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욱의 글로벌 산책] 미국의 동맹들은 무임승차한 적 없다
국립부경대 국제지역학부 교수
걸프전 등 참전해 피와 돈 공동 부담
美국채 매입으로 '달러 기축'도 지탱
협력 붕괴 순간 美 패권 몰락 시작돼
2026년은 붉은 말의 질주를 연상시키는 병오년(丙午年)이다. 지난해 12월 칼럼에서 필자는 새해만큼은 갈등보다 협력이, 불안보다 신뢰가 앞서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했다. 그러나 그 소망이 헛된 기대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국제질서는 다시 한 번 한 지도자의 발언과 선택에 따라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국제질서는 원래 느리게 움직이는 구조다. 규칙과 관행, 동맹과 신뢰는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경험 이후, 세계 각국은 전쟁의 재발을 막기 위해 다자주의적 국제질서를 구축했다. 유엔, 국제법, 집단안보 체제, 동맹과 협력의 규칙은 강대국의 선의가 아니라, 전쟁 비용을 뼈저리게 경험한 인류가 선택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그 질서가 지금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이 불안정성의 중심에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지도자가 있다. 트럼프는 국제질서를 규칙의 체계가 아니라 거래의 결과로 바라본다. 그의 외교는 일관되기보다 즉흥적이고, 축적되기보다 단기적이다. 그 결과 국제질서는 한 국가의 전략이 아니라 한 지도자의 언행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는 줄곧 미국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과도한 비용을 부담해 왔고, 유럽은 ‘무임승차’해 왔다고 주장했다. 방위비 분담 문제를 숫자의 논리로만 환원한 이 주장은 정치적으로는 매력적일지 몰라도,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 유럽은 미국의 전쟁을 구경꾼처럼 지켜본 적이 없다.
한국전쟁에서 유럽 국가들은 미국과 함께 참전해 피를 흘렸다. 걸프전에서도, 2001년 9·11 테러 이후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유럽 동맹국들은 병력을 파견했고, 막대한 재건 비용을 분담했다. 이는 미국의 요청에 따른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전후 국제질서를 함께 지탱하겠다는 유럽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경제적 차원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금태환을 담보로 달러 중심의 국제 통화질서를 구축했다. 이른바 브레튼우즈 체제다. 그러나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일방적인 금태환 중지 선언으로 이 체제는 붕괴했다. 국제 통화질서의 근간이 한 국가 대통령의 선언으로 무너진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유럽은 미국의 달러 패권에 정면으로 도전하지 않았다. 오히려 달러 체제의 안정을 선택했다. 미국 재무부의 지난해 11월 기준 자료에 따르면, 유럽 국가들은 전체 미 국채의 약 40%에 해당하는 약 3조 6350억 달러 규모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다. 영국이 8880억 달러로 가장 많고, 벨기에(4870억 달러), 룩셈부르크(4260억 달러), 프랑스(3760억 달러), 독일(1100억 달러)이 그 뒤를 잇는다. 이는 유럽이 안보뿐 아니라 금융 차원에서도 미국 중심 질서를 떠받쳐 왔음을 보여준다.
아시아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본 한 나라만 해도 약 1조 2000억 달러의 미 국채를 보유하고 있고, 중국도 6830억 달러(홍콩 보유분 2560억 달러 별도)를 들고 있다. 아시아 국가 전체가 보유한 미 국채 규모는 약 3조 700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의 글로벌 영향력은 군사력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라, 동맹과 파트너 국가들의 신뢰와 협력 위에서 작동해 왔다.
이 대목에서 오늘의 상황은 더욱 선명해진다. 과거 미국의 일방적 결정에도 불구하고 동맹국들은 질서 유지를 선택했다. 그러나 트럼프식 외교는 그 신뢰를 당연한 전제로 여기지 않는다. 동맹의 기여는 평가절하되고, 협력은 비용 계산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접근이 단기적 압박 효과를 넘어 장기적 신뢰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국제질서에서 신뢰는 가장 값싸게 얻을 수 있으면서도, 가장 비싸게 잃게 되는 자산이다. 쌓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몇 차례의 발언이면 충분하다.
만약 유럽과 다른 동맹국들이 더 이상 미국을 예측 가능한 파트너로 인식하지 않게 된다면, 미국이 수십 년에 걸쳐 구축해 온 동맹 협력 네트워크는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그 순간부터 미국의 힘은 마모되기 시작한다.
강대국의 진짜 힘은 혼자 설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함께 서고자 하는 국가들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려 있다. 적토마처럼 질주만 하는 힘의 정치가 계속된다면, 국제질서의 변화는 더 빨라질 수는 있어도 더 안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국제질서가 한 지도자의 정치적 계산에 따라 흔들리는 시대에, 중견국이 치러야 할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한국 역시 안보는 동맹에 기대면서도 통상과 경제에서는 압박에 노출돼 있다. 규칙이 무너지는 순간, 의존은 곧 취약성이 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안일한 낙관이 아니라, 동맹의 변동성까지 감안한 냉정한 국가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