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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청년세대의 분노
지구촌 곳곳에서 청년들의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가 도미노처럼 벌어지고 있다. 2025년 9월,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는 젊은 세대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정부가 페이스북, 유튜브, X(옛 트위터) 등 26개 주요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차단하자, 그동안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청년세대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통신인프라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네팔에서 SNS는 국내 상거래와 소통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해외 일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식구들과의 안부교환의 창구이기도 하다. 정부의 산업정책 부재로 인구의 60% 이상이 30세 미만인 네팔에서 청년 실업률은 20%를 넘는다. 해외 노동이 일상화한 사회, 국내 일자리의 부족, 기성 정치권의 부패와 무능은 젊은 세대에게 “이 나라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냉소를 심어주었다. 그런 와중에 정치 엘리트와 그 자녀들의 호화로운 생활이 SNS를 통해 확산되자, 청년들은 ‘네포키드’(Nepo Kid)라 불리는 특권층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분노한 청년세대의 시위 속에서 정권은 붕괴되었다.
개발도상국에서 청년의 분노는 네팔에서만 그치지 않고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분출하고 있다. 모로코에서도, 마다가스카르에서도, 기존 사회 시스템에 좌절한 청년세대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이와 같은 청년들의 울분은 개발도상국 뿐만 아니라 선진국에서도 서서히 끓어 오르고 있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 C‘est Nicolas qui paie(세 니콜라 끼 빼: “돈 내는 건 니콜라야”라는 뜻)”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하고 있다. 이 해시태그 속의 ‘니콜라’는 특정 인물이 아니다. 그는 프랑스 대도시에서 일하며 세금을 성실히 내는 30대 중반의 직장인, 중산층 근로자의 전형이다. 그는 국가의 복지제도와 세금 구조 속에서 끊임없이 돈을 내지만, 정작 본인은 주택 구매의 어려움, 임금 정체, 불안한 미래 속에 살아간다. 그가 내는 세금이 은퇴자 복지나 사회보장제도로 흘러가지만, 자신의 삶에는 실질적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체감이 “니콜라가 낸다”라는 자조 섞인 표현으로 드러난다.
이 표현이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프랑스 사회의 세대 간 불균형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통계청(INSEE)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근로 세대의 실질 생활 수준은 사상 처음으로 은퇴 세대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부모 세대가 누리던 안정된 직장과 연금, 저렴한 부동산 가격은 이제 젊은 세대에게는 ‘과거의 유산’이 되었다. 반면 청년층은 높은 세금과 불안정한 일자리, 상승하는 집값을 동시에 감당하고 있다. ‘니콜라’의 불만은 단순한 세금 부담이 아니라, “기회가 닫힌 세대”라는 인식의 결과다.
대부분 선진국에서 인구감소 현상에 따라서 선진국 청년세대는 자신들 세대보다 인구가 많은 노년층의 연금 등 복지를 과도하게 부담하게 되었다. 또한, 선진국의 청년세대는 정치권의 기성세대용 선심 쓰기로 확대되어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국가부채 역시 떠안게 되었다. OECD의 2023년 통계에 따르면, 일본의 국가부채는 GDP대비 228%, 미국은 121%, 프랑스는 116%, 독일이 63%이다.
한국도 2007년 국가부채가 25%에서 2023년 48%로 빠르게 증가하였다. 그리고 인구감소로 한국의 청년세대는 자신들 세대보다 인구가 많은 기성세대를 부양해야 하며, 부동산 가격은 폭등하여 내 집을 마련하기 어려워졌고, 경제구조는 고도화되어 더 이상 예전처럼 일자리를 찾기 쉽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에 비해 부동산 비용과 교육·육아 비용도 폭등하였다. 그 결과 한국의 청년세대는 비혼 및 저출산을 선택하여 한국 사회는 서서히 소멸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선정한 HK(인문한국)3.0사업단 중 국내에서 유일하게 청년 아젠다를 연구하는 국립부경대 이보고 HK3.0 사업단장은 청년 이슈에 대한 기성세대의 이해와 접근 방식을 철저하게 바꾸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이 단장에 따르면, “현재 기성세대는 청년을 대상화하고 이를 병리현상으로 치부해서 관련 문제를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러나 청년은 우리 사회의 거울이며, 오히려 청년을 통해서 우리 사회의 모순을 보다 빠른 경로로 구체화하고 그 실체에 다가갈 수 있다”고 조언하고 있다.
청년세대는 한 사회의 미래를 열어갈 세대다. 청년세대가 좌절하여 주저앉으면 더 이상 그 사회의 미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기성세대들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애써 청년세대의 울분에 눈을 감아왔다. 여러 달콤한 명분을 내세워 빚까지 떠넘겨 왔다. 청년세대의 분노는 이제 임계점에 다다랐다. 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방안부터 최우선으로 고민해야 할 때다.
2025-10-2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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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하주의 AI 톡] 인공지능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
지난 몇 년간 “세종대왕이 맥북프로를 던졌다”는 우스개가 인터넷을 돌아다녔다. 초기 버전의 챗GPT가 “세종대왕의 맥북프로 던짐 사건에 대해 알려줘”라는 질문에 대해 마치 고증이 끝난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인물·장소·정황을 들어가며 구체적으로 답변한 것이다. 이후 해당 사례는 생성형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잘못된 정보를 가리키는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의 전형적 예시로 회자되었다.
할루시네이션은 원래 정신의학에서 환각을 뜻하지만, 인공지능 분야에서는 근거 없는 내용을 사실처럼 생산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인물·문서·사건을 실제처럼 진술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문장은 매끄럽고 논리도 그럴싸하지만, 그 근거는 허공에 떠 있다. 이 문제는 챗GPT로 대표되는 텍스트를 생성하는 대형 언어모델(LLM)뿐 아니라 이미지·동영상 등 멀티모달 생성 모델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챗GPT를 개발한 오픈AI가 지난달 발표한 논문에서는 이 문제의 핵심 원인을 인공지능의 학습 체계에서 찾았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여 텍스트 생성 모델을 내부적으로 만들어 낸다. 이 모델은 사용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만들면서 “다음에 올 단어를 가장 잘 예측하는 방식”으로 동작한다. 이때 예측의 결과값이 불확실하면 인공지능은 ‘모른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가장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 내는 것’에 보상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학습했다는 것이다. 독자들도 학창 시절 시험을 치를 때 정답을 모르는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보다는 무엇이라도 쓰는 편이 더 나은 점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인공지능은 정답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럴듯한 문장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때로는 천연덕스럽게 허구를 ‘사실처럼’ 제시하게 된다. 이 논문은 할루시네이션이 단순한 잡음이나 데이터 오류에서 초래된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에 부여한 학습 목표와 평가 설계의 결과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현실에서는 인공지능의 할루시네이션이 우스개 수준을 넘어 여러 형태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국내에서도 언론 보도용 초안에 인공지능이 지어낸 발언이 포함되어 편집 단계에서 걸러진 사례가 있고, 연구자들이 참고문헌으로 받은 목록 중 일부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되기도 했다. 공공·상업적 서비스에 인공지능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안내가 시민들의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정보가 빠르게 확산하는 환경에서 인공지능이 만들어 낸 허구가 사실로 오인되어 확산하면, 사회적 신뢰와 정책 결정의 기반 자체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면 이 같은 할루시네이션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연구와 시도가 있지만, 현 시점에 독자가 알아두면 좋을 두 가지 기술은 RAG(Retrieval-Augmented Generation)와 XAI(Explainable AI)다. RAG는 인공지능이 내부에 가지고 있는 생성 모델만으로 답을 만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대신 질문을 받으면 모델이 신뢰할 수 있는 외부 데이터베이스나 문서 저장소를 검색해 관련 자료를 가져오도록 하고, 그 근거를 바탕으로 답변을 구성하게 한다. 예컨대 법률 분야에서는 국가법령정보센터의 판례·법령을 실시간으로 조회해 답변에 인용하도록 하면, 모델이 ‘지어낸’ 판례를 만들어 낼 가능성을 크게 낮출 수 있다. 중요한 점은 RAG가 단순한 검색 보조가 아니라, 답변 생성 과정 전체에 근거를 연결해 넣도록 한다는 것이다. XAI는 인공지능의 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만들어 할루시네이션을 줄일 수 있도록 돕는다. 단순히 결과만 주는 대신, “이 답변은 ○○데이터, △△문서를 참조했고, 결론은 이러저러한 절차로 도출했습니다”처럼 근거와 추론의 경로를 보여주게 하는 방식이다. 사용자는 그 설명을 통해 인공지능의 추론이 타당한지, 혹은 그 근거가 낡거나 편향되었는지를 스스로 가늠할 수 있다. 이 두 접근법은 서로 보완적이다. RAG는 ‘무엇을 근거로 했나’를 제공하고, XAI는 ‘결론에 도달한 추론 과정’을 드러낸다. 기술적으로는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사회적 수용성과 책임성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인 방향이다.
