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곰곰 생각] 친애하는 정산 씨
내 집 뒷산이 천 리 밖 명산보다 나아
'대도시 허파' 금정산, 시민과 동고동락
국내 최초 도심형 국립공원 지정 쾌거
관광 개발 대신 관리·보호 품격 높여야
등산 문화 변화·등산객 세대교체 주목
산을 대하는 자세 바꾸는 계기 삼아야
산을 대하는 태도에서 한국은 서양과 큰 차이를 보인다. 서양은 만년설로 뒤덮인 험산 준령을 괴물이 출몰하는 곳으로 여겨 두려워했다. 근대 과학이 무지의 공포를 걷어내기 전까지 산 정상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한반도는 국토 70퍼센트가 산지이지만 최고봉 백두산이 3000m를 넘지 않고, 남한에 한정하면 한라산·지리산 모두 2000m를 밑도는 저산 지형이다. 그래서인지 한민족의 서사는 산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한국인의 삶은 산에서 시작해 산으로 끝난다. 생명이 태어나면 산지에 태를 묻으며 장수와 복록을 빌었으며, 죽으면 산소(山所)로 돌아가 대대로 선산(先山)을 이뤘다. 입산(入山)은 산과 일체가 된다는 의미로 쓰여 꼭짓점을 정복하는 행위와 구분할 정도였다. 특히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이 개국을 위해 내려온 곳이 태백산이었고, 이후 역대 왕조도 도읍지를 정할 때 산세를 첫 조건으로 따졌다.
산업화 시대에 근교 산은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해방구였다. “주말에 뭐 해?”는 ‘산에 같이 가자’는 압박이다. 회사 상사는 단합을 핑계로 부하 직원들의 휴일을 빼앗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5060 세대의 억지 산행은 이제 옛말이다. 알록달록한 레깅스룩의 젊은 여성들이 동네 뒷산을 누비기 시작하면서 산길에서 세대교체가 일어난 지 오래다. 배낭에 막걸리 한 통씩 챙겼던 아재, 아줌마 세대는 교류와 여흥에 방점을 찍었지만, 2030 세대는 등산을 스포츠의 한 장르로 받아들인다.
요즘은 안내 산행도 스마트폰 앱이 대세다. 올가을 억새 군락을 보러 창녕 화왕산에 가면서 앱을 이용했다. 버스는 승차 지점인 도시철도 서면역과 동래역 등을 경유하는데, 지정 좌석제라 ‘불편한 동석’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떠들썩한 관광버스를 연상하면 오산이다. 취식 불가에 묵언 수행이 연상되는 고요한 분위기는 귀갓길까지 일관됐다. 하산 후 각자의 방식으로 씻고, 일상복으로 바꿔 입고 차량으로 돌아왔고, 상당수는 등산화를 주머니에 넣고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소음·냄새 제로가 철칙. 주 이용객인 젊은 여성과 ‘나 홀로’ 취향이 만들어 낸 등산 문화의 혁신이다.
소싯적부터 산속에 들기를 좋아해서 해외 출장 때면 일정 외 시간을 쪼개 현지 명산을 들르곤 했다. 일본 도쿄에서는 후지산에 올랐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차로 4시간 이상을 달려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바위산을 걷고 말았다. 일본 파견 근무 때 후쿠오카현 숙소 인근의 시오지야마(四王寺山)는 샅샅이 훑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망한 백제 유민들이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축조한 백제식 산성 유적이 중턱에 흩어져 있어 답사하는 재미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부산일보〉 산행 지면을 담당했을 때는 매주 명산만 골라 다니는 호사도 누렸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내 집 뒷산이 천 리 밖 명산보다 낫다! 천하의 절경이라도 오르고 싶을 때 바로 입산이 가능한 발밑 가까운 산만 못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금정산 둘레길과 능선은 나의 최애·최다 산행로다. 부산 금정구 쪽 금정산 자락에 터를 잡고 30년 넘게 산 덕분이다. 문밖 산행로 초입에서 1시간 남짓 걸으면 북문과 동문 사이에 올라선다. ‘쇠의 바다’ 김해평야와 광안리·해운대의 아득한 바다를 조망하며 바장이다 보면 충만감이 밀려온다. 후지산보다, 요세미티 기암괴석보다 엎어지면 코 닿을 삼삼한 동네 금정산이 최고다.
미로 같은 둘레길에서 길을 잃고 탈진했던 쓰라린 순간, 새해 해맞이로 심야에 고당봉에 올라 칼바람을 맞으며 떨었던 무모한 도전, 식물원 위 숲에서 볼더링(암벽 타기)을 즐기던 추억…. 금정산은 오랜 세월을 동고동락한 친구다. ‘정산아, 고맙다!’ ‘금’ 자를 떼고 ‘정산’으로 부르는 게 버릇이 됐다. 한데, 이제 격식을 갖춰 ‘정산 씨’라고 부를 일이 생겼다.
올해 금정산은 대한민국 24번째이자 최초의 도심형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시민단체 제안으로부터 20년 만의 쾌거다. 지난해 대구 동구의 팔공산 도학캠핑장과 등산로에서 시설·서비스가 확 달라져 놀랐던 경험이 겹친다. 23번째 국립공원으로 승격한 팔공산은 예전의 만만한 팔공산이 아니었다.
금정산은 국내 유일의 도심형 명품 공원이다. 관광객 유치를 핑계로 요란한 개발 사업을 펼칠 게 아니라, 체계적인 생태·탐방로·문화재 관리와 보호 체계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등산 문화의 변화, 등산객 세대교체의 의미를 새겨보면 명확해진다. 변해야 할 것은 금정산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금정산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정산 씨’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찾아나가면 된다.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