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지역 의료 공백 논의는 다시 시작된다
권상국 지역사회부장
지역에 큰 상처 남긴 의료계 태업
정주 환경에 대한 믿음마저 파괴
지역의사제와 공공의대 재추진
이제는 거부감보다 기대 더 커져
야합으로 끝나지 않게 지켜봐야
해가 바뀌고 희망의 메시지가 쏟아지는 요즘이다. 그 가운데서도 지역에 반가운 소식을 꼽자면 단연 지역의사제 논의다.
의대 정원을 결정하는 보건의료정책심의위에서 내년 이후 의대 증원분 전체를 지역의사로 돌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공공의대 신설과 인력 양성 규모 등에 대한 논의도 이어가기로 했단다.
지난해 의대 증원을 빌미 삼아 촉발된 의료계의 태업은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으로 갈수록 더 크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의사를 못 구해 동네마다 겨우 돌아가던 24시간 응급실이 문을 닫았고, 응급실 뺑뺑이에 어린 목숨이 피어보지도 못하고 숨을 거뒀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전해졌다.
일련의 사태는 정주 환경에 대한 지역 주민의 기본적인 믿음을 흔들어 댔다. ‘진짜 여기서 나와 내 가족이 안심하고 계속 살아도 되는 걸까’라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국가의 입장에서도, 국민의 입장에서도 참담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의 심장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균형발전이 국민적 공감대를 얻어가는 와중이었다. 그러나 의료계의 태업은 그들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균형발전은 허상에 불과하며, 역시나 수도권을 벗어나 살면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도 받을 수 없다’라는 조롱만 남겼다.
사실 지역의사제나 공공의대 논의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다들 막연한 거부감을 느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대도시를 벗어나 도농복합지역으로만 가도 그 거부감보다 의료 공백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커졌다. 지난해 의료계의 태업을 직시하며 여론은 그렇게 싸늘하게 바뀌었다.
김해와 양산은 문을 닫았던 거점 병원 두 곳이 올해 긴 침묵을 깨고 재가동을 준비하자 주민 기대감이 상당하다. 경영난으로 폐업했던 김해중앙병원과 웅상중앙병원이 운영 재개를 위한 로드맵을 구체화 하고 있다. 여전히 복잡한 채무 관계와 의료진 확보가 숙제로 남아 있지만 이들 병원의 폐업 이후 오랫동안 원거리 진료와 응급의료 공백으로 큰 불편을 겪어온 탓에 주민들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경남도가 지난해 시범운영에 들어간 지역의사제도 반년도 되지 않아 긍정적인 시그널이 나온다. 영입이 쉽지 않은 과목에서도 채용이 이뤄지고 있고, 계약 만료 후 수도권으로 돌아가더라도 그 기간만큼은 진료의 영속성을 보장할 수 있는 까닭이다. ‘내일부터 근무 못 해요’ ‘공고를 띄워 새 의사 구해봐요’라는 식의 철부지 수련의들의 처신에 지역 병원들이 더는 휘둘리지 않게 됐다는 게 고무적이다.
그러나 벌써 의료계는 의사 수급 시점과 인원을 놓고 불만을 드러내며 재차 태업 기미를 보인다. 대한의사협회에서는 물리적 대응까지 운운하는 모양이다.
지난해 ‘의대 증원이 어떠한 기준도 없이 이뤄졌고 오류투성이’라며 1년을 드러누운 이들이다. 올해 바뀐 정권에서 추계위를 새로 꾸려 재차 증원 수치를 산출했지만 이 또한 합리적이지 않다며 어깃장을 부린다. 이쯤 되면 어느 쪽의 주장이 비합리적인지는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연초 쏟아지는 메시지와 이슈의 홍수 사이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건 지역 의료는 벼랑 끝 위기감 속에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 했다는 사실이다. 이슈의 주무대에서 사라진 의대 증원 논의는 장기간 이어진 피로감에 졸속 처리되거나 여론과 동떨어진 수준의 야합으로 결론 날 가능성 역시 높다.
2024년 기준으로 인구 1000명 당 의료인은 서울이 4.7명인 데 반해 경남은 그 절반 수준인 2.6명에 불과했다. 의대 증원 논의가 수도권 의료기관 종사자 수만 늘리는 방향으로 악수를 두지 않도록 지역의사제와 공공의대가 본궤도에 오를 때까지 꾸준히 지켜봐야 한다.
교육과 의료는 최소한의 정주 환경을 만드는 기본 조건이다. 그리고 그 기본 조건을 충족하는 지역이 확장될수록 균형발전은 이상이 아닌 현실이 된다.
지역 소멸을 막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 모두 천문학적 비용도 불사하고 ‘사람 붙들기’에 나서고 있다. 기본소득에 집과 일자리까지 지역에 살아만 준다면 뭐든 제공하겠다며 진땀을 흘리는 중이다.
하지만 이런 당국의 노력과 시간과 자본도 ‘우리 동네도 응급실 뺑뺑이 발생’ 기사 한 번에 무위로 돌아간다. 일상을 흔들어 정주 환경을 악화시키는 세력이야말로 진정한 균형발전의 적이다. 병오년의 여론은 더 매서운 회초리를 들고 눈을 치켜떠야 한다.
권상국 기자 ks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