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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자유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진 검투사 ‘막시무스’(러셀 크로우)의 모습이 생생하다. 열광과 광기의 콜로세움, 역동적인 액션과 인물들 간의 들끓는 파토스까지 2000년 개봉한 ‘글래디에이터’는 놀라운 영화였다. 그로부터 24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글래디에이터 Ⅱ’가 개봉했다. 1편에 이어 2편도 직접 연출한 감독 리들리 스콧은 전편보다 더 화려하고 웅장한 스케일로 고대 로마 시대를 완벽히 재현하며 왕의 귀환을 알렸다.
‘글래디에이터’ 1편이 전쟁 영웅에서 노예로 전락한 ‘막시무스’가 황제 ‘코모두스’의 폭정 아래 신음하는 로마와 자신의 명예를 찾는 여정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2편은 그로부터 2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시작한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누마디아 왕국의 실질적인 지휘자 ‘하노’(폴 메스칼)는 정복자 로마군에 맞서지만 압도적인 화력과 병사를 가진 로마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결국 ‘하노’는 이 전쟁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포로가 되어 로마로 끌려온다. 고대 로마 시대로 단숨에 진입하는 이 오프닝은 ‘하노’에서 ‘루시우스’라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찾아가는 여정의 첫걸음이기도 하다.
리들리 스콧 감독 '글래디에이터 Ⅱ'
정국 혼란 속에서 만들어지는 영웅
검투, 살라미스 해전 장면 인상적
하노는 어린 시절 ‘루시우스’라는 이름을 가진 고귀한 존재였지만 황권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로마 바깥을 떠돌았다. 아내를 만나 누마디아 왕국에 정착했지만 노예가 되어 로마로 돌아온 하노의 인생은 영웅의 일생과 닮아있다. 하노는 지금의 로마가 자신이 알고 있던 그 로마가 아님을 눈치챈다. 로마 제국은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통합하며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폭군 카라칼라·게타 쌍둥이 황제 통치 하에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발톱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검투사들의 주인 ‘마크리누스’(덴젤 워싱턴)는 ‘하노’를 이용해 황권을 차지하고자 한다. 폭압적인 지도자로 사회가 안에서부터 무너질 때, 오히려 권력의 권위는 추락하고 권력을 탐하는 자들이 각축하게 되는 것이다.
아들이 아닌 로마를 잘 통치할 수 있는 이에게 권력을 계승하고자 했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꿈꾸던 로마는 무너졌다. 권력을 잡은 그의 아들 ‘코모두스’는 광기에 사로잡혔고, 뒤이은 쌍둥이 황제들 역시 시민들의 자유를 짓밟고 자신의 허영과 쾌락을 채우는데 바쁘다. 시민에게 자유가 없다면 로마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말로 로마의 미래를 꿈꿨던 황제는 과거의 인물이 되었지만, 그의 질문은 현재에도 유용하다. 지도자의 자질을 가지지 못한 자가 나라를 다스렸을 때 고통받는 건 과거에도 현재에도 시민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콜로세움에서의 결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만큼 콜로세움이 중요 공간으로 등장한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욕망을 위해, 우매한 시민들의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콜로세움은 화려한 혈투를 제공하지만 정작 콜로세움은 시민을 각성시키고 영웅을 만들어내는 장이다. 콜로세움에서의 혈투 끝에 하노는 자신이 누구인지 각성하며 비로소 로마의 꿈을 이룰 ‘루시우스’가 된다. 그 유명한 “권력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어떤 왕이 될 것인지 선언하는 말이다. 열광과 광기 사이에서 결투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결국 무능력한 황제의 권위에 맞선다. 자유를 잃은 시민은 왕을 저버리고 광기 어린 폭도로 변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사실 ‘글래티에이터’ 2편의 서사는 진부한 면이 있다. 하지만 2세기 로마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세트장과 마지막 전투 ‘살라미스 해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치 당시 콜로세움 안에 있는 듯한 착시감이 들 정도다. “그 당시 로마의 냄새가 날 정도로 고증에 공을 들였다”는 노장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영화를 보는 즉시 수긍할 것이다.
2024-11-2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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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흔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보통의 가족
‘보통의 가족’은 네덜란드의 국민 작가로 불리는 헤르만 코흐의 소설 ‘더 디너’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이미 전 세계에서 4번이나 영화화된 작품이기에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익숙한 서사와 연출에도 영화가 끝난 뒤 곱씹게 되는 매력이 있다. 영화 속 일이 내게도 벌어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지금까지 지켜온 신념을 한순간에 내던질 수 있을까? 영화는 내가 그들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되묻는다.
‘8월의 크리스마스’, ‘외출’, ‘봄날은 간다’ 등으로 한국형 멜로 영화를 다시 썼다고 평가받는 허진호 감독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장르로 돌아왔다. 그의 역사영화 ‘천문: 하늘에 묻다’나 ‘덕혜옹주’와도 또 다른 결이다. 허진호 감독은 전작들에서 미장센을 통해 영화적 감성을 보여주었다면 ‘보통의 가족’에서는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 우리 사회의 병폐를 꼬집는다. 앞선 영화들과 달리 메시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물들의 감정을 내밀하게 포착하는 점에선 역시나 허진호의 영화답다.
‘보통의 가족’은 누군가의 보복운전으로 한 아이의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어린 딸은 혼수상태에 빠지는 사고를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재완, 재규 형제는 이 충격적인 사고와 깊숙이 연결되면서 이후 자신들의 신념이 충돌하는 것을 확인한다. 재완은 돈만 많이 준다면 살인자의 변호도 마다하지 않는 변호사이며, 동생 재규는 윤리와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소아과 의사이다. 형제는 이 사건의 변호인과 주치의가 되면서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한다. 또한 형제는 직업윤리에 맞게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사건을 대한다.
전처와 사별 후 지수와 결혼해 늦둥이를 낳아 키우는 재완과 치매에 걸린 노모를 지극 정성으로 간병하는 연경을 아내로 둔 재규는 사소한 갈등은 있지만 행복해 보인다. 두 가족은 주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는 등 우애도 나쁘지 않다. 물론 이 우애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님은 금세 밝혀진다. 원작의 제목이 ‘더 디너’이니만큼 영화에서도 식사 자리는 매우 중요하다. 밥을 먹는 횟수가 쌓일수록 가족의 민낯도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처음 식사 자리에서는 보통의 가족과 다름없이 화목해 보이지만, 이내 이들이 만난 이유가 치매에 걸린 노모를 요양원에 보내기 위해서였음이 밝혀진다. 불편한 침묵과 위선의 얼굴, 가식의 말들이 오고 가지만 그들은 세련된 매너와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다음 저녁 식사는 재완의 집에서 이루어진다. 그들은 잘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았지만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는다. 그들이 저녁 식사를 가장해 은밀히 만난 이유는 자식들이 일으킨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다. 그토록 이성적이었던 부모는 자식의 문제 앞에서 신념이나 윤리의식을 내던진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밥을 먹기 위해 만났지만 신경전을 벌이느라 밥 한술 뜨지 못한다. 가족 내에서 겉돌지만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지수만 밥을 먹을 뿐이다. 밥을 먹는 듯 보이지만 재완과 재규, 연경은 그럴듯한 말로 타인의 인생을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관을 주장하기 바쁘다.
