몫이 된다.
2026-02-10 [18:32]
-
[김대래의 메타경제] 대통령의 '숙제 검사'
얼마 전 어떤 단체에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현재의 부산을 진단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이 주요 주제였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먼저 오늘날 대한민국의 세계적 위상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았다. 우리 역사에서 오늘날처럼 큰 힘을 가졌던 때가 얼마나 있었을까. 몇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대체로 단군 이래 가장 전성기의 위상에 있다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많은 나라들이 경제 성장에 돌입했지만 선진국으로 가는 기차에 탑승할 수 있었던 나라들은 많지 않았다. 중진국 함정이라는 힘든 코스를 이겨내고 거의 마지막 기차에 한국은 탑승하였다. 우리의 성취가 더욱 화려해 보이는 것은 그런 흔치 않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시장·정부의 상호보완 성공 모델
이익 향유와 분배 구조까지 고착한 시장
다시 유연하게 만들려면 정부 개입 필요
이러한 우리의 높은 성장 경험은 물론 오래 전부터 경제학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 왔다. 외국의 학자들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는데 그들이 특히 주목한 것은 정부와 시장의 역할에 관한 것이었다.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한 정부의 역할이 더 중요했는지 아니면 적절한 시장 기능의 작동이 더 성장에 기여하였는지에 대한 논의였다.
정부의 개입을 좌파적 정책으로 보고 무엇이든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관점으로는 경제개발 시대를 평가할 수 없다. 아직 시장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시대였고, 자원의 동원에서부터 공정하고 효율적인 시장을 만드는 것까지 정부에 많이 의존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경제개발 계획으로 대표되는 정부의 역할은 특히 중화학 공업화에서 결정적이었다. 정통 경제학에서는 당시 한국의 경제환경에서 중화학 공업화는 적절한 정책 방향이 아니었다. 특히 정통 경제학자들이 많이 포진했던 경제기획원은 중화학 공업화에 미온적인 입장이었다. 경제학의 대진리 중의 하나로 되어 있는 비교 우위론에 입각해 볼 때 중화학 공업화는 가능성이 낮은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화학 공업화를 밀어붙인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기획원 대신 상공부와 주로 호흡을 맞추었다. 시장이 받쳐주지 못한 부분은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면서 시장 기능을 보완하고 키워나갔다. 중화학 공업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은 지대하였는데, 경제 점검 회의는 마치 초등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는 것과 같았다.
우리 경제의 규모가 좀 커지고 시장이 나름대로 자리를 잡으면서 정부의 개입은 줄어들었다. 특히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정부의 역할보다는 시장에 의한 조율이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 시기는 대체로 지방자치의 부활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정부의 끊임 없는 중재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곳곳에서 정부를 무력화하였다.
산업 정책이 약화되면서 기업들은 수도권으로 몰려들었고, 시장의 이름으로 수도권의 대형 유통점들은 지방 상권을 잠식하였다. 수도권 집중이 불러온 서울 집값 폭등은 정권을 교체할만한 파급력을 가지면서 정부를 압박하였다. 서울 부동산 시장은 시민들의 거처를 중개하는 시장이 아니라 거대한 전국적 투기판이 되어 버렸다.
주식 시장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소득 수준이 선진국의 반열에 올라서고 세계적인 기업들도 상당수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가는 개발도상국 수준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하였다. 주식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적절히 이익이 돌아가지 않는 한국 주식시장의 고질적 병폐가 굳어져 버린 탓이다.
실용을 앞세운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들이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큰 성과는 코스피 지수가 5000을 돌파한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 주식시장을 지켜보아 온 투자자들에는 예상 밖의 빠른 성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인공지능이 불을 당긴 반도체 사이클의 조기 도래라는 시대적 운도 따랐다. 그러나 주식시장의 틀을 바꾸려는 노력이 없었다면 코리안 디스카운트라는 고질을 이렇게 빨리 극복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비정상 상태로 굳어버린 시장을 정상으로 돌려놓는 과정에서 산업 정책도 과거보다는 약하지만 부활하고 있다. 지역균형 발전도 산업 정책의 틀 속에서 논의되고 있다. 국무회의를 비롯한 모든 논의 과정들이 투명하게 중계되고, 오래 전에 보았던 대통령의 숙제 검사가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숙제 검사가 없었다면 해양수산부의 이전도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경제학 교과서는 말한다. 정부와 시장은 보완적인 존재이고, 시장이 실패하는 곳에 정부가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오랫동안 굳어졌던 시장은 이익을 향유하고 분배하는 구조까지도 함께 고착화하였다. 이렇게 굳어진 시장을 다시 유연하고 효율적이게 만들기 위해서는 가끔은 정부가 시장을 이겨야 할 때가 있다.
2026-02-03 [18:24]
-
[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미국의 동맹들은 무임승차한 적 없다
2026년은 붉은 말의 질주를 연상시키는 병오년(丙午年)이다. 지난해 12월 칼럼에서 필자는 새해만큼은 갈등보다 협력이, 불안보다 신뢰가 앞서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 소망이 헛된 기대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국제질서는 다시 한 번 한 지도자의 발언과 선택에 따라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국제질서는 원래 느리게 움직이는 구조다. 규칙과 관행, 동맹과 신뢰는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경험 이후, 세계 각국은 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다자주의적 국제질서를 구축했다. 유엔, 국제법, 집단안보 체제, 동맹과 협력의 규칙은 강대국의 선의가 아니라, 전쟁 비용을 뼈저리게 경험한 인류가 선택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그 질서가 지금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이 불안정성의 중심에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지도자가 있다. 트럼프는 국제질서를 규칙의 체계가 아니라 거래의 결과로 바라본다. 그의 외교는 일관되기보다 즉흥적이고, 축적되기보다 단기적이다. 그 결과 국제질서는 한 국가의 전략이 아니라 한 지도자의 언행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는 줄곧 미국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과도한 비용을 부담해 왔고, 유럽은 ‘무임승차’해 왔다고 주장했다. 방위비 분담 문제를 숫자의 논리로만 환원한 이 주장은 정치적으로는 매력적일지 몰라도,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유럽은 미국의 전쟁을 구경꾼처럼 지켜본 적이 없다.
한국전쟁에서 유럽 국가들은 미국과 함께 참전해 피를 흘렸다. 걸프전에서도, 2001년 9·11 테러 이후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유럽 동맹국들은 병력을 파견했고, 막대한 재건 비용을 분담했다. 이는 미국의 요청에 따른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전후 국제질서를 함께 지탱하겠다는 유럽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경제적 차원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금태환을 담보로 달러 중심의 국제 통화질서를 구축했다. 이른바 브레튼우즈 체제다. 그러나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일방적인 금태환 중지 선언으로 이 체제는 붕괴했다. 국제 통화질서의 근간이 한 국가 대통령의 선언으로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유럽은 미국의 달러 패권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달러 체제의 안정을 선택했다. 미국 재무부의 지난해 11월 기준 자료에 따르면, 유럽 국가들은 전체 미 국채의 약 40%에 해당하는 약 3조 6350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이 8880억 달러로 가장 많고, 벨기에(4870억 달러), 룩셈부르크(4260억 달러), 프랑스(3760억 달러), 독일(1100억 달러)이 그 뒤를 잇는다. 이는 유럽이 안보뿐 아니라 금융 차원에서도 미국 중심 질서를 떠받쳐 왔음을 보여준다.
아시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본 한 나라만 해도 약 1조 2000억 달러의 미 국채를 보유하고 있고, 중국도 6830억 달러(홍콩 보유분 2560억 달러 별도)를 들고 있다. 아시아 국가 전체가 보유한 미 국채 규모는 약 3조 700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글로벌 영향력은 군사력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동맹과 파트너 국가들의 신뢰와 협력 위에서 작동해 왔다.
이 대목에서 오늘의 상황은 더욱 선명해진다. 과거 미국의 일방적 결정에도 불구하고 동맹국들은 질서 유지를 선택했다. 그러나 트럼프식 외교는 그 신뢰를 당연한 전제로 여기지 않는다. 동맹의 기여는 평가절하되고, 협력은 비용 계산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접근이 단기적 압박 효과를 넘어 장기적 신뢰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제질서에서 신뢰는 가장 값싸게 얻을 수 있으면서도, 가장 비싸게 잃게 되는 자산이다.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몇 차례의 발언이면 충분하다.
만약 유럽과 다른 동맹국들이 더 이상 미국을 예측 가능한 파트너로 인식하지 않게 된다면, 미국이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해 온 동맹 협력 네트워크는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그 순간부터 미국의 힘은 마모되기 시작한다.
