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이러다 다 죽는다
“이러다 다 죽는다.” 지구촌 전쟁 얘기가 아니다. 기후 재난에 대한 경고도 아니다. 부산의 소규모 건축사사무소들이 토해내는 절박한 탄식이다. 지역의 한 건축사는 “30년 가까이 건축사로 활동했지만 최근 2~3년이 가장 힘든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그만큼 어렵다. 여기엔 주거 공간의 획일화가 자리 잡고 있다. 부산의 도시 풍경은 이제 거의 아파트로 수렴된다. 해운대·마린시티의 고층 단지부터 강서·명지를 비롯한 서부산권의 신도시 계획까지, 주거 개발의 중심축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아파트 건설에 맞춰져 있다. 지역의 소규모 건축가와 사무소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설계의 다양성과 실험, 지역적 개성이 숨 쉴 공간이 점점 줄어드는 셈이다. 소규모 건축이 사라진 도시, 그 결과는 무엇일까? 이러다간 자칫 도시를 지탱해 온 건축 생태계의 한 축이 붕괴할 수도 있다. 온통 아파트로 뒤덮인 도시.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일본의 신도시 마쿠하리 베이타운 모습. 5층 이하 저층부 설계를 소규모 건축가에게 맡기는 방식을 취해, 공존과 상생의 질서를 만들어냈다. 부산국제건축제 제공
■아파트 편중이 가져온 현주소
한국의 주거 형태는 빠르게 아파트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2024년 기준 전국 주택 중 아파트 비중은 약 65%에 이른다. 여기에 연립·다세대주택까지 포함하면 80%에 육박한다. 부산은 이보다 더 높은데 아파트 비중만 69.9%에 이른다. 신규 인허가 물량도 대부분 아파트다. 주거 구조의 편중은 갈수록 심화되는 양상이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건설 수주를 좌우하는 것도 결국 대단지 주거사업이다. 미분양 증가와 자재비 상승에도 아파트 공급은 멈출 줄 모른다. 이대로라면 도시가 아파트로 빼곡히 채워지는 날도 머지않아 보인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건축은 단순히 물량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도시의 결을 빚어내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결을 가장 촘촘하게 형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규모 건축이다. 골목을 살리고, 상권을 키우며, 지역의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힘이 바로 거기에서 나온다. 동네 병원과 작은 도서관, 근린생활시설과 리모델링 사업이 그 축이다. 그러나 지금의 구조에서는 이러한 영역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대단지 설계는 대형 건축사사무소와 건설사 중심으로 돌아가고, 설계·시공·감리 전반이 그 틀 안에 고착됐다. 그 결과 지역의 소규모 건축사는 점점 주변으로 밀려난다. 남은 영역은 단독주택이나 소규모 공공건축, 리모델링뿐이지만, 이마저도 물량이 줄어 경쟁만 치열해지고 있다. 어렵게 대형 프로젝트를 따내더라도 상황은 녹록지 않다. 부산 지역 정비사업이 평균 12년이나 걸리는 현실에서 작은 사무소들이 이 기간 버텨내기란 쉽지 않다.
부산 연제구, 동래구 일대 아파트 단지. 정종회 기자 jjh@
■획일화된 공간서 벗어나야
획일화된 주거 공간이 변해야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도시가 단조로워진다. 어디를 가도 비슷한 단지와 입면, 비슷한 배치다. 낮에는 비어 있고 밤에만 켜지는 창문들. 우리는 효율을 얻었지만 도시의 표정을 잃었다. 더 많이 더 빨리 짓는 데는 성공했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도 이제 고민해야 한다. 아파트는 공동주택인데, 정작 아파트 단지 속에서 공동이라는 개념은 찾을 수가 없다. 설령 있다고 해도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공동일 뿐이다. 학자도, 언론도, 시민사회도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또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도시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된 건축 생태계의 위기다. 소규모 건축사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은 건축 생태계의 경직과 도시 다양성의 상실로 이어진다. 대단지 아파트 중심 구조는 지역 건축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다. 그동안 다가구주택과 상가주택, 소규모 프로젝트는 지역의 일자리, 디자인 경쟁과 다양성, 도시의 개성을 떠받쳐 온 기반이었다. 젊은 건축가들의 실험과 도전, 기술 축적 역시 이 토대 위에서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기반마저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특히 부산 상황은 더욱 우려스럽다. 부산은 재개발·재건축과 대단지 아파트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조다. 주택 경기가 식으면 도시 전체가 흔들린다. 건축 생태계가 너무 단선적이기 때문이다. 소규모 건축이 살아 있어야 시장의 충격을 분산할 수 있다. 시장의 허리가 단단해야 함께 버틸 수 있다. 이게 안 되면 도시 경쟁력도 무너진다. “이러다 정말 다 죽는다.”