그러다 뉴스에서나 볼 법한 사건이 자신들의 문제가 되었을 때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도덕적이고 이상적인 아내의 모습을 보였던 연경은 아들의 범죄를 숨기기에 급급하다.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감정만 남고, 위선을 떨쳐낸 모습에는 패악만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폭발한다. ‘보통의 가족’은 제한된 공간에서 인물들이 연기하기에 자칫 지루할 수도 있으나 대화와 표정만으로도 역동적인 풍경을 만든다. 더불어 예상치 못한 사건과 마주했을 때 얼마나 쉽게 자신의 신념을 놓아버릴 수 있는지 깊이 파고든다. 우리는 과연 겉과 속이 다른 이 형제를 마냥 비난할 수 있을지 고민해 본다.
2024-11-0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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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반려 애니메이션의 성취
인간과 자연, 인간과 기계 등을 다룬 애니메이션은 ‘반려’를 주로 이야기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동종’이 아니라 ‘이종’이 함께하는 삶이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인간이 빠져 있더라도, 인간과 다른 생명체의 공존을 이야기하는 작품도 많다. 최근 개봉한 ‘와일드 로봇’은 로봇과 동물이 동반자가 된다는 설정으로 다른 반려 애니메이션과 차별점을 둔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하늘에서 상자가 떨어진다. 상자 속에는 로봇 ‘로줌 유닛 7134’(로즈)가 들어 있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로즈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동물들만 있는 야생의 섬에서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게다가 무인도에서 로즈가 부서지지 않고 버티는 건 힘겨워 보인다. 다행히 로즈에게는 환경에 적응하고 행동을 모방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이 탑재되어 있다. 이내 동물의 언어를 이해하고 그들의 모습을 모방하며 동물들 곁으로 다가가지만 생김새가 다른 로봇에게 곁을 내어줄 리 만무하다.
무인도가 목적지가 아니었음을 감지한 로즈는 본사로 귀환을 시도하지만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는다. 이를 지켜보던 동물들은 급기야 로즈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받아들이고, 함께 사는 일은 쉽지 않다. 로즈는 어쩔 수 없이 쫓기는 신세가 되고 조용했던 무인도는 한바탕 소란이 일어난다. 이때 로즈는 우연히 기러기 둥지에 홀로 남겨진 알을 발견하고, 그 알을 훔치려는 여우 ‘핑크’가 합세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알을 깨고 나온 기러기 ‘브라이트빌’은 눈을 떠 처음으로 본 로즈를 엄마로 여기며 따른다. 하지만 로즈에게 빌은 도움을 줘야 할 대상일 뿐이다. 겨울이 오면 남쪽으로 떠나는 기러기들의 습성에 따라 빌도 무리들과 떠나야 하나, 작고 약하게 태어난 빌은 하늘을 나는 것은 고사하고 물에 뜨는 것도 어렵다. 방대한 지식을 가진 로봇 ‘로즈’와 무인도를 잘 아는 여우 ‘핑크’는 기러기 ‘빌’을 위해 작전을 세운다.
함께 어울려 살 수 없는 로봇과 기러기, 여우는 함께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관계도 변화한다. 특히 로즈는 빌이 길을 잃을까 혹여 다치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이다. 기계적으로 빌을 대하던 로즈가 달라진 것이다. 로봇인 로즈가 엄마를 학습했다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로즈의 행동을 학습의 결과로 보기에는 의구심이 든다. 빌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행동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로즈를 빌도 의심 없이 엄마로 여긴다. 기러기 빌을 잡아먹으려고 했던 핑크도 빌의 자립을 응원하는데 마치 가족처럼 보인다.
이제 로즈를 감정이 없는 로봇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로즈는 이별을 슬퍼하고 사랑하는 이를 지켜야 함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서 느끼기 때문이다. 이는 로즈가 인간화되었다기보다는 시스템의 오류나 사랑이라는 마음이 새롭게 입력된 것이라 보는 게 적절해 보인다. 물론 그 이유를 애니메이션은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서로 섞일 수 없다고 믿었던 존재가 서로의 반려가 되고 변화한다는 점에 의미를 두면 어떨까 싶다.
로즈의 변화는 새로운 공동체를 꿈꿀 수 있게 하며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음을 알린다. 여우, 게, 비버, 곰, 사슴 등 한자리에 모일 수 없는 동물들이 싸움을 멈추고 혹독한 추위를 함께 견뎌내는 장면에서는 인류애마저 느껴진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고 동물을 소유하려 하는 원흉이 누구인지 떠오르게 한다. ‘와일드 로봇’에는 인간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데 말이다.
2024-10-2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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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네가 너인 게 어떻게 약점일 수 있어?
최근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들이 연이어 개봉하고 있다. 김혜진의 ‘딸에 대하여’, 장강명의 ‘한국이 싫어서’와 ‘댓글부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까지 모두 소설이 원작인 작품이다. 게다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더 개봉된다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문자를 영화로 옮기는 것이라 치부할 수 없다. 소설 원작 영화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어 관객들에게 공감을 끌어낸다. 또한 이들 영화를 보면 원작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감독의 연출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과 영화가 서로 다른 매체임을 인식하게 한다.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 중 단편 ‘재희’를 이언희 감독이 영화화했다.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다양한 에피소드가 추가되며 한편의 청춘물이 완성되었는데 감독의 연출력이 특히 눈에 띈다. 이언희 감독은 데뷔작 ‘…ing’(2003)를 통해 감성적인 로맨스를, ‘미씽: 사라진 여자’(2016)에서 미스터리를 통해 여성 서사를, ‘탐정: 리턴즈’(2018)에서는 추리와 코미디까지 장르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다양한 시도를 선보였다. 그리고 그는 20여 년이 지나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다시 ‘사랑’을 말한다. ‘...ing’에서 그렸던 차분하고 서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불완전해서 불안한 그러나 자유로운 청춘들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다.
영화는 주인공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스무살, 누구의 눈치도 보는 법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의 재희(김고은)와 세상과 거리 두는 법에 익숙한 흥수(노상현)는 우연한 계기로 한집에 살게 된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두 사람은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가십의 대상이 된다. 이후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의 삶에 지지를 보내며 1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때 남녀가 한 공간에 산다고 하면 사랑 이야기겠거니 생각하겠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진부한 전개를 따르지 않는다.