강대국의 진짜 힘은 혼자 설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함께 서고자 하는 국가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 있다. 적토마처럼 질주만 하는 힘의 정치가 계속된다면, 국제질서의 변화는 더 빨라질 수는 있어도 더 안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국제질서가 한 지도자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흔들리는 시대에, 중견국이 치러야 할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국 역시 안보는 동맹에 기대면서도 통상과 경제에서는 압박에 노출돼 있다. 규칙이 무너지는 순간, 의존은 곧 취약성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안일한 낙관이 아니라, 동맹의 변동성까지 감안한 냉정한 국가 전략이다.
2026-01-27 [18:10]
-
[송하주의 AI 톡] 아틀라스가 공장에서 가정으로 오려면
새해와 함께 막을 올린 CES 2026의 핵심 키워드는 단연 ‘피지컬AI’였으며 그 중심에는 ‘로봇’이 있었다. 특히 현대자동차그룹의 보스톤다이나믹스사가 선보인 휴머노이드 ‘아틀라스’가 보여준 자연스럽고 당당한 걸음걸이와 제조 현장에 특화된 구조와 동작은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현대차는 양산형 아틀라스를 수년 내 자동차 조립 공정에 실제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했고 휴머노이드의 시대가 이미 현실의 문턱에 와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피규어 2.0 로봇처럼 자동차 제조 과정에 실제 투입되어 테스트를 마친 휴머노이드가 이미 존재하나 아틀라스의 강건한 구조와 부드럽고 효율적인 동작은 제조 현장에 더욱 적합한 것으로 기대된다. CES 행사 이후 현대자동차의 주가는 가파르게 상승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작년 하반기 국내에 테슬라의 자율주행 소프트웨어 FSD가 일부 모델을 대상으로 풀리면서, 테슬라 차주들의 국내 사용기가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이는 수년 동안 지지부진한 현대차의 자율주행 기술 개발 상황과 대비되면서, 미래 자동차 경쟁에서 현대차가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한 전망까지 나왔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면, 이번 CES 이후의 반전은 더욱 극적으로 느껴진다.
로봇에 환경 맞추는 수준으론 부족
물리 세계 직관 학습하게 만들어야
피지컬AI 새 화두 월드모델 급부상
피지컬AI의 대표적인 사례로 흔히 휴머노이드와 자율주행이 거론된다. 테슬라는 이 두 가지 기술을 모두 보유한 기업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자동차 회사와는 차원이 다른 미래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이번 CES를 계기로 현대차 역시 기존의 ‘자동차 제조사’ 이미지를 벗고, 피지컬AI 시대를 이끄는 기술 기업으로 재평가받기 시작했다. 단기간에 이뤄진 시장의 눈높이 변화는 그 상징이라 하겠다.
이제 시선을 한 단계 더 넓혀보자. 현대차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가 자동차 공장을 넘어 가정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어떤 기술적 도약이 필요할까. 자동차 제조 현장은 평평한 바닥, 고정된 구조물, 정해진 작업 대상물 등 로봇이 활동하기에 비교적 정형화된 공간이다. 필요하다면 환경 자체를 로봇에 맞게 다시 설계할 수도 있다. 반면 가정은 전혀 다르다. 집집마다 바닥 재질과 내부 구조가 다르다. 계란처럼 깨지기 쉬운 물건부터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 같은 무겁고 위험한 물건까지 다뤄야 한다. 집 안을 뛰어다니는 어린아이의 움직임처럼 예측 불가능한 상황도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문제는 이러한 다양한 환경과 상황을 실제 데이터로 미리 수집해 학습시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경우의 수가 방대할 뿐 아니라, 드물게 발생하지만 치명적인 상황에 대한 데이터는 확보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 바로 ‘월드모델’ 또는 ‘월드파운데이션모델’이다.
대규모 언어모델(LLM)이 텍스트를 기반으로 사고하고, 여기에 이미지·영상·소리를 더해 멀티 모달 모델로 확장되었다면, 월드모델은 한 단계 더 나아가 물리적 공간과 시간, 사물 간 상호작용 그리고 인과관계를 이해하도록 AI를 확장한 것이다. 물체는 중력에 의해 아래로 떨어지고, 물은 열을 가하면 뜨거워지고, 뜨거운 것이 사람 피부에 닿으면 화상을 입힐 수 있다는 ‘물리적 상식’을 인공지능이 이해하고 동작의 결과를 예측하는 것이다. 인간이 당연하게 여기는 물리 세계의 직관을 시뮬레이션할 수 있도록 하는 AI이다. 이 분야에서는 메타의 JEPA, 구글의 Genie3, 그리고 엔비디아의 코스모스가 대표적인 월드모델 또는 월드모델 개발 플랫폼으로 거론된다. 이번 CES에서 엔비디아는 코스모스를 활용한 자율주행 AI ‘알파마요’를 공개하며 피지컬AI 경쟁의 방향성을 분명히 했다. 알파마요는 현재 벤츠의 일부 자동차 모델에 적용돼 테스트를 진행중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자율주행 관련 기술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현대차에도 향후 알파마요가 적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월드모델은 단순히 로봇과 자율주행을 위한 기술에 그치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진정한 일반 인공지능, 즉 AGI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핵심 요소로도 인식되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 이해를 넘어, 물리적 세계에 대한 이해와 추론 능력이 있어야 비로소 세상을 이해하는 지능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몇 년간 챗GPT로 대표되는 LLM 기술이 급격히 발전하며 정점에 다다르자, 인공지능 업계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피지컬AI로 이동하고 있다. LLM이 그랬듯, 피지컬AI와 월드모델 역시 막대한 데이터와 계산 인프라를 요구한다. LLM을 따라가기에도 벅찬 국내의 상황이지만 우리 기업들의 강점인 제조 분야를 중심으로 차별화한 접근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2026-01-20 [18:09]
-
[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범용 인공지능 앞에 선 대기과학의 과제
2025년엔 정치·경제·외교 전반에 걸쳐 굵직한 이슈들이 이어졌지만, 사회 전반에 가장 깊고 넓은 영향을 미친 변화는 챗지피티로 대표되는 인공지능 서비스가 일상의 구석구석까지 스며든 일일 것이다. 인공지능은 특정 산업이나 기술 영역에 머물지 않고, 사고방식과 의사결정 구조 자체를 바꾸며 사회의 작동 방식을 재편하고 있다. 대기과학 역시 연구 설계부터 자료 해석, 예보와 소통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전환점에 서 있다.
이미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이러한 변화를 현실로 만들고 있다. 구글은 그래프캐스트(GraphCast)와 젠캐스트(GenCast)와 같은 인공지능 기반 대기 모델을 통해 수치예보 수준의 정확도를 빠른 계산으로 구현하며 중기 예보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오로라(Aurora) 모델을 중심으로 대기와 해양, 기후 요소를 통합적으로 학습해 태풍 경로와 극한 기상 예측에 활용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IBM은 그래프(GRAF)와 프리스비(Prithvi) 계열 모델을 통해 기후 재분석과 장기 예측, 재난 위험 평가 분야에서 인공지능 역할을 강화하고 있다. 이들 모델은 이미 항공·해운·에너지 산업은 물론 재난 대응과 기후 서비스 전반에 활용되고 있다.