인공지능은 강력한 ‘도구’이자 ‘동반자’가 되었지만, 그것이 생성하는 결과가 곧바로 ‘절대적 진실’은 아니다. 인공지능이 내놓는 문장들이 겉으로는 그럴듯해도, 중요한 판단에서는 항상 근거를 확인하는 습관을 지녀야 한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할루시네이션’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한편, 기술적·제도적·문화적 노력을 통해 그 피해를 줄이고 신뢰를 쌓아야 한다. 세종대왕의 맥북프로 이야기는 웃음으로 끝났지만, 다음번 인공지능의 ‘웃음’이 사회적 피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2025-10-14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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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도심항공교통과 기상 예측 기술
도심항공교통(UAM)은 대도시의 만성적 교통 체증을 완화할 혁신적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복잡한 도심 상공에서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UAM은 교통 혁신이 아니라 새로운 위험으로 전락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추진되는 ‘한국형 도심항공교통(K-UAM) 안전운용체계 핵심기술개발사업’은 단순한 기술 연구를 넘어, 우리 사회가 미래 교통에 대한 신뢰를 쌓아가는 첫걸음이다. 충돌 방지, 돌발 기상 대응, 이착륙장(버티포트) 연계 운영 등은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바로 이러한 기반이 튼튼해야 시민들은 안심하고 하늘길을 이용할 수 있다.
UAM의 안전 운항을 위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기상예보 체계의 정교함이다. 특히 UAM이 주로 비행할 대기 경계층 300~600m 고도는 지상과 대기의 상호작용이 가장 활발히 일어나며, 난류와 돌풍 같은 예측하기 어려운 현상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현재의 기상예보는 비나 눈, 큰 바람 등 전반적인 날씨 흐름을 알려주지만, 도심의 복잡한 지형과 건물 배치가 만들어내는 미세한 기류 변화까지 반영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UAM 운항은 대부분 1시간 미만의 짧은 구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상 정보는 시의적절하게 신속하게 제공되어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따라서 K-UAM 안전운용체계 핵심기술개발사업에서는 대규모 날씨 정보를 기반으로 하되, 실제 운항 고도에서 나타나는 난류의 특성과 국지적 기상 현상을 실시간에 가깝고 빠르게 예측할 수 있는 기술 개발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300~600m 비행 고도 난류·돌풍 빈번
1시간 미만 운항 신속한 기상 정보 필요
안전·신뢰성 확보 기술 개발 이뤄져야
전통적인 일일 기상예보에서 활용되는 수치 모델링 기법은 UAM 운항 보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대규모 슈퍼컴퓨터 연산을 기반으로 하는 수치 모델링은 예측 결과를 도출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며, 고작 1시간 미만으로 운항하는 UAM이 직면하는 급변하는 대기 경계층의 난류를 반영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더욱이 돌발 상황으로 운항 시간이 갑자기 변경될 경우, 기존의 경직된 예보 체계로는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난류 현상은 예측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단일 경로를 제시하는 확정적 예보 대신 발생 확률과 위험 수준을 제공하는 확률 예보 체계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즉, K-UAM의 안전한 운항을 위해서는 전통적 수치 예보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새로운 형태의 신속하고 확률 기반의 기상 예측 기술이 요구된다.
국립부경대를 중심으로 한 기상예측 연구팀은 UAM 운항에 특화된 새로운 형태의 예보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이들은 기존 기상예보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졌던 300~600m 대기 경계층의 특성을 정밀하게 파악하기 위해 최신 윈드 라이더와 지상관측 장비를 설치해 고품질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 중이다. 또한 지상 장비가 커버하지 못하는 공간은 드론을 활용해 관측망을 확장함으로써, 도시 지형의 영향을 크게 받는 대기 흐름을 다각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평균적인 대기장과 난류가 얽혀 형성하는 역학적·열역학적 구조를 규명하고, UAM 운항에 최적화된 대규모 기상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UAM이 운행하는 지역의 평균 대기장과 난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짧은 시간 안에 초단기 예보를 제공하기 위해 연구팀은 전통적인 수치 모델링 기반의 예보 방식을 넘어 AI 기반 예측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지상 및 이동 관측 장비에서 확보한 최적의 자료를 활용해 고해상도 수치 모델을 가동하고, 다양한 상황에서 생산된 대규모 기상 데이터를 토대로 인공지능 예측 모델을 훈련시킴으로써 UAM 운항 중 발생할 다양한 기상 조건에 대해 신속한 예보를 제공할 체계를 마련하고 있다.
UAM 운항에 필요한 기상 예측은 아직 연구 성과조차 거의 존재하지 않는 영역으로, 순수한 학문적 도전일 뿐 아니라 실제 운항에 적용 가능한 실용적 서비스까지 구축해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신 관측 장비의 빠른 구축과 활용, AI 기반 첨단 예측 기술의 도입, 전문가들의 사명감 있는 참여 덕분에 필요한 기술이 빠른 속도로 개발되고 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시점은 앞으로다. 기초적인 단계의 기술을 고도화하고, 수집된 기상 데이터를 실제 운항 환경에 맞게 실시간·맞춤형으로 제공하는 서비스로 발전시키며, 고객과 운영자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는 기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UAM 운항의 안전과 신뢰성을 확보하는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현재 사업단은 후속 과제에 대한 예비타당성 심사를 받고 있다. K-UAM 상용화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재정 투자와 이를 통한 기술의 고도화와 완성도 제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결국 UAM 시대의 성공 여부는 기술적 혁신뿐 아니라 사회적 관심과 관계 부처의 적극적 지원에 달려 있다.
2025-09-30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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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해양수도 부산, 균형발전의 초석
부산은 대한민국 해양수도를 목표로 오랫동안 항만·해운·물류 산업의 중심지이자 해양 무역·교류의 관문으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단순한 항만 도시를 넘어, 해양 행정 기반의 중심, 해사 사법권의 확보, 북극항로의 전략적 활용, 금융·디지털·첨단 산업의 복합 클러스터 조성까지 포괄하는 도시로 나아가고 있다. 이를 포괄적으로 지원하고, 구체화할 법적·제도적 기반이 바로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부산 글로벌허브도시 조성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특별법안’)이다.
특별법안은 제22대 국회 개원 직후 부산 지역 여야 의원 18명 전원이 공동 발의한 법안으로, 지역 과제를 넘어 국가 전략 과제로 인식되고 있다. 특별법안 제1장 제1조, 제2조는 부산을 국제물류·국제금융·디지털 첨단산업의 글로벌 허브도시로 규정하며, 제4조와 제5조는 국가와 부산시의 각자 책무와 상호 협력을 명시하였다. 이어 제2장은 추진체계, 제3장은 물류·금융·산업 기반 조성, 제4장은 글로벌 교육·생활·문화·관광 환경 조성, 제5장은 특구 입주기업과 파견 인력 지원, 제6장은 재정 지원 및 특별회계 설치 근거 등을 담고 있다. 즉, 단순한 선언이 아닌 진정한 해양수도를 향한 구체적 법적 틀로 설계되어 있다.
해사법원·북극항로 등 현실화 위해
글로벌허브특별법 조속히 통과돼야
부산만이 아닌 국가 전체 성장 효과
법안이 통과되려면, 우선 법안이 ‘부산만을 위한 특혜법’이라는 시각과 오해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컨대 가덕도신공항 개항과 북항 재개발은 수도권 항공 수요 분산과 동남권 물류 혁신을 동시에 가능케 하며, 북극항로 개척은 인천항·광양항 등과의 협력 구조를 강화한다. 또한 금융·디지털 첨단 산업 육성은 대구·광주·세종 등 타 도시와 연계를 통한 각 지방 도시의 가치 상승을 견인하여, 특정 지역이 아닌 국가 전체가 성장하는 파급효과를 낳는다.
법적 시각에서 볼 때, 특별법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하다. 해사법원 설치나 조세·금융 규제 특례는 행정명령이나 조례로는 제한적이고 반드시 국회 입법을 통해야 완성된다. 이는 특정 지역을 위한 편의가 아니라, 헌법상 균형발전과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필수적 절차다.
지역의 정치적 합의와 시민적 열망도 뚜렷하다. 부산 지역 국회의원 전원이 공동발의에 참여했고, 부산시는 범시민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시민·기업·학계가 함께 법안 통과를 촉구하고 있다.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는 ‘글로벌허브특별법으로 열어가는 북극항로 시대’라는 주제로 기대 효과와 보완 과제가 논의되었으며, 해양수산부 장관은 동남권투자공사 설립 구상을 발표해 제도적 기반에 힘을 더했다. 이는 부산만이 아니라, 전국적 자본 흐름을 유도하여 투자 활성화로 이어질 수 있다.
타 도시의 입장을 고려하면, 부산의 도약은 곧 국가 균형발전의 촉진제다. 수도권 일극 체제를 완화하지 않으면 지방의 자생적 성장도 불가능하다. 부산이 글로벌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면, 인천은 항공·물류 협력, 대구는 메디컬·소재산업 연계, 광주는 AI·에너지 협력, 울산은 조선·에너지 산업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타 도시를 향한 진정성 있는 설득이 필요하고, 이러한 부산 시민의 목소리가 곧 국가 균형발전의 시작이다.
