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재파의 생각+] 동점 운동회
동아대 교양대학 교수·공모 칼럼니스트
요즘 초등 운동회 경쟁 많이 사라져
취지는 이해… 승패 의미 지우는 건 의문
오히려 학교 밖 사교육 영역으로 이동
무조건 배제 말고 규칙 속 경험도 필요
얼마 전 아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에 다녀왔다. 아이들은 들뜬 마음에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히 운동회에 갈 준비를 했다. 나 역시 어린 시절 운동회의 추억을 떠올리며 설레는 마음을 안고 아이들의 학교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운동회가 시작되니 예전과 다른 요즘 운동회 풍경에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가장 크게 달라진 점 한 가지를 꼽자면, 요즘 운동회에서는 경쟁이 사실상 사라졌다는 것이다. 청군과 백군으로 나누어 경기를 진행하지만 어떤 게임을 어떻게 해도 결과는 결국 ‘동점’으로 끝난다. 예를 들어 계주에서 청군이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500점을 따내도, 백군이 ‘응원을 열심히 했다’는 이유로 동일한 500점을 받아 결국 최종 결과가 동점으로 귀결되는 식이다.
동점 운동회가 끝난 뒤 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아이들에게 오늘 운동회가 어땠는지 물어보았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저마다 느낀 점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 팀이 열심히 해서 이겼는데 동점이라고 해서 화가 났다”, “한 달 동안 아침마다 계주 연습을 한 친구가 불쌍했다”, “어차피 동점인데 왜 경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아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가 무의미해질 때 느끼는 허무함이었다.
물론 소외되고 상처받는 아이 없이 모두가 참여하고 즐기는 운동회를 만들자는 학교의 취지 자체는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인위적인 동점 처리로 노력과 경쟁, 승패의 의미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방식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초등학교 운동회는 단순한 체육 행사가 아니다. 운동회는 공정한 규칙 아래 최선을 다해 실력을 겨루고 그 결과에 따라 승리한 친구에게는 박수를 보내고, 패배한 친구에게는 격려를 건네며 서로의 노력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는 교육의 장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성취감과 배려심, 협동심과 같은 사회적 기술을 익힐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동점 운동회는 운동회 본연의 교육적 의미를 크게 훼손한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경쟁을 부정적 자극으로 보아 배제하려는 교육적 조치는 비단 운동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이미 2010년을 전후해 중간·기말고사가 단계적으로 폐지되었고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도 초등 단계에서 실시되지 않는다. 교육 당국은 시험 폐지가 과도한 성적 경쟁을 줄이고 학생 부담을 완화하려는 조치라고 설명해 왔다. 또 이러한 취지에 공감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문제는 시험이 없어졌다고 해서 경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학교에서의 공식적인 평가가 없어지자 학부모들은 아이의 학업 수준을 확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교육 기관의 ‘레벨 테스트’에 의존하는 상황이 됐다.
예를 들어 수학 심화 학원으로 유명한 ‘생각하는 황소’ 입학시험에는 전국적으로 1만 명도 넘는 학생이 응시한다고 한다. 이 학원은 학업 수준에 따라 반을 4개로 나누는데 입학 시험에 합격했는지, 어느 반에 배정받았는지가 공부 잘하는 아이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 학원 입학시험 준비를 위한 학원을 다니거나 심지어는 과외를 받는 경우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경쟁을 없애려는 교육 당국의 의도와 달리 우리 아이들은 오히려 학교 밖 통제하기 어려운 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이는 경쟁의 장을 학교에서 사교육 영역으로 이동시켜 더 큰 격차와 비용 부담을 낳고 있다.
정말 초등학교는 어떤 경쟁도 허용해서는 안 되는 공간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사회에 경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며, 아이들 역시 언젠가 현실의 경쟁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의 축소판인 학교는 아이들이 그 경쟁을 보다 안전한 환경에서 미리 경험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규칙 안에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방법, 승리를 위한 치열한 노력, 지더라도 다시 도전해 보는 경험 등은 경쟁 사회에 나가기 전 학교에서 익혀두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다.
그렇다고 경쟁의 강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경쟁을 무조건 배제만 하지 말고 건전한 경쟁을 안전하게, 단계적으로, 공정한 규칙 속에서 경험하게 하자는 것이다. 운동회도 시험도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장치, 비교와 줄 세우기 수단이 아닌 노력과 도전, 성취의 의미를 배울 수 있는 교육적 과정으로 설계하자는 것이다.
우리의 학교는 아이들이 넘어질까 봐 뛰지 못하게 하는 곳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고 달리는 법, 안전하게 넘어지는 법,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뛰는 법을 배우는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