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환단고기’를 다시 읽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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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 대표

“우리 동방의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알아,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한다.” 〈환단고기〉의 사상을 요약하는 이 문장은 역사적 사실 여부와는 별도로, 한 공동체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이해하고자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1월 말은 새해의 결심이 서서히 힘을 잃는 시기다. 계획과 목표가 흔들릴수록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나를 누구라고 믿고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자기개념, 곧 자기의식은 개인의 의지나 성취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몸에 밴 태도와 습관, 기억과 분위기, 그리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오랫동안 반복해 온 이야기 속에서 서서히 빚어진다. 개인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더 큰 ‘우리’에 대한 이해와 맞물려 형성된다. 그래서 자기개념을 성찰하려는 시선은 자연스럽게 개인을 넘어 그가 속한 집단의 서사로 향하게 된다.

이 집단적 자기 이해가 한 사회 차원에서 응결된 형태가 바로 국민정신이다. 국민정신은 개인의 심리와 윤리를 떠받치는 중요한 토대다. 국가 공동체가 자신을 존엄한 존재로 인식할 때 그 안에 속한 개인 역시 좀 더 안정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 반대로 공동체가 스스로를 하찮거나 주변적인 존재로 내면화할 경우 개인의 자기 확신 또한 쉽게 흔들린다.

신화적 요소 지녀도 배척해서는 안 돼

사실 여부보다 사유 흔적으로 이해를

어떤 삶 자세 가능하게 했는지가 중요

이러한 국민정신은 처음부터 언어로 조성되지 않았다. 춤과 의례, 제의는 말보다 앞서 공동체 세계관을 몸에 새겨 왔다. 절기의 제사나 집단적 춤사위, 예절의 신체 동작은 개인에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라는 감각을 반복적으로 각인시킨다. 그러나 몸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다의적이다. 이와 달리 텍스트는 의례와 몸의 실천에 담긴 의미를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공동체의 자기 이해를 언어로 고정한다. 춤과 의례가 국민정신을 ‘느끼게’ 한다면, 텍스트는 그것을 ‘이해하게’ 한다. 문제는 어떤 텍스트가, 어떤 방식으로 이 역할을 수행해 왔는가이다.

이 물음의 연장선에서 〈환단고기〉를 둘러싼 논쟁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책이 신뢰할 수 있는 역사 문헌인가를 두고는 논란이 많다. 그러나 텍스트의 가치를 오직 사실 여부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사실적 정확성이라는 질문 너머에는 또 다른 물음이 놓여 있다. 즉 이 텍스트가 독자에게 어떤 자기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주는가 하는 점이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떤 판단이 거짓이라는 점은 그 판단을 반박하는데 결정적 이유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삶을 고양하고, 삶을 유지하며, 생을 지탱하는가 하는 점이다.” 니체에게 중요한 기준은 사실의 정확성이 아니라, 그 판단과 해석이 인간의 삶에 어떤 힘으로 작용하는가였다. 어떤 이야기가 인간을 위축시키고 자기 경멸로 이끈다면,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삶에 해롭다. 반대로 한 서사가 인간에게 자신을 긍정할 힘과 버텨낼 용기를 준다면, 그것이 신화적 요소를 지닌다 해도 섣불리 배척되어서는 안 된다. 니체는 진리를 삶과 분리된 추상적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삶을 북돋우는 해석과 삶을 약화시키는 해석을 가려내는 데 철학의 역할이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철학적 사유란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삶을 견디게 하고 지속하게 만드는 해석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이 관점을 텍스트 읽기에 적용한다면, 문제는 한 문헌이 ‘사실인가’보다 그것이 ‘어떤 삶의 태도와 자기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가’로 이동한다. 〈환단고기〉는 유구한 시간적 연속성과 선택된 공동체라는 상상을 통해 개인이 자신을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찬란한 전통의 흐름 속에 있는 존재로 이해하도록 이끈다. 이러한 서사는 개인의 자기개념 형성에 작용하는 중요한 문화적 자원이 된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이스라엘 민족의 성경 전통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선민’이라는 집단적 자기 이해는 유대 공동체가 오랜 유랑과 박해 속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이 믿음의 역사적 진위를 어떻게 평가하든, 그것이 개인의 자기의식과 존엄성을 지탱해 온 힘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사례가 보여주듯 중요한 것은 서사의 사실 여부가 아니라 그 서사가 개인에게 어떤 삶의 자세와 자기 인식을 가능하게 했는가이다.

〈환단고기〉는 맹신의 대상도, 냉소의 텍스트도 아니다. 그것은 한 공동체가 스스로를 존엄한 존재로 이해하고자 했던 사유의 흔적이다. 개인의 자아개념이 쉽게 흔들리는 시대, 우리는 어떤 이야기가 우리를 더 단단하게 살아가게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가 ‘정확히 어땠는가’가 아니라, 그 과거를 해석하는 우리의 사유가 ‘오늘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열어 주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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