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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약육강식의 국제관계 속 한국의 선택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국제질서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미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부터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질서에 대한 도전이 본격화되었지만,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그 기조는 더욱 노골적인 데다 심지어 배타적인 양상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세계가 바야흐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무대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의 영토인 그린란드에 대해서 트럼프 대통령은 트럼프 1기 행정부 출범 때부터 적극적인 매입 의사를 밝혔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 그린란드 매입 의사를 밝히고 당시 덴마크 총리가 “그린란드는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반박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은 덴마크 방문 일정을 불과 2주 전에 일방적으로 취소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지난 3월 29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NBC와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린란드를 가져올 것이다. 100%다”라며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가능성이 있지만 나는 어떤 옵션도 배제하지 않는다”고까지 노골적으로 말했다.
1929년 대공황 사태 이후 미국에서 전 세계로 확산된 보호무역주의가 만들어낸 폐해에 대한 반성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다자간 무역질서를 주도적으로 출범시켰다. 하지만 미국 주도의 이 다자간 무역질서도 트럼프 재집권 이후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이라 불릴 만큼 무시무시한 관세 폭탄을 마구 던지고 나섰기 때문이다.
2025년 4월 2일, 트럼프 대통령은 수입 과잉 및 무역수지 적자 문제를 이유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거의 모든 국가에 기본 10% 관세, 또한 국가별 소위 ‘상호관세’라는 추과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Executive Order 14257)을 발표했다. 그리고 새로운 관세 부과를 4월 9일 시작한 지 13시간 만에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 대해서 90일 동안 소위 상호관세 부과를 연기하였다.
그러다가 세계 각국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관세 부과를 결정하고 8월 1일부터 부과한다는 서한을 7월 초부터 발송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25%, 일본은 25%, EU와 멕시코는 30%, 캐나다는 35%의 관세율이 통보되었다. 그리고 각국은 미국과 관세 협상을 하였고, 한국, EU, 일본은 15%의 관세율로 미국과 관세 협상을 타결하였다. EU와 일본이 미국과 무역 협상이 타결된 시점에서 한국은 미국과 협상을 빠르게 마무리해야 했지만, 이번 협상을 통해서 한미 FTA는 무력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한국과 타결한 협상 내용도 무시하고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미국의 관세 압박에 한국은 미국과 한미 FTA를 개정하여 기존 한미 FTA에 포함되어 있던 대미 수출 화물자동차에 대한 미국 측의 관세 철폐 시한을 2021년 1월에서 20년 늦추고, 당시 트럼프 행정부가 25% 관세를 부과한 철강에 대해서 한국은 대미 철수출 쿼터제를 도입하여 쿼터분에 대해서는 무관세로 미국에 수출하는 것으로 협상을 타결한 바가 있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는 5월 30일, 철강·알루미늄 수입에 대한 관세율을 50%로 인상하면서, 트럼프 1기 행정부가 한국과 협상을 타결한 내용도 무시한 채 한국의 대미 철강 수출에 대해서도 다른 국가와 같이 50%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이와 같은 조치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서 얼마든지 기존의 합의 사항이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에 침공당한 우크라이나에 영토 포기를 요구하면서 러시아와 휴전을 강요하고 있다. 구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 규모의 핵보유국이었지만, 핵무기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정치적 안보 보장을 받은 바 있다. 이것이 1994년 12월 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체결된 부다페스트 각서이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는 서유럽으로 확전을 두려워하여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요청을 거절한 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본토 타격에 제한을 두는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부다페스트 각서처럼 우크라이나에 평화 보장을 대가로 영토 포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국제사회에서 점차 다자 질서는 무력화되고 있고, 강대국의 이해에 따른 19세기 제국주의 시기 양육강식의 논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중견국가인 한국이 변화하는 국제질서에서 유일하게 살 길은 스스로 강해지는 것 밖에 없다.
2025-08-2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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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변화하는 여름, 흔들리는 기후 질서
논문을 쓰며 참고 자료를 찾다가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다. 1988년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내가 방학 숙제로 제출했던 여름 일기였다. 유치하고 서툰 글을 읽는 일은 잠시 오글거림을 불러왔지만, 그 안에는 37년 전 여름의 기후가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어린 나는 냇가에서 친구들과 수영하며 지냈고, 8월 한 달은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중순이 되자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그 변화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방학의 마지막을 알렸다.
당시 8월 중순은 참을 수 없는 무더위와 거리가 멀었다. 더위가 찾아와도 나는 밖에서 뛰어놀았고, 땀이 나면 냇가로 달려가 식히곤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의 여름은 여러모로 낯설다. 지난주만 해도 8월 말에나 경험할 법한 늦여름, 초가을 같은 선선한 날씨가 이어졌지만, 며칠 사이 날씨는 급변해 열대야와 폭염이 찾아왔다. 중위도 지역에서는 7월 장마철에 나타나는 정체전선이 자리 잡으며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고, 서울과 경기도 곳곳이 큰 피해를 보았다. 단 며칠 만에 초가을 같은 선선함은 사라지고, 극심한 여름이 자리를 대신했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기후는 나름의 질서를 유지했다. 하루하루 날씨는 불규칙했지만, 계절의 변화만큼은 약속된 듯 정해진 순서를 따랐다. 초여름이 오면 사람들은 장마를 걱정하며 긴 비에 대비했고, 장마가 끝나면 무더위 속에서 여름휴가를 계획했다. 8월 중순이 되면 저녁 바람이 선선해지며 가을의 시작을 알렸다. 이렇게 불규칙한 날씨와 질서 있는 계절 변화 사이에는, 두 성질을 동시에 지닌 ‘준계절적’ 움직임이 자리하고 있었다.
준계절적 움직임의 대표적인 사례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수축과 팽창이다. 북태평양 고기압은 여름철 대륙과 해양이 태양열에 서로 다르게 반응하면서 형성되는 거대한 공기 덩어리다. 온도가 빠르게 오르는 대륙에는 대륙성 저기압이, 천천히 올라가는 바다 위에는 해양성 고기압이 자리 잡는다. 한반도는 이 두 공기 집단의 경계에 놓여, 여름철 날씨가 두 집단의 배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7월 장마 역시 이 경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북태평양 고기압의 움직임은 계절 변화에 따라 비교적 규칙적인 패턴을 보인다.
하지만 북태평양 고기압의 경계에서는 다양한 날씨 현상이 발생한다. 중위도 저기압과 고기압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며 규칙적인 계절 변화에 변화를 부여한다. 이들 기압계는 중위도 제트기류의 불안정한 흔들림으로 발생하고, 북태평양 고기압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달하고 소멸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들 중위도 저기압과 고기압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기와 위치에 영향을 미치며, 반대로 북태평양 고기압의 변화는 중위도 제트기류를 통해 이들의 발달과 이동에도 영향을 준다. 여름철 날씨 예보에서 “북태평양 고기압이 북상하면서” 혹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물러나면서”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북태평양 고기압은 계절 변화의 규칙성과 날씨의 불규칙성을 동시에 가지며, 준주기적 움직임을 보인다.
