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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장르의 전복, 감정의 승리
오리지널 시나리오의 부재가 원인일까, 웹 콘텐츠의 대중적인 인기 때문일까. 매년 웹소설과 웹툰의 영화화가 늘어나고 있다. 그런 의미로 최근 개봉한 영화 ‘좀비딸’은 특별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디지털 콘텐츠가 영화라는 전통적 매체로 옮겨지면서 대중들의 선택을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5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2025년 흥행작이 된 ‘좀비딸’은 누적 조회 수 5억 뷰를 기록한 웹툰 ‘좀비가 되어버린 나의 딸’을 원작으로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단순히 원작의 인기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좀비딸’의 내용은 뻔하다. 좀비로 변해버린 딸을 끝까지 지키려는 아버지의 사투라는 설정은 예측 가능하며, 좀비 장르에 가족애라는 보편적 감정을 다루는 것도 자주 보았던 방식이다. 하지만 이 ‘뻔함’ 속에서 영화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을 통해 한국적 좀비영화의 가능성을 확인했고, 이후 수많은 좀비 콘텐츠에 노출되었다. 그런데 ‘좀비딸’은 기존 좀비물이 추구했던 공포와 액션, 생존 서스펜스에서 벗어나 가족 신파극이라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영화에서 그려지는 좀비는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보호받아야 할 가족이다. 생존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된다.
‘좀비딸’은 휴먼 좀비 코미디라는 독특한 장르적 정체성을 구축한다. 맹수 전문 사육사 ‘정환’(조정석)은 중학생 딸 ‘수아’(최유리)의 생일을 맞아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티격태격 장난을 치는 부녀의 모습이 마치 친구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좀비가 인간을 무는 기이한 광경에 부녀는 정환의 모친이자 수아의 할머니 ‘밤순’(이정은)이 있는 은봉리로 대피하기로 한다.
하지만 부녀가 살고 있는 동네는 이미 좀비 떼가 창궐해 있다. 동네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에서 숨어 있던 수아가 어린이 좀비에게 물리고 만다. 좀비가 보이면 즉시 신고하거나 사살하라는 정부의 지침을 어긴 정환은 감염된 딸을 데리고 몰래 은봉리로 간다. 이제 정환은 좀비딸의 정체를 숨겨야 하면서도, 딸이 사람들에 섞여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간화 되는 훈련을 시작한다. 밤순은 물론 정환의 동네 친구 ‘동배’(윤경호)까지 이 훈련에 가담한다.
좀비가 된 딸과 그를 돌보는 정환 사이의 일상적 에피소드들은 때로는 웃음을, 때로는 따뜻한 감동을 선사한다. 이는 좀비라는 극한 상황을 통해 오히려 평범한 가족의 소중함을 부각시키는 역설적 효과를 만든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영화가 좀비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하면서도 장르적 재미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포 대신 웃음을, 절망 대신 희망을, 파괴 대신 보호를 선택하면서도 좀비물이 가져야 할 긴장감과 극적 구조를 유지한다.
‘좀비딸’은 새롭고도 익숙한 재미를 제공하는 영화다. 즉 좀비 소재는 익숙하지만 가족 신파극이라는 접근은 새로웠고, 아버지와 딸의 관계는 익숙하지만 좀비딸이라는 설정은 새로웠다. 이러한 균형감각이 바로 웹툰 원작이 영화로 성공적으로 각색될 수 있었던 핵심이다. 이처럼 영화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에게 익숙한 웹툰의 감수성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면서도, 전 연령대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놓치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좀비딸’은 한 편의 영화가 흥행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기존 장르의 관습을 깨뜨리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웹툰이라는 새로운 원천 콘텐츠가 영화계에 가져올 수 있는 신선함을 증명한다. 결국 ‘좀비딸’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장르는 틀이 아니라 도구이며, 진정한 감동은 새로운 형식이 아니라 진실한 감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2025-08-27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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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반짝거리지만 충동적인 아이들의 세계
일본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존경을 보내는 한 사람이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내가 넘어서고 싶었던 단 한 명의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는 “일본 영화사의 마지막 거장일지도 모른다”고 말했으며, 하마구치 류스케는 “어떤 일본 영화감독도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은 채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는 바로 1980-90년대 일본영화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소마이 신지 감독이다. 2001년 세상을 떠난 감독은 롱테이크 중심의 독자적인 연출 방식,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으며 내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등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하며, 일본영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개봉하지 않았기에 이름이 덜 알려져 있다가, 작년 ‘태풍클럽’(1985)이 정식 개봉하면서 시네필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최근 과거 작품들이 4K로 디지털 복원되면서 다시 개봉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데, 소마이 신지의 영화도 이 흐름에 맞춰 한국에서 연이어 개봉했다. ‘이사’(1993)와 ‘여름정원’(1994)은 한 주 차이를 두고 개봉을 했는데 공통점이 많다. 모두 초등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일본 간사이 지방의 여름을 배경으로 촬영됐다. 먼저 부모의 이혼을 마주하면서 주인공 소녀 ‘렌’이 겪게 되는 혼란과 방황을 그리는 ‘이사’는 절제된 연출력과 개성 있는 인물들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는 여름이 주는 생동감과 소녀의 방황과 모험이 주된 내용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신비로운 느낌이 강해서 다소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여름정원’의 경우 좀 더 대중적인 작품인데 아이들과 노인의 우정을 따듯한 시선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정원’은 할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고 사흘 만에 등교한 야마시타에게 친구들이 ‘죽음’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이들이 심각하게 죽음을 논의하는 장면은 생경하면서도 한편으로 위험해 보인다. 언제나 함께 다니는 삼총사 안경잡이 ‘카와베’, 스모 선수 ‘야마시타’, 말라깽이 ‘키야마’는 죽음을 염탐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그 대상자를 동네에서 혼자 사는 노인으로 정한다.
영화 속 아이들의 세상은 어른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하지 않다. 놀라울 정도로 도발적이고, 충동적이며 한순간도 멈추어 있지 않다. 내리쬐는 햇빛 속에서 갑작스레 퍼붓는 소나기처럼 아이들의 세계는 예측불가능하다. 먼저 아이들이 관찰하는 노인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에 혼자 산다. 종일 누워서 TV를 보거나 먹거리를 사러 나가는 일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이 없는 노인은 아이들의 말처럼 내일 죽어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우연한 계기로 아이들이 허물어져가는 노인의 집을 고쳐주면서 그들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노인의 집 지붕에 색을 입히고, 집에 쌓여있던 폐품을 버리는데 이는 마치 노인의 삶을 어루만지는 듯 보이면서 한편으론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즐거워 보인다. 잡초로 무성하던 정원에 꽃씨를 뿌린 아이들은 꽃이 어서 피길 바라는 마음을 안고 노인의 집으로 달려간다. 노인을 미행하던 때는 노인의 죽음이 궁금했지만, 노인의 일상으로 들어온 아이들은 노인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여름정원’은 아이들과 노인이 친구가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만 설명할 수 없다. 태평양전쟁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하는 노인의 이야기는 끔찍한 역사와 조우하고, 부모의 이혼으로 슬픔을 삭이는 아이는 가족 해체가 낳는 비극을 상상케 한다. 아이들의 질문으로 돌아와 죽음은 두렵고 회피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것처럼 당연한 이치임을 느끼게 만든다. 그때 아이들도 비로소 한 뼘 성장한다. 여전히 유효한 서사와 감정을 강요하지 않는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소마이 신지의 영화가 왜 지금 사랑받는지 알 수 있다.