빅테크 기업, 예보 모델 통해 기후 서비스
양질 데이터 안정적 생산·관리 체계 시급
기상 현상 핵심 변수·구조 선별해 접근을
기존의 기상 예측 모델은 관측 자료로부터 산출한 초기조건과 경계조건을 바탕으로 유체역학 방정식을 직접 풀어 대기의 변화를 모의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 과정에는 방대한 계산량이 수반돼 초고성능 슈퍼컴퓨터가 필수적이며, 한 번의 예보를 생산하는 데에도 막대한 시간과 자원이 투입된다. 더욱이 예측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물리 과정을 세분화하고 모델의 복잡도를 높일수록, 그에 비례해 개발과 운영에 필요한 시간과 노력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반면 인공지능 기반 모델은 과거의 방대한 관측·재분석 자료에서 패턴을 학습해 상대적으로 적은 계산 자원으로도 경쟁력 있는, 때로는 더 나은 예측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데이터가 축적될수록 성능이 지속적으로 향상된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인공지능 기반 예측 모델이 빠른 속도로 기상·기후 예측 분야 전반을 장악해 나갈 가능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대기과학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고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가 되고 있다. 인공지능 기반 모델이 실제 예측 현장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양질의 데이터를 안정적으로 생산·관리하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인공지능 모델의 성능은 결국 어떤 데이터를 얼마나 정교하게 학습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데이터 생산 기술의 수준이 곧 예측 역량을 좌우한다. 특히 인간의 일상과 직접 맞닿아 있는 시공간 규모에서 발생하는 대기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자료는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기후 재난의 빈도와 피해가 증가하고 탄소중립이라는 다음 사회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도시 스케일의 기상 정보가 체계적으로 생산되고 장기적으로 관리돼야 한다. 이를 위해 인공위성과 지상 관측을 포함한 관측 기술의 고도화는 물론, 초고해상도 도심 기상 모델의 활용과 지속적인 고도화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범용적인 인공지능 예보 모델의 실효성과 효율성에 대해서도 보다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가용한 모든 데이터를 동원해 모든 기상 현상을 한 모델로 예측하는 방식이 과연 가장 효율적이며 최선의 선택인지 재검토해야 할 시점이다. 폭우로 인한 홍수를 예보하는 상황과 강풍에 따른 피해를 예측하는 일은 중요하게 다뤄야 할 물리 과정과 핵심 정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인공지능 모델이 각 상황에 맞춰 어떤 정보를 선택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하게 검증되지 않았다. 오히려 극한 기상에 대해서는 범용 모델보다 특정 현상에 최적화된 특성화 인공지능 모델을 구축하는 것이 더 현명한 대안일 수 있다. 예측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는 대신, 대상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핵심 변수와 구조를 선별해 모델을 설계하는 접근이 효율성과 예측성을 동시에 높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이를 위해 대기과학계는 기초 이론 연구를 다시 중심에 놓고, 물리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인공지능 기술과의 전략적 결합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범용적인 인공지능 기반 예측 모델의 등장은 대기과학계에 적지 않은 혼란과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거대한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전환기의 혼란 속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해 보인다. 시대의 유행과 기술의 속도에 휩쓸리기보다 학문의 본질을 다시 붙잡으려는 보수적인 성찰과, 동시에 새로운 프레임의 등장을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열린 태도를 함께 갖추는 일이다. 그 균형 속에서만 대기과학은 인공지능 시대에도 사회에 필요한 과학으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2026-01-13 [18:07]
-
[백진규의 법의 창] 2026년! 해양수도의 과제
2000년 12월 18일, ‘해양수도 부산’이 공식적으로 선포된 지 25년이 지났다. 당시 이 선언은 수도권 일극 구조를 넘어, 세계적 항만과 해양산업 역량을 갖춘 부산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해양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국가의 전략적 선택이었다. 그러나 현재, 해양수도 부산은 제도적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 비전은 제시되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법과 사법 체계는 충분히 구축되지 못했다.
2025년은 이러한 한계를 넘는 중요한 분기점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크다. ‘부산 해양수도 이전기관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해양수도 이전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해양수도는 더 이상 선언이나 계획의 영역이 아니라 법률로 규정된 국가적 책무가 되었다. 이는 해양수도가 정책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행되어야 할 제도적 과제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점에서 2025년을 ‘부산 해양수도 원년’으로 평가할 수 있다.
법률의 제정이 곧바로 제도의 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법은 방향을 제시할 뿐이며, 그 방향이 현실에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행정(재정)적 설계와 사법적 뒷받침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해양수도는 행정과 사법이 동시에 기능할 때 비로소 실체를 갖는다. 행정 측면에서 보면,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은 큰 진전이다. 그러나 물리적 이전만으로 해양수도의 중심 기능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해양 정책의 기획과 예산 조정, 국제 해양 협상, 해양 안전과 환경, 해운·조선·물류 산업 정책을 종합적으로 조정·집행할 수 있는 실질적 권한과 조직 역량이 함께 이전·강화되어야 한다. 해양수산부가 국가 해양 전략의 조정·집행 기관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면, 해양수도의 실효성 역시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해양수도의 완성에 또 다른 시급한 과제는 사법 영역에 있다. 해양수도가 제도적으로 완결되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마지막 축은 해사법원이다. 현재 해사법원 설치를 위한 법안은 국회에 계류 중이다. 국회는 늦어도 2026년 상반기에는 입법적 결단을 해야 한다. 이는 제도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해양국가로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기반이다.
해사 분쟁은 일반 민사·상사 사건과 성격을 달리한다. 선박 충돌과 해양 사고, 해상 오염, 용선·운송계약 분쟁, 해상보험과 선박금융 등 각종 해양사건에는 국제조약과 국제관행, 항해·기관·보험·금융에 관한 전문적 판단이 복합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사건을 전담 조직과 전문 인력 없이 일반 법원 체계에서 처리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상당수 해사 분쟁을 해외 법원이나 국제 중재기관에 의존해 왔다. 이는 소송비용 부담을 넘어, 해양 법질서 형성과 해사 판례 축적 과정에서 국내의 역할이 제한되는 구조로 이어져 왔다. 부산에 해사법원을 설치하는 것은 지역 균형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주요 해양사건이 발생하고, 해운·조선·물류 산업과 해양 행정·연구 시설이 집적된 도시에서 해사사법이 작동하도록 하는 것은 사법의 전문성과 접근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합리적 선택이다. 특히 본원 기능과 항소심까지 연계된 체계를 부산에 구축하는 것은 해양수도의 기능적 완결성을 높이는 데 필수적이다.
2026년 해양수도의 과제는 이제 보다 분명해졌다. 첫째, 해양수도 이전 특별법의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한 관련 법령의 정비와 단계별 이행 로드맵 수립이 필요하다. 이전 대상 기관의 기능 범위와 권한 이전 수준을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해양수산부 기능의 실질적 강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 해양 전략을 총괄·조정할 수 있는 정책·예산·국제 협상 권한을 부산에 집적시키는 구조적 개편이 요구된다. 셋째, 해사법원 설치를 중심으로 한 해사사법 생태계 구축이 필요하다. 전문 법관 양성, 해사 전문 변호사·감정인·중재인 풀(pool) 조성, 국제 해사중재와의 연계까지 포괄하는 종합적 전략이 마련되어야 한다. 넷째, 해양산업 클러스터와 해양금융 기능을 결합한 고부가가치 해양경제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선박금융, 해상보험, 해양파생상품 등 금융 기능이 해사사법과 연계될 때 부산은 단순한 항만 도시를 넘어 국제 해양 허브로 도약할 수 있다. 다섯째, 북극항로와 녹색항로, 해양에너지 전환에 대응하는 법·제도적 기반을 선제적으로 구축해야 한다. 이는 산업 전략이자, 미래 세대를 위한 법적 준비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과제를 종합적으로 조율할 범정부 차원의 상설 기구, 예컨대 ‘국가해양위원회’ 설치도 필요하다. 해양수도는 국가 전략이기 때문이다.
해양수도 부산의 완성을 위해, 2025년이 법적으로 방향을 확정한 해라면, 2026년은 그 방향을 흔들림 없이 이행해야 할 시간이다. ‘일이관지’(一以貫之)의 태도로 처음 세운 국가적 결단을 끝까지 관철하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이 부산을 통해 해양 강국으로 완성될 수 있는 필요조건이다.
2026-01-06 [18:00]
-
[홍순연의 도시 공감] 기획자 전성시대를 꿈꾸다
얼마 전 대전시 문화유산과 관계자들이 옛 대전 부청사 활용 방안을 찾고자 부산에 찾아온 적이 있다. 역사문화자원인 대전부청사는 1937년 근대 모더니즘 건축 양식이 집약된 건물로, 해방 이후 미 군정청과 대전시 청사로 활용되었던 건축물이다. 대전시는 이 건축물과 유사한 활용 사례를 보기 위해 부산을 방문하였다. 처음에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활용 이야기를 전반적으로 설명하는 자리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도모헌과 밀락 더 마켓, 포디움 등을 답사하면서 물리적 공간보다는 지역적 특성을 반영한 콘텐츠와 지역에서 활동력을 가진 팀들의 발굴, 활동 가능한 기획자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성토하는 자리가 되었다. 그러면서 의미 있는 건축물을 이제 공공에서 운영하는 방식보다 민간 위탁 방식 등 지역 생태계 속에서 운영자를 찾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결국 답사 내내 관리 운영에 대한 고민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지역 청년 크리에이터들의 활동 무대로 역사적 공간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건축물이라면 더욱이 가치를 높이는 방법 중 하나가 기획자와 역사 문화자원을 연결하는 방법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닿았다.