현재 지구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기후 시스템의 체계적 특성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시간과 공간 스케일이 커지면서, 원래 불규칙에서 준주기성, 나아가 주기성으로 이어지던 구조적 체계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날씨의 불규칙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양상은 더 극단적이다. 비가 내리면 폭우가 되고, 맑은 날씨는 폭염을 동반한다. 준주기성을 띠던 북태평양 고기압의 수축과 확장도 보다 불규칙하게 나타난다. 확장 기간이 길어지면 한반도에 가뭄이 발생하고, 수축하면 거대한 강우 시스템이 형성되어 홍수를 유발한다. 계절적 순환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8월의 날씨는 기존의 7월, 8월, 9월 초의 특성이 혼합된 듯하며, 계절 구분이 흐려져 일주일 사이에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현재까지 기후학계와 환경 단체는 기후 온난화를 주로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의 관점에서 접근해 왔다. 대중 역시 기후 온난화라고 하면 산업화 이후 지구 전체의 기온 상승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틀리거나 핵심을 놓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기후 적응 단계에 들어서면서, 기후 온난화를 단순한 온도 상승이 아닌, 그로 인해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현상을 상변화라고 한다. 주변 온도가 상승하면서 얼음 자체의 온도가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얼음을 구성하는 물 분자의 배열과 구조적 안정성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섭씨 0도를 넘으면 얼음은 빠르게 구조를 바꾸며 액체 상태로 변모한다. 기후 온난화를 상변화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상변화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를 기후 온난화에 적용하면, 현재 발생하는 기후 재난을 온난화와 연결해 이해하는 논리적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
2025-08-1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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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북극항로 시대, 부산의 역할
요즘 가장 차갑고 뜨거운 곳은 북극해이다. 기후위기가 바다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북극해의 해빙 현상이 가속화되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북극항로’가 본격적으로 열린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기존 항해보다 30~40% 가까이 시간을 단축해 국제 해운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전 세계가 북극항로를 선도하고, 선점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중국은 이미 2024년 기준으로 35차례 북극항로 운항을 했고, 미국은 쇄빙선 구매계획을 발표했으며, 러시아는 2035년까지 북극항로 선정에 39조 원의 투자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일본은 제4차 해운 기본 계획에 북극항로를 포함시켰으며,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적 선사인 CMA CGM은 올해 쇄빙선을 구매했다. 이제 북극항로는 더 이상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전략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특히 부산은 북극항로의 기점이자 종점으로서, 물류와 해양산업의 중심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부산이 이 거대한 기회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준비, 그중에서도 법률적 기반 구축을 선행해야 한다. 국제 해양법(협약)부터 해양환경 보호, 항만 안전, 해양 보험, 분쟁조정까지, 북극항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물류·해양산업 중심되는 거대한 기회
해양 사고 시 책임 소재 등 분쟁 발생
법령 발굴·입법 제안 주도적 역할해야
북극항로는 대부분 러시아 연해를 따라 형성돼 있고, 그 주변은 극한의 자연환경 속에 있다. 이 때문에 북극항로에는 ‘유엔해양법협약’과 국제해사기구(IMO)의 ‘극지방 운항 국제규정’ 등 다양한 국제기준이 적용된다. 부산에서 출항하는 선박이 북극항로를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에 부합하는 선박의 구조 기준, 운항 능력, 승무원 자격 요건 등 국내 관련법 정비가 필수적이다. 부산시는 중앙정부와 협력해 극지항해를 위한 선박 검사와 인증 체계를 선도적으로 마련하고, 극지 전용 선박의 설계·건조에 필요한 법적 인허가 기준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북극은 지구 생태계의 최전선이자 마지막 보루이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해양오염이나 사고는 전 세계적 영향을 미친다. 이를 예방하고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환경영향평가, 선박 배출 규제, 해양 사고 시 책임소재와 손해배상 체계 등이 명확히 정립돼야 한다. 부산은 이미 친환경 항만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여기에 발맞춰 예컨대 ‘북극항로 통항 선박 특별관리 조례’ 등과 같은 지역 입법을 통해 지속 가능한 해양 이용의 모델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북극항로는 기상 조건이 극단적이며, 사고 위험도 높다. 이에 따라 관련 선박은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보험료가 급등하거나, 보험인수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부산은 지방정부 차원의 선박 보증제도, 공공보험기구와의 연계, 리스크 평가 기준 마련 등을 검토해야 한다. 또, 해난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보험금 지급과 손해배상 책임에 대한 명확한 법적 기준과 국제조정 절차도 필요하다. 이와 같은 법제는 단지 위험과 손실을 줄이는 차원이 아니라, 부산이 해양 금융과 법률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기 위한 핵심 기반이 될 것이다.
북극항로 이용이 본격화하면, 항만 이용권, 운임 갈등, 사고 책임 등 다양한 국제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현재 일반 민사 법원 또는 일부 지방법원, 부산 중재센터가 그 일환을 담당하고 있지만, 보다 신속하고 전문적인 해상사건 처리를 위해서는 부산에 해사전문법원 설립이 필요하다(부산일보 7월 9일 자 23면 필자 칼럼 참조). 부산이 아시아 해양 분쟁 해결의 중심지가 되기 위해서는, 해사전문법원 이외에도 지방정부 차원의 전문 인력 양성에 필요한 법률 지원과 교육 체계도 함께 고민하고, 정비해야 한다.
이 모든 법과 제도의 준비에는 중앙정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지방정부가 장기적 전략을 가지고 먼저 움직여야 한다. 중앙정부가 국제협약과 국가 기준을 만드는 동안, 지방정부는 실무적 인프라와 지역 네트워크를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 북극권 도시와의 자매결연, 국제 포럼 유치, 지역 내 조례 제정 등을 통해 부산은 국제적 해양 법률 선도 도시로서의 위상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부산시는 ‘북극항로 법제도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지역 기업·학계·법률가들과 함께 필요한 법령을 발굴하고 중앙정부에 입법을 제안하는 지방 주도형 해양 정책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북극항로는 단순한 항로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글로벌 해양 질서의 재편을 의미하며, 부산은 그 중심에 설 수 있는 도시다. 그러나 준비 없는 기회는 지속되지 않는다. 길이 열렸을 때, 그 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법과 제도의 준비가 그 시작이고, 그 준비에 부산시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빙상 실크로드’로 가는 북극의 문이 열리고 있다. 부산은 이제 북극항로를 시작으로 해양물류 도시를 넘어, 해양 법률 도시로 도약할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다.
2025-08-1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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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공간의 경험, 팝업스토어 전성시대
요즈음 백화점, 거리를 걷다 보면 팝업스토어를 자주 만난다. 작게는 소규모 브랜드를 소개하는 것부터 아이돌 굿즈, 애니메이션 덕후들을 위한 미디어콘텐츠 관련 스토어를 비롯하여 명품 브랜드까지 팝업스토어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미 여의도의 백화점은 상설매장을 버리고 팝업스토어 만으로 매장을 구성하여 고객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움을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 창업자들의 비즈니스모델이나 상권 활성화 모델에도 팝업스토어는 하나의 아이템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제 팝업스토어는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수단이 아닌 스토리와 가치를 보여주는 마케팅의 한 요소로 자리매김 중이다. 그리고 경험 소비를 이끄는 세대들에게는 공간을 소비하는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바야흐로 팝업스토어의 전성시대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팝업스토어는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서 신상품, 특정 제품을 일정 기간 판매하고 사라지는 매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짧은 기간에 브랜드의 홍보와 한정판 제품 판매를 목적으로 브랜드나 제품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과거에는 시장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운영되는 단기 매장이었지만 현재는 단시간에 인상 깊은 이미지와 제품을 어떻게 판매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아닌 공간 기반으로 가치와 스토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의 팝업스토어 성지인 성수동은 이미 서울의 방문객들에게 공간 경험을 제공해 주는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공간, 제품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들이라면 이미 성수동을 방문하였을 것이다. 성수동은 공장과 창고가 가득했던 곳이다. 어느 순간 주차장 차고, 카센터가 개성 있는 편집숍과 카페, 갤러리 등으로 활용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브랜드들이 장소에 주목하게 되면서 거친 창고와 오래된 건축물들이 지금의 성수동을 만들었다. 또한 서울 숲과 한강공원에 인접, 보행동선이 연결되어 오픈스페이스와 장소의 힘이 함께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둥지 내몰림’ 현상으로 성수동 지하철역 2번 출구 앞에 있던 오래된 돼지갈비 식당은 문을 닫았고 주변의 로컬 가게들은 임대료 상승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한 동네에서 90개 이상의 팝업 스토어가 운영됨에 따라 비슷한 팝업에 대한 한계로 마케팅 효과나 집객을 위한 과도한 비용 투입, 주목을 끌기 위한 경쟁적인 이미지 연출 등이 골목마다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부산에서 팝업스토어가 처음 이슈가 된 것은 2021년에 해운대 해리단길에 오픈했던 모 침대 회사의 팝업이었을 것이다.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파는 그로서리 매장을 오픈하여 포토존의 성지가 되었고 다양한 소품들과 굿즈를 구매할 수 있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약 3개월 동안 운영된 팝업은 침대 회사임에도 주요 제품인 침대를 보여주지 않고 주변 지역 소소한 작은 가게들의 특색에 맞는 문화 요소를 살리고 집객을 통한 지역 활성화와 동시에 자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보여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부산슈퍼 팝업스토어 또한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영도의 100년 된 골목 끝자락에 위치하여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간판과 신문 매대, 층층이 쌓은 식음료 박스들을 활용하여 공간을 연출하고 부산의 관광 굿즈를 판매하여 코로나 시기임에도 많은 방문객들이 찾은 장소였다. 당시 팝업이 끝났음에도 sns에 노출된 이미지 한 컷을 찍기 위해 방문객들은 심심치 않게 방문하기도 하였다. 5년 정도 지속적으로 운영된 부산슈퍼는 부산관광공사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제 팝업스토어는 이제 민간기업에서 공공기관까지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무수히 많은 팝업이 생성되고 없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살아남는 팝업들은 단순히 일시적인 행사나 화려한 이미지나 단순한 판매 공간 아니라 단시간에 독특한 스토리를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되는 팝업스토어는 오히려 일반 매장보다 장소와 공간, 경험을 연결하고 스토리의 지속성을 높이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브랜드의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렬함을 보여주기 위해 지역에서는 다양한 장소에 대한 아카이빙과 더불어 이러한 작업을 위해 스토리, 장소, 데이터 분석, 브랜드, 마케팅, 공간 기획 등을 할 수 있는 인적자원들도 필요하다. 서로 다른 분야의 협력자들 간의 프로젝트 모델이 만들어진다면 지역 너머의 활동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협업 모델이 새롭게 만들어졌으면 한다. 부산은 다양한 스토리와 장소를 가지고 있다. 더불어 항로 연결을 통해 일본, 미국, 동남아까지 확장 가능한 거점 도시라 생각한다. 브랜드 팝업을 위한 시작점으로 부산의 장소를 활용하였으면 한다.
