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칼럼] 설계도 밖의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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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들 프리랜서

봄이 오면 사람들은 벚꽃 길을 찾아다닌다. 봄을 만끽하려고 이곳저곳 다니는 모습은 다분히 낭만적이다. 나도 봄이 오면 그리워하는 곳이 있다. 부산 금정구 장전동의 느티나무 가로수 길이다. 연두색 새순이 돋으면 봄이 왔다는 걸 알리고, 무성한 녹음이 짙어지면 여름이 왔다는 걸 알리던 길이다. 나의 초등학교 등하굣길은 가로수 길과 함께했다.

하지만 그 길은 금정구와 북구를 잇는 산성터널이 생기면서 사라졌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동네의 그늘이 되어주던 수십 그루의 느티나무가 베어졌고, 초등학교의 교문은 위치까지 바뀌었다. 학교 앞 골목에 즐비하던 문방구들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넓은 도로와 터널, 아파트의 높은 담벼락이 새롭게 자리 잡았다. 가로수 그늘 아래 오가던 발걸음들은 조용해졌다. 나뭇잎 흔들리던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던 골목에는 자동차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남았다.

최근 ‘세계디자인수도 부산’ 협정식

디자인 통해 변화 가능성 높게 봐

F1963·영도 깡깡이 마을 좋은 사례

시민, 오래된 것 잃지 않을 권리 있어

어떤 과거 지키고, 어떤 기억 남길지

우리 마음속 질문 던질 때 도시 달라져

터널은 필요한 인프라다. 산성터널은 산이 많은 부산의 광역 물류와 교통망을 위한 도시의 선택이었다. 그 불가피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라진 것들을 떠올릴 때, 느티나무 가로수 길은 단순한 추억의 부재나 아쉬움만으로 치부될 수 없다.

동네란 단순히 물리적 공간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서예원의 할머니가 수십 년째 같은 자리에 앉아 붓을 드는 시간, 빵집 앞에서 아이 손을 잡고 멈추는 시간, 퇴근길 치킨을 포장해 가는 시간. 이런 것들이 모여 동네가 된다. 한 동네가 형태를 바꾸면, 오랜 시간 같은 동선을 공유하며 쌓아온 관계들도 한꺼번에 흩어지게 된다. 가게가 문을 닫고 이웃이 떠나는 건 개인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실은 함께 만들어온 시간이 지워지는 집단의 상실이다.

동네의 작은 변화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곳까지 파문을 일으킨다. 핀란드 헬싱키 디자인 랩(Helsinki Design Lab)이 소개한 한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지역의 수영장에서 이용객이 급격히 줄어든 일이 있었다. 시의회는 곧바로 시설 노후화를 원인으로 지목했고 대대적인 리모델링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실제 원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수영장으로 향하던 버스 노선이 변경되면서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긴 것이다. 문제는 건물이 아니라 버스 시간표였다.

이 사례는 도시가 작동하는 방식이 얼마나 미세한 요소들에 의해 좌우되는지를 일깨운다. 시민의 일상은 거창한 건물보다, 오히려 익숙한 동선과 사소한 연결 위에서 형성된다. 결국 도시를 설계한다는 것은 '무엇을 새로 지을 것인가'보다 ‘사람들의 움직임과 관계가 어떻게 이어지고, 어떻게 단절되는지’를 먼저 묻는 일이어야 한다.

며칠 전 ‘2028 세계디자인수도 부산’ 협정식이 열렸다. 세계디자인기구(WDO)는 새 건물을 짓고 화려한 조명을 입히는 것은 자본이 있으면 어느 도시든 할 수 있는 일차원적인 디자인이라고 봤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달랐다. 이 도시가 과거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공간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지였다. 부산을 완성된 도시가 아닌, 디자인을 통해 자신을 바꿔나갈 가능성이 높은 도시로 평가한 것이다.

옛 공장의 골격을 살린 문화복합공간 F1963, 조선소 골목을 남긴 영도 깡깡이 마을은 사라질 뻔한 문화를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문제는 그 방식이 예외적인 성공 사례로만 남을 것인지, 아니면 개발의 기본 문법이 될 것인지가 관건이다.

우리가 도시 개발을 이야기할 때 최우선 과제로 삼아온 것들이 있다. 더 넓은 주거 공간, 더 빠른 교통, 더 편리한 인프라들이다. 그동안은 이런 기준들이 필요했다. 지금도 여전히 고려해야 한다. 다만 그 기준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더 크고 더 빠른 것들이 들어설 때, 그 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들 말이다. 이제는 개발 논리와 함께 동네가 사라질 때 함께 끊기는 관계들도 눈여겨봐야 한다.

우리 세대는 나고 자란 공간을 잃고 있다. 시민의 삶에는 더 나은 것을 제공받을 권리만이 아니라, 오래된 것을 잃지 않을 권리도 있다. 그 상실이 누적될 때 도시가 무엇을 잃어가는지, 행정만이 아니라 시민도 함께 물어야 한다. 어떤 과거를 지키고 어떤 기억을 다음 세대에 넘길 것인지, 그 질문이 설계도보다 먼저 시민의 마음속에서 시작될 때 도시는 달라진다.

봄마다 느티나무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다면, 그 그리움이 도시를 바꾸는 시작이 될 수 있다. 좋은 도시는 안목 있는 시민이 만들어낸다. 2028 세계디자인수도 부산이 세계에 내놓을 수 있는 가장 부산다운 것이 무엇일지 함께 물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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