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의 곰곰 생각] 도망쳐도 되는 사회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취업도, 구직도 하지 않는 '쉬었음'
고용 시장 밖 청년 세대 역대 최고
20대는 또래 인구 7.3%로 폭증

'버티지 않아야 승리' 가치관 역전
"실패""돌아오라" 훈계 효과 떨어져
복귀 유도하는 징검다리 고민해야

‘존버!’ 지면에 풀어쓰기 민망한 이 줄임말이 강조하는 바는 ‘끝까지 버텨라’다. 중도 포기란 없다, 끝까지 가지 못하면 낙오라는 집단 최면은 사회의 긴장감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도 같은 역할의 자기 암시다.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면 안 된다는 지상 명령은 사회 구조적으로 촘촘하게 작동해서 개인의 대안 모색은 원천 차단된다.

우리는 ‘도망치지 않는 것’이 미덕인 사회에 살고 있다. 시련을 정면 돌파하지 않으면 현실 도피자, 실패자라는 손가락질이 돌아온다. 개인에 그치지 않고 가족의 수치가 된다. 이 암묵적인 규칙은 도덕률로 작용해 개인과 집단을 통제한다. 문제는 원치 않은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도 발목이 잡힐 때다. 결국 억지춘향은 마음의 병으로 이어진다. 원하는 바가 충족되지 않아서 생기는 우울증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미덕과 수치 체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가정과 학교를 거쳐 기성 사회로 진입하는 경로에 순응하지 않는 흐름이 나타난 것이다. 최근 통계에서 취업도, 구직 활동도 거부한 채 ‘그냥 쉰다’는 20대 인구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더 이상 버티지 않겠다’는 젊은이들의 절규인 셈이다. 전후의 가난과 산업화를 거치며 ‘버티기=생존’이라는 공식을 내면화한 기성세대가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통계청의 7월 고용동향을 보면 취직할 의사 없이 고용 시장 밖에 머무는 흐름은 상승 기세를 더하고 있다. 한창 직장 경력을 쌓으며 결혼과 출산, 주택 마련에 나설 30대의 ‘쉬었음’ 인구는 31만 2000여 명으로 집계됐다. 10년 전인 2016년(16만 8000여 명) 대비 무려 85.7%가 폭증한 결과다.

사회 초년병인 20대는 역대 최악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쉬었음’ 인구가 42만 1000여 명이었는데, 이 수치는 코로나19 유행으로 고용 시장이 얼어붙었던 2020년(40만 7000여 명)보다 높고, 2003년 통계 집계 이후로 7월 기준 역대 최고치다. 2016년 7월(24만 5000여 명)과 비교하면 71.8%나 껑충 뛰었다. 출생률 하락으로 20대 인구가 줄어든 조건을 감안하면 더 심각하다. 2016년 ‘쉬었음’ 20대는 또래 집단의 3.7%였는데, 올해는 7.3%로 갑절이나 뛰었다. 이 추세를 막지 못하면 조만간 20대 10명 중 1명이 사회와 단절되는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쉬었음’ 항목은 실업자도 구직자도 아닌 채 쉬는 경우다. 실업률 통계에서도 빠지는 ‘쉬었음’ 인구가 늘면 자칫 실업이 줄고 고용이 늘어나는 듯한 착시를 일으킨다. 사회문화적 맥락에서는 세대 단절을 일으켜 장기간의 부작용을 초래한다. 학령과 취업 적령기를 놓쳐 경력 단절이 생기면 사회 복귀가 어렵기 때문이다.

과도한 경쟁에 대한 저항, 혹은 도저히 승산이 없어 보이는 미래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저항은 저성장 시대 전 세계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사회 문제다. 중국에서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없는 과로 사회에 염증을 느낀 ‘탕핑’(躺平·가만히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족의 퇴사 행렬이 이어졌다. 초경쟁 사회에서 성공에 대한 강박을 MZ 세대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행태를 비꼰 영어권 속어 ‘눈송이’(snowflake)도 같은 맥락이다. 너무 쉽게 포기하는 행태를 눈 녹듯 사라지는 데 빗댄 조롱이다.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부작용을 먼저 경험한 일본에서는 청년 세대의 도망(회피) 현상이 우울증의 하나로 분류되기에 이르렀다. 정신의학계는 ‘도망은 수치’라는 의식이 옅어지는 데서 나아가 ‘버티면 더 위험하다’거나, ‘도망쳐야 이긴다’는 가치관 역전에 주목한다. 현실을 벗어나지 못해 겪는 고전적인 ‘멜랑콜리 우울증’과 대비되는 것이 도망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새로운 우울증, 즉 ‘신세대 우울증’이라는 것이다.

‘존버’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자발적으로 사회 진입을 거부하는 인구 집단이 급속도로 세를 불리는 현상은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의 규칙을 바라보는 청년들의 시각이 달라진 데 있다. 그래서 “도망치면 실패”라는 훈계는 설득력이 떨어졌다. 청년 세대에 외면당하는 사회가 지속 성장하고 번영할 수는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인정과 포용력이다. ‘공백기’를 마치고 사회에 복귀하려는 청년 세대가 낙인과 배제의 문턱을 마주해야 한다면 세대 단절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도망쳐도 되돌아올 수 있는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과제다.

김승일 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