결국 이 법안은 ‘부산만을 위한 특별법’이 아니라, 헌법 제119조 제2항의 경제민주화, 제122조의 국토균형발전 명령을 구체화하는 ‘균형발전을 위한 국가적 법률’이다. 부산의 해양수도 비전은 이미 준비되었다. 국회가 해야 할 일은 이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해양수도 부산, 해사법원, 북극항로, 글로벌 금융·물류 허브 이러한 모든 구상은 특별법으로 완성될 때 비로소 부산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의 도약이 된다.
나아가 법안의 통과는 대한민국의 성장축을 다변화하고, 동북아 해운·물류 질서 변동에 선제 대응하기 위한 국가적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국회는 더 이상 논의 지연으로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고, 법안의 세부 설계와 문제점에 대해 신속하고 투명한 심사를 거쳐야 할 것이다. 특별법의 가치의 조절은 ‘무엇을 허용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관리하고, 추진하느냐’에 달려 있다. 북극항로라는 국제 환경의 변화, 해사 분쟁 해결 능력 확보, 글로벌 금융·물류 허브를 통한 산업 재편은 기회이자 시험대다. 지방정부는 ‘균형발전’이라는 설득의 논리를 가지고 타 도시와 국회를 설득하여 이 기회를 제도적 안정성으로 연결해야 한다. 국회는 신속하되 정교한 입법으로 부산의 잠재력을 국가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 시간을 끌 여유가 없다.
지금 부산은 선택의 기로에 있다. 해양 유관기관을 포함한 해양수산부 이전, 해사법원 설치, 글로벌 금융·물류 허브를 지원할 특별법 통과가 완성될 때, 비로소 해양수도 부산의 시작이다. 이를 위한 모든 주체의 책임감 있고 속도감 있는 행보를 촉구한다. 부산이 국가의 지역 균형발전 촉매제로 등장할 때다. 부산의 도약은 국가 균형발전의 초석이자,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2025-09-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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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도시+디자인, 부산다움의 시작
얼마 전 일본 규슈의 작은 도시인 미야자키를 방문한 적이 있다. 미야자키는 부산에서 후쿠오카를 경유하여 일본 국내선을 타고 다시 40분을 가야 도착하는 작은 도시이다. 지역의 건축가들과 함께 도시를 답사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특산물인 삼나무로 지은 철도 역사였다. 역사의 주요 구조뿐만 아니라 역 내부에 위치한 자전거 거치대까지 삼나무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지역의 뜨거운 여름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회랑 같은 역사의 넓은 공간은 지역 축제를 비롯하여 어린이 집 전시회 등 다양한 지역 활동의 주 무대로 활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의 플랫폼은 기차를 타는 기능 외에 도시를 내려다보는 전망대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마치 건축물 하나로 미야자키 전체를 설명하는 듯하였다. 이것이 도시의 경쟁력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계디자인수도 걸맞은 실험 이어져야
다양한 분야 시민참여형 프로젝트 도입
공간의 질과 지역 미래 경쟁력 높여가길
도시의 경쟁력을 경제력이나 인구 규모만으로 평가하던 시대는 지난 듯하다. 도시의 경쟁력은 디자인과 공간의 질 그리고 활용에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는 대표적 국제 프로젝트가 바로 세계디자인수도(World Design Capital·WDC)이다. 세계디자인수도는 단순한 도시 미관이 아니라 디자인을 통해 사회·문화·경제적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냈는지에 대한 평가를 통해 선정된다. 그간 헬싱키, 케이프타운, 타이베이, 멕시코시티, 발렌시아, 세종, 상파울루 등이 세계디자인수도의 이름을 거쳐 갔다. 이들 도시는 디자인을 사회 혁신의 도구로 활용했다. 예컨대 2012년 헬싱키는 ‘시민 생활 중심 디자인’을 기치로 내걸며 공공도서관과 공원, 교통 체계를 시민 눈높이에 맞게 개선해 북유럽식 복지 도시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2014년 케이프타운은 남아공 특유의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디자인으로 풀어내려는 도전을 시작했다. 불평등한 도시구조 속에서 시민 참여형 거버넌스를 강화하며 ‘디자인이 사회통합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다. 2016년 타이베이는 첨단 ICT 기술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시티 구축과 생활밀착형 공공디자인 확대를 통해 아시아 도시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2018년 멕시코시티는 역사와 문화자산을 보존하면서도 공공공간을 재편해 시민의 일상 경험을 바꿔냈다. 2022년 발렌시아는 해양도시로서 지속 가능한 건축·도시디자인 전략을 내놓으며 유럽 지중해 도시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 같은 해 세종시는 스마트 행정도시라는 특수성을 기반으로, 시민 참여형 공공디자인 정책을 강화해 한국형 도시디자인 모델을 구축했다. 가장 최근 2024년 선정된 브라질 상파울루는 세계적 대도시의 인프라 문제를 디자인으로 재구성하며 사회적 불평등 개선까지 시도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된 도시들은 핵심 키워드를 기반으로 도시혁신의 실험장이자, 도시의 새로운 경쟁력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이제 부산이 그 깃발을 이어받았다. 세계디자인수도 선정으로 부산 또한 도시의 정체성과 경쟁력을 새롭게 디자인할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핵심 키워드, 지역적 특성, 그리고 시민, 디자이너들의 참여와 역할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해양이라는 핵심 키워드 하나만으로 연결되는 디자인은 무수히 많다. 북항 재개발, 영도 해양관광벨트, 수영만 요트경기장 일대 등 주요 공간별로 어떻게 디자인할 것인지, 해양 친화적 건축은 무엇인지, 친환경 해양 레저 인프라를 위한 방법은 없는지 등이다. 그 외 해양 생태와 공존하는 도시디자인, 기후 위기에 대응하는 해양도시 모델 등 각종 키워드를 연결하는 다양한 디자인 활동들이 필요하다. 또한 지역적 특성을 살린 다양한 디자인이 요구된다. 원도심만 보더라도 과거의 흔적과 쇠퇴가 공존하는 곳이다. 영도·초량·동구 일대는 항만과 철도의 기억을 품고 있지만, 인구 유출과 상권 침체로 활력을 잃고 있다. 역사적 맥락을 보존하고 항만 지역의 역사 문화자원들을 중요한 매개물로 삼아 지역에 새로운 기능을 덧입히는 건축적 재생 전략이 필요하다.
더불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부분은 디자인은 전문가의 영역이지만, 그 결과는 시민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부산이 세계디자인수도로서 진정한 성과를 위해 시민참여형 도시디자인 프로젝트가 많았졌으면 한다. 과거 부산에서 이루어진 공공디자인 프로젝트인 ‘광복로의 광복’ ‘미로미로 프로젝트’ ‘산복도로 일번지’처럼 주민과 디자이너들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생활권 단위의 공공건축, 15분 도시, 교통체계, 공공디자인, 해양산업디자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참여형 프로젝트가 만들어졌으면 한다. 부산의 세계디자인수도 선정은 도시의 ‘외형적 치장’이 아니라 도시의 경쟁력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회이다. 과거와 현재, 지역과 장소, 시민과 전문가가 함께 엮어내는 디자인 실험을 통해 지속 가능한 도시, 부산다움의 시작점을 제대로 구축하길 기대한다.
2025-09-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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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인공지능, 어디까지 왔나
인공지능(AI)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크다. 10년 전만 해도 남의 일 같았던 인공지능이 이제는 우리의 일상 속으로 성큼 다가왔다. 어떤 계기를 통해 인공지능이 우리와 가까워졌을까? 인공지능의 경로는 어떤 방향으로 구성되어야 할까?
첫 번째 계기는 2016년 3월에 있었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었을 것이다. 이세돌은 1승 4패를 기록했고, 그 1승은 바둑에서 인간이 인공지능을 이긴 마지막 사례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인상 깊었던 것은 제2국과 제4국이었다. 제2국에서 알파고는 인간의 예상을 빗나간 수를 두어 ‘신의 한 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제4국에서는 이세돌이 기보에는 없는 이상한 착점으로 알파고를 이겼다. 인공지능이 기존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데는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는 점과 인공지능이 돌발 상황에서는 무기력할 수 있다는 점을 동시에 보여준 사건이었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알파고 대국은 구글이 검색 엔진을 넘어 인공지능으로 나아간다는 선언이었다. 구글은 인공지능 벤처기업인 딥마인드를 인수해 구글 딥마인드를 차렸고, 구글 딥마인드는 알파고 대국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여기서 ‘딥’은 다름 아닌 딥러닝을 뜻한다. 딥러닝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힌턴은 작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구글 딥마인드의 최고경영자인 데미스 허사비스는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허사비스는 알파고 대국에 등장한 인물인데, 이후에 알파고 시리즈를 알파폴드로 변환하여 인간 단백질의 구조를 계산하는 데 사용했다.
