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53억 혈세 매몰, 누가 책임지나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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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승혁 사회2부 차장

울산 태화강변에 때아닌 53억 5000만 원짜리 노면 주차장이 들어섰다. 고작 10대 남짓 주차하는 이곳은 원래 ‘태화 고지배수터널’ 공사 현장이었다. 수해를 막겠다며 5년 넘게 땅만 파더니 민원만 양산한 채 끝내 다시 메워버렸다. 부실 행정과 세금 낭비의 압축판으로 지역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사례다.

애초 사업의 본질은 ‘물길의 분산’이었다. 중구는 2016년 태풍 ‘차바’로 생업의 터전을 잃었던 태화시장 일대의 침수를 막아보자며 ‘자연재해 위험지구 정비사업’이란 명칭 아래 두 갈래 계획을 세웠다. 고지대에서 내려오는 빗물의 55%는 터널을 통해 강으로 바로 빼내고, 나머지 45%는 배수펌프장을 지어 처리한다는 복안이었다. 한데 배수량의 절반 이상을 담당할 고지배수로가 공정률 10~20% 상태에서 통째 무산(부산일보 1월 30일 자 10면 보도)된 것이다.

터널이 막히자 방재 설계의 근본적인 허점이 남았다. ‘터널이 감당하기로 한 빗물 55%는 이제 어떻게 처리한단 말인가.’ 설계대로라면 지난 2월 준공한 배수펌프장은 빗물의 절반도 처리하기 어려운 ‘반쪽짜리’ 시설에 불과하다. 총 600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쏟아붓고도 태화시장은 여전히 침수 위협 앞에 위태롭다는 얘기다.

중구청의 후속 대응은 더욱 납득하기 어렵다. 터널 공사를 ‘잠정 보류’(?)하는 대신, 행정안전부 공모로 103억 원을 확보해 함월산 계곡 상류(무주골·유곡천)에 우수저류시설을 짓겠다고 한다. 이 사업을 준공하면 지방비를 확보해 200억 원대 고지배수터널을 재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서 의문이 꼬리를 문다.

먼저, 우수저류시설이 터널 몫이었던 빗물 55%를 감당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만약 55% 유량을 처리할 수 있다면 애초 큰돈 들여 민원이 불보듯 뻔한 도심지 터널 공사는 왜 추진했나. 터널을 다시 추진한다는 대목에선 103억 원짜리 저류시설이 결국 임시방편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계획대로 고지배수터널을 마무리한다 해도 자가당착이다. 현재 추진 중인 우수저류시설의 실효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두 시설 모두 필요하다면 ‘터널과 배수펌프장으로 100% 유량 처리가 가능하다’던 종전 설계가 잘못됐음을 시인하는 꼴이다. 물론, 행안부 공모도, 지방비 확보도 확정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재추진 시기조차 알 수 없는 막연한 구상에 가깝다. 갈팡질팡하는 중구의 행정 난맥상이 주민 혼란만 부추길까 걱정이 앞선다.

중구가 터널 실패를 ‘잠정 보류’로 규정하며 현실을 호도하는 것도 문제다. 보류란 어떤 일을 잠시 멈추어 두는 것이지, 수억 원의 비용을 들여 공사 현장을 원상복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저 행정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해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지난 2월 11일 태화시장 인근 배수펌프장에서 정치인들과 주민들이 참석한 축하 행사가 열렸다. 입구 현수막에는 ‘자연재해위험지구 정비사업 준공식’이라는 글귀가 선명했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무색한 광경이다. 흙더미로 터널은 메울수 있어도 주민 불안과 냉소는 가리기 어렵다. 방재의 한 축이 무너진 상태에서 절반의 준공을 전체의 성공으로 포장하는 작태는 110만 시민에 대한 기만이나 다름 없다.


권승혁 기자 gsh0905@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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