2025-08-0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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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다시 보는 우장춘의 세계
한번은 광안리해수욕장에 갔다. 도로변 화단에 피튜니아가 심겨 있었다. 남미가 원산지인 피튜니아는 오래 전부터 관상용으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문제는 암술과 수술이 모두 존재하는 겹꽃 피튜니아를 얻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처음으로 완전한 겹꽃 피튜니아를 개발한 인물은 누구일까? 장영실, 장기려와 함께 부산의 3대 과학자로 꼽히는 우장춘이다. 또 한번은 부산대 인근의 가정식 밥집을 찾았다. 깊은 맛의 배추김치와 달콤한 양배추 쌈이 곁들어진 백반을 먹었다. 우장춘은 1950년에 한국에 돌아온 후 채소의 품종을 개량하는 연구에 매진했다. 우량 품종을 찾아내는 데서 시작하여 교잡 실험을 통해 신품종을 개발해 나갔다. 그 결과 1960년에는 배추 원예 1호와 2호가 탄생했고, 1962년에는 양배추 동춘(東春)과 양파 원예 1호와 2호가 등장했다. 우장춘은 1959년 8월 10일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제자들을 통해 결실을 보았던 것이다.
광안리해수욕장과 가정식 밥집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과 이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의 일상에서 과학자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한국의 과학자, 특히 부산의 과학자를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무심코 여긴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감사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우장춘에 대한 오해도 제법 있다. 그는 생물의 유전적 성질을 이용하여 우수한 품종을 길러내는 육종학을 전공했다. 우장춘은 육종학의 위력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해 ‘씨 없는 수박’을 자주 활용했다. 강연회가 열릴 때마다 손수 재배한 씨 없는 수박을 꺼내 시연해 보였다. 씨 없는 수박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탔고, 1955년 대구에서는 ‘씨 없는 수박 시식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우장춘과 씨 없는 수박은 점점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며, 급기야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의 ‘재배자’에서 ‘개발자’로 둔갑되기에 이르렀다. 씨 없는 수박은 교토제국대학의 기하라 히토시(木原均)가 1943년에 처음 개발했는데,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의 대표 업적으로 간주되는 촌극이 빚어졌다. 이러한 점은 일본의 여성 저술가 츠노다 후사코(角田房子)가 1990년에 우장춘의 전기로 발간한 〈나의 조국〉에서 지적된 바 있다.
우장춘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종의 합성’이 꼽힌다. 그것은 유채의 염색체수(38개)가 배추의 염색체수(20개)와 양배추의 염색체수(18개)를 합친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를 가지고 수많은 중간 교잡 실험을 시도했으며 그 결과 유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곧이어 그는 배추와 흑겨자를 활용하여 갓을 만들었고, 흑겨자와 양배추를 교잡하여 에티오피아 겨자를 합성했다. 배추, 양배추, 흑겨자가 꼭짓점에 위치하고 중간에 유채, 갓, 에티오피아 겨자가 있는 그림은 ‘우의 트라이앵글(U’s Triangle)’로 불린다. 우장춘은 1935년에 ‘배춧속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63쪽짜리 영어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36년에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장춘의 연구는 매우 괄목한 것이지만, 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지금도 인터넷 자료를 검색해 보면 “우장춘의 연구가 세계 최초로 다윈의 진화론을 논박하고 수정했다”는 식의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같은 종들의 교배를 통해서만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고 주장하지도, 다른 종들의 교배를 통한 종분화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지도 않았다.
또한 일본의 육종학자들은 1910년대부터 인근 품종들의 상관성을 고려하여 식물종이 진화하는 양상을 탐구해 왔다. 특히 1930년에는 앞서 언급한 기하라 히토시가 ‘게놈 분석’이라고 부른 염색체 분석 방법을 정립하여 밀의 종분화를 탐구하고 있었다. 우장춘은 이러한 연구 전통 내에서 배춧속 품종 사이의 교잡 실험을 통해 해당 작물들의 상호관계를 밝혔던 셈이다. 우장춘의 연구는 종의 합성에 관한 주장을 최초로 입증하여 그것이 과학적 이론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의의가 있다.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하지 않았고 종의 합성을 처음 논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위상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이 없어도 우장춘은 위대하다. 종의 합성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다는 것만으로도 세계적인 과학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더 나아가 우장춘은 조국으로 돌아와 일본에서 하던 첨단 연구를 이어가지 않고, 한국의 실정과 요구에 부합하는 연구로 전향하는 또 다른 위대함을 보였다.
오는 8월 10일은 우장춘의 기일이다. 부산 동래구는 2006년부터 해마다 우장춘 박사 추모식 거행을 주관하고 있다. 이번 추모식을 계기로 우장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그의 세계가 더욱 잘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2025-07-2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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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관광 '갈라파고스' 대한민국
각급 학교가 이제 방학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휴가철이 시작되었다. 국내외 관광객들로 주요 공항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굴뚝없는 공장’이라 불리는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서 세계 각국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전 세계는 관광의 황금기를 누렸다. 2019년 국제 관광객 수는 사상 최초로 14억 명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흐름은 2020년 초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급격히 멈춰섰다. 국경이 닫히고 항공편이 중단되면서 관광산업은 세계 경제 전반에서 가장 먼저, 가장 깊은 충격을 받은 분야가 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종식 이후 세계 관광은 가파른 회복세를 보이며, 2024년 한 해 동안 국제 관광객 수는 약 14억 6000만 명으로 집계되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하였다.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2019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는 1750만 명으로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가,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한 2020년에 급감하였다. 이후 회복세를 보이면서 2024년에는 1637만 명으로 2019년의 94% 수준까지 회복하였다.
이웃 국가인 일본의 사례를 보면, 2019년 일본을 방문한 해외 관광객 수는 3188만 명이었고,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급감했다가, 2024년에 3686만 명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엔저 현상을 고려하더라도 현재 한국과 일본의 외국인 관광객 방문 규모는 두 배 이상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외국인 관광객 방문 숫자가 일본의 외국인 관광객 방문 숫자를 상회하였다. 2010년과 2014년에 한국은 각기 879만 명과 1421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했고, 일본은 같은 기간 861만 명과 1341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였다.
한일 간 외국인 관광객 역전이 벌어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관광 및 요식업 등에 적용된 IT 시스템 구축에서 한국과 일본은 고객층을 겨냥하는 전략이 달랐다는 점이다. 우선 한국기업은 비용이 덜 들면서 수익을 쉽게 낼 수 있는 내국인 고객을 중심으로 한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식당 웨이팅 및 예약 어플리케이션인 ‘캐치테이블’과 ‘테이블링’을 꼽을 수 있다. 이 시스템은 한국 전화번호가 없이 데이터로밍만 활용하는 외국인 관광객은 이용이 불가능했다가, 지난해에야 개선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에 일본의 식당 줄서기 시스템인 ‘에어웨이트’ 같은 경우, 이용 고객이 앱을 다운로드할 필요 없이, 종이 번호표에 QR코드를 인쇄하여 발행하고 고객은 QR코드 인식을 통해서 자신의 SNS에 줄서기 순번을 연동시킬 수 있어서 일본 전화번호 없이도 이름난 식당의 줄서기가 가능하다.
