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그가 진짜 잃어버린 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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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이가라시 고헤이 '슈퍼 해피 포에버'
사라진 뒤에도 지속되는 시간의 힘
기억이 '슈퍼 해피'하다면 이별도…

영화 '슈퍼 해피 포에버' 스틸컷. 찬란 제공 영화 '슈퍼 해피 포에버' 스틸컷. 찬란 제공

‘사노’는 친구 ‘미야타’와 함께 이즈의 휴양지에 도착한다. 그런데 그는 휴양지 풍경에는 관심이 없다. 빨간 모자를 쓰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가 그 모자가 아이 것이 맞냐는 생뚱맞은 질문을 던지거나, 아내 ‘나기’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전화를 건 상대의 말을 조용히 듣다 휴대폰을 바다에 던져버린다. 문 닫힌 식당에 들어가 물건을 뒤지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이해 못할 행동을 이어가던 사노는 호텔 프런트로 찾아가 대뜸 빨간 모자를 잃어버렸으니 찾아달라는 요구까지 한다. 그는 오직 무언가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움직일 뿐이다.


영화 ‘슈퍼 해피 포에버’는 사노의 행동에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이가라시 고헤이 감독은 ‘다카라, 내가 수영을 한 밤’(2022)에서 보여준 것처럼, 이번에도 정적인 카메라와 절제된 거리감을 유지하며 사노를 천천히 따라갈 뿐이다. 스크린을 채우는 건 눈부신 하늘과 시원한 여름 바다. 하지만 그 풍경은 사노의 내면과 대조를 이뤄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설명이 유예된 자리에서 드러난 사실은, 사노가 찾는 모자가 이미 5년 전 분실물이라는 점이다.

카메라는 2018년, 과거의 시간으로 미끄러진다. 같은 휴양지, 같은 호텔이지만 그곳의 공기는 사노가 머물던 현재보다 한결 가볍다. 사노는 이 휴양지에서 나기를 처음 만난다. 타인이었던 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고, 선물을 주고받고, 클럽에서 춤을 추는 등 설렘의 순간들로 채워진다. 늦은 밤 편의점 앞에 앉아 컵라면을 나눠 먹으며 어떻게든 헤어지는 시간을 늦춰보려는 모습은 귀엽다. 운명이나 극적인 로맨스가 아닌, 여행지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만남은 관객의 마음속에 더 쉽게 스며든다. 특별할 것 없는 연애의 시작이 역설적으로 가장 찬란한 기억이 된다는 사실을 카메라는 고요히 증명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사노는 빨간 모자를 나기에게 선물한다. 나기는 그 모자를 쓰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모자를 잃어버린다. 우리는 그녀가 어디에서 모자를 잃어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마음이 가는 남자에게 받은 선물을 잃어버리고 당황해 거리를 헤매는 나기의 모습을 볼 뿐이다. 잃어버린 모자를 찾아 헤매다 사노와의 약속 시간에 늦어버린 나기는 이제 사노를 만나지 못할까 봐 우울해진다. 바로 그때 거짓말처럼 두 사람이 다시 만난다. 여행이 끝나도 두 사람의 관계가 이어질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는 5년을 지나 2023년의 시간으로 건너온다. 사노는 아내 ’나기‘를 잃고 혼자 남겨졌다. 과거 나기 앞에서 수줍어하던 그는 없고 잔뜩 날이 선 남자만이 남아 있다.

그러니까 사노에게 모자 찾기는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견디는 방식이다. 사노는 5년 전 나기와 함께 걸었던 장소를 다시 걸어본다. 장소는 그때 그대로지만, 그곳에 있었던 사람은 없다. 호텔의 복도, 바닷길, 방 안의 공기는 과거의 감각을 품은 채 사노를 맞이한다. 이때 감독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보여주지만 이를 굳이 나누어서 보여주지 않는다. 사라진 것은 과거로 밀려난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현재와 겹쳐지고 포개지고 있음을 자연스레 느끼게 한다. 그래서 영화는 추억을 회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오히려 과거가 되돌아오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사라졌다고 믿었던 시간은 장소와 감각 속에 남아, 지금의 사노를 다시 붙잡는다.

기억은 희미해져도 그때의 감각은 남아 있는 법이다. 이때 빨간 모자는 소품이 아니라 처음 만난 날의 어긋남과 다시 이어진 시간, 끝내 돌아오지 않는 존재의 의미를 품고 있다. 그때 그 시간의 모자를 찾을 수 없겠지만 그것은 사라짐이 아니다. 영화는 사라진 이후에도 지속되는 시간의 힘을 새긴다. 상실을 견뎌낼 만큼 ‘슈퍼 해피’한 기억이 내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이별은 슬픔이 아니다. 지나간 시간이 기억과 장소에 고스란히 살아있는데 슬플 리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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