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진의 기록으로 그림 읽기]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알면 허세나 소문을 쫓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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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두 여인, 1962년, 캔버스에 유채, 130×89cm, 리움미술관 소장, ⓒ박수근연구소 나무와 두 여인, 1962년, 캔버스에 유채, 130×89cm, 리움미술관 소장, ⓒ박수근연구소

우리나라 사람치고 박수근(1914~1965)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세상을 떠난 뒤 얻어진 명성이라 아쉽긴 하지만. ‘만약’은 정말 쓸데없는 말이지만, 그가 돌아와 다시 화가를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어려울 것 같다.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나 흘렀지만, 여전히 미술은 인정받기 어려운 세상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면 머리는 감옥’이라는 이 저잣거리 표현은 빈곤은 정신(머리)을 먹을 것(생계)에만 집중시킨다는 뜻이다. 박수근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7살 때 가세가 기울어 보통학교 졸업이 끝이었다. 당연히 미술 전문교육을 받지 못했다. 지난 회에 소개한 일본 에도시대 오카다 코린과 달리 피에르 부르디외가 주창한 문화자본을 한 푼도 가지지 못했다.

6·25전쟁 때 빈 몸으로 월남한 박수근은 일 년여 동안 미군 피엑스에서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이어갔다. 당시 최빈국이던 한국에서 창조 정신이 절대적인 화가를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로 일반인 정신(머리)으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도 좋은 작가는 많았다. 박수근도 이 부류에 속하는 작가였다. 아니 오히려 그 누구보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 더 열심히 창조 활동을 했다. 하루하루를 직장인처럼 그림 그리는 일에 매달린 것은 오카다 코린처럼 달리 다른 방도도 재주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미군 병사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번 돈으로 구한 작은 판잣집 마루를 화실로 삼아 창작열을 불태웠다.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퇴원한 다음 날 1965년 5월 6일 박수근은 이 세상 포도청을 벗어났다. 그냥 주부로 살던 박완서는 그해 10월 ‘박수근 유작전’ 기사를 보고 전시장을 찾았다. 미군 피엑스에서 서로 도우며 어려운 시절을 견딘 인연을 모른 체할 수 없어서였다. 저잣거리 말, 참 인생은 알 수 없다. 여기서 그녀의 숨어있던 창작 욕망을 일깨운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을 만난다. 잎사귀 하나 매달지 않은 고목이 아니라 혹독한 삭풍은 견디며 찬란한 봄을 기다리는 ‘나목’으로 본 그녀는 5년 뒤 장편소설로 현상공모에 당선된다. 이후 1993년 발표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자전적 소설로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박수근 작품이 없었다면 박완서는 목구멍 포도청에 매달려 살았을지 모른다. 예술 하면 밥 빌어 먹는다는 야단으로 천대하던 시절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미군 병사들과 예술을 사랑하는 미국인들은 박수근 그림을 알아보고 수집해 간 시절이기도 했다. 만약 박수근이 지금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여전히 너무 적다고 단념할 것이 뻔하다.

부산현대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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