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화의 크로노토프] 해양수도 부산, '축적'의 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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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음악 칼럼니스트

해수부 '지역 문화 동반자' 기대 커
작가들이 해양 소재 콘텐츠 빚도록
예산 일부라도 예술 지원 사용하길

새해는 언제나 약속의 시간이다. 늘 계획과 목표로 시작된다. 지난해 12월 23일, 해양수산부 부산 이전 개청식은 구호로만 외쳐왔던 해양수도가 현실로 전개되는 새로운 한 해의 출발을 알렸다. 하지만 7조 3566억 원이라는 예산과 함께 온 해양수산부의 정착이 단순한 물질적 팽창이 될지 도시의 문화적 자생력과 자존심 회복으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도시는 문화적 경험이 반복되고 기억이 축적되어 쌓일 때, 비로소 한 세대의 유행을 넘어 영속적인 생명력을 지닌 ‘문명의 그릇’이 된다.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고 지탱하고 유지하는 핵심적인 비결이자 에너지가 문화와 예술이다.

지난해, 부산은 오페라하우스와 콘서트홀을 운영하기 위해 부산클래식문화재단을 설립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마저도 여전히 불안하게 보인다. 화려한 물질적 기반은 갖췄으나. 정작 그 공간을 채울 ‘부산만의 기억과 시간’이라는 준비 과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공연예술 장르에서 공공 예산으로 유명세를 임대하는 일은 쉽다. 알려진 거장을 영입하고, 이미 완성된 대형 기획사의 공연 상품을 쇼핑하듯 사 오는 방식은 단기적인 박수갈채를 보장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것은 도시 문화의 축적이 아니라,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를 임시방편으로 가리는 ‘문화적 가림막’에 가깝다. 당장에 곶감만을 빼 먹는 근시안적 소모다.

예술과 문화는 시간을 먹고 자라는 본질을 갖고 있다. 도시는 사람들이 살며 일군 실천들이 모인 복합적인 산물이다. 한순간 화려한 박수보다 수십 년의 제작 역량과 실패와 재도전이 쌓이는 구조가 필요하다. 부산에 정착한 해양수산부 예산 중 아주 작은 일부라도 해양도시의 문화예술을 위해 사용되기를 바란다. 총예산의 0.3%만이라도 해양 문화와 해양 예술을 꽃피우기 위한 마중물로 쓰이면 좋겠다. 그 예산으로 부산이 완성품만 소비하는 ‘문화 변방’에서 벗어나게 되고, 지역 예술가들이 부산의 바다와 해양을 소재로 직접 콘텐츠를 빚어내는 주체가 되면 좋겠다.

해양문화도시는 개념이나 방향 없이 반복되는 전시와 축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사오거나 빌려온다고 저절로 만들어지지도 않는다. 부산의 바다와 항구는 단순한 경관이 아니다. 전쟁을 통한 이주와 노동으로 이루어낸 삶이 켜켜이 쌓여 만든 ‘기억의 서사 공간’이다. 관광객들이 단순히 스치고 지나갈 ‘볼거리’가 아니라, 예술적 형식으로 정형화되고 반복 생산되어야 할 소중한 ‘문화 자산’이다. 도시의 문화예술은 연구와 기록, 창작과 재공연, 교육과 전승으로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만 살아남는다. 예술과 문화는 단기적 성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그 과정을 제도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지속적으로 꽃피울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사치품을 명품이라 부르며, 외부에서 가져온 비싼 공연에 ‘세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것은 그 도시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 그곳의 사람과 시간이 축적된 것이라야 한다. 그리스 음악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가장 그리스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 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바다와 해양, 그리고 부산만이 가진 독창성이 빠진 ‘수입산 콘텐츠’만으로는 이 도시의 정체성을 담아낼 수도, 세계적인 것이 될 수도 없다. 지역의 경험과 시간으로 만들어진 고유한 창작물이 지층처럼 쌓일 때, 부산은 세계적인 도시가 된다.

병오년 새해에 부산은 무엇을 더 빨리 가져올 것인가 보다, 무엇을 더 오래 키울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문화가 다시 ‘곁다리’나 ‘전시행정’으로 밀려난다면, 도시는 양적으로 팽창할지언정 질적으로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공허한 성장에 그치고 말 것이다. 문화재단이나 문화회관 또한 수도권 대형기획사의 일회성 공연 유치를 위한 ‘부산분점’ 역할에 그치지 말고, 지역 예술가들의 자생적 제작 기지를 자처하며 ‘부산발 콘텐츠’를 길러내야 한다. 예술가가 다음 작업을 지속적으로 준비하는 시간과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 문화예술 예산은 미래를 담는 냉철한 정책의 언어라야 한다.

부산의 콘텐츠가 세계로 뻗어나가는 꿈을 꾸어야 한다. 부산의 꿈이 유명인들의 방문 횟수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숫자로 만든 성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지만, 부산 사람의 땀으로 쌓은 기억과 그 기억이 빚어낸 예술은 풍랑에도 휩쓸리지 않는다. 부산이 단순한 소비의 파동을 넘어, 깊고 단단한 창작의 심연을 담아낼 시간이 되었다. 자본이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항구에 머물게 할 것인지, 오랜 세월 사람이 살며 문화와 더불어 빛나는 해양도시로 만들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 새로 둥지를 튼 해양수산부가 사람을 부르고, 사람이 머무는 도시 부산을 만드는 데 진정한 문화적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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