2025-08-1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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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살아남는 법, 그리고 살아가는 법
우리는 과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을까? 매일 반복되는 출근길과 끝없이 쌓이는 빚, 생활이라는 무거운 짐 아래서 꿈은 점점 빛을 잃어간다. 그런 현실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숨을 죽이고, 마음속 깊은 곳에 쌓인 갈망을 묻어둬야만 했을까. 그런 순간, ‘독자’는 작은 빛을 찾아내듯 폰을 켜고, 자신만의 은신처인 웹소설 속 세계에 몸을 싣는다.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는 그의 삶은, 오직 그가 읽는 이야기 안에서만 반짝인다.
대부분의 웹소설이 그렇듯, 평범한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현실의 냉혹한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세계에서, 그는 무수한 시련과 고통을 딛고 일어나 결국 세상의 중심으로 거듭난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단순한 희망을 넘어, 깊은 카타르시스라는 이름의 해방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현실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결말이기에 더욱 그렇다.
김병우 감독의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은 누적 조회 수 2억의 동명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감독은 원작의 풍부한 상상력을 동력으로 삼아, 현실과 판타지 사이를 능숙하게 넘나들며 재미를 유발한다. 이때 영화는 장르 특유의 쾌감은 물론 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들로 외연을 확장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주인공 ‘독자’(안효섭)가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정규직보다 비정규직이 더 많은 시대, 그는 정규직이 되지 못했음에도 별다른 저항 없이 묵묵히 짐을 챙긴다. 그런데 당장 다음 달 생활비조차 막막할 텐데, 독자는 지나치게 담담한 모습이라 오히려 이질적으로 보인다.
독자는 만원 지하철에서는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아이를 먼저 챙기는 등 소위 말하는 ‘착한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그렇게 단순히 정의할 수 없다. 같은 날 정규직 전환에 실패한 동료 ‘상아’(채수빈)가 원치 않는 남자의 접근에 곤란해할 때, 독자는 그 상황을 지켜볼 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 간신히 남자를 돌려보낸 상아에게 그는 그저 “잘 참았다”고 말한다. 독자는 눈앞에 놓인 임무는 묵묵히 수행하지만, 타인과의 충돌이나 감정적 개입은 철저히 피하려 한다. 그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며 살아가는 인물인 것이다.
그의 무기력한 태도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와 무관하지 않다. 세상과 단절된 삶 속에서 그를 위로하는 것은 오직 하나, 10년간 연재된 웹소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연재 초기에는 인기작이었지만 세계관이 붕괴되는 등으로 조회 수는 1에 머문다. 즉 단 한 명이 읽는 소설이라는 뜻인데, 바로 그 한 명의 독자가 ‘독자’이다. 마지막 출근 날, 소설의 마지막 회가 연재되고, 그날 현실에서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진다. 독자의 눈앞에서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놀랍게도 그 광경은 자신이 읽어온 소설 속 장면과 일치한다.
영화는 액션 판타지 장르답게 볼거리가 많지만 진짜 재미는 주인공이 맞닥뜨린 철학적 딜레마에서 비롯된다. 소설 속 주인공 ‘유중혁’(이민호)은 초인적인 전투 능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로, 임무를 완수하고 멸망한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는다. 독자는 그런 중혁에게서 구원의 가능성을 보았지만, 타인을 구하지 않고 혼자 살아남는 결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피해자인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독자는 외로움과 절망,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중혁의 모습에 공감하며 위로받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만난 중혁은 이타적인 영웅이 아니었다. 이제 소설의 미래를 알고 있는 독자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혼자 살아남을 것인가 아니면 동료들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영화는 이 질문을 통해 판타지를 넘어 현실에 묵직한 성찰을 던진다.
2025-07-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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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임꺽정'이 고국으로 돌아온 시간, 64년
한국 영화 중 본 사람은 많은데,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입으로 전해지는 영화가 꽤 많다. 그중 이만희 감독의 ‘만추’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 중 하나다. 제17회 베를린영화제 출품을 비롯해 각종 영화제에서 대상과 감독상을 휩쓴 영화는 당시의 인기와 흥행을 고려하면 필름이 사라진 것이 이상할 정도다. 영화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냐 하면 1960년대를 대표하는 김기영, 김수용 감독이 자신만의 스타일로 영화를 리메이크했으며, 2011년에는 이 영화를 본 적 없던 김태용 감독이 ‘만추’를 연출한다.
김태용 감독은 리메이크작들을 참조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각색했다. 영화 공간을 시애틀로 옮기고, 한국 남자와 중국 여자의 사랑으로 바꾸는 등 원작과는 다른 ‘만추’를 완성했다. 하지만 사건과 시공간이 달라졌을지 몰라도 쓸쓸하고 고독한 늦가을의 정서는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감독은 이 영화로 그해 열린 영화 시상식에서 감독상, 대상 등을 수상했으며, 여주인공을 연기한 배우와 결혼까지 하면서 여러 이슈를 낳았다. 유실된 한 편의 영화가 현실의 영화와 만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점은 흥미롭지만 한편으론 씁쓸하다. 한국영화사에서 아카이빙의 중요성을 오래 간과해 왔음을 알려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실된 한국영화 찾기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한국영상자료원을 통해 배운다. 지난 6월 말부터 이달 초까지 ‘유현목 탄생 100주년 특별전’이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의전당 등에서 진행되었다. 우리에게 유현목은 소설을 영화로 만든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소설의 이야기를 빌려와 영화로 옮기는 단순 작업을 하지 않았다. 각색을 통해 전쟁 이후의 허무와 절망, 실존적 고독을 담아냈으며, 국가정책에 부합하는 반공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그 속에 비판적 목소리를 포함시키며 한국 영화를 한 단계 나아가게 만든 감독이다.
감독은 ‘오발탄’(1961), ‘김약국의 딸들’(1963), ‘순교자’(1965), ‘카인의 후예’(1968) 등으로 독보적인 연출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돌아가시기 전까지 50여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독인 그에게도 사라진 영화가 있는데, 그것은 1961년 12월 개봉한 ‘임꺽정’이다. 이 영화는 당시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을 이끌었음에도 필름을 찾을 길이 없었다. 어딘가에 필름이 있다고 해도, 필름을 보관하는 일이 워낙 까다롭기에 대부분은 이제 ‘임꺽정’을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가운데 2022년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임꺽정’을 발견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으로 돌아온 영화는 4K 디지털 복원 과정을 거쳐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임꺽정’ 역시 홍명희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데, 당대 사회를 가감 없이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유현목 감독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임꺽정’은 기존의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의적 ‘임꺽정’(신영균)은 양반들의 횡포에 시달리는 민중들을 위해 탐관오리를 무찌르는 이로운 인간이다. 민중을 위해 싸우는 의적의 이야기이니 무겁고 진지하게 흘러갈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사극 액션 장르로 통쾌하고 재미있다. 어찌 보면 오락물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데, 영화가 끝나면 그저 웃고 지나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유현목 감독은 ‘임꺽정’을 단순한 액션물로 만들지 않았다. 영화에는 양반들이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있다. 이때 감독은 양반들이 다리를 잘 건널 수 있게 다리 밑에서 온몸으로 지탱하고 있는 이들이 백성임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코믹하게 그려지지만 실제 이 현실을 지켜온 존재가 누구인지 알기에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으로 64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우리 곁으로 돌아온 영화 ‘임꺽정’을 보며,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되새겨 본다.