좋은 기획 기반한 도시 사업 활력
하지만 계약 해지 불안감에 한계
프로젝트 발굴단 운영해 지원하길
최근 들어 정부부처 사업에도 기획자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과거 활동가와 다른 개념인 기획자는 프로젝트나 활동의 전반적인 큰 그림을 그리고, 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 계획, 자원 배분 등을 수립하며 효율성, 장기적인 영향, 위험 관리, 분석 및 구조화에 중점을 둔다. 부산에서도 동구 이바구 캠프를 중심으로 청년기획자들이 모여 있다. 청년마을 사업 이후에 공공 플랜을 중심으로 대학생들과 창업자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캠프를 운영하고 있다. 오히려 지역 대학 간의 연계프로그램을 통해 공간, 브랜딩이라는 키워드로 건축전공 학생들과 함께 활동력을 높이고 있다. 영도에는 라보드 팀이 있다. 마을관리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 봉산마을에 거점시설을 운영함으로써 마을주민들과 연결된 사업들을 유치하는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이제는 빈집을 활용하는 방안을 통해 사업화 모델 구축, 지역프로그램 운영 참여 등 다양한 활동력을 보이고 있다. 상권에서도 기획자가 있는 골목상권들은 언제나 활력이 넘친다. 남천바다로, 문문상회, 사상 가로공원 등 신구의 조합으로 고유한 지역 골목의 모습과 좋은 상인들이 들어올 수 있는 방법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곳엔 각자의 사업체와 거점공간 중심으로 활동력을 높이고 있는 일종의 필드형 기획자들이 활동하고 있다. 아마도 지역을 들여다보면 곳곳에서 활동력을 가진 기획자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외 각 지역별 청년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팀들, 청년 로컬크리에이터까지 합치면 부산에는 기획자로 활동할 수 있는 잠재 인력은 더 많이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기획자들을 만나보면 한결같이 많은 고민을 갖고 있다. 우선 공공사업, 민간사업을 하는 팀들은 모두 계약 해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내가 운영하는데 내 것이 아닌 느낌이라고 한다. 공공사업은 계약 종료 후 재계약을 위한 공모에 다시 응모해야 하고 계약 종료 후 더 이상의 활동력을 보장받을 수 없으니 항상 이렇게 열심히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고 한다. 지속적인 활동력을 보장할 수 없는 프로젝트의 한계에 대한 고민인 셈이다. 그래서 기획자들이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운 듯하다.
그러면 지역마다 기획자들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우선 기획자 발굴과 참여를 유도하는 프로젝트 발굴단을 만들었으면 한다. 각 지역마다 이루어지고 있는 축제, 문화, 프로그램, 굿즈 등 분야별 프로젝트를 집약화하여 지역 기획자들에게 소개하는 오픈 플랫폼을 운영하였으면 한다. 그리고 기획자들이 기획 프로세스에서부터 운영에 이르는 모든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했으면 한다. 또한 구군 단위의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없을까? 소위 지역 스펙 쌓기 프로젝트를 만드는 것도 방법이다. 지역, 장소별 특성을 반영한 프로젝트로 기획에서 실행까지 활동력을 높이는 방법을 찾았으면 한다. 이를 기반으로 지역 공간을 거점으로 활동력을 확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락방, 유니크 베뉴, 청년센터, 도시재생 거점공간까지 이미 지역에는 공간이 확보되었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획자들의 아이디어와 기획력을 바탕으로 지역의 장소 가치를 높이고 차별화된 지역 고유의 브랜드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온오프라인 연계 마케팅 등 지역 외부의 수요를 지역 내부로 이끄는 역할도 기대해 본다.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와 거점, 프로젝트의 중심에 기획자들의 역할이 존재했으면 한다. 2026년에는 부산형 기획자들의 활동이 지역마다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2025-12-30 [18:13]
-
[송성수의 과기세] 100년 만에 다시 만나는 슈뢰딩거
100년 전의 과학에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때는 1925년 12월 하순의 어느 날이었다.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을 수학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었다. 슈뢰딩거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여친과 함께 스위스 아로사의 별장으로 휴가를 떠났다. 거기서 그는 자신의 이름이 붙은 방정식의 골격을 세웠다. 약간의 보완을 거친 후 1926년 1월에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발표했다. 그 방정식은 양자역학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물리학 교과서에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물리학에서 아름다운 방정식 4개를 뽑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F=ma와 E=mc2가 생각날 것이다. F=ma는 뉴턴의 운동방정식이고, E=mc2는 아인슈타인이 만든 질량-에너지 등가원리이다. 나머지 2개로는 맥스웰 방정식과 슈뢰딩거 방정식이 꼽힌다. 맥스웰 방정식은 전자기학을 집대성한 것이고, 슈뢰딩거 방정식은 양자역학을 파동함수로 묘사한 식이다. 맥스웰 방정식과 슈뢰딩거 방정식은 상당히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많은 물리학자들은 두 방정식에서 자연현상의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한다.
슈뢰딩거와는 별도로 1925년 7월에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을 이용하여 전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1926년 5월에는 슈뢰딩거가 자신의 파동역학과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이 실질적으로 동등하다는 점을 증명했다.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행렬역학보다는 파동역학을 선호했다. 행렬보다 미분방정식이 간단하고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역학은 ‘양자역학’이란 이름으로 결합되었는데, 그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으로는 막스 보른이 꼽힌다.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슈뢰딩거 방정식을 풀어 얻게 되는 파동함수의 물리적 의미에 관한 것이었다. 1926년 12월에 보른이 그럴듯한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파동함수가 고유한 상태함수이긴 하지만 물리적 의미를 가진 것은 파동함수의 제곱 값이고 그 값이 단지 확률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의 파동은 물질을 실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확률의 파동’이라는 것이었다.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도 보른의 주장에 동조했고, 양자역학에 대한 확률적 해석은 ‘코펜하겐 해석’으로 불렸다. 코펜하겐은 보어의 이론물리학연구소가 있던 곳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슈뢰딩거가 코펜하겐 해석에 매우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1935년에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불리는 사고 실험을 제안했다. 그 실험은 1시간 뒤에 방사성 원자가 붕괴하면 상자 안의 고양이가 죽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생존하는 상황에 주목한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고양이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고양이가 살아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어있는 상태가 된다. 슈뢰딩거는 이것이 말이 되지 않는 소리라고 일갈하며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와 유사하게 아인슈타인은 “당신이 달을 보기 전에는 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라는 말을 남겼다.
만년의 슈뢰딩거는 물리학보다 생물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3년에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생물학에 대한 대중 강연을 준비했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할 생각이었지만 준비 도중에 강연 내용이 계속 불어났다. 결국 슈뢰딩거는 세 번에 걸쳐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실시했으며, 이를 보완하여 1944년에 책으로 출판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물리학자가 바라본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다. 슈뢰딩거에게 생명현상을 관장하는 것은 유전자였으며, 유전자의 본성은 다름 아닌 정보였다. 이제 생물학자들의 임무는 유전자에 저장된 정보를 해독하는 것이 되었다. 슈뢰딩거는 전신의 모스 부호를 예로 들면서 조그마한 유전자에 수많은 정보가 담길 수 있다고 설파했다.