지난달 31일 부산시청 12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2026 특별기획 부산공간대포럼에서 박인석 명지대 건축학과 명예교수가 얘기하고 있다. 부산국제건축제 제공
■대안은 있다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이미 다른 도시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부산에서는 건축과 도시를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정책 방향을 모색하는 ‘특별기획 부산공간대포럼’이 지난달 30일부터 사흘간 열렸다. 포럼 둘째 날인 31일, 박인석 명지대 건축학과 명예교수는 일본의 신도시 마쿠하리 베이타운을 소개했다. 이곳이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히 건축의 형태에 있지 않다. 도시와 건축, 공공과 민간, 그리고 다양한 건축가의 협업이 하나의 질서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마스터 아키텍트(MA)’ 방식 아래 도시계획과 건축 설계는 분리되지 않고, 처음부터 하나의 과정으로 통합됐다.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5층 이하 저층 건축물에 두 명 이상의 건축가가 공동으로 참여해 설계를 맡는 구조다. 이른바 도시·건축 통합계획, 즉 협동설계 방식이다. 일정한 목표를 공유한 뒤 공공기관과 사업자, 그리고 각 블록을 담당하는 민간 주체들이 역할을 나누고 협의와 조정을 거쳐 도시를 완성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대형 건설사와 소규모 건축가가 각자의 영역을 맡아 조화를 이루고 결과적으로 거리마다 서로 다른 표정을 만들었다. 핵심은 공존이다. 대형과 소형, 공공과 민간, 계획과 설계가 하나의 질서 안에서 긴장과 균형을 이루며 공존한다. 그래서 이 도시는 단조롭지 않다. 가로가 살아 있고, 블록이 살아 있으며, 건축 하나하나가 도시의 생명력을 품고 있다.
마쿠하리 베이타운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흔히 “한국은 땅이 좁아서 고층 아파트가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진실에 불과하다. 마쿠하리 베이타운은 5층 내외의 중층 주거만으로도 180~230%의 용적률을 구현한다. 고밀도 개발이 곧 초고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높이가 아니라 구조와 배치, 그리고 도시적 맥락이다. 가로와 블록, 건축이 유기적으로 이어질 때 도시는 비로소 밀도를 품은 채 살아 숨 쉰다.
일본 신도시 마쿠하리 베이타운 모형도. 부산국제건축제 제공
■의지가 있으면 된다
일본 마쿠하리 베이타운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5층 이하 저층부 설계를 소규모 건축가에게 맡기는 구조는 단순한 역할 분담을 넘어 공존과 상생의 질서를 만들어낸다. 이는 단지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선택이다. 마쿠하리 베이타운의 설계 지침처럼, 지자체나 대형 건설사가 의지를 갖고 접근한다면 우리 역시 충분히 구현할 수 있는 모델이다. 특히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차원의 권고나 지자체의 조례 제정을 통해 소규모 건축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방안도 가능하다. 결국 지금 필요한 것은 실행을 향한 결단이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우리나라는 재개발이나 신도시를 지을 때 도시계획, 엔지니어링, 건축 영역이 분리되곤 한다. 이제는 초기 단계부터 건축가가 참여하는 통합적 설계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근래 서울시는 도시계획과 건축이 결합해 토지이용계획을 만들었다. 당연히 새로운 디자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지구단위계획은 누가 해야 한다는 명확한 규정이 없다. 건축사가 하면 된다. 이제는 부산시도 이를 상시적으로 가져갈 때가 됐다. 이런 시스템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처럼 따로 설계한 뒤 억지로 맞춰가는 방식으로는 획일성을 벗어날 수 없다. 마쿠하리 베이타운이 보여주듯 소규모 건축가의 참여를 제도화될 때 비로소 힘을 갖는다. 저층부 설계를 지역 건축가에게 맡기거나 복수 설계자 참여를 의무화하는 방식도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도시재생 구역에서는 소규모 프로젝트 공모를 상시화할 필요도 있다. 골목 단위의 설계 공모가 늘어날수록 건축 시장은 활력을 되찾게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공공이 먼저 이런 실험에 적극 나서야 한다. 부산시와 부산도시공사가 시범사업을 통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해야 할 이유다. 이 문제는 단순한 정책 선택이 아니라 지역 생존의 문제다. 부산도 할 수 있다. 아니, 해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아파트를 쌓는 도시에서 만드는 도시로 바꿔나가야 한다. 도시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방향을 정하는 일은 지금 당장 할 수 있다.
정달식 부산일보 논설위원. 부산일보DB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