두 번째 계기로는 오픈AI가 챗GPT를 선보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챗GPT는 2022년 11월에 출시된 인공지능 챗봇으로 출시 두 달 만인 2023년 1월에 사용자 1억 명을 확보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챗GPT는 분석형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생성형 인공지능에 해당한다. 기존 정보에 대한 분석을 넘어 새로운 정보를 생성하기 때문에 기획과 창작의 동반자 역할을 할 수 있다. 챗GPT를 가능하게 했던 요소로는 거대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이 꼽힌다. 엄청난 매개변수(파라미터)를 보유한 인공 신경망으로 구성되는 언어모델로 기계어가 아닌 자연어를 처리할 수 있다. 챗GPT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화제가 되었고, ‘프롬프트 엔지니어’가 유망 직종으로 부상했다.
얼마 전에는 챗GPT를 활용하여 이미지 파일을 지브리 스타일로 바꾸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다. 많은 사람이 지브리 변환에 몰두하면서 전력 수요가 급증했다고 하니, 요즘의 인공지능은 그야말로 ‘전기 먹는 하마’인 셈이다. 챗GPT의 전력 소비량은 질문 1개당 약 2.9와트시(Wh)로 구글 검색의 10배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챗GPT를 자주 사용한 사람들의 몰입도와 기억력이 급감했다는 보고도 있다.
올해 1월에는 중국산 인공지능 챗봇인 딥시크가 도전장을 내밀었다. 시선을 끌었던 점은 딥시크가 오픈소스로 공개되어 누구나 자유롭게 활용하고 성능 개선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오픈AI가 핵심 사항을 비공개로 유지하고 구글과 메타가 축소된 저사양 모델만 공개하는 방식과 대비되었다. 딥시크가 미국과 중국의 갈등 속에서 수출이 불허된 고가의 그래픽 처리 장치(GPU) 없이 제작되었다는 점도 부각되었다. 이런 식으로 딥시크는 가성비가 뛰어난 오픈소스 모델이 탄생했다는 점을 알렸다. 그것은 작은 규모의 기업이나 조직도 자체적으로 특화된 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의 언론은 딥시크의 등장을 ‘제2의 스푸트니크 충격’으로 보도하면서 잔뜩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1957년에 구소련이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하여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준 것에 비유되었던 셈이다. 우리나라로서는 미국의 유수한 빅테크가 아닌 중국의 신생 기업이 인공지능을 만들었다는 점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딥시크는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치고 말았다. 딥시크는 개인정보의 과도한 수집, 심각한 환각과 정치적 편향성, 중국 정부의 악용 가능성 등과 같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계기를 통해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가 되고 있지만, 아직 인공지능이 일상적인 상품으로 사용되고 있는 단계는 아니다. 인공지능은 완성된 기술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는 기술이며, 어떤 식의 인공지능이 상용화될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더욱 성능이 우수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 등장한다는 식의 단순한 논변을 넘어서야 한다. 과도한 에너지를 사용하는 인공지능은 바람직하지 않다. 민감한 개인정보를 침해하는 인공지능도 적절하지 않다. 우리는 어떤 인공지능을 바라는가? 그러한 요구를 반영하는 인공지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심각히 따져보고 대응해야 하는 질문이다.
2025-09-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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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의 메타경제] 개혁 없이는 균형발전도 없다
성남시장으로 재임할 때 탁월한 행정능력으로 인기를 얻으면서 전국적 정치인으로 급성장하였던 이재명 대통령이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된 지 꼭 3개월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 이전부터 현안으로 떠올랐던 몇 개의 법안들이 우여곡절 끝에 최근 국회의 문턱을 넘었고, 취임 이후 가장 큰 난관으로 여겨져 온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와의 회담도 큰 고비를 넘겼다.
특히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샅바싸움은 예측불허의 위험 때문에 곤혹스러움이 예견되었지만 일단은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면서, 기존에 구상해 오던 정책 기조를 유지해 갈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로 돌아온 이 대통령은 국정과제의 기조를 다시 확인하고 개혁에 가속력을 붙여갈 것으로 예상된다.
새 정부의 개혁과제 곳곳 저항 직면
기득권 벽 넘는 것은 그처럼 어려워
해양수도 부산의 완성도 산 넘어 산
국내로 돌아온 대통령의 마음 속에는 무엇보다 개혁을 빠르게 마무리해야 한다는 절실함이 크게 다가올 것이다. 취임 3개월을 지나면서 대통령의 당초 생각과 달리 시행과정에서 달라지거나 입법이 지연되는 사례를 지켜보았고, 향후 그러한 우려들이 더 많이 생겨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사실 거의 주목받지도 또 지적되지도 않았지만, 취임 이후 가장 먼저 시행하였던 소비쿠폰의 지급부터 대통령의 의중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대통령 선거운동 당시 이 후보는 소비쿠폰을 지역화폐로 지급하겠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막상 지급하는 단계에서는, 일부 지역화폐로 지급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신용카드로 수령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개개의 국민들은 신용카드 형태의 수령이 더 익숙하여 편리한 것일 수 있지만,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전달 비용이 소상공인 대신 카드사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이용 수수료가 없거나 최소화한 형태의 지역화폐로 모두 사용되었다면 지역의 소상공인들에게 더 많은 수입이 돌어갈 수 있었을 것이고, 이것에서 파생될 승수효과까지 고려하면 지역이 잃어버린 손실은 결코 적지가 않다.
결국 방심하는 사이에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지급한 소비 쿠폰이 슬그머니 카드사의 손쉬운 돈벌이 기회로 되어 버린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처럼 어떠한 정책과 개혁이든 약간의 틈만 보이면 이익을 챙기려는 의도의 손길을 피하기 쉽지 않다. 어쩌면 지금쯤이면 이 대통령도 소비 쿠폰의 사례를 통해 성남시장과 대통령의 업무 사이에 놓여있는 긴장감의 차이를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는 단체장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을 명확하고 빠르게 시행할 수 있지만 국정은 그에 비해 진행 과정이 훨씬 복잡하다. 무엇보다 국가는 큰 세력들인 계급이 부딪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어렵게 국회를 통과한 상법 및 노란봉투법의 개정과 관련한 논란이 대표적이다. 왜곡된 주식시장을 바로잡고 노동자의 기본 권한을 보장하기 위한 법률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던 것은 대규모 주식 보유자들과 기업들의 저항이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앞으로 남아있는 개혁 과제들이 더 걱정된다는 것이다.
검찰 개혁과 정부조직 개편 그리고 세수확대를 위한 주식 양도세의 개편 등은 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오랜 숙원인 검찰 개혁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목소리들이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고, 주식 양도세 개편안에는 주식을 전혀 가지고 있지도 않은 사람들까지 더불어민주당의 대주주 요건 완화 추진에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하고 있다.
기득권의 벽을 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움직이고 또 움직일 수 있는 자원을 독점해 온 집단으로 한푼의 돈도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까지 자신들의 이해에 우호적인 태도를 갖도록 만드는 힘을 발휘하곤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도 여론이라는 것이 사실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 정교하게 만들어진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러한 개혁 과제들의 끝머리에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지역 균형발전 과제가 놓여있다. 겉으로는 다른 개혁과제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듯이 큰 틀의 개혁 흐름이 원만하게 흘러갈 때만 지역 균형발전 과제도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다.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과 해사법원 신설 그리고 투자은행의 설립에 더하여 해양 관련 공공기관의 추가 이전이라는 솔깃한 얘기들이 마구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힘 대표에 당선된 장동혁 대표가 해명하긴 했지만, 첫 발언으로 해수부의 부산 이전 반대를 언급했듯이 넘어야 할 산이 만만치 않다. 부산의 미래가 달려있는 해양수도 부산의 완성도 개혁에 반대하는 두터운 기득권의 벽을 넘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다. 개혁 없이는 균형발전도 없다.
2025-09-02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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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약육강식의 국제관계 속 한국의 선택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재집권 이후 국제질서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이미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부터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질서에 대한 도전이 본격화되었지만,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그 기조는 더욱 노골적인 데다 심지어 배타적인 양상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세계가 바야흐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무대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덴마크의 영토인 그린란드에 대해서 트럼프 대통령은 트럼프 1기 행정부 출범 때부터 적극적인 매입 의사를 밝혔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이 2019년 그린란드 매입 의사를 밝히고 당시 덴마크 총리가 “그린란드는 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반박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은 덴마크 방문 일정을 불과 2주 전에 일방적으로 취소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이후인 지난 3월 29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NBC와 가진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린란드를 가져올 것이다. 100%다”라며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고도 가능성이 있지만 나는 어떤 옵션도 배제하지 않는다”고까지 노골적으로 말했다.
1929년 대공황 사태 이후 미국에서 전 세계로 확산된 보호무역주의가 만들어낸 폐해에 대한 반성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다자간 무역질서를 주도적으로 출범시켰다. 하지만 미국 주도의 이 다자간 무역질서도 트럼프 재집권 이후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이라 불릴 만큼 무시무시한 관세 폭탄을 마구 던지고 나섰기 때문이다.
2025년 4월 2일, 트럼프 대통령은 수입 과잉 및 무역수지 적자 문제를 이유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거의 모든 국가에 기본 10% 관세, 또한 국가별 소위 ‘상호관세’라는 추과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Executive Order 14257)을 발표했다. 그리고 새로운 관세 부과를 4월 9일 시작한 지 13시간 만에 중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에 대해서 90일 동안 소위 상호관세 부과를 연기하였다.