2025-07-16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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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F1의 스피드와 브래드 피트라는 영화가 만날 때
3년 전 여름, 빠른 속도로 하늘을 누비던 톰 크루즈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면 이 영화를 놓칠 수 없을 것이다. ‘탑건: 매버릭’이 하늘 위에서의 전투를 그린다면, ‘F1 더 무비’는 땅 위에서 가장 빠른 속도 전쟁을 선보이며 몰입도를 높인다. 조셉 코신스키가 만든 두 편의 영화는 유사한 부분이 많다. 빠른 속도를 중심에 두고 있고, 이야기 전개 방식도 그렇다. 아마도 ‘탑건: 매버릭’을 재미있게 본 관객이라면 ‘F1 더 무비’도 흥미롭게 보지 않을까 싶다.
영화는 1990년대 포뮬러원(F1)의 주목받는 유망주였지만 단 한 번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고 만 비운의 드라이버 ‘소니 헤이스’(브래드 피트)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3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소니는 미국 전역을 돌며 용병 드라이버로 활동하고 있다.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오로지 승리만을 위해 달리는 소니 앞에 한때 동료였던 ‘루벤’(하비에르 바르뎀)이 나타나 자신의 팀 드라이버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F1 최하위 성적에 머물러 있는 APXGP팀은 이번 시즌 F1 대회에서 한 번이라도 승리하지 못하면 팀이 팔릴 위기에 처해 있다. 불안한 팀 분위기로 대다수 드라이버들이 꺼리는 팀이 되면서 노장 소니에게까지 기회가 온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F1에서 달리지 않았던 소니를 반기는 이는 없다. 특히 팀의 루키이자 파트너로 함께 달려야 할 20대 ‘조슈아 피어스’(댐슨 이드리스)는 소니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팀을 위기에 빠뜨린다.
영화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과 성장, 최하위 팀이 위기를 어떻게 이겨내는가에 초점을 맞추며 진행되는 언더독 서사를 바탕으로 한다. 거기에 더해 소니와 루벤의 우정, 레이싱카 개발 기술감독 ‘케이트’와 ‘소니’의 사랑까지 예상가능하기에 진부해 보인다. 하지만 2시간 30분이라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하물며 F1이라는 단어를 난생처음 들었어도 영화에 집중하게 하는 힘이 있다.
‘F1 더 무비’의 힘은 속도와 체험에서 나온다. 이제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보다는 집에서 영화를 보는 데 익숙한 시대다. 그런데 이 영화는 TV 화면이 아니라 대형 스크린에서 볼 때 재미가 극대화된다. 실버스톤에서 열리는 영국 그랑프리부터 일본 그랑프리의 스즈카 서킷 등 전 세계 F1 서킷의 현장을 그대로 옮겨오며 박진감 넘치는 현장을 재현한다. 배우들은 시속 300km의 속도를 전달하기 위해 진짜 레이싱을 즐기며, 차량과 서킷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고성능 카메라는 서킷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로 인해 서킷에서의 속도 경쟁과 아슬아슬한 추월 장면에서는 주인공은 지지 않을 거라는 뻔한 공식에도 불구하고 흥분하게 만든다. 제작자로 나선 제리 브룩하이머의 말처럼 “마치 관객이 운전석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극장에서 영화를 봤을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이때 영화의 내용과 잘 맞아떨어지는 한스 치머의 영화음악도 한몫 거든다.
또한 영화는 레이싱 장면을 생생하게 담아내는 동시에 소니와 조슈아가 처한 상황과 그들의 충돌 과정도 차근차근 풀어간다. 소니의 절실함과 조슈아의 불안함이 균형감 있게 담기기에 엔딩 장면에 이르면 원팀이 된 두 사람을 만난다. 완벽하지 않은 두 사람이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해 나가니 응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럼에도 영화는 소니를 연기한 브래드 피트의 영화임을 부정할 수 없다. 고독하고 자유분방한 브래드 피트를 그대로 답습하는가 싶다가도 ‘F1 더 무비’가 영화적인 순간이 될 때는 여지없이 ‘브래드 피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2025-07-0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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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안녕하지 못했던 과거와 작별하기
역시 고봉수다! 아니, 조금은 답보상태에 빠져있던 고봉수 랜드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할까? ‘빚가리’에 이어 1년 만에 신작을 낸 고봉수 감독은 전작보다 더 깊어지고 한층 안정적인 영화로 돌아왔다. 이 말은 고봉수 영화가 달라졌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제작 기간 15일, 제작비 250만 원,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델타 보이즈’나 고교생 레슬러들의 고군분투기를 다룬 ‘튼튼이의 모험’에서 보여준 독특한 유머와 재기발랄함은 여전하다.
고봉수 감독의 영화 속 인물들은 짠내 나는 인생을 살거나 찌질한데도 정이 간다.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피식거린다. “이 영화는 대체 뭐야” 중얼거리다가 어느새 빠져든다. 그러니까 그의 영화는 작지만 강하고, 허술해 보이는데 빈틈이 없다. 바로 이런 점이 씨네필들의 지지를 받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아무리 매력적이라고 해도, 상영관이 충분하지 않은 현실에서 관객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이 점은 대부분의 독립예술영화가 처한 현실이라 씁쓸하다.
고봉수 감독의 신작 '귤레귤레'
이국에서 조우한 첫사랑 상처
웃으며 안녕 고할 수 있을까?
‘귤레귤레’는 고봉수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다른 결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현실을 기반으로 한 서사와 유머는 일관적이지만, 아련하고 애틋한 사랑의 감정은 섬세해졌다. 물론 감독은 퀵서비스 기사의 짝사랑을 다룬 ‘다영씨’에서도 로맨스를 그렸지만, 무성흑백영화로 대중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귤레귤레’는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할 수 있는 사랑과 상처, 이별의 감정을 다루고 있기에 보편적이다. 또한 한국을 벗어나 튀르키예라는 낯선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낭만과 몽환을 오간다.
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대식은 튀르키예의 카파도키아로 출장을 왔다가 상사 ‘원창’의 강요와 억지로 3일간의 여행을 시작한다. 여행을 함께하는 멤버는 대식과 팀장, 여행 유튜버와 그녀의 두 딸, 이혼 후 재결합을 위해 여행에 나선 정화와 병선, 현지 가이드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대식은 정화를 보자마자 흠칫 놀란다. 대학 동창이자 공대 여신으로 불렸던 정화는 그의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오래전 대식은 정화에게 고백했지만 대차게 차였고,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던 중 그녀와 재회하게 된 것이다. 대식은 정화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정화는 전남편과의 불화가 부끄러워 고개를 돌린다. 인사할 타이밍을 놓친 두 사람은 서로를 모른 척한다. 게다가 눈치 없는 원창과 막말을 퍼붓는 병선, 분위기를 띄우려 애쓰는 가이드로 인해 영화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벌룬(열기구) 투어 장면이다. 수많은 벌룬이 하늘로 오르는 장면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하지만 이 영화는 풍광이 아니라 사람에 집중한다. 과거의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대식은 ‘귤레귤레’를 몇 번이고 외쳐본다 ‘웃으며 안녕’을 의미하는 이 단어는 상처받은 과거, 불행한 현재와 이별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마법의 말이다. 과거의 감정에 안녕을 고하는 인사다. 저 멀리서 정화도 대식이 보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대식과 정화는 처음 튀르키예에 왔을 때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무언가 후련해 보인다.