이 영화는 여타의 청춘 로맨스물처럼 보이지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차별과 편견을 말한다. 성소수자 흥수는 자신의 성 정체성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있는 듯 없는 듯 학교생활을 하고, 잘 놀고 잘 표현하는 재희의 자유분방함은 함부로 손가락질해도 되는 존재로 취급당하기 일쑤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아주지 않는 사회에서 재희와 흥수는 주눅이 들지만, 함께 있기에 고통을 견딜 수 있어 보인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재희와 흥수의 우정을 그리는 동시에 그들 각각의 사랑에도 집중한다. 흥수는 누구를 만나도 깊이 사랑하려 들지 않는다. 혹여나 사람들이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될까 봐 언제나 상대와 거리를 두며 일회적인 사랑을 한다. 헤어져도 상처받지 않은 척, 쿨한 척 돌아선다. 반면에 재희는 매번 진실한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사랑은 험난하기만 하다. 특히 재희는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취향도 바꿀 정도로 사랑에 헌신적이지만, 그 사랑 때문에 폭력 앞에 놓인다. 사랑 때문에 울고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은 미숙한 사랑으로 한 번쯤 울고 웃었던 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에 상처받았을 때 나의 곁에서, 나와 함께 있어 주었던 어떤 상대를 떠올리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퀴어를 소재로 한 영화는 무겁고 어두울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도시의 사랑법’은 가볍고 경쾌한 연출로 유쾌하게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폭력들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데이트 폭력 등은 현실에서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흥수와 재희가 당하는 폭력은 분명 다른 층위이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폭력은 내가 겪을 수도 혹은 내가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2024-10-09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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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오늘이 불행한 청춘들에게
퇴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출근이야?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다. 떠지지 않는 눈을 반쯤 뜨고 어제 입었던 옷을 대충 걸쳐 입고 집을 나선다. 마을버스 열두 정거장을 지나 지하철 1호선을 탔다가 다시 2호선에 올라 강남 사무실까지 장장 2시간이 걸린 출근길이다. 출근을 했을 뿐인데 치열한 전투를 한 차례 치른 패잔병 같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피곤하다. 벌써 집에 가고 싶다.
출퇴근이 힘들어도,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해도 ‘계나’는 참는다. 한국이 싫어서, 한국을 떠나기 위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다. 재개발 아파트에 들어갈 희망에 부푼 엄마는 계나가 모아둔 3000만 원을 빌려 달란다. 계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냥 아파트 평수를 줄여 가자며 엄마의 부탁을 흘려듣는다. 그러니까 계나는 어디서 살든 무슨 일을 하든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참을 수 없는 건 오늘 내가 먹을 점심 메뉴 하나 마음대로 고르지 못하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오늘을 희생하는 것이 견딜 수 없다.
‘한국이 싫어서’의 주인공 계나는 비교적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풍족하진 않지만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이 있고, 오래 사귄 애인이 원하던 직장에 취업했고, 좋아하는 일은 아니지만 꼬박꼬박 월급 나오는 회사도 다닌다. 겉보기엔 그럴듯한 삶이지만 계나는 답답하다. 행복하지 않다. 불행해서 한국을 떠나겠다고 꾸준히 말한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계나는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홀로 뉴질랜드로 떠난다.
장강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한국이 싫어서’는 소설 내용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장건재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살린다.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이 계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녀를 둘러싼 주변 상황을 둘러보게끔 한다. 특히 계나의 뉴질랜드의 생활과 한국에서의 일상을 교차해서 보여주는 장면은 단순히 두 삶을 비교하는 방식이 아니라서 좋다. 뉴질랜드에서 계나는 한국에서만큼 치열하게 산다.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병행하며 부족한 영어와 인종차별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더 많다. 그럼에도 계나는 편안해 보인다. 이 지점에서 계나가 한국에서 왜 그토록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
영화 제목에서만 노골적으로 ‘한국이 싫다’고 할 뿐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은유적으로 이를 알리고 있는데 계나는 자신이 맹수들에게 잡아먹히는 작고 약한 ‘톰슨가젤’ 같단다. 치열한 경쟁과 약육강식이 당연시되는 한국에서 맹수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즉 계나에게 한국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더 많이 일해야 하고, 누군가와의 경쟁을 통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나라다. 계나가 보기에 한국은 불확실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견뎌야 하는 ‘헬조선’이다.
한국을 떠나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던 계나는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났다. 그런데 영화에는 열심히 살다 보면 기회란 주어지는 것이니 떠나지 말라는 옛 남친, 한국을 떠나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여동생도 있다. 그들은 떠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소설 원작에는 없지만 뉴질랜드에 정착한 유학원장 가족의 모습은 의미심장하다. 타국에 안정적으로 정착한 이 가족은 행복해야 하지만 무언가 불안한 기색을 내비친다.
그들은 여기가 아니어서 떠났지만, 거기도 정답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그런 의미로 이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하는 ‘한국이 싫어서’는 진짜 한국을 의미하는 것 같지 않다. 무한 경쟁 시대를 비판하는 동시에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힌 청춘들에게 여러 선택지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롭게 시작해도 괜찮다고 청춘들을 위로하는 것 같다.
2024-09-2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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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나의 일이 될 수 있는 너의 이야기
김혜진 소설의 ‘딸에 대하여’가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감도 있었지만 걱정이 먼저였다. 엄마의 목소리가 전면에 드러나는 일인칭 주인공 시점의 소설을 영상 언어로 구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랑 감독은 침묵과 여백, 인물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것만으로도 문자와 영상이 다름을 알린다. 원작의 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만의 영상 언어를 완성한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엄마의 집에 딸이 찾아온다. 이사를 해야 하니 돈을 빌려달라는 딸의 요청에 엄마는 대출을 알아보지만 돈을 빌리기 쉽지 않다. 결국 딸은 7년간 사귄 동성 연인을 데리고 엄마의 집으로 들어온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땐 그런대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집에서 내 딸과 함께 있는 딸의 여자친구를 보는 일은 참을 수 없다. 딸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는 게 소원인 엄마는 “내 딸이 그럴 리 없다”며 현실을 부정해 보지만 바뀌는 건 없다. 엄마는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말을 삼킨다. 아직 엄마는 딸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엄마는 딸이 집으로 들어온 후부터 치매에 걸린 노인 ‘제희’를 돌보는 데 몰두한다. 병에 걸린 노인을 돌보는 일은 가족이라도 하기 힘든 일이지만, 엄마는 남인 제희를 헌신적으로 보살핀다. 제희는 젊은 날 한국계 입양아들을 지원하며 평생을 타인을 위해 살았던 인물이다. 그녀의 이름을 딴 재단이 설립될 정도로 존경받는 삶을 살았지만, 늙음과 병이 찾아온 제희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현재 제희는 세상에서 빠르게 잊혀지는 중이며 요양원의 골칫거리로 여겨진다.
엄마는 병든 제희에게서 딸의 미래를 보았다. 딸이 제희처럼 가족 없이 홀로 지낼까 봐 무섭다.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사랑을 하는 딸이 모두에게 외면당할까 봐 두렵다. 엄마가 제 몸이 부서져도 상관없다는 듯 제희를 돌보는 이유는 딸이 홀로 곤궁하게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또한 가족이 아니라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음을 엄마는 증명하고 싶은 것이다. 제희를 존경하는 마음과 딸이 그리 살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양가적 감정이 영화를 통해 전달한다. 딸을 바라보는 얼굴, 한숨, 침묵, 편히 잠들지 못하는 시간은 엄마의 복잡함을 드러낸다. 결국 엄마는 꾹꾹 눌러두었던 말을 딸의 여자친구에게 건넨다.