한국 시스템의 갈라파고스화로 꼽히는 또 다른 시스템은 국내에서 대중교통 말고는 길 찾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구글 지도(Google Map)다. 대부분 국가에서는 구글 지도는 찾고자 하는 지점의 위치, 그 지점까지 이동하기 위한 다양한 이동 수단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구글 지도가 국내에서 제한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을 한국 정부 탓만 할 수는 없다. 한국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구글 뿐만 아니라 모든 외국 기업이 상세한 지도 데이터를 해외 서버에 저장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2007년, 2016년에도 구글은 한국의 상세지도 데이터를 해외 데이터 센터로 반출하려 했으나 한국이 직면한 안보상의 이유로 거부당하고 애플 역시 2023년도 유사한 요청이 거절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구글 지도는 한국에서 대중교통 정보는 제공하지만, 도보 및 자동차 내비게이션 기능은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구글이 한국에서 제대로 서비스를 할 수 없다면 한국에서 지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네이버와 카카오가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외국어로 서비스를 제공하면 좋겠지만, 네이버와 카카오 지도 사용자가 대부분 한국인인 상황에서 이들 기업이 외국어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투자할 요인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의 불편은 가중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한국은 이웃 국가인 일본 뿐만 아니라 베트남 등 다른 국가에게도 관광객 수가 뒤처지는 신세가 됐다. 2010년 외국인 관광객이 505만 명으로 한국과 큰 차이를 보이던 베트남이 2024년 1760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을 맞이하여 한국 방문 외국인 관광객 수를 앞지른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외국인 관광객 유치 확대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스템에 대한 외국인 관광객의 접근성 문제를 더욱 치밀하게 개선할 필요가 있다.
2025-07-2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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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다른 목소리 어우러지는 만남, 융합의 시작
다른 나라에서 학위를 받으며 가장 먼저 마주한 어려움 중 하나는, 낯선 문화를 단순히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몸에 밴 생활방식과는 사뭇 다른 문화 속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작은 충돌이 일어났다. 공부에만 집중하면 될 줄 알았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전공을 가리지 않고 학생과 교수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건물 중앙의 넓은 공간에 모여 티타임을 가졌다. 커피나 차, 간단한 다과를 곁들이며 담소를 나누는 이 시간은 영어가 익숙하지 않았던 내게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티타임은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서로의 연구를 이야기하며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뜻밖의 소통의 장이 되어주었다.
이 시절, 내가 소속해 있던 연구실 건물에는 기후 과학자뿐 아니라 지진, 암석, 공룡 화석을 연구하는 사람들, 때로는 이론 물리학자들까지 찾아오곤 했다. 시간이 흘러 다른 연구자들과 대화가 익숙해졌고, 그들과 대화하며 같은 주제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하게 여겼던 개념이 낯설고 비논리적으로 느껴졌지만 그 과정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도 생겨났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며 나의 ‘상식’이란 것이 얼마나 상대적인 것인지도 알게 되었고, 내 전공을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법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내가 하는 전공에 대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느꼈다. 공식적인 학회 발표나 기관이 주최하는 워크숍과 같은 자리를 제외하면, 내가 하고 있는 전문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일은 많이 없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관심사가 아닌 주제를 굳이 꺼내는 일이 오히려 배려심 없는 행동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협업을 기본 조건으로 하는 연구 제안서를 작성할 때도 드러났다. 여러 연구 책임자들의 협력이 필수적인 과제의 경우, 의견을 활발히 교환하기보다는 전체 일을 합리적으로 나누고, 각자의 전문 분야를 믿고 맡기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이는 각 분야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문화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분업의 결과를 단순히 합쳐 만든 결과물은, 때때로 예상보다 덜 유기적이고 상호 연결성이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융합’이라는 단어가 과학계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전문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되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고 질문을 주고받는 문화가 조금 더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돌이켜보면, 티타임은 어쩌면 이런 대화와 이해의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자연스러운 방법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매일 이어지는 편안한 만남은 공감과 신뢰를 쌓는 기반이 되었고, 연구에 대한 정보와 관점을 나누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단순한 사교의 장을 넘어, 융합적인 연구의 씨앗이 자라는 소통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새 정부 아래 한국에서도 기후 위기와 경제 위기 같은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융합 정책이 시도되고 있다. 예를 들어 ‘기후에너지부’의 신설은 신재생에너지와 기후변화라는 서로 다른 분야를 하나로 묶으려는 의미 있는 과제로 읽힌다. 그러나 조직을 단지 합친다고 해서 진정한 융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낯선 언어와 사고를 이해하려는 태도, 그리고 그 차이를 기꺼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비로소 융합은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연구실의 작은 티타임이 보여주었듯이, 융합은 거창한 제도보다는 일상의 작은 대화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이뤄진 많은 과학의 혁신은 서로 다른 분야 간의 융합에서 비롯되었다. 가령,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는 리만 기하학이, 맨틀 대류 이론에는 유체역학이, 기후변동 연구에는 통계물리학의 브라운 운동 개념이 적용되었다. 이처럼 하나의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탐구 못지않게, 이질적인 학문 간의 연결과 교차는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해왔다.
새롭게 신설되는 기후에너지부는 기후 연구와 에너지 연구라는 서로 다른 분야가 만나는 융합의 장이 될 것이다. 융합은 결국 사람이 만드는 일이다. 융합의 출발점은 타인의 일을 내 일처럼 듣고, 그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필자가 처음 어색하고 낯설게 경험했던 티타임의 일상적인 대화가 떠오른다. 별다를 것 없던 그 시간이야말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이해를 넓히는 진짜 융합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도, 그런 자연스러움 속에서 조금 더 자주 마주 앉고, 서로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한다.
2025-07-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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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해사법원은 부산에 설치돼야 한다
2021년 3월 23일, 세계 물류의 심장이라 불리는 수에즈운하에서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Ever Given)호가 강풍과 항로 오류 등으로 인해 운하의 남쪽 구간에서 좌초된 것이다. 선체 길이만 약 400m에 달하는 이 선박은 약 6일 동안 수에즈운하를 완전히 막아 세계 무역의 12%에 해당하는 항로를 마비시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약 1200척 이상의 선박 운항이 지연되면서 하루 약 100억 달러(약 13조 원)에 이르는 무역 손실이 발생했다고 한다. 사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집트 수에즈운하관리청(SCA)은 선주 측에 약 9억 달러(약 1조 200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선박과 선원을 억류하며 국제적 분쟁이 발생했다.
결국 사건은 국제해사법과 보험, 선박책임제한제도, 그리고 국가 간 협상력 등이 얽힌 복잡한 소송전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한국 해역에서 발생하면, 우리는 법적으로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가?”
해상사고 및 관련 분쟁은 기술적 요인뿐 아니라 국제법, 보험, 선주와 용선자 간 계약, 그리고 국제적 중재 시스템까지 총체적으로 작동해야 해결되는 분야다. 따라서 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해사법원’(Maritime Court)이 필수이다.
해사법원은 선박사고, 해양오염, 해상운송계약, 선박저당권, 해양보험, 선원노동, 국제해양분쟁 등을 전문적으로 심리하는 해양 분야 특화 법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일반 민사 법원 또는 일부 지방법원에서 처리되고 있지만, 선박 충돌이나 해상 화물 손상 등의 기술적·국제적 특성이 강한 분쟁을 일반 법관이 처리하기에는 신속성이나 전문성 등에 한계가 있다.
국제적으로는 이미 영국, 미국, 중국 등 해양 강국들은 해사법원을 운영 중이다. 예컨대 중국은 상하이에 국제해사법원을 설치, 운영해서 법적 ‘해양주권’을 강화하고 있다. 해사법원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법원 이외에도 해운·보험 전문가, 선박 기술 감정인, 해양법 전공 법관, 국제 중재 경험자 등 복합적 인프라도 필요하다. 이는 국가의 해양 법률 중심지로의 전략적 선택이 요구되는 일이다.
부산은 단연 대한민국 해양산업의 중심지다. 세계 6위 컨테이너항만, 한국 최대의 선박 출입항 기록, 그리고 수많은 선박회사, 해운중개사, 해양금융기관이 모여 있다. 부산에는 이미 해양대학,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한국선급 등 기관이 존재하고, 국제 중재센터까지 들어서며 제한적이나마 해양 분쟁 해결의 플랫폼이 마련되어 있다.
정부는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부산시민의 한 사람으로 환영할 일이다. 행정 중심(해수부)과 사법 중심(해사법원)이 같은 지역에 위치하게 되면 해양 정책 수립과 해양 분쟁 해결이 훨씬 유기적이고 신속해질 수 있다. 더 나아가 부산은 북극항로 시대를 맞아 동북아 해양 분쟁의 중재 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지리적, 산업적, 국제적 이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 부산은 단지 국내 해양 사건을 처리하는 수준을 넘어, 국제 해사 사건을 유치하고 중재하는 ‘국제 해양법 수도’로 성장할 수 있다.
