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수의 과기세] 양자역학 100년과 닐스 보어
부산대 교양교육원 교수
가설·이론 거쳐 1925년 양자역학 시대
덴마크 보어 연구소, 현대물리학 산실
열린 자세·자유로운 토론으로 후학 양성
올해는 양자역학이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이에 발맞추어 유엔은 올해를 ‘세계 양자과학기술의 해’로 정했다. 세계 곳곳에서 양자역학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는데, 필자가 속한 한국과학사학회도 지난 4월 26일 개최된 춘계학술대회에서 양자역학 100년을 돌아보는 특별 세션을 마련했다.
양자역학은 1925년에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의 두 갈래로 세상에 태어났다. 1925년 7월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역학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했고, 그것은 1926년 3월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을 저자로 하는 소위 ‘3인 논문’으로 진화했다. 슈뢰딩거는 1925년 12월 양자 현상에 대한 파동방정식을 구상했으며, 1926년 1월 파동역학의 탄생을 알린 첫 논문을 발표했다. ‘양자역학’이란 용어는 보른이 처음 사용했고, 슈뢰딩거는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이 수학적으로 동일하다는 점을 증명했다.
양자역학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플랑크, 아인슈타인, 보어, 조머펠트 등을 만나게 된다. 플랑크는 흑체복사를 설명하기 위해 1900년 ‘플랑크 상수(h)’를 도입했고, 아인슈타인은 1905년 플랑크 상수를 활용해 ‘광전효과’를 멋지게 분석했다. 보어는 1912년 전자가 일정한 궤도를 따라 운동한다는 ‘궤도 모형’을 통해 수소의 선스펙트럼을 설명했으며, 그것은 1916년 ‘보어-조머펠트 원자모형’으로 거듭났다. 1900~1912년 양자가설, 1912~1925년 고전 양자론, 1925년 이후가 양자역학의 시대로 평가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처음에는 가설에 불과했던 것이 학자들의 인정을 받으면서 이론이 되었고 결국 수학적 표현을 갖춘 역학의 수준에 이르렀던 셈이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인물은 닐스 보어(1885~1962)이다. 보어는 당시 과학의 주변국이던 덴마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1년 코펜하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로 갔다. 전자를 발견한 조지프 톰슨 밑에서 1년 정도 수학하다가 뉴질랜드 출신인 러더퍼드가 재직 중이던 맨체스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러더퍼드는 알파입자 산란실험을 바탕으로 1911년 원자핵이 중심에 있고 전자가 핵 주위를 회전한다는 ‘행성 모형’을 제안한 바 있었다. 보어는 행성 모형이 전자기학과 모순된다는 점에 착안하여 자신의 궤도 모형을 개발했다. 보어는 1916년 30세의 나이로 코펜하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21년에는 덴마크 정부와 칼스버그 양조회사의 지원을 바탕으로 코펜하겐 대학에 이론물리학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보어는 연구소의 소장을 맡아 성심껏 운영했으며, 이에 따라 이론물리학 연구소는 ‘보어 연구소’로 회자되었다.
덴마크의 보어 연구소는 독일의 괴팅겐 대학, 영국의 캐번디시 연구소와 함께 현대물리학의 산실이 되었다. 사실상 양자역학의 성립과 발전에 공헌했던 거의 모든 이론가가 1920~1930년대에 보어 연구소를 거쳐 갔다. 파울리의 배타 원리, 윌렌벡과 호우트스미트의 스핀 개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보어의 상보성 원리 등이 이 연구소에서 나왔다. 오늘날 양자역학에 대한 주류 해석으로는 ‘코펜하겐 해석’이 꼽히는데, 여기서 코펜하겐은 다름 아닌 보어 연구소를 지칭한다.
보어 연구소의 독특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용어로는 ‘코펜하겐 정신(Copenhagen spirit)’이 자주 사용된다. 그것은 격식을 따지지 않는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의미한다. 보어는 한참 아래의 젊은이들이 어떠한 의견을 내더라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산책하면서 젊은 과학자와 단둘이서 자유로운 대화를 즐겼던 사람도 보어였다. 이 때문에 보어 그룹은 ‘소요학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보어가 내건 거의 유일한 규칙은 “어느 누구도 모국어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보어 연구소를 거쳐 간 인물 중에는 일본 현대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니시나 요시오도 있다. 그는 1923~1928년 보어 연구소에서 공부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코펜하겐 정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니시나는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연구 업적을 남겼고, 이화학연구소(리켄)에서 핵심적인 관리자로 활동했으며, 자유로운 토론과 적절한 격려로 후학을 양성했다.
조지프 톰슨의 아들로 1937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조지 톰슨은 보어가 과학계에 미친 공헌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출판된 논문만을 가지고 보어가 과학계에 끼친 영향을 전부 평가할 수는 없다. 그는 갈릴레오와 뉴턴 이래 가장 근본적인 과학의 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었다. 세계의 많은 과학자들이 보어의 뛰어난 업적에 무한한 찬사를 보냈으며,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애정을 품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는 점이 그의 과학적 업적보다 더 중요하다.” 보어는 세대 간에 다리를 놓고 다음 세대를 키워낸 훌륭한 스승이자 리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