대학 강사인 딸은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준을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는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모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그런데 서로를 이해하려 들지 않는 엄마와 딸은 무척 닮았음을 알 수 있다. 생김새나 행동을 뜻하는 게 아니다. 딸은 동료 강사의 부당한 해고에 앞장서 항의하며 대학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엄마는 왜 남의 일에 앞장서냐며 타박하자, 딸은 동료가 겪은 일이 언제든 나의 일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엄마도 제희가 겪고 있는 일이 남의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다른 듯 닮은 두 사람은 언제든 내 일이 될 수 있는 남의 일에 침묵하지 않는다.
이처럼 영화는 타인을 위한 삶이 자신을 지키는 것임을 말한다. 엄마와 딸은 속한 세계도 사는 방식도 다르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로 인해 영화 말미에 엄마와 제희, 딸과 딸의 여자친구가 한 공간에서 가족의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킨다. 더불어 이들을 통해 생물학적 혈연에 기반하지 않는 느슨한 가족공동체를 꿈꿀 수 있게 한다. ‘딸에 대하여’는 엄마의 시선으로 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영화는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무연고 노인, 돌봄노동, 나이듦과 젊음, 성 소수자의 이야기까지 딸과 엄마의 이야기를 거쳐 우리에게 온다. 이 이야기가 언제든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잘 짜여진 쇼트를 통해 전한다.
2024-09-1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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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희망 없는 시대, 행복을 꿈꾸다
‘행복의 나라’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영화다. 1979년 12.12 군사반란을 관통한다는 점에서 ‘서울의 봄’과 닮아있지만, 사건의 최전선에서 물리적 충돌과 시시각각 변하는 정세를 긴박하게 좇는 ‘서울의 봄’과는 달리 일종의 후방-법정에서 일어난 ‘쪽지재판’을 사건화한다는 점에서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영화는 10·26 대통령 암살 사건 발생 이후 수사, 기소, 심리, 사형 구형까지 단 54일이 걸린 재판 과정을 그린다.
이때 추창민 감독은 54일 동안의 재판 과정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비극적 시대 속 개인을 포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로 인해 영화는 사건이 중심이 되기보다는 인물들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주목하면서 사건 자체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공백을 메우기 위해 허구적 인물을 동원한다. 그러고 보면 감독은 역사 속 작은 틈새를 찾아 그 자리에 상상력으로 채우는데 일가견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광해군의 15일간의 행적이 빠져 있는 것에 착안해 만든 ‘광해, 왕이 된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번 영화도 실제 있었던 정치 재판을 주 내용으로 삼으며 역사와 허구 그 사이를 교묘히 오간다.
영화 오프닝은 궁정동 대통령 안전 가옥에서 시작한다. 이때 카메라는 암살당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총알을 장전하는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태주’(이선균)의 모습을 포커싱한다. “오늘 해치운다”는 명령을 전해 받은 비서관들은 초조해 보인다. 바로 이날 대통령 암살 사건이 일어나고 곧이어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검거되며 재판에 넘겨진다. 이때 유일한 군인 신분으로 단심제가 적용된 박태주의 변호를 맡는 인물이 ‘정인후’(조정석)다.
영화는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던 군인 박태주, 사형선고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인후, 권력을 장악한 합수단장 ‘전상두’(유재명), 이 세 인물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 속 대부분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허구적 인물인 정인후의 경우 가장 극적으로 변화하는 인물이다. 정인후가 박태주의 변호인이 된 것은 정의나 신념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 재판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 게 아니라, 이기고 지느냐의 싸움”일 뿐이었다. 그런 정인후가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박태주와 전상두를 만나면서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런데 정인후의 성장은 꼭 긍정적이지만 않아 보인다. 정인후는 박태주의 사형선고를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권력의 중심인 ‘전상두’ 앞에서 매번 좌절감을 맛보기 때문이다. 정인후와 군 검찰단 검사는 박태주의 행동을 두고 ‘내란의 사전 공모인지, 위압에 의한 명령 복종인지’를 두고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인다. 박태주에게 유리한 증인을 세우고, 자료를 찾아내지만 전상두는 ‘쪽지’ 하나로 모든 것을 무화시킨다. 재판을 감청하고, 재판부를 좌지우지하며, 일이 자신의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폭력으로 해결하는 모습에서 정인후는 분노를 버리고 타협을 배우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그는 소위 말하는 좋은 변호사로 성장하지만, 희망 없는 시대에 ‘좋은’ 변호사는 무력하다.
‘행복의 나라’는 단순히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흘러가는 영화가 아니다. 엄혹했던 시대임에도 선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알려주려 애쓴다. 물론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신파적인 장면들을 배치하거나, 정인후의 극적인 감정 변화가 영화에 몰입하는 방해 요소로 작동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군인 박태주를 연기한 고 이선균의 처연하고도 묵직한 연기와 그의 작은 미소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의 나라’는 충분히 의미 있는 영화이다.
2024-08-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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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낯설지만 아름다운 경험
2022년, 프랑스 출신의 장 마리 스트로브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 소식에 시네필들은 애도를 표했고, 세계 곳곳에서는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도 지난 7월 18일부터 8월 11일까지 장 마리 스트로브와 평생 그의 영화적 동반자이자 아내였던 다니엘 위예의 작품을 상영하는 ‘지나간 미래 X 다가온 과거: 장 마리 스트로브 & 다니엘 위예 회고전’을 열었다.
사실 스트로브와 위예의 영화들은 시네마테크나 영화제에서 간간이 만날 수 있는 귀한 작품이기에, 회고전이 열린다는 소식만으로도 설렜다. 게다가 초기작인 단편부터 2006년 위예가 타계한 후 스트로브가 홀로 찍은 영화들까지 무려 32편이 상영되는 회고전이기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그들의 영화를 볼 수 있을지 몰라 무척 기다려졌다. 그래서인지 올해 진행된 시네마테크 기획전 중 유독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관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음 스트로브와 위예의 영화를 접하는 이들은 그들의 영화 세계를 난해하다고 느낀다. 서사 중심의 영화가 아니고, 대사와 독백들로만 채워져 있거나, 인물들은 건조하다 할 정도로 감정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도 배우의 신체 일부만을 비추거나 텅 빈 공간을 비추는 등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기에 더욱 그렇다. 관객들은 감독들이 잘 알려진 문학이나 연극 등의 작품을 영화화했기에 쉽게 영화에 몰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감독들은 그 작품을 통해 영화와 끊임없이 거리를 둘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두 감독은 오페라, 연극, 시, 소설 원작 텍스트를 가져오지만 원본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실러, 횔덜린, 카프카, 브레히트의 작품을, 실제 음악가를 캐스팅해 바흐의 음악을 재해석하거나, 세잔의 그림과 루브르의 명화들을 탐색하면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영화를 완성한다. 스크린에 옮길 수 없을 것 같은 재료들로 영화를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영화를 ‘번역의 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스트로브와 위예는 현대 미술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가히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회고전에서 인상 깊었던 영화는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이었다. 이 영화는 프리드리히 횔덜린이 남긴 미완성 작품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가져오면서 과감한 방식으로 영화화한다. 그런데 그들은 횔덜린의 언어를 재해석하지 않으며 배우의 목소리를 통해 원문을 그대로 낭독할 뿐이다. 횔덜린이 쓴 본연의 언어를 이탈하지 않으려는 의도다. 그로 인해 배우들은 연기하지 않으며 오롯이 낭독하는 데 애쓴다. 배우의 낭독은 영화 세계로 진입하는 매개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배우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 몰입하지 않고, 배우가 제시하는 상황, 즉 횔덜린의 텍스트가 의미하는 상황 그 자체와 직면하게 된다.