정부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정책적 선언과 그 뒷받침을 해야 하고, 국회는 해사법원 설치에 필요한 입법적 지원을 해야 한다. 지방정부의 노력 역시 요구된다. 부산시와 부산시의회는 단순히 ‘유치 요청’에 그치지 말고, 유치 지원 조직 구성, 지방조례 제정 등 해사법원 설치에 필요한 행정적, 예산적 지원 기반을 선제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또한 해양대학교, 로스쿨, 해양 관련 기관 등과 협력해 해사법관 후보군, 조사관, 기술 감정인 등 전문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실무 중심의 해사법 교육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나아가 부산시는 국제해양도시 브랜드와 해운박람회 등을 활용해 해외 해운회사, 해외 로펌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지역변호사회와 연계해서 향후 설치될 부산 해사법원의 국제적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에버기븐호 사건은 바다가 곧 법률의 공간이며, 그 공간을 누가 먼저 준비하느냐가 국제경쟁력을 좌우함을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이 해양 강국을 꿈꾼다면, 법적 토대인 해사법원의 설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리고 그 중심은 마땅히 부산이어야 한다. 지방정부의 전략적 실행력과 중앙정부의 정책 결단이 맞물릴 때, 우리는 해사법의 수도, 부산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2025-07-0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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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다시, 해양도시 부산 만들기
부산에서 살다보면 바다 위 7개의 다리를 일상적으로 건너고, 해안선을 따라 놓인 콘테이너, 대형 크레인의 모습에 익숙해지면서 크루즈선의 웅장함과 다양한 해양 활동들에 무덤덤해지게 된다. 그러나 정작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해수욕을 해본 경험 없이 부산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부산을 ‘해양도시 부산’이라고 부른다. 해양도시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은 아마도 바다를 끼고 선박이 화물이나 승객을 싣고 내리는 기능인 부두와 저장시설을 지닌 항만이 만들어지면서부터일 것이다. 부산은 1876년 개항 이후 지금까지 항만의 기능과 함께 도시가 만들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산은 자의든 타의든 바다를 근간으로 도시민들의 생활과 산업 그리고 도시공간의 변화가 만들어져 왔다. 때로는 불편함을 감내하면서 바다를 기반으로 발전하여 건설된 도시로, 육상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해양자원을 효율적으로 이용하며, 해양산업과 생태계를 조화롭게 발전하는 도시가 바로 부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해양도시 부산이라는 말은 당연히 부산의 상징적인 슬로건이 되었다. 그리고 이 슬로건은 해양이라는 키워드로 미래지향적인 도시의 기능을 만들어 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2000년대 초부터 진행된 북항재개발과 동삼혁신지구 해양클러스터 프로젝트일 것이다.
북항재개발 프로젝트는 2008년부터 시작되어 현재 1단계 지역에서 건축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적인 장소를 기반으로 창업, 미디어, 문화까지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도시 공간 프로젝트로 자리매김 중이다. 2024년 이순신대로가 개통되면서 시민의 접근과 활용이 제한되었던 북항은 도시민을 위한 친수공간으로 활용되기 시작하였으며 1부두와 같은 기존의 항만시설은 다양한 이벤트 공간이자 시민들의 활동과 참여의 공간으로 변화되었다. 더불어 북항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기반으로 유네스코세계유산위원회 유치 장소로 제안되고 있다. 앞으로 2, 3단계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부산 북항의 모습은 해양도시의 산업유산을 기반으로 한 미래 해양도시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장소가 될 것이다. 그리고 2004년부터 시작된 동삼혁신지구 해양클러스터 조성사업은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국립해양조사원 등 17개 해양·수산 관련 공공기관이 이전하면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해양정책, 해양과학기술, 해양인력양성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으며 해양 관련 산학연구 활동의 주무대가 되고 있다.
2011년 당시 필자가 설계사무소에 다닐 때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이전을 위해 진행한 공간 기획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던 본원을 방문하여 인터뷰를 진행하고 현재 인원과 향후 늘어날 인원들을 계산하고 연구실, 사무실, 그 외 필요 공간을 조사했다. 이를 기반으로 동삼혁신지구 대상지의 입지 조건에 맞는 기획 설계를 진행했다. 인터뷰 때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부산으로 이전함으로써 함께 일하는 민간연구기관들도 부산 지역에 이전 계획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히 공공기관 하나가 부산으로 내려오는 것이 아닌 연쇄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정말 큰 프로젝트임을 직감하게 됐다. 이후 영도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해양클러스터에 공공기관과 지역사회 공헌에 대한 다양한 활동을 함께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부산 지역 소상공인들 디자인 지원프로젝트, 복지기관과 연계한 취약계층 자녀들을 위한 생일파티 케이터링 서비스, 지역마켓 기관연수원 참여 지원 등을 진행해 공공기관의 지역사회 공헌 부분까지 연계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최근 이슈인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은 새로운 도시 발전의 원동력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앙행정기관인 해양수산부가 지역에 상주함으로써 정책 수립과 집행의 중심지가 되고, 관련 산하기관을 비롯해 해양 관련 연구소, 협회, 기업들이 집적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더불어 공무원, 연구 인력, 정책 담당자들의 유입으로 인한 소비 증대와 고급 인프라 수요 증가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도 부산의 새로운 활력이 될 것이다. 동삼혁신지구의 공공기관 이전과 같이 관련 기업, 로펌, 컨설팅 업체 등 정책 수요 기반 산업이 동반 이전을 통해 일자리 부분도 확대될 것으로 기대된다. 자연스럽게 국제 해양 기구 유치, 국제 해양 박람회 개최 등 글로벌 마케팅 효과도 클 것이다. 앞으로 ‘부산=해양도시’라는 브랜드 구축으로 외국인 투자 유치 및 국제 교류도 확대되어 다양한 활동과 새로운 변화에 대한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이미 해양 관련 연구 기관과 관련 학교, 공간까지 구축된 부산에 해양수산부까지 이전함으로써, ‘해양수도’라는 의미가 새롭게 부산을 만들어 나갈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2025년이 기대된다.
2025-07-01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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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지속 가능한 에너지와 정책
‘지속 가능한 발전’은 매우 익숙한 개념이 되었다. 그것은 1987년에 ‘우리 공동의 미래’라는 보고서에서 처음 언급되었고, 1992년에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된 유엔환경개발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지속가능한 발전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째는 자연환경이 수용할 수 있는 능력에 위협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개발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며, 둘째는 미래 세대의 필요를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재 세대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원자력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첫 번째 기준은 통과할지 몰라도 두 번째 기준에 부합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원자력발전소(원전)는 방사성폐기물을 남기기 때문이다. 원전은 생로병사의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각종 폐기물을 내놓는다. 원전을 아무리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관리하더라도 폐기물 문제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미래 세대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다.
방사성폐기물은 방사능의 세기에 따라 저준위, 중준위, 고준위 폐기물로 나뉜다. 저준위 폐기물에는 장갑, 덧신, 걸레 등이, 중준위 폐기물에는 방사선 차폐복, 원자로 부품이 포함된다. 고준위 폐기물은 주로 사용후핵연료를 지칭하며 핵분열 생성물의 농축 폐액도 여기에 속한다. 고준위 핵폐기물의 보존 기간은 100만 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방사성폐기물을 처분하는 장소가 바로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이다. 경주에 설치돼 있는 방폐장은 중·저준위 방폐장에 해당하며 아직 고준위 방폐장은 마련돼 있지 않다. 고준위 폐기물은 임시저장 시설에서 보관 중인 단계에 있는데, 문제는 해당 시설의 용량이 포화되는 시기가 임박했다는 점이다. 게다가 앞으로 폐쇄되는 원전이 계속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 고준위 폐기물의 처분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올해 3월에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고 하니 그 귀추가 주목된다.
많은 사람들은 원자력이 경제적이라는 점을 거론한다. 주지하듯, 원전의 발전 단가(전기 1kWh 생산하는 데 드는 비용)는 매우 저렴하다. 그러나 방사성폐기물을 처리하는 비용을 포함시키면 어떻게 될까? 또 원전이나 방폐장의 부지를 확보하는 데도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유발된다. 이러한 점을 추가한다면, 원전 위주의 에너지 정책은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지속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에너지 수요에 맞추어 원전을 계속 증설하는 것은 너무 쉬운 정책이다. 건설 중이거나 가동 중인 원전은 알뜰하게 사용해야겠지만, 신규 원전의 건설은 가급적 자제할 필요가 있다. 2017년에는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가 구성되어 시민참여단 숙의를 바탕으로 신고리 5·6호기의 건설을 재개하되 원자력발전은 점점 축소해야 한다는 합의가 도출되기도 했다. 친원전 진영과 반핵 진영에게는 모두 못마땅한 결론이었지만, 시민참여단은 일련의 학습을 통해 지혜로운 판단을 내렸던 셈이다. 많은 국가가 고민하는 것은 ‘에너지 믹스’ 혹은 ‘에너지 포트폴리오’이다. 화석연료에 의한 에너지 생산을 점점 줄여나간다는 전제하에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어떻게 가져가느냐의 문제이다. 좋은 에너지의 조건으로는 경제성, 안정성, 환경친화성, 안전성 등이 거론된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에너지에 몰입할 것이 아니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계속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원자력공학과는 에너지공학과로 재편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하나의 에너지만 공부하다 보면 균형 감각을 확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10.5%로 집계되고 있다. 사상 첫 두 자릿수로 나아갔지만, OECD 38개 회원국 중에선 여전히 꼴찌 수준이다. 지난해 OECD의 평균은 35.8%로 우리나라의 2038년 목표를 웃돈다.