분자생물학의 새로운 장을 개척했던 과학자들은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많은 영감을 얻었다. 윌킨스는 이 책을 접한 후 자신의 전공을 핵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바꾸었고, 왓슨도 대학 3학년 때 책을 읽은 뒤에 유전자를 연구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처럼 슈뢰딩거는 단순한 물리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물리학에 뿌리를 두면서도 철학과 생물학으로 나아갔다. 현대물리학의 최전선을 달리는 가운데 양자역학의 철학적 의미를 캐묻고 생명현상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경향은 슈뢰딩거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현대물리학의 창시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그들은 나치가 집권하기 전까지 역동적인 학문공동체를 이루며 치열하게 탐구하고 토론했다. 학문이 세분화되어 있는 오늘날에도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와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 속에서 새롭고 중요한 것들이 생겨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2025-12-23 [17:54]
-
[김대래의 메타경제] 혐오의 경제학
얼마 전 친구와 함께 늦가을 단풍을 볼 겸 금정산에 올랐다. 제2망루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일흔은 넘어 보이는 신사분이 다가와 갑자기 퀴즈를 내겠다고 하였다. 얼떨결에 받아 든 퀴즈는 두 개였다. 하나는 금정산성의 축조 연대를 맞추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나라의 독립문이 어느 나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퀴즈의 목적을 알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두 문제를 근사하게나마 바로 맞추었다. 그래서인지 더 이상 퀴즈를 내지 않고 젊은 커플이 앉아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관계가 없으며, 구한말 우리나라가 독립문을 세웠던 것은 중국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흐르던 혐오
다시 한국에서 중국으로 흘러가
수평적 경쟁관계 외면 어리석음
그런데 기분이 묘했다. 퀴즈를 내고 설명을 하는 태도에서 퀴즈에 무엇을 담고 싶었는가 하는 의도가 깊이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독립문 건립은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라는 말로 시작한 설명은 한반도와 필리핀을 놓고 일본과 미국이 구두로 양해하였던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있었다는 어떤 근거도 없다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퀴즈와는 관계가 없는 말을 하던 그가 황급히 자리를 뜨는 모습에서 의도는 더욱 짙게 확인되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혐오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여러 차례 보도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일제의 만행을 많이 듣고 자랐을 고령의 신사분으로부터 일본에는 우호적이고 중국에는 적대적인 태도를 접하는 것은 좀 의외였다. 물론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고 또 동북아 3국 간의 혐오는, 정도와 형태의 차이는 있지만 3국 모두 적지 않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3국 간 혐오의 역사에서 단연 선두는 일본의 한국에 대한 혐오 즉 혐한(嫌韓)이었다. 대체로 혐오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르는 경향이 짙은 것이어서 좀 더 발달된 나라들이 뒤처진 나라에 보내는 무시가 핵심을 이룬다.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겪었던 한국에 대한 일본의 혐오는 그래서 역사적 뿌리가 깊고 강력하였다.
일본에서 혐한은 한 때 산업으로 불릴 만큼 성행하였다. 혐한 서적들은 서점의 한 코너를 차지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가 아주 최근에 들어와서야 많이 퇴색되었다. 진실과는 상관 없이 한국은 나쁘고 곧 무너질 것이라는 희망을 담은 선동이 더 이상 먹히지 않을 만큼 한국의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역전의 마무리는 1인당 소득에서 일본이 한국에 뒤지게 된 것이었고, 이로써 혐한이 설 수 있는 핵심 토대는 무너져 내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혐오는 사실을 부정하고 보고 싶은 것만 봄으로써 적절한 대응을 방해한다는 점이다. 한국에 대한 혐오를 통해 일시적으로는 시원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 일본이 대응책을 준비하는 데는 그 같은 혐오가 일절 기여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일고 있는 대중 혐오도 근본에서는 다를 바 없다. 중국의 발전이 우리보다 낮고, 중국이 곧 무너질 것이라는 주장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부분적인 사실을 부풀려 전체적인 것처럼 오해하게 하는 것도 닮았다. 게다가 미디어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더욱 자극적인 전달 방식으로 구독자를 끌어모으는 새로운 상업적 방식이 결합되면서 더욱 빈번하게 콘텐츠들이 생산되고 증폭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세계 최대의 공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중국에서 생산된 원재료 없이는 세계의 공장들이 가동되지 못하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인공지능과 같은 첨단 부문에서는 미국과 선두를 놓고 다투는 유일한 나라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한 때 우리나라가 앞서가던 많은 분야에서 중국이 격차를 줄이고 일부는 앞서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오늘날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의 경제는 이제까지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매우 수평적 경쟁 관계에 있다. 일본과 중국이 외교적인 문제로 서로의 약점을 노린 경제적 제재를 한 방씩 주고 받고 있지만, 어느 쪽도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는 것은 경제가 너무 깊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역으로 3국 간에 형성된 경쟁 관계가 그만큼 심각하고 또 그러한 경쟁 때문에 불필요한 혐오와 증오가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한다. 3국이 함께 이러한 혐오를 줄여나가야 하겠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속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미워하고 외면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혐오가 아닌 사실을 직시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실행하는 데 에너지를 써야 한다. 좀 더 냉철해져야 한다.
2025-12-16 [18:09]
-
[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세밑에 불확실성의 해를 돌아보다
2025년은 ‘불확실성’이 더 이상 수사가 아니라 일상의 질서를 규정하는 새로운 실체적 환경이 된 해였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발 통상 규범 재편, 에너지 공급망의 요동, 기후변화 대응의 후퇴, 세계 각지의 전쟁과 세계 각국의 극단주의 세력 부상이 불러온 지정학적 긴장, 그리고 아시아·아프리카·유럽에서 터져 나온 세대 갈등이 겹치며 국제 질서에서 ‘예측가능성’의 가치는 마치 박물관에서 찾아봐야 할 정도로 희귀한 것이 되었다.
학자들이 늘 강조해 온 ‘미국은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국가’라는 명제는 1월 20일 트럼프 대통령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설득력을 잃었다. 한 국가 지도자의 성향이 세계 질서의 규칙과 속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현실로 확인했다.
트럼프의 약탈적 통상의 충격부터
거리로 쏟아진 청년층의 분노까지
새해엔 균형·가치 지킬 수 있기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수십 년간 국제무역을 지탱해 온 WTO 중심의 다자주의는 사실상 기능을 상실했고, 강대국의 정치적 의지가 규칙을 대체하는 새로운 질서가 자리를 잡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 관세를 외교·안보·산업정책의 도구로 삼아 국가 간 교역을 ‘상호이익의 장’이 아닌 ‘양자 흥정의 장’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무역 질서는 보편적 규범을 잃고 국가 간 체급과 영향력이 규칙을 결정하는 일방적 구조로 재편되었다. 이 흐름 속에서 한국과 미국 양국 정부가 공식 서명하고 의회가 비준한 한미 FTA마저 무력화되었다. 이는 단순한 정책 조정이 아니라 전후 질서를 떠받쳐 온 다자주의의 후퇴이자 글로벌 공공재의 해체라는 의미를 지닌다.
2025년 국제 질서를 규정한 또 하나의 축은 에너지 안보였다.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와 중동 불안정이 겹치며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변동성이 심화되었고, 주요 수송 경로가 지정학적 위험에 노출되자 각국은 더 높은 비용을 감수하며 안정적 조달 확보 경쟁에 나섰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은 기후 거버넌스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2025년 1월,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협정에서 미국이 재탈퇴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탄소감축 의제와 기후협력 메커니즘에도 깊은 균열이 생겼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해사기구(IMO)의 선박 탄소세 도입을 ‘녹색 사기’라 비난하며 반대했고, 탄소세에 찬성하는 국가에 대해 관세 부과, 항만 입항 금지, 비자 제한, 정부 계약 금지, 항만 수수료 인상 등 다양한 제재 가능성을 경고했다. 미국의 이 같은 압력으로 인해 IMO의 선박 탄소세 도입은 1년 연기되었다. 기후변화를 부정하고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재정 지원을 축소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속에서 전임 바이든 행정부의 IRA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결국 전임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을 믿고 미국에 투자한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유럽의 기업들만 큰 손실을 떠안게 됐다.
2025년의 불확실성은 국제 정세를 넘어 사회 내부의 균열로 확산되었다. 유럽에서는 청년층이 주거비·교육비·불안정 노동에 짓눌린 채 ‘기회 없는 성장’을 호소했다. 고령사회 진입이 본격화하면서 청년층의 노년층 연금 부담이 급증했고, 대부분 선진국의 확장적 재정 정책으로 청년 세대에 떠넘겨질 국가 부채 역시 증가하였다. 청년층은 결국 ‘부모 세대를 떠받치지만 자신은 누구에게도 받쳐지지 못하는 세대’라고 자기 세대를 규정하면서 좌절감에 휩싸여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개발도상국의 상황은 더 격렬했다. 고물가·실업·부패 속에서 청년층은 미래를 빼앗겼다는 절망감으로 거리로 나섰고, 일부 개발도상국에서는 대규모 청년 시위가 대통령 사임과 군부 개입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또 다른 일부 국가에서는 청년 항의가 조기 총선과 정권 교체로까지 이어졌다. 청년층의 절망이 한 국가의 정치 체제를 직접 흔든 한 해였다.
2025년은 다사다난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해였다. 국제 질서는 흔들렸고, 경제와 사회는 새로운 균형을 찾지 못한 채 요동쳤다. 그러나 이 같은 혼란이 남긴 교훈은 분명했다. 불확실성은 피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관리하고 준비해야 할 새로운 시대적 환경이라는 것이다.