이제 특별한 경험을 한다. 전혀 모르는 타국의 언어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그러다 낭독의 내용을 전혀 알아챌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어느 순간 끝없이 몰려오는 자막읽기의 집착을 내려놓을 때는 스트로브와 위예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들이 들리고 보인다. 바람에 스치는 나무들의 살랑거리는 움직임,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의 변화, 영화 속 에트나 산의 불완전한 기운을 감지한다. 배우가 낭독하는 단어의 강조와 긴 휴지, 늘어짐, 노래를 부르는 듯 맑고 고운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미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도 영화를 감각할 수 있는 ‘영화적 순간’이다. 스트로브와 위예는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으며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영화 만들기를 실천한 감독들이다. 그로 인해 이토록 자유롭고 낯선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한다.
2024-08-1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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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있다면
이른 새벽, 거리를 쓰는 빗자루 소리에 눈을 뜬 남자는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양치질을 하고 분재에 물을 주고, 소지품을 챙겨 집을 나선다. 집 앞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뽑아들고 오래된 차에 올라탄 남자는 카세트 테이프 하나를 골라 올드팝을 듣는다. 그때 아침 해가 떠오른다. 어제도 떠올랐을 해를 감격한 듯 바라보는 남자가 환하게 미소 짓는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얼굴이다.
남자는 도쿄 시부야 공공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다. 일을 시작하는 그의 행동에서는 어떤 망설임도 없다. 좌변기와 비데,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반짝반짝 빛나도록 쓸고 닦는다. 지각을 한 젊은 동료는 설렁설렁 일을 하면서 내내 투덜대지만 히라야마는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이 유별나 보이는 건, 청소 용구와 물품을 직접 만들 정도로 정성을 다하는 점 때문이다. 게다가 공공화장실은 금방 다시 엉망이 될 곳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매일 온힘을 다하여 청소하는 그의 모습은 종교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고결하고 거룩해 보인다.
빔 벤더스 감독 '퍼펙트 데이즈'
환경미화원 '히라야마' 삶 그려
평범한 일상 속 삶의 묘미 찾아
점심시간에는 공원 벤치로 나와 샌드위치와 우유로 끼니를 때운다. 문득 고개를 든 그는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바라보다 필름 카메라를 꺼낸다. 풍경과 시간을 기억해두려는 듯 그 순간을 찍는다. 퇴근길엔 목욕탕에 가고, 지하철역 상가에서 술 한 잔과 식사를 간단히 한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책을 읽다 잠이 든다. 다시 아침, 빗자루 소리에 눈을 뜬다. 영화 ‘퍼펙트 데이’는 한 시간가량 히라야마의 일상을 따른다. 어떤 사건이나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은 무척 단조로워 보인다. 그러나 히라야마가 느끼는 일상이야말로 완벽하다. 제 일을 하고, 여름날의 햇빛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으며, 술 한 잔을 마시고, 소설을 읽으며 고된 하루를 마감할 수 있는 하루가 완벽하지 않을 수 없음을, 히라야마는 몸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반복되는 일상에 어떤 틈이 발생하면 힘들다. 사전 통보 없이 일을 그만둔 동료 때문에 청소해야 할 곳이 두 배로 늘어나면서 퇴근 후의 시간이 사라지고, 엄마와 싸우고 가출해 자신의 집을 찾아온 조카딸 ‘니코’로 잠자리까지 불편해진다. 일상의 리듬이 깨지자 그의 삶은 한순간에 엉망진창이 되고 만다. 영화는 완벽한 하루는 좋은 직장을 가지거나 돈이 많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린다. 즉 히라야마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속도에 제 몸을 맞추려 하지 않고, 자신의 속도로 흘러간다.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지키며 완벽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
물론 속도에 둔감하고 변하지 않는 히라야마가 자신의 틀 속에 갇혀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다른 순간을 찾아내는 사람이 자신만의 견고한 성에 홀로 살 리 만무하다. 히라야마는 매일 아침 뜨는 해와 나무를 비추는 햇살의 빛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할 줄 알며, 집 나온 조카를 다그치기 보다는 가만히 지켜보며 감싸 안아주는 다정함이 있다. 단골 선술집 여주인의 전남편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그림자밟기 놀이를 하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로를 건넨다. 최소한의 인간관계만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누구보다 세계와 일상에 유연히 반응하고 있었다.
‘퍼펙트 데이즈’는 잔잔한 일상을 그리는 듯 보이지만 같은 일상이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한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누구도 감지할 수 없는 다른 어떤 순간들을 포착한다. 이를 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을 뿐이다. 더불어 감독 빔 벤더스와 배우 야쿠쇼 코지의 만남, 이른 새벽 뜨는 해와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올드팝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완벽하게 완성한다.
2024-07-31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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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폭주하는 아이들, 조금씩 흔들리는 세계
바비 보이즈의 음악에 맞춰 춤추는 소녀들, 고요했던 학교 수영장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진다. 어둠 속 소녀들을 비추는 조명은 달빛. 달빛 사이로 소녀들의 맑은 웃음소리와 역동적인 움직임이 한 폭의 그림처럼 보인다. 이때 소녀들을 지켜보던 한 아이가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소녀들의 열기가 사그라진다. 가슴 뛰는 이 오프닝은 영화 ‘태풍클럽’이 활기와 정적, 우울과 비관이 가득 찬 기묘한 세계임을 알린다.
‘태풍클럽’은 도쿄 근교의 작은 마을, 태풍이 몰려오는 4박 5일 동안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아이들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거나, 선생에게 환멸을 느끼거나, 삶과 죽음을 고민하는 등 저마다의 고민과 불안을 안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 주변에 아이들을 돌보고 보호할 어른의 존재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태풍이 다가온다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약했던 바람이 점차 거세지고, 폭우를 동반한 태풍이 마을로 점차 가까워지자 아이들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소마이 신지 감독 '태풍클럽'
청소년의 고민과 감정 주목
카메라에 자유로운 모습 담아
선생들은 태풍 소식에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만 어떤 이유인지 6명의 아이들이 학교에 고립된다. 남은 아이들은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지금껏 한 번도 표출하지 않았던 욕망을 분출하기 시작한다. 윤리나 규범 등의 고리타분함을 교육하던 학교는 축제의 장이 된다. 아이들은 자유롭게 사랑을 하거나, 속옷만 입은 채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무엇이 그들을 즐겁게 만드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은 놀이 때문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거운 감정들을 북돋아 내고 있다. 태풍처럼 격렬하고, 어디로 흘러갈지 모를 예측 불허의 감정들을 토해내고 만끽한다.