‘귤레귤레‘는 고봉수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대중적인 영화다.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신민재, 김충길, 백승환 배우의 개성적인 연기는 과한 듯 선을 넘지 않으면서 현실감을 부여한다. 소심하고 어리숙한 대식을 연기한 이희준 배우의 섬세하고 귀여운 멜로는 그를 다시 보게 만든다. 나아가 여행이 주는 낯선 감각, 첫사랑과의 재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메말랐던 감정을 건드린다. 그로 인해 영화를 보는 내내 어디선가 만날 것만 같은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2025-06-18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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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망토 대신 하이, 파이브
여름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슈퍼히어로물. 하늘을 날고, 적을 쓰러뜨리며, 세상을 구하는 영웅들의 서사는 식상하지만 여전히 대중에게 사랑받는 서사 중 하나다. 7년 만에 신작을 연출한 강형철 감독의 ‘하이파이브’도 영웅물을 답습하는 영화처럼 보이나, 가는 길이 조금 달라 보인다. 감독은 세상을 구원하려는 목표나 의지보다는 슈퍼히어로 그 자체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하이파이브’는 한 남자가 병원에 실려 오고 곧이어 장기기증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장기를 기증한 인물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나누어준 장기는 6명의 인물을 살린다. 게다가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들은 초능력까지 생기면서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 먼저 심장을 기증받은 ‘완서’(이재인)는 태권도 선수였으나 경기 중 심정지가 오면서 꿈을 포기한 십대 소녀다. 심장을 이식받은 후에는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사귈 줄 알았지만, 태권도장을 운영하는 아빠(오정세)의 과도한 보살핌과 관심 때문에 숨이 막힌다.
사실 완서는 심장이식 후 엄청난 괴력과 스피드가 생겨났지만 걱정 많은 아빠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을 때 폐를 이식받고 강풍의 입바람을 일으키는 초능력을 가진 ‘지성’(안재홍)을 만난다. 둘은 초능력이라는 공통분모로 친해지고, 장기를 기증받은 다른 사람들을 찾아본다. 신장을 이식받았지만 초능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선녀’(라미란), 각막을 이식받고 전자파 통제 능력이 생긴 ‘기동’(유아인), 간을 이식받고 치유 능력이 생긴 ‘약선’(김희원)은 자신들의 초능력이 타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꿈꾸며, 어설프게나마 어벤져스 같은 ‘팀’을 만든다. 하지만 세대도, 성별도, 살아온 환경도 다른 그들이 팀을 꾸리는 건 쉽지 않다. 특히 또래인 지성과 기동은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싸우기 바쁘다. 그러던 와중에 마지막 이식자의 정체가 드러난다. 췌장을 이식받은 영춘(신구/박진영)은 5명의 초능력자들의 능력을 빼앗기 위해 계략을 펼치며 악당의 면모를 보인다.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주인공들의 서사이다. 평범한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였던 그들은 병으로 고통과 싸워야 했으며, 사람들과 함께 있지 못하고 고립되어 있었다. 아픈 몸은 외로움과 분노, 슬픔 속에 살게 했다. 즉 그들은 지금까지 미래나 희망 따위를 논할 수 없는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장기를 이식받은 후부터 달라진다. 사실 영화는 초능력을 가진 이들이 영웅이 되는 데 초점화하지 않는다. 아프고 힘들었던 그들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데 고무된 것처럼 보인다. 또한 언제나 혼자였던 그들이 팀원들과 유대를 통해 연대하는 데 의미를 둔다. 그들에겐 세상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시급한 건 자기 자신의 구원이었던 것이다.
‘하이파이브’는 익숙한 한국형 히어로물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정서적인 밀도와 인간적인 온기를 놓치지 않는다. 초능력은 이야기의 장치일 뿐, 실은 이들이 살아온 삶과 마주하는 과정이 영화의 핵심이다. 아프고 외로웠던 몸, 누구에게도 말 못 했던 슬픔,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도움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어우러졌을 때 이 히어로는 빛난다.
OTT 등을 통해 한국형 히어로물은 급속히 발전해왔다. ‘무빙’ ‘경이로운 소문’처럼 초능력과 감정을 엮어내는 시도 또한 이미 익숙하게 보아왔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만화 같은 상상력, 지성과 기동의 티격태격, 선녀와 약선의 이야기 등 인물들의 조화가 인상적이라 새롭게 느껴진다. 특히 완서의 이재인, 영춘의 젊은 모습을 연기한 박진영 배우는 선배들의 아우라에 뒤지지 않는 안정적인 연기를 펼치는데, 영화를 돋보이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2025-06-04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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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재난 앞에서
가까운 미래, 일본의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 ‘유타’와 ‘코우’는 인생의 절반을 함께 보낸 친구다. 교내 음악 연구 동아리를 만들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는 두 사람은 늘 붙어 다니며 소소한 사고나 장난을 치며 무료한 일상을 보낸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해도 함께라면 두렵지 않던 둘의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아직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유타와 달리 코우는 일본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을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의 생각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모든 교과과정을 이수하고 이제 졸업식만 남은 교실의 풍경은 나른하다. 대학 발표를 기다리거나, 취업을 생각하는 등 아이들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고민하거나 결정을 끝낸 상황이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미래, 아이들은 불확실 속에서 위태롭지만 한편으로는 자유로워 보인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은 영화 ‘해피엔드’의 오프닝 시퀀스에서도 잘 포착된다. 소동을 일으키고 도망가는 아이들의 모습, 그 옆으로 빨간 점멸등이 꺼질 듯 말 듯 깜박인다. 언제 꺼질지 몰라 불안하기 짝이 없는 불빛이지만 어쩐지 지켜보고 싶은 빛이다.
영화는 유타와 코우, 그들이 속해 있는 음악 동아리 친구인 야타, 밍, 톰과의 우정을 통해 진행되고 있기에 학원청춘물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우정이나 관계의 변화로 설명할 수 없다. 이는 오프닝 이후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테크노 음악을 듣기 위해 클럽을 찾은 아이들은 교복을 입고서 당당히 출입을 요구한다. 미성년자는 출입할 수 없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은 관계자 전용 구역으로 몰래 들어가 음악을 듣는다. 하지만 유타와 코우가 음악을 듣는 시간은 짧다. 불법 단속을 나온 경찰에게 붙잡히고 말기 때문이다.