재생에너지의 단점으로는 경제성이 꼽힌다. 그러나 기술의 역사를 보면 모든 기술이 처음부터 경제성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원자력도 초창기에는 엄청 비싼 에너지였다. 어떤 기술에 계속 투자를 하고 공을 들이다 보면 그 기술이 경제성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재생에너지의 경제성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보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재생에너지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잘 가꾸어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전이 너무 정치화되었다. 원전 확대에 찬성하면 보수이고, 딴지를 걸면 진보라는 식이다. 정보 편향 때문에 복잡한 문제를 너무 간단하게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복잡한 문제는 이모저모를 따져야 하는 법이다. 다양한 출처의 정보를 종합적으로 판단하면서 현실적 방안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 공동의 미래’로 가는 길이다.
2025-06-2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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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정권 교체와 에너지 정책의 불확실성
고도로 산업화한 사회에서 에너지는 인체에서 혈액과 같은 역할을 한다. 에너지 결핍은 국가 경제의 마비를 초래할 수 있는 재앙이 된다. 따라서 각국은 에너지 자원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한편 세계 각국은 자국의 경제적·정치적 상황을 고려해 에너지 정책을 선택했고, 글로벌 현안에 발맞추어 자국의 에너지 정책을 수정하기도 했다.
2011년 동일본지진 당시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사고의 여파로 일본뿐만 아니라, 독일 등 상당수 유럽 국가에서 탈원전이 국가 에너지 정책으로 결정됐다. 경제 대국 중에서는 독일이 탈원전을 가속화해 2023년 탈원전을 완료했다.
그러나 EU 내에서 산업생산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폴란드와 체코 같은 중동부 유럽 국가들은 탄소배출 감축과 전력수요 증대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신규 원전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됐다. 게다가 2022년 발발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발생한 에너지 공급망 위기는 유럽에서 값싼 러시아산 천연가스에 의존했었던 EU회원국이 정책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국민투표로 탈원전을 결정했던 이탈리아가 올해 3월 원자력 기술 사용을 허용하는 법안을 승인했고, 벨기에도 지난달 15일 의회 의결로 탈원전 폐기를 공식화했다. 메르츠 총리가 이끄는 새로운 독일 연립정부는, 기존 독일 정부의 입장을 바꿔 EU 법률에서 원전을 재생에너지와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프랑스의 노력을 더 이상 막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글로벌 현안 변화만큼 미국 등의 국가에서는 정권 교체가 에너지정책 변화의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미국에서 전기자동차 세액공제 관련 정책은 정권마다 계속 바뀌어 왔다.
오바마 행정부는 전기자동차 이용을 활성화할 목적으로 전기자동차 세액공제 정책(제조사별 20만 대 상한, 최대 7500 USD)을 실시했다. 그러나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오바마 행정부에서 입장을 180도 바꿔서 전기자동차 세액공제 정책을 폐기하려 했다. 2018년 11월 미국 중간선거 결과 미국 하원에서 민주당이 다수당이 되어서 추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는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입법을 통해서 오바마 행정부의 전기자동차 세액공제 정책을 한층 더 강화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한 IRA를 폐지하려고 하고 있으며, 그 결과 지난달 22일 미국 하원에서 청정에너지 보조금 축소를 골자로 한 법안이 통과됐다. 결국 바이든 행정부가 추진한 IRA의 운명은 미국 상원의 결정에 따르게 됐다.
한국의 자동차기업과 배터리기업은 바이든 행정부의 IRA보조금 혜택을 받기 위해서 미국 내에서 생산시설 확충을 위한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IRA가 폐지되면 대규모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캐나다 앨버타주에서 미국 네브래스카주를 잇는 키스톤XL 파이프라인는 2008년 3월 조지 부시 행정부(공화당) 때 추진했다가, 2015년 11월 오바마 행정부(민주당) 때 폐기됐다. 그러던 것이 다시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인 2017년 1월 재개됐다가, 2021년 1월 20일 바이든 대통령(민주당) 취임 첫날 행정명령으로 다시 허가가 취소되었으나 올해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첫날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바이든 행정부의 허가 취소 행정명령을 취소해 재추진했다.
알래스카 LNG 사업도 미국 정권 교체에 따른 불확실성이 나타나고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미국의 에너지 독립과 아시아 수출 확대 전략의 핵심 사업 중 하나로 간주하며 알래스카 LNG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러나 바이든 행정부는 기후 변화 대응, 야생동물 보호구역 환경 파괴, 알래스카 원주민 공동체와 환경 단체들의 반대 등을 이유로 2024년 1월 알래스카 LNG 사업을 중단시켰다. 미국 정권 교체에 따른 리스크와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의 막대한 비용문제, 카타르, 호주,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주요 LNG 공급국 대비 가격 경쟁력 문제로, 미국 기업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알래스카 LNG 사업 참여를 주저하고 있다. 이 때문에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일본, 대만을 압박하며 알래스카 LNG 사업을 재추진하려고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을 고려할 때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추진되었다가 바이든 행정부 때 폐기되었고 트럼프 2기 행정부 때 재추진되고 있는 알래스카 LNG 사업은 향후 미국 정권교체 상황에 따라서 지속 여부가 불확실하므로 투자에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정권 교체 때마다 에너지 정책이 급변하여 불확실성이 초래되고 있는 미국의 상황은 6월 4일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한국의 에너지 정책에도 주는 함의가 크다.
2025-06-10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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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빙하 위 항로, 과학이 방향을 잡아야 한다
6·3 대선이 막을 내리면서 다음 정부의 정책 방향에 대한 관심이 전국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부산도 예외는 아니다. 여야가 팽팽히 맞서는 지역인 만큼, 각 정당은 선거 기간 동안 부산 민심을 얻기 위해 언론과 유세를 통해 다양한 공약을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받은 공약은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과 북극 항로 개척이다. 물류의 핵심 거점인 부산이 다시 도약할 수 있다는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제안이기 때문이다.
북극 항로는 북극해를 따라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새로운 해상 통로다. 최근 지구온난화로 북극해의 얼음이 빠르게 녹으면서 이 항로가 현실적인 선택지로 부상하고 있다.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 해상 통로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현재 우리 상품이 유럽으로 가려면 남중국해를 지나 싱가포르와 아라비아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통과해야 한다. 이 항로는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여러 위험 요소도 안고 있다. 남중국해는 미중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지역이며 해적 출몰도 잦다. 아라비아해 역시 소말리아 해적의 위협이 존재하고, 수에즈 운하는 이스라엘과 이슬람 국가 간의 충돌로 인해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결국 유럽으로 가는 기존 항로는 정치적 갈등, 해적 위험, 높은 통행료 등 여러 부담을 안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극 항로는 우리에게 매우 매력적인 대안이 아닐 수 없다.
북극 항로 개척, 대선 공약으로 주목
미국·러시아 등과 국제적 협력 중요
기후변화 대응 환경적 요소도 고려
극한 지역 데이터 확보·분석 노력을
하지만 북극 항로를 실제로 활용하려면 기술적 준비 외에도 해결해야 할 정치적·외교적 과제가 많다. 항로의 대부분이 러시아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속하기 때문에 러시아와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현재 러시아는 이 항로를 엄격히 통제하며 통과 허가와 통행료를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안정적인 이용을 위해서는 러시아와의 외교적 협상이 뒷받침돼야 한다. 또한 북극은 미국, 캐나다, 러시아, 노르웨이 등 여러 나라가 자원과 항로를 두고 이해관계를 얽고 있는 민감한 지역인 만큼, 국제적 협력과 규범 마련이 중요하다. 새 정부는 이러한 외교적 환경을 충분히 고려해야 할 것이다.