아이들은 온몸으로 태풍과 마주한다. 그들에게 태풍은 몸을 숨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에너지를 분출하는 시간이다. 즉 아이들에게 태풍은 모든 공간을 휘저어 버리는 동시에 억압되어 있던 본성을 확인시키는 기폭제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태풍이 마을을, 학교를 완벽하게 잠식했을 때 아이들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진정한 해방감을 맛본다. 그리고 태풍이 지나갔다. 전날 그렇게 몰아치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조용해진 마을, 그 사이 아이들은 한 뼘쯤 자라있거나, 어떤 아이는 희망 없음을 깨닫고 사라졌다. 아이들이 아주 조금 변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미성숙한 아이들의 성장을 뜻하지 않는다.
감독 소마이 신지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와 학교 바깥의 현실을 비춘다. 이때 감독은 아이들의 생각을 알려고 들지 않는다. 아이들의 세계를 비추는 카메라는 적당히 거리를 둔 채 그들을 그저 따라갈 뿐이다. 카메라는 아이들보다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후 천천히 이동한다. 이는 단순히 고정된 카메라라고 할 수 없다. 카메라가 관객의 시선을 규범화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아이들의 자유로운 정념을 추적하기 위한 방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마이 신지의 대표적 스타일로 여겨지는 ‘원 씬 원 컷’은 예술적 기법으로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념을 표현하고 담을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기에 그의 카메라는 공간의 깊이를 보여주거나 사유의 깊이를 넓히기보다는 실험적인 방식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역동적인 카메라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정념의 형상을 닮아있는 태풍과 학생이라는 유비적 대상을 포착하며 불완전한 세계로 우리를 이끈다.
2001년, 13편의 영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소마이 신지의 ‘태풍클럽’은 1985년 일본에서 개봉했다. 한국에서는 시네마테크나 영화제를 중심으로 소마이 신지의 영화들을 간간이 볼 수 있었지만 정식 개봉은 아니었다. 39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도착한 이 영화는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불안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청춘의 에너지를 담고 있다.
2024-07-17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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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이 영화의 의외성
개봉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아무 기대 없이 극장에 들어섰다가 넋을 놓을 정도로 빠져드는 경우가 있다. ‘핸섬가이즈’가 바로 그런 영화다. 한순간도 관객들의 시선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정신없이 몰아붙이다가, 순식간에 긴장하게 만들어 혼을 쏙 빼놓는 영화. 남동협 감독의 첫 번째 장편영화 ‘핸섬가이즈’는 한바탕 소리 내서 웃게 만들다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등 당최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든다. 제멋대로 만든 영화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철저히 계산된 연출로 풀어가고 있어 영화가 끝나고도 기분 좋은 유쾌함을 느낄 수 있어 보인다.
‘핸섬가이즈’는 세 개의 축으로 진행되는 영화다. 먼저 자신들이 핸섬하다고 생각하는 재필과 상구가 평화로운 전원생활을 꿈꾸며 시골 마을로 이사를 오면서 발생하는 이야기가 영화의 한 축이다. 영화는 여러 장르가 혼합되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골조는 코미디다. 이때 코미디를 가능하게 하는 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얼굴을 가진 ‘재필’과 ‘상구’를 통해 가능하다. 누가 보아도 험상궂은 얼굴인데도 “나는 터프한 미남 스타일, 너는 섹시한 미남 스타일!”이라며 서로를 핸섬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실소가 터져 나온다. 형제는 무서운 얼굴 때문에 범죄자 취급을 받지만 도로에 죽어있는 염소 사체를 묻어주고, 물에 빠진 여대생을 구해주는 선량한 인물들이다. 험상과 선량이라는 낯선 조합이 영화의 웃음 포인트인 동시에 사랑스러움을 책임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평생을 모은 돈으로 구입한 집에서 행복만을 꿈꾸며 살아갈 줄 알았던 재필과 상구 앞에 날벼락 같은 일이 생긴다. 가만히 서 있기만 했을 뿐인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코앞에서 죽어 나가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험악한 얼굴로 오해를 받아도, 친구 한 명 사귈 수 없어 외롭긴 했어도 누군가를 해쳐본 적도, 불법을 저지른 적도 없는 선량한 형제는 이 사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 그들은 단지 전원생활을 꿈꾸며 밤낚시를 즐기려고 했을 뿐인데 말이다.
두 사람을 범죄자라고 확신하는 인물은 시골 마을로 놀러 온 대학생들이다. 특히 그들은 자신들의 친구 ‘미나’가 재필과 상구에게 납치되었다고 확신하며, 그들을 습격하기 위한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보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무겁지 않게 풀어내는 연출도 재미있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명언이 즉각 떠오르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장면은 겉모습만 보고 쉽게 판단 내리는 현대인들과 겹쳐 묘한 여운을 남긴다. 재필과 상구가 코믹 요소를 담당한다면 대학생들이 등장할 때마다 영화는 공포물로 분위기가 전환된다. 영화의 마지막 축은 오컬트다. 과거 외국인 선교사가 ‘바포메트’라는 악령을 봉인했는데, 그 악령이 두 사람의 새 집 지하에 봉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악령은 긴 시간 자신을 깨워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때를 노리고 있는데, 영화의 마지막 축은 바포메트가 일으키는 어두운 기운과 이상한 죽음들에 있다.
‘핸섬가이즈’는 세 개의 이야기가 이어지면서 코미디, 호러, 오컬트, 약간의 로맨스와 뮤지컬, 좀비물까지 다양한 장르가 담겼다. 어쩌면 영화가 정신없을 거라 예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서로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장르와 이야기가 비틀어져 긍정적 효과를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잔혹한 묘사와 유머가 공존하는 공포영화를 꺼려하는 관객도 있겠지만, 과도한 설정이나 억지웃음을 짜내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마음 편하게 관람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터커&데일vs이블’이라는 원작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한국적으로 각색한 점도 독특한 장르영화로 완성하는데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2024-07-03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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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어른이 된다는 건 기쁨이 줄어드는 것
감정을 색깔로 표시할 수 있다면 오늘의 감정은 무슨 색깔일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온통 주황색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까? 기쁨이라는 감정 하나만으로 충분했던 과거는 사라지고,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에 휘둘리기 바쁘다. 내 감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감정은 내가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그중 가장 속수무책인 감정은 바로 주황색을 나타내는 ‘불안’이다.
