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흔들리는 국제 질서와 부산 금융의 기회
이명호 부산국제금융진흥원장
평상시 금융중심지는 효율·편리 공간
혼란의 시기에는 거래 안정성 최우선
불확실성 시대, 예측 가능성이 경쟁력
국제 질서 흔들릴 때마다 금융 재편
큰 도시 아닌 믿을 수 있는 도시 쏠림
부산, 세계적 변화 대응 기회 잡아야
최근 국제 정세의 불안은 더 이상 외교·안보에 그치지 않고 자본의 이동과 금융기관의 입지를 바꾸는 변수로 작동하고 있다. 전쟁의 장기화, 제재의 상시화, 공급망 불안, 통화 질서의 긴장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금융의 관점에서 보면 지금은 단지 위기의 시기만은 아니다. 글로벌 자본과 금융 기능이 더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곳으로 옮겨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부산에는 이 흐름을 금융중심지 도약의 기회로 살릴 여지가 있다.
평상시 금융중심지는 효율과 편리의 공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불안의 시기에는 그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이 먼저 보는 것은 수익률만이 아니다. 자산이 안전하게 보호되는지, 계약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지, 결제와 청산이 멈추지 않는지, 정책과 규제가 쉽게 흔들리지 않는지를 본다. 결국 금융중심지는 위기 속에서도 거래 질서를 지켜낼 수 있는 도시다.
역사도 이를 보여 준다. 국제 질서가 흔들릴 때마다 중심은 이동했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금융 중심이 베네치아와 제노바에서 앤트워프, 암스테르담, 런던으로 옮겨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 크고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더 안정된 제도와 더 예측 가능한 질서를 갖춘 도시가 중심 기능을 끌어들였다. 반대로 정치적 갈등과 제도 혼란을 겪은 도시는 금융 기능을 지켜내지 못했다. 금융은 결국 가장 큰 도시보다 가장 믿을 수 있는 도시를 선택한다.
이제 부산 금융중심지 논의도 국내 다른 도시와의 경쟁 틀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 시야를 국제 질서 재편과 글로벌 금융 기능 이동이라는 더 큰 흐름으로 넓혀야 한다. 중요한 것은 다른 도시를 이기는 일이 아니다. 변화하는 국제 환경 속에서 부산이 어떤 대안이 되는 금융도시, 어떤 믿을 만한 보완 도시가 될 수 있느냐이다.
금융허브의 불안정성이 커질수록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보완 도시의 가치는 더 커진다. 부산도 세계 금융 질서의 변화 속에서 새로운 금융 수요를 흡수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금융도시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기회는 언제나 준비된 곳으로 간다. 지금 중요한 것은 부산이 그 기회를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고 있느냐이다.
금융중심지의 경쟁력은 결국 세 가지다. 첫째, 안전성이다. 외부 충격 속에서도 거래와 자산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예측 가능성이다. 규제와 세제, 감독과 정책의 방향이 일관돼야 한다. 셋째, 개방성이다. 외부 자본과 기관, 인력이 실제로 들어와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함께 갖춰져야 비로소 힘을 갖는다.
부산의 현실적 강점은 분명하다. 해양·항만·물류는 물론 부울경 동남권 제조업과 연결된 실물 기반이 두텁다. 공급망과 해상 물류가 국제 정세와 지정학의 영향을 직접 받는 지금, 실물 금융, 해양 금융, 무역 금융, 물류 연계 금융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부산이 이 기반을 금융 기능과 정교하게 연결해 나간다면, 단순한 지역 금융도시를 넘어 차별화된 금융 거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금융중심지는 구호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실제 산업, 실제 거래, 실제 서비스의 축적 위에서 형성된다. 그런 점에서 이는 부산이 가진 가장 현실적이고도 강한 자산이다.
다만 기회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부산 금융중심지 전략의 가장 큰 위험은 외부보다 내부에 있다. 사업 이름이 바뀌고, 우선순위가 뒤집히고, 선거 때마다 정책의 틀이 흔들리면 어느 금융기관도 장기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자본은 단기적 열정보다 장기적 일관성을 더 높게 평가한다. 부산이 먼저 흔들리지 않는다는 신호를 줘야 한다.
중앙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금융 규제, 외환, 세제, 감독의 핵심 권한은 대부분 중앙정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의 지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두바이와 아스타나의 사례가 보여주듯, 제도 실험과 신속한 집행이 가능한 자율적 운영 기반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 현장 중심의 자율성과 실행력이 있어야 금융중심지 전략도 실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지금 부산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세계의 불안을 남의 일처럼 바라보다가 기회를 놓치는 길, 그리고 금융 기능 이동의 흐름을 읽고 부산을 새로운 대안으로 키우는 길이다. 금융의 역사는 반복해서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중심은 영원하지 않다. 더 믿을 수 있는 곳,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갈 뿐이다.
부산이 놓쳐서는 안 될 것도 바로 그 변화다. 변화의 방향을 정확히 읽고, 흔들림 없는 전략과 지속적인 실행으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세계적 불확실성은 분명 부담이다. 그러나 준비된 도시에 그것은 위기가 아니라 재편의 기회가 된다. 부산이 금융중심지로 도약할 수 있느냐는 외부 환경보다 먼저, 그 기회를 끝까지 붙들 의지가 있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