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재능의 무게, 혈통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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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일본 실사 영화 흥행 기록 경신
재일교포 이상일 감독의 '국보'
예술가의 영혼과 만나는 3시간

이상일 감독의 '국보' 스틸컷. NEW 제공 이상일 감독의 '국보' 스틸컷. NEW 제공

17세기 초, 일본 가부키는 일본의 정신을 담는 대표적 전통 예술로 자리 잡았다. 화려하고 역동적인 가부키 무대는 탄생 직후부터 많은 변화를 겪었고, 에도 막부가 ‘풍기문란’을 이유로 여성의 출연을 금지하면서 모든 배역을 남성이 연기하는 독특한 관습이 세워졌다. 이때 남성이 여성 역할을 맡는 배우를 ‘온나가타(女形)’라 부른다.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는 바로 이 온나가타의 삶과 예술, 그리고 영혼 깊숙한 곳의 고뇌를 집요하면서도 섬세하게 따라간다. 남성이 여성 역할을 연기한다는 점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스크린을 채우는 유려하고 압도적인 아름다움은 그런 선입견을 단숨에 지워낸다. 흥미로운 점은 가장 일본다운 예술을 담은 이 영화를 재일교포 3세 감독이 연출했다는 점이다. 특히 혈연 중심의 계승이냐, 능력의 계승이냐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영화의 핵심 화두는 마치 이상일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국보’는 일본 영화사에 새로운 발자취를 남겼다는 사실에서도 의미 있다. 일본에서만 1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으며, 2003년 ‘춤추는 대수사선 극장판 2’ 이후 22년 만에 실사영화 흥행 기록을 경신한 기록이라고 전해진다. 175분이라는 긴 러닝 타임, 일본인들의 눈높이에 맞는 가부키 무대를 재현해야 하는 등의 어려움은 오히려 흥행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에도 얻어낸 결과라 주목할 수 있다.

영화는 야쿠자 보스의 아들로 태어난 ‘키쿠오’가 우연한 계기로 가부키 세계에 발을 들이며, 온나가타로 성장해가는 여정을 그린다. 이때 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동료인 슌스케 또한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즉 영화는 두 사람이 궁극의 예술을 찾아가며 겪는 갈등과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마침내 예술의 정점에 다가서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다룬다. 이는 무려 50여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성과이다.

영화의 중심에는 키쿠오와 슌스케가 있다. 가부키를 늦게 시작했음에도 무섭게 실력이 늘어가는 키쿠오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소년이다. 슌스케는 가부키 명가에서 태어났지만 자신의 실력이 키쿠오에 미치지 못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열등감을 가진다. 세습 제도가 강한 가부키 세계에서 재능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또한 재능이 없는 자가 혈통만으로 자리를 이어받는 것도 치욕스럽다. 영화는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두 사람이 겪는 고뇌와 절망, 질투와 광기, 열정을 그려낸다.

그래서 영화는 무대 위의 화려함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막이 내려간 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는 사투와 치열함을 깊이 들여다본다. 완벽한 무대를 위해 자신을 끊임없이 깎아내리고, 뼛속까지 스며드는 연마의 시간을 견뎌내는 모습은 처절할 만큼 아름답다. 스스로의 결여를 메우려 몸부림치고 타인의 재능을 시기하는 모습까지 숨김없이 담아낸다. 이처럼 감독은 무대를 가득 채우는 배우들의 절제되면서도 유려한 동작, 어둡고 고독한 분장실의 조명을 활용하는 등으로 감정의 층위를 쌓아 올리며 ‘국보’를 움직이는 회화로 빚어내는 것이다.

특히 키쿠오가 첫 주연 무대에서 눈물을 머금은 채 천천히 관객을 바라보는 순간, 카메라는 그의 얼굴에 비치는 조명과 흔들리는 숨결을 오래도록 잡아낸다. 그 표정에는 승리와 공허, 희열과 두려움, 모든 감정이 겹겹이 담겨 있다. 이 장면은 ‘국보’라는 영화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강렬하게 보여주는 순간이며, ‘예술이 한 인간을 국보로 만드는 과정’이 무엇인지 스스로 설명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일본의 전통 예술을 보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고독하고 치열한 길을 걸어가는 예술가의 영혼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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