경찰은 일본인인 유타에게는 집으로 귀가하라며 훈방 처리하지만, 재일조선인인 코우에게는 체류 허가서를 요구한다. 아버지의 아버지가 일본에 살았음에도 여전히 일본의 국민이 될 수 없는 코우는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유령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는 비단 코우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만 출신이지만 중국어를 못하는 밍과 졸업 후 미국인 아버지가 있는 미국으로 가려는 톰도 차별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네오 소라 감독의 ‘해피엔드’는 아이들의 시선에서 차별과 혐오, 폭력의 세계로 외연을 확장한다. 특히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이다. 유타와 코우가 교장의 슈퍼카를 망가뜨리는 장난을 치자, 분노한 교장은 학생들의 안전을 명목으로 AI 감시 시스템을 도입한다. AI는 교내 곳곳을 훑으며 교칙을 위반한 학생들에게 벌점을 부여한다. 처음엔 AI를 재미있는 놀이쯤으로 생각하던 아이들은 대학 입시에 영향을 미치는 벌점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검열하기에 이른다. 코우도 국가 장학금 수령을 박탈당할까 봐 불안하다.
기술 발전이 삶의 편리함을 가져왔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삶을 과연 행복하게 하는지 묻게 하는 장면에 이르면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가 우정이 아니라 재난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 갑작스레 일어나는 지진, AI 감시하에 통제와 검열이라는 재난, 차별과 혐오를 키우는 사회적 재난까지 연이어 터진다. 이 재난 앞에서 인간은 저항하거나 투항하거나 몸을 숨긴다. 아이들도 AI 감시 시스템이라는 재난을 마주하며 투쟁하거나 침묵한다.
영화는 터질 듯 터지지 않는 재난 앞에서 그 어떤 해결책도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이 재난이 아이들의 세계 속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알린다. 졸업식을 마친 아이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길을 향해 걸어간다. 드디어 육교 앞에 선 유타와 코우는 헤어짐이 아쉬워 머뭇거리고, 지키지 못할 말을 늘어놓지만 돌아보지는 않는다. 꺼질 듯 꺼지지 않는 점멸등처럼 약한 빛을 내며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그들의 해피엔딩을 꿈꿔본다.
2025-05-21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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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인간다움을 위한 처절하면서도 처연한 행위
구병모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파과’는 60대 여성 킬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킬러물이라 하면 남성들의 전유물이었고, 그것도 젊고 잘생긴 배우의 몫이었다. 민규동 감독은 뻔한 고전 서사를 담백하면서도 흡입력 있게 풀어낸다. 특히 나이나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여성 킬러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영화는 한 여자가 킬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데서 시작한다. 온몸에 멍이 든 소녀가 위태롭게 걷고 있다. 소녀를 보고도 무심히 지나치는 차들 사이로 남자 ‘류’의 차가 멈춘다. 소녀는 어딘지 비밀스러운 남자와 그의 아내가 있는 집으로 가고, 난생처음 가족의 사랑을 느끼나 그 행복은 짧다.
소녀는 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살아남기 위해 킬러 ‘손톱’이 된다. 소녀의 삶에는 어둠과 죽음만 있을 뿐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다. 이때 소녀 곁에 남은 단 한 사람의 죽음은 소녀를 완전히 무너지게 만든다. 소녀는 스승이자 은인이 준 이름 손톱을 버리고, 스스로 부여한 이름 ‘조각’(爪角)으로 다시 태어난다. 손톱이 인간으로 살고자 가진 이름이라면, 조각은 인간으로 살기를 체념한 이름이다. 조각은 미래도 희망도 꿈꾸지 않는다. 철저한 고립과 외로움을 선택한 그는 아무도 곁에 두지 않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조각이 몸담고 있는 조직 ‘신성방역’은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의 죽음을 의뢰받고 처리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40여 년 동안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던 레전드 킬러가 바로 조각이다. 그러나 이제 조각은 늙었고 몸에 문제까지 생기면서 퇴물로 취급당한다. 모두가 그의 은퇴를 바라지만 조각은 떠날 마음이 없다. 킬러의 자질을 갖춘 그는 빠르고 증거를 남기지 않으며 냉철하다. 특히 그는 인간이 가지는 두려움이나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이 없다. 오래 함께 일한 동료의 뒤처리를 자신이 맡는 것으로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불필요한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다. 감정을 배제한 채 살아가는 조각은 마치 기계 같다. 하지만 그에게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감정을 깊숙이 눌려두고 있을 뿐이다. 감정을 내보일 때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숱한 죽음들 속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봉인해두던 조각이 변한다. 가족도 친구도 만들지 않았던 조각이 죽어가는 개 한 마리를 살리고 그 개를 집으로 데려오면서부터다. 그 무엇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그가 변한 이유가 퇴물 취급을 받기 때문인지, 몸에 탈이 생겼기 때문인지, 조직을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았을 연민 혹은 동정의 감정으로 조각의 일상이 뒤틀린다는 것이다.
흠집 난 과실(破果) 또는 여자 나이 16세(破瓜)를 일컫는 영화 제목 ‘파과’는 조각의 생애를 뜻한다. 평범한 10대 시절을 보낼 수 없었던 소녀는 상처받고 고통받으며 어른이 되었고, 흠집 난 인간으로 살았다. 영화는 파과를 의미하는 조각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교차해서 보여주며, 그가 살아남기 위해 한 선택과 행동에 집중한다. 그리고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생의 마지막 순간, 삶의 의미를 찾고 인간다움을 회복하기 위한 처절함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조각을 연기한 배우 이혜영을 빼놓을 수 없다. 기억해보면 이혜영은 누군가의 엄마나 아내를 연기해도 누군가의 그 무엇으로 남지 않는 연기를 펼쳤다. 온전히 자신만의 서사를 쓰며, 특유의 카리스마와 고혹적인 목소리로 스크린을 채웠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면 배우가 아니라 그가 연기한 캐릭터만이 기억된다. ‘당신 얼굴 앞에서’의 무료한 듯 지적인 얼굴, ‘피도 눈물도 없이’의 강렬함, ‘파과’의 지친 듯한 무표정까지 모두 그이지만 매번 다른 얼굴로 자신을 지우는 이혜영의 연기는 주목할 만하다.
2025-05-07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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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람, 밥 딜런
한 편의 시(詩)가 노래가 된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기타 소리에 맞춰 높이 멀리 날아올라 나에게로 온다. 노래가 얼마나 강렬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우리는 밥 딜런을 통해 보았다. 세상과 불화하는 듯한 표정. 아무렇게나 내뱉는 듯한 무심한 말들은 한 시대와 만나 예술이 된다. 1961년, 스무 살이 된 밥 딜런은 자신의 음악적 우상인 ‘우디 거스리’를 만나기 위해 미네소타를 떠나 뉴욕에 입성한다. 희귀 유전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그를 위해 밥 딜런이 수줍게 노래한다.
‘컴플리트 언노운’은 밥 딜런의 전기 영화다. 슈퍼스타인 그의 이야기와 노래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밥 딜런의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의 이야기가 시작되면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의 노래가 아득해지고, 어느새 그는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 멀리 달아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의 음악적 행보와 그가 만났던 사람들, 그의 감정들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것을 확인한다. 그러다 결국 밥 딜런이라는 인물이 내가 아는 그가 맞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린다. ‘Like a Rolling Stone’의 가사이면서 영화 제목이기도 한 ‘컴플리트 언노운’처럼 밥 딜런은 ‘완전히 알려지지 않은 사람’임을 확인한다.
