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시선으로] 부정 타고 인생 말린 것들
김대현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공동연구원
가정의 달 5월이 되면 어떤 사람은 자신을 문득 힘들어한다. 가정폭력 및 파트너폭력 피해자, 친족 성폭력 피해자, 원가족으로부터 도망 나온 가출팸 청소년,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미등록 외국인, 성정체성이 아우팅되어 원가족과 절연한 성소수자, 원가족에 의해 시설에 갇힌 장애인이 그렇다. 세상의 가족에는 ‘홈 스위트 홈’과 더불어 그렇게 듣기만 해도 ‘부정 탈 것 같은’ 현장들이 존재한다. 전자만 가족인 것이 아니라 후자 또한 가족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이기에 ‘가족’을 사유하자는 것이 페미니즘의 착상이다.
운동과 학술은 무언가를 호명할 때 세상이 말하는 좋은 면과 더불어 춥고 어두운 면을 함께 염두에 두기를 권유해 왔다.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시기를 생각할 때 그 시절의 여러 찬란한 것들과 더불어 고문 피해를 입은 독립 운동가와 민주화 운동가를 거기에 나란히 놓는 까닭이 그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시도와 권유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강력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위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는 가족의 일은 더욱 그렇다.
운동과 학술이 주로 세상의 좋은 면보다 어두운 면을 집요하게 먼저 보려는 것은,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체로 좀 더 시급한 관심과 해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시급함은 ‘인생 말린 것들’에게 내 팔자 옮기 싫다는 예감 앞에 쉽게 가로막힌다. 세상의 어둠에 털끝 하나 닿지 않고, 거기에 대해 어떠한 말도 귀담아듣지 않으면 비로소 나는 안전하리라는 생각이야말로 인간적이고, 세상을 사는 누구라도 한 번쯤 품어보았을 욕망이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는 문득 어떤 사건과 인생을 알게 되고, 제 눈으로 무언가를 목격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내가 이것을 가려두고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이것을 안 뒤에도 이전처럼 행복할 수 있을까. 너의 슬픔을 안 연후에 너와 함께 다시 웃는 날은 과연 언제 올까. 사실 그 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인생의 비극은 내가 온전히 원해서 겪은 것이 아니고, 눈앞의 사람은 내가 온전히 원해서 만난 것이 아니므로.
그렇게 어떤 사람들은 팔자 사나운 것에 어느새 휘말린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는 그것이 내 일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내가 보고 겪은 것들에 다만 책임을 다하고 싶어한다. 내가 보고 겪은 걸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은 기운이 세다. 그 사람은 팔자를 피해 애써 발딛은 세상의 행복이 너무 비좁은 나머지, 그저 지금보다 내 행복을 넓혀 나와 내가 본 이들이 거기에 함께 머물기를 바란다. 그들에게도 돌아갈 가족이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