북극 항로를 논의할 때 환경적 요소도 간과할 수 없다. 이 항로가 가능해진 배경에는 북극 해빙의 급격한 감소가 있다. 지구온난화로 북극의 얼음이 해마다 빠르게 줄고 있으며, 이는 해운업계에는 새로운 기회처럼 보일 수 있지만 동시에 지구 생태계에는 심각한 경고다. 북극 해역은 기후를 조절하는 지구의 ‘냉장고’ 같은 역할을 한다. 해빙이 줄어들면 태양열을 반사하던 빙면이 사라지고, 더 많은 열이 바다에 흡수돼 온난화를 더욱 가속시킨다. 항로 이용이 늘어날수록 선박 운항으로 인한 환경오염, 생태계 교란, 해양 사고 가능성도 함께 증가할 수 있다. 결국 북극 항로 개발은 단순한 경제 논리를 넘어,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가능성이라는 전 지구적 과제를 함께 안고 있는 고난도 방정식이다.
따라서 북극 항로를 안정적으로 개척하고 활용하려면 북극해의 자연환경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 해빙의 계절별 변화, 해류의 흐름, 기상 패턴, 생태계의 민감성 등은 항로의 안전성과 직결되는 핵심 요소다. 북극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 많은 지역으로, 예측 불가능한 기상 변화와 해빙의 불안정성은 해상 운송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현재의 과학적 지식만으로는 북극 항로를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정보와 예측을 충분히 제공하기 어렵다. 북극의 해빙은 여름철 내내 태양이 비추고, 늦여름까지 해양이 받은 열이 최대에 이르면서 매우 불안정한 상태가 된다. 바람에 의해 쉽게 이동하고, 구름이 조절하는 복사열의 양에 따라 녹거나 늘어난다. 해빙과 바다가 맞닿은 경계에서는 대기뿐만 아니라 해양도 격렬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상황은 해마다 다르게 전개되며, 국지적인 해빙 변화 폭을 크게 해 예측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인공위성 관측과 물리 법칙에 기반한 기후 시뮬레이션이 널리 쓰이고 있는 현재에도, 북극해의 다양한 물리 현상은 여전히 과학적으로 제대로 설명되지 않고 있다.
북극 항로 개척은 여러 요소가 얽힌 복합적인 과제다. 정부가 고려해야 할 사안도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북극 해빙을 중심으로 한 과학 연구는 중요한 축을 이룬다. 극한 지역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관측 데이터를 확보하고 이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북극 항로의 시대를 앞두고, 대기·해양 학계의 발 빠른 움직임이 요구된다.
2025-06-04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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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사기 없는 세상, 신뢰 사회로 가려면
“절대 남에게 말하지 마세요.” “지금 송금하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합니다.” 사기범들의 대사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매번 속는다. “설마 내가 그렇게 당할 줄은 몰랐어요.” 사기 피해자들의 공통된 말이다. 누군가는 고수익 투자로, 누군가는 지인의 부탁으로, 또 누군가는 말 한마디에 인생을 송두리째 잃었다. 우리 사회에 사기 범죄는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다.
최근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전국의 사기 피해 신고는 하루 평균 1000건을 넘긴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투자사기, 전세사기, SNS 쇼핑몰사기, 코인사기, 부업사기, 그리고 지인 간 금전사기까지. 사례는 너무나 다양하고, 수법은 점점 교묘해지며, 그 피해는 점점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이제는 단순히 ‘사기범’의 처벌만을 논할 수 없다. 왜 사기가 이렇게 끊이지 않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막을 수 있는지를 본질적으로 질문해야 한다.
전국 사기 피해 하루 평균 1000건 넘어
사기범 처벌 속도 늦고 피해 회복도 더뎌
법, 마음까지 규제 못 해…내면 성찰 필요
형법 제347조는 사기죄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사람(타인)을 기망하여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을 얻은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또한 특별법은 피해액에 따라 가중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사기범의 처벌 속도가 느리고, 피해 회복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디지털 기술과 결합한 지능형 사기는 수사도 쉽지 않다. 사기 피해의 70% 이상에 달하는 지능형 사기의 피해자들은 분노와 무력감 속에서 좌절한다.
사기 범죄가 과거보다 더 만연한 원인으로 사회적 환경 변화에 따른 경제적 불안, 온라인 거래 활성화로 인한 사회적 디지털 환경의 변화, 처벌의 느슨함으로 인한 범죄자에게 ‘리스크 대비 수익이 높은’ 범죄로 인식되는 현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태도가 가져온 사회적 신뢰 저하 등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원인에 대해 첫째, 진화하는 사기 범죄에 대응하여 법과 제도의 정비를 통하여 사기 범죄에 대한 처벌 강화, 범죄수익의 박탈, 피해회복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 디지털 범죄 대응 전담 기구의 확대와 기술적 감시 시스템이 요구된다. 둘째, 금융·디지털 문해력 교육 강화가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금융과 디지털 문해력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성인을 대상으로도 지속적인 예방 교육이 필요하다. 셋째, 온라인 플랫폼 책임 강화가 필요하다. 중고 거래 앱, SNS, 투자 플랫폼 등 사기 발생 가능성이 높은 온라인 환경에 대해 피해 보상 제도를 포함한 운영자의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넷째, 신뢰 회복을 위한 사회, 문화적 변화가 절실하다. 이익보다 양심, 경쟁보다 연대의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정직이 손해가 되지 않는 사회, 타인을 속이기보다 배려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사기는 설 자리를 잃는다.
위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기의 근절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한계는 ‘법의 예방 기능’만으로는 부족함을 의미한다. 법은 ‘범죄 이후’에 개입할 수 있지만,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적 기획’이 따로 필요하다. 사기 범죄의 심리적 본질을 불교의 통찰, ‘탐·진·치’에서 참고해 볼 수 있다. 불교는 인간의 고통과 악행의 뿌리를 ‘탐욕(탐), 분노(진), 어리석음(치)’의 세 가지 독으로 설명한다. 사기 범죄 역시 예외가 아니다. 피해자는 쉽게 돈 벌고 싶은 마음으로 유혹에 빠지고, 사기범은 더 많은 이득을 탐해 범죄를 저지른다(貪·탐). 사회에 대한 불만과 분노는 “나만 당할 수 없다”는 방식으로 또 다른 피해자를 낳는다(瞋·진). 경계심 없는 어리석음은 사기를 반복하게 만든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는 부족하다(癡·치). 법은 이러한 마음의 문제를 직접 규제하지 못한다.
사기 예방의 최후 방어선은 ‘나 자신의 판단력’이다. “나한테만 너무 좋은 기회는 없다” “믿고 싶은 마음을 경계하라” “모르면 물어보라”는 단순한 원칙이 사기를 막는다. 불교에서 말하는 ‘보시(나눔)’ ‘자비(공감)’ ‘지혜(통찰)’ 중 ‘지혜’는 단지 수행의 덕목이 아니라 현대사회 범죄 예방의 또 하나의 실질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사기를 줄이기 위해선 속이는 사람을 막는 법과 속지 않는 사람을 만드는 교육,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내면의 성찰이 함께 작동해야 한다.
사기는 단순한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행위이며, 공동체를 파괴하는 해악이다.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선진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경제성장뿐 아니라 ‘신뢰 사회’로의 도약이 병행되어야 한다. 사기에 대한 단호한 대처와 함께, 정직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적 토양을 마련하는 일, 그것이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과제다. 누군가가 “돈을 쉽게 벌 기회가 있다”고 귀에 속삭인다면, “변호사나 전문가에게 물어 보고 답해주겠다”고만 해도 사기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2025-05-27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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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50+ 세대’ 곱하기 0.7
부산의 인구는 현재 325만 명을 조금 넘는다. 그 중 중장년 이상이 46%로 인구 절반을 차지한다. 부산 인구에 관련된 연관어도 인구 소멸, 2025년 초고령 사회 진입, 노인과 바다 등이 주로 거론된다. 하지만 암울한 데이터들과 달리 현장에서 만나는 50~64세 장년층인 이른바 ‘50+ 세대’의 활동력을 보면 과연 암울함만 존재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최근 새로운 소비문화의 중심으로 ‘50+ 세대’를 주목한다. 1970년을 전후해 태어난 세대는 10대 자녀와 비슷한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고 있다. 온라인명품쇼핑몰 고객 중 ‘50+ 세대’ 비율이 약 45%를 차지한다. MZ세대를 주요 고객으로 삼던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이제 자연스럽게 ‘50+ 세대’가 주 고객으로 자리매김 중이다. 방탄소년단을 좋아하는 덕후 중에도 이 세대는 빠지지 않는다. 방탄소년단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자연스럽게 10대들과 교감한다.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 세대는 어떠한가? 사회 활동 및 소비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세대로서 취미, 여가 생활 등 자기만족을 위한 소비를 즐기는 중장년 남성 ‘골드 파파(Gold Papa)’, 제2의 전성기를 맞아 돈을 아끼지 않는 세련된 노년 여성 ‘어반 그래니(Urban granny)’ 등 초고령화 사회이지만 여전히 활동력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연령대가 ‘50+ 세대’인 것이다. 요즈음은 나이도 자신 나이에 0.7을 곱한 활동 나이, 즉 사회적 나이에 초점을 맞추는 추세다. 필자도 계산해보니 30대가 된다.