2026년의 문턱에서 우리는 다시 길을 묻는다. 더 신중한 판단과 깊은 성찰, 그리고 함께 나아갈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지금,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은 단순한 시간의 교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를 다시 묻는 질문의 장이 된다. 바라건대 2026년은 갈등보다 협력이, 불안보다 신뢰가 더 앞서는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불확실성이 일상화한 격변의 시대 속에서도 우리가 지향하는 균형과 가치가 흔들리지 않고, 모두의 희망을 모아 새해에도 굳건히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2025-12-09 [18:02]
-
[송하주의 AI 톡] 피지컬 AI 시대, 로봇은 왜 인간을 닮아가나
1월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개최된 CES행사. 엔비디아의 CEO 젠슨 황은 인공지능의 미래를 말하며 새로운 키워드를 꺼냈다. 바로 ‘피지컬 AI(Physical AI)’다. 챗GPT로 대표되는 생성형 AI가 텍스트와 그림, 영상을 ‘만드는’ 기술이라면, 피지컬 AI는 세상을 직접 보고, 듣고, 움직이는 AI다. 한마디로, AI가 컴퓨터에서 튀어나와 현실 세계에 발을 딛기 시작한 것이다. 카메라로 주변을 인식하고, 팔과 다리로 움직이고, 손가락 끝으로 섬세한 조작까지 수행하는 AI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로봇, 특히 인간을 닯은 로봇 휴머노이드가 바로 피지컬 AI의 대표주자다.
현재 AI의 선두 주자는 명확하다. 미국과 중국이다. 천문학적인 양의 데이터를 확보하고, AI 모델 개발 능력 그리고 컴퓨팅 인프라를 갖춘 두 국가가 생성형 AI 경쟁을 주도하고 있다. 여기에 다른 나라가 먼발치라도 따라가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다.
반면 피지컬 AI는 다르다. 이 영역에서는 정밀 제조, 센서, 모터 제어 같은 하드웨어와 제조 기술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이 분야는 우리나라가 강점을 가진 영역이다. 근로자 1인당 사용되는 로봇의 수를 나타내는 로봇밀도 측면에서 한국은 전 세계 1위다. 인구 대비 로봇 활용률이 가장 높다는 것이며 새로운 로봇 기술을 시험하고 실제 산업에 투입하기 가장 좋은 실험장이 한국이라는 의미다. 생성형 AI 경쟁에서 뒤처졌다며 우려하는 사이, 다른 문이 조용히 열리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부울경 지역은 막강한 제조 인프라와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어 피지컬 AI의 개발, 하드웨어 제조, 현장 실증이 모두 가능한 최적의 무대다. 피지컬 AI 기반 제조업 혁신을 통해 부울경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이쯤 해서 피지컬 AI와 관련해 자주 언급되는 의문 하나를 살펴 보고 지나갈 때가 됐다.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개발에 총력을 쏟다시피 하고 있는 휴머노이드 로봇과 관련한 질문이다. 왜 인류는 굳이 사람처럼 생긴 이족 보행의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려는 것일까. 이는 특정 작업에 특화한 비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생산성 향상 등을 추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질문과도 상통한다.
실제로 산업용으로 개발된 로봇은 특화된 로봇의 형태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예이다. 공사장의 포크레인을 닮은 용접용 로봇은 자동차 생산 라인의 고정된 위치에서 용접만 잘하면 되고, 트럭과 비슷한 모양인 이송용 로봇은 물류센터에서 물건을 빠르고 정확하게 옮기면 된다. 그런데도 테슬라, 피규어AI, 보스톤 다이나믹스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휴머노이드 로봇을 선택한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세상이 ‘인간 기준’으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 손잡이 높이, 계단의 폭, 의자 높이, 공구의 크기, 심지어 냉장고 문을 여는 방식까지. 모든 것이 인간의 팔 길이와 손 모양, 걸음걸이, 시야 높이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다. 따라서 인간처럼 걷고, 잡고, 돌리고, 앉고, 기울일 수 있는 휴머노이드 로봇은 사람이 일하는 거의 모든 환경에 그대로 투입될 수 있다. 로봇 개발 기업의 입장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특화 로봇보다 표준화한 휴머노이드 로봇을 사용하여 여러 용도로 사용하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며 시장성이 높을 수 있다. 결국 휴머노이드 로봇 경쟁은 ‘인간이 만든 세상을 가장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를 둘러싼 싸움이기도 하다.
AI는 지난 10년간 인간의 정신 노동 영역을 빠르게 따라잡고 있다. 그리고 이제 피지컬 AI는 육체 노동의 영역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생성형 AI가 인간의 ‘두뇌’와 경쟁했다면, 피지컬 AI는 ‘몸’과도 경쟁하기 시작한 셈이다. 과연 이 흐름은 어디까지 갈까? 비교적 단순한 육체적 노동의 대체에서 시작하여 매우 복잡한 작업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AI가 결국엔 모든 형태의 인간 노동을 대신할 것이다.
SF 소설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파운데이션’에는 솔라리아라는 행성이 등장한다. 광대한 개인 공간에서 사람들이 서로 얼굴조차 거의 마주하지 않는 사회. 출생부터 죽음까지 일상 모든 일을 로봇이 처리하는 세계다. 만약 피지컬 AI의 미래가 이 방향이라면, 우리는 편안함과 고립, 효율과 상실 사이에서 새로운 질문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로봇이 일을 대신 해 주는 시대,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고 로봇에게 맡겨도 되는 일은 어디까지일까. 피지컬 AI는 이제 막 태동했다. 그러나 이 기술이 가져올 변화는 우리의 직업, 도시, 가족 구조, 인간의 의미까지 바꿀 수 있다. 그 변화의 파도가 다가오는 지금, 우리는 단순히 기술을 따라갈 것이 아니라 그 기술이 만들어낼 사회의 형태를 성찰할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2025-12-02 [18:05]
-
[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초겨울 북극 해빙: 항로 개발 과제와 전략
10월에서 11월로 넘어가면서 북극 해빙은 한층 깊어지는 한겨울 조건에 따라 빠르게 변화한다. 10월에는 여름철 최소 해빙 면적에서 회복되는 초기 단계로, 북극해 곳곳에 여전히 얇은 신생 해빙이 넓게 분포하고 상당한 지역이 부분적으로 얼어 있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11월에 접어들면 지속적인 한랭화와 일사량 감소의 영향으로 해빙의 확장과 두꺼워지는 과정이 가속화된다.
북극에서 해가 지기 시작하면 태양 복사가 사라지면서 해빙 성장은 눈에 띄게 빨라진다. 일사량이 없어진 상태에서는 해양-대기 시스템이 복사 냉각에 지배되며, 바다는 지속적으로 장파복사를 우주로 방출해 표층 온도를 급격히 낮춘다. 표층수가 어는점에 도달하면 이후의 열 손실은 곧바로 해빙 형성으로 이어진다. 차고 안정한 경계층 대기는 전도에 의한 열 손실을 강화하여 새로 형성된 얼음이 빠르게 두꺼워지도록 돕는다. 이 시기에는 해빙이 하루에 몇 센티미터씩 두꺼워질 뿐 아니라, 해빙 면적도 빠르게 증가하여 2주 동안 약 180만㎢, 즉 대한민국 전체 면적의 약 18배에 해당하는 광대한 해역이 새롭게 얼음으로 둘러싸일 수 있다.
그러나 초겨울에 증가하는 해빙의 양은 해마다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변동성은 이전 해빙 융해철 동안 북극해 상층에 저장되는 태양 에너지를 조절하는 해빙-알베도 양의 피드백 세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바다가 더 많은 열을 보유한 경우, 해빙이 형성되기 위해서는 이 초과 열이 먼저 방출되어야 하므로 해빙 성장의 시작과 속도가 지연된다. 하지만 이 저장된 열이 얼마나 빠르게 방출되는지는 구름양, 폭풍 활동, 바람, 해양 혼합 등 다양한 대기 및 해양 조건에 크게 좌우된다. 그 결과, 초겨울 해빙 성장은 단순한 계절적 냉각의 결과만이 아니라, 해양-해빙 시스템에 작용하는 여러 기상·기후 과정의 통합적 영향을 반영하게 된다.
