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역사의 비극, 한 끼의 실존
영화평론가
영화 '왕과 사는 남자' 스틸컷. 쇼박스 제공
왕의 자리를 빼앗긴 어린 왕 ‘이홍위’가 있다. 울부짖음과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궁궐. 한때 왕이었던 소년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겨우 버티고 있다. 그때 왕의 자리를 빼앗은, 권력의 정점에 선 남자가 다가온다. 소년은 왕의 얼굴을 하려 애쓰지만, 이내 밀려오는 것은 두려움과 무기력이다. 이홍위는 모든 걸 포기한 듯, 한명회에게 자신이 “이제 어디로 가는지” 묻는다.
우리는 세종의 적장손으로 10세에 왕위에 오른 조선 제6대 국왕, 단종의 운명을 잘 알고 있다.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고작 16세에 생을 마감했다는 이 비극적 사실은 영화를 보는 데 주저하게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는 세조와 한명회의 쿠데타나 사육신의 복위 운동 같은 무거운 역사를 재현하는 데 주력하지 않는다. 영화는 단종 ‘이홍위’가 유배지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새롭게 다시 쓰이기 때문이다.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
거창한 담론 대신 사람에 초점
마음 닫고 곡기마저 끊었던 왕
거친 밥상에 수저 든 장면은…
영화는 단종이 유배 생활을 했던 짧은 시간을 상상력으로 채운다. 그곳에서 만났을 법한 사람들과 있음직한 사건들이 겹쳐지며 역사와 허구가 촘촘히 뒤섞인다. 이때 역사는 이홍위를 ‘청령포’라는 감옥에 갇혀 죽음만을 기다리던 소년으로 기록했지만, 영화는 그를 ‘광천골’이라는 구체적인 삶의 터전으로 밀어 넣는다. 이홍위는 그때 비로소 역사가 가둔 비극을 뚫고 나와, 살아 있는 얼굴을 드러낸다.
유배지에 발을 내디딘 이홍위가 마주한 것은 정갈한 신료들의 예법이 아니다. 꾀죄죄한 얼굴로 어딘지 기대에 찬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엄흥도(유해진)의 시선이다. 귀한 양반 하나만 잘 모셔도 마을 형편이 조금은 피지 않을까 하는 속내로, 제 동네를 유배지로 ‘셀프 추천’한 이가 바로 마을 촌장 엄흥도다. 어딘지 능청스럽고 유쾌한 그가 화면에 들어서는 순간, 이홍위를 짓누르던 비극은 묘하게 흩어진다. 이제 영화는 죽음 말고는 미래가 없다고 믿는 이홍위의 시간에서 벗어나, 당장 입에 풀칠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엄흥도와 ‘함께 사는 삶’으로 이동한다.
앞서 말했듯 ‘왕과 사는 남자’는 정치적 격변의 순간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유배지로 내몰린 이홍위의 내면 변화와 그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투박한 시선에 머문다. 특히 이홍위와 마을 사람들의 거리를 좁혀가는 장치인 ‘밥’을 먹는 장면은 감동을 자아낸다.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곡기마저 끊었던 이홍위였다. 그런 그가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차려낸 소박한 밥상 앞에서 수저를 드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변곡점이다.
화려한 수라상 대신 거친 그릇에 담긴 밥 한 그릇을 나눈다는 것. 이는 ‘전직’ 왕이었던 이홍위와 마을 사람들이 수직적 계급을 넘어 서로를 가엾게 여기는 동등한 관계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시종일관 한명회의 위협이 광천골을 덮치고 단종 복위를 둘러싼 날 선 갈등이 숨통을 조여온다. 그러나 카메라는 끝내 이 척박한 유배지에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을 놓치지 않는다. 그들이 나누는 것은 거창한 담론이 아니다. 그저 함께 앉아 밥을 나눠 먹는 것, 그 한 끼로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는 일이다.
즉 끼니를 거부하던 이홍위가 다시 수저를 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짓누르던 무력감을 털어내고, “비록 내일 죽더라도 오늘은 살아가겠다”는 생의 의지다. 그 의지는 결국 역사를 바로 세우려는 신념으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고립시켰던 나약한 소년은 사라지고, 어느덧 자신의 사람들을 지키려는 ‘진짜’ 왕의 얼굴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이때 ‘왕과 사는 남자’는 이홍위를 그저 가련한 역사의 희생자로만 두지 않고, 따뜻한 어른 엄흥도의 품 안에서 스스로를 지켜낼 줄 아는 인간으로 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