뉴욕에 도착한 밥 딜런은 노래하기 위해 클럽을 전전한다. 드디어 그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기 시작하자 객석이 고요해진다. 기존의 음악들과는 다른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시적인 음악은 슈퍼스타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 평단과 대중이 열광한다. 이때 밥 딜런의 노래 실력만으로 그를 평가할 수 없다. 당시는 대중문화의 격변기였다. 시대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으며 선두에는 청년들과 대중문화가 있었다. 청년들은 기성세대와의 작별을 고하는 동시에 세상의 변화를 욕망했고, 미술, 음악, 영화 등의 대중문화는 저항적 기조를 담아낸다. 정치적으로는 핵전쟁 공포와 베트남전으로 촉발된 반전 운동, 인권 문제, 페미니즘 논의로 관심이 확장된다. 밥 딜런은 인권운동에 참여하고 사회참여적 음악을 발매하는 등 그 누구보다 시대와 깊이 조우한다. 그러면서도 “괴로운 시대, 사랑할 사람을 찾으라고” 열창한다.
영화 ‘컴플리트 언노운’은 밥 딜런의 20대 초반 시절을 조명한다. 그러니까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밥 딜런이 음악을 시작하는 시기부터 음악적 변화를 꾀하는 1965년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 공연까지를 다룬다. 지금까지 한 인물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들은 대체로 인물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대비하며, 그의 업적을 알리는 데 공을 들였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젊은 날의 밥 딜런의 모습, 음악을 향한 고민과 변화, 그와 관계를 맺었던 인물에 중심에 두며 갈등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때 밥 딜런을 노래하게 한 인물이 우디 거스리였다면, 음악적 성장에는 포크송 가수로 유명한 피트 시거와 조안 바에즈가 있다. 밥 딜런의 뮤즈인 첫사랑 실비는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다. 밥 딜런이 만나고 관계 맺은 사람들 덕분에 그의 음악 또한 빛날 수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음유시인, 음악적 실험을 멈추지 않았던 밥 딜런의 이야기는 영화의 오프닝과 같이 우디 거스리를 만나고 헤어지는 것으로 끝난다. 이 엔딩은 우디 거스리를 통해 시작된 하나의 시간이 끝나고, 인생 2막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밥 딜런을 연기한 배우에 있다. 티모시 샬라메는 밥 딜런이 되기 위해 무려 5년 동안 준비했을 정도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특유의 게슴츠레한 눈빛은 밥 딜런 그 자체이며, 읊조리고 숨을 삼키는 듯한 창법, 기타 연주와 노래는 모두 그가 직접 소화하고 있음에도 이질감이 들지 않는다. 마치 밥 딜런의 젊은 날과 마주하는 것 같다.
2025-04-23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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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새로운 챕터를 시작한 브리짓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이유는 하나다.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영화에선 그토록 달콤하고 쉬운 연애가 현실에선 여간 어렵기에 우리는 영화를 보며 꿈꾼다. 그 사랑이 나에게도 찾아오기를 그리고 영화 속 사랑이 그 속에서나마 영원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운명처럼 찾아온 사랑 앞에서 좌충우돌하다 결국은 해피엔딩을 맞는 전형적인 로맨틱 영화의 구조를 따른다. 그런데 ‘브리짓’은 기존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들과 다르다. 사랑에 성공하고 막이 내린 줄 알았는데, 그런 영원한 사랑은 없단다.
브리짓은 완벽한 남성과의 연애를 꿈꾸지만, 마냥 동화 속 왕자님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여성이 아니다. 사랑을 찾아 헤매고, 썸을 타는 남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이어트를 선언했다가 매번 실패하며 나이에 맞지 않게 덜렁거리고 자주 실수한다. 푼수같이 구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내 이야기 같고 어느 땐 우리 옆집 언니같이 친숙해서 사랑스럽다.
완벽하게 행복한 이야기로 끝을 맺은 줄 알았던 브리짓이 돌아왔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로부터 무려 24년이 흘렀고, 전작(브리짓 존스의 베이비)으로부터 9년이 지났다. 브리짓을 연기한 르네 젤위거도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만큼 후속작 소식은 놀랍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뉴 챕터’는 여전히 현실 속에 살아 숨 쉬는 브리짓의 이야기를 그린다. 1편에서 3편까지 브리짓은 마크 다아시(콜린 퍼스)와 싸우고, 헤어지고 사랑하기 바빴기에 이번 작품에서는 그와 결혼한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브리짓은 ‘혼자’ 남겨졌다.
남편 마크를 불의의 사고로 잃고 두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는 브리짓은 여전한 듯 보이지만 어쩐지 낯선 얼굴이다. 과거 잠옷 바람으로 노래하던 그녀는, 이제 잠옷 바람으로 두 아이의 아침을 챙기고 등굣길을 마중한다. 아이들의 엄마로 충만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그녀는 외롭다. 남편이 떠난 지 4년이 지났지만, 남편이 보고 싶다거나 외롭다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다. 그녀에게는 보살펴야 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아무렇지 않은 척, 그리움과 외로움을 꾹꾹 눌러 담아도 그 상실감은 지워지지 않는다.
브리짓은 나름 아이들을 위해 애쓴다고 하지만 집안 꼴이 말이 아니다.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잠옷 바람으로 동네를 헤집고 다니는 브리짓은 자신마저 놓아버린 듯 보인다. 바로 그때 그녀 앞에 두 남자가 나타난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시리즈는 역시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이번에도 브리짓은 연하남과 과학 교사와의 관계를 통해 사랑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그 와중에 브리짓의 푼수 끼는 여전하다. 젊어 보이려 입술에 필러를 맞았다가 부작용으로 웃음을 주거나, 데이트 중에 실수를 연발하는 모습은 나이가 들어도 역시 브리짓이다.
더불어 이번 시리즈에는 깊이를 더한다. 남편을 잊지 못하는 브리짓과 아직 아빠를 잊고 싶지 않은 아이들의 에피소드는 영화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어찌 보면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을 마크에게 편지를 쓰는 브리짓이나 아빠의 생일을 맞아 풍선에 카드를 날려 보내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이기에 가능한 감동이다.
우리는 브리짓의 연애와 이별, 결혼과 출산을 지켜보았다. 브리짓의 나이 듦과 아픔을 느꼈기에 자연스레 공감할 수 있는 슬픔이고 감동이다. 이는 전작의 주인공이었던 마크를 잊지 못하는 관객들 또한 그를 추억할 수 있게 만든다. ‘마크’의 존재를 지우지 않고 영화 내내 느낄 수 있게 한 연출은 섬세하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챕터에 접어든 브리짓의 이야기가 지금 여기에서 멈추질 않길 바란다.
2025-04-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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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조용히 조금씩 회복되는 세계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이지만 적막과 고요로 가득 차 있는 숲속은 어딘지 오묘하다. 사람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는 세계. 눈에 보이는 건 동물뿐이다. 개들이 강에서 잡아 올린 물고기들을 서로 먹겠다며 으르렁거린다. 그때 근처에서 상황을 몰래 보고 있던 검은 고양이가 땅에 떨어진 물고기를 낚아채 달아난다. 눈앞에서 먹이를 빼앗긴 개들은 고양이를 뒤쫓기 시작한다. 한바탕 추격전이 벌어질 찰나 숲이 요동친다.