그러다가 세계 각국을 상대로 일방적으로 관세 부과를 결정하고 8월 1일부터 부과한다는 서한을 7월 초부터 발송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은 25%, 일본은 25%, EU와 멕시코는 30%, 캐나다는 35%의 관세율이 통보되었다. 그리고 각국은 미국과 관세 협상을 하였고, 한국, EU, 일본은 15%의 관세율로 미국과 관세 협상을 타결하였다. EU와 일본이 미국과 무역 협상이 타결된 시점에서 한국은 미국과 협상을 빠르게 마무리해야 했지만, 이번 협상을 통해서 한미 FTA는 무력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트럼프 2기 행정부는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한국과 타결한 협상 내용도 무시하고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미국의 관세 압박에 한국은 미국과 한미 FTA를 개정하여 기존 한미 FTA에 포함되어 있던 대미 수출 화물자동차에 대한 미국 측의 관세 철폐 시한을 2021년 1월에서 20년 늦추고, 당시 트럼프 행정부가 25% 관세를 부과한 철강에 대해서 한국은 대미 철수출 쿼터제를 도입하여 쿼터분에 대해서는 무관세로 미국에 수출하는 것으로 협상을 타결한 바가 있다.
그러나 트럼프 2기 행정부는 5월 30일, 철강·알루미늄 수입에 대한 관세율을 50%로 인상하면서, 트럼프 1기 행정부가 한국과 협상을 타결한 내용도 무시한 채 한국의 대미 철강 수출에 대해서도 다른 국가와 같이 50%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그리고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이와 같은 조치는 미국의 요구에 따라서 얼마든지 기존의 합의 사항이 바뀔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에 침공당한 우크라이나에 영토 포기를 요구하면서 러시아와 휴전을 강요하고 있다. 구 소련 해체 이후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 규모의 핵보유국이었지만, 핵무기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미국·영국·러시아로부터 정치적 안보 보장을 받은 바 있다. 이것이 1994년 12월 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체결된 부다페스트 각서이다.
그러나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는 서유럽으로 확전을 두려워하여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 요청을 거절한 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 본토 타격에 제한을 두는 형태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부다페스트 각서처럼 우크라이나에 평화 보장을 대가로 영토 포기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국제사회에서 점차 다자 질서는 무력화되고 있고, 강대국의 이해에 따른 19세기 제국주의 시기 양육강식의 논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중견국가인 한국이 변화하는 국제질서에서 유일하게 살 길은 스스로 강해지는 것 밖에 없다.
2025-08-2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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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변화하는 여름, 흔들리는 기후 질서
논문을 쓰며 참고 자료를 찾다가 오래된 노트를 발견했다. 1988년 초등학교 5학년이던 내가 방학 숙제로 제출했던 여름 일기였다. 유치하고 서툰 글을 읽는 일은 잠시 오글거림을 불러왔지만, 그 안에는 37년 전 여름의 기후가 또렷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어린 나는 냇가에서 친구들과 수영하며 지냈고, 8월 한 달은 맑은 날씨가 이어졌다. 중순이 되자 기온이 조금씩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그 변화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방학의 마지막을 알렸다.
당시 8월 중순은 참을 수 없는 무더위와 거리가 멀었다. 더위가 찾아와도 나는 밖에서 뛰어놀았고, 땀이 나면 냇가로 달려가 식히곤 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의 여름은 여러모로 낯설다. 지난주만 해도 8월 말에나 경험할 법한 늦여름, 초가을 같은 선선한 날씨가 이어졌지만, 며칠 사이 날씨는 급변해 열대야와 폭염이 찾아왔다. 중위도 지역에서는 7월 장마철에 나타나는 정체전선이 자리 잡으며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졌고, 서울과 경기도 곳곳이 큰 피해를 보았다. 단 며칠 만에 초가을 같은 선선함은 사라지고, 극심한 여름이 자리를 대신했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기후는 나름의 질서를 유지했다. 하루하루 날씨는 불규칙했지만, 계절의 변화만큼은 약속된 듯 정해진 순서를 따랐다. 초여름이 오면 사람들은 장마를 걱정하며 긴 비에 대비했고, 장마가 끝나면 무더위 속에서 여름휴가를 계획했다. 8월 중순이 되면 저녁 바람이 선선해지며 가을의 시작을 알렸다. 이렇게 불규칙한 날씨와 질서 있는 계절 변화 사이에는, 두 성질을 동시에 지닌 ‘준계절적’ 움직임이 자리하고 있었다.
준계절적 움직임의 대표적인 사례는 북태평양 고기압의 수축과 팽창이다. 북태평양 고기압은 여름철 대륙과 해양이 태양열에 서로 다르게 반응하면서 형성되는 거대한 공기 덩어리다. 온도가 빠르게 오르는 대륙에는 대륙성 저기압이, 천천히 올라가는 바다 위에는 해양성 고기압이 자리 잡는다. 한반도는 이 두 공기 집단의 경계에 놓여, 여름철 날씨가 두 집단의 배치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7월 장마 역시 이 경계에서 발생하는 현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북태평양 고기압의 움직임은 계절 변화에 따라 비교적 규칙적인 패턴을 보인다.
하지만 북태평양 고기압의 경계에서는 다양한 날씨 현상이 발생한다. 중위도 저기압과 고기압이 서에서 동으로 이동하며 규칙적인 계절 변화에 변화를 부여한다. 이들 기압계는 중위도 제트기류의 불안정한 흔들림으로 발생하고, 북태평양 고기압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발달하고 소멸한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들 중위도 저기압과 고기압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기와 위치에 영향을 미치며, 반대로 북태평양 고기압의 변화는 중위도 제트기류를 통해 이들의 발달과 이동에도 영향을 준다. 여름철 날씨 예보에서 “북태평양 고기압이 북상하면서” 혹은 “북태평양 고기압이 물러나면서”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즉, 북태평양 고기압은 계절 변화의 규칙성과 날씨의 불규칙성을 동시에 가지며, 준주기적 움직임을 보인다.
현재 지구 온난화가 진행됨에 따라, 기후 시스템의 체계적 특성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시간과 공간 스케일이 커지면서, 원래 불규칙에서 준주기성, 나아가 주기성으로 이어지던 구조적 체계가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날씨의 불규칙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양상은 더 극단적이다. 비가 내리면 폭우가 되고, 맑은 날씨는 폭염을 동반한다. 준주기성을 띠던 북태평양 고기압의 수축과 확장도 보다 불규칙하게 나타난다. 확장 기간이 길어지면 한반도에 가뭄이 발생하고, 수축하면 거대한 강우 시스템이 형성되어 홍수를 유발한다. 계절적 순환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8월의 날씨는 기존의 7월, 8월, 9월 초의 특성이 혼합된 듯하며, 계절 구분이 흐려져 일주일 사이에도 뚜렷한 변화가 나타난다.
현재까지 기후학계와 환경 단체는 기후 온난화를 주로 지구 평균 기온 상승의 관점에서 접근해 왔다. 대중 역시 기후 온난화라고 하면 산업화 이후 지구 전체의 기온 상승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틀리거나 핵심을 놓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기후 적응 단계에 들어서면서, 기후 온난화를 단순한 온도 상승이 아닌, 그로 인해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 얼음이 녹아 물이 되는 현상을 상변화라고 한다. 주변 온도가 상승하면서 얼음 자체의 온도가 높아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얼음을 구성하는 물 분자의 배열과 구조적 안정성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섭씨 0도를 넘으면 얼음은 빠르게 구조를 바꾸며 액체 상태로 변모한다. 기후 온난화를 상변화와 일대일로 대응시킬 수는 없지만, 상변화에서 나타나는 구조적 변화를 기후 온난화에 적용하면, 현재 발생하는 기후 재난을 온난화와 연결해 이해하는 논리적 기초를 마련할 수 있다.