부산시는 액티브 시니어인 장노년층에 초점을 맞춘 센터들을 운영 중이다. 부산시는 2030년까지 60세 이상 고용률을 45%로 높이는 것은 물론 장노년층 일자리도 대폭 늘릴 계획이다. 13만 명 이상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온라인 플랫폼인 장노년일자리센터와 지역 거점공간 중심의 우리동네ESG센터를 운용 중이다. 그 외 신노년 세대의 소통과 교류, 친목 형성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한 노후 생활을 지원하는 하하센터 등이 있다. 그중 장노년일자리센터를 살펴보니 전문적인 일자리보다는 경비원, 미화원, 생산직, 주차관리원 등 한정된 일자리에 대한 구인구직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각종 커뮤니티, 인생학교 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좀 더 양질의 일자리와 정보의 확장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이를 위해 퇴직한 시니어를 위한 기술 중심의 직무교육 제공과 함께 일자리를 연결하는 천직(1000jobs) 일자리 플랫폼을 벤치마킹 했으면 한다. 정보 전달 방식도 통일된 이미지와 짧은 길이의 영상 콘텐츠 중심으로 개선한다면 민간 기업의 참여를 높이고 좀 더 양질의 일자리까지도 담을 수 있는 플랫폼으로 변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우리동네 ESG센터는 지역적 특성, 기업 참여, 탄소발자국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기반으로 운영 중에 있다. 현재 지역마다 유형을 조금씩 달리하여 핵심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다양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올해 오픈한 영도센터의 경우 기본적으로는 재생 플라스틱의 활용과 시제품 생산 그리고 자원순환 프로그램은 유지하되 지역 카페와 연계해 커피박을 활용한 제품과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지역성을 반영한 아이템으로 서로 다른 활동력을 보인다면 지역마다 다양한 활동들을 기대할 수 있다.
이제 ‘50+ 세대’의 활동력을 반영한 정책과 프로그램은 시작되었다. 다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세밀한 기획들이 조금 더 필요한 때다. 중앙동 소재 한 게스트하우스 대표가 털어놓은 경험담이 생각난다. 서울에서 내려와 사업을 준비하던 그는 게스트하우스 사업 초기에 주변 상인들의 소개를 받아 보일러 공사를 의뢰했다. 그런데 공사 당일 온 작업자가 70대 어르신이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엘리베이터가 없다 보니 4층까지 계단으로 혼자서 큰 보일러를 옮길 수밖에 없었기에 “어르신은 못 하신다”라고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왜소한 몸집의 그 어르신은 “걱정 말라고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했지만 부상을 염려해 쉽게 작업을 진행하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수십 분의 실랑이 끝에 어르신은 작업을 시작했다. 어르신은 허름한 이불 몇 장을 보일러 밑에 깔아 요리조리 움직이더니 4층까지 손쉽게 옮기고 공사도 깔끔하게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지금까지 보일러는 잘 작동되고 있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 대표는 당시 자신의 선입견 때문에 보일러 공사 전문가인 어르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털어놨다. 어쩌면 우리는 전문적인 지식과 오랜 세월 동안 체득한 현장 노하우를 가진 노년층을 단지 외모와 나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아닐까? 사회적 나이로 치면 아직도 왕성한 ‘50+ 세대’를 위한 세부적인 맞춤형 정책들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
2025-05-2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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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양자역학 100년과 닐스 보어
올해는 양자역학이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이에 발맞추어 유엔은 올해를 ‘세계 양자과학기술의 해’로 정했다. 세계 곳곳에서 양자역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필자가 속한 한국과학사학회도 지난 4월 26일 개최된 춘계학술대회에서 양자역학 100년을 돌아보는 특별 세션을 마련했다.
양자역학은 1925년에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의 두 갈래로 세상에 태어났다. 1925년 7월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했고, 그것은 1926년 3월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을 저자로 하는 소위 ‘3인 논문’으로 진화했다. 슈뢰딩거는 1925년 12월 양자 현상에 대한 파동방정식을 구상했으며, 1926년 1월 파동역학의 탄생을 알린 첫 논문을 발표했다. ‘양자역학’이란 용어는 보른이 처음 사용했고, 슈뢰딩거는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이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증명했다.
양자역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플랑크, 아인슈타인, 보어, 조머펠트 등을 만나게 된다. 플랑크는 흑체복사를 설명하기 위해 1900년 ‘플랑크 상수(h)’를 도입했고, 아인슈타인은 1905년 플랑크 상수를 활용해 ‘광전효과’를 멋지게 분석했다. 보어는 1912년 전자가 일정한 궤도를 따라 운동한다는 ‘궤도 모형’을 통해 수소의 선스펙트럼을 설명했으며, 그것은 1916년 ‘보어-조머펠트 원자모형’으로 거듭났다. 1900~1912년 양자가설, 1912~1925년 고전 양자론, 1925년 이후가 양자역학의 시대로 평가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처음에는 가설에 불과했던 것이 학자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이론이 되었고 결국 수학적 표현을 갖춘 역학의 수준에 이르렀던 셈이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인물은 닐스 보어(1885~1962)이다. 보어는 당시 과학의 주변국이던 덴마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1년 코펜하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로 갔다. 전자를 발견한 조지프 톰슨 밑에서 1년 정도 수학하다가 뉴질랜드 출신인 러더퍼드가 재직 중이던 맨체스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러더퍼드는 알파입자 산란실험을 바탕으로 1911년 원자핵이 중심에 있고 전자가 핵 주위를 회전한다는 ‘행성 모형’을 제안한 바 있었다. 보어는 행성 모형이 전자기학과 모순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의 궤도 모형을 개발했다. 보어는 1916년 30세의 나이로 코펜하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21년에는 덴마크 정부와 칼스버그 양조회사의 지원을 바탕으로 코펜하겐 대학에 이론물리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보어는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성심껏 운영했으며, 이에 따라 이론물리학 연구소는 ‘보어 연구소’로 회자되었다.
덴마크의 보어 연구소는 독일의 괴팅겐 대학, 영국의 캐번디시 연구소와 함께 현대물리학의 산실이 되었다. 사실상 양자역학의 성립과 발전에 공헌했던 거의 모든 이론가가 1920~1930년대에 보어 연구소를 거쳐 갔다. 파울리의 배타 원리, 윌렌벡과 호우트스미트의 스핀 개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보어의 상보성 원리 등이 이 연구소에서 나왔다. 오늘날 양자역학에 대한 주류 해석으로는 ‘코펜하겐 해석’이 꼽히는데, 여기서 코펜하겐은 다름 아닌 보어 연구소를 지칭한다.
보어 연구소의 독특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용어로는 ‘코펜하겐 정신(Copenhagen spirit)’이 자주 사용된다. 그것은 격식을 따지지 않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의미한다. 보어는 한참 아래의 젊은이들이 어떠한 의견을 내더라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산책하면서 젊은 과학자와 단둘이서 자유로운 대화를 즐겼던 사람도 보어였다. 이 때문에 보어 그룹은 ‘소요학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보어가 내건 거의 유일한 규칙은 “어느 누구도 모국어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보어 연구소를 거쳐 간 인물 중에는 일본 현대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시나 요시오도 있다. 그는 1923~1928년 보어 연구소에서 공부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코펜하겐 정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니시나는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연구 업적을 남겼고, 이화학연구소(리켄)에서 핵심적인 관리자로 활동했으며, 자유로운 토론과 적절한 격려로 후학을 양성했다.
조지프 톰슨의 아들로 193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조지 톰슨은 보어가 과학계에 미친 공헌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출판된 논문만을 가지고 보어가 과학계에 끼친 영향을 전부 평가할 수는 없다. 그는 갈릴레오와 뉴턴 이래 가장 근본적인 과학의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세계의 많은 과학자들이 보어의 뛰어난 업적에 무한한 찬사를 보냈으며,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애정을 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점이 그의 과학적 업적보다 더 중요하다.” 보어는 세대 간에 다리를 놓고 다음 세대를 키워낸 훌륭한 스승이자 리더였다.
2025-05-13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