모든 것이 쓸려가고 난 후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재난이 어느 날 우리 앞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 번쯤 해보았을 것이다. 라트비아에서 온 영화 ‘플로우’는 대홍수가 세상을 덮친 이후 살아남은 동물들이 등장한다. 호기심은 많지만 매사 경계하는 검은 고양이,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맞아주는 골든 리트리버, 잡동사니를 쌓아두고 행복해하는 여우원숭이, 모든 일에 관심 없는 듯 보이는 카피바라, 무리에서 쫓겨난 뱀잡이수리까지 대홍수가 아니었다면 접점이 없었을 인연이 모인다.
동물들의 대홍수 생존기 '플로우'
인간의 '말' 없을 뿐 소통은 충분
'흐름'에 몸 맡기고 즐기기만 하면
이미 한 차례 모든 것이 쓸려간 듯한 숲에 다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고양이는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높은 곳을 찾아 헤맨다. 고양이가 보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지만 물은 코끝까지 차오르고, 발을 버둥거려 보지만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을 뿐이다. 그때 낡은 배 한 척이 고양이 앞으로 다가온다. 겨우 배에 몸을 실은 고양이는 한숨 돌리지도 못한 채 항해를 시작한다. 얼마 후 비슷한 사정으로 배에 탑승하는 동물들과 만나고 그들 나름 경계하고 날을 세우지만 생사가 걸린 여정 앞에서 서로를 구해주고 또 어느 때는 작은 위로를 보낸다. 서서히 서로에게 스며든다.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땅에서는 끝없이 물이 차오를 때 어디선가 나타난 낡은 배는 노아의 방주와 닮아있다. 하지만 이 배가 나타난 이유를 지구 온난화나 종교적인 이유로 볼 수 없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물로 가득 찬 세계에 떠 있는 배 한 척과 거기 타고 있는 동물들의 이미지에는 보다 깊은 고민과 은유가 담겨 있을 뿐이다. 더불어 재난을 그리는 영화라고 해서 파괴만을 다루지 않는다. 무너지고 사라진 자리에서 조용히 조금씩 회복되는 자연의 모습도 담겨져 있다.
또한 ‘플로우’는 대사가 없는 영화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동물들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교감(말)한다. 동물이 하는 대사를 인간이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인간의 말을 하는 동물들에 익숙해져 있었던 걸까? 영화가 시작하고 동물들이 ‘말’을 하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영화는 그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생각임을 깨닫게 만든다. 동물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동물들의 몸짓이나 표정을 통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고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동물들의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들 또한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 만난 동물들은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하지만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들은 행동과 표정만으로도 서로를 이해한다. 긴츠 질발로디스 감독은 동물이 동물답게 행동할 수 있는 연출에 공을 들였다. 이를 위해 동물들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동물들의 실제 소리를 녹음했다고 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플로우’는 낯선 감각을 일깨울지 모른다. 낯설지만 어색하지 않다. 설명하지 않지만 이해 가능하고, 은유와 비유로 채워졌으나 어렵지 않다. 의미를 찾지 않고 그저 영화의 흐름(flow)에 몸을 맡긴다면 영화가 주는 낯선 감각이 무척 즐거울 것이다. 더불어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3D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 ‘블렌더’를 사용해 만든 영화는 CG가 화려하진 않지만 사실적이다. 특히 동물들의 움직임은 사랑스럽고 자연 풍경은 신비로워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다.
2025-03-26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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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부디 확신을 의심하라
미국의 권위 있는 영화 시상식인 아카데미가 열리는 3월, 한국의 극장가도 소란스럽다. 각 부문 수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된 작품들이 아카데미 특별전, 혹은 기획전이라는 이름을 달고 상영되기 때문이다. 독창적인 작품,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 등을 한 번에 볼 수 있기에 시네필들이 설레는 시즌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싶다.
올해 아카데미는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아노라’에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무려 5관왕을 안긴다. 미국 내 소수자와 비주류 문화를 조명하던 숀 베이커 감독은 ‘아노라’를 통해 다수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작품성에서도 좋은 평가를 얻었다. 특히 성 노동자와 계급 문제를 익숙한 신데렐라 서사와 연결한 점은 숀 베이커이기에 가능한 연출로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아카데미에서 각색상을 받은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의 ‘콘클라베’가 인상적이었다. 로버트 해리스가 2016년 출간한 동명의 장편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배우들의 연기,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설전, 강렬한 음악, 정교한 편집으로 영화에 몰입하게 만든다. 특히 가장 경건하면서도 성스러운 장소에서 드러나는 비밀과 욕망 그리고 반전, 인물들의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확인할 때 이 영화가 왜 추리 스릴러물인지 알 수 있다.
영화는 교황의 서거로 충격에 빠진 ‘로렌스’의 뒷모습을 좇으며 시작한다.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로렌스는 충격을 받지만 그에겐 애도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추기경 단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차기 교황 선출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열쇠로 문을 잠근 방’을 의미하는 ‘콘클라베(conclave)’는 교황을 선출하는 선거를 의미한다. 교황 서거 즉시 모든 추기경들은 기존의 직위가 해제되지만, 콘클라베를 지휘해야 하는 추기경 단장만은 그 직이 유지된다. 올곧고 강직한 성품을 지닌 로렌스는 교황 선거권을 지닌 108명의 추기경들을 소집하고,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통제하며 선거를 이끈다.
교황이 선출되기 전까지 핸드폰이나 통신 기계를 사용할 수 없기에 추기경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오로지 투표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새 교황의 탄생은 쉽지 않다. 108명의 추기경들이 차기 교황이 되길 원하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내는 방식이기에 따로 후보가 존재하지 않는다. 교황이 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여 선거 운동도 할 수 없다. 게다가 가장 많은 표를 얻는 후보가 당선되는 것도 아니다. 3분의 2 이상 찬성해야 교황으로 선출될 수 있기에 투표의 향방을 쉽게 점칠 수 없다. 영화는 사흘 동안 6번의 투표 과정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지리멸렬한 투표가 반복되자 가장 성스러운 선거라고 자부하는 ‘콘클라베’에도 음모와 술수가 암약한다. 강경한 개혁파와 최악을 막으려 차선을 선택하는 진영이 갈등하다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로렌스는 그 사이에서 여러 전언과 정황을 목도하며 유력 후보들의 비밀을 알게 된다. 누구보다 고귀하고 순결하다고 믿어졌던 그들의 민낯이 드러난다. 이때 추기경들의 욕망은 종교나 정치적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흠결 없는 인간은 없음을, 혹은 신 앞의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알려주는 듯하다.
로렌스는 첫 선거를 앞두고 “확신이야말로 통합의 강력한 적이니 의심하라”고 말한다. 확신은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한다. 갈등과 분열을 멈출 수 있게 하는 건 확신이 아니라 의심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이다. 그런 의미로 마지막 투표에서 추기경들이 날 선 경계와 확신을 내려놓으며, 앞선 결과와 전혀 다른 선택을 할 때는 감동적이다. 그것은 동화 같으면서도 혁명적이다. 확신으로 들끓던 문 닫힌 세계에 문이 열리고 새 시대가 들어서는 희망을 본다.