13살이 된 ‘라일리’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친한 친구들이 있고, 좋아하는 하키를 즐길 줄 아는 매일이 행복한 소녀이다. 늘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을 보낼 줄 알았던 라일리에게 갑작스레 변화가 찾아온다. 라일리 머릿속의 감정 컨트롤 본부에 불안, 당황, 따분, 부럽이라는 새 감정들이 등장한 것이다. 새로운 감정은 상냥했던 라일리가 느닷없이 화를 내게 하거나, 고민을 나누던 친구들을 의심하게 하거나, 인기 많은 친구를 부러워하는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만든다. 설상가상으로 늘어난 감정을 수용하기 위해 감정 본부가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가면서 작은 자극에도 감정이 대폭 확대되어 반응하게 되는 이상증세가 나타난다. 그야말로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는 상태, ‘사춘기’에 접어든 것이다.
개봉 영화 '인사이드 아웃2'
13살 라일리 이야기 통해
마음의 성숙 과정 보여줘
고대하던 하키 캠프 첫날, 단짝 친구들과 다른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는 걸 알게 된 라일리는 불안에 지배당한다. 당장 친구들과 헤어지는 것도 아닌데 벌써 슬퍼하고 분노하고 초조해하다가 결국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오답을 내놓고 이를 실행하려 애쓴다. 불안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며 주장하며 기존의 감정들과 충돌한다. 이제 라일리에게 남은 건 점점 커지는 불안밖에 없다.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분주했던 기존 감정들인 기쁨, 슬픔, 까칠, 버럭, 소심이는 밝고 상냥한 라일리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나 역부족이다.
‘인사이드 아웃2’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고 있는 애니메이션이다. 특히 세심히 변화하고 서로 충돌하는 감정은 아이나 어른 할 것 없이 공감할 만한 요소다. 누구나 예상 불가능한 미래가 불안하고, 불안한 만큼 나를 더 채찍질한다. 나의 부족한 모습에 조급해하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열등감과 패배감에 휩싸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은 13살 라일리만의 일이 아니다. 언젠가 우리가 지나왔던 과거이며, 현재도 느끼는 감정들이다. 불안이 나의 삶을 갉아먹는 걸 알지만, 폭주하는 불안을 끌어안는데 역부족이었음을 말이다. 하지만 불안이 나를 성장시킨 원동력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안다. 즉 불안은 라일리를 힘들게 하지만 어른이 되기 위한 ‘자아’의 필수 요소임을 영화는 말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속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기쁨이 줄어드는 것”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살지만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행복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얻기 위해 내 안의 감정들이 서로 부딪히고 다치고 아프기를 반복한다. 그러다 깨닫는 건 행복이 아니라 어느새 단단해진 마음(감정)이다. 물론 그 감정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날뛰던 감정들을 통제할 수 있게 되면 이제 아이에서 어른이 되었음을 불현듯 느낀다.
사춘기라는 통제 불가능한 감정을 지나 능숙히 감정을 숨길 줄 아는 어른이 되지만, 이제 기쁨만을 찾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기쁨이 줄어들고, 그 자리만큼 불안에 내어주는 일이니까 말이다. 애니메이션은 사춘기를 겪던 ‘나’를 떠올리는 동시에 감정을 잃어버린 ‘나’를 만나게 하는데, 그건 어쩐지 슬프면서도 따듯한 기억과 마주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로 9년 만에 돌아온 ‘인사이드 아웃2’는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2024-06-1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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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악은 누구에게나 있다
벽을 타고 소리가 넘어온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누군가의 비명임을 눈치채게 한다. 사운드만으로 끔찍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음을 전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를 소재로 한 영화다. 영화 제목의 의미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둘러싼 40㎢ 지역을 일컫는 말로,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온갖 꽃이 만발한 정원에 다섯 아이가 뛰놀고, 아내 ‘헤트비히’와 남편 ‘루돌프’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헤트비히 말대로 그들이 있는 그곳은 흡사 낙원처럼 보인다. 그러나 영화는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이 가족의 행복이 누군가의 죽음들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린다.
루돌프 가족이 사는 집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벽의 바깥이 천국이라면, 벽의 안은 생과 사가 오가는 지옥이다. 죽음을 결정하는 사람은 루돌프이다. 그의 진짜 얼굴은 수용소로 끌려온 유대인들을 어떻게 하면 빠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독일 장교였다. 다정한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던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죽음을 지시하는 모습은 섬뜩하기 그지없다. 영화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한 가족을 보여주는 동시에 불안정한 음악,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 날카로운 비명, 아이의 울음소리를 함께 배치한다. 피 흘리는 장면이나 총격 장면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바로 서사와 이미지, 사운드가 모두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객은 벽 너머, 수용소의 상황을 볼 수 없다. 카메라는 루돌프 가족의 일상을 뒤따르며 그들이 보는 위치에서만 수용소를 보거나, 그곳에서 들려오는 미묘한 소리들만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이미지 중 하나는 아우슈비츠 굴뚝에서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이다. 유난히 푸른 하늘 속에서 검은 연기는 빠르게 흩어지고 바로 뒤 카메라는 정원의 싱그러움을 비춘다. 정원을 비옥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 상상하게 만드는 연출이다.
이들 가족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총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 행동한다. 학살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피크닉을 즐기고, 생일파티를 하고, 유대인에게서 강탈해온 물건을 자기 것인 양 사용한다. 특히 루돌프가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아 아우슈비츠를 떠나야 하는 상황에서 천국 같은 이곳을 떠날 수 없다며 분노를 터뜨리는 헤트비히의 모습에서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비인간성을 목격한다. 정원에서 놀던 형이 동생을 온실에 가두는 장면에 이르면 나치가 유대인을 감금하고 학살하는 모습을 아이들이 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한다. 죽음 앞에서 태연한 가족의 모습은 ‘악’의 얼굴이 얼마나 평범하고 무심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영화는 유대인이 있는 수용소 내부를 한 차례도 보여주지 않지만 평범한 인간이 만들어내는 잔인함으로 말미암아 그곳이 지옥임을 상상하는 데 어렵지 않게 한다. 이때 소리는 공포를 가중한다. 또한 잔인한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을 줄 알았던 가해자가 우리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라는 점에서 충격을 안긴다. 이 지점에서 조나단 글레이져 감독은 다른 이의 삶을 짓밟으며 쌓아 올린 행복과 평화를 지키려는 루돌프 가족의 서사를 과거로 국한 시키지 않는다.