2025-08-1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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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북극항로 시대, 부산의 역할
요즘 가장 차갑고 뜨거운 곳은 북극해이다. 기후위기가 바다의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북극해의 해빙 현상이 가속화되며,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북극항로’가 본격적으로 열린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기존 항해보다 30~40% 가까이 시간을 단축해 국제 해운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전 세계가 북극항로를 선도하고, 선점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중국은 이미 2024년 기준으로 35차례 북극항로 운항을 했고, 미국은 쇄빙선 구매계획을 발표했으며, 러시아는 2035년까지 북극항로 선정에 39조 원의 투자 계획을 밝혔다. 그리고 일본은 제4차 해운 기본 계획에 북극항로를 포함시켰으며,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적 선사인 CMA CGM은 올해 쇄빙선을 구매했다. 이제 북극항로는 더 이상 단순한 무역로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직결되는 전략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특히 부산은 북극항로의 기점이자 종점으로서, 물류와 해양산업의 중심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부산이 이 거대한 기회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준비, 그중에서도 법률적 기반 구축을 선행해야 한다. 국제 해양법(협약)부터 해양환경 보호, 항만 안전, 해양 보험, 분쟁조정까지, 북극항로는 단순한 길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물류·해양산업 중심되는 거대한 기회
해양 사고 시 책임 소재 등 분쟁 발생
법령 발굴·입법 제안 주도적 역할해야
북극항로는 대부분 러시아 연해를 따라 형성돼 있고, 그 주변은 극한의 자연환경 속에 있다. 이 때문에 북극항로에는 ‘유엔해양법협약’과 국제해사기구(IMO)의 ‘극지방 운항 국제규정’ 등 다양한 국제기준이 적용된다. 부산에서 출항하는 선박이 북극항로를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해서는, 이에 부합하는 선박의 구조 기준, 운항 능력, 승무원 자격 요건 등 국내 관련법 정비가 필수적이다. 부산시는 중앙정부와 협력해 극지항해를 위한 선박 검사와 인증 체계를 선도적으로 마련하고, 극지 전용 선박의 설계·건조에 필요한 법적 인허가 기준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북극은 지구 생태계의 최전선이자 마지막 보루이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해양오염이나 사고는 전 세계적 영향을 미친다. 이를 예방하고 책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환경영향평가, 선박 배출 규제, 해양 사고 시 책임소재와 손해배상 체계 등이 명확히 정립돼야 한다. 부산은 이미 친환경 항만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여기에 발맞춰 예컨대 ‘북극항로 통항 선박 특별관리 조례’ 등과 같은 지역 입법을 통해 지속 가능한 해양 이용의 모델 도시로 거듭나야 한다.
북극항로는 기상 조건이 극단적이며, 사고 위험도 높다. 이에 따라 관련 선박은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어 보험료가 급등하거나, 보험인수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부산은 지방정부 차원의 선박 보증제도, 공공보험기구와의 연계, 리스크 평가 기준 마련 등을 검토해야 한다. 또, 해난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보험금 지급과 손해배상 책임에 대한 명확한 법적 기준과 국제조정 절차도 필요하다. 이와 같은 법제는 단지 위험과 손실을 줄이는 차원이 아니라, 부산이 해양 금융과 법률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기 위한 핵심 기반이 될 것이다.
북극항로 이용이 본격화하면, 항만 이용권, 운임 갈등, 사고 책임 등 다양한 국제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현재 일반 민사 법원 또는 일부 지방법원, 부산 중재센터가 그 일환을 담당하고 있지만, 보다 신속하고 전문적인 해상사건 처리를 위해서는 부산에 해사전문법원 설립이 필요하다(부산일보 7월 9일 자 23면 필자 칼럼 참조). 부산이 아시아 해양 분쟁 해결의 중심지가 되기 위해서는, 해사전문법원 이외에도 지방정부 차원의 전문 인력 양성에 필요한 법률 지원과 교육 체계도 함께 고민하고, 정비해야 한다.
이 모든 법과 제도의 준비에는 중앙정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지방정부가 장기적 전략을 가지고 먼저 움직여야 한다. 중앙정부가 국제협약과 국가 기준을 만드는 동안, 지방정부는 실무적 인프라와 지역 네트워크를 신속히 마련해야 한다. 북극권 도시와의 자매결연, 국제 포럼 유치, 지역 내 조례 제정 등을 통해 부산은 국제적 해양 법률 선도 도시로서의 위상을 구축해야 한다. 특히 부산시는 ‘북극항로 법제도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지역 기업·학계·법률가들과 함께 필요한 법령을 발굴하고 중앙정부에 입법을 제안하는 지방 주도형 해양 정책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북극항로는 단순한 항로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글로벌 해양 질서의 재편을 의미하며, 부산은 그 중심에 설 수 있는 도시다. 그러나 준비 없는 기회는 지속되지 않는다. 길이 열렸을 때, 그 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 필요한 것은 법과 제도의 준비가 그 시작이고, 그 준비에 부산시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빙상 실크로드’로 가는 북극의 문이 열리고 있다. 부산은 이제 북극항로를 시작으로 해양물류 도시를 넘어, 해양 법률 도시로 도약할 준비를 해야 할 시점이다.
2025-08-12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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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순연의 도시 공감] 공간의 경험, 팝업스토어 전성시대
요즈음 백화점, 거리를 걷다 보면 팝업스토어를 자주 만난다. 작게는 소규모 브랜드를 소개하는 것부터 아이돌 굿즈, 애니메이션 덕후들을 위한 미디어콘텐츠 관련 스토어를 비롯하여 명품 브랜드까지 팝업스토어 공간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미 여의도의 백화점은 상설매장을 버리고 팝업스토어 만으로 매장을 구성하여 고객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움을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 창업자들의 비즈니스모델이나 상권 활성화 모델에도 팝업스토어는 하나의 아이템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제 팝업스토어는 단순히 제품을 판매하는 수단이 아닌 스토리와 가치를 보여주는 마케팅의 한 요소로 자리매김 중이다. 그리고 경험 소비를 이끄는 세대들에게는 공간을 소비하는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바야흐로 팝업스토어의 전성시대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팝업스토어는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서 신상품, 특정 제품을 일정 기간 판매하고 사라지는 매장을 의미한다. 따라서 짧은 기간에 브랜드의 홍보와 한정판 제품 판매를 목적으로 브랜드나 제품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과거에는 시장성을 테스트하기 위해 운영되는 단기 매장이었지만 현재는 단시간에 인상 깊은 이미지와 제품을 어떻게 판매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아닌 공간 기반으로 가치와 스토리를 전달하는 매개체로 활용되고 있다.
서울의 팝업스토어 성지인 성수동은 이미 서울의 방문객들에게 공간 경험을 제공해 주는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공간, 제품에 대한 관심이 높은 사람들이라면 이미 성수동을 방문하였을 것이다. 성수동은 공장과 창고가 가득했던 곳이다. 어느 순간 주차장 차고, 카센터가 개성 있는 편집숍과 카페, 갤러리 등으로 활용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브랜드들이 장소에 주목하게 되면서 거친 창고와 오래된 건축물들이 지금의 성수동을 만들었다. 또한 서울 숲과 한강공원에 인접, 보행동선이 연결되어 오픈스페이스와 장소의 힘이 함께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나기도 한다. ‘둥지 내몰림’ 현상으로 성수동 지하철역 2번 출구 앞에 있던 오래된 돼지갈비 식당은 문을 닫았고 주변의 로컬 가게들은 임대료 상승으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있다. 또한 한 동네에서 90개 이상의 팝업 스토어가 운영됨에 따라 비슷한 팝업에 대한 한계로 마케팅 효과나 집객을 위한 과도한 비용 투입, 주목을 끌기 위한 경쟁적인 이미지 연출 등이 골목마다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부산에서 팝업스토어가 처음 이슈가 된 것은 2021년에 해운대 해리단길에 오픈했던 모 침대 회사의 팝업이었을 것이다. 식료품이나 생필품을 파는 그로서리 매장을 오픈하여 포토존의 성지가 되었고 다양한 소품들과 굿즈를 구매할 수 있는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약 3개월 동안 운영된 팝업은 침대 회사임에도 주요 제품인 침대를 보여주지 않고 주변 지역 소소한 작은 가게들의 특색에 맞는 문화 요소를 살리고 집객을 통한 지역 활성화와 동시에 자사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효과를 보여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부산슈퍼 팝업스토어 또한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영도의 100년 된 골목 끝자락에 위치하여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오래된 간판과 신문 매대, 층층이 쌓은 식음료 박스들을 활용하여 공간을 연출하고 부산의 관광 굿즈를 판매하여 코로나 시기임에도 많은 방문객들이 찾은 장소였다. 당시 팝업이 끝났음에도 sns에 노출된 이미지 한 컷을 찍기 위해 방문객들은 심심치 않게 방문하기도 하였다. 5년 정도 지속적으로 운영된 부산슈퍼는 부산관광공사의 브랜드로 자리매김하였다. 이제 팝업스토어는 이제 민간기업에서 공공기관까지 활용도가 높아지고 있다. 무수히 많은 팝업이 생성되고 없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살아남는 팝업들은 단순히 일시적인 행사나 화려한 이미지나 단순한 판매 공간 아니라 단시간에 독특한 스토리를 전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단순하게 생각되는 팝업스토어는 오히려 일반 매장보다 장소와 공간, 경험을 연결하고 스토리의 지속성을 높이는 노력이 더 필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브랜드의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렬함을 보여주기 위해 지역에서는 다양한 장소에 대한 아카이빙과 더불어 이러한 작업을 위해 스토리, 장소, 데이터 분석, 브랜드, 마케팅, 공간 기획 등을 할 수 있는 인적자원들도 필요하다. 서로 다른 분야의 협력자들 간의 프로젝트 모델이 만들어진다면 지역 너머의 활동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협업 모델이 새롭게 만들어졌으면 한다. 부산은 다양한 스토리와 장소를 가지고 있다. 더불어 항로 연결을 통해 일본, 미국, 동남아까지 확장 가능한 거점 도시라 생각한다. 브랜드 팝업을 위한 시작점으로 부산의 장소를 활용하였으면 한다.