2025-03-1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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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내 안의 진짜 고통과 마주하기
언젠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간 적이 있다. 누군가의 희생에 슬퍼했고 비극 속에 사라진 누군가를 추모했다. ‘리얼 페인’을 보며 비극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내가 ‘진짜 고통’을 느꼈었던 건지 의심이 들었다. 그러니까 당시를 살지 않았던 내가 사진 몇 장과 교과서에 적힌 지식만으로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제시 아이젠버그 감독의 ‘리얼 페인’은 역사적인 비극과 개인의 고통을 나란히 세우며 진짜 고통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생김새부터 성격, 취향까지 모든 것이 다른 사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에란 컬킨)가 오랜만에 만난다. 그들의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할머니의 고향 폴란드로 여행을 가라며 돈을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할머니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미국으로 건너온 생존자이자 이민자였다. 손주들이 뿌리를 잊지 말라는 숨은 뜻일까. 사촌은 할머니의 유언대로 폴란드로 떠난다. 최종 목적지는 할머니가 살았던 집에 가는 것이지만 그들은 먼저 ‘홀로코스트 투어’를 하기로 결정한다.
데이비드는 벤지와의 여행이 어색할 것이라 생각한다. 한때는 형제처럼 친밀한 사이였지만 데이비드가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서 벤지와 멀어졌기 때문이다. 아마도 두 사람은 할머니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데이비드는 여행 전부터 초조해 보인다. 가족과 떨어지는 것도 불안한데 약속장소인 공항으로 가는 길까지 막힌다. 게다가 벤지에게 아무리 연락을 해도 답이 없다. 급하게 공항에 도착한 데이비드는 몇 시간 전부터 도착해 공항에서 놀고 있었다는 벤지를 보며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안심한다. 벤지는 과거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홀로코스트 투어를 중심으로 진행되기에 다소 무겁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리얼 페인’은 지금까지 보았던 홀로코스트 영화와 결이 다르다. 이 영화는 어떻게 하면 비극을 더 참혹하게 보여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각자가 어떤 방식으로 비극을 받아들이고 애도할 수 있는지 살핀다. 이는 거침없이 행동하고 말하는 벤지 덕분에 가능하다. 독일군에 맞서 싸운 민중의 동상 앞에서 우리는 조용히 사진을 찍는 것을 의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벤지는 정답이란 없다는 듯 투어의 일원들이 민중이나 독일군이 되어보는 체험을 하게끔 권하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사실 어떤 문제든 감정적으로 대하는 벤지를 보는 건 불안하다. 유대인 수용소가 있는 도시로 가는 기차에서는 “80년 전 유대인들은 꼬리 칸에 가축처럼 실렸을 것”이라며 일등석 자리를 박차고 끝 칸으로 이동한다. 벤지는 짧은 시간이나마 그들의 고통을 온전히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는 홀로코스트 투어가 진정한 애도와 공감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데이비드는 그런 벤지가 어디로 튈지 몰라 좌불안석이다. 그러고 보면 데이비드는 ‘우리’와 닮았다. 적당히 자신을 감추고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비극에 관심을 가지지만 그것이 나의 삶과는 연결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리얼 페인’은 불안정한 벤지의 감정을 통해 영화 주제로 나아간다. 벤지는 정보만 나열하는 가이드에게 과거의 공동체와 현재의 우리가 연결되는 투어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당황한 가이드는 유대 전통에 따라 묘비석 위에 돌을 올리는 행위로 이름 모를 누군가를 추모하자고 제안한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잠식할 수 없으나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질 수 있다. 홀로코스트를 경유해, 할머니의 집으로, 데이비드와 벤지의 내밀한 이야기로 말이다. 그로 인해 영화는 내 안의 ‘진짜 고통’과 직시할 때 공동체의 고통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25-02-2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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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는 카메라
장손에게 시집온 외숙모는 일 년에 8번의 제사상을 차린다. 이제는 제사상 정도야 눈 감고도 차린다고 말하지만, 그 일이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다. 그 와중에도 외숙모는 장손이라는 역할을 물려받은 아들이 장가를 가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다. 유산은 물려주지 못할지언정 제사만은 물려줄 수 없다는 외숙모의 의지는 가족 모두가 받아들인 지 오래다. 올해 설 명절을 앞두고 차례상을 차리는 외숙모를 보며 영화 ‘장손’이 떠오른 건 자연스러웠다. 아마도 가부장제에 익숙한 우리에게 이 영화는 결코 낯선 풍경이 아닐 것이다.
‘장손’은 3대에 걸친 대가족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모이면서 시작하는 영화다.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 전을 부치는 여성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푸념과 농담을 늘어놓는다. 집안의 어른인 할머니는 그런 며느리와 딸, 손녀를 보며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며 핀잔을 준다. 그때 집안의 장손 ‘성진’이 도착한다. 장손이 오면서 본격적인 서사가 진행되지만 사실 제삿날 장손이 하는 일은 별로 없다. 장손은 그저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영화는 장손이 아니라 김씨 집안의 여성들을 따른다. 집안 여성들은 제사상을 차리는 것뿐 아니라, 가족이 경영하는 두부 공장의 일도 주도한다. 두부 공장은 집 바로 옆에 있는데 여성들은 공장과 집을 오가면서 가사노동과 집안 경제까지 책임지고 있다. 그러니까 영화의 서사는 장손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의 모순을 담는다고 볼 수 있지만, 카메라는 장자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는다. 카메라가 따르는 적자는 바로 김씨 집안의 여성들이다.
그녀들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이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손녀 ‘미화’는 제사를 일찍 지내자는 말을 전하라며 장손인 동생을 할아버지 방으로 밀어 넣는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녀들이 말을 할 수 없었던 건 여성들 스스로에 원인이 있다. 할머니는 제사 음식을 만드는 딸과 며느리, 거기다 임신한 미화에게는 에어컨을 틀지 못하게 했지만 성진에게는 손수 에어컨을 틀어준다. 미화에게는 제사 음식을 손도 못 대게 하더니 장손에게는 음식을 허락한다. 집안 남성들은 어떤 말도 할 필요가 없다. 할머니와 엄마가 먼저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미화는 할머니와 어머니를 지켜보며 자신의 말에 힘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성진을 할아버지에게 보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이는 가부장제에서 미화의 생존 전략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을 통해 말해지는 존재였음을 알린다. 어쩌면 영화는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수 있어 보이지만 단순히 젠더 갈등으로만 풀 수 없다. ‘장손’은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세계 또한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국 사회의 굵직한 역사를 관통하며 좌절을 배웠고, 평생을 트라우마에 갇힌 채 살아온 인물들이다. 영화는 그들의 아픔 또한 함께 보듬어 안는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가족영화를 만나왔다. 그 중 ‘장손’이 기억에 남는 이유는 가족의 삶을 돌아보고 떠나보낼 줄 아는 시선을 가졌기 때문이다. 영화 속 가족은 한 번의 제사와 한 번의 장례를 치르며 여러 번의 이별을 경험한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운을 남긴다. 장손을 배웅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할아버지가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다 어딘가로 향한다. 롱숏으로 비추는 눈 내리는 마을의 전경. 할아버지의 모습이 점처럼 보일 때까지 카메라는 오래 지켜본다. 마치 배웅하듯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는 롱숏, 롱테이크다. 오정민 감독은 한 가족사의 이야기를 아련하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여름에서 가을로, 겨울로 넘어가면서 계절을 담아내고,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는 미스터리한 연출로 긴장감을 부여한다. 그로 인해 가족의 역사를 감히 함부로 재단할 수 없게 만든다.
2025-02-12 [1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