영화 말미에 카메라는 유대인이 있던 수용소가 아닌, 희생자를 추모하는 전시관으로 변모한 현재의 수용소 내부를 비춘다. 마치 애도하듯 수용소 안을 조심히 살피는 카메라를 무심히 바라보는 나를 느낄 때, 살해를 지시하던 루돌프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내 안에도 악이 내재해 있음을 확인한다. 영화는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현재로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2024-06-0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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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훔쳐보기와 노출하기
영화를 보는 이유를 하나만 꼽자면 내가 모르는 타인의 삶을 훔쳐볼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극장의 불이 꺼지면 ‘나’는 지워지고, 스크린 속 주인공들에 몰입한다. 그들의 일상을 훔쳐보는 것을 통해 쾌락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 시대에는 훔쳐볼 것들이 넘쳐난다. 드라마나 영화는 숨기지 않고 관음증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SNS는 사회적 관계망이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를 훔쳐보는 것을 용인한다. 보는 자와 보여지는 자의 쾌락이 넘쳐나는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여기, 자신의 취미가 훔쳐보기임을 당당히 밝히는 남자 ‘구정태’가 있다.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을 가진 그는 고객이 맡긴 열쇠로 빈집에 들어가, 집주인이 알아채지 못하게 집수리를 하는 등 자신만 아는 흔적을 남겨 놓는다. 그리고 그 집에 있었으나 없어도 무방한 물건 하나를 기념품으로 챙겨 나온다. 정태는 타인의 집을 훔쳐봄으로써 그 사람의 민낯 혹은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믿는다. 오직 자신만이 상대의 진실을 엿볼 수 있다고 믿으며 훔쳐보기를 놀이로 즐긴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한소라‘는 보여지는 삶을 즐기고 보다 많은 관심을 얻기 위해 삶 자체를 연출하는 ‘인플루언서’다. 그녀는 유기견과 유기묘를 돌보는 콘텐츠를 통해 선행의 아이콘으로 알려져 있다. 그뿐만 아니라 명품을 쇼핑하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등 화려한 삶을 과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SNS 속 그녀는 모두가 선망하고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여성이지만 실상은 거짓과 위선으로 점철되어 있다. 정태가 소라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도 편의점에서 소시지를 먹으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SNS에 비건 샐러드 사진을 올리는 모습을 본 이후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거짓을 살아가는 여자가 궁금해진 정태는 소라를 훔쳐보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공인중개사라는 직업을 이용해 타인의 집에 침입하는 것이 용이했지만 길에서 우연히 만난 소라의 집에 침입할 방도가 없다. 이미 훔쳐보기에 대한 윤리의식이 마비된 정태는 소라를 스토킹하기 시작하고, 그녀의 집에 몰래 침입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지만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소라가 집을 내놓겠다고 정태의 사무실로 스스로 찾아와 집 열쇠를 건넨다. 마음껏 소라의 집을 들락날락하던 어느 날, 정태는 피투성이로 죽어있는 소라를 발견하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영화 ‘그녀가 죽었다’는 정태가 소라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부터 스릴러 영화의 형식을 따른다. 사실 이 영화는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듯 익숙한 이야기라 새롭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SNS로 야기되는 현대사회의 병폐인 과시욕과 관음증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속도감 있게 풀어내는 동시에 소라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연출, 캐릭터의 강렬함이 관객들의 집중도를 높인다. 특히 인물들을 단순히 비호감형으로 만드는 데서 나아가, 그들이 끝까지 죄를 뉘우치지 않는 점이나 타인에게는 냉혹하고 자신에게만 관대한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그려내고 있는 부분은 섬뜩함을 자아낸다.
마지막으로 “나쁜 짓은 절대 안 해요. 그냥 보기만 합니다”, “내가 제일 불쌍해”라는 자신의 서사를 관객들에게 알려주는 해맑은 내레이션은 스릴러 영화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명랑한 방식이라 특이하다. 범죄자의 내레이션은 그들이 직접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기에 변명이나 동정으로 읽힐 수 있지만, 거리를 두고 그들을 바라보게끔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김세휘 감독은 영화가 무섭기보다는 경쾌한 스릴러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범죄자들의 내레이션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2024-05-2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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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남의 영화세상] 끊어질 듯 이어지는 첫사랑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몽글몽글한 감정. 기억 속 어딘가 숨겨져 있다가 불쑥 나타나 아련함을 남기는 감정을 첫사랑이라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다가도 혹여 내 기억과 다르다면 어쩔까 우려되는 마음, 누구나 한 번쯤 가져보지 않았을까? ‘패스트 라이브즈’는 가슴 한편에 묻어둔 첫사랑의 기억을 소환하는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를 첫사랑 영화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껏 보았던 애틋하고 애잔한 사랑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영화는 해성과 나영, 아서가 뉴욕의 한 바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세 사람의 모습을 본 누군가 그들의 관계를 유추한다. 동양인 남자와 여자는 연인인지, 친구인지, 그들의 곁에 있는 외국인 남자와는 삼각관계인지 그저 동료인지 묘한 세 사람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은 채 영화는 24년 전으로 돌아간다. 서울, 12살의 나영과 해성은 우정 이상의 감정을 쌓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나영의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면서 둘은 급작스럽게 이별한다. 나영은 다가올 미래가 궁금해 첫사랑을 잊는다. 나영과 해성이 다시 만난 건 자그마치 1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다.
뉴욕에 있는 나영과 한국에 있는 해성은 SNS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전처럼 설렘을 느낀다. 어렵게 만난 만큼 사랑은 쉽게 이어질 줄 알았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다. 12년의 세월은 극복했지만, 14시간이라는 한국과 뉴욕의 시차는 극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상채팅으로만 마주하는 얼굴도 만족스럽지 않다. 20대의 불안정함, 미래를 약속할 수 없는 불확실함 속에서 관계를 지속하는 것은 어렵기만 하다. 두 사람은 현실적인 벽에 가로막혀 또 한 번 서로의 인생에서 멀어진다.
또다시 1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다. 극작가가 된 나영은 결혼을 한 상태고, 해성은 여자 친구와 결혼을 고민하고 있다. 인생의 큰 결정을 앞둔 해성은 이제는 ‘노라’라는 이름이 더 익숙한 첫사랑 나영을 만나기 위해 뉴욕을 찾아온다.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24년 만에 첫사랑을 만나러 온 해성과 설렘을 안고 기다리는 나영, 아내의 첫사랑을 응원하는 나영의 남편 아서와 함께 이틀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데 있다. 이때 셀린 송 감독은 그들의 관계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12살, 24살, 36살의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낸 나영과 해성을 포착한다. 이를 통해 나영이 이민을 가지 않았다면, 24살의 그들이 실제로 만나기라도 했다면 어쩌면 첫사랑을 성공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더불어 첫사랑의 실패는 온전히 첫사랑의 시간에만 주목하게 만든다. 각자만의 시간 속에서도 첫사랑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 첫사랑과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긴 시간을 돌아온 것이다.
영화 제목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는 전생 또는 지나간 삶을 의미한다. 나영과 해성은 이제 붙잡을 수 없는 지나간 삶에서의 인연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찌 보면 전생이 적절해 보인다. 12살에 만난 인연이 24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다시 나타난다면 전생인지 현생인지 혼란이 오지 않을까? 어떤 시간엔 분명 존재했지만, 애틋하고 절실했던 마음이 분명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잊히는 것, 잡을 수 없는 시간의 감각을 ‘전생’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패스트 라이브즈’는 기존의 첫사랑 영화와는 결이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통속적일 수 있는 첫사랑과의 재회는 현재와 과거를 교묘히 뒤섞으며 애잔하게, 한국과 미국의 거리는 전생과 현생으로, 한국어가 낯선 여자의 영어와 영어가 낯선 남자의 대화 사이에 오는 침묵은 서로의 긴장 상태를 만든다. 첫사랑의 파동을 이토록 담백하게 그려낸 영화라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김필남
영화평론가
2024-05-08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