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가방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문태준(1970~)

나는 이 가방을 오래 메고 다녔어

가방 속엔

바닷가와 흰 목덜미의 파도

재수록한 시

그날의 마지막 석양빛

이별의 낙수落水 소리

백합과 접힌 나비

건강한 해바라기

맞은편에 마른 잎

어제의 귀띔

나를 부축하던 약속

희락의 첫 눈송이

물풍선 같은 슬픔

오늘은 당신이 메고 가는군

해변을 걸어가는군

가방 속에

파도치는 나를 넣고서

-시집 〈풀의 탄생〉 (2025) 중에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 사람의 가방에 담긴 것을 보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 있습니다. 시인의 가방 속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야말로 많은 것을 담을 수 있는 가방이란 생각이 듭니다.

삶에 필요한 것들,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 담겨있는 가방. 그 가방을 오늘도 누군가 메고 갑니다. 파도치는 시인까지 담아서 가는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지금 내 가방 속엔 무엇이 들어있는지 살펴봅니다.

아버지가 남겨놓은 나침반, 걸어왔던 길들의 이정표들, 어릴 적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멀리 떠나고 있던 성당의 종소리, 높고 높은 산들이 한때 깊은 바다였다던 메모와 내 머리 위를 맴돌고 있는 구름들. 나는 오랫동안 내가 메고 다닌 가방이었습니다. 오늘의 나까지 담아 걸어가고 있는 나, 나를 살게 해준 것들을 가만히 불러봅니다. 신정민 시인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

    당신을 위한 뉴스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