2025-08-0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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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성수의 과기세] 다시 보는 우장춘의 세계
한번은 광안리해수욕장에 갔다. 도로변 화단에 피튜니아가 심겨 있었다. 남미가 원산지인 피튜니아는 오래 전부터 관상용으로 많은 인기를 누렸다. 문제는 암술과 수술이 모두 존재하는 겹꽃 피튜니아를 얻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처음으로 완전한 겹꽃 피튜니아를 개발한 인물은 누구일까? 장영실, 장기려와 함께 부산의 3대 과학자로 꼽히는 우장춘이다. 또 한번은 부산대 인근의 가정식 밥집을 찾았다. 깊은 맛의 배추김치와 달콤한 양배추 쌈이 곁들어진 백반을 먹었다. 우장춘은 1950년에 한국에 돌아온 후 채소의 품종을 개량하는 연구에 매진했다. 우량 품종을 찾아내는 데서 시작하여 교잡 실험을 통해 신품종을 개발해 나갔다. 그 결과 1960년에는 배추 원예 1호와 2호가 탄생했고, 1962년에는 양배추 동춘(東春)과 양파 원예 1호와 2호가 등장했다. 우장춘은 1959년 8월 10일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제자들을 통해 결실을 보았던 것이다.
광안리해수욕장과 가정식 밥집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과 이와 같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우리의 일상에서 과학자를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한국의 과학자, 특히 부산의 과학자를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무심코 여긴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감사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우장춘에 대한 오해도 제법 있다. 그는 생물의 유전적 성질을 이용하여 우수한 품종을 길러내는 육종학을 전공했다. 우장춘은 육종학의 위력을 생생히 보여주기 위해 ‘씨 없는 수박’을 자주 활용했다. 강연회가 열릴 때마다 손수 재배한 씨 없는 수박을 꺼내 시연해 보였다. 씨 없는 수박에 대한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탔고, 1955년 대구에서는 ‘씨 없는 수박 시식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우장춘과 씨 없는 수박은 점점 밀접하게 연결되었으며, 급기야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의 ‘재배자’에서 ‘개발자’로 둔갑되기에 이르렀다. 씨 없는 수박은 교토제국대학의 기하라 히토시(木原均)가 1943년에 처음 개발했는데, 씨 없는 수박이 우장춘의 대표 업적으로 간주되는 촌극이 빚어졌다. 이러한 점은 일본의 여성 저술가 츠노다 후사코(角田房子)가 1990년에 우장춘의 전기로 발간한 〈나의 조국〉에서 지적된 바 있다.
우장춘의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는 ‘종의 합성’이 꼽힌다. 그것은 유채의 염색체수(38개)가 배추의 염색체수(20개)와 양배추의 염색체수(18개)를 합친 것과 동일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우장춘은 배추와 양배추를 가지고 수많은 중간 교잡 실험을 시도했으며 그 결과 유채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곧이어 그는 배추와 흑겨자를 활용하여 갓을 만들었고, 흑겨자와 양배추를 교잡하여 에티오피아 겨자를 합성했다. 배추, 양배추, 흑겨자가 꼭짓점에 위치하고 중간에 유채, 갓, 에티오피아 겨자가 있는 그림은 ‘우의 트라이앵글(U’s Triangle)’로 불린다. 우장춘은 1935년에 ‘배춧속 식물에 관한 게놈 분석’이라는 63쪽짜리 영어 논문을 발표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1936년에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우장춘의 연구는 매우 괄목한 것이지만, 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지금도 인터넷 자료를 검색해 보면 “우장춘의 연구가 세계 최초로 다윈의 진화론을 논박하고 수정했다”는 식의 표현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같은 종들의 교배를 통해서만 새로운 종이 출현한다고 주장하지도, 다른 종들의 교배를 통한 종분화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하지도 않았다.
또한 일본의 육종학자들은 1910년대부터 인근 품종들의 상관성을 고려하여 식물종이 진화하는 양상을 탐구해 왔다. 특히 1930년에는 앞서 언급한 기하라 히토시가 ‘게놈 분석’이라고 부른 염색체 분석 방법을 정립하여 밀의 종분화를 탐구하고 있었다. 우장춘은 이러한 연구 전통 내에서 배춧속 품종 사이의 교잡 실험을 통해 해당 작물들의 상호관계를 밝혔던 셈이다. 우장춘의 연구는 종의 합성에 관한 주장을 최초로 입증하여 그것이 과학적 이론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의의가 있다.
우장춘이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하지 않았고 종의 합성을 처음 논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위상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이 없어도 우장춘은 위대하다. 종의 합성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다는 것만으로도 세계적인 과학자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더 나아가 우장춘은 조국으로 돌아와 일본에서 하던 첨단 연구를 이어가지 않고, 한국의 실정과 요구에 부합하는 연구로 전향하는 또 다른 위대함을 보였다.
오는 8월 10일은 우장춘의 기일이다. 부산 동래구는 2006년부터 해마다 우장춘 박사 추모식 거행을 주관하고 있다. 이번 추모식을 계기로 우장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그의 세계가 더욱 잘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2025-07-29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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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관광 '갈라파고스' 대한민국
각급 학교가 이제 방학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휴가철이 시작되었다. 국내외 관광객들로 주요 공항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굴뚝없는 공장’이라 불리는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서 세계 각국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전 세계는 관광의 황금기를 누렸다. 2019년 국제 관광객 수는 사상 최초로 14억 명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흐름은 2020년 초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급격히 멈춰섰다. 국경이 닫히고 항공편이 중단되면서 관광산업은 세계 경제 전반에서 가장 먼저, 가장 깊은 충격을 받은 분야가 됐다. 코로나19 팬데믹 종식 이후 세계 관광은 가파른 회복세를 보이며, 2024년 한 해 동안 국제 관광객 수는 약 14억 6000만 명으로 집계되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을 회복하였다.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2019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수는 1750만 명으로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가,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한 2020년에 급감하였다. 이후 회복세를 보이면서 2024년에는 1637만 명으로 2019년의 94% 수준까지 회복하였다.
이웃 국가인 일본의 사례를 보면, 2019년 일본을 방문한 해외 관광객 수는 3188만 명이었고, 다른 국가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급감했다가, 2024년에 3686만 명으로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엔저 현상을 고려하더라도 현재 한국과 일본의 외국인 관광객 방문 규모는 두 배 이상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10여 년 전만 해도 한국의 외국인 관광객 방문 숫자가 일본의 외국인 관광객 방문 숫자를 상회하였다. 2010년과 2014년에 한국은 각기 879만 명과 1421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했고, 일본은 같은 기간 861만 명과 1341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을 유치하였다.
한일 간 외국인 관광객 역전이 벌어진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이다. 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관광 및 요식업 등에 적용된 IT 시스템 구축에서 한국과 일본은 고객층을 겨냥하는 전략이 달랐다는 점이다. 우선 한국기업은 비용이 덜 들면서 수익을 쉽게 낼 수 있는 내국인 고객을 중심으로 한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식당 웨이팅 및 예약 어플리케이션인 ‘캐치테이블’과 ‘테이블링’을 꼽을 수 있다. 이 시스템은 한국 전화번호가 없이 데이터로밍만 활용하는 외국인 관광객은 이용이 불가능했다가, 지난해에야 개선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에 일본의 식당 줄서기 시스템인 ‘에어웨이트’ 같은 경우, 이용 고객이 앱을 다운로드할 필요 없이, 종이 번호표에 QR코드를 인쇄하여 발행하고 고객은 QR코드 인식을 통해서 자신의 SNS에 줄서기 순번을 연동시킬 수 있어서 일본 전화번호 없이도 이름난 식당의 줄서기가 가능하다.
한국 시스템의 갈라파고스화로 꼽히는 또 다른 시스템은 국내에서 대중교통 말고는 길 찾기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구글 지도(Google Map)다. 대부분 국가에서는 구글 지도는 찾고자 하는 지점의 위치, 그 지점까지 이동하기 위한 다양한 이동 수단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물론 구글 지도가 국내에서 제한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을 한국 정부 탓만 할 수는 없다. 한국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구글 뿐만 아니라 모든 외국 기업이 상세한 지도 데이터를 해외 서버에 저장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다. 2007년, 2016년에도 구글은 한국의 상세지도 데이터를 해외 데이터 센터로 반출하려 했으나 한국이 직면한 안보상의 이유로 거부당하고 애플 역시 2023년도 유사한 요청이 거절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구글 지도는 한국에서 대중교통 정보는 제공하지만, 도보 및 자동차 내비게이션 기능은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구글이 한국에서 제대로 서비스를 할 수 없다면 한국에서 지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네이버와 카카오가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 외국어로 서비스를 제공하면 좋겠지만, 네이버와 카카오 지도 사용자가 대부분 한국인인 상황에서 이들 기업이 외국어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투자할 요인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의 불편은 가중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한국은 이웃 국가인 일본 뿐만 아니라 베트남 등 다른 국가에게도 관광객 수가 뒤처지는 신세가 됐다. 2010년 외국인 관광객이 505만 명으로 한국과 큰 차이를 보이던 베트남이 2024년 1760만 명의 외국인 관광객을 맞이하여 한국 방문 외국인 관광객 수를 앞지른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외국인 관광객 유치 확대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시스템에 대한 외국인 관광객의 접근성 문제를 더욱 치밀하게 개선할 필요가 있다.