변화무쌍한 초겨울의 해빙 변화를 보면서 해양수산부가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추진할 북극항로 개척 사업 추진의 도전적인 면모를 떠올리게 된다. 북극항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새로운 해상 운송 축으로서 막대한 경제적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여러 기술적·환경적 도전 과제가 공존하는 복합적 영역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북극 해빙의 변화이다. 해빙은 계절과 기후 요인에 따라 급격하게 변동하며, 이러한 변동성이 항로의 안전성과 운항 가능성을 좌우하기 때문에, 북극항로 개발의 모든 논의는 결국 해빙 변화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예측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해빙의 두께와 면적을 시간에 따라 정확하게 예보하는 일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북극항로 운항을 위한 해빙 예보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포함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확률적으로 정의된 한계를 명확히 인지한 상태에서 예보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예보의 목표는 실제로 배를 운항하는 다양한 상황에서 결정된다. 우선 해빙의 존재 여부와 두께에 따라 선박의 안정성이 달라지기 때문에, 예보가 도달해야 하는 정확도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해빙을 효율적으로 회피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연료 절감 효과와 경제적 이익도 고려되어야 한다. 이처럼 다양한 외적 요건과 수요자의 관점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예보 목표를 수립하는 과정이 북극항로 안전성과 효율성을 확보하는 핵심 기반이 된다.
결국 실효성 있는 예측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대기, 해양, 그리고 항해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종합 연구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선상 관측과 지상 관측, 인공위성 데이터 분석, 지역 상세 기상 모델 및 해빙 모델의 통합이 필수적이며, 동시에 안전성과 효율성을 모두 고려할 수 있는 항해 시스템 전문가의 참여가 요구된다. 더불어, 인공지능 예측 모델의 개발과 활용을 위해 AI 모델 전문가와 대규모 데이터베이스 구축 전문가도 함께 포함되어야 한다.
기후 시스템에서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구성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북극 해빙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해빙의 변화는 북극항로 개척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으며, 안전하고 효율적인 운항을 위해서는 이를 정확히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관측이나 단기적 예보에 의존해서는 한계가 뚜렷하며, 체계적 연구와 국가·국제 차원의 협업을 통해 장기적·종합적 데이터를 축적하고, 다양한 모델과 관측 자료를 통합한 실효성 있는 예보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결국 북극항로 개발의 성공은 해빙 변화를 과학적으로 관리하고 예측하는 능력에 달려 있으며, 이를 위한 전략적 접근과 협력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는다.
2025-11-25 [18:03]
-
[백진규의 법의 창] 해양수도 이전 특별법, 절반의 성공인가
지난 7일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는 ‘부산 해양수도 이전기관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해양수도 이전 특별법’)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여야 의원이 각각 대표 발의한 해양수산부 및 산하기관 이전 관련 법안을 병합해 마련된 위원회 대안이다.
특별법의 제정 취지는 명확하다. 그동안 수도권에 과도하게 집중된 해양행정 기능을 분산하고, 부산을 명실상부한 해양수도로 육성하기 위해 이전기관과 이전기업의 안정적 정착을 국가가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이번 특별법은 그동안의 정책적 선언을 넘어, 법률의 형태로 해양수도를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별법은 공공기관 이전을 단순히 ‘행정적 이주’로만 보지 않는다. 이전기관의 이주 비용, 사무소 신축비, 융자 지원뿐만 아니라, 이주 직원의 주택 공급, 자녀 학업 및 양육 지원, 정주 여건 개선 등 실질적 정착을 위한 다양한 정책 수단을 포함한다.
행정·산업·생활 결합 '해양특화지구' 진전
해수부 기능 강화 제외 이전 지원에 초점
후속 입법·정책 보완 해양행정 분권 이뤄야
해수부 장관이 지정할 수 있는 ‘해양특화지구’ 제도는 이번 법의 큰 진전이다. 해양특화지구에는 이전기관과 기업의 사무 시설뿐 아니라, 공동 주거 단지, 교육시설, 복합 편의시설까지 포함된다. 이는 행정·산업·생활이 결합된 ‘해양행정복합지구’ 개념으로, 단순한 물리적 이전을 넘어 ‘해양도시 생태계’를 조성할 근거가 된다. 또, 해양특화지구 내에서는 용적률 상한을 최대 120%까지 높일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이주 인력의 주택공급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유연한 도시계획 장치로, 향후 해양산업·해사법률·국제물류 등이 결합한 부산형 해양클러스터로 발전할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법안을 두고 많은 전문가는 ‘절반의 성공’이라고 평가한다. 그 이유는 바로 ‘해양수산부 기능 강화 조항’이 빠졌기 때문이다. 당초 여야 모두 해수부 본부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부산 이전과 함께 정책 중심부를 이전하는 방안을 논의해 왔다. 그러나 연내 법안 처리를 위해 논란이 되는 기능 강화 부분을 제외하고 우선 ‘이전 지원’에 초점을 맞춘 대안으로 합의한 것이다. 이는 법 제정의 속도를 높이는 선택이었을지 모르나, 본질적 목표였던 ‘해양행정의 실질적 분권’은 미루어진 셈이다.
즉, 이번 법으로 해수부의 물리적 이전은 가능해졌지만, 각 행정부처에 산재해 있는 해양 관련 정책결정권·예산 편성권·인사권 등 여러 핵심 기능이 여전히 중앙에 남는다면, 부산은 이름뿐인 해양수도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해수부의 핵심 기능은 단순한 행정 집행이 아니라, 국가 해양 전략의 기획과 조정, 국제 해양 질서 대응, 해양안전 정책 수립 등 고도의 전략적 영역에 있다. 해양 관련 기능이 부산 중심으로 재편되지 않는 한 부산이 진정한 ‘해양수도’가 되기는 어렵다.
해양행정 분권의 실질화를 위해서 그리고 부산이 진정한 해양수도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이번 특별법을 출발점으로 삼되, 실질적 기능 이전을 위한 후속 입법과 정책 보완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해수부 기능 강화 법안의 조속한 제정이다. 이번 법에서 빠진 각 행정부처에 산재한 해양 관련 기능, 예컨대 조선, 해양플랜트, 해양에너지, 해양물류, 해양레저, 국립 해상공원 등에 관한 정책기획, 예산·인사권 등을 별도의 법안으로 해수부로 이관해야 한다. 둘째, 중앙해양안전심판원(세종)과 해양환경공단(서울) 등 다수의 해양 공공기관을 부산으로 이전해야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셋째, 충분한 예산 지원을 통한 해양특화지구의 실질적 집적 효과를 극대화해야 한다. 법률상 지정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해양산업, 해사법률, 국제기구, 연구 기관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산업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해양산업-행정-사법’이 함께 작동하는 해양혁신 허브로 발전시켜야 한다. 넷째, 부산시의 행정 역량 강화다. 특별법이 아무리 훌륭해도, 이를 집행할 주체의 준비가 부족하면 실효성이 반감된다. 부산시는 중앙정부 의존형 개발에서 벗어나, 해양행정의 분권화를 뒷받침할 전문 조직과 인력을 강화해야 한다. 지방정부가 주도하는 ‘지역 해양정책 플랫폼’이 구축될 때 비로소 법의 정신이 살아난다.
이번 특별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다면, 부산은 비로소 ‘법으로 지정된 해양수도’라는 지위를 얻게 된다. 이는 단순한 명칭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국가가 공식적으로 부산을 해양행정의 중심도시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법의 제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전은 공간의 이동이지만, 기능의 이전은 권한의 이동이다. 해양 관련 포괄적, 전문적 기능이 빠진 해양수도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부산이 진정한 해양수도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이번 법을 토대로 해수부 기능 강화와 해양행정의 분권화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 ‘이전의 법’이 ‘기능의 법’으로 진화할 때, 부산은 비로소 대한민국 해양 정책의 중심으로 우뚝 설 것이다.
2025-11-18 [17:57]
-
[홍순연의 도시 공감] 일상, 취향 공유 프로젝트
몇 년 전부터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단어가 주목받고 있다. 라이프스타일이라는 의미는 개인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 즉 한 사람이 가진 가치관, 취향, 사고방식, 행동 습관, 소비 습관, 시간 및 공간 활용 방식 등을 포괄하는 주관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2025년 라이프스타일 트렌드를 살펴보면 균형, 경험, 지속가능성이 핵심 키워드라고 한다, 팬데믹 이후 집이 다목적 공간으로 진화하고 개인의 취향과 경험을 중시하는 공간으로 변모하며 이러한 공간이 부족할 때는 가까운 주변에서 유사한 공간을 찾기도 한다. 그러면서 ‘아주 보통의 하루(아보하)’를 추구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확실한 행복을 위해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보통의 하루를 보낼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하는 삶의 태도를 지향하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 책방, 동네 카페 등 작은 가게들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례는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부산 수영구 광안리에 작은 브런치 카페인 헬멧이라는 가게가 있다. 상권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주택가의 몇몇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골목에 위치하고 있다. 단풍나무 가드닝을 통해 좁은 골목을 통일감 있게 꾸며 계절감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골목 상인들은 이곳을 메이플 거리로 명명하고 골목만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 가고 있다. 얼마 전 취향인들이 이곳에 모여 작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기간을 맞춰 골목의 가게들은 시즌 메뉴를 론칭하고 헬멧의 지하 공간에서는 작은 영화를 상영했다. 주변 카페인 스누비와 대니얼스에서는 DJ 공연과 독서 모임을, 르템즈에서는 요가 클래스를 선보였다. 이 행사에는 수영구에 위치한 공방 대표들도 참여, 가게 내부에 공방 작품들을 전시 판매하면서 작은 볼거리도 제공했다. 수영구만의 색깔을 보여준 듯하다.
