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창의 클래식 내비게이터] 자신의 발등을 찍은 지휘자와 '파사카유'
음악평론가
장 밥티스트 륄리(Jean Baptiste Lully, 1632~1687)는 바로크 시대 프랑스 음악계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음악가였다. 궁정 작곡가가 된 륄리는 당시 15세이던 루이 14세가 아폴론 신으로 출연하는 ‘밤의 발레’를 작곡하여 총애를 받았다. 이 곡으로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고, 륄리는 그때부터 ‘왕의 남자’가 되었다. 왕은 화려한 연회와 예술을 정치적 선전도구이자 통제 수단으로 활용했고, 륄리는 충직하게 이를 뒷받침해주었다.
1661년 5월 16일, 륄리는 왕실 작곡가이자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고 그때부터 프랑스 음악의 전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는 작곡가이자, 연주자, 무용가로 활동했다. 예술적인 재능과 노력도 탁월했지만 동시에 뛰어난 아첨 실력과 권모술수를 겸비하였기에 대적할 상대가 없었다. 그는 이탈리아식 오페라가 아니라 프랑스 특유의 ‘서정 비극’ 양식을 확립했으며, 프랑스 발레의 기본 구조를 만드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프랑스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극작가 몰리에르와 함께 코미디 발레 ‘서민 귀족’ 등을 완성하여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왕으로부터 프랑스 오페라 제작의 독점권을 따내 전무후무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그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오페라를 올릴 수 없었다.
륄리는 왕의 전속악단에서 길고 화려한 지팡이로 바닥을 치며 박자를 맞추는 지휘를 했다. 이런 식으로 지휘봉을 휘두른 사람은 륄리가 처음이었다. 어느 날, 루이 14세가 병에서 회복한 것을 기념하고자 ‘테 데움’을 지휘하던 륄리는 지팡이로 자기 발등을 내려찍는 바람에 큰 상처가 생겼다. 상처 부위가 괴사하기 시작하자 의사는 발가락을 잘라내야 한다고 했다. 륄리는 그러면 춤을 출 수 없게 된다며 수술을 거부했고, 그 때문에 파상풍이 악화하여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 권력의 어이없는 말로였다. 2000년에 개봉한 영화 ‘왕의 춤’이 루이 14세와 륄리, 몰리에르의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의 첫 장면이 바로 륄리의 지팡이 사고로 시작했다.
‘파사카유’(Passacaille)는 륄리가 세상을 떠나기 한해 전, 권력의 최정상에 있던 시절인 1686년에 초연된 오페라 ‘아르미드’ 5막 1장에 삽입된 춤곡이다. 파사카유는 스페인에서 생겨난 춤곡 ‘파사칼리아’가 프랑스로 흘러들어와 발레 춤곡으로 사용된 것이다. 그 후 이 춤곡은 바로크 시대 기악 모음곡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악 합주곡으로 연주하면 장엄하고 흥겨운 맛이 나지만, 피아노나 기타로 편곡된 곡을 들으면 꿈꾸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