2025-07-22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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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우석의 기후 인사이트] 다른 목소리 어우러지는 만남, 융합의 시작
다른 나라에서 학위를 받으며 가장 먼저 마주한 어려움 중 하나는, 낯선 문화를 단순히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몸에 밴 생활방식과는 사뭇 다른 문화 속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작은 충돌이 일어났다. 공부에만 집중하면 될 줄 알았던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전공을 가리지 않고 학생과 교수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건물 중앙의 넓은 공간에 모여 티타임을 가졌다. 커피나 차, 간단한 다과를 곁들이며 담소를 나누는 이 시간은 영어가 익숙하지 않았던 내게 낯설고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티타임은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서로의 연구를 이야기하며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뜻밖의 소통의 장이 되어주었다.
이 시절, 내가 소속해 있던 연구실 건물에는 기후 과학자뿐 아니라 지진, 암석, 공룡 화석을 연구하는 사람들, 때로는 이론 물리학자들까지 찾아오곤 했다. 시간이 흘러 다른 연구자들과 대화가 익숙해졌고, 그들과 대화하며 같은 주제도 전혀 다른 관점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하게 여겼던 개념이 낯설고 비논리적으로 느껴졌지만 그 과정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도 생겨났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며 나의 ‘상식’이란 것이 얼마나 상대적인 것인지도 알게 되었고, 내 전공을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법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와 보니, 내가 하는 전공에 대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지 않다는 사실을 느꼈다. 공식적인 학회 발표나 기관이 주최하는 워크숍과 같은 자리를 제외하면, 내가 하고 있는 전문적인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일은 많이 없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관심사가 아닌 주제를 굳이 꺼내는 일이 오히려 배려심 없는 행동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협업을 기본 조건으로 하는 연구 제안서를 작성할 때도 드러났다. 여러 연구 책임자들의 협력이 필수적인 과제의 경우, 의견을 활발히 교환하기보다는 전체 일을 합리적으로 나누고, 각자의 전문 분야를 믿고 맡기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이는 각 분야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문화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분업의 결과를 단순히 합쳐 만든 결과물은, 때때로 예상보다 덜 유기적이고 상호 연결성이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최근 한국에서도 ‘융합’이라는 단어가 과학계의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전문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되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고 질문을 주고받는 문화가 조금 더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돌이켜보면, 티타임은 어쩌면 이런 대화와 이해의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자연스러운 방법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매일 이어지는 편안한 만남은 공감과 신뢰를 쌓는 기반이 되었고, 연구에 대한 정보와 관점을 나누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다. 단순한 사교의 장을 넘어, 융합적인 연구의 씨앗이 자라는 소통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새 정부 아래 한국에서도 기후 위기와 경제 위기 같은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융합 정책이 시도되고 있다. 예를 들어 ‘기후에너지부’의 신설은 신재생에너지와 기후변화라는 서로 다른 분야를 하나로 묶으려는 의미 있는 과제로 읽힌다. 그러나 조직을 단지 합친다고 해서 진정한 융합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낯선 언어와 사고를 이해하려는 태도, 그리고 그 차이를 기꺼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될 때, 비로소 융합은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 연구실의 작은 티타임이 보여주었듯이, 융합은 거창한 제도보다는 일상의 작은 대화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이뤄진 많은 과학의 혁신은 서로 다른 분야 간의 융합에서 비롯되었다. 가령,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는 리만 기하학이, 맨틀 대류 이론에는 유체역학이, 기후변동 연구에는 통계물리학의 브라운 운동 개념이 적용되었다. 이처럼 하나의 분야를 깊이 파고드는 탐구 못지않게, 이질적인 학문 간의 연결과 교차는 새로운 통찰을 가능하게 해왔다.
새롭게 신설되는 기후에너지부는 기후 연구와 에너지 연구라는 서로 다른 분야가 만나는 융합의 장이 될 것이다. 융합은 결국 사람이 만드는 일이다. 융합의 출발점은 타인의 일을 내 일처럼 듣고, 그 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 필자가 처음 어색하고 낯설게 경험했던 티타임의 일상적인 대화가 떠오른다. 별다를 것 없던 그 시간이야말로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이해를 넓히는 진짜 융합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도, 그런 자연스러움 속에서 조금 더 자주 마주 앉고, 서로를 향해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었으면 한다.
2025-07-15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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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진규의 법의 창] 해사법원은 부산에 설치돼야 한다
2021년 3월 23일, 세계 물류의 심장이라 불리는 수에즈운하에서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기븐’(Ever Given)호가 강풍과 항로 오류 등으로 인해 운하의 남쪽 구간에서 좌초된 것이다. 선체 길이만 약 400m에 달하는 이 선박은 약 6일 동안 수에즈운하를 완전히 막아 세계 무역의 12%에 해당하는 항로를 마비시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약 1200척 이상의 선박 운항이 지연되면서 하루 약 100억 달러(약 13조 원)에 이르는 무역 손실이 발생했다고 한다. 사고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집트 수에즈운하관리청(SCA)은 선주 측에 약 9억 달러(약 1조 200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선박과 선원을 억류하며 국제적 분쟁이 발생했다.
결국 사건은 국제해사법과 보험, 선박책임제한제도, 그리고 국가 간 협상력 등이 얽힌 복잡한 소송전으로 비화되었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한국 해역에서 발생하면, 우리는 법적으로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가?”
해상사고 및 관련 분쟁은 기술적 요인뿐 아니라 국제법, 보험, 선주와 용선자 간 계약, 그리고 국제적 중재 시스템까지 총체적으로 작동해야 해결되는 분야다. 따라서 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해사법원’(Maritime Court)이 필수이다.
해사법원은 선박사고, 해양오염, 해상운송계약, 선박저당권, 해양보험, 선원노동, 국제해양분쟁 등을 전문적으로 심리하는 해양 분야 특화 법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사건들이 일반 민사 법원 또는 일부 지방법원에서 처리되고 있지만, 선박 충돌이나 해상 화물 손상 등의 기술적·국제적 특성이 강한 분쟁을 일반 법관이 처리하기에는 신속성이나 전문성 등에 한계가 있다.
국제적으로는 이미 영국, 미국, 중국 등 해양 강국들은 해사법원을 운영 중이다. 예컨대 중국은 상하이에 국제해사법원을 설치, 운영해서 법적 ‘해양주권’을 강화하고 있다. 해사법원이 제대로 기능하려면 법원 이외에도 해운·보험 전문가, 선박 기술 감정인, 해양법 전공 법관, 국제 중재 경험자 등 복합적 인프라도 필요하다. 이는 국가의 해양 법률 중심지로의 전략적 선택이 요구되는 일이다.
부산은 단연 대한민국 해양산업의 중심지다. 세계 6위 컨테이너항만, 한국 최대의 선박 출입항 기록, 그리고 수많은 선박회사, 해운중개사, 해양금융기관이 모여 있다. 부산에는 이미 해양대학,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한국선급 등 기관이 존재하고, 국제 중재센터까지 들어서며 제한적이나마 해양 분쟁 해결의 플랫폼이 마련되어 있다.
정부는 해양수산부를 부산으로 이전하겠다고 밝혔다. 부산시민의 한 사람으로 환영할 일이다. 행정 중심(해수부)과 사법 중심(해사법원)이 같은 지역에 위치하게 되면 해양 정책 수립과 해양 분쟁 해결이 훨씬 유기적이고 신속해질 수 있다. 더 나아가 부산은 북극항로 시대를 맞아 동북아 해양 분쟁의 중재 허브로 도약할 수 있는 지리적, 산업적, 국제적 이점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 부산은 단지 국내 해양 사건을 처리하는 수준을 넘어, 국제 해사 사건을 유치하고 중재하는 ‘국제 해양법 수도’로 성장할 수 있다.
정부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정책적 선언과 그 뒷받침을 해야 하고, 국회는 해사법원 설치에 필요한 입법적 지원을 해야 한다. 지방정부의 노력 역시 요구된다. 부산시와 부산시의회는 단순히 ‘유치 요청’에 그치지 말고, 유치 지원 조직 구성, 지방조례 제정 등 해사법원 설치에 필요한 행정적, 예산적 지원 기반을 선제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또한 해양대학교, 로스쿨, 해양 관련 기관 등과 협력해 해사법관 후보군, 조사관, 기술 감정인 등 전문 인력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고, 실무 중심의 해사법 교육을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나아가 부산시는 국제해양도시 브랜드와 해운박람회 등을 활용해 해외 해운회사, 해외 로펌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고, 지역변호사회와 연계해서 향후 설치될 부산 해사법원의 국제적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
에버기븐호 사건은 바다가 곧 법률의 공간이며, 그 공간을 누가 먼저 준비하느냐가 국제경쟁력을 좌우함을 보여주었다. 대한민국이 해양 강국을 꿈꾼다면, 법적 토대인 해사법원의 설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그리고 그 중심은 마땅히 부산이어야 한다. 지방정부의 전략적 실행력과 중앙정부의 정책 결단이 맞물릴 때, 우리는 해사법의 수도, 부산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2025-07-08 [1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