또 다른 사례는 파도타기이다. 최근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셰프들과 함께 하는 파도타기라는 프로그램은 부산을 맛있는 도시로 만들기 위한 사람들이 모여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안부, 공존, 잔향 등을 주요 키워드로 맛과 스토리를 구성했다. 쉽게 맛보지 못하는 음식은 물론 지역에서 활동하는 셰프들의 다채로운 개성을 확인하고 맛볼 수 있는 기회라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을 기다리게 된다. 이미 예약 앱 대기자가 500명이 넘는 파도타기 프로그램은 미식이라는 주제로 자유롭게 소통하는 공간을 만드는 도시민의 취향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활동들을 집약시키고 공간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공유하는 방법들이 이제는 도시민에게 살아가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러한 취향 중심의 공간이 바로 라이프스타일 공간이다. 그리고 취향은 무엇보다 사람 중심의 커뮤니티가 중요하다. 대부분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시간적 노력과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 사람들 간의 소통이 이뤄지고 이를 통해 작은 프로젝트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공에서 지원하는 라이프스타일 프로그램을 찾아보면 개인의 취미, 건강, 자기 계발 등 교육 프로그램이 대부분이다. 유행에 따라 너무 비슷한 프로그램들이 지역마다 생성된다. 그래서 주민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는 동네 취향 공간 중심으로 변모하면 어떨까 한다. 우리 동네 취향 공간을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변화된다면 지역민의 활동 동선도 개인별 취향에 따라 바뀌지 않을까? 최근 부산시 다락방 프로젝트가 그 시작이라 생각한다. 일상 속에 문화공간을 찾는 아카이빙과 테스트 베드를 통해 가능성을 찾는 작업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다락방 홈페이지에 따르면 다락방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영감을 얻고,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는 커뮤니티라고 되어있다. 이를 기반으로 공간별 스토리를 정립하여 공간 주인장 중심의 활동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까지 고려되었으면 한다. 아마도 특별하지 않지만 주인장의 취향이 공간에 묻어나고 이를 공유하는 방법이 바로 ‘아보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자주 가던 부산 중구 원도심의 비건 식당이 지난달 31일 문을 닫았다.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 한 끼가 가진 의미에 집중하던 식당이라서 이유가 궁금했다. 이 식당 대표는 4년간 운영한 식당을 접으면서 즐거움과 힘듦이 함께 왔다고 한다. 그리고 쉬면서 발효를 주제로 다양한 문화기획을 준비하겠다는 계획도 전했다. 그가 맛있는 밥집 주인이 아니라 문화기획자이자 식경험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2025년 트렌드 노트에는 이러한 문구가 있다. ‘지금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 지속하며 성장시키고 싶은 나만의 것을 여가에서 찾기 시작했다.’ 2026년이 한 달 남짓 남은 지금, 나만의 것을 찾는 취향 활동가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2025-11-11 [17:50]
-
[송성수의 과기세] 유럽연합의 인공지능법에 부쳐
요즘에는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인공지능(AI)이 화제가 된다. AI만한 대학원생이 없다는 교수도 있고, AI가 교수보다 더 낫다는 학생도 있다. AI를 능숙하게 활용하도록 제대로 공부해야겠다는 사람도 있고, AI가 인간의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다. 일반인공지능(AGI)이 등장하면 인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지난 9월 24일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공개 토의를 주재하면서 화두로 꺼낸 것도 AI였다. 그는 “현재의 AI는 새끼 호랑이와 같다”고 운을 뗀 후 “새끼 호랑이는 우리를 잡아먹을 사나운 맹수가 될 수도 있고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나오는 사랑스러운 ‘더피’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AI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포괄하면서 케이팝의 위상을 넌지시 알린 재치 있는 발언이었다.
AI의 규제에 대해서는 유럽연합(EU)이 가장 체계적으로 준비해 왔다. EU는 2018년에 논의를 시작한 후 2020년 〈AI 백서〉를 발간했다. 2021년에는 인공지능법(AI Act)의 초안을 발표했는데, 부속서를 포함해 120쪽이 넘는 분량이었다. 2023년에는 챗GPT의 등장을 반영해 초안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EU의 AI법은 2024년 2월 최종적인 합의가 도출되었고 2024년 8월 발표되었다. 올해 8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처럼 EU가 AI법을 마련하는 데는 5년이 넘는 세월이 소요되었다.
EU의 AI법은 ‘위험기반 접근법’을 채택하는 가운데 AI를 위험의 유형에 따라 차등적으로 규제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유형은 허용할 수 없는 위험, 높은 위험, 제한된 위험, 낮은 위험으로 나뉜다. 허용할 수 없는 위험은 전면 금지되고, 높은 위험은 적합성 평가를 받아야 하며, 제한된 위험에는 투명성 의무가 부여되고, 낮은 위험의 경우에는 자발적인 행동강령이 권고된다. 이를 어길 경우에는 상당 액수의 과태료가 부과되는데, 허용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한 최대 과태료는 3500만 유로(약 530억 원) 혹은 직전 회계연도의 매출액 7% 중에서 더 높은 금액이다.
허용할 수 없는 위험의 AI에는 ①의도적으로 인간의 의사결정능력을 손상시킬 수 있는 AI, ②특정 집단의 취약점을 악용하는 AI, ③민감한 특성에 기반한 생체인식 분류 시스템, ④사회적 점수 매기기 혹은 개인의 신뢰도 평가에 사용되는 AI, ⑤범죄나 행정 위반을 예측하고 평가하는 데 사용되는 AI, ⑥얼굴인식 데이터베이스를 자동으로 생성하거나 확장하는 AI, ⑦직장이나 교육 분야에서 감정을 추론하는 AI 등이 포함된다. 이런 목록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어떤 AI에 대해 경계해야 하는지 혹은 개발하지 말아야 할 AI는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 수 있다.
높은 위험의 AI는 인간의 생명과 기본권을 위협할 소지가 있는 것인데, 기본권에는 차별 금지, 표현의 자유, 프라이버시 보호 등이 포함된다. 높은 위험의 AI에는 위험관리 시스템의 구축, 데이터 품질기준의 충족, 기록에 대한 이력의 추적, 사이버 보안의 확보, 인간의 감독 여부 등과 같은 요구사항이 부과된다. 이와 같은 요구사항은 AI라는 기술의 개발에 못지않게 이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방법과 절차가 중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제한된 AI는 이미지, 오디오, 비디오 콘텐츠를 생성하거나 조작하는 경우에 해당한다. 제한된 AI를 배포하는 주체는 범죄예방과 같은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해당 콘텐츠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이와 함께 챗GPT를 비롯한 파운데이션 모델에 대해서는 모델 구조와 훈련 데이터를 요약하여 공개해야 하며, 저작물을 무단으로 활용하지 않았는지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규정이 추가되어 있다.
EU의 AI법은 규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AI의 발전을 위한 정책적 지원에 관한 사항도 담고 있다. AI의 개발, 시험, 검증을 위해 규제 샌드박스를 구축할 것을 주문하고 있으며,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 대해서는 재정적 지원을 강화하고 인프라 접근성을 향상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법안이 규정한 조건을 충족할 경우에는 높은 위험의 AI를 실제 환경에서 시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 등에 관한 기본법(AI 기본법)’이 2025년 1월에 공포되었고, 내년 1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우리나라의 AI 기본법은 EU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제정된 AI 법제라고 선전되고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개괄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없이 빠른 속도로 마련되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5년 이상의 숙의를 거친 EU의 경우와 크게 대비된다.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만들 때 상당한 진통이 예상된다.
2025-11-04 [1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